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옛날 옛적에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어느 고을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설화라고 한다. 신화, 야담, 전설, 유래담, 민담 등이 전부 설화에 포함된다. 설화(說話)는 일정한 구조를 가진 꾸며낸 이야기이므로 신변잡담이나 역사적 사실은 포함되지 않는다. 설화는 구비 전승되었다. 즉,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기에, 전승 과정에서 이야기가 덧붙어 지역마다 세부적인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설화를 통해 우리는 그 시절 사람들의 세계관과 가치관 등의 시대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설화는 권선징악, 음덕양복, 전화위복 등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 구슬할망은 ‘물질을 배워 구슬(진주)을 따는 할머니’라는 뜻으로 나주김씨 집안의 시조신화이다. 김씨 사공의 도움으로 제주도에 들어온 허씨 애기씨가 커서 물질을 하여 전복 안의 진주로 집안을 일으킨 이야기로, 오늘날 해녀의 시조에 해당한다.
> 자청비는 ‘스스로 청해 태어났다’라는 뜻으로 오랫동안 아이가 없던 집안에 태어난 딸이다. 남장을 하고 과거를 보러 갔다가 옥황상제의 아들 문도령과 사랑이 싹터 결혼하고, 문도령이 반란군에게 죽자 반란군을 제압하고 문도령을 살려낸다. 그 공로로 하늘의 오곡종자 씨앗을 가져와 인간 세상에 퍼뜨린 농사의 신이다.
우리나라 곳곳 산세 좋고 터 좋은 곳에는 절이 자리 잡고 있다. 오래된 절들은 거의 대부분 창건설화를 가지고 있다.
>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두 고승인 의상(義湘)과 원효(元曉)가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기 위해 찾았다는 사찰이다. 그런데 재계를 한 의상은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고 낙산사를 창건하였지만, 원효는 낙산사를 향하는 길에 만났던 여인이 관음보살의 진신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관음보살의 진신이 머물러 있다는 동굴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낙산사를 떠났다고 한다.
> 나라 유학시절 의상대사를 사모한 선묘낭자는 의상이 결혼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용으로 변해 의상대사를 지켜주기로 한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대사가 영주 봉황산에서 화엄사상을 펼치려 하자 용은 큰 바위로 변해 절 위에 위태롭게 매달려 다른 종파 스님들이 무서워 도망가도록 했다. 의상대사는 그 절을 접수해 큰 바위가 떠 있었다는 의미로 부석사라 칭했다.
> 영종도의 어부 손씨가 연평도 조기잡이를 나갔는데, 돌부처만 연거푸 몇 번을 건지자 바다에 던져버리고 돌아온다. 그날 밤, 도사가 꿈에 나타나 돌부처를 건져 영종도 태평암 위에 세워놓으라고 한다. 그렇게 했더니 물고기가 잘 잡히고, 대대손손 잘 살았다. 그 돌부처는 용궁사로 모셔갔는데, 돌부처가 쥐고 있던 약으로 여러 사람을 고쳤다고 한다.
> 연천군 한탄강에는 삼형제 바위가 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혼자 삼형제를 낳아 길렀는데, 이들은 우애가 좋고 효심이 깊었다. 어느 여름, 김을 매다 더워진 삼형제가 한탄강에 들어가 놀다 막내가 급류에 휘말리는 바람에 다른 형제들도 막내를 구하러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는다. 어머니가 한탄강가에서 목놓아 운지 몇 달, 한탄강에 3개의 바위가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이를 삼형제 바위라 하며 1년에 한 번씩 제사 지내주고 있다.
> 보령시 빙섬에는 독수리바위가 있다. 어부 삼만이는 배를 빌려 물고기를 잡았는데, 배주인의 딸이 삼만을 좋아했다. 딸을 육지로 시집보내려는 아버지 몰래 딸은 삼만이와 정을 통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삼만이를 흠씬 두들겨 패서 배에 꽁꽁 묶어 바다로 띄워 보냈다. 근해를 떠돌다 열흘 만에 갯벌로 돌아온 배 안의 삼만이는 죽어 있었고, 갯벌에선 우뚝 바위가 솟았다. 이후 빙섬에서 처녀가 시집 못가고 죽으면 독수리바위가 채간 것이라고 한다.
> 세종리의 성질 고약한 부자는 노승이 탁발하러 오자 거름을 퍼붓고 내쫓았다. 며칠 뒤 다시 노승이 왔을 때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하고 쌀을 시주했다. 노승은 그 보답으로 며칠 뒤 마을에 큰 홍수가 날 것인데 전월산으로 피하라고 말한다. 그때 뒤를 돌아보면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며느리는 전월산으로 피하다 시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고 그대로 굳어 며느리바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