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천안시하면 독립기념관, 유관순 열사, 천안 거봉포도, 천안삼거리, 호두과자, 병천순대 등 다양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올해(2019년)는 삼일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당시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은 삼일만세운동의 영원한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유관순 열사의 고향이자 병천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역사의 현장이다. 인근 목천읍에는 1987년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독립기념관이 건립되면서 천안시는 독립운동사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천안시의 향토민요인 ‘천안삼거리’는 천안이 조선시대에 중요한 교통의 길목이었음을 알려주는 노래이다. 천안은 조선시대 주요 간선도로였던 호남대로와 영남대로의 세 갈래 길 중 하나인 영남우로(嶺南右路)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천안은 근현대시기에 들어서도 1960년대 말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가 생기기 이전까지 내륙교통의 요지였다. 인원의 왕래가 잦은 지역이다보니 조선시대부터 천안에는 숙박을 제공하는 여각(旅閣)과 아울러 외식문화도 발달하였다. 특히 천안에서 영남대로로 갈라지는 지점이면서 유관순 열사의 고향이기도 한 병천장의 ‘병천순대’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도 교통의 요지였던 천안의 지리적 배경과 관계가 깊다.
천안의 명물인 호두과자도 교통의 요지였던 천안의 지리적 이점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천안 호두과자는 1931년 고(故) 조귀금(趙貴金)·심복순(沈福順) 부부가 천안역 근처에 ‘학화호도과자’ 가게를 열고 1934년부터 호두과자를 개발하여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천안시는 20세기 초 철도가 부설된 이후에도 경부선과 호남선 열차가 경유하는 천안역이 들어섰고, 특히 천안이 1922년 부설된 장항선의 시발역(始發驛)이 되면서 근대 이후에도 철도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호두과자는 천안을 경유하는 수많은 기차 여행객들의 간식거리이자 여행선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양과자 가운데 유독 호두를 재료로 만든 과자를 만들었는지가 궁금해진다. 그것은 천안시가 우리나라 호두의 시배지(始培地)이자 호두 산지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떡, 과자, 빵, 죽을 비롯한 다양한 식품과 건강식으로 각광 받는 대표적인 견과류인 호두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재배된 곳이 천안이다. 천안의 호두 시배지는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의 광덕산(廣德山)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충렬왕(1290) 때 몽골어를 잘하여 원나라에 사신으로 자주 왕래하였던 유청신(柳淸臣)이 원나라에서 호두묘목을 가져와 이곳에 심었다고 전한다. 광덕산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했다는 광덕사(廣德寺) 대웅전 입구에 천연기념물 398호 지정 보호수로서 수령(樹齡)이 400년 된 호두나무가 있고, 절 어귀에 세워진 ‘호도전래사적비(胡桃傳來史蹟碑)’는 천안이 호두의 고장임을 알리고 있다. 고려 말에 전래된 천안의 호두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천안을 비롯한 충청도 지방의 주요 농산물이자 국가에 바치는 주요 공물 중 하나였다는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편의 여러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호두의 한자명은 ‘호도(胡桃)’로 ‘오랑캐의 복숭아’라는 뜻을 지닌다. 호두는 중국 한나라 때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가져와서 심기 시작하였는데, 호두를 둘러싸고 있는 녹색의 호두 과육(果肉)이 복숭아와 비슷하게 생겨서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이러한 호두의 유래와 우리나라 호두에 대해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었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호도’라는 시문에서 잘 알려주고 있다.
옛날 장건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을 때 특이한 열매를 얻어서 중국에 심었는데 훗날 사람들이 좋아하여 점차 많아졌다. 그 후 이 열매는 우리나라에도 많이 심었는데, 껍질이 얇고 살이 많아 제기(祭器)를 채우기에 충분하니 마치 옛 성현의 외유내강과 같다. 더군다나 껍질 속에 채워져 있는 보배는 자못 맛이 달다. 아름다운 열매들이 푸른 잎 속에 주렁주렁 달려 있다가 늦가을 바람과 서리에 흔들려 떨어질 때 껍질을 빠져나와 마당에 떨어지는 소리는 가히 즐겁다. 하나를 엄지손가락으로 대강 부수어서 시험 삼아 맛보니 어찌 잣 열매만 맛있다고 하겠는가?(昔年張騫使西戎 得此異果種秦中 後人愛之漸蕃滋 厥後此果盈天東 皮薄肌多可充籩 外剛內柔如古賢 況復珍瓤頗甘美 嘉實離離靑葉裏 秋晚風霜搖落時 脫殼墜庭聲可喜 擘碎麤處試一嘗 松子柏仁那專美)
우리나라의 호두는 김시습의 표현대로 껍질이 얇고 알맹이가 실하며 고소하고 단맛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이는 최근 미국에서 많이 수입되고 있는 캘리포니아산 호두와 맛을 비교해 보아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처럼 달고 고소한 맛을 지닌 천안 호두는 호두과자뿐만 아니라 충청도 지방의 다양한 향토음식으로 만들어 졌다. 그중에 하나가 호두 시배지인 천안 광덕산과도 연관이 깊은 광덕산 호두산채비빔밥이다. 해발 699m의 광덕산은 차령산맥의 주맥에 속한 산으로 고사리ㆍ다래순ㆍ취나물과 같은 산채와 느타리ㆍ석이ㆍ싸리ㆍ표고 등 버섯이 많이 나는 지역이다. 호두산채비빔밥은 광덕산에 자생하는 다양한 산채와 버섯을 볶아 밥에 올리고 다진 호두와 계란지단, 볶은 소고기를 고명으로 얹어 호두기름과 고추장을 곁들여 먹는 향토음식이다.
천안시 광덕면에는 호두산채비빔밥 이외에도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호두를 이용한 향토음식이 발달하였다. 몇 가지를 들자면 물에 불린 율무를 끓이다가 호두를 넣고 끓여낸 ‘호두율무죽’은 노약자의 보양과 환자의 병후 회복에 도움이 되는 음식이다. 호두와 당근, 호박 다진 것을 으깬 두부와 잘 섞어서 만든 소를 호박꽃에 안에 밀가루를 바른 다음 채워서 쪄낸 ‘호두호박꽃만두’는 매우 진기한 음식이다. 또한 곶감의 씨를 꺼낸 다음 호두로 속을 채운 다음 곱게 썰어내는 ‘호두곶감말이’는 곶감의 붉은 색과 호두 흰색이 어우러져 눈으로 보기에도 아름다운 형상을 지닌 음식이다.
충청북도는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맑은 산수를 자랑하여 유독 ‘청풍명월’이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레 붙은 지역이다. 충청북도에서도 청풍명월하면 단양군이 본 고장이다. 예로부터 단양군의 명승지인 ‘단양팔경’ 가운데 제1경 도담삼봉(島潭三峯)은 충청북도를 상징하는 랜드마크인 동시에 옛날부터 충청북도가 청풍명월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얻은 주역이다. 조선 500년 치세의 제도 전반과 문물의 기틀을 만든 주역이었던 조선 창업의 개국공신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의 호도 바로 이 도담삼봉에서 유래한 것이다. 단양군에는 1980년대 충주호 건설로 옛 단양읍이 수몰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단양읍 도전리(道田里)도 정도전이 태어나 성장한 곳이라는 설화가 전한다.
단양군은 지정학적으로 충청북도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단양군의 동쪽으로는 경상북도 영주시, 서쪽으로는 제천시, 남쪽으로는 경상북도 예천군과 문경시, 북쪽으로는 강원도 영월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지리학적으로는 백두대간에서 분기한 소백산맥 자락에 위치한 단양군은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흐르는 남한강이 어우러져 빚어낸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인해 조선시대의 각종 비결(祕訣)에 십승지[十勝之地]의 한 곳으로 꼽힌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예로부터 소백산에서 나는 약초와 산채, 버섯 등은 나라에까지 진상할 정도로 단양군의 주요 특산물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편 단양군 조에는 느타리버섯, 석이버섯 등 버섯 종류와 복령ㆍ당귀ㆍ복신(茯神)ㆍ대왕풀(白芨)ㆍ인삼ㆍ자단향(紫檀香)ㆍ안식향(安息香)ㆍ모향(茅香) 등의 약재가 진상품이었고, 이외에도 산겨자[山芥]ㆍ송이버섯ㆍ신감초(辛甘草) 등을 주요 특산물로 기록하고 있다. 18세기 영조 때 국가에서 편찬한 읍지(邑誌)인 『여지도서(輿地圖書)』 단양현 조에도 당귀ㆍ창출(蒼朮)ㆍ백출(白朮)ㆍ시호(柴胡)ㆍ길경(桔梗, 도라지)ㆍ자초(紫草)ㆍ송이버섯을 단양의 물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수려하고 청정한 산야에서 나는 다양한 산채와 버섯은 단양 사람들의 음식문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중 하나가 소백산산채비빔밥이다.
단양의 소백산산채비빔밥은 소백산에서 채취한 산채를 주재료로 만든 비빔밥으로 밥 위에 고사리ㆍ고비ㆍ더덕ㆍ도라지ㆍ취나물 등의 산채와 표고버섯과 송이버섯 등의 버섯류 등과 함께 시금치나물ㆍ무채나물ㆍ콩나물 등을 얹어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어 비벼먹는 음식이다. 원래는 단양의 산지에서 화전을 일구던 화전민들이 산에서 캔 나물과 버섯 등으로 만든 반찬을 밥에 넣어 먹던 음식이 차츰 비빔밥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30여 년 전 무렵부터 음식상품화가 되면서 단양군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단양군에는 단양팔경을 비롯하여 신라적성비, 온달산성, 고수동굴, 소백산 주목군락지 등 문화유적과 명승지가 많은 지역이다. 그중에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소백산 계곡에는 대한불교천태종의 총본산인 구인사(求仁寺)가 있다. 구인사는 1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법당과 최대 5만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전각을 갖춘 국내 초대형사찰이어서 단양군을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둘러보는 관광코스의 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사찰 초입에는 단양의 다양한 향토음식을 제공하는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구인사의 향토음식점에는 산채정식ㆍ산채비빔밥ㆍ산채도토리묵밥ㆍ산채더덕백반 등 소백산에서 나는 풍부한 산채를 이용한 요리가 다양하다. 그중 소백산산채비빔밥은 대표적인 향토음식 메뉴로 만날 수 있다.
단양군청에서는 2012년 ‘단양채(丹陽彩)’라는 향토음식 BI(Brand Identity)를 개발하였고, 그에 적합한 향토음식점을 선정하였다. 그 가운데 구인사의 장미식당과 금강식당, 단양읍의 영남식당 등은 소백산산채비빔밥을 전문으로 하는 단양채 음식점으로 지정되어 있다. 산채비빔밥에 들어가는 산채, 버섯과 일반 나물류가 일정한 레시피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식당마다 산채와 나물 등을 조합한 고유의 산채비빔밥을 선보이고 있다.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양군은 소백산에서 발원한 죽령천, 단양천, 금곡천 등의 청정하천에서 나는 민물생선으로 만든 향토음식으로도 이름난 곳이다. 특히 단양 쏘가리는 1급수를 자랑하는 단양군의 민물어종이다. 단양 쏘가리매운탕과 쏘가리회는 오래전부터 전국을 누비는 식객ㆍ여행객ㆍ등산객과 낚시꾼 등을 통해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진 향토음식이다. 올갱이해장국도 단양군의 향토음식이다. 올갱이는 다슬기의 충청도지방 방언으로 1급수에만 서식하는 다슬기는 충청북도의 하천이나 호수 전역에 서식하였기 때문에 올갱이해장국은 충청북도를 대표하는 향토음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소백산맥에 바로 위치하여 청정한 자연환경을 유지하고 있는 단양군의 하천에서 채취한 다슬기로 끓인 올갱이해장국을 최고로 친다.
단양군은 충청남도 서산시와 경상북도 의성군과 더불어 우리나라 육쪽마늘의 3대 주산지이기도 하다. 단양군에서는 육쪽마늘을 농산물로 유통할 뿐만 아니라 단양군의 새로운 향토음식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한 음식으로는 마늘떡갈비ㆍ마늘돼지갈비ㆍ마늘돼지갈비찜ㆍ마늘돼지수육ㆍ마늘비빔육회ㆍ마늘찜닭ㆍ마늘더덕주물럭ㆍ마늘정식ㆍ마늘솥밥 등이 단양군의 새로운 향토음식으로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음식들은 얼핏 보면 전국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음식에 마늘 정도 추가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음식에 자기 고장의 특산물인 마늘을 활용하여 향토음식화 하려는 시도는 선현들이 강조하였던 진정한 전통의 계승정신에 부합하는 것이다.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서 공자(孔子)는 “옛것을 익혀서 새롭게 하는 것을 안다면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는 말을 남겼다. 옛것을 제 아무리 잘 알고 정통하여도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통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단순히 추종에 그친다는 말이다. 즉 ‘전통’은 단순히 옛것을 향수(鄕愁)하고 수구(守舊)하는 것을 본연으로 삼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옛날에 화전민들의 일상식 내지 산사(山寺)의 선식(禪食)이었던 음식이 30여 년 전부터 단양군의 향토음식 소백산산채비빔밥으로 발전하였듯이, 지금 단양군의 향토음식문화는 단순히 '과거형'에 머물지 않는 ‘현재완료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전라북도 익산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하면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의 국보 제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益山彌勒寺址石塔)을 들 수 있다. 미륵사지 석탑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탑 중 연대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규모 또한 가장 큰 탑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1915년 석재의 일부가 무너져 내린 탑신(塔身)을 일제가 콘크리트로 보강한 상태로 80여 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흉물스럽게 방치되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비로소 2001년부터 20여 년이 넘는 복원과정을 거쳐 2019년 4월 복원공사를 마쳤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우선 그 엄청난 규모에 압도당하기 마련이다. 엄청난 크기의 화강석을 마치 밀가루 반죽 하듯이 다듬어서 쌓아 올린 석탑은 웅장하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한 자태로 인해, 충청남도 서산시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64호) 석불의 온화한 미소와 함께 백제불교의 진수와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익산시에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같은 엄청난 규모의 석조물이 건축될 수 있었던 요인은 예로부터 익산지역에서 품질이 우수한 화강암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잘 닦여진 도로와 같은 교통망이 발달하지 않았고 대형 운송수단이나 장비도 없었다. 따라서 대형석재와 같이 무거운 건축재는 재료를 현지에서 조달이 가능한 지역에 건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익산지역은 백제시대에 소력지현(所力只縣)이라는 작은 현이었지만 북쪽의 금강(錦江) 건너에 위치한 백제의 수도 사비성[부여시]과 지리적으로 가까웠고, 질 좋은 화강암이 생산되는 산지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미륵사지 석탑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익산시 미륵사지 석탑이 위치한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의 인근 지역은 고대로부터 품질이 좋은 화강암의 산지였다. 석탑이 있는 익산시 금마면과 서북쪽에 위치한 함열읍, 함열읍 동쪽에 위치하고 금마면 북쪽에 있는 낭산읍, 금마면의 서쪽에 위치한 황등면의 세 곳이 그러하다. 이 세 지역은 현재도 화강암 채석장과 석재가공 공장들이 들어서 있어서 석재산업이 활성화되어 지역의 주요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석재공업협동조합의 회원사 정보에 의하면, 황등면에 13개소, 함열읍과 낭산면에는 17개소 등 총 30여 개소의 석재가공공장이 등록되어 있다. 특히 황등면의 최고급 화강암은 ‘황등석’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인기가 있어서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천안의 독립기념관, 청와대 영빈관 등이 모두 황등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본래 석재가공업은 채석장에서 가공 공장에 이르기까지 천공(穿孔)ㆍ발파ㆍ절단ㆍ운반ㆍ할석(割石)ㆍ표면처리ㆍ조각 등의 여러 공정마다 발생되는 돌먼지와 파편으로 인해 만성폐쇄성폐질환이라는 직업병에 노출되기도 한다. 그래서 속방(俗方)이기는 하지만 먼지를 많이 마시는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돼지고기와 같이 기름기가 많은 음식을 먹으면 몸속의 먼지를 기름기가 제거하여 좋다는 속설이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돌먼지가 날리는 황등면 채석장의 석부와 가공 공장의 석공들을 위한 별미가 이 지역의 향토음식으로 전하고 있다. 일반에는 육회비빔밥으로 더 알려진 황등비빔밥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은 건설경기가 많이 위축되어 예전에 비해 생산량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황등면은 한때 석재 가공 공장이 150여 개소가 넘을 정도로 경기가 좋은 곳이었다. 경기가 좋으면 사람이 모여들기 마련이고, 사람이 모이면 장이 들어서고, 장이 들어서면 식당이 생긴다. 식당이 들어서면 여러 가지 음식도 선보이게 마련이다. 황등면은 지형의 대부분이 평지여서 기름진 논과 우시장이 있어서 좋은 쌀과 소고기를 구할 수 있었다. 또한 인근에는 농수산물이 풍부하게 나는 김제와 군산이 있어 다양한 식재료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과 일제강점기 때부터 품질이 좋은 화강암의 생산지로 경기가 좋았던 황등면의 사회적 배경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음식이 황등비빔밥이다.
비빔밥은 2006년 당시 문화관광부에서 선정한 ‘100대 민족문화상징’에 선정될 정도로 전국적인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은 식품이다. 또한 국내 모 항공사에서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제공하면서 외국인들에게 선풍을 일으켰고, 현재는 음식한류의 주요 콘텐츠로 세계의 호평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비빔밥의 대표로는 전주비빔밥과 진주비빔밥이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한 까닭에 일반적으로 ‘육회비빔밥’으로 더 알려진 황등비빔밥은 앞서 두 비빔밥의 아류내지 파생음식으로 이해하기가 쉽다.
우리나라 전통향토음식과 관련한 데이터베이스를 방대하게 구축하고 있는 농촌진흥청에서 2010년 발간한 『전통향토음식 용어사전』의 황등비빔밥 항목에는 황등비빔밥이 전라북도의 향토음식이고 “육회비빔밥이라고도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육회비빔밥 항목에는 ‘황등비빔밥 참조’로 처리되어 있다. 단연코 육회비빔밥은 다른 비빔밥에서 파생되지 않은 독자적인 음식이며 익산시 황등면이 원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황등비빔밥은 우선 조리법에서 다른 비빔밥과는 차별되는 특징을 지닌 음식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조리법을 살펴보면 먼저 돼지뼈에 고추씨를 넣고 삶아낸 육수에 무와 선지 등을 넣고 선짓국을 끓여 놓는다. 선짓국은 황등비빔밥에 곁들여 내는 국물이다. 밥에 부추와 콩나물을 얹은 뒤 육수에 토렴을 한 후 고춧가루ㆍ고추장ㆍ깨소금ㆍ참기름 등을 넣고 비벼 둔다. 육회용 소고기는 다진 마늘ㆍ다진 파ㆍ고추장ㆍ깨소금ㆍ참기름 등 양념으로 무친다. 기름을 두른 그릇에 비벼 놓은 밥을 담고, 그 위에 김ㆍ당근ㆍ무채ㆍ상추와 육회를 올린 뒤 그릇을 뜨겁게 달궈서 선짓국과 함께 낸다.
조리과정에서 황등비빔밥의 특징은 쌀밥에 고명들을 얹어내는 다른 비빔밥과는 다르게 쌀밥을 육수에 토렴한 다음 밑간으로 미리 비벼서 준비한다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푸짐한 소고기 육회의 양이다. 진주비빔밥이나 전주비빔밥에도 고명으로 육회를 사용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칠보화반(七寶花盤)’이라는 명칭을 지니고 있는 진주비빔밥의 경우, 육회는 그저 밥에 올리는 고사리ㆍ무나물ㆍ돌김ㆍ숙주나물ㆍ청포묵 등의 비빔재료 중 하나에 불과하다. 전주비빔밥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황등비빔밥은 미리 비벼 놓은 밥 위에 올리는 고명은 양에 있어서도 그렇고 소고기 육회가 거의 전부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황등비빔밥은 음식의 유래에서도 다른 비빔밥과 차이가 있다. 전주비빔밥이나 진주비빔밥은 오래전부터 해당지역에서 만들어 먹던 향토음식이 현대시기에 들어 상품화가 이루어졌고, 지방자치단체 혹은 정부의 마케팅에 힘입어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그 반면에 황등비빔밥은 애초부터 음식상품으로 개발된 음식이고, 그 시기 또한 80여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음식이다. 전라북도 익산시 황등면 황등리에는 황등비빔밥을 전문으로 하는 '진미식당'이라는 노포(老鋪)가 있다. 1936년 무렵부터 황등비빔밥을 처음 만들어 팔기 시작한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80여 년이 넘는 세월을 3대에 걸쳐 명맥을 계승하고 있다.
전라북도 전주시는 현재 전라북도의 도청소재지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통괄하는 전라관찰사의 감영 소재지였고, 읍(邑)의 등급도 높아서 외관직(外官職)에서는 가장 높은 종2품 부윤(府尹)이 주재하는 읍치(邑治)였다. 또한 전주는 조선 왕실의 성씨인 이씨의 본관이어서 1410년(태종 10)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어용전(御容殿)이 세워졌다가 후에 이름이 바뀐 경기전(慶基殿)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전라도 지역의 행정과 경제 중심지였던 전주부에는 전라도 일원의 물산과 조세가 집하되다보니 장시도 발달하였다. 조선시대 전주성 안에는 1개의 장시(場市)와 네 개의 성문 밖에는 각기 1개씩의 외장(外場)이 설치되어 전라도 각지에서 올라온 물산과 인원이 모이는 물류의 중심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유동인구가 많고 경제활동이 활발한 지역일수록 다양한 음식과 외식문화가 발달하기 마련이다.
전주는 조선시대 전라도 지방의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천혜의 지리적 환경까지 갖추어서 예로부터 품질이 우수한 농산물이 많이 나는 지역이었다. 특히 교동의 콩나물과 황포묵, 기린봉 일대의 열무, 삼례의 무, 서낭골의 파라시(감), 화산동 고개 너머 미나리, 소양의 서초(담배), 신풍리의 애호박, 한내의 게, 한내와 남천의 모래무지 등은 ‘전주 10미(味)’로 유명하였다. 이러한 재료들에 전라도의 깊은 장맛과 손맛이 어우러져 다양한 음식이 발달하였다.
전주의 다양한 향토음식 중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단연코 전주비빔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주비빔밥은 개성의 탕반, 평양의 냉면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음식 중 하나로 꼽혔다. 또한 진주비빔밥, 해주비빔밥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비빔밥으로도 유명한 음식이었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전주비빔밥은 2006년 문화관광부의 ‘대한민국 100대 민족문화 상징’ 가운데 음식 항목으로 지정된 김치, 떡, 비빔밥, 고추장, 된장과 청국장, 삼계탕, 불고기, 소주와 막걸리, 냉면, 김밥, 라면 등 11개 항목에서 우리의 주식인 밥에 해당하는 음식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되기도 하였다.
전주비빔밥은 1960년대 전주의 비빔밥 식당이 서울로 진출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고, 1980년대에 들어서는 전국적인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1990년대 이후에는 전주비빔밥이 해외에 알려지게 되었고, 1990년대 말 이후로는 전주비빔밥이 일본을 비롯하여 해외로 직접 진출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의 한 가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전주비빔밥이 미국의 대통령부터 세계적인 배우까지 각계 유명인사의 입맛을 사로잡았다는 기사는 비일비재하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지금은 고인이 된 미국의 팝 가수 마이클 잭슨과 전주비빔밥의 일화이다. 마이클 잭슨은 1997년 11월 19일 전라북도 무주와 전주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전주에서 처음 먹어 본 전주비빔밥의 맛에 단번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물론 매운 것을 먹지 못해 고추장 대신에 간장으로 비벼 먹었다. 이후로 마이클 잭슨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투숙하는 호텔에 특별히 부탁하여 전주비빔밥을 먹었고, 해당 호텔에서는 내친김에 ‘마이클 잭슨 비빔밥’이라는 상품을 개발하여 특수를 누렸다고 한다.
전주비빔밥의 가장 큰 특징은 30여 가지에 이르는 다양한 재료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어 음악으로 따지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교향곡과 같은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재료가 다양하면서도 혼잡하게 섞이지 않고 흰색(도라지, 더덕, 무, 밤, 쌀밥), 파란색(시금치, 오이, 호박), 붉은색(고추장, 당근, 불고기), 검정색(고사리, 다시마, 표고버섯), 노란색(은행, 콩나물, 황백지단, 황포묵) 등 하늘을 상징하는 황색과 동서남북과 사계절을 상징하는 나머지 네 가지색의 오방색이 조화를 이룬다.
전통시대의 양반은 음식도 격식을 갖추어 먹었던 탓에 음식을 한데 섞어 먹는 것은 이른바 상놈들이나 먹는 음식으로 여겼다. 예컨대 대구광역시의 향토음식인 소고기 육개장도 원래는 밥과 국을 한데 말아서 내는 ‘국밥’ 형태였다. 그러나 국밥을 장터에서 장돌뱅이나 상놈들이 먹는 음식으로 여겼던 경상도 양반의 체면을 고려하여 ‘따로 국밥’이라는 차림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런데 전주비빔밥은 다양한 재료를 한데 섞어 먹는 음식인데도 불구하고 양반들의 식도락으로 선호되었다. 그 이유는 우주만물의 변화를 의미하는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이 비빔밥에 올린 갖가지 고명이 다섯 가지 색으로 정갈하게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전주비빔밥의 또 다른 특징은 놋그릇을 사용하는 데 있다. 최근에는 돌솥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예로부터 고급식기에 속했던 놋그릇은 음식이 잘 식지 않고 놋에 들어있는 금속성분은 음식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는 항균효과가 탁월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전주비빔밥은 밥을 지을 때 소대가리를 고은 육수를 밥물로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육수를 사용하면 밥알이 서로 달라붙지 않아 밥이 잘 비벼지며 밥에 윤기가 난다고 한다. 경상남도의 진주비빔밥도 밥을 지을 때 육수를 사용하는데 양지머리를 재료로 쓰는 점이 다르다.
비빔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궁중음식 유래설, 농번기 음식설, 동학혁명설, 묵은 음식 처리설, 제사 음복설, 몽진(蒙塵)음식설 등 실로 다양하다. 그중 제사 음복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경상도 지방의 안동과 진주는 각기 유명 성씨와 명문 반가들이 많은 지역으로 제사가 많아서 제사음식을 음복하는 제사문화에서 ‘헛제삿밥’과 같은 음식이 파생되었고 헛제삿밥이 비빔밥의 원형이 되었다는 설이다. 전주비빔밥의 경우에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전주지역에서 일손이 바쁜 농번기의 음식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동학혁명 때 동학군들이 밥을 빨리 먹기 위해서 개발되었다는 설이 있었다. 한편 1990년대 이후 전주비빔밥이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궁중음식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비빔밥의 명칭은 ‘골동반(汨董飯)’이었다. 골동반은 ‘여러 가지를 한데 섞어 비빈 밥’이라는 뜻으로 궁중에서는 ‘골동반(骨董飯)’이라고도 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통 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 골동반(汨董飯)의 표기와 함께 처음으로 한글로 ‘부븸밥’이라는 명칭이 등장하였다. 근대에 들어서는 1939년에 발간된 근대 조리서인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에 ‘부빔밥’으로 표기되었고, 현재에 이르러 ‘비빔밥’으로 정착되었다.
동백꽃으로 붉던 우도가 그립다. 가슴 휑하게 맑은 날이면 우도의 진정한 해초비빔밥과 보랏빛 군소가 생각난다.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1시간 남짓한 우도로 곧장 가는 배는 하루 세 번 있다. 그러나 우도를 제대로 즐기려면 연하도에서 우도로 가는 배를 타야 한다. 연하도에서 반하도, 우도를 연결한 다리를 건너기 위함이다.
2018년 6월 준공한 이 다리(309m)는 차가 다닐 수 없는 보도교이다. 배가 운항하는 날은 주로 맑은 날이기 때문에 우도로 향하는 길은 늘 푸르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반하도를 반 바퀴 돌면 신비한 동백나무 숲과 만날 수 있다. 촘촘히 선 나무들이 하늘과 바다를 가리고 있어 몹시 어둡다. 우도에는 동백나무가 가장 많은데, 섬 동쪽의 용강정 주변에는 200년 넘은 동백나무들도 있다. 붉은 동백을 머리에 이고 간지러운 동백향에 취해 걷다 보면 아랫마을에 도달한다.
우도에 단 하나뿐인 송동호민박. 마당에서 청각을 북북 빨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아침에 청각을 바다에서 가져왔는데 이렇게 빨아서 무쳐 먹어도 좋고 고추장을 찍어 먹어도 맛있다고 한다.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인아주머니(강남연 여, 54세)는 벌써 상을 차려놓았다. 해초비빔밥은 그날그날 바다에서 채취해 오는 것을 사용하기 때문에 예약을 해야 한다.
오늘은 모자반, 까시리, 서실, 미역, 톳 5가지를 준비했고 여기 멍게 하고 미역을 섞어 비빔밥으로 드시면 돼. 여 전갱이는 쫄깃하고 다른 데하고 달라. 더 맛있어.
아주머니는 손님이 오는 이른 아침이면 바다에 나가 해초와 거북손, 따개비, 홍합 등을 채취한다. 해초는 형형색색으로 푸짐하고 전갱이는 노릇하게 구워졌다. 옆에는 거북손과 알 굵은 따개비, 못난이 홍합, 고둥이 한 바구니 있다. 해초부침개와 청각나물, 삭은 고추절임, 파래김국, 몇 가지의 산나물 등 정성이 가득하다.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어 시아버지의 병환으로 남편을 따라 섬으로 들어왔다. 마음 착한 며느리는 물때가 언제인지, 굴을 따러 바다에 나가서는 어느 것이 바위인지 굴인지도 몰랐다.
법꿀(석화)은 사철 나는데 시집와서 맨 처음에는 바위인지 굴인지 모르고 그랬다. 나중에는 호미 가지고 요래 때려보면은 소리가 난다. 통통통 소리가 나면 얘는 굴이구나, 탕탕 튀고 하면은 얘는 돌이구나 하고 알지. 그 굴 하나 따려며는 엄청 힘이 든다. 그게 5년 걸렸다.
그녀는 어딘가로 들어가더니 군소가 든 작은 냄비를 가져온다. 봄에 채취했던 통통한 군소를 삶아 얼려놓았다가 좋은 손님에게 조금씩 대접한다. 검은 가죽에 금빛 가루를 점점이 뿌린 군소의 등은 생각보다 부드럽다.
이게 귀한 손님 올 때만 내준다. 몬 생겼어도 향이 좋다. 이게 해녀들한테는 마리당에 얼마씩 판다. 엄청 비싸. 이게 약이니까 좋다. 여 먹으봐라. 여 알이 기어 다니며 알을 쏴. 국수 말아 논 거처럼 해초에 쏴 놓는 거야. 그 알을 몸에 머물고 있을 때 삶으며는 계란 노른자같이 나와. 봄 되면 있더라고. 항상 내장을 빼 삶는다. 군소가 귀가 있제? 그게 잡을라 치면 보라색 물을 쏘면서 도망을 간다. 꼭꼭 씹어서 우물우물 꼴딱해. 하나 다 먹어. 이거는 야채 놓고 막 무쳐 먹으면 또 맛있다.
필자는 바다토끼라는 귀한 군소를 떠끔떠끔 받아먹었다. 씹을수록 쫀득하고 낮은 솔향이 난다. 다음은 다섯 가지 해초에 멍게를 한 숟가락 올려 고추장에 비벼 본다. 해초가 입안에서 이리저리 뛰어놀고 멍게의 향은 숨을 쉴 때마다 코에서 역류한다. 역시 맛의 해답은 청정한 자연인가. 아주머니는 날이 좋으니 바다로 나가자 한다. 뜻하지 않은 호강에 신이 나 그 뒤를 따라나섰다.
주인아저씨(김강춘 남, 58세)의 배는 멀둥나래(작은 방파제)에 정박해 있다. 부부는 우도에서 가장 젊다. 현재 인구가 25명인데, 70대 이상의 노인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부부의 일과 중 하나가 마을 노인들의 안녕을 확인하는 것이다. 한때 농사를 짓지 않아도 돈벌이가 좋아 돈섬이라고 불린 적도 있었다. 그때에는 아저씨의 동급생이 28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바다에서 나는 것은 다 있다는 너른 바위에는 거북손과 따개비, 고둥이 바위틈 사이에 겹겹이 붙었다. 거북손을 캐고 해초류를 따는 아주머니는 마치 산에서 나물을 뜯듯 똑똑 따낸다. 비탈진 바위에서 발을 내딛지 못하고 벌벌 떠는 필자와 달리 경사진 바위를 성큼성큼 다닌다. 이미 삶이 되어버렸다는 뜻이겠지. 잡은 따개비를 칼로 긁어 입에 넣어준다. 너무 짜다. 이맛살을 찌푸리자 달처럼 웃는다.
이게 지금은 짭조름하지. 씹을수록 더 짜다. 그지? 이게 전복하고 똑같다. 알도 이리 크다. 따개비가 꼬들꼬들해. 들척지근한 게. 지금 프라이팬만 있으면 살짝살짝 볶아서 보글보글 끓이고 술만 가져오면 자연히 안주다. 거북손도 냄비 앉혀 놓고 먹는 기다.
정말 어떤 날 이곳에 와서 그리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십 넘은 노모는 이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며느리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며느리의 음식이 세상 최고라고 자랑한다. 다음에는 오돌도돌 따개비밥을 해 준다며 다시 오라고 손을 흔드는 부부의 마음에 필자도 손을 크게 흔들어 답했다. 또 오겠노라고.
비빔밥은 흰밥에 고기볶음·나물·양념장 등을 넣고 비벼 먹는 음식이다. 비빔밥은 오랜 옛날부터 존재했던 음식으로 생각되는데, 비빔밥의 기원을 안동의 헛제사밥처럼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들을 밥과 섞어 먹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비빔밥은 순우리말로 표기한 것이고 한자어로는 ‘골동반(骨董飯)’,‘혼돈반(混沌飯)’, ‘비빔’이라는 소리를 살려 ‘부비반(捊排飯)’ 등으로 기록하였다. ‘혼돈반’이라는 한자표기 기록이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의 『기재잡기(寄齋雜記)』 에 나오는 점에서 이미 17세기 초에는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1800년대가 되면 비빔밥을 의미하는 한자 ‘骨董飯’과 함께 한글을 병기한 문헌들이 등장한다. 이때 한글 표기는 뷔음, 부뷔음, 뷔음밥, 부빔밥, 부븸밥, 부뷘밥, 부뷔엄밥, 부뷔음방, 비빔밥 등으로 다양하다. 연구자들은 19세기 말의 『시의전서』에 처음으로 비빔밥에 해당하는 ‘부븸밥’이 등장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1810년의 『몽유편(蒙喩篇)』에 비빔밥을 뜻하는 한자어 ‘骨董飯’과 함께 한글 표기로 ‘뷔음’이 사용되었다. 『몽유편』은 『시의전서』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것이다.
1800년말의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비빔밥 만드는 법이 나오는데, 비비는 반찬으로 볶은 고기, 볶은 나물, 다시마 튀각 등이 있다. 양념은 고춧가루, 깨소금, 참기름이었다. 달걀도 부쳐 썰어 얹고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서 구슬만 하게 빚은 다음 가루를 약간 묻히고 달걀을 씌워 부쳐 밥에 얹는다. 비빔밥 상에 장국을 내놓는다고 하였다. 일제시대의 음식조리서인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법』등에도 다시마 튀각을 부수어 넣고 계란을 흰자와 노른자 나누어 고명을 부쳐서 올리라고 되어 있어 『시의전서』의 조리법과 비슷하다.(이상 정경란, 「비빔밥의 역사」,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15(11), 2015.) 비빔밥은 조선후기부터 음식점에서 파는 외식메뉴였다.
일제시대 유명한 비빔밥으로 『별건곤』잡지는 진주(晉州)비빔밥을 거론하고 있다.
맛나고 갑 헐한 진주(晋州)비빔밥은 서울비빔밥과 갓치 큰 고기졈을 그냥 노흔 것과 콩나물 발이 셋치나 되는 것을 넝쿨지게 노흔 것과는 도져히 비길 수 업슴니다. 하-얀 쌀밥 우에 색을 조화시켜서 날늘듯한 새파란 야채 엽헤는 고사리나물 또 엽헤는 노르스름한 슉쥬나물 이러한 방법으로 가지각색 나물을 둘녀노흔 다음에 고기를 잘게 닉여 끄린 장국을 붓어 비비기에 젹당할만큼 그우에는 유리됴각갓흔 누런 쳥표 서느 사슬을 노흔 다음 엽헤 육회를 곱게 썰어놋코 입맛이 깩금한 고추장을 조곰 언슴니다. 여긔에 니러나는 향취는 사람의 코를 찌를 뿐 안이라 보기에 먹음직함니다. 갑도 단돈 10전(錢). 상하 계급을 물론하고 쉽게 배곱흠을 면할 수 잇는 것임니다. 이럿 소담하고 비위에 맞는 비빔밥으로 길녀진 진주(晋州)의 젊은이들은 미술의 재질이 만흔 것임니다. 또한 의기(義氣)의 열열(烈烈)한 XX졍신을 길너주는 것임니다.’
(「별건곤」 제24호, 1929)
『별건곤』의 이 기사를 보면 1920년대 서울에도 비빔밥이 판매되었고 진주비빔밥처럼 육회와 채소를 밥에 넣었는데 육회는 큰 고깃덩어리로, 채소는 콩나물을 긴 줄기채로 넝쿨지게 밥에 넣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비빔밥은 음식점의 메뉴중 하나였으므로 전국 도시의 음식점에서는 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25년 간행된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해주의 명물로 해주교반(海州交飯)을 언급하는데 세속에서 골동반 즉 비빔밥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고 맛을 내는 것이 아주 좋아서 감히 기이한 음식이라고 칭한다고 하였다.
『동아일보』1938.10.04. 「기산영수의 향기 탄 함평소주에 비빔밥」이라는 기사에서는 ‘잠간 함평에 와서 일을 보고 오후에 가는 이가 점심을 먹게 되면 대개는 만히 잇는 비빔밥집이니 그 곳에 들어가 십오전짜리 비빔밥 한 그릇에 보통 주량을 가진 이면 소주 두잔만 마시면 바로 목에 넘겨버리기도 아가울만한 싼듯하고 깊은 맛있는 비빔밥, 그 구수하고 향기난 소주, 이러기에 함평 시장 날이면 외촌에 사는 분들이나 근읍에 계신 이들은 시장에 와서 비빔밥에 소주만 먹고가는 예도 적지안하며 ...’라고 하였다. 함평 비빔밥과 소주가 기막힌 조합을 이룬다는 것이다.
음식점에서 비빔밥은 냉면이나 장국밥, 대구탕반과 같이 20전에 판매되었는데 1930년 11월 곡가가 폭락하면서 조선총독부의 음식값 인하 정책에 의해 15전으로 내리기도 했다. 비빔밥은 일제 강점기 음식점이 활성화되고 신문 등 매체가 발전하면서, 각 지역의 생산물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띤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전주비빔밥이 유명한데 매년 가을 '전주비빔밥축제'가 열린다.
진주비빔밥은 우리나라 전통음식 중 오랜 세월에 걸쳐 그 명맥을 이어온 경상남도 진주시의 명물로 진주냉면, 진주 헛제삿밥, 교방 상차림 등과 더불어 ‘진주4미’의 하나로 손꼽히는 음식이다. 진주비빔밥에는 ‘칠보화반(七寶花盤)’이라는 별칭이 있다. 한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일곱 가지 보배스러운 꽃과 같은 밥”으로 새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명칭이 붙은 것은 황동색의 놋그릇에 담은 흰 쌀밥에 고사리, 무나물, 돌김, 숙주나물, 청포묵 등을 가지런하게 담고 그 위에 육회와 고추장을 얹어낸 모양에서 유래하였다.
비빔밥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고유한 전통음식으로 현재는 음식한류를 주도하고 있는 식품이다. 그렇다면 비빔밥이 언제부터 우리 음식문화로 정착되었는지 궁금해진다. 과연 언제부터 비롯되었을까. 우선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조선전기의 야사(野史)를 모아 엮은 『기재잡기(寄齋雜記)』에서 비빔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세조 때 권력가였던 홍윤성(洪允成, 1425~1475)이 손님에게 ‘혼돈반(混沌飯)’을 대접한 내용이 확인된다.
밥 한 그릇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으니 세상에서 이른바 혼돈반이라고 부르는 음식과 같다
(遂以飯一盆 襍以魚菜 如俗所謂混沌飯)
적어도 15세기 무렵에는 음식이름을 가진 비빔밥 문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숙종~영조 때의 문신이었던 권상일(權相一)의 『청대일기(淸臺日記)』에는 경종(景宗)에게 ‘골동반(汨董飯)’을 올렸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저자 이익(李瀷)은 「물에 말은 밥(澆饡)」이라는 시에서 “나는 골동이 물리거나 싫증나지 않는다”고 하여 ‘골동(骨董)’을 언급하고 있다. 고종 때 사람인 지규식(池圭植)의 『하재일기(荷齋日記)』에는 ‘골동반(骨董飯)’과 막걸리를 먹었다는 내용이 있다.
19세기 후반에는 비빔밥이 서민들도 즐겨 먹는 음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구한말의 언론인이었던 장지연(張志淵)은 「절음식(節飮食)」이라는 글에서 삼삼오오 떼를 지어 남의 제삿집에 가서 골동반을 억지로 달라고 하여 먹는 그릇된 풍습을 비판하고 있다. 이상의 옛 문헌을 정리하면 비빔밥은 조선전기부터 이미 ‘혼돈반’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던 음식이며, 조선 후기에는 골동(骨董)·골동반(骨董飯)·골동반(汨董飯)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빔밥의 한글 명칭은 1800년대 말의 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 ‘부븸밥(汨蕫飯)’으로 기록되었고, 1939년 발간된 『조선요리제법』에는 ‘부빔밥’으로 표기되었다가 현재의 비빔밥에 이르고 있다.
비빔밥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면 당연히 진주비빔밥의 역사가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경상남도 진주시에는 진주비빔밥에 관한 두 가지의 유래가 전한다. 그 하나는 진주성 전투 유래설이다. 일본은 1592년 11월 1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듬해인 1593년 6월 일본은 전년의 패배를 설욕하고 전라도로 향하는 진로를 개척하기 위해 10만의 병력을 동원해 진주성을 재차 공략하였다. 이때 치열한 공방전이 연일 계속되어 병사들이 자리를 비울 수 없게 되자 부녀자들이 밥을 지어 날랐다. 하지만 밥과 반찬을 따로 마련하기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밥에 나물을 얹어 제공한데서 진주비빔밥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제사음식설이다. 제사를 마친 후 제사음식을 한데 모아 넣고 비벼서 나누어 음복한데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의기(義妓) 논개를 기리기 위해 매년 음력 6월 진주의 기생들이 지내던 의암별제(義巖別祭)의 음복음식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 관계로 확증할 수는 없지만 임진왜란 이전에 ‘혼돈반’과 같이 밥에 반찬을 비벼먹는 음식문화가 존재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임진왜란이라는 시기를 공통분모로 삼고 있는 두 가지 유래설이 단순히 설(說)에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진주비빔밥의 특징은 전주비빔밥과의 비교를 통해 명료하게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밥을 지을 때 진주비빔밥은 ‘사골국물’, 전주비빔밥은 ‘소머리국물’을 사용한다. 둘째, 진주비빔밥은 ‘숙주나물’, 전주비빔밥은 ‘콩나물’을 쓴다. 셋째, 비빔밥과 함께 내는 국의 경우 진주비빔밥은 ‘선짓국’, 전주비빔밥은 ‘콩나물국’을 낸다. 넷째, 진주비빔밥에서는 계란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에 소고기육회를 올리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진주비빔밥은 ‘육회비빔밥’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에 비해 전주비빔밥은 황백지단을 쓸 뿐 아니라 비빔밥 위에 계란 노른자를 올린다. 다섯째, 진주비빔밥만의 특징으로는 바지락으로 끓인 ‘보탕국’을 비빔밥에 넣어 비벼 먹는다. 비빔장은 ‘엿꼬장’을 쓰는데 고추장에 물엿과 황설탕 등을 첨가하여 만든 장을 말한다.
경상남도 진주시 대안동 촉석로 207번길 3에 위치한 천황식당은 1927년 개업한 이래 3대째 진주비빔밥의 명성을 이어온 명가로서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한식진흥원에서 ‘오래된 한식당’으로 지정한 곳이기도 하다.
쌀, 물, 숙주, 시금치, 애호박, 고사리, 도라지, 소고기, 청포묵, 김, 무, 잣, 엿꼬장, 국간장, 깨소금, 참기름
조리과정바다에 봄에 왔음을 알리는 붉은 꽃 같은 멍게의 표준어는 '우렁쉥이'였다. 멍게는 본래 방언이었지만 표준어인 우렁쉥이 보다 실생활에서 친숙하게 사용되자 멍게와 우렁쉥이 모두 표준어로 정하게 되었다. 4월에서 6월에 제철인 멍게는 붉고 우툴두툴한 껍질을 벗기면 오렌지색의 탱글한 속살이 나온다. 이 속살을 입에 넣으면 멍게 특유의 향과 알싸하면서도 달큰한 맛이 어우러진다. 멍게는 우리나라 전 연안에 서식하고 있지만 1980년대 후반 양식업의 발달로 보급이 확대되었다.
멍게 양식업이 발달한 경상남도 거제에서는 멍게를 이용한 비빔밥이 유명하다. 거제의 멍게비빔밥은 생 멍게 살을 재료로 사용하지 않는다. 먼저 제철에 잡은 멍게 살을 잘게 다져 양념을 한 후 저온에서 숙성시키는 방법으로 멍게젓을 담근다. 숙성된 멍게젓을 냉장고에서 살짝 얼린 다음 네모꼴로 썰어 밥과 함께 참기름, 김 가루, 깨소금 등을 가미해 비벼먹는 ‘멍게 젓갈’ 비빔밥이 바로 거제의 향토음식인 멍게 비빔밥이다. 멍게비빔밥은 멍게 젓에 양념이 배어 있어 고추장을 넣지 않고 먹는 것이 멍게 본연의 향과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멍게에는 타우린 성분이 있어 노화를 방지하고 숙취해소에 도움을 주는 신티올 성분도 함유되어 있다. 또한 인슐린 분비를 촉진시켜 당뇨병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
멍게, 소금, 다진 마늘, 고춧가루, 생강, 통깨, 참기름, 김가루
조리과정진주시는 경상남도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경남의 역사·문화·예술·교육 등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이러한 진주시를 대표하는 전통시장은 1844년 개설된 진주중앙유등시장으로 진주시청을 비롯하여 교육·금융·의료시설 등의 주요 시설들이 밀집되어 있는 진주시 대안동에 자리 잡고 있다. 진주중앙유등시장은 상설시장이며, 매월 2일과 7일 오일장도 열린다. 상설시장에는 975개의 점포에서 1374명의 상인들이 종사하며, 장날이면 500여 개의 노점이 조성된다. 주요 거래품목은 농·수·축산물 및 가공용품, 음식점, 의류, 잡화 등 다양한 물품이며, 특히 의류와 음식점이 특화되어 있다. 시장 내에는 한복거리와 숙녀복거리가 있고, 먹자골목과 활어시장도 조성되어 있다.
진주중앙유등시장의 형성은 1884년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보부상들이 진주상무사(晋州商務社)를 조직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는 매월 2일과 7일 열리는 오일장 형태로 운영되다가 일제강점기에 시장규칙에 따라 공설시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1937년 일본에 의해 ‘진주시장 진흥회’로 되었다가 해방이 된 이후 ‘진주중앙시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시장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6년 1월 대화재로 모든 점포가 전소되고, 1967년 시장의 건물을 다시 만들면서부터다. 진주중앙시장이 현재의 이름으로 바뀐 것은 2011년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되면서 지역의 대표 축제인 ‘진주남강유등축제’와 연계하기 위해서였다.
진주남강유등축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에서 풍등을 통신수단으로 이용한 것에서 착안해 만들어진 축제이다. 이 축제는 진주성대첩을 기억하기 위해 2000년에 시작되었으며, 매년 10월 남강과 진주성에서 열린다. 축제의 주요 행사는 소망 등달기, 유등띄우기, 창작 등만들기, 한국의 등 및 세계등 전시, 각종 전시 및 체험행사 등으로 매년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국내 최고의 축제이다.
진주하면 떠오르는 대표음식은 진주비빔밥과 진주냉면으로 모두 진주중앙유등시장에서 맛볼 수 있다. 진주비빔밥은 일곱 색깔 꽃밥인 ‘칠보화반(七寶花飯)’이라고도 불린다. 기름을 걷어낸 쇠머리를 우려낸 국물에 밥을 짓고, 밥 위는 숙주, 고추, 근대나물 등을 얹어 만든다. 한편 진주냉면은 평양냉면과 함께 예전부터 유명한 음식이다. 진주냉면의 면은 메밀로만 만들고, 김장배추김치, 배, 오이, 육수용 쇠고기, 쇠고기육전, 계란 노른자 지단 등의 고명을 냉면 위에 얹는다. 또한 육수는 멸치, 바지락, 건홍합, 마른 명태 등 해산물에다 표고버섯을 넣어 끓여낸다는 점이 특징이다.
흔히 추석을 기준으로 숫게의 철이 지나고, 암꽃게의 철이 온다고 한다. 달이 차오르는 신비한 자연의 이치와 함께 암꽃게의 살도 차기 시작한다. 바다생물이 살을 찌우는 그 시간에 말똥성게 또한 알이 찬다. 일반적으로 성게 알은 일상식에서 쉽게 만나지 못한다. 마음먹고 초밥집이나 일식요릿집을 들러야만 맛볼 수 있기에 성게알보다는 일본말 ‘우니’가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부산은 다르다. 바다의 도시 부산에서는 가을이 되면 앙장구밥이라는 독특한 음식이 식탁에 올라온다. 앙장구는 부산에서 말똥성게를 부르는 이름이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성게들을 손질하면 주황빛 말똥성게 알이 한가득하다. 이를 큰 대접에 넣고 밥과 김가루를 뿌려 참기름에 쓱쓱 비벼 먹는 것이 앙장구밥이다.
반찬과 밥을 한 그릇에 모두 섞어 비벼 먹는 비빔밥 문화는 사실 조상제사를 지내고 나서 남은 찬거리를 한 그릇에 담아 비벼 먹는 것에서 유래됐다. 오색 찬란하게 꾸며낸 제사음식을 다 함께 섞어 먹음으로써 제사를 지낸 사람들 모두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조상의 덕을 고루 받는다는 공평 배분의 정신이 녹아있는 것이다. 또한 비빔밥 문화는 해당 지역의 특색을 담고 있다.
전주산 황포묵이 들어간 전주비빔밥부터, 강원 영월의 산나물이 듬뿍 들어간 산채 비빔밥, 진주 우시장이 있어 육회가 올라간 진주 비빔밥까지 비빔밥에 들어간 재료를 보면 지역의 색깔이 뚜렷하게 들어가 있다. 말똥성게의 알이 주재료로 들어가는 앙장구 밥은 말똥성게 비빔밥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부산의 색깔을 잘 담아낸 부산의 비빔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쌀밥과 성게알이 섞인 콜라보레이션은 육지의 비빔밥을 넘어 바다와 육지의 만남이다. 내륙에서는 쉽게 구경조차 못 할 귀한 성게알이 하얀 밥 위를 샛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참깨와 김가루를 뿌려 조화를 만들어주면 육지와 바다가 만난다. 고소하니 바다향 물씬 나는 앙장구밥은 맑은 미역국과 조합이 좋으니 꼭 먹어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