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의병의 활동 기간은 1894년 갑오의병과 1895년 을미의병 이후 1907년 정미의병을 이어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약 20년에 이른다. 1895년 을미사변에는 전국의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고,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에 대한 유생의병장 뿐만 아니라 평민의병장과 학생, 농민, 상인 등 다양한 계층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이후에도 의병은 계속해서 대일항전을 이어갔고, 독립투쟁의 터전을 조성하였다.
을미의병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구실로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조선에 대하여 침략의 마수를 드러내면서 일어났다. 일제는 전쟁을 구실로 서울에 군사를 파견하 여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고 친일내각을 내세워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이어 그들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왕비를 시해하고 우리의 고유 풍속을 훼손하는 단발령을 내림으로써 을미의병 투쟁이 시작되었다. 국모 시해의 소식을 들은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은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895년 11월 26일을 전후하여 충북 보은에서 문석봉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할 뜻을 처음 밝히었다. 이후 제천에서는 류인석 등의 화서학파 유생들이 모여 역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논의하였다. 얼마 후 일제가 단발령을 공포하자 친일내각을 붕괴하고 일제를 몰아내고자 의병을 일으키니 한말의병의 시작이었다.
자세히보기을미의병이 해산한 뒤 한동안 잠잠했던 의병투쟁은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다시 시작되었다. 1905년 들어 러일전쟁에서 승세가 굳어지자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보호조약 체결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고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을사조약은 강제로 체결되었고,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본의 간접적인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국권침탈에 분노한 의병들도 다시 봉기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이때부터 일어난 의병투쟁을 을사의병 이라고 한다. 원용팔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부대가 제일 먼저 봉기하였다. 원용팔은 을미의병 때에도 류인석 의병부대에서 활약하였는데, 1904년 9월 제천‧청풍‧횡성‧홍천 등지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는 영월 주천에서 의병항쟁을 준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원용팔은 체포되고 의병대는 해산되었다. 이를 계기로 을사조약 체결 이후 전국 각처에서 의병항쟁이 시작되었는데, 가장 대규모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던 의병은 민종식‧최익현‧신돌석 의병부대 였다.
자세히보기1907년 8월 군대해산을 계기로 해산 당한 많은 군인이 의병에 가담하여 정미의병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의병부대의 전투력이 강화되어 의병투쟁은 본격적인 전쟁의 양상을 띠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중 황해도‧경기도의 김수민, 함경도의 홍범도 등이 평민의병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정미의병은 한일병합 이후에도 이어져 1915년까지 전개되었다. 민중의 참여와 지지로 의병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양반 유생 의병장들은 1907년 12월에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연합의병을 결성하였다. 양주에 집결한 연합의병은 일제와 친일파가 장악한 서울을 탈환하여 일제와 담판하기 위해, 이듬해 1월에 서울로 진공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유생 의병장들은 의병대열에서 점차 떠나 일부는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평민의병장과 일부 혁신 유생들은 지역민의 도움을 받으며 소규모 부대로 유격투쟁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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