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부천의 자유시장은 현재 부천에서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으로 부천역 남부철도를 따라 대규모로 발달된 종합 시장이다. 1947년 문을 열었고, 1970년대 후반까지 부천 유일의 시장이기도 했다. 1980년대까지 큰 호황을 누린 자유시장은 오후 4시가 되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밀려들어 몸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다. 당시 부천주민들 외에 인접한 도시인 김포와 광명, 시흥에서도 고객들이 찾아올 정도로 경기도 내에서도 손꼽히는 시장의 하나였다.
현재도 부천 지하철역과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하고, 500m 넘는 시장길을 따라 채소와 청과, 축산, 수산물 등 싱싱한 식자재는 물론 식당, 의류, 잡화, 생활용품을 파는 점포수가 250개가 넘은 대규모 시장으로 부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편, 해방 이후 자유시장 인근에 함께 개설된 것이 깡시장이다. 자유시장이 소매시장이라면 깡시장은 과일과 채소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도매시장이다. 깡이라는 말은 일본어에서 할인을 의미하는 ‘와리깡’에서 유래한 말이다.
깡시장에서 청과물 경매가 이루어질 때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시장을 꽉 메웠다. 특히 복숭아가 출하되는 여름이면 이 지역은 복숭아 향기로 가득 찼다. 부천을 복사골이라고 부를 정도로 과거 부천의 대표특산물은 복숭아였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에 부천역에서 자유시장 쪽으로 나오면 복숭아를 파는 노점들이 즐비했다.
깡시장은 차츰 규모를 키워서 2006년에는 시장 인정을 받아 ‘부천청과물시장’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하지만 아직도 주민들은 깡시장이라고 부른다. 부천청과물시장은 바깥에서 보면 시장처럼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도매시장의 모습이 드러난다. 자유시장보다 규모는 작지만 거래 규모는 자유시장보다 크다.
1990년대에 후반부터 인근에 대형마트와 백화점이 생기고, 신도시와 소사역 중동역 등으로 교통이 분산되면서 2000년대 들어 자유시장도 다른 전통시장들처럼 장세가 약화되었다.
장세회복을 위해 자유시장은 2009~2012년, 2014~2015년까지 2단계 사업을 통해 아케이드 시설과 간판 정비 등 쾌적한 쇼핑 환경을 조성하였다. 또한 추석, 설 등 명절 행사 뿐 아니라 계절별로 가을축제, 보물찾기, 할로윈 대축제 등을 열어 시장이 단지 물건을 사는 곳을 넘어 지역의 문화 공간이며 즐길거리가 있는 곳이란 인식을 심어 주고 있다. 시장행사들을 여러 SNS로 알리고, 점포 대부분이 대형마트처럼 가격표시제를 시행하고 있어 사람들이 좀 더 편안하게 쇼핑을 하도록 돕고 있다.
이러한 노력 덕에 현재 자유시장은 가족 단위 고객들과 젊은 층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금요일부터 시작되는 주말권에는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특히 많아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하늘이 높아지고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10월 말, 나들이하기 좋은 장소로 수원 화성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정조의 원대한 꿈이 서린 기품 있는 유적지가 관광의 우선순위기는 하지만, 즐거움을 만끽하기에 그것만으로는 다소 부족하다. 모름지기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고, 정신과 육신의 오감이 만족해야 완전히 충족되지 않겠는가.
현지의 생생한 생활감을 느끼기에 수원남문시장 만한 곳이 없다. 수원행궁에서 수원천을 끼고 팔달문 방향으로 5분여 걸어 내려오면 수원남문시장에 다다른다. 수원남문시장은 총 9개의 시장이 모여 있으며 역사가 무려 220년이나 된다. 여느 시장처럼 번듯한 점포부터 노점상까지 북적이지만 잘 정비된 팔달문과 버드나무가 흐드러진 수원천을 끼고 있어 정취가 있다.
재미있는 건, 서울의 시장들이 일반적으로 한두 가지 특화된 품목으로 경쟁력을 갖춘 데 반해, 수원남문시장은 먹거리부터 공구까지 생활상에 필요한 거의 모든 품목을 취급하는 점이다. 9개 시장마다 주요한 품목을 달리 취급해서 수원시민의 생활을 책임진다.
대장간 문화를 간직한 구천동공구상가시장은 기계공구류, 공산품을 판매한다. 패션1번가·시민상가는 패션과 잡화를, 못골종합시장과 미나리광장시장은 농수산물과 각종 식재료를, 영동시장과 팔달문시장은 포목, 의류를 각각 판매한다. 군것질거리도 빼놓을 수 없는데, 팔달문시장은 가마솥에 튀겨내는 통닭으로 이름난 통닭거리에 맞닿아 있다. 지동시장은 특히 순대가 유명하니 꼭 먹어보도록 하자.
이렇게 시장이 번성한 건 애초에 수원이 상업도시로 기획되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화성 건조 시 성내 생활이 가능하도록 인삼과 갓에 대한 독점권을 제시하며 유상(柳商)을 불러들여 시장을 조성하였고, 이후 이 일대는 경기 남부를 대표하는 상권으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여느 전통시장과 같이 수원남문시장도 도시개발로 인한 상권의 이동, 경기침체 등 다양한 이유로 고락을 거듭한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살리고 지역주민과 상생하기 위한 여러 시도가 돋보인다.
2016년 수원화성 일대가 수원화성관광특구로 지정되고, 이어 중소벤처기업부의 글로벌 명품시장 육성사업 지원대상으로 선정된 후 변화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의미 있는 건 시장 상인들의 자체적인 노력이었다.
90년대까지 압구정에 못지 않은 ‘힙한’ 거리였던 남대문로데오시장은 수원역 개발의 영향으로 폐업한 가게가 속출, 우범지대로 전락할 위기였다. 그때부터 남문로데오상인회가 앞장서 지역 예술가와 2012년부터 마을만들기 사업을 진행했다. 아름다운 테마거리를 가꾸는데 이어 수원청소년야외공연장, 남문 로데오 아트홀, 남문 로데오 갤러리를 잇따라 개관하여 예술과 문화의 거리로 거듭나고 있다.
영동시장 내의 ‘28청춘 청년몰’과 팔달문 차없는 거리부터 지동교에 걸친 ‘청년 푸드 트레일러 존’도 빠질 수 없다. 여기서는 젊은 감각을 앞세운 글로벌 퓨전음식과 공예품 등을 판매한다. 푸드 트레일러 존은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운영하며 야시장도 함께 연다.
지자체가 마련한 다양한 무료 문화체험과 공연도 놓치지 말자. 남문시장 고객센터 2층 유상박물관 & 관광상품 체험장에서는 당일 시장에서 5만원 이상 구매한 영수증 소지자와 외국인에게 무료로 24K 금박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일반 체험객은 최소 하루 전 예약 시 이용 가능)
정조가 풍족한 백성의 삶을 그리며 건배사로 사용한 표현인 불취무귀(不醉無歸: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음)의 뜻을 창조적으로 해석한 금박체험은 직접 금박을 입힌 술잔, 캔버스를 가져갈 수 있어 인기가 높다고. 정조가 꿈꾸었던 화성은 백성이 배부르고 평안한 실존적인 세상이었다. 이를 위해 왕이 직접 세운 유일한 시장이 모태가 된 수원남문시장. 온전한 화성을 음미하고 싶다면 방문해 보기를 추천한다.
여주는 경기도에서 두 번째로 큰 전통 5일장이 열리는 곳이다. ‘여주중앙통’, ‘여주제일시장’이라고 불리던 이 5일장은, 2016년 문화관광형 시장육성사업에 선정되면서 한글을 테마로 ‘여주한글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주가 한글을 테마로 내세운 이유는 세종대왕릉이 여주에 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릉이 여주까지 오게 된 이유는 당시 풍수지리를 보던 지관들이 여주를 따라 흐르는 남한강 근처를 천하의 명당으로 꼽았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여주시는 세종대왕하면 바로 연관검색어처럼 떠오르는 한글을 전통시장 활성화의 키워드로 가져왔다.
실제로 기존시장이 ‘여주한글시장’이 되면서 단순히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시장 곳곳에 방문객의 눈길을 끄는 세종대왕상, 한글을 연상시키는 조형물, 한글 표지판들이 설치되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또한 한글시장 내에 있는 생활문화전시관 ‘여주두지’에는 실제 예전 사람들이 사용했던 물건을 전시하고 있어 가족단위 관광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처럼 ‘여주한글시장’은 쇼핑과 관광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만족도 높은 시장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매달 5일과 10일 여주 5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한글시장과 연결된 가판에 나와 더 다양한 농수산물과 잡화들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타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럼 볼거리, 살거리가 풍부한 여주한글시장의 알차게 즐기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여주한글시장은 1~4구역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고, 구역 너머에는 난전이 이어진다. 한글 시장의 1구역은 다양한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여기서 한글시장의 명물 ‘한글빵’을 맛볼 수 있다. 한글빵은 단팥, 고구마, 단호박 등으로 속을 채운 쫀득한 찹쌀빵으로 빵 위에 한글의 자음모음 24개가 한 글자씩 찍혀있다. 한글 24글자를 모두 먹으려면 한두번 방문해서는 안될 것 같다. 이 구역은 야시장이 열리는 날엔 더욱 많은 판매대가 형성된다.
2구역은 ‘여주두지’와 문화 아지트라 불리는 ‘토닥토닥’이 위치하고 있다. 지역사람들 누구나 이용하는 다목적문화공간이기도 하고 타지역 방문객에게 여주를 알리는 곳이기도 하다.
3구역은 여주시장 상인들이 여주쌀과 고구마로 빚은 여주현미초진액, 천연화장품 등 협동조합 상품을 만날 수 있는 구역이다. 다양한 상품을 개발 전시하고 있으며, 바로 구입도 가능하다.
4구역은 세종대왕의 생애와 한글 탄생의 역사를 벽화나 조형물로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인증샷 찍기 매우 좋은 곳이다. 세종대왕과 한글의 역사를 담은 벽화는 4구역뿐 아니라 2, 3구역의 골목에도 곳곳에 숨어있기 때문에 시장골목을 하나하나 들어가 숨은 벽화와 한글 조형물들을 발견하는 것도 여주한글시장을 즐기는 방법 중의 하나다.
파주에는 임진각, 판문점 등의 역사적으로 유명한 장소가 있지만 그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문산자유시장도 있다. 문산자유시장은 지역주민들 사이에서 예로부터 문산시장이라 불려왔다. 2015년에 공식적으로 문산자유시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문산자유시장의 기원은 조선시대 문산포장이다. 문산포는 과거 임진강을 통해 들어온 수많은 선박이 활발히 움직였던 교통의 요지였다. 한양과 밀접한 지리적 특성으로 임진강을 통한 각종 유통이 발달하여 장단과 포천, 개성, 강원도 철원 등지까지 화물을 공급했고 다양한 물자들의 집산지 시장으로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던 물자 요충지 시장이었다.
조선시대로부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아픔까지 함께 겪은 긴 전통의 시장이기도 하다. 이후 5, 10일장으로 명맥을 이어오다 1966년부터 정기시장으로서의 문산장 폐쇄 후 장터 주변에 소매상들이 밀집한 형태로 상설시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렇게 20년이 지나 1989년 정기시장은 4, 9일장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2015년 '문산자유시장'으로 명칭을 변경 후 새로운 전통시장의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문산자유시장은 문화관광형 시장으로서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이 육성사업은 각 시장이 가진 고유의 특성을 찾고 개발시켜나가며 관광과 쇼핑이 상호작용을 이루는 시장을 목표로 한다. 2017년 이 사업에 선정되어 2019년까지 사업을 진행해왔다. 이후 문산시장은 주민만이 아닌 관광객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문산자유시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즐길 수 있다. 실내시장과 상설시장, 그리고 4.9일장이 그것이다.
상설시장은 기존의 전통시장과 달리 빵집, 프랜차이즈 떡볶이, 디저트 카페 등 젊은 층이 좋아하는 가게가 즐비하여 인기몰이 중이다. 물론 문산시장의 세월만큼이나 오래 자리를 지킨 전통 있는 가게들도 많다.
시장의 묘미는 시장을 둘러보다 출출해진 배를 채우는 일이다. 그런 때엔 아무 분식집이나 찾아 들어가도 훌륭한 맛을 볼 수 있다. 현지인의 주관적인 추천이 들어간다면 '수원떡볶이'를 찾아가라 하고 싶다. 할머님 두 분께서 운영하시는 분식집으로 우리의 부모님 세대서부터 함께해온 맛집이다. 분위기 있게 시장 골목 구석에 놓인 야외테이블에서 어묵 국물 한 사발을 들이키는 기쁨이 있는 곳이다. 떡볶이 1인분에 2,000원 가량으로 가성비 또한 좋아 현지 학생들도 많이 찾기도 하고 학창 시절의 기억을 찾아 아이의 손을 잡고 방문하는 이들도 종종 보인다.
4, 9일 장날이 되면 상설시장 앞 도로를 꽉 메우는 천막들이 설치되고 장터가 열린다. 하교한 학생들과 주민들이 뒤섞여 걸으며 장터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싱싱한 해산물과 어묵 구이, 김구이, 양말 판매 트럭 등 상설시장과는 또 다른 활기가 넘친다. 어느 시장이나 그렇듯 그곳에선 목청껏 외쳐가며 가격을 부르는 상인과 간절하게 가격을 깎는 소비자들이 있다, 상인분이 결국 한 줌 더 얹어주며 상황을 무마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가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사람의 정이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맛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또한 계절마다 장터에서 사 먹는 음식도 바뀌게 된다. 봄에는 국화빵과 크림과 사과잼이 발린 와플을, 여름에는 오렌지 맛과 포도 맛을 반반 섞은 슬러시와 컵떡볶이, 가을이면 통통한 핫도그와 오징어 튀김으로 살을 찌우고, 겨울이 되면 갓 화통에서 꺼낸 군고구마를 호호 불어가며 먹는 사시사철 생동감이 넘치는 장터이다.
2017년부터 육성사업으로 나날이 시장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대형마트의 시대에도 전통시장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조선시대의 문산포장에서부터 오늘날까지 긴 역사를 지켜온 문산자유시장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현재 고양시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일산신도시의 호수공원 근처나 덕양구에 새로 만들어진 신도시 지역이다. 그렇다면 30년 전 고양시에서 가장 번화했던 지역은 어디였을까? 바로, 원당이다. 일산에서 약 20분, 서울에서는 약 30분 떨어진 지역으로 아직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원당. 원당역 근처 1984년에 세워진 리스쇼핑몰 앞에 원당 시장이 있다.
원당 시장은 1970년대 세워져 다른 재래시장에 비해 역사가 길지 않다. 크기 역시 64개의 점포로 이루어져 있는 작은 시장이다. 원당 시장에선 반찬, 떡, 식재료, 생활용품까지 다양한 물건들을 구매할 수 있다. 작지만 만물상인 이 시장에는 꽃의 도시 고양시답게 향기로운 꽃시장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그 중에서 추천해주고 싶은 상점은 즉석식품과 반찬 코너이다. 여러 반찬가게가 있지만 겹치는 반찬이 하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에 가면 이미 반찬을 샀어도 그 다음 가게에 가서는 또 다른 반찬을 사기 일쑤이다. 이모님께 포장을 부탁하고 기다리면 그 자리에서 만들던 맛깔스러운 반찬을 종이컵에 담아 주신다. 고소한 나물 무침부터 운이 좋으면 윤기 가득한 떡갈비도 맛볼 수 있다. 국내산 재료와 이모님 손맛이 어우러진 반찬은 그 어느 음식점보다 훌륭한 한끼 식사가 되어준다.
명절이 되면 원당시장의 활기가 배가된다. 최근 제사상의 음식들을 직접 하기보다는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원당 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원당 시장의 장점은 원하는만큼 음식을 살 수 있다는 점이다. 전집에서도 원하는 전을 골라 다음 다음, 그 그릇을 저울에 재고 정해진 가격을 내면 된다. 얼마어치를 주인이 담아놓은대로 사올 필요 없이 자신이 원하는만큼만 값을 치러도 된다는 건 매력적이다. 전 뿐만 아니라 떡, 과일 역시 집집마다 무게 당 가격을 매겨 자신이 원하는 만큼 구입알 수 있다.
원당시장의 또 다른 매력이라고 하면, 물건을 직접 눈으로 보고 고르는 재미이다. 시중의 마트나 백화점에서는 랩이나 포장지로 포장이 되어 있어 직접 물건을 보고 고르기 어려웠던 수산물이나 쌀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그것을 직접 담아가거나 만져보고 냄새 맡고 고를 수 있다. 가끔 수산물 코너에서는 싱싱한 전복이나 게를 바닥에 깔아놓은 뒤 "8개에 만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내놓곤 한다. 이때 복작복작한 사람들 틈에서 나만의 수산물을 고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된다.
원당 지역은 일산신도시가 생긴 후 쇠퇴하다가 최근 도시 재생 사업 구역에 포함되었다. 원당 지역의 부활 가능성 기준이 된 것은 다름 아닌 원당 시장이었다. 이처럼 원당 시장은 지역 주민들에게 단순히 경제활동의 장을 넘어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원당 시장이 지역 거점이 된 이유는 365일 쉬지 않고 운영하는 상인들과 이용하는 손님들 덕분이 아닌가 싶다. 바쁜 현대 사회 속에서 정을 느끼기 어렵게 된 요즘, 한 손에는 떡볶이, 다른 한 손에는 반찬을 들고 시장 한바퀴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육거리종합시장은 명칭 그대로, 여섯 갈래의 길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자연 발생적 시장이다. 무심천변에 우시장이 있었고, 농산물과 땔나무 장사가 있었으며, 국밥집, 대장간이 있었는데 이것이 육거리시장의 시초라고 한다. 조선 후기 청주 읍성 남문 밖에서 음력 2일과 7일에 ‘청주 장날’이 열렸다고 한다. 한강 이남에서 열린 3대 시장 중의 하나였는데,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1980년대 이후이다.
육거리종합시장은 현재까지도 청주의 대표적인 전통시장으로 전국 5대 재래시장에 꼽힌다. 기와지붕과 청사초롱을 달아놓은 입구에서부터 우리나라 전통시장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 전체 규모는 99,000㎡로, 축구 경기장 15개에 맞먹는 크기이며, 입점해 있는 점포수는 약 1,200개, 종사자 수는 3,300여 명. 하루 10,000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으며, 연 매출액도 3,000억이 넘는다고 한다.
육거리종합시장에는 “여기서 돈을 못 벌면 어떤 곳에서도 돈을 벌 수 없다.”는 말이 전해진다고 한다. 그만큼 장사가 잘 되는 곳이다. 청주가 고향인 이희숙 씨(66세)의 말에 의하면 “대형마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시장에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집안에 큰 행사가 있거나 구하기 힘든 물건이 있으면, 육거리시장에 가면 다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육거리종합시장의 심볼은 ‘남석교’를 상징한다. 6가지 색깔로 나누어진 돌다리는 각각 붉은색은 정육, 노랑색은 가공식품, 주황색은 청과, 초록색은 농산물, 보라색은 공산품, 파란색은 수산물을 상징한다. 남석교는 고려 말쯤 만들어진 80m가량의 국내 최장 길이의 돌다리로, 1936년 시장 바닥에 묻혔다. 시장 근처의 무심천이 범람할 때마다 피해를 보았고, 일제강점기 때, 주변 지역이 매립되면서 남석교도 서서히 묻힌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해마다 시장에서는 대보름을 맞아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남석교 답교놀이’축제를 열기도 한다.
이곳은 여섯 갈래의 길이 만나는 중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12개의 시장이 합쳐진 곳이다. 농기구 거리, 농축수산물 거리, 산나물 채소 거리, 방앗간 거리, 약제 거리, 닭 전 거리, 혼수 거리, 한마음 패션 거리, 먹자 거리, 꽃다리, 도깨비시장이 그 12개의 시장으로, 전통시장의 현대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시장으로도 꼽힌다.
12곳의 품목에 따라 구획이 나누어져 있다. 2002년에는 전국 최초로 시장 전 구간에 10m 높이의 아케이드(반원형의 천장)를 설치했고, 2003년에는 전국 최초로 시장 상품권 이용을 시작하기도 했다.
‘일일테마가 있는 거리’사업으로 시장 주변에 간판을 개선하고 깨끗한 가로환경을 가꾼 결과, 2016년 국토경관디자인대전에서 국토교통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육거리종합시장의 특이점 중 하나는 새벽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명 ‘도깨비시장’. 옛날에는 잠깐 시장이 섰다가 도깨비불처럼 사라진다 하여 도깨비시장이라 불렀으며, 현재에는 새벽시장이라 불린다.
상가 점포 60여 개, 노점 상인 300여 명, 조사자 수 600여 명이 함께하는 일터로, 오전 5시부터 8시까지 3시간 동안 열리는데, 농민들이 직접 생산하고 수확한 신선한 농산물들을 직접 거래할 수 있다.
주차는 청주시에서 운영하는 공영주차장에 할 수 있다. 주차공간도 꽤 여유로운 편이고, 요금은 30분 500원, 1시간 1000원 선이다. 장애인 차량이나 경차인 경우는 50% 할인이 적용된다. 연중무휴로 9시~22시(점포별 상이)까지 영업하며, 무료와이파이와 카드거래 또한 가능하다.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별명을 가진 곳이 있다. 1970~1980년대 추억의 풍경이 보고 싶다면 이곳을 추천한다. 인천 강화도의 교동도이다. 강화도의 교동도? 그렇다. 이곳은 섬 안에 있는 섬이다. 강화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15분을 가면 교동도 월선포 선착장이다. 섬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 교동도의 들녘은 가을이면 황금벌판으로 장관을 이룬다. 교동도는 섬이지만 주민들이 쌀 맛있다고 자랑하는 넓은 들판이 있다. 대부분의 주민은 농사를 짓고 고기잡이 하는 분이 더 적다. 바다를 막아 만든 인공저수지가 섬 양쪽에 있다. 간척으로 얻은 땅에 주민은 적으니 가구당 경작 면적도 전국에서 손꼽히게 넓은 편이다.
지난 2014년 교동대교가 연결돼 이제는 육지이지만 다리가 개통되기 전까지 이곳은 사람들이 잘 찾아가지 못하는 지역이었다. 망원경 없이도 북한의 연백평야를 볼 수 있을 만큼 북한과 가까워서 출입도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그 탓에 오랜 세월동안 진짜 섬처럼 외부와 단절을 겪었고, 옛 모습을 오랫동안 간직한 지역이 됐다.
조선시대의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로 유명했다. 이곳을 다녀간 왕족을 손으로 꼽자면 양손가락을 다 써야할 정도다. 광해군, 연산군을 비롯해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도 이곳에 유배했었고, 선조의 첫째 서자인 임해군과 인조의 동생인 능창대군 이곳에 머물렀다. 또 인조의 다섯째 아들인 숭선군과 철종의 사촌 익평군까지 시대별로 유명인들의 유배지였다.
그런데 교동도에는 역사의 흔적보다도 대룡시장 골목이 더 유명하다. 마치 1960년대 영화세트장을 꾸려놓은 것처럼 시장에 들어선 순간 과거가 펼쳐진다. 대룡시장은 월선포 선착장에서 가깝다. 큰길을 따라서 약 5킬로미터 쯤 가면 된다. 한국전쟁 때 황해도 연백군에 살던 주민들이 교동으로 잠시 피난 나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해 살았다. 고향을 바로 앞에 두고도 찾아가지 못하는 마음을 달래며, 살아생전 돌아갈 날을 꿈꾸며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다 도시로 나가도 연세 드신 분들은 이곳을 지키는 이유는 바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교동도 북단 율두산에 있는 망배단은 이런 실향민들이 명절 때 모여 차례를 지내는 곳이다. 그래서 교동도는 실향민의 섬이라고도 불렸다. 고향의 연백시장을 그리워한 실향민들은 그곳을 그대로 재현해 300m 정도의 골목에 대룡시장을 꾸렸다. 시장은 10분이면 다 둘러볼 정도로 짧고 성인 남자 둘이 나란이 가려면 어깨를 겹쳐야 하는 좁은 골목이이다. 하지만 이발소나 미장원, 분식점과 통닭집, 신발가게에 약방, 시계점, 전파사까지 있을 건 다 있다.
차가 다니기 힘든 골목에 키 낮은 가게가 있고 손 글씨로 쓰인 촌스런 이름의 간판이 얹어져 있다. 선팅이 벗겨진 유리문에 몇 번 덧칠된 가게 이름이 이 시장의 분위기를 대변한다. 보통 생각하는 시골의 전통시장하고도 분위기가 다르다. 약국이 아닌 약방, 고무신과 장화를 파는 신발가게, 낡은 이발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추억의 골목. 이 배경을 그냥 두기 아쉽다면 시장 한쪽 ‘교동사진관’에 마련된 옛 교복과 고무신을 차려 입고 추억의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시장통 담벼락의 벽화나 옛 포스터, 표어들이 훌륭하게 사진 구석을 장식해줄 것이다.
돼지네 식품, 붉은노을 호프 치킨, 와글와글 식당, 중앙신발, 민욱이네 담배 잡화 등 익숙한 듯 어색한 간판이 가득한 골목. 한국전쟁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은 집 두어 채 있던 벌판에 직접 시장을 만들었다. 산에서 직접 나무를 해다가 움막집을 짓고 그곳에서 떡을 팔고 국수를 팔았다. 물이 귀한 시절이라 이발관에서는 손님 머리 감길 물을 위해 물통 지고 산을 넘어 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전쟁이 끝나고, 장사로 돈을 번 사람들이 건물을 올리고 비로소 시장다운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초가지붕 대신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던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당시에 나라에서 지급받은 목재로 지은 건물들이 몇십 년 세월 동안 그저 그 모습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룡시장 골목에는 초가지붕 위에 또 슬레이트를 올린 건물도 몇 채 있다. 먹고살기 바쁘니 초가지붕 걷어낼 틈도 없었던 모양이다.
조용하던 이곳이 ‘빈티지’ 열풍에 한 번, ‘레트로’ 열풍에 또 한 번 유명세를 타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핫’한 듯하다. 이곳을 다니러 온 사람들에게는 영화 세트장을 보는 것 같겠지만 시장 상인과 주민들에게는 이곳이 삶의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을 찍거나 구경할 때도 시끄럽지 않도록, 여행자의 예의를 지키길 바란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앞쪽으로 옛 건물들이 이어져있다. 시장을 찾으려하지만 한눈에 띄지 않는다. 골목으로 들어서야 시장 골목들이 보이는데, 문을 닫은 몇몇 가게들 사이로 생선가게, 방앗간 등의 오래된 가게에 불이 켜져 있다. 가게들을 사이에 끼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제야 새롭게 단장한 평화시장의 모습이 보인다.
이 시장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49년 전이다. 1980년대 이곳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북적이는 동네 시장이었지만, 점차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갔다. 하지만 이 잊혀진 공간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며 새로운 활기를 찾는 중이다. ‘숭의평화창작공간’이 문을 열면서 이곳은 오래된 도시의 잊혀진 공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는 공간으로 성장하고 있다.
평화시장의 옥상에 오르면,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내려다보이고, 그 주변으로 주상복합 건물을 세우는 공사들이 진행 중이다.
이곳에 남아있는 생선가게 할머니는 마트가 생기면서 손님들이 확 줄었다고 말씀하신다. 이 시장에서 40여 년 동안 생선가게를 하신 사장 할머니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던 이곳을 추억하셨다. 호황기였을 때만해도 골목에 생선가게만 8개가 있었다고 한다. 바글바글대는 손님들에 대한 기억들이 여전히 생생하신 듯하다. 하지만 이제 이 가게만 유일하게 남았다. 장사가 되지 않지만 집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기 뭐해서 가게에 항상 나오신다고 한다. 할머니는 가게 유리창에 붙은 손글씨로 된 가게 팻말을 보면서 창작공간의 샥시들, 그러니깐 입주 작가들이 만들어줬다면서 좋아하셨다.
1971년 시작한 숭의평화시장은 숭의동과 도원동 일대의 주민들이 모여드는 농수산물 재래시장이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100여 개 상당의 점포들이 들어와 시장이 활기를 띄었고 안마당에는 좌판들이 가득 차서 지역주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이 일대가 변두리로 밀려나면서 주민들은 점점 떠났다. 더욱이 근처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시장의 기능을 잃어버린 이곳의 상점들은 텅 비어버렸다. 이제는 평화시장 생선가게, 그리고 쌀집, 방앗간 등 몇 점포만이 유일하게 남았다. 그렇게 완전히 사람들로부터 잊힐 뻔했던 시장엔 젊은 작가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조금씩 활기를 만들어갔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도로변과 상점들 사이로 작은 골목을 지나 들어가면 조금은 낯설고 예상치 못하는 이색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광장을 중심으로 색색의 콘크리트 건물들이 에워싸고 있다.
잊혀졌던 공간과 지역사회와의 공존을 위해서 2015년 인천시와 미추홀구는 8억 4500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시장의 빈 점포 6개 동을 창작공간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젊은 예술가들이 모이는 이곳은 기존의 상점들과의 공존을 통해 새 숨을 쉬기 시작했다. 지역 작가들과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주민들이 어우러져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생기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마을과 가게 주인들이 젊은 작가들의 존재를 경계했다고 한다. 구도심의 발달로 인해 원래 주민들이 갈 곳을 상실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우는 잠시였다. 지금은 기특하다고 격려해주시고 어깨를 두드려주시며 많이 가까워졌다고 한다. 현재 숭의창작공간은 입주 작가 6개 팀, 레지던시 작가 7개 팀 그리고 문화예술단체 등의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와 있다. 리사이클, 전통술과 차 만들기, 도자기 공예, 공공미술 등 다채로운 창작영역이 함께 한다. 매주 수요일 오후 1시에 원데이 클래스인 ‘숭의문화예술시장’도 열린다.
서울에는 많은 재래시장이 있다. 대형마트와 온라인 쇼핑몰이 활성화되며 재래시장에 위기가 오는가 싶었지만,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성한 시장만의 고유한 매력은 빼앗지 못했다. 최근에는 레트로 열풍을 타고 시장을 찾는 젊은층이 늘어나고 있다니 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몇 천원에 패션 피플이 될 수 있는 동묘시장, 수십 년 된 물건들로 꽉 찬 서울 풍물시장, 마약김밥과 빈대떡 같은 전통 음식으로 유명한 광장시장, 전국 온갖 한약재가 집결한 경동시장까지 특색 있는 시장이 너무 많다. 그중 입이 즐겁기로 으뜸이라는 마장축산물시장을 소개해볼까 한다.
마장축산물시장은 수도권 축산물 유통의 60~70%를 담당하고 있는 축산물 전문 도.소매시장으로, 1500여 개 점포에 연간 이용객 수가 200만 명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축산물시장이다. 1963년 도축장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마장동 우시장은 1998년 주변 개발로 도축장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현재의 마장축산물시장으로 발전했다. 아직 축산물 시장에 대한 선입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곳을 방문하면 깨끗하고 현대화된 시설에 놀랄 수도 있다. 시장 내부에 들어서면 오토바이가 다른 시장보다 확연하게 많이 다니는데, 오토바이 때문인지 몰라도 시장의 활기가 다른 시장과 남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장 축산물 시장은 기존 전통 재래시장의 구조가 아닌 빠르게 변해가는 유통환경과 고객의 요구에 대처하고자 첨단 시스템을 갖추어 자율적으로 상거래가 형성된다. 전국 축산 농가에서 매시간 배송되는 축산물과 수입고기를 취급하며 정확한 원산지와 가격표시제가 의무화되어 소비자가 믿고 먹을 수 있다. 좀 더 저렴하면서 양질의 육류를 공급하여 시중 대형 마트보다 0~30%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시민의 건강과 직결된 먹거리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고 의사협회도 인정한 곳이라니 더욱 신뢰가 간다.
고기를 전문으로 팔며, 정형도 즉석에서 행하다 보니까 온갖 종류의 고기를 다 살 수 있으며, 한 마리당 얼마 나오지도 않는 희귀 부위도 운이 좋으면 구할 수 있다. 소와 돼지의 온갖 부위를 싱싱한 상태로 취급하는 점포들이 운집해있어 갈비, 등심, 안심은 물론이고 시중에서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아롱사태, 차돌박이, 토시살, 홍두깨살, 제비추리 등을 이곳에서는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다. 30년의 시간을 고유의 재래시장 체취를 담고 있으면서 시중보다 저렴한 가격에 흔치 않은 부위를 마음껏 구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단골 뿐 아니라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도 시장의 매력에 금방 빠진다.
명절 등 집안 행사를 앞두고 찾은 사람들 뿐 아니라 해장국집이나 정육점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즐겨 찾고, 구내식당에서 직원들에게 단체급식을 하는 병원, 기업, 정부종합청사까지 이곳에서 고기를 구해가는 사람들은 정말 다양하다.
질 좋은 고기를 구입해 집에서 요리해 먹을 수도 있지만 여기까지 찾아온 김에 시장에 있는 육류 취급 식당을 방문하면 어떨까? 수산물 시장에서 구입한 해산물을 조리해주고 먹을 수 있는 초장집처럼, 시장에서 구입한 고기를 식당에서 조리해 먹을 수 있다. 시장 특유의 분위기를 느끼면서 맛있고 신선한 고기를 먹을 수 있다. 숯불에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고 쌈 채소와 소주 등 술과 밥을 파는 식당들이 많은데, 마트나 정육점에서 쉽게 살 수 없는 생 내장이나 특수 부위를 가져와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이 시장만의 보너스인 것 같다. 나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숯불 위에 올려진 한우 한 점을 입에 넣으면 삶이 풍요로워지며, 잘살 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잠깐의 마법이더라도 의심 없이 푹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불판 위가 깨끗해진다.
식당을 나와 이대로 가기 아쉽다면 시장 옆에 있는 청계천 산책을 추천한다. 마장축산물시장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청계천을 만날 수 있는데, 광화문이나 종로에 있는 청계천과 사뭇 느낌이 다르다. 시내 중심가의 청계천과 달리 넓고 한적한 공간이 펼쳐지는데 내가 알던 청계천이 맞나 싶을 정도다.
겨울을 제외하고 저녁에 펼쳐지는 마을 주민 대상 에어로빅 수업은 또 하나의 재미를 준다. 수십 명의 사람이 강사를 따라 운동하는데, 구경하던 나도 어느새 덩실덩실 몸이 움직인다. 그러다 보면 소화도 오케이다.
마장축산물시장에는 '나눔의 거리'가 있다. ‘나눔의 거리’는 축산 시장 내의 점포들이 매월 1근씩의 고기를 기부해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하는 행사다. 성동구 사회복지사가 가게 앞 '나눔' 표시가 있는 곳에서 고기를 걷어 가는데, 가입 점포만 200개가 넘는다. 시장의 푸근한 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전통적인 볼거리, 먹을거리, 정까지 푸근한 마장축산물시장은 서울 시내에 있는 축산물도매시장 중 가장 유서가 깊다고 한다. 마장축산물시장 외에 축협 중앙회 축산물 공판장(가락동), 협진식품 축산물 도매시장(독산동)을 방문해 비교해보는 것도 재래시장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 될 것 같다.
궁시장(弓矢匠)은 활과 화살을 만드는 기능과 그 기능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활을 만드는 사람은 궁장(弓匠),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시장(矢匠)이라 한다. 우리 민족의 활 만드는 기술은 오래전부터 세계의 그 어느 민족보다 탁월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우리 민족을 활을 잘 만들고 잘 쏘는 동쪽의 민족이라는 뜻으로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고구려 활의 형태는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데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활과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전통 활의 형태는 이때부터 큰 변화 없이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도 활쏘기가 중요시되었으며, 조선 전기에는 무과의 과거시험 과목에 궁술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1592-1598) 이후 외국에서 조총이 수입되자 활은 전쟁용 무기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이 변화하여 현재 국궁(國弓)은 소나 양의 뿔로 만든 각궁(角弓)이 보편화되었다.
활(弓)은 대나무나 나무, 쇠를 반달형으로 휘어서 양 끝에 시위를 걸고 화살을 걸어 쏘는 무기이다. 주로 전쟁이나 사냥에 사용되었지만 연습, 의례 그리고 심신의 수련에도 사용되었다. 활은 크기에 따라 2m이상인 장궁(長弓)과, 이하인 단궁(短弓)으로 나뉜다. 장궁은 해안지대나 삼림지대의 민족이 주로 이용하여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섬의 원주민 사용했으며, 단궁은 초원민족인 한국과 몽고가 주로 썼다.
또 활은 재료에 따라 통나무궁(丸木弓)과 복합궁(複合弓)으로 나눌 수 있다. 통나무궁은 나무나 대나무의 한 가지를 휘어 만든 것으로 보통 장궁이다. 그러나 복합궁은 나무나 대나무, 소의 뿔이나 힘줄 등 여러 재료를 붙여서 만든 활로 대개 단궁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널리 쓰는 각궁(角弓)은 단궁이면서 복합궁이며 성능이 매우 뛰어나 사정거리가 멀다는 특징이 있다.
화살은 활에 대고 쏘는 가늘고 긴 대이다. 일반적인 화살의 구조는 긴 대의 앞부분에 화살촉이 붙어있고, 뒷부분에 날개가 붙어 있어 무게 중심을 앞쪽에 있어, 앞을 향해 똑바로 날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현재 널리 사용되고 있는 화살은 죽시(竹矢)로 옛날 이름은 유엽전(柳葉箭)이다. 조선시대에 무인들의 연습용으로 쓰던 화살로 몸체는 대나무이며 뒷부분은 싸리나무, 깃은 꿩깃 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71년 9월 13일 국가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이 지정되었다. 현재는 유영기(시장), 박호준(시장), 김종국(시장)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아 전통적인 활과 화살 제작기술을 보존하고 전승하는데 힘을 쓰고 있다.
예전에는 한국인의 주식이 쌀이었다지만, 요즈음에는 빵도 그에 못잖게 먹는다. 대형 프랜차이즈 베이커리부터 시작해서 소규모 동네 카페와 편의점의 진열대까지, 토스트빵에 갖가지 소를 채워 넣은 샌드위치는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메뉴다. 다양한 속을 넣은 샌드위치를 판다지만, 이 모든 샌드위치의 할아버지뻘 되는 것은 바로 사라다빵이다.
'사라다(サラダ)'란 채소를 마요네즈나 케첩과 같은 소스에 버무려 내오는 서양식 요리 '샐러드(salad)'의 일본식 발음이다. 이제는 샐러드라는 단어가 너무나 보편적으로 통용되지만, 사라다빵이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했던 20세기 무렵에는 그 모양새도, 맛도 독특한 새로운 음식이었다. 사실상 샐러드 샌드위치라는 이름이 더 적합해보이는 이 음식이 아직까지도 일본어의 발음을 빌려와 사라다빵이라고 불리는 데에는 ‘그때 그 시절’이라는 추억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사라다빵은 크게 두 개의 유형으로 나뉜다. 속이 부드럽고 촉촉한 번에 으깬감자와 계란, 옥수수 알갱이 등을 넣고 마요네즈 소스로 버무린 샐러드를 넣은 고소한 사라다빵이 있는 반면, 빵을 한번 튀겨낸 크로켓 빵에 채 썬 양배추와 오이를 넣고 케찹과 마요네즈 소스를 한 번씩 뿌린 ‘단짠’ 버전도 있다. 늘 그렇듯이, “누가 원조냐”라는 질문을 피할 수가 없겠지만 명확한 사실은 없다. 다만 조리법의 특성으로 미루어 보건데, 빵을 튀겨내어 겉을 더욱 바삭하게 한 크로켓 버전이 조금 더 최신의 것이라는 점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표면이 바삭한 크로켓을 만들기 위해서는 빵가루를 입혀 기름에 튀겨내야 하는데, 이때 빵을 기름에 푹 잠기도록 해야지만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식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식용유가 일반인에게도 대량으로 보급된 때가 1970년대이니까, 그 이전에는 귀한 식용유를 대량으로 쓸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부드러운 번(Bun) 빵에 속을 채운 사라다빵이 아무래도 더 먼저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아닐지 추측해볼 수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대한민국 각지의 시장과 빵집에서 맛볼 수 있었던 사라다빵은 요즘 대형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에서도 ‘추억의 사라다빵’이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팔리고 있다. 양배추뿐만 아니라 햄과 할라피뇨 등 각종 독특하고 이국적인 재료들이 앞다투어 빵 속에 들어가고 있는 이 풍요로운 시대에 이렇게 간단한 재료와 소스로 만든 사라다빵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맛에 있어서 추억이 차지하는 비중을 가늠하게 해준다.
사라다빵의 변신은 진행형이다. 대구에서는 10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내세워 기본기에 충실한 사라다빵을 판매하고 있고, 서울에서는 소세지를 넣기도 한다. 강릉에서는 사과나 건포도를 넉넉하게 넣어 달콤새콤한 맛을 강화하는 반면, 포항의 경우 스팸이나 가공햄을 넣어 보다 풍부한 맛을 내기도 한다. 1970, 80년대에 시장에서 즐겨먹었던 사라다빵의 추억은 이제 지역에 따라, 또 빵집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재료보다 중요한 것은 추억의 사라다빵이라는 이름 속에 녹아있는 아련한 흔적이다.
선풍기마저 귀했던 시절이었다. 최저기온이 섭씨 25도를 웃도는 열대야(熱帶夜)는 여름 동안 3,4일씩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별이 총총 박힌 무더운 밤이면 더위를 참지 못해 집을 뛰쳐나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낮 동안 달아오른 벽과 지붕은 밤이 찾아와도 식을 줄 몰랐고 골목마다 문 앞에 돗자리를 펴고 모기를 쫓으며 밤새 수다 꽃을 피웠다. 그것도 안 되겠다 싶으면 한강변이나 밤거리를 거닐며 더위를 잊으려 했다.
한밤중의 종로는 낮과 달랐다. 밤에 열리는 야시(夜市) 혹은 야시장(夜市場)에서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과 먹을 것, 옷가지 등을 팔았고 길가 양옆으로 포장을 친 상인들로 북적였다. 손부채를 들고 나온 어떤 사람은 상인과 물건 값을 흥정하느라 옥신각신 하기도 했다. 오십 년 전의 이야기이다. 최근, 추억의 야시장이 다시 나타났다. 지역의 관광문화자원으로 특화되면서 시장경제를 살리는 효자가 되고 있다. 지역 예술가의 공연과 향토음식 등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부하고 주변 전통시장의 특산품도 살 수 있다니 여행자라면 들려볼 만하다.
밤에 활동하는 도깨비처럼 밤에만 열리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2015년부터 시작하였고 여의도 한강공원과 반포 한강공원, 청계광장, DDP, 문화비축기지 등에서 4월부터 10월 말까지 열리고 있다. 야외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비가 오거나 추운 날씨에는 운영하지 않는다. 밤도깨비 야시장에는 젊은 상인들이 대부분이다. 음식을 판매하는 푸드트럭과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핸드메이드 존이 있고 이 외에 다양한 체험존과 버스킹 공연도 진행한다.
한국 음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국가의 전통음식과 국적을 알 수 없는 음식, 색다른 아이디어로 만든 음식도 있어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 특히 젊은이들의 감각이 돋보이는 푸드 트럭의 상호와 차림표의 이름, 재미있는 트럭 디자인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것을 잊게 된다. 게다가 울긋불긋한 조명과 흥겨운 음악은 한밤의 소풍에 불을 지필 것이다. 교통수단은 개인차량보다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다.
순천시 풍덕동에 있는 아랫장은 매달 2와 7로 끝나는 날에만 열리는 5일장이다. 1949년부터 지금까지 지역의 경제와 문화를 책임져왔다. 현재는 점포의 수가 약 200여 개, 노점이 1,400개에 달한다.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은 야시장이 열리는 날이다. 야시장의 먹거리 중에는 순천 앞바다에서 건져온 해산물이 주로 많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조개구이 불쇼를 보여주고 있는 상점 앞에는 젊은 연인들이 모여 있다. 나무젓가락에 돌돌 말린 낙지호롱으로 호객을 하는 주인장의 구수한 사투리도 재미있다. 이 정도라면 누군가 부르는 트로트에 맞춰 흔들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순천 아랫장 야시장은 시장 내에 대형 천막을 설치하여 실내와 다름이 없는 공간이다. 사계절 운영이 가능하며 비바람이 몰아쳐도 안전할 것 같다. 순천을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아랫장이나 야시장이 열리는 날에 맞춰 일정을 잡아야 한다. 만약 장날과 야시장이 열리는 날이 딱 겹치는 일정에 순천을 방문한다면 흔치 않은 행운을 얻은 셈이다.
예전의 야시장은 하얀 포장, 푸른 포장 등 비슷한 모양의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었다. 지금은 트럭이나 트레일러 등으로 판매수단을 개선하였고 시장운영도 시스템화 되었다. 그리고 각설이 타령 대신 멋진 무대와 버스킹 공연을 구경할 수 있고 야바위 게임 대신 공예품 만들기와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흥청거리던 야시장의 모습은 지역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관광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다시, 무더운 여름이 되면 집 근처에 사는 친구를 불러 야시장 나들이를 할 생각이다. 나무 아래 어딘가에 돗자리를 펴고 근사한 야식과 술 한 잔을 기울여 평범했던 하루를 예찬해야지.
여주시는 동쪽으로 강원도 원주시와 충청북도 충주시를 접하고, 서쪽은 경기도 이천시, 남쪽은 충청북도 음성군, 북쪽은 경기도 양평군과 접하고 있다. 산지가 동서로 뻗어있어 동쪽으로는 강원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양평군과 경계를 이룬다. 토지의 49%가 임야이다. 경지는 27.8%에 불과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녹두, 고구마가 생산되고, 특용작물로 참깨, 들깨, 땅콩이 생산된다. 전체 인구 중 25%가 농가 인구이다. 가남장- 1일, 6일, 여주장- 5일, 10일, 대신장- 4일, 9일 등 오일장이 선다.
과거에는 남한강을 중심으로 수로 교통이 발달했었다. 현재는 이포나루만 남아 이천과 양평을 연결하는 나루터 역할을 한다. 북내면은 여주읍내의 북쪽에 있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북내면은 전형적 농촌 마을로 미곡 위주의 농업지역이다. 북내면에 남한강 유역에서 생산되는 점토, 백토 등을 원료로 하는 도자기 공장이 있다. 당우리는 금당천이 마을로 흘러 남한강과 금당천 유역에 평야지대가 형성되었다.
하자 한 시월은 다 가고 새로나 천절이 돌아라 왔네 각설이 춘절이 날아든다
일자라 한자니 들고 봐라 일월이 송송이 야송송밤중의 샛별이 뚜렷하다
두이자라 들고 봐라 이자 서기가 힘들다고 경성 팔도에 ○○○○
삼이자라 한 자나 들고 봐라 사시생춘에 바쁜 일에 중마참이나 늦어간다
오자라 한자나 들고 봐라 호방 떴다라 종강손 왕빛 아래 조발구
선비들의 손 봐라 유월의 영춘 더운 날에 욕설가지가 저리 좋다
칠이자라 한자나 들고 봐라 칠년대한에 봄 가뭄 앞뒤 청산에 비둘기
한 방울만 떨어져도 많은 인간이 춤을 춘다 알자나 한자라 들구 봐라
우리나 형제는 칠형제 남의나 형제는 팔형제
한글방에다 누웠소 한 서당에 앉혔을 때 그때라 들구 돌어를 갈 때 ○○보기가 ○○한다
구자라 한 자라 들고 봐라 구름청산에 늙은 중 염주를 목에 걸고
양박에 목탁에 손에 들구 시적시적 가다가 들켰네나 들켰네
남었네 남었구나 창자라 한 자나 남었구나
진주야 지성 이민지지 우리나라를 생길랴고 회장청각에 꿈을 안고
진주야 한강에 떨어질 제 어는 기상이 아니나 울구 어는 화룡이 아니 울까
「각설이타령」은 걸인들이 마을이나 장터를 돌며 구걸하면서 부르는 소리이다. 혼자 구걸하러 다니기보다는 거지들이 모여서 장타령을 부르며 동냥을 하러 다닌다하여 각설이패라고 하였다. 각설이패는 주로 장이 서는 날이면 입담을 늘어놓으며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었다. 여주시는 예전에 남한강을 중심으로 장이 흥한 곳이었다. 장이 활발하게 섰던 여주에서는 각설이패의 등장과 성장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각설이패는 구걸을 목적으로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재미있는 사설이 기억에 남아 각설이타령은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 있다. 각설이타령은 현재까지도 장터에 가면 들을 수 있는 소리이다.
과거의 주요 교통 수단은 하천을 이용한 수로 교통이었다. 여주시는 남한강을 중심으로 수로 교통이 발달한 곳이다. 한강의 4대 나루는 광나루, 마포나루, 이포나루, 조포나루이다. 그중 여주시는 이포나루와 조포나루를 중심으로 시장이 활성화되었다. 시장에서 주거래 상품은 곡물이었고,소금이나 새우젓, 담배나 옹기 등 다양하였다. 육로 교통이 발달하면서 현재는 이포나루만 남아있고 시장의 규모도 줄어들었다. 정기시장은 가남장- 1일, 6일, 여주장- 5일, 10일, 대신장- 4일, 9일 등 세 곳만 남아 있다.
함안에는 손꼽히는 명소가 여럿이다. 말이산고분군, 고려동 유적지, 입곡저수지, 악양생태공원, 연꽃테마파크 등……. 그중에서도 함안 대표 명소로 함안 가야장을 꼽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가야장이 이토록 사랑받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세월에 지쳐 쇠락의 길을 걷는 여느 오일장과 비교하면 규모나 활기가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주말이나 공휴일에 장이 서면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는데, 요즘은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다.
오일장은 물산을 사고팔거나 물물교환을 하는 공간이었다. 장마다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장돌뱅이들이 대다수였지만, 손수 농사를 지은 물품을 들고나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쌀과 잡곡, 손질해 말린 나물과 제철 과일, 그밖에 다양한 생물 등이 풍성했다. 때로는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닭, 토끼 같은 가축도 끼어 있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의 장날은 매우 복합적인 기능을 담당했다. 하루 종일 땅에 엎드려 농사짓느라 바깥나들이가 거의 없던 시골 사람들에게 장날은 세상과 소통하는 중심 창구였다.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손쉽게 얻고, 시집간 딸자식이나 멀리 이사 간 친척의 안부도 묻고 들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처럼 장날이 지역사회의 경제적·사회적 구심점이 되면서 사람들의 일상도 장날을 기준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물건을 내다 파는 시기는 물론이고 사람을 만나는 일, 물건을 주문하고 찾는 때, 돈을 빌리고 갚는 날짜도 장날에 맞추어 정했다.
오일장은 지역민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문화의 장이기도 했다. 약장사의 그럴듯한 공연에는 시끌벅적 사람들이 몰렸고, 때때로 열리는 서커스 공연에는 환호를 보냈으며, 노래자랑에서는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오일장에는 고단한 일상을 잠시 쉬어가게 하는 볼거리·먹을거리도 넘쳐났다.
함안에도 오일장이 있었다. 평림시(平林市, 1일·6일), 방목시(放牧市, 3일·8일), 궁북시(弓北市, 4일·9일)가 그것이다. 『함주지』를 보면 언제 생겼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장터 기록은 1587년에 편찬된 제1권과 1730~1740년대에 편찬된 제2권 전집에는 나오지 않고, 1830~1840년대에 편찬된 제2권 후집에만 등장한다. 이를 바탕으로 함안의 오일장은 1700년대 중후반에서 1800년대 초반에 생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06년에 함안으로 편입된 칠원에는 읍시(邑市, 3일·8일)와 우질포시(亏叱浦市, 2일·7일)가 있었다. 칠원의 오일장은 1643년에 편찬된 『무릉지』와 1699년에 편찬된 『칠원지』에는 보이지 않다가, 1855년 펴낸 『칠원읍지』에 비로소 나타난다. 이는 칠원의 오일장 역시 함안과 비슷한 시기에 처음 생겨났음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 6월 9일 자 『동아일보』에는 함안의 오일장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위인걸사(偉人傑士)가 족출(簇出)하든 함안(咸安)’이라는 제목 아래 다룬 341회차 ‘순회 탐방’은 명주실(生絲), 무명베(綿布), 삼베(麻布), 모시베(苧布), 비단(絹布), 부채(扇子), 기와(瓦), 금은세공(金銀細工), 놋그릇(眞鍮器), 옻그릇(漆器), 대그릇(竹器), 왕골자리(莞草筵), 갈대자리(蘆席), 누룩(叺麯子), 짚신(草履), 미투리(麻履), 갓(笠子), 붓(筆), 농기구(農具) 등 시장에서 판매하는 물품을 나열하고, 마지막에 시장 이름과 1년 매출액을 적어 놓았다.
기사에 따르면, 오일장 별 매출액은 읍내시(邑內市)로 바뀐 방목시가 1만5,517원, 군북시(郡北市)로 바뀐 궁북시가 8만8,571원, 칠원시(漆原市)로 바뀐 칠원읍시가 3만9,418원, 이름이 바뀌지 않은 평림시가 4만5,177원이다.
군북시가 압도적인 매출을 자랑하는 가운데, 평림시와 칠원시는 6,000원 차이로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반면 읍내시는 당시 군청 소재지인데도 크게 처지는 꼴찌였고, 우질포시는 사라졌는지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의 가야장은 방목시(放牧市)라는 이름으로 그해에 처음 신설되었다고 매출액 없이 적혀 있다.
오일장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매우 번성했다. 장날이 되면 오일장 가는 버스는 미어터졌다. 도로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장에 가는 장꾼들로 들어찼으며, 마을 단위로 모여 경운기 짐칸까지 빼곡하게 올라타고 가는 경우도 많았다.
50대 이상의 시골 출신들은 대부분 오일장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손을 잡고 가는 오일장은 그 자체로 특별한 경험이었다. 집에서 들고 나간 쌀이며 닭 따위를 돈으로 바꾸어 다른 물건을 사러 다니는 어른들을 따라다니면, 장터 이곳저곳에서 여러 신기한 풍경과 물건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러던 오일장이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급속하게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시군 단위의 자급자족 수준을 벗어나,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물건들이 시장 곳곳을 차지하면서부터였다. 장터마다 뚜렷했던 개성과 특징이 사라지면서 오일장은 확연하게 활기를 잃어 갔다.
함안만 해도 함안장은 옷 파는 행상 트럭만 두어 대 있을 뿐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가야장보다 크다고 했던 군북장도 가뭇없이 사그라들었다. 두 번째로 컸던 대산장도 점심때만 지나면 파장 분위기일 정도로 예전 같지 않은 모양새이며, 칠원장 또한 크게 다른 모양새는 아니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53년, 이곳은 중앙시장(3구시장)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이주민과 토박이가 함께 자리를 잡으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장터였다. 처음에는 생활필수품을 사고파는 곳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속초 경제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1970년대 설악산 관광 붐이 시작되면서 시장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관광객은 설악산을 다녀온 뒤 반드시 중앙시장에 들러 건어물과 젓갈을 사 갔다. 시장 안에는 60여 개의 건어물 가게가 새로 문을 열었고, 골목마다 짭조름한 바닷내음이 진동했다. 이때부터 속초는 “관광과 수산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으며, 훗날 ‘속초관광수산시장’이라는 이름도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시장의 흥망은 파도와 같았다. 한 번 밀려온 물결이 언젠가는 빠져나가듯, 중앙시장은 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1988년, 지하 1층과 지상 2층 규모의 대형 상가 건물이 신축되어 500개가 넘는 점포가 입주하면서 시장은 전성기를 맞는 듯했다. 하지만 시대는 이미 변하고 있었다. 1994년 교동에 아남프라자의 개장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더 세련되고 편리한 쇼핑 공간으로 발길을 돌렸다. 1998년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는 전국 모든 상권이 휘청거렸고, 중앙시장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2003년 이마트 속초점이 들어서면서 시장은 직격탄을 맞았다. 점포의 3분의 1 이상이 문을 닫고, 빈 점포에는 먼지만 쌓였다. 상가 운영비조차 감당하지 못해 단전과 단수 위기에 몰린 시장은 마치 조용히 침몰해가는 배처럼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도 속초 사람들은 시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2006년, 속초시는 시장 현대화 사업에 착수했다. 이름도 속초중앙시장에서 속초관광수산시장으로 바꾸며 재생에 나섰다. 시청은 전담팀을 만들어 시장에 상주하게 했고, 골목에는 비가림 시설을, 어두운 시장 안에는 화려한 조명을 설치했다. 시장 입구에 세워진 대형 조형물은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했고, 속초 앞바다에서 청정 해수를 직접 끌어오는 인입 시설까지 갖춰 회센터를 현대식으로 탈바꿈시켰다. 상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상인대학을 통해 친절 서비스와 경영 마인드를 새롭게 배우고, 시장투어, 세일 이벤트, 주말장터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스스로 시장을 살려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2006년 전국 재래시장 시범시장 선정을 시작으로, 2008년에는 우수 재래시장, 2011년에는 ‘가볼 만한 전통시장 50선’과 ‘여행하기 좋은 전통시장 10선’에 이름을 올렸다. 전국 지자체와 상인들이 속초를 찾아와 벤치마킹할 정도로 성공적인 부활을 이룬 것이다. 폐업 위기까지 몰렸던 시장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골목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해졌다.
물론 부활의 이면에는 그림자도 존재한다. 관광객이 몰리면서 임대료 상승과 외지인 점포 매입이 이어졌고, 정작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토박이 상인들은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또한 의류와 포목점이 사라지고 건어물 가게로 대체되면서 업종의 다양성이 줄어든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농촌 마을에서 직접 농산물을 가져와 판매하는 이들을 위한 공간 부족과 2층 상가의 빈 점포 활용 문제 등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초관광수산시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활발하게 움직인다. 이곳에는 상가 건물 외곽의 '인정시장'과 1990년에 준공된 상가 건물 내부의 '종합중앙시장'이 공존하고 있다. 이 둘은 마치 속초 시장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보여주는 풍경처럼, 서로 다른 색을 띠면서도 한 몸처럼 이어져 시장의 맥박을 이어간다.
이곳은 속초 사람들의 삶이 응축된 공간이자, 수많은 위기와 도전을 이겨낸 도시의 기억이다. 골목마다 퍼지는 오징어 굽는 냄새, 젓갈을 담는 상인의 분주한 손길, “한 접시 더 얹어줄게요!”라는 푸근한 목소리 속에, 속초관광수산시장은 살아 움직인다. 이곳은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며 속초의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전주남문밖시장은 전주부성의 남문인 풍남문 밖에 장이 서서 붙여진 이름이다.남문밖시장을 줄여서 ‘남밖시장’라고도 불렀다.풍남문 밖 전주천변에서 열리던 이 장은 가끔 전주천 맞은편의 천변에 서기도 했다.큰비가 내리면 남고산성에서 급하게 내려오는 산성천의 물줄기와 흑석골에서 공수내로 쏟아져 내리는 거친 물살을 전주천의 제방이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이럴 때면 남밖시장은 전주천 건너편에 있는 곤지산의 동쪽,현재의 전주교대 부속 전주초등학교 앞 천변에 장이 섰다.
그런데 1900년 전후에 개신교의 선교사가 촬영한 전주 남밖시장 사진은 또 다른 곳에 장이 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사진을 살펴보면 시장의 맞은편 상류 쪽 천주천변에 기와지붕을 한 누각 건물이 보인다. 전주향교의 만화루이다. 전주향교 만화루는 조선시대 향교에서 조금 떨어져서 전주천변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다 1913년, 현 완산초등학교의 전신인 전주 제2공립보통학교를 건립할 때 헐려서 교사의 자재로 사용되었다. 전주천변에 있었던 만화루의 모습이 이 사진 속에 나타나 있다.
이로 미루어 이 사진 속 남밖시장은 오늘날의 동서학동 전주교육대학교 앞, 옛 반석리의 천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은 풍남문으로부터 1.2km나 떨어져 있다. 남문 밖에 있는 장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먼 곳이다. 그렇다면 전주 남밖시장은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풍남문으로부터 꽤 거리가 먼 반석리에 자리했던 것일까.
전라도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돌아온 이면상이 고종을 알현했다. 고종이 물었다.
“전주의 변고는 과연 노령(奴令:관노와 사령)에게서 연유하여 인명을 많이 해쳤는가?”
전주의 변고란 2년 전인 1889년 정월, 전라감영 아전들의 횡포에 맞서 관노들과 사령들이 일으켰던 관노의 난을 말한다. 이 난으로 관노와 사령 수십 명이 죽고 이들이 살던 반석리, 오늘날의 동서학동은 폐허가 되었다.
전주의 변고란 2년 전인 1889년 정월, 전라감영 아전들의 횡포에 맞서 관노들과 사령들이 일으켰던 관노의 난을 말한다. 이 난으로 관노와 사령 수십 명이 죽고 이들이 살던 반석리, 오늘날의 동서학동은 폐허가 되었다.
이면상이 아뢰었다.
“이 변고는 이교(吏校:이서와 군교)와 통인배들이 패역하고 흉포한 행위를 멋대로 부려 이미 수십 명을 해치고, 집 3, 4백 호에 불을 지르고 부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그 난리의 우두머리 3인을 법에 따라 처단하고 이어 100호를 반석리에 지어 도망한 노령들을 불러서 돌아오게 하여 옛날처럼 터전을 잡고 살게 하고, 해당 촌에 시장을 옮겨 설치하여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그러므로 촌이 점점 흥성하여 100호 외에 또한 많이 지어졌습니다.”
이 대화는 1892년(고종 29) 6월 7일자 「승정원일기」에 적혀있다.
이면상은 암행어사제도가 폐지되기 직전에 마지막 어사로 파견되어 암행어사란 직책을 재물을 모으는데 십분 활용한 탐욕스런 관리였다. 그런 이면상이었지만 전주에 도착해 반석리를 보니 전쟁터를 방불할 정도의 폐허로 변해있었다. 명색이 임금의 사자인데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귀경해서 임금에게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기 위해서라도 대책을 세워야 했다. 이에 이면상은 뇌물로 받았던 돈 중에서 상당한 돈을 내놓고 살상의 책임이 큰 전라감영 아전들을 부추겨 반석리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담을 다시 쌓고 기반을 정비했다. 이러한 내용이 전라감영 안에 옮겨놓은 이면상영세불망비의 뒷면에 적혀있다.
앞마을에서부터 미리 암행어사가 왔다고 소문을 내서 뇌물을 준비하도록 할 만큼 탐욕스럽고 부패한 관리였지만 이면상은 뇌물로 받았던 돈 중에서 1,150냥을 내놓으며 살상의 책임이 큰 이속들을 압박해 5,850냥을 만들어 폐허로 변한 마을을 재건하도록 했다. 여기에 관노들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재기할 수 있도록 남밖시장을 반석리로 옮기도록 조치했다고 이면상은 고종에게 보고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로 볼 때 앞서 인용했던 선교사가 촬영한 남밖시장 사진은 이면상이 전주에 암행어사로 왔던 1891년 정월 이후에 남밖장을 반석리로 옮겼던 때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석리에 있었던 남밖시장은 1910년 한일병탄이 되면서 다시 풍남문 밖 천변으로 옮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