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뼈국물과 돼지수육이 어우러진 깊은 맛, 밀양 무안돼지국밥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쌀을 비롯한 곡물을 껍질을 벗겨 통으로 익힌 밥을 주식으로 삼았다. 아무런 가공도 하지 않은 채 전분 덩어리를 끓여서 익힌 밥은 그 자체로는 별다른 맛도 없고 그 자체로만 먹기에도 다소 거북하다. 쌀은 그나마 양반에 속하고 예전에 조상들이 주곡(主穀)으로 많이 이용했던 메밀이나 조, 기장과 같은 곡물은 거칠어서 더욱 불편했다. 따라서 우리 전통음식문화는 자연스레 국과 김치를 비롯한 반찬이 발달하였다. 수분과 염분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국은 밥의 목 넘김을 돕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밥의 소화를 돕는다. 여러 가지 반찬은 밥에 없는 영양분과 염분을 공급하여 미각의 균형을 이룬다. 그래서 전통 상차림은 밥과 국, 김치를 기본으로 하고 반찬의 가짓수에 따른 3첩ㆍ5첩ㆍ7첩ㆍ9첩ㆍ12첩 반상이 정형화되었다.

     

    국과 밥은 식사 도중에 말아먹는 한이 있더라도 각자 그릇에 담아내는 것을 정식으로 여겼다. 그런데 조선후기 이후에는 국과 밥을 한데 말아서 내는 파격적인 음식이 등장했다. 바로 장국밥, 탕반(湯飯)으로도 불리는 ‘국밥’이다. 국밥은 조선후기에 장시(場市)가 발달하고 전국적으로 증가하면서 시장상인과 장보러 나온 주민, 장시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장돌림(장돌뱅이)’들을 위한 간편식으로 장시와 주막 등지에서 선보이기 시작한 음식이다. 국밥은 밥을 미리 지어 놓고 국도 사전에 마련해 놓는 등 모든 조리과정을 끝내고, 주문이 오면 바로 그릇에 밥을 담고 뜨거운 국물을 부어내기만 하면 된다. 국밥은 밥과 국을 일체화시킨 간편성과 완성된 음식을 담아내는 신속성으로 인해 일종의 패스트푸드와 같은 음식이었다. 또한 장날이 되면 특별하게 장 볼 일이 없어도 국밥 사먹는 재미에 장터에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밥은 우리 외식문화의 시초를 이룬 음식이기도 하다. 

     

    조선후기의 화가 김홍도(金弘道)가 남긴 보물 제527호 『김홍도필풍속도화첩(金弘道筆風俗圖畵帖)』 중 ‘주막’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면 패랭이를 쓴 남자가 큰 사발을 기울여 숟갈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국이나 탕에 밥을 말았을 때 남은 밥알과 건더기를 먹기 위해 하는 행동이다. 남자의 소반에는 반찬그릇으로 보이는 접시와 종지, 남자가 쥐고 있는 큰 사발 외에 다른 식기류는 없는 점으로 보아서 국밥을 거의 다 먹고 있는 상황으로 추정이 된다. 이와 같이 장시와 주막을 중심으로 발생한 국밥은 마을 어귀나 고갯길, 나루터 등에도 주막이 들어서면서 확산되었다. 한편 밥과 국을 한데 넣고 말아먹는 국밥은 상놈의 음식이라며 핀잔하는 양반의 체면을 고려해서 밥과 국을 따로 제공하는 ‘따로국밥’이 파생되기도 했다. 대구광역시의 향토음식으로 일반에 ‘육개장’으로 널리 알려진 ‘대구탕반(大邱湯飯)’을 밥과 국을 따로 담아서 내는 ‘대구 따로국밥’이 대표적인 분리형 국밥이다.

     

    장시에서 출발한 국밥문화는 순대국밥, 소고기국밥, 소머리국밥, 곰탕, 육개장 등 재료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경상도 지방의 경우 영천소머리국밥, 함안소고기국밥, 예천 용궁순대국밥, 대구 육개장 등 조선시대부터 대형 장시가 들어섰던 대읍(大邑)이나 교통의 요지에 생겼다. 그밖에 전라도 지방의 나주곰탕과 전주콩나물국밥, 충청도의 병천 순대국밥, 경기도 안성의 소고기국밥과 백암 순댓국 등이 모두 장시를 중심으로 발생한 지역별 대표적인 국밥들이다. 

     

    근현대시기에 들어서면서 경상도지방에는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국밥이 탄생하였다. 바로 돼지국밥이다. 전통국밥은 주로 소의 부산물을 이용한 국밥이나 순댓국이 주종이었던 반면, 돼지국밥은 근현대시기에 경상도지방에서 발생하였다. 경상도 지역의 돼지국밥 발생 유래에 대해서는 한국전쟁 이후 미군부대에서 나온 돼지고기 부산물을 탕국으로 끓여먹기 시작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경상도지방에는 대구, 부산, 밀양 세 지역의 돼지국밥이 대표적으로 알려졌는데, 적어도 부산돼지국밥의 유래는 한국전쟁 발생설이 타당하다. 부산돼지국밥은 이북출신 피난민들이 부산에 정착하면서 1950년 9월 부산 범전동에 설치된 일명 ‘하야리아 부대’로 불리는 주한미군 부산기지사령부 등에서 흘러나온 각종 고기 부산물과 재료를 끓여 팔기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미군부대와 가까운 부산 서면시장을 중심으로 부산돼지국밥골목이 형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밀양돼지국밥은 부산과 같이 돼지국밥이라는 명칭을 쓰고는 있지만 발생연원과 재료에 있어서 부산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밀양시의 향토음식이다. 밀양돼지국밥이 부산돼지국밥과 구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부산돼지국밥이 돼지의 뼈와 고기로 육수를 내는데 비하여, 밀양돼지국밥은 소뼈로 국물을 내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즉 밀양돼지국밥의 뽀얀 국물은 설렁탕 국물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발생시기에서도 부산돼지국밥과 다른 것은 한국전쟁 이전인 일제강점기에 밀양에서 식당을 운영해오던 사람에 의해 개발이 된 음식이기 때문이다.

     

    밀양돼지국밥의 역사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군 무안면 무안리의 한 식당으로부터 시작된다. 1938년 당시 최성달 씨가 무안면 장터에 ‘양산식당’이라는 상호로 문을 열면서 부터이다. 오랜 시간 소뼈를 푹 고아 낸 맑은 육수에 소금과 밀가루로 깨끗이 세척한 후 익힌 돼지고기를 올려 돼지 특유의 비린내를 없앤 국밥을 만들어 낸 것이 시작이었다. 밀양돼지국밥은 소뼈 국물로 우려낸 깊은 맛과 푸짐하게 얹어낸 부드러운 돼지고기 수육의 맛에 반한 장사꾼들의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지면서 유명해졌다.

     

    최성달 씨 이후로는 아들 최차생 씨와 부인 김우금 씨가 ‘시장옥’이라는 식당을 별도로 차려 분가해 나갔다. 현재는 최차생 씨의 세 아들이 삼대에 걸쳐 밀양돼지국밥의 전통을 계승해 나가고 있다.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양산식당’은 막내아들 최수곤 씨가 승계하여 ‘동부식육식당’이라는 상호로 개명하여 운영을 이어 나가고 있다. 최차생 씨가 운영하던 ‘시장옥’은 큰 아들 최수도 씨가 ‘무안식육식당’으로 개명하여 계승하고 있다. 둘째 아들 최수용 씨는 '제일식육식당'을 창업하여 맛의 전통을 잇고 있다. 한 집안이 삼대에 걸쳐 식당업을 계승하는 것은 전국 어디서나 흔히 목격할 수 있지만, 세 형제가 한 지역에서 동일한 업종을 운영하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것은 보기 드문 사례라 할 수 있다.

     

    밀양돼지국밥의 원조인 ‘양산식당’을 승계한 ‘동부정육식당’은 2012년 당시 농림수산식품부와 한식진흥원이 역사가 50년 이상 된 전국의 노포(老鋪) 100곳을 지정하는 사업에서 경상남도 지역의 ‘역사성 있는 식당’에 당당히 선정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상호가 모두 ‘00식육식당’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 이유는 이 세 곳 식당이 식육점을 겸하기 때문이다. 보통은 식육점을 운영하면서 식당을 겸하는 것으로 ‘정육점식당’이라는 용어까지 생긴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은 다르다. 돼지국밥에 소와 돼지를 모두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신선한 재료를 직접 확보하는 차원에서 식당에서 식육점을 겸하게 된 것이다. 또한 식육점을 겸하다 보니 돼지국밥 이외에 소국밥, 소곰탕, 돼지수육, 소수육, 소육회 등의 메뉴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고 있다.

     

    향토음식을 결정짓는 요인으로는 역사성과 더불어 지역성을 중요한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음식의 발생한 지역이 분명할수록 지역성은 더욱 구체화된다. 예컨대 유관순 열사의 고향이자 1919년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면(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은 ‘병천순대’로 유명한 지역이다. ‘병천순대’는 옛날부터 영남대로 길목에 위치하였던 병천장의 음식으로 길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충청도 지역의 대표적인 순대이다. 그런데 ‘병천순대’를 ‘천안순대’라고 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사람들은 병천이 어디에 있는 지명인지 몰라도 ‘병천순대’ 자체로 만족한다. 그만큼 브랜드 자체에 익숙해져 있거나 신뢰감을 느끼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밀양돼지국밥은 오히려 ‘무안돼지국밥’이 더 적확한 표기일지도 모른다. 다만 전라남도 무안군의 ‘무안’이라는 동명(同名)의 지명이 있어서 오인될 수도 있고, 무안면이 속한 밀양시의 전국적인 지명도가 워낙 높기 때문에 자연스레 밀양돼지국밥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밀양시에도 100년이 넘는 전통을 지닌 밀양전통시장의 밀양돼지국밥골목을 비롯하여 관내 50여 곳에 이르는 밀양돼지국밥 전문식당들이 성업 중이다.

  • 담백한 맛의 일품, 경기도 광주 소머리국밥

    한국인의 식단에서 밥과 김치, 국은 모든 음식의 근간을 이루는 우리 전통음식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쌀과 같은 곡식은 탄수화물이 풍부하여 훌륭한 식량원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지은 밥은 맛이 밍밍하기만 하다. 여기에 배추와 무 등을 소금에 절여 고춧가루, 젓갈을 비롯한 각종 양념과 야채를 넣어 발효시킨 김치는 쌀밥과 조화를 이루어 입맛을 돋워주고 소화를 돕는다. 또한 국(탕)은 동아시아의 이웃나라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매우 다양하고 가짓수가 많은 음식으로 우리 전통음식문화의 특징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 

     

    특히 국(탕)은 쌀밥을 씹어 삼킬 때 목 넘김을 좋게 해주는 효과와 함께 적절한 수분과 염분을 제공한다. 지금과 같이 쌀이 넉넉지 않아서 좁쌀을 비롯하여 기장, 메밀, 보리 등 잡곡을 더 많이 섭취하였던 조선시대의 식탁에 국(탕)은 꺼끌꺼끌한 잡곡을 먹는데 도움이 되는 음식으로 발전하였다. 쌀 또한 지금과 같이 도정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환경에서 국(탕)은 우리 조상들의 식탁에 빠져서는 안 될 음식이었다. 심지어 임금의 밥상을 일컫는 ‘수라(水剌)’도 ‘탕(湯)’을 뜻하는 몽골어인 ‘슐렌(šülen)’에서 비롯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고려 후기에 몽골에서 전래된 곰탕을 비롯하여 불고기ㆍ순대ㆍ소주ㆍ만두 등은 조선시대 들어서 우리 고유음식으로 한층 더 발전하였다. 그 중심에는 고기로 끓인 국(탕)이 있었다.

     

    예로부터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우리의 기본식단인 밥과 국, 김치를 한데 아우른 대표적인 음식으로 ‘국밥’이 있다. 국밥은 조선후기 전국적으로 장시(場市)가 발전하고 증가함에 따라 장시를 중심으로 발달한 우리나라 최초라 할 수 있는 외식문화의 전형이 된 음식이다. 국밥은 지역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시를 찾는 사람들과 상인의 배를 든든히 채워주었고, 장 볼 일이 없어도 국밥 한 그릇의 맛을 보기 위해 일부러 장을 찾는 별미였다. 

     

    농경국가였던 조선시대에는 국초부터 농사의 주요 생산수단인 소의 도살을 금지하는 금령(禁令)을 유지하면서 서울의 경우 제한적이나마 ‘다림방’으로도 불렸던 현방(懸房)이라 하는 푸줏간 영업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차츰 소의 식용이 일반에 보편화되면서 조선후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소의 부산물을 이용한 국밥이 전국 장시의 명물음식으로 등장하였다.

     

    조선시대의 장시는 주로 교통의 요지이자 행정적으로 읍치(邑治)에 속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지역에 형성되었던 장시는 규모가 커서 인근에 우시장과 도살장을 겸하기도 했다. 현재도 해당 지역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으로 알려진 나주곰탕, 대구 따로국밥(육개장), 안성 소고기국밥, 영천 소머리국밥, 함안 소고기국밥 등도 조선후기 이후 지역의 장시문화가 만들어낸 오랜 역사를 지닌 향토음식이다.

     

    경기도 광주시는 남한산성이 위치하여 조선시대 한양의 남쪽을 방어하는 관방(關防)의 거점지역이었다. 또한 조선시대 내내 국가 주요 간선도로였던 영남대로(嶺南大路)가 경상도 동래(東萊)에서 출발하여 밀양, 대구, 상주, 문경, 충주, 용인 등을 거쳐 한양에 진입하기 전 마지막 경유지가 바로 광주였다. 지금 광주시는 골프장만 즐비한 수도권의 한적한 소도시에 불과하지만 예전에는 교통의 요지였다. 지방에서 영남대로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은 한강을 도강하여 한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여장을 풀고 정비하면서 쉬던 지역이었다. 

     

    광주는 조선시대 왕실의 음식을 전담하고 각종 그릇을 공급하는 일을 맡았던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이 현재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 설치되었던 지역이다. 조선시대 ‘분원백자’로 알려진 조선백자의 산실이 바로 광주시였다. 이와같이 조선시대 광주는 서울의 궁중문화가 자연스레 소통하는 지역으로 ‘작은 서울’이라고도 불릴 정도였다. 특히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 국왕이 두 달간 남한산성에 피신한 이후 그 중요성이 재인식되면서, 광주는 남한산성의 수축(修築)과 함께 관찰사보다도 급이 높은 정2품 유수(留守)가 관할하는 도시로 성장하였다.

     

    조선시대에 음식문화에서도 광주와 서울이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은 ‘효종갱(曉鐘羹)’에서도 알 수 있다. 1925년 최영년(崔永年)의 『해동죽지(海東竹枝)』에 소개된 ‘효종갱’은 남한산성에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배달음식으로 알려진 음식이었다. ‘효종갱’은 소갈비에 된장을 넣고 끓여 육수를 낸 후, 배추속대ㆍ송이ㆍ표고ㆍ전복ㆍ해삼ㆍ콩나물을 넣고 푹 끊인 해장국의 일종이다. ‘새벽종이 칠 때의 국’이라는 뜻을 지닌 ‘효종갱’은 밤새 만들어서 항아리에 담아 소달구지에 실어 서울로 배달하면 새벽종이 칠 무렵에 도착한다고 하여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효종갱’은 주로 서울의 대갓집 아침상이나 서울에서 술 좀 마신다 하는 양반들의 속을 풀어주는 별식으로 사랑 받았다.

     

    이러한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지닌 경기도 광주시에 1970년대 들어 새로운 향토음식이 등장하였다. 바로 ‘곤지암소머리국밥’으로 대중에 더 잘 알려진 광주시의 향토음식인 소머리국밥이다. 광주 소머리국밥은 역사가 매우 짧아서 일반적으로 장시에서 발달한 다른 지역의 국밥과 같은 개연성을 찾기는 어렵다. 일부 문헌에서는 “경기도 광주는 예부터 경상도 지방에서 과거 보러 한양에 갈 때 지나던 길목으로서 이 지방에서 숙식할 때 주식으로 먹던 소머리국밥”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증빙할 수 있는 관련 문헌이 없어 억측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역사는 짧지만 광주 소머리국밥의 유래에는 관련된 애틋한 일화가 전한다. 1970년대 중반 곤지암에서 포장마차 영업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부부가 있었다고 한다. 부인은 병치레가 잦은 병약한 남편을 위해 몸에 좋다는 약과 식품을 구해다 먹였다. 어느 날 그는 ”소머리를 달여 먹이면 오장육부의 기능이 활발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소머리를 구해서 남편에게 끓여 먹였다. 소머리만 고아서인지 누린내가 심해 남편이 국물을 입에 대지 않자 부인은 여러 차례 시도 끝에 소머리국의 냄새를 제거하고 풍미를 지닌 소머리국밥을 만든 결과 남편은 건강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인은 남편의 건강을 찾아주기 위한 보양식으로 만든 소머리국밥을 포장마차의 메뉴로 손님에게 내놓았는데 반응이 좋고 찾는 손님들이 늘면서 지금의 소머리국밥 식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 광주시 곤지암읍에 소머리국밥 식당이 하나둘씩 들어서면서 현재 곤지암읍 곤지암리 일대에는 소머리국밥 골목이 형성될 정도로 소머리국밥 식당이 성업 중이다.

     

    광주 소머리국밥은 핏물을 뺀 소대가리와 사골을 끓이다가 무 등을 넣고 푹 끓인 국물을 밥에 부어 머리고기를 썰어 얹어 낸 다음 양념장을 곁들여 먹는 음식이다. 예전 소머리국밥 식당에서는 소머리를 적당히 쪼개서 끓여서 다소 탁하고 특유의 냄새도 강했다. 현재는 전문 가공공장에서 소머리를 완전히 해체하여 뼈와 머리고기로 공급받기 때문에 요즘 소머리국밥의 국물은 예전에 비해 훨씬 맑고 담백하다.

     

    전통시대의 문헌을 살펴보면 조선후기 이후 근대시기까지 발간된 『동의보감(東醫寶鑑)』(1610)ㆍ『의휘(宜彙)』(1871)ㆍ『의방합부(意方合部)』(미상)ㆍ『식의심감(食醫心鑑)』(1924)ㆍ『의가비결(醫家秘訣)』(1928) 등의 의서(醫書)에서 소대가리의 효능을 언급하고 있다. 소대가리는 중풍으로 인한 반신불수, 만성두통, 각기병, 출산 후 산부의 원기회복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서에 실린 조리법과 효능의 예를 들면 소대가리를 중탕하여 익히거나(의방합부) 국을 끓인다든지(의가비결), 푹 삶아서 술과 함께 먹고 땀을 내면(의휘, 의방합부), 만성두통이나 각기병에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소머리국밥은 우리 전통어법대로 따르자면 ‘소대가리국밥’이 맞는 표현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대가리는 ‘동물의 머리’라 되어있고, 머리는 통상 사람에 국한하여 사용하였다. 생선의 경우에도 ‘생선대가리’라고 하지 ‘생선머리’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가리가 워낙 비하의 의미를 지닌 비속어로 사용되다보니 짐승인 소에게조차 차마 사용하지 못하는 ‘불인지심(不忍之心)’에서 소머리국밥으로 부르는 듯 하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할머니뼈다귀해장국’이라는 간판을 보고 기겁했다는 우스개를 연상케 하는 알고보면 재미있는 음식명이다. 만약에 조상들이 와서 보신다면 소대가리가 아닌 소머리에 기겁해 하실지도 모를 일이다.

  • “돼지는 쫀닥쫀닥 주디에 피순대 먹으면 다 먹은 기다”

    돼지머리를 내리치는 도끼날은 힘차고 날카롭다. 순대국밥에 들어가는 돼지머리 고기 손질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끼가 정확한 부위를 단번에 잘라내야 한다. 만약 실수라도 하게 되면 살이 으깨지고 뭉그러져서 모양도 맛도 좋지 않다. 그렇게 부위별로 잘린 돼지머리를 뜨거운 물에 담가 잡냄새를 뺀다. 김영기(남, 62세) 씨는 이러한 도끼질만 30년이 되었다.

    칠곡의 왜관(倭館)은 조선시대에 일본인이 통상(通商)하던 곳이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회유책으로 일본인의 왕래와 무역을 허가하였다. 그리고 부산과 서울, 낙동강 부근에 일본 사신의 유숙 등을 위한 공관을 설치하게 된다. 이 중 그 지명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곳은 왜관뿐이다.

    1905년 낙동강 동쪽에는 왜관역이 세워졌고 칠곡 왜관 철교도 개통되었다. 6·25전쟁 때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고자 고귀한 피를 뿌린 치열했던 접전지역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60년경에는 미군기지가 생겼다. 1968년 2월 착공하기 시작하여 2년 5개월 만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는 실로 신화와 같았다. 경부선 철도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꼬박 12시간이 걸렸는데 경부고속도로는 이 거리를 5시간으로 줄였다. 이처럼 왜관의 역사는 파란만장하게 바삐 흘렀다. 왜인과 상인들이 넘쳐났고 군인과 피난민들이 머물렀다. 그리고 경부고속도로 현장의 일꾼과 여행객들.

    이들의 피곤한 삶을 위로하기 위해 1960년대 왜관역 주변에는 순댓국집이 생겼다. 40년 전에는 우시장도 있었고 도살장도 있었다. 신복희(여, 60세) 씨의 기억으로 30년 전 순댓국 가격은 이천 원이었다.

    왜관의 순대는 다른 지역과 달리 돼지 선지를 주로 하여 만든다. 살아있는 선지(피) 한 말을 체로 걸러 신선한 것만 돼지 소창에 넣는다. 엉긴 피는 꾹꾹 짜서 풀어야 하고 위로 올라오는 거품은 걸러내야 제맛이 난다. 채소는 넣지 않는다. 당면만 조금 들어갈 뿐이다.

    도끼로 쳐서 부위별로 잘린 돼지머리는 지름 1미터 남짓한 큰 솥에 넣는다. 머리 다섯은 쳐야 솥이 채워진다. 엄나무를 넣어 3시간은 삶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불이다. 연탄불로 삶아야 고기가 뭉근하고 쫄깃하다. 돼지주디(입)와 혓바닥은 2시간이면 족하다. 먼저 주디를 건져내어 식기 전에 돼지 이빨을 뺀다. 주디가 잘 익으면 살은 쫄깃하고 이빨도 딱 떨어진다. 돼지 사골은 이틀을 우려내어 깊은 맛이 난다. 맛이 깊어 따로 간을 보지도 않는다. 그 자체로 손님상에 내면 그만이다.

    왜관역에서 반평생 순대만 만들어 온 주인의 부엌에는 닳고 닳아 끝이 뾰족해진 부엌칼이 있다. 이렇게 닳아 없어진 칼만 해도 수십 개이다.

    원래 돼지는 주디(입) 먹으면 다 먹었다고 한다. 주디가 쫀닥쫀닥해서 제일 맛있다. 그거는 국밥에 드가고 수육에는 머리 고기만 드간다 안카나.

    이 집의 돼지머리 고기는 쫀득한 젤리와 같고 순대는 설탕 없는 브라우니와 같다. 그 맛은 씹을수록 고소하여 가슴으로 기억된다.

    돼지머리 고기와 피순대
    돼지머리 고기와 피순대
    칠곡 피순대 순대국밥
    칠곡 피순대 순대국밥


    ■ 도움 주신 분

    '성주식당' 정호연(여, 85세), 김영기(아들, 62세), 신복희(며느리, 60세)

  • “주전자 떠꿍으로 껍질 벗겨서 끓여 먹던 수구레국밥”

    창녕으로 가는 길목은 가을로 풍성하다. 이곳은 서부 경남지역의 우시장으로 유명하다. 얼마 전만 해도 우시장이 열리는 날이면 새벽부터 소를 싣고 온 트럭들로 붐볐다. 그리고 어김없이 소를 판 사람도, 산 사람도 점심때가 되면 소주에 수구레국밥을 먹었다. 뜨거운 국밥으로 자식처럼 거둔 소에 대한 미안함과 서운함을 달랬다.


    창녕장이 열리는 날에도 장을 찾은 사람들은 수구레국밥을 먹었다. 수구레는 소의 두꺼운 겉가죽과 고기 사이의 피부 근육이다. 소의 특수 부위로 많은 양이 허락되지 않고(약 2kg) 손질도 어려운 부위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장날이 아니어도 인근 시장이나 수구레 골목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현풍 백 년 도깨비시장’에는 수구레국밥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이 십여 집 남아 있다. 골목에 들어서면 구수하고 매콤한 수구레국밥 냄새가 군침을 돋운다. 국밥집마다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한 솥 가득 수구레를 끓인다. 콩나물과 우거지, 파를 넣은 벌건 국물은 언뜻 보기에도 얼큰해 보인다. 필자는 건축현장에 다닌다는 동네 주민의 추천으로 30년 가까이 수구레국밥을 끓이고 있는 서외숙(여, 63세)씨를 만났다.


    옛날에는 몬사는 사람들이 수구레를 먹었어요. 소고기는 비싸서 못 먹고. 어릴 때부터 우리는 먹었죠. 지금은 소 껍질 뼈껴논 거 가오지만, 그때는 숙모님 할 때는 소털 삐끼는 걸 그 와갖고 큰 주전자에 물 끓여가지고 수돗가에 펼쳐놓고 주전자 떠꿍 있잖아. 떠꿍. 그거 갖고 다 삐꼈어. 소 껍질까지 다 먹은 기지. 그때는. 그런데 지금은 소 껍질은 없잖아. 늙은 소는 털도 안 벗겨져. 그래 요만큼 요만큼 잘라서 털 떼고, 그래 힘들었어요. 수구레는 여 아저씨들은 환장을 한다. 옛날 기억이 있어 가지고. 지금이야 세월이 좋아져 그런 기 안 먹고 고기만 먹지만. 시집가기 전만 해도 내는 그리 먹었다.


    그랬다. 수구레 부위만 먹은 것이 아니라 털을 제거한 소가죽까지 먹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던 시절이었다. 장날에는 수구레를 센 불에 오래도록 삶으면서 기름기를 제거하고 양념을 강하게 하여 전골로 끓였다. 장작불에 넓은 냄비를 올리고 자박하게 끓여 선지와 수구레를 넣었다. 건더기를 돌리면서 익히다가 손님이 오면 먼저 익은 것을 건져주고 고기를 좋아하는 단골이 오면 더 주기도 했다.


    수구레국밥은 치아가 좋은 젊은 사람들은 졸깃한 맛에 먹는다지만 옛 추억 때문에 수구레국밥을 찾는 노인들도 많다. 그래서 노인들이 들어오면 호른호른하게 푹 삶아 따로 준비한다. 무와 마을을 넣고 오래 끓인 육수에는 누린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식당 내에도 수구레국밥집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깔끔 떠는 딸과 함께 일하면서 위생과 냄새에 더욱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주인아주머니는 소 선지와 수구레를 보관한 냉장고로 안내하면서 보관하는 방법과 수구레국밥을 끓이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

    수구레국밥
    수구레국밥

    수구레는 빛깔이나 모양이 좋은 것을 사용하고 냉동보관을 우선으로 한다. 도축장에서 들여오자마자 고기 손질을 빠르게 하여 삶는 것이 중요하다. 고기를 한꺼번에 오래 끓이면 흐물흐물해져 부드러울 수 있지만 졸깃한 식감이 사라진다. 그래서 먹기 전에 양념해 두고 고기의 식감을 살리면서 기름기 없이 잘 끓여야 하는 것이 노하우란다. 아주머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입맛에 맞게 작은 냄비에 수구레를 끓인다. 소 선지는 붉은빛이 비실 비치는 신선한 것을 사용해야 맛이 좋다.


    부추를 넣어 수구레 국밥 한 술을 떠 본다. 맵지 않고 기름기도 하나 없어 시원하기까지 하다. 수구레 부분은 부드럽고 쫀득쫀득하며 느끼하지 않다. 천천히 곱씹을수록 구수한 맛이다. 혹시 칼칼한 국물 맛을 원한다면 청양고추를 넣어도 좋고 무김치 국물을 한 술 넣어도 속이 풀릴 것 같다. 이것이 땀 흘려 일하는 분들이 찾는 이유겠지. 수구레는 지방이 적고 콜라겐 성분이 많아 관절에 좋다고 한다. 그리고 달콤한 젤리나 케이크, 마시멜로 등을 만들 때 수구레나 돼지껍질 등이 필수 재료라는 사실. 그래서인지 주인아주머니의 얼굴이 꽤 동안이었던 것 같다. 

  • “덜큰한 바다 꿀 생각에 통영 박신장을 가다”

    콧등 시린 찬바람이 불면 노릇하게 절여진 배춧잎으로 굴을 감아 먹을 때이다. 전국적으로 굴 생산지 1위를 기록하는 통영. 오밀조밀 크고 작은 섬들이 모여 있는 바다. 박경리 추모공원에서 보이는 통영 바다는 푸르다.


    연안(沿岸)의 인평동 길목에는 굴껍질이 산을 이룬다. 어떤 것은 길을 따라 늘어선 모양이 담장처럼 멋스러워 보인다. 버리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나일론 줄에 꿰어놓은 굴껍질은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 잠시 대기 중이다. 4~5월, 봄이 되면 바다 어디쯤 굴 채묘(천연 또는 인공 종묘 생산의 한 과정)가 잘 되는 곳에 내려질 것이다. 바다 깊이 말뚝을 박고 굴껍질을 맨 굴줄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단단히 부표에 고정시킨다. 부표는 굴줄이 있는 곳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가라앉음 정도로 굴의 무게를 짐작하게도 한다. 통영 바다에 흰 부표가 많은 이유이다.

    줄에 꿰놓은 굴껍질
    줄에 꿰놓은 굴껍질
    채묘 할 굴껍질을 싣고 가는 배
    채묘 할 굴껍질을 싣고 가는 배

    대체로 10월부터 굴 줄을 걷기 시작하는데 알이 작으면 해를 넘겨 2월까지 작업을 한다. 이른 아침 작업을 시작하면 점심 때 끝난다. 굴 줄에는 해초와 홍합, 미더덕 등이 달라붙어 있다. 그것들을 제거하고 세척하여 굴껍질만 커다란 자루에 담는다.

    우리는 꿀, 통영사람들은 모두 꿀이라고 합니다. 경상도 발음이 억세서 그런 것도 있고 바다의 꿀이다 해서 그리 부릅니다. 꿀은 물이 들어가고 나가는 곳에서 단련시킵니다. 저기 줄을 맨 꿀 껍데기를 가지고 와서 30m 간격으로 꿀을 달아 키웁니다. 저 밑에 꿀 하나 떠 있는 곳에 부표에 하나씩 100m~200m, 열 개. 저건 양식 면허가 있어야 하고 꿀밭이라고 하죠. 옛날에 멀리 조업 나갈 때 뱃일하면서 충무김밥 많이 먹었습니다. 김만 하나 싸고 그냥 김치, 오징어, 섞박지 이런 거는 상하지 않으니까요. 요즘은 뭐, 간단하게 소주 한잔하고 끝날 일인데요.

    은하수산 김홍관(남, 58세)씨는 육지에서 농작물을 키우듯 바닷사람들에게 바다는 밭과 다름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육지의 농작물을 키우듯이 성장촉진제를 주거나 동물사육 하듯이 사료를 주는 것은 아니다. 굴이 먹는 것은 바닷속에 사는 플랑크톤과 유기물이다. 바다에 두면 굴껍질에 자연 채묘가 되고 시간과 자연이 굴을 키운다. 그래서 바다가 깨끗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태풍이 가끔씩 올라와야 해요. 태풍이 바다 밑바닥까지 뒤집어주면 깨끗해지죠. 바다 청소를 안 해주면 유독가스가 올라와서 굴이 잘 크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자주 오면 안 되죠. 껄껄껄.

    굴껍질 까기
    굴껍질 까기

    굴껍질을 전문적으로 까는 곳, 박신장. 박신(剝身)은 껍질을 벗긴다는 뜻으로 굴껍질을 벗기는 장소, 굴껍질 까는 공장을 의미한다. 새벽 4시, 박신장에는 굴껍질 까는 아주머니들로 분주해진다. 작업에 집중하는 4~50명 아주머니들의 손은 날래다. 두 번의 손놀림에 상처 하나 없는 굵은 굴을 거친 껍질에서 떼어낸다. 짧은 무쇠 칼날은 굴눈을 정확히 찾아 위 껍질을 젖히고 굴의 관자를 단숨에 떼어낸다. 필자는 굴눈이 어디 있는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주머니들은 순식간에 한 바가지 가득 굴을 채운다. 이렇게 오후 4시까지 열두 시간을 서서 일한다. 무게에 따라 성과급을 받기 때문에 남들보다 부지런히 하면 그만큼 더 벌 수 있다. 각굴(석화)을 작업장 위에 쏟아내고 밀어내는 소리와 자그락 껍질을 까는 소리만 들린다.

    여 눈이 있어. 고기를 콕 찔러서 칼을 돌려. 알이 상하면 안 돼. 아이구, 이것도 한 철만 하니까 하는 거야. 좀 더 있으면 손 시룹고 문 열고 있으니 춥지. 그래도 일한 만큼 버니까 좋아. 이리 벌어도 다 약값으로 드간다.

    필자에게 입담을 늘어놓으시는 아주머니는 굴 까는 방법을 설명하면서도 손은 쉬지 않는다. 그녀의 단단한 어깨가 숙련된 솜씨임을 증명해 준다. 우리가 먹었던 굴 한 봉지에는 이들의 노고도 담겨 있었던 것이다.

    생굴
    생굴

    껍질을 제거한 굴은 세척작업을 해야 한다. 굴껍질을 깔 때 섞여 들어간 껍질 부스러기나 오물 등을 ‘쩍’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제거해야 온전한 상품이 된다. 싱싱한 굴들은 당일 오후 5~6시면 위판장에서 경매한다. 그리고 마트나 시장을 통해 우리의 식탁으로 올라오게 된다. 바다에서 우리의 식탁까지 오는 시간은 길어야 3~4일이다.


    이제 우윳빛 굴국밥을 먹으러 가보자. 그런데 통영에는 굴국밥이 흔하지 않다. 분명 몇 년 전만 해도 있었다. 이는 굴국밥보다 복국을 찾는 손님들이 많아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그래서 결국은 굴국밥을 먹지 못했다. 대신 굴전과 굴무침, 굴숙회를 맛보았다. 먼저 생굴을 한입 물어 보자. 생굴이 볼록한 배에 담아두었던 덜큰한 바다를 뱉어낸다. 다음은 홀홀 불어먹어야 하는 갓 익은 굴전이다. 고소함이 부추향과 함께 계란 옷에서 터져 나온다. 굴 몇십 마리를 해치웠다.

    굴숙회
    굴숙회
    굴전
    굴전
    굴무침
    굴무침

    검은색 테두리가 또렷한 굴이 맛있다는 식당 주인의 말을 듣고 나오는 길에 조선칼을 판다는 트럭을 만났다. 문득 박신장의 아주머니들이 생각난다. 굴껍질 까는 칼은 대장간에서 만든 칼을 사용한다고 했다. 무쇠가 튼튼하고 오래 가기 때문이란다. 무쇠처럼 단단한 그들의 삶처럼 통영 바다의 청정함도 오래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 도움 주신 분

    은아수산 김홍관(남, 58세)씨는 굴채취에 대한 설명을, 홍덕수산 박신장에서는 사진 촬영을 협조해 주셨다. 굴향토집(문복선 여, 53세)에서는 굴 요리 사진 촬영을 도움받았다.

  • 경상북도를 사통팔달했던 영천장의 명물, 영천 소머리국밥

    경상북도 영천시는 조선 시대의 가장 중요한 간선도로였던 영남대로(嶺南大路)가 경유하는 지역이었다. 영남대로는 세 갈래 길[우로(右路)·중로(中路)·좌로(左路)]이 있었는데, 영천은 울산에서 출발하여 경주, 안동, 풍기를 지나 죽령을 넘어가는 좌로에 위치하였다. “잘 가는 말[馬]도 영천장 못 가는 말도 영천장”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어디에서 출발하든 어떤 말을 타든 영천장을 통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근대 이전까지 영천은 지리적으로 서쪽의 대구, 북쪽의 안동, 동쪽의 포항, 남쪽의 경주와 울산은 물론이고 반경 팔십 리 내외의 이웃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경상도의 물류와 인원이 집결하고 통과하는 중간지점이다 보니 자연적으로 영천에는 큰 장시가 발달하였다. 2일과 7일에 서는 오일장으로 열리던 영천장은 대구의 약령시장, 안동장과 함께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의 3대 시장 중 하나였다.

    영천장이 경상도 물류의 중심지였다는 근거는 ‘영천 돔배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돔배기는 '소금에 절인 토막낸 상어고기'의 경상도 방언이며 경상도 지역의 제사상에 반드시 올리는 제수(祭需)였다. 안동을 비롯한 지금의 경상북도 북부지방에 해당하는 안동문화권 지역의 제사상에 돔배기로 만든 '돔배기산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영천장을 통한 물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돔배기는 현재도 영천시장에서 맛 볼 수 있는 영천의 별미로 유명한 음식이다.

    영천 소머리국밥은 영천의 역사와 지리적 환경이 만들어낸 향토 음식이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장꾼들과 한양으로 올라가는 과객(科客)이 쉬어 가는 중간지점으로서 영천에는 주막과 객주 집이 유난히 많았다. 그래서 오일장이 설 때면 소머리와 사골을 푹 끓여낸 국밥집이 장터에 성시를 이루었다. 영천장터의 국밥이 소머리국밥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경상도에서 규모가 컸던 우시장이 바로 영천장 인근에 위치하여 재료를 수급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음식문화의 측면에서 소머리국밥은 느림과 빠름의 미학을 고루 갖춘 음식이다. 그 만드는 과정으로 보면 핏물을 뺀 소머리 뼈와 사골을 오랜 시간 끓이면서 기름을 걷어내고 정성을 들여 고아야만 제 맛이 나는 슬로우푸드이다. 반면에 이렇게 오랜 시간 조리 과정을 거쳐 완성된 음식은 주문 즉시 바로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의 특징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공장에서 가공되어 나온 육즙을 데워 주는 요즘의 패스트푸드 문화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세련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성을 들여 준비하고 허기진 손님들에게 바로 먹을 수 있도록 내어주는 소머리국밥에는 어머니의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경상북도 영천시 시장4길 52번지 일대 영천 공설시장 안에는 50년이 넘은 소머리국밥 골목이 형성되어 성업 중이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마솥 옆에서 이마에 송골송골 땀을 맺혀가며 먹는 한 그릇의 소머리국밥에서 사람 사는 정겨운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재료

    소머리 고기, 사골, 대파

    조리과정
    1. 1. 소머리뼈와 사골을 찬물에 담가 핏물을 뺀 후 가마솥에 넣고 10시간 이상 끓인다.
    2. 2. 1의 국물에 고기와 대파를 넣고 이틀 정도 푹 고아낸다.
    3. 3. 고기는 건져내어 납작하게 썰어 따로 준비한다.
    4. 4. 국그릇에 고기를 담고 대파를 얹은 후 끓인 육수를 부어 밥과 함께 낸다.
  • 피난살이의 고달픔과 허기를 달래주었던 부산 돼지국밥

    부산광역시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이 전한 여러 지역의 음식문화가 어우러져 만들어진 부산 특유의 향토음식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자갈치시장의 곰장어구이를 비롯하여 구포국수, 냉채족발, 돼지국밥, 밀면, 비빔당면 등이 피난민을 통해 부산에 유입되어 정착하였거나 먹을 것이 부족했던 피난시절의 음식으로 등장한 것들이다.

    부산 돼지국밥
    부산 돼지국밥

    그중에 부산 돼지국밥은 돼지 사골을 우려낸 뜨거운 육수를 밥과 돼지고기에 여러 차례 부었다 따랐다 하여 덥게 만든 다음에 국물을 부어내는 부산광역시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이다. 뽀얗게 우려낸 진한 국물에 경상도 방언으로 ‘정구지’라 불리는 부추를 듬뿍 넣어 새우젓으로 간한 국밥의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부산진구에 위치한 서면시장의 돼지국밥골목은 부산의 원조 돼지국밥 맛을 보러 온 전국의 식객들로 연중 북적인다.

    부산 돼지국밥
    부산 돼지국밥


    국밥은 전통시대의 장터를 중심으로 발달한 우리나라 고유의 서민음식이자 외식문화의 원조이다. 경상도 지방에도 옛날부터 지역별로 국밥문화가 발달하였다. 경상북도 영천시의 소머리국밥, 대구광역시의 따로국밥, 경상남도 함안군의 소고기국밥 등이 그러한 것이다. 이 지역들은 교통로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어 장시가 크게 발달하였고 교통과 물류의 거점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에 반해 부산의 돼지국밥은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현대사가 낳은 산물이다.



    또한 부산은 교통로의 요지이기 보다는 종착지였기 때문에 전국의 음식이 한데 모여 어우러지는 용광로와도 같은 곳이었다. 즉 분단과 전쟁으로 인하여 부산으로 이주하거나 피난 내려온 전국 팔도의 음식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부산 특유의 새로운 음식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부산광역시 영도구에서 58년을 살아온 정진아 할머니가 한국방송공사의 '한국인의 밥상'에서 한 인터뷰에 의하면 어릴 적에는 부산에서 돼지국밥을 본 기억이 없다고 한다. 돼지국밥은 부산에 이북 피난민들이 내려오면서 만들어진 음식이라고 증언하였다. 즉 부산의 돼지국밥은 이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태어난 고유의 향토음식이라기 보다는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회적 환경을 바탕으로 하여 탄생한 음식이다.

    부산 서면시장
    부산 서면시장
    송정3대국밥
    송정3대국밥

    부산에 돼지국밥이 자리 잡은 연원은 한국전쟁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부산 지역으로 유입된 피난민들이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돼지뼈를 이용해 탕국을 만들어 먹은 데서 돼지국밥이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1950년 9월 지금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전동 일대에는 '하야리아 부대' 불리는 주한미군 부산기지사령부가 설치되었고, 주변에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각종 부산물과 재료를 이용한 국밥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미군부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부산 서면시장에 돼지국밥 골목이 형성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송정3대국밥
    송정3대국밥
    송정3대국밥
    송정3대국밥

    과거의 돼지국밥은 전쟁으로 인해 헐벗고 굶주리며 경제개발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힘겨운 시절, 피난민에게는 타향의 설움을 달래주고 부산서민에게는 고달픈 삶의 애환을 풀어주는 힐링푸드였다. 그러나 현재는 부산시민의 헬스푸드이자 부산을 찾는 식객들이 순례하는 컬처푸드로 자리 잡았다. 2009년 부산광역시는 부산지역의 여러 향토음식 중에서 13개 음식을 부산의 공식적인 향토음식으로 지정하였다. 돼지국밥도 그 중에 하나로 선정되어 부산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2동 255-15 서면시장 일대는 서면 향토음식 특화거리로 지정되어 있다. 도로 한 쪽에는 돼지국밥집들이 늘어서 있고 그 맞은편은 칼국수집들이 죽 늘어서 있다. 1946년 연지시장에서 개업하여 1950년 이 곳으로 이전해온 ‘송정3대국밥’이 오래된 맛집으로 알려져 있다.


    재료

    돼지사골, 사태, 전지, 무, 물

    조리과정
    1. 1. 돼지사골, 사태와 전지를 찬물에서 핏물을 뺀 후 24시간 푹 고아 육수를 만든다.
    2. 2. 삶은 돼지고기와 무를 밑간하여 중불에 달달 볶으면서 육수를 붓는다.
    3. 3. 뚝배기에 밥을 담고 삶은 돼지고기를 얹어 육수를 부어 토렴한 다음 대파를 얹어낸다.
    4. 4. 곁들여 내는 부추겉절이, 깍두기, 새우젓, 양파, 풋고추, 마늘 등으로 입맛에 따라 간을 맞춘다.
  • 장국밥의 고향은 장터가 아니에요!

    탕반(湯飯), 온반(溫飯), 장탕반이라고 불린 장국밥은, 소금 대신 간장으로 국물의 간을 맞춰 구수한 맛을 더한 음식이다. 19세기 말의 조리서 『규곤요람』에는 “장국밥은 국수 마는 그것과 같이하는데 밥만 마는 것이다. 밥 위에다 기름진 고기를 장에 조려서 그 장물을 붓는다”라고 했다. 장국밥이란 이름에서 많은 사람이 장터에서 파는 음식으로 여겨 마당 장(場)을 연상하지만 실은 이처럼 간장으로 간을 해서 젓갈 장(醬)자를 쓰는 음식이다.

    장국밥은 양지머리 고기를 오랫동안 푹 끓여 낸 다음 국물은 탕국으로 쓰고, 고기는 가늘게 찢어 산적, 나물들과 함께 얹어내는 형태이다. 이러한 음식 형태로 인하여 제사 후 남은 음식을 한데 모아 먹기 편하게 만들어진 음식이라는 유래가 있기도 하다.

    장국밥은 깍두기와 배추김치 외에 별다른 밑반찬이 필요 없고, 비교적 저렴한 가격 덕에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기도 하다. 또 주문 즉시 비교적 빨리 먹을 수 있어 식사시간도 줄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지고 외식이나 단체급식의 수요가 늘어나자 전국적으로 장국밥을 파는 식당이 많이 생겨났다.

    그중에서도 서울의 무교탕반은 역사와 유명세가 대단했는데, 당시 세도가는 물론 헌종(1834~1849년)도 평복차림으로 드나드셨다고 알려져 있다. 소설가 조용만은 1930년대의 문화계를 되돌아보는 글에서 “그때 무교탕반은 값이 30전이었다. 설렁탕이나 냉면, 비빔밥이 다 10전이었는데 무교탕반만 그 세 곱절이었다. 그렇게 받을 만한 것이 맛이 달랐다. 국물이 뽀얗게 진하고 비싼 움파를 곁들인 고기산적을 넣고 국수를 알맞게 넣어 맛이 별미였다.”라고 회상했다.


    재료

    쇠고기(우둔), 무, 고사리, 도라지, 콩나물, 쇠고기(양지머리), 간장, 다진 마늘, 파, 소금, 설탕, 참기름, 깨소금

    조리과정
    1. 1. 양지머리는 덩어리째 찬물에 씻어서 핏물을 빼고 무와 함께 푹 삶는다.
    2. 2. 밥은 고슬고슬하게 지어 놓는다.
    3. 3. 고기가 무르면 건져서 도톰하게 썰고, 무는 나박 썰어서 간장과 마늘, 파로 양념하여 국물에 넣고 끓인다.
    4. 4. 고사리, 도라지는 적당한 길이로 손질한 후 간장, 다진 마늘, 파, 깨소금, 참기름으로 양념하여 볶아 둔다.
    5. 5. 콩나물은 삶아서 동일한 양념으로 무쳐 둔다.
    6. 6. 쇠고기는 다져서 양념한 후 구워내어 사각 형태로 썬다.
    7. 7. 뚝배기에 밥을 담고 뜨거운 장국을 붓은 다음 구운 고기와 나물들을 고루 얹는다.
    8. 8. 기호에 따라 파나 고춧가루를 넣어 먹는다.
  • 모주(母酒) 한 잔을 곁들여 먹는 남도 술꾼들의 해장음식, 전주 콩나물국밥

    콩나물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있는 식품으로 전국 어디서나 콩과 물만 있으면 길러 먹을 수 있는 간편하면서도 영양가가 높은 식재료이다. 그 중에서 전라북도 전주시는 예로부터 콩나물로 유명한 고장이었다. 전라북도는 예로부터 기후가 온화하고 물이 좋은데다가 품질이 좋은 콩이 많이 나는 지역이어서 전주의 콩나물은 질이 좋기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전주에는 콩나물을 이용한 음식이 발달하였다.


    지금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얻고 있는 전주비빔밥에도 콩나물이 주요 재료로 들어간다. 전주비빔밥 외에도 전주에는 콩나물국밥, 콩나물죽, 콩나물잡채, 콩나물무밥, 콩나물전, 콩나물무침, 콩나물김치, 콩나물짠지 등 콩나물을 이용한 음식이 즐비하다. 특히 콩나물국밥은 콩나물비빔밥과 더불어 지금은 전주를 대표하는 전국적인 음식으로 발전하였다.


    콩나물국밥에 앞서 우리나라에서 콩나물을 언제부터 식용하였는지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콩나물을 언급한 문헌은 옛 의서(醫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콩나물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고의 의서로 고려 고종(高宗) 때인 13세기 전반에 간행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대두황(大豆黃)’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1433년(세종 15)에 간행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는 ‘대두황권(大豆黃卷)’이라는 약재로 소개하고 있다. 대두황이나 대두황권은 ‘콩나물을 말린 것’을 말하며 우황청심환(牛黃淸心丸) 같은 한약의 약재로 쓰였다. 또 1488년(성종 19)에 언해본으로 간행된 『향약집성방』에는 대두황권을 콩나물로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우리나라에서 콩나물을 식용한 역사는 오래 되었고 약재로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 이전의 고문헌을 살펴보면 콩나물국밥이라는 음식명이 직접 언급되어 있는 기록이 없어 그 유래를 정확하게 고증할 수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콩나물죽이나 콩나물국을 비롯하여 콩나물을 이용한 반찬을 다양하게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조선 후기 영조(英祖)때의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는 콩나물죽을 소개하고 있다.


    (콩을)싹을 내서 콩나물로 만들면 몇 갑절이 더해진다. 가난한 자는 콩을 갈고 콩나물을 썰어서 한데 합쳐 죽의 재료로 삼으면 족히 배를 채울 수 있다.(長芽為黄卷增數倍 貧者磨其粒而挫其芽并為饘粥之材足以充腹)


    콩나물국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는 조선후기 작자와 연대 미상의 『의방합편(醫方合編)』이다. 『의방합편』에서는 콩나물을 ‘곽채(藿采)’라 하였고, 콩나물국을 ‘곽갱(藿羹)’으로 소개하고 있다. 콩나물국은 담병(痰病)치료에 좋은 음식으로 “콩나물국을 많이 먹고, 또 콩나물로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어 오래 먹는다(藿羹多食 且以藿爲某饌長服)”고 설명하고 있다. 비록 콩나물국밥을 직접 언급한 문헌은 없지만 ‘국밥’이라는 음식이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오래된 전통음식의 한 종류라는 점과 앞서 언급한 기록을 감안하면 최소한 조선후기에는 콩나물국밥이 대중적인 음식으로 등장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전주에서 콩나물국밥을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1929년 개벽사(開闢社)가 발행한 대중잡지였던 『별건곤(別乾坤)』 12월호에는 콩나물국이 ‘탁백이국’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의 설렁탕, 평양의 어복쟁반과 더불어 서민들의 3대 명물음식으로 등장한다. 이에 콩나물국밥이 오래전부터 먹었던 향통음식이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콩나물국밥
    콩나물국밥

    전주에서 콩나물국이 유명한 것은 장시(場市)의 발달과 관계가 있다. 전주는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의 본관인 전주 이씨의 고장으로 조선 초기 종2품 외관직인 부윤(府尹)이 주재하는 전주부가 설치되어 읍격(邑格)이 높았고, 중앙에서 파견한 관찰사가 상주하는 전라도 감영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따라서 전주에는 전주성 안에 1개의 장시(場市)와 네 개의 성문 밖에 각기 1개씩의 외장(外場)이 설치되어 전라도 각지에서 올라온 물산과 인원이 모이는 물류의 중심지였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전주성의 남문(南門)인 풍남문(豐南門) 밖에 위치한 전주남부시장은 그 역사도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주 콩나물국밥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우리나라는 조선 후기에 장시가 발달하면서 전국 주요 장시에는 장날 모여든 상인들과 장보러 온 사람들을 상대로 국밥을 만들어 파는 우리 고유의 외식문화가 자리 잡았다. 지금도 전국 각지 역사가 오래된 시장에는 순대국밥, 소고기국밥, 소머리국밥 등 국밥음식이 전통향토음식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데, 전주의 콩나물국밥도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전주의 콩나물국밥은 오래된 역사만큼 종류도 다양하여 크게 끓이는 식과 토렴하는 식으로 구분된다. 우선 끓이는 식은 콩나물국에 밥을 넣고 뜨겁게 끓여내는 방식으로 펄펄 끓은 뚝배기에 날계란을 올려 내는 것이 특징이다. 전주시 고사동 전주감영 뒤편에 위치한 ‘삼백집’이 끓여내는 콩나물국밥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1947년 개업한 삼백집은 허영만의 『식객』에도 등장한 식당으로 창업주 고 이봉순 할머니가 하루에 300그릇만 판다는 원칙을 세워서 삼백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삼백집의 콩나물국밥은 날계란을 휘저어 적당히 익혀서 밑반찬으로 나오는 소고기 장조림과 잘 익은 김치와 함께 먹는다.


    다음으로 ‘남부시장식’으로도 불리는 토렴하는 식은 국밥을 끓이지 않고 콩나물국에 밥을 여러 번 토렴하여 따끈하게 먹는 방식으로 오징어 육수를 쓰는 것이 특징이다. 토렴식 콩나물국밥은 1979년 남부시장에서 영업을 시작한 ‘현대옥’이 유명하다. 이곳에서는 콩나물국밥에 날계란을 얹지 않고 수란(水卵)으로 만들어 김, 오징어젓, 새우젓, 무장아찌 등과 함께 밑반찬으로 낸다. 이외에 전주 한옥마을 인근에서 1987년에 개업한 ‘왱이집’이 전주 3대 콩나물국밥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왱이집의 콩나물국밥은 남부시장식과 같다.


    콩나물의 효능에 대해서는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물에 담가서 싹이 난 것을 대두황권이라 하는데 주로 오장과 위기(胃氣)가 뭉쳐 병이 생긴 데 쓰며 삶아 먹을 수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향약집성방』에는 “맛이 달고, 약성이 평이하고, 독성이 없다. 기를 보익(補益)하고 통증을 멈추게 한다”고 하였다. 콩나물은 식물성 단백질과 미네랄, 비타민 등 다양한 영양분을 함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콩나물 꼬리 부분에는 아미노산의 일종인 아스파라긴산이 매우 풍부하여 최고의 해장음식 재료로 손꼽히고 있다. 전주에서는 예로부터 이른 아침 모주(母酒) 한 잔을 곁들인 콩나물국밥을 진정한 술꾼의 해장음식으로 여겼다.

  • 소고기 느낌을 주는 현풍시장 수구레국밥

    쇠가죽에서 벗겨 낸 질긴 고기를 ‘수구레’라고 한다. 경상도에서는 ‘수구리’, ‘소구레’ 등으로 부른다. 현풍시장 사람들은 ‘소 껍데기 안의 껍데기’라고 한다. 쇠가죽 껍질과 쇠고기 사이의 아교질에 해당한다. 수구레는 비계가 아니고, 소 한 마리 당 2㎏ 정도만 나오는 특수부위다. 부드러운 식감 때문에 국밥으로 해서 먹거나 무침을 해서 먹기도 한다.

    수구레국밥
    수구레국밥


    달성군 현풍시장과 우시장

    현풍은 조선시대 달성군 일대의 중심지였다. 현풍오일장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에 개설하였으며, 매월 5일과 10일에 열렸다. 현풍오일장은 인근 대구, 유가면 사람들은 물론 전국에서 가축과 농산물을 판매하려는 상인들이 다녀갔다. 특히 장터 근처에 1980년대까지 있었던 우시장 때문에 수구레국밥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현풍백년도깨비시장’이라는 이름의 상설시장으로 운영 중이다. 현풍시장에 “배고플 때마다 근심과 걱정을 먹고 사는 도깨비가 상인들에게 손님을 데려다주거나 장터에 신기한 물건을 건네주고 근심 걱정과 맞바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현풍시장 수구레국밥촌

    현풍시장 수구레국밥은 장날에만 맛볼 수 있었던 서민음식이었다. ‘수구레국밥집’이 상설식당으로 자리 잡은 것은 30여년 정도 된다. 처음에는 그저 한 두 곳 식당이 상호도 따로 없이 주로 장날 위주로 손님을 맞곤 했었다. 그러다가 새롭게 지어진 상가 1층에 ‘수구레국밥촌’이 셩겼다. 10여 개의 수구레국밥집이 오일장과 상관없이 매일 문을 연다. 수구레국밥과 밥 대신에 삶은 국수를 말아먹는 수구레국수를 항상 먹을 수 있다.


    서민들 영양공급원 수구레국밥

    수구레는 서민들에게 소고기 느낌을 주는 최고의 영양공급원이다. 고기 값이 비싸던 시절 서민들은 상대적으로 값이 싼 수구레로 단백질 보충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추운 겨울 언 몸을 녹여줄 대표적인 음식이 수구레국밥이다. 수구레는 잘 끓이지 않으면 질겨서 먹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수구레를 다룬 경험이 있어야 음식을 제대로 할 수 있다. 깨끗하게 손질해 삶아서 썰어둔 수구레를 선지와 함께 가마솥에 넣어 끓인다. 거기에 고춧가루, 풋고추, 파, 간장 등으로 양념하고, 누린내를 없애기 위해 산초가루와 마늘을 넣고 한 시간 이상 끓여야 수구레국밥이 완성된다. 

  • 안성 쇠전거리에서 시작된 안성국밥

    안성지역에는 “이일, 칠일 안성장에 팔도물건이 널려있다.”라는 옛말이 있다. 안성장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는 말이다. 안성은 오래전부터 장시가 발달하여 연암 박지원은 18세기 후반 「허생전」에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의 삼남의 물화가 서울로 이송되는 길목”이라 하였다. 이중환은 1750년 경의 「택리지」에서 “안성은 경기도와 호서지방 해협 사이에 위치해 화물이 수용되고, 공인과 상인이 모여들어 한남의 도회가 되었다.”라고 해서 당시 안성이 교통의 요지가 됨과 동시에 물류 집산지로서의 시장이 형성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1747년에는 “안성시장이 서소문 외 시장 중에는 가장 컸었다.”는 것을 각종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안성장과 함께 한 우시장

    안성 우시장도 안성장과 같이 발전했다. 안성장을 조선 3대 시장이라고 하였으니, 우시장도 규모가 대단하였을 것이다. 1909년 『고종시대사』에 의하면 “경기도에서 도살장 설립지 1등지는 인천, 개성, 2등지는 수원, 안성, 영등포, 3등지는 1등과 2등지 이외의 각지임을 지정”하여 고시하였다. 그만큼 매매되는 가축의 수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안성기략』에 의하면 1923년에는 9,006마리의 소를 출장하였고, 1924년에는 8,365마리를 출장하였다. 이는 경기도에서 매우 큰 규모에 속하는 것이다. 한편 안성 우시장은 1930년대 성남동 구시장 근처에 있다가 후에 지금의 안성2동 보건소 자리로 옮겼고, 다시 도기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지금은 그마저도 없어지고 금광면 개산리의 송아지 경매장이 현재 남아 있을 뿐이다.


    사골과 잡뼈로 우려 낸 안성소머리국밥

    안성소머리국밥을 끓이려면 사골과 잡뼈를 10시간 이상 끓여낸 국물에 양지머리와 소머릿고기, 마늘, 생강, 파를 넣고 더 끓인다. 고기는 편육으로 썰어 놓고 국물에 박고지, 토란대, 고사리 등을 넣어 한 번 더 끓인다. 그 다음 밥에 편육을 얹고 국물을 부어 양념장을 넣어 먹는다. 소머리와 사골 및 잡뼈를 가마솥에서 불을 꺼뜨리지 않고 온종일 푹 고아 내고 양지머리에서 우러나온 고소한 국물과 채소와 어울린 국물에 양념을 넣어 고기의 누린 맛을 제거하는 것이 특징이다.


    쇠전거리 안성탕과 안성국밥

    안성쇠머리국밥은 1920년대 초 안성 우시장으로 이어지는 ‘쇠전거리’ 한 귀퉁이에 작은 가마솥 하나를 걸고 팔던 국밥집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안성소머리국밥’을 ‘안성탕’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안성국밥’으로 특화해서 판매하고 있다. 안성국밥은 2012년에 고속도로 휴게소 판매 음식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음식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 군산공설시장 형성과 함께한 돼지국밥

    군산시 신영동에 위치한 군산공설시장(구시장)은 1913년 군산선 개통과 더불어 인근에 식료품상들이 모여들면서 1918년에 시장이 개장되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군산공설시장은 군산을 대표하는 시장으로 1945년 해방 후에도 강경, 논산, 부여, 대천, 서천, 장항 등 충청남도 일부지역과 김제, 부안 등 전라북도 서부 지역 주민들도 이용하는 큰 시장이었다.

    군산 공설시장
    군산 공설시장
    군산 공설시장
    군산 공설시장


    군산의 ‘세느 강변’과 돼지국밥 골목

    군산의 돼지국밥은 군산공설시장과 옹기전 사이를 흐르는 ‘샛강’ 주변에서 식당 4~5개가 영업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1920년대 공설시장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돼 주로 돼지고기 부산물로 국밥 등을 만들어 팔았다. 샛강은 째보 선창[현재 죽성 포구]으로 유입되는 금강의 지류다. 샛강 주변은 1970년대까지 ‘옹기전 골목’, ‘순댓국집 골목’ 등으로 불리다가 1970년대 후반 복개 공사로 샛강이 주차장으로 변하자, 아련한 추억을 잊지 못한 사람들이 프랑스의 ‘센(Seine) 강’에 빗대 ‘추억의 세느 강변’으로 부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군산 돼지국밥

    샛강의 돼지국밥은 1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원래는 ‘순댓국’이라 했으나 1970년대 이후 ‘돼지국밥’으로 바뀌었다. 돼지머리와 내장을 온 종일 삶아낸 국물에 돼지의 다양한 부위(순대·귓불·막창·편육)와 부추, 다진 마늘, 고춧가루, 들깨 가루 등의 양념을 해서 뚝배기에 다시 끓여내 먹는다. 국밥집 13곳에서 판매되는 돼지머리가 하루에 170~180개 정도 되고, 행사가 많은 봄·가을에는 200개 넘게 소비하는 날도 있다. 전라북도는 물론 강원도, 경상도 지역에서도 편육 주문이 들어오기도 한다.


    해장국으로 인기 좋은 돼지국밥

    군산 돼지국밥은 옛날 배고프던 시절 서민들의 허기를 달래주고 머리 고기와 순댓국으로 주전자 막걸리를 먹던 그 시절의 추억을 지금도 떠올리게 한다. 맛과 향수를 느끼려는 단골손님들은 물론 최근에는 색다른 맛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추억의 세느 강변’ 돼지국밥은 푸짐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밑반찬으로 배추김치와 깍두기 외에 손님이 보는 앞에서 싱싱한 부추로 겉절이를 무쳐준다. 손님들이 요구하면 순대·귓불·막창·편육 등을 듬뿍 넣어줄 뿐만 아니라 국물이 진하고 얼큰해서 해장국으로 인기가 좋다.

  • 백암장과 함께 한 백암순대

    순대는 소나 돼지의 창자 속에 여러 가지 재료를 소로 넣어서 삶거나 쪄서 먹는 음식이다.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업기술서인 『제민요술』에도 그 기록이 보이며, 우리나라의 경우 빙허각 이 씨의 『규합총서』(1809)에는 쇠 창자찜, 『시의전서』(조선 말기)에 어교순대와 도야지순대 만드는 법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어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풍성 옥에서 만들어 팔던 백암순대

    ‘백암순대’는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지역에서 만든 순대를 총칭하는 말이다. 다만, 백암지역에서 순대를 언제부터 먹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현재의 ‘백암순대’는 60여 년 전에 ‘풍성옥’을 운영하던 이억조(여, 1909~1996)가 백암장이 설 때 순대와 국밥을 만들어 팔던 것이 시초라고 한다. 백암장이 열리는 매월 1일과 6일에만 먹을 수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면서 경기도 용인시의 향토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백암면 소재지에는 10여 곳의 식당이 운영 중이다. 식당 한 곳에 제조시설을 해놓고 순대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순대를 만들어 저장하였다가 파는데, 몇 대에 걸쳐 직접 만든 순대만을 판매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백암시장 순댓국
    백암시장 순댓국

    돼지 사육 농가가 많았던 백암면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에서 순대가 유명하게 된 이유는 한때 우리나라에서 돼지 사육 농가가 가장 많은 곳이 바로 백암면 지역이다. 110여 가구에 무려 15만 5천 마리를 사육하기도 하였다. 또한, 가까운 곳에 도축장이 있어서 순대의 주재료인 돼지의 부속물을 얻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 순대를 백암장에서 선보였다가 맛이 좋아 입소문을 통해 백암장의 명물이 된 것이다.


    각종 채소를 넣고 찌는 백암순대

    백암순대는 돼지의 선지와 호박·부추·숙주·두부·콩나물 등의 채소를 다지고 섞어서 갖은양념을 한 다음 돼지 창자 속에 꽉 차게 집어넣고, 실로 양 끝을 동여맨 후에 쪄서 만든다. 다 익은 순대는 새우젓으로 만든 양념장에 찍어서 먹는다. 일반적인 순대와 차이가 있다면 무엇보다도 다진 채소를 풍성하게 넣어 순대의 잡맛이 덜하고 담백하다는 것이다.

    백암시장 순댓국
    백암시장 순댓국

    시장 사람들 수고로움에 보상인 순댓국

    백암장에 와 소를 팔고 목돈을 쥔 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농촌에서 가져온 쌀, 달걀 등을 팔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따뜻하고 시원한 순댓국 한 그릇이 그 수고로움에 대한 보상이었다.

  • 피난지에서 만든 탕반, 돼지국밥

    돼지국밥은 경상도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음식이다. 또한 향토 음식의 하나로 지역을 대표하여 부산에는 돼지국밥 골목이 있다. 허영만은 만화 『식객』에서 돼지국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소 사골로 끓인 설렁탕이 잘 닦여진 길을 가는 모범생 같다면, 돼지국밥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반항아 같은 맛이다.” 돼지국밥 애호가인 부산의 최영철 시인은 “돼지국밥을 먹으면 숨어 있던 야성이 깨어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경상도 지역에서 돼지국밥은 다음의 3가지 방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대구식’인데 이는상대적으로 향신료와 내장을 많이 넣는다. 다음으로  ‘밀양식’은 뽀얀 색깔이 설렁탕을 연상시키는 국물로 대표된다. 마지막으로 ‘부산식[신창 국밥식]’ 인데 곰탕처럼 맑은 국물로 대표된다. 그러나 현재는 일부의 식당만이 이같은 특색을 유지하고 있고,  대부분 모든 방식이 혼합되어 있다. 


    돼지국밥의 정확한 유래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돼지 뼈로 우려 낸 육수에 고기와 밥을 마는 돼지국밥이 부산과 경상도 일대에 국한되고 1950~1960년대부터 급속히 확산된 것을 보면, 6·25 전쟁을 거치면서 그나마 구하기 쉬운 돼지 부산물로 설렁탕을 흉내내어 뿌리 내린 것으로 추측”된다는 설이다. 김상애 전 신라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돼지국밥은 자생적으로 태어난 향토 음식이라기보다는 전쟁과 피난이라는 혼란한 시대·환경적 토대 위에서 태어난 부산물로 보인다”라고 주장한다. 다른 하나는 “북한 지역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에 의해 북한 지역의 향토 음식이던 순대국밥이 유입되었고, 1960년대 이후 순대가 귀해져 순대를 대신하여 편육을 넣어 현재의 형태로 변형되었다는 설(1952년에 개업한 부산 돼지국밥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하동집’ 주인의 말)"이 그것이다.


    어쨌거나 두 가지 설은 모두 6·25전쟁과 관련되어 있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국에 밥을 말아먹는 탕반 문화가 있어왔는데, 피난지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로 만든 탕반이 돼지국밥이었던 것이다. 설렁탕의 변형이든, 북한 지역 순대국의 변형이든 전쟁이 낳은 음식이 바로 돼지국밥인 것이다. 2009년 부산 향토 음식점으로 서구 토성동에 있는 신창국밥, 북구 구포동에 있는 덕천 고가, 연제구 연산동에 있는 경주 박가 국밥이 지정되었다. 그리고 동구 범일동에 있는 조선방직 앞과 부산진구 부전동에 있는 서면 등지에 소위 ‘돼지국밥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 빨간 맛의 매혹, 함안 소고기국밥

    국밥은 한식 중에서 가장 서민적인 대중음식이다. 시골 읍내에 5일장이 서는 날은 국밥 한 그릇의 호사를 누리고 싶어 수 십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던 추억의 음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식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전통시대에 장터나 주막촌에서 가마솥을 걸어 놓고 팔던 국밥이야말로 우리나라 외식문화의 원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전통시대인 조선후기에는 장시가 발달하면서 장시가 증가하였고, 지방마다 큰 장시 인근에는 우시장이 섰다. 이러한 장시들을 중심으로 소고기를 재료로 한 국밥이 등장했는데, 경기도 안성, 충청도 공주, 전라도 나주, 경상도 영천과 함안이 대표적인 국밥의 고장이라 할 수 있다. 경상남도 함안군은 경상도식 소고기국밥의 본향이다. 물론 경상북도 영천시의 국밥도 유명하지만, 영천의 경우에는 소머리뼈로 국물을 내고 소머리고기를 얹어내는 소머리국밥이기 때문에 소고기국밥과는 차이가 있다.


    함안 소고기국밥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에 있던 우시장의 도축장에서 신선한 소고기와 선지를 즉시 공급받기 때문에 맛이 좋기로 유명하였다. 국밥용 소고기를 솥에 넣고 국물이 뽀얗게 우러날 때까지 육수를 끓인 후 선지, 콩나물, 무 등을 푸짐하게 넣고 매콤하게 끓여내어 대파를 얹고 후추를 뿌려 먹는 것이 바로 함안 소고기국밥이다. 재료 중 대가리를 딴 콩나물을 쓰는 것이 특징이다. 사실 콩나물은 대가리보다 뿌리부분에 아스파라긴산과 같은 영양분이 집중되어 있고, 자칫 딱딱한 콩나물 대가리가 국밥의 식감을 저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상남도 함안군이 소고기국밥으로 유명해진 것은 조선시대부터 함안이 교통의 중심지였던 것과 관계가 깊다. 조선시대에는 1407년(태종 7) 군사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낙동강 서쪽 성주에서 창원에 이르는 28개의 군현을 경상우도(慶尙右道)로, 낙동강 동쪽은 경상좌도로 구분하였다. 함안은 서쪽의 진주와 남해, 북쪽의 의령과 창녕, 동쪽의 창원과 김해, 남쪽의 마산과 진해를 잇는 경상우도 교통의 중심지였다. 특히 함안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 영의정 유성룡의 건의로 요해처로 삼아 방어선을 펼친 군사요충지이기도 했다.

    지금도 경상남도의 중앙에 위치한 함안군은 전통시대에 대구나 포항 등지에서 진주나 남해 쪽으로 가거나, 하동, 사천 등지에서 서울로 가는 사람들은 함안을 거칠 수밖에 없는 길목이었다. 5일과 10일에 서는 함안 5일장 옆의 가야시장은 50여 년 전만 해도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떠들썩했다고 한다. 이렇게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장시는 인원과 물류가 자연히 집중되고, 그에 따른 편의시설이 발달하기 마련이다. 함안 소고기국밥은 이러한 역사 지리적 배경 하에서 경상남도 함안군의 명물로 자리 잡은 향토음식인 것이다. 지금은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북촌2길 일대 함안장터 안에 한우국밥촌이 형성되어 있는데, 대구식당과 한성식당의 소고기국밥이 유명하다.


    재료

    사태, 양지, 홍두깨살, 선지, 무, 콩나물, 토란줄기, 매운 양념

    조리과정
    1. 1. 한우 사태와 양지, 홍두깨살 등을 3~4시간 정도 푹 고아서 육수를 만든다.
    2. 2. 소고기 육수에 무와 콩나물, 토란줄기, 선지 등을 넣고 은은한 불에 끊인다.
    3. 3. 건더기를 건져내고 육수만 한 번 더 끓인 다음 고춧가루와 갖은 양념으로 얼큰한 맛의 국밥을 말아 낸다.
  • 전통 5일장의 맛이 스며있는 백암순대

    백암순대는 원래 경기도 죽성(현재 안성시 죽산면 소재)지역에서 먹던 토속음식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죽성이 퇴조하면서 인근 고을인 용인 백암면의 5일장을 통해 전승되어 온 음식이다.

    백암장은 보통 ‘쇠전’으로 불리는 우시장이 유명했다. 정조의 정책으로 성장한 수원장과 더불어 용인 백암장은 2만 두 이상 거래되었던 곳이었다고 알려져 백암장의 당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백암시장 순댓국
    백암시장 순댓국

    백암순대는 함경도 출신의 이억조(여, 1909~1996)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쯤 ‘풍성옥’이라는 식당을 운영하며 국밥과 순대를 만들어 팔면서 알려지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백암장의 순대와 순대국밥은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져 백암장은 ‘순대 장’이라고도 불렸다. 이처럼 백암순대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공장에서 만드는 순대와 달리 순수 돼지 내장에 다양한 채소와 신선한 재료를 다져 넣고 직접 삶아 만드는 데 있다. 채소가 많이 들어간 순대는 그 맛이 담백하다. 백암순대가 유명해진 데는 순대의 재료가 되는 돼지 부속물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도 한몫하였다. 백암지역의 돼지 사육 두수가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순대는 영양이 풍부한 음식이기도 하다. 순대의 기본 재료인 선지와 돼지의 내장에는 철분과 단백질이 풍부하고 순대에 들어가는 채소에는 각종 비타민과 섬유소가 함유되어 있다. 게다가 찹쌀과 당면은 탄수화물을 공급해 주므로, 백암순대는 술안주나 영양식, 식사 대용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음식이다.

    2003년 백암순대는 ‘세계 최장 순대 만들기’에 도전하여 성공하였다. 200명의 참가자가 협력하여 길이 100m의 순대를 만들어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재료

    배추, 양배추, 무청, 당근, 양파, 부추, 마늘, 찹쌀가루, 쌀가루, 당면, 돼지고기, 선지, 돼지 소장, 소금, 참기름, 후추

    조리과정
    1. 1. 돼지고기는 갈아놓는다.
    2. 2. 배추는 절여서 다지고, 양배추는 양파와 같이 채를 썰어 준비한다.
    3. 3. 물에 불린 당면은 적당한 길이로 썰고, 준비한 채소들은 곱게 다진다.
    4. 4. 콩나물과 숙주나물을 잘게 다지고 두부는 으깨어 갈아놓은 돼지고기와 함께 섞는다.
    5. 5. 조와 찹쌀을 4의 재료와 함께 섞는다.
    6. 6. 준비된 재료에 선지를 섞고, 후추와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7. 7. 일정한 길이로 자른 돼지 창자는 뒤집어 소금과 밀가루로 깨끗이 손질한 다음 원래대로 뒤집어 놓는다.
    8. 8. 창자의 한쪽 끝을 실로 묶고 다른 한쪽 끝에 깔때기를 끼운 후 준비한 속 재료를 밀어 넣어 채운 다음 끌을 시로 묵는다. 창자에 속 재료를 많이 넣으면 삶는 도중에 터질 우려가 있으니 양 조절에 주의한다.
    9. 9. 끓는 물에 순대를 넣고 삶거나 찜통에 넣고 쪄낸다.
  • 임금님과 함께 설렁탕 한 뚝배기!

    조선시대 역대 왕들은 동대문 밖 전농동(지금의 동대문구 제기동) 선농단에 적전(籍田)을 마련하고 음력 정월 하순이 되면 종친, 신하들과 함께 선농단에서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낸 뒤 친히 밭을 갈아 보임으로써 농사의 소중함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일종의 권농행사를 하였다.

    행사 때 모여든 많은 사람을 대접하기 위하여 소를 잡아 통째로 큰 가마솥을 수십 개 걸어놓고 끓여서 뚝배기에 국밥을 말아 낸 것이 오늘날 설렁탕의 기원이라고 한다. 원래 이름은 선농단에서 유래된 선농탕이었는데 음이 변하여 설렁탕이 되었다. 항간에서는 설렁설렁 끓여서 설렁거리며 먹는다 하여 설렁탕이 되었다고도 한다.

    1929년 잡지 ‘별건곤’ 9월호에 ‘경성명물집’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시험으로 먹어본다는 것이 한 그릇 두 그릇 먹기 시작하면 누구나 재미를 들여 집에 갈 노잣돈이나 자기 마누라 치마 사줄 돈이라도 아니 사 먹지 않고선 견디지 못할 것이다.’ 라며 설렁탕의 매력을 소개한다.

    설렁탕

    설렁탕은 곰탕과 비슷한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곰탕은 고깃국물, 설렁탕은 뼛국물이라는 말도 있듯이, 설렁탕은 뼈와 도가니를 많이 넣고 끓이기 때문에 국물이 탁하고 희고 뽀얀 색깔이 특징이다. 반면 곰탕은 고기나 내장을 삶은 맑은 국물이 기본이다. 요즘은 설렁탕 음식점들이 전문화, 대형화, 체인화의 경향을 보이는 동시에 설렁탕을 전통적인 방법으로 끓이기 위해 가마솥을 설치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소비자들의 입맛을 잡으려 힘쓰고 있다.


    재료

    쇠머리, 쇠족, 사골, 도가니, 사태, 양지머리, 당면(국수), 양파, 대파, 마늘, 생강

    조리과정
    1. 1. 쇠머리, 쇠족, 사골, 도가니는 토막 낸 것으로 깨끗이 씻어 찬물에 1∼2시간 담가 핏물을 뺀다.
    2. 2. 큰 솥에 물을 붓고 끓이다가 1의 재료를 넣고 한소끔 끓어오르면 소쿠리에 쏟아붓고 물을 따라 버린다.
    3. 3. 다시 찬물에 위의 재료를 넣고 푹 고면서 깨끗이 손질해 놓은 양지머리, 사태 등을 넣어 끓이다가 거품을 걷어내고 대파, 생강, 마늘, 청주 등을 함께 넣어 약 불에서 은근히 끓인다.
    4. 4. 국이 충분히 고아져서 맛이 들면 고기는 건져 얇게 편육으로 썰고 국물은 식혀서 기름기를 건져낸다.
    5. 5. 삶은 국수나 당면을 같이 담아내거나 따로 곁들여 낸다.
    6. 6. 간을 미리 맞추지 않고 잘게 썬 파와 소금, 후추, 고춧가루는 따로 곁들여 낸다.
  • 영천장의 돔배기와 소머리국밥

    영천에 장이서는 날은 매월 2일과 7일이다. 영천장은 영남지역의 3대 시장의 한 곳으로 뽑힐 정도로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시장이며, 농산물과 수산물의 거래가 활발한 시장이었다. “잘 가는 말도 영천 장, 못 가는 말도 영천 장”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인근의 각 고을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이 빠른 말을 타거나 느린 말을 타도 결국 영천장에 가면 만난다는 의미다. 영천 장은 주변 장들에서 출발하는 물건들이 쉬어가는 중간 지점이었다. 그 중에서도 동해안의 생선은 반드시 영천장을 거쳐야만 군위, 안동, 달성, 경산까지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상어를 포로 떠서 소금에 절인 돔배기

    영천시장에 돔배기를 판매하는 점포가 밀집해 있어 ‘돔배기 시장’, ‘돔배기 골목’으로 불린다. 돔배기는 ‘간을 친 토막 낸 상어고기’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다. 상어고기를 ‘돔박 돔박’ 네모나게 토막 내어 썰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돔배기는 주로 구이와 산적 그고 조림으로 해서 먹는다. 경상도에서 보통 명절이나 제사상에 올리는 대표적인 생선이다. 경상도 일대에서만 판매되는 식재료로 전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곳이 영천이다. 동해안에서 잡은 상어를 영천으로 오기 전에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염장을 했기 때문이다. 영천시장에서 구입할 때에 상인에게 언제 쓸 것인지를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인들이 판매하려는 돔배기에다가 소금을 칠 때에는 계절, 날씨, 사용할 날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서 소금의 양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골을 우려내 끓여내는 소머리국밥

    영천에 오일장이 서면 가마솥을 내걸고 사골을 푹 우려 끓여내는 장터국밥집이 성시를 이뤘다. 영천의 장터국밥은 주로 소머리국밥이다. 소머리국밥이 유명한 것은 영천에 경상도 최대 규모의 ‘영천 우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천에는 1910년 이전에 개설한 우시장이 유명했다. 전국에서 ‘수원쇠전’ 다음으로 유명했다고도 한다. 50여년이 지난 요즘에도 영천공설시장 안에는 소머리국밥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여전히 커다란 가마솥에 소머리뼈와 사골을 넣고 10시간 이상 기름을 걷어가며 국물을 우려내고 다시 고기와 대파 등을 넣어 푹 끓여낸다. 이틀 정도 고아야 제대로 국물이 우러나오는데, 그래서인지 국물색이 진하고 맛은 담백하다. 이렇게 끓인 소머리국밥에는 배추 겉절이나 깍두기에 곁들여 먹으면 일품 맛이 된다.

  • 슬로시티로 유명한 창평의 담양창평시장

    슬로시티로 유명한 담양군 창평면에는 ‘담양창평시장’이 있다. 담양창평시장은 조선시대 개설되었던 ‘창평읍내장’의 전통을 잇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시장이다. 현재 상설시장과 매월 5, 10일에 열리는 오일장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주로 인근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비롯하여 지역의 특산물인 한과, 죽염, 쌀엿 등과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다. 또한, 담양창평시장에는 창평 맛의 명소로 입소문을 탄 ‘창평국밥거리’가 있다.

    담양 청평전통시장 입구
    담양 청평전통시장 입구
    담양 청평전통시장 슬로우시티 안내판
    담양 청평전통시장 슬로우시티 안내판

    담양읍내장의 상권에 편입된 창평읍내장

    창평 지역에서 언제부터 시장이 형성되었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1770)에 따르면 “창평 지역에는 창평읍내장과 삼지천장이 개설되었다.”라고 하며, 이때만 해도 “창평읍내장은 매월 1일과 6일에 열렸다.”고 한다. 창평 지역은 함평, 남평과 함께 전라남도의 3평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었지만, 1914년에 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창평 지역이 담양군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장날의 개시일이 5일과 10일로 변경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창평면 고읍리에 열렸던 창평읍내장은 담양군에 편입되면서 삼지천장’이 있던 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와로 만들어진 장옥이 아름다운 담양창평시장

    담양창평시장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창평의 ‘삼지내마을’이 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부터였다. 삼지내마을이 슬로시티로 지정된 것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전통음식과 옛 생활방식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삼지내마을에는 대나무를 이용해 만든 죽염 장류와 창평에서 생산한 쌀로 만든 ‘창평쌀엿’, ‘창평한과’가 유명하다. 이 모두 옛날 방식으로 만든 것이며, 담양창평시장에서 구매할 수 있다. 삼지내마을에서 서쪽으로 500m 거리에는 기와를 이용해 전통 가옥처럼 세운 장옥이 아름다운 시장인 담양청평시장이 있다.

    담양 청평전통시장 간판
    담양 청평전통시장 간판
    담양 청평전통시장 내부
    담양 청평전통시장 내부

    궁녀들의 제조비법으로 만드는 창평쌀엿

    담양창평시장에 유명한 것은 슬로푸드의 정수라는 쌀엿과 한과인데, ‘창평’이라는 지역의 이름이 붙을 정도로 창평을 대표하는 특산물이다. 예부터 담양은 땅이 비옥해서 좋은 쌀을 생산했으며, 쌀을 이용해 쌀 엿과 한과를 만들어 먹었다. 특히 ‘창평쌀엿’은 조선시대 양녕대군이 창평 지역에서 지낼 때 함께 왔던 궁녀들이 전수해준 제조비법을 현재까지 잇고 있다고 한다. 창평쌀엿은 바삭바삭한 식감과 입안에 달라붙지 않고 찌꺼기도 남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담양 청평전통시장 농산물판매장
    담양 청평전통시장 농산물판매장
    담양 청평전통시장 물품
    담양 청평전통시장 물품

    순대와 돼지고기를 넣은 창평국밥

    담양창평시장은 순대와 돼지고기를 가득 넣은 ‘창평국밥’으로 유명하다. 창평에서 돼지국밥을 팔기 시작한 것은 시장 내에 우시장과 도축장이 있어 국밥의 재료인 신선한 돼지 부속물을 손쉽게 구할 수 있어서였다. 처음에는 끓는 물에 돼지 피를 넣고 콩나물과 무를 뚝뚝 잘라 넣어 고춧가루를 풀어 밥을 말아 먹던 게 원조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장이 서면 간이 국밥집도 차려졌지만, 지금은 시장 내에 국밥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값싸고 푸짐한 국밥 한 그릇은 시장을 찾은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채워준다.

    담양 청평전통시장 국밥
    담양 청평전통시장 국밥
    담양 청평전통시장 장터국밥
    담양 청평전통시장 장터국밥

  • 우아한 혼밥, 돼지곰탕에 고추지 다짐이면 충분

    때론 식사(食思)에 집중하고 싶을 때가 있다. 만남이 한데 섞여서 식사가 일이 되는 경우가 아닌, 오롯이 음식을 즐기는 시간.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식탁 위의 나물반찬의 이름은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하면서 음식을 만든 사람의 정성까지 살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서울의 서교동 주택가에는 열 평 남짓한 돼지곰탕집이 있다. 2017년에 창업 후, 짧은 기간에 유명해진 옥동식 돼지곰탕 전문점이다. 


    “15년 동안 요리사 생활을 하며 지치고 힘들었던 어느 순간에 ‘식당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 달 시행착오를 거쳐 메뉴를 완성했고 식당 창업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3개월 동안 하였습니다. 직원 없이 혼자 운영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한 가지 메뉴로 운영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테이블이 아닌 바(bar) 형태의 테이블이 필요했고 좌석도 열석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음식을 만든 사람이 직접 서비스를 하면 그 음식에 대한 가치를 손님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옥동식(남, 46세) 대표는 식당 운영의 효율성을 강조한다. 식당을 운영한다는 것은 음식의 맛과 영양은 기본이고 자원관리와 고객 서비스, 수익성 등을 고려해야 하므로 이 공간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돼지곰탕이라는 한 가지 메뉴에만 집중할 수 있는 현재의 운영시스템은 당일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여 식재료의 원가 관리가 수월하다는 이야기이다.

    마포 돼지곰탕

    식당 자리가 열 석, 자리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맛을 즐기기 위해 찾는 손님들이 꽤 많다. 식당 밖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기대감은 조바심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가면 밖의 분위기와 다른 평온하고 여유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긴 바를 따라 몇 명의 손님은 어깨를 맞대고 재즈 음악 속에 묻혀있고 필자의 옆에 앉은 젊은 연인은 잔술을 부딪치며 소곤거린다.


    오렌지 빛의 조명 아래, 따듯한 보리차와 고추지 다짐, 김치 그릇이 차려졌고 수저받침 위에 수저가 가지런하게 놓였다. 곧이어 놋그릇에 담긴 주인공이 등장한다. 잠을 자던 밥알들이 얌전하게 돼지고기 밑에 눌려있다. 그 위에 송송 썬 파를 보기 좋게 올렸다. 필자는 관리하기 어렵다는 놋그릇을 사용하는 주인장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국밥 한 그릇이라도 예(禮)로써 대접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탕을 파는 식당에서는 설설 끓는 곰탕의 온도를 뜨끈하게 유지하기 위해 오지그릇에 담아낸다. 옥동식 대표가 생각하는 그릇에 대한 선택 기준은 이와 다르다. 정성껏 만든 국밥의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너무 뜨거워서도 차가워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좋은 재료로 만든 좋은 그릇에 음식을 담아서 손님을 대접하고 싶었다.


    “뚝배기는 뜨거운 국물에만 신경을 쓴 것 같아요. 뜨거우면 맛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사람의 미각은 온도에 따라 맛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데요, 따듯한 국물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적당한 온도는 60도에서 65도라고 해요. 돼지곰탕을 손님에게 서비스할 때 65도 안팎을 유지할 수 있는 그릇이 유기그릇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토렴을 하는 이유도 그 온도를 유지하기 위함이죠.” 

     

    그런데 왜 돼지국밥이 아니라 돼지곰탕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돼지국밥처럼 내장과 뼈를 사용하지 않고 국내산 흑돼지(버크셔 K)의 앞다리와 뒷다리 살만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품종은 잡내가 적고 아미노산이 많아 감칠맛이 풍부해 국물요리에 좋다. 사용하는 조미료는 단지 소금뿐이다. 투명하고 맑은 국물은 무색무취(無色無臭)의 담백함만 남았다. 얇게 저민 살코기는 쫄깃하고 부드럽다. 만약 반찬이 필요하다면 고추지 다진 것을 고기 위에 조금 올려 깊은 젓갈 향을 음미해도 좋다. 고추지 다짐은 새우젓과 소금, 고추를 섞어 일주일 동안 발효한 것을 다져서 만든다. 요즘은 혼자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곳에서 혼밥을 할 때는 남의 시선에 부담 갖지 않고 수줍어할 필요도 없다. 나 홀로 우아하게 앉아 돼지곰탕의 맛에 온전히 빠지면 된다. 향긋한 보리술 한 잔을 말벗으로 앞에 두어도 좋을 터이다. 아무도 그것을 방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