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혼자 가실과의 약속을 지킨 설 처녀

    삼국사기와 비슷한 내용의 완도군 설 처녀 설화

    전라남도 완도군에 전해지는 설 처녀 설화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1145)의 열전 설씨조에 실린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형태이다. 설화의 구성과 내용을 비롯하여 등장인물들의 이름까지 똑같이 설정되어 있다.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설 처녀의 아버지가 군대에 징집되었다는 내용이었지만, 설 처녀 설화에서는 장보고 장군과 함께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다는 내용으로 구체화되어 있다. 이는 문헌에 실린 설 처녀 설화가 완도의 지역적 특성에 맞춰 변이하여 전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대신 전쟁에 나간 가실을 7년 동안 기다린 설 처녀

    옛날 청해진에 가난한 어부였던 설씨 노인이 아름다운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때 청해진은 해적이 침입하여 사람들을 끌고 가서 노예로 파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 모습에 화가 난 장보고 장군은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마을 남자들을 뽑아 황해까지 싸우러 갔다. 어느덧 늙은 설씨 영감 차례가 되었다. 설 처녀는 늙은 아버지가 전쟁터로 나간다는 것이 너무 슬펐지만, 자신이 대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 처녀가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가실이라는 청년이 그녀의 집을 찾아왔다. 오래전부터 설 처녀를 짝사랑했던 가실은 설씨 노인을 대신해 자신이 전쟁터에 가겠다고 했다. 설씨 노인은 가실의 제안이 정말 고마워 자신의 딸을 짝으로 주겠다고 했다. 가실은 “낭자, 내가 전쟁터에서 꼭 살아올 것이니, 우리 그때 혼례를 올립시다.”라고 했다. 그러자 설 처녀는 자신의 품속에서 구리거울을 꺼내 반으로 나눈 후 한쪽을 가실에게 주었다. 이후 가실은 장보고 장군과 함께 전쟁터로 떠났다.


    약혼자 가실과의 약속을 지킨 설 처녀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노인은 가실을 기다리며 7년 동안 과부처럼 지내는 딸을 보니 안쓰러웠다. 그래서 노인이 “딸아! 7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가실이는 죽은 것 같구나. 이제 그만 기다리고 다른 곳으로 시집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설 처녀는 울면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씨 노인은 설 처녀에게 말도 안하고 다른 총각과 결혼할 날짜를 잡아버렸다. 설 처녀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는 날, 드디어 가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전쟁터에 시달렸던 가실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가실은 설씨 노인의 집으로 가 자신이 돌아왔다고 했으나, 설씨 노인은 “어디 거지 같은 행색으로 가실 행세를 하느냐?”라며 쫓아내려 했다. 이 소리를 들은 설 처녀가 놀라 방에서 나왔고, 가실이 지금까지 고이 간직해왔던 거울 반쪽을 꺼내자 설 처녀는 자신이 갖고 있던 거울 반쪽에 맞춰보니 딱 맞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7년 만에 다시 만났고, 기쁜 마음에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혼례를 올렸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완도의 나이든 사람들은 ‘가실가실하게’라는 말을 쓰는데, 이 말은 가실과 설 처녀의 너무도 힘들었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신의의 중요성을 담은 이야기

    설처녀 설화는 약혼자 가실과의 신의를 굳게 지킨 여인의 이야기로, 남녀 간의 혼인 약속을 중심으로 효(孝), 열(烈), 신의(信義)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설 처녀는 효와 열의 가치를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설 처녀는 효를 실천하지만, 아버지의 뜻이라 하더라도 바르지 못한 행동을 교정하는 주체적인 면모를 보인다. 또한 가실과의 혼인은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에 참여한 가실을 기다림으로써 효와 정절의 이중적 가치를 표상하고 있다. 즉 설 처녀는 인간의 보편적 윤리인 신의를 강조하며, 효와 열도 함께 지켜 내는 모습을 보인다.

  • 역적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장보고 대사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 대사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에는 청해진(淸海鎭)이 있다. 청해진은 신라시대 흥덕왕 3년(826)에 장보고 대사가 설치한 진영이며, 설치 초기에는 해적을 소탕하는 해군기지 역할을 하였다. 이후 청해진은 무역기지로써 장보고 대사의 해상활동에 근거지가 되었다. 장보고 대사는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항로를 개척하였고, 이들 국가와 무역을 시행하여 동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장보고(張保皐, ?~846) 대사는 완도에서 태어났으며, 기골이 장대하여 활과 창을 잘 다루었다고 한다. 후에 당나라로 넘어가 군인으로 출세하였다가 다시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의 눈에 들어 청해진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완도 지역에는 장보고 대사에 관한 다양한 설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장보고란 이름보다 송징이란 이름이 더 알려져 있다. 장보고 대사와 송징 장군을 별개의 인물로 보는 견해들도 있지만, 장보고 대사가 역적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에 본명 대신 송징이란 이름을 빌려 전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엄장군의 화살에 맞아 죽은 송장군

    옛날 완도에는 송장군과 엄장군이 살았다. 송장군은 장좌리 장도에 살았고, 엄장군은 가용리 엄나무골에 살았다. 엄장군은 송장군이 가장 아끼는 부하였으며, 항상 송장군의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는 인물이었다. 하루는 엄장군이 신라의 왕에게 비밀 지령을 받았다. 지령의 내용은 ‘송장군이 세력을 키워서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니 그를 반드시 죽여라.’는 명령이었다. 왕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던 엄장군은 어쩔 수 없이 송장군을 배신하고, 그를 죽일 계략을 세웠다. 

    역적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장보고 대사

    어느 날, 엄장군이 송장군을 죽이기 위해 송장군이 깊이 잠든 새벽을 틈타 장도로 침입하였다. 엄장군은 발소리를 숨기고, 조용히 송장군의 집 앞까지 왔다. 칼을 꺼내 들고, 문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수상한 기운을 느낀 송장군은 이미 잠에서 깨어 대비하고 있었다. 엄장군의 칼날이 송장군의 목으로 날아 올 때, 도술에 능했던 송장군은 까투리로 변신하여 솔섬 옆에 있는 작은 섬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송장군을 노리던 엄장군은 화살을 쏴서 결국에는 송장군을 죽이고 말았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송장군이 죽은 작은 섬을 ‘까투리섬’이라 불렀고, 송장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장좌도의 주민들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송장군을 모시게 되었다. 또한 송장군이 죽을 때 마침 해가 떠오르고 있어 제사를 항상 해가 떠오르기 전에 지내야 한다는 속설도 생겼다고 한다.

     

    송징 장군으로 기억되는 장보고 대사

    완도 지역에서는 역적으로 몰려 안타까움 죽음을 맞이한 장보고 대사의 비극적인 죽음이 송징이라는 인물로 대체되어 전해지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 장보고는 역적으로 낙인찍혀 그의 부하 염장에게 죽게 된다. 그의 죽음과 함께 평생을 일군 청해진 세력은 철저하게 붕괴하였고, 그를 따랐던 수하들과 청해진의 백성들은 김제의 벽골제로 강제로 이주되었다. 사실상 장보고 대사의 죽음과 함께 청해진의 영광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후 장보고 대사는 역사에서 역적으로 기록되었고, 그의 삶에 관한 진실은 지워졌다. 그러나 장보고 대사는 완도 지역에서 송징 장군으로 기억되고, 지역 사람들은 그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 오동도의 오동나무를 베어버린 신돈

    오동나무가 없는 오동도

    전라남도 여수시 수정동에는 오동도가 있다. 오동도는 전국적으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동백꽃의 군락지로 알려졌지만, 본래는 오동나무가 많았던 섬이다. 섬의 모양도 오동잎처럼 생겼다고 하여 ‘오동도’라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섬 어디에서도 오동나무는 찾아볼 수 없다. 오동도에서 오동나무가 사라진 것은 고려 때 ‘요승(妖僧)’으로 불렸던 신돈이 오동도에 봉황이 날아드는 것을 막기 위해 오동나무를 모두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이야기가 현재까지도 여수 지역에 전해지고 있다.


    봉황이 깃들 오동나무를 베어버린 신돈

    고려 말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왕의 스승이 되었던 신돈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신돈은 특히 공민왕의 신임이 두터워 항상 가까이서 공민왕을 보필하였다. 하루는 풍수설에 능통했던 신돈이 전라남도 땅을 돌아보다가 우연히 여수의 오동도를 지나게 되었다. 신돈의 일행이 오동도에 들어설 때 한 줄기의 빛이 홀연히 오동도를 빠져나갔다. 찰나의 일이라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정도였는데, 갑자기 신돈이 “아~”하는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서둘러 배를 돌려 왕이 계신 개경으로 돌아갔다.


    오동도의 오동나무와 신돈


     며칠을 쉬지 않고 달려 온 신돈은 개경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공민왕을 찾아가 말했다. “폐하, 전라도에는 오동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그곳의 오동나무를 모두 베어버려야 합니다.”라고 했다. 영문을 알 수 없던 공민왕이 무슨 연유인지 궁금해하자 신돈은 “고려의 국운이 기운다는 소문이 돌아 풍수를 살피러 전라남도 땅에 다녀왔습니다. 그러다가 오동도를 가는 길에 놀라운 일을 목격했습니다.” 답답함을 느낀 공민왕이 이야기를 재촉했다. “소신이 오동도에 도착했을 때 오동나무 숲에서 한 줄기 빛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바로 봉황이었습니다.”라고 했다. 


    공민왕은 봉황이 나타난 것이 이렇게 호들갑을 떨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돈은 “전라도의 ‘전’자는 사람 ‘인(人)’ 밑에 임금 ‘왕(王)자’를 쓰는데, 전라도의 오동도에서 봉황이 드나든다는 것은 고려 왕조를 이을 인물이 전라도에서 나올 징조로 보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신돈은 해결할 방법이 있다며, 전라도의 ‘전’자를 사람 인(人)자가 아닌 들 입(入)자로 바꾸고, 오동나무 열매를 좋아하는 봉황이 오동도에 드나들지 못하도록 오동나무를 모두 베어버리면 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리하여 전라도의 ‘전’자가 바뀌고, 오동도의 모든 오동나무가 베어졌다고 한다. 


    고려를 부흥시키려는 신돈의 의지

    풍수지리에 능한 신돈이 오동나무를 제거한 것은 임금을 상징하는 봉황이 오동도에 날아들자 이곳에서 나타날 왕에 의해 새로운 시대가 열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이다. 즉 신돈은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고려 말의 현실적 상황이 풍수에서 비롯되었다고 인식하고, 이를 바꾸기 위해 오동나무를 벌목하고 지명의 한자를 바꾼 것이다. 그러나 신돈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전라도 출신의 전주 이씨인 이성계에 의해 망하고 말았다.

  • 인어를 구해주고 영리한 아들을 얻은 명씨

    신안군 도초면 도초도의 인어 이야기

    전라남도 신안군 도초면에는 도초도가 있다. 도초도는 신라시대 당나라와의 무역기지로 당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도읍과 닮았고, 초목이 무성하여 ‘도초(都草)’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도초도는 인근 지역의 섬 중에서 가장 큰 섬으로 섬의 형태가 고슴도치처럼 생겨서 ‘도치도’로도 불린다. 이러한 도초도에는 인어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인어의 보은으로 영리한 아들을 얻은 명씨

    옛날 도초도에 명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명씨는 오십이 넘도록 장가도 못가고 겨우 짚신을 팔아 하루하루 연명해가고 있었다. 하루는 명씨가 장에서 짚신을 팔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부둣가에 모인 사람들을 보았다. 궁금해서 가보니 어떤 어선이 인어를 잡아와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하는 자리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어를 잡아먹자고 했다. 명씨가 가까이서보니 인어는 두려움에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명씨는 ‘아무리 미물이라 하나 눈물을 흘리는 생명을 잡아먹으려 하다니!’ 싶은 생각이 들어, 그날 짚신을 팔아 번 돈을 털어 인어를 샀다. 그리고 인어의 몸을 회복시킨 후 다시 바다에 풀어주었다. 


    인어를 구하고 영리한 아들을 얻은 명씨


    시간이 흘러 몇 년이 지났다. 명씨가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바다에서 인어가 나와 옥동자를 명씨에게 인도해주었다. 장가도 못가 대를 이을 자식도 없던 명씨는 옥동자를 애지중지하며 귀하게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명씨의 집안 선산에 마을의 세도가가 땅을 파고 묘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 사실을 알고 명씨가 막아보려고 했으나 도저히 세도가의 권세를 막을 수 없어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몸져누운 명씨에게 어린 아들이 “아버지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라고 물었다. 어린 아들에게 얘기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 알 것 없다고 했지만, 아들이 계속 이유를 묻자 알려주었다. 아들은 “아버님, 걱정 마십시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라며 집을 나섰다. 선산에 도착한 아들은 묘를 파고 있는 세도가 사람들을 보았다. 화가 난 아들은 “감히 누가 이런 짓을 한단 말이냐?” 호통을 쳤지만, 어린 아이의 말인지라 모두 무시하고 내쫓으려고만 했다. 


    그러자 아들은 주문을 외웠고,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와 천막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쓰러졌다. 그때서야 보통 아이가 아님을 안 사람들은 용서를 빌었다. 아들은 “너희들이 아무리 권력과 돈이 있다고 하나 어찌 함부로 하려고 하느냐? 다시 이런 일을 생긴다면 그때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며 주문을 멈췄고, 세도가 사람들은 산에서 도망쳤다. 이후 아들은 자라 도승지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지금까지도 명씨 집안은 인어의 후손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이 설화에서 인어는 은혜를 보답할 줄 아는 존재로, 착하게 살면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라는 민중들의 소망을 형상화하고 있다.

     

  • 소년 마천목과 두계천 도깨비살

    유일하게 남아있는 두계천의 도깨비살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오지리의 두계천에는 도깨비살이 있다. 도깨비살은 도깨비가 만든 ‘살뿌리’를 말하며, ‘독살’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바다나 강에서 물고기를 잡기 위해 돌로 둑을 쌓아 만든 보를 말한다. 과거에는 독살이 설치된 곳이 많았지만, 현재는 일부 어촌 지역에 남아 있고, 강에 설치된 독살로는 오지리의 도깨비살이 유일하다. 도깨비살로 불리는 이유는 곡성 지역에 전해지는 마천목(馬天牧,1358-1431) 장군의 설화에서 연유했다. 현재 두계천 변에는 ‘마천목 장군과 도깨비살’에 관한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물고기를 잡겠다는 소년의 효심이 도깨비를 감동시킨 이야기

    마천목은 보성군 회천면 모원마을에서 태어났다. 열다섯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을 치르고 어머니의 고향인 곡성으로 이사를 했다. 곡성으로 이사를 왔지만,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아 겨우 끼니를 이을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던 마천목은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섬진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보탬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아직은 어린 소년인지라 잡는 양에 한계가 있었다. 

    하루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돌을 쌓아 물고기를 한 곳으로 모아서 잡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강이 너무 넓고 물살이 거세서 돌을 쌓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시도했지만, 번번이 쌓은 돌은 물살에 휩쓸려 무너지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반복하다가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돌을 쌓는 방법을 궁리하며 걷다가 돌멩이 하나가 발부리에 걸렸다. 자세히 보니 푸르고 둥글게 생긴 예쁜 돌이었다. ‘어머니에게 가져다드리면 좋아하시겠구나!’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가지고 와 부엌에 놓아두었다.

    소년 마천목과 도깨비살

    그날 밤, 잠을 자던 마천목은 이상한 기운에 잠이 깨서 주변을 둘러보니 도깨비 한 무리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천목은 무서웠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무슨 일이냐? 당장 정체를 밝혀라.”하고 외쳤다. 그러자 도깨비 무리 중 하나가 나와서 하는 말이 “저희는 강에 사는 도깨비들입니다. 저희의 대장을 돌려주십시오.”라고 했다. 마천목이 무슨 말이냐고 재차 묻자 “장군께서 강가에서 들고 가신 푸른 돌이 저희의 대장입니다.”라며 다시 돌려 달라고 간청했다. 


    도깨비들은 마천목이 보통 소년이 아님을 알고 장군이라 불렀다. 문득, 마천목은 좋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 예쁜 돌을 줍게 된 것이 강에 독살을 쌓다가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천목은 도깨비들에게 “개울가에 독살을 만들어주면 너희들의 대장을 돌려주겠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도깨비들은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 날, 강가에 가보니 약속한 대로 독살이 만들어져 있었고, 덕분에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었다. 이 일로 마을 사람들은 마천목의 효심과 용기, 지혜를 대대로 칭찬해 주었고, 이후 두계천의 독살은 도깨비들이 쌓았다고 하여 ‘도깨비살’이라 불렀다고 한다.


    소년 마천목의 효심이 만들어낸 도깨비살

    소년 마천목에 관한 설화에서 도깨비들이 마천목을 위협하지 않고 도와주는 이유는 악인에게는 벌을 주지만, 효자, 충신, 선인 등에게는 재물과 복을 가져다주는 도깨비의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즉 마천목이 독살을 쌓는 목적이 자신의 영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부모님에 대한 효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도깨비들이 조력자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효심을 다하면 하늘에서 도와준다는 교훈을 간직하고 있다. 

  • 죽어서 호박꽃과 박꽃이 된 쌍둥이 자매

    영암군에 전해지는 단꽃 설화와 단꽃 노래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호박꽃과 박꽃에 얽힌 '단꽃 설화'와 '단꽃 노래'가 함께 전해지고 있다. 단꽃 설화는 사이가 좋지 않던 쌍둥이 자매가 뒤늦게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를 그리워하다가 죽어서 호박꽃과 박꽃으로 환생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단꽃 노래는 배고픈 아이들이 꽃 안에 고여 있는 단물을 빨아 먹으면서 부르던 노래이며, 노랫말은 “내야 꽃은 이쁜 꽃 이쁜 꽃은 단 꽃”이다.


    사이 나쁜 쌍둥이 자매가 꽃으로 피어나 

    아주 옛날 영암에 늙은 부부가 어렵게 아이를 얻었는데, 쌍둥이 자매가 태어났다. 부부는 큰딸은 ‘금동이’ 작은딸은 ‘은동이’라 부르며, 자매를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금동이와 은동이는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랐지만, 생김새만 똑같은 쌍둥이였지 성질은 정반대였다. 금동이가 잠을 잘 때면 은동이가 깨어 있고, 은동이가 잠을 잘 때면 금동이가 깨어서 놀았다. 더욱이 자매간에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를 헐뜯고, 괴롭혀서 부부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매가 밖에 나가 놀기 시작하자 부부는 자매에게 짚신을 한 켤레씩을 사주었다. 그런데, 금동이는 아침에 놀러가면서 “은동이는 매일 잠만 자니깐 신발이 필요 없잖아!”하며 동생의 신을 밖으로 던져 버렸다. 또한, 은동이 저녁에 놀러가면서 “금동이는 매일 잠만 자는데 신발은 필요 없잖아!”하며 언니의 신을 밖으로 던져 버렸다. 자매는 크면 클수록 더 사이가 나빠졌고, 이런 자매를 보며 부부는 한숨만 늘어갈 뿐이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자매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부부는 고민 끝에 금동이는 낮의 나라로 시집을 보내고, 은동이는 밤의 나라로 시집을 보내기로 했다. 부부는 자매가 떠나는 날 작은 구슬을 하나씩 주며, "너희들은 이 구슬을 하나씩 가져가 잘 간직하고 살아라.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만큼 구슬이 커질 것이니, 서로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살아라. 너희의 구슬이 커진다면 우리는 죽어서도 행복할 것이란다."하고 말했다. 그때서야 자매는 지난날 서로를 미워했던 시간을 후회했다. 이후 낮의 나라로 시집간 금동이는 죽어서 금색 호박꽃이 되어 낮에만 피었고, 밤의 나라로 시집간 은동이는 죽어서 박꽃이 되어 밤에만 피었다. 호박꽃과 박꽃에 작은 구슬이 맺혔다가 나중에 커다란 열매인 호박과 박이 되는데, 이는 자매가 서로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호박과 박은 원래 한배에서 태어났지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호박은 바닥에서 자라고, 박은 지붕 위에서 자라게 되었다고도 한다.


    인간의 영혼이 깃든 호박꽃과 박꽃

    단꽃 설화는 ‘식물 유래담’의 한 유형으로 호박꽃과 박꽃이 각각 낮과 밤에 피는 이유를 사이 나쁜 쌍둥이 자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쌍둥이 자매지만, 낮에 꽃이 피는 호박꽃과 밤에 꽃이 피는 박꽃의 특성을 낮과 밤으로 비유하여 서로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 없는 이유를 드러내고 있다. 더욱이 쌍둥이 자매가 나눠 가진 구슬을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의 크기로 형상화하고, 그 결과물을 ‘호박’과 ‘박’이라는 열매로 표현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는 그리움을 열매에 투영하고 있다. 호박꽃과 박꽃 같은 식물에도 인간의 영혼이 깃들 수 있다는 인식을 보여주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깊었던 진묵대사

    진묵대사 모친의 묘가 있는 성모암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에는 성모암(聖母庵)이 있다. 성모암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암자로 진묵대사 모친의 묘소인 ‘진묵대성사 존비지묘(震默大聖師 尊妣之墓)’가 위치해 있다. 진묵대사(1562-1633)는 명종 17년(1562)에 김제군 만경면 불거촌(지금의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에서 태어났다. 불거촌은 ‘부처님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진묵대사와 같은 고승이 출생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진묵대사는 부처의 ‘소화신(小化身)’으로 추앙받았으며, 신통력으로 많은 이적을 행하다보니 다양한 일화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진묵대사는 고승이면서도 가족과 맺었던 인연을 끊지 않고, 출가한 이후에도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이어갔다. 그렇다보니 진묵대사의 효행에 얽힌 설화들이 여러 편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김제시에는 진묵대사 어머니의 묘가 있어 다른 설화보다 더 강하게 전승력을 유지하고 있다. 

     

    어머니를 위해 모기를 없앤 진묵대사

    진묵대사가 출가하여 전주 우아동(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우아동) 일출암에 있을 때의 일이다. 진묵대사는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니가 걱정되어 전주 왜막촌으로 모시고 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왜막촌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하루는 진묵대사가 어머니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어머니가 지난밤 모기들이 너무 극성을 부려서 밤잠을 설쳤다고 하였다. 여름이 되면 왜막촌의 모기가 유난히 극성이었다. 그래서 진묵대사는 산신에게 “앞으로 왜막촌에는 절대 모기가 머물지 못하게 하여라. 만약 내 말을 어긴다면 혼쭐을 내주겠다.”라고 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날부터 모기들이 사라졌다고 하며, 지금도 왜막촌에는 모기들이 없다고 한다. 그렇게 진묵대사는 깊은 효심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지만, 어머니는 숙환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진묵대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자손이 없어도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이어지는 곳)’의 명당자리로 알려진 불거촌에 어머니의 묘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자손이 없어도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이어지는 명당

    1927년 5월에 화부인(華夫人) 이순덕(李順德)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성모암 인근 마을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날 밤, 잠이 든 화부인은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하얀 가마가 서쪽하늘에서 내려왔고, 한 스님이 나타나서 화부인에게 가마를 타라고 하였다. 화부인이 스님의 말대로 가마에 타자 가마가 공중으로 솟아오르더니, 한참을 날아가다가 어느 묘소 앞에 멈추었다. 화부인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고, 집주인에게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주인은 “마을 근처에 진묵대사 어머니의 묘소가 있으니, 한번 가보시지요.”라고 했다. 다음 날, 화부인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인이 말한 곳으로 가보았다. 그런데, 진묵대사 어머니의 묘소는 풀이 우거져 있고, 봉분도 내려 앉아 크게 훼손되어 있었다. 이에 화부인은 봉분을 다시 세우고, 정성스럽게 묘소를 관리하였다. 이후 사람들이 진묵대사 어머니의 묘소 밑에 제각을 만들었고, 화부인의 공적을 기리는 비를 세우면서 지금의 ‘성모암’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한 진묵대사 어머니 묘소에 제사를 지내면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성모암을 찾고 있다.


    진묵대사의 효성에 관한 이야기

    실제 진묵대사는 승려였지만, 출가한 이후에도 평생 어머니를 봉양했을 만큼 효성이 지극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진묵대사의 효성은 구도자적 관점에서 볼 때 속세와 인연을 끊지 못했다는 점에서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민중들에게는 보다 인간적이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특히 김제시에는 진묵대사 어머니의 묘소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성모암을 찾는 이들이 있어 지금까지도 이야기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봐서 아내와 두 아들을 잃은 박씨

    황룡과 청룡의 싸움을 도와주고 아내를 얻은 총각

    옛날 해남의 어촌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박씨 총각이 있었다. 박씨는 가난했지만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효자였다. 박씨는 자신의 배가 없어 남의 배에 일을 했는데, 하루는 이 배가 고기를 잡으러 먼 바다로 나가게 되었다. 먼 바다로 가는 중 선장은 잠시 잠이 들었고, 꿈에 백발의 노인이 나와 “박도령을 섬에 두고 가거라.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선장은 꿈에 본 노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만선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갑자기 배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득 꿈에서 들은 말이 생각나 가까운 섬에 박씨를 내려놓으니 그때서야 배가 움직일 수 있었다. 섬에 버려진 박씨는 “나만 두고 가면 어찌하오.”라고 목놓아 불렀지만 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홀로 남은 박씨는 할 수 없어 섬을 둘러보다가 작은 초가를 발견했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한 노인이 그를 반겨주었고, 그때부터 박씨는 노인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런데, 먹을 거 하나 없어 보이는 섬에서 노인은 신기하게 먹을 것을 구해와 박씨에게 주었다. 어느 날, 노인이 활을 가지고 오더니, “이제부터 너는 활 쏘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라고 했다.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노인의 말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박씨는 처음에는 잘 못 쐈지만, 한 달쯤 지나니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맞출 수 있었다. 그때서야 노인이 "내일 아침 바닷가에 가보면 황룡과 청룡이 싸우고 있을 것이니, 너는 활을 쏴서 반드시 황룡을 죽여야 한다."라고 했다.

     

    다음 날, 바닷가에 나가니 노인의 말대로 황룡과 청룡이 싸우고 있었다. 이때 박씨가 황룡을 활로 쏴서 죽였고, 청룡은 노인으로 변해 박씨에게 다가왔다. 노인은 "나는 원래 청룡의 화신인데, 황룡이 나의 하나뿐인 딸을 첩으로 삼으려고 해서 삼 년째 싸우고 있었다. 너의 도움으로 딸을 뺏기지 않아도 되니 나의 딸을 너에게 주겠다."라고 했다. 박씨는 청룡의 딸을 아내로 삼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하루는 아내가 “아들 셋을 낳을 때 까지는 절대 제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시면 안 됩니다.”라고 부탁을 했다. 아들 둘을 낳고 행복하게 살던 어느 날, 박씨는 아내가 목욕하는 모습이 매우 궁금했다. 그래서 아내의 부탁을 어기고, 몰래 문틈으로 보았는데, 커다란 뱀이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박씨는 소리를 질렀고, 아내는 슬픈 표정으로 나와 두 아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후 박씨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원망하며 평생 혼자 살았다고 한다. 


    금기의 설정과 처벌의 의미

    이 설화는 인간과 용이 결연을 맺는 ‘이물교혼담(異物交婚譚)’의 한 유형이다. 박씨는 청룡을 도움으로써 아내와 두 아들을 얻지만, 과도한 호기심 때문에 아내가 제시한 금기를 위반하게 된다. 그 결과 박씨는 아내와 두 아들을 잃게 되며, 아내와 두 아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마치 ‘선녀와 나무꾼 설화’에서 선녀의 모습과 닮아 있다. 이러한 금기의 설정과 처벌은 인간이 함부로 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절대자의 금기’이며, 아내와 두 아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신과의 약속을 파괴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신의 처벌이다. 

  • 고려의 왕이 되고 싶었던 왕망

    신안군 압해읍 고이도에 소재한 왕산성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읍 고이도에는 왕산성이 있다. 왕산성을 왕건의 작은 아버지인 왕망이 쌓았다고 전해지며, ‘고이도성(古夷島城)’이라고도 불린다. 왕산성이 소재한 고이도는 일제 강점기까지는 스스로를 왕이라 칭한 왕망이 살았던 섬이라하여 ‘왕도’라 불렸다고 한다. 이후 왕망이 숨은 연못인 고시(古市)의 ‘고(古)’자와 섬의 모양이 ‘이(耳)’자를 닮았다하여 ‘고이도’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이도에는 왕망에 관한 설화와 함께 다양한 지명들에 관한 유래들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 개국에 큰 역할을 했으나 인정받지 못하자 반역을 꿈꾼 왕망

    후삼국시대에 왕건의 작은 아버지인 왕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왕망은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왕건은 왕이 되자 왕망의 공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왕망은 왕건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왕망은 역모를 실행하기도 전에 발각되어 지금의 압해읍 고이도로 도망쳐야만 했다. 왕망은 ‘언젠가는 반드시 고려왕실을 내 손아귀에 넣고야 말 것이다.’고 생각하며, 고이도에 성을 쌓고 세력을 키워 나갔다. 왕망은 돌로 만든 지팡이를 갖고 다닐 만큼 힘센 장사였던지라 부하들은 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였고, 고이도에서 왕 못지않은 권세를 부리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이도 인근 해역에서 고려의 조정으로 국세를 싣고 가는 배를 발견하였다. 왕망은 부하들과 함께 돈과 식량을 빼앗고, 선원들은 자신의 부하로 삼았다. 이때 배는 ‘배시게’라는 곳에 버렸고, 돈은 ‘돈바위’라는 곳에 숨겨 두었다고 한다. 지금도 고이도의 인근 해역에는 이러한 지명이 남아 있다. 


    몇 달 후 지방에서 세금이 계속 올라오지 않자 고려의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조사해보니 왕망이 고이도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왕건은 "당장 고이도로 군사를 파견하여 왕망을 잡아오너라."라고 명령했고, 장수는 관군들을 데리고 고이도로 쳐들어갔다. 왕망은 미리 대비하여 관군들에게 대항했지만,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관군들에게 결국 패하고 말았다. 다급히 도망치던 왕망은 대촌마을을 지나며 돌지팡이를 떨어뜨렸는데, 지금도 이곳에는 왕망이 떨군 돌지팡이라 전해지는 ‘기둥바위’가 있다. 왕망은 계속 도망치다가 무안군 망운면까지 오게 되었고, 더 이상 도망칠 힘이 없자 ‘고시(古市)’라 불리는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뒤 쫓던 관군들은 연못에 도착하여 왕망의 시신을 찾기 위해 연못의 물을 다 퍼냈다. 그러나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이상하게 생긴 자라 한 마리를 발견하였다. 왕망을 잡지 못한 장수는 화가 나서 자라의 목을 베었는데, 이때 자라의 목에서 흐른 피가 연못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이후 사람들은 고이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왕산’이라 부르며, 지금도 음력 정월 보름날이 되면 왕산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고이도를 지켜주는 수호신, 왕망

    고이도에 전해지는 왕망에 대한 설화는 고려의 왕이 되고 싶었던 왕망의 열망이 담긴 이야기이다. 왕망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함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이를 인정받지 못하자 반역을 계획하나 실행해보기도 전에 발각되고 만다. 이후 고이도로 도망을 오고, 세력을 키워 고려에 대항하려한다. 그러나 왕건이 보낸 장수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의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다. 설화에서 왕망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며 그의 꿈은 좌절된다. 그러나 왕망의 이야기와 이야기에 얽힌 증거물 등이 현재도 고이도에 남아 있으며, 왕망은 고이도 주민들의 무병과 안녕, 나아가 풍요를 기원하는 대상이 되어 고이도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좌정하고 있다.

     

      

  • 탐욕 때문에 게 명당의 숨통을 막아 집안이 망한 임씨

    영암군 시종면 와우리의 게명당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에는 와우리가 있다. 와우리의 이름은 마을 앞산의 형상이 마치 소가 누워 되새김질하는 모양에서 연유했다고 하며, 산 아래에는 ‘우정(牛井)’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우정마을에는 정확한 위치를 확인 할 수는 없지만, 게명당이라는 지명의 이름이 남아있다. ‘게명당’은 게의 머리 부분을 의미하는 명당자리로 현재까지 와우리에는 게명당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탐욕 때문에 집안이 망한 임씨
    탐욕 때문에 집안이 망한 임씨


    욕심 때문에 명당을 잃어버린 임씨

    옛날 영암군 시종면에는 우정마을이 있었다. 제일 먼저 이곳에 자리를 잡은 사람은 임씨 성을 가진 농부였다. 임씨는 열심히 농사를 지어 부자가 되었는데, 부자가 되자 과거의 일은 생각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렸다. 하루는 임씨가 아버지의 묘를 쓰기 위해 좋은 자리를 찾다가 우연히 마을 뒤에 있는 절터가 명당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임씨는 스님들을 쫓아내고 절을 허물어 아버지의 묘를 만들었다. 그러자 임씨의 집안은 더욱 번성했다. 절을 빼앗긴 스님들은 스승님을 찾아가 “임씨라는 자가 저희들을 내쫓고, 절을 허물어 아버지의 묘자리로 썼습니다.”라고 하소연을 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스승님은 임씨를 혼내주기 위해 우정마을로 갔다. 


    마을에 도착한 노승은 허름한 차림으로 임씨 집을 찾아 주인을 만나기를 청했으나, 하인이 나와 노승을 쫓아냈다. 다음 날 임씨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니, 다시 하인이 나와 “주인마님이 오셔서 험한 꼴을 당하기 전에 얼른 다른 곳으로 가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노승은 “시주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왔건만, 이리 문전박대를 하느냐?”라고 했다. 집안에서 이 말을 들은 임씨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기인을 알아보지 못한 하인을 혼쭐내고, 노승을 사랑채에 모셔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임씨가 어떻게 하면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는지 묻자, 노승은 “물이 들어오는 마을 들판에 둑을 만들면 될 것이다.”라고 일러주었다. 임씨는 바로 인부들을 동원하여 둑을 쌓았다. 그런데, 둑이 완성되고 물이 고이자 갑자기 물이 요동치더니 임씨의 집을 덮치고 말았다. 원래 임씨가 터를 잡은 곳은 ‘게’ 형상의 머리 부분으로 명당자리였는데, 둑을 쌓아 게의 숨통을 막아버렸기에 물이 넘치게 된 것이었다. 이후 한순간에 집안이 망한 임씨 일가는 마을을 떠났고, 마을 사람들은 임씨가 살았던 곳을 ‘게명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탐욕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긴 이야기

    게명당에 얽힌 설화는 ‘풍수설화’의 한 유형으로 명당자리에 조상의 묘를 써서 집안이 번창하길 바라는 후손들의 바람이 담긴 이야기이다. 하지만 명당자리인 게명당에서 터를 잡았으나 더 큰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에 명당을 훼손하였고, 결국에는 집안까지 망하게 되었다. 이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경계해야만 복을 받는다는 교훈담으로 기능하고 있다.

     

  • 용왕의 병을 고친 명의 이진원

    해남군 마산면 맹진리 출신의 이진원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맹진리에는 이진원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원주 이씨 세보에 따르면 이진원은 1676년에 태어나서 1758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진원은 해남 마산면 맹진리 출신으로 명의로 알려졌던 인물이며, 기록에 따르면 “고대 중국의 화타나 편작과 비교되는 명의로 국의가 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라고 한다. 그러나 더 많은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고향에 머물며 의술을 펼쳤다고 한다. 현재 이진원의 묘는 해남군 황산면 원호리 명당골에 소재하고 있다.

     

    용왕의 병을 고친 의원

    조선시대 해남군 마산면 맹진 고을에는 이진원이라는 의술이 뛰어난 의원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진원의 집에 이상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찾아 왔다. 진원은 기이한 생각이 들었지만,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았는지 일단 들어 보기로 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저는 용궁의 사자로 용왕님의 병세가 깊으셔서 의원님을 모시러 왔습니다.”라고 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며 안 가본 곳이 없었지만, 용궁이라는 말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진원은 “저는 수영도 못하는데, 어찌 용궁으로 간단 말입니까?”라고 묻자, 그냥 자신만 따라 오면 된다고 했다. 결국, 진원은 사자를 따라 용궁으로 갔다. 


    용궁에 도착한 진원은 용왕의 병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분명 병세가 짙었으나 아무리 찾아도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용왕이 "그동안 용하다는 의원들이 모두 다녀갔으나 내 병을 낫게 하는 이가 없었다. 너 또한 그러하면 내가 죽을 것이니 너를 죽여도 너무 섭섭해 하지마라."라고 했다. 진원은 기가 막혔다. 병을 고치러 왔다가 까딱하면 목숨까지 잃어버리게 생겼으니 말이다. 열심히 진단했지만 도저히 병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낙심하던 진원은 문득 용왕의 입을 살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왕의 입을 벌리고 아가미를 살펴보니 질경이풀이 용왕의 아가미에 붙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너무도 깊게 뿌리 내리고 있어 제거할 방도가 없었는데, 그때 문득 단단하고 질긴 질경이는 백마의 오줌을 뿌리면 죽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진원은 용궁의 사자에게 백마의 오줌을 구해달라고 했다. 사자들이 육지로 가서 백마의 오줌을 구해왔고, 용왕의 아가미에 뿌리자 질경이는 바로 시들어 죽어가던 용왕은 바로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자신의 병이 낫자 용왕은 크게 기뻐하며 “내 병을 고친 의원에게 용궁에서 가장 높은 벼슬을 주어라!” 명했다. 깜짝 놀란 진원은 용왕의 제안을 사양하고, 육지로 돌아왔다고 한다.

     

    죽을 병에서도 구원받기 바라는 민중들의 소망

    이진원에 관한 설화는 의술이 뛰어난 의원이 용궁으로 가서 다른 의원들은 치료하지 못한 용왕의 병을 치료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맹진리 출신의 이진원으로 실제 역사에서 의술이 뛰어났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 인물에 설화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내려오는 이야기다. 보통 이런 설화는 명의들이 뛰어난 도술로 병을 고친다는 내용이 많은데, 이진원은 도술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수련한 뒤 의술을 획득한 명의라는 점이 특징이다. 명의에 관한 설화에는 무슨 병이든지 치료할 수 있는 의원이 존재하여 죽을병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민중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

     

  • 씨름으로 소유권을 정한 칠기도

    완도군 금일읍 장정리 도장마을 앞의 칠기도

    전라남도 완도군 금일읍 장정리에는 도장 마을이 있다. 도장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해조류로, 인근 청정 해역에서 다시마와 미역 등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특히 도장 마을 앞에 있는 칠기도(일곱 개의 무인도를 통틀어 칠기도라 부름)는 해조류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약 300년 전부터 이웃 마을 간에 칠기도를 차지하기 위한 분쟁이 일어났다고 하며, 그에 얽힌 설화가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씨름으로 소유권을 정한 칠기도


    십 년 재판보다 씨름이 낫다

    지금으로부터 삼백여 년 전 칠기도를 두고 여러 마을끼리 소유권을 주장하는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마을마다 칠기도가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지라 장흥 부사를 판관으로 재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장흥 부사는 재물에만 욕심이 있는 인물이라 금방 판결을 내려주지 않고 재판을 질질 끌기만 했다. 칠기도의 소유권을 주장한 마을들이 재판에 이기기 위해 바다에서 재취한 해조류와 농사지은 곡식을 팔아 장흥부사에게 뇌물로 바쳤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힘들게 번 돈을 쓰지도 못하고, 점점 빚만 늘어가니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칠기도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네 개의 마을 대표들이 재판을 받기 위해 장흥현으로 갔다. 목적지가 같다 보니 대표들은 걸어가며 칠기도가 자신의 것이라고 서로 다투었다. 먼 길을 걷다 보니 이제는 서로 말을 주고받을 힘도 없어 자울재라는 고갯길에 앉아 쉬게 되었다. 오래 걸어 힘들기도 했고, 서로 다투기만 했던지라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는데, 그때 문득 도장 마을 대표가 ‘언제까지 이런 재판을 해야 하나? 우리끼리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판을 하면 할수록 좋은 건 장흥 부사뿐이고, 결과는 언제 나올지 모르며, 그때까지 돈은 또 얼마나 들지 모르는 일이었다. 마을의 대표들 모두 이런 생각을 했지만, 서로 조심스러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 때 한사람이


    “쓸데없는 재판 때문에 마을 사람들 모두 힘들어하고 있소.

    우리 재판 따위는 집어치고,

    씨름을 해서 이긴 마을이 칠기도를 갖는 게 어떻겠소?”


    라고 했다. 모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좋다고 대답했다. 며칠 후, 칠기도의 소유권을 정하는 씨름판이 벌어졌다. 네 개의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들이 출전하였는데, 최종 우승은 도장 마을에 사는 조장사가 하였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결과에 승복하였다. 이때부터 칠기도는 도장 마을이 관리하게 되었고, 이곳 마을에는 ‘십 년 재판보다 씨름이 낫다’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설화는 당시 관원들의 횡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신기한 요술부채를 갖고 있는 왕등도 전씨

    굶어죽으라고 보내는 유배지 왕등도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에는 왕등도가 있다. ‘왕등도(王登島)’는 ‘왕이 오른 곳’이라는 뜻이다. 왕등도에는 크고 작은 섬 다섯 개가 모여 있다. 이중 사람이 사는 곳은 상왕등도와 하왕등도 둘뿐이고, 이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때 유배를 왔던 남(南)씨와 노(盧)씨가 마을을 형성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러한 왕등도에는 한양에서 귀양 와 살았다는 전씨에 대한 설화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신기한 요술부채를 갖고 있는 왕등도 전씨
    신기한 요술부채를 갖고 있는 왕등도 전씨

    전씨들이 왕등도를 떠나지 않는 이유

    옛날 서산(현재 부안군)에는 귀양살이 섬으로 알려진 왕등도가 있었다. 왕등도는 돌섬이라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귀양 온 사람들이 대부분 양반인지라 물고기를 잡거나 나무뿌리를 캐본 적도 없어 굶어 죽으라고 보내는 섬이었다. 하루는 전씨 성을 가진 양반이 한양에서 죄를 짓고 귀양을 왔는데, 전씨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인 요술 부채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 이 부채는 안으로 부치면 재물이 들어오고, 밖으로 부치면 재물이 나가게 하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어느 날, 전씨가 바다를 보니 한양으로 곡식을 싣고 가는 세곡선이 보였다. 이에 전씨는 바닷가로 가서 부채를 안으로 부쳤고, 세곡선은 왕등도로 방향을 바꿨다. 세곡선의 선원들은 배가 엉뚱한 곳으로 가자 당황을 했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배는 자기 멋대로 왕등도로 향했다. 배가 도착하자 전씨는 세곡선에 다가가 말했다. “이보시오. 나는 한양에서 귀양 온 양반인데, 이곳에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소. 그러니 나에게 곡식을 조금만 나눠주시오.”라고 했다. 선원들도 전씨의 사정이 안타까웠지만, 함부로 곡식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안 되겠다고 하자 전씨는 “곡식을 주지 않는다면 이 섬을 영원히 떠나지 못할 것이오.”라며 겁을 주었다. 선원들은 왕등도를 벗어나기 위해 노를 저었지만, 정말 전씨의 말대로 배는 왕등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선원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 경험이 많은 한 늙은 선원이 “정해진 곡식의 수량이 있으니, 여러 섬에서 모은 곡식을 조금씩 덜어주면 어떻겠냐?”라고 했다. 이에 선원들은 곡식을 조금씩 모아 주었고, 그제서야 비로소 배가 움직일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전씨는 곡식이 떨어질 때마다 지나가는 세곡선을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 이유로 오늘날까지도 왕등도의 전씨들은 섬을 떠나지 않았고,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해상세력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

    왕등도 전씨에 관한 설화는 왕등도에 전씨가 집성촌을 형성하게 된 유래를 담은 이야기이다. 한양에서 귀양 온 전씨는 요술 부채를 이용하여 세곡선의 곡식을 얻었는데, 설화에서는 굶어 죽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또한 그의 비범한 능력은 조상이 물려준 요술 부채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왕등도의 토착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 존재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시 상업권과 교역권을 장악했던 해상세력들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백 년 묵은 지네가 벼락 맞아 죽은 벼락바위

    영암군 신북면 명동리의 벼락바위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명동리 오봉산 기슭에는 벼락바위가 있다. 예부터 벼락바위 밑에는 백 년 묵은 지네가 살았는데, 이 지네가 지나가는 사람들과 나무를 하던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고 한다. 이에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 지네가 죽게 되었고,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바위의 이름을 ‘벼락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벼락바위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할 수 없지만, 명동리와 인근 지역에는 벼락바위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백 년 묵은 지네가 벼락을 맞아 죽은 벼락바위
    백 년 묵은 지네가 벼락을 맞아 죽은 벼락바위


    벼락을 맞아 죽은 백 년 묵은 지네

    옛날 영암의 오봉산 기슭 아래에는 명동이라는 고을이 있었다. 명동은 마을 사람들 간에 우애가 좋은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백 년 묵은 지네가 오봉산 기슭에 있는 바위에서 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지나가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이 발생하였다. 하루는 나무를 하러 갔던 마을 사람이 지네에게 죽임을 당했고, 같은 일이 여러 번 되풀이 되자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이에 원님이 관군들에게 “백 년 묵은 지네를 잡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내릴 것이니 꼭 잡아 오너라.”라고 했지만, 그 누구도 지네가 두려워 선뜻 나서지 못했다. 마을이 점점 흉흉해지자, 원님은 전국에 있는 장수들을 모집하여 지네를 잡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전국에서 힘깨나 쓴다는 장수들이 명동 고을에 모두 모였지만, 장수들은 지네를 잡기는커녕 도리어 목숨만 간신히 건져 도망칠 뿐이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하면서 마을은 점점 폐허가 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이러다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혹시 모를 일이니, 우리 하늘에 제사라도 한번 지내봅시다.”라고 했다. 끝까지 남아 있던 마을 사람들은 마지막 희망을 담아 산 아래에 제단을 만들고, 정성스럽게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냈다. 그러자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깜깜해지면서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고, 하늘에서 큰 벼락이 오봉산 기슭으로 떨어졌다. 이후 붉은 핏물이 골짜기를 타고 마을까지 흘러 내려왔다. 깜짝 놀란 마을 사람들이 산을 올라가 보니, 두 동강이 난 바위 속에는 커다란 지네가 죽어 있었다. 그 후로 마을은 예전의 평화로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벼락 맞은 바위를 ‘벼락바위’라 불렀으며, 지네의 피가 흘렀던 골짜기를 ‘벼락냇가’라 불렀다고 한다.

     

    인과응보적 인식이 담긴 이야기

    벼락바위에 얽힌 설화는 ‘지명 전설’의 한 유형으로 벼락바위와 벼락냇가에 대한 지명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벼락바위 설화의 주요 내용은 사람들을 죽이는 백 년 묵은 지네의 행위와 이에 따른 하늘의 처벌이다. 하늘이 벌을 내리는 것은 마을 사람들의 기원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결과 사악한 존재인 지네는 벼락을 맞아 죽게 된다. 또한 설화의 전승 주체들은 벼락바위 설화를 통해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인과응보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 달 각시를 얻었다가 잃은 칠뜨기

    영암군 월출산의 달 각시 이야기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개신리에는 월출산이 있다. 월출산은 서해에 인접해 있고, ‘달을 가장 빨리 맞이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월출산이 있는 개신리 인근에는 달 각시에 관한 설화와 함께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달 각시 설화는 주인공인 칠뜨기가 달 각시를 만나 행복하게 살다가 늙은 어머니 때문에 달 각시를 잃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늙은 어머니 때문에 달 각시를 잃은 칠뜨기


    달 각시를 아내로 얻은 칠뜨기

    옛날 영암 월출산 기슭에 결혼할 나이가 한참 지난 칠뜨기가 늙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칠뜨기는 어리숙했지만,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효자였다. 그런 아들을 생각해 어머니는 좋은 짝을 만나 결혼하길 바라며, 밤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달님에게 빌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아들과 결혼하겠다는 처녀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칠뜨기가 잠에서 깨어보니 한 처녀가 옆에 앉아 있었다. 깜짝 놀란 칠뜨기가 누구냐고 묻자, 처녀가


    “저는 당신과 함께 살기 위해 달에서 온 각시입니다.

    달이 뜨는 밤에만 내려 올 것이니,

    그 누구에게도 제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만약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칠뜨기는 기뻐하며, 꼭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이후 칠뜨기는 달 각시와 함께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 하지만 칠뜨기는 늘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고, 결국 어머니에게만은 달 각시에 관한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날 밤, 어머니가 칠뜨기 방 앞으로 가보니 정말 꽃신이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달 각시가 어디로 가는지 보기 위해 꽃신에 실을 묶어두었다. 이후 새벽에 나가 보니 꽃신은 사라지고, 실은 집 뒤뜰에 있는 정화수 그릇 안으로 들어가 있어 달 각시가 정화수 그릇을 통해 오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월출산에 다시 달이 뜨자 정화수 그릇에서 나온 달 각시가 칠뜨기 방안으로 들어갔다. 


    몰래 이를 지켜보고 있던 어머니는 바로 뒤뜰로 가서 정화수 그릇을 깨버렸다. 그렇게 해야 달 각시와 아들이 평생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새벽이 되어 달이 사라질 때가 되자, 달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달 각시는 칠뜨기의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뒤뜰에 있는 정화수 그릇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릇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달나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달 각시는 풀벌레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월출산에 달이 떴지만, 그날부터 달 각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칠뜨기는 하염없이 오지 않는 달 각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풀벌레로 변한 달 각시는 모습을 드러낼 수 없어 그렇게 밤이 되어 달이 뜨면 구슬프게 노래만 불렀다. 


    달각 달각 달 각시님

    달각 달각 뭇 하시오

    달각 달각 물 질러서

    달각 달각 밥 짓지요


    지금도 짝사랑에 빠진 남자들한테는 달 각시 노래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전한다.

     

    달 각시와 칠뜨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달 각시 설화는 ‘우렁이각시 설화’의 한 유형으로 주인공 칠뜨기가 어머니의 지성으로 달 각시를 만나게 되지만, 금기를 어기고 비밀을 발설하여 달 각시를 잃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금기를 지켰을 경우 주인공은 행복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으나 호기심이나 욕망 때문에 금기를 어기게 된다. 이에 비해 달 각시 설화에서 금기의 파기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에서 비롯한다. 어머니를 걱정한 아들의 효성이 금기를 파기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달 각시가 제시한 금기는 주인공인 칠뜨기에 의해 깨지고, 아들의 행복을 위해 어머니가 ‘정화수 그릇을 깨는 행위’는 달 각시와 칠뜨기의 이루어지질 수 없는 비극적인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 기지를 발휘하여 병귀신을 무찌른 어부

    목포에서만 전해지는 독특한 설화

    전라남도 목포시는 우리나라처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으로 바다와 관련한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항구도시로 성장하면서 지역적 특성을 보여줄 수 있는 설화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현재 남아 있는 설화 중 병귀신에 얽힌 설화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설화로, 관련한 풍속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알라딘의 요술램프와 비슷한 병귀신

    기지를 발휘하여 병귀신을 무찌른 어부

    옛날 목포의 작은 어촌마을에 가난하지만 착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 농사지을 땅이 없던 어부는 물고기를 잡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지만, 그것도 변변치 않아 겨우 입에 풀칠만 할 정도였다. 그래도 어부는 가족을 위해서 하루에 꼭 네 번만 그물질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앞 바닷가에서 그물질을 하는데, 첫 번째도, 두 번째도, 그리고 세 번째도 허탕이었다. 어부는 속상한 마음에 “하늘이시여, 세상에 나쁜 짓을 하고도 잘만 사는 사람이 많은데, 어찌하여 전 착하게 살았는데,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제발 이번만은 고기가 많이 걸리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그물을 정성스럽게 바다에 던졌다. 


    드디어 그물을 건져 올리는데, 이번에는 그물의 무게가 무거워 큰 기대를 했다. 그런데 막상 올라 온 그물에는 놋쇠로 만든 병만 있을 뿐이었다. 어부는 오늘 건진 것이라고는 쓸데도 없는 놋쇠 병뿐이라 한숨만 나왔다. 놋쇠 병을 자세히 보니 병마개가 있어 궁금해서 병마개를 빼냈다. 그러자 ‘펑’ 소리와 함께 귀신이 나타났다. 깜짝 놀란 어부는 두려움에 몸을 엎드려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귀신은 “나는 마왕이다. 오늘 반드시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했다. 


    본래 병에서 나온 귀신은 천상을 어지럽히던 마왕으로 옥황상제의 명을 받은 태상노군에게 잡혀 병에 봉인되고 바다에 던져지게 된 것이었다. 마왕은 병 속에 갇혀 있으면서 백 년 안에 누군가 자신을 풀어주면 그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 주려고 했지만 아무도 건져주지 않았고, 그다음 백 년은 세 개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했지만 역시 구해주는 이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뒤로 자신을 풀어주는 이가 있다면 무조건 죽이기로 다짐했다는 것이다. 어부는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마왕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마왕의 손에 죽임을 당할 순간, 어부에게 좋은 묘책이 떠올랐다. 어부는 “죽더라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큰 대왕님이 어떻게 저 작은 병에 들어가실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그 말은 들은 마왕은 뽐내듯이 온몸을 흔들어 연기로 변해서 병 속으로 들어갔다. 어부는 이때다 싶어 바로 병뚜껑을 막아버렸고, 뒤늦게 어부의 뜻을 안 마왕은 나오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부는 병을 다시 깊은 바다로 던졌다. 이후 어부는 근처 바닷가에 집을 짓고, 이곳에서 다른 어부들이 절대 고기를 잡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지혜로운 어부가 전하는 권력자에 대한 경고

    병귀신에 얽힌 설화는 바다를 생활 터전으로 삼고 있는 한 어부의 이야기이다. 모든 어부들이 그렇듯 그들은 바다를 두려워하면서도 가족들의 삶을 책임져 주는 것이 바다이기에 다시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다. 여기 병귀신을 건져 올린 어부 또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바다로 나왔고, 자신만의 신념을 갖고 그물 던졌다. 그러나 건져 올린 것은 놋쇠 병뿐이었고, 설상가상으로 그 병 안에서는 연기와 함께 마왕이 나타나 어부를 죽이려고 한다. 이때 어부는 기지를 발휘해 다시 마왕을 병 안에 가두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는 위기에 대처하는 어부의 담대함과 지혜로움뿐만 아니라 악한 행위를 한 자를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는 교훈이 드러나 있다. 아무리 생사여탈권을 쥔 권력자라도 함부로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담겨 있다. 한편 병귀신 설화와 관련한 풍속이 목포시에 남아 있다. 목포에서는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어 산 사람의 몸에 씌면 병에다가 귀신을 잡아넣는 ‘귀신 물리기’를 했다고 한다. 귀신 물리기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일, 생시 등을 종이 써서 병에 넣고, 뚜껑으로 막은 후 몰래 땅에 파묻으면 귀신이 나간다고 믿었던 의식이다.  

  • 거문도 주민들의 수호신 고도리 영감

    여수시 삼산면의 거문도 풍어제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에는 거문도가 있다. 거문도는 제주와 여수 사이에 있는 다도해의 최남단에 위치한 섬으로 서도, 동도, 고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문도에서는 매년 음력 4월 15일에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거문도 풍어제’를 지낸다. 거문도 풍어제는 고도리 영감제를 시작으로 풍어제, 용왕제, 거북제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고도리 영감제는 마을을 지켜주고, 풍어를 몰고 온 ‘고도리 영감’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오늘날 거문도 풍어제의 기원이 되었다. 현재 거문도에는 고도리 영감에 관한 두 편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거문도 주민들의 수호신 고도리 영감

     

    풍어를 몰고 온 큰 바위 

    옛날 전라남도 여천의 거문도는 주민들이 물고기 잡아 생활하는 어촌마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주민들은 힘든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 하나가 “아무래도 용왕님이 노하신 거 같으니, 우리 제사라도 한번 지내봅시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정성을 모아 음식을 장만하고, 용왕제를 지냈다. 그러자 잔잔했던 바다가 요동을 치고, 억수 같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하여 주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다음 날이 되자 바다가 잠잠해지고 비도 멈추었는데, 마을 앞바다에 큰 바위 하나가 떠올랐다. 주민들은 용왕님이 보내주신 바위라 믿고, 수월산 정상에 바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때부터 조업을 나간 배들은 항상 만선으로 돌아왔으며, 특히 고등어가 많이 잡혔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이 바위를 ‘고두리 영감’이라 불렀고, 이후 ‘오돌이 영감’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왜구를 무찌른 오돌이 영감

    옛날 전라남도 여천군 삼산면 동도리 죽촌 마을은 바다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어부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하루는 한 선주가 마을의 해안가에 쓰려져 있는 오 척 단신의 청년을 보았다. 선주는 죽어가는 청년을 모른 채 할 수 없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돌봐주었다. 선주 덕분으로 청년은 정신을 차렸고, 여기가 어디인지 물었다. 선주는 “여긴 동도라는 섬으로 바닷가에 쓰러져 있던 당신을 내가 데려왔소.”라고 했다. 그러자 청년은 “저는 오돌이입니다.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는데, 저를 살려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하며, 언젠가 선주에게 받은 은혜를 꼭 보답하겠다고 했다. 건강을 회복한 오돌이는 갈 곳이 없으니 선주의 배에서 일을 시켜달라고 했다. 그래서 배에 태웠더니, 오돌이는 게으름만 피우고 매일 잠만 자는 것이었다. 그렇다보니 다른 선원들의 불만이 커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울릉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왜구의 배를 만나 선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이때도 오돌이는 잠만 자고 있었다. 선원들이 욕을 하며 깨우자 오돌이는 “왜구의 배가 더 크고 좋으니, 우리 저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갑시다!”라고 하며 왜구의 배에 올라탔다. 왜구들은 그런 오돌이를 잡아 돛대에 묶었지만, 오돌이가 온몸에 힘을 주어 밧줄을 끊고 돛대를 뽑아 왜구에게 던졌다. 이를 본 왜구의 두목이 오돌이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하자, 오돌이는 “다시는 이 바다에서 노략질을 하지마라. 만약 또 내 눈에 띈다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했다. 이후 다시는 왜구가 나타나지 않았고, 삼도 뱃사람들은 편하게 고기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마을로 돌아 온 선원들은 오돌이를 정중하게 모셨고, 그런 의미에서 ‘오돌이 영감’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죽촌 마을 뒤 개천의 돌다리는 오돌이가 놓았다 하여 ‘오돌이 다리’라고 부르고, 힘세고 의리 있는 사람을 ‘오돌이 같은 장사’라 부른다고 한다.

     

    거문도 주민들의 소망이 담긴 이야기

    고도리 영감에 관한 설화는 거문도 풍어제의 기원과 풍어제 때 모시는 신체인 고도리 영감에 관한 비범성을 드러낸 이야기이다. 모든 어촌마을이 그렇듯 거문도 주민들도 바다를 터전으로 살고 있으며,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업 간의 안전과 만선의 꿈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도리 영감 설화에는 이러한 거문도 주민들의 소망이 ‘고도리 영감’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져 있다. 즉 고도리 영감의 존재는 거문도 주민들에게 심리적 안정감과 기대감 주었다. 

     

  • 양씨 부인과 설씨 총각의 내기로 만들어진 홀어머니산성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의 홀어머니산성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의 대모산에는 홀어머니산성이 있다. 홀어머니산성은 백제시대에 쌓았다고 하며,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초까지는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홀어머니산성이라는 이름은 ‘아홉 명의 아들을 둔 양씨 부인이 아들들과 함께 산성을 쌓았다’라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대모산성’ 또는 ‘백산리산성’이라고도 불린다. 홀어머니산성의 축성에 관한 기록은 1700년에 편찬된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대모산성은 원나라 초에 한 할미가 아홉 아들을 데리고 성을 쌓고, 여기 살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산성은 1984년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0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남대문 문패 가져오기와 성 쌓기 내기

    옛날 순창 고을에는 얼굴이 아름답고 성품도 고운 한 부인이 아홉 명의 아들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 부인은 성이 양씨여서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양씨 부인’이라 불렀다. 같은 마을에는 설씨라는 총각도 살고 있었는데, 이 설씨 총각은 오랫동안 양씨 부인을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더는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 없었던 설씨 총각은 “양씨 부인, 이제 아들들도 다 장성했으니, 우리 함께 삽시다.”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절개를 지켰던 양씨 부인은 설씨 총각과 결혼할 마음이 없어서 싫다고 했다. 자신이 거절하면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던 설씨 총각이 이때부터 막무가내로 행동했다. 아무래도 그를 쉽게 단념시킬 수 없음을 알게 된 양씨 부인은 “우리 내기를 해서 이긴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어떤가요?”라고 하며 내기를 제안했다. 내기는 양씨 부인이 대모산에 성을 쌓고, 그동안 설씨 총각은 나막신을 신고 한양에 가서 남대문의 문패를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이튿날, 양씨 부인과 설씨 총각의 내기가 시작됐다. 설씨 총각은 나막신을 신고 한양으로 출발하였고, 양씨 부인은 아홉 명의 아들들과 함께 열심히 성을 쌓았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쉴 틈도 없이 성을 쌓았던 양씨 부인은 마지막 돌을 올리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마침 그때 설씨 총각이 한양에서 돌아왔다. 양씨 부인은 자신이 먼저 성을 완성했으니 내기에서 이겼다고 했다. 그러나 설씨 총각이 양씨 부인의 치마에 남아 있는 돌을 발견하고, 아직 그 돌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이겼다고 했다. 양씨 부인은 자신이 내기에 진 것을 알았지만, 차마 설씨 총각과 결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머리에 치마를 뒤집어쓰고, 성벽 아래로 뛰어내려 자결했다고 한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양씨 부인이 쌓은 성이라 하여 ‘홀어머니산성’이라고 불렀고, 지금도 결혼을 앞둔 여성은 이 성을 지나면 안 된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절개를 지켜야 했던 여성의 삶

    홀어머니산성에 얽힌 설화는 성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관한 ‘축성설화’이다. 이 설화에서는 내기의 주체가 오누이가 아니라 남녀 간으로 설정되어 있고, 전승지도 순창 지역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오누이 힘겨루기 설화’의 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내기의 내용도 성 쌓기와 서울 왕복이라는 점, 내기의 결과로 여성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유사하다. 이 설화에서 양씨 부인의 죽음은 당시 죽은 남편을 위해 평생 수절하며, 절개를 지켜야하는 여성들을 삶을 반영하고 있다. 

     

  • 비밀을 발설한 아내 때문에 우물에서 승천하지 못한 노인

    남원시 화정동에 소재한 한우물

    전라북도 남원시 화정동의 한우물 마을에는 예부터 ‘하늘이 내려준 샘’이라고 알려진 한우물이 있다. 원래 한우물 마을은 '연화리'라 불렸는데, 1625년에 김해 김씨가 정착하면서 한우물 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에는 가뭄에도 항상 솟아나는 샘이 있어 샘의 이름을 ‘한우물’이라 지었고, 한우물을 통해 교룡산의 정기가 솟아난다고 하여 마을의 이름도 ‘한우물 마을’로 바꿨다고 한다. 지금도 한우물에 관한 이야기는 왕정동 일대에 전해지고 있으며, 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한우물에서 용이 되지 못한 우룡(牛龍)을 위해 우물제를 지내고 있다.

     

    우물에 자신의 묘를 쓰려 했던 노인

    옛날 교룡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한우물 마을에는 후처와 아들 삼 형제를 둔 노인이 살고 있었다. 노인은 남다른 혜안을 갖고 있어 마을의 우물이 천하의 명당임을 알고 있었다. 노인은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아들 삼 형제를 불러 놓고 유언을 하였는데, 이때 아내는 남이기 때문에 들으면 안 된다고 하여 유언을 듣지 못하게 했다. 노인은 “아들들아! 마을에 있는 우물이 천하에 하나뿐인 명당자리이니, 반드시 내가 죽으면 나의 목을 베어 우물에 넣어야 한다, 그러면 삼 년 후에 복이 되어 우리 집안은 크게 번성하고, 대대로 훌륭한 인물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삼 년 동안 이 비밀이 지켜지지 못한다면 큰 재난을 입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때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너무 궁금했던 아내는 밖에서 몰래 엿듣고 있었다. 이후 아버지가 죽자 효성이 지극한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목을 베어 우물에 넣고 장사를 지냈다.


    노인이 죽은 지 삼 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계모와 아들 삼 형제가 크게 다투게 되었다. 화가 난 계모는 마을 사람들에게 “불효자들이 아버지가 죽자 목을 베어 우물에 넣었다.”라고 떠들고 다녔다. 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라 며칠에 걸쳐 우물의 물을 퍼냈는데, 이때 하늘로 막 승천하려고 했던 검은 소가 앞발을 쳐들고 울부짖으며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마을은 황폐해졌고, 우물에서는 매일 귀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을에 이상한 일이 계속 발생하자 마을 사람들은 용한 무당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는데, 무당은 “하늘로 승천하지 못한 검은 소의 한을 풀지 않으면 마을이 망할 것이니, 얼른 굿을 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굿을 통해 검은 소의 한을 풀어주고, 우물을 메워 버린 후 위쪽에 새로운 우물을 파서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가족이지만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 어머니

    한우물에 얽힌 설화는 ‘풍수설화’의 한 유형이며, 명당인 우물에 아버지의 유언대로 묘를 썼지만, 어머니의 발설로 영광스러운 가문의 미래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이다. 특히 금기의 파괴는 가족 내 유일한 여성인 후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는 어머니가 가족의 일원이기 이전에 ‘외인’이라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 이야기는 그런 생각을 더욱 공고히 하여 ‘아내는 믿고 비밀을 공유해서는 안 된다’는 관념을 심어주고 있다. 

     

  • 백발수신을 위해 남해신사를 세운 현종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에 소재한 남해신사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에 남해신사(南海神祠)가 있다. 남해신사는 남해를 다스리는 수신(水神)에게 국가의 안녕과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으며, ‘남해당(南海堂)’ 또는 ‘남해신관(南海神壇)’이라고도 불렸다. 남해신사는 강원도 양양의 ‘동해묘’, 황해도 풍천의 ‘서해단’과 함께 해신제를 지냈던 3대 사당 중 한 곳이고, 현재는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해신을 모시는 사당이기도 하다. 남해신사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증보문헌비고』에 “고려 현종 19년(1028)에 비로소 남해의 해신에게 제사의식을 올렸다.”라는 기록이 있어 현종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해신사의 수신제는 조선시대 말까지 이어지다가 일제강점기에 중단되면서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 이후 발굴조사를 통해 2001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고, 2003년부터는 ‘남해신사 제례 보존위원회’가 주관하여 매년 마을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현종의 목숨을 구한 백발수신

    고려 현종 원년 때의 일이다. 현종의 친송책(親宋策)에 불만을 품은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했는데, 워낙 거란군이 대군이라 고려군은 패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현종은 나주로 피신하여 남해포에서 야영을 하게 되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든 현종이 꿈을 꾸었는데, 백발의 수신이 나타나 “지금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을 때가 아니오.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라고 했다. 현종은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 보니, 멀리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였다. 현종은 바로 신하들과 함께 몽탄으로 피신했고, 군사들을 매복시켜 거란의 장수 하공진을 인질로 잡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군사를 재정비한 현종은 거란군을 무찌르고, 무사히 환궁할 수 있었다. 현종은 자신의 꿈에 나타나 목숨을 구해준 백발수신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마침 환궁하게 되자, 현종은 신하들을 불러 놓고,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백발수신의 덕이다. 당장 남해포에 ‘남해당’을 짓고, 백발수신을 받들어라. 또한 나주, 영암, 해남, 강진, 영광, 함평 등의 6개 고을 현감들이 한자리에 모여 직접 제를 모셔라.”라고 명령하였다. 

     

    밤이 돼서야 제를 지냈던 남해당

    현종의 명을 받은 6개의 고을 현감들이 매년 한자리에 모여 백발수신을 위해 제를 지냈다. 그러던 어느 해, 남해당에서 제를 지낼 때 난데없이 대들보 위에 큰 구렁이가 한 마리가 나타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를 주관하던 현감이 구렁이를 보고, 깜짝 놀라 급사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조금 전까지 건강하시던 현감이 갑자기 죽다니, 이것은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여 백발수신이 노했기 때문이지 않겠소.”라고 했다. 이런 일들이 종종 발생하자 6개 고을의 현감들은 서로 제를 모시기를 꺼렸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3명씩 조를 짜서 제를 지내도록 하고, 소홀함이 없이 정성을 다하라고 명령을 했다. 그러나 현감들은 제를 지낼 때면 무슨 변고가 생길지 몰라 항상 걱정하였다. 특히 처음 당도하는 현감이 제를 주관하다 보니, 먼저 도착하지 않으려고 늦게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남해당에서는 항상 밤이 돼서야 제를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남해신사의 정통성과 신성성을 담은 이야기

    남해신사에 얽힌 두 편의 설화는 남해신사 건립에 대한 정통성과 신성성을 담은 이야기이다. 남해신사 건립은 백발수신의 도움 때문에 목숨을 구한 현종의 보은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수신을 모심에 있어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죽음을 맞게 된다는 설정을 통해 남해신사의 신성함을 드러내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한편 남해신사는 과거 해신제를 지냈던 3대 사당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으로 바다를 다스리는 수신에 관한 의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적지이다.

     

  • 임경업 장군과 누이의 내기로 만들어진 낙안읍성

    순천시 낙안면에 소재한 낙안읍성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는 낙안읍성이 있다. 예부터 낙안읍성이 자리한 마을에는 임경업 장군이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낙안은 교통의 요충지이며, 물산이 풍부했던 곳으로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지역이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낙안 출신의 김빈길(金贇吉) 장군이 토성을 쌓은 것이 낙안읍성을 시초라 할 수 있다. 이후 세종 6년(1424)에 다시 돌로 쌓기 시작했고, 인조 4년(1626)에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낙안 군수로 있을 때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현재 낙안읍성은 해미읍성, 고창읍성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읍성’ 중 하나이며, 다른 읍성과는 달리 실제로 이백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국내 유일의 민속마을이다.

    순천 낙안읍성 낙민루 정면
    순천 낙안읍성 낙민루 정면
    순천 낙안읍성 내 풍경
    순천 낙안읍성 내 풍경
    순천 낙안읍성 성벽
    순천 낙안읍성 성벽

    임경업 장군과 누이의 성 쌓기 내기

    순천 낙안읍성 표지석
    순천 낙안읍성 표지석

    옛날 임경업 장군이 낙안의 군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 낙안은 왜구의 침입이 잦아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하였던지라 임경업 장군은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을 쌓기로 하였다. 임경업 장군에게는 누이가 하나 있었는데, 백성들을 생각하는 장군의 마음이 대견하여 동생을 돕기 위해 내기를 하자고 했다. 누이는 “너는 성을 쌓고 나는 군사들의 군복을 만들 것이니, 더 빨리 끝내는 사람이 이기는 거로 하자.”라고 했다. 누이는 봄에 목화를 심어 가꾸었고, 수확한 목화솜으로 베를 짜서 옷을 열심히 만들었다. 임경업 장군도 병사와 주민들을 동원하여 성을 쌓기 시작했다. 임경업 장군은 채찍으로 금전산의 큰 돌을 옮기는 도술을 부렸다. 


    옮겨 온 돌로 성을 다 쌓은 후 바위 하나가 남았는데,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 바위를 ‘남은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누이는 옷을 다 만들고 이제 옷고름만 달면 내기에서 이기는 것이었지만, 아직 동생이 성을 다 쌓지 못한 것을 알고, ‘아, 내가 여자인데, 내기에서 이기면 동생과 군사들의 사기가 내려가겠구나!’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성을 다 쌓고 나서 동생이 오자 자신이 졌다며 임경업 장군에게 승리를 양보했다고 한다.


    임경업 장군만 기억하는 낙안읍성

    낙안읍성에 얽힌 설화는 성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관한 ‘축성설화’로 임경업 장군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낙안읍성 안에는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재직할 당시 선정을 베푼 것과 왜구를 물리친 것에 대한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 담긴 ‘임경업장군비각(林慶業將軍碑閣)’도 있다. 또한 마을에서는 정월 대보름이 되면 당산제를 지내는데, 이때 임경업장군비각에서부터 제를 올린다고 한다. 이처럼 임경업 장군은 낙안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영웅을 넘어 마을 수호하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순천 낙안읍성 임경업장군 비각 정면
    순천 낙안읍성 임경업장군 비각 정면
    순천 낙안읍성 양혜공 김빈길 장군 동상 정면
    순천 낙안읍성 양혜공 김빈길 장군 동상 정면

    이는 임경업 장군에 대한 전승집단의 강한 믿음과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낙안읍성을 처음으로 쌓은 사람은 김빈길 장군이다. 김빈길 장군은 낙안에서 태어나 의병들을 모아 낙안읍성을 쌓고, 왜구를 무찔러 낙안을 지킨 인물이다. 그런데 김빈길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해 없어지고, 현재는 임경업 장군을 모신 사당인 충민사(忠愍祠)에서 영정과 위패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순천 낙안읍성 임경업장군 비 정측면
    순천 낙안읍성 임경업장군 비 정측면
    순천 낙안읍성 임경업장군 초상
    순천 낙안읍성 임경업장군 초상

  • 일곱 골짜기가 바다로 변한 칠산바다

    영광군 낙월면 송이리에 속한 칠산도

    전라남도 영광군 서쪽 바다에는 ‘칠산도’라 불리는 일곱 개의 작은 섬들이 있다. 칠산도는 낙월면 송이리에 속한 섬들로 남쪽에서부터 일산도(一山島)를 시작으로 북쪽의 칠산도(七山島)까지 일곱 개의 섬들이 이어져 있으며, 이들 섬이 소재한 바다를 ‘칠산바다’라 부른다. 또한 칠산바다에 얽힌 설화는 칠산바다와 인접한 지역에서 주로 전승되고 있다. 본래 칠산바다는 육지였으며 일곱 개의 골짜기가 있어 ‘칠산 고을’이라 불렸던 곳이었으나, 대홍수로 인하여 바다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일곱 골짜기가 바다로 변한 칠산바다


    돌부처의 귀에 피가 나면 마을이 바다로 변한다

    옛날 칠산 고을에 서씨 성을 가진 노인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서노인의 집에 과객이 찾아와 하룻밤 머물기를 청했다. 서노인은 낯선 사람이지만, 풍기는 이미지가 온화하여 과객을 후하게 대접해주었다. 다음날 과객이 떠나며, “앞으로 이 칠산 고을은 바다가 될 것이니, 얼른 가족과 함께 떠나시오.”라고 했다. 깜짝 놀란 서노인이 "그때가 언제입니까?"라고 묻자, “저 산에 있는 돌부처의 귀에서 피가 흐른 뒤가 될 것이오.”라고 했다. 그날부터 서노인이 매일 아침 돌부처에 이상이 없는 지 확인하러 갔다. 서노인이 하루도 빼먹지 않고 돌부처를 보러 가자 마을사람들은 궁금하여 왜 그런지 물었다.


    서노인은 과객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지만, 오히려 미친 영감이라고 조롱만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사는 백정 하나가 서노인을 놀리기 위해 밤에 몰래 돌부처의 귀에 피를 바르고 왔다. 다음날도 어김없이 돌부처를 확인하기 위해 산에 올랐던 서노인은 피 흘리는 돌부처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마을로 달려와 “돌부처의 귀에 피가 났다. 바닷물이 밀려오기 전에 얼른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서노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고 비웃기만 했다. 서노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한 후 바로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향했다.


    칠산 고을 원님에게도 이 소동이 알려졌고, 관원들은 마을을 혼란스럽게 한 서노인을 잡아다 벌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관원들의 얼굴빛을 보고 이상한 기운을 느낀 원님은, “서노인의 말이 맞다. 얼른 가족을 데리고 도망가야 한다."라고 했다. 원님과 관원들은 가족들을 이끌고, 서노인이 오른 산으로 갔다. 그때 천둥번개가 치며,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고, 바닷물이 밀려와 칠산 고을은 물바다가 되었다. 서노인은 밀려오는 바닷물을 보고 더 높이 오르려는데 한 소금장수가 산중턱에 서 있다가 “영감님 이제 그만 멈춰도 됩니다. 바닷물은 이 지게 발목까지 차고 그칠 것입니다.”라고 했다. 소금장수의 말대로 바닷물은 지게 발목까지만 차고 말았다. 이리하여 칠산 고을은 ‘칠산바다’가 되었고, 일곱 개의 골짜기는 ‘칠산도’가 되었다고 한다. 

     

    금기를 어기면 벌을 받는다는 인식이 담긴 이야기

    칠산바다에 얽힌 설화는 본래 육지였던 칠산 고을이 칠산바다가 된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칠산바다와 인접한 지역에서 전해지고 있다. 설화에서는 이인이 등장하여 금기(禁忌)를 주고, 금기를 지킨 사람들은 살아남지만, 이를 믿지 않고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맞는 결과로 나타난다. 즉 금기는 인간의 질서와는 다른 ‘신적 질서’에 대한 엄중함을 드러내고, 신성성을 위협하는 인간들의 도전, 교만, 방심을 제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 용이 살았던 못을 메우고 선운사를 세운 검단선사

    전라북도 대표사찰 선운사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도솔계곡과 선운계곡이 만나는 자리에 선운사(禪雲寺)가 있다.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이러한 선운사 창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신라의 진흥왕(540~576)이 꿈에서 ‘미륵삼존불’을 보고 감동하여 절을 세웠다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 위덕왕 24년(557)에 백제의 고승 검단선사가 용이 사는 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선운사를 지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당시 선운사가 있던 곳은 백제의 영토였던 지역이므로 진흥왕보다는 검단선사의 이야기에 더 힘이 실린다. 선운사의 이름은 검단선사가 ‘구름 위에 누워 참선한다.’는 뜻인 ‘참선와운(參禪臥雲)’에서 따와 지었다고 한다. 

     

    용이 사는 못을 메우고 절을 지은 노인

    옛날 백제시대 선운산 기슭의 선운 고을에는 가끔 해적과 산적들이 나타나 주민들을 괴롭혔는데, 오순도순 서로 도와가며 사는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도적 떼들이 큰 골칫거리였다. 하루는 선운 고을에 한 노인이 찾아와서 이 마을이 소금과 종이를 만들기에 좋은 곳이라 생각되니 오늘부터 마을에서 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마을 사람들은 비록 행색은 초라했지만, 인자한 노인의 모습에 흔쾌히 허락했다. 그날부터 노인은 마을에 살며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노인의 일손을 돕고, 소금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노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어려움이 있으면 해결해 주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을 사람들은 노인을 따르게 됐다.


    어느 날, 마을 앞바다에 배가 한 척 나타났다. 그 배는 사람의 기척이 있으면 가라앉고, 기척이 없으면 떠오르는 이상한 배였다. 소식을 들은 노인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바닷가로 향했다. 그러자 바다 한가운데 있던 배는 노인을 향해 다가왔다. 배가 다가오자 노인은 배에 탔고, 갑자기 어디선가 백의 동자가 나타나 하는 말이 “저는 인도 공주님의 심부름으로 동쪽 바다에 소금을 만드는 노인에게 두 분의 금불상을 전하러 왔습니다. 이 불상을 성스러운 땅에 모셔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 말은 들은 노인은 금불상을 모시고 마을로 왔다. 당시 마을에는 용이 사는 못이 있었는데, 노인은 용을 몰아내고, 연못을 메워나갔다. 그때 아랫마을에 눈병이 돌았는데, 신기하게도 연못에 숯을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 나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숯과 돌을 날라 못을 메웠다. 못이 메어지자 노인은 그 위에 절을 짓고, 백의 동자가 전해준 금불상을 정성스럽게 모셨다. 이때 지은 절이 바로 ‘선운사’였다고 한다.


    하루는 도적들이 노인을 찾아와 소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노인이 소금이 없다고 하자 화가 난 도적들이 노인을 해치려했는데, 그때 어디선가 큰 호랑이가 나타나 도적들의 앞을 막아섰다. 깜짝 놀란 도적들이 겁을 먹자 노인은 호랑이를 쓰다듬고, 괜찮다며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자 호랑이는 노인에게 공손히 절을 하고 산으로 올라갔다. 이 모습을 본 도적들은 노인에게 절을 하고 새사람이 되겠다고 했다. 다음날 노인은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며 마을을 떠나려고 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떠나기 전에 이름이나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노인은 “검고 붉다는 검단(黔丹)이라 하오.”라고 말하며, 홀연히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새로운 문화를 전파한 검단선사

    선운사에 얽힌 설화는 검단선사가 창건한 선운사에 대한 내력을 담은 이야기이다. 검단선사는 마을 연못에 사는 용을 물리치고, 용이 살았던 연못에 선운사를 만든다. 이것은 토착신앙을 몰아내고, 외래종교인 불교가 뿌리내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불교적 가르침으로 교화된 대중으로 도적들이 등장하며, 이들을 교화한 인물은 바로 검단선사이다. 검단선사는 도적들에게 소금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어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고, 교화된 도적들은 검단선사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매년 선운사에 ‘보은염(報恩鹽)’을 올렸다고 한다. 이처럼 선운사에 얽힌 설화는 검단선사를 중심으로 선운사가 창건되었고, 새로운 문화가 전파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부처님의 계시를 받고 송광사를 창건한 혜린선사

    순천시 송광면 조계산에 소재한 송광사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 자락에는 송광사가 있다. 송광사는 우리나라 조계종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으며, 경남 합천의 해인사, 경남 양상의 통도사와 함께 한국의 삼보사찰(三寶寺刹) 중 한 곳이다. 송광사의 창건은 통일신라의 승려였던 혜린(慧璘)선사가 송광산[조계산의 옛지명]에 이르러 ‘길상사(吉祥寺)’라는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에는 40여 명의 스님이 살았던 작은 절이었으나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오면서 절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고, 절의 이름도 길상사에 송광사로 바꾸었다. 특히 송광사는 지눌스님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초기의 고봉국사까지 열여섯 명의 국사를 배출해 승보사찰(僧寶寺刹)이 되었으며, 새로운 한국불교의 중심지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송광사 건물 풍경
    송광사 건물 풍경
    송광사 내부
    송광사 내부
     


    문수보살의 인도를 받고 절을 지은 혜린선사

    신라시대 말엽, 혜린선사가 십여 명의 제자들과 산속에서 수도하고 있었다. 하루는 제자들이 괴질에 걸려 몹시 괴로워했고, 혜린선사가 약초를 뜯어 치료했으나 효험은커녕 아픈 사람들이 더 늘어나기만 했다. 걱정이 컸던 혜린선사은 제자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부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정결한 기도처를 찾아 나섰다. 혜린선사는 산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연못을 발견했는데, 연못 가운데는 문수보살 석상이 우뚝 서 있었다. 혜린 선사는 깜짝 놀랐지만, 제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생각이 들어 무척이나 기뻤다. 바로 제자들과 함께 문수보살을 마주 보고 앉아 기도를 시작하였고, 기도는 그렇게 7일 동안 이어졌다.


    기도가 끝나는 날, 부처님이 혜린선사의 꿈속에 나타나 “이제 너와 제자들의 모든 시련이 끝났으니, 이 길로 새 절터를 찾아 절을 짓고 중생을 구제하도록 하여라.” 했다. 꿈에서 깨어 보니 시름시름 앓던 제자들이 모두 건강해졌다. 혜린선사는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문수보살 석상에게 가는 길을 인도해 달라고 다시 기도를 드렸다. 혜린선사가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자 언제 오셨는지 노승 한분이 온화한 미소로 혜린선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승은 부처님의 불보를 전하면서 “제자들과 함께 전라도 남쪽에 있는 송광산으로 가시오. 그곳에 불보를 모시고 절을 지어 불법을 전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혜린선사는 제자들과 함께 송광산으로 떠났다. 여러 날이 지나 드디어 송광산 아래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는데, 그때 한줄기 빛이 송광산 기슭을 비추었다. 혜린선사는 빛이 비춘 곳에 절을 만들어 부처님을 모셨고, 절의 이름을 ‘길상사’라 했다고 한다.

    송광사 앞 강
    송광사 앞 강


    송광사의 신성함과 영험함을 담은 이야기

    송광사에 얽힌 설화는 혜린선사가 창건한 송광사에 관한 내력이 담긴 이야기이다. 송광사의 창건에서는 역사적 사실보다 사찰의 신성함을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혜린선사가 세운 송광사의 절터는 부처님이 계시를 해준 성스러운 땅이며, 이러한 성스러운 땅에 혜린선사로 하여금 절을 창건하게 하여 송광사의 신성함과 영험함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보조국사 지눌스님은 혜린선사가 창건한 길상사를 번성시킨 인물이다. 이후 송광사에서는 보조국사 지눌 스님을 포함하여 열여섯 명의 국사를 배출하였고, 그 결과 큰스님을 가장 많이 배출한 승보사찰이 되었다.

    송광사 내부 통로
    송광사 내부 통로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과 비석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과 비석

  • 선화공주의 청을 들어 세운 미륵사

    지금은 폐사지로 남아있는 동양 최대의 절 미륵사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로 잘 알려진 미륵사(彌勒寺)의 터 ‘미륵사지(彌勒寺址)’가 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 2년(601)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백제의 절로는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절이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크게 번성하였으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점차 쇠락한 것으로 추정한다. 미륵사지는 1962년에 사적 제150호로 지정하여 관리하였지만, 현재는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미륵사지 서원금당터
    미륵사지 서원금당터


    다만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과 ‘미륵사지당간지주(彌勒寺址幢竿支柱)’만이 외롭게 남아 있을 뿐이다. 미륵사지석탑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지만, 이것도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말하는 듯 많이 쇠약해진 모습이다. 특히 미륵사지석탑은 훼손 상태가 심각하여 2001년부터 수리를 시작해 2018년 7월에 보수 작업을 완료하였고, 2019년 4월 30일에 열린 준공식에서 복원된 모습을 공개하였다.

    미륵사지석탑 정면
    미륵사지석탑 정면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 깃든 미륵사

    백제의 30번째 왕은 무왕이다.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로 홀로 집을 짓고 살던 중 못의 용과 정을 통하여 무왕을 낳았다. 무왕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넓은 아이였고, 집이 가난하여 생계를 위해 마를 캐어 팔았다 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를 ‘마동’ 또는 ‘서동’이라 불렀다. 어느 날,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경주로 갔다. 경주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며 노래를 가르쳐 주었는데, ‘선화공주가 서동과 몰래 만나 정을 통한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노래는 아이들에 의해 경주 전역에 울려 퍼졌고, 결국 진평왕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진평왕은 선화공주의 부정한 행실을 문제 삼아 먼 시골로 유배를 보냈는데, 왕후는 황금을 주며 노잣돈으로 쓰라고 했다. 선화공주가 길을 떠나는 도중에 갑자기 서동이 나타나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나 선화 공주는 서동을 믿었고 좋아했다. 후에 서동의 이름을 들은 선화공주는 자신이 서동의 부인이 될 운명임을 알고 서동을 따라갔다.


    서동과 함께 백제에 도착한 선화공주는 왕후가 준 황금을 팔아 생활을 꾸리자고 했다. 그러자 서동은 웃으면서 “내가 마를 캐던 곳에는 이것이 산처럼 쌓여 있소.”라고 했다. 선화공주는 깜짝 놀라며, “이것은 죽을 때까지 부자로 살 수 있는 진기한 보물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부모님께 보내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서동이 좋다고 했지만, 문제는 산처럼 쌓인 황금을 보낼 방도가 없었다. 이때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가 신통력으로 황금을 수송해주겠다고 했다. 지명법사는 신통력으로 선화공주의 편지와 황금을 진평왕에게 보냈고, 진평왕의 마음을 얻은 서동은 백제의 무왕이 되었다. 하루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용화산 아래의 큰 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수레를 멈추고 내려와 공손하게 절을 했다. 미륵삼존을 본 후 선화공주는 “이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라고 무왕에게 말했다. 무왕은 공주의 소원대로 못을 메워 절을 짓고, 절의 이름을 ‘미륵사’라 하였다. 

     

    백제 무왕의 신념이 담긴 미륵사

    미륵사에 얽힌 설화는 우리에게 「서동요」의 배경설화이며, 서동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미륵사의 창건은 백제 무왕에게 있어 왕권 강화의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당시 백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이상을 심어주고 싶은 백제 무왕의 신념이 담긴 이야기이다. 설화에서는 선화 공주의 부탁으로 미륵사가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2009년 미륵사지석탑을 보수 과정에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에는 선화공주가 아닌 당시 좌평이었던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덕진 아씨의 공덕으로 만들어진 덕진다리

    영암군 덕진면 덕진리의 덕진다리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덕진리에는 덕진 아씨의 공덕(功德)이 깃든 ‘덕진다리’가 있다. 덕진다리는 월출산 아래 영암읍과 덕진면 경계에 흐르는 덕진천[지금의 영암천]에 놓였던 다리로 나주에서 영암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길목에 위치하며, 교번마을과 역리마을을 이어주었다. 덕진다리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덕진교는 덕진포에 있다.”라는 내용으로 볼 때 1500년대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덕진다리는 과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징검다리로 그 흔적만 남아 있다. 1992년에 덕진다리가 있던 곳에 새롭게 덕진교를 만들었으나 이것도 2009년에 영암천을 확장하는 공사로 인해 없어졌다.


    덕진 아씨의 공덕을 빌려 살아난 원님

    신라시대 때 영암 고을에는 인색하기로 유명했던 원님이 있었는데,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어 저승에 가게 되었다. 염라대왕을 만난 원님은 이승에서 아직 할 일이 많다면서 좀 더 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염라대왕은 원님의 수명이 적힌 명부를 보고, 아직 젊은 나이인 걸 불쌍히 여겨 이승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저승차사가 이승으로 데려다주는 조건으로 삼백 냥의 돈을 내라고 했다. 원님이 가진 것이 없다고 하자, 저승차사는 “이승에서 쌓은 덕만큼 채워지는 곳간이 저승에 있으니 그곳에서 가져오너라.”라고 했다. 원님은 자신의 곳간을 찾아 문을 열었는데, 고작 볏짚 한 단만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곳간을 보고 망연자실한 원님에게 저승차사는 “네 고을에 사는 덕진 아씨의 곳간에서 쌀을 빌리고, 나중에 이승으로 돌아가서 갚으면 된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원님은 덕진 아씨의 쌀을 빌려 이승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원님은 돌아오자마자 마을 사람들에게 덕진 아씨에 관해 물었더니 사람들은 입의 모아 덕진 아씨를 칭찬했다. 덕진 아씨는 덕진천 옆에서 작은 주막을 하고 있는데, 배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을 주고, 잘 곳이 없는 사람에게는 방을 내어준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원님은 덕진 아씨를 찾아갔다. 원님은 자신이 저승에 갔다 온 이야기를 하고, 빚을 갚겠다며 삼백 냥을 건네주었다. 덕진 아씨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니 안 받겠다고 극구 사양했지만, 원님의 간곡한 부탁을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어 삼백 냥을 받았다. 덕진 아씨는 평소 덕진천에 다리가 없어 마을 주민들을 비롯해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불편을 겪고 있어 다리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라 원님에게 받은 돈으로 다리를 놓기로 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완성된 다리를 덕진 아씨의 이름을 따서 ‘덕진다리’라 불렀다고 한다.


    저승곳간이 가득 차길 바라는 마음

    덕진다리에 얽힌 설화는 가난하지만 선행을 베푼 덕진 아씨와 부자지만 남에게 인색했던 원님을 대비하여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삶인지에 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현재 덕진 아씨의 주막이 있던 곳에는 1832년에 덕진 아씨의 공덕을 잊지 않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세운 ‘대석교창주덕진지비(大石橋創主德津之碑)’가 있다. 단오가 되면 마을에 있는 ‘덕진제각’에서 덕진 아씨의 공덕을 찬양하고, 마을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덕진여사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 단야낭자의 슬픈 전설이 전해지는 벽골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벽골제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는 단야낭자의 슬픈 전설이 전해지는 벽골제가 있다. 벽골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경남 밀양의 수산제, 충북 제천의 의림지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수리시설' 중 한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비류왕 27년(330)에 처음으로 쌓기 시작해 신라 원성왕 6년(790)에 증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4차례에 걸쳐 개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세종 2년에 홍수로 무너졌고, 일제강점기에는 간선 수로를 설치하면서 크게 훼손되었다가 1975년부터 복원을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스스로 청룡의 제물이 된 단야낭자

    신라 원성왕 때의 일이다. 신라의 조정에서는 오래된 벽골제를 보수하기 위해 당시 최고의 토목기술자였던 원덕랑을 김제로 파견했다. 원덕랑은 김제 태수와 함께 일을 했다. 태수에게는 미모가 빼어나고 성품 또한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단야낭자라 불렀다. 단야낭자는 원덕랑을 보자 첫눈에 호감을 느꼈고, 연모의 정은 점점 깊어져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원덕랑은 벽골제 보수작업에만 열중했다. 원덕랑은 신라에 약혼녀 월래가 있었기에 단야낭자의 마음은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었다. 벽골제 공사가 끝나갈 무렵,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큰비가 내려 더 이상 공사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당시 벽골제 인근에는 백룡과 청룡이 살고 있었는데, 심술궂은 청룡이 백룡과의 싸움에서 이기자 더욱 더 심하게 행패를 부렸고, 벽골제의 제방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힘들게 보수공사에 참여했던 마을사람들은 청룡의 노여움을 풀어주기 위해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했다.

     

    이런 와중에 원덕랑을 만나기 위해 신라에서 약혼녀 월래가 왔다. 태수는 자신의 딸 단야가 남몰래 원덕랑을 사모한 것을 알고 있던 터라 월래를 청룡의 제물로 바칠 음모를 꾸몄다. 이러한 아버지의 음모를 알게 된 단야낭자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오랜 고민 끝에 ‘나만 희생하면 제방도 완성되고, 원덕랑과 월래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더욱이 아버지의 살인까지 막을 수 있게 되는 거니까.’ 생각하며, 스스로 청룡의 제물이 되기로 결심했다. 청룡이 제방을 공격하자 단야는 청룡을 막아서며, “수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힘들게 쌓은 제방이니 제발 노여움을 푸시고, 무너뜨리지 말아 주세요.”라고 간청한 후 청룡이 사는 못에 몸을 던졌다. 이후 청룡은 단야의 희생으로 노여움을 풀었고, 벽골제의 보수 공사는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또한 원덕량은 월래와 함께 신라로 돌아가 결혼했고, 마을사람들은 단야의 효심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단야루’와 ‘단야각’을 세웠다고 한다.


    벽골제 보수공사의 어려움과 사랑 이야기의 결합 

    벽골제에 얽힌 단야낭자의 이야기는 신을 위해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설화’의 한 유형이다. 단야낭자는 마을 사람들과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원덕랑과 약혼녀 원래를 위해 청룡의 제물이 된다. 이러한 단야낭자의 희생이 있었기에 벽골제를 지킬 수 있었으며,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실제 벽골제 보수 공사는 조수와 깊게 고인 물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설화의 전승집단은 이러한 벽골제 보수공사의 어려움을 자연적 조건이 아닌 용의 조화에 의한 것으로 인식하고, 여기에 원덕랑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결합해 단야낭자의 희생정신에 대한 가치를 부각하고 있다. 단야낭자 이야기는 김제 지역에서 전승되는 '쌍용놀이'의 기원설화로도 알려져 있다.

     

  • 홍장의 효성과 성덕의 정성이 이어진 관음사

    백제 최초로 만들어진 사찰 관음사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는 백제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관음사가 있다. 관음사는 백제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사찰이며, 분서왕 4년(301)에 옥과 출신의 처녀 성덕이 세운 절이다. 절 이름은 성덕이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 와 절을 완성하고, 그 이름을 ‘관음사’라 부른 것에서 연유한다. 관음사에는 백매 선사가 쓴 『관음사사적』(1729)이 전해지는데, 「심청전」의 근원설화로 알려진 원홍장이야기와 처녀 성덕의 관음사 창건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관음사는 현재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보전되고 있다.

    관음사 내부 전경
    관음사 내부 전경

     

    진나라 황후가 된 효녀 원홍장

    백제 때 대흥(지금의 충남 예산 지역)이라는 고을에 원량이라는 장님과 원홍장이라는 어린 딸이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홍장은 아름다웠으며, 심성 또한 고와 어릴 적부터 앞 못 보는 아버지를 정성스럽게 모시는 효녀였다. 어느 날, 원량은 길에서 홍법사의 법당을 짓는 일을 맡은 성공(性空)이라는 스님을 만났다. 성공 스님은 부처님의 뜻이라며 원량에게 우리 절의 큰 시주님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스님의 말에 몸 둘 바를 몰랐던 원량은 “저는 가난하여 먹고살 양식도 없는데, 어떻게 시주하겠습니까? 다만 효성 지극한 딸이 있으니 그 아이라도 데려가서 보탬이 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스님은 기뻐하면서 돌아갔고, 원량은 자신이 했던 말을 땅을 치며 후회했다.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원량은 딸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다.

     

    약속은 약속인지라 홍장은 스님을 따라 홍법사로 향했다. 며칠째 걷기를 반복하다가 피곤한 몸을 달래기 위해 소랑포 부두에서 쉬게 되었다. 이때 멀리서 두 척의 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더니 홍장이 있는 나루터에 멈추었다. 그리고 배 위에 있던 사자가 다가와 홍장의 얼굴을 보고, 황후마마라며 절을 하였다. 홍장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자, 사자는 자신은 진나라 사람이고, 황후가 돌아가셨는데, 황제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새 황후가 백제에서 태어나 장성했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하여 황제의 명으로 예물을 가지고 모시러 왔다는 것이다. 홍장은 스님에게 예물을 모두 드리고, 사자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홍장은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지만, 홀로 남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장인을 시켜 자신의 원불(願佛)로 관음보살상을 만들게 하였다. 그 후 관음보살상을 배에 싣고 백제국으로 보내며, 인연이 있는 곳에 닿아 봉안되기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관음사 안내판
    관음사 안내판
    원통전 지붕 장식
    원통전 지붕 장식

     

    돌배에 탄 관음보살상을 발견한 성덕

    곡성 옥과(현재 곡성군 옥과면)에 성덕이라는 처녀가 살았다. 하루는 성덕이 바닷가를 걷고 있는데, 수평선을 바라보니 돌배 하나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배속에 빛이 가득했고, 안에는 관음보살상이 앉아 있었다. 성덕은 엎드려 절을 하고, 관음보살상을 업었더니 깃털처럼 가벼웠다. 성덕은 관음보살상을 모실 인연의 땅을 찾아 숱한 들과 마을을 지났다. 지금의 곡성군 오산면에 있는 고개를 지날 때 갑자기 관음보살상이 태산처럼 무거워서 한 발 짝도 뗄 수가 없었다. 성덕은 그곳에 관음보살상을 모시고, 절을 세워 그 이름을 ‘관음사’라 하였다. 그 후 사람들은 관음사를 품고 있는 산을 ‘성덕산’이라 이름 짓고 그녀의 덕을 기렸다고 한다.

    관음사 가는길
    관음사 가는길


    관음의 화신으로 형상화된 원홍장과 성덕

    관음사에 얽힌 설화는 관음사 창건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부각하고, 원홍장의 효성과 성덕의 정성이 이어져 관음사가 창건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설화에서 원홍장과 성덕은 모두 관음의 화신으로 형상화되어 있으며, 이러한 인식은 관음사와 관음보살의 신성화를 통해 불교의 대중화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함으로 보인다. 한편 원홍장에 관한 이야기는 그 구조와 내용이 「심청전」과 유사하여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의 배경설화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관음사 안내판
    관음사 안내판
    관음사 안내비
    관음사 안내비

  •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임진왜란의 영웅, 김덕령 장군

    김덕령 장군을 모신 충장사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충장공(忠莊公) 김덕령(金德齡, 1567~1596)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다. 원효사로 가는 길을 따라 배재에 이르면 왼쪽에 조성된 충장사와 김덕령 장군의 묘소를 볼 수 있다. 사당 안에는 김덕령 장군의 영정과 교지가 봉안되어 있고,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된 김덕령 장군의 의복과 묘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사당 뒤편에는 김덕령 장군의 묘와 비석이 있고, 가족묘도 함께 있다. 김덕령 장군이 태어난 광주광역시를 비롯하여 전국에는 김덕령 장군에 관한 다양한 설화들이 전승되며, 신비한 출생부터 비극적 죽음까지 설화의 내용도 다채롭다.

    충장사
    충장사
    충장사 내부
    충장사 내부


    아버지의 실수로 누이 다음에 태어난 김덕령

    김덕령은 무등산 석저촌에서 태어났다. 하루는 중국의 한 명사가 아버지의 묘를 쓰기 위해 명당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광주 무등산까지 오게 되었는데, 무등산에서 명당자리를 발견한다. 그날 명사는 김덕령 부친의 집에서 머물면서 명당자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김덕령 부친은 명사가 돌아간 뒤 그 자리에 조상의 묘를 옮겨 썼는데, 묘를 옮길 때 그 안에서 석회암이 나오자 그것을 파내고 묘를 썼다. 그리하여 누이가 먼저 태어났고 그다음에 김덕령이 태어났다고 한다. 


    김덕령은 어린 시절부터 힘이 장사여서 전국의 씨름판을 누비며 최고의 장사로 이름을 날렸다. 씨름판에 가면 자신을 이길 사람이 없자 김덕령은 자신이 최고라며 자만심에 빠졌다. 그런 모습을 본 누이는 자중하라고 타일렀지만, 김덕령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 날, 누이가 남장을 하고 씨름판에서 김덕령을 이기고 돌아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게 된 김덕령이 자책하며 죽으려하자 누이는 “너를 이긴 사람은 바로 나야.”라고 했다. 김덕령은 누이를 이기기 위해 무등산 돌기를 연습한 뒤 자신은 무등산을 돌고, 누이는 도포를 만드는 내기를 하자고 했다. 이 내기는 지는 사람이 죽는, 목숨을 건 시합이었다. 누이는 일부러 옷을 마무리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집으로 돌아온 김덕령은 자신이 이겼다며 누이를 죽였다.

    은륜비 해설비
    은륜비 해설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음을 맞이한 ‘만고충신 김덕령’

    임진왜란이 나자 많은 사람이 김덕령에게 전쟁터에 나가 왜적을 무찔러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그때 김덕령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상중이라 김덕령은 왜군들을 죽이지는 않고, 도술을 부려 겁만 주며 스스로 물러가게 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왜군을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하여 김덕령을 역적으로 몰아 사형을 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김덕령은 신이한 능력으로 사형을 거부하고 역적으로는 죽지 않겠다며, ‘만고충신 김덕령’이라는 비석을 세워달라고 했다. 결국 김덕령을 죽일 수 없자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김덕령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었다고 한다.

    충장공 묘비
    충장공 묘비


    민중들이 기억하는 최고의 영웅

    김덕령 장군은 임진왜란 때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김덕령 장군을 임진왜란 최고의 영웅으로 기억하며, 김덕령 장군이 전쟁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었다면 보다 빨리 왜적들을 몰아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왜군의 침략에 속절없이 당해야 했던 억울함과 슬픔을 보상받고 싶었던 백성들의 마음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설화에서는 왜군을 죽이지 않고 살려 보냈다고 하여 처형당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김덕령 장군이 ‘이몽학의 난’의 주동자인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는다. 김덕령 장군이 처형당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춘산곡 (春山曲)」이라는 시조가 전해진다. 이 시조에는 형장에서 최후를 기다리는 김덕령 장군의 억울한 심경이 담겨 있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불붙는다 /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

    이 몸에 내(川) 없는 불 일어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

  • 섬진강을 건너 처녀를 살린 두꺼비

    두꺼비 이야기가 전해지는 섬진강

    우리나라 이야기에는 동물이 은혜를 갚은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그중에서도 처녀에게 길러진 두꺼비의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천 년 묵은 지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처녀를 구하기도 하고, 홍수에 떠내려 갈 뻔한 처녀를 구하기도 한다. 대부분 처녀가 밥을 주어 수년 간 기른 두꺼비가 위기에 처한 처녀를 돕는다는 큰 줄기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두꺼비 이야기 중에 섬진강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라남도 광양과 경상남도 하동 일대에서 전해지고 있다. 섬진강은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의 3도에 걸쳐 흐르는 강으로, 고려 말 왜구가 섬진강 어귀로 쳐들어와 공격했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큰 소리로 울어 왜구가 피해 갔다고 해서 ‘두꺼비 섬(蟾)’을 써서 섬진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자기를 길러준 처녀의 은혜에 보답한 두꺼비 이야기

    옛날에 두치강이라는 강줄기 나루에 마음씨가 고운 한 처녀가 살았다. 하루는 처녀가 저녁을 차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두꺼비가 나타나서는 부엌으로 폴짝 뛰어 들어왔다. 두꺼비는 배가 고픈지 밥상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큰 눈동자를 끔벅거렸다. 처녀는 두꺼비에게 “배 많이 고프니? 왠지 지치고 외로워 보이는구나. 우리 집에서 같이 살자.”라며 밥을 퍼주고 부엌 한 켠에 흙집을 지어주고는 두꺼비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두꺼비가 처녀의 집에서 지낸지도 3년이 훌쩍 지났다. 두꺼비는 어느새 솥뚜껑만큼 크게 자랐다. 어느 여름밤, 비가 쏟아붓기 시작하더니 두치강 상류에 홍수가 났다. 순식간에 물이 불어, 온 동네가 물에 잠기기 시작하였다. 물결이 얼마나 센지 집도 사람도 가축도 둥둥 떠내려갔다. 처녀도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며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외쳤지만 도움 받을 곳이 없었다. 바로 그때 처녀가 기르던 두꺼비가 나타나 등에 타라는 듯이 엎드렸다. 처녀가 두꺼비 등에 올라타자 두꺼비는 있는 힘껏 강기슭으로 헤엄쳐 갔다. 한참을 이동해 간신히 뭍에 도착하여 처녀가 내리자 힘을 다 써버린 두꺼비는 그만 죽고 말았다. 처녀는 울면서 “두꺼비야, 네가 나를 살리느라 이렇게 죽고 말았구나. 미안하고 고마워.” 라며 어루만졌다. 


    처녀는 강기슭 언덕에 두꺼비를 묻고서 매년 제사를 지내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처녀와 두꺼비가 도착한 강기슭을 두꺼비 나루라고 하여 ‘섬진(蟾津)’이라 하였고, 그 강을 ‘섬진강(蟾津江)’이라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섬진강 언덕에는 두꺼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비가 와서 물이 불면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지만 평소에는 두꺼비가 헤엄치고 있는 듯한 형상처럼 보인다고 한다. 전라남도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사동(蛇洞)마을에서는 동네가 부유해지려면 이 바위가 물속에 잠겨서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풍수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처녀와 두꺼비가 서로 은혜를 베푼 이야기

    이 이야기는 처녀가 두꺼비에게 베푼 은혜와 두꺼비가 처녀에게 갚은 은혜 이야기를 통해 두꺼비나루와 두꺼비바위가 생기게 된 사연을 담고 있다. 마음씨 고운 처녀가 두꺼비를 기르고, 처녀가 위기에 닥쳤을 때 기르던 두꺼비가 처녀를 구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여기에서는 그중에서도 섬진강의 유래와 얽힌 두꺼비의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전통적으로 민간신앙에서 두꺼비가 집에 들어오면 죽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들어온 두꺼비를 잘 보살피면 복을 받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통해서도 동물이 은혜 갚은 이야기가 형성될 수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 천석군 집터 이야기

    조사일시 : 2017년 4월 15일 

    조 사 자 : 정은정 

    제 보 자 : 손병관(남,78세)

    구연상황 : 용방면 게이트볼장에서 인터뷰 전 용방면 노인회장이셨으며 관에서 정년퇴직을 하셔서 문헌에 입각한 이야기들올 많이 해 주시고,주변 지인들 소개를 많이 해 주셨다.

    조사장소: 구례군 용방면 게이트볼장

     

    한 어 한 사오십년 전에 우리 마을에 에 천석군 농사 천마지기 지는 부잣집이 있었는데, 에 그 집에 인제 지금은 후손들이에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해가지고 패했지마는 옛날에는 아주 부자였어요.

    인제 그 집터를 우리가 사가지고 현재 집터로 쓰고 있고, 어 그래서 그 집터는 형이 물거품형이라고 합니다. 그 집터형이 그 물거품은 팍 일어난다는 얘기죠. 일어나고 어쩌다 보면는 물거품이 확 죽은단 얘기여〜〜


    그 집터는 한 때는 흥하고 한 때는 망한다. 그런 집터기 때문에 에 꼭 미신을 지켜서마는 아니지마는 나는 그 집이다가 집을 안 짓습니다. 왜 그러믄 그 집에 유래를 보면는 할아버지는 엄청나게 부자였는데, 손자가 싹 팔아묵고 망했거든요. 그거슨 뭐냐므는 혈 자체가 버끔혈이라 그래서 나는 나 하나의 그 말하자믄 어떤 그 뭐라 그르까 부를 누릴라 하믄 짓지요.


    나만 안다믄 그러나 내 후손들이 만약에 망한다 그럴수도 있단 얘기지. 미신을 지킨다 헌다믄 그래서 나는 거기는 집을 안 짓다 안 짓는다. 인제 가지고 과원의 과수원으로만 쓰고 있지. 집을 짓지 않는다 그래~ 내가 어느 분들이 집을 집터를 사러오믄 하도 좋으니까 집터를 사러 많이 옵니다. 


    그믄 나는 그 얘기를 하믄서 집을 짓지 마라 급니다. 이건 미신이라 미신이겄지만은 내가 봤을때는 집을 지어서는 안된다. 이건 다른 터로 써야지 나 하나만 부귀를 누리기 위해서 사는건 아니지 않느냐.

    우리 후손들을 생각해야지. 그래서 나는 집터를 사러오몬 욕심 같으믄 내가 지금이라도 몇십만원씩 평당 받고 팔수도 있지마는 집 짓지 마시오.


    그러고 안 팔고 있거든요. 나는 거기를 과원으로 쓰고 있습니다. 거기를 응 그 집터를 이렇게 보면는 뒤가 완전히 소쿠리같이 생겼어요. 요렇게 생겼어요. 긍께 어뜨게 보믄 묘지 묘지 요렇게 좀 묘지잖아요.

    딱 묘지 쓰면는 가장 좋을 그럴 터여 집터도 지금 그렇게 생겼거든, 딱 이렇게 생겼거든 근데 그 집터하고 우리집 터하고 있어요. 요렇게 근데 우리집터는 형으로 보면는 버끔혈이 아니라 그래요. 요 집터는 버끔혈이라 그래서 한 때에 천석군을 누렸는데, 이 대를 못가고 망해부렀거든요. 그런 전설이 있는데, 어 인자 그건 그것은 미신이여 미신이예요. 그러나 인자 시골 사람들은 보통 미신을 많이 지키잖아요. 안 지키고 싶지마는 또 그 어딘지 모르게 내력이 쯤 남아있거든. 그 미신에가 긍께 완전히 배제를 못허잖아.


    긍께 그런 것이 남아있기 때문에 나도 터러게 살적에는 지금도 큰 옛날에 주춧돌 있잖아 주춧돌 요 토방돌 이런 것이 지금은 인자 석공들이 많아가지고 그것만 만들지만, 옛날에는 참 어렵게 만든 돌 들이라~

    긍께 주춧돌도 이렇게 크고 토방돌도 막 이렇게 넓어가지고, 멜금헌 것을 거따 집을 지믄 참 좋지요. 난 고놈을 뽑아다가 우리 집을 지었어.


    우게다가 음 원래 우리 집이 있었어. 그 집을 인자 옛날 집을 헐고 그 자재를 갔다가 우리가 일부 썼죠. 토방돌 아까 주춧돌 이런거 그래 우리 집은 한옥인데 한 엄청 큽니다. 한옥이라도 우리도 인자 옛날 대궐같이 쪼금 크게 지었어요. 그런데다가 그 돌로 가지고 자연석 그 아주 옛날돌 그 돌로 딱 해놨기 때문에 운치가 좀 있지요.

  • 부마가 된 선비

    조사장소 : 구례군 용방면 사우 

    조사일시 : 2017년 5월 11일 

    조 사 자 : 정은정 

    제 보 자 : 이병영(남,83세)

    구연상황 : 회관에서 놀고 계시던 부인의 소개로 집에 방문하여 이야기를 듣는 상황이었다. 미리 연락드린바가 없었음에도 가지고 계신 이야기가 풍성하여 거침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가셨다.

     

    뭔 일탁했냐 뭐 일탁이가 잠깐만 그 인자 선비하나가 고상한 선비 하나가 그 옹주 중국 옹주 땅으로 스승을 찾아서 인자 가는 길인데. 도중에 어디 산속에 어디서 날이 저물었어요. 날이 저물어 가지고 밤이 되부러서 인자 뭘 즈그 잘 곳을 찾는디 뚝방에 보니까, 불이 쓰여서 보니까 소슬대문이 있더라. 그것이여 대문이 있고 그래서 대문 뚜들면서 “나는 그 송나라 누군디 응 지금 어디 스승을 찾아가는 길인데, 하루 저녁 유허고 갈 수 있느냐” 물으니까 그 어떤 여종업원이 나오면서 들어오시라 그래서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음식을 거나하게 잘 채려주드라.


    음식을 끝나고 나니까 중년된 부인이 하나 나와서 난 임금의 이 나라 임금의 딸인데 이십삼년 전에 홀로 되어 가지고 이 홀로 된 사람이니까 오늘 저녁 말하자믄 저하고 운우정을 맺읍시다. 간곡히 청허더라 그것이여 그런께 그 선비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허지 마라 그것이여 내가 선비로써 하룻저녁 말허자믄 조금 신세를 졌다 할지언정 내가 선비로써 그런 짓을 허겄느냐. 그러니까 하도 여자가 간곡히 인자 그 요구를 허니까 거기서 인자 삼일 밤낮 삼일을 거기서 인자 자고 먹고 허는거여.


    그런데 삼일이 딱 되고 나니까 더 있었으면 같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더 있었으면 더있어 음 화해가 온다 재앙이 오니까 인자 헤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대신 내가 금베게 하나를 드리리다 금베게 하나를 드릴테니까 이걸 가지고 가시라 그러면서 금베게 하나를 줘서 아이 이상허다 허고 요리 보니까 벌써 집은 없어지고 그 저 금베게만 여전히 들고 있단 말이여. 그러고 나니까 당실은 무덤하나만 남아있다, 그래. 


    이 이 이상하다 그래가지고 인자 와서 밖에 돌아와 가지고 관가에 와 관가에다가 바쳤어요. 금베게를 이런 이런 일이 있어서 있다면서 사실 직고 하면서 바치니까 그 사람 그 인자 그 사람도 역시 임금헌테는 인자 송나라 임금헌테는 아니 진나라 임금헌테로 보냈드니 진나라가 내 눈 진짜요 요 요 진나라 근께 진나라 요 진짜도 있고 근디 요 진짜라 내눈 진짜 그 임금 이 임금이 그 말을 듣고는 그 황 말허자몬 임금 마누라를 황후라 안 해.


    황후가 보니까 자기 딸한테 준 비게가 분명하거든. 그러니까 이제 도둑 아니냐 그래갖고 조사를 해 보는거야 긍께 사실대로 이러이러해서 그렇습니다. 사실 이실 얘길 하는데 그러니까 고질 듣덜 안허고 묏을 파보니까. 그대로 가만히 소장품 가만히 다 있는디 금비게만 없어진거야 그러고 여자 그 시신을 보니까 그 남녀 간에 정을 나눈 그것이 뚜렷히 나타나 있어 그래서 자 그 선비 말허고 현실하고 딱 맞으니까 진짜 자네는 내 사위다 그면서 인자 그 부마도 부마라는 벼슬을 주었다.

  • 서시천 이야기

    조사장소 : 구례군 용방면 사우마을 정자 

    조사일시 : 2017년 5월 9일 

    조 사 자 : 이연경 

    제 보 자 : 김석원(남,59세)

    구연상황 : 제보자는 구례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는데,사우마을에서 우연히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채록하였다.


    옛날 중국에 어 진시황이라는 그 중국을 통일한 어 황제가 있었어. 우리가 인자 시황제, 진시황제 이렇게 말하는데, 인자 중국을 통일하고 나니까 아 뭐 백성 다스리는거는 인자 두 번째지. 내가 가질 거 다갔고 뭐 이룰 거 다 이루었는데 인자 뭐가 남았겄어. 어떻게 하면은 죽지 않고 오래 살까 인자 그런 연구를 하게 됐지〜〜.


    그래서 인자 여러 가지 인자 방법을 강구도 해보고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 보고 막 좋은 약도 구해다 먹어보고 근데 인자 어떤 한 사람이 그런거 어 저쪽 그 동쪽 나라에 멀〜〜리 그 이제 그 동방에 가면은 지리산이라는 그때는 방장산이라고 아마 그랬을거야.


    그 방장산이라는 그 아주 신령스런 산이 있는데, 거기에 불로초가 있다고, 어 그걸 인자 캐서 먹으면 죽지 않고 늙지 않고, 오래 살수 있다고 인자 말한거야. 그러니까 뭐 아주 뭐 다 뭐 가지고 더 바랄 것 없는 진시황은 당연히 그 불로초를 먹고 오래 살기를 바랐겠지〜〜. 그래서 인자 진시황이 어 자기 인자 휘하에 있는 어 서불이라는 장수를 시켜서 인자 서불은 서시라고도 해. 불자하고 시자는 똑같은 한자거든〜〜. 그래서 구별이 안 되기 때문에 서불이라고도 하고 서시라고도 하는데. 이 장수를 시켜서 저기 동쪽나라에 가서 방장산에 가서 방장산이 지리산이야.


    이 지리산 방장산에 가서 이 불로초를 캐와라하고 인자 명령을 했어. 그러니까 이 서불 장군이 인자 여러척의 배에다가 어 청춘 남녀를 기냥 그 어떨 때는 동남동녀라고도해. 근데 하여간 한 삼천여명을 태우고, 왜 이렇게 많이 태우고 왔는지는 나도 모르지. 인자 하여간 바다를 건너서 바다로 배를 타고 쭉 와가지고 어 섬진강을 따라서 인자 쪽 올라왔겠지. 그래서 인자 그 당시에서 다 배로 이렇게 여기저기를 다닐때니까 서시천 이런데도 인자 다 지금 서시천에도 배가 다 다녔어.


    그래서 인자 구례 지리산을 갈려고 하니까 구례로 쭉 올라와가지고 어 여기 서시천쪽에다가 배를 대고 지리산으로 들어갔겠지. 근데 어 말이 그렇치 불로초가 있나 불로초를 못 구했지〜〜 못 구하고 인자 어떻해. 인자 어 뭐 어쩔 수 없이 인자 다시 하천을 요 요 서시천을 따라서 인자 쭉 내려와 갔고 인자 남해로 내려가서 어〜〜 저 지금 제주도 탐라로 갔다고 그래〜〜


    긍게 사람들이 그렇치. 진시황의 명령에 그 말하자면 불복을 했지. 그 불로초를 못 구했으니까 그러니까 겁이 나서 자기 나라로 못 돌아 가고, 그냥 그 지금 제주도 그 당시 탐라로 그냥 들어가서 거기서 탐라라는 나라를 만들고,살았다는 그런 말도 있어.  그래서 어쨌던 그 서불이 서시거든 서불이 왔다 이렇게 불로초를 구하러 왔다간 그 하천이라고 그래서 어 인자 서시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데 아까도 말했지만은 불자는 그 한자 시자 똑같은 거야. 불이라고 도하고 시자라고도해.


    그래서 그 서불천도 맞는 말이고. 서시천도 맞는 말인데, 하여간에 여기는 지금까지 이렇게 서시천이라고 불러. 긍게 진시황이 진시황제지 잉. 진시황제가 그 불로초를 서시를 시켜서 구하러 보냈다 해서 서시천이라고 말한대.

  • 당산제의 몸가짐

    조사장소 : 구례군 토지면 옥산마을 

    조사일시 : 2017년 4월 20일 

    조 사 자 : 이미숙 

    제 보 자 : 정오순(여, 82세)

    구연상황 : 이렸을 땐 남부럽지 않게 자랐다고 하시며 집을 지을 땐 한 알아보고 지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정월 열나흘날 내일이 보름이면 오늘 당산제를 모시잖아. 그러면은 따악 맨스 없는 사람, 젊은 사람은 안 돼. 맨스 가뿌런 사람 애기 다 나뿐 사람 요런 사람 깨끗한 사람만 인자 지내는디, 옷이 다섯벌은 되야되. 똥 싸몬 이제 따순물에 이제 목욕 못해. 개울에 막 철철 내려가면.


    정월달에 하니께 얼마나 추워 똥을 눴다하면 거가서 목욕하고 머리감고 와서 옷 갈아입고 인자 오줌만 누면 인제 그냥 못 갈아입고 그런께 대번에 되어야 한디 남식이 엄마라고 한 사람이 근께 거기 땅이 있어. 땅이 밭이 한 두어마지기 한마지기 있는디 그거 없는 사람인디 그거 인자 그것만 지내면 한 해는 공짜로 지어묵어 고거 할라고. 저만치 건네다 보이는 동네가 있는디 여그 우리 집에서 보면은 옛날에 꽃자지 고루땡이라고 있어 그거.


    그것만 꼬옥 입어. 아이고 저거 왜저럴까 우리 집에 사람이 끓어싼디 저거 옷이 한 벌 없는 사람이라, ‘옷 한 벌을 갖고 어쩔라고 저런다냐’ 그 사램이 딱 지내고 정월 보름안에 지내면 한 한달에나 있다가 다리가 아프다고 쩔씸쩔씸 하고 다니더니 작대기를 짚고 댕기거니 하체가 썩어서 죽었잖아. 근디 가서 당산제를 모시면 여기 거가 막 쭈~욱 꼬랑이라 논께로 그 동네가 요렇게 있으면. 올라가면 철룡빛이라고 거따가 또 밥을 담아다 놓고 여그 당산에다가 밥을 또 담아다논디 정신을 안쓰고 거가 아 이렇게 눈큰놈이 나와가꼬 호랭이가 반석이 있거든.


    여기 밥 채려 놓은디가 거가 있어. 정신을 안쓰면 나와가꼬는 쭈욱있대. 이제 정신을 써갖고 하면 안나오고. 그런디 그 사람이 그렇게 썩어서 죽었는디 이렇게 그 이야기를 했싸. 그것도 막 째그만 호랭이 뭐 작은게 나왔가니 크〜〜은 호랭이가 나왔대. 근디 지금은 그것도 없어져 부렀잖아. 지금은 당산도 안지내고 거기따가 따듬어서 시멘에다가. (정월 열나홀날)밤에 지내.


    근디 그거 제사 지낼 적에는 개도 있는 사람은 싹 부엌에다가 잡아 여브러. 조〜〜용허니 혀. 밥 묵고 따악 불고 안키고 방에 들어가서 문 닫고 일찍 초저녁부터 조용하니 동네 개소리가 나고 어쩌고 그러면은 ‘아 저 집 정신을 잘 못썼다’ 그러고는 그래가꼬는 지내는 거여. 그래가꼬 지내면은 인자 그 이튿날 보름날 아침에 베 굿치고 그래가꼬 그 할매는 죽을 적에도(요렇게 해가꼬 죽어브렀어)

  • 노인 귀신

    조사장소 : 구례군 토지면 송정마을

    조사일시 : 2017년 5월 29일

    조 사 자 : 이미숙

    제 보 자 : 황선매(여, 60세), 최병욱(남, 62세)

    구연상황 : 윗집 어르신 댁에 방문했는데 안 계셔서 안부를 여쭈러 들렀더니 무슨 일이냐고 해서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집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자고 하셔서 쭈뻣쭈뻣했더니 집에 안사람도 있다고 괜찮다고 웃으시며 걸지게 말을 해 주셨고.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음료수와 과자도 내오셨다.

     

    집 사람 만나가꼬 내가 외곡서 내가 무기고에서 있었어요. 외곡 근무할 적에. 우리 시누랑 거기 갔다 오다가. 그랬는데 그 집에서 그 비상이 걸려브렀대, 거기가. 비상이. 그때 그때는 딱 돌려가꼬 반장 집에가 그 전화가 있어. 그면은 막 급한 일 있으면은 뭐 웬만하면 전보로 하고, 급한 일 있을 때만 그것이 통화가 돼. 그랬는디 그때 뭐 와가꼬는 그 비상 걸렸다고 빨리 내려오라 한다고 그러더라고. 아 그런데 가기가 싫더라고.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갈건디. 그때는 우리 우리 아들도 그때도 없을 때 인갑다 잉. 없어요. 없었던갑다. 만나고서 얼마 안됐을 때. 얼마 안됐을 때재 잉?


    그랬는디 가기 싫다고 그랬는디 따라가자고 했는디 아니라 해가지고, 그때 왜 그랬냐면은 그때 공수부대들이, 그 갑자기 딱 들어와가꼬 이런 딱지를 하나 붙여브면 거긴 파산 되쁜거여. 그럼 우린 다 교도소로 가야돼. 인자 그런게 있었어. 옛날에는. 방위들 교육,예를 들어서 부대에,지금 같으면 부대 같은데재. 인자 그런께로 무기고는 지켜야 하는데 근무를 제대로 서야 하는데 딱지 하나를 붙이면 그건 폭발해쁜거라.


    그래가꼬 우리는 가서 진지를 묵던지, 대게 맞고 교도소도 갔다 와요. 그래 인자 가기는 가야돼. 갑자기 그건 누가 날려서 그런 것이 아니고 요것들은 아무 소문도 없이 갑자기 와브러. 근디 애들 보고는 군인은 사복을 입고 다녀 그 사람들도, 근께 간첩이라 간첩 그 사람들이, 그때 당시만 해도 간첩이라. 지금 공수부대들이지만은. 특전부대 가들이 왔었지만은. 그때는 그래서 인자, 올 때는 간첩이라. 그면 우리가 간첩을 이제 딱지 붙여브면 간첩이 그거이 폭동이 터져쁜거여. 그게 그만큼 중요해 그게. 그래가꼬는 내려갔는데 가기가 싫더라고. 아 근디 내려간디 쩌 뭐 외곡 거 지금 요 송인, 그 저 그 섬지농원. 그놈 옛날에 소나무, 지금도 그렇지만은. 그때는 이렇게 소나무가 우거져 가꼬 있었어. 그 비포장 도로였을때는. 막 소나무가 엄청 우거져가꼬. 그러면서 비가 왔네. 또. 비가 부실부실 겁나 무서운디라. 그거이 왜 그냐면 사람이 서이나 당했어. 죽었어 그 사람들아 한 번은 염소가, 그 염소가 저 뭐이야 암낼내가지고 그 해가꼬 오다가 자기가 그 나무에 목을 매가꼬 죽어블고 목을. 나무가지에다가. 올려나브렀어.


    그런께 살아 있는게 아니야. 지가 올라가고 지가 죽어쁜거여. 한 사람은 꼬랑창으로 쳐박혀서 죽어쁠고. 거기서 서이나 죽었는디 한 사람은 째져블 고살이. 개판이 되브렀재. 근께 거기가 무서운데라. 원래부터 무서운디라. 혼자 웬만한 사람은 못 가. 거기는 옛날부터서. 가는데 어우 허~연 영감이, 허연 영감이 둥~실 둥실 춤을 추면서 나보고 오래.


    어 오래 나보고. 근께 내가 하는 말이 “야, 너 귀신이여 사람이여?” 그때만 해도 인자. 그런께 말을 안 해. 근디 이것이 어쩌다 보면은 반쪼가 나도 그래. 사람이 반백에 없어. 그래가꼬 반 갖고 오래. 아 근데 그놈의 귀신이 담배를 피울란께 이놈 또 옷이 다 젖어브렀네 벌써. 그래가꼬 너 죽여쁜다고 가만히 있어, 잉. 자전거를 타고 인자 그 노인 그 사람을 보고 인자 화악! 가브렀어, 인자. 이 새키 대져블거라고 인자. 갔는디 얼마나 컸냐면 나 무지 컸거든? 뒤돌아본께로 이 새키가 반도 반도 부라 되게꼬 나보고 오라 그러네.

    아 짜증나블더만 진짜 그때만 해도 돌이, 돌이 엄청 많았지. 돌로 그냥 주 패고 아프다말다 안하고 어쩌다 말도 안하고 아 그래가꼬는 인자 그 영감한테 간께 영감이 없어져브렀어.


    그래서 쪼금 우로 인자 다시 또 올라왔어. 올라온께로 원인을 보니깐은 소나무가 많이 있다 보니깐은 비가 왔는데,도로 가상에 도로는 안 젖었어. 다른데는 도로가 젖어가꼬 시커머고, 거기는 소나무새로 도로가 안젖어 가꼬. 달빛이 그 저 달빛이 비치니깐은 소나무가 까딱까닥 한께로 이것이 인자 사람을 갖다 죽이는거여. 나보고 오라는거여. 그래가꼬 돌을 세게 던져 놓은께로 반쪽으로 되븐거여. 그래가꼬 원인을 확인 할라고 거기서. 내가 인자 확인해 봤재. 다른 사람이 쳐다봤으면 완전 그 새키 뭐 멍청이라고, 이상한 놈이라고. 아니 거기서 많이 그랬었잖아. 거기서 사람이 서이나(3명이나) 죽었어. 나이 든 사람들이 많이 그래가지고 혼이 나가서 죽은 사람도 있고 물에 빠져서. 물은 무슨 물에. 목을 매가꼬 죽어블고. 그래가꼬는 그거 알고 보니까는 그거야. 가가꼬 인자 그거 나 근무서는 거기 가본께로 상황 끝나브렀드라고. 아따 꼬라지가 나블더만.

  • 석주관 칠의사에 대한 이야기

    조사장소 : 구례군 토지면 하죽마을 

    조사일시 : 2017년 6월 12일 

    조 사 자 : 이미숙 

    제 보 자 : 이규종(남,69세)

    구연상황 : 지인의 소개로 혹시나 해서 갔더니 예상 외로 아시는 것이 많으시고 예전에 교직에 계셨고 지금은 향토사학자로 계신다고 하삼 이야기를 나누시다 목이 마르시다고 녹차를 한잔 하면서 계속 하자고 하시며 맛있는 차를 대접해 주셨다.

    구례 칠의사 단 정면
    구례 칠의사 단 정면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정측면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정측면

    위패만 모셔져 있으면 역사적인 자리는 아닌데,거기가 석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석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시대에 군인들의 주둔지를 말하는 거야. 그런께 잘 모르고 피아골 그 저 뭐이야 칠의사 칠의사 그러는데 칠의사는 일곱 의사를 말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실제로 가면은 에... 묘가 8기가 있어. 근께 7분만 계셔야 할 것이 8분이 있재,앙 그게 무슨 소리냐면은 당시에 구례 현감이 돌아가셨거든. 거기다가 같이 모셔서 8기가 있고, 이제 칠의사는 광의 왕문성 어른인가... 저 그 어른을 중심으로 일곱 의사들이 화엄사 승이 153명이 들어가 거기에가. 그래가꼬 자기 집의 가노들, 말하자면 자기 집에서 부리는 하인들까지 다해서,


    (조사자 : 그러면 그것은 무슨 전쟁이 있었는가요?)

    청일전쟁, 아니 정유재란이었지. 그때 인자 그 일본 놈들이 침략을 해오니깐 쪼그마한 길이 아주 좁잖아. 지금은 많이 넓어졌지만 옛날에 길이 좁으니깐 거기 인자 군인들이 오는 것을 거기에서 인제 막았고,왜 그리 막았냐면 방금 이야기 했다시피 석주관은 관이라고 하는 것은 문이다 그 말이재, 문. 그런께 영호남을 관통하는 4개의 문중에 하나였어. 인자 부산에서 서울을 가기 위한, 4개의 길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 여길 지나가는. 근께 석주관 그 말은 군인들이 고려시대까지 거기서 주둔하고 있었어. 그 석주관이 옛날부터 있었던 지명이고, 말하자면 군인들이 주둔해 있었던 곳을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그런거.

    구례 석주관 전몰의병 추념비.지위비
    구례 석주관 전몰의병 추념비.지위비

    그래가꼬 그때는 군인이 아니고 우리 민간인들이 이제 거기서 막 막다가 돌아가시고, 근데 왕이 계셨어, 왕. 거기서 어른이 중심이 되어가지고 그 분을 따르는, 다른 분들이 여섯 분들이 아들까지도 같이 왕 거시기 아들.그래가꼬 같이 하고. 구례를 지킬라고, 의병들이지. 그래가지고 구례 당시에 현감이 인자 여기가 인자 일본한테 짓밟히니까 남원으로 가서 남원 그때는 부였거든 부. 부사가 있었거든. 남원부 구례 현이여. 지금은 전라남도 구례군 그러듯이 남원부 구례 현. 

    구례 석주관 칠의사 숙첨문 현액
    구례 석주관 칠의사 숙첨문 현액
    구례 칠의사 추모 약사
    구례 칠의사 추모 약사

    그러니까 구례 현감이 남원 가서 싸우다가 돌아가시니깐 그 분의 시신을 모셔다가 인자 의사들 옆에다가 모시게 된거재. 그래서 인자 칠의사. 사가 절 사자가 아니고 사당이라고 쓸 때 사 자여. 그래서 잘못하면 칠의사 하면은 절이라고 생각을 하거든. 그래서 점점점 커져서 지금은 상당히 건물도 크게 지어놓고 한때는 도지사도 와서 제관이 되고 그랬었죠. 그러다가 지금은 점점 지방에서만. 이제 구례군에서 주관을 해서 많이, 인자 향교에서만 해. 향교에서 주관을 많이 해서. 그러니까 인제 그런 것. 그거 인자 칠의사 이야기 같은 것은 굉장히 자료들도 많이 나와 있고, 그것도 발굴도 많이 하고 그래서 그것은, 뭐 말할 것도 없고.

  • 타령하는 도깨비

    조사장소 : 구례군 산동면 수평마을 

    조사일시 : 2017년 4월 24일 

    조 사 자 : 윤명숙 

    제 보 자 : 강점례(여, 81세)

    구연상황 : 마을 회관에서 예전에 직접 겪으신 이야기라며 말씀해 주셨다.

     

    옛날 도깨비 얘기는... 나 한번 내가 저기 저 그전에 농사를 지을 때는, 그전에는 많이 무서웠어.

    시방은 그렇제...... 아무리 비가 부슬부슬 올라 그럴 때.....

    아... 저기-서 불이 착착착착 서지다라고. 아... 그러더니, 도깨비불이 도깨비들이여...

    꼭 키가 넘산 맨이로 꼭 엉금엉금 그러고 걸어 다니고 그랬어.


    그리고 산에가 저기 저 수락촌에 사는디,

    그때 뭐시고 감똘개는 널어 놨는디. 귀신이 나왔어. 여자 귀신인가봐..... 아, 흥부렁 타령을 해....

    그래서 우리 고숙이랑 갔는디--, 인자 암말도 안했어. 무서서 

    고숙이랑 갔는디. 그놈 걷어갔고 집에 가서.

    “아줌씨 원 소리 안들었어요”

    “아- 들었어요! 나 아저씨한테. 얘기 할라다 안했어여” 내가 그랬어.

    도깨비가 나와 가지고 흥부렁 타령... “흥-흥-흥” 그런 타령을 해! 그런 것 그런 것은 내가 한번은 봤어.

    옛날 옛적에 도깨비들은 엉금엉금 걸어가거든, 그래가꼬 막 - 

    여기 있다가 금방 쫓아오고 막 그랬어... 뭐- 헐거 있어야제, 이야글... (하하하)

    돼지고기 그런 것 갔고 댕기면 따라오제, 그래가꼬 죽제... 따라와- 그 냄새 맡고, 근께...

    저녁으론 고기 갔고 댕기는 것 아니여... 지금은 차가 있은께... 여부렁께 상관 없는디... 

    전에는 걸어 댕겨잖아. 


    그래가꼬 어떤 사람은... 저-기 계척에서 고기를 갖고 왔대, 고기를 갖고 왔는디.

    어떻게 저기해가꼬 그냥 어디,

    이양, 아사리 속으로 대꼬 들어가가꼬. 그래서 이냥 괴기를 내뿔고 오니까, 괜찮더래.

    그래가꼬 보-도시 왔대. 그런게 만나면 그런다니까. 지는 절대 저녁으론 안가꼬 댕겨애돼 

    돼지고기 같은건......


    시방은 차가 있은께. 그러 안하는디. 전에는 걸어 댕겼잖아 순전히 산이고. 어디고... 하-야...

    그래서 그렇게 무섭제. 지금은 그런 세상 안살아. 다 편하게 살제.

    아이 어찌 저기서부터 따라오더래, 그냥 그 사람이 술을 먹었는디, 아이 정신이 나더래...

    그래서 인자, 잡아가꼬(하하하하) 전봇대다 딱- 묶어놓고 온께. 빗자락이더래.

    빗자락에 피가 묻으년 그런다네. 피가,사람 피가 묻으면 근대... 묶어놓고 아침에 와서 본께, 빗지락이더래, 빗지락 몽댕이더래 (하하하하)

    그래서 어찌 웃었던지...


    피가묻으면 근데, 피가..... 그래서 도채비가 된거래, 빗지락...... 요즘은 도깨비 그런 것 없어.

    세상이 요렇게 된께-- 그런 것 없어. 그런디 저 아래에선 쪼깨 무설라 그러대.

    딱 오병이집 앞에 거기가 뭐가 있는갑서. 키가 커 갔고,아가씨… 젊은 아가씨인디, 우 아래 희연히 입었어. 그래서 엉금엉금이... 사람 같은면 말할 것 아니여... 나도 올라오고. 저는 내려가고 그런께,

    말도 안하고 그냥 내려간디. 나 한번 봤어. 요즘은 내가 그런 일을 안한께,몰라...

    전에는 도깨비가 많아, 여기 학교 밑에도 그러고. 여기도 그러고 또 저기 저 저저저 엉덕에 올라간디, 그기도 있다네, 도깨비가 옛날에는 여기는 순전 아장터이고. 산이였어. 여가 소도 매놓고 그런데야.

    산에서나 살까. 여기서는 모르제. 몰라... 전에는 무서왔어. 세상살이가 무섰어... 캄캄한데 혼자 못 댕겼어.

    시방 이렇게 불이 서지고 막 그런께 그러제. 세상이 발달 돼가꼬.

  • 잉어 세 마리의 은혜

    조사장소 : 구례군 산동면 삼성마을 

    조사일시 : 2017년 6월 12인 

    조 사 자 : 김은희 

    제 보 자 : 이강희(남. 56세)

    구연상황 : 문화원의 소개로 제보자의 집올 방문하여 채록하였다.

     

    긍께 저 용소의 그 잉어 이야기는 어 아주 옛날에 그 인자 그 하씨 성을 가진 그 감사 직책의 그 벼슬아치가 어 임금의 인자 명을 받아 가지고 인자 전국을 이렇게 인자 관리들이 그 백성을 잘 다스린가 실차를 댕기게 됐어. 그 인자 하 씨 성을 가진 감사라 그래서 우리는 하감사라고 그래. 그래서 그래가지고 인자 그 하감사라는 사람이 어 인자 이 전라도 지방에 이렇게 두루두루 돌아다니다가 인자 우리 구례까지 오게 됐지.


    인자 구례에서도 산동, 그때는 산동에가 산동원이라고 그래가지고 인자 음 벼슬아치들이 인자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잠을 자는 곳, 이 지금으로 말하면 여관 같은 것이 산동원이라 그래가지고 산동에가 있었어. 인자 그래서 그 화감사가 어 산동원에 와서 잠을 자는디, 아 이거 그날 저녁에 꿈에 그냥 머리가 허연 도사가 탁 나타나 가지고 아 뭐 그 자고 있는 하감사를 깨우더란 말이여. 꿈속에서. 그러면서 이러더래. 아 하감사 이보시오! 나는 저 용소에 사는 어? 그 용소의 주인인 용이오. 어 그런데 그 당신이 머물고 있는 그 산동원에 그 관리들이 당신을 대접하려고 그 용소에 있는 그 우리 아들, 저 잉어인디 그 인자 잉어로 변한. 


    그 잉어 세 마리를 잡아 갔는데 그게 우리 아들이오. 그러니까 그 잉어 세 마리를 다시 좀 살려주시오. 용소에 좀 놔 주시오. 그러면 내가 하감사 소원을 한 가지 들어 주겄소. 꼭 좀 그렇게 부탁허오. 하고 꿈속에서 인자 그렇게 얘기를 웬 그 노인이 이 얘기를 하더래.


    그래서 깜짝 놀래서 인자 아침에 인자 그 자리에 일어나 가지고 인자 하 감사가 음 산동원에 근무하는 그 인자 관리들을 불렀겄제. 그래갖고 물어 봤겄제? 아 뭐 어제 뭐 저 나를 대접 할라고 거 그 소에서 잉어를 뭐 잡아 온 적이 있냐? 그러니까 아 관리들이 그렇다는 거여. 그러면서 잉어 세 마리를, 큰 놈을 세 마리 잡았는데, 그 저 감사님 끓여드리려고 저기 저 큰 독에다가 넣었는데 아직 죽이지는 않았다고,아직 잡지 않았다고 그래. 그러니까 아이고 그러면은 잘 됐다. 그 저 죽이지 말고 살려줘야 되겄다. 그래가지고 요 앞에 용소가 어디 있냐. 인자 이렇게 관리들한테 물어봐 갖고 그 인자 하감사가 직접 관리들하고 같이 잉어 세 마리를 다시 그 용소에 갖고 가갖고 인자 그 물에다 놔 줬대. 그 인자 잉어들이 뭐 꼭 인사라도 하듯이 용소를 한 바쿠 삥 돌더니 물 위로 하감사를 족 쳐다보면서 인사를 하는 것처럼 물속으로 쓱, 고맙다고 인사한 것처럼 인자 물속으로 쑥 들어 가더래.


    아 인자 그래서 들어가고, 놓아주고 하감사가 인자 그렇게 그 용소 물에 다 대고 이야기를 했대.

    자. 잉어 세 마리를 놔 줬으니까 어 저 나 소원 하나 들어주시오. 하면서 인자 내 소원은 어 인자 갑자기 인자 하감사가 그런 거야. 다른 것도 인자 필요 없고, 용소에 용이 있다면은 용의 모습을 한 번 보고 싶소. 인자 이렇게 말한 거야. 그러니까 그 용소가 물이 잠잠하니 가만히 있드만 갑자기 물이 그냥 출렁허더니 용꼬리가 그냥 휙 그렇게 하늘로 쪽 나왔다 첨벙 다시 물속으로 이렇게 떨어지더래. 그래서 다 놀랬지,아주 그냥 깜짝. 아 그런데 인자 하감사는 욕심이 생긴 거야.


    아 그 그 꼬리만 봐갖고 용인지 어찌 알겄소? 용 그 얼굴 전체 모습을 보여 주라고 자꾸 인자 소에다 대고 빈 거여. 아이 그 난 그 용 얼굴을 꼭 보고 싶소. 꼬리만 봐갖고는 안 되겄소. 용 얼굴을 보여주시오. 보여주시오 그러니까 인자 잠시 후에는 다시 용 물이 막 출렁이더니, 용꼬리가 딱 나오고 용 그 그 등 비늘 있는 데 몸땡아리 정도만 죽 올라오더니 다시 물속으로 첨벙 떨어지고 머리는 안 나왔대. 그래도 인자 사람들이 너무 무섭고 놀랍고 다 바위 뒤에 숨고, 나무 뒤에 숨어서 이렇게 막 지켜보고 있는디 또 하감사가 나서갖고 난 용 머리가 보고 싶다. 몸하고 꼬리 봐갖고는 만족을 못하겠다. 계속 얼굴을 좀 보여 달라. 그러고 인자 얘기를 하니까 그냥 잠시 후에 그냥 갑자기 그냥 하늘이 시커매지고 그냥 큰 우레와 같은 천둥소리 같은 것이 우루루 나더니 물이 막 출렁이더만 아주 무서운 형상의 그냥 용이 그냥 막 솟아올라갖고.


    그냥 얼굴을 그냥 그 무서운 얼굴로 하감사하고 이런 데를 확 째려보더니 다시 물속으로 쫙 들어갔대. 너무 근데 용의 얼굴이, 형상이 너무 무서워 갖고 하감사나 본 주변 사람들이 그대로 기절해가지고 영영 못 깨어나고, 그냥 그대로 죽어브렀대. 아 그런 그 어 용소에는 그 저 그런 전설이 지금도 전해져 오지. 그니까 그 용소에는 그 인자 용이 살았다 그래. 그리고 인자 그때 그 놔 줬던 잉어가 용의 아들이라 그러는디 그건 잘 모르겄제.

  • 느티나무 총각

    조사장소 : 구례군 산동면 자택 

    조사일시 : 2017년 6월 28일 

    조 사 자 : 정은정 

    제 보 자 : 허영자(여, 63세)

    구연상황 : 동네에서 이야기 할머니로 통하는 제보자는 현대물부터 옛날이야기까지 많은 것을 알고 계시다고 하시면서 구연동화의 모양을 갖추어 이야기를 해 주셨다. 주위에는 네 분의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청중이 되어 재미있게 이야기를 듣고 해 주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느티나무 총각 얘기 해주께.

    옛날 옛날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마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어요. 근데 그해 겨울에 눈이 너무 많이 와 가지고 사람들이 겨우내 써야할 땔감을 다 써버리고 없었어요. “어휴 올해는 왜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가?” 마을에서 모두 겨울 내내 쓸려고 모은 멜감이 다 떨어져 “이러다 모두 얼어 죽겠는데” 그랬더니 한 사람이 “그래 그러면 저 마을 앞에 느티나무를 베어다가 나눠 쓰는게 어때?”


    젊은 사람들은 도끼를 들고 느티나무 있는 곳으로 모였어요. 젊은 사람들이 도끼를 들고 느티나무 밑으로 돌아오자 이 마을에서 오랜 경험을 갖고 있는 할아버지가 “여보게 젊은이들 오래된 나무는 함부로 베는게 아니네” 그랬더니 젊은 사람들이 “아니 그럼 어떻게 해요. 눈이 많이 와서 마른 나무도 없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얼어 죽게 생겼단 말이예요.” 그랬더니 “그 나무는 베지 말고 정 나무가 필요하거든 우리 집 행랑채를 헐어서 나눠 갖다 쓰게” 옛날에는 집을 나무로 지었어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행랑채를 헐로 갔더니 할머니가 거기서 걱정을 했어요.


    “아니 우리 행랑채를 헐어가면 농사철에 일꾼들은 어디서 재읍니까? 일꾼들은 위해서 마련한 방인데 방도 없이 어떻게 일꾼을 구해요” 그러면서 화를 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랑곳 하지 않고 젊은 사람들한테 행랑채를 헐어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 해 겨울을 따뜻하게 지냈다고 해요. 그런데 봄이 되고 농사철이 되자 할아버지가 사람을 구하고자 해도 구할 수가 없었어요. 쉴 방이 없기 때문에 어느 날 할아버지는 소 먹일 여물을 쓰다 말고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는데, 밥을 먹고 나오니까 왠 젊은이가 소 여물도 써놓고 집안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젊은이 당신은 도대체 누군데 우리 집을 도운거요” 그랬더니 “아 할아버지 저는 농사일을 배우러 왔는데 잠 잘 곳은 있으니 농사일을 배우게 해 주세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농사꾼을 구할 수 없어서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젊은이가 찾아와서 너무도 반겼어요. 다음날부터 농사일 집안일 가리지 않고 젊은이는 열심히 일을 했어요. 그 덕분에 할아버지 할머니는 방이 없어도 능사일을 거뜬히 할 수 있었데요.


    추수를 다 하고 할일이 없게 되자 젊은이는 “이제 일이 없으니 농사일 잘 배우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랬어요.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곳간에 가서 곡식을 가지고 나와서 그동안에 일을 해서 너무 고마운데 변변치 않지만 이거라도 받아 가시라고 했더니, 그 젊은이가 극구 사양을 하면서 건강하게 잘 지내시라고 인사를 하고 떠나버렸어요. 알고 봤더니 할아버지가 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를 베지 말라고 해서 자기가 살 수 있었던 느티나무가 사람으로 변해가지고 은혜를 갚은 거였데요.

  • 금환락지 이야기

    조사장소 : 구례군 토지면 금내리 

    조사일시 : 2017년 5월 4일 

    조 사 자 : 정은정 

    제 보 자 : 김완기(남, 82세)

    구연상황 : 용방면 이장님의 소개로 인터뷰 요청을 드렸으며, 집 거실에 앉아서 이야기를 들었다.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개인 역사 이야기를 하셨다. 

     

    음, 용두 용두 그 재가 베틀재라 그런디 그 베틀재서 베를 짜던 옥녀가 선 쉽게 말해서 선녀가 까락지를 빼갖고 흑 떤져갖고 떨어진 자리가 금환락지 쇠금자 고리환자 떨어질락자 땅지자 그 금가락지가 떨어진 자린디 음 상대 중대 하대가 있단디 하나만 떨어질 것인디 세 개가 떨어져능가 난 잘 모르것고 나 지리적으로 음 상대가 좋고 중대가 더 좋고 하대가 더 좋다


    그런디 상대는 시방 권금 올리기라고 금 거북이 뭐 진흙에 묻혔다. 그런디 말이 저 그 집을 따듬을 때 집터를 따듬을 때 시방 저 궁궐자리 따듬을 적에 돌 거북이 나왔었다 그런 말도 있고 그런 전설이 있는디 인자 확실히 자세히는 모르겄고 그런 전설이 나와 있아 응


    그래 인자 그 유풍천씨가 처음에 그 집짓는 양반이 그렇게 축지를 했는데 음, 삼십리씩을 한걸음에 갔다고 대축이라고 그 말씀을 허디드라고 그래갖고 여그서 저녁묵고 서울가서 친구하고 얘기허고 오몬은 그저 삼 삼고 있고 머슴들이 짚신삼고 있고 아직 안 자고 있고 인자 이 양반 변지용은 딱 부삭에 꼬실라불고 암껏도 흔적이 없이 글기땀에 음 잡아 같이 허고 그런 적은 없었다.


    인자 그런 얘기 자연스레 나오고 거 인자 오다가 대변보다가 인자 뒤에서 뭔 어릉어릉 허길래 딱 손을 잡아갖고 오금쟁이 밑에 넣고 꽉 쪼그리고 앉아서 변을 보고 나니까 죽었어. 그거이 인자 그 본께 호랑인디 그걸 갖다 뼈를 갔다 걸어났데 대문가에다 근디 머리는 사변 전에 있었는디 사변 때 댕이 한다가 뭐이 가져가 분는가 없어져불고 뼈만 시방 몇개 남아 있는디 인자 학실한거는 모르겄고 내가 인자 어른들한테 전해들은 얘기로는 그런 얘기를 듣고 그것이 전해져.


    인자 중대하고 하대는 찾을라고 쌌느디 아직 못 찾는가봐 용정 쪽에 거 뭐 중대라고 최씨라는 사람이 시방 집을 하나 지어갖고 시방 있고 또 하대 가 요 밑에 여가 기다고 시방 금환락지라고 해쌓는 사람이 있고 그런디 아직은 그런 자리를 잡았으몬 뭐 임금이 나오고 부자라도 크게 될 거인데 아직은 그런거이 나타나지 않은께 인자 모르죠. 하하하 아이가 그래도 쪼금 덟은맛이 있어 있는디 더 놔두면 났지맹 그래도 갖고 가서 귀물인께

  • 정말 귀신이 있는가

    조사장소 : 구례군 구례읍 봉동리 

    조사일시 : 2017년 1원 29인 

    조 사 자 : 최금자 

    제 보 자 :유근례(여,자세)

    구연상황 : 다른 이야기도 해주시라고 했더니 해주셨다.

     

    옛날에 우리 동네에 그 아저씨 태고가 본명이시다고 그랬는디 그때는 태고가 있어가꼬 태고를 사람을 부른께 본명인 셈인디 그 아저씨 직업이 대목이라 대목, 옛날에는 대목이다고 그랬더마. 이거 집 짓는 일 허고 집고치고 하는 거 대목이라 그런디 대목이래가꼬 자기 일 부엌문이 문이 없어. 그래가꼬 거적 데기를 치고 살았어.


    그런께 항상 어른들이 헌 소리가 대목치고 자기 집이 문하나 빤듯한 사람이 없다고 그런 얘기를 하더만 우리 어렸을 때, 근디 그 양반이 꼭 산일을 가몬 다른 사람 꼭 같이 가서 나무을 한거이 아니고 꼭 다른 사람하고 반대방향으로 가서 혼자 골차기를 들어간다고 글더라고. 그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디 같이 가다가 헤어진 사람이 있었지 인자. 


    아 근디 그날 밤에 집에를 안 왔어. 그 때는 막 산에 호랭이가 있다고 시절 이거든. 근데 내가 인자 어린 시절인께 내가 알아 그 때는. 어른들한테 들은 얘기가 아니고. 근디 인자 세입 갱이라고 저 소나무 밑에 가지가 저절로 그것이 인자 말라서 고사되거든 죽어. 그걸 인제 저 대나무 긴 대나무를 가꼬 가서 끝에다 낫을 달아가꼬 그걸 밑에서 이렇게 인제 잡아 댕기몬 인자 떨어진갑더만. 그것을 지고 오믄 죽은 나무니까 나무가 가볍고 지고 오기가 좋은께 인제 그 나무를 해가꼬 올라고 했는가본디 그날 저녁에 인제 사람이 안온께 


    인제 동네 남자들이 다 들고 나서서 횃불을 들고 꽹과리를 친 사람, 징을 친 사람, 그래서 온 동네 사람들이 남자들이 다 나서서 그 천은사까지가 거의 한 8키로나 될까, 그 산에 나무한데 까지,8키로도 넘겼지.

    그런 거리를 인제 밤에 사람들이 갔는디, 어저께 저 골차기로 갑디다. 그 소리만 듣고 인제 그 골차기를 가서 본께 딱 지게가 옆에 있고, 불도 피웠더래. 불도. 불도 추웠던께 불을 피웠던가. 불을 피웠던 자리도 있고 근디 거가 죽어 부러가꼬 있더래. 밤에 추와서 죽었던가.


    이게 다른 사람보고 같이 갔더라면 나무에서 아마 떨어졌는가비 그거 띠다가. 같이 갔더라면 누가 지고 와가꼬라도 살거인디 자기 혼자 그 골차기로 가가꼬는 그기서 떨어져서 그렇게 죽어 브러가꼬 그때 시절에는 바깥에서 죽으든 집이를 못 들어온다고 그러더만. 그 밖에 객사라고 그래가꼬 자기 집에를 못 들어와. 그 송장을 못 각고와. 그런게 인제 어떤 동네에 인제 뒤에가 인제 공동지가 있는디 그 공동지다가 인자 뭐 그때는 살림도 곤란하고 한께 인제 널도 없이 그냥 그렇게 해서 그냥 그렇게 해서 묻었는디. 


    동네 사람들이 인제 비가 부슬부슬 올 때 거기를 지나간디 ‘어이어이’ 하고 불러서 본께 그 양반이더래.

    그 양반이 평소에 골마리에다가 손을 쑥 집어였고 잘 댕긴디 손이 시린께. 그런디 여시기 골마리에 손을 여코 나옴서 ‘어이 같이 가세 같이 가세.’ 글고 불르더라고. 그 사람들이 아이고 그냥 혼비백산해가꼬 막 들고 왔다고 그런 소리를 그 때 내가 어린 시절에 몇 번 들었거든. 근께 진짜로 그렇게 귀신이 있는가. 그 사람이 좀 허예서 글케 지나가면서 괜히 그 무서우니까 그렇게 봤는지. 나 어렸을 적에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어.

  • 아침에 심으면 저녁에 따먹는 외씨

    조사장소: 구례군 구례읍 양정리 

    조사일시 : 2017년 5월 1일 

    조 사 자 : 최금자

    제 보 자 : 조학자(여,73세)

    구연상황 : 옛날이야기를 잘 하신다고 동네 아시는 분이 알려주어서 찾아갔더니 못하신다고 하시더니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건 우리 할머니한테 우리 내가 어렸을 들었던 이야기인데 아주 옛날이야기. 근데 인제 옛날에는 가마타고 말 타고 결혼을 하면 지금 같음은 뭐 가까운 데지만은 산 넘어 머 멀리 그래도 가고 그런 시대제. 근게 이웃동네라도 멀게 느껴졌겄어. 근데 인제 이 이웃마을로 장가를 들었어. 남자가. 옛날에는 별로 나이가 다 차서 가는 게 아니라 남자가 나이가 어렸을 때 결혼을 하니까 근데 이제 장가를 가서 첫날밤을 지내고 여자가 남자가 좀 어리고 그러니까 그냥 인제 조금은 글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던지 그거 참기는 참았지. 방구는 또 나오잖아.


    그래서 그냥 방귀를 푸욱 껴버렸대. 그랬더니 남자가 누웠다가 탁 일어나서 옷을 입고 가버리더래. 그래서 그냥 할 수 없이 방귀 한 방 뀌고는 이 여자가 시집을 못 간 거야. 남자가 장가는 왔지만은 남자 데꼬 자기 집을 가야 시집을 가는 거잖아. 근데 인자 시집을 가고 옛날에는 그렇게 1년씩 밀쳐가지고 가고 2년도 밀쳐가지고 가고 그랬다. 남자가 자기 무시하고 여자가 방귀 꼈다고 여자를 데리러 안 와버리는 거야. 그래가지고 그래도 첫날 밤 치렀다고 애기를 벴던지 아들을 났는데 아들이 커서 열세 살 열네 살 그렇게 먹도록 아버지가 찾아오지를 안 해.


    근데 열다섯 살을 먹으면 옛날에는 호패를 차고 그렇게 어른이 된대. 그래도 어른이 되기 전에 내가 우리 아버지를 찾아야겠다. 근데 오랜 세월에 되 노니까 그냥 아버지를 찾기가 참 어려워. 옛날 세숭은 이해가 잘 안되지만 옛날은 소통이 잘 안되고 이 마을 저 마을 가기만 해도 멀고 그런 세상이다 노니까 사람 찾기가 어려워. 근데 인제 이 애기가 그 청년이 된 거지. 이 청년이 자기 아버지를 찾아야겠다고 나서. 근께 엄마가 어떻게 찾겠냐고 그니까 내가 세상에 났다가 아버지는 찾아 봐야지요. 내가 아버지를 찾으러 갈라니까 외씨(오이씨)를 한 홉만 사다주라고. 외 외씨를 한 홉만 구해주라고 그래서 엄마 외씨를 한 홉을 구해다가 아들을 줬대. 그래가꼬 아들이 동네마다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면서


    “외씨 사세요. 외씨.

    아침에 심으면 저녁에 따는 외씨를 팝니다.”


    한께 저 미친놈이 무슨 놈의 외를 아침에 심었다가 저녁에 따는 놈의 외가 어디가 있어서 저 거짓말을 해도 그러고는 아무도 거들떠도 안 봐. 미친놈이 다고. 근게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외씨를 사라고 외씨를 사라고 글고 아침에 심으면 저녁에 따먹는 외씨라고 저녁에 심으면 아침에 따먹는 외씨라고. 그러고 인제 맨날 매칠을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그러고 인자 외씨를 팔러 다니는데 어느 날 하루는 비가 부슬부슬 와서 비를 피해서 처마 밑에 딱 섰는데 어떤 중년 남자가 가까이 와서는 사연을 물어보는 거야.


    그래서 외씨를 사시라고 이거는 저녁에 심으면은 아침에 따먹는 외씨라고 그러니까 그런 외씨가 어딨냐고 거짓말 마라고. 아니 틀림없이 그런 외씨가 있다고. 아무래도 이 사연이 있는 것 같애. 이 청년이 아무래도 좀 그래서 인자 그냥 비도 오고 그런디 그냥 우리 집에서 하루 묵어가라고. 그러고는 인자 자기 집으로 델꼬. 가가꼬 아무래도 인제 사랑방에 둘이 앉아서 청년한테 물어보는 거야. 아무래도 사연이 있어서 그러는 것 같다고.


    무슨 사연인지 털어놔 보라고 이야기를 해 보라고 그러니까 그 청년이 얘기를 하는 거여. 우리 엄마가 방귀 한 방 꼈다고 시집을 못 가고 나를 낳아서 키웠는데 방귀를 안 뀐 사람 세상에 나서 방귀를 한 번도 안 껴본 사람이 이 외씨를 심음은 아침에 심음은 저녁에 따고 그런 외씨라고. 그러니까 방귀 안 뀐 사람이 이거를 심으면 틀림없이 그런다고. 그러니까 나는 세상에서 방귀 한 번도 안 껴본 사람만 찾는다고. 가만히 들어보니까 자기 이야기여. 그 사람이 이제 그 사람이 바로 방귀꼈다고 여자를 소박 놓고 와 가꼬는 인자 다른 사람한테 장가를 가까꼬는 사는 거야


    그러니까 무릎을 탁 치고 나는 이렇게 자식이 생긴 줄은 몰랐다고. 내가 나이 어려서 장가 가가꼬 그냥 집에도 오고 싶고 인자 그래서 방귀 뀌었다는 핑계로 와 가꼬는 안가부렀대. 그래도 인제 별로 좀 정도 없었던가. 정이야 정이라는 건 아니지만은 그런데 그 아들이 머리가 좋아서 그래도 지혜롭잖아. 그래서 그렇게 해서 아버지를 찾고 자기 엄마 남편을 찾아줬다고 그런 이야기를 해주더라고. 인제 그래도 사람이 똑똑하면 자기 팔자를 찾아먹는 거라고.

  • 도깨비와 밤새 싸운 할아버지

    조사장소 : 구례군 구례읍 봉동리 

    조사일시 : 2017년 5월 25일

    조 사 자 : 최금자 

    제 보 자 : 편귀임(여, 65세}

    구연상황 : 마을 앞에서 모여서 놀기에 가서 이야기 들으러 왔다고 했더니 해주셨다.

     

    전에 우리 동네에 술을 엄청 좋아하는 어르신이 계셨어요. 근데 그 양반이 장날만 되몬 그렇게 도깨비하고 싸우고 뭐 어쨌다고 그러고 며칠을 못 일어나고 또 며칠은 장 돌아오면 살아나가꼬 장에 갔다와 가꼬 도깨비하고 씨름하고 그런 양반이 있었어.


    근디 집안 식구들도 맨날 장만 되은 비상이 걸리제. 장날만 되면 오밤중에 와가꼬 도깨비하고 씨름을 하고 다 죽어가꼬 오고 한번은 안 되것다 싶은께 아들이 이제 어디서 싸워왔는가 어디서 싸웠는가 갈쳐주라고 그랬단마. 근께 인제 술 취해있는 김에서 오다가 어디쯤에서 도깨비하고 싸움을 했는가 생각이 났던 모양이야. 그래서 가서 본께 진짜 논인디 논이 아주 얼마나 실갱을 한 흔적이 있더래.


    근데 인제 그 양반이 장에서 술을 먹어도 갈치는 사가꼬 갔고 왔던 모양이야. 근데 갈치를 허리춤에다가 전에는 그냥 짚으로 쪽 묵어서 주자네. 근데 그 놈을 허리춤에 차고 오다가 그때가지 갈치가 안 떨어져 뿔고 갈치가 허리춤에 있었던 모양이래.


    근데 어쩌다 휙 돌아본께 갈치가 밤 되면 번쩍번쩍 안한가. 번쩍 번쩍 해가지고 눈도 막 째려보고 막 그랬겄제. 갈치가, 또 그놈을 또 도깨비가 나타났다고 인자 자기 허리춤에 찬 갈치하고 밤새도록 싸운 거지 놈의 논에서. 이리 밟을라다 안 되고 허리춤에 있는디 맘대로 되겄는가. 이리 돌면 또 따라오고 저리 돌면 또 따라오고 했겄지. 그래가꼬 할아버지가 도깨비하고 싸우고 맨날 도깨비한테 홀려서 밤새 끌려다녔네 어쨌네 그 수수께끼가 풀렸단마.

  • 전사 일곱 난 명당자리

    조사장소 : 구례군 구례읍 백련리 화실 

    조사일시 : 2017년 6월 13일 

    조 사 자 : 최금자 

    제 보 자 : 이영달(남,74세)

    구연상황 : 지인분이 이분이 잘 하신다고 이야기를 해주셔서 가게로 찾아 갔더니 바쁘시다고 다음에 오라고 해서 또 갔더니 가게 문이 닫혀서 못 만나고 또 다시 찾아갔는데 안 계시고 전화를 했더니 저녁에 화실로 오라고 해서 화실에 가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풍수 셋이서 인자 평소에 그 집터 좋아져가 묘자리가 좋아 막 그래싸고 글것아니요. 긍께로 니가 옳니 내가 옳니 해가꼬 본거야. 인자 그래가꼬 인자 나중에 서로 존심싸움을 해가꼬 그럼 좋다 우리 내기를 한 번 하자 그래가꼬 셋이서 가서 인자 어디 산줄기를 보고 딱 보고 여기서 한 번 보자. 긍께로 근디 보는 눈이 같이 공부를 비슷하게 하다본께 거의 같은 자리를 본거여. 봐가지고 그날 저녁에 거기를 가서 인자 묘자리를 딱 본거여. 그래가꼬 지팡이를 짚고 각자 보고 왔는디 한 자리로 모이게 된거야. 지팡이로 요 자리가 기여. 잉. 셋이다 거의 같은 자리에 서가지고 요자리가 기여.


    자네가 보기에는 어찐가. 여기가 맞아 지팡이로 푹푹 쑤신거야. 한참 서 있다가 셋이서 자네가 보기에도 맞제. 잉, 여이가 참 진사가 몇이나고 그렇게 지팡이로 그렇게 인자 푹푹 쑤셔싼께 거기서 해골이 톡 볼가진거야 잉. 해골이 톡 볼가진거야. 아하 이것이 누가 썼구나. 이 자리를 알고 썼다. 그래가꼬 인자 자기네들이 인자 지팡이로 해가꼬 인자 평장을 해놨는디 지팡이로 파뿐 줄 알고 그 자리를 다시 깨끗이 해가꼬 다시 묻어주고 내려 온거여. 산을 타박타박 셋이서 이야기를 하고 내려오다 본께 한참 내려온께 그 밑에 큰 마을이 하나 있는디 마을에 인자 막 횃불이 써지고 부연 써지고 난리가 났드란 말이여. 긍께 옛날에는 호롱불 아니요. 긍께 동네에 호롱불이면 창문만 빼꼼하고 캄캄하지.


    근디 큰 잔치를 한거여. 횃불을 써 놓고, 저것이 뭐다냐 사람들이 왔다갔다하고. 뭐다요. 긍께로 큰 경사 났다고 그러냐고 뭔 경사가 났다요. 긍께 오늘 지금 말하자면 이 집이 진사가 일곱 번째 나왔다는 거야. 음 집안에 큰 경사지 아주 그니까 큰 잔치를 벌이는거여. 긍께 막 모닥불을 피고 횃불도 피고 긍께 지나가는 객도 얻어먹을 판이라. 들어가서 있은께 막 노인들이 온께 극진히 대접하드라마. 긍께 인자 말하자면 갈 데 없으면 주무시고 가라고 그래싸고 그래가꼬 그 동안 진사가 여섯 번이나 났은께 말하자면 얼마나 권세를 누리고 살았겄소.


    근데 자정쯤 되니까 그냥 좋아서 난리 드란거야. 다시 보통 말하자면 요런 어떤 축제 같으며 가정 축제가 되면 초저녁 때만 하고 보통 자정되면 잠자고 조용해지잖아요. 근디 막 난리를 하드라는 것이여. 좋아서 하늘을 찌르고 막 하드라마. 이 사람들이 잠을 얻어 자다가 잠을 얻어 자다가 놀란거야 다시 아이 왜 저러냐고 다시 설명을 하는거야.


    다름이 아니라 진사가 일곱 번째 나왔는데. 진사가 되는 날 자정이 되면 왼쪽 눈이 먼다는 거야. 왼쪽 눈이 멀어뿐다 이거야. 여섯이가 눈이 멀었다는 거야. 근디 이 사람은 눈이 안 먼거야 근께로 이 사람들이 셋이서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본께 이상하다 이거야 희안한다 희안하다 주인을 부른거야. 주인을 불러서. 이 집에 조상들을 어디에다가 모셨냐고 특별히 모신 것도 없어요. 특별히 모신 것도 없는데 그렇게 여지껏 진사가 났다 이거여.


    그러니까 그러냐고 한참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하니까 한참 있다가 뭐라고 하냐면 증조할아버지 윗대에서 호식을 당한 사람이 있었다 이거야. 근디 오늘 낮에 그 사람들이 가서 그 했던 해골이 왼쪽 눈에 명감나무 가시가 뚫고 올라갔더냐 이거야. 근디 인자 그 사람들이 말하자면 거시기 하다보니까 주머니 칼로 싹 잘라뿔고 그 자리다 좋게 묻어줬다 이거야 이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거야.


    잉,오늘 이만저만 해서 잉. 우리가 셋이서 묘자리를 이렇게 봤는디 말하자면 해골이 왼쪽 눈에 말하자면 왼쪽 눈으로 말하자면 그 명작나무를 우리가 잘라 줬는디 그것이 맞다면 아마 이집 선산이 맞는 것 같다고. 이 집터 문맥이 홀리는 것하고 그 터하고 일치한 것 같다고 그렇게 이야기 해가꼬 아 진사를 몇 개 얻어 눈 안 멀고 말하자면 조상을 찾았다고 잉, 그런 얘기가 있더라.

  • 중국으로 시주를 받으러 간 사연

    조사장소 :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당산 

    조사일시 : 2017년 5원 02일 

    조 사 자 : 송은주 

    제 보 자 : 김용덕(남,79세)

    구연상황 : 황전리 당산에시 어르신이 각황전 지을 때 이야기 아요, 하시면서 구술해주셨다.

     

    내온이라는 절이 있어. 절에서 쪼금 올라 가몬 용쏘라고 있어, 용쏘.. 옛날에 용이 거그서 등천을 허고 살았다. 해가꼬 용쏘가 있는디. 시방 그때는 뭐 명지실이 두 개가 들어가 두 꼬리가 들어가네 한 꼬리가 들어가네 그랬는디. 시방은 사람들 가서 목욕해도 그렇게 깊은 지도 모르고,그런 쏘라 것이 하나밖에 없어. 화엄사에서는 용쏘라고 없어.


    그 빠져 죽은 것은 옛남에 여그 가몬 어 호텔 들어간디 바로 다리 우에가 거이 먼 쏘가 몰라 시방 독에다 파졌아 독에가~ 애천동이라고 거 호텔자리가 애천동이라고 동네가 있아 거가 애천동이라고...

    옛날에 여순반란나서 말하자몬 해방도 되기 전에 거 옛날에 이조 때, 말하자믄 옛날에 말하자몬 이 화엄사가 잘 뭐이 안 된께로. 예 말하자몬 저 중국으로 가서 시주 해가꼬 오라고 말하자몬 화엄사 꿀을 요만한 오강 단지 만 헌디다 단지에다가 꿀을 담아 가꼬 손을 여서 밀가리를 묻치몬 꿀이 안 묻든께 밀가루가 안 묻을 것 아니여~


    주지스님이 그렇게 그 화엄사 주지가 중들이 한 180명 되고 나무 해다 준 사람들 밥해준 보살들 뭐 이런 사람들 조차해서 건 300명이 살았는디. 저 오후에부터 날이 셀라고 헐때까지 다 검사를 해도 전부 아아 꿀을 묻채가꼬 밀가루 동이에다가 손을 년디 안 묻든 사람 있가디 다 묻제. 근디 나무 해 날른 사람이 때가 많이 찌였던가 어쨌던가 몰라도 꿀도 안 묻고 밀가루도 안 묻고 헌게 그 사람을 베랑을 진기가꼬 중국으로 보낸거이여.


    가서 시주를 해오라고 긍께 인자 시주를 기양 헌 것이 아니라 이야기 들으몬 그래. 그 인자 제일 첫무냐 만낸 사람을 새복에 한 네시나 되서 베랑을 진기서 내려 보낸디 그 애천동에 사는 아줌마가 빨래를 허로 거리 나왔어. 새복에... 그때는 방맹이로 뚜들여가꼬 빨래를 해 입고 그럴때인디, 그 중도 아니고 처사라 베랑을 짊어지고 내려가다 본께, 제일 처음에 본 사람한테 시주를 받으라고 그랬어. 긍께 얼마나 가서 졸란는고 여자가 물에 빠져 죽어 뿔었어.


    거 시방 가몬 다리를 놔 졌어. 호텔 올라 간디 다리가 있어. 다리 밑에 보몬 우측으로 화엄사 쏘가 있어. 그 원 쏜가 모르것네. 어 거기서 죽어뿔고 이 사람이 가란대로 중국을 갔어. 긍께 몇 년이 걸렸제 걸어서 걸어서 간 께로 중국을 가니까, 그래 인자 중국을 간께로 말하자몬 아까 거 시주를 못 해서 물에 빠져 죽어 뿔었는디 제일 첨에야 본 사람헌테 시주를 해도라고 했는디 암 것도 줄 것도 없고 빨래 헌 사람이 뭐 있어. 뭐 암 것도 줄게 없신께로 애가 터진께로 물에 빠져죽어 뿔었는디, 중국을 간 께로 그 왕 아들이 3년 전에 난는디, 손이 안 펴져 딱 옴으라져가꼬 그냥 처사를 보고는 손을 쫙 펴 불었어.. 그게 그게 뭔 왕짜가 뭐이 새겨져가꼬 있은께로 그 천왕이 중국 천왕이 그 사람한테 시주를 해줬어. 그래 갖고 와 가꼬 화엄사에 각황전이라는 절을 짓다고 말이 옛말이 그런 말이 있어.

  • 연을 타고 온 스님

    조사장소 : 구례군 마산면 광평길 자택 

    조사일시 : 2017년 5월 10인 

    조 사 자 : 김은희 

    제 보 자 : 이규태(남,75세)

    구연상황 : 문화원에서 제보자의 연락처를 줘서 제보자 자택을 방문하게 되었다.

     

    옛날에 황전 마을에 인자 어떤 노인이 살고 있었어. 어느 날, 이렇게 딱 집 마당에서 저기 지리산 쪽을 이렇게 이렇게 딱 쳐다보니까 아 산골짜기에서 연기가 딱 피어오른 것이야. 아 글쎄 연기가 피어오른갑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 다음 날 또 봐도 또 연기가 피어올라. 아 그 다음 날도 또 연기가 피어오르고 맨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야.


    그러니까 인자 맨날 그 산골짜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니까 처음에는 불 났는가 했더니 인자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날마다 연기가 피어오르니까 아 필시 저 산중에 뭔가 있는갑다. 인자 이렇게 생각하고 혼자 가보기는 말하자면 좀 겁나고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 여러 명하고 인자 같이 인자 그... 연기 나는 골짜기를 가보게 됐어.


    아 그래서 그 골짜기에 이렇게 들어가 보니까 아 뭐 계곡에 움막 같은 것이 있고, 이제 그 움막 속에 이제 누가 있는가 인자 그 불경 외는 소리 그런 소리가 막 들린 것이야. 그래서 인자 그 안에를 들여다봤겠지. 그러니까 들여다보니까 음 그 노인하고 마을 사람들이 아니 생전 들어보지 못한 이상한 소리로 뭐 불경 같은 걸 그 외고 있고, 뭐 막 하여간에 처음 본 이상한 사람이 이렇게 있는 거여.


    하여간 스님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에 우리나라 사람은 아닌 것같애. 하여간 뭐 근데 일단 머리를 뭐 깎고 승복 같은 걸 걸친 것이 뭐 스님은 스님 같은데. 여튼 얼굴 생긴 거나 어 그 피부 색깔이 우리나라 사람은 아닌 것 같애. 그래서 이제 이렇게 뭐 그 스님하고 얘기를 해 볼라도 뭐 말이 통해야지. 말이 안 통한 거여. 그래서 이제 고민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스님이 어 뭐 그 뭐야 붓하고 종이를 갖고 나와 가지고 이렇게 쓰는디 한자를 쓰던 것이여.


    근데 이제 이 그 노인이 다행히 인자 한자를 쪼끔 인자 알고 있었나 봐.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떠듬떠듬 보니까 자기는 이제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고. 저 천축국이라는 데에서 이렇게 어 우리나라에 이렇게 불법을 전파하고자 인자 어 왔다고 뭐 이렇게 이제 한문으로 떠듬떠듬 이렇게 써줬어. 그러니까 이제 아 인자 깜짝 놀랬지. 그면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고 그러니까 그 연이라는 짐승을 타고 어 뭐 그 자기 어머니랑 같이 이렇게 왔다는 거야. 그러니까 인자 아유 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디 어쨌든 깜짝 놀랬아 그러면서 그 사람이 떠듬떠듬 써 놓은 글을 보면은, 어 그 연이라는 짐승은 원래 그 바다 속에 사는 짐승인디 뭐 바다 속을 헤엄도 치고 다니지만 막 하늘도 날아다니고 그런대.


    근데 자기가 인자 천축국에서 공부할 때 그 자기 절이 어 바닷가 쪽에 있었는데 그 연이라는 인자 짐승을 이렇게 인자 뭐라 할까 친해져 가지고 하여간에 자기 막 그 제자로 삼아서 막 타고도 다니고 이렇게 같이 돌아다녔다는 뭐 그런 얘기여. 그래서 사람들이 궁금해서 도대체 연이라는 짐승이 어찌 생겼다 보고싶다고 그랬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제 그 그 이상하게 생긴 스님이 어피리 비슷한 악기를 이렇게 꺼내더니 입에다 대고 희한한 소리를 이렇게 큭 불었단 말야.


    그러니까 아주 또 또 들어보지 못 한 뭐 희한한 소리가 확 나더니 갑자기 그냥 하늘에서 그냥 큰〜〜 거북만한 그냥 연이 확 날아오더니 그 어 그 그냥 스님 옆으로 가볍게 내려앉았어. 근데 그냥 그 연이라는 짐승의 형상을 보니까, 아이고 이 놈이 머리는 꼭 용 같이 생겼고, 몸은 또 거북이여. 아 근데 몸 길이는 열 자는 넘어 보이고 아 또 두 날개가 있어. 아 생전 처음 보는 짐승이여. 아 그러니까 인자 그 노인하고 인자 마을 사람들은 하 숨을 죽이고 이 정말 신기하게 생긴 막 그 짐승을 이렇게 보고 있었지. 


    아 그랬더니 그 저 그 스님이 그 그 이상하게 생긴 연이라는 그 그 동물 등에 딱 타고 손을 이렇게 딱 드니까,출발해도 좋다 뭐 이런 식으로 손을 딱 드니까 아 그냥 연이 확 하늘로 그냥 공중으로 쫙 날아오르는 것이여. 야 그 모습에 그냥 전부 다 감탄을 하고 할 말을 잃었지. 그 그 스님이 이렇게 확 연을 타고 인자 날아간 그런 쪽을 보고 사람들이 이 얘기를 했을 것 아니라고? 아 그 연을 타고 다니는 어떤 그 스님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음 뭐 그 처음에는 그랬다는 거야. 비연. 그러니까 연을 타고 다니는 존귀한 사람 해 가지고 비연 존자라고 할까 막 이러다가 마을 사람들하고 이야기 한 끝에 연을 타고 댕기는 사람이다 해서 연기존자라 이렇게 부르기로 했대.


    그 외국 스님을. 그러니까 또 인자 그 인자 그 마을 사람들이 인자 그 인자 그 외국 스님하고 그 연기존자라는 스님하고 인자 세월이 좀 가니까 좀 친해졌겄제. 좀 친해지니까 그 연기존자도 인자 우리말을 좀 알아듣고. 서로 마을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되어서 인자 서로 왕래도 하고 또 그 사람이 인자 인자 그 불경도 가르치고 인자 그랬겄지. 그러니까 이제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 인자 그 외국에서 온 그 연기 존자의 그 또 그 불처님 부처님 말씀 그런 본문도 인자 듣고 싶고 그런데 마땅한 장소가 없었을 거 아녀? 그런다고 해서 그 계곡 쪼그만 움막에서 법당을 대신할 수도 없고 그래서 음 마을 사람들이 어 인자 법당을 이렇게 인자 하나 인자 뭐 짓기 시작했다는 모양이여. 그러니까 인자 뭐 불사지,불사를 일으켜서 인자 그렇게 인자 절 집을 지은 거지.


    그래서 인자 그 절 집을 딱 지어 놓고 인자 어 그 외국서 온 뭐 그 스님이 어 사는 그런 뭐 집이다 해서 뭐 처음에는 뭐 해회당인가? 해회당인가? 뭐 이런 집을 지었다는 거야. 그게 말하자면 인자 화엄사의 시초가 된 거지. 인자 그때가 우리가 알기로는 그러니까 그 백제 성왕 때 인자 그 서기로 따지면 544년이래. 그때 인자 인자 처음으로 어 인자 화엄사가 지어졌다 뭐 인자 이렇게들 말들 하지.

  • 화엄사 돌 두꺼비

    조사장소 :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

    조사일시 : 2017년 6월 5일

    조 사 자 : 송은주

    제 보 자 : 진조스님(남, 61세)

    구연상황 : 화업사 종무소에 방문해서 취지를 말씀드리고 화엄사에 잘 알고 계시는 진조스님께 연락을 드려서 잔조스님 방으로가 몇 가지 이야기를 녹취해주셨다.

     

    어, 화엄사에 돌두꺼비가 있습니다. 이 두꺼비가 있는데......

    그 두꺼비 하믄 생각 나는게 있죠. 섬진강 섬진강은 본래 이름이 다사강이에요. 다사강인데. 본래는 고려말엽 우황때에 왜구가 인제 극심하게 막 쳐들어 왔단말이에요. 그런데 그 두꺼비이들이 지금 말하면 인제 다 다압면 섬진강 마을에서 막 울부짖어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는 왜구들이 그 소리를 듣고 도망가 버리는 거에요.

    구례 화엄사 돌 두꺼비 원경
    구례 화엄사 돌 두꺼비 원경
    구례 화엄사 돌 두꺼비 윗면
    구례 화엄사 돌 두꺼비 윗면

    그래 다사강이 그 후로 섬진강이 된 거에요. 근데 우리 화엄사도 마찬가지로 뭐가 있냐면 우리나라 계속 박해를 입고 일제치하에 있다 보니까 우리가 하믄 어떻게 하면은 일본을 좀 요렇게 망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 본거에요. 그래서 인제 대중화 대중방에 다 모여서 우리 한번 그 한번 해 봅시다. 했더니 어떤 말을 또 하는게 있냐하믄 그 대중방에 모여갖고 한 스님이 얘기를 하는 거에요. 남원 남원 실상사에 보면은 그 법당에 그 법당 안에 종이 있는데, 일본 지도가 있다는거에요. 그래서 흘러서 일본으로 가기 때문에 교랑으로 쳤다는 거에요. 그런 것 있듯이 우리도 한번 해보자, 그래서 인제 그 두꺼비를 만들기를 하는데 그 두꺼비를 어떻게 제일 좋은 자리가 어디냐. 이 화엄사가 본래 그 지리 여기는 지리산이죠, 옛날에는 두류산이였다고요.

    구례 화엄사 돌 두꺼비 화엄사 건물
    구례 화엄사 돌 두꺼비 화엄사 건물
    구례 화엄사 돌 두꺼비 화엄사 계단
    구례 화엄사 돌 두꺼비 화엄사 계단
    구례 화엄사 돌 두꺼비 정면
    구례 화엄사 돌 두꺼비 정면

    두류산 백천줄기 홀러마천자 요 두류산에 그 협력자리가 길쌍봉이에요. 길쌍봉이가 그 길쌍봉이 내려오는 거 아래서 거 백두산 기운이 있으니까는 우리 그 기운이 있으니까는 요 각황전 앞에다 만들어 났다.

    뭘 만드냐 두꺼비를 하자. 두꺼비를 하면은 옛날에 일본을 물리친 두꺼비를 하자. 근데 너무나 노골적으로 하믄 안된다. 헌식대로 만들자. 두꺼비를 네모로 하믄 헌식이란 것은 우리가 인제 불공 끝나거나 제사 끝날 때 이렇게 새들 먹어해 올려난게 있어요. 올려놓믄 인제 새들 먹고 가거든요.


    그서 인제 만들기로 해서 했는데 또 소문이 쪼금 났단 말이에요. 조선 총덕부가 아이 화엄사에서 요상한 짖거리를 하더라. 하고 올라 와 본거에요. 지금 뭘 만들쇼. 아이 우리가 여기다 지금 헌식대 좀 만듭니다. 뭐 새들도 먹고 해야 되니까 헌식대 좀 만들기 위해서 합니다. 아이 거 당신도 불자니까 그 뜻을 알게 알게 아니겠냐. 아 그긴 그러는데 그러믄 하물면 위해서 좋소, 해 봅쇼, 해는 거야, 근데 그 뜻도 모르고 인제 좋아 했지.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 간 거에요. 그거 해고 나서 얼마 후에 거 사리탑에서 방관을 했어요.


    아 방관하니까 마을사람 다 올라오면서 아이 어떻게 방관을 했냐. 그러니까 주지스님이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얼마 후에 해방이 돼 버린 거에요. 그랬더니 저 두꺼비는 즉 뭐냐 일본에 패망하고 없어지기를 바라는 그 월력으로 세웠는데, 그게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됐긴 됐다 얼마 후에 됐다는 거여 돌두꺼비가 있지요. 헌식대가있죠.

    구례 화엄사 돌 두꺼비 정면
    구례 화엄사 돌 두꺼비 정면
    구례 화엄사 돌 두꺼비 측면
    구례 화엄사 돌 두꺼비 측면

  • 미절전설과 흔적

    조사장소 : 구례군 문척면 원전리 전천마을 이귀호씨 자택 

    조사일시 : 2017년 5원 27일 

    조 사 자 : 강수명 

    제 보 자 : 이귀호(남,74세)

    구연상황 : 전화하고 찾아뵈었으며 이곳 토박이로 적극적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도 그 미절에 대해서는, 우리 거튼 사람은 초등학교 벌써 들어가기 전 부터 풀 망태 지고 지게질을 허고 풀을 베 나르고 군대 가지 전까지 미절을 수 차게 댕겼 뭐 허로? 풀을 베 나르고 나무를 해 나르고 미절을 가 보몬. 내가 인자 군대 갔다 와가지고 거기 갈일이 없지. 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공무원을 주욱 나가 댕기다 보니까 갈일이 없어가꼬 못 갔는데 내가 공무원을 69년도부터 했으니까 60, 3,4년 이후로는 안 갔을거야.


    군대 간 후로는 거기 간일이 없으니까 근데 거개가 댕기다 보은. 나 같은 사람은 우리 집이, 옛날부터, 지금은 소를 한집에 기업화 되가꼬 큰 축사를 지어가지고 소를 몇 백마리 키우구 그러지만 집이 소 한 마리 아니면 두 마리. 한 마리 키우다가 새끼 한 마리 나면 두 마리 키우지. 세 마리 키우던 사람도 없었어. 그런데 우리 집 아까 말 하다시피 형제간이 다섯명이나 되고. 여자 형제 간이 세명이나 되고, 그러니까 근디,부모님 덕인가 언권가 몰라도. 또 다 건강했어 이.


    뭐 지병을 앓는 다든지 그런거 하나도,소를 낳아서 키우고 그 소를 안 팔고 큰 소는 가지고 아부지가 쟁기질 허고 뭐 농사짓고 쟁기질 허고 품삯 받아가꼬 우리 먹고 살고 학교 보내고 글고, 또 새끼를 나면 딴집 같으면 다급헌께 나중에 새끼가 새끼 낳고 그러믄 그렇게 너 댓마리썩 되는 거여. 그럼 어때 날이면 날마다 풀을 베 나르고 풀을 베도 막 하루에 풍을 한 두 망태 베 가고는 그러니까 풀을 베기 위해서 이제 미절꺼지 가는거.


    그러고 여름철 이렇게 가물 때는 그때만 해도 집집마다 소를 많이 키워 이? 그때 돼지 키우고 소 키우는게 재산이니까 들에 가먼 풀이 없어 꼴 베다 줄 풀이 없어 그러믄 풀을 베러 거기가고 또 소를 지금은 경지 정리를 해 불고 소를 못 뜯기는데, 소를 아침에 밥 먹기 전에 나와서 소를 풀을 뜯겨 이? 뜯기고 와서 나중에 거 왔다가,또 오후에 오면 와서 또 뜯기고 그러는데, 나 같은 경우는 고등학교 댕길 때까지 그러고, 요 근방에 요새 겉이 가 물아 불면 풀이 없어.


    그러믄 소를 몰고 미절까지 그기까지 가서 소를 풀을 뜯어 멕여 가지고 걸어가지고 여기오고 그래. 그때도 보니까 감나무 터 같은거 있고 새미. 옹달샘 터가 있고 그러는데. 그전에 절터라 그러니까 절 뜰방 이? 그때는 세멘트가 없으니까. 전부 돌로 쌓드라고, 신주 신주 그기 지금도 많이 있으거여 근디 지금은 감히 들어가도 못흐거여. 그것을 내가 잘 알아 거기가면 또 채소 같은거 여름거 열은고 또 골고루 있고 그래 그러는데. 옛날 우리 할아버지 때 얘기 들으먼 거 뭐 전설이것지 참말로 그런 일이야 없었것지, 미절이라고 쌀미짜 미절이거든 이? 절사짜 이?


    헌데 어째서 미절이라고 지었냐면? 거기 가면 또 뒤에 산이 넘고 그런께. 물이 무던 많아 딴데 요론데 물이 꼬랑에 물이 없을 때에도 거기가면 샘물이 있고, 옹달샘이 항시 고여 있고 물이 계속 흐르드라고.

    옛날 절터가 절턴가 싶은가구나, 그러고 그때 우리 할아버지도 그러드라고 옛날 여기 절이 있었는디, 절에서 바위에선가 쌀이 조금썩 조금썩 나오는데 그 쌀이 욕심 많은 사람들이 와가지고 그 한꺼번에 많이 빼 먹을라고 작대기로 막 그런께 나중에 쌀이 안 나왔다 허드라.


    우리 할아버지도 전설로 듣고 있드라고, 그러니까 아마 내가 벌써 일흔 다섯, 일흔 너이, 우리 아버지가 1812년생이니까, 150년 전에 할아버지도 확실한거 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니까, 아마 신라시대나 절이 있었고 백제시대나 절이 있었는지 모르것 드라고, 그래서 미절이라고 그러드라고, 그래서 거기 가보면 절은 절터는 절터여 딱 보먼.  왜냐먼 대차 물이 있고 사람이 살았단 근거는 거 옹달샘이 있고, 신의대 대가 있다는 것은 사람이 살아 있는 근거거든, 어디를 가더라도 차를 타고 대가 있으면 저건 옛날에 마을 터였구나 허고 글거거든.


    대체 물이 있고, 대나무가 있고, 축대가 있고 돌로 쌓은 축대, 축대라고 해야 되나? 뜰방이 있고 이? 여러채 있었어. 뜰방이 돌로 해논게 지금도 아마 그기 있으꺼여. 여러군데 있드라고 그러고 군데군데 가먼 지금도 쓰고 있는지 방아 옆이라든지 여그 저 무이대(머구대) 이? 그기 많은거여. 돈나물 있지 이? 돈나물, 돈나물 이 근방에서 구경을 못해 그기 가면 있어, 거기서도 파다 심고 그랬는데, 가먼 옛날에 절터는 분명히 맞아.

  • 오산 뜀바위

    조사장소 : 구례군 문척면 동해벚꽃로 자택 

    조사일시 : 2017년 6원 2일 

    조 사 자 : 이연경 

    제 보 자 : 김만수(남,69세)

    구연상황 : 문화원의 소개로 제보자의 집을 방문하여 채록하였다

    구례 오산 사성암 풍경
    구례 오산 사성암 풍경
     

    오산 뜀바위는 옛날에 그 그 어 마을에 그 긍께 죽염마을 그 저 마을에 인자 그 뱃사공이 하나 살고 있었거든? 긍께 인자 그 사람은 주로 어 인자 겨울에 산에서 이렇게 인자 벌목을 해 가지고 어 그 나온 나무들을 어 실어갖고 인자 섬진강에서 벳목을 만들어 저 밑에 인자 하동까지 이렇게 인자 인자 운반해서 인자 그 나무를 또 인자 팔아가지고 인자 생계를 하는 인자 그런 뱃사공이었어.


    아 인자 어떤 해에 인자 자기 인자 일이 인자 그렇게 어 나무를 배로 실고 가서 팔고 먹고 살고 그런 일이라, 어 그때도 인자 어? 인자 그 나무를 몽땅 뗏목에다 실고 인자 하동쪽으로 길을 떠났어. 인자 자기 부인한테는 인자 언제 언제까지 돌아오겠다. 인자 몸조심하고 잘 있어라. 인자 그러고 갔는디. 아 그때따라 기상이 안 좋았는가,어쨌든 가. 아니면은 나무 판매가 제대로 안 됐든지, 어쨌든지 어 부인과 이렇게 인자 돌아오기로 약속한 날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 했어.

    구례 오산 사성암 유리광전 전경
    구례 오산 사성암 유리광전 전경

    그러니까 인자 그 아내는 약속한 날이 돼도 인자 자기 남편이 오지 않으니까 굉장히 초조해졌을거 아녀?

    그래서 인자 그 죽염마을 뒤에 있는 인자 산에 가서 인자 인자 빌라고 긍께 인자 말하자면 오산이제. 그때는 인자 그 오산에 있는 절을 인자 오산사라고 그랬대. 그 오산사에 가서 어 인자 그 부처님께 인자 인자 공을 드리면서 남편을 무사히 좀 돌아오게 해 달라. 인자 이렇게 빌고 그 인자 그 오산사 뒤에 그 인자 뜀바위라고 큰 높은 바위가 있어. 그 바위에 올라가 가지고 저 말하자면은 인자 하동쪽을 쳐다봄시로 아 우리 남편 좀 무사하게 돌아오게 해 주십쇼. 하고 이렇게 인자 그렇게 빌다가 그 그 그 뜀바위 그 높은 뜀바위 틈 사이로 신발이 그냥,신고 있던 신발이 그냥 탁 떨어져브렀대.


    아 그런데 인자 이런 사실을 잘 모른 그 하동까지 인자 그 그 뗏목에다 나무 싣고 갔던 뱃사공, 그 인자 그 남편은 아내가 인자 막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그런 것도 모르고 열심히 하여간에 늦어가지고 빨리 집에 가려고 뗏목에 노를 젓고 올라오는디, 아니 강물에 뭔 여자 신발 한 짝이 이렇게 막 떠내려 온 것이여. 하 그래서 요리 건져서 봤더니, 아 이게 분명히 자기 아내 신발이여. 아 긍께 강에서 자기 아내 신발짝을 줏으니까 얼마나 인자 그 불길한 생각이 뭐 들겄어? 아이고 이거 뭐 참 어 어떻게 아내가 잘못돼 버리지 않았나. 막 이런 생각이 드니까 굉장히 인자 불안하고 초조해졌겄제.

    구례 오산 사성암 약사전 앞 불상과 불전함
    구례 오산 사성암 약사전 앞 불상과 불전함
    구례 오산 사성암 풍경
    구례 오산 사성암 풍경

    그니까 인자 그 뱃사공은 인자 더욱더 인자 막 뗏목 노를 빨리 젓으면서 인자 집으로 빨리 올라고 인자 열심히 노를 젓고 올라오고 있는디, 아 아까 그 뜀바위에서, 오산사 뒤에 뜀바위에서 신발을 떨어트린 그 아내는 아 인자 뭐 떨어진 신발을 이렇게 찾을라고 그 막 그 높은 그 뜀바위 사이를 이렇게 이렇게 하다가 아이 그냥 실수로 그냥 뜀바위 사이로 떨어져 갖고 아 죽어 버린 거야. 아〜〜 그런데 인자 그 사실을 모르고 어 인자 그 남편은 막 그 인자 막 그때 그 불안한 마음에 열심히 뗏목 노를 저어 가지고 집에 와 보니까. 아 이고 뭐 자기 아내가 이미 어 싸늘하게 죽어 있는거여. 하 그것도 신발 한 짝만 신고. 자기가 그 한 짝을 강에서 주워 왔잖아


    아 그래서 남편은 너무 또 자기 그 아내를 사랑하고 그랬는데 내가 너무 늦게 온, 늦게 어 오다 보니까 어 참 우리 각시가 이렇게 맨날 그 높은 저 뜀바위에 올라가 이렇게 이렇게 나를 오기를 기다리다 떨어져 죽었는갑구나 생각하니까 그냥 자기도 그냥 죄책감도 생기고 또 그냥 설움에 복받쳐서 그냥 남편도 죽어브렀다는 인자 그런 그 전설이 뜀바위에가 있어. 그리고 인자 오늘날에도 그 뜀바위 사이에서 이렇게 신발이 이렇게 떨어지면은 저 그 하동 앞에 그 바다까지 떠내려간다는 그런 전설이 지금도 전해져 내려와.

  • 정성으로 모신 조왕중발

    조사장소 : 구례군 문척면 중산리 성자마을 자택에서 

    조사일시 : 2017년 4원 16일 

    조 사 자 : 강수명 

    제 보 자 : 김화자(여,76세)

    구연상황 : 농사일을 피해 미리 연락하여 사택에서 만났으며, 친정은 광양이고 부군 되시는 손영호 어르신과 같이 녹음하였다. 다과를 내놓으시며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몇 년 전 우리 며느리가 서울 며느리가 교회를 다니거든. 우리 순천 동서도 다니고 있는디 우리가 인자 우리 옛날에 우리 어머니가 그리 흐시던거라 요만은 조왕중발에다가 인자 이런데는 식당 방에다 그냥 물을 떠나 그럼 우리 며느리들은 오먼 우리 동서도 우리 시어머니 제사고 명절에 오먼 걍 이렇게 어그라가꼬. 어그러불고(엎질러 버리고)


    “아이고 우에 어찌했는가” 하믄 “형님 그기 머간디요?” 이러고 어그러불고 우리 며느리도 “어머니 요새 그런거 흐는 사람이 누가 있대요?” “아이 나둬라 그냥 옛날에 흐던 습관이라서 그양 그른거 흔다” 오먼 걍 어따가 부서불고(부어 버리고)

    (조사자: 그게 조왕중발이죠?)


    응~! 조왕중발이라 몇 년 전부터 우리 동네는 모도 여~ 가계 집에는 시방도 있어. 가계집이는 지금도 요 ~만 흔디다 물을 떠노드마 그르게 그기도 옛날에 할머니가 참 그런거 지성스리 그런거 해사 그런디 며느리도 시어머니를 닮아서 긍가 어찐가 그러고는 해서 언제년에 그 집을 가봉께 지금도 요만 흔디다가 싱크대 있는디다 물을 떠나 드라고 우리도 몇 년 전끄정 그랬는디, 며느리들이 강 교회를 대니고 흔께 오먼 그냥 부서부러 부서불고 씨거(씻어서) 업퍼 불고(엎어 놓고) 그래 

    (조사자 : 지금 그래서 안 하시는 거예요?)


    응! 안흐제. 그래가꼬 부산사람들도 교회 댕기제 순천 시아제들도 그르제 며느리도 글제 긍께 오먼 강 “어머니 이런거 있으면 안되요” 그러고 요새 젊은 사람들이 그래 우리들은 쪼금 옛날 그리서 풍속 있지만은 요새 젊은 사람들은 머 그런 거 머 교회 그른거 신앙생활 그른거이나 막 흐까 “그른거 불교 그른거 누가 요새 흐냐”고 그냥 버리불고 막 어그러불고 글더라고 그러고는 글도이 

    (조사자 : 조왕중발은 왜 모셨어요?)


    인자 옛날에는 우리 친정에서도 글고 이런데서도 글고 아침에 일찍 넘 앞에 딱 떠다가 그 조왕중발 갔다노코 “아이고 우리집 새끼들 어디든지 다니믄 항시 발을 받아서 막 간디마다 항시 좋은 일만 있게 해줍소사” 허고 인자 그리 물을 떠노코(떠다 놓고) 항시 물을 이러고 막 떠노코 그래 한번썩 정성을 그르게 입 정성을 흐면서 옛날에는 꼭 그래 넘 앞에 가서 우리들도 옛날에 꼬랑에 가서 물을 찌르다 묵을 때도 넘 앞에 새립문(사립문) 딱 열어노코 딱 조왕중발에 물 떠다노고 


    “새끼들 잘 되게 해줍소사~”


    하고 그른걸 옛날에는 그른 것을 위해서 그른걸 떠나 옛날에는... 아첨~마다 일년 내 낼 아침에 또 다시... 하 일년 내 다시 그넘 버리고 또 다시허고 다시허고 생전 그리가꼬 그런건디 인자 요새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 따라가야제 나만한 사람들은 안 맞아 뭐 한 나 한나 노인들이 쓰던 그릇부터 요새 젊은이들은 좋은걸 쓸라고 먹을라제 흔께 그른거 상관없다고 못흐게 해.


    그른께 인자 몇 년전부터 며느리들을 오고는 강 없애 오먼 “어머니 이런거 흐먼 안돼요! 이른게 뭐다요?” 그래 “아이 놔둬라” 그러고 인자 가먼 그리 놓는데 또 오먼 또 그러먼 강 “아이 대차 이러구나”허고 인자 그때부터 며느리들이 엎고 그를때부터 인자 그른거이 걍 없은 거이 지금꺼지 그른게 인자 아예... 하 그때는 얼마나 그런걸 정성들인가 그런건...

  • 두꺼비 귀신

    조사장소 : 구례군 간전면 불무동마을 

    조사일시 : 2017년 4월 27일 

    조 사 자 : 이순심 

    제 보 자 : 김순심(여,기세)

    구연상황 : 불무동마을에 어렸을 때 시집을 와서 현재까지 생활하시고 젊었을 때 자신이 귀신을 본 이야기를 해 주셨다.

     

    혼자 내려온디 컴컴했었어. 근디 우리 친구가 그 중간에서 농사를 재. 근께 인자 주구 신랑하고 주구 동생허고 우리 친구허고 인자 온지 알았어~~ 남자 요렇게 가고 그 뒤에는 여자가 간께 한들한들〜〜 거리가 여기서 얼매 만큼 떨어지겄냐. 여~ 그 차 있는디여~ 저 정자나무 있는디 만치 떨어졌네. 아따 부지런히 가가꼬 동무가 있어서 좋다 부지런히 가가꼬 말을 해야겠다허고 부지런히 따라 내려가도 그만허네〜〜


    아 그런디 어쩌다 본께 하나가 없어져 부렀어. 아이 없어졌다하고 쪼끔 내려가면 인자 동네서 길이 불이비치. 그냥 눈을 막 똑똑히 떠고 어디서 없어진가 볼라고 인자 그때는 귀신인줄 알았재. 인자 처음에는 몰랐는디 아一-이 어이서 없어진지 또 두개다 없어져부렀네. 그래서 인자 도로 올라왔어 또랑으로 어디로 들어 가부렀냐하고 도로 요리 몇 걸음 따라 올라온디 아무런 흔적이 없어. 


    그래서 인자 도로 내려간디 컴컴헌디 내려간께 저 밑에 내려간 께 인자 뚜낌쟁이 모두 해서 팔땐디 졸졸히 세명인가 받쳐놓고 있더라고 우리조카가 있어. 어~이 여기 저기 저~기 명길이 이센 간거 봤는가! 근께 안 봤어요. 아이 이러고 이러고 구랬네. 근께 아지매가 귀신을 봤그만 그러네. 뭔〜〜 귀신을 봐 근께 아〜〜 귀신이라 아무것도 없어. 그래 쌌더니 그러고 내려 왔는디... 3일째 남~섬가 우리 고모집 오빠가 그거서 귀신헌테 홀려가꼬 막 날 살리라고 막 조재민이 날 살리라고 막 동네 인자 불 비치는 동네

    막 불렀다네.... 근께 인자 그 집에서 나와가꼬 데꼬 왔는디 막 어리벙해 인자 귀신한테 글리 댕기논께 아이고 그래가꼬 그 가 귀신이 있는지 알았그만....


    혼은 빼가고 그러덩만 신짝이고 뭐고 갑시다 그래가꼬 데고왔다고 밤에 데꼬 내려왔어. 그 양반을 인자 술 잡순께 인자 그런 일도 있다 하지만은 나는 근메 출촘해 가꼬 이삿짐 가꼬 내려온디 그러더라고 아이고...  혼났다고... 또 내려온디 아 이 무단히 뻔해가꼬 요집 요리 질이(길) 쭈욱 있는디 요리 들어가서 독이(돌) 요만헌기 있는디 그 가서 딱〜〜 요러고 앉어 정신은 출촘헌디...


    아~이 이상허다 말을 헐랑께 말이 안 나와 아저씨는 저~기 밑에 내려가뿔고 아이고 어쩔 수 없고 그냥 말이 안나온께 참 깝깝하더만 난 중에는 막 불러 막~~ 경진어메 경진어메 그러고 불러더만 아~이 대답을 헐 수가 있는가? 그 가만히 앉었어. 앉었언께 오더니만 손을 뚝 떼가꼬 막 간께. 다라가 안펴져가꼬 요래가꼬 졸 졸 졸 따라 내려갔드만 그래가꼬 한참 몇백 미터나 내려갔는가 몰라 한 삼백미터나 내려갔는가 길 가운데 돌이 요만한게 있었어. 아 이 그거가 딱 쭈구리고 앉아서 못 간다고 허네.


    근께 그 아저씨도 무서운갑드마 막 담배를 피우더니 그냥 막 갑시다 그러네 그래 또 그때도 말이 제대로 안 나왔어(귀신이 혼은 빼 갔을까..) 몰라 그래가꼬 인자 담배를 한 대를 피더니 또 손을 질질질 끌고 가아 그래가꼬 인자 막 다리 막 요리 옹그린듯 해가꼬 막 안펴진께 그래가꼬 따라 내려 갔는디 그 먼저 사람들 서이 귀신 본 거기만치간 께로 아〜휴 한숨이 나오더라고〜〜 아이고 그래가꼬 인자 우리 집이 왔는디 3일거장 혀가 굳어갔고 말이 안 나와요. 막 그래가꼬 혀가 어절해 가꼬 말이 안 나오고 그러더랑께 그래가꼬 나는 귀신허고 같이 댕겨 봤그만.

  • 도깨비 집터

    조사장소 : 구례군 간전면 대촌 마을 

    조사일시 : 2017년 5월 29일

    조 사 자 : 이순심 

    제 보 자 : 조택용(남,81세)

    구연상황 : 제보자는 대촌마을에 태어나 현재까지 생활하시면서 마을 한쪽의 집을 가르키면서 도깨비 집터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우리집 뒤로 다섯채가 있었어요. 그랬는데 싹~시방 내가 헐어버리고 그냥 개량주택을 지었는디 그여~ 밑에 집~하고 여거 강씨가 우리 전에 아버지가 요~사로 오기 전에 근게 몇 년 됐냐?? 내가 팔십~팔십 한 일년 정도 되었겠네. 그거 회관 밑에 집에 우리가 살다가 형님을 거거서 낳아 가지고 올라오고,나는 여거 와서 낳았다니까 내 나이 하고 집터 나이하고 같을 거여.


    근런디 여거 뒤에 건평나무라고 여가 한~다섯 사람이 요렇게 안으면은 돌아 갈만한 큰! 나무가 요렇게 건평이 이만씩 허니 열고 그래갖고 그거이 나무가 있었고, 그래갖고 인자 명절만 되면 그기다가 제를 지내고 어머니가 평상 맨 먼저 조상보다도 그거가 먼저 그런게 꼭 거~여가 터가 쎄가지고 다들~다른 사람은 그때만 되어도 우리 집 들어와서 혼자라던지 이런 사람은 잘 수가 없었어요.


    무서워가지고~ 오도 못해요. 그런데 우리집 안 사람은 그리 안 헌다고요. 순천 그때 반란사건 때 소개 나가갖고 나는 할머니허고 둘이 여거 살아도 그 무서운거 혼자 그렇게 살아도 빈집이 있어도 무서운 줄을 모르는디 다른 사람들은 무서워서 그걸 왜 그렇게 무섭냐 그런고 도깨비 집이라는 별명이 붙어갖고..


    이놈의 집구석이 전에는 여거 오칸 겹집이였었는디 저거 한옥으로 그어 우리가 여거 클~적에도 다 여기서 컸는디 세살 먹을 적에... 안쪽으로 요리 불에 끄시러운 자국이 있었어요. 여기 부엌이 요짝 쪽으로 있었는디 부엌도 들리고~그래갖고 왜 그렇게 됐냐고 그런디 전에는 여기 겨울로 막 나무를 많이 해서 막 동을 세워서 이렇게 한 이십 동석 해 놨다가, 그런디 그 도깨비가 불을 댓부러 가지고 저어 그걸 어떻게 알고 보았냐? 그런게 전에는 도깨비불이 라는 걸 많이 있었거든요. 들에도 가면 우리도 봤지만은 그~참 이상한 불이라, 이미 뭐 어째갖고 뭐 그런다고 그런디~ 


    그 우리는 믿지는 않지만은 그어 그어 인자 저어~ 담배벌이 하는 사람들이 늦게사 인자 그 담배벌이하고 컴컴해 진게 인자 저 진몬당 이라고 저거 저~산 몬당 그 밑에 그거 와서 쉬어서 이렇게 인자 해가 넘어간게 컴컴헌디 불이 나갖고 그 여기 사람들은 막 그 동으로 갖다가 불을 붓고 꼈는디 여거 사람들은 안 보이는디 아무리 끈 사람들도 도로 여기 꺼 놓으면 이짝에 또 타고 이짝에 또 타고 그러더래.


    그래갖고 집이 이리 거의 없어지고 두칸 밖에 안 남았는디 그 어거 도깨비불이란 것이 어떻게 아냐허면 저기 산에 사람들이 보니까 그렇게 도깨비가 요렇게 불대를 들고는 낀 사람들이 이리로 가면 이짝으로가 갖고 불을 대고 그래갖고 그 그분이 그어 뭐 말이 자기가 도깨비 허고 그 상호가 안 맞아서 그런 해를 입었다 그래갖고 못 살고 결국에 밑에 동네로 이사를 가버렸어요. 팔고~


    그래~ 아무도 살 사람이 없는 디 우리아버지가 그래도 그때 그 우리아버지는 좀 신~이 좀 그석이가 있어가지고 그냥 좀 사가지고는 이걸 개축을 해가지고 우리가 살다가 인자 요렇게 된 것이고.

    나이 살이나 든 양반들은 우리 집은 지금도 요오 혼자 있으면 못 들어와요. 잘~


    나는 혼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디(웃음) 그런 도깨비 설이라는 그런 그 그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그런 집이예요.

  • 정월보름날 당산제 지낸 이야기

    조사장소 : 구례군 간전면 양동중앙길 마을 

    조사일시 : 2017년 5월 24일 

    조 사 자 : 이순심 

    제 보 자 : 윤희현(남,91세)

    구연상황 : 제보자는 양동마을에 젊었을 때 부터 현재까지 생활하시면서 마을사람들이 몸 등을 깨끗이 한 후 당산제를 정성껏 지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 전에는 정월 보름날 아~ 또 나흘날 저녁인가? 음력 정월 그때는 애~ 에 당산제 답이 있었어요. 논이 지금도 있어요. 그것이~ 그 전에는 이 대촌하고 같이 합제를 지냈었거든. 인자 뭐이냐 그러면은 나흘날 저녁에 밤 열두시나 되면은 가서 지네요. 그때는 왜냐 그러면은 이 개를 키우고 그랬다면 개 소리도 안 듣게 조용할 때 인자 이 짊어지고 저 잿몰 이라고 그기가 있거든요.


    그기 가서 인자. 그러니까 당산제를 모시게 되면은 한 일주일 전부터 딱!! 지정을 해줘요. 당신이 그때는 지정을 해 주면은 얼른 말허자면은 젊은 사람들은 남자 길-으면 여자 허고 합방을 잘 못허게하고 물도 여럿이 있는데 안 먹고 저 한쪽에 그 새미가 있거든요. 그기다가 사내끼(짚으로 꼬은 줄)로 딱 둘러다놓고 그기 물을 떠다가 그래가지고는 그 뭐 애기를 낳거나 상주를 헌 사람은 상대를 안허고 그렇게 해가지고 음 한 열한시내지 열두시 되면은 인자 그때쯤에도 지게에다가 짊어지고 쭉 밤에 올라가요. 저어 챗몰 뒤에, 그러면 인자 그기 가서 그어 제사 지낸 사람이 그 넘어 꼬랑이 있거든요. 찬물에 가서 다시 싹 손도 씻고 그냥 세수하고 그러고 와가지고 인자 제사를 지네. 뭐 제사 지내는 것은 인자 별것도 없어요.


    인자 그어 밥허고 그 나물 조금허고 간단해,그기는 그러고 가가지고는 인자 그 제사를 지내고는 돌로 가지고 이렇게 딱 놓게 그롬 되어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때는 정월보름 께되면은 그 막 얼고 그러잖애요. 그렇게 놔두면 괭이로던지 철장가지고 와가지고는 고놈을 위로 떠들고 인자 파고 그런게 인자 미리서 안날 그기도 왼 사내끼를 과가지고 금투줄 늘이 놓고 흙을 한테로 딱 파다놔요. 그래 요리 접근을 못허게 인자 그 밥을 그기다가 묻고 그 해서 그러고 인자 발상을 해서 딱 묻고 인자 큰 돌로 기지고 못...개 라든가 이런 짐승이 못 파도록 보도시(어렵게) 떠들어요. 둘이서 딱 요렇콤 덮고 인자 내려와요.


    내려 오면은 대촌 올라간디 저 짝에 유상각 있지라 인자 그거 와서 진짜 제사를 지네. 그거 와서 인자 그거 외-서 인자 제물 딱 차려놓고 밥이네 떡 이네 국이네. 뭐 이렇게 딱 해놓고 인자 그러면 축문이 있어요. 그럴 때 지낸 축문 축문을 읽고 그때쯤에도 그어 한복입고 두루마기입고 그렇콤 해 가지고 인자 가서 축원을 읽고 인자 제사를 지내고 뭣이냐 인자 그기도 역시 인자 밥을 요리 딱 거시기 해놓고는 딱 덮어 놓고는 인자 내려오고 그랬어요.


    그런게 상당히 복잡했어요. 그런게 조용할 때 그때쯤에도 밤 열한시가 넘어야 제사를 지내제. 그 안에는 안 지냈어요. 지금은 인자 뭐 지금도 지내기는 지냅니다마는 그냥 낮에 시방은 지내지마는 그때는 그렇콤 당산제를 지냈어요. 축문이 상당히 복잡해요. 한문도 써가지고 그런데 인자 그것도 딴디는 보면 다 그거 뭐 등천식인디가 쌔 부렀어요. 그냥 하늘에 올라가십시오. 허고 지금은 그냥 간편히 해가지고 낮에 가서 지내고 와가지고는 그냥 술한잔 먹고 그렇콤 하는데 시방은 간편 허니 다 그러잖아요. 아마 당산제 지내는디가 여거도 없애자고 해쌌는디 지금도 꼭 지내고 있어요.

  • 방광마을 유래

    조사장소 : 구례군 광의면 쌍샘이길 자택 

    조사일시 : 2017년 4월 20일 

    조 사 자 : 이연경 

    제 보 자 : 박은식(남,63세)

    구연상황 : 광의 삼거리 보리밥집에서 식사 도중 설화채록 한다는 이야기를 하자 제보자가 자기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해 주겠다고 해서 오후에 제보자 집을 방문하여 이야기를 채록 하였다.

     

    아 우리 동네가 왜 방광리냐고 하면은 여기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어. 그것은 어느 저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데.. 들판에 인자 이렇게 조 알지 조 잉


    조가 누렇게 익어 가고 아조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을 때, 한 스님이 인자 딱 길을 가고 있는데, 조가 너무 탐스럽게 잘 익어 있는거여 들판에 그래서 자기도 무르게 조가 야 정말로 먹음직스럽게 탐스럽게 잘~~익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남의 밭이겠지 남의 밭에 들어가서 세 개를 싹 꺽어가꼬 인자 자기 암자로 갔어. 그런데 인자 그 암자에는 인자 노스님이 인자 한분 계셨거든. 근데 인자 그 젊은 스님이 아 이렇게 탐스런 조가 있어서 세 개 끽어 왔다고 자랑스레 말하니까 노스님이 막 화를 내면서 이놈아 어 그 조는 남의 건데 남의 물건을 그렇게 애써 밭에 가궈 논 남의 조를 세 개나 훔쳐왔으니까


    어 그건 아주 나쁜 잘못된 짓이야 너는 그래서 그 집에 가서 최소한 삼년동안 일을 해서 그 조 값을 해야 돼 하면서 갑자기 그 노스님이 도술을 부리더니 그 젊은 스님을 그냥 소로 만들어 놔 버렸데~~ 아 그런데 인자 그 마을에 아 거 임자 없는 뭔 소가 하나 이렇게 돌아 다니는거여. 그래서 인자 마을 사람들은 아이구 참 먼 소가 이렇게 혼자 주인도 없이 돌아 다닌건가 해서 소 주인을 이렇게 막 찾아봤는데 소 주인이 끝까지 나타나지 않고 없는거여 하는 수 없어서 인자 소를 가는대로 나둬 봤어.


    지가 어디로 간가 보자하고 놔뒀더니 그 아까 젊은 스님이 조 세개를 꺽어잖아 그 조 세개를 꺽은 그 밭에 주인집으로 소가 지발로 걸어 들어가는거 아니겄어. 아 그러니까 그 주인은 깜짝 놀랐겠지 그냥 완전히 옛날에는 소 하면은 아주 큰 재산이잖아 근데 그 밭에 주인은 그냥 뜻밖의 소한마리를 얻게 돼서 얼마나 좋겠어. 너무 좋았지. 지발로 소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냥 마치 그 뭐라 할까 옛날에 애기 업동이가 들어온 것처럼 아주 그냥 특별대우를 했데. 너무 잘해주었데.


    아 근데 또 소는 또 주인이 잘해줘서 그런가 몰라도 주인 말을 아주 잘 들었데. 특별히 뭐라 하지 않아도 일도 잘하고 주인이 시킨대로 모든 일을 아주 잘해주었어. 그래가지고 하여간 삼년이 흘렀는데 삼년동안에 소가 그 집 재산을 많이 불려주었데. 그래가지고 하여간 소가 그 집으로 들어와서 일을 한지 한 삼년정도 지났어.


    근데 어느 날 인자 하루 소가 똥을 싸는데 아 똥에서 굉장히 눈부신 밝은 빛이 팍 나오는거야. 주인이 깜짝 놀라서 막 그 밝은 빛이 나는 소 똥을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뭐 글씨가 써진 종이가 그 안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데. 그러니까 그 종이가 뭔가 이렇게 찾아 봤겄지. 가만히 있어봐 잉 그 저 뭔가 봐보고 그것은


    “명야마적중다래 흔연영접준비요”


    말하자면 무슨 뜻이냐면~~ 내일 저녁에 도둑놈들 그 마적단이 막 쳐들어 올거니까 그냥 기분 좋게 그 사람들을 대접해주라는 뭐 그런 뜻이여. 아 그냥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어떻겠어. 너무나 뜻밖이지만 그냥 그 주인은 그 글씨가 써진대로 그냥 어쨌든 어 도둑놈들이 와도 접대를 해야되겠다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과연 어 그날 한밤중에 그냥 마적때가 수십 명 몰려왔데..


    긍게 막 도망가고 이래야 되는데 마을사람들이 주인이 아 문전까지 나와서 이렇게 맞아들이며 아 접대준비가 되었다고 들어오라고 막 그러니까 공손히 이야기하니까 아 마적들도 그 도둑들도 뭐 상상도 못헌 일이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게냐 주인을 불러서 물어 본거야. 긍게 주인이 이렇게 준비하게 된 과정과 대접하게 된 과정을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사세하게 이야기 헌거여 그러니까 그 마적의 두목이 그래 그런 신비한 소가 있겠다고 하면서 그 소 한번 보자해서 주인과 함께 그 외양간으로 가봤어.


    아 그랬더니 이미 그 소는 간곳도 없고 소가죽만 딱 남아 있더래. 그리고 그 어제 쌌던 그 소똥에서도 지금까지도 그 밝은 빛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그 소 가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딱 써 있었더래. 그 내용을 보면


    나는 지리산에 중인데

    이렇게 무심코 길을 가다가 탐스러운 조가 있어서

    그 조 세 개를 주인 허락도 없이 이렇게 꺽은 과보로

    업보로 어 삼년동안 일을 하여 그 빚을 다 갚고 간다

    그리고 이 내가 남긴 이 소가죽을

    남해 바다에 던지면 이게 우묵가사리가 되니

    어 그것을 거두어 번뇌에 시달리는

    그 중생들의 더위를 식히는 약이 되게 하라


    뭐 이런 내용의 써져 있었다는 거야. 아 이걸 본 마적에 두목과 그 졸개들은 이렇게 생각했지. 아 조 세 개를 쩍고도 막 삼년동안 저런 업보를 받고 어 저 고생해가지고 저렇게 갚아야 되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우리는 도적질과 착취와 노략질 만 해묵은 우리는 어떻게 업보를 갚는단 말이냐 하고 모두 크게 뉘우치고 그 있잖아 화엄사 화엄사로 그냥 싹 들어가서 한꺼번에 중이 되어 버렸데. 자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서 이게 소가 그 똥을 쌌는데, 똥에서 밝은 빛이 났다고 해서 빛이 펴진다고 해서 방광이요. 그래서 마을 이름이 방광리가 되었다고 그래.

  • 온수동에 우물이 사라진 이유

    조사장소 : 구례군 광의면 구만길 사무실 

    조사일시 : 2017년 5월 15일 

    조 사 자 : 이연경 

    제 보 자 : 조민기(남,62세)

    구연상황 : 제보자가 여러 가지 설화를 많이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만마을에 있는 제보자의 농기구 수리 사무실을 방문하여 이야기를 들음.

     

    온동마을은 옛날에는 그 인자 구례가 아니었어. 옛날에는 그 남원부 소속이었제. 그러다가 인자 그 나중에 인자 그 구례로 편입되어가지고, 인자 일제시대 때 인자 그 온당리로 이렇게 들어와서 인자 그 온동마을이라고 인자 불르게 된거여. 그 인자 온동은 인자 그 다 인자 구례사람들은 알제. 인자 그 마을에 옛날부터 인자 그 따뜻한 물이 나온다 그래서 인자 그 온수골이라고 그랬어.


    긍께 따뜻할 그 온자에다 물수 있잖아 잉~ 그 온천할 때 온 그렇게 온수골하다 온동 뭐 이렇게 불렀는데, 인자 그것은 예전부터 내려온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쪽 온동 마을 그 건넜던 뒤에 그 골론게라는 논이 있거든. 근데 그 골론게라는 논에서는 이렇게 저 찬물이 나오는게 아니고, 인자 뜨거운 물 그 온천물 같은 것이 막 못아 그 인자 그 온천물에다 이렇게 인자 그 막 사람들이 인자 목욕허고 그러면은 막 안 났는 피부병도 막 잘 났았뿐다는 막 그런 소문들이 인자 막 돌고 그래가꼬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인자 그 물에다 인자 몸을 씻을려고 인자 막 몰려 들었제.


    그래가꼬 막 점점점 나라 안팎으로 막 소문이 퍼졌다는거여. 그래서 막 각종 막 그 피부병 환자들이나 이렇게 몸이 아픈 사람들이 이쪽 그 골론 게 논에서 나온 그 온수물에다 온천물에다 몸을 담글라고 막 많이 들어왔겠지. 인자 근데 그중에 나중에는 문둥병환자 있잖아. 나환자 문둥병환자들이 전국각지에서 인자 어 이물에다가 몸을 씻으면은 피부병이 문둥병이 났는다 그래가지고 아 이리 인자 모여 들어서 얼마나 많이 모여 들었냐면은 한때는 요 밑에가 그 문둥골이라는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하여간 많이 이렇게 모여들어서 문둥골에서 살면서 그 나병환자들이 나환자들이 이쪽에 계속 그 인자 말하자면 몸을 씻으로 다녔다는 것이여.


    이쪽마을주민들은 나환자들에 대한 혐오감과 또 혹시나 그 병이 막 전염될까봐 고심하던 중에 그 마을주민들이 회의를 해가꼬 어느 날 그 따뜻한 물이 나오던 그 골롱개 논에 구멍을 큰〜〜 그냥 쇠로 만든 솥뚜껑으로 딱 덮고 그냥 흙으로 묻어 버렸다는 인자 그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아 그래가지고 오랜 세월이 인자 흘러서 그것을 다시 찾아볼려고 해도 다시는 못 찾는다네. 물 나온 구멍을~ 지금도 모르제. 어딘가를~~

  • 불공드려서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

    조사장소 : 구례군 광의면 공복마을 이웃집 

    조사일시 : 2017년 6월 15일 

    조 사 자 : 안미숙 

    제 보 자 : 박순자(여,76세)

    구연상황 : 양소아이르신 댁으로 마실 나오셨다면서 이야기를 해주셨다. 전에는 신을 받아야 해서 몸이 많이 아프셨다고 하셨다. 지금은 괜찮다하시면서 이야기를 녹취해주셨다.

     

    뭔 절이라고 그러드마. 암자 절인디 시방도 그 암자 절이 있데. 암자 절에서 부자집에서 인자 그 절을 다녔다네. 암자 절은 아무것도 없는디 그랬는디 인자 아들하나 낳고 못나서 또 나을려고 그 절에 공을 많이 드리려 다녔데. 그래가꼬 아들 7남매를 났데. 그래가꼬 애기들 잘되라고 공을 많이 드리려 다닌께 인자 애기들이 판사도 되고 검사도 되고 그러더래.


    그래서 인자 판사도 되고 검사도 되고 다 출가해 보내뿔고 암자 절하고 자기 집하고 바꿨다네. 옛날 한옥 집이라 영 좋데 부잣집이라... 그래서 절값이라 줬데. 암자 절은 요상하니 오두막집이래. 절하고 집하고 바꿔서 절에서 얼마 안살다가 죽었데. 인자 죽었는디, 인자 아들들은 다 잘 됐는디 딸이 하나 저기 부자 집으로 시집을 갔데. 부잣집으로 시집을 갔는디 그 부자집 시어머니가


    “왜 너는 요런데를 시집을 왔냐” 그러더래...

    “왜 그러요” 근께


    “여기는 이 집안간은 삼십대 되면 여자들이 확 죽는디

    왜 여기를 왔냐 요리 시집을 왔냐”


    그러더래. 그래서 인자 친정을 가가꼬 기분 나쁘더래요. 삼십대 되면 죽은단께 그래서 친정 엄마한테

    “엄마 나는 거기를 간께 시어머니가 삼십 되면 죽는다네 집안간에서 싹 다 죽었다네” 그래서 그 시어머니는 그 후에 왔다네. 그 시어머니는 제처로 왔다네. 그랬는데 시어머니가 제처로 왔는지도 모르고 왜 요런디로 시집을 왔냐 집안간 여자들은 다 죽은디 삼십대밖에 못살고 다 죽은단디...


    기분 나빠서 친정에 가가꼬 어머니 나 삼십대 밖에 못 산돼요. 어쩌기다 살지 말까요 하니까 아이고 잘 뚜드리 먹고 살아라 저거 부잣집인께 먹는거나 잘 먹고 잘 살아라 봐야 알지 삼십 되면 죽는다냐 그러더래요. 그래서 인자 와가꼬 아무리 일을 해도 샌찮하더래. 서운하더래. 그래서 인자 길 가다가 승복을 입은 보살이 지나가면서 그러더래요. 아줌마 저거 아줌마는 복을 많이 줘야 살 것소 그러더래요. 그래서 나는 삼십대 되면 죽은단디 스님 나 삼십대 되면 죽것소 그런께로 나 시키는대로 하면 삽 십대 더 살것소. 그러안하면 삼십대 죽것소. 그러더래요. 그 사람도 그런께 부야가 나더래. 그래서 인자 또 절인가 갔더래. 그 사람도 또 그러더래. 영 깨름직하여 못 살것더래.


    그래서 서방 몰래 절에를 갔대. 간께 여기 절에 다니면서 지상보상님을 많이 찾으세요 그러면 아줌마가 백살 되도록 살거요. 그러더래. 그래서 한 삼년을 지상보살만 찾으세요 그러더래. 그래서 인자 그 사람말만 듣고 절에도 못가고 어쩌지도 못하고 밤낮 지상보살 지상보살 놀새 없이 지상보살 밤낮 지상보살만하고 다닌께, 서방이 미쳤다고 그러더래. 그러고 인자 넘들도 저 여자가 미쳤다고 그러더래. 지상보살만 찾은다고 백일을 허라해서 백일을 하고난께 백일 끝났소 하고 스님한테 찾아간께 절에는 돈판이라고 있어. 천장인가 만장인가 찍어가꼬 음식을 겁나게 장만 해가꼬 그 돈을 많이 찍으시오. 그러면 오래오래 많이 살 것이요. 그래서 백일 돼서 시키는데로 했데요. 돈 찍고 음식 장만해서 바닷가로 가더래요. 조그만 배를 하나 끌고 오더니 그것에 다 놓고 돈을 하나씩 뿌리면서 바다를 한 바퀴 돌고 꼬시래를 많이 하고 그러면서 음식을 다 뿌려주고 왔데요.


    스님은 지상보살님 지상보살님 스님은 염불하고 그러더니 스님이 오늘 저녁 자면 꿈에서 선동을 할거요 그러더래요. 그러더니 꿈에서 예쁜 크네기가 머리를 따고 소복을 입고 저거 배를 타고 따라갔다 왔더니 인사를 하고 가더래요. 내가 소원을 풀었다면서 내가 몇 살 먹어서 죽어가꼬 우리 집이 부자인디 옷 하나 못 입고 못 먹고 가서 죽은 것이 후회가 돼서 집안간에 댕기면서 꾸줄풀이하고 나처럼 살아보라고 젊은 사람을 다 데려 갔는디 너는 내 소원을 들어준께 너는 오래오래 잘 살아라. 그러면서 배 마지막 끝에서 허연 소복을 입고 예쁜 큰 애기가 머리를 따고 댕기를 내리고 그러고 인자 인사를 하고 사라지더래. 그런디 옛날 사람으로 해서는 오래오래 살았다네. 그런다고 그 절에 가면 찾아 가보래. 그런 뒤로 집안간에 젊은 사람들이 안 죽고 그러더래.

  • 축지법을 써서 새가되어 날아간 이야기

    조사장소 : 구례군 광의면 공복마을 유상각 

    조사일시 : 2017년 6월 23일 

    조 사 자 : 안미숙 

    제 보 자: 강명숙(여,65세)

    구연상황 : 동네 유상각에서 앉아 게시길래 상황설명을 했더니 어렸을 때 할아비지한테 들은 이

    야기를 해주었다

     

    그러고 인자 우리 할아버지가 아주 어렸을 때 거 꼴짜기에 거기는 집성촌이라 강가들만 살아. 다른 성씨가 하나도 없어. 그런게 인자 우리 할아버지가 진주 강씨인디, 진주에서 인자 요리 이사를 왔어,혼자. 인자 옛날 선조 십몇대 할아버지가 그래가꼬 인자 쭈~욱 이어져서 마을에서 강가들만 산마을인디.

    옛날에 어려운 시절이 6.25전쟁 나기 이전에도 어려웠다더구만,무슨 혁명을 시도했데, 내가 어려서 기억을 잘 못하겠어.


    뭔 혁명을 시도 했는데,노부부가 노부부가 우리 말하자면 그 마을에 통솔권자가 우리 할아버지여. 강가들 집안이지만은 우리 할아버지가 통솔하고 있는디, 인자 노부부가 그 마을 산속 마을이니까 도망을 온 것이여. 어디서 그러고 인자 혁명이 일어나는 주동자였는지는 모르지만은 피해서 그 마을로 숨어 들은거여.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가 그 마을 통솔권자였데. 할아버지아버지보고 우리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쫓기고 있으니까 우리를 조용한 빈집 있으면 작은방이라도 남의 집 작은 방이라도 둘이 거쳐 할 곳 마련해 주라고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다고. 은혜는 언제든지 갚겠다고 해서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가 인자 그 집안에 빈방하나 있는 아래채를 하나 빌려 줬데.


    거기를 빌려 줬는데,거기서 숨어서 살고 있고 서로 도우면서 살고 있는디, 하루는 인자 거 수사관들이 지금으로 말하자면 범죄자를 잡으로 다닌 경찰 이였겠지. 그런 사람들이 와서 이 마을에 초상화를 주면서 전에는 사진이 없은께 초상화를 갖고 와서 이런 사람 안 왔냐고 그런께로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가 좀 똑똑 했나봐. 그래가지고 여기는 그런 사람 없고 한 집성촌 밖에 안 산다 그랬데. 그래가꼬 인자 우리 할아버지한테 살짝기 귓속말로 그 사람들 잡으로 왔으니까 피하라고 그런 이야기를 전해라 그러더래.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그 뒷문으로 갔는갑데,가가꼬 말을 했데.


    “할아버지,할머니 우리 할아버지가 어디로 피하시래요”


    그렇게 말을 했데. 근께 알았다고 그러더래. 그러고 인자 숨어서 인자 우리 할아버지는 집으로 왔나봐.

    그래도 어떻게 수사관들이 눈치를 챘는가 그 집을 찾아 갔더래. 집에서 나갔는데 골목에서 누가 말해줬는갑더래. 수사관들한테 근께 인자 그 집으로 갔데. 그 살고 있는 방으로 찾아 갔는데 언제 피할 시간도 없이 안에가 있는디, 문을 열어 뿐거여. 인자 잡을라고 저 옛날에는 흙집이 쪼그만코 그러잖아 그래 가지고 문을 팍 연께 두 노인이 없어졌뿐거. 두 노인이 없어져 버려서 참 희안하다 그러고는 인자 있었는디, 새가 작은 새가 참새 같은 작은 새가 두 마리가 푸르륵 날아가 버리더래. 문을연께,


    근께 인자 옛날말로는 축지법 그런 걸 썼다 그래. 인자 노인들이 그런 능력이 있데. 그래가꼬 새가 두 마리 날아 갔는디 그뒤로 그 노인들을 어디서 볼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고 영원히 그대로 사라져버렸데.

    그 사람들 잡아가지도 못하고 그랬다고 우리가 어려서 들은 이야기여... 그 사람들 한번 보고 싶다고 우리 할아버지 한말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기별이라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

  • 덕진이 세운 영암천의 다리, 전남 영암군 덕진교비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교에 있는 「덕진교비」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덕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순조 13년(1813)에 세운 「덕진교비(德津橋碑)」라는 비석이 있다. 전면에 “대석교 창주 덕진지비(大石橋創主德津之碑)”라고 새겨진 이 비석은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덕진리와 영암읍 역리를 잇는 덕진교 북쪽에 조선시대 때 이 지역에 살던 마을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현재는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리 교변 마을의 남쪽 영암천 가에 있다. 비석의 크기는 가로 62cm, 세로 150cm, 두께 20cm이며, 기와집 형태의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영암 덕진교비각 정면
    영암 덕진교비각 정면
    영암 덕진교비각 정측면
    영암 덕진교비각 정측면

     

    다리가 없어 불편하고 위험했던 영암천


    영암 덕진 설화 표지
    영암 덕진 설화 표지


    통일신라 때 덕진이라는 여인이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천 변에서 주막집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 당시 이 지역은 전라남도 강진군 등 남해안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배를 타거나 멀리 돌아가야 하는 불편을 겪었다. 심지어 장마철에는 하천의 강물이 불어나 여행객들과 마을 사람들의 목숨이 위험할 때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다리를 놓을 방법을 생각했지만 마을 사람들끼리 힘을 합치는 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관아를 찾아가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원님은 들은 체하지도 않았다. 


    덕진은 이를 안타까워하며 도움이 될 방법을 고민했다.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다리를 놓게 할 방법이 없을까?”


    덕진은 그날로부터 한 푼 두 푼 차곡차곡 돈을 모아 땅속에 묻어둔 항아리에 보관하였다. 몇 날 며칠을 먹고 입는 것을 아껴서 드디어 300냥이라는 큰돈이 모였다. 다리를 짓는 데 쓰일 돈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덕진은 갑자기 병을 얻어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건네줄 새도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원님의 꿈에 나타난 덕진

    몇 해가 지나 새로운 원님이 부임하였다. 백성들을 아끼고 어려운 일들을 해결해주는 원님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원님이 소복을 입은 여인이 와서 간절하게 부탁하는 꿈을 꾸었다.

    영암 덕진 설화 표지
    영암 덕진 설화 표지
     


     “저는 영암천 변에 살았던 덕진이라 하옵니다. 사람들이 다리를 놓으려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는데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보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돈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저승의 사람이 되었으니 어떻게 그 돈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돈을 찾아 마을 사람들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날이 밝자 원님은 꿈이 너무 생생하여 사람을 시켜 덕진이 일러준 땅을 파보게 하였다. 과연 꿈의 내용처럼 항아리 안에 300냥이 담겨 있었다. 원님은 이 돈으로 큰 다리를 놓은 후 덕진의 이름을 따서 덕진교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덕진의 노력으로 다리를 놓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사람들은 이를 듣고 고마워하며 다리의 북쪽에 덕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비석을 세웠다. 

     

    실제로는 김준철과 최천복이 세운 덕진교

    덕진교는 전라남도 영암군 남쪽에 있는 강진, 해남, 진도 사람들이 영암과 나주를 거쳐 한양으로 올라갈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다리이다. 설화에서 전하는 것과는 달리 덕진교는 통일신라가 아닌 조선시대 때 세워진 것이다. 덕진리 교변마을 서동열댁 비석에 따르면 1812년에 전라남도 신안군 사람인 김준철과 최천복이라는 사람이 덕진교를 세웠다고 한다. 「덕진교비」가 이듬해인 1813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 「덕진교비」는 김준철과 최천복의 업적을 기리는 비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덕진교비」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덕진 이야기와 함께 전하고 있다. 이는 덕진면에 살던 주민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선행을 베푼 덕진의 숭고한 정신을 이야기로 만들어 오래도록 교훈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덕진교비」와 함께 전하는 덕진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영암천과 옛 덕진교
    영암천과 옛 덕진교
    현대식 덕진교와 옛 덕진교
    현대식 덕진교와 옛 덕진교

  • 명당 먹통바위를 알아본 윤선도

    조사장소 :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남선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6.9

    조 사 자 : 김명선, 윤홍기

    제 보 자 : 강진간(남,79세, 1939년생)


    윤선도는 옛날에 굴포서 한 십여 년 살았어. 정확한 햇수는 십 여년일거여. 윤선도가 거기서 함께 산 지산면 인지리 설씨 부인은 본부인이 아니고 속은(사실은) 둘짼지 셋짼지 몰라도 설씨 부인을 데리고 굴포 마을에서 몇 년 살았어. 어느 때냐 하면은 원 막을 그 시기나 되겄지. 조선 중기 때 그 당시 나이로 봐서는 52세 정도나 되었던가. 원을 막을 때, 그저 사람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많이 사서 이렇게 쓰고 본래 즈그 집이 부자였닥 해(부자라고한다). 농토가 많은 부자였닥 해. 

     

    큰 벼슬도 하고 본관은 물론 해남이고, 살면서 아마 몇 년 걸쳐서 끝났을 거라 봐. 한 해 두 해가 아니라 그 당시 제주를 많이 다녔고 진도도 많이 다녔어. 자기는 저수지할 때 1년이나 2년 하면 일이 끝나겠지 했는데 많이 걸린께 고통 많았겠지 돈도 많이 들고. 배를 타고 굴포에 와서는 앞에 멀리 있는 산인데 여그서는 큰 산 여귀봉쪽 산인데, 그 산 높은 지역에서 묘를 쓰는 것 같아 보이는데 그 자리가 자기가 보았을 때는 아주 좋은 자리 같아 고산 윤선도가 풍수지리에 능한 사람이여 문학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저 자리가 고관대작 자리인데, 어떤 분이 저기다 묏을(묘를)쓸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저 집안이 보통 집안이 아니겠다.’ 거기 가봤다고 하는데 실제 가봤는지 안 가봤는지 확실치는 않아 어른들 말만 그래. 가서본께 큰 바위가 있고 묏자리가 좋아 “저 바위가 먼 바윈고?”한께. 일한 사람이 “벌바위라 합니다.”“벌바우가 아니라 먹통바위 같이 보인다.” 하도 자리가 좋아서 큰 사람이 나올 것 같은께, 걍(그냥) 변통 없는 말로 말했다는 것이여. 그라고 지났는데 그것이 사실일까 아닐까 사실을 확인 안 해봤어. 어른들 말만 들었지. 

     

    최근에 와서 김병삼씨가 육군 소장을 지내갖고, 그 분이 체신부 장관까지 했어. 그란께 여기 있는 어른들이 하는 말이, 나는 그때만 해도 젊었제. “대처 고산 윤선도가 풍수지리는 참 박사다! 박사여! 그 당시 하는 말이 고관대작이면 즈그들은 요새 같으면 옛날에 대감이나 지금 같으면 장관이라 생각했는데, 체신부 장관 된 것 본께 대체 맞기는 맞다. 잘 본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내가 들었어. “벌 바우라고도 하고 먹통바우라고도 해.” 그래서 그 후로는 상만, 중만, 송월 저쪽 사람들이 거그를 ‘먹통바우’로 불렀어. 그런 이야기만 들었어.

  • 애기 업은 무당을 도깨비로 착각하다

    조사장소 :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남선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6.9

    조 사 자 : 김명선, 윤홍기

    제 보 자 : 강진간(남,79세, 1939년생)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기 전 이제. 지금부터 60년 전이라고 보면 돼. 그 시절에 그때만 해도 정월 초믄 무당들이 이집 저집 다니면서 굿을 많이 하고 점치러 다니고 그랬어. 병이 나도 그들이 와서 굿을 하고 그때도 이 지방에서는 무당들이 직업을 그걸로 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어. 무당을 굿쟁이라 할까? 당골이라 할까? 한 분이 전문적인 굿쟁인데. 여그서 굴포서 굿을 하러 갈 때 젊어서 애기를 낳아갖고 애기가 젖을 먹은께 등에 업고 굴포리에 가서 굿을 했어. 하고 난께 12시가 넘거든 새백이(새벽이)되아. 정월 초라 깊은 겨울이여. 

     

    애기를 등에 업고 즈그 집으로 가. 즈그 집이 어디냐 하면 남동이여. 굴포서 남선을 지껴서(지나서) 남동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남선서 남동을 가는 그 길이, 산길이 한2킬로는못되고 1킬로는 넘고 2킬로 가까이 되었닥 해. 동녕개에서 남동으로 가는 옛날 산길이 지금은 버스가 다니는 길이라 괜찮은디 그때는 사람만 걸어 다녔어. 산속이나 다름없어 그런데 그 골창(골짜기)이름이 원골인가 할꺼여. 아주 거그가 아주 도깨비도 잘나고 그건 몰라 우리가 말로만 들었은께. 

     

    원골 이름이 아주 악하다(魄)는 뜻일 것 같아 원한이 있다는 ‘원(怨)’자. (그골창이) 사람도 더러 죽고. 등에서 자던 애기가 깨어나면 등에서 울거든. 가다 더러 울고, 울고 밤이 깊어서 새백(새벽)이 되었는데 애기가상당히 울면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달기면서(달래면서) 가고, 또 안 울면 그대로 가고 그 산길을 갈 때 ‘여가 무선 자리다’ 곧 무섭다는 것을 자기도 생각하고 가지. 날은 디게(매우) 어둡고 눈은 하나씩 떨어지고 상당히 추운 날인데 구름은 꽉 쪄갖고(가득 차서) 앞이 잘 안보이제. 

     

    그 당시에 즈그 동네 남동 사람이 나이도 지긋한데. 우리 동네다 딸을 여워갖고(시집보내서)딸네 집에 왔다가 술을 거나하게 먹었어. 술을 거나하게 먹었어도 즈그 집에 간다고, 즈그 딸은 못 가게 해도 쌀쌀(천천히) 간다고 가는 길이 무당하고 거의 같은 시간에 나섰든가 그 분은 100미터 이상 앞으로 가지고 애기 엎은 무당은 100미터 이상 떨어져서 가게 됐던 모양이여. 긍께 인자 뒤에서 애기 울음소리가 나거든 술 먹은 영감님이 가만히 생각하니 ‘거그도 무선 자린께 자기도 거그가 무선 자린데 도깨비가 틀림없이 났다.’

     

    옛날에 즈그들이 알기로는 도깨비가 나서 사람들이 죽고 그랬는데 나도 이것 큰일 났다. 술 먹은 김에 찌벅찌벅 가는데 길은 사납고 자빠지기도 하고. 갈라고 하지만 술을 먹어서 빨리 못 가고 애가 터져. 그런데 애기 울음소리가 차차 가까워지거든 더욱 무서워서 환장할 일이제. 그래서 아무리 빨리 갈라고 해도 발걸음은 잘 안 떼어지고. 가다가 애기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진께 인자 겁이 나고 어쩌고 하다가 넘어져 갖고 채 일어나지도 못하고 일어날려고 하지만 잘 안 되고 그란께, 그라고있는 순간에 애기 울음소리가 무지무지 가까워져. 

     

    근디 이 무당은 전혀 모르제. 앞에가 사람 있는 줄 전혀 모르제. 무당은 빨리 갈라고 애를 쓰고 가는데 한참 가다 사람 같은걸 볼바(밟아)갖고 넘어지면서, “워매 이것이 뭐시냐?” 그랑께 넘어져 갖고 있는 영감도 

    “지금 뭔 일이야?” 소리를 지르거든. 깊은 밤중이라 둘이 다 무섭던지 거기서 둘이 정신을 잃어갖고 소리 지르다 알고 본께 즈그 동네 사람들이여. 그렇게 무선 꼴을 당했단 것을 실제 우리들이 들어보고 그런 세상에는 무서운 일도 많이 있었어. 미신을 너무나 믿기 때문에 의지하고 살다가 그런 꼴을 당하는 걸 봤어.

  • 학이 춤추는 형상의 무학재

    조사장소 :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번답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6.30

    조 사 자 : 김명선, 윤홍기

    제 보 자 : 박청길(남, 78세, 1940년생)


    큰 마을 뒷산이 학이 나래를 펴고 춤추는 모양이여. 그래서 옛날 어른들이 ‘무학재’라고 이름을 붙인 모양이여. 남선 연혁비에도 보면은 무학재라는 문헌이 나와. 가다가 큰 마을 연혁비가 세워졌으니 읽어 보면 알겠지만, 그 연혁비도 내가 고희 기념으로 내 시비하고, 또 우리 형님이 남선마을 연혁을 만들려고 계획을 세웠었어. 근디 그 형님이 결국 자료 발굴하다가 아파서 돌아가셨어. 그래서 못하고 말았는데, 그 뒤로 내가 시비를 계획하면서 다른 마을도 보통 가보면 연혁비가 세워졌는데, 우리 마을에 더구나 ‘내 욱에(위의) 형님이 계획했던 연혁비를 내가 다시 세워야 되겠다’ 그런 뜻을 가지고 다른 마을로 자료 발굴도 다녔었고 문헌에서 찾아보기도 하고 그래서 연혁비를 내 시비와 같이 세웠어. 

     

    역시 우리 마을 뒷산 형국이 학이 나래를 펴고 춤을 추는 그런 형태여서 아마어른들이 무학사, 무학재라고 불렀던 모양이여. 무학재로 올라가자면 길 오른쪽으로 큰 산 고랑이 있어. 산골물이 흘러 그란데 그 물은 큰물은 아니어. 많은 물은 아닌데 졸졸하니 작은 산골인데도 그 물이 금년 같이 가물 때도 물이 마르지를 안해. 그란데 그 물은 무학재 올라가는 바로 길옆에 가 있어. 무학재가 큰 무학재 있고, 작은 무학재도 있고 두 개여. 마지막 올라가면 그것이 큰 무학재고, 보통 우리가 말하는 작은 잔등이라는 데가 작은 무학재여. 

     

    작은 무학재 거기는 절이 있었어. 그 절이 무학재에 있기 때문에 무학사였어. 그란데 그 절이 크냐 적으냐 하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어. 어른들로부터 구전해 오는 말을 들었을 때 절이 있었다는 것만 내가 듣고 있었어. 그러니까 그 절이 있기 때문에 금년 같은 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은 그런 좋은 샘이 있었고, 겨울에도 그 샘물은 얼지를 안 해. 그란데 또 그 샘물이 깊지도 안 해. 바가지로 뜰 정도로 사람들이 손으로 끌쩍끌쩍 해놓으면 거가 항상 물이 고여 있어.

     

    그란데 아무리 더운 여름에 가도 물은 아주 시원해. 요새 냉장고에 저장해 놓은 물처럼. 그라고 또 아주 추운 겨울에 가도 그 물이 욱에는(위에는) 얼었지만 그 얼음을 깨면은 그 밑에는 맑은 물이 있어. 우리 어렸을 때는 무학재 주변에서 소를 많이 방목 했었거던. 아침에 가서 풀 먹이고 조반 먹으로 올 때 잡아서 매 놓고 올 때도 있었지만은 들녘에 곡식이 없을 때는 소를 방목해불어. 지금은 산이 울창하기 때문에 방목할 수 없는데, 해방직후로 우리나라 좋던 산이 벌목해가지고 민둥산으로 되어 있을 때는 방목을 했어. 

     

    그때 소 먹이로 다닐 때도 항상 그 물을 먹었었고, 또 땔감 나무를 하러 다닐 때도 무학재 그 산에서 해 오는데, 나무하러 갈 때, 또 목마를 때는 거그서 먹고 오고,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나 또 여름에 더울 때나 그 샘물로 세수하고 했어. 그 샘물이 목욕할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지는 않아.

  • 달이 잘 보이는 근월제 서당

    조사장소 :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번답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6.30

    조 사 자 : 김명선, 윤홍기

    제 보 자 : 박청길(남, 78세, 1940년생)


    우리 동네가 서당이 있었대. 연혁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까 ’근월제’라고 있었어. 지금은 그 분이 돌아가시고 안 계신데 우리 동네 최고령자였던 그분이 근월제에서 수학을 했었대. 우리 장형도 그때 수학을 했었고. 또 백동, 굴포, 신동 분들이 우리 마을에 근월제 서당에 와서 공부를 했다는 거여. 당시에는 백동, 신동, 굴포에는 서당이 없었던 모양이여.

     

    내가 지금 생각해보아도 백동서 갑부집 아들이 남선에 와서 우리 장형과 같이 수학을 했었대. 그런데 그분은 우리 장형보다 연세가 훨씬 높은 분이여. 그리고 신동서 오신 분도 우리 형님하고 같은 연배고, 굴포에서 오신 분은 우리 형님보다 연세가 높은 분이고 그랬어. 나는 서당 갈 형편도 못 되고 나이도 어리니까 못 갔어. 우리 형님 말씀 들으니까 백동 양두익씨라는 분도 우리 마을에 와서 수학을 했고, 신동 강문규씨도 했고, 굴포 조만인가 찬인가 이런분 들이 수학을 했닥 해. 

     

    그분들은 우리 형님보다 연장자여. 아마 우리 형님이 최연소자였던 모양이야. 신동 문표씨 하고만 같은 연배고 나머지 백동, 굴포 분들은 우리 형님보다 더 연상이여. 이것만 봐도 아마 이 근동에서 우리 남선에 최초로 서당이 생겼으니까 나는 그때 서당을 못 다녔지만서도 우리 남선의 자랑이여. 

     

    다른 마을보다 조금이라도 한발이라도 앞선 곳이 아니냐 이런 자긍심을 갖게 돼. 그런데 그 이름을 어째 근월제라 했냐? 이것은 어른들한테 물어봤더니 나한테 가르쳐준 사람이, 근월제가 ‘가까울 근’자고 ‘달 월’자 ‘집 제’자로 나한테 전달한 사람이 이 근월제라는 이름을 어느 분이 지었는지를 자기도 모른대. 서당 다니면서 훈장한테 글만 배웠을 뿐인데 글을 배우면서 동생 말 듣고 생각해보니까, 왜 하필이면 근월제라고 서당 이름을 불렀을까? 직접 훈장 밑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왜 서당 이름을 근월제라 했는지 지금 같으면 물어봤을 텐데 안 물어보아서 굉장히 아쉽네. 

     

    이 서당이 남향으로 되어 있어. 근월제 서당을 할 때는 내가 어려서 기억이 안 나는데, 거기서 서당을 계속하잖아. 내가 철이 들었을 때는 그 서당이 없어졌어. 그란데 그 서당 건물이 남향이기 때문에 평야(대개) 서당은 주경야독이라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 많이 공부하잖아. “옛날에 낮에 공부하는 사람이 있겠지만은 건물이 남향이기 때문에 밤에 공부하러 가서 보면은 달이 잘 보이거든. 서당이 남향으로 앉아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근월제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네.” 이렇게 말해 주었는데 확실하지는 않아.

  • 망자가 탄 가마 상여와 상여집

    조사장소 : 진도군 임회면 삼막리 하미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6.12

    조 사 자 : 김명선, 윤홍기

    제 보 자 : 하영호(남, 73세, 1945년생)


    요새는 꽃상여 있고 그런데 그 전에는 나무로 곽을 짜갖고 다 꽂아 였어요(넣었어요). 다 꽂아여갖고 고런데다, 이케 3층이나 해갖고 꽂아 였어(넣었어). 그 놈을 이런 커나큰 나무 상자에다 또 다 끝나면 고놈 다시 가져오고. 그런 식으로 하고. 

     

    상여집은 벌거리에서 우징칭하고(우중충하고), 요새는 그런 소리 하면 또깨비 잘 나는 데로 무서서(무서워서) 그 조태는(곁에는) 아무도 안 갔고, 상여집을 그때 상여 가질러 갈라고 그라면 누가 먼차(먼저) 들어가는 이도 없고, 한 뻔에 우~ 하니 들어갔제. 먼저 들어가서 갖고 오는 사람이 없었어, 무선께 또깨비 난다고. (조사자 : 상여의 크기는 어느 정도 되었나요?) 

     

    상여는 그 놈만 여고(넣고) 상여집이 거가 밑에 상여를 밀란께, 이런 퉁건 [양손 엄지와 중지로 원을 만들며] 열채, 이 나무가 저기서 여기까지나 질꺼여.(길다) 그런 때는 사람이, 요새는 사람이 자동으로 해서 저기서 사오면 사람이 열인가 야달인가(8인)들어갈꺼여. 그란데 그런 때는 사람이 많이 미고(메고) 그래 나서, 그 진 놈 있제 옆에, 또 하는 놈 있제. 옆에 또 걸치는 놈 있제, 그란께 상여가 움먹해도 이상(제법)아주 컸섰제, 이상. 그때는 상여를 사람 열둘이나 열너니(열넷이)나 멧던가? 열둘이나 열 너니 였을꺼여. 

     

    우리 동네 같으면 지원이 하선생 아범 멧(묘) 쓴 그 옆에 거가 음침해갖고 생여집 있는 데로 잘 안 갈라 했어. 그런 때는 또깨비도 많이 나고. 얼름해서(어둑해서) 비올라하면 인불이 많해갖고(많아서) 동네 문중 선산 같은 데는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 또깨비불이라 하고 상여집 조태를(곁에를) 누가 갈라 고를 해야지. 암도 안 갈라 하제, 무선께. 어느 동네도 다 그랬을 거여. 

     

    그런 때는 의무적으로 누구나 초상나면 그때가 상부상조 잘했제. 요새는 누구 결혼식 간다, 큰아들 어디 승진했는께 간다고 나가분께 할 수 없이 궐을 받았는데 인자는 세대차이가 난께 지금은 상여도 암도 안하고 얼른해서 화장해다가 즈그 식구까지 와서 묻고 가. 

     

    상여집은 양수씨가 이장할 땐게 암찍해도(암만해도) 한 4~50년 될 건데. 상여를 만들 때 상여판자에 닭, 오리, 새, 꽃 등을 전부 찡기는데(꽂는데) 거가 좀 먹어불면(꽂은 곳이 부서지면) 안되아. 절간에서 채색한 것 같이 거기서 다 오리면 오리, 뭐 다 기래갖고(그려가지고)고놈을 다 찡겠어. 그라면 어른들이 어디는 뭣 붙이고 어디는 뭣 붙이고 시킨께 하제. 동네가 어디 가던지 시키는 사람 있제. 우덜은 째끔해서(작아서) 모르제. 그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그런데 몰라. 상여는 한번 칠해갖고는 끝까지 써 불었을 꺼여. 닮아지면 닳아진 대로 써불었을 거여. 

  • 등등매 잔등과 어둠굴 잔등

    조사장소 : 진도군 진도읍 동외리 고산 서예원

    조사일시 : 2017.8.24

    조 사 자 : 윤홍기, 김명선

    제 보 자 : 하영호(남, 79세, 1939년생)


    ( 조사자 : 동네 잔등에 대해서 얘기해 주세요.) 

    이것은 내가 본 것도 아니고,마을에서 이렇게 구전으로 전해온 얘기에 따르면, 하고야리에서 보전으로 들어오는 고개 이름이 ‘등등매 잔등’ 이라고 그랬는데, 그 등등매 잔등이 하도 높으니까 일본놈 때 거기를 인제 맥을 짜르는데, 그 맥을 상당히 깊이 짤른거여. 짤랐는데, 바로 그것을 짜르던 그해, 멀쩡한 사람들이 상고야리의 모인인데, 그분이 아주 미남으로 잘생겼어요. 그분 얼굴을 내가 알지. 그런데 그분이 그냥 벙어리가 돼버리고…. 

     

    또 상보전 마을에 똑같은 나이에 그분도 벙어리가 됐다고…. 그거 어떻게 그렇게 멀쩡한 사람들이 두 마을에서 연관된 동시에 이렇게 벙어리가 됐냐? 그것 참 그것은 신비스런운 일이 아닌가? 그래 가지고 그 혈맥을 타고 더 가면은 지력산에서 내려오는 혈맥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인제 보전 역산이 되야. 그것보고 남대문이라고 그라는데, 그 고개를 넘어서 상보전 사람들이 상당히 경작지가 많았지, 밭이. 그런데 거기도 너무 높으니까, 그 잔등이 하도 높으니까, 그때는 그 뭐냐 80년도 후반 아니면 90년대 초, 그때 우리 마을 사위가 그 공병대 대장으로 진도에 왔었어. 

     

    그래가지고 군인 도자(굴삭기)로, 군인 도자를 가지고 그것보고 ‘어둠 굴 잔등’이라고 그랬어. 어둠굴이라는 말이 인제 ‘어둘 암(陪)’자에다가 ‘골 곡(谷)’자 해서 ‘암골(暗谷)’인데, ‘항상 어둡다, 깊다’ 그 말이지. 

    그래 인자 그 잔등을 낮에 짜르는데, 우리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계속 우리 마을 사는 내 바로 한 살 아래 동생이 있는데, 그 동생 말에 의하면. 지가 현장에 있었다는 거여, 그 공사 현장에. 그 도자가 잔등을 짜르는데 멀쩡한 대낮에 그 우로만 구름이 그냥 잔뚝 쌓이더라는 거야. 

     

    그러더니 두 번인가 세 번째 미니까는 억수같이 소나기가 쏟아지니까, 그 군인이 공사 못하것다고 그냥 엔진 꺼버렸다 해. 그래가지고 그 뒤로 인제 한참 있다가 또 밀었다고 그런 이야기가 있어. 그것이 어둠굴이 상보전에서 고야리 저 수지로 넘어가는 거기가 ‘어둠굴’이라고 그래.

  • 죽은 총각을 묻은 성재 잔등

    조사장소 : 진도군 지산면 심동리 하심동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8.24

    조 사 자 : 윤홍기, 김명선

    제 보 자 : 허경환(남, 69세, 1949년생)


    (조사자 : 그 성재에 대해서 말씀 해보세요.) 

    성재. 그 가학 넘어 가자면, 아까도 얘기 했지만 성재 잔등 짤른 자리 안 있습니까? 옛날에는 돌아가시면 젊은 총각이나 처녀는 길 옆에다 묻어요. 그런 때는. 거기가 가학 OO이 형님, 00씨다고 그 형님이 결혼 안 하고 상사병으로 죽었을 거이여. 그래 거그다 묻혔는데, 그 전에 박은부씨라고 그분이 도의원도 하시고 면장도 하시고 그랬어요. 그분이 면장하실 때 그런 때는 차가 없기 때문에 자전거로 다녔어요. 

     

    자전거 타고 다니든 시절인데 인자 퇴근 시간이 늦어져 불면, 그 무서워서 거그 가서 봤든 모양이여. 그 넘에는 한씨라고 살았어요. 그분 보고 꼭 보내다 주라고, 허한씨 보고 꼭 보내다 주라고, 글 안하면 거기서 주무시고 가고…. 또 그 후로는 우리 장인영감이 그 조카 돼요. 가학 갔다 밤에 오는데 봤었던 모양이여. 그래갖고 그 한씨네 집이 그 저수지 안에 조그만 가게 집이였어요. 가게 집이기 때문에 얼른 거기 들어가서 술 마시기 좋고, 얼른 사람 뭣하기 좋고 그라기 때문에 도로변이라 거그를 들어가서, “어야,조카네 나 좀 데려다 주게, 우리 딸네 집에 좀 데려다 주게.”“어째라?”“안 보이는가? 쟈가 안 따라오는가?” 

     

    “뭣이 따라와라.” 그랑께, “안 보이는가? 송호리 집으로는 못가고, 우리 딸네 집으로 잔 데려다주게.” 그래서 내가 저수지 안에서 남의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데, 거기를 밤에 모시 고왔더라고…. 아홉 시 반, 열 시. 그 무렵에 모시고 왔데. “가학 갔다 오시다가 혼자는 못 가신다 해서 요리 모시고 왔네.” 그래 모시고 와갖고는 ‘자가 나 뒷 따라 온다’고 그래갖고 거그서 밥 해갖고 갖다 막 허치고 했어. 그란데 지금도 즈그 동생은 밤에 거기를못 다녀요. 인지리서나 십일시서나 같이 저하고 놀다가 거기까지 보내다 줘요. 성재까지 보내다주라 해. 보내다주면, “가게 오게.” 얘기 말도 없어. 거기까지 가자마자 번개같이 가버려 그냥. 

     

    번개같이 가불어 아주. 그랑께 갸도 봤던 모양이여. 그라고 차도 한 대 망가졌어. 인자 봤었던 모양이제. 속력으로 달려가는데 차가 다행히 우쪽으로 붙었던 모양이제. 꼬랑으로 들어가 불어갖고, 꼬랑으로 들어가 분지 얼로 들어간지도 모르고 계속 악세레타만 볼 분께(밟으니까), 차가 다이야가 완전히 다 망가져갖고, 차 한나 폐차시켰어. 무서워갖고….

  • 열녀비를 세운 사연

    조사장소 : 진도군 지산면 관마리 관마마을 경로당

    조사일시 : 2017.8.16

    조 사 자 : 윤홍기, 김명선

    제 보 자 : 윤영웅(남, 78세, 1940년생)


    옛날에 이 부락에 광산김씨 한 분이 나가서 쩌그 전라북도 전주 근방에서 살았단 말이여. 거기 살면서 앞 못보는 여자를 만나서 둘이 결혼해서 사는데 딸 하나를 났단 말이여. 딸이 한 뎃살 먹었을 때 영감이 죽어불었어.

     

    드 딸을 데리고 인자 남편 고향이라고 여기 찾아 왔어 그 봉사가. 그래 가지고 여기 살면서 눈 못보는 여자가 다시 올라가서, 그 영감 뼈를 남편 고향에다 묻는다고 여기까지 모시고 와서, 관마리에다 장사 지냈단 말이여. 그런데 그 할머니가 열녀가 보통 열녀가 된 것이 아니여. 

     

    순서가 조금 바꿔졌구만, 그 할머니가 밴(배운) 것이 옛날 점하는 삼통 흔들어서 점하는 것을 배(배워)가지고 점을 하러 다니고, 굿이랄까 그것보고 뭣이라 하드라 점문같은 것을 하려 다녔어. 그런데 저그 지산면 길은리 부락에 가서 점문을 하고 오다가, 고야리 길에서 젊은 남자가 인자 좀 건들라고 뭐 연애하자 했던 모양이어. 

     

    그래 집에 와서 부정한 손이 옷을 닿았다고 그 옷을 불태워불었어. 그런 할머니란 말이여, 늙어 죽도록 시집도 안 가고 열녀가 보통 열녀가 아니제, 그 할머니는. (조사자: 비석은 누가 세웠나요?) 딸이 하나 있었단 말이여. 그 딸이 지금 살아계시면 107살 되겠네. 돼지띠라서 우리 어머니와 같은 나이라 내가 알어. 그 딸이 그 열녀비를 세웠제.

  • 중업바위와 쌀 나오는 구멍

    조사장소 : 진도군 지산면 심동리 하심동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8.24

    조 사 자 : 윤홍기, 김명선

    제 보 자 : 허경환(남, 69세, 1949년생)


    여기 중업바위를 여기서 보면, (조사자: 중업이 무엇인가요?) 중바위여요,중바위를 그 중이 거기서 살았다 해가지고, 옛날말로 중업이라 그래요. 거기 가면 중업이라 그래요. 지금말로는 중바위. 그란데 거기서 중이 한 분이 살았다는 흔적이 어르신들 말들어 보면, 가보면 움먹해가지고 가운데가 움먹해. 그람 거기다 방독을 놨던 혼적이 있다고 해, 옛날에 거기다 방독을 놔갖고 산 흔적이 있었는데, 그 방독이 어째 없어 졌느 냐? 

     

    옛날에 그랑께 지금은 수리시설이 좋습니다만은 그때는 수리시설이 안 좋기 때문에 비가 안 왔다 그라문 나무 갖고 산에 올라가서 불 피고 그랬아 또 부인네들, 나이 자신 어른 함씨네들, 막 중간40 50대 그런 사람들이 여자들이 날 궂이를 하면 비 온다 해갖고. 명산에 묘를 쓰면 비가 안 온다 해가지고 묏 파러 댕겼어. 

     

    묏 파러 댕기면서 거기를긁어 파보니까, 거가 인자 움먹한 방독 같은 것이 있고 그랑께 여가 시체가 있지 않느냐? 해골이 있지 않느냐? 그래갖고 거기 있던 방독이고 흙이고 파갖고 전부 다 버려 불었다 해. 옛날에 중이 한사람 거기서 살았던 거지. 염불하고 있던 중. 한 스님이 찾아왔던 모양이여. 한 스님이 찾아와서 인자 먹을거리를 해야 될 텐데, 자기가 사는 하루에 한 번씩만 나오는, 그 쌀 한 사람만 먹을 양만치 나오는 거가 구멍이 있어. 

     

    구멍이 있는데, 인자 스님이 와서 밥을 좀 더해야 할 것 아닙니까? 밥을 더해야 할 텐데 쌀은 고만치 밖에 안 나오고 한사람 몫만 나오고…. 그란데 쌀을 더 나오라고 그 부지갱이, 옛날 말로 비땅으로 그 구멍을 쑤신 모양이여, ‘더 나온나 그라고. 쑤시니께 쌀은 안 나오고 피만 나왔다고 그래…. 지금 올라가서 보면은 그 구멍이 있고, 그 빨간 자리가 있아 그런 얘기가 있아 

  • 관매창이 관마리로 바뀐 이유

    조사장소 : 진도군 지산면 관마리 관마마을 경로당

    조사일시 : 2017.8.17

    조 사 자 : 윤홍기, 김명선

    제 보 자 : 윤영웅(남, 78세, 1940년생)


    원래 관마리가 '말 마’자 가 아니라 ‘매화 매’자여서 관매창이라 했어. ‘창고 창’자 해서‘관매창’인데, 어째서 관매창이냐 하면은 지산면 그랑께 진도 말 키기(말 키우기) 전이여. 세금 받을 때 지산면 세금을 전부 곡식을 받아 갖고 관마리 여기 회관 된 밭, 회관도 일부가 원래 밭으로 따라 갔어. 이 회관 자리도 요 밭이 한 열 마지기 쯤 되아, 이 밭아 이 밭에다가 모두 모테서 재(쌓아) 놓고 거둬 갖고 배로 실어 냈제. 요 밑에. 심일시(십일시)밑에서, 옛날 그랬다고 그라던만. 그래서 ‘창고 창’자 해서 관매창이여. 

     

    (조사자: 관매창에서 관마리로 왜 바꿨나요?) 

    아! ‘매화 매’자? 그 당시 길은리, 지산면 길은리 분하고 관마리 그 노인 한 분하고 사이가 나빠 갖고 서로 라이벌이 되아갖고 길은리 그 분이 면장을 했단 말이오. 면장 하면서 관마리 그 분 미워라고 이 ‘매화 매’ 자를 ‘말 마’ 자로 고쳐 불었단 말이오. 그란데 옛날 책을 보면 이 ‘매화 매’로 되아있어, ‘말 마’자가 아니라. 

     

    (조사자: 관마리 할 때의 관은?) 

    관은 그 옛날 ‘매화 매’자 쓸 때도 ‘볼 관’자 썼어. 똑같은 ‘관’자. 그라고 ‘매’ 자를 ‘말 마’로 고쳐 불었단 말이오. 말 킨다고. 

     

    (조사자: 창은 무슨 창을쓰나요?) 

    창은? 관매창이라고 하다 인자 옛날에 관마리로 했어. 그란데 사람들이 부르기를 관매창! 관매창! 그랬아 또 게미창이라고도 하제, 말을 살짝 돌려서.

  • 용동은 여의주를 가진 용 형국

    조사장소 : 진도군 지산면 길은리 용동마을 마을회관

    조사일시 : 2017.7.15

    조 사 자 : 윤홍기, 김명선

    제 보 자 : 박양수(남, 73세, 1945년생)


    (조사자 : 동내마을 유래부터 애기해주세요.) 

    우리 마을 용동마을 유래를 얘기할려면,애당초에 이 지역에서 인자 우리 마을은 길은리가 행정부락이여. 길은 하고 용동 요리가 길은리 소관인데, 우리 애당초 이름이 ‘용골’이래. ‘옹골,용골’이라 했어. 용동에 처음에 와서 마을을 설립한 사람이 저 지금 상보전 김형오네 아버지, 이름은 잘 모르것구만. 그분이 설립자인데, 인자 용동 모퉁아리서 살았어. 

     

    이름이 용동이라 해서 행정단위로 마을 이름을 고칠라고 보니까, 원래 용골이였는데, ‘용 용’자에다가 ‘골짜기 동’자에다가, 용동이라고 인자 개명이 되야서 그랬어. 우리 마을은 인자 용동이라는 지명이 어째서 그라냐면, 지명이 용의 뭣으로 봐서 형체와 같다든만. 우리 마을이, 용의 형국이 그 용머리도 순전히 바위고 형체가. 

     

    또 용은 여의주가 있어야 형국을 갖췄다는데, 그 앞에가 쪼그만한 보리섬이라고, 바로 거기가 조그만 보리섬이 있어서 그것보다 여의주 형국이라고 그래. 그래서 그 용은 여의주가 있어야 용의 형체가 되는데, 옛날에 그 지명을 지은 사람들이 그래도 어느 정도 선견지명이 있어갖고 지어서 그런대로 용동이라는 지명이 맞다. 그래갖고 용동이라 했어.

  • 3구로 가신 당할머니

    조사장소 : 진도군 조도면 가사도리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10.09

    조 사 자 : 박주언, 김현숙

    제 보 자 : 문형주(남, 80세, 1938년생)


    (조사자 : 옛날에 당제 모시는 것 기억 하시죠? 당제. 거리제라고 했습니까,뭐 라고 했습니까. 여기서는?) 옛날은 여기 거리에서 안 모시고 개인집서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이 욱에가(위에) 있었어. 그란데 샘, 거그서 목욕하고 물을 길어가 밥하고 그랬거든. 그란데 이 동네가 당이 없어져서 밥도 안 놓고 해서 그런가, 뭔 이상해. 이 동네가.


    (조사자 : 할머니 당산이죠?) 예, 그래갖고, 당할마니가 저그 3구로 가불었다고, 할뭄이(할머니가) 저 3구로 가불었다고, 여기서는 야단이고. 아이구, 지금 사람들이먼 그런 거 할라고 해요? 안해요. 3구. (조사자: 3구요? 아, 돌목해수욕장 있는 거기요?) 에. 거기여, 3구로 당할머니가 글로(거기로)가버렸다 그래요. 예, 그라대.


    (조사자: 거기가 잘 살게 되어서 그런가요?) 3구가 인제는 좋게 되아불었어. 당할머니가 그렇게 갔기 때문에 잘 살게 되었다고. 옛적에는 이 당. 당지(당제) 모시고, 저기 1구, 2구, 3구, 저 건네는 1구여. 거기가 아주 곤란했어. 그래 명절 돌아오먼 품, 한 되, 두 되 없응께 품을 내러와(빌리러와). 없을 때는 한되, 두되 곡석을(곡식을) 내러와. 그라먼 있는 사람이 그걸 주고 이자를 걷었거든. 그란데 지금은 외려(되려)큰 마을이 곤란하게 되았어. 바꽈지게 되아불었어.

  • 음력 시월에 모시는 산제

    조사장소 : 진도군 조도면 가사도리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10.9

    조 사 자 : 박주언, 김현숙

    제 보 자 : 문형주(남, 80세, 1938년생)


    당에다 제사를 모시먼 동네서 돈을 줘요. 하루 얼마썩 일당을 받고 한 일주일 동안 공을 들애(들예. 방금 말하대끼 거그 가서 목욕하고 물을 갖고 내래오는 거야. 거기 당샘에서 물을 길어다가 목욕을 거그서 하고, 물을 길어갖고 낼와(내려와요). 물을 길어가지고 갖고 와. 물은 갖고 와서 공을 들이제. 거기서 목욕도 하고 그 물로 집에 와서 공을 들이고 음식장만은 집에서 하고. 그 물 갖고. 

     

    사람 못 댕기게 금줄, 어린애 낳으먼 금줄 치대끼 딱 쳐불어. 부정 있는 사람은 못 들어가. 아니 추접한 사람은 못 들어가. 이치를 생각하먼 부정 탄 사람은 못 들어가. 제관을 한 명. 제관도 이렇제 생기를(생기복덕)모도 봐가지고 제관을 안 선정합니까? 금년에 누가 제관하먼 되겠다, 누가 되겠다 이렇게 뽑아가지고, 그란데 안할락해(안할라해). 

     

    그란데 자석(자식)없고. 그런 사람이 산제를 모셨제. 산제. (조사자: 정월보름날 모셨던가요?) 아니. 날을 받아. 시월달에 날을 받제. 음력 시월달에 날을 받아가지고 좋은 날로 봐서 시월달에 모시는데, 좋은 날로 개린다(정한다)그 얘기여. 그라고 산고(임산)나 들리고 어짜고 하머는 이 달에 ‘아, 한 열홀 남았다.’ 달 기 일을 보았을 때, ‘열흘나마 남았다’, 임신해갖고 애기 낳을 달 같으먼 피해. 저 2구나 3구로. 피 맴에, 부정탄다고. 

     

    (조사자: 이 동네 사람이 부정타면 다른동네서 제관을 했나요?) 

    여그서 했제. 그전에는. 그라고 지금은 1구와 2구 갈라졌제, 그전에는 1구가 이장 혼자 다 관리해불었제. 그란데 마을이 너무 커져서 I구와 2구로 되았제. 여가 한 삼백호 나므(나마) 되았어요. 섬은 섬이여도 삼백호 정도여. 섬은 섬이 어도 부촌은 부촌이요, 이 섬이. 돈이 그렇게.

  • 뒷발질을 잘해야 하는 고비끼질

    조사장소 : 진도군 조도면 신전리 신전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8.19

    조 사 자 : 박주언, 김현숙

    제 보 자 : 박정인(남, 76세, 1942년생)


    (조사자: 닻배는 어디에서 만들어요?) 

    옛날에는 자기 마을에서 많이 만들었어. 이 나무를 비어다가 옛날에는 나무가 하도 좋으니까. 고비끼 나무. 나도 고비끼질 많이 했소. 톱이, 이렇게 생긴 [반원을 그리며] 톱이 있어. 그라고 톱자루는 여가 있고, 끄터리(끝)에 이케 약간 홈이 있아 그 나무를 이케 톱을 쓰는, 이 한(하는)사람을 보고 ‘고비끼’라고 그래. 그란데 그 나무를 쓰는 폼을 보여주까? [일어선다]

     

    나무를 쓸먼은(톱으로 썰면), 이렇게만(한쪽 방향으로만)쓸먼은 길이 나쁘게 납니다. 뒷발질을 잘해야 되요. 뒷발질. 뒷발질. 얼른 알기 숴람게(수월하게) [메모첩과 볼펜을 들고 톱질하는 흉내를 내며] 나무를 쓸잖아요? [뒷발을 점점 원을 그리며 한 쪽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요롷게 들어갔다, 요롷게 나갔다, 요롷게 들어갔다, 요롷게 나갔다. 이렇게 해야 나무 질이 좋아. 나무결이 빤듯이 나오제. 

     

    나무가 요롷게 한쪽에서 계속 쓸잖아요? 그라머는 나무가 퉁. 먹어불 수가 있고 안 먹을 수 없어. 이 뒷발질을 잘해야 돼. 나도 고비끼질을 몇 년 해봤거든요?우리 배 짓니라고. 그래서 나무를 쓰는 데는 고비끼라고, 톱질하는 사람을 ‘고비끼’라 했어요. 내가 왜 고비끼질을 해봤냐먼, 내가 풍선, 화물선 그놈을 죽항리서 지었다 했잖아요? 그 나무를, 참나무 같은 것들을 [두 손으로 크게 한아름을 만들어] 이런 나무들을 갖다 쪄서 배를 지었어. 

     

    그래서 그 고비끼 톱을 사다가 이것을 하는데, 그건 얼마 안 쓰먼은 톱니가 이상하게 옹니로 요기가 이케 되었어. 그래갖고 톱을 쓰다가 닮아지먼은, 이 새다구(사이)를 이케 하면 택아리지게 생겼어. 그라먼 여그를 다시 쪼까 더 문대 먼, 한번 씩 문대고 나먼 아주 톱이 잘 나가고 매끈매끈 잘 나가더라고.

  • 개웅 물줄기로 고을의 길흉을 점치다

    조사장소 : 진도군 고군면 가계리 가계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5.6

    조 사 자 : 박영관, 박정석

    제 보 자 : 허광무(남, 72세, 1946년생)


    여기서 벌판 길이가 한 2킬로 정도 됩니다. 2킬로 정도 되는데 아주 옛날 먼 옛날에 봄 되고 4월. 5월 지나면 여름에 계절풍이 많이 봅니다. 한 9월까지 계절풍이 많이 부는데 그때 이케(이렇게) 만호가, 바다에서 살았던 그 조개를 사람이 먹지는 않았습니다. 먹지 않는 작은 조개륜데 그것이 한 3년 정도 되믄 자연폐사가 되야서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이러트믄(말하자면)큰 모래언덕을 이루었습니다. 그 모래언덕이 파도가 계절풍 때문에 밀려와서 그 높이가 일정하니 이케 반반하니 길게 밭처럼 있어서 장밭이라고 그렇케 이름을 지었습니다. 

     

    장밭에 다른 거는 없었습니다. 잡초, 풀하고 그 외 아열대 지방에서 잘 사는 순풍나무라고 하는 것이 주로 서식을 했었는데 지금 여기 향동천입니다. 향동천을 우리는 개웅(개울)이라고 합니다. 바닷물하고 육지 냇물하고 왔다 갔다 하는 데를 개옹이라고 했는데 이 개웅이 이쪽 아랫쪽 회동 쪽으로 내려오면은 나라에 또는 이 고을에 궂은 일이 생기고, 이 개옹이 저 웃쪽으로 가면은 좋은 일이 생기고 그란다는 유래가 있습 니다. 왜냐하면은 모래로 되야 있으니까. 

     

    향동천에서 흐르는 물이 범람할 때는 물 힘에 의해서 이것이 이쪽으로 바로 나갈 수도 있고 또 이것이 올라갈 수도 있고 그래서 뭐이라 하까 국가의 안위적인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물이 이케 회동 쪽으로 많이 밀려가면은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고. 또 저쪽으로 가면은 좋은 일이 생기고 그란다고 그런 유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기 마을 선착장 끝이 옛날 지명으로는 청룡 끝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풍수로 얘기를 할 것 같으면 이쪽 가인동 쪽을 우백호. 저쪽에 뫼봉, 쌀미봉입니다. 미봉이라 하는데 그 미봉 제일 끝을 청룡이라고 봤을 때. 거기가 청룡 끝입니다. 선인들이 청롬 끝이라고 얘기를 해가지고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좌청룡, 우백호, 그 안에 또 안가계가 있고, 또 장밭이 있었고 또 마지막으로 이 만호. 만호 인구가 먹고 살 수 있다는 이 풍요로운 바다를 좌청룡. 우백호가 이렇게 탁 싸고 지금까지 수산물이 풍성해가지고 여기 사람들이 다른데 시골보다는 농수산물이 풍요롭게 생산되는 바람에 쫌 생활이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도 우리 마을이나 요 주변 마을에는 외지에서 젊은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지금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탈농어촌 시댄데 말입니다. 오히려 지금 다른 마을보다 잘 사는 이런 마을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일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가 이 황금바다를 잘 관리하고 유지하고 오염시키지 않고 꼭 보존이 잘 되야서 우리 자손만대 아주 풍요를 노래할 수 있는 그런 좋은 곳이 되길 간절히 희망합니다.

  • 고성성터와 성안 샘

    조사장소 : 진도군 고군면 고성리 오일시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5.21

    조 사 자 : 박영관, 박정석

    제 보 자 : 곽채술(남, 88세, 1930년생)


    우리 마을 앞에 오래된 고성성터가 있습니다 이곳은 진도에서 최초의 공부였던 읍성터입니다. 이 성은 백제 성왕15년 서기537년에 최초로 진도읍성으로 세워진 성인데, 쭉 거그서 행정을 하다가 나중에 진도 읍이로(읍으로) 이사했는 데 그것은 세종 때로 건너가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세종대왕 때 진도가 고려말엽에 저 공도시에가 있었어요. 고려말엽에 통치, 그때 고려가 망할 시기가 되어 국력이 약하니까 국방이 허술해서 왜구를 다 막지 못하니까 진도가 텅 비게 되얏어요(되었어요). 

     

    관청을 지키던 병사들이 다 떠나버려 진도군민을 보호하지 못하니까 정부에서 쩌그 육지로 또 피난을 시켰어요. 해남이로(해남으로) 영암이로 모도(모두). 그 기간이 87년 동안에요. 그동안에 비었다가 다시 조정이 바뀌고 이조시대가 되야서 이조 국력이 회복되고 행정 질서가 잽히고(잡히고)국방력이 강해져서 세종시대에 읍에다 성을 다시 짓고 그리(거기)읍에로 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랫동안 이르트면(말하자면)고성이 진도읍성이었죠. 

     

    제일 첨부터 진도읍이로 이사 가기까지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여러 가지 명칭도 있고 지명이 있습니다. 제일 아쉬운 것은 그 성이 해방 후까지 완전히 형태가 남아 있었고 기초 돌도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방 후에 정부의 무관심과 행정의 무관심으로 방치해두니까 전부 지역 주민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도(모두)건축에 쓰고, 저수지 막는데 쓰고 이렇게 해서 다 없애졌는데(없어졌는데)지금 다소나믄(조금이라도) 있는 그 자리라도 문화재로 되얏쓰면(되었으면) 했는데 그리 안 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것을 문화재로 만들려고 고성 성지 보존위원회를 만들어서 활동했지만 아직까지 못하고 있습니다. 쪼금(조금) 서운한 것은 진도군에서 경지정리하면서 문화재 보호한다고 하면서 그 성을 전부 돌을 만들어 부렀습니다 또한 농민들은 농지내놔라 하고. 석도가 하나도 없이 성은 아주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단지 쪼금 남은 것은 고성초등학교 주위 성벽 한 30m 정도만 남아있지만은 그것이 문화재로 아직 지정이 안되야서 쪼금 아쉽습니다. 그것마저 없어질까봐 두렵습니다.

     

    고성에 따른 지역의 지명이 고성마을 옆에 사냥터라고 있습니다. 상당히 넓은 평지가 있었고 거기에 후박나무도 있고 그렇게 사냥터니까 옛날에 활쏘는 장소겠지요. 요샛말로 사격장이가 있었어요. 그리고 신리 저수지 옆에 관청들이라는 명칭이 있었는데, 거가 성에 일부 형(刑), 이르트면(말하자면)감방 같은게 있었던가 뭐 성에 따른 관청이 있어서 거가 관청들이라고 하는거 같애요. 

     

    끙께(그러니까) 거가 담도 뭐냐 쪽 그 산인데도 담이 쌓여있고 그런 것을 봤습니다만은 지금은 그 담이 있는가 없는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성안에 좋은 샘이 있었어요. 여그 초등학교 바로 옆에서 한 20미터 거립니다. 초등학교 담벽 한 20미터 거리에 있는 샘인데 그렇게 성내에 있는 사람들이 그 물을 먹고 살았겠지요. 그 샘이 아주 좋게 판석이로 꼭 나무로 깎아 만든 그 판자 같이로(같이) 그케 두께는 상당히 두껍죠. 그놈이. 

     

    그렇게 만든 판석이로(판석으로)좌우 전후를 막고 욱에(위에)두께까지 덮이개까지 판석이로 덮고 사람이 바로 두레박를 쓰지 않고 바가지로 이케 물을 떠서 쓸 정도로 그렇게 얕은 샘이지만은 물이 잘나서 있었어요. 그래 그 샘물로 성안뜰 논을 전부 농사를 짓고 살았지요. 그러니까 그 샘이 있다면 문화재랄까 그거이 참 유적이랄까 유물이랄까 그런 좋은 자료가 될 거인데 아쉽게도 경지정리 하면서 그 샘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또 무척 아쉬운 점이죠.

  • 금호도 숲속 암반 위에서 모시는 당제

    조사장소 : 진도군 고군면 금계리 금호도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4.26.

    조 사 자 : 박영관, 박정석

    제 보 자 : 양재복(남, 71세, 1947년생)


    당제는 우리 금호도 역사가 생긴 이래 언제 그걸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가 아주 철이 들기 전부터 어려서 초등학교 이전부터 그걸 계속한 것을 보몬 상당히 역사가 오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금호도 뒷쪽 북쪽에 천연 숲이 있는데, 그 숲에 이상하게 암반이 딱 깔려있는 거기에 항상 그 솥은 가져오지 않고 거기다 항상 엎어놔요. 그 솥을. 

     

    그래가지고 정월 초삿날 청년들이 전부 동원돼서 천막이나 텐트, 멍석 이런 집기 전부 가지고 가고 제관들은 정월 초하룻날부터 재계를 하고 집에는 금줄을 치고 일체 두문불출, 수신제계를 한 다음에 그날 3일날 저녁에 해가 짐과 동시에 산으로 올라가서 하룻밤을 꼬박 거그서 잠은 절대 잘 수 없고 꼬박 자다가 자정이 되면 여기서 징으로 신호를 해주믄 밥을 지어가지고 제사를 모시고 내려와요. 그것이 당젭니다.

     

    거기서 대개 하는 것은 마을의 무병과 풍년을 들기를 기원하는 거고 다른 얘기는 없다고 그래요. 간단하게 “마을 질병이 없고 풍년들게 해주십시오” 한다고만 그렇게만 빈다고 그래요. 풍년만 빌어요. 제대로 전부 한다고 하면은 농사도 여기가 밭이 한 780마지기 되거든요. 대게 농사풍년을 빌고 질병이 없기를 정월 삿날(사흘날) 저녁에 올라가서 사일날 새벽에 내려와요. 그래가지고 칠일 날 저녁에, 바로 하는 게 아니라 칠일 날 저녁에는 인제 여기 사장 회관 팽나무 밑에 사장에다가 텐트를 치고 제수를 마련해요. 

     

    그때는 풍습이 꼭 돼지를 잡아서 통째 듬북 넣서 큰 가마솥에 돼지를 삶아요. 그냥 산 돼지 잡아먹을 수 있게. 그래가지고 저녁 해질 무렵에 용왕제를 모시거든요. 그래 거기서 모시고 일부는 차를 가지고 여기 용왕바위라고 이 아래 바위에 내려가서 거기서 또 다시 모시고. 그런 다음에는 전부 둘러앉아서 마을 사람들이 전부 저녁식사를 한 다음에는 징, 꽹과리 모두 들고 사물놀이, 각 집을 다 돌아주면서 사물놀이 하고 마지막으로 여기는 제일 중요한게 식수였거든요. 

     

    그러니까 우물굿이라고. 우물도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여 우물이 한 십여군 데 되는데 마을 공동우물이 그 우물굿도 다, 그 우물에서도 풍악을 올리고. 그것이 인제 풍어제 겸 거리제라고 그랬어요. 우리는. 거리제에 ‘가’ 자만 써서 가제. ‘거리 街(가)'자. 그것이 인제 보면은 가제에서 용왕제 했어요. 풍어제 했어요. 그것은 풍어제였고.

  • 비를 점치는 팽나무

    조사장소 : 진도군 고군면 금계리 회동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5.7.

    조 사 자 : 박영관, 박정석

    제 보 자 : 용홍심(여, 90세, 1928년생)


    저 나무가 수백 년 된 나무라. 그랑께(그레나까) 저케(저렇게) 나이를 먹응께 저절로 안죽어부요(죽어버리지않소?). 저 나무 젊어서랑은 저 이파리에 풀이 한 번에 안 피었어. 한 번 피고, 두 번 피고, 시번(잎이 세번)피었어. 시번 피믄 인자 그런 때는 방조이(방죽이) 없응께. 

     

    팽나무에서 풀이 피어나면 그때마다 비가 오니까 물을 쓸 수 있응게 모도 또 심고 농삿일도 흐고(하고) 저것 팽나무가 풀 한 번 피면 비가 오고 또 뭐하고 또 두번 피믄 물이 없응께 비오믄 얼른 뭐하고 팽나무 피먼은 물이 몇 번, 비가 몇 번 오는지를. 안온지를 알았어요. 그란데 한뻔에(한번에) 인자 나무 잎이 싹 펴면은(피면) 비가 많아이 와서 전부 모를 하고 풍년이 들었구만요. 옛날에는 여가 세그룬가(세그루가) 있었다고 그러대요. 여 팽나무가 세그루가 나란히 있었다고. 시게(세 개)나란히 있었어요. 시게 나란히 있었는데 두 개가 죽어갖고 지금 주저앉아 부렀어. 쩌리(저쪽으로) 아. 주저앉아 부렀어. 저놈만 지금 죽어갖고 저케 저절로 까끔까끔(조금씩조금씩) 저케 둥그러지요. 인자 저것도 금방 자바지것소. 

     

    그 바로 밑에 대나무들이 있는데 옛날에 그 밑에는 집이 한 채 있었어요. 그것을 그 주인네가 그케 명일에는 설에고,보름에고, 추석에고 그런때는 그 팽나무 밑에다가 밥 차라(차려서) 갖다논 것입디다(갖다 놓았다고 그럽니다). 아 밥을 차라놓고. 잔뜩 인자 오래된 팽나문께. 아주 신령스런 팽나무구만요. 백년, 수백년 되얏제. 저기에 새싹이 한뻔에(한번에) 팍 피면 아 올해는 풍년들것다 그러고. 저거이 두 번 시 번 나눠서 피믄 모를 두 번 시 번 하고 그랬어요. 

     

    그러믄은 인자 비가 찔끔찔끔해서 그러것다 했고 그라믄 또 모를 하고 그랬어요. 물이 없응께. 요 우게 저수지는 막은지 오래돼야요. 한 이십년 될 것이요. 우리 동네는 물세도 안 물고 상수도 물 먹습니다. 요그 이 밑에 모도 몽리답들(바다를 매립하여 조성한 논) 거기는 저수지 물로 농사도 짓고 그라죠.

  • 뽕할머니의 기도

    조사장소 : 진도군 고군면 금계리 회동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5.7.

    조 사 자 : 박영관, 박정석

    제 보 자 : 용홍태(여, 86세, 1932년생)


    언제나 팔월 보름날에는 잡귀를 물리친다고 동네 호호 방문해서 그런 때는 기양(그냥) 돈을 내라 이라(이렇게)안 하고, 우리가 없이 살기 때문에 집집마다 댕기믄(다니면) 자기 집이 와서 무당을, 무당들이 하대끼(하듯이) 잡신을 몰아내고 행복한 길운이 온다 그래서 집집마다 댕김서 쭉 조상에다 물 떠놓고 그 조리중 하고 포수하고 안 있었든가. 굿치고(굿하고) 댕기믄 그 사람들이 막 비손하고(손모아 빌고) 뭐 포수쟁이가 총을 이케 쾡해고(쾅하고) 쏘면서 잡귀를 물리친다고 그런 놀이를 많이 했습니다.

     

    영등제 때도 딱 모도(모두) 모여가지고 바다에 저기여 농사도 풍년되고 바다도 해산물이 모도 풍족하니 그케(그렇게) 되라고 거그서 간단하니 비손하고(손모아 빌고) 그런 것을 했습니다. 영전이 농어촌 풍년해서 우리 모도 잘 살자 잘 살게 해주쇼 하고 기원을 했습니다. 바다 영등신한테 했구만요. 영전한테 그때는 그 뽕할머니라는 사람이 원래는 모도에서 살았어요. 전설에는 모도에서 살았는데, 그분이 흉년이 들어서 본데(본디) 모도에서 물이 갈라져서 회동이로 나와서 진도 와서 시주를 받아갖고 자기 손자들을 멕여 살릴라 한데(하는데) 건네(건너)올 때는 바다가 좋게 갈라졌어요. 

     

    그래서 무사히 우리 동네와서 진도 본도에서 시주를 해가지고 갈라한께(갈려고 하니까)막 태풍이 불데끼(부는 것 같이) 하고 파도가 쳐가지고 도저히 갈 수가 없어요. 영등이 자기 후손들을 자기가 시주한 것을 갖고가서 밥을 해 멕여(먹여)살려야 손자들이 살거인데, 태풍불대끼 갑자기 바다에가 막 바람불어가지고 파도치고 갈라치듯이 안갈라지고 그랑께(그러니까) 그분이 성의껏 하나님한테 기도를 했어요. 

     

    ‘내가 시주 받아온 놈을(것을) 가지고 가서 내 아들 손자들을 멕여 살려야 할거 인데’ 하고 기도를 해서, 그 험한 파도와 바람이 일시적이로 딱 잠잠하니 되야서 건너가서 자기 자손들을 멕여 살렸다는 그런 전설이 있어. 그래갖고 75년도에 프랑스 대사가 여기를 와가지고 바닷길 현장을 보고 하나님한테 감사기원을 하는 그 현장을 봤습니다. 그것이 세계적으로, 군에서 행사를 하고 그래갖꼬 78년도에 영등제를 시작했는데, 그때 처음 시작할 때 여제사는 그때 사당이, 지금 영락이라고 그라는데, 그때는 사당도 없었고 기냥 (그냥)노지에서 뭣했어요. 팽풍(병풍)하나 쳐놓고. 

     

    그때부터는 헌관이 그 박선배, 저 군수님이 내랑 선배님부터 했어. 쭉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그때 유세차~ 뭐하고 축관하시고. 처음에 우리 할 때는 두루매기 입고 하고 낸중에부터(나중에)군에서 할 때는 군에서 옷을 가지고 와서 했어요. 처음엔 기양(그냥) 이케(이렇게) 요놈(이것) 입고 아무놈(아무거나) 입고 두루매기만 입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갖고 영등제가 시작이 되얏구만요.

  • 중을 제물로 삼은 임선포와 걸어가다 멈춘 선모산

    조사장소 : 진도군 고군면 내산리 내동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4.20.

    조 사 자 : 박영관, 박정석

    제 보 자 : 고용범(남, 84세, 1934년생)


    선모산과 임선포라는 것이 내산리 옆에 거가(거기에) 있습니다만은 개를(바다를) 막어서 있는데 옛날에는 원을(저수지를) 막으믄 자꾸 터져요. 그것 땜시(때문에) 곡식 농사를 못해먹게 되는데 거그서 임자 없는(절없는)중을 제숙으루(제삿감으로) 해서 들어갔다 해얏꼬(해갖고)임선포라 한다는 그런 전설이 있어요. 

     

    임선포가 황조서 마산이로(마산으로) 나는(지나가는) 원입니다. 임자 없는 중, 중보고 스님이라 안하요. 그랑께 원을 막을라고 임자없는 중을 제숙으로 들였다 해얏꼬(해갖고)임선포라고 그케 이름을 지었다고 그럽디다. 그 둑을 왜정시대 때 막었는디 원이 하도 터지고 그랑께 원을 막을 때 임자 없는(절없는)중이 들어갔다 해얏꼬 제숙으로 들어 갔다고 임선포라고. 제물이 들어갔다 바로 나왔제. 

     

    그랑께 임선포라는 데는(곳은) 옛날에 전설로 이상(아주) 유명했던 것입니다. 예전 시절에는. 그 유둘이, 벽파 거그 가는 질목(길목) 남해안에서 올라오는 그 질목이라(길목) 거가 그렇케 되얏는 것입디다. 그 선모산이라는 것은 옛날에 축지법으루 해서 그 산을 몰고 이케(이렇게) 해찰이로(회초리로) 몰고 마르도(마라도)로 부칠라고 몰고 가는데 한 여자가 애기를 데리고 있다가, "저 산도 걸어가는데 왜 너는 안 걸어 가느냐?” 방정맞은 여자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산이 섰다케서(섰다고해서) 선모산이라고. 지금도 그케(그렇게)산이 딱 끊어져갖고 있어요. 

     

    산이 걸어가다 섰다 해서 선모산이라고 했답니다. 삼마산이라고도 합니다. 황조 옆에 거그 가서 딱 짤라져(끊어져)갖고 있어요. 동시랑이 있고 반꾸머리가 선 마산이요. 거그 삼선에서 원포 뒷산하고 하월 앞에 있는 거그 섰는 것이 선모산이라 그라지요. 옛날에 임선포 노른들은(너른들은)강강수월래에도 그런 설이 있든 모양입디다. 뭐 그란데 그런 것은 모르고. 그라고 전에 어렸을 때 깨벗고(발가벗고)짱뚱이 잡으러 뛰어다닌 기억이 있습니다. 예적시에 봤드란데 그런 것은 모르것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까지도 거그는 물이 들어와서 못해 먹었시오. 완전히 하여튼 우리 동네 내동 마산 앞까지도 물이 들어왔어요. 옛날 일본사람들이 막은 굴뚝이(둑이) 있었어요. 그래 거까지는 물이 들어서 못해묵꼬(농사를 못 짓고) 우덜(우리들)짱뚱이 잡으로 깨벗고(발가벗고) 뛰어대는 거 그런 거는 기억이 납니다.

  • 정월 대보름 당심애굴 통과하기

    조사장소 : 진도군 고군면 원포리 원포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4.22.

    조 사 자 : 박영관, 박정석

    제 보 자 : 임경웅(남, 75세, 1942년생)


    우리 마을은 포천이 되어갖고 농토가 없었습니다. 그래갖고 왜정 때 황조랑 마산하고 간척지를 막아가지고 그 농토를 우리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서 약 1킬로, 2킬로 가차이(가까이) 되는 재를 산 넘어서 지게로 나락을 짊어지고 와 갖고, 이녁 집에 와서 전부 기계로 훌트고 해서 먹고 살고, 재를 넘어온 그 산 이 ‘당심애’ 라는데, 당심애가, 굴이 방으로 치면 20미터 가차이 했어요. 

     

    우리는 어려서 그런 때는 산에 나무를 베서 때고 하니까 질이 나서 보름에는 굴을 껴야(통과해야) 오래산다 하니까 어른들이나 젊은 아그들이나 보름 때는 전부 굴을 끼로 가고, 음식을 갖고 가서 먹고 제사도 모시고 그라고 해야 장수하고 복을 타서(받아서)산다 해서 보름에 그케 굴을 끼로 꼭 다녔습니다. 그 질이 나락을 벼서 지게로 한 2킬로 가차이 되는 재를 짊어 댕김시로 농사를 짓고 먹고 살았는데. 지금은 하도 거리가 먼게 능사를 안 짓고 그 질도 없어져 불고 굴도 안 다니니깐 질도 없어서 산으로 다니기 어려우니깐 지금은 암도(아무도) 다니도 안 하고 그대로 방치 되었다고 합니다. 

     

    (조사자 : 그러면 그 굴에 가서 굴을 낀다는 것은 액맥이 같은 거네요. 거기 가면 나한테 재앙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데 거기서 제를 모시거나 공을 들이거 나그런 일은 없었습니까?) 그란께 마을에서는 공동으로 안 해도 마을 사람들 개개인이 굴을 끼로 갈 때는 술하고 안주하고 갖고 가서 그그서(거기서) 먹고 제로 부서(부어) 술도 따라놓고 했제라. 굴을 끼로 오면은 몸도 건강하고 장수하고 복타 산다고 해서 보름에는 항상 하고 매년 한 두 번씩 다니면서 굴을 끼고 그 굴을 끼는 바우독(바윗돌) 욱에서(위에서) 놀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놀았제. 

     

    추석에는 안하고 다른 때는 안하고 보름 때만 했는디, 만약 아무 때나 댕기면 공이 안 된다 해서 그 날짜를 정해서 그래야 성의대로 해서 공을 들여야 된께 보름 때만 마을 사람들이 전부 가서 굴을 껴 오고 하는 그 사례가 있었습니다.

  • 지막리에 있는 산과 바위들

    조사장소 : 진도군 고군면 지막리 지막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5.3

    조 사 자 : 박영관, 박정석

    제 보 자 : 조병재(남, 71세, 1947년생)


    지막리 산은 안꿀산, 월굴산, 뒷골산, 홍꿀산, 지막꿀산 이렇케 나눠져 갖고 있습니다. 그란데 안꿀산에는 주봉산이라고 하는 정상이 아주 가파르고 높은 산이 한나 있습니다. 고 옆에 월굴이라고 하는 데에는 약 한 30평 되는 급격한 바위가 있는데 365일 물이 안마르고 그 바위 전체를 덮어서 이케 흐릅니다. 대하 칠년에도 그 물이 안말랐다고 하는데 현재 지금도 그 물이 꼭 이케 보면은 햇볕을 받아서 기름마니로(기름같이)빤닥빤닥하니 이런 현상이로 사시사철 물이 흘러들어서 그 바위를 보고 ‘지름바우’라고 부르고, 그 지름바우 하단에는 사람이 십 한 오 육 명이 앉아서 누웠을 수 있는 ‘노리석바위’가 현존해 있습니다. 

     

    그리고 뒷골로 가면은 뒷골 산중턱에는 ‘장군바우’가 있는데 현재 그 바위도 지금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울재라는 산을 보고 ‘강만산’이라고 하는데 그 강만산 앞에는 ‘젓그락바위’라고 있었는데 그것이 지금와서 소실되기도 했제만은 저수지를 막으면서 그것이 지금 수몰되야 부렀습니다 그리고 지막불로 들어가면은 ‘물레바우’라 해서 물레같이 생긴 바위가 지금 있습니다. 그래서 지막불이라고도 하고 또 물레바우 번덕지라고도 일명 그케 부릅니다. 또 그 이면에 노적들이라고 하는 데가 있는데, 노적들 우에는 ‘감투 바우’라는 그런 큰 바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산은 지막굴 같은 경우는 워낙 산 속이 넓어서 지막리의 저수지가 그 지막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마 진도군에서도 물이 빠지지 않는, 안빳는 원래 물이라고 할 것입니다. 원래 물이 좋고 다시 그 저수지를 막어놔서 이거 좋습니다. 그래서 산이 참 깊은 골입니다. 그리고 일명 다른말 대포리라고도 하는데 주 총산이라고 합니다. 주총산 줄기를 따라서 내려오면은 옛날에 비가 안오면은 기우제를 모시고 들녘에 충이 많아지면은 충제를 모셨던 그 제터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제터 아래는 서학사 절이 지금 현존해 있습니다.

  • 학의 혈인 지막리

    조사장소 : 진도군 고군면 지막리 지막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5.3

    조 사 자 : 박영관, 박정석

    제 보 자 : 조병재(남, 71세, 1947년생)


    우리 마을 전설은 옛날에 당월천 옆에 냇가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에가 물욕천이지. 이름 없는 집이 몇 가구가 있었는데 해적들 때문에 거그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지금 이 자리로 이주를 해가지고 집을 짓는데 외곽처럼 산에 띠껍(띠) 을 뜯어다가 마람을 엮어서 막을 쳤어. 

     

    그래서 ‘지초 지(芝)’자. ‘막 막(幕)’자 써서 지막리라고 했는데 그 막을 쳐놓으면은 바람이 불어서 자빠지고 또 쳐놓으면은 또 자빠지고 그러는데 어느 대사가 길에 지내가면서 “이 터는 학의 혈이다. 그러니 양쪽 날개에다가 독(돌)을 울려놓고 집을 짓어라. 그러면은 집이 안 헐어질 거이다.”그래서 저그 돌백이라고 하는 데가 고인돌처럼 거가 큰 독이 두 개가 있었는데 지금 하나는 없어져 불고 하나가 있고 저 아래 큰 샘이라고 하는 데가 독이 거그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돌이 없어졌습니다. 

     

    그 독을 갖다가 눌러놓고 나니까 그 막이 안 헐어지더라 그래서, 그 후로 집덜을 모도 지서갖고 마을이 형성이 되얐다고 하는데 터가 학의 터라고 하는 유래가 거그서 흘러 나왔습니다. 그래서 지막리 웃동네를 보고 옛날에 놀면서 건든다믄서 ‘새꼴랑지, 새꼴랑지’ 그랬는데 그 말은 학이 내려다 봤기 때문에 학의 꼬리라는 소리지 다른 의미가 없는 얘깁니다. 

     

    그래서 지막리는 그렇게 해서 학의 터라고 해가지고 약 한 50년 전만 하더라도 세대가 이백 한 삼십 세대, 아마 진도서는 가장 큰 세대, 마을이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로 산업화, 이농의 현상이 일어나서 지금은 백 한 오십 세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 마을 내에 그 오래된 이름이 모도 와전이 되어가지고 말이 쫌 옳은 말이 못됩니다만은 알로레, 멀무덤, 돌백이, 문텅바우, 석질, 가도레. 콩박근이 이렇케 그 오래된 이름을 지어가지고 있고, 마을 입구에는 김해김씨 가문의 일인 삼비의 효열비가 훌륭하제 역사깊게 서갖고 있고 그 옆에는 창녕 조씨가 문의 전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월산 하에는 창녕 조씨 가문의 효열비가 있고 그 옆에는 박씨들 가문의 효열각이 또 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각을 옛날에도 짓고 해가지고 모도 대대전손해서 지금 그 자손들이 훌륭하게 관리를 잘하고 있습니다.

  •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판관 박만재

    조사장소 : 진도군 고군면 지수리 지수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4.23

    조 사 자 : 박영관, 박정석

    제 보 자 : 김서규(남, 81세, 1937년생)


    향동리에 판관재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판관재에 대한 얘기는 이 구전에 의하면 고군면 향동리에 거주하던 박만재, 고인이 되얏지만(되었지만) 선조로서 당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같이 왜군과 싸우시다가 전사하여 모사리 뒷산 향동리로 가는 소릿재 밑 산에 판관 벼슬을 하시다가 전사하여 향동으로 길 위에 매장되어 있기에 그 잿등을 판관재라 칭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묘를 가보면 묘 앞에 상석과 묘비가 세워져 있고 세운 시기는 도감 26년 11월 6대손 성병 근기라고 되어 있습니다. 2차로 세운 비는 1978년 9월 15일 11대손인 춘기, 통명, 정옹, 근지 이르케 세워져갖고 있습니다. 비전에는 임진공신 어해장군 전주판관 밀양박공 지묘, 배씨로는 숙부인 한양 조씨 합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뒷면에는 공후휘자를 보면은 내종 자는 필란,또 사은록 정재, 그리고 장자 정립, 차자 경홍, 삼자 경돈 삼형제가 뒷면에 세워져갖고 있습니다.

     

    인자 그 비 뒷면을 기록을 살펴보면, 박공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우리나라를 침입하고 있기에 신하 된 도리로 앉아 볼 수가 없어 나라를 구해야 겠다는 일념으로 결사 출전키로 결심하고 지원자를 모집, 군수를 방문하여 출전할 것을 아뢰고 지원자 수백 명과 같이 전지로 출전하니 무비충효전율영재명장으로 천거되어 이순신 장군과 같이 출전하게 되니 이순신 장군이 크게 환영하고 기뻐하시었다. 박공은 장군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왜군과 싸울 때마다 크게 전과를 올리니 칭찬하시었다고 합니다.

     

    또한 독자적으로 돌격대를 조직하여 전과를 올리니 이순신 장군께서 크게 기뻐하면서 ‘동서고금의 충신이요, ‘열사’라 칭하면서 항시 나의 장군이라 호칭하고 한산싸움에서 또 전과를 크게 올리니 장군께서 조정에 알리시어 포상을 내리게 하고 전주판관으로 명받아 미승월에 작전을 퇴치하고 다시 통영으로 가 이순신 장군과 같이 왜적과 싸우시다가 장군이 전사하여 치상하고 전지로 가 격전하시다 전사하니 조정에서 공조판서 공신으로 명받아 녹전을 왕께서 하사하셨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녹전은 지금 후손이 봉헌하고 있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상 판관재에 대한 얘기를 하였습니다.

  • 충제가 없어진 이유

    조사장소 : 진도군 의신면 거룡리 사정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6.11

    조 사 자 : 김명선, 윤홍기

    제 보 자 : 박석규(남, 75세, 1942년생)


    옛날부터 충제를 모실라믄 아주 정갈하게 목욕 정성하고, 한 3일 전부터 부인하고 서로 각방 하고, 충제 제관을 생기에 맞는 사람 두 사람을 선출하고, 심부름 할 사람은 한 사람 선정하는데, 심부름 하는 사람은 생기에 맞으나 안 맞으나 보통 어린 좀 젊은 사람을 선정해요. 

     

    충제를 모실라몬 아침에 일찍하니 산에를 조반(아침밥) 막 먹고 그 산을 올라가요. 그 주변 청소 다 하고,그라고는 뒤에가 쪼그만한 웅달샘이 있는데, 그 샘을 ‘안꼬 샘물’이라 해요. 그 샘이 바구독 새다구(사이)에서 쪼금 나와서 한 쪽 박씩(바가지)이나 곱(고이는)는 그런 샘이 있어요. 거기서 정성스럽게 청소해내고 그 물을 질러 옛날에 그 옹구뱅, 이렇게 된 병 주둥아리 좁은 것 있소? 거기다 물을 길러. 그래갖고 새내끼로 묶어서 그놈을 들쳐미고 올라가서 밥 짓고 제관들이 먹을 밥도 그 물로 가서 해서 먹고, 또 제사 올릴 밥도 거기서 짓어요. 

     

    그때 와서 거기서 하루 저녁 제 모시는 것 놔두고 한번 가 봤는데, 정성을 다해서 하고 축관이 축 다 읽고 정성스럽게 하던만요. 그렇게 하고는 그 다음날 아침에 내려와서 그 재물을 가지고 부락에 내려와서 동네 어른들하고 술 한 잔씩 그놈 갖고 나누고 그렇게 했는데, 뒤로 과학이 발달하고 사람을 고르다보면 생기에 맞는 사람이 별로 없어, 잘 안 나타나. 

     

    또 서로 안 갈라하고 그랑께, 차라리 제를 없애 버리자. 농약도 생기고 그랬는데 제를 지내갖고 충이 없어지겠냐. 충제는 제충을 목적으로 하는데, 정성스럽게 제사를 모시면 충이 없어진다 멸구도 없어지고 그란다고 그랬는데, 농약도 생기고 그랑께 제사만 지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약을 뿌려야 없어지는데 이건 하나의 미신이다 차라리 그냥 하지 말자. 그케갖고 1974년 그때 내가 마을 일을 볼 때 없애불었어요. 

     

    충제는 어찌게 됐던지 음력 6월 초 하룻날 제를 모시고 여기만 제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각 마을 다 모시고 그래서 그날은 전부 쉬어. 음력으로 6월 1일 오늘 제 오른다 하면 일절 부락에서 일 안 하고, 흰 빨래도 밖에 절대 안 널고, 일하는 사람이 있으면 부락 일을 보는 사람들이 나가서 못 하게 하고 내일 하라고 했어.

  • 학동들이 뽑은 주량팔경

    조사장소 :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돈지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7.4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박현재(남, 73세, 1945년생)


    옛날 해방 전후로 해서 자식 교육에 남다른 뜻이 있는 중앙지역 학동들의 학부모들이 주량지의 터에다가 건물을 짓고 옛날 한문 공부를 시켰는데, 저희들이 그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서 가봤는데 터는 있으나 지금 실제 건물은 없습니다. 들려오는 내용에 의하면은 2005년도까지 사람이 살다가 인제 폐가가 되서 철거가 되고 그 부근에 천 년 모셨던 노거수 두 그루가 지금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가서 확인한 바로는 그 천 년 묵은 팽나무 두 그루가 그때 당시 배움에 열중했던 서재 학동들의 배움터를 지금까지 지켜주고 있어 산 징표가 되고 있습니다. ‘주량팔경’은 어차피 주량공원을 조성을 할 때에 주량 서재에서 옛날에 학동들이 중앙 지역에 보이는 산이나 들녘을 배경으로 해서 여덟 가지 가장 좋은 경치를 선정을 해서 글을 짓고 만들거나 해서 후세에 전해오고 있으며 지금 주량공원 행사를 가질 때 매년 그 주량팔경에 대해서 설명도 하고 오신 분들한테 그 내용을 전달도 하고 그렇습니다. 

     

    화타사의 여름철의 구름이 도는 광경이 아주 멋있다 해가지고 화타사 기운을 제1경으로 삼고 두 번째로는 동쪽 청룡 뒷산에서 달이 떠오르는데 학동들이 그 장면을 밤에 볼 때에 아주 멋있고 좋다 해서 제2경으로 삼은 것 같습니다. 제3경으로는 중앙지역에서 동쪽 끝을 보면 ‘송천기미’라는 곳이 있는데 송천기미 뻘판에서 밤에 불을 피워 놓고 고기나 게를 잡던 그런 불빛이 아주 선명했습니다. 저도 어릴 때에 그 장면을 여러 차례 본 기억이 새롭습니다. 

     

    네 번째로는 주량 서재에서 동쪽 한 2미터 부근에 옥대천이라는 아주 물이 잘나는 샘이 있는데 그 샘터에서 빨래하는 방망이 소리하고 또 물 긷고 오는 아낙네들이 마치 저잣거리 드나드는 것 같이 보여서 그걸 4경으로 정한 것 같습니다. 제5경은 주량 서재에서 저 앞쪽을 보면 가장 높은 산이 천마산이 있는데 천마산에서 소를 키우면서 꼴을 베고 또 풀을 베면서 노래 불렀던 그 천마산 초가가 제5경이 된 것 같습니다.

     

    제6경으로는 우황천 쇠돌목 중심 부근에 급장천이 있는데 비가 올 때고 여름철에 특히 우수기인 장마나 맛통 때에는 급장천이 꽤 오랫동안 울고 또 무섭기까지 하고 그래서 서재 학동들이 급장천 울음소리를 제6경으로 정한 것 같습니다. 제7경으로는 감지평 농가가 있는데 서재 뜰에서 앞을 보면은 가장 비옥한 들판이 감지평입니다. 그런데 감지평에서 옛날에 수작업으로 논에 김을 매고 농약을 하고 논두럭을 비고(베고)했을 때 피로를 달래기 위해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이 서재 학동들의 귀에 아주 보기 좋게 들렸던 것 같습니다.

     

    제8경으로는 강선암 낙조가 있는데 중리 뒷산이 바로 강선암입니다. 그런데 서재 학동들이 하루의 지친 몸을 일몰 직전의 가단 쪽에서 서쪽을 보면은 일몰 광경이 아주 황홀해서 그 모습을 제8경으로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주량 서재터에서 보는 것보다는 현 주량공원에서 보는 그 일몰 광경이 더 아름답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 첨찰산에서 발원하여 길게 흐르는 의신천

    조사장소 :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돈지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7.4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박현재(남, 73세, 1945년생)


    의신천은 진도에서 가장 높은 첨찰산(尖혔山)에서 발원된 냇물이 사천리, 침계, 창포, 돈지, 옥대천을 지나서 옥대천과 청룡천과 개듬벙(웅덩이)과 합류에서 의신포로 방류를 하는 진도에서 가장 길고 수질이 좋은 천(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약 800년 전에는 현 주량지(돈지마을앞들) 평야 지대는 거의 바다였을 거라고 생각되며 우항천으로 명명한 것은 예로부터 ‘쇠목돌이내’라 불러가지고 이것을 한자로 명명을 하다 보니 우항천이 된 것입니다. 1961년 군사혁명 때에 하천 접안을 직선으로 조성하는 사업을 했는데 당시 중장비가 없어서 순 인력으로 하고 저도 십 대 청소년일 때 몇 날 며칠을 토사를 모아서 제방을 힘들게 쌓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때 당시는 먹고 살기가 어려울 때라 식량증산을 우선으로 하였기 때문에 수확이 많은 통일벼도 재배를 권장하였고 공유지도 최대한 활용했고, 또한 야산도 계단식으로 개발을 하여 당시에 영산 앞산을 개발한 혼적이 남아 있습니다. 하천 제방 정비 사업은 인근 주민 모두의 절반의 생활터였습니다.

     

    그곳에서 빨래, 수영, 고기잡이, 낚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어르신들은 배 수영이 없는데 냇가에서 자연적으로 배운 실력입니다. 지금은 수영장에서 돈을 주고 배우지만 큰 비가 올 때면 제방 부근의 논 주위는 무섭고 걱정이 됩니다. 혹시라도 제방이 넘치거나 터지면 논이 침수는 물론 토사가 덮치기 때문에 기도하는 심정으로 제방뚝을 지키고 있었고, 저도 몇 번 그 현장을 목격을 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세찬 물결은 기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쓸어버리기 때문에 주위에선 사람이 더 중요하니 제발 가지 말라고 부탁하기도 했지만 끝내 휩 쓸려가서 죽은 사례도 몇 번이고 본 적이 있습니다. 

     

    옛날 어르신 소거씨 방천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거씨 방천’은 소거씨라는 분이 방천 부근에 자기 전답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제방을 관리하는 일종의 소유권 비슷한 목이라 해가지고 이름을 전부 그렇게 불렀는데 우항천 중심 부근에 소거씨가 소유한 전답의 부근 일대 방천을 일명 소거씨 방천 이렇게 불러가지고, 나이가 많이 되신 육, 칠팔십 대 어르신들은 지금도 소거씨 방천’ 이렇게 다 부르고 있습니다.

  • 급창둠벙이 울고 도깨비가 요동치다

    조사장소 :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돈지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7.4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박현재(남, 73세, 1945년생)


    저희 마을에서 급창둠벙은 직선으로 약 500미터 남짓한 거리입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우수기 장마통 때에는 주로 해질녘이면 급창둠벙이 울고, 그 소리를 저도 듣고 우리 마을 사람 대부분이 다 듣고 있었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마치 소 울음소리도 같았고 문풍지 우는 소리도 같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밤에는 도깨비불이 그곳에서 나와서 아릿재를 넘어서 방천 둑으로 왔다 갔다 하고 꺼졌다 다시 둘 셋으로 갈라졌다 요동을 치고 다니는 것을 우리 마을뿐만 아니라 저도 아주 많이 본 적이 있습니다. 

     

    급창둠벙이 물이 불어나 갑자기 넘치는 현상을 본 사람도 있었다는데 그걸 보고 물이 끓어오르더라는 말도 저는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 급창둠벙이 우는 소리를 내고 도깨비불이 나와서 돌아다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예사가 아니었고 한 서린 영혼들이 영면치 못하고 허공 중천을 헤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집니다. 특히 6.25동란 직후부터 61년 제방 정비 사업 전에 가장 많았고, 흔히 보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름철 잠자리 들기 전에 모깃불 피워놓고 지금의 백구공원에 모이면 변함없이 급창천이 울고. 도깨비불이 날아다닐 때면 나이 어린 꼬마들은 무서워서 집으로 도망을 쳤고, 어른들은 오래토록 그 장면을 볼 수가 있었으니 전쟁의 참화 속에서 죽은 넋은 고히 잠들지 못하고 주량서재에서 글을 배우는 학도들의 심금도 울렸기에 주량팔경 중에 급창수명(及취水嗚)을 넣지 않았는가 생각이 들어집니다. 또, 저도 들은 바에 의하면 거기는 항상 물이 용솟음쳤고 물이 끓어오르고 해서 금갑의 용둠벙이라는 아주 민물이 잘 나는 큰 둠벙이 있는데. 급창둠벙에서 일명 도굿대, 도굿대를 집어넣으면 물길이 통해서 금갑둠벙으로 나온다 하는 말도 전해 들었습니다마는 이것은 조금 과장된 표현이, 말이 아닌가 싶어지기도 합니다.

  • 감지평 들녘의 젖줄이었던 참샘

    조사장소 :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돈지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7.4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박현재(남, 73세, 1945년생)


    제가 앉어(앉아) 있는 북쪽은 밭으로 벌었던(농사짓던) 유명한 삼별초 난의 떼무덤 들녘이고, 동쪽을 보면은 광활하고, 높고, 토질이 비옥하고. 수매가 깊은 감 지평 감자 뜰 들녘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돈지마을에서 남쪽 방향으로 약 400미터 되는 곳에 물이 좋기로 소문난 ‘참샘’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 참샘은 크기가 직경 4 내지 5미터 되는 아주 큰 샘이었고, 나오는 물 양이 땅에서 솟구치는 모습을 저희들이 직접 눈으로 봐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물 양이 충분했었습니다. 

     

    또 물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있고, 그 부근에서 일을 하다가 목이 마르면 굳이 집에까지 올 필요없이 그 참샘 물로 더위를 식히고 갈 증을 해소하기도 했었습니다. 지난 1961년 전에, 하천 정비가 있기 전에 참샘 물이 이 넓은 감지평 들녘을 전부 먹여 살린 젖줄이기도 했으며, 지금 지난 1987년 경지 정리가 된 후로는 참샘이 없어지기는 했으나, 그 부근에서는 지금도 물이 엄청나게 솟아나오므로 해서, 그 부근에 있는 작물은 물이 너무 차고 시원하기 땜에 거의 자라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그 지하에서 옛날에 참샘 물이 죽지 않고 계속 살아 숨 쉬고 있고 용솟음치고 있다는 바로 산 증표이기도 합니다. 어렸을 적에 가정에 샘도 없고 상수도 물도 없을 그런 시절에, 특히 부녀자들이 낮에 지친 몸을 목욕을 하기 위해서, 먹을 감기 위해서 참샘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밤에는 무섭기도 하고 부녀자들이 혼자 옷을 다 벗고 목욕을 할려면은 불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기 때문에 여럿이 동무를 떼를 지어서 같이 와서 목욕을 했든 기억이 새롭고요. 

     

    특히 아주 망나니 남자 분들이 여자들이 벗어 놓고 목욕을 하는데 그 옷을 감춰버리기도 하고 가져가버리기도 하기 때문에 여럿이 떼를 지어서 목욕을 할 때, 한 여자는 그 옷을 지키면서 끝까지 함께 행동을 했던 그런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다음에 참샘 물이 하도 맑고 깨끗했기 때문에 그 주위를 흐르는 여러 개의 지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각종 물고기가 엄청 많았고, 지금 보기 아주 힘든 새우도 참샘 물을 먹고 컸기 때문에, 저희들이 어렸을 때 그 깨끗한 물에서 나온 그 새우 맛을 지금도 언젠가는 한번 다시 맛을 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 의신 관내에서 제가 알기로는 중리 뒤에 있는 성죽 저수지에 가면 옛날 깔맹이라고 하는 아주 특이한 어종이 지금도 살아있고. 방금 말씀드린 새우도 그곳에는 자라고 있기 때문에, 역시 새우는 물이 맑고 깨끗해야만 계속해서 크고 자랄 수 있지 않느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주위에 참샘 물보다 더 낮은 경작지는 거의 참샘 물로농사를 지었지마는 참샘 지역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전답에는 옛날 물채를 이용해서 물을 뿜어 올렸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고, 그걸 물채를 떠 올리면서 갯수를 시었던(세었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어르신들이 너무 피곤한 나머지 하나, 둘 셋 해가지고 오십 번 내지 백 번을 물을 퍼 올리면은 그 다음에는 피곤하닌까 조금 쉬었다가 막걸리를 잠시 마시고, 다시 물을 품어 올려서 논농사를 지었던 그런 기억이 새롭고. 그때 당시 아이알 육육칠 통일벼를 많이 재배했던, 그리고 미질이 좋은 능림 6호 이런 종자를 심어서 능사를 지었으나 단위 수확량이 아주 적어가지고, 지금같이 콤바인 이용해서 수확하지 않고, 가정에서 또 들녘 현장에서 탈곡기로 수확을 하고, 볏짚은 소를 먹이고. 또 마람을 엮어서 해이고 해가지고 비를 방비했던 그런 기억이 나는데, 지금 우리가 마람을 구경하려면 용인에 있는 민속촌에 가지 않으면은 마람을 구경할 수가 없어요. 

     

    저도 어렸을 때 하루종일 마람을 엮으면 서투른 나머지, 마람 한 장에 볏짚 세 뭇이 필요한데 하루에 빠르면은 열 장 남짓 엮을 수 있는데, 숙달된 어르신들은 저보다 두 배, 세 배 정도 많은 양을 엮을 수 있었기 땜에 ‘역시 나이가 벼슬이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 첨찰산 동천암에서 불법을 깨우친 사명당

    조사장소 :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사상마을 첨찰산 동천암

    조사일시 : 2017.4.7.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서만석

    제 보 자 : 박정석(남, 69세, 1948년생)


    옛날에는 진도를 옥주라고 했습니다. 첨찰산, 옥주 제1봉 할아버지 봉다리 그 바로 밑에 있는 동천암입니다. 이곳 동천암은 조선조 1580년대, 사명대사께서 청량산으로 해서 우리나라 명산을 주유하다가 마지막으로 이곳 옥주 고을 진도 첨찰산에 있는 이곳에 오셔서 수도하였습니다. 사명대사가 여기에서 수도한다는 말을 듣고 이 일대의 불자들이 불법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런데 때가 봄인지라 암자 앞 뒤 뜰에 꽃들이 만발하였는데 한밤중에 비가 내려서 꽃들이 다 저버리고 말았어요. 

     

    사명당이 그 모습을 보고, ‘인생이 정말 무상하구나, 어제 피었던 꽃이 이제 빈가지만 남았구나!’ 하면서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깨우치고 거기에서 법회를 열어 제자들을 모여 놓고 사명대사가 설법을 하시기를, “어제 가지가지 피었던 꽃이 다 지고 빈가지만 남았다. 이 얼마나 허망하냐. 모든 인생이란 이와 같으니 저마다 마음속에 불법이 있으니 이제 깨우치고 이 세상에 나가서 좋은 일들을 많이 하기를 바란다!” 하니 그 제자들이 그 뜻을 깨우치고 세상에서 불법을 전파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명대사께서는 이곳 바위 밑에 앉아서 완전히 진흙으로 굳어진 허수아비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도를 닦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곳이야말로 정말로 사명대사가 도를 깨우친 수도처 명소가 아닐까요? 그 후로 이 암자는 없어졌지만 지금도 뜻이 있는 분들이 여기에 와서 소원을 기원하고 또 기가 충만하여 소원이 이루어진다고도 합니다. 

     

    이 산이 ‘천을태을형’이라 듣고 있는데 양쪽 산이 이곳 동천암을 중심으로 싸고 있는 이 앞에는 세봉우리가 우뚝하게 솟아 있어서 이곳은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라서 정말로 기가 모이는 곳이고 이곳 바로 밑에는 산정상이면 서도 샘물이 일 년 내내 끊이지 않고 샘물 또한 맛이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동천암이라고 부르고 첨찰산의 보배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 삼별초군이 남긴 나근당골과 말무덤

    조사장소 :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사하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6.6.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박옥길(남,76세, 1942년생)


    제가 어렸을 때 우리집 뒤에 나이 드신 육십 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한테 들은 바에 의하면, 삼별초군들하고 전쟁이 나서 왕무덤재를 넘어서 도망을 가다가 왕무덤재 지금 왕 무덤 자리에서 말이 쓰러졌드랍니다. 그래갖고 말은 거그서 그냥 죽고 왕은이 그 욱에로 올라가다 적군에 또 살해를 당해서 논수동을 거쳐서 삼밭 위에 있는 저포리재를 통해서 거그 넘어서 의신을 거쳐서 금갑 이렇게 해서 제주도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나근당이란 장수가 거그서 또 병사들하고 흩어져서 논수동 뒤에 땅골이라는 골(골짜기)이 있었습니다. 거기 가서 은둔해갖고 상당한 기간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란데 거가 장수가 살던 흔적이 있습니다. 논수동 뒤에 땅골 나근당, 그 나근당 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해서 나근당골로 나중에는 긋게(그렇게) 불러 왔습니다. 그래 산봉달이에(봉우리) 가면은 약 백여 메타, 높이는 일 메타 정도 되는 돌성이 지금도 있고 나근당이라는 장수와 그 잔병들이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다고 그래요. 

     

    그 다음에는 저포리재로 삼별초군들이 가다가 접전하고 아마 포로도 많이 잽히고 거그서 큰 싸움이 일어났는데 역시 말이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 산봉우리에 가면 지금도 말무덤이 몇 개가 있다고 그래요. 그란데 그 말들도 죽었다 합니다. 의신 중리를 통해서 돈지 앞으로 해서 만길 잔등을 넘어서 제주도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란데 왕무덤재를 지내서 저희들이 학교를 다녔습니다. 말무덤 용미를 지나서 읍내를 다니고 하는 그런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통해 다니다 보면은 거 용미 거그를 어찌기 하다 밟았다 하면은 용미에서 꿍, 하는 소리가 났어요. 그래서 ‘누가크게 소리를 내느냐.’하고 시합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깐 도굴을 해 버렸어요. 그때 도굴을 했어도 꿍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말무덤이나 왕무덤을 복원한다고 한 뒤로는 그 소리가 지금은 안 나더군요. 그란데 그것이 상당히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 꿍, 소리를 찾을 란가 모르겠습니다.

  • 운림산방을 복원하기까지

    조사장소 :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사하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7.16.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차철웅(남, 64세, 1954년생)


    운림산방에 대한 내력을 나는 잘 모르지만은 우리 아버지랑 전에 들은 얘기로 하면은 우리 ‘병’자, ‘윤’자 할아버지께서 누구한테 산지는 모르지만은 운림산방 소치 생가를 샀어. 우리 할아버지가 사갖고 거그서 살다가 우리 아버지가 행랑채 지금 같으면은 사랑방이랄까 사랑채라 할까, 행랑채를 뜯어갖고 우리 아버지를 제금을(분가를) 냈어. 

    진도 운림산방 안내판
    진도 운림산방 안내판
    진도 운림산방 설명석
    진도 운림산방 설명석

    우리 아버지가 막둥이여. 근디 저그 아래 집으로 산밭으로 제금을 냈어. 그란데 제금 내갖고 사는 도중에 거그 운림산방에서는 우리 큰 아버지, 아버지 형님분들이 전부 살다가 셋째 큰아버지가 거그 살다가 다시 윤대 씨한테 폴아갖고…. 그 집을 산밭에다 짓어갖고(지어서) 살았는데 남농 (선생) 보좌관인가 비서인가 모르겠는데 그 사람이 몸이 겁나게 좋았어. 하톤 그 사람이 와갖고 운림산방 복원 할란다고 집을 포라(팔라고) 하드라고 그러걸레(그래서), “나는 집은 못 폴겄소.” 그라길래, “왜. 못 포냐?”

     

    그래서 우리 집이 뜯어 올 때 4칸 집이었어. 내가 그 4칸 집에다가 달아내갖고 6칸 집에서 살았어. 더 이상 6칸이고 4칸이고 5칸이고 필요 없이 사칸 집을 짓어만 주라. 내가 땅은 줄란게. 이 집을 폴면 내가 돈 몇 푼 받고 어디가 살겄냐. 나는 거지 되야분다. 그라닌까 뜯어온 사칸짜리 그 집만치 브르크(블록)로 짓든지 초가집을 짓든지 짓어주라. 나는 그람 그리 갈란게. 헌 집은 맘대로 뜯어가서 해라 그랬제. 그거이 팔십 이삼년도 된다고 봐야지요. 참말로 칠십이 년도에 저수지를 막었거든. 그랑게 팔십 이삼년 되것네. 아이 긍게(그러니까) 내 말 들어보쇼. 

     

    그 집을 지어주라 한게, 그 남농 비선가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응,응, 그것도 좋은 말이다.” 하드라고. 아니 내가 살던 집을 줘불면, 그런 때는 참말로 몇 푼 받도 안하고 폴아불면 나는 어쩌겄소. 그때 집이 한 오십만원 갔을 거여. 그란데 그때 내가 집을 뜯어가는 대신 한 채를 짓어주라고 말한게, 우리 동네 허00이라는 사람이, “그것 돈 한 오십만원 밖에 안 하 거인데 그 돈 받고 잔(좀)팔제마는 뭔 놈의 집을 짓을라고 하냐?”

    진도 운림산방 근접
    진도 운림산방 근접
    진도 운림산방 별채
    진도 운림산방 별채
     

    함시로 막 성질을 내. 자기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여. 나도 집을 포나(팔든) 안 포나 상관이 없어. 그래도 그 운림산방을 남농 선생이 복원하고 좋게 한닥 한게 내 솔직한 대로는 큰맘 먹고 그렇게 해 준 것이여. 그란데 00이라는 사람은, “돈 오십만 원이면 집을 살 것인데” 그람시로(그러면서) “하지 말어!” 막 성질 내갖고 가분당게. 결국 내가 안폴았제. 집을 폰 것이 아니라 나는 무조건 하고 이 땅만치 부르크 짓든지 내 땅에다가 집만 짓어주라 한게는 00씨가 그렇게 나쁜 소리를 하네 진짜 내 생각에는 소치 생가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즈그들이 사정을 더 많이 하고 돈을 줘야 될 판인디 왜 그랬쌓는지. 

     

    진도 운림산방 연못
    진도 운림산방 연못
    진도 운림산방 운림동
    진도 운림산방 운림동

    그러니까 소치 선생님이 운림산방을 딱 지어가지고 살다가, 그 때가 칠십 한 팔세 그렇게 나이가 들어서 딱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심서 지금 자식들한테 사천리 땅이 척박하고 자갈땅이고 소출이 적고 하닌까, 그 나이 들어서 쓴 시에 가 뭐라고 나오냐면, “너희들은 도회지에 나가 살아라.” 그라고 시를 지었어요. 그랑께 소치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바로 우리 할아버지한테 팔고 강진으로 모두 가버렸거든요. 그전에 미산 선생하고 남농 선생을 여기서 운림산방서 낳고 그라고 나중에 강진 병영으로 가. 강진 병영을 가서 좀 살다가 목포 유달산 밑으로 딱 갔단 말이요.

    진도 운림산방 운림동 내부
    진도 운림산방 운림동 내부
    진도 운림산방
    진도 운림산방

  • 동산이 구슬처럼 이어진 연주리

    조사장소 : 진도군 의신면 연주리 연주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5.8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조권준(남, 66세, 1952년생)


    아주 오랜 옛날에는 연주리를 둠버리라고 저그(저기) 앞산이 배의 닻을 놓는 그런 형국이어서 둠버리라고 했다 했는데, 그때는 이쪽 마을이 거의 200호에 가까운 아주 큰 능촌마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르신들의 말씀에 의하면 그런 때 어촌에서 오시는 분들에게 상당히 푸대접도 했었고, 그래서 좀 안존일이(좋 지않은일이)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뒤쪽에 보시면 우리 마을은 동산이 세 개가 있거든요. 그러던 차에 어느 도사님이 오셔서 그 동산을 구슬로 생각해서 ‘구슬 주㈱’자에, ‘이을 연(連)’ 자를 써서 구슬이 이렇게 이어졌다 해서 연주리라고 하면 아주 좋을 것이다고 해서 우리 마을이 연주리라고 되었다고 합니다. 그란데(그런데) 그 뒤로 산이 헐리고 도로가 나고 개화가 되면서 연주리는 이렇게 거의 어려워지는 그런 상태로 되었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이 있어서 저희들은 뭐 구술로 전해오는 그런 얘기로 거기까지만 알고 있습니다. 

     

    (조사자: 연주마을하고 응덕마을하고 어느 곳이 주축이 되었나요?) 

    연주리였죠. 지금도 할머니들이 이쪽으로 들어오실라고 표를 사러 가면은 응덕리는 없어요. 지금도 연주리라 해야 차표를 줍니다. 그래서 이쪽이 근거지가 됐고 요쪽으로 보면은 지금도 기와가 많이 출토 되거든요. 그래 지금 요 뒤에 박재열씨네 집 뒤로 보면은 지금도 옛날 기와로 담도 이렇게 싸놓고 그런 것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새마을 사업으로 많이 없어졌지만 그 흔적이 지금도 나오고는 있어요. 

     

    그 당시 200호나 되었다는 마을의 규모나 크기가 짐작도 안가지만 하튼 옛날의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으면 아마 이쪽 지역에서는 초사리, 그 다음에 연주리, 그 다음에 중리, 그라고 돈지, 그렇게 본다면은 농촌 규모로는 상당히 번성했던 마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 강성봉에 모여서 충제를 지내다

    조사장소 : 진도군 의신면 옥대리 중리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5.9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김영식(남, 84세, 1934년생)


    우리 마을 뒤 쪽에 있는 산이 강성봉이랍니다. 그러고 왼짝으로(왼쪽으로) 작은 당 저수지가 있는데, 그 구계지 저수지 있는 재를 막 들어와서 높은 곳이 왕봉입니다. 강성봉하고 왕봉 그 밑에서 지금 우리들이 사는데 강성봉에는 처음에 산이 뭣할 때(형성될때) 산신들이 내려와서 거기서 지나 댕긴(다닌) 그 발자국이 지금도 남아있어요. 

     

    그래갖고 그 밑에다가 귀신들 제사를 모시는데 충제를 모실 때는 내나(늘) 옥대, 중리, 정지, 청통 네 개 마을이 충제를 모십니다. 그란데 충제를 모실 때는 음식을 많이 장만하고 그런 때는 물이 귀하니까 째그만한(작은) 샘을 하나 파갖고 거기서 밥하는 물만 좀 쓰고 그 나머지는 여그서(여기서) 물을 한통이나 두 통 갖고 가요. 산에서 닭도 잡아갖고 밥을 여러 상을 하는 것이 아니고 밥 한상하고 국하고 아까침에(좀 전에) 닭은 삶아서 고기로 제사를 제대로 모셔갖고 뭣할 때는 모두 나놔서(나눠서) 해. 

     

    그때 밥은 갖고 내려올 수가 없은게 그대로 비워갖고 국이고 뭐이고 전부 그 자리에 비워서 옆에서 굿만 보고 있던 산신들 보고 잘 먹고 어쩍하든지(어떻든지) 농사짓는데 하나도 피해가 없이 전부 풍년이 되게 해 주라고 빌었습니다. 그란데 그동안 해방된 후로 청용마을이 한번 충제를 안 왔습니다. 안 와갖고 뭣한데 그 뒤로 그 제관이 가서 빌었던가 어쨌던가. 제사도 안 오고 그랬은게 거그는 농사지었어도 못 먹게 하라고 그랬든가 갑자기 충이 많이 생겨갖고.. 

     

    그때는 이 조, 서숙 그런 것을 많이 심긴게(심으니까)아주 충이 많이 생긴께 큰일 이제. 그때 청용서 와서 막 빌면서 우리가 다시 제 모시는데 전부 책임지고 할테인게 잔(좀) 뭣해주라고(용서해주라) 다시 그렇게 해서 제를 모시고 난계(모셨더니) 그날 저녁부터 해충 벌레가. 예전에는 돌담이 많은데 그리 싹 들어가갖고 그렇게 해서 농사를 건졌제. 

     

    그랑께 그 뒤로 부터는 청용서 안 빻고(안빠지고)닭이라도 한 마리 갖고 댕기다가 인자는 그냥 안와. 저 옥대서도 안 오고 정지리는 적은게 아주 안 오고. 그란께 중리가 할 수 없이 책임지고 하제. 제관은 하나에 도울 사람 두 분 뭣하니 해서 세 분이 올라가서 제를 모시고 그라고 내려오는데 제관들도 나이가 먹어서 못 올라간게 작년부터서는 인자 더 밑에 밑에로, 지금 새로 질 난(길이 난)그 욱에서(위에서) 작년에는 제를 모셨어. 앞으로는 욱으로 안 올라 갈라해. 강성봉 중간만큼 되는 데서 제를 모셨는데 응 이제 많이 내려와 불었어.

  • 제각을 복원하고 다시 모신 당산제

    조사장소 : 진도군 진도읍 북상리 30번지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6.9

    조 사 자 : 박주언, 김현숙

    제 보 자 : 조규식(남, 67세, 1951년생)


    하율로 또 들와갖고(들어와서) 바로 그 동산 안있읍딘쟈? 바로 우리 집 앞에 정면이 동산이제. 그란데 동산, 거가 당산이라 그래. 어른들 말이. 그란데 거그 굿치다가 바로 현장에서 급사해갖고 죽어분 사람도 있고. 그래서 해마다 거그서 설에 제를 모시제. 지금도 하제. 

     

    그란데 제를 안모실 때는 맨날 죽고 죽고, 젊은 사람들이 다 죽었어. 00만해도 둘이나 안죽었소. 그랑께 젊은 사람들이 좀 저그(자기) 집안에서 제일 잘생겼단 놈은 죽어불어. 그랑께 창진네도 그래불고. 왠만한 집은 다 그랬어.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제를 지내자. 어째 지내던 것을 안 지내냐.” 그라고 제를 지냄시로(지내면서) 그 앞에 길을 냄시로(내면서) 제각을(제터를) 없애 불었어. 그래갖고 우리 사촌동생하고 집안 어르신 아들하고 둘이 처창이네 공장 앞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안죽었소. 그란 뒤로 다시 쭉~ 지금까지 제사를 모시제. 다시 제각을 만들어 놨어. 

     

    (조사자: 그 제사 이름을 뭐라고 합니까?) 

    그냥 ’제 올린다’그라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 전에 마을번영회라던가 요런 것을 해갖고, 지금도 그라지만 우리 동네가 공직자가 많애. 경찰, 면서기, 학교 선생 이런 사람들이 많애. 그랑께 또 그 사고가 나기 전에 동네 이장들하고 새마을지도자하고 같이 점을 보러 갔던 모양입디다. 그래갖고 “왐마, 하율이 한 이십 년 조용하더니 또 다시 징조가 벌어졌다.” 그라더락 해. 그랑께 그것(당산제)을 하자 항께 ‘돈 든다’고 ‘뭔 쓰잘 데 없는 소리 하냐’고, ’그런 거 뭣하러 하자 하냐‘고 그랬는데. 

     

    바로 그때 사고가 나갖고 하루에 생이가(상여가) 앞뒤로 나가고 요렇게 일이 난 뒤로부터는 인자 제사를 쭉 모셔. 그라고 산꼭대기에다가 제를 모실 때, 저 앞산 동네 앞산 쩌 멀리 보이는 무안 박씨들 산 거그는 가물거나 멸우(멸구) 같은 것이 막 끓먼(많이 생기면) 충제를 모셨지라. 그란데 지금은 충제는 그 자리도 없어져불었어. 안해불어.

     

  • 강강술래 가사의 유래

    조사장소 : 진도군 진도읍 남동리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10.12

    조 사 자 : 박주언, 김현숙

    제 보 자 : 박병훈(남, 82세, 1936년생)


    옛날에 어느 처녀가 결혼을 하는데, 결혼식을 하는 총각한테 중매장이가 바람을 넣어가지고, 그 신부가 아주 빡빡 얽고 다리도 절고 아주 못난 여자라고 바람을 중매장이가 넣었어. 근데 결국에 한 번 정한 것은, 옛날에는 인자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이라 놔서, 신랑이 신부 측에 가서 예를 들이고 밤에 인자 신랑이 신부 측에서 자게 되었어. 근데 이 신랑이 옷소매를 머리에다 얹고 밤새도록 신부 얼굴을 쳐다보도 안하고 그라고 따로 누웠으니까, 하도 답답해서 신부가 이런 강강술래를 노래를 불렀다고 해.

     

    [노래를 부른다]

    어제어제 오신손님 강강술래 

    비단해도 어디가고 강강술래 

    대단해도 얼가는데 강강술래 

    물로허긴 이내몸에 강강술래 

    한승없이 생길손가 강강술래 

    몰리명주 한산모시 강강술래 

    반만틀고 저꿀보소 강강술래

     

    신부가 그 노래를 부르니까 신랑이 옷소매를 살짝 들치고 신부를 보니까, 아주 천하일색이거든. 그래서 신랑이 하는 말이

     

    닭아 닭아 울지마라 강강술래 

    날아 날아 새지마라 강강술래 

    임 품안에 잠잘란다 강강술래 

    임의 얼굴 볼랴거든 강강술래 

    금비 오고 개인날에 강강술래 

    공단 고름 반만보소 강강술래

     

    그라고 노래를 불렀다는 강강술래 가사 이야기야. 

    (조사자: 이 강강술래는 누구한테 들은 것을 채록하신 겁니까?)

     

    이 강강술래를 정한 사람이 누구냐면 천구백 한 구십오년경에 향교리에서 살다가 지금 작고하셨는데, 그때 당시 60여 세 쯤 됐든가 해. 곽미심이라는, 그런 아주머니한테 채록을 했지. 그리고 이 아주머니는 진도읍내 포산리에서 출생하여 향교리로 시집을 온 아주머니였어.

  • 모조밥과 미역국을 길거리에 뿌리는 해창마을 거리제

    조사장소 : 진도군 진도읍 해창리 해창마을

    조사일시 : 2017.10.28

    조 사 자 : 박주언

    제 보 자 : 김동심(여, 82세, 1936년생)


    돼지를 쩌그서 잡어. 그대로 상을 놔. 모조밥을 해. 그래갖고 한 그릇 내던져 주고. 미역국 끓여갖고. 옛날 어르신들은 모조밥하고 미역국을 같이 요케요케 했는데 [내던져주는 식으로] 지금 젊은 사람들은 어찌께 하는가 몰라 어따(어디다) 붓으는가(붓는지) 안 부스는가 안 봬, 그것은 안 뵙디다. 그라고 돼지는 꼭 거그서 잡어. 그래갖고 피는 길가에다 뿌려. 검줄 다치고. 

     

    그랑께 젊은 사람들은 절대로 당주를 못했지요. 월경 있는 사람은 절대로 안 돼요. 깨끗한 사람만 해요. 지금은 덮어놓고 시는(쓰는) 것이 법 같칠로(법처럼)한 하고(계속) 무조건 차례로 돌아와. 옛날 어른들은 절대 글안했어. 아주. 보름에 하는 것 누구 둘이 딱 정하고. 2월 열엿샛 날이 동네 할머니가 집을 동네에다 그 집을 바쳤어. 그라고 그 할머니 생일에 낮에 제사를 지내줘. 그 돈으로 논을 한단지 샀던가 그랑께. 그 할머니 제사도 동네잔치로 논 버는 사람이 그 비용을 다 대지요. 

     

    옛날에는 제사 모시는 사람 따로, 거리제 모시는 사람 따로, 이케 했는데 지금은 전부 함께해요. 당주가 벌초도 하고. 그랑께 우리도 추석 세고 할라다 아직 안 했어. 당주는 우리 집이 동족 끝잉께요 옆집하고 금년에 끝이요. 내년부터는 서쪽 끝에서 보탐(부터) 시작해서 둘이 썩 당주를 하지라. 당주차례인데 무슨 문제가 있으면 딴 사람하고 당주를 하고. 

     

    나도 요 뒷집하고 해야 하는데, 서울 가게됭께, 요 옆집하고 하지라. 제사 모시는 물건들은 이장이 사다주는데 같이 가기도 하고. 거리제 당주는 거그서 밥해서 차리고, 당제는 당주가 집에서 제사음식을 하는데 저 사람이 교회 댕깅께 늙었어도 내가 음식을 장만했어.

  • 대꾸지라 불렀던 대사마을

    조사장소 :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대사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07.17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문종옥(남, 69세, 1948년생)


    전에는 대사마을을 대꾸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지금 남평 문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예 남평 문씨가 입도한 것은 약 오륙백 년 전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 전에 남평 문씨가 들어오기 전에는 지명이 있었는데 거기는 오씨들이 많이 살았고, 또 고지라는 지명에서는 고씨들이 많아 살았다고 얘기를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또 밤골이라는 지명도 있는데, 거기는 바로 도암산 뒤쪽으로 거기도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로, 나무하러 가서 땅을 파보믄 기왓장 같은 것이 나와요. 그리고 어 문헌에 보면, 세종 때는 ‘대사읍곳’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세한 것은 우리가 문헌을 안 봐서 모르겠습니다만은 전에 박문규 문화원장께서는 대사라 해서 ‘사’ 자가 ‘절 사’ 자로 되어 있는 문헌을 봤다고 합니다. 

     

    그리고 도암산에는 큰 굴과 작은 굴이라는 굴이 두 개가 있는데, 작은 굴은 할미 굴이라 하고, 큰 굴은 그냥 크니까 큰 굴이라 하는데. 거기는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소 먹이러 다니면서 비가 들어오면 거기 들어가서 의지하고 그랬거든요. 예 그 우층(위쪽)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이순신 장군의 칼 났던(놨던) 자리라면서 좀 반반하니 그런 부분을 가르켜 줬던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어 그렇게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뭐 크게는 아까 나리처럼 군내 간척지를 같이 끼고 있기 때문에 어업하는 방식은 비슷했으리라고 보고 그 뒤로 어 거그를 1차 간척을 하면서 대사제라는 큰 저수지를 반포 되는데 막었어요. 그래갖고 물이 마을 앞으로 오는데 진도서 터널을 통해서 저수지 물이 오는 데는 거그 밖에 없을 것입니다. 터널을 통해서 지금 군민들이 다 그 물을 쓰고 있습니다.

     

    (청중: 거 옛날 문헌에가 대사읍곶이라고 그렇게 된 것으로 볼 때는 대사 마을이 무척 큰 마을이었다고 생각이 되아요. 그래서 대사읍곶, 대사골곶, 대사골이다, 골곶이다 하고 진도에가 많은 마을이 있는데, 거그를 대사읍곶이라 했거든요. 그래서 큰 마을이 거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이 들고, 거기 죽전 앞에 있는 죽전 마을 거그를 큰 대꾸지라고 하고 대사 마을은 작은 대꾸지라고 해서, 옛날에는 그 쪽이 모두 한 마을이었던 모양이여. 전체 해안가 갓으로(바깥쪽으로) 옛날에는 거 죽전, 대사, 대야 또 녹진 그런데가 전부가 한 마을이었던 것 같애요.) 

     

    지금 행정 구역으로는 전부 녹진리로, 그래서 그때 당시는 진도 사록에 본 문헌대로 한다면 주위에가 큰 마을들이 없었던 것 같애요.

  • 조상들의 예견대로 큰 들이 된 대야리

    조사장소 :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대야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6.24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박병림(남, 68세, 1950년생)


    저희 대야리를 전에는 큰 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르신들이 여기를 큰 들이라고 부른 것이 지금은 딱 맞아떨어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지금 저희 마을을 보면은 동쪽으로 군내북초등학교가 있어요. 거기서 잿등으로 넘어가는 골짜기에 한 사천 평 되는 논이 있었습니다. 우리 진도는 밭이 많지 논이 아주 귀할 적에 거가 한 사천 평 정도 지금으로 얘기하면 이십 마지기 정도 논이 있어서 그래서 큰 들이라 했고 공교롭게 딱 들어맞는 그런 지명이 있다는 것을 어르신들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청구에서 포천이란 분이 여그(여기) 제방을 쌓아가지고 제가 대강 봤을 적에 한 이백 마지기 이상이 수도작 논이 형성 돼야 가지고, 포천이란 분이 저수지도 막아서 지금까지 이쪽 사람들이 다른데 보다는 쌀을 더 많이 먹었다고 해. 우리가 흔히 얘기할 때 조도에서 시집온 여자가 평생 쌀 서 말만(세말만) 먹고 와도 부잣집이다 했는데 여기는 뭐 일 년에 서 말 이상 먹은 걸로 제가 그렇게 얘기 듣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여기가 큰 들에 걸맞게 저 아래쪽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나리하고 대사하고 건너가는 좁은 통이 있는데 저희 아버님이 1965년도에 그 통을 연결하는 제방을 쌓아가지고 하시다가 지금 우리나라에서 재벌에 들어가는 이랜드 그룹 회장 아버지인 박정준씨란 분이 저희 아버님하고 친분이 있었는데 저희 부친이 힘이 부치니까(힘들어서) 땅을 그 분한테 팔아가지고 지금 이렇게 큰 들녘이 형성돼 있습니다.

     

    근데 정말로 이름에 걸맞게 그런 큰 들녘이 하나, 둘 이렇게 돼야 가지고 지금은 읍내 분들도 이쪽에 와서 농사를 짓고 가고 그럽니다. 우리가 75년도에 다시 동네가 죽전리 마을에서 분가하면서 큰 들이니까 대야로 하자해서 마을이름을 개명 해가지고 지금은 자연마을 단위로 저희가 이장도 뽑고 대야리라고 하니까, 정말 옛날 어른들이 큰 들이란 이름을 정말 잘 지었구나 생각하고 ‘큰 대’자, ‘들 야’자 써서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마을 특징에 딱 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 구원이 바로 저희 집 앞에서 교회 이런 데까지 입니다. 골로(거기에)뚝방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게 없어지고 아래쪽에 농로길이 돼야 있는데, 바로 여그서 한 백메타나 오십메타 가면은 갯벌이 있어 가지고거그서 우리 어렸을 적에 걍(그냥) 팬티도 안 입고 우리가 놀던 그런 기억도 있고 그래요.

  • 다시 세운 장승

    조사장소 :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 덕병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5.18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이상문(남, 76세, 1942년생)


    내가 이장을 할 때 88년도 3월 29일 날, 면에서 이장단 선진지 견학이라 해갖고 서울서 자고 자는 날 저녁이었어. 장승보존회장이 손복동씨였어요. 장승보존회가 있었어요 따로. 새마을지도자 백연석씨가 지금 살아계셨고 해서 뭔 일이 생기믄 그분들한테 이케 연락해서 원만하니 하고, 나도 2박 3일이니까 금방 오겠습니다 하고 갔는데 와서 딱 물으니까는 장승을 도난당했다고 그래요. 

     

    그래 바로 잠 한숨 자고는 새북(새벽)부터 녹진이로 가서 녹진파출소 가니까는 파출소 일지 썼냐고, 어제저녁에 이케 장승을 도난당했는데 차량 출입하는 그 차량일지 써논 놈(것) 있냐고 물은께는 멍군장군하고 글케 대답합디다. 그래서는 내 글자도 잘 못 쓰는 놈이 청와대, KBS, MBC, 도지사, 군청, 군수 해서 내가 보냈습니다. 편지를 네 분께 보냈는데 이거 감사 대비해야 된다고 그케 말을 해. 

     

    그 뒤로 또 걍 말이 수그러져 불고(사그라들고) 없고 영 장군은 못 찾았어요. 못 찾아 그라고 저그 저 서울 장한평 거그를 갔어요. 그거 찾일라고 거그를 가서 보니까는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없고. 그 후로 도사 마사끼라는 사람, 장승을 가지고 연구하는 사람이 있었어. 일본 사람인데, 도사 마사끼라는 사람이 덕병서 먹고 자고 일년을 살면서 연구를 했어. 그 사람이 혹시 장난쳤나 그라고는 기어이 경찰에 신고했는데 그 사람도 아무 뭣이 없고 그래서 그 뒤로 걍 허무맹랑하게 그케저케 걍 이 세월만 가부렀어요. 

     

    그라고 복원할라는데 아이 그 장승을 잊어분 뒤로는 아 느닷없이 멀쩡한 청년이 정신병자가 되버리고 막 사방에서 느닷없는 사람이 교통사고 나서 죽고 아이 엄청나요. 그래서 청년들이 우리가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복원을 합시다 그래요. 이래갖고 동네 돈하고 청년회 돈하고 같이 해서 당시에 김수복씨가 청년회장이였는데, 그 석장승을 맞췄어요. 지금 서 있는 것이 그때 복원한 것이에요. 복원비를 좀 주라고 그란께 군청에서 예산이 없다고 안주고 그래 우리 동네 돈으로 걍 했어요. 

     

    그래갖고 지금 보존하면서 인구전(인두세)좀 걷고 했더니, 마을 어른들이 사람 못된 놈 인구 좀 볼라고 겨(기어) 나왔다고 그렇게 욕을 했어요. 그렇게 인구전을 중요시하고 정월 초하룻날 깽하고 나오믄은 인구 좀 볼라고 나왔다고 그랬어요. 그 인구전 걷어갖고 제물 가시고 했어요. 다른 건 뭐 특별한 거 없어요.

  • 북산재에서 만난 도깨비

    조사장소 :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 덕병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5.18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이상문(남, 76세, 1942년생)


    옛날에 아부지가 말씀 하는 것을 제가 어렸을 때 들었는데요. 우리가 학교를 갔다오면 인자 학동에서 넘어가는 길이 하나 이어요. 산속에가. 그거는 자전거도 못다니고 사람만 다녀요. 우게(위에) 올라가믄 비가 많이 오믄은 돌이 씻쳐(쓸려)내려가지고 막 돌백께(돌밖에)없어요. 흙이랑은 하나도 없어. 온통 돌로 되야가지고 운동화를 신고 이 높은 데를 올라서 학이 쪽으로 갔다하면 운동화가 일주일도 못 걸려요. 신발이 다 찢어져불어.

     

    거그를 갔다오면 산하고 하늘백께(하늘밖에)안 보여요. 아무것도 없어. 거그 다닌 데가 허술해갖고 쫌 무섭다고 다들 그렇게 말했어요. 아부지 말씀이 쩌그(저기)한의에 사는 김서방이란 놈이 어찌나 담이 신데(용감한데) 지사를 지내고 조랑에다가 음식을 갖고 오는데 어떤 놈이 나와서, “네가 담이 시단께 너랑 나랑 씨름을 한번 해보자.” 그라드래. 

     

    그래서 둘이 씨름을 하고 그 아저씨가 힘이 세갖고 발로 탁 자빠려갖꼬(넘어뜨려)인자 그 사람이 쓰러진께, “니가 나한테 졌은께 내가 너를 인자 곧 보겠다.”함서(하면서) 자빠진 사람을 소나무에다가 자기 허리띠를 딱 풀러서 묶어놓고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니가 나한테 졌은께 죽었는가 살았는가 가서 보자 그라고 가서 본께, 소나무에 그 빗지락 몽댕이, 싸래비찌락(싸리빗자루)몽댕이가 묶어져갖고 있어서, ‘아, 사람이 아니고 이것이 뭐실까?’ 

     

    그라고 자기 허리띠만 띠고 빼갖꼬 허리띠를 묶으고 와서 질끈 묶고 가서 ‘자아, 어제는 분명히 내가 사람하고 씨름을 해갖고 사람을 묶었는데, 왜 비찌락몽댕이가 묶어졌는가’ 또 그것이 소문이 다 퍼져가지고 거그는 무선데다(무서운 곳)거가 무선데니까 거그는 저녁에는 못 지나온다고 했어요.

     

    그라고 큰 집 오빠가 진고(진도고등학교)를 걸어다녔어. 거그 뭐냐 학동길에서 북산재 있잖아요.진도 읍내. 정자리에서 북산재를 넘어서 학교를 다녔는데, 갔다오믄 늦은께 큰어머니가 꼭 거그 마중을 다녔어. 그 기종이 오빠를, 기준이 오빠를. 밤에 늦게 오면 무섭다고 꼭 큰엄마가 마중을 다녔어. 그런 거를 쫌 알아요. 아부지가 얘기를 해줘서.

  • 연안차씨와 방귀등

    조사장소 :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둔전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5.28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박세종(남, 80세, 1938년생)


    둔전리는 예전에 민간인이 주둔해갖고 생활을 하면서 자급자족한 마을이라 둔전이라고 했다고 그랍니다. 그래 둔전리는 지금 와서 연안차씨가 둔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마을을 형성했는데 그런 때는 연안차씨를 모르고 뒷굴 차씨라고 했었습니다. 둔전리 마을에 저수지가 있는데 여가 ‘방귀뚱’이라 그러는데 방파제 이러트믄 적을 방지한다는 방, 방귀뚱이 있고 그래갖고 차씨들이 연산편모둥이라고 있는데 편모둥 옆에가 방귀뜽이라고 있습니다. 

     

    방귀뜽은 뭐이라 하냐 그라믄 방귀라는 것은 바다에 사는데 항상 돌대가리 같은 개가 있씨요. 꼭 방귀같이 생겼어요. 요 등이, 이따 여그 보믄 뵈는데. 거가 그 양반들 산소가 있었는데 우리 어려서 가보몬 경주 가믄 능 같이로 크나큰 그런 묘가 있었어요. 그래갖고 모도 개간해갖고 다 없애불어서 딸기밭 그런 것이 되야 불었습니다 거가.

     

    어째서 차씨들이 망했냐 그라믄은 여그 구원이라고 왜정때 일본사람들이 침공하기 전에 막었던 구원이라고 있었습니다. 여그 바로 산 밑에 요리, 여그서 쪼 둔전리 못 가서 연산 요리(여기). 구원을 막은께 여까지 바닷물이 철렁거려서 고기도 낚고 그랬드랍니다. 그랬는데 거그를 막어분께 방귀가 죽제. 갯물을 못 먹은께. 

     

    그래서 차씨들이 망해갖고 이 사람, 저 사람 어디로 뜬지 모르고 다 떠불었어 (떠나버렸다). 그 집을 놔두고 그런 때는 집도 살 사람이 없고 하기 때문에 저런데서 곤란하게 살다와갖고 거그서 뜯어다 맞춰갖고 한 것이 지금의 둔전립니다. 차씨들이 부르던 둔전 마을을 요 밑에로 인자 옮겨서 그거이 둔전리로 인자 되얏죠. 

     

    그런께 내가 지금 생각할 때는 고려말 아니면 이조 아닌가 400여년 400년이 더 된께. 여가. 예, 조선조 중기나 되것습니다. 그란께 사백 한 오십년을 겪는데 그 전에 차씨들이 반촌이라 해갖고 양반들 반촌, 민촌이 있는데 둔전리 여그는 차씨들이 양반이었드랍니다. 그래야만 잘못하는 사람이 있으믄 덕석머리도(덕석몰이) 시키고 한 저 지금 동계, 저 동계 마을에 가든 동계 책이 있는데 그거이 내려오던 그 누구네가 맻섬, 맻섬 하던 그거이 내려 왔었는데 누가 이장함시로 누가 가져가 감춰불었어. 지금은 없어. 참 좋은걸 놓쳐 불었제(잃어버렸다). 

     

    그래갖고 이 차씨들이 완전히 망한 것은 구원을 막아분께 갯물이 안들온께 방귀가 몰라져(말라) 죽제. 방귀등, 여가 방귀등이 차씨들 선산. 선산이여. 지금은 개간해갖고 모도 밭 같은거 하고 지금은 원주 이씨 선산 되얏는데 차씨가 망해불고 둔전이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전에는 말 타고 마을 앞에 못 댕기겠드랍니다. 둔전이란 데가 어찌게 씬지(드세서). 옛날에는 둔전마을 바로 앞에까지 바닷물이 다 들왔습니다.

  • 세등마을의 미륵제와 별신제

    조사장소 : 진도군 군내면 세등리 세등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6.6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곽재복(남, 78세, 1940년생)


    세등에서 일월에 년중 행사로 하는 미특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미륵제사를 준비할려면 언제든지 마을 이장과 새마을지도자. 반장 이 분들이 모든 제물을 준비하시고 그 사이에 제관, 축관, 헌관, 집사 이 세 분을 모든 선택을 잘 하셔서 거기를 가시게 됩니다. 

     

    그 분들 모두 품행이라기보다 가정사에 어떠한 불미스런 점도 있어서는 안 되고 될 수 있으면 청결하고 좋으신 분들로 선정해서 미륵제에 갈 수 있게 해서 정월 열 삿 날 오후에야 입주를 하게 됩니다. 입주를 하게 되면은 이장은 거기에 대한 모든 필요한 제물이나 식사할 수 있는 생활도구를 전부다 운반하여서 준비를 해가지고 열 낫 날 미륵에 가서 에, 문을 깨끗이 정리를 하고 주위 환경 청소 이런 것을 전부다 합니다. 그런 다음 그날 저녁 일몰이 되면은 집사는 거기 가서 촛불을 켜 놓고 다시 막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밤 열한시부터 한시 사이가 자시니까, 언제든지 열한시 넘어서 축관과 제관은 예복을 입고 정한수를 들고, 동 서 남 북 헌신할 수 있는 제물을 들고 가서 미륵에 당도하기 전, 문턱바우에서 제를 모시고 산신을 모시고 동서남북으로 헌신을 한 다음, 미륵에 가서 정한수를 떠놓고 마을의 모든 안녕과 건강을 위해서 미륵제 축을 읽도록 합니다.

     

    축문을 읽은 뒤로 거기서 재배를 하고 막으로 돌아와서 별신제를 지냅니다. 별신제도 미륵제와 같이 마을의 안녕과 모든 농사 풍해, 수해 등 재난을 다 막아 달라는 뜻에서 아, 별신제를 모시고 난 다음 짐대에 가서 제를 지낼 때에는 마을에 남아있는 남자들을 전부다 동원을 해서 즐겁게 행사를 하고, 짐대 밑에서 술 한 잔과 모든 음식을 나눠서 잡수고 놀지요. 거기 짐대에다 고기 그런 것을 넣어요. 그 짐대에 제수를 달아매지요. 소뼈하고 소 턱뼈하고 명태하고 창호지 하고.

  • 어머니 몰래 놓은 노둣돌

    조사장소 : 진도군 군내면 월가리 월가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4.20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김선원(남, 74세, 1944년생)


    월가리에 큰 하천이 있습니다. 예전에 그 하천을 이씨보라는 그저 노두를 놓는 역사가 있는데요. 우리 동네에서 어머니하고 아들하고 이르케(이렇게) 생활을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란데 어느 날 어치케(어떻게) 어머니란분이 덕병이라는 동네에 사는 남자와 눈이 맞았든가 홀어머니가 그 하천을 건너야 덕병을 가거든요. 그란데 하천이 쯤 깊어갖고 그 하천을 한겨울 그 추운데도 맨날 발 벗고 건너다니고 그랬었대요. 

     

    남자는 덕병 살고 어머니는 월가린데 하로는(하루는) 아들이 자다 본께 어머니가 안 계셔요. 분명 한 방에서 같이 잤는데. 그래 이 밤중에 어딜 가셨는고 그라고 그냥 그럭저럭 있다 보니까 자꾸 그런 징조가 나오거든요. 새벽이 되믄 아들이 잠들든 어머니가 없어져요. 그래 어찌케 하다 보니까 어머니가 밤마다 나가는 것을 목격을 했어요. 그래갖고 살살 뒤를 따라가는데 월가리서 덕병 가는 하천을 어머니가 그 겨울에 발을 벗고 건너드래요. 

     

    춘데(추운데)물을 이케 건너간께 아들이 야 이거 이것을 거까지 동네까지 따라갔대요. 뒤를 밟아서. 그란데 그걸 한 두번 아들이 보고는 너무 깊은 하천을 춥게 건너가니까, ‘와, 이거 다리는 못 놓고 내가 이거를 어찌케(어떻게)해서 편하게 건너시게 다니게 만들것냐.’ 이래갖고 보통 사람은 짊어지기도 힘든 그런 돌을 지게에다 져다가 그 노두를 놓아 줬어요. 하천에다가 큰 돌을. 

     

    어머니 발을 차가운 물에 안적시게 해갖고는 하천을 무난히 건너가게 만들었다 해얐꼬 효자라는 소문을 듣고는 어느 지역에서 저 구에서 소문을 듣고 이 씨보에 이 비를 세웠어요. 나도 인자 그 비를 봤거든요. 그때는 그 비가 논에가 있었어요. 남의 농사짓는 논에가 가세(가에)에가 있었는데 그것을 경지정리를 하면서 그 비가 뽑혔는데 월로(어디로) 간지를 몰랐는데 그 비를 다시 찾았어요. 어찌케 찾았는고. 

     

    지금 현재도 이 비를 새로 좋게 만들어가지고 지금 저 냇가 옆에가 정자까지 만들고 해서 비도 좋게 만들고 한 그런 내력이 있습니다. 이씨보라는 같은 비석이고 정확하진 않지만 지금 현재 군수님하고 같은 형제 간 내력이 아니라 그런 같은 뭣이거든요. 이씨라 해도 경주 이썰 거이여. 전주이씨. 그랑께 군수님도 지금 알고 계십니다. 그 아들이 이씨요. 그래갖고 보존을 잘 하고 있습니다.

  • 지박구산에서 정성을 다해 모시는 충제

    조사장소 :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 정자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5.18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강남철(남, 63세, 1955년생)


    우리 마을에서 충제를 모시는데요. 옛날부터 어르신들이 계속 모셔왔었습니다. 그런데 인자 날짜는 유월 초하룻날 음력으로 되겠습니다. 제관은 두 명이 하시는데요. 지금도 계속 연이어서 하고 있습니다. 충제를 계속 모시면서 오다가 중간에 충제를 안 모신 해가 있었는데, 그 해에 동네에서 불미스런 일이 많이 일어나가지고 어른들이 두 명이 돌아가셨고 젊은 사람 한 사람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충제를 안 모셔가지고 그런 일이 있었다 그래갖고 그 다음해 바로 충제를 모셔서 지금까지 계속 모시고 있습니다. 

     

    전에는 제관들이 하루, 거기서 모든 것을 준비해가지고 제사를 모셨지만은 지금은 산이 너무 우거지고 또 모든 것이 불편사항이 있어갖고 집에서 준비를 해서 그날 하루 이케(이렇게) 제관을 두 분 모셔갖고 하고 있습니다. 제관들은 인자 손이 없고 또 삼재가 안 든 사람으로 해서 우리가 선정을 해가지고 아주 철두철미하게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제를 모시는 장소는 지바구산이라고 마을 뒷산에가 있습니다. 산이 상당히 쫌 넓습니다. 진등산 바로 밑에 그 지바구산이 있는데 거기서 모시고 있습니다. 샘이 하나 있는데 그게 천수답이 있는 그런 곳인데요. 그란데 그 샘이 가을에는 다른 데로 가면서 여름에는 그 샘물이 보는 데로 옵니다. 그 물이 하도 청명하고 물이 없는 것 같지만은 그 물이 그렇게 깨끗하고 그 마을에 가장 보배스런 물터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그날 충제를 모시는 것은 우리 마을에 병이라든가 충이라든가 없애는 날로 해가지고 일제히 그 날은 하루 들녘에 안가고 집안에서 동네 안에서만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주 옛날에 내가 알기만 해도요. 아침 새북에(새벽에) 제관이 두 명이 딱 차출이 되믄요. 이른 아침 새벽에 올라갑니다. 전부 첼(천막)을 갖다 치고 그 우게(위에) 지샘이라 해서 그 샘에서 그 물을 다 퍼서 건져 내불고 다음에 올라온 새 물을 질러서(길러서) 이고 가서 질 때까지 가서 거그서 돼지잡고 전부 그랬습니다. 지끔은 그런 것이 없어졌지만. 

     

    돼지는 삶아서 머리만 쓰죠 거그서는. 일단 그라고 그놈 갖고 와서 이자 제 모시고 와서 그 다음날 마을 사람들 모도 나놔서 같이 자시고 그랬습니다. 우리 알기로는

  • 정자리는 암소가 넓은 들녘을 품은 형국

    조사장소 :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 정자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5.18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김진일(남, 68세, 1950년생)


    정자리 위치가 옛날 어른들이나 지관들 말씀을 들어 보면은 정자리 앞 동네, 저기 동산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정자리 위치가 갯갓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그래요. 정자리 뒷산이 마치 암소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형상이라는 거예요. 뒷산이.

     

    그러고 지금 우리들이 확실히는 모르지만 정자가 지어졌던 자리가 우리말로 오동메산이라고 그러는데 오동메라는 산이 딱 똥그랗게 이렇게 산이 지어져 있어요. 산이 조성이 돼있는데 이것은 그 소의 배설물인 똥, 소똥인 자리다 이렇게 얘기합디다. 그러고 그 소가 이 앞에 넓은 지역을 딱 안고 있기 때문에 물은 많아도 옛날 말로는 물이 많으믄 부자라고 안그럽니까. 

     

    그런데 저쪽에 그 오동메산하고 저쪽에 분산지역하고는 수로가 짧아요. 그래서 반대로 정자리가 지역이 넓어가지고 부자가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흐르는 말로는 뭐 어렸을 때 들은 얘기론 저 앞에 동산에서 정자리로 바라볼 때 수역으로 넘어오는 가은 광재가 있는데 옛날에는 숲이 이렇게 우거졌기 때문에 멀리서 보몬 길이 뻥 뚫렸지. 그러니까 마치 소 목이 짤리는거 같이 보인다는 건데요. 

     

    그 앞에가 아까 연골이란 지역 쪽이 부주산이 소머리로 보이고 정자리 뒷산이로 소 몸통이고 그 다음에 오동메 산은 소똥으로 보이는데, 그때 지관이 저기에 큰길을 내면 정자리는 사고가 생길텐데 이래요. 내가 어렸을 때 동산으로 지관을 모시러 갔다 올 때 당골네하고 같이 그런 말씀들을 한 걸 들은 적이 있어요. 어쨌든 정자리 여그가 그런 걸로 봐서는 인구, 사람 사는 거에 비해서는 넓은 지역을 가졌잖아요. 

     

    그러고 창목만 넘으면 지금은 저쪽에 한일을 막았지만 옛날에는 다 바다였으니까. 또 갯것도 먹을 것이 많고 안쪽으로 들어오든 농산물도 많고. 그래서 정자리는 동네가 발전이 될 것이다. 그러고 여튼 이것은 지어낸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이 앞산이 오동, 저기 중매산이라 우리는 중매라 하는데, 어느 어른들은 옛날 한 육칠십년 전 기준으로 봤을 때. 유일하게 정자리 한 동네에서 판 검사가 나온 동네다 한동네서. 

     

    넓은 들녘을 가진 지역이라 먹을 것이 충족하고 앞에 중매를 문필봉으로 바라보면 이 정자리에는 문장가나 세도가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옛날 어른들이나 지관들이 말을 하고, 정자리 산세를 그렇게 봐왔습니다.

  • 옛 지명에 담긴 조상들의 선견지명

    조사장소 : 진도군 군내면 죽전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시 : 2017.4.18

    조 사 자 : 박정석, 박영관

    제 보 자 : 이승희(남,89세,1935년생)


    그 지형이라는 것이 참 이상한 것인데 이쪽 지역에 보믄은 이쪽에 ‘큰들’이라는 지명을 가진 동네가 있고, 그다음에 우리 동네로 와서 ‘공선구지’라고 옛날부터서 공선구지라고 그러는데, 공선구지라는 그 얘기가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 지금 와서 보믄은 몇 백 년 전에 어떻게 했으믄, 우리 선조들이 이름을 그렇케 진 것이 지금에 와서 꼭 그 지명과 현실과 꼭 맞게 되는냐 하는 것이 참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고, 지금 우리가 생각을 해보든 큰들만 하데라도 누가 봐서 큰 들에 동네가 있었는데 거기가 들이 생길 줄을 알거이냐 그말이여. 

     

    근데 한문이로 써서는 대야, 그러믄은 인자 큰들 아닌가? 그런데 큰들이라는 것은 옛날 몇 백 년 전부터 큰들, 그렇게 해서 이름을 지어 왔는데 지금은 완전히 거기가 박정준씨 매립한 백정복 그거를 중심으로 해서 완전하니 큰들이 되야부렀다 하는 것이 딱 맞어 들어가고, 공선구지만 하더라도 보통 이야기를 공선구지, 공선구지 그라는데 ‘꾸지’ 그러믄은 육지가 바다 쪽에 쭉 뻗어나간 것 보고 꾸지라고 이러는데, 입구 구에다가 이래 하나 내려 끗는 다음에 ‘곶지’라고 그라고 ‘고지’라고도 하거등.

     

    근데 공선구지 그러는데 나는 공선구지 하는 얘기가 공선, 빌 (공)자, 배 (선)자. 공선꾸지거등 그래서 진즉이 공선꾸지라는 얘기는 조선소를 암시하고 있지 않으냐. 그런 것이 인자 이케 이제 일치가 되는데. 그런데 그쪽 지역이 또 이제 이상한 것이 공선구지 뿐만이 아니라 죽전 동네를 에워싸고 있는 산이 ‘근대산’이거든. 근대산인데 그것이 바로 조선소가 시작을 했던 바로 그 울타리 한나 그 곳에가 속에가 들어가 있단 말이여. 그래서 근대산, 근대산 그러는데 걸어진 배다 그렇케 해석을 하몬은 지형적으로 맞을거 같고. 

     

    또 한 가지는 내가 지금 조선소 독구불이 자리에가 원래 우리 선조들의 선산이 거기가 있던 자린데 그 선산에 이묘를 할라 할 적에 옛날에 덕병에 살던 김치화씨라는 분이 있어. 내가 어렸을 땐데 김치화씨 라는 분이 오랜동안 지사로 이래 돌아다닐 땐데, 그 분을 모시고 가서 고 부분에를 갔더니 치화씨 그분이 가서 자리를 잡어 주면서 첫 번째 하는 얘기가 뭔 얘기를 하는고 하니. “아이참, 이상하네. 여기는 묘가 들어갈 자리가 아니고, 쇠소리가 날자리라고 되어 있는데 이상하니 묘가 들어갔네.”

     

    아, 그런 얘기를하더라고. 그러길래 그적에는 먼저 그런갑다 하고 그라고 그냥 듣고 흘러 보낼 정도로 그렇게 됐는데 인자 지나고 보니까 분명하니 거기는 쇳소리가 나는 독구불 자리다 그 말이여. 그러고 그 바로 앞에 있는 산이, 조그만 산이 하나가 있는데 그 산이 인제 분무굴이라는 굴이 이케 쏟아져 나와서 거기 보고 여기서는 속칭 불무굴, 불무굴 그러는데 불무굴이라 하믄 불무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그것들을 얘기 하는데 그 치화씨라는분이 그쪽을 또 얘기를 하더라고. 


    “저 건네 저것이 뭐시라 한디야?”“아, 거기 보고 이제 분무굴이라 한답니다.” 그란께. “어,그려. 분무굴이 맞것다.”“그라나 저 건네 있는 저 섬은?” 그쪽에는 지금은 거기까지 이제 매립이 되얏고 물이 안들어 오지만은 그쪽에는 섬이 또 뭐라하냐 한나 있어갖고 물이 사방으로 이케 들어오게끔 들어갔다 나왔다 하기끄름(하게) 되었는데. “저 섬은 뭔 섬이디야?”“서당섬이라 그럽니다.”그랑께.“아니다 이놈아, 그거이 뭔 서당섬이여? 쇠당섬이다.” 

     

    그래. 그 쇠당섬이 뭐냐 하몬 그 머릿독을 얘기를 하는 거 같어. 성난간에 머릿도올. 그것을 얘기 하는 거 같어. 그러고는 그 양반 얘기한데로 거기는 완전히 그 부분에는 쇳소리가 나고. 불을 담굴고, 쇠로써 뭣을 만들고 하는 데가 조선소여. 

     

    현재 일하다 나는 독구불이 자리라 그래, 독구불이 자리. 그러믄 그것이 그 지형하고 이름하고 현재 요런 것 하고 똑같이 맞어 들어가지 않느냐 이 말이제. 그래 그런 것들을 봤을 적에 참 모두 그 지형이나 사람 이름도 물론 그러겠지마는 그 지형이름이라는 것도 그렇게 옛날에 지었어도 요즘까지 그케 딱 맞아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런 것을 말씀 드리고 잡고.

  • 내 복으로 산다

    조사장소 : 전주시 완산구 중인동 원중인마을에서

    조사일시 : 2000.5.20.

    제 보 자 : 최순복(여,73세)


    옛날에 거시기 딸이 셋인디. 딸이 셋인디. 인자 지아부지 지어매가 데리다 놓고 인자 물어봤어. 너는 누 복으로 사냐? 아부지 복으로 산다. 너는 누구 복으로 사냐? 저도 아부지 복으로 산다고, 엄마 복으로 산다고. 막내딸을 불러다, 너는 누 복으로 사냐고? 저는 제복으로 산다고, 나는 내복으로 산다고. 혀서 내쫓아 붓어. 인자 제복으로 산다고 허니께, 지그 부모복으로 산다고 안하고 제복으로 산다고. 근게는 쫓아내부렀어. 내복으로 산다고 하니게 나가봐라 니가 니복으로 사는가. 나가 봐라. 쫓아내서 나갔넌디. 

     

    나가서 인자 보따리 하나를 들고 산중으로 간게. 인자 나무꾼이 있어. 나무꾼이 있는디, 나무꾼을 따라서 갔어. 참, 부자집 큰 애기가 온게로 어떻게 헐 수가 없어. 그 집서 밥을 먹여서 재워야지 어찌. 밥을 먹고선 잤는디. 독으로 이렇게 담을 짓고 집을 짓고, 토담집을 독으로 담을 싼 집을 졌넌디. 토담을 져서 집을 졌는디, 자고 난게 그게 다 금덩어리랴. 지그가 짓고 사는디, 큰 애기가 들어 갔더니 그게 다 금덩어리랴. 근게 다른 사람 눈에는 안비여. 근게 그 큰애기 눈에만 그게 금덩어리지. 근게 그놈을 그 독을 빼다가 줌서 총각한테 팔아갖고 오랬대. 시내가서. 그런게로 그 독을 어떻게 파냐? 근게로 그냥 내 말만 듣고 팔로가라고 글디랴. 근게 암말도 말고 갖고 팔아갖고 오랴. 

     

    그래 그놈 팔아갖고 온게, 갖고 가서 팔고 팔고 한 것이 부자가 돼서 잘 살았어. 부자가 돼서 참 그것을 팔아갖고 참 집도 잘 짓고 부자가 돼서 잘 사는디. 지그 아부지가, 지그 아부지 지그 엄마는 헐 수 없이 돼았드랴. 헐 수 없이 돼아서는. 그래갖고 어매하고 아부지하고 인자 그 산골짝으로 이렇게 왔는디. 그 딸네 집으로 얻어 먹으로를 왔드랴 얻어 먹으로 와서 본게 직어매(*자기 엄마) 직아부지드랴. 

     

    그래서 그 딸이 본게로. 인자 지그 엄마로, 인자 반갑게 험서. 우리 엄니가 왜 거시기 하냐고. 근게로, 인자 그때사 딸복으로 살았구나 싶어서. 딸이 어매 아부지를 모시고 잘 살았드랴. 그렇게 그 딸이 잘 모시고 그렇게 잘 살드랴. 근게 눈으로 안보이는 복이 있어야 잘 산다고. 그런 복도 타고난다고. 그렇게 해서 잘 산다고 근다고, 사람들이 글드라만.

  • 고을 원님 된 하인

    조사장소 : 전주시 완산구 중인동 원중인마을 노인당에서

    조사일시 : 2000.3.11.

    제 보 자 : 고석진(남, 74세)


    옛날에 원님 하나가 사는디. 늙은 하인을 한나 두고, 아 원님 밑에는 하인이 있을 거 아니여. 하인이 원님에게다 참 잘히여. 근게 밤나 거시기가 하는 말이, ‘내가 죽기 전에 너 어디든, 조그만한 골살이 하나를 주마.” 말하자면, 늙은 하인이 더 잘 할거 아니여. 정성들여지다가. (조사자 : 골살이요?) 골살이하고 하는 것은 요새 군수급 아니라고. 군수급. 옛날에는 골살이라고 그려. 군수 요새는 고을 거시기, 고을 원님이제. 근디 옛날, 어, 그 시방 국무총리지. 시방은 자격이 있어야 주는디. 옛날에는 자기 명령으로 주었거든. 옛날에는 삼정승 육판서라고 글안혀?(*그렇지 않어?) 근디. 정승 하나가 있는데. 늙은 하인 하나가 참, 겸손하게 자기한테다 다 잘한게. 내가 아무튼지 생전에 너 어디 조그마한 골살이 하나를 주마고 근게 하인이 더 잘하지. 

     

    아 그런디. 나이가 다 해서 인제 정승이 나이가 많이 먹어 갖고. 다 죽게 생겼는디. 골살이는 커니. 주들 아니혀. 근게 속으로는 괘씸하지. 하인이. 이제 정승이 몸이 좋지 안 해갖고, 이제 누워서. 피접을 허고, 이제 데리고도 못 나가고. 근게, 이제 늙은 하인이, 아들은 정승이 서넛 되었든 가 비여. 예를 들어서 서울 사는 서방님, 부산 사는 서방님. 시방 이 샌님께서 금방 운명하실라고 한게. 근게 쉽게 말해서 종신허시라고 다 불렀지. 근게 이제 아들들이 말허자면, 아들들도 정승 아들들인게 모다 고관대작을 지내고 다 잘 살거 아니여. 

     

    와서 있는데, 아 이 앵감이 쉽게 정승이 죽도 않네. 그래서 아들들이 어떻게 급한 맘에 다 왔는디. 하루 지나 이틀 지나 죽도 않은게. 소변본다고 나간 놈도 있고, 대변본다고 나가고, 담배 핀다고, 바람 쐰다고 나가고 아들들이 다 나가. 인제 어찌 지친게. 그런디 아, 이 하인이 가만히 생각해 본게 이거 금방 죽게 생겼거든. 죽어도 시방 나 골살이 하나 준다더니 영영 안 줘. 말을 안히여. 근게 아들들이 다 나간게. 하인은 하인이, 뒤지든지(*죽든지) 말든지 이놈의 영감 골살이 하나 준다더니 주도 않고 다 죽게, 숨 뚝 죽어불먼 어떻게 타겄어. 말하자먼 우리가 비고 자는 목침이라고 그러제. 목침으로 대감 목아지(*목)를 들이 쳐버렸어. (조사자 : 늙은 하인이요?) 

     

    응. 아 근디 글안해도 죽게 생긴데다가 이 놈 목아지를 한번 들여 맞아 버렸으니, 살겄는가? 말도 못허고 인제 허울적 허울 뻐르적 뻐르적 헌게. 늙은 하인이, “큰서방님 들어 오시오. 큰서방님, 작은 서방님 막 들어 오시유. 샌님께서 금방 운명허신게. 빨리빨리 들어오시유. 들어오시요. 빨리 빨리라.” 들어와서 본게, 자식들이 아까보단 병세가 나빠져 가지고 금방 죽을라고 그려. 근게 정승이 인자 말은 못 허고, 목침을 가리킴서 저 하인이 목아지를 때렸다고 가리킨게.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씀 좀 해보쇼.” 모른게, 하인이 허는 말이, “서방님들 그게 뭔 말씀인지 몰르지요?”“응. 모르지. 뭔 말인가.”“샌님께서 살아 계실 적에, 저를 목촌 고을이라는 고을 골살이를 하나 주기로 했소. 목촌 고을을 주기로 했는디. 내가 이렇게 아픈게 말을 못헌게. 못 주고 눈을 못 감고 죽는다고. 나를 갈치는 것은 저 사람 목촌 고을을 주라 그 말이요.”“아이고 아버님 눈 잘 감고 가시오. 저 사람 틀림없이 목촌 고을 골살이를 줄틴게. 걱정말고 가시유.”허허허. 지혜가 있어. 그 늙은 하인이. 근게 얘기지.

  • 당산나무 잘못 건드리면 꼭 죽는다

    제 보 자 : 문평섭(남, 77세, 신풍마을)


    우리 마을도 당산나무가 두 개가 있어. 그런데 옛날에 그 당산나무 가지를 산삼하는 사람이 차에 걸린다고 짤라부렀다고 그래. 두 그루가 쌍으로 있고 밑에 하천에 한 그루가 있고 세 그루가 있는디 그 두 그루 중에서 한나를 차가 걸린다고 짤라부렀어. 그래갖고 사람이 여남은씩 죽었다고 그래. 그 뒤로 새마을사업이 일어나면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은, 당산나무를 놀기 좋게 한다고 산 나무를 갖다가 뭐하러 그랗게 할 것이여. 

     

    산 나무 가세를 멀지감치 독을 딱 쌓고는 나무하고 공간이 없이 딱 세멘으로 믹스를 해부렀네. 내가 서울에서 내려와서 올 무렵에 보니까 그렇게 되어있더라고. 나무가 뺑 둘러져 있어서 곰팡이가 피고 썩어 들아가고 내가 그때 뭔 일이 있어가지고 장흥군청회의 하는 데를 갔었는데, 장흥군수가 “신풍 이장을 구속을 시키든가 해야지. 세멘을 떨어낼란가 몰라도 그 좋은 나무를 배려불고 있다”고 그래. 그런 말을 듣고 와서 회를 붙여서 청년회를 동원해서 그때는 포크레인이 없어서 수백만 원 인건비 들어서 정으로 떨어냈어요. 청년회에서 달라들고 그래서. 

     

    그때도 이 세멘을 한 사람부터 이장을 한 사람하고 그때 주동이 된 사람 팔구명이 죽어부렀어. 젊은 사람들인디. 마을에 젊은 사람들 변사를 추적을 해보니까 그 시기가 맞아 떨어져. 그놈 파분 뒤로는 그런 일이 없어. 그런 일이 없으니까 나무도 신이 있지 않냐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란께 신학은 공부를 많이 하믄 달관한 인물이 나온가 모르겠습니다만, 옛날 구학은 공부를 많이 하믄 천지이치를 깨달은 달관한 인물이 나온다 그래요. 그라은 인자 동방의 우리나라에서도 퇴계 율곡 그런 분들은 달관을 했다고 그래요. 

     

    (시멘트를 떼어낸 후엔 마을이 안정을 찾았나요?) 늙은 사람이 죽는 것이 원칙인디 중간 사람들이 죽어나가니까 추적을 해보니까 이장을 한 사람만 죽었어. 그런 일이 있더라고요. (당산나무 잘 살고 있어요?) 잘살고 있제. 그란디 그것이 묘해 당산나무 가지가 번창하고 하루는 이장님이 나보고 “군에서 태풍이 불었는데 나무가 째지고 그래서 가지를 정리를 한다고 그란디 어째야 쓰까라?”그래. 그래 “난 말 못 하것네. 옛날에 그런 변사가 두 번이나 있었는디 난 못하것네” 그랬는디, 군에서 어떻게 기술적으로 했는가 그때는 아무 이상이 없어. 

     

    군에서 주기적으로 와서 위험성이 있는 가지는 제거해. 그것은 괜찮애. 그란디 이제 그때 나무가 참말로 곧 죽게 되어있었어. 손바닥 같은 버섯이 나서 파보니까 그때 다 썩어부렀어. 그래갖고 군수가 마을에 와서 얘기하니까 나무를 살리자고 그때 돈이 상당히 들어갔어. 근세에 있는 일이에요. 그란께 이것이 참 우리가 미신이라고 한 일이 진실일 수도 있고 사람 나이를 먹고 살다보믄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있더라고요.

  • 친구를 위한 거짓 점쟁이

    옛날에 같은 서당에서 동문수학하는 돌이와 두꺼비라고 하는 두 아이가 있었다. 돌이네는 만석 거부요, 두꺼비네는 가난하여 부모들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자식을 가르치겠다는 일념에서 서당을 보내고 있었다. 돌이는 친구 두꺼비를 도와주고 싶으나 아버지의 재산이며 아버지가 구두쇠라 도와주자고 하여야 도와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돌이인지라 여러가지 생각 끝에 두꺼비를 유명한 점쟁이를 만들어서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두꺼비에게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 은 반상기를

    뒤뜰 모과나무 고목속에 갔다 놓을 것이니

    두꺼비 너는 모르는 척하고 와서

    코로 냄새를 맡아서

    은 반상기를 찾도록 하여야 한다”


    라고 말하고 서당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아무도 모르게 은 반상기를 모과나무속에다 감추어 놓았다. 물론 집안에서는 소동이 났다. 그때는 어머니에게 우리서당에 잃어버린 물건을 잘 찾은 아이가 있으니 그 아이에게 물어 보자고 하였다. 돌이는 이렇게 하여 두꺼비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그리하여 여기저기 냄새를 맡는 것처럼 하다가 모과나무 고목속에서 은반상기를 찾아 들고 나왔다. 이렇게 하여 많은 보수를 받아서 가난을 면하고 소작논을 받아서 두꺼비 아버지도 남의 집 머슴살이를 면하였다. 이렇게 되어 돌이와 두꺼비는 더욱 친한 친구로 우정을 이어서 동문수학 하였다.


    그런데 두꺼비가 코로 냄새를 맡아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다는 소문은 입과 입을 통하여 번져가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는 후로 두꺼비라는 사람은 모든 것을 알아내는 용한 점쟁이로 널리 알려져 궁중에까지 소문이 퍼졌다. 이때에 중전이 아이가 없어서 몹시 걱정되어 두꺼비를 불러 들였다. 실제로는 두꺼비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으니 중전앞에 서게 된 두려움이야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에 임금이 내전에 들어 오다가 왠 사람이 중전앞에 있는 것을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그 사실을 듣고 임금은 일관을 시켜 중전 뜰 앞에 있는 큰 돌로 두꺼비를 눌러놓고 임금은 저 돌 밑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다.


    두꺼비는 겁에 질려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생각에서 무심코 나오는 소리가 돌이 때문에 애민 두꺼비가 죽는구나 라고 했다. 이때에 임금옆에 섰던 일관이 무릎을 딱 치면서 용케 앞서 맞췄다고 하면서 일관은 돌 밑에 두꺼비가 죽게 되었다고 하니 정말 정확하게 알아 맞췄습니다 하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은 그렇다면 중전은 언제 아이를 갖겠느냐 하였다. 두꺼비 겁짐에 얼른 대답한다는 것이 오늘 저녁입니다. 그래서 그날 내전에서 자게되었고 그후로 후사가 있었다.


    두꺼비는 음관 주부벼슬이 내려졌다. 이렇게 되니 완전한 역리학자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공교롭게 중국의 임금이 옥쇄를 잃어 버렸는데 찾을 길이 없었다. 중국에 모야라하는 역리학자 그리고 무속들을 총동원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런데 조선에 유명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사신이 왔다. 그래서 궁중에서 두꺼비를 보내기로 정하여 후한 여비를 주어서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중국에 도착하니 중국에서도 칙사 대접을 하였다. 그래서 훌륭한 객관에 머무르도록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조용한 외딴집을 마련해 달라고 하였다.


    그 곳에서 쉬면서 한 달 말미를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한 달은 다 되어가고 몹시 불안하여 그날 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일이면 이제 죽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으니 잠이 오지 않을 뿐만아니라 유난히 바람이 불어서 문풍지가 서럽게 울어댔다. 얼마나 한심 하겠는가? 그래서 "야 이 놈의 문풍지야 내일이면 나 죽는다” 하는 말을 연거푸 말하였다. 그런데 어떤 놈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큰 절을 하면서 “저를 살려 주십시오” 옥쇄는 제가 훔쳐다 저기 연못에 던졌으니 제가 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의 목숨하나 구해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두꺼비는 “너의 목숨은 구해 주겠다마는 그게 사실이렸다?” "예,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성안에 있지 말고 멀리 떠나거라” 하였다. 이 사람의 이름이 문풍지였고 조선에서 유명한 사람이 왔다 하니 매일저녁 이방 근처에 숨어서 동정을 살피는데 “야 이놈의 문풍지야 내일이면 너 죽는 다” 로 알아듣고 이와같이 사정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날 궁중나리를 불러 저 연못의 물을 다 품도록 하여라. 


    명하고 물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과연 옥쇄는 그곳에 있었고 중국 임금은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금은보화를 받고 조선땅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만약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이 많은 재산을 두고 죽을 수는 없으니 변명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 끝에 눈을 하나 쑤셔 버리고 중국에서 치료하고 돌아와서 이제 눈이 하나 없어지면서 영이 없어져 버려서 이제는 바보가 되었다고 소문을 내고 돌이와 함께 부자로 살았다고 전한다.

  • 성낭고개의 전설

    성낭고개의 전설은 성악고개이다. 순창읍에서 서남쪽으로 2km쯤 가면 작은 고개가 있어 풍산면 죽전리로 넘어가고 이곳에서 서쪽으로 아미산을 넘어가면 금과면 발산리로 가는 길이다. 이 고개에 예로부터 몇 가구의 산촌마을이 있었는데 순창읍을 드나 들면서 떡 장사를 하는 할머니가 살았다. 매일 떡을 만들어 팔고 석양이면 이 고개를 넘어 이 산촌마을로 돌아오곤 하였다. 하루는 떡을 팔고 다음날 떡을 만들 찹쌀과 팥을 사가지고 고갯길을 넘어 오는데 고개 마루에 어떤 사람이 누워 있으나 남녀가 유별이라 모른 척하고 지나오는데 사람 살리라는 가느다란 소리가 들리었다.


    할머니는 귀를 의심하고 서 있는데 다시 사람 살리라는 소리가 겨우 들릴 정도였다. 확인하여 본즉 고개마루에 누워있는 사람의 소리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물어본즉 배가 고파서 탈진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집으로 달려가 먹을 것을 갖다 주었더니 감식을 하고 일어서서 고맙다는 사례를 하고 떠나려고 하였다. 이같은 인연으로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는데 매일 밥만 먹으면 산으로 돌아다니다 저녁이 되면 돌아오곤 하였다. 이 사람은 곡성에서 풍수지리설을 배우고 실지 답산을 하기 위해서 이곳 아미산에 왔다가 배가 고파 탈진하였던 김영감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말을 할머니에게 하지도 아니하고 할머니도 묻지도 않았으며 몇 달이 지나서 엄동설한이 되었다.


    이때에 떡장수 할머니 집에 심부름을 하며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늙은 총각이 있었다. 할머니는 이 노총각이 안타까웠으나 별로 도와주지 못하였으므로 노총각에게 말하기를 언제까지 노총각으로 늙겠느냐 우리집 영감님에게 부탁하여 묘자리를 하나 얻어 써서 한 때를 보고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할머니는 영감이 지리에 통달한 사람임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이 같이 노총각에게 권하였다. 총각은 그 말을 듣고 영감에게 매달려 사정을 하였다.


    "저도 한 때나 보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더니 처음에는 모른다고 거절하다가 할머니가 말한 것 이구먼 하면서 승낙하였다. 즉 할머니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노총각에게 묘자리를 주어 할머니의 장래를 맡길 생각에서 노총각의 어버이 묘를 정하여 주었다. 그리고 곧 만석거부가 될 것이며 장가도 들어 아들 7형제를 둘 것이니 그 때가 되면 묘를 옮기도록 하라고 부탁하고 할머니와 헤어져 떠나 버렸다. 때는 이른 봄이라 총각은 할 일이 없어 양지쪽에 누워있는데 아미산 쪽으로 상여가 가더니 묘를 만들어 놓고 상주들이 다 간 후에 올라가 보니 묘의 봉분이 엄청나게 크고 제사를 지낸 흔적이 없고 봉분 옆에 큰 바위가 붙어 있었다. 총각이 힘은 셌는지 바위를 밀어보니 굴이 있고 바위는 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들어가 보니 여러가지 금은보화가 가득 차있었다. 노총각은 이 돈으로 거부가 되고 장가를 들어 아들 형제를 두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하나씩 죽어가니 재산도 차츰 몰락하여 갔다. 6형제가 다 죽어버리고 막내아들 하나가 남았는데 떡장수 할머니가 영감님에게 찾아가라고 시켰다. 서둘러 곡성땅에 들어 물어물어 찾아 갔더니 영감 왈, "이제는 늦었노라, 7형제를 두면 바로 옮기라 했는데 이제 와서 어찌하자는 것이냐” 하면서 “그 자리는 거문고혈로 소리를 낸 후에는 줄을 풀어 놓는 것이니 만석 소리를 듣고 7형제를 두었으면 그때 바로 영감님을 찾았으면 될 일인데 배부르고 귀하게 되면 사람들은 옛 생각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개구리가 올챙이 적을 모른다는 말이 생기고” 이 고개를 이때부터 성악(聖樂)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말의 변천에 따라 성낭고개라 부르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그곳의 옥녀탄금(玉女彈琴)혈을 옥녀봉 밑에서 찾고 있다.

  • 염라대왕이 있는 저승길

    세상 모든 사람들이 믿지 않은 것처럼 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세관을 가지고 있다. 신앙을 가진 종교인들이야 극락과 지옥을 믿고 있으니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신앙인이 없는 사람들도 대부분 저승이 있다고 생각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하간 저승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탁병문은 형님 그렇다면 저승 갔다온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탁병호는 겨우 몸을 가누면서도 큰 소리로 말을 시작하였다.


    내가 누워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나를 가자고 하기에 어디에 가느냐고 물었더니 가보면 안다고 하면서 재촉하여 따라 나섰더니 서쪽으로 얼마를 갔는지 바다도 같고 강도 같은 물가에 도착하였다. 이때 어디에서 왔는지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사람들은 나를 보고 저 강아지를 따라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보니 바닷물인지 강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물위에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었다. 하얀 강아지는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가고 나도 따라갔더니 무사히 외나무 다리를 건너갈 수 있었다.


    한참 가고 보니 웅장한 궁궐 같은 집이 나타나고 집 앞에 당도하니 개는 간 곳이 없고 어떤 사람의 안내를 받아 집 안쪽으로 들어서니 많은 사람이 책상을 놓고 접수를 받고 있는데 그 속에 당숙이 앉아 계시면서 너 어찌 왔느냐고 하면서 너는 아직 올 때가 못 되었는데 동명이인이 있어 왔구나 하면서 어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었다. 당숙은 바로 병문이의 아버지였기에 당숙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저승 구경이나 하고 가겠습니다. 하였더니 쾌히 승낙하면서 들어가라고 하였다.


    안으로 들어서 보니 엄청난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고, 저 높은곳 용상 위에 앉아있는 이가 염라대왕이라 하였다. 그래서 극진히 절을 하고 제가 어떠한 연유로 돈도 없고 자식도 없습니까? 하고 말하였더니 그 옆을 가리키면서 그곳에 가서 물어보라고 하였다. 옆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가서 내가 복이 적어서 부자는 못된다고 하더라도 어찌 저는 아들마저 적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말하기를 인연이 아닌 사람과 만나서 살았기에 아들이 하나 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나의 인연은 어디에 있으며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인간의 인연은 모두 셋인데 첫째,인연을 두 사람 모두 못 만났기에 그 사람도 시집을 갔으나 헤어져서 지금 유등면 건곡리에 친정 어머니와 지금 배를 메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여기저기 구경을 하는데 이승과 똑같이 모두들 살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곳을 갔더니 이상호가 큰 황소를 물고 논을 갈고 있기에 자네는 이곳에 와서도 논을 가는가라고 물었더니 자네가 알다시피 이 소를 잡아먹었기에 그 죄로 이 소에게 갚으라고 하여 하는 수 없이 죄 닦음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사람 이상호는 전란때에 부잣집에서 남의 집을 살았는데 전란이 나자 황소를 몰고 집으로 왔었다. 불행하게도 군대가 주둔하여 이 황소를 도살하여 먹어 버렸다. 그후 이상호도 전염병으로 죽었는데 이와같은 죄 닦음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느 곳을 갔더니 구림 재당숙이 집도 없는 산야에서 움막을 치고 있었음으로 당숙 어찌 이러고 계십니까? 하였더니 저 병의 때문에 이렇게 지키고 있다고 하였다. 병의는 병호의 재종 동생으로 전란때 끌려가서 죽었는데 어디에서 죽었는지 확인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곳을 형님이 지금 알 수 있습니까? 물었더니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며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우리나라 명산인 백두산을 가보고 싶다고 말했더니 백두산을 안내받아 구경하였다고 하면서 백두산 천지가 거대하여 물이 파랗게 맑으며 삼지연 연못이 어떠하고 노천 온천 또는 폭포 등을 설명하는데 실지로 보지 않고는 말할 수 없도록 잘 알고 있었다.


    탁병호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학교를 다니지 못했기에 지리공부를 한 병문이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저승 이야기는 많았으나 오래되어 기억할 수가 없고 이승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은 그 죄 닦음을 하고 있는 광경은 목불인견이라면서 절대로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말을 열 번도 더 하였다고 한다.

  • 한날 네 처를 거느린 사나이

    옛날 모계사회때는 뭇 여자가 종족번식을 위하여 건강한 사나이를 거느라고 살았다고 하나 가부장 제도가 시작되면서 부터는 한 남자가 여러 여인을 거느리고 사는 예가 있기는 하였으나 한날 네 처를 거느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사회제도가 용납하지 않았다. 성을 갖게 되는 고려때에 노성 윤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가는 구림면 어느 산골마을에 외아들을 둔 윤씨가 아들을 혼인시키기 위하여 여러곳으로 구혼을 하였다. 그런데 근동에서는 가난하기에 혼사가 이루어지지를 않았다. 매파의 중매로 혼사가 이루어진 것은 충청도 어느 고을이었다.


    그래서 대례 날 갈 수는 없었고 몇일 전부터 걸어서 그 마을 앞 주막집에 전날 도착하여 자게 되었다. 윤씨는 저녁을 먹고 심심하여 내일 행례를 치러야할 아가씨가 어떻게 생겼는가 궁금하여 잠이 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이몽저몽하다 자정이 넘었는데도 잠이 들지 않아 밖으로 나와서 동구 밖으로 걸었다. 그런데 나뭇가지에 무엇이 흔들거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이 나뭇가지에 목을 매었다. 급히 쫓아가서 줄을 풀고 땅에 뉘여 놓고 온몸을 주무르고 문질렀더니 숨이 되돌아 왔다. 그때서 살펴보니 아름다운 여인이였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린 여인은 오히려 살려 놓았다고 항의를 하였다. 연유를 알아보니 그 여인은 그 고을 부잣집 딸로 그날 혼인식을 하던 처녀로 행례장에 나오는 신랑이 지지리도 못나고 키가 난쟁이인 것을 보고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행례를 거절하고 있다가 밤이 되어 집을 나왔는데 그 신랑과는 도저히 평생을 살 수가 없고 달리 방법이 없어 죽기로 하고 목을 맸는데 이렇게 살려 놓았으니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할 것이냐 하였더니 내 몸에 손을 댔으니 나를 평생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날이 밝으면 이웃마을 처녀와 혼인할 사람이란 사정을 말하였으나 자기 몸을 먼저 손을 대었으니 이유를 불문하고 자기가 첫 번째 여자라는 것이다. 만약 거절하면 지금 죽을 것이고 승낙한다면 집에 들어가 다음날 신행길에 자기도 가마 길을 준비하겠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승낙을 하고 주막집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가서 막 누우려고 하는데 밖에서 호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나주목사 도임 행차길인데 이곳에서 쉬어 갈 것이니 방을 비우라는 말이었다.


    오늘 다섯시에 행례를 치러야 하겠기에 쉬어야 되겠는데 방을 비우라고 하니 암담하였다. 그래서 문을 열고 호령을 하였다. 도임 행차길에서 이토록 민폐를 끼치는 목사는 누구이기에 이토록 무례하냐고 하였다. 이때에 나주 목사가 앞으로 나와서 "누구신지는 모르나 타당한 말씀이온데 저의 누이가 서울에서 이곳까지 걸어온 여독으로 죽게 생기었는데 이 누이를 그 방에서 같이 쉬도록 하여 주시오" 라고 하면서 “누이는 서울에서 대감 댁 아들과 정혼하였는데 혼전에 대감 아들이 죽어서 양반 체면에 다른 곳에 여울수가 없어서 시골 어디가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 데리고 오는 길인데 노정에서 죽게 생겼으니 선비 방에 같이 두었다가 다행히 살아나면 선비와 같이 살고 죽으면 근교에 묻어 주시오" 라고 하면서 나주목사는 길을 재촉하여 떠나 버렸다.


    할 수 없이 그 처녀를 아랫목에 누이고 몸을 주무르고 하였더니 얼마 후에 의식이 회복 되었다. 그래서 살펴보니 미모일 뿐만 아니라 현모양처로 손색이 없는 처녀였다. 이렇게 되어 날이 밝기 전에 두 처녀의 몸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희한한 운명의 장난이라 할 것이다. 날이 밝자 그날 행례를 치르기로 된 처녀의 집에서 가마를 들고 와서 행례를 재촉하여 행례 청으로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입니까? 행례청에서는 신부가 두사람이 나란히 나왔다. 연유를 알고 보니 이러하다. 신부의 아버지는 생년월일이 같은 친구와 한마을에 살면서 복중 약혼을 하였다. 만약 아들과 딸을 낳으면 부부가 되도록 하며 두 집이 다 아들 일 때는 의형제가 되고 두집 모두 딸일 때는 한사람을 섬기면서 살도록 한다는 언약을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날 한시에 딸을 낳았다. 그런데 한 친구가 먼저 떠나게 되면서 딸을 부탁하면서 죽었다.


    이와 같은 언약 때문에 친구의 딸을 데려다 키웠으며 부모간의 약속이기에 어려서부터 계속같이 산다는 것이 철저하게 인식되었기 행례청에 두 처녀가 서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 신행길에는 가마 네개가 나란히 윤씨 집에 들이 닥쳤다. 윤씨 집안에서는 해괴한 일이라 하여 집성촌에서 쫓겨났다. 다섯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윤씨로서는 난감하였다. 그러나 서울 대감집 딸이 모든 살림을 주관하고 3명의 어머니들이 열심히 일을 하여 먹고 살기에 족하게 되면서 똑같이 네 명 다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성년이 되었는데 네명의 아들을 과거를 보게 하려고 서울 친정아버지 대감에게 편지를 쓰면서 상세한 연유를 적어서 아들에게 들려 보냈다. 대감은 죽은 줄 알았던 딸이 살아 있고 외손자 네명이 나란히 과거에 왔으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상시관이 시골까지 누이동생을 데리고 갔던 오라비 나주 목사였으니 네명 다 과거에 급제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렇게 되어 독자의 아들 넷이 윤씨 가문의 중시조가 되었다고 전한다.

  • 소금장사가 이인이 되다

    옛날에는 서해안에서 소금을 지게에다 짊어져서 마을마다 다니면서 팔기 때문에 어느 때에 비를 맞을지 모르기에 소금장사의 필수품은 창호지를 넓게 붙여 가지고 기름을 먹이에 가지고 다닌다. 한시라도 비가오면 소금 짐을 덮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수 십년을 소금 짐을 덮고 다닌 유지는 소금에 절을 대로 절어서 날이 궂은 날이나 청청한 날이라도 눅기가 생기여 눅눅해지고 날이 맑으면 먹구름이 일어서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아도 유지는 고슬고슬 한 것이다. 따라서 소금장사는 유지를 보고서 비가 올지 안 올지를 알기 마련이다.


    소금장사 신 영감은 보통 소금장사가 아니고 천문을 아는 이인으로 소문이 났다. 그것도 그럴 것이 청정한 날인데도 곧 비가 온다고 하면 비가오고 곧 비가 올 것 같은 날인데도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면 비가 오지 않으니 이인이란 소문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에 하남 어떤 골에 군수가 부임하면 그날 밤으로 죽은 괴변이 생겼다. 그러니 그 고을 원님으로 나갈 사람이 없어서 고을 행정이 마비가 되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각 고을에서 이인 한사람씩 뽑아서 올리라는 령이 내려졌다. 이 고을에서는 부득이 천문을 아는 소금 장사를 이인으로 선발하여 한양으로 호송되어 가고 있었다.


    하루는 어느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주막집 대문간을 넘어서면서 절구통에 걸어서 넘어질뻔하여 "이놈의 절구야" 라고 하였더니 "예. 왜 그러십니까?”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누가 대답하는지 모르고 들어갔다. 밤이 되어 주막집 주인이 방문밖에 와서 말하기를 "나리님은 이인이시기에 나라에 뽑혀 올라 가시니 저의 아내가 죽게 생겼으니 살려 주십 시오" 라고 하였다.


    소금장사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생각하여 보니 대문을 들어올 때 이놈의 절구야 하였더니 대답하였던 일이 생각이 나서 자정이 되어 아무도 없을 때 대문간으로 나아가서 "절구야" 하고 불렸다. 그랬더니 "예,나리 왜 그러십니까?" 말하였다. 그래서 살펴보니 절구는 대문에 붙어 있는 고리였다. 소금장사는 "절구야! 이 집 주인의 아내가 무엇 때문에 죽게 되었느냐”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예, 이집은 새로 지은 집인데 집터 밑에 유골이 있는 것을 모르고 집을 지었기에 그 유골이 여자를 죽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하고 물었다.


    그 여자가 누워있는 자리밑을 파보면

    유골이 있을 것이니

    집 뒤에 좋은 곳에 묻어 주고

    음식을 장만하여 제사를 지내어 주면

    바로 나을 것입니다.


    소금장사는 “절구야, 고맙다”고 말하고 날이 밝자 주인을 불러서 여인이 누워있는 방장 밑을 파 보았는데 유골이 나와 집 뒤에 잘 묻어 묘를 만들고 음식을 장만하여 제사를 지냈다. 여인은 거짓말같이 나아서 아무렇지 않았다. 주인은 백배 절을 하고 그 공을 어떻게 갚으오리까 하니 소금장사 신씨는 아무것도 필요 없고 대문에 박힌 절구를 달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 절구를 받아서 비단에 잘 쌓아 가지고 길을 떠났다.


    밤이면 조용할 때 절구에게 세상사를 물어보면서 가게 되었다. 한양에 도착하여 "절구야! 나라에서 무엇을 물어볼 것이냐” 하였더니 절구가 말하기를 "하남에 고을원님이 부임하는 날 밤에 죽으니 그 이유를 상감께서 물으실 것이니 나리를 그 고을원님으로 보내 달라고 하십시요” 하였다. 그 뒤 상감을 배알하니 그 사실을 물었다. 신씨는 말하기를 ”그 고을원님으로 저를 보내주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상감이 생각하여 보니 그 말이 타당하여 그 고을원님의 교지를 내리어 보내었다.


    이렇게 되어 그 고을사또로 부임하여 "절구야,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이냐" 하고 물으니 절구는 말하기를 “내동헌 사또가 자는 방의 뒤에 수백년 된 고목이 있는데 그 고목속에 백여우 세 마리가 살면서 사또를 죽이니 동헌에 도착하여 바로 장작 수백짐과 새내끼 수백단을 모아서 고목나무에 쌓고 포수 십여명을 모아 놓고 장작 덤이에 불을 붙이여 불이 타면 여우가 뛰어 나을 것이니 포수들에 쏴 잡도록 명령하라” 하였다. 신씨사또는 이와같이 하여 놓고 불을 질렀더니 과연 백여우가 뛰어 나왔다.


    그래서 포수들이 쏴 죽인후로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 이렇게 되어 고을원님이 된 신씨 소금장사는 절구의 은공을 어떻게 갚아야 할 것인가,절구에게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절구는 슬피 울면서 "이제는 저의 소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하였다. 소금장사는 자네 덕으로 내가 이렇게 귀하게 되었고 돈도 있으니 자네의 어떠한 요구라도 다 들어 주겠네" 하였다. 절구는 말하기를 "사또께서 소금을 가져오는 서해안에서 소금을 운반하는 배의 도사공 이었는데 30여명의 부하들과 소금을 싣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죽었는데 내 혼이 배 조각 하나에 붙어있는 무쇠고리에 붙어서 땅위로 올라와 그 주막집 대문고리가 되어 있다가 나를 도와줄 사람을 기다리던 중에 사또를 만난 것이오니 나를 강주땅 도사공 절구의 집으로 데려다 주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소금장사 신사 또는 서해안 강주땅을 찾아가서 도사공 절구의 마누라와 아들을 불러놓고 지금까지의 사실을 말하였던바 마누라와 아들들이 절구를 붙들고 한참을 울었다. 울음이 그친 후에 절구와 헤어져 소금장사는 고을원님으로 잘 살았다고 전한다. 이와같이 우주의 만물은 기름종이 하나라도 그 정신(상)이 있고 동물은 반드시 영혼이 있어 절구처럼 해원 될 때까지 승천하지 못하고 떠다닌다는 이야기로 사람은 작은 것이라도 세심히 살펴야 한다는 교훈으로 전하여 오고 있다.

  • 진정한 친구

    옛날에 천석을 받은 조씨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장성하여 공부를 하지않고 여러청년들과 어울려 술이나 마시고 다니면서 형이야 동생이야 하면서 우리는 친한 친구라고 자랑하면서 우리들은 서로 돕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하면서 진정한 친구라 하였다. 더욱이 아들은 매일같이 술이나 마시고 친한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며 다녔다.


    이와같은 아들을 보면서 걱정이 되어 아들을 불러놓고 “너는 친구가 많다고 떠들어 대는 데 옛 사람의 말에 주식 형제는 천개유로되 금란지붕은 일개무한이라 하였다. 술이나 밥으로 사귄 친구는 천이나 되어도 난을 금할 친구는 하나가 없는게 한이라 하였다. 너의 친구는 술친구로 개 친구란 것이다. 그러니 한 친구를 사귀어도 의리있는 어려운 일에 앞장서서 도와줄 수 있는 참다운 친구를 사귀도록 하라” 고 하였다.

    그러나 아들은 말하기를 저의 친구들은 의리가 있고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앞장서서 도와 줄 친구들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이러한 아들을 보고 아니라고 해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하인을 시키어 돼지를 한마리 잡아서 털을 깨끗이 벗겨서 섬에다 둘둘 몰아서 짊어지고 밤늦게 아들을 앞세워 너의 제일 친한 친구의 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친구를 불러 내어 내가 실수를 하여 살인을 하였으니 친구가 이 시체를 맡아서 처리를 좀 해달라고 하라고 하였다. 아들은 친구에게 그와같은 말을 하고 이 시체를 자네가 어떻게 감당을 좀 하여주게 하고 말하였다. 그 친구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네가 살인을 하였으면 자네 혼자 해결해야지 나조차 끌어 넣은 것이냐 면서 들어서지도 못하게 하면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아버지는 두 번째 친한 친구에게 가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두 번째 친구를 불러내어 내가 술을 먹다 시비가 되어 한번 때린 것이 사람이 죽어서 그 시체를 짊어지고 왔으니 자네가 어떻게 처리 좀 해주소라고 하였다. 그 친구는 말도 못 꺼내게 하면서 빨리 가라고 호통을 쳤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의 친구들은 모두 의리에 산다는 친구들인데 아버지의 친구는 많지도 않고 한사람 있는데 가 보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친구를 찾아가서


    "여보게 내가 술을 마시다

    실수를 하여 사람을 죽였네,

    그래서 송장을 짊어지고 왔는데

    어떻게 좀 감당을 하여 주게”


    라고 말하니 그 친구는 어찌하다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가? 우선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어 놓고 생각해 보자면서 연장을 챙겼다. 이와 같은 현실을 보고서 아들은 술친구는 개 친구라고 하면서 회개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튿날 돼지를 삶아 놓고 아들친구와 아버지 친구를 불러 놓고 잔치를 벌였더니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친구의 의리가 어떠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아들이 올곧게 살면서 그 재산을 지켰다고 전한다.

  • 죽었다 살아난 사람

    탁병호라는 사람은 어려서 겨우 자기의 이름을 기록할 정도의 공부를 하였으나 영리하여 누구에게든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가세가 넉넉하지 못하여 글공부를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부모를 모시고 형제가 많은 대가족을 주관하여야 하는 장자로 태어났기에 어떠한 일이고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다.


    옛날에 큰아들은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이유에서 일찍 혼인을 하였는데 본인들은 어리고 또한 가족제도가 어른들의 뜻대로 하는 때임으로 본인은 알지도 못한 이웃마을 최씨와 혼인하여 살게 되었다. 그런데 첫아이가 딸이었고 계속하여 딸 넷을 낳고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래서 탁씨는 항시 하는 말이 남의 집 장손으로 태어났으니 아들을 많이 낳아서 집안이 번창하여야 된다고 생각하였고,몹시 아쉽게 여기었다.


    그러나 사람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식구가 늘어나고 자식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나 농사만 지어서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과 구루마를 사가지고 모든 운반수단으로 활용하면 돈도 벌고 운송수단도 되었기에 말을 길렀다. 그리하여 농산물 또는 각종 물건을 싣고 안가는 곳이 없이 다니면서 돈을 잘 벌어서 치가를 잘 하였다. 그러던 중에 국가에 별난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사회질서가 혼탁하여 마을사람끼리도 반목이 되고 일가 간에도 서로를 의심하는 사회구조가 되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죽고 식량이 부족하여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보니 전염병이 만연하였다. 이 마을도 예외가 될 수 없어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때였다.


    이때에 탁병호는 전염병에 걸려 며칠동안 앓아 누워 있었다. 어느 날 사촌동생 탁병문에게 불길한 소식이 전하여졌다. 사촌형 탁병호가 별세하였다는 말을 듣고 정신없이 사촌형에게 가보았더니 이미 수족이 설렁하게 굳어 가고있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 수족을 걷어 소염을 하여놓고 출상 준비를 하였다. 집안사람은 물론 마을에 김씨들이 많이 살았는데 모두 모여 들어서 마당에 불을 피우고 삼십대 젊은 사람이 죽었으니 모두 모여 들어 애통하면서도 인명은 재천이라 도리 없이 출상 준비에 바빴다.


    하룻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사촌동생 탁병문은 입관준비를 위하여 시체를 거두어 옷을 갈아 입히려고 소염하여 놓은 손목을 풀려고 잡았더니 소염할 때는 나무 조각처럼 단단하였는데 손목이 부들부들 하였다. 깜짝 놀란 사촌동생 병문은 자기가 무엇을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고 다시 손목을 잡아보았다. 분명 죽은사람의 손이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의 손처럼 느껴졌다. 그때 아들 딸이 어리지만 불러 들이고 아주머니를 불러서 아무리 생각하여도 형님이 죽지 않은 것 같으니 몸을 주무르고 옷을 풀어 드리도록 하였다. 그런 즉 약 2시간이 되어 온 몸이 따뜻해지고 손발이 움직였다.


    이렇게 정오가 되면서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집안은 웃음바다가 되고 출상준비를 치우고 집안에는 술판이 벌어졌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가 이웃마을에서 확인하러 온 사람으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튿 날 오전에는 완전히 회복되어 말을 할 수 있도록 되었다. 이렇게 되니 사촌동생이며 집안 어른들이 어떻게 된 것인지 확인하기 시작하였다. “탁병문은 형님 어떻게 된 것입니까?” 탁 병호는 말하기를 "내가 얼마동안 죽었었느냐?" 반문하였다. 만 하룻동안 이라고 하니 그동안 내가 그렇게 많은 곳을 다녀왔다는 말인가라고 하면서 혼자 말처럼 하였다. 탁병문은 그렇다면 형님은 분명 죽어서 저승을 다녀왔다는 말입니까?

  • 비홍산성과 열녀이씨 전설

    비홍산성(飛鴻山城)은 남원과 순창을 이루고 있는 해발 375m의 비홍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의 고호 용성지(龍城誌)의 기록에 의하면 鴻山城峙 在者省坊 飛鴻率下麓 古直提學楊 首生之妻烈女李氏修築此城又鑿井甘泉湧出後人指其城曰姑城指其井曰姑井李氏事蹟見 下烈女編이라 되어 있다.


    기록대로라면 이 산성은 옛날 직제학 양수생(楊首生)의 처이며 열녀였던 이씨부인이 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양수생은 고려 공민왕때의 사람으로 현재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에서 세거하였던 남원양씨(楊氏)의 시조이며 열녀이씨는 그의 처로 구미리에 열녀각이 서있다. 이와같은 기록으로 보아 이 성도 할미성이요,샘도 할미샘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성의 유래는 할머니가 쌓았다는 전설로 이어진다. 따라서 비홍산성을 쌓았다고 기록된 양수생의 처 이씨에 얽힌 전설을 알아 보기로 한다.


    용성지 기록으로 보아 양수생의 처 열녀 이씨는 시아버지 대제학 양이시(楊以時)의 고향 인 남원 교룡도로 낙향하여 살면서 곡식을 저장하기 위하여 성을 쌓았다고 보면 비흥산성의 아래마을이 교룡도 였으며 많은 곡식을 저장하고 이곳에 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이 살만한 곳을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씨는 비흥산성에서 멀리 구막(龜岳)을 바라보시고 저 곳이면 가히 사람이 살만한 곳이라 하고 나무로 매를 만들어 띄웠더니 구악 밑에 바위에 앉았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가 보니 이미 다른 사람이 집을 짓고 사람이 살고 있어서 주인을 찾아 말하기를 여인의 몸으로 이곳까지 살기 위하여 찾아 왔으니 댁의 방 한 칸만 빌려 달라고 하였다.


    그 주인은 말하기를 "부인의 사정은 알았으나 이 집은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나는 이 집 주인이 올 때까지 지켜주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말을 하였다. "그렇다면 이 집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나도 모릅니다. 다만 집주인의 성씨가 양씨라는 것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부인은 내 등에 업혀 있는 아이가 양가입니다. 그러니 집을 빌려주십시오." 하였더니 주인은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이 집은 부인께서 사실 집이오니 편안히 잘 사시기 바랍니다." 하고 무엇하나 손대지 아니하고 떠나버렸다. 그 사람은 도인으로 그 곳에 집을 지어놓고 양씨가 나타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비홍산성에 있는 노복들을 데려다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 며칠 후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이 터는 내가 일찍이 잡아둔 터인데 당신이 와서 살고 있으니 나에게 이 집을 내주고 다른 곳으로 떠나라고 하였다. 할머니는 당치도 않은 말이라고 일축하여 버렸다. 이 사람은 전일에 도인에게 이 터를 달라고 사정하였으나 주인이 따로 있다고 하면서 거절을 당했는데 기어이 이 터를 빼앗을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정 못 내놓겠다면 둘이서 내기를 하여 이긴 사람이 차지하기로 합시다. 라고 제안하였다. 할머니는 귀찮은 일이니 내기를 하여서 말을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정 그렇다면 무슨 내기를 하자는 말입니까? 하였더니 내가 닭 알을 방바닥에서 천장에 닿도록 쌓아올려 놓을 것이니 부인께서도 나와같이 쌓아 올리면 내가 진것으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할머니는 내기에 승낙하고 그 사람에게 닭 알을 쌓으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보란듯이 닭 알을 천장에 닿도록 쌓아올렸다 그리고는 부인도 이와같이 쌓아보시오 하였다. 할머니는 댁의 재주는 대단하십니다. 그러나 나도 댁의 재주만큼은 있으니 보라고 하면서 닭 알을 허물어서 거꾸로 천장에서 부터 방바닥에 쌓아 놓았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그 사람은 감탄을 하면서 진 것을 자인하고 물러 갔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이 집터를 얻어서 대대로 이 집터에서 자손이 살아왔으니 할머니는 도인이셨기에 비흥산성도 여인의 힘으로 쌓았던 것으로 믿어진다.


    따라서 비흥산성은 석축이 약 500간(약900m)이며 건곤간손 방위에 망루를 세워 성의 기둥으로 삼았고,성의 높이는 약 6m로 성벽의 안과 밖을 석재로 맞추고 안에는 작은 돌을 채워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도 기록에는 고성(姑城) 즉 할머니 성이며 샘도 할머니 샘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옛 사람들은 모계사회 구조로 모든 것은 할머니로부터 이룩된 것으로 믿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기에 작은 성들은 이와같이 할머니 성으로 전하여 오고 있다.

  • 집터 때문에 거부가 된 명당

    세상 사람들은 모두 성공하면 자기 노력이라고 자랑한다. 이 세상에 부자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가 있으며 명예를 구하지 않는 자가 있으리오. 그러나 욕심과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대자연의 섭리에 의하여 흥망성쇠가 이룩되기에 천하의 거부 오나시스도 때가 되면 그 많은 재산 한 푼도 못 가지고 떠나고 천하를 호령하던 징기스칸도 흥망성쇠의 자연의 섭리 앞에는 미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자연의 힘에 의하여 태어나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원리에서 대자연의 힘을 이용하여 잘살아 보자는 것이 풍수지리이다. 우리는 풍수지리하면 무조건 미신이다 또는 묘지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원래 풍수의 원리는 바람과 물과 땅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잘 응용하여 사람에게 유익하도록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일생동안 사는 터를 잘 잡아 살면 건강하고 돈도 잘 벌고 명예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바람과 물과 땅이 사람에게 영양을 미치는 사례는 굳이 여기에서 설명 하지 않겠다. 다만 사람이 사는 터에서 부자가 나오고 훌릉한 사람이 태어난 실례가 많이 있다.


    우리고장 적성면 지북리를 옛날에는 갖대라고 하였다. 갓대란 갖(冠)과 대(帶)의 형상이란 말이다. 갓과 옥대나 금대는 부귀영화의 상징이다. 따라서 그 형상을 살펴보면 두류봉에서 전전박환하여 지북리 뒷산이 살짝 솟으니 분명 갖처럼 생기였다.


    여기에서 한 지맥이 동남쪽으로 내려와 마을 어귀에서 머무르고 이어서 남쪽으로 돌면서 맥신하게 내려가니 이 역시 금대(金帶)가 분명하다 거기에서 동쪽으로 박환하여 마을 입구에서 머무르니 금대의 양쪽 끝이 본신 청룡백호를 형성하고 두류봉에서 발원하는 물이 인계면을 거쳐 마을 앞에서 횡대수를 이루니 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그 앞에 방갖에서 내려온 맥은 살찐 호랑이 등으로 이 마을 안산이 되니 이 어찌 노적이 아니랴? 이와같은 대 명당이기에 이곳에 터를 잡은 참봉 양운거가 국부가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갖대 양부자 하면 전라감영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다. 그것은 양참봉이 국조실록에 현종때에 흉년이 들어 쌀 수백석을 내어 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거부였음이 확실하며 인색하게 굴었던 부자들의 형태와는 달랐다. 그러기에 그 재산이 약 백년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대부분의 부자가 당대에 망하는 사람이 많으나 자연의 힘에 의하여 부자가 되었기에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산(案山)이 백호라 살기가 없을 수가 없다. 이것을 피할 수 있었기에 충화가 밀어 닥친 것이다.


    양참봉이 생존시 전주에 살았던 만암 이상진이란 명재상이 있었는데,만암 정승의 아버지 위토답을 구입코자 하였으나 찾아 놓고 보면 양참봉의 논이었다. 그래서 부득이 만암 정승이 직접 나섰어도 위토답을 구입하지 못했다. 일국에 재상이 자기의 친산 위토답을 구하지 못한 치욕을 당하였으니 그 분함이 뼈에 사무쳐서 마음속으로 복수하려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자 양참봉도 만암 정승도 타계한 후 그 자손들 간에 원한이 있던 차 양참봉 후손이 과실치사사건이 있자 기회에 보복이 일어나 투옥되고 가문에까지 화가 미쳤다고 한다. 이와같은 화가 닥쳤던 원인은 안산의 살기였으며 마을 이름을 바꾼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이와같은 거부가 있으면 시샘하는 무리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때에 갖대에서 거부가 나온 것을 시기하여 마을 이름을 지북이라고 하라는 어느 도인의 말에 의하여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양참봉의 집안에 그와같은 화가 미쳤고,마을도 한동안 화를 입었기에 옛 부터 이 마을사람들은 아무런 이유없이 갖대라하는 것을 싫어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마을이 다시금 갓대로 돌아올 시기가 닥쳐오고 있다. 자기의 일륜(一輪)은 360년 이기에 양참봉이 멸문지화를 당한지도 어언 300여 년전의 일이니 이제 환원될 시기가 도래하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불원한 장래에 다시 이 마을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마을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 아내를 구출한 현감의 슬기

    옛부터 화산(華山)하면 명산으로 알려져 신비스러운 일이 많은 산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이 산의 중턱에 거대한 바위가 있어 그 바위 밑에는 큰 굴이 있어 옛날 금돈(金豚)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 굴속에서 기거하면서 수도를 하였는데 어느 날 화산의 신령이 나타나 무슨 소원이 있기에 이토록 열심히 기도를 하느냐 하고 물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대답한다는 것이 돼지처럼 근심없이 영원이 살아 갔으면 한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신령은 그렇다면 그렇게 되도록 하여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그 사람은 돼지가 되어 있었다. 막상 근심이 없는 돼지가 되고 보니 아무런 가치가 없는 돼지가 된 것을 깨달았으나 그때는 아무런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이 때에 적성현(磧城絲)은 북쪽은 평양 남쪽은 적성이라고 할 정도로 미색의 고장으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지방 수령하면 평양감사 다음이 적성현감을 원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금돈(金豚)이란 사람은 돼지가 되어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고 미색을 탐하는 수령들을 혼내주고 싶어 현감의 여인을 데려왔다. 그러다 보니 금돼지도 미색에 빠지게 되었고 적성현감으로 오겠다는 사람이 없어 현감자리는 비어있게 되었다. 이 때에 머리는 현명하나 관운이 없어 현감자리 하나 얻지 못하고 이제는 어느 대감집에 사서노릇을 하면서 생을 유지하던 최씨란 사람이 대감에게 청하여 적성현감을 원했다.


    이곳은 갈 사람이 없는 곳이요. 오랫동안 대감에게 물심양면으로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기에 기회가 있으면 조그마한 현감자리라도 주려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보낼 곳이 없었던 찰나에 잘되었다고 생각하여 적성현감을 천거하여 보내게 되었다. 그래서 최현감은 현명한 머리로 부인과 굳은 약속을 하였다. 만일 불의지사가 있더라도 정신만 차리면 화를 면할 것이며 내가 부인을 꼭 구할 것이니 나의 뜻에 따라 달라고 하였다. 부인도 오랫동안 낙방거사로 있는 남편의 시중에 싫증을 느꼈었기에 승낙하고 현감으로 부임하기로 하였다. 부임하던 날 밤 자정이 넘어서 회오리바람이 일면서 금돼지의 등에 업혀 화산굴로 끌려왔다.


    이때 최현감은 부인의 치마허리에 명주실을 달아 놓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부인은 없고 명주실만 늘어져 있었다. 최현감은 모든 이 속들을 데리고 따라가 보았더니 이 굴로 들어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굴 안에 있는 돼지가 크고 용맹스러워 함부로 다룰 수가 없어 이들이 지키고 있으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때에 굴 안에서는 여러 명의 현감부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최현감의 부인도 같이 있으면서 금돼지가 무릎을 베고 희롱하고 있었다. 이 부인도 사대부가의 딸인지라 지기를 내어 금돼지에게 물었다.


    이와 같이 무서운 것이 없는 이가 바위 굴 속에서 살 것이 아니라 밖에 나가서 좋은 집을 짓고 나와 같이 살자고 하였다. 그러자 금돼지는 아무것도 무서운 것이 없으나 녹피(鹿皮)만이 제일 무섭다고 하였다. 그때의 부인의 머리에 스쳐가는 것은 주머니에 들어있는 열쇠의 끈이었다. 옛날 사대부 집에서 사치할 것 없고 실용적이어서 열쇠는 녹피 끈에 매어 달았다. 그래서 부인은 열쇠를 꺼내어 열쇠의 끈을 금돼지의 코에 대었다. 그랬더니 큰 돼지는 울음소리를 내면서 죽었다.


    그러고 보니 죽어있던 것은 돼지가 아니고 사람이었다. 이렇게 되어 부인도 구출하고 최현감도 적성현감을 잘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인이 최현감과 결혼한지 수년 되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는 것이 한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은 후에 태기가 있었다. 만삭이 되어 낳은 결과 아들이었다. 그런데 꼭 금돼지를 닮았었다고 한다. 이 분이 장성하여 대현이 되신 최선생이란 말과 화산 금돼지의 아들이란 말이 전하여지고 있다.

  • 망국의 한을 달랜 정금대

    유등면 건곡리 뒤 정자나무등을 정금대라고 하는 것은 이곳에 거문고를 가지고 올라 거문고를 타면서 망국의 한을 달랬기 때문이다 옛날 절의를 지키다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갔건만 그 이름은 영원히 정금대라는 이름과 함께 남아 있다. 그 주인공은 옥천조씨(玉川趙氏) 서운관부정(書雲觀副正)을 지냈던 조영(趙瑛)으로 옥천부 원군(玉川府院君) 조원길(趙元吉)의 아들이다. 고려의 사직이 무너지고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조를 건국하였을 때에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여 두문동에 들어가 모든 것을 거부하고 생을 마친 72현 이외에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켰던 선비들이 많았다.


    조영(趙瑛)도 그 중의 한 분으로 아버지를 따라 순창으로 내려와 유등면 건곡리에서 은거 하였는데 태종(太宗)은 조영의 사람됨을 알고 이조판서(吏曹判書)의 높은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불응하고 정금대에 올라 북쪽하늘 송경(개성)을 바라보며 거문고를 뜯으면서 망국의 한을 달래고 망국의 시를 노래하곤 하였다. 그 시를 살펴보면,


    백운지아심(白雲知我心) 횐 구름은 내 마음 알리라

    청산여고인(青山如故人) 청산은 옛 사람과 같은데

    욕설망국한(欲說亡國恨) 임 잃은 이내 설움

    운산묵사돈(雲山默似頓) 말해서 무엇하라.


    예나 지금이나 살기 위한 명분 아래 아침에는 이곳이요, 저녁에는 저곳으로 아첨하여 살아가는 인심인데 옛사람들은 일편단심 변함없었으니 그 얼마나 훌륭한 초인간적 소신이겠는가? 이와같은 조영은 끝내 이곳에서 정금대에서 생을 마감했고 옥천조씨는 조선조에서 불복신으로 등용되지 않는 설움을 겪었다.

    더욱이 이와같이 절의를 지킨 분의 분묘마저 실전하여 행화를 받지 못하니 세상은 어딘가 불안정성이 아닌가 싶다. 현 건곡리 마을 한복판에 어느 분의 분묘가 있었는데 묘비나 모든 석물은 건곡 마을 앞 수렁논에 묻혔다는 말이 있다. 과연 누구의 분묘인지는 몰라도 바른일을 한 선현들이 영원히 추앙받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선보다 악이 앞서는 것처럼 생각되어 이 글을 쓰면서 매우 가슴 아픈 심정 금할 길 없다.

  • 승천못한 용이 사는 용소

    남원 덕과면 천황봉이 발원지요,순창 쌍치면 고당산에서 발원되는 물이 굽이굽이 돌아서 흘러내려 임실 백년산에서 발원하는 물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물을 섬진강이라 한다. 이 물이 순창 풍산면 옥출산이 머무른 곳과 남원 대강면과 경계하고 있는 곳을 용소 또는 용연이라고 한다. 이 용소는 깊이도 깊고 길이도 길어서 풍산면 용내리에서 있었던 용혈암과도 연관된 승천하지 못한 용이 때를 기다린 용소의 전설이 많은 일화와 함께 많은 물이 흐르는 가운데 용소가 있다.


    용은 상상동물로 길조로 보는 동물이나 동서양간에 상상 동물로 보는 것은 같으나 그림으로 그리면 동서양이 거의 같은 것으로 보면 세계 각처에서 용의 화석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뱀과는 달리 용은 길조의 상징으로 인용되는 바, 사람이 좋은 꿈을 꿀 때 용꿈을 꾸었다고 자랑한 것만 보아도 우리가 용을 얼마나 귀히 여기는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고귀한 용자 붙은 지명이 허다한 가운데 이곳 용연도 그 중의 하나이니 대체로 용자 붙은 지명은 용과 밀접한 갖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용소도 예외가 아니어서 옛날 이 소에서 번개가 번쩍 번쩍 지구가 터질듯한 천둥이 울리며 억수같은비가 쏟아지는 아침에 이 소 속에서 오색이 찬란한 용이 비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려던 찰나,향가리마을 처녀가 물동이를 이고 샘물을 뜨려다가 공중으로 치솟는 용의 괴물을 보고 놀라 고함을 질렀더니 용은 힘을 잃고 다시 용소로 떨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날이 새자 마을사람들은 떼를 지어 용을 구경하러 갔으나 용소 깊숙이 숨어버린 용을 두 번 다시 구경할 수가 없었다.


    이 용소는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명주실 세 꾸러미를 풀어 넣어도 바닥에 닿지가 않았다고 전한다. 명주실 세 꾸러미면 약 3,000m 가 되는바 물의 깊이가 이렇게 까지 깊을 수야 없건만 옛날 전설에 이와 유사한 예가 허다하다. 또 이곳은 날이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어 여러차례 신기한 효험이 있어 사람들은 용산에 기우제를 지냈더니 옛날 하늘로 올라가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용소 안에 갇혀 있는 용이 비를 내리게 해준 것이라 믿어 왔다. 그러므로 한발이 심하여 가뭄 걱정이 될 때면 관가에서는 의례히 이곳(용소)안의 용에 비를 내리게 해주십사 하고 기우제 지내는 것이 연례적 행사처럼 되었고 나중에는 정월에 미리 제사를 지내어 금년도 비를 자주 내려 주시어 풍년이 들도록 해 줄 것을 기원하는 관습 까지 생기게 되었으니 이런 것을 모두 용소의 기우제가 효험이 있었기 때문이라 풀이하게 되었다.


    또 용소 부근에 사구(모래언덕)가 있어 이것이 또한 한해의 풍년과 흉년을 미리 알려주는 조짐이 있다. 해마다 농번기가 되면 장마가 들고 홍수가 밀어닥칠 때가 있다. 이 때 용소의 강상 중앙에 모래언덕이 쌓여 모이면 이해에 풍년이 든다 하고 사구가 나타나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하였다. 한편,부근의 경치가 그림같이 아름다워 예부터 시객들과 천하의 풍류 한량들이 모여 이곳에 노니는데 그 중에 용소 위 반석이 있어 거의 백여 명이 앉아 놀만하다. 이 반석 위도 또한 풍류객이나 여름의 하동들이 즐겨 놀던 곳인바, 김연(호는 월계)이라는 선비가 있어 이 반석 위를 골라 정자를 아담하게 지어 월계정이라 불렀는데 그 후로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어느덧 정자가 없어져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니 픽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옥출산과 월지매(月枝梅)

    서암산(瑞巖山)에서 설산(雪山)이 생하여 전라남도와 도계를 이루면서 동남쪽으로 흘러간 산맥이 마지막 산진(山盡) 수회(水回)한 곳이 풍산면 향가리 옥출산(玉出山) 이다. 이름 그대로 보석 (寶石)이라고 하는 옥(玉)이 나오는 산이란 말이다. 이 산에서 어느 때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옥이 생산되었던 것으로 전한다. 옥은 영원불변한 것으로 금보다 귀중한 것으로 옛 부터 보물로 알려져 왔다. 하얀 은색을 띠면 연옥이라 하고 파란 색이면 벽옥,노란색은 황옥,초록색은 취옥이라 하여 값이 비싸게 거래되는 귀한 보석이다. 따라서 옛날 오산방 향가리는 옥의 거래로 중국 일본 등지에서 뱃길로 들어와 무역이 이루어졌기에 자라뫼가 큰 마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남원에 월지매 는 무남독녀로 그 이름 못지 않게 달덩어리처럼 아름답게 자라 방년 18세가 되는 꽃보다 아름답고 그윽한 향기가 풍기는 처녀였으나 아버지가 안계셔 항시 외롭고 쓸쓸함을 달래기 위하여 무엇인가 귀한 보물을 갖고 싶어 하였다. 그러던 중에 순창 옥출산에서 나오는 옥이 아름다운 보석이란 말을 들었다. 그래서 옥을 갖고 싶은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에는 병이 되어 눕게 되었다. 어머니는 무남독녀 하나를 의지하고 살았는데 병이 되어 누워 있으니 각 방면으로 약을 써보았으나 백약이 무효였고, 알 길이 없어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이 되었다.


    이와 같은 소문이 남원 장안에 퍼지자 많은 젊은이들이 안타까워하였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어떤 도승이 이 말을 듣고 찾아가 본즉 병이 아니고 심상(心傷)임을 알고 물어본 결과 순창 옥출산 옥을 갖고자 하였음을 알았다. 그러나 옥을 구할 형편이 못 될 뿐만 아니라 다른 묘책이 없음을 알고 이 사실을 남원. 순창에 소문을 내었다. 그러나 이 옥을 구해 다 줄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순창 군수가 이 말을 듣고 옥을 구하여 주었던바, 월지매는 거짓말처럼 털고 일어났다. 물론 갖고 싶은 옥을 가졌기에 심상이 나았지만 옥을 안고 있었기에 옥에서 나온 기로 인하여 완쾌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순창군수와 가약을 맺어 행복하게 살았다는 전설이다.


    이와 같이 옥에서 나오는 기가 인체에 무병장수한다는 말이 이때부터 전설처럼 전해져 왔으나 누구도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과학이 극치를 달리고 있는 지금에 와서 강원도 춘천 연옥 광산 굴 속에서 4시간 이상 있으면 만병이 치유된다는 체험으로 요즘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으니 우리 선인들에게 전해온 말이 이처럼 입증되고 있다. 우리는 선현들이 전하는 하잘 것 없는 전설이라도 다시 한 번 검토해야 되며, 학술적으로 전해오는 모든 것을 재검토하여 현대적으로 가다듬어야 할 것으로 믿어진다.

  • 풍년을 알려주는 세암산

    세암산은 금과면 목동리에 솟아있는 산으로 서암산이라고도 한다. 이 산은 그 이름처럼 그해에 풍년이 들 것인가 흉년이 될 것인가를 농민들께 미리 알려주는 산으로 이름이 나 있다. 오랫동안 경험에 의하면 정월에 이 산을 올라가 보면 산이 울리면서 둥! 둥! 하고 북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그 북소리를 조용하게 귀 기울여 들어보면 산골짜기에서 나는 것도 같고, 귀를 동쪽으로 기울이면 동쪽 골짜기에서 나는 것도 같고, 남쪽으로 귀를 집중시키면 남쪽에서 나는 것 같아 마냥 신비스럽기만 하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들어보면 산의 깊숙한 땅속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같기도 하고, 또 가만히 들어보면 10리 밖에서 징소리가 나는 둣도 하여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 다른 생각을 하게 되면 둥! 둥! 북소리는 딱 그치고 만다. 물론 이것은 모기 소리만큼이나 가늘게 들리므로 잠시 그 소리를 놓쳤을 뿐, 알고보면 소리는 여전히 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 소리는 그 정체가 무엇인가? 산에는 산신령이 있다더니 신령들이 노래잔치라도 벌이고 있는 것일까?


    음반을 틀어놓은 경음악 속에서 그 소리색깔에 따라 피아노소리, 첼로소리, 바이올린소리, 기타소리 등 각종 악기소리를 따로따로 가려내어 들으려는 것처럼 대자연에 울려 퍼지는 바람소리, 새소리,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들과 구분하여 이 수수께끼의 소리를 가려내어 들으려면 그만큼 신경이 집중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엄연히 들려오는 신기한 북소리! 이 북소리가 울리게 되면 그 해에는 반드시 비가 흡족하게 내려 풍년이 들고, 이 북소리가 울리지 않으면 그 해에는 흉년이 들거나 평년작에 불과하다.


    이곳 금과면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이 산이 풍년을 예고해 주는 산이라 하여 이 산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 어찌 산에서 북소리가 날리 있겠는가?  그것은 아마도 울창하게 우거진 숲속인지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서로 엉기고 설키면서 흔들리는 각종 잎이 움직이고 흔들리는 소리가 때로는 크게 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잔잔하게 들리기도 할 것이고, 거기다가 이따금 부엉이 소리도 뒤섞이지 않는다고 누가 보증하겠는가? 이것을 사람들은 마치 산신령이 농악잔치라도 한판 벌려, 거기에서 울려 퍼지는 신기한 소리인양 상상해온데 기인 할 뿐이다.


    그러나 대자연은 기류의 흐름에 따라서 기가 응집되고 머무른 곳에서 더이상 응집 될 수가 없으면 그 기류는 공중으로 폭발하여 지는 현상이 생긴다. 이와 같은 사실을 기의 응집처로써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혈처인 것이다. 그래서 북소리가 나는 곳이 여러곳에서 있으면 그 혈처에 따라서 다르며 그 북소리가 어떠한 예고를 하는 것도 각기 다르다.

  • 강천용소와 노총각

    호남의 소금강이라 일컫는 명산 강천산에서 발원한 청계수가 강천호에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팔덕면을 관통, 인근 여러면의 넓은 벌을 적시는 지금의 경천 냇물이 먼 옛날에는 강천산 입구에서 팔덕의 서북방 구림면으로 흘렀을 뿐 이곳은 실개천 하나없는 삭막한 벌판이었으며, 이곳에서 동쪽을 약 7km떨어진 순창읍 교성리 마을터에 한 노총각이 홀어머니와 함께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한발이 극심하여 샘물마저 바닥이 나고 안절부절 새 샘터를 찾아 땅을 파다가 힘에 겨워 잠깐 쉬고 있을 때 마침 미녀 한 사람이 미소를 머금고 교태를 부리며 그 앞을 사뿐히 지나가지 않는가? 미모에 혹한 그 노총각은 삽자루를 집어 던지고 뒤를 밟아 여인을 따라가니 그 여인은 가끔 뒤를 힐끗힐끗 돌아보며 미소로 유인하자 도중에 집에 돌아가려는 생각조차 금방 없어지고 무작정 따라 간다는 것이 강천산 입구에까지 이르렸다.


    앞서가던 그 미모의 여인이 넋을 잃은 채 따라오는 노총각을 기다리고 서 있자, 헐레벌떡 쫓아간 노총각은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억누른 채 가까이 가서 매부리코만 벌름거리며 거친 숨만 내뱉고 있을 때 그녀는 구슬같이 굴러 나오는 어여쁜 목소리로 인사를 청했다. 길가 바위에 나란히 마주앉은 두 남녀는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끝에 그 여인이 정색을 하고 하는 말이 “나는 저 동쪽 30리 밖 풍산면 행가리 용소에 살고 있는 암용의 변신이다. 원래 천상에서 천웅장군의 본처로 부귀를 누리고 살다가 남편이 소첩을 얻어 즐기매 그를 시샘하여 첩과 혈투를 벌였더니 둘 모두에게 중벌이 내려져 이렇게 인간 세계로 쫓겨 난지 천년! 나의 원수는 강천산 아래 용소에 살고 있고, 이제 우리 둘 중에 하나만이 승천하여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 오늘 우리는 마지막으로 혈투를 벌여 최후의 승자가 승천하게 되니 나를 도와 달라.”


    말을 끝낸 그녀는 품속에 간직한 비수를 꺼내주며 이르기를 “이 길로 한참 올라가면 깊은 아래 용소가 있고, 바로 옆에 노송과 바위가 있으니 다리 하나는 노송 가지에 걸치고 다른 하나는 바위를 밀고 서서 비수를 들고 겨누고 있다가 두 마리의 용이 엉겨 붙어 싸우는 중 하얀 복부를 너의 앞에 드러내도록 원수를 밀어 부처 세 번까지 기회를 줄테니 이 비수로 힘껏 복부의 비늘 사이를 찔러 나의 원수를 죽여 달라.” 겁에 질린 노총각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이를 거절하자, 만약 듣지 않는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위협함에 하는 수없이 시킨대로 이행할 것을 각오하고 길을 뜨니 어느덧 그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노총각이 드디어 용소에 다다랐을 무렵, 그 밝던 하늘은 순식간에 시커먼 먹구름으로 덮이고 뇌성벽력으로 천지가 진동하며 회오리 바람이 불어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벼르고 있으니 마침내 용소의 물이 요동을 치며 뒤집히고 물줄기는 하늘을 솟구쳤다. 두 마리의 용이 생사를 걸고 혈투를 벌이던 중 두 번까지의 기회가 왔으나 질겁을한 노총각은 그만 실신한 상태에서 단행을 못하다가 마지막 세 번째 기회가 왔을 때 이를 악물고 복부에 칼을 박고서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누가 깨우는 바람에 간신히 눈을 떠보니 검은 구름은 간데없이 하늘은 밝게 개어 화사한 햇빛이 산천을 비추고 먼저 만난 그녀가 백배 사례하며 노총각의 소원을 재촉하여 묻자 그 노총각은 평생의 소원 그대로 마을 앞 시냇물과 예쁜 아가씨가 소원이라고 간신히 대답하기에 이르렸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500보마다 막대를 꽂아 표식을 해 두면 그 길이 바로 시냇물이 될 것이요, 또한 내일은 어느 길 잃은 아가씨가 많은 보물을 간직한 채 구원을 청할데니 그를 놓치지 말고 아내로 맞이하시오.” 하지 않은가


    노총각은 바로 실행에 옮겨, 이윽고 집에 다다르자 3년 가뭄에 억수가 쏟아져 죽은 용의 시체와 핏물이 말끔히 씻겨 내려간 뒤 서북방 구림으로 흐르던 물줄기는 높은 언덕으로 막히고 새로운 정수(淨水)가 노총각이 지나왔던 발자취 따라 오늘날의 경천을 이루고 예언대로 예쁜 아가씨를 맞이하여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는 전설이다. 지금도 관광객들은 이 용소에 다다르면 사연깊은 그 전설을 되새기며 용싸움의 상념에 사로잡혀 바위 위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 강천사 시주승과 두터 부자촌

    팔덕면 소재지에서 덕천 방면으로 통하는 다리인 제2용산교를 막 지나노라면 동서로 길게 반월형으로 둘러싼 ’뒷등'이 보이고 바로 그 아래 이른바 둔터들 이라고 불리는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이곳은 강천저수지가 생기기 전만 해도 농민들에게 푸대접받던 비전박토였으나 오늘날에는 옥답으로 변하여 넓은 들을 형성하고 있고,더 멀리 몇 백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자자손손 부귀를 누리는 행세깨나 하던 부자촌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자손들은 번창하여 문무에 능했고 인근에는 수백호의 소작농, 집집마다에는 득실거리는 하인종속들이요, 여기에 권세까지 겸하였으니 그 위세는 하늘을 찌를듯하였다. 이렇듯 온통 하늘의 복을 독차지하는 양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권세까지 떨치게 되자 자만심과 경멸이 쌓이고 인근 주민들에게는 그들이 부러운 존재이기보다는 무서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강천산에 있던 한 암자의 시주승이 찾아와 시주할 것을 권하며 목탁을 두드리자, 마침 숭유억불(崇儒抑佛) 사상이 몸에 밴 때인지라 그 시주승을 묶어 놓고 주리를 틀어 형언할 수 없는 갖은 곤욕을 보여서 돌려보내니 그 원한은 가슴 깊이 사무치게 되었고, 그 후에도 잇따라 다른 시주승에게 똑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자 이 같은 횡포에 앙심을 품고 당시 풍수지리에 능한 시주승이 이 부자촌 양반들에게 호된 벌을 줄 것을 결심하고 도승으로 변장하여 부자촌을 찾아갔다.


    그는 마을에서 가장 권문대가로 알려진 부잣집을 골라 대문 앞에서 푸념삼아 하는 말이 “허허, 이것 큰일 났군. 이 마을에 오늘날까지 몇 대를 두고 이렇게 부귀영화를 누린다마는 이제 그 운(運)이 다할 날이 얼마남지 않았으니 그것이 안타깝구나. 다만, 한 가지 이를 모면하기 위한 묘책이 있긴 하건만….” 하면서 혀를 끌끌 차고 뒤돌아서서 대문을 나서자 이 말을 하인들로 부터 전해들은 집 주인은 부리나케 뛰어나와 대문밖에서 그 도승을 붙들고 애걸복걸 그 예방책만 일러달라고 간청하지 않은가. 이에 못 이긴 척 묘책을 일러주는 말이


    “이 마을 앞 냇물 건너 저기 보이는

    ’초래바위‘가 횡액을 불러오고 있으니

    저 바위를 헐어서

    재앙을 모면 할 길 밖에는 없소이다.”


    라고 하여 그 마을이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명당터의 지맥을 잘라 버리도록 했던 것이다. 이 말에 속아 넘어간 마을사람들은 더 많은 부귀를 누리라는 욕심으로 수십명이 며칠을 두고 이 바위를 부수고 나니 이게 웬일일까? 불과 며칠 사이에 마을 장정들이 연거푸 급사를 당하고 그토록 번창했던 마을은 피폐해져 마침내는 집한채 남지 않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둔터들 땅 속 깊은 곳에는 이따금씩 와편이 나오고 반월형의 뒷등 지맥과 초래바위와의 연결된 흔적이 역연한 것을 보면 그럴 듯한 이 전설이 더욱 실감나게 느껴진다. 남을 경멸하여 횡포를 부리면 그에 상응한 벌을 받게 된다는 이 교훈은 ’둔터들과 초래바위' 전설과 함께 이 고장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 한 쪽 눈이 멀게 된 이야기

    1) 기재우의 아내가 큰 아들을 낳고 첫 이렛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 조상님을 알현코자 여종이 방안을 청소하는데 벽에 걸어 놓은 물레가락이 방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갓난아이의 눈에 꽂히고 말았다.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야단법석이 일어났다. 아들을 낳았다는 전언에도 아이의 두 눈이 멀쩡하다는 데에서 소침해 있던 기재우가 사랑방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서야 득의에 찬 미소를 머금고 희색이 만면하여 사랑방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2) 다른 이야기로는 노사가 소년 시절, 대나무로 만든 장난감 활을 가지고 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하게 되었다. 그때 노사는 포개놓은 멍석더미 한쪽 끝에 숨어 멍석 구멍에 한 쪽눈을 들이대고 반대편 쪽 아이들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이때 상대편 아이 하나가 멍석의 반대편 구멍에다 대고 활을 쏘았다. 화살은 그대로 소년 노사의 눈에 박했다. 손자가 실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모두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는데도 정작 아버지는 오히려 기뻐하였다고 전한다.


    이렇게 출생과 성장의 일화를 남긴 유명한 기정진 선생은 성리학의 학문적 다른 이론으로 유림들의 반발이 거세어 30권 20책에 달하는 그의 방대한 『노사문집』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야 발간되었고, 그의 학문이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노사 기정진은 그의 나이 69세에 이르러서 사헌부 집의가 되었고 곧이어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또 호조참의 경연특진관을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렸다. 

     

    노사 선생의 지혜를 엿보게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명나라에서는 가끔 사신을 통하여 우리 조정에 문제를 가져왔다. 우리나라의 인재를 시험하기 위함에서였다. 선생이 부친상을 당하여 장성의 선산 묘소에서 시모하고 있을 때 명나라에서 어려운 문제를 보내왔다. 조정에서는 백관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풀어내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나라에서는 노사 선생에게 사람을 보내 문제를 보이게 하였다. 선생은 즉시 답을 써 조정에 보냈고, 이 해석을 본 명나라 사신들은 놀랐다.


    임금께서도 기뻐서 “장안만목이 불설 장성에 일목 이라. 장안에 눈이 만개가 있으나 장성에 눈 하나만 같지 못하다.” 라는 말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장성의 일목이 아니라 순창의 일목이라 하여야 옳다. 노사 선생이 순창 복흥면 하사리에서 태어났고, 18세때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장성 하남으로 이거하였으나 56세에 다시 복흥면 조동 하사리(동산리)로 환거하였으니 분명 순창 복흥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장성 사람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는 기씨의 집성 세거 장소가 장성이라는 이유에서 순창 사람으로 태어났는데도 장성 사람으로 전하여지고 있으니 순창의 후학으로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순창 향지사 등 고향의 후학들이 동산리의 생가 터에 유허비를 건립하는 등 선생의 연고를 바로 잡는데에 노력하고 있다.

  • 장성 갈재의 잠검도둑

    순창 복흥에서 장성 북하면 약수리로 넘나드는 재를 장성갈재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곡두재라 부르고 백양사로 통하는 포장도로가 개설되어 재라는 느낌마저 없을 정도이다. 옛날에는 이 재도 장성쪽이 길고 험하기에 장성갈재라 불렀던 것 같다. 옛날 삼국시대 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감 한사람이 무남독녀 하나를 데리고 글도 가르치고 잘 길러서 어여쁜 성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그러나 만석거부요 벼슬도 큰 벼슬을 하였기에 대감으로서 딸의 사윗감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마음에든 혼처가 나오지 않았다.


    생각다 못한 이 대감은 한 꾀를 내었다. 아무리 돈이 있고 잘 배운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생의 험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지라 사람됨을 참아 볼 생각으로 장날이면 장성 갈재의 고갯마루에서 장검을 들고 "목숨이 아깝거든 돈 보따리를 놓고 가거라" 하고 호령하였다. "네가 이 돈 보따리를 다시 갖고 싶으면 나를 찾아오면 도로 내어 주마” 라고 하면서 "나는 살기를 죽은 나무 고장에서 살며 내 성은 살림 찌그러기 이고 이름은 탈상 찌그러기이다. 돈 보따리를 잘 간수하여 두었다가 돌려 주마" 라고하였다. 이 보따리를 빼앗아 가서 표를 써 붙여 곳간 가득모아 두었으나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섣달 대목장이어서 모두 설장을 보느라 돈이 없었던 것이었다.


    대감이 말을 타고 장검을 내리려하는 찰라 망건장사가 돈 보따리와 망건을 짊어지고 올라왔다. 그래 똑같은 방법으로 말을 하였더니 “내가 이것이 없으면 식구가 다 굶어 죽소, 그냥 보내 주십시오.”라고 사정을 하였다. 처음 사정하는 것이기에 안 된다고는 하였지만 더 사정하는 양을 보려고 하였는데 놓고 가 버렸다. 대감은 그 길로 그것도 되지 않으니 어찌할 수 없이 중단하였다. 그러나 망건장사가 억울하여 방방곡곡 고을수령을 찾아다니면서 소지를 올렸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망건장사를 하다가 보니 각 고을수령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 때에 공주 감영감사가 송사를 제일 잘 처리한다는 말을 듣고 공주감영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강변 모래밭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아이들이 모래밭에서 원님 놀이를 하고 있었다. 원님이 된 아이가 높은 곳에 앉고 이방, 호방, 병방들이 나열하고 형방이 소지내용을 알리는데 아주 그널럴사 하게 진행하였다. 망건장사가 그걸 보고 원님 앞에 나가서 절을 하고 "소인도 송사하러 왔소."라고 하였다. 이 호방들이 우리는 아이들이 원님놀이를 하고 있으니 안 된다고 하였다. 그 때에 원님자리에 높이 앉아 있는 아이가 "안 된단 말은 있을 수가 없다. 그 노인의 송사를 받아 들여라" 하였다. 그리고 영감에게 무슨 송사냐고 물었다. 망건장사는 그동안의 사정을 사실대로 말을 하였다. 꼬마 원님은 다 듣고 게 무슨 어려운 일입니까? 도적놈이 사는 고장이 죽은 나무 고장이라고 하니 죽은 나무가 쓰이고 있는 것은 장승이다. 그러니 도둑놈의 고장이 장성이고 살림살이 하나 남은 것은 박적 뿐이니 성은 박가다.


    그리고 삼년상 치르고 남은 찌꺼기는 탈상하고 석 달 동안 남아 있는 것은 건이다. 그러니 장성에 사는 박건을 찾아가면 찾겠다고 말하였다. 망건장사는 아이의 말이 사리에 맞을 뿐만 아니라 아이가 비범하여 끝난 후에 따라가 보았더니 산 밑에다 찌그러진 집으로 들어간것을 보고 망건장사는 장성에 박건을 찾아 나섰다. 그래서 찾아가보니 만석거부에 대궐 같은 집에 사는 영감이었기에 당신이 박건이요 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내가 박건인데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동안의 사정을 말하고 그 돈 보따리를 되돌려 달라고 하였더니 반기면서 그 아이의 집을 당장에 가자면서 돈 보따리와 망건 그리고 많은 포상을 주면서 아이집을 안내하여 달라고 하였다. 다음날 망건장사와 박건은 말을 타고 달려 그 아이 집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박건은 비가 오니 비를 좀 피하자고 하였더니 꼬마는 정중히 나와서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기를 권하였다. 가난하지만 훌륭한 머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사위를 삼았고 이아이가 백제의 재상이 되어 나라를 증흥시켰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 삼방 오장군의 전설

    순창의 삼방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쌍치면과 복흥면을 말한다. 삼방이란 세 곳을 막으면 들어올 수 없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세 곳에서 통행인을 검사하던 관방이 설치되어 있었다. 함경도 안변군에 삼방약수와 함께 명승지로 알려지고 강원도 인제의 삼방 그리고 순창의 삼방이 있을 뿐이다. 순창의 삼방을 살펴보면 노령산맥 순창땅으로 시작되는 정읍 칠보면 매죽리를 경계로 솟아 오른 산이 옥촉봉으로 이 봉우리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산맥은 국사봉에서 계룡산이 마지막으로 추령천에 가로 막혀 끝이 났다.


    그리고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노령산맥은 고당산이 639.7m의 높은 산으로 이어져 서남쪽에서 칠보산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개운치 두들재를 거쳐 여시목에서 복용재를 거쳐 남쪽으로는 백방산으로 내려가고 서남쪽으로는 추령을 거쳐 서쪽으로 장군봉,연자봉,신선봉 그리고 까치봉에서 남쪽으로 박환하여 도집봉 곡두재 그리고 감상굴재를 거쳐 대각산 장군봉을 거쳐 도장봉 분더재에서 빛재를 거치면서 동쪽으로 뻗어 내려 솟아 오르니 담양과의 경계에 추월산이 우뚝 솟아 올랐다.


    이 추월산에서 북으로 역룡하여 710.1m 고지의 깃대봉에서 동북쪽으로 박환하여 390m 천치재에 이른다. 이 재에서 다시 북으로 오누리재 그리고 용추봉에서 세자봉으로 구림면 여분산과 경계하면서 북으로 계속 역룡하여 신광사재에서 서북쪽으로 매봉 그리고 오봉산 밑에서 배재에 이르니 국사봉 및 계룡산을 바라보면서 추령천과 마주치니 쌍치, 복흥을 가운데 놓고 한 바퀴 원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이 원의 안에서는 이곳 계룡산 아래 피노리와 정읍과 경계지점 추령과 담양과 경계를 이룬 천치재를 막아버리면 들어올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기에 이곳을 삼방(三防)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곳 삼방에는 옛날부터 오장군의 전설이 전하여 온다고 하기에 필자는 이와 같은 삼방이기에 다섯 장군이 이곳을 지키면서 전설이 생긴 것으로 알고 확인하여 보았다. 그러나 말을 타고 대검을 휘저으면서 적진으로 달려 가는 장군이 아니고 지형상의 다섯 장군이 그 상을 하고 있는 형상을 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구가 형성되면서 부터 이루어졌던 장군봉이 다섯인데 각기 그 상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정읍 내장산과 경계를 하고 있는 장군봉은 총괄 장군이라고 한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야전군 단장이다. 따라서 제일 뒤에서 제일 높은 곳에 앉아 총지휘하듯 그 형상이 도도하며 높은 곳에 앉아서 호령하는 장군 형상이다. 따라서 장막내에서 제일 높은 곳이 있으며 주변에 부장들이 둘러 서 있으며 전 후 좌우에 초병이 서 있는 형상이다. 다음은 쌍치면 탕곡리에 솟아있는 장군봉(606.3m)이다. 이 장군은 앞에 둔전리에 둔을 치고 전투준비를 갖춘 전투사단장이다. 다음은 복흥면 금월리 대각산에 있는 장군이다. 이장군은 쉬는 장군으로 예비사단장 격이다. 그러기에 옥녀가 옆에 있으며 주안상이 벌어진 가운데 한가로이 쉬는 장군이다.


    다음은 쌍치면 양신리 세자봉옆에 서 있는 장군봉으로 이 장군은 궁중을 지키는 수도경비 사단장으로 세자와 금상을 지키느라고 온 정신을 곤두세우고 있다. 따라서 전 후 좌우에 어영장이 있으며 구림면 금상굴에는 투구를 쓴 어영장이 대검을 짚고 서 있는 것이다. 다음은 다섯 장군 중에서 가장 중요한 최전방 장군으로 복흥면 상송리 앞산 장군봉으로 적장을(추월산) 앞세워 놓고 항복을 받은 형상이기에 대검을 휘두르며 호통을 치고 있다. 따라서 락덕정의 위쪽에 항서바위가 있어 항서에 서명 날인 하도록 독촉하고 있으며 정면 골짜기를 항서골이라 부르고 있다.


    이 장군의 정면에는 출진을 지휘하는 격고형상(두드리는 북)과 그 앞에는 궁당살매라고 하는 화살이 한꺼번에 여러 발이 날아가는 전차와 성문을 부술 수 있는 당살매가 적진을 노리고 서 있다. 위와같은 다섯장군이 의기양양하게 솟아 있기에 삼방에 오장군 이라고 전하여 오면서 옛 선현들의 자연의 섭리를 정확하게 판단하였고 활용하는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 메기바위와 송아지

    쌍치면 둔전리 위에 천변에 점암리가 있는데 이곳을 점암이라 부르는 것은 메기바위를 한자로 고친 것이다. 메기바위는 백방산에 발원하는 냇물의 일부와 정읍의 고당산에 발원하는 냇물이 서로 합류되는 지점에서 중안리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대한 바위가 천변에 누워 있다. 이 부근 냇물을 특히 둔전천이라 부르고 또한 점암천이라 부르는 것도 메기바위의 전설에 연유하기도 하지만 점암천은 메기바위 뿐아니라 크고 작은 바위가 항상 여기저기에 산재하여 어떤 바위는 곰처럼 생긴 것도 있고,어떤것은 말모양,어떤것은 거북이 모양 등 백가지 형태의 기형으로 되어 있고,


    철따라 밝은 물이 흐르는 중 여름에는 흙탕물을 좋아하는 메기가 바위틈새 깊숙이 숨었다가 용솟음쳐 나오니 홍수가 지면 메기들이 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앞마당까지 예사로 뛰어 오른다. 이렇게 메기가 흔한데다 바위가 많으니 메기바위의 이름이 붙을 법도 하지만 점암의 이름은 다른 까닭이 있다. 메기도 10년 20년을 자라며 더구나 인적이 드문 산중의 메기는 아득한 옛날 몇 백년을 자라온 메기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몇 백 년을 자라다 보면 그 크기도 어마어마하여 짚단처럼 클 뿐 아니라 그런 메기는 입맛 다시는 소리도 북치는 소리와도 같다고 한다.


    지금의 점암촌, 점암이라 부르는 거대한 메기바위 밑에 몇 백년이나 자라온 거대한 메기가 살고 있었다. 한 여름에 마을사람이 송아지를 길들이려 앞내 물가의 둑에 말뚝을 박아 송아지의 목줄을 그 말뚝에 단단하게 묶어 놓고 천변의 깨끗하고 연한 풀을 마음껏 뜯어 먹게 하고는 주인은 송아지 일은 아예 잊어버리고 뒷산에 올라가 꼴을 베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먹구름이 뭉게뭉게 퍼지면서 천둥이 치고 바람이 일더니 억수같은 소낙비가 퍼붓는다.


    삽시간에 흙탕물이 냇물을 덮치자 바위틈 깊숙이 물속에 잠겨 저절로 왔다 갔다 하는 피라미며 쏘가리 따위를 낚아채어 주린 배를 채우고 있다가 느닷없이 흙탕물에 번쩍 정신을 차려 밖으로 헤엄쳐 흙탕물에 앞 못보는 붕어며 쏘가리를 마음껏 잡아 삼키며 둑을 타고 올라가는데 어디서인지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향기로운 냄새가 새 맛을 돋구었다.


    메기는 본능적으로 이 좋은 냄새를 따라 몸을 솟구쳐 물위로 고개를 내밀어 냄새를 맡아 보니 그것은 바로 눈앞의 둑 위에 소낙비를 맞아 어찌할 줄 모르는 송아지의 몸에서 풍기는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메기는 욕심이 한이 없는 동물인지라 이 좋은 먹이를 놓칠리가 없다. 잠시 물속에 잠겨 힘을 집중시키고는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싶더니 번개처럼 송아지를 한 입에 삼켜 제 보금자리 인 바위 굴 속으로 잠겨 버렸다. 이윽고 송아지 주인이 헐레벌떡 소낙비를 맞으며 송아지를 찾았으나 송아지는 온데 간데 가 없고, 송아지 목줄만이 물속으로 평평하게 박혀 있지 아니한가?


    줄을 당겨보니 마치 말뚝에 잠긴 줄을 당기는 것처럼 꼼짝도 아니한다. 인은 그제야 힘을 가다듬어 두 손으로 줄을 힘차게 당겼더니 집단 같은 무거운 물체가 요동치며 따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윽고 줄을 다 낚아 채 보았더니 이게 웬일인가? 송아지 대신 어마어마하게 큰 메기가 송아지를 삼켰음인지 줄에 낚여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메기가 송아지를 삼킨 것이 분명하므로, 이 희한한 일로 인해 바위 이름을 「메기바위」(鮎嚴)라하고, 마을 이름은 점암촌, 냇물은 점암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보은하고 신선된 홍성문

    양반을 조롱하기 위하여 명당을 팔러 다니기 위해서 하시 지나가는 곳이 강진에서 사곡 가곡을 거쳐 뒷내장을 가게 되었다. 돌아가는 길도 이 길을 가기도 하였다. 수년 동안 명당을 팔다가 보니 상자와 둘이서 먹을 식량을 구하지 못하고 사자암으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들려서 한 달을 먹을 수 있는 쌀 두말을 상자를 시키어 얻어가지고 사자암을 돌아가는 집이 있었다.


    홍성문 대사는 항상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말을 상자에게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농사 하고 다니다 보면 식량을 준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수 없이 많았다. 그때마다 이 정씨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다. 별로 넉넉하지도 못하는 정씨이나 조금도 싫다는 내색을 하지 아니하고 쌀을 상자에게 주었다. 얼마가 지나서 홍성문도 사람인지라 늙어서 죽음이 닥쳐왔다. 본인의 죽음을 느낀 홍대사는 그동안 신세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보니 시간이 없었다.


    홍대사는 상자도 대동하지 아니하고 급히 정씨 집으로 달려왔다. 정씨를 만나기가 무섭게 지금 아버지의 묘를 파묘하여 가지고 저기에 보이는 곳을 가리키면서 그곳에 천광을 하면은 뾰족한 돌이 상중하에 보일 것이니 그대로 두고 아버지를 모시라고 하면서 나는 몸이 불편하여 산에 오를 수 없으니 빨리 서둘러 일하도록 재촉하였다. 정씨는 동생들을 불러 홍대사가 이르는 대로 청광할 것을 명하고 본인은 파묘를 하여 유골을 모시고 도착하여 보니 천광을 다하였는데 뾰족한 돌을 힘들여서 상중 두개는 뽑아 놓고 하에 있는 돌을 뽑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야 생각하니 아우들에게 돌을 뽑지 말라는 말을 안 한것을 후회하였다. 그래서 더 이상빼지 못하도록 하고 홍대사에게 뛰어 갔다. 이때 홍대사는 거의 실신상태였으니 그 사실을 말하니 허허 진사 두장은 버렸으니 빨리가서 하관하고 성분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정씨는 성분하여 놓고 평토제를 지내면서 생각하니 홍대사가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집으로 달려와 보니 홍대사는 흔적이 없었다. 죽었으면 시신이 사랑방에 있어야 할 것인데 시신도 없이 사라졌으니 알 길이 없었다.


    그 후로 홍대사는 명당을 사라고 외치지도 아니하고 시신도 무덤도 본 사람이 없었다고 전 하면서 홍대사는 신선이 되어 승천하였을 것이라는 이야기만 전하여 올뿐 아무런 근거가 없다. 다만 홍성문대사가 기록하였다고 전하는 회문산가로 회문산 24혈을 불러 놓은 회문산 가만 남아 영원히 전하여 질 것이다.

  • 회문산의 백용이는 괴적인가, 의적인가

    회문산은 임실순창 그리고 정읍을 경계하고 있는 호남의 명산이다. 그러나 이처럼 삼계군을 경계할 만큼 거산이기에 오랜 옛날부터 애환이 많은 산이다. 옛날에는 동물의 피해,도적의 피해 근대에 와서는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6.25 동란 때는 남부군의 본거지로 알려져 있으며 역사성도 있는 산이지만 사람들의 기억으로는 좋은 것보다는 나쁜쪽이 잊혀지지 않아서 인지 좋은 것은 사라져 가고 괴적 같은 말만 남아 있게 된다.


    회문산은 명당이 많다는 전설에 따라 전국 각처의 쟁쟁한 인사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는데 이곳이 도적의 소굴이 된 것은 명당을 찾으러 온 돈많은 사람들의 제물을 빼앗기가 안성맞춤인데 까닭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도적이 한창 왕성할때 그 우두머리로 백용이란 자가 있었다. 그의 용모를 그려본다면 키가 8척 장신이요, 눈은 쇠방울처럼 컸으며 눈썹이 시커멓고 앞가슴이 떡 벌어져 자못 대장부처럼 생겼는데, 힘이 장사여서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아 무리중의 괴수가 되었다.


    호랑이가 성을 내면 마을에 내려와 잠자는 아기를 물어가거나 호젓한 산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혜치고 집집마다 개나 돼지를 채어가니 그 피해가 막심하다. 이러한 호랑이를 백용은 맨주먹으로 때려잡아 한동안 회문산의 호랑이를 얼씬도 못하게 하였으니 도적들은 그를 수령으로 모신 것이 무리가 아니었다. 그가 한번 성을 내면 얼굴에 험한 송곳같은 날카로운 수염이 거꾸로 서고 눈은 찢어져 올라가 불이 튀긴 것 같고 소리를 지르면 회문산이 울린다.


    백용의 도당은 거의 백명에 육박하는데 산상에 막을 쳐 소굴을 만들고,졸개들도 각처에서 납치한 부녀자를 아내로 삼아 버젓하게 살림을 꾸리는데 그중에 백용 두목은 예쁜 첩들을 다섯씩이나 거느려 호사를 하였으니 도적들은 백용이지만 그에 딸린 계집들을 합치면 2백 명도 넘을 지경이다. 백용은 어디에서 강탈하였는지 항상 백마를 타고 다니며 그 밑에 5명의 참모들도 각기 말을 한 필씩 거느리고 있었다. 각처에서 모여든 부호들은 혹은 말을 타고 오는 것도 있지만 사인교란 가마를 타고 몇 사람의 하인들을 거느려 회문산 주변의 마을주막에 숙식을 정한다음 산을 헤매어 명당을 찾는데 며칠씩 산을 헤매다가 돌아가는 수도 있고 어쩌다 묘 자리를 발견하면 다시 온갖 제물을 장만하여 말이나 가마에 실어 오는데 이런 행차가 도적들에 탐지되면 영락없이 기습을 받아 말과 짐을 다 빼앗기고 만다.


    백용 도당들은 이와 같이 재산가나 귀인들의 행차를 습격하여 빼앗은 재물로 호사를 하고 그 밖에 부호들의 집을 습격하는데 그들이 한가지 의리가 있다면 회문산 둘레의 부락은 털끝만큼도 침범하지 않은 점이다. 그뿐아니라 산 둘레의 이웃 부락과는 서로가 의좋게 지냈으며 특히 주막집 아낙네들과는 각별히 친밀하여 빼앗은 재물을 조금씩 선사하기도 하였다니, 이런 것은 이웃 주민들의 관심을 사 두어야 사업이 잘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이들을 의적이라 부른 것도 그들과 통함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이곳 도당들은 순창임실담양태인 등 인접 관가의 두통거리여서 그들을 소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일설에서 백용이 대장은 엄청난 의적으로 임꺽정 못지않은 의로운 일화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좋은 것보다는 나쁜 쪽으로 남은 것이 많기 마련이다. 실질적으로 의적을 한쪽이 더 강하였다고 생각되기에 이미 다른 곳에서 괴적으로 기록하였기에 그 실을 번복하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썼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의적 쪽으로 정리하여 모든 사람을 교화하는 현명함을 보였으면 한다. 다음 기회가 주어지면 의적사례를 조사 연구하여 사회정화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나주 동문다리의 귀신

    조사 장소 : 광촌리 1구 

    조사 일시 : 1997년 8월 2일

    조 사 자 : 조웅 조사

    제 보 자 : 김대순(여, 65)

     

    우리 시숙님이 장개를 갔는디. 장개를 갔는디. 거시기 인자 지금 갔으몬 신혼여행인디. 쟁인질이라고 쟁인질 거기를 간게, 장개를 와갔고 큰애기 집에 간 거. 쟁인질 처갓집이 나주사람 나주였었는디 양반이라고 나주 큰다리 나주 큰다리 있제. 건너 갈라든 다리 밑에 가 대보가 있는갑고만. 막 쟁인질을 갔는디. 한방에서 안 재우고. 지금 같으몬 재운디. 사랑방으로 사우를 댈고 와쁘서. 쟁인 어른이 데꼬간께 요로고 따라간디. 옛날 옛날에 총각때 사귄 여자가 있었던갑서. 그런디 그 여자가 나타나더래. 딱 나타나가꼬, “갑시다. 요놈 갖고 가몬 우리 둘 먹고 살 수 있승게.”


    밤에, 그 날 저녁에 달이 둥둥 떳는디 달이 아니고 해로 변하더래. 해로 변해가꼬 해가 둥둥 떠서 밝은 날이더래. 그 사람을 따라 갔어. 따라갔는디 귀신이었던갑서. 긍게. 쟁인 어른이 사랑방에 가서 ‘온다냐? 온다냐?’ 하고 기다린디 안 온게 저녁내내 기다려도 안 온게. 난리가 났어. 그 양반은 따라갈라고. 나주 동문다리. 나주 동문다리라고 요거 맨들어, 대보 밑에 대보 밑에 끼깨 갔는갑서. 끼깨. 귀신한테. 모른게 사람인 줄 알고 갔는디. 대보가 짚더라고. 높더라며. 그 밑을 감서 이상한 생각이 들더래. 신랑이. “내가 이럴 때가 아닌디 왜 이런다냐?” 그래가꼬 ‘이상하다’ 가만 생각해가꼬 달을 본께. 하늘을 처다본께 깜깜해져 블더래.


    “이거 안 되겠다. 옛날 어른들 말씀이 요럴 때는. 갑자기 깜깜 할 때는 양다리 걸치고 오줌을 싼다고 했는디.” 남자는 오줌을 싸분게로 인자 해가 달로 변했더래. 해가 달로. 진짜 달이여. 몸이 개분해지면서. 개뿐해 봄시롱 달로 변했더니, 근게로 밑에 밑에 대보 밑에로 꼬랑창으로 들어 갔더래. 꼬랑창으로 끼껴 들어 가서. 그래가꼬는 안 되 것슨게 그것을 뽁뽁 내려갈 때는 어떻게 내려갔는디 모른디 복폭 물팍 꿇고 올라가 왔는디 짚은 데로 그래가꼬 남평도 중간 나주도 중간 거가 중간인디. “나주로 가야 쓰냐? 요로 와야 쓰냐? 나주서 안 가돈 집에서 난리가 나고 어짜쓰고?”


    나주를 간게로 집을 뚜둘고 난리가 났어. 장인어른이 막 신 신고 찾으러 갈란디 난리가 났는갑서. 귀신은 없어져 블고. 옛날 두루매기 끈이 끊어지고 코피가 나오고. 거기서 굿을 하자고 한디 안 하고 집으로 와가꼬. 집에서도 부모가 난리제. “귀신한테 끼께 다녔응께 막 대경을 하자.”고. “절대 대경을 하몬 나가 블란다고. 굿하고 맥이한거 나가 블란다.”고 안 하고 말았는데. 그런 일이 있었어.

  • 소원대로 된 세 친구

    조사 장소 : 석전리 1구

    조사 일시 : 1997년 8월 1일

    조 사 자 : 조웅 조사

    제 보 자 : 미확인

    구연상황 : 제보자는 이 이야기를 시아버지께 들은 이야기라 하며 시작하였다.

     

    옛날에 한 마을에 사는 세 친구가 있었어. 그들은 같은 서당에 댕겼제. 하루는 서당에 가는 길인디, 한 동무가 “우리가 어떻게 공부를 배워 가지고 뭐슬 해 먹을까나?” 그란데 “너는 무엇이 소원이냐?” 물어봤제이. 그런께 동무가 “나는 논을 사고 막 쟁여 노호. 막 권세를 누리고 살란다.” 허그든. 또 다른 동무에게 “너는 무엇 될나냐?” 헌께 “난 절라감사가 될란다.” 헌께. 그런데 또 다른 동무가 “너는 무엇이 될래?”헌께 “나는 신선이 될란다.”그랬었제.


    아. 옛부터 맴속에서 우러나온 말은 아뢴디 다 된다 그랬거든. 그렇게 동무 서이다가 자기 소원대로 되었제. 그래서 커서 인자 신선이 될란 아이는 신선가 되았고. 부자가 될란다는 아이는 부자가 되아서 권세를 누리고 있었제. 인자 신선이 된 동무가 감사가 된 동무를 만났는디 감사가 된 동무가 “나도 신선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해서, 신선이 뒤에 하늘을 향해 주문을 외운게 동아줄이 내려져서 감사가 그걸 타고 올라 갔제. 둘이서 바둑을 두는데, 거 신선이 있는 곳이란 시간이 억수로 빠르거든. 있으면 모른디 그 곳의 잠깐이 이 곳의 억만 년이 홀러버리는 거야. 바둑을 뒤고 난께 시간이 많이 흘러 버렸제.


    한 번은 감사가 신선에게 “우리 이러지 말고 예전에 서이가 다녔던 부디 그 때이고 싶다.”한께, 아 그런데 신선이 “그 동무는 너무 권세부리며 살며 마음씨가 너무 욕심쟁이가 되어부렀다. 글 수 없다.” 그러는 거여. 그 부자 친구는 이에 죽어서 욕심부린 죄로 은하수에서 구렁이가 되어 있거든. 감사 친구가 “그래도 기다려 줘보자.” 그런게 신선이 “그렇게 하라.”고 했는가 비여. 아 그래 그 구렁이를 불러다가 신선이 “저기 저기로 가면 천도 복숭아가 있는지라. 세 개가 있는데 하나는 너 먹고 두 개는 이리로 가져와서 우리랑 나누어 먹자.” 그런게 구렁이가 알았다며 갔는디. 막상 천도 복숭아 앞에 가니까 욕심이 생긴 거여. 그래서 얼른 한 개를 먹고 또 한 개를 먹어 버린거제. 


    천도 복숭아가 얼매나 좋은 거여? 그거 먹으몬 불로장생한당께. 근께 구렁이가 먹는 건 신선이 속인 가짜였제. 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선이 감사에게 “너도 봤제?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그랜디. 그런게 감사 친구로 “어쩌다 저리 되았는가?” 슬피 울었다여. 아 그런께 옛부터 가진 게 있으면 나눠주고. 잘 산 사람이 못 산 사람 나눠주고 그러는 건디. 욕심을 너무 부리몬 안 되는 거여. 또 용서로 빌 기회가 오면 잘 넘겨야 허는 거여. 그렇지 못하든 결국 구렁이 꼴이 된다는 거여.

  • 도깨비와 씨름한 사람

    조사 장소 : 신가리 당가마을

    조사 일시 : 1997년 7월 29일

    조 사 자 : 조웅 조사

    제 보 자 : 이천수(남, 70)

     

    영감이 한 팔십 살 먹었는디 그 영감이 술을 좋아해. 장에 갔다 오다보믄 재가 하나 있는디. 갯골재라고 재가 있거든. 순 산속으로, 사람 댕기는 길 하나만 있는데. 장에를 갔다오니까 어떤 놈이. 젊은놈이 한 놈이 “영감님 여그 잠깐 쉬었다가쇼” 그러거든. 술을 먹고 “나 안 쉬고도 가것어라우” 허고 갈라고 헌디,

    “아이. 좀 쉬었다 가쇼.” 헌게 “그럼 그러세” 해가꼬 앉었어. 앉즌께 이약, 이약을 허드니 “나허고 씨름 한 번 허작해.” 허니까


    “이 젊은 놈의 새끼가 늙은 영감보고 씨름허작 헌다."고.


    “아따. 젊으니까 한 번 헙시다.” 술먹은 잠에 “이 자식아. 그럼 허자” 모를 전부 심어 노았는디 씨름허작 해. 영감하고 씨름을 해. 근디 논바닥에서 씨름을 해. 즈그 아들들이 삼형제인디 “아버지가 올 때가 되었는디 안 온다.”허고 나가본께, 새벽쯤 나가본께 “이놈아. 이놈아” 굉장을 허그든. “아부지. 아부지.” 부르고 쫓아가니까 그 놈의 도폭에다 갓을 쓰고 흙이 엉겨 묻어서 “이놈아. 저놈아.” 야단이여. 삼형제가 즈그 아부지를 업고 왔어. 집에다 누이고 씻기고.


    다음날 "도깨비한테 홀리몬 삼 년밖에 못산닥 허드라.” 허고 일도 안 시키고 술만 먹고 놀아. 삼 년이 뭐야. 구십 몇 살까지 살았는디. 이십 년을 더 살았어. 삼 년 밖에 못산다고 아조 실망을 했는데…. 그 뒤 노므 모 때와 주니라고 삼 형제가 가서 하루 종일을 했어. 전부 밟아 자처 놓았은께. 즈그 아부지 발자국밖에 없으니 다른 놈 발자국은 있도없고. 그러니까 도깨비에게 홀린 거여.

  • 호랑이 발자욱

    조사 장소 : 가운리 가동마을

    조사 일시 : 1997년 12월 5일

    조 사 자 : 이수자, 장주환 조사

    제 보 자 : 임종국(남, 74)

     

    눈이 겁나 많이 왔단 말이여. 그래가꼬 재종형님하고 둘이 퇴끼 모리러 갔어. 눈이 왔은께 산에 가면 퇴끼가 가다가 눈에 파묻혀 가꼬 어디 소풍밑에 엎드려 있으면 잡아도 어디 못 도망간께. 눈 때문에. 퇴끼모리를 둘이 갔단 말이여. 가서 본께는 발자국이 여그 한나 있고 저그 한나 있고 이렇게 있어. 외 발자국이여. 그거는 니 발로 가도 외발로 가. 그 신령님께서. 발이 이거만 한놈이 이렇게 간께 재종이 “요 따라가 보자.” “거 뭐신디야?” “몰라. 따라 가야. 눈속에 지가 어디 갈란디야.” 그러고.


    아그들이제. 따라 갔는디 저그 가면 굴바우라는 바우가 있어. 다른 짐승들은 그 굴바웃가에서 모두 토끼같은 것 오소리 같은 것 많이 살아요. 아 근데, 굴바우 있는 디를 갔는디, 이 높이가 사람 키로 넉 길. 다섯 질은 높아. 근데 거끼까지는 발이 있었는디 없어져 버렸어. 어디 간 곳이 없어. “아이, 어디 가부렀다요? 속으로 들어 갔나 보다. 요 속에 찾아 보자.” 그래 들여다 보니 아무 것도 없다. “집에 가자.” 그런께


    “아이. 여까지 왔는데 여그 없으면 어디로 갔겄제. 지가. 요 우그로 가보자.” 인자 또 요바우 옆으로 돌아 올라서 본께 거그서 그 높은 바우를 올라가가꼬 발자국이 또 있어. 그렇게 날랜 짐승은 신령님이여. 아 그래고 놈을 조막조막 딸아간께. 아 따라가 가꼬, 거그 요그만치 온께는 또 발자국이 없어져 버렸어. 인자

    “여 눈속에서 없어졌으니 어디가 있것냐 그냥 가자. 발자국 없다.” 한께 “이 새끼가 여 까적 와가꼬 찾아서 잡아야제 그냥 가겄냐?” 거그서 솔나무로 솔나무로 해가지고 여그서 치자며는 자네들 차 있는데 그 정도를 발자구를 없애 버리고, 나무로 나무로 해서 내렸어.


    내려 떨어진 자리가 있어. 그래서 그 놈을 따라서 졸졸 따라 간께 복암사절 밑에까지 따라 갔었어. 옷이 여까지, 푹푹 빠진 눈밭에. 근께 미친놈이지. 애기들이제. 근까 복암사절 밑에 가가꼬는무리 찾아도 없어. 그런께 저. 고리 해가지고. 절리 해서 지 굴로 들어가 분께 못찾아 부렀어. 근까 지름 바우 있는데까지만 가가꼬는 못가. 옷만 홈썩 젖어가꼬 집이 와서 어른들한테, 솜바지 저고리 홈짝 젖어가꼬 왔으니 좋다 하겄어? 어머니한테 뚜드러 맞었지.

  • 팥죽 먹고 달아난 소금장수

    조사 장소 : 동당리 당촌

    조사 일시 : 1997년 11월 25일

    조 사 자 : 이수자, 장주환 조사

    제 보 자 : 미확인

     

    옛날에 소금장수가 소금을 한짐을 지고 홀짝홀짝 물어 물어 강께. 중간에 가니까 구신이 나타남서 “저그 산속에 불쓴데 불이 써진 거기로 들어가 보라.”고 하드라요. 그래서 들어 갔어. 영감 할무니. 옛날에 오죽 이 숭년이여? 근디 영감 할무니 죽을 쓰느라고 인자. 밤에 와서 “주인 양반. 여기서 밤좀 지내고 가자.”고 항께 “들어오시라” 그러드라요. 들어강께 영감 할머니 살든가 부억에서 죽을 쑤면서. 죽 쑤는 소리가 “왔다가드라. 왔다가드라.” 끓는 소리가 막 그러드라우.


    배는 고파 죽겄는디. 죽이 먹고자 죽겄는디 이 놈을 어째야 쓰꺼나 하고는 밥달라 소리도 죽달라 소리도 못해. 인자 끓는 소리가 나니 환장하거든. 냄새는 팥죽 냄새가 코로 펄펄펄 들어오고. 인자 가만히 누워서 자는 척 하고 누웠으니 영감이 하는 말이 “소금 장시 가고 나면 먹게 딱 덮어놔 두소.”하고 “그럼. 그럽시다.” 그러거덩. 배가 고파 죽겄어. 인자 옛날이라. 그렁께 가만히 자는척 코고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둘이 들어오드라는구먼. 들어 와서 인자 잠을 자. “저 양반은 소금장사하니 따맛이 자시라고 하고, 여기서 우리 둘이 자자.” 하고 인자 둘이 장께. 영감이랑 자느라고 코를 “드르롱. 드르롱.”과쌍께 “옳다. 느가 자긴 자구나.” 그러고는 가서 그 놈을 배 가리코 혼자 먹어 부렀어.


    혼자. 소금장사. 그래놓고는 가만히 갖고 와서 인자 뭐 거시기 갖다가 입에다 살살 영감이랑 입에다 발라 놨어. 그러고는 인자 옳다구나 하고는 어디만큼 갔어. 강께는 아 영감이 딱 일어나드니 배고파 죽겄는디 소금장시 가부렀네. “배고파 죽겄응께 죽그릇 가서 묵세.” 긍께. 참말로 일어났서. 그제 봉께는 없거든. 그렁께 둘이 가서는 그놈을 가서 봉께 아무것도 없네. 다 먹어버리고. 긍께 인자 사람이 너무 못할 일을 해도 못써. 아무 것도 없응께. 서로 보면은 입에가 묻었거덩.


    “당신이 묵어 버렸지라우.”

    “자네가 묵어 버렸지?”


    서로 치딱치딱 해. “아이. 이상하다고. 그럼 소금장시가 묵었으까나?”고 하고. 긍께 그 놈을 먹고 소금 가마니를 못지고 가고 거기다 놔두고 가부렀어. 배가 부롱께. 그래가꼬 가다가다 인자 그 놈올 배가 부릉께 걸어도 못가겠드라고요. 그래가꼬는 인자 그 놈을 배를 이기고 소금 가마니 몇푼 되지도 않응께 그 놈을 그걸 지고는 빈거로 강께는. 대치나 댈싸쿵 사자같은 놈이 앞에 쭉 서드라구요. “너 어데서 뭣하고 오냐?” 그렁게 “나 아무것도 안 하고 온다.”고.


    “어디 가다가 시방 산속에 짚은디 불썬 집에서 잠을 자고 온다.”고 항께. 그 집을 졸졸졸 찾아 갔어. 댈싹한 놈이 앞에 서. “여기서 소금장시 여기서 사람 한나 자고 갔냐?”고 해서 “자고 갔다.”고. “어떤 사람이냐?” 고. “소금장시가 요리 자고 소금가마니 놔두고 우리 팥죽 다 묵어 부리고 갔다.”고 그러드라구요. 그 놈이 어찌코 도망을 가서. 딸싹한 놈이라서 어찌기 텔레비만한 딸싹 큰놈이 일어나서 헤쳐 강께. 그 사람이 못걸어 가서 거기서 죽어부렀다네 글쎄. 산속에서 배 치여서. 팥죽에 치여가꼬. 그런 사람도 있어. 그렁께 에지가니 처묵고 갔으몬 됐을 것인디.

  • 돔을 먹은 강감찬(蛇頭魚尾)

    조사 장소 : 죽산리 산두마을

    조사 일시 : 1997년 11월 26일

    조 사 자 : 이수자, 장주환 조사

    제 보 자 : 박일상(남, 66)

     

    강감찬이는 나주 요그 목사 아니요? 강감찬이가.


    (조사자 : 강감찬이요?)

    예. 옛날에 나주 목사 아니였오? 나주 목사 사신분 아니요잉. 그래서 강감찬이는 나주 목사 살았어도 근거가 없어요. 어서 죽었는지 죽은 근거가 없어요. 그런께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고 그러그든. 강감찬이가 어째 하늘로 올라갔냐 하며는. 안 죽어서. 어째 안 죽었냐면 돔을 먹었던 것이여.


    (조사자 : 돔이요?)

    강감찬이가 거 지금 같으면 그 태게는 입법. 사법, 행정을 전부가 다 군수가 다 하고 왕이 다하고 거뭐지고 않했소이. 옛날에는 지금은 전부 분할이 되았지만은. 그렁께 지금 같으면 군수를 함시롱 그 경찰들 보다가. 밑작에 나졸들 보다가 동지섣달에 횟감올 가져오라 허거든. 횟감을 해가꼬 오라고 허거든. 그렁께 아 동지섣달에 어디 가서 얼음 깨고 횟감을 잡을 것이냐? 물에 가서. 생선회. 여그저그 다닌께 “너그들 안 해가꼬 오면은 목을 짤려 죽인다.” 헌께 안 죽을랑께 여그저그 돌아다니는디, 어느 마을을 가니까 지드란 구랭이가 담을 넘더란다.


    “야 요놈 잡아 가꼬가서 껍덕 배껴서 해주면 횟감인지 알게 뭐신지 어찌게 알라디야?”


    허고 잡아가꼬 가서 껍덕을 배끼고는 꼬리 잘르고 대그빡 짤라버리고는 횟감을 해다 준께로 와샥와삭 잘 먹더란다. “껍덕하고 대가리는 어쨌는고?” 헌께  ‘하고. 오매 죽었다. 인쟈 우리는 죽었다.’ 무릎을 꿇고

    “살려 주시오." 허고는 고놈을 갖다 준 걸 고놈까지 삭 먹어 부드란다. “아따 잘 먹었다. 이것이 진짠디 진짜를 내 버리고 이놈들 가져왔다.”고 그러드란다. 그것이 전이여. 거시기에 사두어미이라디야. 사두어미. 머리는 뱀 사짜 뱀같고 꼬리는 고기 꼬리같이 생긴 것 보다가 돔이라고 근데. 돔. 그걸 먹었어. 그래서 강감찬이가 어디서 죽은지 근거가 없대요. 나주 목사로 살았는지.


    (조사자 : 아 강감찬 이야기가 간혹보니까 어르신들이 얘기해 주신 분이 계시드라구요. 그런데 지금 해 주시는 얘기는 제가 처음 들었거든요. 그런데 강감찬이 나주 목사를 한거는 처음 알았네요.)

    돔이 있대, 지금 짱어가 대고빡허곤 구랭이 같고 꼬리만 고기 꼬랭이. 아니 납작허니. 그런디 구랭이가 그런 구랭이 보고 돔이래. 그걸 먹을면 그렇게 좋다면서야. 파충류는 전부가 다 꼬리가 동글동글 안하냐이.


    (조사자 : 아. 그래요?)

    그런거시 인쟈 머리를 구랭이고 꼬리는 고기같이 생긴 것이 조매 있것냐 없제. 악어꼬리가 어떻게 생겼디. 납작허디? 동그라치? 그러제. 납작허니 파충류는 없어.

  • 임백호 이야기

    조사 장소 : 죽산리 화동마을

    조사 일시 : 1997년 11월 25일

    조 사 자 : 이수자, 장주환 조사

    제 보 자 : 유재산(남, 84)

     

    임백호가 아무리 추울 때래도 우리 계집애처럼 부채를 들고 얼굴을 가리고 다녀. 여자들 눈이 보면 미처부린께잉. 그렇게 참 잘난 인물이여. 정말로. 한 번 저 가니께 잉. 좋은 입성으로 한양으로 가는디 한번은 저 숭어장시가 잉 “숭이 사시오.” 그러거든. 그렁께 숭어 장수가 “허. 여보 내 이복허고 바꿔 입세.” 그러드라는구만. 자기 마냥 금의 입성을 차려 입고 댕기면 돼지. 아 하늘이 낸 놈을 아, 얼굴이 어떻게 잘났던지 그런 사람이여. 딱 이자 가는디. 


    승이장시가 “아 승이 짐하고 그 놈으거 옷 그놈허고 바꾸자.”고 그러거든. 아 그런게. 이 숭어짐 이거 하나 주면. 인자 그 놈으거 들자 치면 하여간에 그 거머리 새끼제. 그 금의입성에 다니고 그러니께 “그럼. 그러라.”아 딱 입고는 “숭어 사시오.” 하고 그러거든. 그렁께 숭어짐을 짊어지며 가는디. 거 가서 인제 부잣집 가서 이제 대문 열어 부치고 그런디. 아 금으 입성으로 숭어짐을 고하고 바꿔야 제정에 괜찮었거든. 그래서 바꿔준거야. 옷을. 그래서 인제 숭어짐을 모태야 모태야 임백호씨 집을 들어가지 못허고 몽그작 몽그작 하고 있어. 바꿔지 못하고 딱 빠궈 입고는 만지작 하고 숭어 짐도 가지고 있어.


    숭어장시가 가만히 보이께 참 얼굴이 참 금으입성을 잘 입어 노니게 빌미스러울 것이라고. 그 때 당시에는 입었제. 부체 옷을 입고는 이제 저녁에 밤변장이라 그런지 어디서 옥퉁소리가나. 옥통소를 불고 있어. 아따 그렁께 기생하고 새면육각을 쳤는디 아주 여간 천하인물이여. 약자로 차례차례 고놈을 한 번 옥통소로 불고 있은게 아 어서 낮익은 옥통소리가 난다하거든. 하인들보고. 기생들이 개인 비서를 데리고 있었든가 “데려오니라.”고 그러거든. 아 개미 새끼라도 한번 데려오고 싶다 그런디 몰으겄소.


    데려다놓고는 (퉁소를 부는 임백호를 데려옴) 목욕제계하고 다 씻혀 노으니 참말로 그런 인물이 없어든. 세상에 그런 인물은 없어. 너들 다 가라 딱 해놓고 둘이 인자 주고 받고 막 서로 굴도하고 노래 같이 부르고 허느디 사람이 미칠지경이지. 기생도 글 잘못허는 기생이 없어. 잘 하고는 나중에는 낮이나 밤이나 그 기생을 붙들고 놀아 이. 아 며칠 묵었는디. 그 곳에서 가만이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부렸어. 미칠지경이지 그 기생이 찾느라고. 아 마음은 미칠지경인디 기생은 찾덜 못하고 그로고 있는디.


    성은 뭐시라고 이름은 뭐시라고 수정은 들고 기생이 아무데 사는 아무개 임당고(골)라고 그러드라 요로코 거짓말로 그랬어. 성을 모른께 나중에 회진 모자휘 회진 거그서 왔다고 하더라. 아따 회진을 간께 임당고라는 사람이 어떻게 잘했는지 참 잘난 인물이여. 거그서 불호령을 쳐서 붙어있지 못하고 쫓아부서. 그냥 나와부렸어. “내가 그 남자를 못 데리고 요그 왔으니, 발도 못부치게. 내가 살아서 뭐하냐?” 하고 밖에 나오니 회진 앞이 강이여.


    “예이 강이나 빠자 죽는다."


    고 매씨하고 양씨하고는 신 두컬레를 딱 벗어 놓고는 강물가에 죽어 버렸어. 죽어분께 임당골은 말만 임당고제 큰 잘난 인물이제. 신 두커리 보고는 찾으라고 그렁께 나갔어. 그사람이 여자가 남자를 찾았어. 좋게 묻어주고는 있는디. 나중에 베살할려고 그 전때 배실한 사람이여. 쪼까이 했다 하고는 말아 부렀어. 그런디 나중에 송장을 찾으려고 들고 매고 해가꼬는 찾았어. 남자가 인자 배실길에 올라서 배실할라고 인자 헌는디 글도 잘하고 뭐예 다 잘 헐 큰 선비여. 아주 이 선비 그 사람을 글을 써서 배실할려고 탁 띵겼어.


    어찐 일인고 허니 배실을 딱 던진께 어떤 여자가 머릴 삭발하고 그런 여자가 와가꼬는 그 남자 귀신이 왔던 것이야. 못허게 베슬 못하게 띵겨버려. 도로 배실했으며 도로 띵겨불고. 떨겨불고. 그래서 배실은 못했어. 에라 이제 배실은 못하겠다. 회진 요 앞에 큰 인물요. 아주 아 죽기는 언제 죽었냐면 그 남자가 서른 다섯에 죽었어. 아까운 나이에.

  • 오누이 이야기

    조사 장소 : 죽산리 화동마을

    조사 일시 : 1997년 11월 25일

    조 사 자 : 이수자, 장주환 조사

    제 보 자 : 임매실(여)

     

    그 전에 엄마 없이 남매가 살았더라고. 시골에서 얻어 먹고 살장께 간디 또 가고 간디 또가고 고로께 안 되겠은까는 저그 어디 너른 디로 나갔어. 나도 들은 얘기제이. 가다본께 가서 있어. 본께 못살 것 같드라케. 근께는 “여기서 너하고 나하고 헤어지자. 헤어져가꼬 아무디라도 성공해서 만나자.” 그랬어. 그랬는디 인자 머시매는 부자집 거시기를 들어가고 여자는 기생으로 빠졌어. 그래가꼬는 부잣집 아들로 들어갔는디. 그 집이도 아이들이 남맨디다가 고리 또 들어 갔어. 아빠가 즈그 남자를 델코 갔어. 


    댈코 가 가꼬는 그 집이 애기 머시매로 해서는 머시매가 형이고 그 여자로 해서는 이것이 오빠가 되아요. 가운데여. 가운데로 나이가 돠아가꼬 들어갔어. 근디 항상 이것이 일등을 해 부러. 학교를 보낸디. 근께 아빠는 그것도 좋게 생각헌디 엄마는 항상 불만이제. 그러안하면 즈그 애기가 일등인디 고놈 즈그 애기가 언제나 이등으로 나가. 그런께 항상 불만을 헌디, 아무라도 잘하는 놈 보낸다고 인자 그 애기를 대학교를 다 마치고 외국유학을 보냈어. 보낸디 가다가 딱 쓰리를 해 부렀어.


    즈그 유학 갔다올 준비를 다해서 즈그 아빠가 줬는디. 너므 아빠라도 그러고는 인자 유학 갈길이 없제. 그래 가만히 섰은께는 기생들이 요로코 놀아가는 가만히 거가 그 소리를 듣고 있은께는 나오드라고요. 거 한나가 나와서 “들어가자.” 하더라 해. 그래 들어가 있는디 “어째. 뭔 일이 있느냐?” 사연을 물어 보드라거요. 근께 “나는 이리저리해서 유학을 갈 것인디 요로케 쓰리를 당해 불고 못가고 있당께.”는 자기 벌어논 재산을 다 떨어서 줬어.


    “졸업하고 돌아올 때 이 자리에서 만나자.”고 그러고. 그래 가는 인자 유학을 가서 공부를 다 마치고 돌아온디. 인자 한국에서 제일로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이여. 그 사람이. 그런께 인자 그 즈그 갈쳐줬던 아빠도 마중을 나오고. 요론 국가에서도 나가고 또 그 기생도 나왔어. 나갔는디 어느 차를 타야 쓸지를 모른께 그 국가에서 내 보낸 차를 탔으라우. 타가꼬는 자기 목적지를 돌아왔는디. 거시기 즈그 아버지가 처음엔 아버지라고 하더니 공부 딱 마치고 돌아온께는 사우로 생각해 부러. 근디 돈대준 기생도 자기 인연올 맺을라고 돈을 대줬는디.


    어매 근께는 인자 “거시기 그 기생을 언제 어디서 만나자 했지.” 그리가꼬는 “나 지금껏 자기 갈쳐준 사람이 다 은인이여. 어릴 때부터 다 키웠은께.” 그래서 인자 거그를 못 띠고는 그 기생한테는 귤 두 개를 요로코 줬어. 줌시로 한나는 먹은께는 처음에는 달드라 그거여. 근데 둘차 머근께는 시어. 인자 신께는 ‘아. 이미 나하고는 끝난 사람이구나.’ 하고는 그 사람을 죽여불라고 요로코 딱 거시기를 품었어.


    품었는디 인자 여자가 그랬어. ‘저 사람 죽이고 나도 죽은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디 “내가 소원이 대전 아무디서 헤어진 우리 오빠 한번만 만나보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것는디 그 소원을 못이루고 죽은께 그것이 소원이라.”고 그랬어. 그래 생각해 본께 즈그 남매여. 즈그 남매여. 그 기생이 동생이고 그 유학 갔다온 사람이 오빠여. 그것이루 끝났제. 그런 것두 이야기가 되것소?

  • 샘을 파고 망한 부자

    조사 장소 : 등수리

    조사 일시 : 1997년 7월 27일

    조 사 자 : 조웅, 장봉선 조사

    제 보 자 : 이윤식(남, 77)

     

    여기가 이괄이, 여기가 이괄씨가 여기서 생존했시우. 내가 여기서 살아온 디가 이괄의 터라 그러고 있는디. 근디 이괄이가 여그서 몰려서 멸망을 당하지 않았시우? 여기가 옛날에는 솔찬히 이괄이 권리 부리고 살았어요. 사홀 왕까지 했은게. 쿠테타 해가지고. 이 마을이 배의 형국이라 헙디다. 배의 형국인데 본래 이것이. 이 마을이 식수가 곤란했시우.


    우리 어르신네 참 선조때 부자마을로 살았시우. 그래가꼬 결혼을 했시우. 그 때 있은께 결혼을 했시라. 동네에 어떤 사람이 오면은 후이 대접을 하고 인심을 써야 한디 독재를 했어. 그런데 제일 귀한 것이 식수 여. 저기 날랑들 새암에서 물을 길러다가 먹었시우. 그런데 도사가 그 분이 이놈의 것들 망쳐 부러야겠다고 와서.


    와가꼬는 역시나 무엇을 좀 요구하려니까 거시기 대틀을 매고 할라근께 “나 살려주쇼. 와서 본께 식수가주 곤란한 것 같은데 식수 해결을 해 드리겠다.” 했는가비여. 그 사람 말이. 그러니까 여기서는 반가운 말인데 식수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식수를 해결을 하면 어쩌겠냐?”하니까 “내 목숨을 바치겠소.” 했는가 비여. 마을 가운데 가서 큰 새암이라 그러는데 거기에 소나무가 있었어. “그 놈을 비라.”고 그렇게


    “이거 비면 마을에 큰일난다.”


    고 그렁게. “아아. 나 목숨을 걸었당게.” 그래서 그 놈을 비고 팠는디 물이 아주 좋게 나와서 참 살기가 좋아졌다 했는디 그게 바로 배의 복구로 파버린 거지. 여기가 배의 형국인게. 거 나무를 파고 식수를 구할려고 구멍을 뚫어 버렸다는 것이여. 그러니까 배가 가라 앉는 것 아니여. 그래가꼬 재산은 다 풍지박산 되고. 도사가 마을을 망하게 하고 갔다는 거여. 옛날 어른 봐도 잘난 사람이 못난 사람 돕고,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 돕고 살아야 한디 그러질 못했다 그 말이여. 그래가꼬 그런 예가 있습디다.

  • 작은 부인 아홉을 얻어 아들 낳은 이야기

    조사 장소 : 매성리 1구

    조사 일시 : 1997년 7월 28일

    조 사 자 : 조웅, 장봉선 조사

    제 보 자 : 최순임(여, 80)

     

    지금 아들이 서른시 살 먹었는디. 아들 그넘 날라고 작은 마누래를 아홉을 얻었어. 아들은 얻어서 나아가꼬. 영감님은 나하고 십삼 년 세인 께로 얻으몬 영감님은 나이가 많고 난 적은께로 못살 것인게 나가브러. 그 아들은 우리영감이 오십 구 세 때 난 아들이여. 작은 마누래 얻었다는 이야기를, 일제 때 인자 동상네가 애기가 세 살 먹었어.


    그 넘을 애기를 손을 볼라고 우리 영감님하고 사랑허고 자라고 울타리 밑에가 있응께는 두 시간인가 있다가 가데. 가서는. 손을 볼라고 내가 끌여다 붙였제. 그래가꼬는 사랑을 했등가 어쨌등가 하래 저녁 잤어. 근게 우리 식구가 되야 브렀제. 그것은 즈그 집에 가 있고. 딸 성재가 있고 아들이 하난디 그 양반이 홀엄씨되고 애기를 났어. 그래가꼬 연결을 시켜준거여. 그래가꼬 여름내 친허게 지내더니 가을이 된께 다른 남자를 얻었등갑데.


    그하네 그랬등가, 인자 우리 영감을 띨락해. 우리 영감을 떨락헌께 인지 시안내 떨락해라우. 어떤 남자가 섬으로 갈락하니까 따라서 갈라고 우리 영감을 떨락해. 근디 우리 영감이 안떨어질락 해. 그래가꼬는 생전 매질도 안 헌디. 걍. 나를 때리고 그래라우. 그래서 인자 “너땀에 내가 맞는다.”허고 그 집 가서 문이나 바삭비삭헌 문을 이렇게 헌께 깨붓어져 부렀네. 근게 즈그 김가라. 김태진이란 양반이랑 문을 고쳐주락해. 그러니께 우리 오빠가 인자 “오매, 오빠 인자 나는 이러고 걱정이라.”고 헌께 “문을 이러고 저러고 해서 문이 어긋났단 말이요.” 돈 주문 갖고가 할 것인디 그 때는 몰라서. 


    그래가꼬 빠글빠글한 문을 새문으로 달아줬제. 그것이 띠보한태 배고, 우리 영감한태 배고, 놀보 덕천냥반한태 배고 여러시 합동을 해서 애기를 인자 뱄어. 그 넘을 딜고 나갔어. 모냐 얻은 사람이 디고 가브렀는디. 디고간 남자가 야문께요 사람을 또 띠블고 다른 여자를 얻은 게는. 요 머시매가 시 살 먹은께는 우리보다 찾아가락 해. 우리도 손을 못났는디. 그래서는 삼종 시아제 보다가 “이러고 저러고 해서 작은 사람 얻어 속끌이니 그 넘 딜여다가 질들이믄 쓰겄네.” 그래서 인자 그 넘을 딜러 갔어. 딜러 간께는 그 때는 논이네말이 “저만치나 키워가꼬 그 집 줘야.” 한게는.


    “나락을 석 섬을 줄 것인께. 시방 주잖에. 가을에 줄 것인께로 그 애기를 나를 도라.”고 근께. 내일이 장이든가, “내일에 장을 디꼬 오마.”고 그래라. 그런게 인자 장으로 갔어. 장으로 간께는 가를 할딱 배깨가꼬 디고 왔어라우. 데리고 와서는 장에 가서 옷 사입히고는 여까장 “내가 느어매다. 내가 느어매다.”허고 업고 왔어. 즈 엄씨는 따로 오고. 그렇게 와가꼬는. 저녁된께 즈엄씨는 간께. 애기가 따라 갈라고 환장을 해라우.


    그래서 인자 단 수싯대나 뭔나 줘가꼬 숙어질락허몬 즉엄씨가 오네. 꼭. 안 와야 쓴디. 칠월에서 이월까장 사립을 장가 놓고. 열어노몬 기냥 나가브러. 나가몬 딜러가제. 딜러 가믄 애기 그 넘 줬다고 이바지허고 보신허고 술 받아서 가제. 내가 미친년이여. 괜찮해. 공들인 것잉게. 그래가꼬는 이월까장 해도 정이 안 붙어. 에이 못 쓰것습디다. 내가 내속으로 어찌고 해서 나야제 안 되것습디다.


    내비둬붓써. 내비둔께. 인자는 어른인디. 한 번은 지가 장씨라고 왔는디. 와서 도둑질허고 가지가블고 그랬어. 사람이 애래서 질을 잘 들여야 헌디 잘못 들믄 나쁜 사람이 되분가 봐. 그것이 그래가꼬 나쁜 질로 빠지는가벼. 그래가꼬는 아홉번째 작은 할멈을 얻어서 오십 구 세에 아들을 났당게. 지금 그 아들이 여수 가서 선생해. 손 한나를 볼라고 허몬 그렇게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