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돌과 바위가 많은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조들은 예로부터 돌을 깎아 생활도구와 돌담, 돌다리 등의건축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돌에는 영원함과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어 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건강과 풍요를 빌었다.단단한 화강암을 다루는 뛰어난 기술로 석공들이 섬세하게 조각하여 만든 석탑, 석상, 석물 등의 석조물은현대에도 남아 그 시대를 이야기해 준다.
암각화와 암각문은 단어 그대로 바위에 새겨넣은 그림이나 글씨를 말한다. 바위에 그려진 그림은 그 시대의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 된다. 울주 대곡리 반곡리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다양한 고래 그림으로 그 당시에도 울주 바다에 많은 고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동 수곡리 암각화는 청동기 시대 후기에서 철기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한국에서 가장 큰 암각화 유적이자, 가장 오래된 제천의식 거행 장소로 알려진다.
장승은 나무나 돌을 사람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거나, 지역 간의 이정표의 역할을 했다. 장승은 지역과 모시는 대상에 따라 장생, 장생우, 미륵 할아버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나무로 만든 목장승은 전국에서 볼 수 있지만, 돌로 만든 석장승은 주로 경상·전라·충청도에서 볼 수 있다.
태백시의 옛 이름은 ‘장생(長生)’으로 장생(장승)이 많은 곳이라는 뜻이고, ‘소도동’은 고대시대에 천신에게 제사를 지낸 지역의 이름이다. 화강암으로 만든 석장승은 길을 사이에 두고 왼쪽이 천하대장군, 오른쪽이 지하여장군이다. 석장승 중 특히 오른쪽 석장승의 코가 많이 마모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장승이 민간신앙의 대상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충청북도 마송리 오미마을의 석장승은 ‘장성님’, ‘미륵할아버지’, ‘정계대장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1기는 미륵불, 2기는 사모를 쓴 문관의 모양이며, 3기는 특별한 장식은 없이 ‘정계대장군(靜界大將軍), ‘신묘정월일(辛卯正月日)’이 새겨져 있다. 정확한 때는 알 수 없지만, 이 글씨로 신묘년에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미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초에 좋은 날을 잡아 제사를 올리는데, 설을 세고 늦어도 정월 보름 이전에는 장승제를 지낸다.
선돌은 ‘서 있는 바위'라는 뜻으로 선바위, 선돌이라고도 한다. 이 외에도 선돌의 모양이나 돌에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갓바위’, ‘미륵바위’, ‘할아버지’, ‘할머니’ 등 다양한 별칭으로 불린다. 민간신앙과 연결된 입석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마을 제사의 중심이 되기도 하고, 자식을 바라는 사람들의 기도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인류는 구석기 시대부터 무겁고 튼튼한 돌을 이용해 생활에 편리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농촌에서 흔히 사용하는 생활도구로 맷돌과 연자방아 등이 있는데, 오래된 맷돌로는 경기도 양주 회암사지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남아 있다. 연자방아는 동물의 힘으로 곡물의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를 내는 생활도구로, 지역에 따라 ‘연자마’, ‘돌방아’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경기도 하남에는 상사창동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던 연자마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불상은 금동이나 나무로도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석불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경도가 강한 화강암을 주로 사용했는데 조각의 어려움 때문에 마애불이 많이 만들어졌다. 마애불은 암벽이나 대형 석재 표면에 부조기법으로 불상을 조성한 것으로, 삼국시대부터 산악신앙과 불교의 교리가 어울리면서 유행했다.
통일신라 불상은 생동감 있고 듬직하게 표현되었고, 고려시대의 석불은 크고 투박하다는 특징이 있다.
이천 소고리 마옥산의 마애여래좌상과 삼존불좌상이 있다. 마을 인근에서는 마애불이 있는 이곳을 부처박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애여래좌상은 고려시대 불상양식을 보여주며, 삼존 불좌상은 민간신앙과 불교가 결합된 조각상으로 민간신앙적 성격이 강하다.
자세히보기강릉 신복사지 석불좌상은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보살상이다. 높은 보관(보석으로 장식한 관)을 착용하고 그 위에 팔각형 보개(불상으로 보호하고 장식하기 위해 머리에 얹는 것)가 올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자세히보기고려시대에 창건된 운주사에는 ‘천불 천탑’이라 하여 약 141개의 석탑관련 유물과 115개의 석불 관련 유물이 있다. 운주사 석불은 형식을 갖춘 것이 아닌 투박하고 이목구비가 제 각각인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화순 운주사의 석불석탑군’은 2017년 세계유산 잠정 목록으로 등재되었다.
자세히보기창령사 터에서 2001년 많은 수의 나한상이 발굴되었다. ‘나한’은 번뇌를 끊고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를 말한다. 창령사지 나한상은 고려후기에서 조선초기의 불상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정교하는 않지만 친근한 모습으로 조각된 것이 매력이다.
‘은진미륵’은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관촉사(灌燭寺)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불로는 가장 크며, 특히 토속적인 생김새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은진미륵에는 미륵의 보답으로 결혼을 하게 된 서울의 모시장수를 내용으로 하는 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모시장수가 한산장에서 모시를 구입해 지게에 짊어지고 서울로 올라가다가 그만 소나기를 만나 모시가 다 젖게 되었다. 모시장수는 비에 젖은 모시를 어떻게 말릴까 고민하다가 모시를 펴서 은진 미륵에다 입혀 놓았다. 그랬더니 은진미륵이 오랜 시간 헐벗고 있었는데 옷을 입혀주어 고맙다고 하며, 그 보답으로 모시장수에게 “떨어질 락(落)에 붙을 부(附)자를 기억해라!” 라는 말을 남긴다. 모시장수는 그 말을 기억하였다가 필요한 상황에 사용해서 위기를 넘기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불탑은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예배의 대상물이다. 불상과 함께 불교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주요 조형물로 사찰의 법당 앞에 세운다. 불교가 전해진 4세기 무렵에는 목탑이 많이 건립되어지만, 전란을 겪으며 불에 타고 파괴되어 현재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7세기부터는 백제가 독자적인 석조 기술을 이용하여 석탑을 만들기 시작했고, 신라에서도 많은 석탑이 건립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은 중앙 집권적 성격으로 불교 건축물이 주로 도성인 경주 부근에 많이 세워진 것에 비해, 고려시대에는 지방 곳곳에서 개인이 석탑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 건축이 위축되었지만, 대리석으로 만든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남아 불교석탑의 아름다움을 이어가고 있다.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에 건립된 세 개의 석탑 중 하나이다. 639년에 세워졌으며,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2001년 해체·복원을 시작해서 2019년 5월 공개되었다.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자연 암반을 기단 삼에 건립한 최초의 석탑이다. 경주 남산의 용장사 터에 있으며, 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계승하였다.
사자빈신사지 석탑은 1022년 거란족의 두 번째 침입을 받은 후 부처의 힘으로 적을 물리치고자 하는 기원으로 세워졌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석등(石燈)은 일반적으로 불을 밝히기 위해 만든 석조물로 석탑 및 부도와 함께 불교 석조문화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 된 이래 금당(사찰에서 부처님을 모신 곳) 또는 석탑 앞에 석등을 배치해 부처에게 광명과 공양을 드리는 의미가 있다. 불교에서의 석등은 인간의 어두운 마음을 밝혀 중생을 구한다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담은 불교의 중요한 상징물이다. 석등은 사찰 이외에도 능묘, 궁궐이나 저택 등에도 세워졌다.
개선사지 석등은 통일신라 석등 중 유일하게 명문이 새겨져 있다. 868년과 891년 두 시기의 명문이 있는데 이 때문에 제작 시기가 정확하지 않다. 석등의 기단부는 복원된 것이고, 불을 밝히는 부분(화사석)은 8각으로 각 면에 창이 뚫려있다.
자세히보기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 두 마리가 앞을 들어 윗받침돌을 받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33년 무렵, 석등을 반출하려던 일본인의 횡포를 마을 사람들이 저지하여 면사무소에 보관하던 것을 1959년 영암사지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자세히보기고려 말 선불교를 중흥시킨 대표 선승인 ‘나옹화상’을 상징하는 석등으로 우아함과 장식성이 돋보인다. 나옹선사의 부도(사리탑)와 석비가 함께 세워져 있어 제작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고려 후기의 귀중한 유물이다.
자세히보기능이나 묘에 설치된 무덤 앞에 설치한 석조물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왕릉의 석조물에는 석인상, 석수, 장명등이 있다. 이런 석조물은 대부분 단단한 성질을 가진 화강암으로 제작되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잘 보존될 수 있었다. 한양 도성과 가까운 곳에 남아있는 40기의 조선왕릉은 역사적 〮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무덤을 지키는 사람 형상의 석물
무덤을 지키는 동물(말·양·호랑이 등) 모양의 석물
봉분의 왼쪽과 오른쪽에 세우는 돌기둥
봉분 앞에 놓아 영혼이 나와서 놀게 한다는 의미의 석물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사후세계를 밝힌다는 의미의 석등
한국의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 시설로 크게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공간과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으로 구분된다. 서원에 남아있는 문화유산 중 대표적인 석조물은 ‘정료대’와 ‘관세대’가 있다.
정료대는 어두운 밤, 마당에 불을 밝히는 조명 역할을 하는 석조 건축물이다. 돌로 만들어진 주춧돌 위에 팔각형의 기둥이 세워졌으며 기둥 끝에는 함지박 모양의 받침돌이 올려져 있다. 기둥 윗부분에 놓인 받침돌은 비교적 평평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여기에 송진이 엉켜있는 소나무 가지와 기름을 태워 불을 밝혔다.
관세대는 손 씻는 세수 대야를 올려 두는 석조 건축물이다. 소수서원의 관세대는 정료대 옆에 있다. 관세대의 형태는 아주 낮은 높이의 팔각기둥인데, 석조물의 겉면은 마모가 심해 어떤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지 파악할 수 없다.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祭官)이 문성공묘에 제향을 할 때 이 곳에서 손을 씻은 후 본격적인 제향의식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