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는 경기도에서 두 번째로 큰 전통 5일장이 열리는 곳이다. ‘여주중앙통’, ‘여주제일시장’이라고 불리던 이 5일장은, 2016년 문화관광형 시장육성사업에 선정되면서 한글을 테마로 ‘여주한글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주가 한글을 테마로 내세운 이유는 세종대왕릉이 여주에 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릉이 여주까지 오게 된 이유는 당시 풍수지리를 보던 지관들이 여주를 따라 흐르는 남한강 근처를 천하의 명당으로 꼽았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여주시는 세종대왕하면 바로 연관검색어처럼 떠오르는 한글을 전통시장 활성화의 키워드로 가져왔다.
실제로 기존시장이 ‘여주한글시장’이 되면서 단순히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시장 곳곳에 방문객의 눈길을 끄는 세종대왕상, 한글을 연상시키는 조형물, 한글 표지판들이 설치되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또한 한글시장 내에 있는 생활문화전시관 ‘여주두지’에는 실제 예전 사람들이 사용했던 물건을 전시하고 있어 가족단위 관광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처럼 ‘여주한글시장’은 쇼핑과 관광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만족도 높은 시장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매달 5일과 10일 여주 5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한글시장과 연결된 가판에 나와 더 다양한 농수산물과 잡화들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타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럼 볼거리, 살거리가 풍부한 여주한글시장의 알차게 즐기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여주한글시장은 1~4구역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고, 구역 너머에는 난전이 이어진다. 한글 시장의 1구역은 다양한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여기서 한글시장의 명물 ‘한글빵’을 맛볼 수 있다. 한글빵은 단팥, 고구마, 단호박 등으로 속을 채운 쫀득한 찹쌀빵으로 빵 위에 한글의 자음모음 24개가 한 글자씩 찍혀있다. 한글 24글자를 모두 먹으려면 한두번 방문해서는 안될 것 같다. 이 구역은 야시장이 열리는 날엔 더욱 많은 판매대가 형성된다.
2구역은 ‘여주두지’와 문화 아지트라 불리는 ‘토닥토닥’이 위치하고 있다. 지역사람들 누구나 이용하는 다목적문화공간이기도 하고 타지역 방문객에게 여주를 알리는 곳이기도 하다.
3구역은 여주시장 상인들이 여주쌀과 고구마로 빚은 여주현미초진액, 천연화장품 등 협동조합 상품을 만날 수 있는 구역이다. 다양한 상품을 개발 전시하고 있으며, 바로 구입도 가능하다.
4구역은 세종대왕의 생애와 한글 탄생의 역사를 벽화나 조형물로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인증샷 찍기 매우 좋은 곳이다. 세종대왕과 한글의 역사를 담은 벽화는 4구역뿐 아니라 2, 3구역의 골목에도 곳곳에 숨어있기 때문에 시장골목을 하나하나 들어가 숨은 벽화와 한글 조형물들을 발견하는 것도 여주한글시장을 즐기는 방법 중의 하나다.
출생의례는 새로운 생명을 가지는 것을 기원하거나 태어난 생명을 무탈하게 키워내기 위하여 행하는 각종 의례를 말한다. 크게는 아이를 가지기 위한 기자의례와 출산을 기준으로 산전의례와 산후의례가 있다. 이러한 의례는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경기도에서 조사된 기자의례의 사례로는 절에 가서 불공 드리기, 조상신이나 삼신에게 기원하기, 아들을 낳은 집 금줄에 매달린 고추를 훔쳐다 달여 먹기, 단골무당에게서 부적 등의 비방 받기 등이 있다. 돌하르방, 석인의 코 부분을 갈아 달여 먹기도 했는데, 이는 경기도만의 특징은 아니고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출산에 관련된 신으로는 ‘삼신’이 있다. 그래서 집안에 삼신할머니가 없어서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여 삼신을 모시게도 했다.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는 농사를 지어 처음 찐 쌀을 창호지에 싸서 방에 매달아두었다. 이것을 삼신주머니라고 불렀고, 삼신 주머니 위에 종이로 고깔을 만들어 씌웠다.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원할 때는 별도로 바가지에 쌀을 담아 창호지로 덮어 안방 윗목에 1년 동안 매달아 놓는다.
아이를 가졌을 때는 산모와 가족들 모두 주의해야하는 금기들이 있다. 산모는 뼈가 박힌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 경기도 오산지역에선 임신 중에 북어를 먹은 산모의 아이가 손이 퉁퉁 부어서 나왔다. 병원에 데려가니 북어 가시 같은 것이 나왔다고 한다. 이를 ‘미’라고 부른다. 집안에서 지켜야 할 금기사항은 ‘집’과 관련되어 있다. 집을 고치거나 못을 박지 않고, 쥐구멍이 있어도 막지 않는다. 집을 고치거나 못을 박으면 아이가 언청이로 태어나고 쥐구멍을 막으면 난산으로 고생을 하게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을 때도 삼신할머니께 상을 올리는데, 일반적으로 이를 삼신상이라고 부른다. 경기도 광주에서는 삼신상을 ‘산밥’이라 부르고, 하남에서는 ‘삼밥’이라고 불렀다. 해산 후 3일째 되는날, 한이레, 두이레, 세이레까지 해서 삼칠일간 총 4번의 삼신상을 차린다.
또한, 경기도에서는 부정에 대처하는 의례로 ‘상문풀이’가 있었다. 인천 지역에서 초상 중에 아이가 태어날 때 하는 의례이다. ‘상문’이란 죽은 사람으로 인한 살을 의미한다. 초상 중 아이가 태어날 때는 팥죽을 끓이고 밥 혹은 떡을 해서 축원을 한다. 이렇에 해야 죽은 사람의 살이 풀린다고 한다.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면 외부로부터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방지하기 위해 대문에 금줄을 친다. 금줄을 일반적으로 인줄이라고 한다. 남양주 조안리나 구리 사노동에서는 강을 건너 온 사람이 아이를 낳은 산가에 들어오면 부정하다고 여겼다. 또한, 구리 사노동에서는 금줄과 함께 대문 앞에 황토를 깔았는데 이는 부정에 대한 경계를 의미한다.
출산 후 ‘태’를 처리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는데, 가평은 북한강을 끼고 있어 태를 강물에 띄워 보내거나 태에 무거운 돌을 달아서 강으로 던진다. 구리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한다. 강에 떠나보내는 날을 ‘삼 나가는 날’이라고 한다. 강을 끼고 있지 않은 지역에서는 왕겨를 태운 다음 그 재를 개울가 모레더미에 묻거나 물에 흘려보냈다. 안성에서는 태와 탯줄을 바로 태우지 않고 3일이 지나고 삼신상을 차린 후에 처리했다. 또한 태반은 태워서 냇물에 버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관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아이를 낳은 후 산모가 처음 먹는 밥을 ‘첫국밥’이라고 한다. 미역국과 밥과 정화수를 각각 한 그릇씩 준비한 뒤 먼저 삼신에게 올린 후 산모에게 먹인다. ‘첫국밥’은 지역마다 부르는 말이 달랐는데, 수원에서는 ‘젖국밥’, 의왕에서는 ‘첫국첫밥’이라고 부른다. 용인에서는 ‘삼신바가지’에 첫국밥을 담아 삼신께 올리고 난 후, 바가지 째로 산모가 먹기도 했다.
자유로에서 빠져나와 시끌벅적한 행주산성 음식문화거리의 끄트머리쯤에 이르면, 뜻밖에 조용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는 행주서원지와 마주치게 된다.
행주서원은 조선시대의 명장 권율 장군(1537~1599)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곳이다.
조선 24대 왕 헌종이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에 행차할 때마다 행주대첩을 이끈 충장공 권율의 제향을 지낼 건물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다가 행주산성이 잘 보이는 곳에 건립했다고 한다. 제향을 지낼 목적이었기에 처음에는 기공사(紀功祠)라는 사당이었지만, 고종 때 강학 공간을 갖춘 서원으로 발전해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았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담장 일부와 사당의 주춧돌만 남고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강당(전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과 기공사(사당)는 각각 1988년과 1997년에 복원한 것이다.
1970년대 정부가 행주서원을 복원하는 대신 행주산성 안에 충장사라는 권율장군의 사당을 새롭게 건립하고 권율 장군의 위패와 함께 행주서원 안에 있던 행주대첩비(중건비)까지 충장사로 옮겨버리면서, 이곳은 행주서원이 있던 옛터라 하여 행주서원지가 되었다. 충장사로 옮겨졌던 행주대첩비(중건비)는 2011년 3월 행주서원 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행주서원지까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행주산성 음식문화거리를 지나야 한다. 차 두 대가 겨우 오갈 수 있는 좁은 길 양쪽으로 즐비한 대형 음식점들 사이를 지나다 보면, 한국전쟁 때부터 시작된 행주서원의 수난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1985년 경기도문화재자료 제71호로 지정된 뒤 조금씩 복원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곳의 명칭이 아직 행주서원(幸州書院)이 아닌 행주서원지(幸州書院址)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원 내의 모든 건축물이 완벽하게 복원된 상태는 아니다.
권율 장군의 위패는 군사정권 시절 시멘트로 지은 신축사원으로 옮겨지고, 전통적으로 어업이 주업이었던 조용한 마을은 무장공비 침투를 막기 위해 어업이 금지되자 네온사인 화려한 음식점 마을로 변해버렸다.
심지어 평소에는 서원의 문을 굳게 닫고 일반인의 관람조차 허용하고 있지 않아, 마치 휘황찬란한 음식점들 사이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뻘쭘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매년 봄가을에 올리는 제례의식(춘향제와 추향제)과 계절별 유생체험, 고양 시티투어 등을 통해 끊임없이 시민과 가까워지려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체험 수업이나 제례 등의 행사는 예약만 하면 시민 누구든 참여할 수 있다.
언젠가는 소실된 내부 건물도 모두 재건하고, 권율 장군의 위패도 다시 모셔와, 행주서원지가 아닌 행주서원의 이름을 당당히 되찾게 되길, 마을주민으로서 빌어본다.
행주성당은 1899년 약현 본당 관할의 행주공소로 시작해, 1909년 본당으로 승격된 뒤 지금까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성당이다. 행주공소 시절부터 생각하면 장장 120년 동안 한 곳에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행주성당의 특별함은 단순히 성당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점뿐만이 아니다.
성당 마당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기와와 처마선! 한옥 성당이라는 점이 행주성당의 특별한 점이다. 일반적인 한옥과 달리 넓은 정면이 아닌 좁은 측면에 입구가 위치한 행주성당은 대한성공회 강화성당과 함께 대표적인 한식 목조 건축물로 평가받는 건축물이다.
행주성당은 1910년 소박한 한옥 형태로 지어진 뒤 한 번의 이전과 한 번의 증축 과정을 거쳤다. 1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전쟁과 홍수 등 수난을 겪으며 낡고 무너져 시멘트벽과 현대식 기와로 변형되기도 했었다.
그러다 2010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5호로 지정된 뒤, 2013년부터 정부와 고양시의 지원으로 복원사업이 추진되었고, 문화재 전문가들의 고증과 자문을 거쳐 마침내 2015년 복원이 완료되었다.
성당 건물이 거의 완벽하게 복원될 수 있었던 건, 1928년 성당을 이전할 때 기존의 기초 부자재들을 대부분 재활용하였고, 1949년 증축하며 기록한 자료가 잘 보존된 덕분이었다. 특히 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목조에 최초 건립 부분과 증축 부분이 잘 남아 있다는 점이, 행주성당을 대한성공회 강화성당과 함께 대표적인 한식 목조 건축물로 평가받게 한 이유이다.
신발을 벗고 성당 내부에 들어가면 신도 100명 정도가 다닥다닥 붙어 앉을 수 있는 작은 예배공간이 있는데, 낮은 천장에 드러난 나무 서까래들이 너무 자로 잰 듯 곧지 않기 때문인지 더욱 친근하고 아늑한 느낌이 든다.
한옥성당 옆에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현대식 붉은 벽돌 건물인 ‘100주년 기념관 성모의 집’이 우뚝 서 있다. 겨우 3층짜리 건물이지만 묘하게 웅장하게 느껴지는 건, 아담한 한옥 성당과 비교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3층 난간에 설치된 예수님 동상이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성모의 집은 2009년 기공식을 가진 뒤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무려 3년 만에 완공된 건물로서, 소규모 피정의 집(교황청이나 교구장의 인가를 받아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의 단체)과 교구사제의 숙소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미사가 없는 날에도 문을 열어두고 있어서 신자와 관광객들이 1층에 있는 쉼터에서 편히 쉬어갈 수 있다. 쉼터 벽에 그려진 커피잔을 들고 웃는 예수님 그림이 유머러스하고 귀여운 느낌이다.
건물 안에는 쉼터 외에도 행주성당의 100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물전시실이 있어서 언제든 둘러볼 수가 있고, 로비에 무료로 비치해둔 책자 「행주성당 100년 이야기」는 신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한옥성당과 100주년 기념관 사이에는 조금 특별한 공간이 마련돼 있는데, 2016년 행주성당이 특별 전대사 순례지로 선정된 것을 기념해 만든 성모당이다. 성모당의 모양은 대구대교구 성모당을 모델로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 동굴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다만 인근 주민이 아닐 경우 행주성당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3호선 화정역이나 경의중앙선 능곡역에서 버스를 타고 행주성당 근처에서 내린 뒤 5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자동차로 갈 땐 성당까지 이르는 길이 좁고 가파른 골목길이라 복잡하게 느껴지고 주차공간이 마땅치 않을 때도 많아서, 되도록 미사가 없는 한가한 시간대를 골라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어리바리 헤매며, 잘못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성당에 도착해 차를 주차하고 내리면, 주차장 담벼락에 그려진 옛 행주성당 그림을 보게 된다.
자칫 보지 못하고 지나치기 쉬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듯 그곳에 있는 벽화는, 처음 지어질 무렵의 성당과 초가지붕의 사제관 모습으로, 100년 넘은 성당의 역사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예스러운 한옥 성당과 현대적인 성모의 집을 차례로 둘러본 뒤, 유럽의 성모동굴을 본 따 만든 성모당 앞 벤치에 앉아 성당 마당에 서 있는 철제 종탑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독특하면서도 묘하게 조화로운 분위기 속에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에 위치하고 있는 미리내 성지는 천주교 신자는 물론 신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장소이다. 미리내는 은하수를 뜻하는 순우리말인데 어째서 성지 이름이 미리내가 되었을까?
1800년대 초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이곳 미리내와 인근 지역 산속에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루었다. 신자들은 곳곳에서 땅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 살았다. 밤이면 그들이 있는 곳에서 나오는 불빛이 마치 별들이 모여 있는 은하수처럼 보여 미리내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달빛 아래 흐르는 은하수’, 그곳이 바로 미리내 성지이다. 박해를 피해 온 그들이었기에 가장 중요시한 것은 아침.저녁으로 모여 기도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고된 삶이었지만 자신들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자 한 것이다.
주차를 하면 미리내 성지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곳에서 오른쪽을 보면 성체 조배실이 보인다. 성당을 안나간지 오래 되었지만 눈을 감고 조용히 짧은 기도를 올린다. 성체 조배실 옆으로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과 함께 ‘한국 순교자 현양의 발원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그 옆으로는 천국의 모습을 의미하는 큰 조형물이 있다.
잠시 조형물을 감상하다 주차장 왼쪽으로 있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십자가의 길은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는 환희의 순간부터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순간이 표현되어 있으며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103위 시성 기념성당이 나온다.
강하고 견고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모습이다. 웅장한 외관만큼이나 내부의 웅장한 모습도 보는 이의 뇌리에 강하게 들어온다. 성당은 지하 1층, 지상 2층이며 면적이 3,450m²에 이른다고 한다. 이 성당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성당 이름을 보고 도대체 103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다. 103위는 한국인 93명,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주교 3명, 신부 7명을 뜻하며 이들은 1984년 5월 한국순교복자 103위의 시성식(가톨릭 용어, 성인품(聖人品)에 오를 때에 드리는 예식)을 통해 복자(福者)(가톨릭 용어, 죽은 사람의 덕행과 신앙을 증거하여 공경의 대상이 될 만하다고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하여 발표한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에서 성인(聖人)(가톨릭 용어, 교회에서 일정한 의식에 의하여 성덕이 뛰어난 사람으로 선포한 사람)의 품위에 오르게 된다.
이곳에는 종교적인 이유만으로 참혹한 형벌을 당하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는 전시장이 있다. 너무 참혹해 제대로 볼 자신이 없어 눈시울을 붉히며 뒤돌아섰다.
미리내 성지를 얘기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김대건 신부이다. 26세의 꽃다운 나이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순교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이 안장 되어 있는 곳이 이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순교 후 시신도 모셔오지 못했으나 이민식 빈첸시오 청년과 몇몇 신자들이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 가매장되었던 시신을 찾아 미리내까지 옮겨와 안장했다고 한다.
103위 시성 기념성당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김대건 신부의 동상과 그의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경당이 나온다. 경당 앞에는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상이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어린 아들을 먼저 보내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을 말해 무엇하랴. 그 안에는 김대건 신부의 발뼈 조각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설명을 듣고 알면 알수록 숙연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순교자들에 대해 보고 나니 마음이 무거운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면서 종교가 무엇일까, 어떤 마음으로 삶을 살아야 할까 하는 아직은 답을 찾이 못하는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성체 조배실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가면 성요셉 성당이 나온다. 1906년에 지어진 이 성당은 교인들이 성당에 올 때 하나씩 들고온 돌을 모아 벽을 쌓았다고 한다. 내부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중 하악골(아래 턱 뼈)이 안치되어 있다. 하나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다.
성요셉 성당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산 속에 십자가가 보인다. 겟세마니 동산과 무명순교자 묘지로 가는 길이다. 겟세마니 동산은 예루살렘 감람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동산인데 예수는 이 동산에 올라 가끔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미리내 성지 겟세마니 동산에는 예수가 휴식을 하시는 모습을 동상으로 꾸며 놓았다. 그 모습이 평범한 인간다워 나도 모르게 ‘풉’하고 웃었다.
다가오는 서양세력에 따른 국가적 위기와 그 속에서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천주교 박해. 그 박해 속에서 목숨을 잃어간 순교자들을 기리는 공간 미리내 성지. 천주교 신자가 아니어도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 한 번쯤 들러볼 것을 권한다.
주말이 되면 부모들이 흔히 하는 고민 중 하나가 ‘오늘은 무엇을 할까?’이다. 이런 고민을 해결해 주는 안성의 대표적인 장소가 안성맞춤랜드이다. 안성맞춤랜드는 2012년 344,514m²(104,215평) 부지에 세워진 공원이다. 2004년부터 안성시 도시관리 계획에 의거하여 준공된 공원인 만큼 안성의 대표적인 문화복합 공간이다.
정문으로 들어가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이 남사당 공연장이다. 안성 남사당놀이는 안성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예술 공연이다. 남사당은 조선 후기에 장터나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춤, 노래, 곡예를 공연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 연예 집단으로 안성의 남사당은 옛 남사당을 발전시키고자 창단되었다. 남사당 공연장에서는 3월에서 11월까지 주말 상설 공연을 하고 있는데 흥이 절로 오르는 풍물, 아슬아슬 보기만 해도 짜릿짜릿한 줄타기, 말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살판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관람 요금은 개인 기준으로 성인 10,000원, 청소년 5,000원, 어린이 2,000원이다. 단체의 경우는 요금이 조금 다르니 미리 알아보고 가자.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사계절 썰매장을 볼 수 있다. 부모들이 안성맞춤랜드를 많이 찾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여름에는 무더위를 날려주는 시원한 물썰매를, 겨울에는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눈썰매를, 봄과 가을에는 왁스를 사용한 썰매를 탈 수 있어 가족 단위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자연, 힐링, 가족, 여유’. 이 4개의 단어가 연상시키는 것은? 바로 캠핑이다. 캠핑족이 많아지고 있는 요즘 추세를 반영해 안성맞춤랜드 안에 캠핑장도 개장을 했다. 오토캠핑장, 글램핑, 카라반 등이 모두 갖춰져 있으며 이용 요금도 저렴해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는 곳이다. 저렴한 비용에 시설도 깨끗하고 캠핑을 하면서 안성맞춤랜드 내의 다양한 시설을 즐길 수 있는 이점이 있어 안성 시민 및 근교 사람들도 즐겨 찾는다.
20여 년 전 만해도 밤하늘의 별빛을 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빛 공해에 시달리고 있는 요즘 별빛을 본다는 것은 어른들에게는 추억, 낭만을 아이들에게는 꿈, 새로움을 안겨주는 일이다. 안성맞춤 천문과학관은 월요일을 제외하고 개방되어 있으며 로비에는 황도 12궁 별자리판이 있어 자신의 별자리를 찾아보고 그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개인 기준으로 성인 4천원, 어린이 2천원의 비용을 내고 관람 예약을 하면 낮에는 태양 관측을 밤에는 천체 관측을 할 수 있다.
천문과학관이 남자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면 그 옆에 있는 안성맞춤 공예문화센터는 여자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곳이다. 이곳에는 목공예, 금속공예, 섬유공예, 도자공예, 한지공예, 가죽공예, 천연비누 만들기 등 7가지 분야의 공방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방 선생님들께서 친절하고 꼼꼼하게 지도해 주시기 때문에 학교 등 단체에서도 많이 방문하고 있는 곳이다. 그 외 안성맞춤랜드에는 여름이면 새빨간 장미로 아름다운 소원 대박 터널, 시원한 물놀이로 아이들의 무더위를 날려주는 분수광장, 상모 돌리는 모습으로 설계된 수변공원, 맑은 공기를 맡으며 편안하게 산책할 수 있는 편백나무 숲 등이 있다.
안성의 대표적인 놀이공원이니만큼 해마다 5월 5일이면 어린이날 행사가 열린다. 이 행사에는 안성시 여러 단체에서 김밥, 떡볶이 등 먹거리를 무료로 제공하고 어린이들이 간단한 퀴즈에 참여하면 소정의 학용품도 제공해 주고 있다. 가족 모두 즐길 수 있는 공연도 있어 하루를 즐겁게 지내기에 안성맞춤이다. 또 해마다 10월이 되면 전국에서 안성으로 관광객이 몰려온다. 안성시에서 주최하는 가장 큰 행사인 ‘바우덕이 축제’를 보기 위해서이다. 바우덕이 축제는 안성 지역의 유명한 먹거리를 소개하고 다양한 공연을 하는 행사이다. 이 축제가 펼쳐지는 곳이 바로 안성맞춤랜드이다. 무엇을 할까 고민이 드는 주말,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가벼운 마음으로 안성맞춤랜드 산책길에 나서보는 것은 어떨까?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 22-1 버스를 타고 난실리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보이는 이정표가 ‘조병화 문학관’이다. 문학관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모습에 ‘여기가 맞아?’하는 것이 첫인상이었다. 그래도 문학관으로 향하는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꿈’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는 비석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꿈의 귀향’이라는 짧은 시가 있다.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천상병 시인이 이 세상에서 살다 간 것을 소풍에 빗대었다면 조병화 시인은 심부름으로 표현한 것일까?’하는 생각을 하며 문학관 건물로 발걸음을 옮기니 연세가 지긋하신, 백발이 멋스러운 분께서 환한 웃음으로 맞이해 주시면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문학관을 안내해 주신다고 먼저 말씀해 주신다.
가장 먼저 설명해 주신 것은 문학관 1층 복도에 있는 편운동산 그림이다. ‘그림? 시가 아니라?’하고 생각하는 순간, 이 그림이 조병화 시인이 직접 그린 그림이며 그가 평생을 이곳에서 지낸 이유와 이 그림이 그가 꿈꾸는 생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문학관과 부친의 묘소, 어머니를 기리는 묘막인 편운재, 자신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지은 청와헌 등 조병화 시인의 모든 것이 이 작은 그림 한 장에 표현되어 있다.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무엇을 짓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그려 놓고 그 이름에 ‘동산’을 붙인 그 의미를 문학관을 관람하고 나면 누구나 알 것이다.
1층 복도를 지나 제1전시실에 들어가면 ‘우와’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조병화 시인이 남긴 53권의 시집과 수필집을 비롯한 160여 권의 책은 물론이거니와 조병화 시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파이프, 베레모, 안경도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갑’으로 가득한 성적표(아, 그 옛날에는 갑을병정무로 성적이 나왔다고 한다.), 젊은 시절 즐겨 했던 럭비 관련 용품, 훈장 및 상패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벽에 걸려 있는 그의 작품은 ‘시’만이 아니라 ‘화’도 같이 있다는 것이고 그림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해설사분께 여쭤보니 조병화 시인은 물리를 전공했고 고등학교에서 수학 교사를 하셨다고 한다. 충격이다. 물리학도에게서 이런 감성이 나오다니. 그리고 나의 눈에 들어온 작품 ‘인생 방정식’. 자신의 인생을 방정식으로 풀어내다니! 참 조병화 시인답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작품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조병화 시인이 생전 직접 찍어 꾸며 놓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것을 즐겼고 어느 나라를 가든 대 문호들의 생가, 박물관, 음악관은 반드시 관람하셨다고 한다. 편운(片雲)이라는 자신의 호처럼 자유롭고 거기에 더해 멋스럽게 한평생을 사셨던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2층 전시실에 오르면 편운이 아닌 수많은 시인들의 얼굴과 이름이 적혀 있다. 무엇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편운 문학상 역대 수상자들의 모습이다. 편운 문학상은 1990년에 제정되었으며 1991년부터 1년에 2명의 수상자에게 각 1,000만원의 상금을 수여한다. 이 상금은 조병화 시인의 사비로 수여하고 있으며 시인의 유언에 따라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후배 양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시인의 모습에 절로 숙연해진다.
문학관을 나와 길을 따라 걸으면 편운재가 나온다. 편운재는 조병화 시인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만든 묘막이다. 현대인들에게는 조금 생소할 수 있는 묘막. 묘막은 무덤 가까이에 짓고 무덤을 지키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평생 어머니가 주신 가르침을 따라 산 조병화 시인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묘막을 짓고 생활했다고 한다.
편운재 옆에는 자신을 위해 지은 청와헌이 있다. 청와헌은 조병화 시인이 집필하고 휴식을 하던 곳으로 처음에 본 ‘꿈’이라는 비석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 비석에 숨겨져 있는 진실 하나. 이 비석에 있는 문구 중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는 살아 계신 어머님께 돌아왔다는 뜻이 아니라 돌아가신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자신도 돌아왔다는 뜻이다. 살아생전에 자신이 죽을 것을 예상하고 자신의 죽음을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돌아왔다고 표현한 것이다. 실제 이 비석은 만든 후 계속 가려 놨다가 조병화 시인의 49재에 제막했다고 하니 시인이 평생 어머니를 얼마나 그리워하며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크지 않은 문학관이지만 작품의 양이 워낙 많아 제대로 감상을 즐기려면 2시간은 소요된다. 아, 그리고 이 문학관에 갈 때 지녀야 할 마음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를 낭송할 수 있는 뻔뻔함.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소리 내어서 한 번 읽어 보시겠어요?”하는 해설사 분의 말씀에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건 잠시고 나도 모르게 심취해서 낭독하고 있을 테니까. 본래 낭송은 시를 이해해야 그 시의 의미를 제대로 살려 읽을 수 있는 법인데 조병화 시인의 시는 일상 언어로 돼 있어 누구나 쉽게 낭송할 수 있다.
학창시절 공부를 할 때 지긋지긋하게 다니던 도서관. 책장 넘기는 소리도 눈치를 봐야 하고 발자국 소리도 내면 안 되는 곳. 딸깍딸각 하는 시계 소리도 신경 쓰이는 곳. 졸업을 하면 도서관을 가지 않으리라 다짐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책을 빌려보기 보다는 아이들 책이든 내 책이든 도서관에서 대출을 하기 보다는 사서 읽었다. 도서관은 내 인생에서 그다지 친해지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안성에 만화 도서관, 카페 도서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준 사람에게 처음 물은 말은 “도서관에 진짜 만화책이 있다고? 예전에 보던 그런 만화책?”이었다. 그렇다는 상대방의 말에도 의심을 했다.
지난 토요일 아이들을 데리고 보개 도서관을 갔다. 이런 작은 도서관에 있을 만화책방은 어떤 곳일까 하는 기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1층에는 어린이 도서관이 있다. 다섯 살 막내가 알록달록한 이 공간을 그냥 지나갈 리 없다. 잠시 들어가 보니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이 자료실에는 8세 정도까지의 아이들이 볼 수 있는 도서와 각종 DVD 자료가 있었다. 방바닥에도 앉을 수가 있어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앉아 책을 볼 수 있다.
부모들이 솔깃할 만한 행사가 하나 있었다. 하루에 한 권씩, 3년간 총 1,000권의 책을 읽는 프로젝트를 하는데, 사서들이 선정한 책을 꾸러미로 대여해 주기 때문에 책을 고르기 힘들어하는 부모들이 이용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어린이 자료실 방문 후 신청서를 작성하고 나면 10권 단위로 책을 빌릴 수가 있는데 10권이 가방 하나에 담겨 있어 100개의 가방을 모두 읽으면 1,000권을 읽게 되고, 모두 다 읽은 것이 확인되면 도서관에서 일종의 수료증을 줘 아이들에게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2층에는 종합자료실이 있다. 일반 도서 및 간행물, DVD 자료, 인터넷 사용 및 문서 작성이 가능한 공간까지 작지만 갖출 것은 모두 갖추고 있다. 2층에 올라가면서 설레는 이유는 바로 만화책방 이정표 때문이다. 어떤 분위기의 공간에 어떤 책들이 있을까 상상하며 3층으로 올라가는 순간. 아이들과 나의 표정 모두가 밝아졌다.
2018년 리모델링을 해 현대적인 느낌의 공간에 40여개의 좌석을 만들어 이용자들이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해 놨다. 만화, 추리, SF, 무협, 판타지, 로맨스 등 만화방에 가야 접할 수 있는 도서들이 있어 옛 추억을 떠올리며 책에 빠져들 수 있다. 좌석도 딱딱한 의자가 아니라 편하게 누울 수 있는 소파부터 가족 단위로 이용할 수 있는 4인실 공간까지 마련되어 있다. 혹시 유료 이용인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당연히 무료로 이용 가능하다. 또한 도서회원증을 지참하고 오면 40여개의 보드게임도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이곳은 책장 넘기는 소리도 신경 써야 하는 일반 도서관과 다르게 어느 정도의 수다와 소곤소곤 이야기 소리는 다들 이해해 주는 허용적인 도서관이다. 그리고 책다락 만화책방에는 감성을 더해주는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다. 창가 쪽 좌석에서는 노트북을 이용할 수 있어 커피 한 잔 하며 일을 하기 위해 커피숍을 찾는 사람이라면 이곳을 적극 추천한다. 만화책방 내에 카페 공간도 있지만 음료나 커피를 판매하지는 않고 자신이 가져온 커피나 음료를 먹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 할 수 있다.
4인 가족실은 조그만 다락의 형태인데 ‘4인부터 이용 바란다’는 안내문구 때문인지 다른 의자에는 사람이 많은 것에 비해 비어 있었다. 다자녀 혜택 이용! 우리는 책을 뽑아 들고 가족실에 누워 한참이나 책을 봤다.
주말이 되면 아이들에게 늘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주기 위해 어디를 갈까 고민한다. 다른 특별한 것이 없어도 같이 누워 책 읽고 같이 웃고 소곤소곤 이야기 하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 무척이나 대단한 것을 함께 했다는 느낌이 든다. 2시간이나 있다 나오는데도 큰아이는 “엄마, 여기 언제 다시 올까?”하고 묻는다. 적어도 이 공간에서 책을 읽는다면 책을 읽는 것이 의무감이 아닌 재미가 되지 않을까?
보개 도서관은 토요일에서 목요일까지 운영한다. 어린이 자료실과 종합 자료실은 오전 9시부터 18시까지 자료를 대출할 수 있으며 열람실은 22시까지 이용 가능하다. 소개한 공간 외에도 1층에는 49석으로 된 문화 강좌실도 있다. 이곳에서는 각종 문화강좌 및 강연, 전시회, 인형극 등의 행사도 진행되고 있어 도서관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다양한 행사를 무료로 즐길 수 있다.
1866년부터 1871년까지 6년 동안 계속되었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는 6년 동안 8,000여 명에 이르는 순교자를 낸 사건이다. 이때 안성 죽산에서도 24명의 신자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순교했다.
그 후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던 순교의 땅은 1994년 강정근 신부가 죽산성당에 부임하면서 성지를 다지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강정근 신부는 순교자들이 잊혀져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매달 죽산에서 순교한 신자들을 기리는 기념미사를 성지 앞과 도로변에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젊은 신자들과 힘을 합쳐 성지 개발기금을 조성해 성지 개발에 착수했다. 그곳이 현재의 죽산순교성지가 되었다.
죽산순교성지는 ‘잊은 터’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금의 성원목장 자리는 고려 때 오랑캐들이 진을 친 ‘이진(夷陳)터’가 있었는데 이진터는 신자들을 처형하는 곳이었다. 이에 신자들 사이에는 이진터로 끌려가면 다시 오지 못한다 하여 그만 잊어버리라는 뜻에서 ‘잊은 터’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은 순교자 묘역이었다. 순교자 묘역으로 가는 문을 들어가 왼쪽으로 보면 ‘죽산에 한 옛날에’라는 제목의 글이 새겨져 있는 비석이 있다.
죽산에 한옛날에 천주학 신봉자들 , 산산이 찢겨지고 뼐골이 부서져도
은공의 주님사랑 세세에 전하고자 , 수없는 고통속에 목숨을 사루었다
많다던 포졸들은 이제는 간데없고 , 은총의 신도들이 성전을 이루고저
선조의 순교정신 만세에 현양코자 , 조용히 외람진곳 외로이 불탔어라 (후략)
당시 순교자들이 어떤 정신으로 그 고통의 순간을 견뎠는지를 보여주는 글이다.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한 감정이 올라왔다. 작년 6월 우연한 기회에 이곳을 잠시 들린 적이 있었다. 이곳은 6월이면 색색의 장미가 만발한다. 이 글을 읽고 나니 역사는 너무 참혹한데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피어나는 장미라, 무엇인가 아이러니한 느낌이 들었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입구에서 순교자 묘역까지 한 바퀴 돌면서 묵주기도를 할 수 있는 묵주기도의 길이 있다. 동글동글한 큰 돌들이 묵주알을 상징한다. 그 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한가운데 무명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양쪽에 12개씩 순교자 24위의 묘역이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순교자분들에 대한 설명이 적힌 비석이 있다. 부부가, 일가족이 그리고 어린 아이가 같은 날 죽음을 당한 것이다.
비석에 있는 글을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지나간 과거에 분노가 치솟는다. 동시에 목숨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킨 분들에 대한 경외감이 생긴다. 그 경외감에 짧은 기도를 드려본다.
묘역의 양쪽 끝에 길게 세워진 것은 자세히 보면 죽창 모양을 하고 있다. 순교자들이 당한 그날의 비극을 형상화 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이 외에도 죽산순교성지에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14처 십자가의 길과 예비 신학생들의 연수 공간으로 활용되는 영성관도 있다.
죽산성지에 와서 시간이 허락된다면 영성관 정문 바로 옆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팔봉산에 잠시 올라가 보는 것도 좋다. 흔들바위는 설악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성관 바로 뒤에 있는 팔봉산에도 흔들바위가 있다. 높이 2.1m, 둘레 10.4m의 거대한 바위가 초등학생이 흔들어도 흔들린다. 이런 곳에 흔들바위가 있으니 좀 더 신성한 느낌이랄까?
성지를 둘러보면 숙연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뼈아픈 역사이지만 그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나은 미래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기옛길은 지역의 문화유산을 걷는 길로 연결한 새로운 형태의 역사문화탐방로를 말한다. 2012년 삼남길을 시작으로 2015년에는 성남, 용인, 안성, 이천을 잇는 영남길이 개통되었으며 안성에서는 죽주산성길과 죽산성지가 들어가 있다. 경기옛길에 대해 더 궁금하다면 경기옛길 누리집을 참고하면 된다.
‘안성에는 죽주라는 지명이 없는데 왜 죽주산성일까?’하는 의문을 품으며 산길을 올라 죽주산성에 도착했다. 경기도 기념물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에 비해 다소 초라한 안내 자료에 조금은 당황했다. 안내자료를 보니 조금 전 품은 의문은 금방 해결되었다. 죽주가 죽산지역의 고려시대 지명이라고 한다. 안성시 죽산면은 지역의 분기점으로 삼국 시대부터 군사적 전략을 위해 중요한 곳이었다.
죽주산성이 언제 지어졌는지 연대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여러 기록에 의하면 6세기 중반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이곳에 산성을 짓기 시작하였고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까지 꾸준하게 보완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성, 중성, 외성이 있는 삼중성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모두 다른 시기에 축조되었다. 내성 1,125m, 중성 1,322m, 외성 602m이며 성벽 높이는 2.5m 정도이다. 삼중성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적의 침입을 막는 데 유리했고 이에 적은 수의 병사로도 많은 적을 막을 수 있었다.
주차를 하고 바로 옆에 보면 경사가 조금 가파른 길이 나온다. 그 길의 끝에 동문 입구가 있다. 동문지에서 남문지를 거쳐 북문지까지 걷다 보면 안성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다. 성벽 위를 따라 걸으면 1시간 남짓 걸린다. 막상 걸어보니 그 1시간의 산책은 자연에 동화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성벽을 따라 잘 조성된 길을 걷다 보면 보이는 것은 주변의 나무와 길에서 또 다른 길로 이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성벽을 따라 산책을 하고 다시 동문 쪽으로 내려오면 충의사라는 송문주 장군의 사당이 있다. 사당으로 가기 전에 송문주 장군을 소개하고 있는 안내글을 읽었다. 그 자료에서는‘신출귀몰한 장군’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고려 고종 23년(1236년)에 몽골은 3차 침입을 하였다. 당시 죽주 방호별감을 지내고 있던 송문주 장군은 몽골군이 산성을 에워싸고 항복하라고 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싸웠다. 적들의 전략을 예측하여 역공을 하였으며 적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이에 몽골군은 공격을 시작한지 보름이 지나 산성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신출귀몰’이라는 수식어가 딱 맞는 장군이다.
죽주산성을 오면서 도로 한복판에 서있는 동상을 보았는데 알고보니 그 동상이 송문주 장군 동상이었다. 2017년 안성시에서는 죽주산성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죽산삼거리에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사당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장군의 사후(1200년대 후반)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사당 앞에 가보니 벽면에는 당시 몽골군과 싸우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벽화를 보고 있자니 잠시나마 그 옛날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
2019년 16회를 맞이한 죽주대고려문화축제는 적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죽주산성을 널리 알리고 몽고의 침입에 맞서 큰 승리를 거둔 송문주 장군을 알리기 위해 매년 열리는 행사이다. 보통 9월에서 10월경에 축제가 열리며 죽주산성에서 하지는 않지만 죽주 가요제, 죽주 예술제, 문화 체험부스 등 볼거리가 꽤 있는 편이니 그 축제마당에 참여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에 위치한 서일농원은 1983년부터 선분례 명인이 장을 담그며 조성한 우리나라 최대의 농원이다. 2012년 MBC에서 방영한 ‘신들의 만찬’이라는 드라마의 배경 장소이기도 하다. 드라마 시청자는 물론 드라마를 보지 않았더라도, 2,500여 개의 장독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꽤 많을 것이다. 나도 그 당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드라마를 찍는다는 신기함에 두 살 된 아이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장독대를 보러 갔던 기억이 있다. 그 넓은 곳에서 다른 것은 볼 생각도 안 하고 오로지 장독대만 보고 장독대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 기억을 더듬어 이제는 열 살이 된 아이와 함께 서일농원을 다시 찾았다. 다시 가보니 예전에는 아이 챙기느라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우선 정문 앞에 ‘스타팜’이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서일농원은 대한민국 스타팜으로 지정되어 있는 농장이다. 스타팜이란, 국가 인증을 받아 우수한 농식품을 생산하는 농장 중에서 농촌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농장을 말한다. 그런 농장에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장이 출원하고 등록한 스타팜 상표를 쓸 수 있도록 지정했다. 서일 농원에서는 청국장 만들기 및 청국장 끓이기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해 사람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서일 농원의 장은 석연정에 있는 물로 담근다고 한다. 석연정은 서일농원 안에 있는 우물인데 돌을 연꽃 모양으로 깎아 만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우물물은 지하 300m에서 나오는 청정 암반수이다. 장을 담그는 물부터 남달라 장맛이 일품인가 보다.
석연정을 지나 산책길을 따라 올라가면 서일농원을 대표하는 그 멋진 풍경, 바로 2,500여 개의 장독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조금은 낯선 물건인 항아리를 본 아이들이 저 물건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지 물어본다. 장독대 사이 하나하나를 들어가 볼 수는 없다. 장독대 출입구에는 ‘장독대는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며 마음을 정갈하게 해야하는 신성한 곳이므로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팻말이 있다. 그리고 금줄에 솔잎, 고추, 버선을 달아 놓았다. 그것들의 세부적인 의미는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으로는 나쁜 것을 금하고 장맛을 좋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굳이 들어가려 하지 말고 장독대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 한 컷 찍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장독대를 보고 나면 산책을 할 수 있다. 곳곳에 펼쳐진 잔디밭에는 사람들이 편하게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다. 여름이면 연꽃이 장관을 이루는 연못도 있다. 사진 찍는 배경으로 인기 있었던 핑크뮬리밭도 있다. 크기가 넓은 건 아니지만 핑크뮬리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는 정도의 크기는 된다. 지금은 겨울이라 연갈색으로 옷을 갈아 입었지만 연갈색 나름대로 매력적이다. 하늘하늘 가볍게 흔들리는 연갈색의 핑크뮬리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 자유로움 따라 내 마음도 같이 흔들리는 것 같다.
사람들이 서일농원을 찾는 또 다른 이유는 건강하고 담백하고 맛있는 한끼 밥을 먹기 위해서이다. 굳이 서일농원 안에는 음식점 솔 리가 있다.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솔리 건강밥상(15,000원)부터 격식을 차릴 수 있는 솔리 스페셜(45,000원)까지 선택할 수 있는데, 건강한 한끼 밥을 원한다면, 격식 있는 자리에서 맛있는 밥을 먹기 원한다면 찾아가볼만 하다. 식당에는 장을 구입할 수 있는 코너도 있다.
거대한 장독대의 풍경과 맛있는 밥, 산책할 수 있는 잔디밭에 가꿔진 서일농원은 주말 하루 가볍게 나들이 할 수 있는 장소이다.
어릴 때와는 다르게 10여 년 전부터 절에 가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져 이곳저곳 절을 찾아다니곤 했다. 절에서 들을 수 있는 불경 소리와 풍경 소리 그리고 사찰 특유의 향까지 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 편안함을 다시 느껴보고자 안성시 죽산면에 위치하고 있는 칠장사를 찾았다. 칠장사는 안성 8경의 하나이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처음으로 창건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고려시대 혜소국사에 의해 중창된 기록이 있다.
칠장사(七長寺)가 있는 산이 칠현산이다. 칠현산은 11세기경 혜소 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설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일곱 명의 현인이 오래 머물렀다 하여 칠장사라 이름하였다. 사찰의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고려 시대 왜구의 침입으로 개천사에 있던 고려조의 실록을 이곳에 옮겼을 정도로 중요한 사찰이었으며 후에 인목대비는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칠장사 앞에서 절의 전경을 바라보면 유난히 색이 많이 바랜 누각이 보인다. 초라해 보이기보다는 연륜을 보여주는 장엄한 느낌이랄까. 숙연해지는 마음을 가지고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사천왕문이 나온다. 어느 사찰이든 이 사천왕문을 지날 때면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움찔하는 느낌이 든다. 이건 인간의 본성일까? 칠장사 사천왕상 역시 갑옷을 입고 늠름한 장군의 모습이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안성시 향토유적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종이 나오는데 만들어진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어 조선 후기의 범종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동종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대웅전이 있다. 이 대웅전은 2019년 8월 29일에 보물 제2036호로 지정된 법당으로 조선 후기 사찰의 건축 상황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어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크다. 대웅전 내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3호인 목조석가삼존불좌상과 불화 연구의 중요한 자료인 국보 제296호 칠장사 오불회괘불탱, 보물 제1256호 칠장사 삼불회괘불탱이 있다.
대웅전 앞에는 안성 죽림리 삼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9호로 지정되었는데, 만들어진 방식으로 볼 때 고려 전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탑을 볼 때마다 선인들의 지혜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대웅전을 나와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색색의 천이 가득 묶여 있는 박문수 합격다리가 나온다. 박문수가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칠장사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시험을 본 후 수석 합격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각종 시험 및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자신의 소원을 적어 다리 위에 묶어 둔다. 그냥 지나가면 괜히 손해 볼 것 같은 느낌에 한참이나 서서 나의 소원, 아이들의 소원을 적어보았다.
장원 급제한 어사 박문수의 길을 이어가고자 2009년부터 칠장사 어사 박문수 전국 백일장이 해마다 10월경에 개최된다. 이 백일장은 전국의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데, 국회의장상부터 교육부장관상까지 나름 규모가 큰 대회이니 기회가 된다면 참가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조금 더 돌아가면 보물 제 488호로 지정되어 있는 혜소국사비가 나온다. 혜소국사비는 혜소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전체적인 크기도 높이 3.4m로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이 외에도 칠장사 내에는 보물 제983호 안성봉업사지석조여래입상,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9호 칠장사 철당간, 안성시향토유적 제24호 칠장사 사적비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또한 궁예가 열 살 때까지 활쏘기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활터가 남아 있으며 임꺽정이 스승인 병해대사(갖바치 스님)에게 바친 꺽정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경기도 안성 8경 중 하나인 금광 호수. 반짝이는 물결과 주변 자연경관이 멋져 호수를 보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꽤 많은 곳이다. 그런데 금상첨화 격으로 금광 호수 수변을 따라 박두진 둘레길이 생겼다. 안성을 대표하는 시인 박두진과 안성 8경 금광 호수의 만남이라니! 어떤 곳일까 궁금한 마음에 겨울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가 보기로 했다.
안성 시내에서 20여 분을 달려 금광 호수를 끼고 달리다 보니 일찌감치 둘레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런데 입구를 찾을 수가 없다. 같은 곳을 3번 돌고 나서야 조금은 초라한 이정표를 찾을 수 있었다. 외지인들을 생각해 조금 더 크고 눈에 잘 띄는 이정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주차를 하고 나오니 주차장 둘레에 시인 박두진의 시들이 큰 돌에 새겨져 있다. 하나씩 하나씩 읽어보며 시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둘레길로 들어섰다. 둘레길 초입은 흙길이다. 흙길은 왠지 모르게 옛 추억과 낭만을 불러일으킨다. 지금은 어디를 가나 포장된 도로여서 흙을 밟는 느낌도 무척 생소하다. 40년을 넘게 산 나도 생소한데 아이들은 말해 무엇하랴. 같이 간 아이들에게 흙길을 꾹꾹 밟아보라고 했다. 아이들은 마냥 신나 이리 밟고 저리 밟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 흙을 밟은 느낌에 대해 서로 이야기해 본다. 이런 것이 함께 걷는 것의 묘미가 아닐까? 집에서는 이런 대화가 거의 불가능하니 말이다.
흙길이 끝나고 수변데크가 이어진다. 수변데크 바로 아래로 금광 호수가 있어 마치 물 위를 걷는듯한 느낌을 준다. 지금은 겨울이라 물이 없어 수심이 얕지만 여름철에 수심이 높아지면 바로 발밑에 물이 있다고 한다. 가만히 걷다 보니 시인 박두진의 시를 발췌해 짤막하게 게시해 놓은 것들이 눈에 띈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 박두진의 작품‘도봉’. 반가운 마음에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순간 어린 아이처럼 행복함을 느낀다. 대학 시절 잠깐 삶의 허무를 느낄 때 심취했던 시 ‘도봉’.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이 두 줄만 읽어도 고독이 느껴지는 시. 잠시 옛 추억에 잠겼다가 내 옆에 있는 두 아이를 보며 현실로 돌아온다.
아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손을 잡고 걷다 보면 혜산정과 청록뜰로 갈 수 있는 갈림길이 나온다. 우선 혜산정으로 향했다. 시인 박두진의 호를 따라 지어진 이름 혜산정. 혜산정에 갈 예정이라면 간단한 도시락을 가지고 가는 것도 좋다. 정자 아래에서 금광호수와 둘레길을 배경으로 삼아 도시락을 먹는 운치가 있기 때문이다. 바다가 아닌데도 속이 시원해지는 이유는 맑은 금광호수 때문일까?
아이들과 준비해간 간식을 먹고 청록뜰로 발걸음을 옮겼다. 청록뜰의 ‘청록’은 시인 박두진이 자연을 노래한 청록파 시인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20여 분을 걸어 청록뜰에 가니 시인 박두진의 동상이 인자한 미소를 띄고 앉아 계신다. 그 옆에 앉아서 나도 아이들도 찰칵. 청록뜰 옆에는 미로 찾기처럼 펼쳐진 데크가 있다. 짧은 산책이 가능한 곳이다. 힘들어서 잠시 쉬는 나를 두고 아이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이리저리 뛰어서 한 바퀴를 금방 돌고 돌아온다. 이 산책로 밑에도 금광호수의 물이 흐르는데 물이 많을 때 오면 산책길 위로 차오르기도 한다고 한다.
청록뜰에서 차로 조금 이동하면 박두진 집필실 쉼터를 갈 수 있다. 시간이 된다면 여기까지 가보는 것이 좋다. 이곳에는 박두진을 대표하는 시‘해야 솟아라’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어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고 나이가 4백~5백년 된 느티나무도 볼 수 있다. 어디든 자동차로 갈 수 있는 시대에 걷는다는 것은 느림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 느림은 여유를 찾아 주고, 여유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 하루하루 바쁘게 사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잠시 내려놓고 그 느림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중략)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누가 썼는지는 잘 모르더라도 위의 시를 한 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바로 안성의 대표적인 시인 혜산 박두진의 대표작이다. 시인 박두진은 그의 대표작처럼 일제의 극심한 탄압이 있던 1930년대 말 어둠을 밝히며 해처럼 등단한 시인이다. 등단 후 활발한 창작으로 한국 시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굵직한 흐름을 이어가는 박두진의 시 세계와 인간 박두진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박두진 문학관이 2018년 11월 안성시 안성맞춤랜드 한쪽 끝에 개관했다.
3층으로 지어진 이 문학관은 1층에는 1,500여권의 시집을 구비해 놓은 북카페, 박두진 관련 자료를 보관하는 수장고가 있다. 문학관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북카페에 편안하게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다. 2층에 있는 상설 전시실은 3부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박두진의 시를 읽다.’는 부제 아래 시인 박두진의 시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박두진은 시대의 흐름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등 한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시대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현실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시로 표현했다.
시 창작 활동 초창기에 시인은 생명력으로서의 자연을 노래하였는데 일제 강점기 말에도 감시를 피해 시 쓰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해방 이후 그의 문학은 『청록집』으로 빛을 보게 된다. 『청록집』은 1946년 6월 조지훈, 박목월과 함께 발간한 시집이다. 시집 발간을 계기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은 청록파 시인으로 불린다. 그 후 박두진은 1949년 5월 첫 개인시집 『해』를 발간하며 자신의 문학적 입지를 견고하게 다진다.
한국 전쟁 이후 박두진은 현실에 대한 저항정신과 휴머니즘이 잘 드러나는 작품을 쓰면서 역사의 흐름에 동참한다. 그 후 1970년대에 이르러 수석과 종교를 노래하며 시 세계의 변화를 맞이한다. 60여 년 동안 이어진 그의 시 세계는 ‘자연-역사-종교’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2층 상설 전시관에는 박두진의 시 세계를 자세히 알 수 있는 설명과 함께 그의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2부는 ‘박두진의 일상을 보다.’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는 시인은 새벽 시간에는 명상을 하며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였다고 한다. 독서, 글쓰기가 그의 삶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을 때는 수석 채집을 다녔다고 한다. 수석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극진했다. 3부는 ‘박두진의 예술세계와 만나다.’는 부제로 한평생 박두진이 관심을 갖고 함께한 글씨, 수석, 조각,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글쓰기를 넘어서 여러 예술 분야에서 종합적으로 활동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2층 상설 전시관을 나오면 박두진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박두진 문학상은 시인의 시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안성시의 지원으로 2006년 제정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강은교 시인도 역대 수상자에 있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강은교 시인의 ‘사랑법’를 잠시 떠올리며 3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3층은 초록의 인조 잔디밭이 있는 전망대이다. 이곳에 올라가면 안성맞춤랜드의 전체적인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또한 시인 박두진 초기 시의 근간을 이루는 자연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안성의 멋진 자연환경을 직접 볼 수 있다.
박두진 문학관에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어린이 문학 교실, 청소년을 대상으로는 청소년 인문학 특강, 성인을 대상으로는 우리 시대 작가와의 만남(문학 특강)을 운영한다. 수강료는 모두 무료이니 홈페이지를 참고해 참여해 보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박두진 문학관 관람은 화요일~일요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다. 휴관일도 있으니 관람을 원한다면 확인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
경기도 부천의 자유시장은 현재 부천에서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으로 부천역 남부철도를 따라 대규모로 발달된 종합 시장이다. 1947년 문을 열었고, 1970년대 후반까지 부천 유일의 시장이기도 했다. 1980년대까지 큰 호황을 누린 자유시장은 오후 4시가 되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밀려들어 몸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다. 당시 부천주민들 외에 인접한 도시인 김포와 광명, 시흥에서도 고객들이 찾아올 정도로 경기도 내에서도 손꼽히는 시장의 하나였다.
현재도 부천 지하철역과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하고, 500m 넘는 시장길을 따라 채소와 청과, 축산, 수산물 등 싱싱한 식자재는 물론 식당, 의류, 잡화, 생활용품을 파는 점포수가 250개가 넘은 대규모 시장으로 부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편, 해방 이후 자유시장 인근에 함께 개설된 것이 깡시장이다. 자유시장이 소매시장이라면 깡시장은 과일과 채소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도매시장이다. 깡이라는 말은 일본어에서 할인을 의미하는 ‘와리깡’에서 유래한 말이다.
깡시장에서 청과물 경매가 이루어질 때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시장을 꽉 메웠다. 특히 복숭아가 출하되는 여름이면 이 지역은 복숭아 향기로 가득 찼다. 부천을 복사골이라고 부를 정도로 과거 부천의 대표특산물은 복숭아였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에 부천역에서 자유시장 쪽으로 나오면 복숭아를 파는 노점들이 즐비했다.
깡시장은 차츰 규모를 키워서 2006년에는 시장 인정을 받아 ‘부천청과물시장’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하지만 아직도 주민들은 깡시장이라고 부른다. 부천청과물시장은 바깥에서 보면 시장처럼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도매시장의 모습이 드러난다. 자유시장보다 규모는 작지만 거래 규모는 자유시장보다 크다.
1990년대에 후반부터 인근에 대형마트와 백화점이 생기고, 신도시와 소사역 중동역 등으로 교통이 분산되면서 2000년대 들어 자유시장도 다른 전통시장들처럼 장세가 약화되었다.
장세회복을 위해 자유시장은 2009~2012년, 2014~2015년까지 2단계 사업을 통해 아케이드 시설과 간판 정비 등 쾌적한 쇼핑 환경을 조성하였다. 또한 추석, 설 등 명절 행사 뿐 아니라 계절별로 가을축제, 보물찾기, 할로윈 대축제 등을 열어 시장이 단지 물건을 사는 곳을 넘어 지역의 문화 공간이며 즐길거리가 있는 곳이란 인식을 심어 주고 있다. 시장행사들을 여러 SNS로 알리고, 점포 대부분이 대형마트처럼 가격표시제를 시행하고 있어 사람들이 좀 더 편안하게 쇼핑을 하도록 돕고 있다.
이러한 노력 덕에 현재 자유시장은 가족 단위 고객들과 젊은 층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금요일부터 시작되는 주말권에는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특히 많아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성주산은 부천역 1번 출구에서 나와 심곡도서관 쪽으로 10여분 정도 올라가다 보면 등산로 입구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부천역에서 10여분 쯤 가다보면 과연 진짜 등산로가 나올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 때 돌연 성주산 등산로 표지판과 함께 어린이 활터공원이 나온다. 이처럼 성주산은 주택가밀집구역에 위치하고 있다. 사실 성주산 턱밑까지 집을 짓고 산다는 것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어린이 활터공원 옆길을 따라 올라가면 기대한 등산로가 아닌 국궁장인 성무정이 떡하니 앞을 막고 있다. 다른 길이 없어 보이지만 국궁장을 통과하는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은 마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에 나오는 터널처럼 도시와 숲을 나누는 마법 같은 통로다. 이 계단을 통과하면 공간이동을 한 것처럼 깊은 산속 오솔길 같은 등산로가 나타난다.
성주산은 부천 남단에 있지만 동쪽으론 시흥시, 남쪽으론 인천광역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어서 여러 곳에서 편하게 올라올 수 있고, 대부분의 진입로가 주택가 밀집구역인 구시가지에 위치하기 때문에 동네 공원을 찾듯 쉽게 이용가능하다. 코스도 올라가는 방향에 따라 짧게도 길게도 잡을 수 있다. 또한 중간중간 약수터와 정자, 절 등이 있어 등산하는 재미가 있는 산이다. 이 때문에 성주산은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성주산 등산로 중에서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은 단연 하우고개 구름다리다. 부천역 쪽에서 30~40분정도 가면 만날 수 있는 핑크색의 깜찍하고 스릴있는 구름다리다. 아주 길지는 않지만 부천이 예전부터 골짜기가 깊기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구름다리 중간에 가면 바람에 의해 다리가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우고개 구름다리의 준공표지판에 이 다리의 공사목적이 뜻밖에 친절히 적혀있어 옮겨본다.
준공 표지판
공사명: 하우고개구름다리 설치공사
공사목적: 나무, 꽃, 돌, 빛의 도시환경을 만들기 위한 시책의 일환으로 도로횡단에 따른 교통사고 예방은 물론 구름다리를 거닐 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명소를 창출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습니다.
시행청: 부천 시청 / 공사기간 2000.5.3~11.3
설치목적대로 구름다리를 건널 때 즐거움도 느낄 수 있고, 구름다리 아래의 도로는 좁은 2차선이지만 부천과 시흥을 잇는 도로라 교통량이 의외로 많기 때문에 분명 교통사고 예방도 되리라 생각된다. 이곳에서 만난 부천 주민 안복순 씨는 “20년 전 이 구름다리가 처음 생겼을 땐 다리 중간에서 보면 부천역까지 내다 보였는데, 그때 어렸던 나무들이 이제는 모두 자라 숲이 우거져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준공표지판에 적혀 있듯 나무, 꽃, 돌, 빛의 도시환경 역시 목표대로 만들어진 것 같다.
하우고개 구름다리까지 올라오면 복잡한 부천역에서 30분 남짓 거리에 이런 아늑한 숲을 만날 수 있다니 놀랍기까지 하다. 하우고개 구름다리를 건너 성주산 정상까지 갈 수도 있고, 길게는 소래산까지도 갈 수 있다. 인천대공원 쪽으로도 내려갈 수 있다. 성주산은 시간 날 때마다 산책처럼 가볍게 등산할 수 있는 사랑스런 산이다.
마상근린공원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한 근린공원이다.
101,180㎡의 넓은 면적에 야외무대와 풋살구장, 농구장, 실내 배드민턴장, 게이트볼장 등 각종 체육시설과 휴게시설, 600m의 산책로를 갖추고 있다.
산책로의 초입에는 재치 넘치는 속담이나 시를 적은 돌들이 놓여 있어서, 그걸 읽으며 걷다 보면 빙그레 웃음을 짓게 된다. 나무가 울창한 숲길에 마련된 원두막들은 인기가 좋아서 여름엔 언제나 만원이다.
마상근린공원은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피신해 있을 때 물을 마셨다는 대궐고개 약수터와 노비가 풍수지리를 배워 복수했다는 병풍바위의 전설 등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배다리 누리길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시작된 배다리 누리길은 숲길뿐만 아니라 황토길, 군사도로와 철책길, 공원길, 논밭길로 이어지며 지루하지 않게 2시간 정도 걸을 수 있다.
특히 마상근린공원에서 원당중학교까지 1km 정도 길게 이어진 벚나무 길은 아는 사람만 아는 숨은 명소로, 봄에는 벚꽃이 화사하게 피고 가을에는 단풍이 곱게 든다. 번잡하지 않고 고즈넉한 마을길이기 때문에 혼자 조용하게 사색하며 걷거나 데이트하기에도 좋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도 좋다.
이 아름다운 벚꽃 길이 있는 마을이 바로 마상근린공원 이름의 연원이 된 마상골이다.
마상골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예로부터 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는 설과, 마을의 생김새가 말을 탄 사람의 모양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마을의 산세가 말과 코끼리 모양이라 마상(馬象)골이라는 설도 있지만, 1911년 발간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원당면 주교리 마상곡(馬上谷)’이라는 골짜기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상근린공원이 다른 근린공원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점이 있다면, 2016년에 개관한 ‘마상공원 작은 도서관’이 있다는 것이다.
마상공원 작은 도서관은 주민참여예산으로 건립된 최초의 공립 작은 도서관이다.
주교동 주민참여예산위원회가 지역에 꼭 필요한 사업이 뭔지 고민한 끝에 작은 도서관 건립 사업을 추진했고, 시의 타당성 검토를 거쳐 주민참여예산사업으로 선정되어 지을 수 있었다. 주민들의 능동적인 행정참여의 결과물이라 더욱 의미가 깊은 도서관이다.
작은 도서관이긴 하지만 규모만 작을 뿐 3,500여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고 신착도서 코너와 유아열람실도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알찬 도서관이다. 2017년 증축공사 때 한쪽 공간을 전면 폴딩도어로 만들었는데, 날씨가 좋을 땐 완전히 개방할 수도 있고, 문을 닫아도 유리창을 통해 공원의 자연풍경을 도서관 안에서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친환경 공간이 되었다.
종종 야외무대와 작은 도서관에서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는 마상근린공원. 주민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언제든 운동을 위해, 산책을 위해, 책을 보기 위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어 우리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원릉역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에 있는 교외선 철도역이다. 1961년에 처음 역사가 세워진 이후, 같은 해 7월 배치간이역(역장 없이 역무원만 배치된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해, 1964년에 보통역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교외선이 고양시에서 서울로 나가는 유일한 철도 교통수단이었던 때에는 하루에 수천 명의 승객이 이용할 정도였다.
수도권 전철 1호선과 중앙선이 개통되고 점차 고양시와 서울을 잇는 다른 교통수단들이 발달하면서 승객수가 감소함에 따라 1984년 무배치간이역(역무원도 없는 무인역)으로 격하되었다가, 2004년에는 여객영업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일부 포털사이트 검색에는 ‘폐역’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현재까지 드물게나마 인근 군부대나 코레일의 화물 수송 열차가 지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폐역은 아니다.
원릉역이라고 하면 흔히 근처에 ‘원릉’이라는 왕릉이 있다고 오해하기 쉬운데, ‘원당’과 ‘서삼릉’의 한 글자씩을 합쳐서 만든 역명이다. 조선 제21대 왕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元陵)’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원릉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역장님이 계셨던 곳이기도 하다. 정식 역장님은 아니고, 이용 승객이 감소한 원릉역을 폐쇄하는 대신 대매소(승차권 위탁발매소) 운영자셨던 강소득 할머니께 역사 관리를 맡긴 것이었다. 강소득 역장님은 칠순이 다 되신 나이에도 새벽 6시 34분의 첫차부터 마지막 열차의 운행이 끝날 때까지 열차와의 수신호, 매표, 집표, 청소 일까지 혼자서 다 해내며 2004년 여객영업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원당역을 지키셨다.
원당역은 2011년 개봉된 영화 「파수꾼」의 촬영장소로 알려져 잠시 유명해지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원릉역은 방황하는 사춘기 소년들이 친구들과 만나는, 비밀스러우면서도 쓸쓸한 공간으로 그려져, 한동안 영화팬들이 방문해 인증샷을 찍어 가기도 했다. 최근까지 원릉역은 역을 횡단할 수 없게 철책이 설치되어 있어 인근 주민들과 방문객들이 불편을 겪어야 했다. 특히 인근에 있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통학로가 철길로 막혀 100미터 이상의 거리를 돌아가야 하는 등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고양시는 2014년 원릉역 지하보도 공사를 시작했지만, 과거 통행로로 이용하던 사유지의 토지주와 협의하지 않고 보행로를 잘못 설치하는 바람에 토지주가 보상을 요구하며 2m 높이의 담장을 설치하는 등 문제가 발생했다. 다행히 토지주와의 원만한 협의가 이루어졌고 지금은 지하보도가 완성되어 주민들의 불편은 해소되었다. 지하보도의 벽에는 소박한 갤러리도 만들어 원릉역의 역사와 특징을 소개하고 있다.
원릉역 지하보도를 나가면 아파트단지의 산책로가 이어지고, 이 길은 성사체육공원까지 연결된다. 예전처럼 하루 수천 명의 승객이 오가는 역은 아니지만, 인근 주민들이 편하게 산책하고 운동하는 코스로 이용되고 사랑받고 있다. 고양시는 앞으로 원릉역 지하보도 주변을 도심공원으로 조성하고 주민들 소통 및 공동체 공간으로 제공하며 지속적인 개발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행주산성 역사공원은, 1970년대 초 무장공비 침투를 막기 위해 설치했던 한강 하류의 군 철책을 철거한 뒤, 그 자리에 조성한 공원이다. 고양지역 한강변 철책선 12.9km 중 가장 먼저 철거된 곳으로, 처음 철책이 설치된 지 46년만인 2016년에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고양시정연수원 앞 한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33,000㎡이다. 3.73km에 달하는 행주산성 누리길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행주산성 앞의 한강을 조선시대에는 행호(杏湖. 살구나무 호수)라 불렀다고 한다. 예로부터 이 지역에 살구나무가 많았고, 행주산성 인근으로 창릉천이 흘러들어오면서 강폭이 넓어지고 물살이 약해져서 마치 호수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길게 늘어선 입구를 지나 공원으로 들어가면, 넓은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행주산성 역사공원이 나온다. 행주산성 역사공원에는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의 ‘행호관어도’를 토대로 행주마을의 옛 모습을 재현한 것들이 곳곳에 있다. ‘행호관어도’는 겸재 정선이 강 건너 양천현감으로 있을 때, 어부들이 강에서 작은 배를 타고 웅어잡이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그림 속에 보이는 빨랫돌 머리, 버드나무류, 고기잡이배가 공원에 사실적으로 복원되어 있다.
또한 ‘생태공원’과 ‘평화공원’을 지향하고 있는 공원인 만큼 생태광장에서는 살구나무와 갈대, 수크령, 털부처꽃 등 자생식물을 볼 수 있고, 과거 군 초소 건물을 보수하여 만든 초소전망대에서는 적군의 침투를 감시하는 대신 한강과 철새를 평화롭게 조망할 수 있다. 그중 팔각정 초소전망대는 한강으로 들어오는 무장공비를 24시간 감시하기 위해 인근 초소건물 중 가장 높이 설치돼 있었던 덕분에, 지금은 한강을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는 명당이 되었다. 왼쪽으로는 방화대교, 오른쪽으로는 행주대교가 막힘없이 보이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일몰은 인근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밤이 되어 두 대교에 조명이 켜지며 펼쳐지는 야경도 상당히 멋지다. 공원 안에는 군 철책선의 일부를 남겨놓았는데, 이곳이 과거 남북분단의 상징이었음을 알리는 동시에 평화 시대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팔각정 초소전망대로 향하는 길목에 이가순 관개 송덕비(고양시 향토문화재 제64호)가 있다. 1930년대 고양지역에 양수장을 건설하고 수로 연결사업을 통해 해마다 고질적으로 되풀이되던 가뭄과 물난리를 해결한 양곡(陽谷) 이가순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50년에 세운 것이다. 이가순 선생은 3.1 운동과 신간회 활동 등으로 대통령 표창과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행주산성 역사공원의 인근에는 권율 장군을 기리기 위한 행주서원, 현존 사례가 많지 않은 한옥성당인 행주성당, 임진왜란 당시 민관군이 힘을 합쳐 왜군을 물리친 유적지 행주산성 등이 있어서, 함께 연계해 교육공원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왕 공원에 왔다면 공원뿐만 아니라 행주산성 누리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공원 주차장은 항상 무료로 운영되고 있어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다.
이 약수터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에 위치해 있다. 군부대와 작은 농장들을 제외하고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야산 한 가운데에 대궐고개라는 지명이 붙어 있다는 사실이 심상찮다. 이 장소는 고양시에서 조성한 ‘배다리 누리길’이라는 이름의 둘레길이 지나지 않았다면 찾는 사람도 별로 없을 외진 곳이다. 하지만 이곳으로부터 500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의 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생기게 된다. 한반도 땅에는 걷는 길마다 역사가 묻어나는 곳이 수없이 많지만, 이 외진 산속의 좁은 오솔길도 그중 하나라는 사실이 새삼 감탄스럽다.
후에 조선 태조가 되는 이성계는 공민왕의 적자 우왕과 창왕을 죽인 뒤, 고려 왕실 직계에 포함되면서 자신에게도 가까운 왕족을 왕으로 내세우고 싶었다. 그래서 왕이 된 것이 이성계와 먼 사돈뻘이었던 왕족, 바로 공양왕이다. 직접 모은 재산도 상당해서 편안한 말년을 기다리던 사람이 갑자기 왕까지 되었으니 기분이 좋았을까? 시절이 하 수상하던 그때 왕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공양왕이 모를 리 없다. 죄 하나 짓지 않고도 언제 처형당할지 모르는 사형수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 노국공주와 신돈이 등장하는 극적 스토리를 가진 공민왕에 비해 공양왕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어 그저 무력하게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스러진 왕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실제 사료를 보면 나름대로 이성계에게 저항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아마 그것이 그의 죽음을 앞당겼는지도 모르지만 결국 왕이 된지 3년도 못 되어 처형당한다.
실록에서는 그가 삼척으로 유배되고 거기서 처형되었다고 하나, 민간에서 전승되는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공양왕이 삼척에서 탈출하여 쫓기다가 결국 이곳 고양시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저 민담이라고 무시할 수만 없는 것이, 실제로 공양왕릉은 삼척과 고양 두 곳에 있는데 조선 왕조는 고양시의 능을 공인했기 때문이다.
민간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공양왕은 이성계의 병사들에게 쫓기다 최영 장군의 묘지가 있는 고봉현(현재의 고양시)까지 오게 되는데, 산속에서 헤매다 작은 절을 발견하고 몸을 의탁하고자 했다. 그러나 스님들은 쫓아오는 병사들이 분명 이 절을 놓치지 않을 것을 알고, 공양왕에게 근처의 골짜기에 숨어 있으면 밥을 날라 드리겠다고 했다. 그래서 공양왕은 골짜기를 찾아가려 했으나 날은 어둡고 초행길이라 그날 밤은 어느 고개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이 뒤는 자세하지 않다. 골짜기에 숨은 공양왕에게 몇 차례 밥을 가져다줬던 스님들이 어느 날 시신이 된 공양왕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 근방 백성들이 왕이 머물렀던 고개를 대궐고개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공양왕이 피신해 있는 동안 꼭 한 곳의 샘물만을 마셨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바로 그곳이 훗날 대궐고개 약수터가 되었다.
기구한 운명으로 객사한 어느 왕의 사연도 안타깝고, 그를 불쌍히 여겨 왕의 발길이 닿았던 곳마다 대궐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백성들의 마음도 짠하다. 스님들이 왕에게 밥을 주었던 골짜기는 식사골로 불렸는데, 그곳의 이름은 ‘식사동’이 되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있다.
현재 대궐고개 약수터는 식수 부적합 판정을 받아 가끔 이용이 금지되기도 한다. 또 바로 근처에 국도 대체 우회도로가 건설되고 있는데 2016년에는 이 우회도로가 역사적 사연이 많은 산책로를 파괴한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집단민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 유물 증거 없이 사연만이 존재하는 작은 오솔길과 샘물이 현대 문명의 개발 바람을 얼마나 오래 버텨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아직은 공양왕과 백성들의 모습을 충분히 그려볼 수 있을 만큼 숲은 울창하고 골은 깊으니 한번쯤 산책이 필요할 때 지나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에서 마상 공원 뒤쪽으로 가면 ‘박재궁 마을’이라는 묘한 이름의 표지판을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마을 초입에 궁도장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박재궁과 궁도장을 연결지어 추측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 둘은 아무 상관이 없다.
재궁(齋宮)은 본래 국왕이 제사를 준비하는 곳을 지칭하는 말로서, 재실(齋室) 즉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이 아주 규모가 큰 경우에는 재궁이라 불렸다고 한다.
박재궁 마을이란 명칭은 바로 이 지역에 밀양 박씨 가문의 묘역과 재궁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박재궁이란 지명은 일찍이 조선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1755년 영조 연간에 발간된 고양군지에도 ‘박재궁촌’이라는 이름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박재궁 마을에 가면 추원재라는 재실이 있고 상당히 큰 규모의 묘역(3개가 하나를 이루고 있다)과 여러 신도비(고관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죽은 사람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를 함께 세워둔 신도비군이 있다. 마을 자체는 전체적으로 보면 연립주택, 아파트, 빌라 등이 뒤섞여 일반적인 주택가와 다를 바 없으나, 규모가 큰 묘역과 재실이 있고 구석구석에 오래된 기와집들이 자리하고 있어서 아직 이곳과 과거를 연결하는 끈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밀양 박씨 가문이 처음 이곳에 묘역을 마련한 것은 1370년 고려 때 추성익위공신 전법판서 겸 상장군 사경 공을 처음 안장하며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 광해조에 이르기까지 300년간, 53위의 묘소와 11위의 제단, 그리고 배위까지 합하면 전부 90여위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1589년 지사 이의신은 답산기에서 이 박재궁 묘역에 대한 글을 남긴 바 있다.
삼각산에서 떨어진 외맥이 서쪽으로 물 같이 평평하게 서너번 흘러 주원에 들어온 맥이 낮게 오다가 다시 봉우리로 솟았다가 완만한 등성이를 이루고 허술한 듯 내려가다가 뚝 떨어져 혈을 맺었으니 대지(大地: 좋은 묏자리)이다. 전면이 조금 완만하게 굽고, 혈도가 조금 노출된 것이 한스러우나 이 세상에 이만한 땅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한편으로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한편으로 우리가 과거의 유산을 존중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조금 더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아무튼 밀양 박씨 선조께서 묏자리를 잘 쓰셔서인지 몰라도 이 묘역에 묻힌 조상들 중에는 큰 벼슬을 한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고려 중엽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규정(종3품)을 지낸 박현, 대제학을 지낸 박충원, 영의정을 지낸 박승종, 형조참판을 지낸 박자흥, 우문관대제학을 지낸 박시용,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박연 등이 있다.
특히 박충원의 묘는 전체 묘역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는 조선 중종 2년(1507)에 태어나 선조 14년(1581)에 돌아가신 충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영월군수를 거쳐 대제학, 이조판서,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낙춘박선생유고’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한 인물이다. 박충원이 영월군수로 재직할 당시 돌아간 단종의 현신과 화답하고 단종의 묘역을 장릉으로 조성한 것이 현재까지도 일화로 남아 있다.
단종과 관계된 밀양 박씨 인물들은 더 있는데 역시 박재궁 묘역에 묻혀 있는 청제 박심문도 그중 하나다. 박심문은 단종의 충신으로 단종 복위를 모의했던 사람이다. 그는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길에 단종 복위 계획이 들통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압록강에서 자결을 하면서 자신이 신던 신을 집으로 보내, 신이 집에 도착한 날을 자신의 기일로 삼아 달라고 부탁했다. 후손들은 신발과 옷가지가 도착한 날 박재궁의 선영 밑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2008년 밀양 박씨 후손이자 이 지역 주민인 박원석씨가 조상 대대로 보관해 온 ‘충절록’을 고양신문사에 가져가 감정을 의뢰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충절록’의 또 다른 판본인 ‘청제박선생충절록’은 국립중앙도서관에도 보관되어 있다.
재미있게도 ‘박재궁’이라는 마을 이름은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도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곳에도 과거에는 밀양 박씨의 묘가 수십기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고양시의 박재궁처럼 오랫동안 유지되다가 근대의 개발 바람에 버티지 못하고 주택가 부지로 팔렸던 것 같다. 고양시 박재궁 마을의 밀양 박씨 묘역은 현재에도 상당히 면적이 넓은데, 원래 국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땅은 지금보다 훨씬 더 넓었다고 한다. 지사 이의신 선생이 지적했듯 ‘좋은 묏자리이나 한두 가지 한스러운 점이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과거 고관대작을 지낸 한 가문의 묘역을 애써 보존해야 하는 의미를 우리가 찾지 못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박재궁의 넓고 당당한 묘역과 다소 빈한한 주택가의 조화는 어딘가 낯설고 아쉽다.
경기도 하남에는 하남 나무고아원이 있다. 1999년 하남에서 ‘한국국제 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환경을 생각하고 실천하기 위해 각종 도로 공사나 아파트 공사로 필요 없게 된 나무들을 베어버리지 않고 옮겨 심을 수 있는 나무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이런 취지로 2000년에 개장한 곳이 하남 나무고아원이다.
처음 나무고아원에 오게 된 나무는 버즘나무, 외래어로는 플라타너스라고 불리는 나무다. 열매가 동그래서 방울 나무로도 불린다. 버즘나무는 도심의 매연에 강한 나무로 각광받아 가로수로 많이 심었으나, 꽃가루가 날릴 때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미관상 좋지 않다는 지적을 받게 되었다. 또한 성장이 빨라 보도블록 위로 뿌리가 솟아나서 사람들이 걷기에도 불편하고, 가게 간판을 가린다는 시민들의 불만도 폭주했다. 버즘나무 대신 이팝나무로 가로수를 교체하면서 베어지거나 뿌리째 뽑힐 운명이었던 이 나무는 나무고아원이 생기면서 안전하게 옮겨져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다. 지금은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유치원에서 단체로 나들이 와 서 버즘나무 낙엽으로 가면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자연물로 미술 활동도 하는 등 어린이들의 훌륭한 놀이 친구가 되고 있다.
버즘나무 다음으로 나무고아원을 대표하는 나무는 1950년생 버드나무다. 옮겨질 당시 줄기에 상처가 많아 성장이 어려웠지만 하남시청 녹지과 담당자들과 나무외과 선생님의 도움으로 세 번의 외과 수술을 받고 지금은 나무고아원의 터주대감으로, 사람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푸르고 튼튼한 나무로 잘 자라고 있다. 그 밖에도 하남뿐만 아니라 수원에서 옮겨진 은사시 나무, 청와대와 군대에서 옮겨진 소나무, 은행나무, 홍단풍, 감나무, 산수유 등이 하남 나무고아원에서 링거도 맞고, 보호를 받으며 자라고 있다.
갈 곳 잃은 나무들을 보호한다는 의미로 나무고아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아이들을 보육해주는 곳으로 알고 문의 전화가 오기도 했다. 한 때는 어감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하남 수목원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지만, 갈 곳 잃은 나무들을 보호한다는 개장 초기의 취지를 살려 지금은 하남 나무고아원으로 부르고 있다. 흙먼지만 날리던 처음 모습과는 다르게 이제는 푸른 숲이 무성하여 시민들의 산책로, 아이들의 체험교육장으로 사랑받고 있다.
봄이면 봄맞이꽃, 제비꽃, 민들레, 양지꽃이 활짝 피고, 여름비가 내릴 때는 멸종위기보호종인 맹꽁이가 웅덩이에 알을 낳느라 맹~꽁 맹~꽁 우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가을에는 고라니, 꿩, 겨울에는 박새와 참새들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사람에게도 누려야할 인권이 있듯이 동물과 식물들에게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식물과 동물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품어 안아주는 하남 나무고아원이 있어 우리동네가 더 따뜻한 것 같다.
일산은 호수공원과 정발산 공원 등 녹지가 많으며, 녹지의 면적도 신도시 전체 면적의 22.5%로 월등하다. 이 정발산 공원과 호수공원을 연결해주는 공원이 바로 일산문화공원이다. 면적은 59,048㎡이며 야외무대와 광장 조형물을 갖추고 있다.
일산문화공원은 신도시 개발 당시 조성되어 제5호 미관광장으로 불리다 지난 2004년 시민들로부터 명칭공모를 받아 ‘일산문화광장’이 됐다. 일산문화공원은 남과 북으로 3호선 정발산역과 일산동구청, 아람미술관, 아람누리도서관 등의 공공시설과 호수공원이 마주하고 있으며, 동과 서로는 홈플러스와 롯데백화점 등의 쇼핑센터와 웨스턴돔, 라페스타 등의 문화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장점으로 인해 일산의 수많은 공원 중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공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산 문화공원에서는 매년 고양시에서 추진하는 다채로운 행사와 축제가 열리며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기획하고 참여하는 공연 역시 끊이지 않는다.
각 지방의 토속 음식을 소개하는 행사를 비롯해, 막걸리 축제, 호수문화 축제 등 매주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펼쳐진다. 또한 지역 학교학생들과 동호회 등에서 공연을 하고 정기적으로 벼룩시장이 개최된다. 자유로운 버스킹과 스케이트 보드, 자전거, 줄넘기 등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일산문화공원에는 다양한 조형물들이 있다. 가장 남쪽에 위치한 어묵꼬치 모양의 큰 탑은 ‘일산 신도시 건설기념탑’이다. 스테인레스 스틸로 제작된 탑은 높이 30미터로 1997년에 세웠다. 이 탑은 일산 신도시 건설 사업의 성공적 완수를 기념하고 입주민들의 애향심을 고취시키고자 한국토지공사에서 제작, 윤동구, 이형우 작가가 설치했다.
이 작품은 전통적 풍수의 음양조화를 바탕으로, 양적 요소인 정발산과 음적 요소인 호수공원 사이에 위치하여 천지의 중간자를 상징하면서, 우주의 기가 바람을 받아 회전하는 원통형 모빌과 어우러지며, 재생의 기운이 수직으로 솟아 일산 신도시가 끊임없이 번영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건설기념탑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오면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원래는 호수공원 내 고양 600년 기념관 앞에 있었으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2016년 일산 문화공원으로 이전했다. 그 밖에도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많은 벤치와 가로수가 있고, 중앙의 넓은 광장을 지나 북쪽 끝에는 고양독립운동기념탑이 서있다.
고양시는 일본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곳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애국선열들의 위업을 기리고자 일산문화공원에 ‘고양독립운동기념탑’을 건립했다. 31m 높이의 기념탑은 3.1 독립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2018년 8월에 세웠다. 이처럼 일산 문화공원은 언제든 찾아와 쉬고, 보고, 즐기고 참여할 수 있는 고양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위치가 좋고 유동인구가 많아 만남의 장소로도 애용된다. 호수공원이 일산의 자랑이라면, 문화공원은 사랑이다.
많은 이들이 ‘일산’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어떤 것들일까? 신도시, 호수공원, 킨텍스, 전원주택 단지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밤가시 초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신도시라 불리는 일산에 그것도 서양의 주택 단지처럼 세련된 전원주택들이 가득한 동네 한가운데에 짚으로 지붕을 얹고 황토로 벽을 쌓은 작고 소박한 집 한 채, 밤가시 초가가 있다.
'밤가시 초가'는 조선 후기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전통적인 서민 농촌 주택으로, 드물게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평면 구성의 형식이나 기둥 등 주요 목재의 부식 정도로 미루어 대략 150여 년 전, 곧 19세기 중엽 이전의 건축물로 추정되며 경기도 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건물의 기둥, 대들보, 문틀. 마루, 서까래 등에 이르기까지 밤나무 재목을 쓴 것이 특징인데 이는 이 마을에 밤나무가 울창했고 가을이면 밤가시가 많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율동」이란 지명이 생겨날 정도로 밤나무가 유명한 지역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움푹 파진 웅덩이 모양의 안마당이 있고 안마당 주변에는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의 문간채가 전체적으로 ㅁ자형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안채는 좁은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안방과 부엌, 왼쪽에 건넌방과 사랑방이 있다. 문간채는 후대에 지은 것으로 창고와 변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마당의 둥근 웅덩이는 이 가옥의 독특한 특징으로, 똬리 모양으로 둥그렇게 모아지는 마당 위쪽 지붕형태를 따라 떨어지는 낙수물의 배수로 역할도 하고 있다. 밤가시 초가는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정서적인 포근함을 느끼게 하며 주변의 수목과 함께 옛 농가의 정겨움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다.
일산에 신도시 공사가 시작되던 90년대 초반까지 이 집에는 실재 사람이 살고 있었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집의 대문 옆에는 당시 입주자의 명패가 여전히 달려있다. 원래 이 집의 주변으로 다른 집들 또한 밀집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나, 1989년의 홍수로 많은 집들이 유실되고 밤가시 초가 한 채만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았다고 한다. 홍수 직후에 신도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시에서는 150년도 넘은 이 소박한 초가집의 가치를 높이 사 철거하지 않고 원형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초가집과 그 주변의 나무들과 장독대, 그리고 대문 앞의 좁은 길 일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관리 중이며, 밤가시 초가 언덕 아래로는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조선 후기의 서민 생활상도 함께 엿볼 수 있도록 1996년에 새로 지은 한옥 기와집 형태의 ‘민속 전시관’과 기와 대신 납작하게 쪼개지는 푸른 빛깔의 점판암으로 지붕을 얹은 청석집 형태의 ‘관리동’과 ‘사주문’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때 보아도 아름답고 정감 어린 밤가시 초가는 새 것만이 가득한 신도시 일산의 소중한 역사이자 어떤 건축물 보다 빛나는 보물로써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늘이 높아지고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10월 말, 나들이하기 좋은 장소로 수원 화성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정조의 원대한 꿈이 서린 기품 있는 유적지가 관광의 우선순위기는 하지만, 즐거움을 만끽하기에 그것만으로는 다소 부족하다. 모름지기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고, 정신과 육신의 오감이 만족해야 완전히 충족되지 않겠는가.
현지의 생생한 생활감을 느끼기에 수원남문시장 만한 곳이 없다. 수원행궁에서 수원천을 끼고 팔달문 방향으로 5분여 걸어 내려오면 수원남문시장에 다다른다. 수원남문시장은 총 9개의 시장이 모여 있으며 역사가 무려 220년이나 된다. 여느 시장처럼 번듯한 점포부터 노점상까지 북적이지만 잘 정비된 팔달문과 버드나무가 흐드러진 수원천을 끼고 있어 정취가 있다.
재미있는 건, 서울의 시장들이 일반적으로 한두 가지 특화된 품목으로 경쟁력을 갖춘 데 반해, 수원남문시장은 먹거리부터 공구까지 생활상에 필요한 거의 모든 품목을 취급하는 점이다. 9개 시장마다 주요한 품목을 달리 취급해서 수원시민의 생활을 책임진다.
대장간 문화를 간직한 구천동공구상가시장은 기계공구류, 공산품을 판매한다. 패션1번가·시민상가는 패션과 잡화를, 못골종합시장과 미나리광장시장은 농수산물과 각종 식재료를, 영동시장과 팔달문시장은 포목, 의류를 각각 판매한다. 군것질거리도 빼놓을 수 없는데, 팔달문시장은 가마솥에 튀겨내는 통닭으로 이름난 통닭거리에 맞닿아 있다. 지동시장은 특히 순대가 유명하니 꼭 먹어보도록 하자.
이렇게 시장이 번성한 건 애초에 수원이 상업도시로 기획되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화성 건조 시 성내 생활이 가능하도록 인삼과 갓에 대한 독점권을 제시하며 유상(柳商)을 불러들여 시장을 조성하였고, 이후 이 일대는 경기 남부를 대표하는 상권으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여느 전통시장과 같이 수원남문시장도 도시개발로 인한 상권의 이동, 경기침체 등 다양한 이유로 고락을 거듭한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살리고 지역주민과 상생하기 위한 여러 시도가 돋보인다.
2016년 수원화성 일대가 수원화성관광특구로 지정되고, 이어 중소벤처기업부의 글로벌 명품시장 육성사업 지원대상으로 선정된 후 변화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의미 있는 건 시장 상인들의 자체적인 노력이었다.
90년대까지 압구정에 못지 않은 ‘힙한’ 거리였던 남대문로데오시장은 수원역 개발의 영향으로 폐업한 가게가 속출, 우범지대로 전락할 위기였다. 그때부터 남문로데오상인회가 앞장서 지역 예술가와 2012년부터 마을만들기 사업을 진행했다. 아름다운 테마거리를 가꾸는데 이어 수원청소년야외공연장, 남문 로데오 아트홀, 남문 로데오 갤러리를 잇따라 개관하여 예술과 문화의 거리로 거듭나고 있다.
영동시장 내의 ‘28청춘 청년몰’과 팔달문 차없는 거리부터 지동교에 걸친 ‘청년 푸드 트레일러 존’도 빠질 수 없다. 여기서는 젊은 감각을 앞세운 글로벌 퓨전음식과 공예품 등을 판매한다. 푸드 트레일러 존은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운영하며 야시장도 함께 연다.
지자체가 마련한 다양한 무료 문화체험과 공연도 놓치지 말자. 남문시장 고객센터 2층 유상박물관 & 관광상품 체험장에서는 당일 시장에서 5만원 이상 구매한 영수증 소지자와 외국인에게 무료로 24K 금박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일반 체험객은 최소 하루 전 예약 시 이용 가능)
정조가 풍족한 백성의 삶을 그리며 건배사로 사용한 표현인 불취무귀(不醉無歸: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음)의 뜻을 창조적으로 해석한 금박체험은 직접 금박을 입힌 술잔, 캔버스를 가져갈 수 있어 인기가 높다고. 정조가 꿈꾸었던 화성은 백성이 배부르고 평안한 실존적인 세상이었다. 이를 위해 왕이 직접 세운 유일한 시장이 모태가 된 수원남문시장. 온전한 화성을 음미하고 싶다면 방문해 보기를 추천한다.
파주에는 임진각, 판문점 등의 역사적으로 유명한 장소가 있지만 그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문산자유시장도 있다. 문산자유시장은 지역주민들 사이에서 예로부터 문산시장이라 불려왔다. 2015년에 공식적으로 문산자유시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문산자유시장의 기원은 조선시대 문산포장이다. 문산포는 과거 임진강을 통해 들어온 수많은 선박이 활발히 움직였던 교통의 요지였다. 한양과 밀접한 지리적 특성으로 임진강을 통한 각종 유통이 발달하여 장단과 포천, 개성, 강원도 철원 등지까지 화물을 공급했고 다양한 물자들의 집산지 시장으로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던 물자 요충지 시장이었다.
조선시대로부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아픔까지 함께 겪은 긴 전통의 시장이기도 하다. 이후 5, 10일장으로 명맥을 이어오다 1966년부터 정기시장으로서의 문산장 폐쇄 후 장터 주변에 소매상들이 밀집한 형태로 상설시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렇게 20년이 지나 1989년 정기시장은 4, 9일장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2015년 '문산자유시장'으로 명칭을 변경 후 새로운 전통시장의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문산자유시장은 문화관광형 시장으로서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이 육성사업은 각 시장이 가진 고유의 특성을 찾고 개발시켜나가며 관광과 쇼핑이 상호작용을 이루는 시장을 목표로 한다. 2017년 이 사업에 선정되어 2019년까지 사업을 진행해왔다. 이후 문산시장은 주민만이 아닌 관광객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문산자유시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즐길 수 있다. 실내시장과 상설시장, 그리고 4.9일장이 그것이다.
상설시장은 기존의 전통시장과 달리 빵집, 프랜차이즈 떡볶이, 디저트 카페 등 젊은 층이 좋아하는 가게가 즐비하여 인기몰이 중이다. 물론 문산시장의 세월만큼이나 오래 자리를 지킨 전통 있는 가게들도 많다.
시장의 묘미는 시장을 둘러보다 출출해진 배를 채우는 일이다. 그런 때엔 아무 분식집이나 찾아 들어가도 훌륭한 맛을 볼 수 있다. 현지인의 주관적인 추천이 들어간다면 '수원떡볶이'를 찾아가라 하고 싶다. 할머님 두 분께서 운영하시는 분식집으로 우리의 부모님 세대서부터 함께해온 맛집이다. 분위기 있게 시장 골목 구석에 놓인 야외테이블에서 어묵 국물 한 사발을 들이키는 기쁨이 있는 곳이다. 떡볶이 1인분에 2,000원 가량으로 가성비 또한 좋아 현지 학생들도 많이 찾기도 하고 학창 시절의 기억을 찾아 아이의 손을 잡고 방문하는 이들도 종종 보인다.
4, 9일 장날이 되면 상설시장 앞 도로를 꽉 메우는 천막들이 설치되고 장터가 열린다. 하교한 학생들과 주민들이 뒤섞여 걸으며 장터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싱싱한 해산물과 어묵 구이, 김구이, 양말 판매 트럭 등 상설시장과는 또 다른 활기가 넘친다. 어느 시장이나 그렇듯 그곳에선 목청껏 외쳐가며 가격을 부르는 상인과 간절하게 가격을 깎는 소비자들이 있다, 상인분이 결국 한 줌 더 얹어주며 상황을 무마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가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사람의 정이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맛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또한 계절마다 장터에서 사 먹는 음식도 바뀌게 된다. 봄에는 국화빵과 크림과 사과잼이 발린 와플을, 여름에는 오렌지 맛과 포도 맛을 반반 섞은 슬러시와 컵떡볶이, 가을이면 통통한 핫도그와 오징어 튀김으로 살을 찌우고, 겨울이 되면 갓 화통에서 꺼낸 군고구마를 호호 불어가며 먹는 사시사철 생동감이 넘치는 장터이다.
2017년부터 육성사업으로 나날이 시장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대형마트의 시대에도 전통시장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조선시대의 문산포장에서부터 오늘날까지 긴 역사를 지켜온 문산자유시장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남양주 삼패 한강공원은 주민들이 쉽게 여가 시간을 보내는 공원이다. 삼패 야구장부터 인라인장, 풋살구장, 자전거 공원 등의 운동 시설이 갖춰져 있고 음악 분수와 레고 어린이 정원, 공연장에서 다양하게 문화 활동을 즐길 수 있다. 무료 주차장과 프리 와이파이도 제공하고 있다.
공원 안에서 돗자리를 펴고 앉을 수 있으나 지정된 공간과 시간이 정해져 있어 이를 꼭 지켜야 한다. 애견 동반이 가능해 가족뿐만 아니라 애완견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도 많다. 모두가 함께 이용하는 공간인 만큼 개똥 수거 등의 기본적인 에티켓은 지켜야 한다. 야영이나 취사는 금지된다.
여름, 무더위에 지친 시민들은 종종 삼패 한강 공원에 방문한다. 이유는 ‘음악 분수’와 ‘물놀이 시설’이 공원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음악 분수는 하절기(4월~10월)에만 가동하는데, 주중 1회 주말 1회 운영된다. 음악 소리에 따라 가지각색의 색깔을 띠는 음악 분수는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보면 여름밤의 낭만을 극대화한다. 물놀이장 또한 운영되고 있지만, 공간이 작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이 이용하기에 좋다.
남양주 한강 공원의 가장 큰 명물을 꼽아보라면, 아마 대부분 ‘레고 어린이 정원’이라고 답할 것이다. 레고 어린이 정원은 대형 레고들로 꾸며진 공원으로 멀리서도 눈에 띤다. 어린이 정원이라는 이름답게 어린 아이들에게 익숙한 레고를 배치하여 공원을 조성하였다.
그렇다고 레고 어린이 정원이 꼭 어린 아이들에게만 사용이 국한된 것은 아니다. 10대와 20대들 사이에선 이 공간이 사진 핫 스팟으로 떠오르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더불어 한강 공원에는 레고를 이은 사진 스팟이 있는데, 바로 한강 앞에 있는 꽃밭이다. 이곳에는 수레국화나 금계국, 해바라기 등 여러 꽃들이 계절에 맞게 피고 진다. 멀리 코스모스 축제, 벚꽃 축제를 가지 않아도 삼패 공원에서 다양한 종류의 꽃들을 만나볼 수 있다. 더불어 수레국화를 따라 걷다 보면 자작나무 길이 나와, 자작나무 숲에서 색다른 산책을 즐길 수도 있다.
또한 남양주 삼패 공원에서 운영되는 특별한 행사가 있다. 바로 ‘점프벼룩시장’이다. 점프벼룩시장은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오후 4시까지 열리는 행사로 여러 물품을 판매 및 교환한다. 본인 판매 금액의 10% 이상을 자율 기부 할 수 있다. 또한 각종 문화 공연과 체험 부스가 있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남양주 삼패 한강 공원은 남양주 시민들과 덕소 시민들에게 이제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공원에 가면, 아침과 저녁 할 것 없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시간을 보내며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아침에는 각종 운동 시설과, 자전거 길에서 운동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에는 한강 앞 환하게 펼쳐진 야경을 감상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남양주 삼패 공원을 더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있게 되길 바란다.
현재 고양시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일산신도시의 호수공원 근처나 덕양구에 새로 만들어진 신도시 지역이다. 그렇다면 30년 전 고양시에서 가장 번화했던 지역은 어디였을까? 바로, 원당이다. 일산에서 약 20분, 서울에서는 약 30분 떨어진 지역으로 아직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원당. 원당역 근처 1984년에 세워진 리스쇼핑몰 앞에 원당 시장이 있다.
원당 시장은 1970년대 세워져 다른 재래시장에 비해 역사가 길지 않다. 크기 역시 64개의 점포로 이루어져 있는 작은 시장이다. 원당 시장에선 반찬, 떡, 식재료, 생활용품까지 다양한 물건들을 구매할 수 있다. 작지만 만물상인 이 시장에는 꽃의 도시 고양시답게 향기로운 꽃시장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그 중에서 추천해주고 싶은 상점은 즉석식품과 반찬 코너이다. 여러 반찬가게가 있지만 겹치는 반찬이 하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에 가면 이미 반찬을 샀어도 그 다음 가게에 가서는 또 다른 반찬을 사기 일쑤이다. 이모님께 포장을 부탁하고 기다리면 그 자리에서 만들던 맛깔스러운 반찬을 종이컵에 담아 주신다. 고소한 나물 무침부터 운이 좋으면 윤기 가득한 떡갈비도 맛볼 수 있다. 국내산 재료와 이모님 손맛이 어우러진 반찬은 그 어느 음식점보다 훌륭한 한끼 식사가 되어준다.
명절이 되면 원당시장의 활기가 배가된다. 최근 제사상의 음식들을 직접 하기보다는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원당 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원당 시장의 장점은 원하는만큼 음식을 살 수 있다는 점이다. 전집에서도 원하는 전을 골라 다음 다음, 그 그릇을 저울에 재고 정해진 가격을 내면 된다. 얼마어치를 주인이 담아놓은대로 사올 필요 없이 자신이 원하는만큼만 값을 치러도 된다는 건 매력적이다. 전 뿐만 아니라 떡, 과일 역시 집집마다 무게 당 가격을 매겨 자신이 원하는 만큼 구입알 수 있다.
원당시장의 또 다른 매력이라고 하면, 물건을 직접 눈으로 보고 고르는 재미이다. 시중의 마트나 백화점에서는 랩이나 포장지로 포장이 되어 있어 직접 물건을 보고 고르기 어려웠던 수산물이나 쌀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그것을 직접 담아가거나 만져보고 냄새 맡고 고를 수 있다. 가끔 수산물 코너에서는 싱싱한 전복이나 게를 바닥에 깔아놓은 뒤 "8개에 만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내놓곤 한다. 이때 복작복작한 사람들 틈에서 나만의 수산물을 고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된다.
원당 지역은 일산신도시가 생긴 후 쇠퇴하다가 최근 도시 재생 사업 구역에 포함되었다. 원당 지역의 부활 가능성 기준이 된 것은 다름 아닌 원당 시장이었다. 이처럼 원당 시장은 지역 주민들에게 단순히 경제활동의 장을 넘어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원당 시장이 지역 거점이 된 이유는 365일 쉬지 않고 운영하는 상인들과 이용하는 손님들 덕분이 아닌가 싶다. 바쁜 현대 사회 속에서 정을 느끼기 어렵게 된 요즘, 한 손에는 떡볶이, 다른 한 손에는 반찬을 들고 시장 한바퀴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부락산 푸른자락 펼쳐진 미래~’ 나의 초등학교 교가의 가사 중 일부이다. 평택 시민들에게 부락산이 얼마나 의미 있는 산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부락산은 평택시 북동부의 송탄 지역에서 중요한 산이다. 송탄 어디를 가도 부락산을 볼 수 있다. 지산동, 이충동, 서정동 모두 부락산으로 이어져 있다. 실제로 부락산은 조선 시대부터 진위현과 평택현의 경계 역할을 하는 랜드마크였다. 그래서 부락산보다 더 높은 덕암산은 엣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부락산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있다.
부락산은 송탄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고 모든 지역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지름길로도 많이 이용된다. 일반적인 길보다 험한 산길이지만 훨씬 빠르기 때문에 많은 송탄 사람들이 이용한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부락산에 올랐다. 산을 좋아했던 아버지를 따라 거의 매주 등산을 했다. 2014년에는 환경정화를 목적으로 하는 동네한바퀴 프로그램을 하면서 자주 부락산에 올랐다. 송탄에는 K55라는 큰 미군부대가 있어 항상 외국인들이 많았는데, 외국인들과 쓰레기를 주워 환경정화를 실천하는 동네한바퀴 프로그램도 부락산을 중심으로 다녔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일반적인 등산로만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개발되어 몇 년 전 부락산 둘레길도 생겼다. 처음에 부락산 둘레길이 생겼을 때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둘레길은 제주도나 지리산처럼 유명한 곳에 생기는 건줄 알았지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부락산에 생길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둘레길이 생기고 가보니까 너무 좋았다.
부락산 둘레길은 1구간 시내길, 2구간 숲속길, 3구간 벚꽃길, 4구간 역사탐방로 길로 나누어져 있다. 가장 짧은 1구간은 2.5km이고 제일 긴 4구간 역사탐방로는 9.7km나 된다. 부락산 둘레길을 걸으면 송탄의 다양한 장소들을 만날 수 있다. 각 구간의 테마에 맞는 장소들을 갈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다. 1구간은 시내를 중심으로 가볍게 산책할 수 있으며, 2구간은 부락산의 정기를 맘껏 느낄 수 있다. 3구간은 4월 벚꽃 개화시기에 맞춘다면 송탄의 벚꽃 스팟은 모조리 갈 수 있다. 4구간 역사탐방로 길은 이름답게 충의각, 최유림장군묘 등의 역사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중간에 있는 정자들은 둘레길 산책을 더욱 여유롭고 신나게 만든다.
최근에는 지산동에 부락산 산림체험장과 문화공원이 새로 만들어져 다양한 테마의 산책로와 특별한 하늘숲길을 만날 수 있다. 하늘숲길은 말그대로 하늘 위에 만든 산책로로 꽤나 높은 위치에 있다. 안전상의 문제로 밤에는 하지 않으며 오전 9시부터 올라갈 수 있다. 바로 옆에 큰 나무들이 있고 아래를 보면 두려우면서도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산림 체험장은 미리 예약만 한다면 저렴한 가격으로 산림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 코스에 따라 4,000원-6,000원의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 평택시민은 1,000원 더 저렴하다. 여러 가지 장애물을 피해서 코스를 통과하는 기분은 정말 짜릿하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부락산. 20년 전에는 단순히 산책로 기능 밖에 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많은 것들이 개발되면서 평택시민들을 위한 문화, 생활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아직도 문화공원 등을 구성하고 있다고 하니, 더 발전하고 성장할 부락산이 기대된다.
오산시 세마역 근처에는 조그마하지만 특별한 절 보적사가 있다.
보적사는 작은 절로, 창건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백제시대에 독산성이 만들어질 때 같이 창건되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보적사가 아니었으나 1920년 현재의 대웅전을 지으면서 이름을 보적사로 바꾸었다. 보적사는 1978년 세마사로 이름을 변경했다가 1996년 다시 보적사로 바뀌었다. 현재에도 비공식적으로 세마사로 불리는 경우가 있다.
보적사의 이름에 대한 전설이 있다. 먹을 것이 없었던 노부부가 유일한 쌀을 부처님께 공양하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니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보적사라고 한다.
세마역을 따라 오다 보면 독산성 삼림욕장이라고 적혀있는 큰 산문을 만날 수 있다. 거대한 산문을 지나 푸르른 자연을 느끼며 1.4km를 올라가면 동문을 마주한다. 뭔가 비밀스러운 입구 같은 동문을 지나면 아름다운 꽃들이 우리를 반겨 다른 세상에 들어온 느낌을 받으며 조그마한 절 보적사를 만날 수 있다.
보적사는 아담하지만 여유로움과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는 절이다. 보적사 석탑 위에 올려져 있는 아기자기한 불상들을 관찰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개인적으로 보적사에서 가장 기분 좋은 곳은 대웅전 앞 미륵존불(천진포대화상)과 천진동자불복손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양한 절을 가봤지만 보적사의 불상만큼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불상을 보지 못 했다.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웃음을 짓고 있는 천진포대화상의 귀여운 배를 만지며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나도 천진포대화상의 배를 만지며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소원을 빌었다.
천진포대화상의 바로 옆에 있는 천진동자불복손도 인자한 웃음을 지으면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천진동사불복손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불상의 손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어떤 소원이든 이뤄줄 것 같은 불상의 행복한 표정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소원을 빌었다.
불상 외에도 절의 이곳저곳을 보면서 절의 고요한 분위기를 물씬 즐겼다. 규모가 크지 않아 특별하게 볼 것은 없었지만 풍경소리, 아름다운 전망, 인자한 미소를 지닌 불상들이 주는 편안한 분위기가 좋은 곳이다.
보적사에서는 특별한 손님인 고양이들도 구경할 수 있다. 보적사에 밥을 얻어 먹으러 오는 2-3마리의 고양이는 친절하지는 않지만 귀엽고 사랑스럽다. 운이 좋다면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도 볼 수 있으며, 물을 마시는 고양이의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
보적사를 충분히 즐기고 나오면 탁 트인 전망을 볼 수 있다. 높은 건물들이 즐비한 동탄 일대의 전망을 모두 볼 수 있다. 같이 간 사람들과 함께 유명한 건물을 찾아보고, 도란도란 옛 오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날씨가 좋은 날은 아주 멀리까지 시야가 확보된다. 하늘이 뻥 뚫린 전망 좋은 곳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 모든 근심걱정이 씻겨나가는 느낌이다. 추운 겨울이 지나 봄이 온다면 다시 방문하고 싶은 곳이다.
2012년마다 벚꽃철이면 방방곡곡에 울려퍼지는 노래 ‘벚꽃엔딩’의 가사에 가장 걸맞은 곳 중 하나로 평택시 이충동에 있는 은혜로가 있다. 은혜로는 이충동 레포츠 공원에서 국제대학과 은혜고등학교로 가는 길의 비공식적 명칭이다. 공식명칭이 아닌 비공식적 명칭이긴 하나 평택시민들은 모두 이 길을 은혜로라 부른다. 은혜로는 평택시의 봄나들이 명소로 유명하다. 은혜로가 유명한 이유는 그 길 전체의 가로수가 모두 벚꽃이기 때문이다. 풍성한 벚꽃 아래에서 연인, 가족, 친구와 함께 걷는 길은 너무 환상적이라 4월만 되면 평택시민들은 은혜로의 벚꽃이 언제 피나 두근거리며 기다린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해서 다른 곳보다 벚꽃이 조금 늦게 피는 것도 시민들을 애타게 만드는 점 중 하나이다. 은혜로의 벚꽃은 평균적으로 일반 벚꽃 개회시기보다 일주일 정도 늦게 개화한다.
날씨가 화창한 날 낮, 맑게 핀 벚꽃 속 은혜로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가족끼리 나들이를 오는 사람, 연인끼리 온 사람, 친구들과 함께 온 사람 등 다양한 이유로 은혜로를 방문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아는 사람들도 마주칠 수 있다. 우연히 만나는 지인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이다.
은혜로는 걷는 것도 좋지만 차를 타고 드라이브하면서 볼 때도 색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차 안에서 보는 은혜로는 마치 벚꽃 터널 같은 느낌이다. 짧은 시간만 즐길 수 있는 곳이라 그런지 마법의 숲을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은혜로와 더불어 국제대학도 새로운 벚꽃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국제대학은 은혜로 바로 옆에 있는 전문대로 규모가 크지 않지만 깔끔하고 잘 정돈되어 있으며 은혜로와 다른 분위기의 작은 벚꽃들을 볼 수 있다.
국제대학의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벚꽃들과 함께 사진을 찍다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벚꽃개화 시기에 맞춰 인근의 이충레포츠 공원과 이충분수공원에서 다양한 행사를 하니 은혜로와 국제대학의 벚꽃을 구경한 뒤, 이충레포츠 공원과 분수공원을 산책하는 것도 좋다.
밤의 은혜로는 낮의 북적였던 은혜로와 다르게 고요함으로 가득 차 있다. 가볍게 산책을 나온 몇몇 사람들만 볼 수 있으며 아주 늦은 밤에 가면 아무도 없는 고요한 은혜로를 만날 수 있다. 밤에 보는 은혜로의 벚꽃은 낮과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노란 가로등 빛을 받은 하얀 벚꽃들이 뿜어내는 분위기는 마음을 평화롭게 만든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항상 소중하지만, 더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고 싶다면 은혜로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환상적인 벚꽃 아래에서의 추억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더 오래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 추억의 5할 정도는 이충분수공원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 학교에서 분수공원은 10분 거리에 있었고, 친한 친구의 집이 공원 바로 앞에 있었다. 그래서 야간 자습 시간이 끝난 뒤, 심심하면 분수공원에 갔다. 불 켜진 아름다운 분수공원에서 친구와 진솔한 고민을 나눈 적도 있고, 남지친구와 손잡고 걸은 적도 있다. 지친 날에는 우리만의 자리에 돗자리를 깔고 노래를 틀며 치킨을 먹었다. 가만히 누워서 공원의 풍경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 공원에는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나온 사람, 데이트하러 온 사람, 운동하러 온 사람, 아이와 함께 온 가족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도 분수공원에 얽혀있는 다채로운 추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충분수공원은 분수공원이라는 이름답게 매해 4~9월에 매일 2번 분수를 가동한다. 어렸을 때는 왜 그렇게 분수에 들어가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옷이 다 젖어도, 사람들이 많아도, 시끄러워도 그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물을 맞으면 더운 여름이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들어가지 못 할 때에는 가만히 움직이는 분수를 봤다. 시원한 분수를 보고 함께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면 모든 걱정이 씻겨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을 즐기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분수공원에서는 다양한 행사도 진행했다. 정기적인 행사만 해도 여러 개이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매년 8월에 개최하는 평택 전국밴드경연대회다. 이 행사는 이틀 간 열리는 아마추어 락 밴드대회로 매해 경연이 끝난 뒤 유명한 초대가수가 나와 노래를 불렀다. 고등학교 때는 행사 라인업이 뜨는 순간부터 두근두근했다. 페스티벌 당일 날에는 송탄에 그렇게 사람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사람들 사이에 어떻게든 비집고 서서 보는 공연은 멋있었고 정말 신났다. 나는 2015년 공연이 다 끝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뼈해장국을 먹으러 갔다. 너무 웃기게도 그 가게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맨날 먹던 뼈해장국인데도 맛있었다. 아직도 나는 그 뼈해장국 맛을 잊지 못한다.
그 외에도 공원에서는 매월 셋째 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4시까지 알뜰나눔장터가 열린다. 만약 물건을 판다면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일찍 가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늦게 가면 맨 구석쪽에 자리를 잡을 수 밖에 없다. 알뜰나눔장터라는 이름처럼 많은 사람들이 중고물품을 판매한다. 그 속에서 가끔 보석 같은 물건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알뜰나눔장터이지만 중고 물품만 판매하지는 않는다. 평택시의 작가가 운영하는 다양한 공예 체험도 할 수 있으며, 공예 물품을 구입할 수도 있다. 이외에도 행사 날에 맞춰 오는 솜사탕, 닭꼬치, 바이킹 등의 트럭은 알뜰장터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송탄에는 유명한 음식집이 생각보다 많다. 송탄 부대찌개로 유명한 김네집, 최네집 등이 있으며 방송 프로그램에서 몇 번 언급된 미스리 햄버거도 있다. 그 외에도 백종원이 방문해 유명해진 분식집도 있다. 그러나 송탄 토박이로서 송탄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음식집 중 하나는 지성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성원은 평택시 지산동에 위치한 중국음식점으로 영업시간은 오전 10:30~20:50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무이다.
지성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13년이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배가 고팠는데 돈이 별로 없었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도 있었지만 그날따라 분식집에 가기 싫었고, 그러던 중 친구가 알바하는 지성원이 생각났다. 꽤 거리가 멀었지만 열심히 걸어서 지성원에 갔다. 당시 짜장면의 가격이 2,500원이었다. 가난하고 매일 먹어도 배고팠던 고등학교 시절 혜성같이 등장한 지성원은 혁명 같은 곳이었다. 가격도 저렴한데 맛도 있고 양도 많았다. 짜장면의 양은 항상 배고픈 고등학생의 배를 채우고도 남았다. 거기다가 갓 나온 따끈따끈한 탕수육은 얼마나 맛있는지! 저렴하다고 하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탕수육 가격이 비쌌는데 갈 때 마다 친구들과 돈을 모아 사먹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가격이 조금 올라 짜장면 3,000원, 탕수육 9,000원, 짬뽕 4,000원이다. 여전히 저렴한 가격을 자랑하고 있다. 볶음밥 등 밥류는 5,000원에서 시작하며, 요리도 대부분 2만원 내외로 먹을 수 있다. 다른 요리 메뉴도 다른 중국음식 전문점에 비하면 저렴하다. 여러 명이 가면 다양한 메뉴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 때문인지 지성원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혼자 간단하게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 가족끼리 먹으러 온 사람, 포장을 하러 온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한다. 배달을 하지 않아 방문해서 먹어야 하고, 매장이 넓지 않아 가게에 사람이 항상 가득해서 그런지 활기가 넘친다.
많은 평택시민들이 방문하는 지성원에서는 가끔 아는 사람을 마주치기도 한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과 음식점에서 마주치는 것은 뭔가 두근거리고 신기한 기분이다. 지성원이 평택시민들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짜장면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음식이다. 또 특별한 때에 먹는 음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지성원에 얽힌 추억 하나 없는 송탄시민은 없을 것이다. 혹시 오랜 시간동안 평택시민들의 허기를 책임지고 있는 지성원을 모르는 평택시민이 있다면 싸고 저렴한 가격에 맛도 있고 활기찬 기운이 넘치는 지성원에 꼭 방문하기를 바란다.
수원역에서 남쪽방향으로 조금 걷다보면, 두 개의 급수탑이 보인다. 과거에는 담장에 가려져있었지만, 몇 년 사이에 옛 수인선 철도 자리에 산책로를 조성하여 시민들에게 급수탑을 공개하였다. 특히, 급수탑 주변에 산책길을 조성하여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급수탑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급수탑(Water Tower)이란, 물을 공급하기 위해 탑 모양으로 물탱크를 설치한 구조물로, 당시 증기기관차에 물을 급수하였던 시설물을 말한다. 당시 증기기관차는 몇 개의 정류장을 경유하면, 기관차에 급수를 해야만 했다. 급수는 주로 10 여분 정도가 소요됐는데, 따라서 급수탑 주변에는 주로 물을 쉽게 공급할 수 있는 연못이나 저수지가 필요했다고 한다.
수원은 물의 근원이라 이름에 알맞게, 주변에 수원천이 존재하였을 뿐 아니라, 주요 간선의 중심에 있었다. 그래서 증기기관차의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을 설치하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수원역 남쪽에 총 두 개의 급수탑이 만들어졌는데, 벽도조 급수탑과 콘크리트조 급수탑이다. 이들은 협궤열차의 물 공급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특히 수원과 인천을 잇던 수인선의 중요한 물 공급책으로 활용되었다.
수원역 급수탑의 역사적인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수인선이라는 협궤 철도선에 대한 부가적인 내용을 조금 더 알 필요가 있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1937년부터 1995년까지 약 60여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운행이 되었다. 당시, 일반 열차의 1,435mm 철로보다 좁은 762mm 레일 넓이 위에서 달렸던 협궤열차는 마주 보면 무릎이 닿아서 꼬마열차라고도 불릴 정도로 작았다고 한다. 수인선은 인천광역시 송도와 수원을 잇는 협궤 철도선으로 총길이 57km, 일제강점기에는 수여선을 인천항까지 연결하는 중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이후 물량확대와 교통의 편리성 요구가 증대되자, 승객과 화물이 줄어들어 이용 빈도가 크게 감소하였다. 결국 수인선은 1973년 11월 종착역이던 남인천역이 폐쇄되고 1977년 화물수송이 중단되었으며, 1995년에는 여객운송을 중단하고 폐선하게 되었다고 한다.
급수탑은 이러한 증기기관차의 운행에 발 맞춰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지어졌으며, 1967년 8월 31일, 운행을 끝으로 급수탑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한국에서는 증기기관차를 일반 여객용으로 운행하지 않고 있어, 많은 역의 급수탑이 철거된 상태이다. 따라서 전국에 남은 급수탑은 약 20 여개 정도가 전부이다. 남아있는 급수탑 중 일부는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가 되었는데, 경부선과 수원역을 연결했던 수원역의 급수탑 역시 그 중 하나로, 현재 준철도 기념물 제 15,16호로 한국철도 공사 지정 철도문화재로 등록보존되고 있다.
이 두 개의 급수탑들은 두 개의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데, 하나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표준궤용 급수탑의 모양을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벽돌로 만들어진 급수탑으로 콘크리트 급수탑보다 크기는 작지만, 상층부가 더 넓고 크며 붉은색을 띄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붉은 급수탑은 실제로도 매우 드문 경우인데, 작고 아담한 크기이지만 상층부의 커다랗고 웅장한 모습은 당시 수인선의 급수를 담당하던 위용을 보여주는 듯하였다. 반면, 콘크리트 급수탑은 크기는 크지만, 세월에 벗겨진 콘크리트와 녹이 슨 철제 사다리의 모습을 하고 있어 더욱 고독하고 쓸쓸하게 보였다.
급수탑은 주로 원통형 평면을 지니고 있으며 상부와 하부로 나누어져 하부에는 석탄 등을 이용하여 물을 끓이기 위한 엔진과 상부의 물탱크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펌프로 설치가 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는 전기로만 움직이는 KTX 또는 전철이 보편화되고 일반적이라서, 과거에는 석탄과 물을 통해 열차를 움직였다는 것이 새삼 놀랍고 신기하였다.
이렇게 우리의 근대 철도 역사에서 그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가 있는 급수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또 희미한 추억으로 사라지고 있다. 수원역의 급수탑도 최근에서야 산책길로 조성이 되어 시민들에게 공개되었으나, 급수탑에 대한 설명이나 내용이 턱없이 부족하고 이야기의 전달력이 약하다는 한계점을 가진다.
교통의 중심지에서 수인선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수원역 급수탑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안전상의 보수를 확실히 하여 콘크리트 급수탑 위에서 바라보는 수원역의 전경이라던가, 아니면 수원의 철도 역사를 활용한 지역 문화콘텐츠의 활용이 필요하다. 관광상품 개발 등 적극적으로 지역문화원과 시민들이 힘을 합쳐 근대의 소중한 철도 역사를 간직한 문화재를 보존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한국인은 밥 힘이다.’라는 말을 우린 종종하곤 한다. 이 말은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밥을 주식으로 먹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등장하는 밥, 쌀의 기원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고양 가와지 볍씨 박물관이다. 원흥역 4번 출구로 나와 걷다보면 신도시의 높은 아파트들 사이로 낮은 건물이 눈에 띈다. 고양시 농업 기술 센터 옆에 위치한 건물이 바로 고양 가와지 볍씨 박물관이다.
고양 가와지 유적실, 선사시대 농경생활, 조선/근대 농경문화 총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있다.
첫 번째 전시실인 ‘고양 가와지 유적실’에는 5020년 전 신석기인들이 재배한 볍씨와 함께 우리나라 농업의 기원이 소개되어있다. 전시되어 있는 가와지 볍씨는 1991년 일산 신도시 개발 때 발견되었다. 현재 주소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 2199-1 일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출토 당시 이 마을의 이름이 고양군 송포면 대하4리 가와지마을이었기 때문에 가와지 볍씨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볍씨와 함께 가와지마을의 발굴현장이 재현되어 있어 당시를 실감나게 느껴볼 수 있다. 볍씨가 출토된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이 가와지 볍씨 몇톨을 통해 한반도 농경 문화의 시작이 청동기 시대가 아니라 신석기 시대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한반도 농경문화의 기원이 고양시와 한강 문화권이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두 번째 전시실인 ‘선사시대 농경생활’에서 선사시대 당시의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다.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부터 철기시대의 농경 도구까지 다양하게 전시되어 당시 농경생활뿐만 아니라 의식주를 엿볼 수 있다. 수업시간에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유물들을 직접 보고 있자면 신기하다. 이 모든 유물이 고양시에서 출토되었다니 현재 그곳에 사는 주민들에겐 새로움을 더해준다.
세 번째 전시실인 ‘조선/근대 농경문화’에서는 우리나라 최근의 농경문화를 볼 수 있다. 멀지 않은 과거인지라 전시되어있는 물건의 대부분이 고양시민들이 기증한 것이다. 시간이 흘러 우리만의 고유한 농경 생활이 어떻게 확립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볼 수 있었던 유물들도 있어 친근하게도 느껴진다. 이따금, 조부모님과 함께 온 아이들이 조부모님에게 설명을 듣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 전시실에서는 무형문화재도 만나볼 수 있다. 현재 경기도 시도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된 송포 호미걸이의 한 장면을 재현해놓았다. 농업을 그저 일거리로 생각하지 않고 흥으로 승화시킨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보며 농사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전시를 다 둘러보고 나오면 아이들을 위한 체험존이 있다. 이 체험존에서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명이 제공되어있다. 또한 아이들이 직접 전시된 유물들의 용도를 체험해보며 전시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코너가 있다. 이 체험존을 나오면 포토 스팟이 마련되어 있다. 마당에 선사시대의 움집과 혼천의, 수표와 같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규모가 크지 않아 주말에 잠깐 가족과 시간을 내어 둘러보면 좋을 것 같다.
수원 깡우동은 수원 영통구 먹자골목의 한 골목에 있다. 지금은 체인점도 몇군데 있지만 이곳이 본점이다. 학창시절,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먹자골목 근처의 학원에 곧장 가곤 했는데, 생각해보면 항상 터줏대감처럼 그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빠르게 바뀌는 다른 가게들과는 달리, 살짝 낡은 외관과 촌스러운 간판을 가지고 늘 그 곳에 서 있는 깡우동.
학원이 끝나고 나오는 10시쯤에는 얼굴이 빨간 어른들이 가게 앞에서 아이처럼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친구들과 항상 “우리 나중에 어른이 되면 저기서 술 먹자”며 우정을 다짐하곤 했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그 해 겨울, 친구들과 함께 모여 그곳에서 우동 한 그릇에 소주 한 잔을 마시며 각자의 미래를 그렸다. 아이러니 하게도 깡우동은 갓 스무 살이 되는 아이들이 포부를 얘기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냄새가 가득했던 그런 곳이었다. 오히려 40대쯤 되는 아저씨들이 퇴근 후에 우동과 소주 한잔을 즐기며 과거를 돌아보기 좋았던 곳이라 하는 것이 맞겠다. 그럼에도 깡우동에서 술을 먹던 빨간 얼굴의 어른들을 보고 자란 우리는, 마치 그 곳에서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곤 했었다.
이 오래된 가게에는 메뉴가 4개뿐이다. 7000원 짜리 우동과 어묵, 8000원 짜리 어묵우동, 그리고 가장 비싼 18000원 짜리 어묵탕이 전부이다. 사실 이 가격을 들으면 ‘어? 우동치고는 조금 비싼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6000원, 그리고 더 이전에는 5000원이면 우동을 먹을 수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가격도 같이 올라 우동치고는 조금 비싼 가격이 되었다. 하지만 뜨끈한 우동 국물을 한 입 마시는 순간 가격에 대한 생각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우동과 어묵은 순한맛, 중간맛, 매운맛을 선택할 수 있는데 양념장으로 매운맛을 조절 해주시기 때문에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은 순한맛으로 주문한 뒤에 양념을 추가하는 것도 깡우동을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깡우동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국물이다. 깡우동만의 양념장, 쑥갓, 유부, 파 등이 들어간 이 국물은 추운 겨울에는 단단히 얼어버린 몸을 녹여주고, 더운 여름에는 더위로 지친 몸에 활력을 주며 이열치열이 무슨 의미였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국물은 술을 마시고 있지만 해장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게 만들기 때문에 사실 술안주로 최고다. 양념장이 들어가지만 짜지 않고 속이 뻥 뚫리는 이 국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이곳을 찾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깡우동의 면은 다른 우동집보다 얇고 쫄깃한 편인데 우동국물을 가득 머금은 유부와 면을 함께 먹으면 입 안이 우동향으로 가득해진다. 그리고 어떤 메뉴를 시켜도 항상 그 위에 쑥갓이 듬뿍 올라가 있어 향이 일품이다. 반찬은 단무지밖에 없지만 깡우동과 단무지의 조합을 먹고 있으면 다른 반찬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 오래된 가게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인테리어다. 깡우동 내부의 벽은 노랗게 바랜 신문지로 덮여 있는데, 오래된 가게임을 증명하듯이 그때 그 시절하면 떠오르는 사건들부터‘인력구함’처럼 소소한 기사들까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가득하다. 우동 한 그릇에 우리 사회를 다시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물론, 늘 함께 간 사람들과의 대화에 집중하며 우동을 먹느라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신문은 그냥 벽지처럼 느껴지긴 한다.
신문지로 가득한 벽에 둘러싸여 동그란 스텐 식탁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친구, 가족, 애인과 특별할 것 없는 얘기를 하며 우동 한 그릇, 소주 한 잔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집의 가장 큰 매력이며 10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삼송역에서 나와 쇼핑몰을 지나쳐 산책하다보면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운동하시는 게이트볼장이 나온다. 그 곳 뒤를 살펴보면 머리없이 우두커니 서있는 석상이 있다. 차도 근처에 있어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석상의 이름은 ‘밥할머니 석상’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한 시대에 누군가에게 밥을 해주던 할머니이다. 과연 누구에게 어떻게 밥을 해주었길래 석상이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왜 현재 머리가 없는 채로 서 있을까?
‘밥할머니 석상’의 연원을 알기 위해서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밥할머니는 임진왜란 당시 고양시에 살고 있던 문옥형이라는 선비의 아내다. 그녀는 명문거족 출신이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파죽지세로 남쪽부터 조선을 침략하기 시작한 왜군들은 순식간에 고양시에 다다른다. 스스로 목숨을 지켜야했던 고양시의 백성들은 삼각산 노적봉 근처에 거적을 쌓고 새끼줄로 둘러쌌다. 멀리서 보기엔 쌀가마니가 쌓여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말이다. 또한 창릉천에는 석회를 풀어 마치 사람들이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어 뿌옇게 된 것처럼 위장하였다. 이것이 다 밥할머니의 머리에서 나온 지혜였다.
곧 왜군은 현재 원흥지역에 있는 창릉천까지 쳐들어왔다. 왜군들이 물을 살펴보고 물이 뿌옇게 된 이유를 물으니 사람들은 쌀뜨물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안심한 왜군들은 물을 마셨으나 곧바로 배탈이 나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게다가 멀리 바라보니 백성들이 쌓아둔 거적이 군량미를 비축해둔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 전력을 다할 수 없다고 판단한 왜군은 퇴각하였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밥할머니는 권율장군의 행주대첩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조선 병력이 모자랄 것 같자 49세라는 나이에 활쏘기를 배우고 여자들을 모아 맞서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운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 던지고 솥에 물을 끓여 부은 일화의 주인공이 바로 밥할머니와 여성들인 것이다. 전투에 직접 참가하며 관군들에게 밥을 해주고 끊임없이 구휼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녀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불심이 깊어 ‘보살할머니’라고도 불렸다 한다. 그래서일까? 밥할머니 석상은 약사여래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석상을 당시 한양의 입구인 의주대로에 놓았는데, 일제강점기 밥할머니의 위상과 숨은 역사를 알게된 일본군들이 석상의 목을 쳐 얼굴 부분을 훼손하였다. 이로 인해, 현재는 얼굴 없는 석상이 되어버렸다.
해방 이후에 시민들이 얼굴 부분을 따로 만들었지만, 만들 때마다 동네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겨 현재는 없앴다. 그리고 신도시사업과 길을 내는 과정에서 여러 곳으로 이동하였다가 201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면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여성의병으로 활동하며 나라를 지킨 밥할머니를 잊지 않고자 매년 밥할머니 추향제를 열고 있다. 또한 송덕비를 세워 밥할머니를 향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기록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