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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사진:초소 의병부대(1908년, 양평)(사친출처:독립기념관)

우리 민족의 자랑 의병

의병이란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정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웠던 민간인 병사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주변 강대국들에게서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 그때마다 의병이 일어나 나라를 구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의병의 전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되 었으며, 고려·조선 시대를 거쳐 조선 말기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조선 말기의 의병은 일제에 강점된 뒤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이같이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일어나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의병 정신은 한민족의 기질로 자리 잡게 되었다. 민족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은식은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요 국성(國性)이다” 라고 하면서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 라고 말하였다.
곧 의병은 우리나라와 민족을 상징하는 국민성으로 나라를 지킨 위대한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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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의 7년 전쟁 임진왜란과 의병

조선은 중기에 이르러 사화와 당쟁으로 인한 혼란기가 지속되면서 국력이 쇠퇴하고 국방체제가 붕괴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하고 지배권을 강화하며 일본 내의 혼란을 외침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마침내 일본은 1592년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선봉장으로 1만 8,700명의 일본군을 700여 척의 병선에 나누어 태워 쓰시마 섬[對馬島]의 오우라항[大浦港]을 출항하여 부산으로 쳐들어와 부산성과 동래성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그 후 부산에 상륙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대와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한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번대에 이어 후속 부대와 수군 병력 약 9,000명이 들어와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의 총병력은 약 20여만 명에 이르렀다.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곽재우(사진출처 : 국가기록원)
임진왜란 최고의 의병장, 고경명(사진출처 : 문화재청)
최초의 승병을 일으킨 영규(사진출처 : 문화재청)

임진왜란 의병 중 가장 먼저 일어난 의병은 경상남도 의령의 곽재우였다. 곽재우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의령·삼가·합천·현풍 등지에서 승전하여 ‘홍의장군’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전라남도에서는 담양의 고경명·김천일·박광옥 등이 의병을 조직하여 영남을 지나 호남으로 들어오려는 일본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부대와 춘천남도 금산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고경명을 비롯하여 많은 의병이 전사했으나 일본군의 호남 침입을 막아냈다. 충청남도 옥천에서는 조헌이 이우·김경백·전승업 등과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승군 영규의 의병부대와 충청북도 청주를 수복하는 등 충청도 지역에 침입한 일본군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2만 2,600여 명의 의병이 일어나 일본의 침략을 물리쳤다.

의병은 각 지역 출신 의병장과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지역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병사들이었다. 따라서 의병들이 일본군에 비해 무기나 전술적인 면에서는 열세를 면할 수 없었지만, 지리에 익숙하고 적절한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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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 병자호란에도 나라를 지킨 의병

01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정묘호란

임진왜란 후 중국에서는 명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북방의 여진족이 크게 성장하였다. 여진족은 거주지역, 생활환경에 따라 해서 여진·건주여진·야인여진으로 구분되었 다. 이중 농경 생활에 상당히 익숙해 있었으며 명조와 일찍부터 관계를 맺고 있던 건주여진의 누르하치[奴爾哈赤]가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군사행정을 정비한 뒤 1616년 후금을 건국하였다. 이후 1618년 누르하치가 명의 변경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명은 10만 명의 원정군을 일으키고 조선에도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하였다. 광해군은 당시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흥기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따라 강홍립에게 1만여 명의 군사를 딸려 파견하였으나 후금과 적대관계를 가지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세가 불리하면 후금에 투항하는 것도 주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강홍립은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후금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후금에 투항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의 출병요구에 부득이 응했다고 해명했다. 누르하치는 그러한 상황을 인정하고 조선에 친화적인 입장을 보임으로써 광해군 때에는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정묘호란
정묘호란

그러나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 정권은 친명배금정책을 내세웠고, 후금에서도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주전론자인 태종(太宗)이 즉위하였다. 또한, 후금은 명과의 전투 때문에 심한 물자 부족 현상을 해결해야 했는데, 마침 이괄이 반란 실패 후 후금으로 도망하여 광해군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후금의 침략을 종용하였다 고 한다. 이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조선을 침략하여 명을 공격하기에 앞서 후환을 없애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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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청나라의 침입에 다시 일어난 정묘의병

정묘호란 때의 의병은 관군의 패배로 혼란스러워진 정국을 타개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어 전쟁의 직접적인 침략을 당한 지역 뿐만 아니라 후방지역에서도 일어났다.
적의 점령 지역인 평안도 일대의 의병 활동이 더욱 두드러져 여러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된 전직 관료들을 중심으로 의병부대가 모집되어 적의 침략에 대비하거나 뒤처져 있던 적을 참살하는 작전을 펼쳤다. 곧 평남도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들은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해 등 적의 후방을 교란시킴으로써 후금군 주력부대의 남하를 막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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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침입에 다시 일어난 정묘의병
정묘의병
03

청나라에 무릎 꿇은 병자호란

1636년(병자년) 12월 청 태종이 2만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1636년 4월 후금(後金)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태종은 사신을 보내 ‘형제의 맹약’을 ‘군신의 의(義)’로 고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인조가 청의 사신을 만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자 청태종은 1636년 12월에 직접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병자호란
병자호란

임경업의 보고로 청의 침략을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빨리 서울에 이를 줄은 모르고 있었다. 인조는 대책을 서둘러 14일 승지 한흥일에게 종묘 와 사직의 신주를 가지고 강화로 향하게 하고, 세자빈 강 씨, 원손(元孫), 봉림대군, 인평 대군을 강화도로 피하도록 하였다. 또한, 강화유수 장신으로 강화를 방비하게 하고 심기원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도성을 방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인조도 그날 밤 세자와 함께 강화로 가려고 하였으나 청군이 이미 강화로 가는 길은 차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이에 남한산성 주변 고을인 경기도 여주·이천·양근·지평·파주의 군사들 이 성에 들어와 방비 태세를 강화하였으며 의병도 일어나 후방에서 후원하였으 나 청의 대군을 물리치기에는 힘이 모자랐다.

청군의 선봉은 16일에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뒤이어 청태종은 1637년 1월 1일 남한성성 밑 탄천에 20만여 명의 군사를 주둔시키고 위협하였다. 인조는 각 도 관찰사와 병사에게 군사를 모으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도 사신을 보내어 원병을 요청하였지만, 원병은 오지 못하였고, 각도의 지원군은 남한산성에 이 르지도 못하고 패하여 남한산성은 고립되게 되었다. 적의 포위 속에서 추운 날 씨와 싸우며 버텼으나 식량마저 끊어져 모든 정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항복을 결심하고 1월 30일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하로서의 예를 지키고 청이 명을 공격할 때에 원병을 파견할 것 등의 약속을 함으로써 전쟁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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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국가존망의 위기에 선조의 명을 받은 병자의병

청의 침입 소식이 전해지자 호남지역 의병이 먼저 일어나 자진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어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던 인조로부터 위급을 알리며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과 무기를 수집하여 청의 침략을 무찌르라는 교서가 전달되자 의병은 전국적으로 퍼졌다. 그 외 황해도·경기도·경상도 등지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의승군의 활약도 있었다. 각성은 1624년 팔도도총섭이 되어 남한산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였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3,000명의 의승을 모아 항마군이라 이름한 뒤 스스로 승대장이 되어 북상하였으나, 도중에 왕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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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존망 위기에 일어난 병자의병
병자의병

한말 일제의 침략에 저항한 의병

한말의병(韓末義兵)의 활동 기간은 1894년의 갑오의병(甲午義兵)과 1895년의 을미의병(乙未義兵)으로부터 1905의 을사의병(乙巳義兵), 그리고 1907년의 정미의병(丁未義兵)을 이어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약 20년간에 이른다.

01

명성황후 사해사건, 을미사변

을미사변
을미사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청(淸)⋅일(日)⋅로(露) 3국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던 때에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10월 일본의 간섭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이어 일본은 친일내각을 앞세워 조선의 근대적 내정개혁에 개입하여 단발령을 공포하는 등 충격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같은 일본의 만행으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전국각지의 유림들은 우선 친일관료와 일본 제국주의를 상대로 하여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는다’ 라는 구호를 부르짖고 의병을 일으켰다. 특히 조선말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강력히 주장하던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키자 나라의 혼란으로 곤궁에 빠져 있던 많은 백성이 왜적을 몰아내고자 참여하였다. 이후 을미의병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친일내각을 해체 시키고 자주적인 개혁정책을 취하며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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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러일전쟁과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그 후 일본의 침략야욕을 더욱 커져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을 후원하던 청국과 러시아를 몰아내고 한반도에서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또한,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미국과는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함으로써 우리나라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확보한 일본은 1905년 소위 을사늑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았다. 이에 잃어버린 나라의 권리를 되찾고자 구국 항쟁의 을사의병이 다시 시 시작되었다. 이때는 유생 의병장 뿐만 아니라 평민 의병장들도 등장하였고, 학생, 농민, 상인, 하층민 등 다양한 계층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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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을사늑약

03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집행된 고종 퇴위

을사의병의 불길이 채 꺼지기도 전인 1907년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이유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 시키고 순종을 즉위 시켜 한일신협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으로 부터 행정권과 군사권마저 탈취하였다. 이에 8월부터 군대의 해산이 강행되자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정미의병은 강제 해산 당한 군인 들도 합세함으로써 무장의 강화와 유능한 지휘관의 확보, 그리고 작전과 전술상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남한대토벌 작전에 의한 의병 몰살 작전 으로 의병들은 진압당하였고, 우리나라는 일본에 병합되었다. 의병들은 그 후에도 산악지형을 이용하여 유격전을 펼치며 대일항전을 이어갔고, 독립투쟁의 터전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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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퇴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