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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시작 ‘중국’

유교는 공자가 체계화한 사상으로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또한 중국의 유교를 받아들여 오랜 시간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는 학문과 종교로 자리잡아왔다. 흔히 '우리의 전통', '관습'이라고 일컫는 것들 중에 대부분이 조선시대 유교의 흔적인 경우가 다반사이다.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우리의 생활에 깊숙이 자리잡은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시기별로 어떠한 양상으로 발전하여 왔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이를 통해 유교 본연의 모습을 찾아보고 우리의 현재 모습과는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 생각해보자.

  • 선진

    선진 유교 공맹과 순자의 사상이 중심이 된다. 이 시기는 유교적 규범성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원시유학이라고도 한다. 요순을 중심으로 둔 선왕들의 정치사상을 계승한 공자의 가르침이 내용을 이룬다. 즉, 인간에 내재한 도덕에 기초하여 덕화를 실현하는 정치적 사상이다.

  • 한대

    진한대는 중앙집권적 관료제와 군현제 등 이후 중국 근대까지의 역사를 관철하였던 정치적 제도의 골격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또한 유교가 관학이 되면서 이후 유교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보편적 이념으로 자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도 이 시기이다.

  • 당대

    후한 멸망 이후 당나라가 성립되기 전까지는 사상사적으로도 격동의 시기였다. 당대 초기의 유교는 무엇보다도 공영달의 『오경정의』의 완성으로 대표된다. 이것은 새로운 사상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에 의해서 유교는 사상의 지도 이념으로서 실권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경전 해석의 고정화는 경학의 발전을 억제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 송대

    송나라에 들어 유교는 사상적으로 체계화된다. 이 시기의 특징인 성리학은 유교의 분야에서 형이상학을 구축하였다는데 의미가 크다. 특히 주희(朱熹)는 선배들의 ‘이기(理氣)’에 관한 학설을 종합하여 성즉리라는 유교의 이론체계를 확립하였다.

  • 원대

    원대는 전반적으로 송대의 유교를 계승하여 정주학이 발달하였으며, 관학이 성행하였다. 원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종래에 남방에서만 성행했던 학풍이 점차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원대에는 관학이 아닌 학술적 차원에서는 성행하지 못했다. 그 이유로는 인종차별이 있는데, 몽고인이 아닌 인재는 실력이 있어도 높은 지위에 등용하지 않았다.

  • 명대

    송대에 학자였던 육구연은 정주학의 성즉리 대신 심즉리를 주장하였다. 양명학은 사람에게는 누구나 본래적 양심이 있으므로, 이론적 학습을 거치지 않아도 인간의 본래성이 구현될 수 있다는 치양지설(致良知說)을 주장하였다. 또한 인식과 실천은 본래 하나로 본래적 양심을 깨닫아 그에 따라 실천할 것을 강조한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장하였다.

  • 청대

    청대에 들어 송명리학(宋明理學)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것이 고증학(考證學)이다. 청대 유교는 송명 유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송명 유교가 인간의 도덕성 문제에만 치우쳐서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고 본 것이다. 시기적으로 서양의 과학사상 수입과 맞물려 실사구시의 학풍이 일어나게 되었고 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데 있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고 생활에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경세치용의 사상이 전개되었다.

중국의 배향인물

‘배향(配享)’은 본래 주가 되는 신의 제사에 다른 신을 함께 제사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서원에 모시던 것을 의미하는데, 중국의 성현 중에서 주요한 배향인물을 알아보자.

공자상(사진출처:국립민속박물관)
공자(bc551~bc479)

공자는 노나라 추(鄒)읍에서 부친 숙량흘과 모친 안씨(顔氏)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주(周)왕조의 몰락이 점차 가속화되고 있던 시기여서 천자(天子)의 권위는 사라지고 12개의 제후국들이 패권 다툼을 벌이던 시기였으며 전쟁과 반란이 끊이지 않던 극심한 혼란기였다. 이런 때를 당해 활동하였던 공자는 새로운 사회질서의 모델이 필요하였는데 그것이 하은주(夏殷周)의 문물과 제도였다 그러나 하나라와 은나라의 문물과 제도는 증거할 수 없어. 주나라를 중심모델로 삼아 현실에 구현하려 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나라의 눈부신 문물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한 주공을 선성(先聖)으로 존경하였다. 사상적으로도 주나라 문왕의 도를 이으려하였다. 문왕을 이으려는 공자의 노력은 유교의 도통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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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전국시대 인물인 맹자(bc372~289)

맹자는 성선설(性善說)과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장하였다. (性善說)은 인간은 날 때부터 하늘의 착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며 유교 사상의 핵심사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무력으로 백성을 따르게 하는 강압적인 패도정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제시한 것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이다. 또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배우고 생각해서 아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선(善)을 알고 행하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착한 본성을 잃지 않고 사단을 확충하여 본래의 인간성을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주장한 왕도정치란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여겨 덕으로 다스리는 정치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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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사진출처:문화재청)
휘국공(徽國公) 주희(朱 熹, 1130 ~ 1200)

주희의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등이 있다. 주희는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었다. 그러다가 24세 때 연평(延平) 이통(李侗)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게 된다. 다시 1158년에 주희는 이통을 찾아갔고, 1160년에는 수개월 동안 그와 함께 지내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주희는 북송 유학자들의 학설을 종합 계승하는 한편 동시대의 불교와 도교를 섭렵함으로써 송대의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그의 철학 체계인 ‘주자학(朱子學)’은 성리학의 진수를 종합한 것으로서 그 이론이 매우 정밀하고 또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이후의 유교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그의 유교 이론이 조선 시대 전반을 통하여 정설로 인정되고 과거 시험의 학과로 채택됨에 따라 장기간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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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교

흔히들 현재 우리의 생활 속에 아직도 유교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때의 유교는 현대와 맞지 않는, 타파해야 할 관습으로 여기는 부정적으로 여기는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표현된다. 우리의 생각과 모습을 형성하는데 깊은 영향을 끼친 유교를 버려야 할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현재의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계승해야 할 것과 아닌 것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보자.

  • 삼국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로 알려져 있는데 그때 전래된 유교는 주로 한대에 성립된 경학 사상 이었다. 개인 윤리와 국가 질서를 체계화하는데 유교사상을 기초로 삼았다. 특히 공통적으로 유교에 기초한 부분은 제도와 교육분야였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태학을 세워 상류계층을 교육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교과 내용에 오경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반 서민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는 경당이 있었다.
    [백 제]
    중국의 군현제도를 모방한 국가 질서의 수립하였고, 경학이나 의술 등을 일본에 전파함으로써 일본 문화에 지대 한 영향을 미쳤다. 백제는 일찍부터 한자를 사용하였고 유교적 상례를 중요시하였다. 국가의 조직과 제도면에서 도 유교의 영향을 받아 고이왕 때에는 중앙 관제를 『주례』의 육관제를 본 따서 만들었다.
    [신 라]
    신라는 삼국 가운데 한문의 도입과 유교의 전래가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가장 늦게 이루어졌다. 늦기는 하였지만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사회질서와 정치이념에 이용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 통일

    통일신라 때에는 당나라로부터 유교와 문화를 도입하였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유교적 교육 사상의 확립과 함께 유학자가 배출되었다. 신문왕 2년(682)에 국학을 세워 교육제도를 완비하였는데 그 편제나 교과 내용이 모두 유교에 입각한 것이었다. 강수는 그의 스승으로부터 『효경』등을 배웠으며 실천적 유학자로 평가받는다. 설총은 원효의 아들인데 방언으로 구경을 풀이하여 설명하였다고 하나 전해지지는 않는다. 최치원은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문명을 떨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우리의 고유 사상과 유·불·도 3교에 대하여 조예가 깊었으며, 그의 글로는 『계원필경』과 여러 비문이 있다.

  • 고려

    고려 시대는 유불도가 상호 교섭하면서 종교 사상의 분야에서는 특히 불교가 크게 융성한 시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정치이념과 사회윤리의 측면에서 볼 때 유학은 더욱 경세적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유학은 고려의 건국과 국가 기초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기에 접어들면서 유교는 현실적 성격을 띠면서 발전하였다. 후기에는 성리학이 전래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 조선

    조선 전기의 유교는 주자학을 중심으로 구축되고 발전되었다. 전기에는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 이론이 주창되었고 이기론과 심성론에 대한 연구도 깊어졌다. 사상 뿐 아니라 각종 의례와 제도 과학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유교의 사상이나 이론이 근저를 이루었다. 중기에는 유교의 성현을 추모하고 후학을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서원이 세워지고 지역 사회의 미풍양속을 위해 향약이 권장되기도 하였다. 후기는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충격을 받으면서 변화를 도모했던 시대였다.

한국의 배향인물

‘배향(配享)’은 본래 주가 되는 신의 제사에 다른 신을 함께 제사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서원에 모시던 것을 의미하는데, 서원에서의 배향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 서원에 배향된 대표적인 인물들을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