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일본은 20여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하였다.
전국 각지에서는 지역의 유학자들은 제자, 동료, 집안의 노비나 거주지의 마을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지역의 방어 시설을 구축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고, 승려들도 호국정신을 기치로 승병을 조직하여 각지에서 왜적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다.
임진왜란 당시 강원도를 침략한 왜군은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부대로 이들은 청주에서 용인을 거쳐 한성을 점령한 이후 강원도로 들어왔다. 모리의 왜군은 김화현과 금성현을 지나 동북진하여 6월 5일 회양현을 함락시킨 다음 안변에서 흡곡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강릉과 삼척을 지나 영덕으로 남하하였다. 그 후 왜군은 다시 강원도로 향하여 영월과 정선을 점령하고 평창, 원주를 차례로 점령하여 극악한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강원도 의병은 근왕병을 모집하러 온 순화군을 따라 상당수의 의병이 참여하였고, 강원도에는 소수의 병력만이 남아 소규모의 부대로 각 지역의 관군과 협력하며 의병항쟁을 이어갔다. 1592년 8월 중순에는 안변부에서 동해안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온 왜적을 맞아 강릉·삼척·북평 등지에서 모인 의병들이 피난민들과 함께 두타산성을 거점으로 농성하며 전투를 전개하여 왜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자세히보기1592년 4월 28일 선조는 일본군이 경기에 다가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조는 4월 30일에 도성을 떠났고, 이튿날인 5월 1일에 일본군은 경기에 들어왔다. 당시 상황을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광하 막하에서 활약하던 조경남(趙慶南)은 “흉악한 왜적이 경기에 가득 들어와 한강 이남이 연기와 화염으로 하늘이 자욱하고 포성이 땅을 뒤흔드니 용인ㆍ수원ㆍ광주 등지가 깡그리 불타버린다.” 라고 기록하였다. 이처럼 경기도는 도성의 외곽에 있어 임진왜란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았으나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도성에 주둔하고 있어 의병 활동 하기에도 쉽지가 않았다.
자세히보기홍계남은 아버지 홍언수를 따라 안성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그는 홍언수가 죽산부에 있던 적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자 대신 의병을 이끌고 안성을 여러 차례 공격하였고, 여러 고을의 적을 쳐서 많은 전과를 올림으로써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백성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 우성전은 강화도와 인천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추의군(秋義軍)이라 하니 기호지방의 따르는 자들이 많아 의병이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는 소금과 식량을 조달해 임진왜란으로 삶의 터전을 떠난 난민들을 구제하고 강화도를 수비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강화도에 들어간 우성전은 김천일(金千鎰)과 합세해 강화도를 장악하고 적의 진격로를 차단하였으며, 권율(權慄)이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서 행주에 이르자 의병을 이끌고 지원하였다.
의병이 제일 처음 일어난 곳은 당연히 왜군이 먼저 침입한 경상도 지역이었으며, 의병을 가장 먼저 일으킨 의병장은 곽재우였다. 곽재우가 살고 있던 의령은 부산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왜군이 한양으로 가거나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길목이었다. 일찍이 왜군이 부산에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곽재우는 집안의 재산을 정리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왜적에게 짓밟힐 것을 염려하여 조상들 묘의 봉분을 모두 없앤 후 가족들은 멀리 피난시키고 동네 사람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곽재우를 따르는 의병도 십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차츰 각지에서 의병들이 모였고, 전쟁에서 패한 관군들도 의병대열에 합류하며 곽재우의 휘하에는 천여 명의 의병이 모이게 되었다.
자세히보기임진왜란 초기에 관군이 일본군과의 전쟁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하니 조정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백성들의 불안감도 극도에 달했다. 이러한 소동이 일고 있을 때 각 지역 에서는 지역을 방어하고 왜적을 몰아내기 위하여 의병이 봉기하였다. 전라도에서는 임진왜란 초기 직접적인 일본군의 침략은 없었으나 경상도에서 대량의 피란민이 유입됨에 따라 역시 혼란스러웠고, 관의 징병과 군량모집에도 시달렸다. 따라서 경상도 의병의 봉기와 비슷한 시기에 전라도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는데, 가장 먼저 봉기한 것은 유팽로 였다. 유팽로는 1,0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옥과에 주둔시키고 전라도 각 읍에 격문을 띄워 의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또 남원에서는 양대박이 3,000여 명의 의병을 모으니 이들은 이후 고경명 의병부대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자세히보기호남 최대의병은 고경명부대로 1592년 6월 각지에서 봉기한 6,000여 명의 의병이 담양에 모여 고경명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항전에 참여하였다. 고경명부대는 한양으로 북상 중 왜군이 금산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받고 금산전투에 참여하여 왜군과 맞섰으나 대패하고 고경명도 전사하였다. 이후 고경명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의병장들이 흩어진 의병을 다시 모아 곳곳에서 항전을 이어갔다.
충청도에서는 공주목 제독관이었던 조헌과 갑사의 승려 영규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점령당했던 청주를 수복하고 금산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등 호서지역에 침입했던 일본군에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
조헌은 1592년 5월 21일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보은을 거쳐 충청도 서남지역에 이르니 군세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와 동시에 영규도 일본군이 침략해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학살하자 3일 동안 통곡하고 승려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키니 8백여 명의 승병이 모여들었다. 이에 조헌은 영규의 의병군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공략하였다. 당시 청주성은 하치스가 이에마사[蜂須賀家政]가 이끄는 일본군이 점령하여 머물고 있었다. 8월 1일 조헌의 지휘하에 영규를 선봉장으로 청주성을 공격하였고, 다음 날 아침 의병들은 청주성을 되찾았다. 이후, 칠백의총의 유래가 된 싸움이 일어나며 충청도의병은 많은 희생을 당하고 싸움에서 패하기는 하였지만, 일본군도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함에 따라, 호서·호남지방은 온전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자세히보기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선조는 믿고 있던 이일 장군이 상주에서 패하고 신립 장군마저 충주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파천을 결정하고 왕자들을 파견하여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였다. 임해군은 함경도로 파견되었고, 순화군은 강원도로 파견되었는데, 이후 강원도가 왜적에게 점령당하면서 순화군도 임해군이 있는 함경도로 와서 합류하였다. 이때 함경도로 쳐들어간 왜장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였다. 황해도 곡산을 거친 가토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함경도로 쳐들어가 6월 17일, 안변에 도착했다. 함경북도 병마 평사로 있던 정문부가 경성 유생인 지달원의 권유로 최배천·이붕수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논의하고 수백 명의 병사를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정문부는 가토가 이끄는 왜군이 북도를 침공했을 때 다쳐 지달원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들 의병에 종성북사 정현룡과 경원부사 오응태가 합세하여 경성에 나가 국세필을 회유하고 다시 함경북도 지방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니 그 병력이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정문부는 9월 16일 경성전투에서 승리한 다음 반역자 국세필의 일당을 경성에서, 국경인을 회령에서, 정말수를 명천에서 각각 처단하고, 이들 지역을 수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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