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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진작업
지하에 매장된 석탄을 하기 위해서 탄맥까지의 갱도를 뚫는 과정이 굴진이다. 굴진 작업은 착암기로 뚫는 천공, 화약으로 터뜨리는 발파, 발파로 파쇄된 경석(암석 덩어리) 처리, 동발 지주 설치, 배관 및 궤도 작업 등이 주를 이룬다. 굴진 작업에서 캐낸 경석은 바깥 경석장으로 운반한다. 탄광촌의 산에 검은 석탄 같은 것은 무더기들이 바로 경석이다.
석탄을 찾아가는 광부, 굴진부
굴진부 (일명 굴진공)는 갱도를 굴착하는 것이 주 임무이다. 굴진부들은 작업하다가 탄맥을 발견하면 채탄부에게 작업을 넘겨준다. 탄광 개발 초기에는 정(노미)과 망치를 이용하여 암석을 뚫었는데, 1930년대에 착암기가 탄광에 도입되면서 굴진부의 필수 장비가 되었다. 굴진 중에 탄맥을 찾을 무렵 사고를 예방하는 일은 굴진 선산부의 숙련과도 관련이 있다.
정과 망치를 대신한 착암기
탄광 개발 초기에는 정과 망치를 이용하여 암석을 뚫는 수굴(手堀) 방식으로 굴진과 채탄작업이 이뤄졌다. 착암기는 1930년대부터 대형광업소를 중심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개인광업소에까지 보급이 보편화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의 일이다. 1980년대 들어서 국산화한 기종이 출시되면서 굴진 작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발파작업
채탄작업과 굴진작업을 할 때 각각 다이너마이트로 불리는 화약을 사용한 발파작업을 진행한다. 굴진작업에서는 암벽을 뚫어 석탄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화약을 사용하고, 채탄작업에서는 단단한 석탄층을 부숴 석탄을 수송하기 위해 화약을 사용한다. 화약 자체도 위험하지만, 화약을 터트리는 과정에서 암석의 파편을 통해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탄광에서 가장 위험한 직종이 화약 직종이며, 가장 위험한 공정이 발파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화약을 취급하기 위한 노동자는 특별한 자격을 필요로 한다. 각 광업소에서는 화약기사 1급 자격증을 갖춘 관리자 1명을 두도록 법규에서 정하고 있으며, 채탄과 굴진작업장의 관리자(채탄계장, 굴진계장)는 화약기능사 자격증을 반드시 갖추도록 했다. 또 채탄과 굴진작업 현장에서 화약을 장전하고 취급하는 노동자는 국가가 정한 별도의 기관에서 화약취급 교육을 받은 자에 국한하고 있다.
화약은 다이너마이트 대용으로 일제강점기 때는 떡이나 비누를 뭉친 모양의 데라찐을 많이 썼으며, 1960년대 들어서는 비료같이 비닐에 넣은 앰포를 사용했다. 앰포는 데라찐보다 값이 싼 반면에 앰포 작업은 연기가 많이 발생하고 화력이 약한 단점이 있었다. 천공한 곳에다 화약을 넣어 많이 다져야 화약 발파 강도가 높았다.
채탄 작업
영상이나 사진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진 광부의 이미지는 바로 채탄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이다. 탄층에서 석탄을 채취하는 과정을 채탄이라고 한다. 광업소 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대체로 1명의 선산부에 1~3명의 후산부가 함께 일을 한다. 동발을 세우고 기계를 조작하는 것은 선산부의 몫이고, 석탄과 자재를 운반하는 일은 후산부의 몫이다. 채탄갱도는 굴진갱도보다 훨씬 더 좁아서 채탄광부들의 작업 여건이 가장 힘들다고 할 수 있다.
채탄 광부의 하루
사택을 나선 광부는 사택 어귀에서 기다리는 통근버스에 오르는 것으로 출근이 시작된다. 광업소에 도착해서는 중앙목욕탕 탈의실에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안전모·안전장화·방진마스크· 장갑 등을 챙긴다. 그리고 안전등실로 가서 개인 안전등을 챙긴다. 도시락과 물통도 항상 들고 다녀야 한다. 개인 장비가 갖춰지면 안전교육을 겸한 작업지시가 내려지는 취업회에 참석해 방우리(작업구역을 뜻함)를 배정 받는다.
취업회가 끝나면 갱구 앞에서 입갱하는 표찰을 갱구별로 칸이 만들어진 벽에 걸어놓고, 인화물질 소지 여부 등의 보안 점검을 받고 갱구로 들어선다. 갱구에서 한참을 걸어가거나 인차를 타고서 수갱의 케이지(엘리베이터 같은 기능)나 사갱의 권양기가 있는 곳까지 간다. 그렇게 수직으로 지하 수백 미터의 갱도를 지나가야 작업장 입구 갱도가 나온다. 지하 900미터를 넘게 내려가는 장성광업소의 케이지는 3단으로 나뉘어 있어 한 번에 140여 명을 수송할 수 있다.
케이지에 내려서는 운반갱도인 넓은 갱도를 지난다. 지나는 길에 그날 작업하면서 세울 동발을 하나씩 메고 막장으로 간다. 채탄막장은 제대로 서기도 힘들만큼 천장이 낮은 곳이다.
중식시간이 되면 광부들은 동료와 막장 근처의 넓은 지점을 택해 도시락을 먹는다. 일한 만큼 급여를 받는 도급제 작업이므로 식사 시간은 길지 않다. 오래 쉬었다가는 하루 일당에서 손해가 많이 생긴다는 생각에서 밥을 먹고 나면 곧장 작업에 들어간다. 노보리 막장을 내려와 넓은 갱도에서 밥을 먹고 다시 노보리 갱도를 오르는 것이 싫어서 아예 굶는 광부들도 있다.
막장 채탄작업이 끝난 뒤에야 갱 밖으로 나올 수 있다. 탄가루로 범벅된 작업복을 세탁실에 맡기고 중앙목욕탕에서 샤워한다. 지친 몸을 통근버스에 싣고 사택으로 돌아간다.
석탄운반작업(사진출처:한국광물자원공사)
석탄 운반
탄광의 운반작업은 갱내운반과 갱외운반으로 구분하며, 운반 대상에 따라서는 석탄·경석·장비·자재·인원 운반으로 구분한다. 채탄막장에서 생산된 석탄은 막장에서 슈트까지의 막장운반과 수평갱도 운반, 사갱 또는 수갱 운반 과정을 거쳐 갱외로 반출한다. 그리고 갱외의 운반시설인 공중삭도·트럭·컨베이어벨트 등을 이용하여 선탄장과 기차역으로 운반한다.
석탄 수송을 담당하는 운반직에 대한 호칭은 탄광마다 약간씩 달랐는데, 대한석탄공사 산하 장성광업소나 도계광업소에서는 운반부라 하였고, 경동탄광에서는 승회부 혹은 승회원이라 불렀다.
석탄을 운반하는 탄차
질통을 메고 다니던 시기를 지나면서 목재로 만든 탄차(광차)가 도입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탄광이 개발된 까닭에 일본식 용어를 많이 썼는데, 탄광에서는 탄차를 두고 구루마(くるま)라고 불렀다. 낡아서 잘 구르지 않는 탄차를 ‘똥가라’라고 불렀으며, 비어있는 탄차는 공차라고 불렀다. 목탄차는 탄광 노동자들이 직접 손으로 밀어 갱외로 석탄을 실어 날랐다. 철제 탄차(Coal tub)는 갱도 레일이 부설되어야만 운행할 수 있었으므로 민영탄광의 경우 국영탄광보다 다소 늦은 1960년대에 사용되었다.
하늘로 운반하는 가공삭도
탄광촌의 케이블카인 가공삭도(架空索道, 일명 솔개차)는 탄광촌을 상징하는 한 풍경이었다. 공중에 건너질러 놓은 강삭(鋼索)에 차량을 매달아서 석탄이나 짐을 나르는 설비인 가공삭도는 어찌나 유명한지 이름도 많았다. 솔개차, 발음에 따라서는 소리개차, 가공케이블, 고가삭도, 공중삭도, 삭도, 하늘찻길 등 많은 이름으로 불렸다. 삭도는 대다수 탄광 지역이 산악에 있어 지형적인 문제로 인해 도로 개설이나 철도 부설이 여의치 않을 때 공중삭도를 설치하여 석탄을 수송하였다.
가공삭도는 장비나 석탄을 운반하기 위해 설치되었지만, 사람이 타고 다니기도 했다. 산과 산끼리 연결된 가공삭도를 타면 건너편의 현장을 갈 때 걷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걷기 싫어 가공삭도 안에 타고 날아가는 이들이 있었는데, 삭도 운행 도중에 고장이 나서 멈추기도 잦은 터라, 그럴 때는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고생해야 했다.
선탄부(사진출처:한국광물자원공사)
여자 광부, 선탄부
광부들이 캐낸 석탄에서 불순물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는 노동자를 ‘선탄부’라고 부른다. 석탄이 컨베이어벨트를 통해 저탄장으로 나갈 때, 석탄부는 폐석과 통나무 등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작업을 한다.
대체로 광업소의 선탄부는 여성 노동자가 맡았으며, 주부의 일자리가 거의 없던 탄광촌에서 선탄부는 대표적인 여성의 일자리이자, 보수가 높은 일자리로 취업 경쟁률이 높았다. 1980년대 초 까지만 해도 선탄부로 취업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였다. 대체로 남편이나 자식 등 가족이 탄광에서 다쳤거나 사망했을 경우 탄광에서는 생계를 위해 우선적으로 취업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탄광촌에서는 여자에 대한 많은 금기가 강요되면서 설거지를 할 때 그릇소리도 크게 못 내고, 말소리도 크게 못 내게 했지만, 선탄부만은 예외였다. 선탄직은 탄광에서 유일하게 여성들에게 허용한 일자리이다. 선탄 작업을 할 때는 옆에 있는 사람의 형체를 못 알아볼 정도로 탄가루가 많아서 광부 직업병인 진폐증에 노출되어 있었다. 여자 광부들은 조금이라도 탄가루를 막기 위해 방진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해 머릿수건을 칭칭 감아 쌌다.
철암역두 선탄시설(근대산업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철암역 오른쪽에는 철암역두(鐵岩驛頭) 선탄장이 있고, 왼쪽 우금산 산자락에는 정부비축석탄이 보관되어 있는데, 오른쪽 절반은 폐석으로 뒤덮여 있다. 선탄시설은 저탄장과 폐석장 아래 가운데에 있다.
이곳 선탄시설은 1935년에 철골구조물 형태로 건립되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무연탄 선탄시설이다. 이 선탄장은 일제강점기 석탄산업의 시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국내 석탄산업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에 정부는 철암역두 선탄시설의 가치를 인정하여 2002년 5월 27일에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21호로 지정했다.
철암역두 선탄시설 있는 곳은 1999년에 제작한 영화로 박중훈·안성기·장동건·최지우 등이 출연한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촬영된 곳이다. 비 오는 날 선탄장 밖 철로 주변에서 형사 역을 맡은 박중훈과 범인 역을 맡은 안성기가 비를 맞으며 격투하는 장면은 유명하다.
안전장비(사진출처:한국광물자원공사)
생명과 직결되는 안전모
광부의 안전모는 낙반 사고, 동발이나 돌 등에 머리가 부딪칠 때 보호해주는 중요한 보호구이다. 탄광은 안전모 착용을 의무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안전모는 신분을 나타냈는데, 관리자는 흰색·노동자는 노란색·내빈은 푸른색 안전모를 썼다. 1987년 장성광업소에서 관리자를 지칭하는 ‘백바가지 추방’ 이라는 노동운동 이후부터 관리자도 노란색 모자로 바뀌었다.
자세히보기보통 신발과 다른 광부의 안전장화
탄광 개발 초기에 탄광노동자들은 짚신이나 고무신을 신고 막장에 들어가면서 돌 조각에 발을 다치는 사례가 빈번했다. 탄광에서 장화를 무료로 지급하면서부터 착용을 의무화하기 시작한다. 광부의 안전장화는 앞부분에 쇠붙이가 붙어있어서 발가락을 보호한다. 갱 바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신는 작업화는 ‘난장화’라고도 부른다.
자세히보기캄캄한 갱내를 비추는 안전등
캄캄한 탄광 갱내에서 안전등은 필수 장비이다. 갱내 안전등은 남폿불 → 간드레(카바이드등) → 전기안전 등 순으로 발전했다. 1950년대 탄광이 개발될 당시에는 깡통에다 구멍을 뚫어 카바이드를 넣은 깡통간드레를 들고 갱내로 들어갔다. 1970년대 들어 전기 안전등의 보급이 보편화 되었다. 2000년대에는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안전등 배터리가 등장한다.
자세히보기진폐증을 예방하라, 방진마스크
갱내에서 일하는 많은 광부가 직업병인 진폐증에 걸렸다. 탄가루를 흡입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으므로 방진마스크 착용은 필수였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전의 마스크 필터는 성능이 좋지 않아 광부들이 기피했다. 진폐증 발병을 알면서도 마스크를 벗은 채 작업했다. 1980년대 후반 필터의 성능이 개선되면서 방진마스크 착용이 보편화한다.
자세히보기광부의 안경과 시계
갱내에서는 습기와 탄가루가 많아서 안경을 쓰고 일하는 것이 어렵다. 탄광 입사 신체검사 중에서도 시력 검사가 까다로운 것도 그 때문이다. 암석을 제거하는 해머질 작업에서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잠수경 같은 안경을 지급했다. 광부들은 탄가루 때문에 손목시계를 벗어놓고 들어가는 대신, 갱도 곳곳에다 벽시계, 사발시계, 탁상시계 등을 갖다놓았다.
자세히보기옥마선탄장의 컨베이어(사진출처:보령석탄박물관)
광에서의 운반은 장소에 따라 갱내와 갱외 운반으로 구분되고 대상에 따라 석탄, 경석, 장비, 자재, 인원 운반으로 구분된다. 막장에서 생산된 석탄은 막장운반(막장에서 슈트까지)과 수평갱도 운반, 사갱 또는 수갱 운반 작업을 거쳐 갱외로 반출되고, 갱외에서는 갱외의 운반시설을 이용하여 선탄장과 저탄장으로 운반된다.
석탄개발 초기 때 소규모의 광산에서는 질통이나 지게를 이용하기도 하였고, 탄차에 삽으로 석탄을 실어 인력으로 갱외로 반출하기도 하였다. 이후 운반 장비가 발전함에 따라 기계화 및 대형화로 전환되어 대량운반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장비의 발달로 대부분의 탄광에서는 갱 안에서 연속적으로 석탄을 운반하는 컨베이어를 많이 사용하였다. 벨트 컨베이어는 석탄을 비롯한 운송물을 순환 벨트 위에 올려놓고 이동시키는 운송기구인데, 컨베이어로 운반하기 위해서는 탄광 개발할 때 굴진 작업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기존에 가행 중인 중소 탄광의 갱도는 대부분 협소하여 컨베이어를 설치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한 까닭에 탄차에 석탄을 싣고 사람이 미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래된 광산에서는 기존의 운반 갱도 거리가 길은 까닭에 컨베이어를 설치하는 데 경비가 많이 들어 컨베이어를 설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석탄을 광차에 실어 운반하는 모습(사진출처:보령석탄박물관)
질통을 메고 다니던 시기를 지나면서 목재로 만든 탄차(광차)가 도입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탄광이 개발된 까닭에 일본식 용어를 많이 썼는데, 탄광에서는 탄차를 두고 구루마(くるま)라고 불렀다. 낡아서 잘 구르지 않는 탄차를 ‘똥가라’라고 불렀으며, 비어 있는 탄차는 공차라고 불렀다.
목탄차는 탄광 노동자들이 직접 손으로 밀어 갱외로 석탄을 실어 날랐다. 철제 탄차(Coal tub)는 갱도 레일이 부설되어야만 운행할 수 있었으므로 민영 탄광의 경우 국영 탄광보다 다소 늦은 1960년대에 사용되었다.
도계광업소나 장성광업소처럼 규모가 큰 곳은 1940년대에도 1톤 용량의 철제 탄차가 있었다. 규모가 큰 광산일수록 철제 광차 사용이 빨랐으며, 일반 탄광 현장으로 보편화 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의 일이다.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석공을 제외한 개인광업소에서는 목탄차를 더 많이 사용했다. 철제 광차가 도입된 것은 1970년대의 일이다. 개인탄광에서는 1970년대 후반까지도 ‘목구루마’를 사용했는데, 선산부가 동발을 세우고 가는 일이 흔했다. 탄차에 대해 한 제보자는 “탄차는 모두 목차였는데, 개인탄광에서는 1980년대 말까지도 목차를 썼다. 목차가 다니는 레일을 철제 탄차가 다니는 레일보다 폭이 훨씬 좁았다. 목차는 두 사람이 1조가 되어 손으로 밀고 다녔는데, 경석장이나 저탄장에 도착해서는 목차 뚜껑을 들고 떠넘기거나, 삽으로 퍼서 실어냈다. 목차 하나를 가지고 석탄이 나오면 석탄을 시독, 버력(무가치한 암삭 덩어리)이 나오면 버력을 실어 날랐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동원탄좌 가공삭도(사진출처:보령석탄박물관)
탄광촌의 케이블카인 가공삭도(架空索道, 일명 솔개차)는 탄광촌을 상징하는 한 풍경이었다. 철사를 여러 겹으로 꼬아 만든 강삭을 공중에 연결해놓고 석탄을 싣는 운반 도구를 매단 것이 가공삭도이다.
탄광촌의 명물인 삭도는 유명해서 부르는 이름도 많았다. 솔개차, 발음에 따라서는 소리개차, 가공케이블, 고가삭도, 공중삭도, 삭도, 하늘찻길 등 많은 이름으로 불렸다. 삭도는 대다수 탄광 지역이 산악에 있어 지형적인 문제로 인해 도로 개설이나 철도 부설이 여의치 않을 때 공중삭도를 설치하여 석탄을 수송하였다.
가공삭도는 장비나 석탄을 운반하기 위해 설치되었지만, 사람이 타고 다니기도 했다. 산과 산끼리 연결된 가공삭도를 타면 건너편의 현장을 갈 때 걷지 않아도 되었다. 걷기 싫어 가공삭도 안에 타고 날아가는 이들이 있었는데, 삭도 운행 도중에 고장이 나서 멈추기도 잦은 터라, 그럴 때는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고생해야 했다.
우리나라 마지막 케이블카형 석탄수송 장비인 가공삭도는 도계광업소에서 지난 1940년대부터 활용해 50년간 활용됐다. 도계광업소 흥전갱에서 생산된 탄을 공중삭도를 이용해 도계역 저탄장까지 2,314m 구간을 운반했따. 흥전갱 가공 삭도의 바켓 용적은 0.5톤으로 34개의 삭도가 분당 107m의 속도로 운행해 1회 왕복에 45분이 소요됐다. 1일 최대, 1,200톤(시간당 50톤 처리)까지 운반이 가능했다. 이 삭도는 1991년 9월 운행을 중단한 뒤, 1998년 태백석탄박물관으로 이전되어 전시되고 있다.
배경사진:광산시설 석탄운반(사진출처:한국광물자원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