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시 심곡본1동에 있는 느티나무는 1991년 11월 25일, 심곡1동 통장이 설명석을 세울 당시 수령이 470년, 서기 1520년경 생겼다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 수령 500여 년이 된 나무이다. 이 나무는 '깊은구지 느티나무'라고도 하며, 향토수목 전국일련번호 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깊은구지는 부천시 심곡본동의 옛 지명으로, 심곡리(深谷里)의 우리말 표기다. 그 뜻을 풀이하면 ‘깊은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깊은구지 느티나무’의 설명석에는 ‘이 나무는 깊은구지 부락이 형성되면서 마을의 발전과 안녕을 지켜온 수호목으로 북쪽의 300미터 지점에 할아버지 나무가 있고, 서쪽 50미터 지점에 할머니 나무가 있었다.’라고 적혀있다. 설명석의 표현으로 보아 할아버지 나무는 아직도 있고, 할머니 나무는 과거형이므로 이미 없어진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손자나무인 셈이다.
실제로 이 손자나무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심곡본1동 604번지에 할아버지 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 나무는 이미 죽어 고목이 되었다. 주변 어르신들의 말에 의하면 수십 년 전 벼락을 맞아 불탔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아있었으면 수령이 700년 정도 됐을 것이라고 한다. 이 할아버지 나무는 먼 과거 소사지역을 측량할 때 기준점이었으며,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 이 할아버지 나무에 관해서는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 김씨 성을 가진 누군가가 집을 짓기 위해 일꾼을 시켜 할아버지 나무의 가지를 잘랐는데, 그 뒤 가지를 자른 그 청년이 비명횡사했다고한다. 그 전설 때문인지 이미 오래전에 벼락으로 불타 죽은 할아버지 나무는 주택 밀집구역 좁은 골목길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남아있다.
반면 할머니 나무는 최근까지 심곡본1동 623번지, 정명고등학교 초입에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인해 도로를 내기 위하여 잘랐다. 할머니 나무가 할아버지 나무보다 심성이 훨씬 너그러웠던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편 그렇게 오래된 나무가 잘려나가 아쉽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연유로 20세기까지 있었던 오래된 느티나무 세 그루 중 중 현재는 손자 느티나무만 남아있고 ‘지킴이’라 불리며 심곡동, 깊은구지 일대를 보호해주고 있다.
매 홀수 년도 음력 10월에 손자 느티나무와 할아버지 느티나무 주변에서 주민들이 한데 어울려 ‘깊은구지 도당제’를 지낸다. ‘깊은구지 도당제’는 그 기원이 고려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오래된 동제이다. 현재 도당제는 전통적인 도당굿의 변형된 형태로 마을의 안녕·번영·평안과 후손 대대로 이어지는 번창을 빌며, 주민의 긍지를 심어 주기 위한 마을 화합 잔치로 진행된다. 의례절차는 ‘깊은구지 도당제 추진위원회’가 맡아서 주관한다. 2003년부터 부천시에서 도당제 보조금을 지급받아 공식적인 지역 축제로 거행되고 있다. 부천 주민의 무병장수 기원, 주민들의 화합과 친목 도모, 지역공동체 의식 고취, 정신적 결속과 지역문화의 계승을 목적으로 한다.
성주산은 부천역 1번 출구에서 나와 심곡도서관 쪽으로 10여분 정도 올라가다 보면 등산로 입구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부천역에서 10여분 쯤 가다보면 과연 진짜 등산로가 나올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 때 돌연 성주산 등산로 표지판과 함께 어린이 활터공원이 나온다. 이처럼 성주산은 주택가밀집구역에 위치하고 있다. 사실 성주산 턱밑까지 집을 짓고 산다는 것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어린이 활터공원 옆길을 따라 올라가면 기대한 등산로가 아닌 국궁장인 성무정이 떡하니 앞을 막고 있다. 다른 길이 없어 보이지만 국궁장을 통과하는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은 마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에 나오는 터널처럼 도시와 숲을 나누는 마법 같은 통로다. 이 계단을 통과하면 공간이동을 한 것처럼 깊은 산속 오솔길 같은 등산로가 나타난다.
성주산은 부천 남단에 있지만 동쪽으론 시흥시, 남쪽으론 인천광역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어서 여러 곳에서 편하게 올라올 수 있고, 대부분의 진입로가 주택가 밀집구역인 구시가지에 위치하기 때문에 동네 공원을 찾듯 쉽게 이용가능하다. 코스도 올라가는 방향에 따라 짧게도 길게도 잡을 수 있다. 또한 중간중간 약수터와 정자, 절 등이 있어 등산하는 재미가 있는 산이다. 이 때문에 성주산은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성주산 등산로 중에서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은 단연 하우고개 구름다리다. 부천역 쪽에서 30~40분정도 가면 만날 수 있는 핑크색의 깜찍하고 스릴있는 구름다리다. 아주 길지는 않지만 부천이 예전부터 골짜기가 깊기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구름다리 중간에 가면 바람에 의해 다리가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우고개 구름다리의 준공표지판에 이 다리의 공사목적이 뜻밖에 친절히 적혀있어 옮겨본다.
준공 표지판
공사명: 하우고개구름다리 설치공사
공사목적: 나무, 꽃, 돌, 빛의 도시환경을 만들기 위한 시책의 일환으로 도로횡단에 따른 교통사고 예방은 물론 구름다리를 거닐 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명소를 창출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습니다.
시행청: 부천 시청 / 공사기간 2000.5.3~11.3
설치목적대로 구름다리를 건널 때 즐거움도 느낄 수 있고, 구름다리 아래의 도로는 좁은 2차선이지만 부천과 시흥을 잇는 도로라 교통량이 의외로 많기 때문에 분명 교통사고 예방도 되리라 생각된다. 이곳에서 만난 부천 주민 안복순 씨는 “20년 전 이 구름다리가 처음 생겼을 땐 다리 중간에서 보면 부천역까지 내다 보였는데, 그때 어렸던 나무들이 이제는 모두 자라 숲이 우거져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준공표지판에 적혀 있듯 나무, 꽃, 돌, 빛의 도시환경 역시 목표대로 만들어진 것 같다.
하우고개 구름다리까지 올라오면 복잡한 부천역에서 30분 남짓 거리에 이런 아늑한 숲을 만날 수 있다니 놀랍기까지 하다. 하우고개 구름다리를 건너 성주산 정상까지 갈 수도 있고, 길게는 소래산까지도 갈 수 있다. 인천대공원 쪽으로도 내려갈 수 있다. 성주산은 시간 날 때마다 산책처럼 가볍게 등산할 수 있는 사랑스런 산이다.
옛날 하남의 두미강에는 사람들이 살고, 농사도 지을 만큼 커다란 ‘당정섬’이 있었다. 물과 가까이 있다 보니 건강과 안전을 기원하는 ‘당’이 있는 ‘정자’가 있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 ‘당정섬’이다. 당정섬 주민들은 배를 타고 학교도 다니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하지만 1925년 을축년 큰 장마로 집이 떠내려가고 지붕위로 뱀까지 피신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당정섬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윗마을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 마을이 바로 더우개 마을이다. 그 후 당정섬은 한강종합개발로 섬에 있던 모래들이 서울로 옮겨지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옛 신문기사에 실린 당정섬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엄청난 차이가 날 정도로 큰 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두미협에서 내려오는 고운 모래들이 쌓이고 쌓여 다시 작은 섬을 이루었고, 그 섬은 다시 ‘당정섬’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비록 옛날처럼 사람이 살지는 않지만 자연을 그대로 품어 새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특히 하남 당정섬의 장관은 겨울철에 볼 수 있다. 겨울이면 천연기념물 제 201-2호인 큰고니가 시베리아에서 4천 km나 떨어진 하남 당점섬으로 날아온다. 또 다른 천연기념물인 참수리, 흰꼬리수리를 비롯해 휜뺨검둥오리, 흰죽지, 호사비오리, 해오라기 등 40여종의 다양한 철새들이 찾아와 풍부한 먹이들을 먹으며 겨울을 보낸다.
그래서 당정섬에선 매년 겨울철이 되면 ‘고니학교’가 문을 연다. 아이들과 가족들이 철새 탐조대에 설치된 필드스쿠프를 이용해 새들을 관찰할 수 있다. 또 강이 풀리고 따뜻한 봄이 되면 4월에는 잉어들의 산란장소가 되기도 한다. 많은 잉어들이 어도를 따라 산란을 하러 오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녀들과 살아있는 자연 교육을 할 수 있다.
대홍수라는 자연의 재해로 시련을 겪고, 한강종합개발이라는 사람들의 욕심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두미협에서 부드럽게 내려온 모래들이 쌓이고 쌓여 시간이 다시 자연을 치유한 모습만으로도 대견한 섬이다. 어렵고 힘든 시련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모습을 다듬고 만들다 보면 언젠가는 더 소중한 존재로 세상과 더불어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섬 같다. 자연과 시간의 치유의 힘을 보여주는 섬이 바로 당정섬이다.
부천전철역에서 900m남짓 떨어진 곳에 맑은 생태하천 심곡천이 흐르고 있다.
심곡천(深谷川)은 부천시 소사본동 성주산 여우고개 기슭에서 발원하여, 중동신도시를 관통하여 굴포천(인천 부평동)으로 합류하는 하천이었다. 1986년에 복개하여 도로를 개설하였으나, 소명여고 사거리에서 부천시 보건소 앞까지 심곡동을 관통하는 약 1.0 km 구간은 2017년 5월에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하였다. 심곡천을 흐르는 물은 하수처리장에서 흘러나온 물을 재처리하는 방식으로 펌프를 이용해 상류로 올려 보낸 뒤 다시 하류로 보내는 순환 방식이다.
복원된 심곡천의 길이는 1km, 폭은 18.6m로 하루 2만1천 톤의 깨끗한 물이 흐르는 도심 속 자연공간이자 문화가 있는 시민 휴식공간이다. 사실 이 하천의 정식명칭은 ‘심곡 시민의 강’이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심곡천이라고 부르고, 이 하천의 과거 이름도 심곡천이라 이 글도 심곡천이라 표기했다. 심곡천은 현재 부천의 대표적인 생태하천으로 부들초와 갈대 등 토종 수생식물이 자생하고, 맑은 물속에는 송사리와 피라미 등의 물고기가 서식중이다. 복개 1년여 만에 왜가리와 흰뺨검둥오리 같은 철새도 찾아오고 있다.
부천시는 심곡 복개천 복원 공사를 하면서 32년간 복개도로를 받치고 있던 507개의 기둥 중 2개를 철거하지 않고 보존하기로 했다. 원미교에서 양귀자교 중간에 철거하지 않은 두 개의 기둥을 볼 수 있다. 심곡천에는 총 4개의 도보전용 다리가 있는데 부천과 인연이 있는 문인의 이름으로 다리이름을 지었다. 그 다리는 양귀자(‘원미동사람’을 쓴 소설가)교, 변영로(시인, 독립운동가)교, 펄벅(소설, 사회운동가)교, 목일신(아동문학가)교다.
다리 벽면엔 부천시민들이 그린 그림과 부천에서 이루어진 유명한 행사들의 포스터로 꾸민 벽화가 있어 산책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반대편에는 심곡천의 역사를 알려주는 타일 벽화가 있다. 다리 밑이나 하천 주변으로 문화공간도 갖춰져 있어 차세대 예술가들의 버스킹 공연 등 다양한 문화예술 체험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심곡천 주변으론 만화 도시답게 수준 높은 벽화를 만날 수 있어, 인증샷을 찍기도 매우 좋다. 부천시에서 심곡 시민의 강이 완성된 이후 인근 빌딩 사이의 짜투리벽이나 건물 구조를 활용해 벽화를 그려 만화도시 부천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특히 영동빌딩에 그려진 벽화는 멀리서 보면 하천과 연장선상에 놓인 것 같아 보기 좋다. 심곡천의 1·2공영주차장에는 태권브이와 헬로카봇을 트릭아트로 구현해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어른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심곡천은 주말에 가족단위 나들이객이 많을 뿐 아니라 평일 아침/저녁으로 운동과 산책을 나오는 주민들도 많아 언제나 활기차다.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공간을 잠시 떠나 애월읍 금성리 해안가에 가면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넋을 놓을 때가 있다. 그곳에 그다지 유명하진 않지만 마을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남당물과 갯물이 솟아오르고 있다. 물이 깨끗하여 만지고 놀아도 좋은 곳이지만 왠지 더럽히기가 싫어 들어가기 망설여지기도 한다. 개념없는 개발과 그로 인한 환경파괴로 인해 점점 오염되어가는 제주의 물은 이제 단순한 물 그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일까? 이 남당물의 유래가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당물이라고 불리게 된 유래에 대해 주민들은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이 샘가 주변에 남당이라는 당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 남당은 이 좋은 샘 하나를 보고 이 근처에 들어섰던 것 같다. 주민들은 이 당집을 찾아 가족의 건강과 집안 번성을 위해 치성을 드릴 때 이 물을 찾았다고 한다. 굿이나 고사 치성을 드리기 위해 떠온 물은 기본 제물이다. 이렇게 샘이 제와 관계되고 신성시되는 것은 샘물이 생명의 원천이자 낡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으로 바꾸는 재생력과 정화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당집에서 치성을 드릴 때 이 물을 이용한 것은 남당물이 지닌 생명력과 정화력에서 연유된다.
날이 흐린 날은 파도가 워낙 세서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없지만 맑고 쾌청한 날은 남당수를 찾는 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근처 해수욕장에 왔다가 혹은 연예인이 다녀갔다는 유명한 카페에 왔다가 잠깐 들른 것일 수 있지만 혹 이 남당수를 우연하게라도 보게 되는 이들에게 남당수의 유래와 역사에 대해 설명해주고픈 욕심이 있다.
금성리의 숨은 명당으로 꼽히는 남당수 근처에 예전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점점 길도 깔끔하게 깔리고 금성리 청년회에서 새단장을 하여 남당수도 깨끗해졌다. 상가가 많고 관광객들이 가득한 명소들과는 달리 남당수를 중심으로 한 금성리의 바닷가는 들키고 싶지 않은 나만 알고 싶은 제주스러운 곳이다. 남당수 근처 정자에서 바다와 노을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 시름 잊고 그대로 시간이 멈추어 버렸으면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풍부한 용천수 덕분에 풍요로운 마을을 이루었던 역사가 있고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한적하고 너무나 운치 있는 그 마을에 가면 다시 생명력을 얻어오기도 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곳도 많지만 이 작은 마을 안에 있는 남당수는 그런 곳은 아니지만, 옛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보는 소소하고 소박한 즐거움이 그리워 찾게 되는 곳이다.
남당수는 곽지 노천탕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 여기서 5분 정도 더 걸어가다보면 ‘금성천’이라는 하천도 나온다. 더 가면 포구로 연결되는 길이라 트래킹하며 지나치는 이들도 간간이 볼 수 있다. 혹시 곽지해수욕장에 가는 이들이라면 가는 김에 한번 들러보라고 추천한다.
제주민오름은 여러 개가 있지만 그 중 오라2동에 있는 봉우리인 오라 민오름은 높이도 낮고 크기도 작아 원래는 ‘족은민오름’이라고 불렸었다. 나무가 없고 풀밭으로 덮인 민둥산이라 붙여진 이름이지만 지금은 나무와 숲이 울창한 오름으로 변했다. 주택가 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제주의 알려진 큰 오름과는 달리 주민들이 즐겨찾고 운동하는 곳으로 애용한다. 아이들이 오르기에도 무리없이 완만한 편이라서 가족 단위의 행락객들이 많이 찾는다.
민오름의 높이는 251.7m, 비고(최고와 최저의 높이차)는 117m, 둘레는 2.968m, 면적은 474,0001m², 폭은 996m로, 오름의 모양은 말굽형으로 북동향이며, 화구는 정상인 서쪽 봉우리와 동쪽 봉우리 사이에 북동쪽으로 벌어져 있으나, 이 두 봉우리의 정상 부분에는 원형의 분화구 흔적이 남아 있다.
민오름도 옛날에는 풀밭 오름이었다고 하는데 이곳에 산책로와 체육 시설이 설치된 이후 제주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오른 중 하나가 되었고, 해송을 비롯해 전나무, 상수리나무, 밤나무 등의 자연림과 각종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다. 구역상 연동과 오라동의 경계에 위치해서 신제주 로터리에서 정실 마을 방향에서도, 연북로에서도 민오름 길을 이용할 수 있다. 여러 갈래의 산책코스 중 어디를 선택하냐에 따라 다양한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다.
민오름은 화려한 오름은 아니지만 소박하고 정겨운 모습으로 친근하게 다가오는 오름이다. 접근성이 좋고 부담이 없어서 근처 꿈바당어린이도서관을 경유하여 민오름까지 오르면 멀리 공항과 바다까지 제주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중간쯤 갔을 때 한라산이 보인다. 북서사면 등성이에는 시민체력단련시설이 마련되어있어 휴식장소로 시간을 보내기에도 그만이다. 또 산 중간중간 둘레를 현무암으로 쌓아놓아 운치있고, 이끼옷을 입은 돌들과 눈이 부시도록 어여쁜 꽃들을 볼 수 있으며, 데크가 잘 깔려지고 포장된 길이기에 동선이 멀지 않다고 느껴져 자주 찾게 된다. 민오름의 정상에는 쉬기에 좋은 정자가 있고 정상에도 시민체력단련시설이 있다. 정상에서 보이는 영주십경 중 하나인 사라봉과 별도봉, 제주항, 제주시가지 등 여기저기를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오라동의 민오름은 때가 묻지 않은 완연한 숲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걸어보면 ‘참 좋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고 둘레길의 흙냄새와 풀냄새를 맡고 있다보면 막힌 코와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 정상에서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서 동사면으로 이동하다보면 숲에서 나는 풀내음에 상쾌해진다. 둘레길 산책 소요시간은 약 40분이다.
하산하는 길, 송글송글 맺혔던 땀은 바람에 날아가고 시원해지는 몸과 마음에 다음엔 누구랑 올까, 언제 또 올까 생각하게 된다. 오르다보면 그 매력에 푹 빠지게 되는 민오름은 방과 후 학습장소로도 활용되어 아이들이 최고의 자연학습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숲길이라 여름에 올라도 시원하고, 동네 주민들이 산책하고 운동하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기에 혼자여도 무섭지 않다. 자연스러운 흙길을 맨발로 걸으며 내 몸을 자연에 맡겨보면 그 어느 숲길보다 오라동 민오름의 초록이 깃든 모습에 반하게 될 것이다.
수도산(修道山)은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산이다. ‘우뚝 선 고층 빌딩으로 즐비한 코엑스 사거리에 산이 있었나?’하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왜냐면 얼핏 보면 이것은 산이라기 보다는 높이 솟은 언덕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우면산에서 매봉산으로 이어진 지맥 가운데 북쪽 방향으로 작은 능선이 뻗어 역삼동 국기원 근처의 역삼 공원 구릉을 이루고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삼성동 뒷산인 수도산 봉우리를 형성한다. 산 높이는 75m이다.
수도산 남쪽 기슭에는 봉은사라는 천년 고찰이 있고 북쪽 기슭에서 중턱까지 이어지는 곳에 명문고로 유명한 경기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산에는 관심 없을 수밖에 없다. 봉은사는 신라시대 말기에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봉은사가 수도산으로 절을 옮긴 것은 1562년(명종 17년)이다. 선릉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또한 경기고등학교도 지금의 정독도서관 자리에 있다가 1976년 지금의 수도산으로 이전했다.
강남개발의 광풍으로 많이 훼손되고 개발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경기고와 봉은사 덕에 아직도 녹음을 간직하고 있는 수도산은 삼성동에 사는 사람들의 공원이자 쉼터이자 놀이터가 되어 주는 곳이다. 수도산은 아까시나무숲이 빼곡해 여름이면 아카시아 꽃 내음으로 진동한다. 또한 수도산 기슭에 위치한 경기고등학교에는 멧비둘기, 직박구리, 개똥지빠귀, 붉은 머리 오목눈이, 쇠박새, 박새, 참새, 까치 등 야생조류가 아직도 서식하고 있다.
그래서 삼성동 주민들이 수도산을 백배 즐기는 방법이 있다. 이른 새벽에 산책하는 것이다. 하루 중 도시가 침묵 속으로 빠져드는 동트기 직전 새벽, 안개가 조금이라도 끼어 있으면 수지맞는 날이다. 봉은사 입구 사천왕상을 지난다. 큰길로 직진하면 대웅전 가는 길인데 여기서 샛길로 빠진다. 언덕에 이동식 찻집과 휴게실이 있다. 휴게실 왼편에 작은 언덕길이 보인다. 언덕길 입구에선 벌써 보기 드문 높이의 나무들이 즐비하다. 봉은사에는 나무스님이 계셔서 나무며 꽃들이 예사롭지 않다는 소문이 있는데 수도산 입구 언덕길에서 아래를 쳐다보면 천년쯤은 되어 보이는 산사나무 고목이 시선을 휘어잡고, 그 아랫길에 계절마다 바뀌는 꽃무릇, 할미꽃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입구에서 언덕으로 올라오면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푹신한 흙의 감촉이 느껴진다. 여러 사람이 공원처럼 쉴 수 있도록 길다란 의자와 통나무를 가져다 놓았고 편한 신발을 신고 산책할 수 있도록 흙길이지만 단단히 다져 놓았다. 통로도 넓다. 통나무 의자에 앉으면 으레 다양한 종류의 새소리가 들려온다. 삼성동에선 어딜가나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 흔히 도시에서 보는 비둘기나 참새가 아니라 각양각색의 새들이 많다. 물론 한강과 가까운 이유도 있겠지만 수도산의 풍부한 먹거리와 높은 나무 덕에 새들이 편히 쉬고 가서 그러는 지도 모르겠다. 새소리로 힐링을 하면 다시 걸어본다. 대웅전 뒤편으로 돌아 갈수록 길은 좁아지고 마치 등산로 같이 변한다. 나무는 더욱 빼곡해진다. 둘레길 중반 정도 걸어서 산 정상 쪽으로 올라가서 앞을 바라보면 봉은사가 한눈에 보이고 그 앞에 코엑스와 인터콘티넨탈 호텔도 보인다. 묘한 조화다.
그리고 비탈길을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스레 내려오면 봉은사가 자랑하는 10층 빌딩 크기의 미륵대불이 위용을 자랑하며 서있다. 몇 분 안 되는 산행이지만 자연을 느끼기에 충분하며 미륵대불에게 인사드리고 하루의 시작을 맞이하면 그야말로 마음이 완벽하게 무장되어 하루를 맞이할 채비를 끝낸다. 물론 수도산은 새벽 뿐 아니라 아침이든 낮이든 언제가도 좋다. 다만 밤에는 봉은사가 10시에 문을 닫기 때문에 갈 수 없다. 밤 시간만 피해 몸과 마음의 여유를 찾으려면 언제든 가면 된다. 수도산은 삼성동의 힐링 캠프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화산섬이기에 대부분의 하천은 있다고 해도 비가 올 때만 일시적으로 물이 흐르는 건천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제주시 외도동에 흐르는 월대천은 4계절 맑고 시원한 물이 흘러 외도동 시민들이 좋아하는 숨겨진 피서지다. 그 이유는 월대천은 바다와 한라산 계곡물이 흘러 만나는 곳으로 외도동 일대를 흘러 바다로 유입되는 생태하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도천이라고도 한다. 밀물 때는 해수가 역류해 들어와 이 하천에서 담수와 만나게 되는 덕택에 은어, 숭어, 뱀장어 등이 많이 서식한다. 주변에 산책로도 잘 정비되어 있을 뿐 아니라 270년이 넘은 해송과 팽나무가 물 위로 휘늘어져 선경을 자아내는 곳이기도 하다.
월대천은 2009년 7월 제주시가 기존의 관광 명소 이외에 제주시 일대의 대표적인 장소 31곳을 선정해 발표한 '제주시 숨은 비경 31' 중 하나이다.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외도 물길 20리를 걸어보는 것도 좋다. 외도 물길 20리 코스는 도보로 약 2시간이 소요되고 월대천, 알작지, 근천, 내도교, 월대천공원, 외도생태공원, 납세미물, 절물분수공원, 연대 마이못 등을 거치는 코스인데, 외도 주민들이 강력 추천하는 산책로이다.
냇물에서는 은어들이 노닐고 달이 뜨면 운치가 있어 옛 선인들이 모여 맑은 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구경하며 풍류를 즐긴 평평한 대를 월대(月臺)라고 했다. (월대천 표지판)
조선시대에는 많은 시인과 묵객이 이곳을 찾아 달 밝은 밤 은은한 달빛이 물에 비친 운치 있고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시문을 읊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밤의 달빛도 아름답지만 월대천은 사계절 시원하고 맑은 용천수가 흘러 ‘수심이 매우 깊으니 조심하라’는 안내문이 내걸릴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고 하천이 넓어 여름에는 보트도 탈 수 있다. 한 여름엔 월대천 축제가 열려 각종 공연과 체험행사를 한다. 그래서 외도 주민 뿐 아니라 각지에서 가족단위로 참석해 자리테우 체험도 하며 축제를 즐긴다.
월대천을 거닐다가 아이스크림과 애플망고빙수가 맛있다는 카페에 들어가 월대천을 보며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한 여름에도 에어컨, 부채 저리가라 할 정도로 시원하여 여기저기 그늘 밑에 돗자리를 깔고, 텐트를 치고 쉬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외도 주민들은 월대천 때문에 외도를 떠날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인기만점인 장소이다. 벚꽃이 피는 계절이면 팝콘처럼 원없이 핀 벚꽃구경하는 이들로 붐비고, 월대천 산책로에 조성된 운동기구로 건강을 챙기기도 한다.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월대천을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월대천이 지금처럼 아름답고 친근한 모습으로 외도시민의 즐거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최근엔 제주시가 월대천 보전을 위한 자연생태공원 조성 종합계획을 수립하여 용천수 고갈과 자연생태계 파괴로 인한 폐해가 발생되지 않도록 힘을 기울이고 있다. 외도 월대천의 보전과 이용을 위한 종합계획 수립 용역이 시작되면서 지역 주민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월대천과 주변의 자원 활용계획과 교통망 확충, 하천범람 방제방안, 유량 유지방안, 알작지 유실원인 파악 및 보호방안을 수립하고, 이런 유무형의 자원을 활용한 관광객 유치 및 주민들의 쾌적한 이용환경을 조성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말 그대로 종합개발계획 마스터플랜이다. (제민일보)
도곡동 느티나무는 수령이 약 735년으로 추정되는 보호수로써 서울특별시에서 가장 오래된 느티나무이다. 올해 735살을 맞이한 이 느티나무는 경남아파트 102동 뒤에 있다. 과거 말죽거리 역마을 주민들이 매년 10월 질병을 막고, 풍년과 좋은 일이 있게 해달라고 도곡동 느티나무 앞에서 도당제를 지내고 있다. 당집은 없고 느티나무가 수호신으로써 신체(神體)가 되었다. 느티나무는 수고 27미터, 둘레 7.9미터에 이르는 노거수로써 수형이 웅장하고 압도적이다.
도당제는 고려 충렬왕(1275-1308)때부터 시작되었다. 도당제는 마을의 평안과 농사의 풍년, 가축의 번식 등을 수호신에게 기원하는 전통제례이다. 조선시시대 역삼마을 주민들은 가을 추수 후에 이 느티나무 광장에 모두 모여 떡과 과일, 술을 차려 놓고 마당굿을 펼치고 노래와 춤으로 회포를 풀고 해묵은 갈등을 해소하고 일체감을 다졌다. 우리 선조들의 신앙, 노동가치, 자연 친화성 등이 도당제를 통해 이어져 내려왔고, 이제는 지역 축제로 발전하고 있다. 평소에는 느티나무 광장에 녹색의 철책이 세워져 있어 나무신령을 가까이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있으나 일년에 한 번 도당굿이 벌어지는 날은 철책이 개방되어 느티나무를 가까이 볼 수 있다.
이 나무에는 전설도 깃들어 있다. 조선시대 이 일대에 살았던 효자 김의신은 40세 때 뒷산 느티나무 밑에서 백일기도를 하다가 산신령의 말에 따라서 자신의 허벅지 살을 잘라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김의신을 기리기 위해서 느티나무 뒤쪽에 효자비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역말 느티나무는 한창 강남 개발 사업이 시작될 때, 위기를 맞을 뻔하기도 했으나 주민들의 노력으로 오늘날의 보금자리가 마련되었다. 아파트 단지 개발을 하면서 느티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건물 층고를 낮추고 느티나무 주변에 공간을 확보하였으며, 녹색 철책의 울타리를 설치하여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도록 하였다. 느티나무 앞에 보호수 안내판과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이 놓여있다. 현재 강남문화원과 역말전통문화보존회 주최로 역말 도당제 및 잿마당제라는 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역말을 떠나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옛 주민들도 도당제에 참여함으로써 역말 사람으로서 일체감을 확인한다.
나무들이 가장 초라해지는 11월말에 마주 본 이 신령나무는 비록 나뭇잎이 말라비틀어져, 걸쳐있는 초록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 웅장한 나무줄기와 둘레는 신이 깃들어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개발로 인해 지금은 어린이 놀이터와 이웃해 있어 더욱 보기 힘들어 졌지만 철책을 여는 내년 10월 도당제에는 꼭 다시 와서 신령나무를 가까이 마주 대하고 싶다.
현대인들은 바쁜 일상, 높은 건물들 사이에서 살다보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미국에도 센트럴파크를 만든 것이고, 날씨가 조금만 좋으면 한강에 다들 돗자리를 들고 모이는 것이다. 아산에도 지친 심신을 달래줄 장소가 역시 존재한다. 바로 신정호다. 신정호는 충청남도 아산시 신정로에 있다. 용화동에서 터널 쪽으로 가거나 신창, 초사동을 지나서 갈 수 있다. 자연호수가 아닌 인공호수이고, 산책로, 자전거도로, 정자 등이 군데군데 만들어져 있어, 산책하기 용이하고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기에도 좋다.
신정호는 아산 시민들의 나들이 장소이다. 봄이 되면 많은 가족들이 아이를 데리고 나와서 잔디밭에서 뛰어 논다. 신정호에는 놀거리가 다양한데, 여름에는 야외수영장이 개장하기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현장체험학습으로 많이 오고, 일반 시민들도 수영하러 많이 드나든다. 가을엔 신정호에서 열리는 행사들이 많고, 넓은 공터에서 어린아이들이 뛰어놀거나 공놀이를 한다. 신정호에서 즐길 수 있는 활동도 다양하지만 신정호 자체를 즐기러 오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신정호에는 자전거도로가 잘 나있어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신정호를 크게 도는 사람도 있고, 초사동이나 온양시내까지 자전거를 타고 운동 삼아 다녀오는 사람도 많다. 자전거를 타지 않고 걸어서 산책하는 사람도 있고, 가볍게 뛰며 건강관리를 하는 사람도 많다.
신정호 주변에는 카페가 많다. 2012년도 즈음에만 해도 카페가 한두개에 불과했는데 가장 최근에 갔을 때는 신정호로 향하는 도로부터 카페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에도 있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신정호에는 사진을 찍기 좋은 장소가 많아 근처 중고등학교에서도 졸업앨범용 졸업사진을 찍으러 한 학년이 모두 나들이를 오기도 한다. 커플, 가족들도 신정호, 주변 조형물, 꽃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많이 찍는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추억을 남기고 싶다면 적극 추천한다. 신정호에서는 공식적인 행사도 가끔 열리지만 개인적으로, 일반 시민단체에서 개최하는 행사도 많다. 일반 시민이 통기타를 들고 와서 버스킹을 하는 경우도 있고, 근처 학교나 동호회에서 장소를 빌려 행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에 비하면 아산지역이 훨씬 공기가 맑기는 하지만, 아산지역 중에서도 신정호 부근의 초사동 지역이 공기가 맑다. 호수도 있고, 산도 있어서 산책하면서 맑은 공기를 만끽할 수 있다. 바쁜 일상, 빌딩 숲속에 갇혀 살던 아산 시민들과 아산 방문객들을 위해 조성된 휴식 공간인 신정호에서 주말 하루 정도는 지친 심신을 달래보는 것이 어떨까?
보온병에 커피를 타서 담는다. 작은 배낭을 찾아 커피와 생수를 양 옆 주머니에 꽂고 간단한 간식을 챙겨 넣는다. 아빠는 등산스틱을 만지고 엄마는 선글라스와 등산장갑을 챙긴다. 주말 아침, 서둘러 향한 곳은 창포산이다. 혹자는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해서 간 곳이 고작 창포산이라니?”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창포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면 슬리퍼부터 등산화까지 차림이 다양하다. 창포산은 큰 주택단지들 사이에 위치해 오래전부터 시민들의 생활체육 공간으로 사랑받는 곳이다. 그래서 이 산을 뒷동산 오르듯 가볍게 오르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생각보다 가파른 경사에 등산스틱이 등장하기도 한다.
창포산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성곡리와 포항시 북구 장성동, 창포동에 걸쳐 있는 묘봉산의 별칭이다. 나는 일생동안 줄곧 창포산으로 알던 곳이라 정식 명칭이 따로 있는 줄 몰랐다. 묘봉산은 왜 포항시민에게 창포산이란 별명으로 불린 것일까? 추측해 보자면 첫째로, 포항시 남구에 동명의 산(묘봉산)이 있기 때문에 구별이 필요했고, 둘째로는 등산로의 위치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등산로가 창포동 부근을 지나기 때문이다.
이 산은 산줄기를 따라가면 꽤나 규모가 크지만, 등산로는 창포동과 장성동 부근으로 ‘국기봉’까지 2시간 내외로 등산을 할 수 있다.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꽤나 산이 잘 정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정상인 국기봉에 도착하기까지 중간중간 쉬어갈 곳을 만날 수 있으며, 헬스기구를 본 딴 공공 체육시설에서 몸의 긴장을 한 번 풀어줄 수 도 있다. 가을에 창포산에 올랐을 때, 거꾸리에 올라타 쳐다본 소나무 숲 사이의 높은 하늘은 무척 아름다웠다.
창포산 등산로 입구에는 마장지라는 커다란 못이 있다. 지금은 큰 길이 나고 커다란 교회가 생기고 근처에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그 전의 마장지는 산으로 둘러싸여 어린 나에겐 조금 으슥해 무서우면서도 신비로운 공간이었던 기억이 있다. 봄에는 주변에 벚꽃이 만개하고 여름엔 못에 연꽃이 그득한 이곳에는 유모차를 밀고 온 가족부터, 연신 사진을 찍으시는 중년의 여성들과, 건강관리를 겸한 산책을 나오신 노부부까지 다양한 포항시민의 여가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어린 시절의 나와 우리 가족은 여름 저녁에 바리바리 음식과 과일을 싸와서 마장지에서 더위를 피한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지금 커피를 들고 마장지를 둘러보니 모습이 많이 변했지만 이곳이 앞으로도 오랜 시간 시민들의 가까운 휴식공간으로 자리를 지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이 신호등의 불빛에 쉬는 도로, 주말이면 도심을 빠져나가거나 남구 북구를 연결하느라 정체되는 곳, 이곳이 포항문화원이 위치한 우현사거리이다. 포항 사람들은 이 도심을 ‘나루끝’이라 말한다. 심지어 영덕에서 포항을 오가는 시외버스는 반드시 이곳을 경유하며 “나루끝이시더. 내리소.”라는 운전기사분의 말을 듣게 된다. 아마 처음 포항 땅을 밟으면 가장 의아하며 궁금한 지명이 나루끝이 아닐까 생각된다. 강도 배도 없는데 웬 나루? 그것도 끝?
포항은 1970년 산업도시가 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울산에서 시작되어 경주를 거쳐 포항을 휘감은 형산강은 1920년대 말 제방공사가 있기 전까지 많은 지류를 만들어 놓은 형님 강이다. 그 형산강의 지류들로 칠성천·냉천·양학천·학산천·여을천이 흐르고 이 천들은 도랑을 만들고 곳곳에 못을 만들었다.
또한 그 못들이 호수를 이뤘으니 삼호( 三湖 ) 즉, 두호(斗湖), 환호(環湖), 아호(阿湖)이다. 그러나 진짜 호수가 있는 건 아니다. 얼핏 호수로 보일 뿐 이젠 지명이나 도로명으로 남겨진 포항풍경이며 동해와 만나는 천들이 영일만으로 모여드니 호수가 된 듯하다. 속담에 풍어(豊漁)가 들면 물반 고기반이라지만 포항땅을 보면 얼마나 물길들이 많은지 물반 늪반인 듯하다. 그 많은 물길들 중 여을천(余乙川)에 나루터가 있었고, 이 천(川)의 끝자락이 나루끝이다.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나루끝은 우현동·학산동·대신동의 경계 지점을 가리키는 지명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경계를 이해하기 위해 세 동(洞)의 유래를 살펴보면 우현동(牛峴洞)은 7번 국도를 따라 넘어가는 재의 모양이 ‘누운 소’와 같다 하여 소티재 라고도 불리는데 이를 한자로는 ‘牛峴’이라 표기하며, 작은 고개라는 의미의 쇠티가 음이 바뀌어 소현(小峴)으로 불린 후 우현이 되었다는 유래설도 있다. 지금은 창포동과 합쳐져 우창동에 포함되었다. 학산동은 다행이 지금까지 같은 이름이다. 학 세 마리가 날아가는 형상을 지닌 삼학산( 三鶴山)에서 유래 된 지명으로 옛 학산동 사무소 터에는 동제(洞祭)를 지낸 ‘용담제당(龍潭祭堂)이 있기도 하다. 대신동(大新洞)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진출하여 공장을 설립하면서 새롭게 일어나는 신흥 마을로 성장해 대신동이라 불렀다.
“나루끝 가니더” “날끝이시더”이 문구만 사용하면 세 동이 만나는 경계점을 명확히 표시 할 수 있으니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듯 싶다. 1995년 도농통합법에 의해 없어진 영일군의 북쪽 자연 경계 역시 나루끝이었다. 여을천 나루끝의 북쪽 흥해·청하·월포 주민들은 지금도 “포항 간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없어진 영일군의 흔적을 지켜 낼 수 있는 구전(口傳)이다. 또한 나루끝을 빨리 말하다보니 날끝으로도 불렸다. 포항 가는 길목 나루끝을 지나는 곳에 포항문화원이 있다. 포항 나루끝에는 포항의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있다.
‘부락산 푸른자락 펼쳐진 미래~’ 나의 초등학교 교가의 가사 중 일부이다. 평택 시민들에게 부락산이 얼마나 의미 있는 산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부락산은 평택시 북동부의 송탄 지역에서 중요한 산이다. 송탄 어디를 가도 부락산을 볼 수 있다. 지산동, 이충동, 서정동 모두 부락산으로 이어져 있다. 실제로 부락산은 조선 시대부터 진위현과 평택현의 경계 역할을 하는 랜드마크였다. 그래서 부락산보다 더 높은 덕암산은 엣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부락산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있다.
부락산은 송탄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고 모든 지역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지름길로도 많이 이용된다. 일반적인 길보다 험한 산길이지만 훨씬 빠르기 때문에 많은 송탄 사람들이 이용한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부락산에 올랐다. 산을 좋아했던 아버지를 따라 거의 매주 등산을 했다. 2014년에는 환경정화를 목적으로 하는 동네한바퀴 프로그램을 하면서 자주 부락산에 올랐다. 송탄에는 K55라는 큰 미군부대가 있어 항상 외국인들이 많았는데, 외국인들과 쓰레기를 주워 환경정화를 실천하는 동네한바퀴 프로그램도 부락산을 중심으로 다녔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일반적인 등산로만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개발되어 몇 년 전 부락산 둘레길도 생겼다. 처음에 부락산 둘레길이 생겼을 때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둘레길은 제주도나 지리산처럼 유명한 곳에 생기는 건줄 알았지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부락산에 생길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둘레길이 생기고 가보니까 너무 좋았다.
부락산 둘레길은 1구간 시내길, 2구간 숲속길, 3구간 벚꽃길, 4구간 역사탐방로 길로 나누어져 있다. 가장 짧은 1구간은 2.5km이고 제일 긴 4구간 역사탐방로는 9.7km나 된다. 부락산 둘레길을 걸으면 송탄의 다양한 장소들을 만날 수 있다. 각 구간의 테마에 맞는 장소들을 갈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다. 1구간은 시내를 중심으로 가볍게 산책할 수 있으며, 2구간은 부락산의 정기를 맘껏 느낄 수 있다. 3구간은 4월 벚꽃 개화시기에 맞춘다면 송탄의 벚꽃 스팟은 모조리 갈 수 있다. 4구간 역사탐방로 길은 이름답게 충의각, 최유림장군묘 등의 역사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중간에 있는 정자들은 둘레길 산책을 더욱 여유롭고 신나게 만든다.
최근에는 지산동에 부락산 산림체험장과 문화공원이 새로 만들어져 다양한 테마의 산책로와 특별한 하늘숲길을 만날 수 있다. 하늘숲길은 말그대로 하늘 위에 만든 산책로로 꽤나 높은 위치에 있다. 안전상의 문제로 밤에는 하지 않으며 오전 9시부터 올라갈 수 있다. 바로 옆에 큰 나무들이 있고 아래를 보면 두려우면서도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산림 체험장은 미리 예약만 한다면 저렴한 가격으로 산림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 코스에 따라 4,000원-6,000원의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 평택시민은 1,000원 더 저렴하다. 여러 가지 장애물을 피해서 코스를 통과하는 기분은 정말 짜릿하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부락산. 20년 전에는 단순히 산책로 기능 밖에 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많은 것들이 개발되면서 평택시민들을 위한 문화, 생활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아직도 문화공원 등을 구성하고 있다고 하니, 더 발전하고 성장할 부락산이 기대된다.
서울 동대문구 회기에는 산책할 만한 곳이 많다. 예쁜 분수와 나무들이 있는 대학교들도 있고 외대앞역 뒤에는 중랑천이 있고 한예종 안에는 의릉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회기에서 가장 좋은 산책코스는 배봉산이라고 생각한다.
배봉산은 동대문구 휘경2동에 있는 해발고도 106.03m의 산이다. 배봉산을 둘러싸고 삼육의료원, 휘경여자고등학교, 배봉초등학교 등이 있어 다양한 곳으로 쉽게 갈 수 있다. 배봉산 둘레길은 순환코스로 길을 잃을 걱정이 없으며, 유아숲체험장, 근린공원 등이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기에 아주 좋다.
배봉산은 서울의 복잡한 모습과 전혀 다른 평화롭고 단절된 공간이다. 4.5km 남짓한 배봉산 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그 넓은 산 속에 나 혼자만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나 아이가 있어 유모차를 사용하는 사람들까지 배려한 무장애길은 산책을 더욱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시원한 숲 냄새를 맡으며 아무 걱정 없이 걷다보면 배봉산의 다양한 시설들도 만날 수 있다. 시민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운동시설에는 기분 좋은 소란스러움이 함께 한다. 운동시설에서는 몇 개의 간단한 운동기구를 체험할 수 있다.
유아숲체험장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시설이 있다. 놀이터는 6개의 테마와 3개의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 모래놀이터, 나무 위의 집, 전망놀이터 등은 어른인 나도 두근거리게 만들만큼 재미있어 보인다. 유아숲체험장에서는 올챙이도 볼 수 있다. 아직 다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고 하니 얼마나 더 발전하고 좋아질지 기대된다.
또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인공암벽장도 발견할 수 있다. 무료 암벽등반교실을 운영하고 있다고 해서 관심을 가졌으나 기한을 놓쳐 신청하지 못했다. 현재도 배봉산 인공암벽장에서 암벽등반교실 초급반과 체험반을 운영하고 있으니 인근 지역에 거주하며, 암벽등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배봉산공원 관리사무소에 문의해 신청하면 된다.
하늘이 조금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저녁에는 배봉산 전망대에서 보는 훤하게 트인 서울의 모습은 모든 고민을 잊게 만들어준다. 전망대에서 보이는 남산타워는 너무 아름답고, 서울의 환한 불빛들은 황홀하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벤치에 앉아 쌀쌀한 날씨도 잊고 오랜 시간 동안 서울의 야경을 구경할 수 있다.
어두운 하늘에 맞춰 배봉산 둘레길에도 불이 들어왔다. 속삭이는 듯한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가는 발길은 가볍다. 어두운 길이었지만 둘레길이 워낙 잘 되어 있고 순환형 길이라 길을 잃어버릴 걱정이 없어 마음 편하게 돌아올 수 있다. 배봉산 산책은 하루 동안 근심 걱정을 잊고 성공적인 일탈을 한 기분이다. 복잡한 학교, 집, 어딘가를 벗어나 상쾌함을 느끼고 싶을 때 다시 배봉산에 가고 싶다.
일제강점기 동해안의 작은 어촌마을 포항동(浦項洞)은 ‘물반 고기반’의 항구와 안강, 흥해뜰의 곡창지대 덕택에 급성장하는 신흥 도시가 되었다. 영일군에 속해있던 포항읍이 1949년 포항시가 되었다. 군청과 각종 관공서들이 즐비해지고 이에 맞물려 일본인들의 거리와 상점, 음식점 등이 늘어났다. 해방 후 시의 중심지는 이름처럼 중앙동(中央洞)이었다. 그곳에 사시사철 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발길이 끊이지 않는 나지막한 산이 있으니 수도산이다.
흔히 수도산이라 말하면 도를 닦는 修道山이라는 한자를 주로 쓴다. 그러나 포항의 수도산은 水道山 이다. 산정에 수로로 보낼 물을 여과하는 정수시설이 생겼기에 수도시설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의 수도산이 된 것이다. 물길 많은 포항 땅에 고개 돌리면 하천과 개울이었는데, 근대화라는 미명 하에 중심지에 수도시설이 설치된 것이다. 아마 당시 우물물을 길러 먹었거나 맑은 강믈을 이용했을 사람들에게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변화였을 것이다.
수도시설이 생긴 과정은 1929년 <영일읍지>와 1967년 <일월향지>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일월향지 ‘포항 상수도 시설’편에 실린 ‘포항 상수도 수원지 위치 변경 및 추진을 위한 경과보고와 도내시(道內市)의 조치’에 관한 회의록을 보면 포항면을 대상으로 한 수도 설치가 얼마나 많은 논란과 첨예한 대집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1923년~1926년에 걸쳐 상수도 시설이 완공된 후 산은 저수조(貯水槽)로 인해 수도산(水道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안내문에 따르면 저수조는 1926년 2월 24일에 건립된 6각형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지붕은 일제강점기의 흔한 돔구조이다. 수원지는 천곡지이며 현 위치에서 여과, 정수, 가압하여 1924년 5월부터 급수 공급을 시작해 2003년 6월 16일 시설이 노후되어 양덕정수장이 대체급수를 시작하면서 폐지되었다.
그러면 수도산의 원래 이름은 무엇일까? 78m의 낮은 구릉 같은 산을 처음에는 백산(白山)이라 불렀다. 멀리서 보면 산이 희다. 산이 하얗게 보이는 이유는 토질이 규조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포항사람들은 이 규조토가 뭉쳐져 잘 부스러지는 돌을 ‘떡돌’이라고 하는데, 흰 빛깔의 떡돌로 이루어진 산이 수도산의 원래 이름이었다. 조선 건국 후 수양대군의 계유정난(1453년) 이후에는 모갈산(茅葛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고 영월에 유배되었던 단종이 죽임을 당하자 모갈거사(茅葛居士)가 이 산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며 아사순절(餓死殉節)한다. 사람들은 모갈거사의 충절을 기리며 산 이름을 모갈산이라 불렀다. 지금도 수도산에는 모갈거사 순절사적비와 모갈정이 남겨져 있어 그의 자취를 느끼게 해준다.
전 세계에는 독특한 모양의 종유석으로, 혹은 특별한 생태계로, 유구한 역사나 엄청난 크기로 유명한 많은 동굴들이 있고 이곳들은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는 관광명소이다.
우리나라에도 동굴들이 있다. 태백 용연동굴, 단양 천동동굴, 온달동굴, 제주 만장굴.. 동굴은 먼 지역의 특별한 관광 산물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가까운 KTX 광명역, 이케아,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 등과 신축 아파트들로 채워진 신도시 광명에 ‘광명동굴’이 있었다.
1912년 일제가 자원수탈을 목적으로 개발한 시흥광산이 현재의 광명동굴이다. 갱도길이 7.8km에 총 깊이 275m, 갱도층수 0에서 지하 7레벨까지 총 8레벨 규모의 시흥광산은 금, 은, 동, 아연 등의 광물의 총 매장량이 1만 9천 톤으로 추청되며 환경오염과 보상문제 때문에 폐광되기까지 수백 kg이상의 황금이 채굴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은 지금도 동굴에는 많은 양의 황금이 묻혀있을 것이라 분석하고 있다.
폐광 후 40여 년 간 새우젓 창고로 쓰이며 잠들어 있던 광명동굴은 2011년 광명시에 매입되어 빠른 속도로 관광명소로 탈바꿈했다. 일제의 수탈을 위한 기획광산으로서의 역사적 가치와 산업적, 문화적 가치가 결합된 광명동굴은 연간 1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테마파크로 자리잡았다. 나아가 광명시는 200만 글로벌 관광시대를 열기 위해 광명동굴을 중심에 놓고 문화 창조공간으로 성장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광명동굴은 단순히 동굴의 형태에 맞춰 보도가 깔린 게 아니라 동굴의 특성을 살려 다양한 구역마다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동굴이라는 천연의 울림통이 선사하는 특별한 공연을 즐길 수 있는 동굴 예술의 전당과 아쿠아 월드, 공포 체험관이 있어 다양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사계절 내내 12도 내외의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광명동굴은 새우젓 저장소이기도 했다. 그 특성을 살려 전국에서 생산되는 사과, 포도, 참다래 와인을 숙성시키고 있는 ‘와인 동굴’은 방문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곳이다.
금광산이었던 광명동굴의 정체성을 살려 황금의 길, 황금호수, 황금패에 소원을 적을 수 있는 소원의 초신성길도 꾸며져 있다. 광명동굴 밖에도 VR체험, LED 타워, 벽화 예술가 라스코 동굴벽화 전시관 등의 볼거리도 많다.
산 속에 있다보니 도심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든 맑은 공기와 광활한 산림이 펼쳐진다. 단풍이 드는 가을에 더 아름다운 곳으로, 주차장에서부터 광명동굴까지, 동굴 관람 후 나와서까지 상쾌한 산책이 가능하다.
최근에는 글로벌 네이처 브랜드 1위 디스커버리사의 광명동굴 방문이 화제가 되었다. 어드벤처와 엔터테인먼트, 에듀케이션, 힐링이 모두 가능한 광명동굴을 ‘디스커버리 네이처파크’로 조성하기 위한 첫 걸음이었다. 광명동굴은 여전히 추후 개발이 필요한 미개방 구간도 상당히 있으며, 그에 대한 다양한 기획들이 추진되고 있다. 가시적인 성과들도 결과가 좋지만 실제로 광명동굴은 근교 주민들에게 접근성 좋고, 볼 만한 명소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광명동굴은 조선총독부가 대한제국 고종황제를 압박하여 ‘광상조사기관’을 설치하고 금은광산을 발견해서 이를 독점하려고 안간힘을 쏟은 수탈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1912년 이후 108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갱도와 선광장 터, 광부들의 낙서도 보존되고 있는데, 보고 있자면 복잡한 심경이 된다. 채굴된 광석을 선별하던 선광장 터도 그대로 남아있다. 채굴된 광물들이 일본으로 보내져 태평양 전쟁의 무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일제시대 수탈의 증거이기에, 입구에서 마주하는 ‘소녀의 상’이 더 아프다.
한국 전쟁 때는 주민들의 피란처이기도 했던 광명동굴은 이제는 잘 꾸며진 테마파크로 즐기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많다. 이 변화가 ‘폐광의 기적’이라는 수식어를 실감하게 한다.
힘든 역사를 뒤로 하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된 광명동굴, 내외국인 모두가 찾고,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갔으면 한다.
워라밸, 힐링, 소확행이라는 키워드가 화제가 되면서 사람들은 화려한 볼거리나 대단한 시설보다 주변에 산책할 거리나 공원에 관심을 더 많이 두고 있다. 등산 코스, 올레길 등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그 코스들이 좀 더 일상으로 주변으로 가깝게 들어온 것이 각종 둘레길이다. 서울 둘레길 6코스에 해당하는 안양천 산책로도 그런 기류에 맞추어 제법 최근에 조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안양천은 길이 34.8km의 안양시, 군포시부터 광명, 서울의 금천, 목동, 가양으로 이어지는 한강의 한 지류이자, 동시에 삼막천, 학의천, 수암천, 시흥천, 목감천, 도림천 등의 지천을 많이 거느리기도 한 꽤 큰 규모의 강이다.
안양천 산책로는 길이도 적당하고 자전거 도로가 잘 갖추어져 있으며 한강과도 닿아 있기에 라이딩 코스로 예전부터 인기를 끌었다. 이 코스가 유일하게 야간주행이 가능한 곳이어서 더 그렇기도 했다. 최근에는 라이딩 코스로 뿐만 아니라 일반 산책/조깅코스로도 점차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황화 코스모스, 백일홍, 장미꽃, 코키아, 매화나무 등 다양한 꽃과 나무를 만날 수 있으며 핑크뮬리존은 핫한 포토존으로 각광받고 있다. 한창 시즌엔 윤중로만큼이나 아름다운 벚꽃구경을 할 수 있는 숨은 명소다.
큰 하나의 둘레길이지만 지루할 틈 없이 다양한 모습을 마주할 수 있기에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다. 옆에 흐르는 안양천의 물 내음과 바람을 느끼며 꽃구경을 하며 걷다보면 꽤 커다란 가로수길을 만나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다른 분위기의 오솔길을 만나기도 하는 다채로운 매력을 지녔다.
고척돔구장의 개장으로 구일역 유동인구가 많아지면서 구일역에서부터 시작되는 서울 둘레길 6코스가 더욱 부상하고 있다. 고산초, 고원초, 경인고, 구일고, 동양미래대학 등 학교를 중심으로 인근에 커다란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 있기에 안양천 산책로는 이 근교 주민들과 반려견들이 가장 애용하고 있는 곳이다.
사실 안양 주민들에게 현재의 아름답고 잘 정돈된 안양천 산책로는 놀라움 그 자체다. 예전에는 안양천 오염문제가 정말 심각했기 때문이다. 영등포, 광명, 안양, 군포, 부천 역곡 등에서 무분별하게 배출된 생활하수와 공업폐수가 그대로 안양천에 유입되었다. 그래서 이 곳 토박이들에게 안양천은 오랜 시간 감히 접근할 생각도 못할 ‘똥물’의 이미지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
1987년 안양천하수처리장을 시작으로 서울 서남권, 광명, 부천 역곡 등에 차례대로 하수처리장이 들어서면서 정말 비약적으로 개선되었다. 그리고 잠시 멈췄던 적도 있으나 조경 및 정비공사를 꾸준히 해오고 있다. 이런 일련의 시설공사들로 이전에 여름 장마철에 늘 홍수 피해를 입던 시절도 끝이 났고, 부분적으로 계속되는 공사로 안양천 산책로는 지금도 계속 발전 중이다.
똥물 시절, 어둡고 인적없는 안양천은 상습 우범지역이기도 했다. 비행청소년들이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경찰서에 들어가면, 경찰들이 말없이 안양천에서 일어난 끔찍한 범죄현장의 사진을 늘어놓으며 겁을 주곤 했다.
이렇듯 악명높은 하천이었던 안양천은 제대로 환골탈태를 했다. 주민들의 체감 말고도 이를 보여주는 수치가 있다. 수질 개선 전과 후의 BOD 차이인데, 그 수치가 하도 드라마틱해서 교과서의 환경오염 파트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놀라운 개과천선을 증명하듯 현재의 안양천은 생태가 살아있고, 찾는 이들에게 좀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잉어가 많이 보이는데, 이는 한강 본류 강안 준설 및 축대 포장공사와 직선화로 수초대가 사라지고 수심이 깊어지면서, 수초에 알을 붙여 낳는 습성을 가진 잉어, 붕어의 산란할 곳이 사라지자 이 물고기들이 알을 낳으러 안양천을 거슬러 오르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토종 민물게까지 한강으로부터 올라와 많이 살고 있다. 어떤 시기에는 자전거 도로에 길을 건너다 자전거와 사람에게 밟혀 죽은 게들의 모습이 목격되기도 한다.
또한 현재 철새보호구역으로 쇠보리, 흰뺨 검둥오리, 왜가리, 쇠백로, 재갈매기 등의 철새들이 노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겨울에 오리나 백로 등의 철새들이 많은데 이 시기에는 다리를 건널 때 다리 위 가로등에 앉아있는 백로가 싸는 똥을 맞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심지어 백로가 생선을 먹다가 떨어뜨려 놀라기도 하니 항상 주의해야 한다.
과거를 알기에 현재의 안양천은 주민들에게 더욱 애정어린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한 때는 가까이 갈 엄두조차 나지 않던 곳인데 이제 다양한 식물과 새, 물고기를 구경할 수 있는 곳이 되어 가족들과, 사람들과 거닐기도 하고 출사를 나오기도 하고, 굳게 맘먹고 자전거 라이딩을 나서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제 예전의 악명을 벗고 다양한 추억으로 채워지고 있는 안양천의 모습이 새롭고 더욱 기대가 된다. 구로구는 서울의 중심부가 아니라 각종 시설들이 쉽게 사라지고, 방치되곤 하는데 안양천 산책로는 지금처럼 계속 잘 가꾸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