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똑같은 이름, 시대마다 다른 모습의 의복

똑같은 이름, 시대마다 다른 모습의 의복
옛날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살았을까? 의복은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에 따른 생활양식의 표현으로 다양한 형태로 바뀌었다.
사회발달에 따른 계급 차이, 문화·종교의 발달, 외국 문화의 수용, 남녀 성별에 따른 변천요인 등에 따라 점차 다양해졌다.
한반도의 역사 또한 의복의 변화와 함께 흘러왔다. 고구려·백제·신라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의복의 변천을 시대상과 함께 알아보자.
저고리

01 고구려

저고리(襦)

상대시대 저고리인 유(襦)의 길이는 엉덩이선까지 오고, 소매는 좁은 통과 같았다. 또한 곧은 깃에 여밈이 겹쳐지는 모양이다. 허리에는 띠를 매에서 고정했다. 깃과 도련 그리고 소매 끝은 저고리 바탕색과 다른 색의 천으로 둘렀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진 저고리는 남녀가 같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이 모두 같았다.

단의

02 통일신라

짧은 저고리, 단의

통일신라에서는 저고리를 위해(尉解)라고 불렀는데, 흥덕왕 복식금제의 기록에는 단의(短衣)라고 하고 있어 오늘날의 저고리와 짧은 저고리를 의미하는지, 두루마기에 비해 짧다는 뜻에서 명명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대부분 여자가 착용하였으며 치마를 저고리 위에 입을 때 짧은 저고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백저의

03 고려

흰색 모시로 만든, 백저의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시대 여성들은 흰 모시 저고리인 백저의와 황상(노랑치마)를 입었다. 이는 고려시대 고유 양식으로 계급과 상관없이 착용하였다. 좌측의 ‘조반부인 초상‘에는 가장 안쪽에 흰색 옷을 입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여복

04 조선

여자복식 중 저고리

조선시대에는 저고리와 같은 뜻으로 ‘곁막음[脥隔音]’ 또는 ‘곁막이[絹莫伊]’가 있고, 궁중용어로는 ‘동의대(胴衣襨)’라는 말도 쓰였다.저고리의 구성은 길·소매·깃·동정·고름이 기본형제이며, 여자는 끝동이 달리기도 한다. 저고리는 감·재봉법·모양에 따라 홑[單]·겹·솜·누비저고리가 있으며, 여자 저고리 중 ‘당코저고리’는 깃의 모양에 따른 것이다.

대중고, 궁고

01 고구려

바지 고(袴)

상대시대 바지인 고(袴)는 용도에 따라서 그 폭과 길이가 달랐다. 그에 따라 궁고(밑이 막힌 바지), 세고(폭이 좁은 바지), 대구고(폭이 넓은 바지), 곤(길이가 짧은 잠뱅이 형태)와 같이 다양한 바지가 용도에 따라 만들어졌다. 이러한 바지는 남녀가 공통으로 착용했다.

바지 고(袴)

02 통일신라

유목민족의 기본복식, 고(袴)

고(袴, 이후 바지)는 원래 추위를 막기 위해 착용하였는데, 후에는 말을 주로 타는 유목민족에게 바지가 널리 퍼졌다. 신라시대에는 삼국시대에 이어 통 넓은 바지를 입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평민층의 바지는 역시 통이 좁은 바지인 궁고(窮袴)가 계속해서 입혀지고 있었다.

민서복

03 고려

포와 유, 고(袴)로 이루어진 민서복

민서복(民庶服)은 일반 민중들의 옷이다. 고려시대 남자 민서복은 기본적으로 포(袍)와 저고리인 유(襦), 그리고 오늘날 바지로 불리는 고(袴)로 이루어졌다. 또한 농상 공기, 국관, 귀인의 평거복 등 거의 대부분이 상하를 불문하고 백저포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남복, 여복

04 조선

남자와 여자 모두 입는 바지

조선시대에는 남자와 여자 가리지 않고 모두가 바지를 입었다. 남자의 기본 복식은 저고리와 바지였다. 여자의 기본복식은 저고리와 치마로, 치마 안에 속옷으로 바지나 고쟁이를 입었다. 남자와 여자의 복식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구조는 초기와 다르지 않았다.

치마(裳)

01 고구려

치마(裳)

상대시대 치마(裳 또는 裙)는 일반적으로 길이가 길고 폭이 넓어 땅에 끌릴 정도였다. 허리에서 치마단 끝까지 잔주름이 고르게 잡혀 있으며 치마단에는 장식선인 선을 두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귀족층은 폭이 넓은 치마를, 하층민은 폭이 좁은 치마를 착용하였으며 치마 밑에는 반드시 바지를 입었다.

표상, 내상

02 통일신라

표상, 내상

통일신라에 이르러 여인들은 신분의 귀천없이 치마를 입게 되었다. 여기에 속치마라고 불리는 내상(內裳)을 껴입은 것은 복식금제에서 처음으로 나온 제도이다. 기존 상대시대의 치마인 표상(表裳) 안에 내상을 입었다는 것은 복식구조가 발전하여 복잡해지고 있는 것을 말해준다.

선군

03 고려

겹쳐입는 치마, 선군

고려시대에는 저고리를 겉으로 내어 입는 양식과 안으로 넣어 입는 양식이 공존한 것으로 보인다. 송나라의 사신 서긍이 고려를 다녀간 후 저술한 『고려도경』에는 고려 여인들이 황색 치마를 좋아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선군’이라는 치마를 입는데, 여러 겹 겹쳐 입고 폭이 넓을수록 좋아한다고 기록하였다.

대란, 스란치마

04 조선

스란단이 장식된 대란, 스란치마

스란치마와 대란치마는 치마 밑단에 스란을 장식한 치마이다. ‘스란치마’는 스란단을 한층 붙인 것으로 소례복으로 사용하였고, ‘대란치마’(大襴치마)는 스란단을 2층 붙인 것으로 ‘쌍스란치마’ 라고도 하며 대례복으로 사용하였다. 두 치마는 예복용 치마로 궁중의 여성이나 양반집의 부녀자가 갖추어 입었다.

포(袍)

01 고구려

포(袍)

상대시대의 포(袍)의 기본형태는 상대시대의 저고리인 유(襦)와 같아서 깃, 도련, 소매부리에 선이 둘러졌다. 또한 저고리와 같이 곧은 깃에 여밈이 겹쳐지는 모양이다. 포는 현재는 두루마기라고도 불리며 저고리와 바지 위에 입던 겉옷으로 주로 방한과 의례적인 용도로 입었다.

표의 - 단령

02 통일신라

표의 - 단령

통일신라 시대의 표의(表衣)는 포(袍)와 상류층 관복으로서 단령(團領)이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표의를 신분의 귀천 없이 남녀 모두 착용하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시대 여성은 저고리인 단의를 입고 의례적인 경우에만 표의를 덧입었다. 표의 위에는 배자의 일종인 배당을 입었으며, 반비와 달리 소매가 없는 옷이었다.

공복

03 고려

왕과 백관의 겉옷, 포(袍)

고려시대에 포는 관복과 편복으로 널리 착용되었다. 왕과 백관은 둥근 깃의 포를 주로 입었는데 소매통이 좁은 것도 있고 넓은 것도 있었다. 왕은 각종 의례에서, 문무백관은 공복으로 입었다. 편복으로는 통일신라 때의 포가 고려에서도 그대로 습용되는 가운데, 원 간섭기에 중국으로부터 여러 포가 전해져 그 종류가 다양해졌다.

별감복

04 조선

두루 막힌 포, 주의(周衣)

주의(周衣)는 조선시대에 남녀 귀천 없이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겉옷으로 주로 외출할 때 입었다. 주의는 우리말로는 ‘두루마기’ 로 옷 전체가 두루 ‘막혀있다’라는 뜻의 ‘두루막이’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가 밖이 아닌 집에 있을 때도 예의를 갖춰 두루마기나 창의를 입어야 했으며 또한 외출 시에는 두루마기 위에 중치막·도포를 입기도 하였다.

내가 제일 잘나가, 그 옛날 조상들의 몸치레

궁궐 안, 특별한 사람들이 산다
궁궐은 왕족이 사는 큰 규모의 건물인 궁(宮)과 궁의 출입문 좌우 망루를 의미하는 궐(闕)이 합쳐진 단어다.
국가의 중심지이자 왕의 생활공간인 궁궐은 왕을 비롯한 왕족, 그리고 그들의 생활을 돕는 궁녀와 내시들이 상주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궁중 생활은 많은 사람이 함께하기 때문에 왕권 국가에서 엄격한 규범 아래 행해졌다.
각각의 지위와 역할이 그대로 나타난 그들의 옷차림을 유물을 통해 알아보자.

01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로 알아보는 조선시대 궁궐 안 사람들

다음 그림은 영조(英祖)가 김한구의 딸을 계비, 즉 정순왕후(貞純王后)로 맞는 과정을 기록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상·하 2책 중 하책에 수록된 반차도이다. 영조는 1757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가 승하하고 삼년상이 지나자 왕실 가례의 예법인 육례(六禮)의 절차에 따라 계비를 맞았다. 이 반차도는 18세기 어람용 반차도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또한 왕과 왕후를 호위하는 다양한 신분의 행렬이 있어 그들의 복식을 확인할 수 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왕의 행진

조선시대 왕은 가례 때 어떤 옷을 입었을까?

영조는 왕의 대례복을 입고 있다. 대례복은 조선의 왕이 제례나 가례 등 중요한 의례를 행할 때 면관과 함께 착용하는 복식 일습이다. 또한 왕권을 상징하는 법복으로, 국가의 길례, 가례, 흉례 등 다양한 성격의 의례에 착용하는 복식이다.

자세히보기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왕비의 행진

조선시대 왕비는 가례 때 어떤 옷을 입었을까?

정순왕후는 조선의 왕비가 매일 문안, 종친 및 외명부 접견 등의 의례에 참석할 때 입는 복식인 소례복을 입고 있다. 왕비는 의식의 규모에 따라 치마, 저고리 위에 당의나 원삼을 착용한다.

자세히보기

융복 입은 백관 융복은 조선의 백관이 군사(軍事)가 있을 때 착용하는 복식이다. 융복은 립(笠), 철릭, 광다회, 목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까지 왕 이하 백관 모두가 관복을 대신하여 입었다.
너울 쓴 궁녀 말을 탄 궁녀와 정5품 궁녀가 너울, 여립, 장삼, 치마를 입고 왕비의 가마 주변을 걷고 있다. 너울은 조선시대 왕비, 왕세자빈, 왕녀, 군부인, 궁녀, 외명부 등의 상류층 여인들이 얼굴을 가리기 위해 착용한 쓰개이다. 립(笠) 위에 얹어 어깨를 가릴 정도의 길이로, 고려시대의 몽수(蒙首)보다 길이가 조금 짧다.

내가 제일 잘나가, 그 옛날 조상들의 몸치레

02 유물로 보는 궁궐 사람들

태조 이성계의 상복 이미지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상복(常服)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모습으로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과 양다리쪽에 삐져나온 옷의 형태는 조선 전기 공신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자세히보기

순정효황후의 원삼 이미지입니다

순정효황후의 원삼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가 백옥떨잠이 장식된 큰머리에 원삼(圓衫)을 착용한 모습이다. 원삼 위에는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팔 아래로 내려오는 수대(綬帶)를 걸었다. 왼쪽 가슴에는 황태자 가례 기념장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훈장을 달았다. 상단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장이 있다.

자세히보기

흥선대왕군의 금관조복 이미지입니다

흥선대원군의 금관조복

금관조복은 문무백관이 조하(朝賀)나 의식 때 예복으로 착용하는 가장 성대한 복식이다. 금관을 쓰고 서대를 착용하였으며 상아홀을 들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된 금관조복본과 거의 유사하여 미세한 부분적인 차이들을 감안하더라도 하나의 초본을 대상으로 한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복본이나 별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세히보기

내가 제일 잘나가. 그 옛날 조상들의 몸치레

내가 제일 잘나가. 그 옛날 조상들의 몸치레
인간이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을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꾸미는 방법은 몸을 꾸미는 방법과 복식을 활용해 치장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의복과 함께 어울리는 장식으로 자신을 꾸미는 것은 모든 시대 사람들의 각자 생활 양식을 표현한 생활 문화의 대표적인 산물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전근대 사회에서의 치장은 신분에 따라 소재, 색장, 크기 등에 제약을 두었으며, 개인적인 기호보다 신분적 제약이 두드러졌다.

조선 탕건

머리에 쓰던 관(冠)의 일종인 모자로, 조선시대에는 관직자가 평상시에 관을 대신하여 썼다. 속칭 ‘감투’라고도 하여 벼슬에 오르는 것을 일컫는 ‘감투쓴다’는 표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조선 안경

안경은 서양에서 발명되었다는 설과 중국에서 발명되었다는 설로 나뉜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안경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명나라 장수 심유경(沈惟敬)과 왜의 승려 현소(玄蘇) 모두 작은 글자를 크게 보이게 하는 안경을 사용하여 가늘고 작은 글씨를 읽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하던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 미투리

짚신과 미투리는 모양은 같으나 재료에 차이가 있다. 미투리는 삼, 왕골, 부들 같은 재료로 만든 것을 말한다. 은혜를 갚을 때, 머리털로 신을 삼아도 다 못 갚는다는 말을 한다. 모양은 목이 낮고 개방형으로 흔히 날이 여섯 개로 되어 있다. 짚신과 비슷하지만 짚신보다 고급스러운 물건이다.

조선 안경

안경은 서양에서 발명되었다는 설과 중국에서 발명되었다는 설로 나뉜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안경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명나라 장수 심유경(沈惟敬)과 왜의 승려 현소(玄蘇) 모두 작은 글자를 크게 보이게 하는 안경을 사용하여 가늘고 작은 글씨를 읽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하던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 미투리

짚신과 미투리는 모양은 같으나 재료에 차이가 있다. 미투리는 삼, 왕골, 부들 같은 재료로 만든 것을 말한다. 은혜를 갚을 때, 머리털로 신을 삼아도 다 못 갚는다는 말을 한다. 모양은 목이 낮고 개방형으로 흔히 날이 여섯 개로 되어 있다. 짚신과 비슷하지만 짚신보다 고급스러운 물건이다.

조선탕건

머리에 쓰던 관(冠)의 일종인 모자로, 조선시대에는 관직자가 평상시에 관을 대신하여 썼다. 속칭 ‘감투’라고도 하여 벼슬에 오르는 것을 일컫는 ‘감투쓴다’는 표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조선 미투리

머리에 쓰던 관(冠)의 일종인 모자로, 조선시대에는 관직자가 평상시에 관을 대신하여 썼다. 속칭 ‘감투’라고도 하여 벼슬에 오르는 것을 일컫는 ‘감투쓴다’는 표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조선탕건

짚신과 미투리는 모양은 같으나 재료에 차이가 있다. 미투리는 삼, 왕골, 부들 같은 재료로 만든 것을 말한다. 은혜를 갚을 때, 머리털로 신을 삼아도 다 못 갚는다는 말을 한다. 모양은 목이 낮고 개방형으로 흔히 날이 여섯 개로 되어 있다. 짚신과 비슷하지만 짚신보다 고급스러운 물건이다.

조선 안경

안경은 서양에서 발명되었다는 설과 중국에서 발명되었다는 설로 나뉜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안경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명나라 장수 심유경(沈惟敬)과 왜의 승려 현소(玄蘇) 모두 작은 글자를 크게 보이게 하는 안경을 사용하여 가늘고 작은 글씨를 읽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하던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 댕기

유물로 남아있는 댕기는 대부분 왕실용과 박물관에 소장된 혼례용 댕기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도투락(都吐絡)’이라는 용어는 16세기에 본래 금박을 의미하는 ‘도다익(都多益)’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9세기 전반에는 도토락이라는 금박을 찍은 댕기가 많이 사용되었고, 반드시 혼례용 댕기만 도투락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삼작노리개

노리개는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허리에 차는 부녀자들의 장신구이다. 기원이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된 우리 고유의 장신구 노리개는 조선 시대에 와서 더욱 다채롭고 화려하게 발전하였다. 노리개는 몸체, 매듭 장식, 술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옷고름에 차기 위해 은이나 동으로 만든 핀에 해당되는 띳돈도 있다.

조선 당혜

당혜는 코와 뒤꿈치에 당초문(唐草文)을 놓아 만든 마른 신으로, 안은 융 같은 푹신한 감으로 하고 거죽은 가죽을 비단으로 싸서 만들었다. 조선시대 여자의 신으로는 온혜(溫鞋)·당혜 등이 있었는데 온혜는 여염집 부녀자가 신었고 당혜는 양갓집 부녀자가 신었다.

조선 삼작노리개

노리개는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허리에 차는 부녀자들의 장신구이다. 기원이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된 우리 고유의 장신구 노리개는 조선 시대에 와서 더욱 다채롭고 화려하게 발전하였다. 노리개는 몸체, 매듭 장식, 술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옷고름에 차기 위해 은이나 동으로 만든 핀에 해당되는 띳돈도 있다.

조선 당혜

당혜는 코와 뒤꿈치에 당초문(唐草文)을 놓아 만든 마른 신으로, 안은 융 같은 푹신한 감으로 하고 거죽은 가죽을 비단으로 싸서 만들었다. 조선시대 여자의 신으로는 온혜(溫鞋)·당혜 등이 있었는데 온혜는 여염집 부녀자가 신었고 당혜는 양갓집 부녀자가 신었다.

조선 댕기

유물로 남아있는 댕기는 대부분 왕실용과 박물관에 소장된 혼례용 댕기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도투락(都吐絡)’이라는 용어는 16세기에 본래 금박을 의미하는 ‘도다익(都多益)’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9세기 전반에는 도토락이라는 금박을 찍은 댕기가 많이 사용되었고, 반드시 혼례용 댕기만 도투락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당혜

당혜는 코와 뒤꿈치에 당초문(唐草文)을 놓아 만든 마른 신으로, 안은 융 같은 푹신한 감으로 하고 거죽은 가죽을 비단으로 싸서 만들었다. 조선시대 여자의 신으로는 온혜(溫鞋)·당혜 등이 있었는데 온혜는 여염집 부녀자가 신었고 당혜는 양갓집 부녀자가 신었다.

조선 댕기

유물로 남아있는 댕기는 대부분 왕실용과 박물관에 소장된 혼례용 댕기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도투락(都吐絡)’이라는 용어는 16세기에 본래 금박을 의미하는 ‘도다익(都多益)’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9세기 전반에는 도토락이라는 금박을 찍은 댕기가 많이 사용되었고, 반드시 혼례용 댕기만 도투락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당혜

당혜는 코와 뒤꿈치에 당초문(唐草文)을 놓아 만든 마른 신으로, 안은 융 같은 푹신한 감으로 하고 거죽은 가죽을 비단으로 싸서 만들었다. 조선시대 여자의 신으로는 온혜(溫鞋)·당혜 등이 있었는데 온혜는 여염집 부녀자가 신었고 당혜는 양갓집 부녀자가 신었다.

전통이 생활이 되다. 지금, 우리 복식

전통이 생활이 되다. 지금, 우리 복식
언제부터인지 전통 한복을 입은 사람들을 구경하기 쉽지 않다. 전통 한복은 아름답지만, 특별한 날이 아닌 평상시 입기에는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은 100여 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 '생활 한복'이라는 단어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복을 입은 사람들의 사진을 통해 한국의 의복에 담긴 우리나라의 긍지를 확인해보자.

남북정상회담이 걸어온 길

1910년

조선의 풍속을 나타낸 사진자료로 사진관에서 기념촬영한 중류층 조선인 가정의 모습이다.

1937년

1937년 12월 25일 프란치스코 제3회 착의식을 기념하여 혜화동 천주교회 앞에서 촬영한 단체사진이다.

1948년

1948년 경 명동 대포집 '은성'에서 백영수, 황준성(신태양 사장), 이온녀, 이봉구 등을 촬영한 흑백사진이다.

1953년

1953년 6월 20일 발행되었으며 앞표지는 분홍색 한복을 입은 여자의 모습이 있고, 뒷표지는 제주도의 한라산 모습이 담겨져 있다.

1969년 이후

노무라 모토유키가 기증한 슬라이드 필름으로 한복을 입은 아이들을 촬영한 사진이다.

1980년

1980년 2월에 경복궁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한복입은 모습과 고궁의 아름다움을 촬영하였다.

1996년

1996년 3월 4일 한복신문사에서 발행한 한복계 주간신문 창간호이다. 표지는 이리자 한복을 입고 있는 방송인 서정희 사진이다.

2000년 이후

단풍 속에서 한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