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루룩 넘기기엔 너무나 정성스러운, 충남상회 국수

    한 가닥의 국수를 만드는 일은 무척이나 고되다. 

    20Kg 밀가루 한 포와 소금물을 부어 섞는다. 한껏 치대고 저며 얇아진 반죽이 기계에 들어가면 하얀 가락으로 변한다. 이것을 시누대(대나무로 만든 국수 대)에 척척 걸어 그늘과 햇볕에 이삼일 말린 후 자르면 비로소 면발이 만들어진다. 국수의 맛은 정성에서 나온다. 비가 와서도 안 되고 햇볕이 너무 강해도 안 된다. 날이 추워도 안 되고 너무 더워도 안 된다.  

    너부대 마을의 충남상회는 가내수공업 형태로 국수를 만든다. 10평 남짓한 가게 안은 국수를 말릴 곳이 없어 이른 새벽 반죽을 만들고 기계를 한쪽으로 치워놓아야 손님을 받을 수 있다. 

     

    김영이 씨는 20년 전에 남편과 함께 이곳으로 왔다. 고3 큰 아들과 중2 작은 아들 학원비라도 보태어 볼까 해서 살림집과 가게가 같이 붙어있는 연립상가를 얻었다고 한다. 영이 씨는 시장을 보러 왔다가 이곳에 국수기계를 상가와 함께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 덜컥 계약을 했다. 그런데 국수기계 전 주인은 며칠 국수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영이 씨의 고난이 시작됐다. 

     

    내가 고3 아들을 뒷바라지해야 되는데 고3이 내 뒷바라지를 했어. 국수가 추울 때 말리면 툭툭 끊어지고 안 되거든. 그 사실도 알려주지 않았던 거야. 한겨울 내내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지금은 하루에 밀가루 10포를 가지고 국수를 만드는데 처음엔 2포만 가지고도 하루가 금방 지나갔어.

     

    온 가족이 이른 새벽부터 밤 10시까지 밀가루를 반죽하고 국수를 뽑아도 국수 만들기는 어렵기만 했다. 몇 년을 국수기계와 씨름하면서 영이 씨는 국수는 사람의 손 말고도 하늘이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충남상회의 국수는 영이 씨 가족들의 정성과 너부대마을의 바람과 햇빛 그리고 시간이 만든 것이다. 

    밀가루 한 포에 10분 국수 13통(1통에 4천원)이 나온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수는 1년에 한 번 하는 너부대마을 동네 잔치 때도 쓰이고 인근 식당에도 납품이 된다. 이 길을 오며가며 국수를 사는 단골들도 꽤 있다. 

     

    충남상회의 국수 포장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그저 흰 종이에 갈색 띠가 둘러져 있을 뿐이다. 영이 씨는 정식으로 국수집 간판을 내걸어 볼까도 했지만 행정절차는 까다롭기만 했다. 규모도 보다 갖춰야 했다. 

    그래도 우리집 국수 맛을 잊지 못해 멀리서도 오는 손님들이 있어. 요즘은 가정에서 워낙 외식도 많이 하고 대형마트도 많아서 타격이 있는가는 몰라도 우리는 꾸준하거든. 

    시간이 흐를수록 충남상회의 국수 맛도 깊어진다.

    충남상회
    충남상회

     

    ※ 영이씨가 전해주는 국수를 맛있게 만드는 법(TIP)

    「잔치국수」

    다시마멸치 육수가 핵심이다. 육수를 낼 때는 꼭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춰야 한다. 약간의 조미료를 더 해주면 감칠맛이 돈다. 이렇게 만든 육수를 여름엔 냉장고에 항상 넣어놓고 호박나물 정도 얹어내면 그만이다. 

    국수를 삶을 때는 후루룩 끓으면 불을 줄여 뜸을 들여야 한다. 국수 한 가닥을 꺼내 찬물에 넣어 투명하면 다 익은 것이다. 하얀 심이 보이면 더 익혀야 한다.

     

    「칼국수」

    칼국수의 미덕은 냉장고 속 재료가 무엇이든 있는 만큼만 넣어 끓여도 맛이 있다는 점이다. 조개가 있으면 조개를, 사골국물이 있으면 사골국물을, 아무것도 없으면 그저 다시마국물에 달걀만 풀어서 내도 깔끔한 맛이 난다. 충남상회 냉장고 속에서 막 꺼낸 국수를 사다가 우리집 냉장고를 열어 이것저것 넣고 끓여 칼국수의 무한한 변주를 즐기는 게 칼국수의 진정한 맛이다. 

  • 500년 역사를 간직한 전통가옥 필경재(必敬齋)

    조선시대에는 사대문 밖에서 멀리 떨어진 강남에 조선왕조의 능이 많이 세워졌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조선왕릉 중 가장 번화한 곳에 있는 선릉에는 성종, 정릉에는 중종이 모셔져 있고, 대모산 기슭에 자리 잡은 헌인릉은 태종과 원경왕후를 모신 헌릉, 순조와 순원왕후를 모신 인릉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왕릉은 아니지만 왕의 아들들 대군들의 무덤도 이 근방에 많이 조성되었다. 

     

    필경재 이미지
    필경재
    필경재 입구 이미지
    필경재 입구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수서동에 위치한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드님인 광평대군 이여의 묘이다. 광평대군묘역에는 광평대군 내외 묘소,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무안대군 이방번 내외 묘소, 광평대군의 아들 영순군 이하 그 후손들의 묘소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광평대군의 묘역은 서울 근교에서 현존하는 왕손의 묘역 중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 총면적 413,300㎡의 산에 광평대군의 묘소를 비롯한 그 종문 700여 기의 묘소가 일대 장관을 이루고, 종가재실의 고옥이 있는 공동묘역이다. 또 이곳은 종가 재실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있어, 마을 이름을 궁말, 궁촌이라고 부른다. 도로명이 개편된 오늘날에도 이 마을의 도로명은 광평로이다.

     

    공동묘역 끝자락 평지로 내려가면 오래된 전통가옥이 보이는데, 이 곳이 전주 이씨 광평대군 이여의 종가인 필경재이다. 필경재는 15세기 조선조 성종 때 건립된 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전통가옥으로서 1987년 4월 8일 문공부에 의해 전통건조물 제 1호로 지정되었다. 광평대군의 증손인 정안부정공 이천수가 건립하여 현재까지 대대로 19대를 이어오며 그 종손들이 살아온 전통한옥이다. 당시 개인 가옥으로서는 최대 허용치였던 99칸이었으나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많은 부분이 유실되고, 나머지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오다가 1994년에 해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1999년부터는 궁중요리를 선보이는 음식점으로 운영되고 있으나 가옥의 형태는 잘 보존되고 있다. 

    필경재 입구 이미지
    필경재 내부
     

    전주 이씨 광평대군 정안부정공의 종갓집으로 내려오고 있는 이 가옥에서는 북한산성을 축조한 숙종 때 영의정 이유와 효종 때 우의정 이후원, 헌종 때 우의정 이지연 등 3정승을 탄생시켰으며,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철기 이범석 장군과 헤이그 열사 중 한 분인 이위종 열사도 직계 후손이다. 이렇게 많은 문무관을 배출하였고, 일제 치하에서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기 위하여 설립된 중앙고등학교 광주분교로도 사용되었던 유서 깊은 가옥이다. 필경재(必敬齋)의 뜻은 ‘반드시 웃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자세를 지니고 살라’는 뜻으로 필경재가 건립될 당시 지어진 이 고옥(古屋)의 옥호(屋號: 집의 이름)이다.

  • 제주 왕벚나무 거리의 50년된 원이조 설농탕

    매년 4월이면 벚꽃축제가 한창인 제주의 전농로거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1동의 이 도로는 양쪽 도로변을 따라 왕벚나무가 끝없이 이어져 봄에는 벚꽃길로, 가을엔 단풍거리로 입소문이 나 있다. 봄에 길을 걸으며 만개한 벚꽃 구경을 하고, 한 여름 다른 곳에서 신나게 놀다가 가을이 되면 또 생각나는 곳이 전농로이다.

     

    전농로는 총 길이 1.2km, 폭 15m의 왕복 2차선 도로로, 제주 지역 자생종인 왕벚나무가 양쪽 도로변을 따라 이어져 있다. 이곳의 왕벚나무는 대부분이 수령 20~100년 이상 되었으며 제주도 전체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제주시는 지역 자랑거리인 전농로의 왕벚나무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해 1992년 제1회 제주왕벚꽃축제를 개최했고 이후에도 매년 빠짐없이 개최해오고 있다. 그래서 제주도민 뿐 아니라 각지에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 30만 명이 넘게 참석하는 대규모 축제로 성장했다. (두산백과)


    또 제주왕벚꽃축제와는 별도로 삼도1동 마을회에서는 2005년부터 매년 서사라문화거리축제를 열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원이조 설농탕 이미지
    원이조 설농탕


    전농로의 작은 카페에 앉아 단풍을 보며 가을 감성을 제대로 느끼고 나면 꼭 찾는 곳이 있다. 삼도동 전농로에 위치한 원이조 설농탕이다. 이곳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설렁탕집으로, 유명한 핫플레이스라기 보다는 정말 지역주민들에게만 소문난 맛집이다. 허름해 보이지만 가게 입구에서부터 오래된 기운이 확 풍기며 세월의 흔적들을 느낄 수 있는 아날로그한 감성을 가득 담고 있는 곳이다.


    노란색깔 원이조 설농탕 간판 아래로, 가게 옆으로, 앞으로 나무들과 꽃이 심어져 있고 가게 안에도 커다란 나무들이 보인다. 사장님이 엄청 자연을 사랑하시는 듯하다. 들어가면 옛날 식탁과 의자들이 홀에 놓여있고 좌식으로 앉아서 먹는 공간도 있다. 얼핏 느껴지기엔 가정집 같기도 한데 주인장의 취미인 듯 오래된 그림들이 걸려있고 상도 정말 어릴 적에 집에서 쓰던 밥상 그대로 놓여있다. 정감 있는 가게 내부에 숨겨진 각종 골동품 찾는 재미에 빠져 있으면 설렁탕 한 상이 차려진다.


    분위기만 진국이 아니라 국물이 정말 진국이다. 정갈하지만 무거운 사기그릇에 담겨진 반찬들과 진한 설렁탕 국물에 그때그때 달라지는 콩밥, 조밥, 보리밥. 오래된 밥이 나온 적이 없고 국물은 한마디로 깔끔하고 구수하다. 어릴 적 할머니가 끓여주신 그 설렁탕을 다시 먹는 기분이다. 모든 음식은 당일 준비된 것만 판다고 하는데 저녁에 가면 재료가 떨어져 먹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부추김치, 배추김치, 파김치, 등등 김치 종류가 바뀌면서 많이 나오곤 하는데 모든 김치는 할머님이 직접 담그신다고 한다. 그리고 원이조 설농탕에서 가장 독특한 것은 설렁탕에 소면이 아니라 메밀면(소바)을 넣어준다는 것. 소바향이 풍겨나면서 여기에 빨간 양념장까지 풀어 먹으면 칼칼하고 시원하다.

     

    원이조 설농탕 메뉴판 이미지
    원이조 설농탕 메뉴판

    가격도 저렴한 편으로 설렁탕 한 그릇에 8000원이다. 설렁탕엔 고기가 가득 들어있어서 마음도 배도 실컷 부르고 만족스럽다. 설렁탕 한 그릇인데 이상하게 몸보신 되는 느낌이다. 제주도민들이 대개 그러하듯 지나친 친절은 없어도 자주 가면 알아봐주시기도 하고 아이를 데려가면 좋아하신다. 이곳을 자주 찾는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오래된 설렁탕집이라서가 아니라 항상 진심과 정성이 느껴지는 반찬과 국물 때문에 잘 되는 거라고 한다. 10년 전 학창시절부터 원이조 설농탕의 단골이라는 지인은 가성비도 좋지만 이곳에서 먹는 밥은 이상하게 더 든든하다며 추천하곤 한다. 


    원이조 설농탕은 제주공항 근처 유명한 전농로 거리에 있기에 여행객들에게도 돌아가기 전에 한번쯤 들러 맛보고 가면 좋겠다. 50년 된 원이조 설농탕은 사장님 부부의 연륜이 묻어있는 가게로 도가니탕, 수육 등 메뉴도 다양하고 몸과 마음이 서늘해지는 시기가 되면 꼭 한 그릇 먹고 싶어지는 설렁탕이다. 

  • 평택시민들의 허기를 책임지는 지성원

    송탄에는 유명한 음식집이 생각보다 많다. 송탄 부대찌개로 유명한 김네집, 최네집 등이 있으며 방송 프로그램에서 몇 번 언급된 미스리 햄버거도 있다. 그 외에도 백종원이 방문해 유명해진 분식집도 있다. 그러나 송탄 토박이로서 송탄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음식집 중 하나는 지성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성원은 평택시 지산동에 위치한 중국음식점으로 영업시간은 오전 10:30~20:50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무이다.

     

    지성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13년이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배가 고팠는데 돈이 별로 없었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도 있었지만 그날따라 분식집에 가기 싫었고, 그러던 중 친구가 알바하는 지성원이 생각났다. 꽤 거리가 멀었지만 열심히 걸어서 지성원에 갔다. 당시 짜장면의 가격이 2,500원이었다. 가난하고 매일 먹어도 배고팠던 고등학교 시절 혜성같이 등장한 지성원은 혁명 같은 곳이었다. 가격도 저렴한데 맛도 있고 양도 많았다. 짜장면의 양은 항상 배고픈 고등학생의 배를 채우고도 남았다. 거기다가 갓 나온 따끈따끈한 탕수육은 얼마나 맛있는지! 저렴하다고 하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탕수육 가격이 비쌌는데 갈 때 마다 친구들과 돈을 모아 사먹었던 기억이 난다. 

     

    지성원 탕수육 이미지
    지성원 탕수육
    지성원 짜장면 이미지
    지성원 짜장면


    지금은 가격이 조금 올라 짜장면 3,000원, 탕수육 9,000원, 짬뽕 4,000원이다. 여전히 저렴한 가격을 자랑하고 있다. 볶음밥 등 밥류는 5,000원에서 시작하며, 요리도 대부분 2만원 내외로 먹을 수 있다. 다른 요리 메뉴도 다른 중국음식 전문점에 비하면 저렴하다. 여러 명이 가면 다양한 메뉴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 때문인지 지성원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혼자 간단하게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 가족끼리 먹으러 온 사람, 포장을 하러 온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한다. 배달을 하지 않아 방문해서 먹어야 하고, 매장이 넓지 않아 가게에 사람이 항상 가득해서 그런지 활기가 넘친다. 

    많은 평택시민들이 방문하는 지성원에서는 가끔 아는 사람을 마주치기도 한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과 음식점에서 마주치는 것은 뭔가 두근거리고 신기한 기분이다. 지성원이 평택시민들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짜장면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음식이다. 또 특별한 때에 먹는 음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지성원에 얽힌 추억 하나 없는 송탄시민은 없을 것이다. 혹시 오랜 시간동안 평택시민들의 허기를 책임지고 있는 지성원을 모르는 평택시민이 있다면 싸고 저렴한 가격에 맛도 있고 활기찬 기운이 넘치는 지성원에 꼭 방문하기를 바란다. 

  • 속이 뻥 뚫리는 매운 우동집, 수원 깡우동

    수원 깡우동은 수원 영통구 먹자골목의 한 골목에 있다. 지금은 체인점도 몇군데 있지만 이곳이 본점이다. 학창시절,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먹자골목 근처의 학원에 곧장 가곤 했는데, 생각해보면 항상 터줏대감처럼 그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빠르게 바뀌는 다른 가게들과는 달리, 살짝 낡은 외관과 촌스러운 간판을 가지고 늘 그 곳에 서 있는 깡우동. 

    학원이 끝나고 나오는 10시쯤에는 얼굴이 빨간 어른들이 가게 앞에서 아이처럼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친구들과 항상 “우리 나중에 어른이 되면 저기서 술 먹자”며 우정을 다짐하곤 했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그 해 겨울, 친구들과 함께 모여 그곳에서 우동 한 그릇에 소주 한 잔을 마시며 각자의 미래를 그렸다. 아이러니 하게도 깡우동은 갓 스무 살이 되는 아이들이 포부를 얘기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냄새가 가득했던 그런 곳이었다. 오히려 40대쯤 되는 아저씨들이 퇴근 후에 우동과 소주 한잔을 즐기며 과거를 돌아보기 좋았던 곳이라 하는 것이 맞겠다. 그럼에도 깡우동에서 술을 먹던 빨간 얼굴의 어른들을 보고 자란 우리는, 마치 그 곳에서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곤 했었다. 

     

    수원 깡우동 이미지
    수원 깡우동


    이 오래된 가게에는 메뉴가 4개뿐이다. 7000원 짜리 우동과 어묵, 8000원 짜리 어묵우동, 그리고 가장 비싼 18000원 짜리 어묵탕이 전부이다. 사실 이 가격을 들으면 ‘어? 우동치고는 조금 비싼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6000원, 그리고 더 이전에는 5000원이면 우동을 먹을 수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가격도 같이 올라 우동치고는 조금 비싼 가격이 되었다. 하지만 뜨끈한 우동 국물을 한 입 마시는 순간 가격에 대한 생각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우동과 어묵은 순한맛, 중간맛, 매운맛을 선택할 수 있는데 양념장으로 매운맛을 조절 해주시기 때문에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은 순한맛으로 주문한 뒤에 양념을 추가하는 것도 깡우동을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깡우동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국물이다. 깡우동만의 양념장, 쑥갓, 유부, 파 등이 들어간 이 국물은 추운 겨울에는 단단히 얼어버린 몸을 녹여주고, 더운 여름에는 더위로 지친 몸에 활력을 주며 이열치열이 무슨 의미였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국물은 술을 마시고 있지만 해장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게 만들기 때문에 사실 술안주로 최고다. 양념장이 들어가지만 짜지 않고 속이 뻥 뚫리는 이 국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이곳을 찾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깡우동의 면은 다른 우동집보다 얇고 쫄깃한 편인데 우동국물을 가득 머금은 유부와 면을 함께 먹으면 입 안이 우동향으로 가득해진다. 그리고 어떤 메뉴를 시켜도 항상 그 위에 쑥갓이 듬뿍 올라가 있어 향이 일품이다. 반찬은 단무지밖에 없지만 깡우동과 단무지의 조합을 먹고 있으면 다른 반찬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수원 깡우동 우동 한그릇 이미지
    수원 깡우동 우동 한그릇


    이 오래된 가게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인테리어다. 깡우동 내부의 벽은 노랗게 바랜 신문지로 덮여 있는데, 오래된 가게임을 증명하듯이 그때 그 시절하면 떠오르는 사건들부터‘인력구함’처럼 소소한 기사들까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가득하다. 우동 한 그릇에 우리 사회를 다시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물론, 늘 함께 간 사람들과의 대화에 집중하며 우동을 먹느라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신문은 그냥 벽지처럼 느껴지긴 한다. 

    신문지로 가득한 벽에 둘러싸여 동그란 스텐 식탁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친구, 가족, 애인과 특별할 것 없는 얘기를 하며 우동 한 그릇, 소주 한 잔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집의 가장 큰 매력이며 10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 경력 67년의 주방장이 요리하는 판교 동생춘

    동생춘 외관 이미지
    동생춘 외관(사진출처:월간토마토)

    판교 시장 근처의 중국집을 찾았다. 동생춘(同生春). 여태껏 만나 본 중국집 이름 중에 가장 특이하고 예쁘다. 간판에는 수타면 전문이라 쓰여 있다. 가게 앞에 사람이 북적북적하다. 출입문 앞에 주인아저씨로 보이는 캐리커처가 그려진 현판이 붙어 있다. 현판을 유심히 바라보다 출입문 앞에 서 있던 아주머니에게 “이게 뭐예요?”라고 물으니, “뭐긴 뭐여, 우리 아저씨지.”라는 간단한 답이 날아왔다. 알고 보니 아주머니는 동생춘의 주인이다.


    주방과 가까운 자리에 앉았는데, 창문을 통해 주방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주방에 있는 주인아저씨는 군밤 모자를 썼는데, 아저씨와 한 몸인 양 모자가 퍽 잘 어울린다. 오랫동안 중국집을 운영한 것 같아 이것저것 물었다. 독산리 굴이 최고라는 아주머니는 음식에 들어가는 해산물 사러 기차를 타고 대천이며 웅천이며 다닌다고 한다. 아저씨는 요리를 한 지 67년이 되었다. 고향이 예산이라고 한다. 아저씨는 10살이라는 어린 나이 때부터 예산에 있는 중국집에서 주방일을 했는데, 그 중국집 이름이 '동생춘'이었다고 한다. 예산에 있던 동생춘이 없어지자, 그 이름을 빌려와 서천에서 다시 열었다.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일을 했냐고 물으니, 아저씨는 말이 없다. 아저씨를 대신해 아주머니는 “그때 10살이면 으른이여. 아주 막 못 먹고 눈치로만 살은 사람이여.”라고 답해줬다. 

     

    동생춘 주방장 이미지
    동생춘 주방장(사진출처:월간토마토)


    주인아주머니는 예산 인근 지역에서 태어나 자랐다. 젊은 적에 미모가 빼어나 남자깨나 울렸다고 한다. 미스코리아였을 것 같다는 말에 “아휴 옛날에는 그랬는데 진에서 똑 떨어져서 말아 버렸지. 옛날에 인기도 많이 끌었어.”라며 농담을 던지곤 웃어 보인다. 아저씨도 젊었을 적엔 한 인기 했다고 말한다. 동생춘은 미남미녀가 하니 장사가 잘 안 될 수 없는 서천의 명물인 셈이다. 그렇게 선남선녀가 만나 연애하고 결혼해서 동생춘을 운영하며 아들 넷도 잘 길러 냈다.

     

    배도 든든히 채우고 한참 이야기를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은 어느새 추적추적 찬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주인아저씨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말없이 앉아 우릴 바라봤고, 아주머니는 “비와, 언능 가, 인제.”라며 배웅했다. 배나 채울 생각으로 들어갔다가 따끈하게 마음도 함께 채워 든든하게 길을 나섰다.

  • 대구 약전골목의 미도다방

    미도다방 골목 이미지
    미도다방 골목


    대구 진골목의 명소 미도다방에는 좋은 약재로 직접 달인 약차와 분말이 아닌 진짜 한약재를 넣고 푹 끓인 쌍화차가 있다. 미도다방의 약차와 쌍화차가 다른 곳보다 특별한 이유는 미도다방이 위치한 남성로의 약전골목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경북 지역에서는 한약재가 많이 생산되었다. 이 약재들을 사고 파는 시장이 조선 효종 때 대구에 생겨났다. 바로 대구약령시의 시작이다. 예전의 약령시는 봄과 가을에만 열리는 계절장이었다. 일제의 시장 탄압에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장으로 변모하면서도 대구의 약재상들은 약령시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한국전쟁 이후 약령시는 상설시장, 지금의 대구 약전골목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렇게 약재 냄새가 오래 밴 대구 골목의 다방이기에 미도다방의 약차는 어쩐지 더 깊은 맛이 우러나는 듯하다.

     

    미도다방에 가면 대구 향토 시인 전상열의 ‘미도다향’이 크게 쓰여 있다. 시의 어렴풋하던 표현들과 특히 ‘한 시대의 시간벌이’란 시구가 미도다방에 들어가 앉으면 비로소 와닿는다. 오래된 다방 소파, 나무로 된 가리개, 쌍화차 향, 햇살 속에서 어르신들이 추억을 팔아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 벌고 계신다. 그 특유의 생동감에 젊은 사람들도 덩달아 시간여행을 하는 곳이다. 

     

    ‘아름다운 도시(美都)’ 속의 다방(美都)이라는 뜻의 미도다방. ‘정 여사’로 불리는 정인숙 대표가 지인의 다방을 넘겨받아 1982년부터 30년이 넘도록 운영 중이고, 두 번의 이사 후 지금의 위치인 진골목 안쪽에 자리 잡은 것은 2013년이었다. 미도다방을 그저 오래된 곳이라고만 하면 아주 아쉽다. 그 이유는 대구·경북 지역의 대통령부터 정치인과 유림, 문인, 화가들이 다녀가는 명소였기 때문이다. 이인성 화백이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고 소설가 김원일이 새로운 작품 구상에 시간을 쏟았다. 이미 알고 있듯 전상열 시인은 타계 직전에 ‘미도다향’이란 시를 발표했다. 지금도 벽에는 옛 문인들의 흔적으로 그림과 글씨가 가득하다. 더불어 손님들이 기증한 여러 작품들이 다방의 다소곳한 분위기를 돋우어준다.

     

    옛날만 못하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옛 추억의 보따리를 가슴 속에 매어 메고 사람들이 찾아온다. 주로 60~70대 이후 어르신들이고 절반은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단골들이다. 요새는 소문을 듣거나 근대골목투어로 서울, 부산 등 멀리서 오는 젊은 사람들과 외국인 관광객들도 들른다. 


    미도다방 내부 이미지
    미도다방 내부


    오랜 시간 변함없이 다방을 꾸려오는 ‘정 여사’께서는 테이블마다 잠시 앉아서 손님들의 말동무가 되어준다. 가는 손님은 한 명, 한 명 문 앞까지 나가 인사한다. 이렇게 다정한 가게 주인은 처음 본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자신의 지나간 시간을 다시 벌어드릴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의 장수비결은 한 사람의 변함없이 따뜻한 마음 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본도, 현대인도 아닌 어르신들에게만 딱 맞춘 듯 한 미도다방의 모든 요소가 30년 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고객에 대한 존중과 존경 그리고 사랑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도다방은 지역사회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봉사회를 만들어 장학금 기부, 독거노인 봉사, 어버이날 먹거리 잔치를 한다. 동짓날에는 팥죽잔치를 벌이는데 해마다 500명 가까이 모인다고 한다.

     

     미도다방의 커피 값은 2500원이다. 쌍화차와 약차도 3500원~4000원으로 어르신들이 매일 들르시기에 부담이 없는 가격이다. 그 착한 가격에 차 한 잔만 시켜도 옛날 과자를 푸짐하게 내어준다. 또 노란 생강편이 나와 설탕에 콕 찍어 먹으면 어른스러운 입맛을 느끼기에 제격이다. 

  • 의왕 고천동의 국수 뽑는 국수가게

    의왕시 고천동은 오밀조밀 가깝게 붙은 주택 사이로 골목이 정겨운 마을이다. 좁은 골목 어딘가에서 한 무리 꼬마들이 함께 어울려 놀자고 소리치며 달려 나올 것만 같다. 


    고천동 골목골목을 쏘다니다 보니 국수 뽑는 가게와 국수 끓이는 가게가 나란하게 붙어있는 모습이 보인다. ‘칠갑산국수’라는 간판을 보니 칠갑산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니 좁은 가게 안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국수 만드는 집기들을 볼 수 있었다. 국수를 직접 뽑아 말려서 납품하는 모양인지 국수 뽑는 기계와 말리는 건조대까지 모두 갖춰져 있다. 쑥 국수, 잔치국수, 칼국수 등 면의 종류에 따라 뽑아내는 기계도 달라진다. 

     

    ‘칠갑산국수’는 수작업으로 국수를 만드는 곳이다. 의왕시에서 유일하게 남은 ‘국수 뽑는 집’이다. 1950년생인 전덕순 님은 시누 남편이 운영하던 가게를 물려받았다.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부터 세어보면 어느덧 30년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칠갑산국수’는 충남 청양 칠갑산이 전덕순 님의 고향이라 붙인 이름이다. 

     

    칠갑산국수 외관 이미지
    칠갑산국수 외관


    수작업으로 국수를 만드는 공정은 여러 단계를 거친다. 우선 밀가루를 그릇에 넣어 물로 반죽을 하고 기계를 돌려 면을 뽑는다. 그다음 대나무로 된 건조대에 면을 걸어서 이틀 정도 말리는데,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자연스럽게 부는 바람에 말리는 것이지만, 상황에 따라 선풍기를 돌려가며 말리기도 한다. 

     

    한겨울에는 손님도 적고 작업이 힘들고 날이 더우면 반죽이 금세 굳어진다. 국수는 날씨에 매우 민감하고 건조가 중요해서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은 국수 말리기가 쉽지 않다. 


    칼국수용 면은 반죽할 때 소금을 쓰지 않는다. 칼국수를 조리할 때 대부분 우려낸 국물에 면을 넣어 끓여 먹기 때문에 국물에 간이 배는 것을 고려해서 반죽할 때 간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일반 잔치국수용 면은 반죽할 때 적당량의 소금물을 쓴다. 그래야 더 맛있는 국수가 만들어진다. 잘 마른 국수는 일일이 잘라서 개별포장을 한다. 국수 한 묶음이면 15명이 먹을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국수 한 묶음 가격이 5,000원. 10년 동안 변함없는 가격이다. 어째서 가격이 변함이 없냐고 물으니 밀가루 값이 변함없으니 국수 가격도 변함없이 판다는 주인아주머니의 당연하다는 듯 한 대답이 돌아왔다. 

     

    ‘칠갑산국수’는 주로 소매로 많이 팔린다. 도매로 나가거나 영업점에 납품하기엔 단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오랜 기간 믿고 찾는 단골이 사 간다. 작년까지만 해도 장사가 잘되었다는데, 올해처럼 힘들어 보기는 처음이라고 하신다. ‘칠갑산국수’ 가게가 있는 고천동 지역이 재개발 예정지역으로 정해지며 점차 손님이 줄어들었단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선물한다고 찾아오는 단골들이 있어요. 부모님 계신 경로당에 단체로 선물한다고 사가기도 하고, 아무래도 연세 있는 어르신들이 국수를 좋아하니까, 젊은 사람들은 라면을 좋아하잖아. 나이가 좀 있는 단골들이 많은 편이에요. 우리 집 국수를 한번 먹어보면 시중에 파는 국수를 못 먹어요. 맛이 확실히 다르거든. 우리 가게가 문이 닫혀있어서 어쩌다 찾아온 단골들이 국수를 못 살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시중 국수를 사 먹었다가 후회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 국수는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던 든든한 한 끼 식사였다. 쌀이 귀하고 밀가루가 흔했던 그 시절, 집에서 식사 대신 국수나 수제비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국수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던 음식이다. 조선시대에는 국수는 아주 귀한 음식이었는데, 주로 혼인이나 환갑, 돌잔치 같은 경사스러운 날 잔칫상에 올라가던 음식이었다. ‘잔치국수’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나왔다. 결혼을 앞둔 이들에게 언제 국수 먹여줄 거냐고 묻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칠갑산 국수’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국수도 단연 잔치국수다. 옛날에는 시장이나 터미널, 기차역처럼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가락국수집이 보이곤 했다. 급하게 기차를 타기 전에 후루룩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국수는 많은 사람에게 가슴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칠갑산국수’를 나와 이웃한 국숫집에 들어섰다. 따끈한 멸치육수에 금방 끓여낸 국수 한 그릇을 받아들었다. 국수 뽑는 가게와 국수 끓이는 가게가 서로 이웃하며 정겹게 지켜온 마음씨만큼이나 ‘칠갑산국수’의 면과 ‘국숫집’ 국물의 맛이 조화롭다. 따끈한 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고천동 골목 사이를 걷는다. 국수 한 그릇으로도 온전히 채워질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콧잔등에 돋아난 땀을 닦는다. 

  • 50년 전통의 경양식집, 동두천 56하우스

    동두천 상패교 앞에 위치한 동두천 56하우스는 대를 이어 운영하는 오래된 경양식 집이다. 이곳은 오충호 대표의 부친이 미군 부대에서 셰프로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1969년에 문을 열었으니 그야말로 50년 전통의 경양식집이다. 56하우스라는 이름은 ‘오’씨 가족 ‘6’식구가 운영한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56하우스 외관 이미지
    56하우스 외관


    50년 전통의 한식집은 낯설지 않지만 50년 전통의 양식집은 보기 드물다. 56하우스를 이어받은 오충호 대표는 미군 부대 옆에서 미국의 문화를 어려서부터 익혔기 때문에 50년 전통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동두천에는 경양식이 하나의 문화로 형성되어 있었다. 도시락에 계란 하나 넣기도 힘들었던 시절이었지만, 미군 부대가 주둔한 동두천은 햄버거를 비롯한 미국 음식이 흔했다. 오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도넛이나 바나나 우유 등 귀한 미국 제품들을 맛보며 자랐다. 미국의 맛이 익숙했던 당시 동두천 일대에는 햄버거나 피자를 비롯한 경양식을 하는 식당이 즐비했다. 그중 지금까지도 전통을 지키고 있는 곳은 56하우스뿐이다.

     

    56하우스의 입구에 들어서면 살아있는 랍스터가 수조에서 반긴다. 입구 모습도 그랬지만 내부 인테리어에도 7, 80년대의 정서가 가득 담겨있다. 그 시절 고급 레스토랑을 찾아갔던 특별한 날의 향수마저 느껴진다. 이런 풍경 때문일까. 56하우스를 자주 찾는 방문객들은 종종 50년 동안 변함없는 맛이라고 외치곤 한다. 그러나 오 대표는 50년 전의 그 맛은 아니라고 말했다. 미군이 주 고객층이었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미군부대 이전으로 미군이 줄었다. 이 때문에 오 대표는 한국인 손님들을 대상으로 맛을 조금씩 변화시켜왔다.

     

    오 대표는 어려서부터 56하우스에서 요리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요리를 하게 되었다. 동두천에서 유명 호텔까지 출퇴근을 하면서도 어머니와 아내를 도와 56하우스 메뉴 개발에 힘썼다. 그가 막상 호텔을 그만두고 56하우스를 경영하려고 보니 막막했다. 요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한국인으로 고객층을 바꾼 것도 그 시기였다. 그때부터 음식에 밥이 곁들여 나오고 김치와 단무지를 반찬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56하우스 내부 이미지
    56하우스 내부


    샌드위치 가게에서는 샌드위치, 파스타 가게라면 파스타만 주력으로 파는 형태로 고급화 된 현대의 식당과 달리 56하우스는 오랜 경양식집답게 메뉴판의 메뉴도 화려하다. 이렇게 많은 메뉴를 고루 맛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오 대표가 그만큼 노력하고 공부한 결과이다. 랍스터는 수조에서 꺼내 싱싱한 상태로 조리한다. 스테이크 소스는 직접 레드와인을 졸여 만든 비법 소스이다. 이런 랍스터 요리와 스테이크를 함께 먹을 수 있는 56하우스 스페셜부터 다양한 스파게티나 라이스 등의 메인메뉴도 눈길을 사로잡지만, 직접 만든 패티가 들어간 56하우스의 햄버거도 빼놓을 수 없는 이곳의 자랑이다. 계란이 들어간 햄버거는 어린 시절 운동회 날 먹었던 햄버거 맛을 떠올리게 한다. 포장도 가능하기 때문에 햄버거 포장을 주문하는 손님도 많다.

     

    동두천 일대의 도시개발로 56하우스의 음식 맛을 고향의 맛처럼 느끼던 이웃 주민이 많이 사라졌다. 그 때문에 56하우스에는 동네 주민 보다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찾아오는 외지인의 비중이 늘었다. 그 중에는 몇 십 년 전 56하우스에서 식사를 했던 손님도 있다. 2, 30년 전의 추억을 느끼려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연애할 때 오던 손님이 손주를 데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오씨 가족이 6명에서 5대가 될 정도의 시간이 지났지만 오 대표는 5년 정도 밖에 지나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동두천에 관한 추억이 없는 사람도 그 시절의 향수를 가지고 있다면 56하우스를 방문하기 위해 동두천으로 발걸음을 향할 이유가 충분해 보인다.

  • 미곡집산지 군산의 카페 미곡창고

    군산은 스탬프 투어 코스가 여러 개로 나뉠 만큼 볼거리가 많아 여행하기 좋은 도시이다. 근대문화가 도시 곳곳에 남아있어 군산 여행의 테마는 ‘시간여행’이다. 군산 거리를 걷다보면 근대 일본목조 가옥이 보이고, 그와 관련한 체험관이나 전시관이 군데군데 분포해있다. 관광이 발달한 도시인만큼 군산에는 맛집이나 카페가 많다. 카페 미곡창고는 도시재생 카페로 유명하다.


    가게 이름부터 알 수 있듯 카페 미곡창고는 농협 미곡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카페이다. 1961년 시작된 종합농협의 창고사업으로 늘어난 농협의 미곡창고들은 2000년대에 여러 가지 이유로 개수가 감소했다. 이에 버려지던 전국의 농협창고는 다양한 공간으로 변신을 꾀했다. 군산의 카페 미곡창고 역시 그 중 하나이다.

     

    미곡창고 외관 이미지
    미곡창고 외관


    카페 입구 전면에 농협의 마크와 “협창고”라는 초록색 글씨가 보인다. 문 위로 유리창을 높게 올린 탓에 ‘농’자는 사라지고 없다. ‘협’자 역시 미곡창고의 대회 수상을 알리는 현수막에 거의 가려졌다. 전면의 왼쪽으로는 카페 미곡창고의 간판이 걸려 있다. 옆면에는 협동 생산 공동 판매라는 글자가 남아 농협창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농협창고의 모습 그대로를 거의 유지한 카페 미곡창고는 창을 크게 내어 창고의 갑갑한 단점을 보완했다.


    내부 역시 미곡창고의 모습을 그대로 살렸다. 가게의 가장자리 쪽에 복층을 조금씩 올려 높은 천장의 탁 트인 개방감을 느낄 수 있게 공간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농협창고의 허름한 외관과 다르게 내부는 카운터 진열장이나 테이블, 의자를 비롯하여 갖가지 소품에도 신경을 써서 상당히 현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지녔다. 또 한쪽 복층에는 소파와 낮은 테이블을, 다른 쪽 복층에는 의자와 높은 테이블을 두어 각기 다른 분위기로 구성하였다. 1층의 미곡 갤러리는 벽면에 그림을 많이 걸어놓아 갤러리에서 커피를 마시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카페 공간 외에도 커피 로스팅 공간, 베이커리 공간, 커피 학원 공간 등의 작은 공간이 있었다.

     

    군산에는 카페 미곡창고의 전신인 농협 창고 외에도 쌀과 관련한 건축물이 많다. 군산은 오래전부터 호남평야의 쌀이 모이는 미곡집산지였다. 군산항은 1899년에 개항하여 일제강점기 때는 쌀 수탈의 관문이 되었다. 한국의 땅값이 일본의 10분의 1정도였기 때문에 많은 일본인들이 군산의 땅을 매입했다. 일본인 농장주 아래에서 일을 하는 소작농민은 주로 조선인이었다. 일본인은 군산의 여건 좋은 평지에 살았고, 조선인의 거주지는 산비탈과 산기슭으로 밀려났다.

      

    미곡창고 내부 이미지
    미곡창고 내부


    이러한 수탈의 역사는 현재 군산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미곡창고를 개조한 장미공연장과 장미갤러리가 있다. 장미는 장미꽃이 아닌 ‘쌀 곳간’을 의미한다. 그밖에도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나 구 조선은행이었던 근대건축관, 3·1운동100주년기념관 등에서도 당시 군산의 시대적 상황이 잘 설명되어 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는 군산의 쌀과 관련하여 됫박에 곡물을 담아보는 ‘단위 체험’과 쌀가마니를 이고 가던 지게를 메는 ‘지게체험’등을 할 수 있고 3·1운동100년기념관에서도 수탈된 쌀을 반출하는 군산항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카페 미곡창고는 3·1운동100주년기념관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군산에 도착해 근대거리 탐방을 모두 마친 뒤 들른 카페 미곡창고. 넓고 트인 미곡창고 안은 그동안 보고 느낀 군산의 근대문화를 곱씹기에 좋은 공간이다. 또 매장 한쪽에 각종 상패를 걸어놓을 정도로 커피에 자신 있는 전문 바리스타의 커피는 카페 미곡창고가 단순히 카페 공간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유기농 밀로 직접 만든 빵도 카페 미곡창고의 빠질 수 없는 자랑이다.


    카페 미곡창고는 군산역에서 멀지 않다. 군산역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전, 카페 미곡창고의 커피와 빵으로 여행의 기분 좋은 피로를 풀어보자. 카페 미곡창고는 군산 여행의 든든한 마무리가 되어줄 것이다.

  • 30년 한 자리를 지켜온 꾸러기분식

    누구나 학창시절을 회상해보면 떠오르는 추억의 분식집이 하나씩 있을 것이다. 하교하는 길에 들러 친구들과 먹은 기억, 점심시간에 외출증 끊어서 몰래 떡볶이를 먹고 들어온 기억, 그리고 야자 중간 저녁시간에 잠깐 나가 친구들과 수다 떨며 먹은 기억.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중했던 시간들과 빛바랜 추억 속 떡볶이 집이 그리울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때를 대비하여 강동구 주민 20년차로서 강동구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한 번씩은 꼭 가보았을 즉석떡볶이집을 소개하려고 한다.

     

    꾸러기분식 이미지
    꾸러기분식


    명일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사거리가 보인다. 사거리에서 직진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면 핸드폰 대리점이 있는데 한 칸 더 직진하면 그 사이에 골목이 있다. 이런 곳에 맛집이 있다고? 의문이 들 정도의 좁은 골목인데 조금 올라가면 약간은 예스러운 노란색 벽에 '꾸러기 분식'이라는 빨간색 글자가 적힌 노란색 간판이 보인다. 가게 창문에 '명일역 짜장 떡볶이 맛집', 그리고 '톱스타 조인성이 즐겨먹는 짜장 떡볶이'라는 로고가 붙어있다면 잘 찾았다.

    동네 사람들한테는 톱스타 조인성이 단골이었던 떡볶이 집으로 유명하다. 이 근처에서 살았다는 조인성이 배재고에서 농구하고 이 곳 떡볶이를 먹으러 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예전에는 성덕여자상업고등학교 근처 떡볶이 맛집으로도 유명했는데 어느새 성덕여상이 성덕고등학교로 바뀌었다. 이렇듯 명일역 주변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꾸러기 분식은 30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여러 방송에서 소개되었는지 방영 당시 사진과 연예인들의 사진과 사인이 붙어있다. 물론 조인성 씨 사인도 있다. 가게 내부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상당히 느껴진다. 

    보통 즉석 떡볶이 집은 떡볶이 종류를 다양하게 파는데 이곳은 오직 짜장 떡볶이만 판다. 2인분에 11,000원, 3인분에 16,000원이다. 저렴한 가격은 아니지만 추억의 값이라고 생각하고 시켰다.

    프라이팬에 떡, 오뎅, 계란, 야끼만두, 라면사리 등 떡볶이 재료들이 담겨 나온다. 잡다한 재료들을 넣어먹는 것이 즉석 떡볶이의 소소한 재미다. 테이블마다 세팅되어 있는 가스레인지 위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벽면에 붙어 있는 사장님의 꿀팁 '꾸러기 짜장모듬 떡볶이를 맛있게 조리하는 법'을 참고해서 조리하면 먹을 준비 끝. 조리법은 다음과 같다. 불을 켜고 1분 후에 가운데를 중점으로 골고루 잘 저은 뒤 약 3~4분 후에 불을 약간 줄이고 천천히 저으면서 맛을 본다. 그렇게 3~4분 정도 후에 끄고 맛있게 먹는다.

     

    꾸러기분식 짜장떡볶이 이미지
    꾸러기분식 짜장떡볶이


    보통 짜장 떡볶이는 시꺼먼 색인데 여기는 갈색이다. 완전 짜장 맛이 아니고 일반 떡볶이에 춘장이 섞인 맛이다. 예전부터 완전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가끔 생각나는 추억의 맛이다. 꾸러기 분식의 비법은 양념장에 있다고 한다. 텁텁함을 없애주기 위해 파인애플과 사과를 넣고 우엉까지 넣어 끓여낸 육수가 비법의 핵심이라고 한다. 육수에 고춧가루와 고추장, 그리고 춘장을 섞어주면 꾸러기 분식만의 특별한 양념장이 완성된다고 한다.

    즉석 떡볶이의 마무리는 볶음밥이다. 이상하게 즉석떡볶이를 먹고 볶음밥을 먹지 않으면 포만감이 들지 않는다. 특히 꾸러기 분식의 비법인 떡볶이 양념장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선 볶음밥이 필수다. 떡볶이를 다 먹고 볶음밥을 시키면 남은 떡볶이 국물에 밥과 야채를 볶아주신다. 다 볶고 바닥에 꾹꾹 누르면 맛있는 볶음밥이 완성된다.

     

    학교 다니면서 자주 갔던 분식집이 꽤나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이전했거나 없어졌다. 남은 곳은 이곳이 유일한 것 같다. 즉석떡볶이를 좋아하고 2000년대 초반 특유의 감성을 느끼고 싶다면 꾸러기 분식을 강력 추천한다.

  • 문명개화한 음식점, 양식집

    서양요리는 개항기 조선에 소개되었다. 특히 궁궐에서 서양인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받아들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여사의 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보면 그녀가 1894년 무렵 명성황후의 주치의 릴리아스 호턴 언더우드 여사를 통해 경복궁에 초대되었을 때, 궁궐에서의 저녁식사가 놀랍게도 서양식이었다고 회상하였다. 그 식사는 수프를 포함해 생선, 퀘일, 들오리 요리와 꿩 요리, 과일, 적포도주와 커피 등이었다.


    릴리아스 호턴 언더우드 여사와 남편 언더우드 목사는 신혼여행으로 조선의 북부지방을 여행하다 도둑을 만난다. 평안북도 위원의 원님이 도둑과 도둑맞은 물건을 찾아주자 감사의 표시로 서양요리를 대접했는데, 그 요리는 스프, 생선, 화관과 딸기로 장식을 하고 사과소스를 치고 감자를 채워놓은 새끼돼지구이, 밤과 양파 등의 여섯가지였다. 크래커 위에 마말레이드를 얹은 것과 꿀을 탄 커피가 후식이었다. 비숍여사의 책을 참고하면 술도 있어야 하지만 언더우드 부부가 선교사였으므로 술은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전형적인 서양요리 형식이었다.


    이러한 서양요리를 개항기부터 손탁호텔 등 외국인이 운영하는 호텔이나 식당에서 판매하였다. 일제강점기에도 서양요리집이 있었는데, 서양요리에 일본인이 받아들여 변형시킨 요리도 추가되었다. 돈까스, 카레라이스 등이 그것이다. 서양요리집의 주인은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식사를 도와주는 사람을 ‘뽀이’라고 부르고 여자가 그 일을 하기도 했다. 1920년대 서울에 있던 양식집에선 전등 아래 백설같은 하얀 상보를 식탁에 깔아 놓았다. 보이가 메뉴판을 가져오면 음식과 함께 술도 주문하는데 주로 포도주를 주문하였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뽀이에게 팁도 주었다.(『동아일보』1922.03.08 「소설 : 소의 암영」) 식사가 끝나고 후식으로 커피와 홍차 중 하나를 택하여 마셨다.


    양식은 굉장히 비쌌다. 1930년대 풀코스의 양식이 10원이었는데, 당시 쌀 한가마가 9원 20전이었다. 쌀 한가마를 사면 4-5식구가 1달을 먹으므로 한 가정의 1달치 기본 식비를 양식 풀코스 한 끼 식사로 쓰는 것이었다.(『동아일보』1933.02.27 「당선희곡 : 심판」) 정식 코스요리로 양식을 시키면 상당히 비쌌으므로 양식집에서는 메인 메뉴에 후식을 별도로 팔아 가격을 낮추기도 했다.


    양식집에서 핫케익을 시켜 먹으면 상당히 비싸므로 집에서 해먹는 법을 알려주는 신문기사도 있다. ‘양요리집에서 하트케익 한 접시 달라고 하면 한 접시 20전이나 25전에 해다주는 것이 있습니다. 먹어보면 일미요 한 그릇 더 먹고 싶지만 값이 비싸서 못 먹습니다. 집에서 값싸게 만들어 잡수어 보십시오.’라고 기사를 시작하고 있다.(『동아일보』1937.12.16 「화로끼고 해먹기 좋은 서양밀전병」) 백화점의 양식집에서 차 한잔을 마시며 옆에서 점심으로 양식을 먹는 조선인 커플이 나이프로 고기를 찍어 입에 넣는 것을 지적하는 글도 있다.(『동아일보』1936.06.06 「의상의 고현학(4) 시정에서 본 식민지 청년」)


    서양요리가 일본화한 돈까스나 카레라이스는 양식집에서 비교적 싼 값으로 판매하는 식사였다. 열차 안의 식당에도 양식을 팔았는데 1930년 국가가 가격인하를 유도하면서 열차식당의 음식값이 내리게 되었다. 식당열차의 양식 중 1원은 80전으로, 1원 50전은 1원20전으로 값을 내렸는데(『동아일보』1930.01.09 「기차식당도 식가를 감하」) 정식 서양요리는 10원 정도였는데, 1원이나 1원 50전인 것은 돈까스나 카레라이스같은 단품요리였던 것 같다. 이러한 단품요리에 커피나 홍차같은 후식이 제공된 것이다.

    1930년 1월 9일 기차식당도 식가를 감하
    1930년 1월 9일 기차식당도 식가를 감하(사진출처:동아일보)

    해방 후에도 양식집은 있었다. 6.25때 피난지 부산의 하꼬방에서 양식 정식을 팔았는데 오트밀(900원), 파인애플주스(700원), 토스트(700원)의 구성이었다.(『동아일보』1951.05.04 「십자군」) 6.25 전쟁 후 서울 중심가에는 양식집이 다시 문을 열었는데 중구에 특히 많았다. 정부가 유흥세 징수를 위해 요금영수증 발행 우량 상점에 표창하였는데, 표창받은 상점 중 중부세무서 소속으로 컨티넨탈(양식), 태극크릴(양식), 호수(양식) 등의 양식집들이 보인다.(『경향신문』1955.05.08 「사세청서 업자표창 유흥세 납부 호성적」) 호텔 내에서도 양식집이 개업하였다.


    오늘날 양식은 다양화되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이 생기면서 스테이크나 샐러드 등 먹고 싶은 음식만 먹을 수 있고, 여전히 격식을 갖추고 풀코스로 양식을 제공하는 식당도 있다. 돈까스나 카레라이스는 양식집을 벗어나 현대에는 전문점이나 일반 음식점에서 판매하는 음식이 되었다.

  • 근대 신문으로 보는 음식

    음식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까지 세금은 쌀로 냈다. 베로도 세금을 냈지만 베보다 중요한 것은 쌀이었다. 조선 시대까지 흉년이 들면 스스로 노비가 되거나 자식을 노비로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 이상 팔 것이 없는 사람은 도적이 되기도 했다. 흉년 등 음식이 부족한 시기에 사람들은 극한 상태에 이르렀다. 


    1876년 개항 이후 우리나라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이 변화가 음식에도 많이 반영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없었던 음식이 들어오거나 아주 적었던 음식이 많이 들어오게 되었다. 원래 있던 음식이 변화를 겪기도 했다. 이러한 음식의 변화는 자본주의가 개항기 이후 한반도에 정착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근대에 들어 세금을 쌀로 내지 않았다. 돈으로 냈다. 물론 근대에도 소작인들이 소작료를 쌀로 냈는데 이 쌀은 미곡상을 통해 언제든지 돈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일제시기 조선의 돈은 일본의 돈과 같았고 일본의 돈은 미국의 달러나 영국의 파운드 등으로 쉽게 교환되었다. 근대에 본격적으로 세계는 돈을 통해 긴밀하게 묶였다.


    근대에 다양한 음식점이 생긴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으로 이주한 중국인 중 영세한 사람들이 호떡집 등 음식점을 운영했다. 음식 자체로 돈벌이가 쉽지 않으면 사람을 상품으로 내놓기도 했는데 근대의 까페, 선술집 등이 그러한 예이다. 근대에 들어 노비가 되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술집에 팔리는 여성이 많은 것은 근대가 돈을 쫓는 시대라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까지 흉년이 들면 부잣집에 노비로 팔렸고, 근대에는 가장의 빚 때문에 술집에 팔리는 아내와 딸이 생겼다. 근대의 술집은 농사를 짓는 부잣집보다 더 많은 돈이 오고 가는 곳이었다.

    오미자 스파클링 와인 '오미로제'
    오미자 스파클링 와인 '오미로제'

    근대에 들어온 외래음식으로 맥주·포도주·청주 등 술, 사이다 등 음료수, 빵·사탕·과자 등 간식거리가 있다. 이것들의 특징은 공장에서 대규모 생산을 한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공장에서 이런 제품들을 생산했지만, 공장의 소유주는 거의 일본인이었다. 조선인이 일본인 공장에서 일해서 임금을 받았는데 그 공장 제품을 산 사람이 조선인이므로 결국엔 조선 대중이 조선 노동자에게 임금을 주는 것이었다. 조선인 노동자는 조선에 사는 일본인 노동자보다 임금이 쌌다. 일본인 가게나 기업은 인건비 절감을 위해 조선인을 고용했다. 그러함에도 일본인 기업가는 조선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큰 은혜라고 주장하였다.


    근대에 들어 재래음식도 변화를 겪는데 변화의 방향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다. 농사용 소는 고기와 가죽을 쓰는 가축이 되었고, 돼지·닭도 고기와 달걀을 더 많이 주는 쪽으로 길러졌다. 조선 시대까지 조선 내의 필요를 충분히 해결했던 수산업은 근대에 들어 일본, 중국 등으로 수출하는 품목이 되었다. 따라서 엄청난 양을 잡았는데 이 시기부터 명태나 동해안의 전복, 민어, 고등어, 대구, 조기, 고래 등은 씨가 마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올 정도였다.


    조선 시대부터 있던 음식인 설렁탕, 비빔밥, 냉면, 신선로, 편육, 육개장, 팥죽, 빈대떡 등은 근대기 음식점이 늘어나면서 인기 있는 외식 메뉴가 되었다. 근대에 수입량이 많아지면서 우리의 식생활에 자리 잡은 대표적인 식품은 설탕과 밀가루였다. 설탕은 대만의 사탕수수를 수입해서 평양의 제당 공장에서 만들었고, 밀가루는 미국이나 호주 등지에서 밀을 들여와 용산 등의 제분공장에서 밀가루로 만들었다. 설탕과 밀가루는 원료의 원가가 워낙 쌌기 때문에 근대기부터 대중화될 수 있었다.


    근대기 재래음식의 큰 변화는 막걸리나 약주 제조에 세금을 매겨 국가가 통제하는 바람에 약주와 전통 소주가 거의 사라진 것이다.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만들고 남은 폐기물인 당밀을 공업적으로 발효하여 함수 알코올을 만들고 이 알코올을 희석한 소주가 1920년대 개발되었다. 당밀의 원가가 워낙 낮아서 희석식 소주는 전통 소주보다 훨씬 쌌다. 그 대신 도수는 비슷했으므로 사람들은 희석식 소주를 마셨고, 원가가 비싼 전통 소주는 점점 생산량이 줄어 오늘날 희귀하게 되었다. 약주는 잘 상했는데 조선총독부는 이를 고려하지 않고 고율의 세금을 매겼다. 약주 생산이 줄어들면서 오늘날 제사에는 약주 대신 청주를 올리게 되었다.


    이러한 근대의 변화는 이 당시 신문을 통해 비교적 상세하게 나타난다. 신문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당대의 관심사를 반영하는데, 음식은 대중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신문은 매일 발행되므로 당대 음식의 변화를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준다. 음식의 변화를 추적하는 것은 그 사회와 사람들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이다. 

  • 요정의 시대는 갔어도 - 고창 조양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조양관은 원래 여관으로 지어졌다. 일반 건축물 대장에 기록된 연대는 1935년이지만, 실제로는 더 전에 지어졌다는 설도 있다. 여관으로 운영될 당시 상호는 ‘국일여관’이었다고 한다. 해방과 한국전쟁이 지난 후 음식점으로 용도가 바뀌었고, 내부와 외부 구조도 그에 맞추어 변화하기는 했으나, 여러 칸의 방으로 나뉘어 있어 여관의 흔적을 여전히 보여준다.


    여관과 음식점은 용도가 전혀 다른 공간이다. 하지만 한 세대 전만 해도 한국의 여관에서도 직접 음식을 조리해 손님의 방으로 가져다주었다. 일본의 료칸 서비스에는 요즘도 조반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그러므로 조양관은 지어진 때부터 지금까지 80년 넘게 음식과 인연이 깊은 공간으로 유지된 셈이다.


    한국전쟁 후 1950년대에 ‘국일여관’ 건물을 인수한 최계월은 전라북도 전주의 유명한 요정인 ‘행원’의 주방 책임자였다. 원래 ‘행원’의 예기(藝妓)였으나, 목에 이상이 생겨 주방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국일여관’은 숙박업을 접고, ‘조양관’이라는 일종의 음식점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쉽게 드나드는 식당이 아니라 고창에서 알아주는 요정이 되었다.


    전주의 ‘행원’과 고창의 ‘조양’은 창업자의 인연뿐만 아니라 역사 또한 흥미로운 점이 많다. ‘행원’은 원래 1928년 낙원권번으로 시작되었다. 권번이란 1890년대 조선시대 관기(官妓) 제도가 폐지된 이후 조직된 기생조합이다. 1908년 공포된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에 따라 기생조합은 서울 기생(경기)과 지방 기생(향기)으로 나뉘어 식민당국의 규제를 받았다. 낙원권번은 후일 ‘행원’이라는 요정이 되어, 1983년 한식당으로 바뀔 때까지 전주에서 꼽아주는 요정으로 영업을 계속했다. 현재 전주의 ‘행원’은 카페와 복합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고창의 ‘조양’은 1970년대까지 고창에서 가장 유명한 요정으로 번창했다. ‘조양’ 앞으로는 고창천이 흐르는데, 벚꽃 흐드러지게 피는 봄밤이면 ‘조양’의 2층 연회장에서 노랫가락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에 ‘오진암’, ‘대원각’, ‘삼청각’ 3대 요정이 있었다면, 전주에는 ‘행원’이, 고창에는 ‘조양’이 있었던 셈이다.


    고창 조양관


    ‘행원’, ‘조양’ 같은 업태는 사실 근대 들어 새롭게 등장한 영업 방식이다. 개항기에 일본인과 청나라 거류지를 중심으로 술과 여흥을 함께 파는 음식점들이 들어선 데다, 1909년 이를 한국식으로 변형시킨 명월관이 문을 열었다. 명월관을 연 사람은 대한제국 궁내부 전선사장(典膳司長)을 지낸 안순환(安淳煥)이다. 이후, 크고 작은 연회를 열 수 있고, 기예에 능한 기생들을 불러 공연까지 곁들이는 요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요정은 접대의 공간이다. 허기를 채우거나 맛을 즐기기 위해 찾는 음식점과는 달리 ‘한상 떡 벌어지게’ 차려놓고 과시하여 상대에게 만족감을 주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요정에서 차려내는 한상은 한 끼에 도저히 먹지 못할 만큼 음식과 반찬의 가짓수가 많다. 칼럼니스트 황교익에 따르면 ‘한정식’이라는 말은 이 같은 요정의 행태가 남긴 관행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왕도 평상적인 상차림은 7첩이 고작이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고창의 ‘조양’도, 전주의 ‘행원’도 1980년대 들어 사양길을 걷게 된다. ‘룸살롱’이라는 업태가 요정의 수요를 흡수해버렸기 때문이다. 비난의 어조가 다분했던 ‘요정정치’라는 말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시대가 바뀌자 ‘조양’은 요정이 아니라 ‘한정식’ 음식점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외지 손님이 고창을 찾아왔을 때 갈만한 고급 음식점을 지향했고, 이 전략은 성공적이었던 듯하다. 고창의 음식점 하면 ‘조양식당’을 먼저 떠올리는 지역 사람들이 많았다.


    고창 조양관 복도
    고창 조양관 복도


    ‘조양식당’ 건물은 2007년 등록문화재 제325호로 지정되었다. 고창읍내에 남은 유일한 일본식 주거시설이라는 점에서 평가를 받은 덕이다. 일식 시멘트 기와를 얹은 2층 건물(연면적 254㎡, 건축면적 188㎡)은 한눈에 봐도 일제강점기 건물이라고 직감할 수 있다. 


    지붕과 처마의 선도 일본식이고, 2층 외벽을 목재 비늘판으로 마감한 방식도 일본식이다. 물론 세월이 세월이고, 용도도 자주 변경되어서 변형은 많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식당 영업을 하고 있으므로, 보존과 활용이 비교적 잘 되고 있다고 평가된다. 


    2010년대 들어 휴업을 하고 리모델링을 거쳐 다시 식당 문을 열었다. 현재 옥호는 ‘조양관’이며, 서울 강남에 분관을 내기도 했다.


    조양식당 남쪽으로는 동리 신재효(桐里 申在孝·1812~1884)의 고택(서재)과 동리국악당이 있고, 조금 더 가면 고창읍성이다. 




    판소리 열두 마당을 정리한 동리 신재효와 그의 제자로서 흥선대원군 시절 경회루 낙성식에서 창을 해 명창으로 알려진 진채선(陳彩仙)은 모두 고창 출신이다. 신재효와 진채선의 이야기는 2015년 「도리화가」라는 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다.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때 축성된 읍성으로, 충청남도 서산의 해미읍성, 전라남도 순천의 낙안읍성과 더불어 현재까지 남아 있는 3개의 읍성 가운데 하나다. 고창읍성은 고창의 백제 시대 지명인 모량부리(毛良夫里)와 연관 지어 모양성(毛陽城)이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