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신앙은 한 마을 사는 사람들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마을사람들이 함께 행하는 신앙을 말한다.
오랜 세월 동안 마을을 수호해주던 신과 제의를 알아보며 사라져가는 마을신앙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보는 이야기다.
마을신앙은 지역과 제의 방법, 모시는 신 등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주로 경기도에서는 도당제, 경상도에서는 골멕이제, 전라도 지역에서는 당산제라고 하며, 제의를 성황제 또는 서낭제로 부르는 곳도 있다. 이처럼 마을신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모두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한다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당산제는 전라도 지역의 마을신앙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경상도 지역이 골멕이신으로 대표된다면 전라도 지역에서는 당산신이 마을의 주신으로 모셔진 경우가 많다. 당산제의 주신인 당산신은 주로 당산할아버지나 당산할머니로 구체화된다. 그렇다고 반드시 이 두 개의 신만으로 표현되는 건 아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다른 명칭으로 당산신을 부르기도 한다. 또한 두 신이 함께 모셔진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한 분만을 마을신으로 모시는 지역도 적지 않다.
자세히보기당산신의 신체 역시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당집 안에 그림으로 모셔져 있기도 하며 구체적인 신체를 지닌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주로 나무로 표현되는데 흔히 당산나무라 부르는 것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무엇보다 여러 당산신의 한 곳에 모여 있는 지역도 있다. 개별 신들의 역할이 각자 다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산신을 대상으로 한 마을신앙을 당산제라 부른다. 워낙 다양한 형태의 당산제가 전라도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긴 하나 대체로 풍물패를 앞세워 당산신이 좌정한 곳을 찾아가 제의를 지낸 다음 다양한 놀이와 의식을 행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제의와 놀이가 바꿔 진행된다. 놀이의 경우는 농경 지역인 관계로 줄다리기가 많이 등장한다. 줄다리기로 유명한 부안읍 동문안의 당산신은 솟대당산 1기와 한 쌍의 석장승을 합해 3기의 당산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신체(神體) 가운데 동문 안 마을의 주신은 솟대당산이다. 전라북도의 고창 오거리 당산제는 마을의 다섯 곳에 위치한 당산이며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가족 당산형태로 알려져 있다. 매년 정월 대보름 제의가 행해지며 지역마다 각자의 당산제를 지낸 다음 읍내로 나와 동부와 서부로 나눠 고싸움과 줄다리기를 하고 연등놀이도 함께 진행된다.
서낭은 민간신앙의 대상신 중의 하나인데, 개인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공동체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서낭제는 공동체 신앙의 대상인 서낭신을 주신(主神)으로 하여 지내는 민간신앙 형태로 이루어지는 공동체 의례를 말한다.
자세히보기서낭신은 주로 신성하다고 인식되는 나무와 돌을 쌓은 돌무더기로 나타난다. 이러한 서낭당의 모습은 전국에서 발견된다. 이와 달리 나무 옆에 당집을 짓고 그 안에 신의 이름을 쓴 신위(神位)나 서낭신을 그림으로 그린 무신도나 혹은 말 모형을 모시는데, 서낭신을 당에 모셨다고 하여 서낭당이라고 한다. 서낭신을 말 모형으로 표현하거나 서낭신을 나타낸 무신도에서 말이 등장하는 것은 서낭신이 나그네의 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낭신은 주로 마을의 경계에 위치하여 외부로부터 마을 내부로 들어올 수 있는 좋지 않은 재난, 나쁜 기운 등을 막는 기능을 가진다. 이와 달리 길가나 고갯마루에서 있어서 나그네들의 안전을 보호해주는 노신(路神)적 성격 역시 가졌다. 이 경우는 개인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존재했다.
서낭제는 공동체 의례로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서낭신을 마을 수호신을 모신 곳은 주로 강원도와 경상도의 산간 지역과 동해안 지역이 해당된다. 여기에서는 서낭신을 골매기서낭이라고 한다. 제의는 주로 유식제의와 무당굿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무당굿이 있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의 의례는 골매기서낭신 을 주신(主神)으로 모시더라도 제의의 이름은 대부분 별신제 혹은 별신굿이라고 한다. 이와 달리 ‘하회별신서낭제’와 ‘단오서낭제’의 경우 제의의 이름에서도 서낭제라 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의의 양상은 성격과 기능은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도모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부군당제는 서울의 대표적인 마을신인 부군을 모시는 마을당에서 행해지는 제의를 말한다. 부군당이 서울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서울에서는 현재 마을당을 의미한다는 것이다.조선시대 각 관아에 부군당이 존재했었고, 조선의 수도 역시 서울이었기 때문에 서울에 부군당이 압도적인 숫자로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각 관아의 부군당이 어떻게 민간화되어 마을당으로 전환되었는지, 그리고 서울에서도 한강변을 중심으로 집중 분포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자세히보기부군당은 한자로 부군당(府君堂, 符君堂)·부근당(付根堂) 등으로 표기되는데, 그 어원이나 의미 역시 밝혀져 있지 않다. 이러한 한자 표기는 각사 신당의 부군당에서 서울의 부군당이 유래됐다고 보는 것이 다. 먼저 부군(府君)을 중국 한나라 때의 태수(太守)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부군을 관직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다음으로 조선시대 서울 관아의 부군당에서 나무로 만든 남근(木莖)을 모셔 두었는데, 여기에서 부근당(付根堂)이라는 말이 유래하여 부군당(府君堂)으로 변했다고 보는 것이다.
부군은 부군(내외)으로 모셔지기도 하지만 ‘김유신, 남이장군, 최영장군’처럼 실존인물이 모셔지기도 한다. 부군당은 모두 어느 정도 규모를 가진 당집으로 존재하며 그 당집 안에 주신인 부군은 무신도로 모셔진다. 이때 부군 외에 부군당굿에서 함께 모셔지는 산신이나 장군신 등이 함께 모셔져 있다.
제의는 주로 음력 1월 초나 10월 초가 일반적이지만 2월 1일, 7월 1일 3월이나 4월에 지내기도 한다. 최근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이기 쉬운 날로 제일이 바뀌기도 하고 무당굿 형식에서 유교식 제의로 변모하 는 경우도 있다. 또한, 1년에 여러 번 행하던 제의를 1번으로 줄이거나 매년 하던 제의를 격년으로 줄이기도 한다.
우리나라 마을신에는 산신과 같이 자연을 신으로 삼는 형태가 지역별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 밖에도 이성계, 김유신과 같은 역사 속
실존 인물과 미륵신, 영등할망과 같이 허구적인 인물을 신으로 모시기도 한다.
마을을 지키는 장승신은 전국적으로 나타난다. 이정표 역할을 벗어나 점차 마을신으로 모셔지고 있는데 신체의 양상은 나무를 비롯해 돌 등의 재질로 표현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장승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와 고려시대의 문헌에 장승과 관련된 기록이 보인다. 정확히 어느 무렵부터 장승이 라는 용어로 정착되었는지 모르지만 장생(長栍), 장생우(長栍偶), 후(堠), 장성(長城/長性), 장선주(長先柱), 장선(長仙), 댱승, 쟝승, 장신 등 용어가 매우 다양하다.
자세히보기장승이 신으로 모셔진 경우는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구분된다. 장승 그 자체가 신인 곳이 있는가 하면 장승으로 신의 형체가 표현된 것이다. 여러 지역의 마을신 가운데 장승을 마을신의 신체로 생각하는 곳들이 있는데 이런 양상은 비교적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장승의 재료는 크게 돌로 만든 돌장승과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 있다. 돌로 만든 장승은 영구적 성격이 강하자만, 목장승운 일 년 혹은 2-3년 마다 교체를 한다. 마을주민들은 새로 장승을 새로 교체할 경우 산에 올라가 적당한 나무를 고른다. 여러 가지를 잘 살핀 다음 적당한 나무를 정하고 나면 베어내기 전에 간단히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일반적인 모습이다. 베어낸 나무는 마을로 가져와 잘 다듬은 다음 기존에 있는 것과 교체를 한다.
장승은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수 있는데 남자장승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여자장승에는 地下女將軍) 등을 적어 마을의 잡귀를 내쫓는 의미를 강화하였다. 장승을 신으로 모시고 제의를 지내는 곳으로는 경기도 광주의 엄미리 마을,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수척마을, 충남 부여군 홍산면 북촌리 마을 등이다. 장수군 수척마을의 경우는 음력 정초에 날을 받아 한 쌍의 장승을 준비하여 제의를 지낸다.
산신과 관련된 신앙을 흔히 산신신앙이라 부른다.
마을신으로 모셔진 신들 가운데 가장 분포도가 높고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신이 바로 산신이다.
산신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산’과 관련된 신다. 인물신이 아닌 자연신이긴 하나 할아버지와 호랑이가 함께 모셔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인물신적 성격을 지니 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어느 마을이든 자기들과 관련된 산에 산신이 있다고 믿는다. 물론 이런 양상은 시대가 흐르면서 바뀌기도 하였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긴 하나 인물신 보다는 산신이 더 오래전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사실은 비교적 여러 지역 의 마을신앙에서 엿볼 수 있다. 산신이 머물러 있었으나 후대에 산신을 몰아내고 인물신이 모셔져 있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나라를 세운 위대한 왕이나 용감하게 적을 무찌른 훌륭한 장수들은 산신이 되어 국가를 보호하고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기에 산신이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한 셈이다. 이것은 결국 신을 모시는 주체자들에 의해 신이 바뀜을 보여주는 동시에 산신이라는 비교적 추상적인 신보다는 주민들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인물을 신으로 교체한 사례로 보면 된다. 연평도 지역에서 모셔진 임경업 역시 산신을 대신에 후대에 연평도의 마을신으로 모셔진 경우이다.
현재의 산신신앙은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각 가정에서 행하 는 고사가 있으며 다른 하나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행하는 산신제이다.
마을 고사의 경우는 강원도와 경상북도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산메기다. 이들 모두 산에 모셔진 산신을 숭배하는 의례라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제의를 지내는 대상과 규모에서 차이를 보인다.
지역을 대표하는 산신제로는 경기도의 김포김포읍북변리 산신제, 강원도의 화천장 서면구운리산신제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1리 북창 마을 산신제, 전라북도 무주내창마을산신제 등이 있다.
실제적인 동물이 아닌 상상의 동물인 용을 마을신으로 모셔진 곳은 그 수를 헤아리기 조차 어렵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비교적 여러 지역에서 용을 마을신으로 모시고 있다. 용이 지닌 특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 물(水)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수신인 셈인데 생업 과정에서 물이 중요한 농촌이나 어촌 지역 주민들은 용을 특별한 대상으로 여긴다. 비교적 여러 지역의 신으로 모셔진 용은 다양한 신체로 표현된다. 특히 농사와 밀접하게 관련된 지역에서 용은 줄다리기로 표현되기도 한다.
자세히보기줄을 용의 형체로 인식하는 것인데 전라도 지역의 당산제에서 행해지는 여러 형태의 줄다리기가 대표적인 양상이다. 용의 신체인 줄을 마을의 또 다른 신인 당산 할아버 지나 할머니의 신체에 둘둘 감아 둔다. 일부 학자들인 이러한 양상에 대해 특별한 대상인 용신이 마을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하기도 한다.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인데, 물을 관여하는 용신이 마을을 떠나면 한 해 동안 어려움이 많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용의 또 다른 능력은 자연의 조화를 맘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설화를 보면 용이 비가 내리도록 하거나 마을에 질병을 퍼뜨리기도 하고 인간들에게 저주를 내리기도 한다. 이러한 능력을 지닌 용을 잘 달래면 인간이 원하는 바를 해주기도 하는데, 결국 마을주민들이 용에게 제의를 지내는 것은 그런 맥락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미래를 구원해주는 불교의 미륵이 마을신으로 모셔진 경우이다. 우리나라의 마을신앙을 보면 다양한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민간신앙 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일반인들 사이에서 이어져오던 탓에 도교를 비롯한 불교 등의 영향이 여러 가지 형태로 미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민간신앙이 이들 종교에 영향을 준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양상이 사찰에 가면 볼 수 있는 산신각이다.
자세히보기마을신 중에서 다른 신들과 달리 종교적 속성이 두드러진 신이 바로 미륵이다. 흔히 ‘미륵불’로 알려져 있는 미륵은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57억 년 후에 세상에 출현하여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이다.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이 신앙이 형성되었 는지 알기 어려우나 희망의 신앙으로 수용되어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에는 미륵을 신으로 모셔지고 있는 지역이 적지 않다. 미륵을 마을신으로 모시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은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 아차동 마을인데 이곳에서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아차동 마을에 내려오는 이야기
아차동 마을에는 밤만 되면 대나무 밭에서 해괴한 울음소리가 났다. 주민들은 그 대나무 밭을 가보니 미륵 같이 생긴 바위에서 울음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마을의 연장자였던 할아버지가 그 바위 앞에 앉아 기도를 하면서 미륵 바위에게 우는 이유를 물어보 았다. 할아버지는 지속해서 계속 절을 하니 신기하게 울음이 멈췄다.
그날 밤 할아버지는 꿈을 꿨다.
미륵할머니가 나타나 자기가 마을의 신인데 주민들이 홀대를 하고 있으니 내가 기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면 재해를 물리쳐 주겠노라 이야기를 하였다. 주민들은 그의 말에 따라 제당을 지어 주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최영(崔瑩, 1316년~1388년)은 고려 말기의 장군이다. 고려 말기에 이성계와 대립하다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이후 권력을 잡자 이후 처형되었다.
이성계는 개국 이후 6년 만에 최영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넋을 위로했다.
"금(金)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인 최원직의 유언을 평생토록 지켜 청렴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번지 에 있는데 경기도 시도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 풀이 나지 않는다고 하여 적분(赤墳)으로 유명하다. 최영은 생전에 내가 탐욕을 했다면 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내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묘가 적분으로 불리는 것과 위의 일화는 그의 청렴함에 대한 민중들의 믿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가 죽자 많은 백성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고 한다. 죽음 이후 최영은 그가 죽은 고양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중부지방에서 중요한 장군 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경기도 개성의 덕물산에 최영 장군을 모셨던 장군당을 들 수 있다. 살아생전의 그의 청렴함과 함께 그의 죽음이 가지는 억울함과 원한이 그를 신이 되게 하였다고 한다. 최영 장군이 억울하게만 죽었다면 신으로 모셔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죽은 뒤에 공덕을 칭송하여 주던 이름인 시호를 이성계에게 받았다는 것을 통해 그의 억울하고 불명예스러웠던 죽음의 한이 어느 정도 풀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점에서 최영 장군이 무속에서 신으로 모셔질 수 있었던 것은 억울하게 죽었지만, 후에 그 억울함이 해소되어 억울 하게 죽은 다른 영혼들을 위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무속에서는 ‘최영 장군신’을 ‘최일 장군신’이라고도 한다. 서울 지역에서는 최영 장군을 ‘상산’이라고도 한다. 서울 굿에서 부르는 노래의 하나인 노랫가락은 주로 높은 신격에게 바치는데, 그중에는 최영 장군에게 바치는 ‘상산 노랫가락’이 있다. 특히 서울 굿의 초반부에는 상산 장단에 맞추어 굿을 의뢰한 사람들이 굿에 모셔진 신에게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하는 절차가 엄숙하고 중요하게 진행된다. 서울 굿에서 최영 장군이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무속 신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모시는 무신도를 보면 최영 장군은 손에 삼지창이나 월도라는 칼을 들고 있거나 말을 타는 등의 위엄있는 장군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을신으로 모셔진 신 중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인물이 적지 않다.
충청남도 외연도에 모셔진 전횡장군이 그렇고 서울의
동묘 등에 모셔진 관우 역시 그런 유형에 속한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관우는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장군이다. 『삼국지 연의(三國志演義)』에는 충신으로 등장한다. 관우장군이 신으로 모셔져 있는 곳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그가 태어난 중국을 비롯해 동남아 여러 국가이다.
중국에서는 관우장군의 충군으로서의 면모를 본받고 그가 지닌 청룡언월도의 위력을 얻고자 관우를 신으로 모시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그의 용맹한 부분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관우 장군의 용맹함과 장군으로 서의 의리 등이 그가 훗날 신으로 모셔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인 셈이다.
본래 중국에서 신으로 모셔졌던 관우가 우리나라에서 모셔지기 시작한 시점은 임진왜란 이후일 가능성이 크다. 임진왜란 무렵 관우가 자주 나타나 전쟁을 도왔던 것이 계기가 되어 그를 신으로 모시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장군으로서 관우의 뛰어난 능력 때문으로 보이는데 이런 일이 있은 후 서울에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동묘·서묘·남묘·북묘가 생겨났다. 우리나라로 유입된 초기에는 왜병(倭兵)과 명(明) 원군(援軍)이 전쟁을 치른 곳곳이었다. 고종 때까지는 평양, 경북 성부, 안동, 남원, 강진, 동래, 강화도, 개성 등에 관우의 사당이 세워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우는 민간에서 신으로 모셔지기 시작했는데, 조사 자료에 따르면 충북 영동군 영동읍 당곡리, 전남 여천군 남면, 충남 홍성군 홍북면 산수리에서도 관우를 신으로 모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