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궁중음식이 궁중 나인과 양반들을 통해 서민들에게 전해져 발전된 향토음식 이야기
떡갈비는 왕실 사람들이 섭취하기 편하게 소고기를 잘게 다져서 양념하여 구워 먹는 궁중음식이었다. 전라도 지방에는 610여 년 전 담양에 유배된
사대부가 떡갈비를 전하였고, 경기 지방에는 1910년을 전후하여 궁궐에서 방출된 나인들이 떡갈비를 전하였다.
송정 떡갈비는 1950년대에 궁중 떡갈비를 서민의 음식으로
발전시킨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향토음식이다. 궁중에서 귀하신 분들이나 먹던 고급스런 떡갈비가 광주의 송정에서 서민들을 위한 가장 서민적인 향토음식으로 거듭나면서, 현재는 다른 지역의
떡갈비를 넘어서 전국적으로 떡갈비의 대명사라는 명성을 얻기에 이르렀다.
길거리나 분식집에서 편하고 쉽게 즐길 수 있는 떡볶이는 원래 궁중에서나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쇠고기나 쌀떡을 이용한 떡볶이는, 먹거리가
귀했던 시절 일반 서민들과는 동떨어진 음식이었다.
떡볶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세기 말의 요리서인 『시의전서』에서 볼 수 있는데, "궁중에서 흰떡과 쇠고기, 참기름,
간장, 파, 석이버섯, 잣, 깨소금 등으로 떡볶이를 만들어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궁중 떡볶이가 그 시작이다. 궁중 떡볶이는 고기와 채소가 어우러져
영양학적으로도 균형 잡힌 음식이다. 궁중에서 떡볶이를 만들 때 고추장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매운 맛이 사람을 흥분 시키는 특성이 있어, 나랏일을 돌보는 왕에게는 가급적 매운 맛의
음식을 올리지 않은 데서 찾을 수 있다.
두텁떡의 유래는 1795년 정조대왕이 그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칫상에 올린 바가 있어 정조대왕의 효심이 담긴 떡으로도 알려져 있다.
두텁떡은 궁중에서 내려오는 떡으로 일반 백성들이 먹지 못할 만큼 재료가 비싸며 공을 듬뿍 들인 떡이다.
두텁떡은 떡고물이 흩어져 있고 모양이 깔끔하지는 않지만 먹어 본 사람이
아니면 그 맛을 알 수 없을 만큼 맛있는 떡이다. 떡을 시루에 안칠 때 보통 시루떡처럼 고물과 떡가루를 평평하게 안치지 않고 작은 보시기 크기로 하나씩 떠 낼 수 있게 소복소복하게
안쳐 봉우리떡이라고 하며, 편편히 썰어 먹는 것이 아니라 도독하게 하나씩 먹는다는 뜻으로 두꺼울 후(厚)자를 붙여 후병이라 하며, 합병은 소를 넣고 뚜껑을 덮어 안치는 격이므로
그릇 중 합과 비슷한 모양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타락죽은 곱게 갈은 쌀과 우유를 재료로 만들었는데, 조선 시대 왕실의 보양식으로 이용되어 왔다. 조선 시대 궁중에서는 임금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초조반(初朝飯) 또는 자리조반이라고 하는 이른 아침을 올렸다. 이때는 부담이 덜한 미음이나 죽을 올렸는데, 죽으로는 타락죽, 잣죽, 흑임자죽 등이 대표적 음식이었다. 쌀을 갈아 우유와 섞어 만든 타락죽은 보양식으로 취급되어, 10월부터 정월까지 음식을 담당하는 소주방이 아닌 내의원에서는 만들어 왕에게 올렸다.
자세히보기어육장은 궁중에서 왕실을 위해 담근 특수 장류 중 하나로 육류와 식물, 해산물로 제조된다. 전통 장류의 식물성 단백질은 동물성 단백질에 비해
인체에서 이용되는 낮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궁중 장은 궁중에서 왕실을 위하여 담근 장으로 일반 장과는 재료와 제조방법이 다른 장류였다. 어육장에 관해서는 일부 문헌에 전해져 오고
있으나, 어육장의 제조법을 전통 계승한 사람은 찾아 보기 힘든 실정이었다.
그러나 과거 흥선대원군 집안과 밀접한 관계였던 사대부가에서 태어나 어머니로부터 어육장 제조법을
전수받은 권기옥 명인(전통식품명인 37호 지정)이 전통 어육장 제조 방법을 계승하여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