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생활사에 필수 소통 창구 길, 과거 우리나라에서 사람을 비롯한 다양한 대상이 옮겨 다녔던 옛길에 대한 특징과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배경사진:경기수원화성장안문(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삼국시대에 한반도에 전래된 불교가 신라로 전해지던 통로,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선비들, 다양한 물건을 짊어지고 나르던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길 등 옛 도로는 사람과 물자, 문화를 전하던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조선은 개국 초기에 도로에 관한 많은 것을 고려 시대부터 전해져 오던 대로 유지했지만,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 중심의 도로에서 한양 중심의 도로로 바꾸었다. 조선 시대의 도로는 전국에서 나라에 바치는 물건과 세금을 운송하던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왕실을 지키는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한양에서 각 지방을 연결하던 도로는 외방 도로라 불렸다. 간선 기능을 수행했던 외방 도로는 생각만큼 폭이 넓지 않은 소로였지만, 일부 도로는 중국 및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사람의 이동이 많아졌고 북부지방 및 남부지방까지 확대되면서 도로의 폭이 넓어지기도 했다. 도로처럼 넓었던 것은 아니고 물건을 실은 수레가 한 대 겨우 지날 수 있을 만큼의 폭에 불과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6개의 대로가 방사상으로 만들어졌으며, 조선 후기 들어서는 10개의 대로를 확립했다. 도읍지인 한양과 그 주변 지역이 육상 교통로와 물길을 통한 중심지로 기능하면서 한강 하류 지역은 한반도 교류의 중심지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 왔다.
자세히보기조선 시대에는 한양과 지방의 주요 행정 중심지 및 군사기지를 잇는 교통·통신 기관으로 운영되었던 역로가 있었고, 역로를 수십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구역마다 하나의 중심역을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구역을 역도(驛道)라 불렀으며, 역도 내 여러 역 가운데 중심이 되는 역을 찰방역(察訪驛)이라 하였다.
역로는 한양과 지방의 주요 행정 중심지 및 군사기지를 잇는 교통·통신기관으로 운영되었다. 조선 시대의 역로 중에서는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는 간선도로가 중요했으며, 대체로 10대로의 일부 구간이 하나의 역로로 구분되었다. 조선 시대의 역로는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김에 따라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의 역도 체계를 개편했으며, 고려 시대의 6과 22역로 체계를 41역도 543역으로 고쳐 지방별로 역도를 분할하고 속역을 신설했다. 역로는 보행자 위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도로의 폭이 일정하지 않았고,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는 통과하기가 힘들었다.
역로의 숙박시설에는 각 지방의 군현에 있던 객사(客舍)와 역도의 중간중간에 설치되었던 역에서 관리하던 관(舘)이 있었으며 별도로 하급관리나 일반인이 묵을 수 있는 원(院)이 있었다. 원에서는 땔나무와 물만 제공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먹을 식량을 직접 가지고 다녀야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부터는 정기시장이 확산되고 행상과 길손이 많아지면서 교통의 요지에는 사설 숙박업소가 돈을 받고 숙식을 제공하는 주막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원이 있던 곳에 주막이 들어선 주막촌 가운데에는 크게 성장한 곳도 있는데, 장호원·조치원·점촌 등이 대표적이다. 새로 생긴 주막촌에는 말죽거리·떡점거리·주막거리 등의 이름이 붙기도 했다.
자세히보기조선은 육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초기부터 역에 관한 제도를 정비했다. 역로를 수십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구역마다 하나의 중심역을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구역을 역도(驛道)라 불렀으며, 역도 내 여러 역 가운데 중심이 되는 역을 찰방역(察訪驛)이라 하였다. 찰방은 각 도의 역을 관리하던 종6품의 관리직이었으며, 조선 초기에는 23명의 찰방이 있었다. 찰방의 임기는 대체로 2년이었다고 한다.
역은 기본적으로 행정 및 군사 공문서의 전달에 필요한 시설과 인원을 제공했고, 왕의 거동, 사신의 왕래, 지방 관리의 부임, 공물 수송 등 공식적인 업무와 관련된 일을 수행했다. 이 때문에 역은 도로변에 위치하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역이 도로변에 자리했던 것은 아니며, 찰방역도 반드시 역도의 중앙에 위치하지 않았다. 역 주변에는 역에 근무하던 사람과 그들의 가족을 구성원으로 하는 역촌이 형성되었다. 한편 규모가 작은 역에는 역장이 있었고 찰방은 이들을 관리했다. 규모가 큰 찰방역은 독자적인 상업취락과 장터를 가지기도 했으며 독자적인 영역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국가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역 주변에 형성된 역촌의 경제적 기반은 토지였으며, 역촌은 자급자족적 농촌 마을의 형태를 보였다. 따라서 장시는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는 중요한 교환 장치였고, 규모가 큰 역촌은 상인들에게 있어서 주요한 시장이었다.
자세히보기한 장소와 다른 장소를 연결시켜 주는 길은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고, 부족한 물자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해준다. 우리나라의 길은 시간의 흐름속에서 다듬어지고 확장되어 이제는 자동차의 통행에도 전혀 불편함이 없다. 그러나 걸어서 다니던 옛날에 선조들이 이용했던 길은 아무리 사소할 지라도 무언가 사연을 품고 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사연을 간직한 길을 걸으면서 현대와 과거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한다.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사연을 간직한 옛길은 고갯길이 많고, 생필품을 운송하는데 사용되었던 옛길도 여럿 남아 있다.
자세히보기옛 도로는 왕이 병을 치료하러 가거나 왕실에서 릉에 알현하기 위한 능행길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왕이 질병을 치료하러 떠나던 온행길
온행(溫幸)이란 나라의 왕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으로 가는 행행(行幸)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 온천은 여러 질병을 치료하는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왕은 물론 일반 백성들도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을 찾는 일이 많았다. 왕실에서는 나라의 왕이 경솔하게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한양과 가까운 경기지방에 있는 온천으로 가는 것을 좋아했다. 국왕이 궁궐을 비우고 한 달 이상을 궁궐 밖에서 생활하는 일은 우리나라에 전쟁이 났을 때를 제외하면 온행 때 밖에 없었다고 한다.
조선의 왕들이 갔던 온천은 경기도 이천시의 이천온천, 충청북도 충주시의 수안보온천, 충청남도 아산시의 온양온천 등지이며, 이 3개 온천은 조선 왕조 3대 온천으로 꼽힌다. 온양온천은 이동로가 평탄해서 왕들이 특히 자주 방문했다. 세종은 풍질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의 온천으로 행차를 자주 했는데, 그 고을의 민폐를 줄이기 위해 왕실이 이용할 욕실과 침실 공간을 별도로 만들었다고 한다. 세종의 뒤를 이어 세조도 온양의 온천으로 온행을 다녔다. 온양행궁에는 세조가 온천 용출을 상서롭게 여겨 세운 ‘신정비’가 있다.
자세히보기정조가 릉을 참배하기 위해 지나가던 길
정조가 광릉을 참배할 때 통과하던 축석령은 축석령을 넘는 길은 금강산 유람을 가던 선비들이 이용하기도 했고, 죄를 지어 북쪽의 오지로 귀양을 가던 사람들이 지나던 귀양길이기도 했다. 축석령을 넘던 길은 통행량이 많았으므로, 경흥로 변에 있는 포천시 송우리에는 커다란 주막촌이 생기기도 했다. 축석령은 조선시대 양반들이 여행을 하는 길에 하룻밤 숙박을 했던 곳이다. 조선시대 정조는 광릉을 알현하고 돌아오는 길에 축석령에 당도해 행렬을 멈추고 같이 간 신하들에게 “이 고개는 곧 백두산의 정간룡(正幹龍)이요, 한양도성을 지나는 협곡이다. 좌우의 산봉우리들이 선명하고 아름다우며 빼어나고 윤택하여 마치 규장(珪璋)같기도 하고 관패(冠佩) 같기도 하고, 층층이 공중에 핀 연꽃 같기도 한데, 벌떡 일어서기도 하고 잔뜩 웅크리기도 하고 달려가 치솟기도 하고 치달려 한곳에 뭉치기도 하여 지극한 정신이 모두 한양 한 구역에 모였으니, 곧장 사람으로 하여금 눈이 밝아지고 마음이 탁 트여 응접할 겨를이 없게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로 옮기고 매년 능을 찾았다. 도성에서 무덤이 있는 현륭원까지 이르는 길은 정조 효행길 또는 화성효행길 이라는 이름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배다리를 이용해 한강을 건넌 후 과천에서 수원으로 이동했지만, 1795년부터는 한강을 건넌 후 시흥(지금의 서울특별시 금천구)을 지나 수원으로 향했다. 과천길을 버리고 시흥길을 택한 것이다. 시흥행궁에서 머무른 뒤 지지대고개를 넘어 수원화성에 도착했으며, 화성행궁을 출발해 대황교를 지나 현륭원으로 이동했다.
자세히보기보부상은 조선 시대부터 지방의 오일장을 장악했던 전문적인 상인 집단이다. 보부상은 진귀한 물품과 토기, 생선, 소금과 같은 생필품을 나르며 전국의 장터를 누볐다. 전라도와 경상도, 강원도와 경상도, 한양까지 전국으로 소금을 운반했던 소금길과 영동, 영서 지방의 물자가 오가던 백복령 길 등이 있다.
소금장수가 많이 살았던 마포나루 옆 염리동의 소금길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자리한 염리동 역시 소금 염(鹽)과 마을 리(里)가 합해진 이름으로, 과거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던 데에서 생겨난 지명이다. 염리동은 서해에서 들어온 바닷배가 물건을 부리던 마포나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다. 마포나루는 한양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포구로, 조선 전기부터 서해안의 어선은 물론 전국의 소금배가 겨울철의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수시로 드나들던 한양
남서부의 대표적인 포구이자 관문이었다. 마포나루는 한양 도성과의 거리도 가까웠기 때문에 항상 많은 물량이 모여들었고, 마포나루에서 하역된 물건은 염리동을 거쳐 만리현(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 고개)이나 애오개를 넘어 한양 도성으로 운송되었다.
마포구에서는 새우젓과 소금으로 유명했던 마포나루의 지역 전통을 재현하여 2008년부터 ‘마포나루 새우젓축제’를 개최하였고, 축제는 2018년 11회를 맞이하였다.
안동의 간고등어가 운반되던 간고등어길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 자리한 경상북도 안동지방에서는 선비들이 즐겨 먹던 해산물이 고등어였다. 그러나 통고등어는 여름철에 쉽게 상하기 때문에, 고등어가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왕소금을 뿌리는 염장법으로 간고등어를 먹게 되었다. 동해에서 잡은 고등어를 안동까지 가져오는 길은 험한 육로를 이용하는 산길이었다. 울진에서 넘어오는 고등어는 험준한 고갯길을 넘어 보부상들이
운반했으며, 영덕 강구항에서 넘어오는 고등어는 산세가 덜 험해 소가 끄는 달구지에 싣고 이동했다. 울진에서 넘어오는 산길은 보부상들이 다녔던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서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로 이어지는 옛길인 십이령(十二嶺)길을 넘었다. 영덕에 강구항에서 소달구지에 실려 오던 고등어는 안동까지 남은 거리가 10리 정도에 이르면, 고등어에 소금을 뿌리는 간잽이가 고등어의 배를 갈라 왕소금을 뿌렸다. 소금을 머금은
고등어는 안동까지 오는 동안 햇볕을 받아 자연적인 숙성 과정을 거쳤고 비포장도로에서 달구지가 움직이면서 고등어에 남아 있던 물기가 자연스럽게 빠져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강구항에서는 생물이었던 고등어가 달구지에 실려 안동에 도착하게 되면 육질이 단단하면서도 간이 잘 밴 간고등어로 변하였다고 한다.
십이령길은 12개의 고개를 통칭한 이름으로, 옛날 보부상들이 다니던 옛길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영덕에서 황장재를 거쳐 안동으로 이동하던 구간은 현재 국도 34호선이 통과한다.
과거에 사람들이 이용하던 길은 현대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기억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길과 관련된 재미있는 유래와 이야기도 함께 전해져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했던 문경 토끼비리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새재에서 내려오는 조령천(鳥嶺川)과 가은읍에서 흘러가는 영강(穎江)이 만나는 곳에서는 아주 특별한 산길이 있다. 이 산길은 산골짜기의 협곡을 따라 굽이굽이 물이 흐르면서 깎아지른 듯한 가파른 벼랑을 따라 나 있다. 오정산(810.5m)의 서쪽 끝자락에서 영강이 만나는 곳의 절벽에 만들어진 이 긴 길이가 약 3km에 달하는 잔도(棧道)이다. 잔도는 바위 절벽
등을 파고 다듬어 낸 옛길이다. 토끼비리는 조선 시대에 영남지방과 한양을 오가던 사람들이 다니던 영남대로의 옛길에서 가장 험난한 구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길이 통과하는 구간의 지형이 험준하다는 데에서 ‘관갑’이라는 이름을 붙여 관갑천잔도(串岬遷棧道)라고도 부른다.
‘비리’는 위험한 낭떠러지의 험하고 가파른 언덕을 일컫는 ‘벼루’ 또는 ‘벼랑’의 경상도 방언이고 한자로는 천(遷)으로 표기한다.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을 향해 군사를 이동할 때에 이곳에 이르러 길이 사라지자 고심했다고 한다. 그 순간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는 것을 보고 그 길을 따라갔더니 군사들이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서 토끼비리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이로부터 토천(兎遷)이라는 명칭도 생겨났다. 조선 시대에는 낙동강을 거슬러 온 사람들이 문경새재로 갈 때 물이 흐르는 영강의 물길보다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산을 가로질러
갈 수 있는 토끼비리를 자주 이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남대로는 조선 시대에 한반도에서 사람들의 통행이 가장 잦았던 구간이다. 당시의 영남대로는 지금의 경부고속도로보다 100리 이상이나 짧은 도로였다고 전해진다. 토끼비리의 바닥은 암석으로 되어 있지만, 수백 년 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면서 암석이나 바위는 미끌미끌해졌으며 사람들이 디뎠던 곳은 발자국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양으로 닳고 달았다.
벼랑길의 바닥에서 우리 선조들이 다니던 길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경상도 총각과 충청도 처녀의 사랑을 간직한 박달재 옛길
박달재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면과 백운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제천과 충주를 연결하던 옛길이다. 박달재에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시대에 경상도 선비 박달이라는 사람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출발했다. 며칠 동안 걷고 걸어서 백두대간을 넘고 제천에 도착한 박달은 충주로 넘어가면서 또 높은 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마침 날이 어두워져 박달은 고개 아래의 백운면 평동리의
한 농가에서 방을 얻어 하룻밤을 묵었는데 그 집의 딸 금봉이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 때문에 하루만 묵으려던 것이 며칠을 더 머물게 되었고 박달과 금봉이의 정은 날이 갈수록 돈독해졌다. 한양으로의 출발을 더는 미룰 수 없게 된 날, 박달은 과거에 급제하여 함께 살기를 약속하고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이는 며칠을 기다렸지만, 박달은 전혀 소식이 없었다. 과거시험이 치러지는 날짜도 훌쩍 지났다. 금봉이는
박달이 넘어간 재만 바라보며 박달을 기다리다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죽고 말았다. 금봉을 장사지내고 3일이 지난 후, 박달은 힘이 없는 모습으로 마을에 들어섰다. 박달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금봉이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차마 오지 못했던 것이다. 평동에 돌아온 박달은 금봉이가 죽어 벌써 장사까지 치렀다는 소식을 접하고 정신을 잃었다. 박달은 몇 날 동안 금봉이 이름만 부르며 고갯길을 헤매다가 금봉이
고갯마루를 달려가는 허상을 보고 금봉이를 잡아 껴안았으나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두 젊은이의 슬픈 얘기가 얽힌 이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랑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박달재는 1948년 <울고 넘는 박달재>라는 노래로 재탄생했다. 금봉이는 울고 넘지 않았지만, 박달재는 길도 험하고 산짐승에 도적 떼까지 많아 옛날에는 박달재 너머로 시집가면 다시는
친정을 구경하기 힘들어 새색시들이 눈물을 쏟으며 박달재를 넘었다고 한다. 박달재 옛길은 조선 시대에 한양으로 가는 관행길 이었으며, 등짐장수나 봇짐장수들이 물건을 가지고 넘나들던 장삿길로도 큰 역할을 했다. 이 부근에는 옹기장수 얘기가 많은데, 우리나라에 온 프랑스 신부들이 우리나라에 최초의 신학교를 세우고 옹기를 구으며 살던 배론 성지가 박달재 북쪽의 산 넘어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