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 주문진읍 주문진 6리와 12리에 있는 마을은 마을의 형상이 소 모양으로 생겨서 ‘소돌’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주문진 항구에서 양양 방면으로 가다가 보면 바닷가에 있는 마을이다. 유명한 아들바위가 있고 아들바위공원이 만들어져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마을에서는 매년 봄가을로 두 번에 걸쳐 해당화를 신목으로 모시는 해당화서낭당에서 서낭제를 지내고, 3년에 한 번씩 풍어굿을 올리는 전형적인 해안 마을이다. 마을은 마치 소가 옆으로 누워 있는 것처럼 길게 늘어져 있다. 마을이 소 형상이기 때문에 마을제사를 지낼 때 소고기를 쓰지 않고 닭을 쓰고 있다. 풍수에서 소 형상의 마을은 풍요와 자손의 번창을 이뤄준다고 한다. 소돌마을 사람들이 소와 돌을 가져다가 마을의 이름을 지은 것은 마을을 이상향으로 가꾸고자 한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한자로는 소 우(牛)자에 바위 암(岩)자를 써서 우암이라 부른다.
해안을 끼고 육지를 따라 길게 늘어진 우암은 마을 전체의 형국이 소가 드러누워 있는 모양이다. 소의 형국을 살펴보면 마을에서 매년 제를 올리는 해당화서낭당 남쪽 건너편 바다에 있는 바위가 소뿔에 해당하고, 바다를 바라보는 능선이 소머리와 몸통이며, 산기슭 서편이 소의 젖통에 해당한다. 그래서 젖통에 있는 집은 항상 부유하게 살고 있다. 소돌항으로 쓰는 곳이 먹이통인 소구유이다. 구유에 해당하는 곳은 어부들이 고기를 잡아 항구로 들어오므로 소에게 먹이를 주는 형상이어서 무엇이든 항상 풍부하다고 한다. 소돌 포구에 있는 수산물배양장 옆 죽섬[竹島] 주변으로 물이 통해 있어 목선이 드나들 수 있는 해로가 있고 유지공장 뒤 소나무 밑으로 내려가 뚝 떨어진 곳에 아름드리 말뚝바위가 있었으나 지금은 깨뜨려져 없다. 이곳은 소를 매어두는 말뚝이다. 또 배양장을 돌아가면 조그마한 샘이 있는데 이곳은 소의 눈에 해당하는 곳이고, 소젖에 해당하는 곳에서 조금 더 돌아가면 산이 움푹하게 들어갔는데 그곳이 소의 앞다리 부분이고, 이곳에서 고개를 넘으면 쇠똥골이 있다. 이곳은 소의 뒷부분으로, 그 형상을 보면 소가 동쪽을 향해 누웠다고 한다. 옛날 소돌마을 서낭제 때 쇠똥골 우물을 가져다 쓰면 풍년 풍어가 들며 모든 질병이 없어지고 건강하게 살았다고 한다.
신라시대 소돌 바닷가 마을에서 가난하지만 동네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어부가 있었다. 그 어부는 3대 독자인 아들과 함께 살면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었다. 어느 날 3대 독자인 아들은 전쟁터에 끌려가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러나 어부는 아들의 전사 사실을 통보받지 못했기에 어부 부부는 매일 용왕님께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었다. 하루는 꿈에 용왕이 나타나서 “소돌바닷가 죽도에 있는 큰 바위가 구멍이 뚫릴 때까지 소원을 빌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어부의 아내는 매일 죽도 바위 아래에서 아들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죽도에 있는 바위에 구멍이 나면서 아들이 보여서 반가움에 아들을 맞으러 갔는데 꿈이 깼다. 그 후 어부의 아내는 임신을 하였고 아기를 낳았는데 전쟁터에 나간 아들과 너무나 닮은 사내 아이를 낳았다. 사람들은 용왕이 오직 한마음으로 극진히 기도하는 부인의 정성에 감탄하여 아들을 환생시켰다고 말했다. 아들은 커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훌륭한 일을 많이 했다. 이후 죽도의 바위에서 소원을 빌면 한 가지씩 이뤄주고, 특히 자식이 없는 사람이 자식을 기원하면 꼭 이뤄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후에 아들바위로 불렀다.
1990년대 중반 자식을 낳지 못해 애를 태우던 부부가 어느 날 아들바위에 놀러오게 되었다. 그들은 나이가 많아 점점 아이 낳는 것에 대해 포기하게 되었는데, 그날 마침 주위에 사람도 없고, 바위 중간에 오목하게 패여 숨기 좋게 되어 있어 부부는 자식을 기원하며 그곳에서 일을 치렀다. 그 얼마 후에 이들 부부에게 태기가 있어 자식을 낳았는데 아들이었다. 이 부부는 나중에 다시 아들바위에 들렀는데, 그때 탔던 택시 운전수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해서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이후로 많은 신혼부부들이 첫 아들을 낳고자 택시를 타고 이곳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택시 운전수들 사이에서 이 바위는 아들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원래 소돌마을의 아들바위는 삼치가 많이 잡히는 곳이라 해서 삼치바위였는데, 아들바위로 소문이 퍼지자 강릉시에서 관광명소로 만들고자 공문을 내려 아예 아들바위라고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 1996년이고, 강릉시에서 관광지로 만들고자 아들바위로 명명한 것은 1998년이다.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입석리(立石里)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횡성읍 입석리 지명의 근원이 된 선돌은 춘원(春原) 국도변에서 30m가량 떨어진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앞 내 다리에서 우측으로 바라보면 숲속에 높이가 약 5m 되는 것부터 좀 작은 선돌 서너 개가 보인다. 바로 이 돌이 마을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그러니까 선돌이 한자로 바뀌어 설 립(立)자 돌 석(石)자 마을 리(里)자를 써서 입석리가 된 것이다. 일종의 부자 망한 설화로 보면 될 것이다.
옛날 입석리 마을에는 밀양 박 씨인 박수인(朴秀寅)이라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 집을 가리켜 박 부자라고 불렀다. 이 집이 얼마나 큰 재력가였는지 몇 해 묵은 노적가리가 횡성 어디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박 부자가 가진 토지가 얼마나 많았던지 그는 자신의 땅만 밟고 다녀도 인근 동리를 다 돌아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늘어나는 재물에 비례해 이 집에는 매일 수많은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그렇게 되니 손님 대접을 도맡아 해야 하는 이 집 부녀자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갔다. 급기야는 손님 소리만 들어도 골머리가 아플 지경이 됐다. 살림에 보탬이라곤 전혀 되지 않는 과객들은 그야말로 밥만 축내고, 이 집안 식구들에게 시중만 가중시켰다. 급기야 이 집 식구들은 손님이 줄어드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사양하지 않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럴 즈음 웬 낯선 괴승이 이 집에 찾아 들었다. 이 집 식구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손님 치다꺼리의 고충을 말해왔던 터라, 이 괴승에게도 구구절절이 그 내용을 털어놓았다. 한참을 생각하던 괴승은 무겁게 입을 떼었다. 스님은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랬더니 박 부자 집의 아낙들은 “방법이 있다니요. 그리되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하고 그 스님에게 종용을 하였다. 스님은 “나중에 후회는 없는 거지요.”하고 다짐을 하였다. 그랬더니 박 부자 집의 아낙들은 “후회라니요. 정말 그리된다면 당신을 업고 춤이라도 추겠소.” 하고 좋아하였다. 그러자 괴승은 박 부자 식구들을 앞세워 선돌을 향했다. 그리고는 선돌에다가 돌로 만든 갓을 해 씌우면 된다고 말을 하고는 총총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박 부자 집의 아낙들이 생각하니 그깟 돌로 만든 갓을 해 씌우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반신반의하면서 박 부자 집에서는 석수장이를 시켜 선돌 꼭대기에 돌로 된 갓을 해 씌웠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정말로 손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박부자네는 은근히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손님이 줄어듦과 동시에 그 집의 재물도 비례해서 원인 모르게 줄어갔다. 그리고 집안에 불상사가 계속 줄을 이었다. 뒤늦게 박 부자는 후회를 했지만 소용이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안 가 그 많던 박부자네 재산은 바닥이 나고 집안 식구들도 뿔뿔이 흩어졌고 박부자는 정처 없이 떠돌다가 어느 낯선 물방앗간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 후 선돌에 씌워졌던 돌갓은 선돌 앞에 있었던 연못에 떨어져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또한 이 연못도 차츰 매몰되어 지금은 자그마한 웅덩이 형태로 남아있다. 마을 사람들은 매몰된 연못에서 돌갓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 돌갓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을 ‘선돌’ 이라고 불렀으며 한자어로 개칭 돼 ‘입석리(立石里)’로 부르게 되었다.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多木里)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강원도에는 좋은 소나무가 많아서 나라에서 쓰려고 곳곳에 황장금표를 세웠다. 황장금표는 소나무 벌목을 막기 위해서 취해진 조치였다. 화천에도 좋은 소나무가 많아서 다목리에 황장금표를 세웠는데, 나무가 워낙 많아서 마을의 지명이 되었다. 그런데 지명유래에 의하면 이 소나무를 군인들이 몰래 베어서 숯을 구워 한양으로 가져가 팔았다고 한다. 원래 이 지역은 다항(多項)이라 불렀는데, 황장목으로 쓸 나무가 많아서 다목(多木)으로 바뀌었다.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는 나무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좋은 나무를 보호하고 나라에서 쓰려고 마을 입구에 황장금표를 세워 벌목을 금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어느 때부터인가 군인들이 주둔해 있었다. 옛날 군인들은 나라에서 주는 녹봉만으로는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지어 모자란 양식을 충당해야만 했다. 이 마을 군인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서 산에다 불을 놓아 화전(火田)을 만들려고 보니 산에 있는 나무가 너무 좋았다. 금강송이 붉은 껍질을 뽐내며 빽빽하게 서 있었다. 군인들 생각에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군인들은 이 나무를 베어서 숯을 구워 서울로 보내면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고, 산에 불을 놓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마침 한양에는 사람은 많은데 땔나무가 없고 숯이 없어서 밥을 끓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부터 군인들은 나무를 베고, 숯가마를 만들어서 숯을 구웠다. 지천으로 깔린 것이 나무여서 숯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구운 숯은 한강으로 운반해서 서울에 갔다. 다목리에는 나무가 워낙 많아서 아무리 베어 숯을 구워도 나무가 크게 줄지를 않았다. 황장목을 베는 것은 나라의 법을 어기는 것이지만 산마다 빽빽하게 늘어선 나무는 그대로였다. 그래 사람들은 역시 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해서 다항(多項)이라 불리던 지명을 다목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풍산리(豐山里)와 처녀고개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처녀고개는 화천댐 및 딴산 옆에 있는 고개이다.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배경으로 『화천군지』에 지명유래가 전한다.
풍산리 고개 아랫마을에 한 처녀가 살고 있었다. 이 처녀는 한마을에 사는 도령(총각)과 굳게 장래를 약속한 사이였다. 도령은 장래를 약속한 처녀를 뒤에 두고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떠났다. 한양으로 떠나던 날 도령은 고갯마루에서 처녀와 이별하며, “과거에 급제하고 꼭 돌아오겠소.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돌아올 날을 기다려주오.” 하며 약속했다. 그 후부터 처녀는 날이 저물면 도령이 넘어간 고갯마루에 올라서 산굽이를 돌아 흐르는 강줄기를 바라보며 도령이 올 날 만 기다렸다. 그러나 장원급제를 하고 돌아오겠다던 도령은 소식이 없고 어느덧 세월만이 흘러 봄이 가고 겨울이 왔다.
도령이 한양으로 떠난 다음 맞이한 첫봄에 처녀는 자기 키와 같은 나무를 골라 꽃버선을 만들어 매달아 놓았다. 이렇게 기다리기를 10년이 지났다. 소나무는 겨울에도 흰 눈을 이기고 키가 크고 줄기는 굵어졌으나, 도령의 꽃버선을 곱게 만들어 소나무에 매달아 놓고 기다리는 처녀의 일편단심은 변하지 않았다. 어느 날 처녀는 빛이 낡은 도령의 꽃버선을 새로 만들어 소나무에 매달려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실족하여 그만 절벽으로 굴러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해가 지는 산굽이의 물에 빠진 처녀를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녀는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처녀가 죽던 날, 도령은 장원급제하고 돌아왔다. 장원급제하였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달려온 도령에게 처녀가 죽었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그는 처녀가 죽은 자리에 좇아가 보았다. 처녀가 죽은 자리에는 초록색 물새가 처녀의 슬픈 넋인 양 슬프게 울었다. 도령은 자기를 기다리다 죽어간 처녀를 위해 벼슬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양지바른 곳에 처녀를 묻고 그 옆에 초가를 지어 두문불출하며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때부터 이 일대는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동리 이름을 ‘풍산리’라 짓고 처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녀가 꽃버선을 매달았던 소나무를 성황으로 모시고 고개 이름을 ‘처녀고개’라고 하였다.
처녀고개 이야기로 다음과 같은 다른 전설도 같이 전하고 있다. 옛날 사랑골에 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큰 뜻을 품고 중국으로 공부를 하러 갔다. 그는 그곳에서 중국의 한 처녀와 깊은 정이 들어 장래를 약속하는 사이가 됐다. 그러나 청년은 공부를 마치고 중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어 먼저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 후 몇 년이 지났다. 중국에 있는 처녀는 아무리 청년을 기다려도 그 청년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처녀는 사랑하는 청년을 찾아 나섰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 이국만리 머나먼 길을 걸어 천신만고 끝에 화천땅 한 마을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마침 지나는 사람이 있었다. 처녀는 청년에게 들은 마을이름을 대고, “사랑골이 여기서 얼마나 됩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행인은 “구만리를 지나야 하오.”하고 일러 주었다. ‘구만리’란 말을 들은 처녀는 지금까지 온 길만 하여도 까마득한데 구만리를 지나야 한다는데 기가 막혀 병풍바위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것이다. 행인이 알려준 ‘구만리’는 90,000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랑골까지 가려면 지나지 않을 수 없는 마을 이름이었다. 사랑골은 현재 화천읍 산농동의 다른 이름이다.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청량리(淸凉里)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홍천군 서석면(瑞石面)은 단군의 후손들이 살면서 단군제단을 차리고 제사를 올렸던 고장이라서 생긴 지명이다. 홍천에서는 ‘불바라기’라 한다. 불은 ‘밝다’는 의미이다.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돌로 된 상서로운 제단[서석(瑞石)]을 마련하고 그 맥을 이어갔다. 바로 그 고장에 숙종대왕의 이야기가 전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도 강냉이와 토종꿀에 관련된 이야기로 농촌사람들의 생업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음식이다. 옥수수는 최고의 주식이었고, 꿀은 배 아플 때나 원기가 딸릴 때 먹으면 낫는 최고의 약이었다. 그 때문에 청량리의 지명유래에는 옥수수와 토종꿀이 등장한다.
숙종대왕은 조선조의 임금 중에 백성들의 삶을 직접 살펴 정치를 한 임금으로 유명하다. 그는 미복 차림으로 백성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애환을 달래기도 하였다. 숙종대왕은 어느 날 홍천군 서석면에 이르게 되었다. 수행원도 몇 명만 데리고 역시 미복 차림으로 홍천 사람들의 삶을 살피러 온 것이다. 그런데 서석면에 이르자 끼니때가 되어서 배가 몹시 고팠다. 숙종대왕은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어느 민가로 찾아들었다. 그때는 마침 옥수수가 막 익어갈 때였다. 민가에서는 마땅히 준비한 음식도 없고 해서 밭에 나가 옥수수 몇 통을 따왔다. 따온 옥수수의 알갱이를 따 맷돌에 갈아서 솥에 넣고 삶아 올챙이묵을 만들었다. 민가의 주인은 자신들이 여름에 애용하는 시원한 샘을 받아서, 갓 틀에서 짠 올챙이묵을 말아서 숙종대왕 일행에게 드렸다. 파와 고추를 잘게 썰어 넣은 간장을 풀어 먹는 올챙이묵은 시원하기도 하지만 별미였다. 씹을 필요도 없이 그냥 술술 넘어갔다. 숙종대왕 일행은 감탄을 자아냈다. “아, 시원하다. 이렇게 시원할 수가.” 이곳이 원래 옥수수로 유명한 곳이고, 그 옥수수가 막 익어갈 때 부드러운 것으로 올챙이묵을 했으니 더욱 맛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마을이 나중에 맑을 청(淸)자에 서늘할 량(凉)자를 써서 청량리로 불렀다고 한다.
숙종대왕 일행이 청량리에서 쉬시면서 정자에 앉아 있으니, 마을 사람들이 구경을 하러 모여들었다.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니 당연히 구경거리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모여 앉아서 서로 소개를 하는데, 숙종대왕은 자신을 서울 큰 집에 살고 있는 이 서방이라고 했다. 그 마을에 마침 이 씨가 있었다. 두 사람은 만나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숙종대왕은 청량리 이 씨를 보고 언제 시간이 되면 서울에 한번 오라고 했다. 서울에 와서 제일 큰 집에 사는 이 서방을 찾으면 된다고 하였다. 서울에서 온 숙종대왕 일행이 떠나는 날, 이 씨는 산에서 따온 벌꿀을 드렸고, 일행들은 또다시 맛있게 먹었다.
숙종대왕이 떠나고 한참 뒤 청량리 이 씨가 기회를 봐서 서울에 사는 이 서방을 만나러 갔다. 서울 구경을 간다고 머리도 새로 손질하고 짚신도 몇 켤레 장만해서 허리에 차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한 청량리 이 씨는 큰집을 찾기 시작했고, 대궐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제일 큰 집은 다름 아닌 대궐이었던 것이다. 그곳에 이르니 수문장이 있었다. 이 씨가 문으로 들어가려 하니 수문장이 막으면서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 씨는 “나 여기 이 서방을 찾으러 왔다.”라고 했다. 그러자 수문장은 “시골 늙은이가 망령을 했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 서방을 찾는다고 하느냐?”며 끌어내려 했다. 이 씨와 수문장이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숙종대왕께서 궐내를 다니다가 이를 보게 되었다. 숙종대왕은 홍천의 청량리 이 씨를 알아보았다. 사람을 시켜 들여보내도록 했다. 숙종대왕이 “자네 여기 어떻게 왔는가.” 묻자, 이 씨는 “이 서방이 청량리를 떠나는 날 하도 맛있게 이걸 드셔서 내가 또 해왔어요.” 하면서 꿀단지를 선물로 내놓았다. 숙종대왕은 청량리 이 씨의 마음에 감동하여 보답으로 논 몇 마지기를 이 씨 앞으로 내렸다. 이 씨는 하사받은 땅으로 청량리에서 잘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이 씨가 서울에 갔다 온 후에 그때 왔던 서울 사람이 숙종대왕임을 알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평창읍에 있는 노성산성이 함락되기 직전이었다. 군수 권두문(權斗文)은 가족 및 남은 병력과 많은 군민들을 데리고 매화굴(梅花窟)로 피신했다. 매화굴은 천연의 암굴로, 약 2백m 간격으로 두 개의 굴이 있다. 두 개의 굴 중 위의 굴에 권 군수 일행이 피신하였고, 아래 굴은 군민들이 피신했다. 훗날 사람들은 위의 굴에 군수 일행이 피신하였다 하여 관청의 벼슬 관(官)자를 따서 관굴(官窟)이라하고, 아랫굴은 군민들이 피신하였다 하여 백성 민(民)자를 따서 민굴(民窟)이라 불렀다. 지형이 험하고 굴이 은밀하여 왜군이 이 마을을 습격하고 군수를 찾던 중 도저히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때 굴에 숨어있던 권 군수와 그 일행은 민굴과의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매의 발목에 서신을 매달아 서로 연락을 취했다. 권 군수는 평소 매를 좋아하여 알뜰하게 길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매가 화근이 되었다. 왜군이 권 군수와 평창의 백성들이 어디 숨었는지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권 군수가 날려 보낸 매의 방울소리였다. 왜군은 매방울 소리를 듣고 이상히 여겨 그 주변을 샅샅이 조사하여 굴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지리에 어두웠던 그들은 굴의 통로를 발견하지 못하고 강 건너편 언덕에 돌무지를 쌓아 올리고 총을 쏘거나 산 위에서 동아줄을 드리워 줄을 타고 내려왔다. 그러나 굴 안에서 긴 장대에 낫을 달아 동아줄을 끊어버리니 왜병이 강물에 떨어져 죽곤 했다. 이 때문에 강물은 온통 피바다를 이루었다 이처럼 격렬한 싸움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워낙 중과부적인지라 밀려드는 왜군을 끝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끝내 굴은 왜군에게 함락되고 권두문 군수 및 여러 관원들은 적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권 군수에게는 애첩 강소사(康召史)가 있었는데, 영특하고 인물이 절색이며 또한 절개가 대단한 여성이었다. 강소사는 권두문 군수가 왜군에게 잡히는 것을 보고 자신도 왜병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힐까봐 왜병에게 잡히기 직전, 강물에 뛰어 내려 자결하고 말았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강소사를 열녀로 칭송하였다.
권 군수는 머리가 뛰어나고 지조가 굳은 사람이어서 좀체로 항복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아군의 동태를 적에게 알리지 않았다. 왜병은 그를 포로로 잡아갔다. 왜군의 1군은 영월 제천을 거쳐 원주로 진격하고, 2군은 방림 횡성방면으로 협공하여 원주가 함락되었다. 그러자 왜군은 원주에서 잠시 머물게 되었는데 권 군수를 한 서고에 감금시켰다. 권 군수는 며칠을 갇혀 있다가 비 오는 날 밤을 택하여 서고의 벽을 뚫고 탈출하였다. 탈출한 그는 야밤을 틈타서 다시 평창으로 돌아왔다. 그는 치악산 가리파(加利坡) 재를 넘어 칡넝쿨을 엮어 산을 타고 내려와 새우치 고개를 넘어 현재 영월 주천면 판운리에 있는 들둔에 이르렀다. 여기서 새우치는 권 군수가 야밤을 틈타 왜군의 진영에서 탈출하여 넘다가 날이 새었다하여 새우치 고개라는 지명이 붙었다. 곧 날을 '새우다'의 '새우'와 '고개 치(峙)'자를 따서 새우치가 되었다.
평창 백성들은 권 군수가 왜군의 진영에서 탈출하여 평창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현재 모래재 있는 곳까지 마중을 나갔다. 마중을 나간 백성들은 권 군수를 맞아 만세를 부르며 환영하고, 그 기쁨을 노래로 부르며 좋아하였다. 그래서 현재 평창면 하2리와 들둔 사이의 고개를 노래를 부르며 환영한 고개라 하여 ‘노래재’라 불렀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노래재’가 변하여 요즘은 ‘모래재’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이때 권 군수 일행이 피신을 했던 매화굴은 매로 인하여 화를 입었다고 하여 매 응(鷹)자 바위 암(岩)자 굴 굴(窟)자를 써서 응암굴(鷹岩窟)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강 건너편 언덕에는 당시 왜군이 굴을 공격하기 위하여 쌓았다는 약 300여 평의 돌무지가 있다. 당시 권 군수를 도와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지사함(智士涵)과 우응민(禹應民)이라는 두 사람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나중에 지사함에게는 병조판서를, 우응민에게는 병조참판을 추증하였다 한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봉산리 봉두군(蜂頭君)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진부에서 정선방면으로 가다가 보면 신기리가 나온다. 신기리에서 얼마를 더 가면 산중의 산중인 봉산리가 나온다. 이 봉산리는 일명 봉두고니, 봉두구니, 또는 봉두군이라 부른다. 이 봉두군은 조선조 태조 이성계 대왕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곧, 봉두군(蜂頭君)은 한자로 벌 봉(蜂)자 머리 두(頭)자 임금 군(君)자를 쓴다. 그러니까 벌의 우두머리 임금인, 벌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설화에는 이로부터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평창군지』에 전하는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대한민국의 산골을 강원도라 치면 강원도의 산골은 정선이나 평창이 해당될 테고, 또 평창의 산골이라면 정선군과 인접해 있는 진부면의 봉두군을 치게 되리라. 첩첩산중에 쌓여 있는 봉두군은 무척 산골이다. 우리나라 지명의 유래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 벼슬살이가 난 것으로 정해진 경우가 있다. 즉 판관이 났기 때문에 판관터라고 부르는 게 바로 그것이다. 진부면에 있는 봉두군도 바로 그 마을에 봉두군이 났기 때문에 얻어진 지명이다. 봉두군의 유래를 살펴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오랫동안 원나라의 지배 밑에 시달리며 국정이 혼란스러워 백성들이 고통에 빠져있는 고려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태조 이성계는 나라를 새로 세워서 조선이라 했다. 그리고 국초의 혼란을 바로 잡고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닦은 후 바쁜 나랏일의 틈을 타서 잠깐 명상에 잠겼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고생과 노력 끝에 이처럼 나라를 얻어 새 왕국을 세웠는데 이게 모두 내가 타고난 사주에 의한 팔자소관일 게다. 과연 그렇다.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사주쟁이나 관상쟁이들은 나를 보고 왕위에 오를 팔자이며 제왕의 상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과연 내가 왕 위에 오른 것은 타고난 운명일 게다.”라고 생각했다. 태조대왕은 그렇다면 이 넓은 세상에 자신과 한날한시에 난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할까? 만일 이 나라에 나와 똑같은 사주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처럼 임금이 되지 못할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어쩌면 사주라는 것도 허무맹랑한 게 아니겠는가 싶어져서, 그렇다면 그런 사람을 한번 찾아보자고 결심하게 된다.
태조대왕은 그날로 전국에 명을 내리는 한편 각 곳에 방을 붙여 자기와 생년월일시가 같은 사람을 널리 찾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하루는 그런 사람을 찾았다는 강원감사의 직보를 받고 “그렇다면 그 사람을 서울로 직송하라.”고 하였다. 얼마 후 대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앉아 있는 농부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였다. “그대가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일 아무 시에 출생한 게 분명한고?” 물으니 그는 “예, 황공무지하오이나 틀림없음을 아룁니다.” 했다. “그러면 그대의 생업은 무엇인고?” 물으니 “예, 제게는 300여 통의 꿀벌이 있사옵니다. 벌을 치는 게 제 생업임을 아룁니다.”라고 했다. 태조대왕은 농부의 이 말을 듣고 그제야 수긍이 갔다. 300여 통이면 그 벌의 머릿수가 이 나라 백성의 숫자보다도 더 많을 법하다고 느꼈다. 자신보다 이 초라한 농부가 더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은 즉석에서 이 초라한 농부에게 봉두군(蜂頭君)의 칭호를 내리고 적지 않은 상을 주어서 환향하게 하였다. 그 후로 이 농부는 군(君)의 봉함을 받았으므로 이 고장에서는 행세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가 사는 마을의 지명도 봉두군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양봉가들이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벌들을 치기도 하지만 600년 전 토봉을 그렇게 많이 쳤음은 실로 드문 일이었다. 봉두군 마을엔 예나 다름없이 벌들의 먹이인 들꽃이 만발해 있다.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황지는 한강 이남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연못이며, 낙동강과 오십천의 발원지가 된다. 황지는 현재 전설에 등장하는 황동지의 황(黃)자와 며느리 지 씨의 지(池)를 따서 불렀다. 태백시가 삼척시에 소속되어 있을 때는 황지리라 했으나 태백시가 되면서 황지동이 되었다. 이곳에는 장자못 전설이 있어 교훈을 주고 있다. 이야기는 여러 문헌에 전하고 있는데, 『태백시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옛날 황지 연못 터에 황동지(黃同知)라는 부자가 살았는데 매우 인색한 노랭이였다. 어느 날 외양간에서 쇠똥을 쳐내고 있는데 남루한 차림의 한 노승이 찾아와 염불을 하며 시주를 청했다. 시주할 양식이 없다는 황부자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말없이 염불만 하고 서 있는 노승을 보자 황부자는 그만 심술이 나서 치우고 있던 쇠똥을 한 가래 퍼서 바랑에 담아 주었다. 노승이 말없이 돌아서는데 마침 방앗간에서 아기를 업고 방아를 찧던 며느리 지 씨가 이 광경을 보고 달려와 노승을 붙잡고 시아버지의 잘못을 빌며 쇠똥을 털어내고 시아버지 몰래 찧고 있던 쌀을 한 바가지 시주하였다.
물끄러미 지 씨를 바라보던 노승은 “이 집의 운이 다하여 곧 큰 변고가 있을 터이니 살려거든 날 따라오시오.” 하였다. 지 씨가 아이를 업은 채 노승의 뒤를 따라가는데 노승이 말하기를 “절대로 뒤를 돌아다 봐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송이재를 넘어 통리로 해서 도계읍 구사리 산등에 이르렀을 때 며느리는 자기 집 쪽에서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며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나기에 놀라서 노승의 당부를 잊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때 황부자 집은 땅 밑으로 꺼져 내려가 큰 연못이 되어버렸고, 황부자는 큰 이무기가 되어 연못 속에 살게 되었다. 뒤돌아보던 며느리는 돌이 되어 구사리 산등에 서 있는데 미륵바위라고 부르고 있으며 마치 아이를 등에 업은 듯이 보인다. 그 옆에는 개바우라 하여 집에서 며느리 뒤를 따라가던 개가 함께 돌이 되어 있다. 그때 집터는 세 개의 연못으로 변했는데 제일 위쪽의 큰 연못이 황부자의 집터로 마당늪이라 하고, 중간이 방앗간 터로 방간늪이라 하며, 아래에 있는 작은 연못이 변소 자리로 통시늪(통시는 이곳에서 변소를 일컫는 말임)이라 한다. 한편 이 지방에 전해오는 다른 이야기로는 며느리가 돌이 된 것은 노승의 당부를 잊고 뒤돌아봐서 돌이 된 것이 아니라, 늙으신 시아버지를 버리고 저만 살자고 달아났기 때문에 벌을 받아 돌이 된 것이라 한다.
『태백의 지명유래』에는 황지못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황지못 중 마당늪 속에 바위절벽이 있고 그 절벽 밑에 커다란 구멍이 있어 그리로 물이 솟아 나오는데 그 굴속에 용이 산다고 한다. 여기서 나오는 물이 하루 약 오천 톤으로 예전에는 태백시의 상수도로 이용되었다. 이 황지는 옛날부터 신비하고 영험스런 연못으로, 가물 때 기우제를 지냈으며, 연못 속에 돌을 던지면 비바람이 크게 일어난다고 한다. 또 연못 주위에는 천하의 명당이 있다하여 이름난 풍수가들이 모여들었고, 그 덕분에 연못 주변에는 수십 기의 무덤이 생겼다. 상수도가 없던 시절, 황지시민들은 연못물을 길러다 먹었고, 연못에서 흘러 내려가는 도랑에서 빨래를 하였다. 연못 옆의 밭에서는 옛날의 칼과 창이 수십 개 발견되기도 하였다. 황지 연못물이 1년에 두 번 흙탕물이 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이무기가 되어 연못에 살고 있는 황부자가 심술을 부려서 그렇다고 한다. 연못 속에는 큰 나무 기둥이 여러 개 있었는데, 사람들은 황부자집의 기둥과 대들보와 서까래라고 하였다. 그 기둥을 건져서 농짝 같은 가구를 만들어서 판 사람도 있다고 한다.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 여랑골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이 이야기는 2006년 태백시 삼수동 검룡소 부근에 사시던 70세 된 이진용 할아버지가 말씀해 주신 지명유래담이다. 6대째 이곳에서 사는 진짜 토박이다. 황 효자와 여랑골에 얽한 이야기는 비교적 서사구조가 탄탄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랑 전설과도 일맥상통하면서 산악지대인 태백 특유의 호랑이 이야기와 어울려 있는 특별한 전설로 볼 수 있다. 느릅령은 특히 단종을 모시는 서낭당이 있어 유명하다.
옛날 황지에서 장을 보려고 하면 아주 멀리까지 가야만 했다. 황지는 워낙 산골이라 장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삼척이나 경북의 춘양까지 가야만 했다. 황지가 지금은 태백이지만, 옛날에는 삼척시에 속했다. 그러니 장을 한 번 보려면 걸어가다 쉬고, 고개를 넘어가서 또 쉬고 그랬다. 지금은 차를 몰고 다니고, 황지에도 장이 서고 큰 가게도 있으니 별로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옛날에는 모두 걸어서 장을 보러 다녔다. 그런데 삼척의 소달면에 장이 서는데 그곳으로 가려면 반드시 느릅령이라는 곳을 넘어야 했다. 느릅령은 통리라는 곳에 있는데, 장보러 다니는 사람들도 그 고개를 넘고, 장사꾼들도 그 고개를 넘어 다녔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고개에 호랑이가 많아서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러 명이 어울려 다녔다.
황지에 황 씨 성을 가진 효자가 살았다. 사람들이 그를 “황 효자”라고 불렀다. 황 효자는 효성이 아주 대단했다. 부모가 살아서도 효성이 대단했지만, 돌아가신 후에도 제사를 정성껏 모셨다. 황 효자가 아버지의 기일이 돼서 장을 보러 갔다가 오는 길이었다. 느릅령을 넘어야 했는데, 사람들은 날이 어둡고 했으니 황 효자한테 여기서 자고 아침에 넘어가자고 했다. 그러나 황 효자는 아버지 제사를 모셔야 한다면서 굳이 넘어간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황 효자 혼자서 느릅령 고개를 넘어오게 되었다. 황 효자도 깜깜한 밤에 느릅령을 넘는 것이 무척 무서웠다. 그래도 무서움을 참고 느릅령을 넘는데, 난데없이 뭔가 획 하면서 하얀 물체가 황 효자 앞에 우뚝 섰다. 자세히 보니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황 효자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황 효자는 얼마나 무서운지 머리가 하늘로 버썩 서고, 온몸에 진땀이 났다. 그러나 황 효자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어차피 부딪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저 재 너머 사는 황 씨라고 하는데 당신은 누구요? 나는 부모님 제사를 올리러 급히 가야 하니 어서 길을 비키시오.” 그랬더니 그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황 효자가 다시 용기를 내서 그 여자에게 “어째서 내 길을 막느냐?”라며 호령을 했다.
그랬더니 그 여자가 갑자기 땅에 엎드려서 눈물을 뚝뚝 흘려 울면서 말을 했다. “저는 이승에서 억울하게 죽어 한을 품고 저세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이 많아서 저세상으로도 편히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고향사람이라도 만나면 나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말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미처 얘기도 하기 전에 모두들 기절을 해버리니 여태껏 한을 풀지 못하고 이렇게 있습니다. 부디 내 한을 풀어주십시오.” 황 효자가 생각하니, 이 여인의 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계속 이 재를 넘는 사람들이 당할 것 같았다. 그래서 황 효자는 어떻게 하면 한을 풀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여인은 자기가 저승으로 갈 수 있도록 천도를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황효자는 아버지 제사 때문에 사 왔던 제물을 차려놓고 천도제를 지냈다. 그러자 여인은 자신의 이름은 여랑이라고 하면서, 황 효자 때문에 한을 풀고 저승으로 간다면서 황 효자에게 넙죽 절하고는 사라졌다. 그래서 나중에 사람들은 그 골짜기를 여랑골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시는 느릅령에 귀신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강원도 춘천시 동산면 조양2리 밭치리 또는 전치곡리(田雉谷里)에 얽힌 지명이다. 이곳에 골프장이 생기기 전에는 서낭제와 장승제와 거리제를 지냈고, 당숲이 길게 늘어져 장관을 이뤘다. 솟대, 돌탑, 장승, 서낭이 당숲과 어우러졌을 뿐 아니라, 매년 3월3일과 9월9일에 지내는 거리제에는 춘천의 학생들과 마을 주민이 함께 참여하였다. 마을에서는 돼지를 잡아 국밥을 끓여 손님들께 대접을 했다. 강원도민속경연대회에도 몇 번 출연을 했으며, 독특한 장승춤을 개발하여 인기가 높았다. 장승에는 홍천과 춘천과 서울까지 거리도 적혀 있어서 전통적인 이정표 구실까지 했다. 매년 그렇게 깎은 장승은 즐비하게 당숲 사이로 남아 우리의 전통마을 풍속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민속자원이었다. 이런 민속이 전승하게 된 데는 당신화가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아기장수 전설의 변형태인데, 다른 지역의 아기장수 설화에서는 아기장수가 죽지만 이곳에서는 하늘로 올라가고, 나중에 마을신으로 좌정하는 구조를 띠고 있다. 『춘주지』라는 책에 전하는 이야기다.
아득한 옛날 강원도 춘천시 동산면 조양2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첩첩산중에 골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면 조그마한 외진 골짜기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사이에 둔 아담한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에는 용 씨(龍氏)네가 많이 살았는데, 그 중에도 마음씨가 착하고 용모가 단정한 청상과부 김 씨(金氏)가 용 씨 문중에서 자식도 없이 외롭고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김 씨 부인은 가난은 참을 수 있으나 자식 하나 없이 홀로 살아가는 것은 쓸쓸하고 외로워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웬일인지 비가 오면서 뇌성벽력이 치더니 난데없는 장수가 투구와 철갑옷을 두르고 나타났다. 그 장수는 김 씨 부인 앞에 와서 공손히 인사를 하면서 “옥황상제의 명령을 받아 부인을 찾아왔으니 기꺼이 여기소서.” 하며 품에 안기려 했다. 부인이 깜짝 놀라 방을 뛰쳐나와 보니 전에 없던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푸른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구술이 있어 입에 무니 향기가 나면서 스스로 녹아 없어졌다.
김 씨 부인은 이후부터 태기가 있었다. 열 달이 되던 어느 날 대낮에 무지개가 떠오르고 오색 채운이 집을 둘러싸고 해산기운이 돌기 시작하여 옥동자를 분만했다. 갓난아기는 기골이 장대하고 눈썹은 용의 수염같이 길고, 눈은 샛별같이 빛나는 사내아이였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사흘을 두고 계속 울기만 하더니 나흘째 되던 날 “엄마”하고 부르는지라 깜짝 놀란 김 씨 부인은 혹시 관가에서 알지나 않을까 두려워 애기를 죽이고 자기도 목숨을 끊기로 작정했다. 이렇게 생각하던 차에 이레(7일)되던 날, 어린애가 온데간데없어 찾아보니 보리밭 한가운데 서 있는 커다란 밤나무 위에 올라가 앉아 있었다. 이를 본 어머니 김 씨는 깜짝 놀라 이리 내려오라고 이르자, 그 갓난아이가 나무 위에서 하는 말이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저는 아버님을 찾아 하늘나라로 갑니다. 제사 떠난 후 어머님이 병환을 얻으시면 가장 위독하실 때에 이 밤나무 아래 꿩 한 쌍이 졸고 있을 것이니 그 꿩을 잡아다가 고아 잡수시면 병환이 나으실 겁니다. 먼 훗날 어머님의 무덤이라도 찾으려면 지명이라도 알아야지.” 하며, “밭전(田) 꿩치(雉) 골곡(谷) 전치곡”이라 두세 번 외치더니 북방으로 향하여 홀연히 사라졌다. 그로부터 이 마을을 전치곡리 또는 밭치리라고 전하여 왔다. 이곳에서는 그 이후부터 매년 3월에 좋은 일진을 택하여 남녀노소 집집마다 안과태평(安過太平)과 우마(牛馬)의 번식까지 비는(祈願) 성황제를 올리고 부락의 수호신으로 이정표 구실을 하는 장승 세우는 거리제가 전승되고 있다.
옛날 효자 총각이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효자동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총각은 근심과 한숨과 눈물로 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대룡산엘 가면 시체 세 구가 있을 것이다. 그중 맨 가운데 시체 목을 잘라 고아서 달여 드리면 쾌차할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이튿날 총각은 목욕재개하고 산신령님이 일러 주신대로 대룡산을 찾아갔다. 총각이 아무리 대룡산 골짜기를 뒤져도 시체는 보이질 않았다. 시체를 찾다가 지친 총각은 고목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산신령님이 거짓말은 안 하시겠지만 이 넓은 산속 어디에서 시체를 찾는다지? 아니야, 내 정성이 부족해서 눈에 보이질 않는 거야.” 혼잣말을 하며 낙담하다 다시 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해가 서산마루에 걸리려 할 때쯤 총각은 골짜기 중턱 양지바른 곳에서 나란히 누운 시체 세 구를 발견했다. 비록 시체를 발견했지만 감히 시체의 목을 벨 용기가 나질 않았다. “사람의 도리로서 어떻게 감히 죽은 사람의 목을 벤담. 산신령님도 너무 하시지.”하며 주저하지 않았다가 금방 “산신령님의 말씀이니 저 시체의 목을 베어도 죄는 되지 않겠지.” 하고는 용기를 내어 시체의 목을 잘랐다. 목을 벤 시체의 머리를 싸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총각은 어찌나 무섭고 죄스러운지 몸 둘 바를 몰랐다.
이튿날 새벽닭이 울기 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신령님께 빌었다. “신령님. 신령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저의 어머님 병환만 낫게 하여 주십시오. 어머님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죽음도 무섭지 않습니다. 비나이다. 신령님.” 정성 들여 빌고는 정화수를 떠다가 시체의 머리를 고았다. 몇 시간을 고았는지 먼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총각은 시체를 정성껏 달인 물을 어머니께 드렸다. 어머니는 단숨에 마시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한참을 지난 후 그동안 창백하기만 했던 어머니의 얼굴에는 혈색이 돌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몸져누워있던 어머니는 언제 앓았느냐는 듯이 자리를 털고 벌떡 일어났다. 병환이 씻은 듯이 나은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시체의 머리가 아니라 천년 묵은 산삼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총각의 효성에 감동한 산신령이 산삼 영약을 시체로 변해서 내려준 것이다. 이때 총각이 시체의 머리를 잘라 들고 지나온 곳을 거수리(擧首里)라 불렀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수리는 머리 수(首)자에서 머리 두(頭)를 쓰는 거두리(擧頭里)로 변했다. 그리고 총각 효자가 살던 곳을 효자리(孝子里)라 불렀는데, 지금의 효자동(孝子洞)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효자동 문화예술회관 위에 가면 효자상을 주물로 만들어 세워서 효행을 선양하고자 하였다.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중금리 대문동(大門洞)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대문동은 중금리에 있는 자연마을 이름으로, 이곳에는 어답산, 병무산, 대의산 등의 명산이 위치하고 있다. 서쪽과 남쪽으로는 기름진 땅이 있어 아름다운 산간마을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전국 굴지의 큰 부자가 있었는데, 모함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사건이 있었고, 이에 대문동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대문동엔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 년 전 전국 굴지의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거부(巨富)의 이름은 진앙(陳央)이라고 했다. 그의 집은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의 크기를 훨씬 넘는 고루거각(高樓巨閣)이었다. 집 주위에는 4대문을 달았고, 담장을 일곱 겹으로 쌓아 일곱 대문을 들어서야 안채에 이를 수가 있었다. 진앙의 호사는 진시황의 사치에 못지않았다. 진앙의 사택(私宅) 담장 둘레에는 노비들의 거처가 빙 둘러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진앙의 사택 본동(本棟)은 대문에서 7백여m나 떨어진 곳에 있었고, 정원에는 기화요초가 있는 화단이 있고, 뱃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연못이 있었다. 진앙은 그 연못에다가 화려하게 장식을 한 놀잇배(遊船)를 띄우고서 밤낮 주연을 베풀어 흥청댔다고 한다. 진앙이 이렇게 흥청대기는 했지만, 원래 성품은 좋은 사람이었다. 잘 산다고 결코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면서, 가난하여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의 딱한 사정도 잘 돌봐 주었다. 말하자면 맘씨 좋은 부자인 것이다.
진앙은 대문동으로부터 약 3km 떨어진 곳에 복성정(福星亭: '복성'은 길한 별이란 이름으로 원래 복덕성(福德星)이라 하는데 목성을 일컫는다.)이란 정자를 하나 세웠다. 정자는 아름답게 단청(丹靑)하여 놀이터로도 손색이 없었다. 이 복성정 별장에서는 주로 면학독서(勉學讀書)에 힘썼다. 그는 이곳에서 힘써 공부할 때는 일체의 음식을 본가로부터 날라다 먹었다. 음식을 나를 때는 노비 3백 명이 일렬로 늘어서서 계주를 하는 것처럼 운반을 해서 따뜻한 음식이 식는 것을 방지했다고 전한다. 실로 한 나라의 군왕으로서도 못 누리는 호사를 다하고 있었다.
속담에 호사다마라 했듯이, 한양의 어느 관리가 진앙의 생활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래서 그를 모함하는 상소문을 임금님께 올렸다. 그 상소문에 이르기를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거늘 진앙은 출신이 평민이면서도 왕의 행세로 백성에게 임하며, 그 호사는 이루 말할 수가 없으니, 그를 목 베어 천하의 경계(警戒)로 삼음이 좋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임금님은 이 상소문을 읽고 크게 노하여 자세한 것을 미처 알아보지도 않고, 진앙을 극형에 처한 후 재산은 모두 국고로 환수했다. 이때 그를 섬기던 노비들은 옛 주인의 은덕을 잊지 못해 흩어지기 전에 진앙을 사모하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뜻의 비석)를 세웠다. 영세불망비는 4백여 년 후인 그 고장 사람들에 의해 복성정 부근에서 발견되어 다시 세워 놓았으나, 어느 해 홍수에 의해 다시 유실되었다고 한다.
진앙이 조정(朝廷)의 미움을 산 데는 그 이름 탓이 크다. 진앙(陳央)이라고 불러야 할 것을 사람들은 모두 진왕(陳王)이라고 불러서, 그는 마치 진가(陳家) 성(姓)의 왕으로 자처한다는 오해를 받았다는 것이다. 복성정 자리에는 지금도 살구나무가 있어 봄이면 아름다운 꽃이 피고 있다. 물론 당시의 것은 아니다. 다만 생자필멸(生者必滅)이요,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무상한 인간사를 대변해 주는 듯 진왕(陳王)이 아닌 진앙(陳央)의 집터에는 지금도 대문동(大門洞)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천현리와 춘천시 북산면 물로리 등 여러 마을에 걸쳐있는 가리산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이 가리산은 원래 봉우리가 세 개인데 동서남북 어디서 봐도 봉우리 한 개가 가려져 두 개만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노적가리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고도 한다. 현재 이곳에는 그 유명한 중국의 천자가 되어갔다는 한천자 무덤이 있고, 홍천에서는 자연휴양림을 만들어서 운영 중에 있다. 이 가리산에는 여러 전설이 전하는데, 그 중 춘천시 북산면 물로리에 있는 네 개의 바위(각시바위, 신랑바위, 말바위, 가마바위)와 얽힌 전설이 있어 오늘 소개한다.
가리산(고도 1,051m)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에 높은 벼슬을 하는 양반집에 외동딸이 있었는데 이 딸이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 그녀는 조상신을 찾아갔다. “꿈을 펴지도 못하고 죽었습니다. 산신이 되어 꿈을 펴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조상신이 “아름다운 산은 가리산이니라. 가리산 산신으로 가거라.”하고 보내주었다. 처녀로 죽은 딸은 가리산 산신이 되어 골짜기의 물과 바위와 나무와 풀, 그리고 산에 사는 온갖 짐승들을 자상하게 보살펴 주면서 행복하게 살았다.
어느 날, 다른 양반집의 아들이 죽어서 가리산으로 왔다. 그런데 와보니 이미 산신이 좌정해 있지 않은가. “저의 아버님께서 가리산으로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이제부터 이 가리산은 제가 다스리겠습니다.”라고 총각신이 말했다. 처녀신은 어이가 없었다. 다른 산으로 가라고 했다. 두 신은 서로 양보하지 않았고, 다툼은 점점 거세어졌다. 그러자 가리산의 정기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물은 썩고, 나무는 마르고, 풀은 시들고, 짐승들은 포악해졌다. 약한 짐승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숨어 지내야 했다. 그 아름답던 가리산이 점점 황량해져 가는 것을 보면서 가리산 처녀신은 가슴이 아팠다.
처녀신이 총각신에게 말하였다. “가리산의 초목과 짐승들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저들의 꼴을 차마 못 보겠습니다." 총각신은 “그러니 어찌하자는 말씀이신지?”라고 물었다. 그러니 처녀신은 “당신도 결혼하지 못한 몸, 저도 결혼하지 못한 몸. 이러지 말고 우리 결혼합시다. 우리가 내외가 되어 이 가리산을 사이좋게 나누어 다스리면 저 초목과 짐승들이 생기가 돌 것 같습니다.” 했다. 총각신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날씨 좋은 날을 가리어 그들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부가 신랑에게 말하였다. “말을 타고 앞장서시지요. 저는 가마 타고 뒤따르겠습니다.” 신랑은 말을 타고 행복에 겨워 건들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골짜기의 물과 바위와 나무와 풀과 짐승들이 모두 신랑 신부를 축하해주었다. 신랑이 축하를 받으며 흥에 취하여 한참을 가다 보니 뒤따라와야 할 신부가 보이지 않았다. 신랑이 뒤로 돌아서서 멀리 바라보았더니 멀리서 신부가 큰 소리로 말하였다. “이왕 나서신 길, 당신은 그대로 구멍동으로 넘어가십시오. 저는 이쪽 가리산 골짜기로 내려가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랑은 구멍동의 신이 되었고, 신부는 가리산을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
지금 가리산 산신은 여신이고, 구멍동의 신은 남신이다. 가리산 산신은 여신이라 부끄러워서 세 봉우리를 다 보이지 못하고 두 봉우리만 사람들에게 보인다고 한다. 여신과 남신은 일 년에 한 번씩만 만난다고 한다. 지금 가리산에는 그때 여신과 남신이 결혼하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우선 각시바위와 신랑바위가 있다. 각시바위는 각시가 머리를 숙여 절하는 모습이고, 신랑바위는 사모관대한 모습이다. 대례상은 장씨 또는 박씨 묘이고(아기장수설화가 있음), 말 바위는 신랑을 태운 듯한 모습이고, 가마바위는 엎드려 있어 신부가 타기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또 여기에 있는 무쇠말잿등은 신랑이 말 타고 넘어간 고개이고, 가마봉은 신부가 가마타고 넘어간 봉우리이다.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만종리 쉬고개에 얽힌 지명유래로 전통적인 서낭신앙이 사라지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쉬고개 마루에 서낭당이 있었다. 서낭당은 성황당 또는 선왕이라고도 부른다. 한 그루의 나무와 나무 둘레를 잔돌로 쌓아 올린 곳에 사는 서낭님은 이 고개에서 쉬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가는 사람에게 끔직한 노여움을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반드시 이 고개를 넘을 때 서낭당 앞에서 쉬었다가 갔다. 서낭당 앞에서 쉬지 않고 가게 되면 무단히 걷던 사람이 다리 힘이 빠져서 더 가지 못한다거나, 손발의 맥이 풀려 길가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서낭당은 큰 길가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에 있었는데, 길손들은 이곳에서 꼭 쉬어 가게 마련이었고, 고개 이름도 쉬어가는 고개라 하여 쉬고개로 불렸다.
이 고갯마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었고, 원장사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심술궂은 원장사는 약간의 도술도 터득하였다. 그러나 도술을 쓸모 있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겨우 이웃집에 차려놓은 음식을 도술로 가져다가 훔쳐먹는 등의 일에 썼다. 그래서 이웃사람들은 차려놓은 음식이 없어지면 또 원장사가 심술을 부렸다고 비죽거렸다. 원장사가 하루는 말을 타고 쉬고개를 넘었다. 으레 쉬고개에서는 말에서 내려 쉬어가야 했는데, 그날은 말 잔등에 앉아 쉬지도 않고 그냥 넘으려 하였다. 그랬더니, 갑자기 타고 가던 말이 앞 다리가 꺾였다. 말 다리가 부러졌으니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크게 노한 원장사는 뚜벅뚜벅 서낭 앞으로 걸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와 이웃에 살면서도 나를 몰라보기냐.” 그랬더니 서낭님이 대답했다. “내가 여기 있으면서 모든 사람을 쉬어가게 하고, 또 늦게 지나가는 길손을 모두 너의 집에 보내서, 네가 그 덕분으로 손님을 치고 잘 지내지 않느냐? 너는 그러한 내 덕도 모르고 내 앞에서 건방지게 말을 타고 지나가냐? 사람이란 은덕을 알아야 쓰느니라.” 이에 더욱 화가 난 원장사는 “이 놈의 서낭을 없애버리겠다”하고, 집에 오는 길로 기르던 개를 잡았다. 그리고 개 가죽을 서낭의 나무에 매달아 놓고 그 피를 언저리에 뿌렸다.
그날 저녁 무렵 한 여인이 원장사를 찾아왔다. “내가 쉬고개의 암서낭인데 낮에 장난을 좀 했기로서니, 그렇게까지 심하게 하느냐? 속히 그 개가죽을 벗기고, 피를 씻어주어야지 내가 들어갈 수 있다.”하며 애원했다. 그러나 원장사는 심술궂은 사람이라, 암서낭을 보내고, 다음날 또 한 마리의 개를 잡아 가죽은 서낭의 잔돌 무더기를 씌워버리고, 피까지 벌겋게 발라 놓았다. 그날 밤 암서낭이 또 원장사를 찾아왔다. 그리고 울면서 애원하기를 “원장사의 심술이 너무 심하다. 그만 했으면 이제 화도 풀림직한데, 또 개를 잡아다가 그런 짓을 하니, 그게 어디 사람이 할 도리인가? 사실은 내가 쉬고개에 있고, 우리 서방님이 ‘대미기서낭’에 있으면서, 원장사가 잘 되라고 손님을 끌어주어 잘 지내게 한 것이다. 그러니 은혜를 생각해서 어서 가죽을 거두고 피를 씻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심술을 부리기 시작한 원장사는 끝내 서낭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다음날 또 암서낭이 찾아왔다. “원장사! 이제 나는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 이곳에서 떠나간다. 내가 떠난 후 네가 얼마나 잘 되나 두고 보겠다.” 하면서 암서낭은 쉬고개 서낭당을 떠났다. 암서낭이 떠난 후, 이 고개에서 쉬지 않고 가도 아무 탈이 없게 되었으므로, 자연히 원장사 집에 찾아드는 사람도 없어졌다. 그 뿐 아니라, 만사가 뜻대로 되는 일이 없고, 근심하고 걱정할 일만 늘어났다. 그래서 원장사는 술친구들을 불러다가 이웃집에서 담아놓은 술을 도술로 날라다가 먹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고, 원장사의 소행이 드디어 관가에까지 알려졌다. 원장사는 도술을 하는 사람이라 관가에서 자기를 잡으러 떠난 줄을 미리 알고 그 길로 도망쳐 행방을 감추었다. 그 후 관가에서는 원장사의 큰 기와집을 헐어버리고, 근방에 있던 그의 조상의 비석을 깨뜨려 버렸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포리 화진포는 이화진이라는 구두쇠가 살던 지역으로 시주승에게 소똥을 넣어줬다가 벌을 받아 살던 집이 물에 잠겨 큰 연못이 되어 생긴 지명이다. 동해안으로 난 7번 국도를 따라 북쪽 방면으로 가다가 보면 오른쪽으로 화진포해수욕장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그 표지판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넓은 호수를 볼 수 있는데, 그 호수가 바로 화진포이다. 호수 옆에 바다가 있어 그 경치가 매우 좋다. 곧, 바다와 호수의 절묘한 조화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호수는 현재 강원도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호수의 크기가 16km나 되어 동해안에서는 제일 큰 호수다. 호수는 석호이기 때문에 민물고기와 바닷고기가 같이 살고 있다. 화진포 앞바다에는 광개토대왕의 능이 있다는 전설이 깃든 작은 섬 금구도가 있고, 호수 주위에는 해당화가 핀다. 조선 말기에 김삿갓이 선정한 '화진팔경' 중에 금구도의 파도와 모래밭의 해당화가 들어있다. 겨울에는 천연기념물인 백조도 날아든다.
옛날 화진포에는 이화진이라는 시아버지와 착한 며느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화진이라는 영감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서 성질이 고약하고 구두쇠로 소문나 있었다. 어느 날 인근에 있는 건봉사 스님이 와서 “시주 좀 하십시오” 하니 이 영감은 하인을 시켜 처음에는 좁쌀 한 홉 정도를 주었다. 스님은 “고맙습니다.” 하면서 염불을 하고 돌아갔다. 그 후 3년이 지나 스님이 또 “시주 좀 하십시오” 하니 좁쌀 한 숟가락을 주었다. 이번에도 역시 “고맙습니다.” 하면서 염불을 외며 가세의 번창을 기원하였다.
그 후 3년이 지나 스님이 또 “시주 좀 하십시오” 하고 목탁을 두드리면서 염불을 외우니 자꾸 찾아오는 스님이 밉기도 하고 주는 곡식이 아까워 이 영감은 외양간으로 가서 소똥을 한삽 퍼내 “에라, 우린 시주 할 게 없으니 이거나 가져가라.” 하고 쏟아부었다. 스님은 “감사합니다.” 하고 장삼자락을 벌려 받더니 소똥이 담긴 장삼자락을 싸쥐고는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부엌에서 일하면서 이 광경을 지켜본 이 영감의 착한 며느리는 얼른 광에 들어가서 쌀 몇 되박을 행주치마에 싸서 스님을 쫓아갔다. 스님은 잰 걸음으로 저만치 가고 있는데 며느리가 “대사님! 대사님!”하고 불러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냥 가는 것이었다.
“우리 시아버지의 죄를 용서하시고 대신 이 시주를 받아가세요.” 해도 스님은 아무소리 없이 산록으로 올라갔다. 화진포의 높은 산록 고총서낭이라는 곳에서 스님은 멈춰서서 며느리를 돌아다보며 “왜 나를 자꾸 쫓아오느냐?”고 말했다. 며느리는 “우리 시아버지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제가 주는 이 시주를 받아가세요.” 하고 쌀을 내주니 그걸 받지 않고 “고개를 돌려 살던 집을 보라.”고 스님이 얘기했다. 며느리가 집을 돌아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살던 집과 텃밭은 오간 데 없고 시퍼런 개(호수)가 되고 만 것이었다. 다시 스님을 돌아보니 스님 역시 종적을 감춘 것이었다.
며느리는 갑자기 오갈 데가 없어진 것과 순간에 일어난 일이 너무 허망하고 애통하여 허리띠를 풀어서 목을 매어 죽었다. 그 후 어찌 된 일인지 온 나라와 이 지방에 큰 홍수가 나고 농사가 안 돼 흉년이 들고 전염병까지 돌아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이것이 이화진의 논과 집이 물바다가 된 것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나더니 이 동네 나무꾼이 나무하러 갔다가 이화진의 며느리가 목 매달아 죽은 시신을 발견했다. 알아보니 착한 며느리가 애통한 심경으로 자살한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그곳에 이름없는 묘를 만들고 서낭을 지어 일년에 한 번씩 서낭굿을 해준 다음부터는 농사도 잘 되고 전염병도 사라졌다. 결국 화진포는 이화진의 집과 논밭이 있던 곳인데 못된 일을 일삼다가 벌을 받아서 호수가 된 것이라 한다. 이화진의 이름을 따서 화진포라 했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전망 좋은 암벽 위에 '화진포의 성'이라는 유럽 성과 유사한 휴양 건물이 지어졌는데, 북조선의 조선로동당 간부들이 여름휴가 건물로 사용했다. 김일성은 가족들과 함께 화진포를 자주 찾았다. 이후 이 건물은 '김일성 별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1999년부터는 한국 전쟁과 김일성에 대한 자료를 전시한 역사안보전시관으로 개편되었다. 북조선에서는 김일성, 김정숙, 김정일의 '백두산 3대 장군'이 함께 찾은 바 있는 이곳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한국 전쟁 휴전 후 휴전선 남쪽의 대한민국 영토에 편입되면서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도 별장을 각각 마련해 이곳에서 휴가를 보냈다. 두 사람의 별장도 소규모 기념관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가장 소박하다. 2000년대에는 대표적인 한류 드라마인 《가을동화》의 배경으로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에는 다섯 데기의 지명이 있다. ‘데기’는 언덕을 일컫는 이 지역 방언이다. 옛날 산에 불을 놓아 화전을 일구면서 넓은 산꼭대기에 농토가 조성되었다. 그 농토를 따라 화전민이 모여들어 농사를 지으면서 삶을 영위했다. 그때 지역마다 특징적인 나무나 산나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를 따 지명을 붙였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 잘 알려진 데기는 다섯 군데가 있다. 곧, 괴비데기, 안반데기, 장두데기, 황장데기, 황철데기가 그것이다.
괴비데기는 대기3리 동초밭이라는 마을에서 정선군 북면 구절리 쪽으로 약 1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언덕이다. 옛날 이곳에는 고비와 고사리가 많이 자라 괴비데기라고 한다. 고비를 이 지역에서는 ‘괴비’라 해서 괴비가 많은 언덕이라는 뜻으로 괴비데기라 불렀다. 고비와 고사리는 각종 문학작품에도 등장하는 중요한 산나물이다. 봄에 새싹이 돋을 때 뜯어 삶아 말렸다가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었다. 산간에서 화전을 일구던 사람들에게는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최고의 산나물이었다. 그러니 지명 하나쯤은 있는 게 당연하다.
안반데기는 대기4리에 있는 마을이다. 고루포기산(해발 1238m)의 남쪽 낙맥(큰 산맥에서 떨어져나온 산맥)에 있는 언덕이다. 이 언덕에는 마을과 농토가 있는데 그 생김새가 떡메로 떡을 치는 안반과 같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반데기라 불렀다. 지금은 안반데기에 고랭지채소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안반데기에서 보는 일출이 유명하며, 넓게 펼쳐진 고랭지 채소밭이 볼만하다. 그 때문에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다.
장두데기는 대기3리 밤나무에서 동초밭으로 떨어진 낙맥 중간에 있는 언덕이다. 이곳에 한터와 자개터로 갈라지는 산이 있는데 이 산이 큰 언덕으로 되어 있다. 장두는 크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황정데기는 노추산에서 서남쪽 양짓말쪽으로 떨어진 낙맥에 있는 언덕이다. 이 언덕에 황장나무가 많이 자라는데 옛날 임금이나 왕족이 죽으면 이 황장나무로 관목을 짰다고 한다. 황장목은 주로 금강송(金剛松)을 일컫는데, 이 지역에서는 황정목이라고도 한다.
황철데기는 대기3리 한터 서북쪽에 있는 언덕이다. 이곳으로 계속 들어가면 밤나무재가 되는데 옛날 이곳 언덕에 황철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밤나무재는 율곡 선생의 나도 밤나무 전설과 관련이 있는 재이다.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봉호리(蓬壺里)는 고기를 가둔다는 뜻으로, 호수 호(湖)자를 병 호(壺)자로 바꾸어 생긴 지명이다. 이 마을 인근에는 고성에서 유명한 오음산(五音山)과 팔음(八音)이라는 마을도 있다. 고성에서는 매년 수성제(守城祭)를 지내는데 수성은 신라시대 고성을 일컫던 이름이다. 신라시대 고성의 주변에 설악산과 금강산이 둘려 있어서 외부에서 침입할 수 없을 정도로 요새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또 봉호리가 있는 간성(杆城)은 고성의 중심지역으로 그 의미도 수성과 같다.
봉호리 옆으로는 설악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북천이라는 내가 있다. 북천은 봉호리를 휘감아 돌아 마을의 젖줄 역할을 한다. 강이 흐르므로 그 주변에는 쑥[蓬]이 많이 자랐다. 호수 옆에 쑥이 많이 자라므로 마을이름을 쑥 봉(蓬)자에 호수 호(湖)자를 써서 봉호리(蓬湖里)라 했다. 그 때문인지 이 마을에는 고기 어(魚)자를 쓰는 어 씨들이 번창을 했다. 그렇게 어 씨들이 살았는데, 어느 때부터 윤(尹) 씨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윤 씨들은 부지런히 해서 차츰 살림이 피고 어 씨들보다 점점 더 잘살게 되었다. 그런데 윤 씨들이 생각해 보니 그동안 어 씨들이 잘 살았던 것은 마을 이름 때문이라 여겼다. 호(湖)자가 호수라는 뜻이기 때문에 물고기 어(魚)자를 쓰는 어 씨들이 호수에서 노니며 살아가기 때문에 부유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다. 윤 씨들은 어 씨들보다 더 잘 살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내길 어 씨는 물고기이기 때문에 호리병에 가두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윤 씨들은 마을이름의 호수 호(湖)를 병 호(壺)자로 바꾸어서 사용했다. 그래서 지금 봉호리의 한자가 쑥 봉(蓬)자에 병 호(壺)자를 쓰고 있다.
봉호리 옆에는 오음산과 팔음이라는 마을이 있다. 두 지명 모두 소리 음(音)자가 들어간다. 오음산(五音山)은 다섯 마을과 접해 있어 산꼭대기에 오르면 금성, 장현, 적동, 서성, 탑동이라는 다섯 마을의 소리가 모두 들린다. 이 산꼭대기에는 물이 솟는 못이 있어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팔음(八音)은 사통팔달이라 했듯이 팔방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마을 옆에 건봉사(乾鳳寺)가 있다.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 유정 스님이 승병을 이끌고 왜군을 무찌른 유명한 사찰이다. 승병에게 밥을 주려고 쌀을 씻을 때 쌀뜨물이 계곡물을 하얗게 물들여 십여 리를 흘렀다고 한다. 바로 이 절에 석가탄신일이 되면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때 이 동네를 지나게 되므로 ‘팔방의 소리를 잘 듣는다’라고 해서 팔음마을이라 불렀다.
강원도 속초시 노학동(蘆鶴洞)과 학사평(鶴沙坪) 그리고 양양의 학포리(鶴浦里)가 생긴 지명유래이다. 이곳에는 학사평과 학포리, 그리고 노학동이 생긴 지명유래가 풍수와 관련해 이야기되고 있다. 결국 아들딸의 싸움 때문에 명당을 파헤쳤고, 그때 날아간 학이 앉은 곳이 지명으로 남게 되었다.
옛날 아주 친한 친구 세 명이 있었다. 세 명의 친구는 사냥을 즐겨 했다. 어느 날 겨울에 세 사람은 사냥을 나갔다. 산에 올라보니 다른 곳은 모두 눈이 하얗게 쌓였는데 양지바른 한 곳은 눈이 하나도 없었다. 세 사람은 그곳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대화를 했다.“ 아니 다른 곳에는 전부 눈이 있는데, 이곳만은 눈이 녹아 있으니 이건 분명히 명당자리야. 그러니 우리가 이 자리를 그냥 버릴 것이 아니라 우리 셋 중 누가 먼저 죽든지 간에 먼저 죽는 사람이 이 자리에 묻히기다.” 그렇게 약속을 했다.
그중 한 사람은 그 산의 주인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몇 해 지나 그 산 주인이 먼저 죽었다. 그러자 그 친구들이 상주에게 말했다. “우리가 묘터 봐 놓은 게 있으니, 그 아버지가 원한 자리고 하니, 그 자리에 묘를 갖다 써야 한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곳에 묘를 쓰게 되었다. 거기다 묘를 쓰고 나니 점점 가산이 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딸을 낳으면 팔자가 드셌다. 그래 딸들이 점을 쳤는데, 그 묘터가 너무 억세서 남자들은 잘되지만 여자들은 안 된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딸들이 아버지 묘를 옮기자고 했다. 딸들이 그러니 남자들도 동의하고 옮기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묘를 옮기게 되었다. 봉분을 파서 관까지 갔는데 난데없는 학 두 마리가 거기 있다가 날아올랐다. 한 마리는 북쪽을 향해 날아갔는데 지금 학사평(鶴沙坪)에 가서 앉았다. 그 학이 앉은 곳이 모래가 평평하여, 학 학(鶴)자 모래 사(沙)자 평평할 평(坪)자를 써서 학사평이라 불렀다. 그리고 남쪽으로 날아간 학은 양양군 손양면 지금의 학포리에 가서 앉았다. 학이 포구에 앉았다고 해서 학포리(鶴浦里)가 되었다. 나중에 마을을 합칠 때 노동(蘆洞) 또는 노리(蘆里)라는 마을과 학사평의 첫 자를 따서 노학동이 되었다.
강원도 속초시 도문동(道門洞)은 자장율사가 도의 문을 통과했다고 붙여진 지명이다. 도문동은 설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쌍천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양양 낙산사 방면에서 물치를 지나 설악산으로 올라가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면서 옹기를 구워 팔았다고 해서 잘 알려지기도 했다.
자장율사는 신라시대 스님이다. 어느 날 낙산사 의상대에 올랐다가 자기도 모르게 설악산 쪽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쌍천의 물길이 시원하게 흘러내리고 가까이 설악산의 위용이 곧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자장율사는 발길도 가볍게 그 지역을 통과하게 되었다. 워낙 산길이라 길을 가는 도중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길을 가다가 지금의 벼락바위 있는 곳을 지나는데 웬 사람이 있길래 길을 물었다. “지금 소승이 지나는 곳이 어디 입니까?” “도문(道門)이라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길을 알려준 사람은 조금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 자장율사는 그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또 길을 가다가 보니 그 사람이 있었다. 자장율사는 또 길을 물었다. “지금 소승이 지나는 곳이 어디 입니까?” “도문을 지나고 있습니다.” 자장율사는 그렇게 세 번이나 그 사람을 만났고 세 번 다 물으면 도문을 지나고 있다고 했다. 훗날 이곳 지명이 상도문, 중도문, 하도문으로 된 사연이다. 자장율사는 그렇게 설악산으로 향하다가 날이 저물어 잠을 자게 되었다. 그때 어디선가 노루가 나타나서 자장율사 부근을 배회했다. 자장율사는 날도 쌀쌀하고 해서 노루를 불러 목을 베고 하룻밤을 잤다. 훗날 이곳은 노루목이 되었다.
설악산에 올라 자장율사는 좋은 곳을 찾아 향성사라는 절을 짓고 머물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서 향성사는 계속 불길에 휩싸였다. 자장율사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자장율사가 잠을 자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을 했다.“ 이 꼭대기로 올라가 서북방 쪽으로 더 가면 싸리나무가 큰 게 있으니 그 싸리나무가 있는데 절을 지으면 좋을 것이오.” 자장율사가 깨어보니 꿈이었다. 자장율사는 산신령이 시킨 대로 올라가서 절을 지었다. 그리고 신이 점지하여 흥할 절이라 하여 신흥사(神興寺)로 이름을 지었다.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은 해안면(海岸面)에서 해안면(亥安面)으로 한자가 바뀌었다. 해안면은 양구 동면에서 돌산령을 넘어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마을이 분지로 되어 있어서 산 위에 오르면 해안면 전체를 볼 수 있다. 그 모양이 마치 화채그릇 모양이라 해서 펀치볼로 불리기도 한다.
옛날 해안면에는 사람들이 논밭을 일궈 농사를 짓고 살았다. 넓고 비옥한 땅이라 농사도 잘되고 먹을 것이 풍족했는데도, 해안면 사람들은 걱정이 많았다. 지천에 깔린 뱀 때문이었다. 들이고 강이고 마당이고 할 것 없이 온통 징그러운 뱀이 꿈틀댔다. 사람들이 뱀을 퇴치하려고 매일 잡아도 그 숫자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긴 지팡이를 짚고 바랑을 멘, 수염이 허연 노스님이 해안에 도착했다. 해안에 도착한 스님은 마침 점심때가 된 지라 어느 집에 들러서 점심공양탁발을 하였다. 집주인은 반갑게 스님을 맞이해서 점심을 잘 차려 드렸다. 스님은 맛있게 점심을 먹고 나서 집주인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수심이 얼굴에 많군요. 양식은 풍족한 것 같은데, 무슨 걱정이라도 있습니까?” 집주인은 잘되었다 싶어서 스님에게 걱정을 이야기하였다. “스님, 이곳 해안은 땅이 비옥해서 농사가 잘됩니다. 그 때문에 집집이 의식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걱정이 있는데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저기 보시면 알겠지만, 뱀이 곳곳에 기어 다니고 있습니다. 아무리 잡아도 그 숫자가 늘어납니다. 스님, 무슨 좋은 방도가 없을까요?”
그 이야기를 들은 스님은 물끄러미 주인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이곳의 지명이 어떻게 됩니까?” “예, 이곳 지명은 해안이라 하지요. 바다 해(海)자에 언덕 안(岸)자를 씁니다. 이곳 땅이 바다처럼 넓고 산으로 오르는 언덕을 이뤘다고 해서 그렇게 부릅니다.” “바다 해자에 언덕 안자라. 당연히 뱀이 많을 수밖에 없군요. 뱀은 크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가 다시 용이 되어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용은 반드시 물이 있어야 승천을 하고 비를 내리는 등의 조화를 부리지요. 그런데 이곳 지명이 바다 해(海)자를 쓰고 언덕 안(岸)자를 쓰니, 뱀이 용이 되어 가기에 안성맞춤이지요. 바다가 있고 언덕에 비빌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요.” “스님, 그러면 뱀을 없앨 좋은 방도는 없는지요?” 해안에 사는 집주인은 벌써 안달이 났다. 스님의 혜량으로 뱀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었다. 스님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뱀의 천적은 돼지이지요. 돼지는 비계가 두꺼워 뱀이 물어도 그 독이 닿지 않고, 또 돼지는 뱀을 무척 즐겨 먹는 동물이지요. 그러니 돼지를 기르시오.”
스님의 해법을 들은 집주인은 이제 뱀에서 벗어나 살게 되었다고 몹시 좋아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 넓은 땅에 돼지를 얼마나 많이 길러야 할지 또다시 고민이었다. “스님, 그러면 돼지를 얼마나 길러야 할까요?” “직접 돼지를 길러 뱀을 없앨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요. 이 넓은 땅에 돼지를 길러 뱀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뱀이 생기는 원인부터 없애야 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곳은 뱀이 살기에 가장 좋은 지명인 바다 해자에 언덕 안자를 쓰는 마을이니, 마을의 이름부터 바꿔야 합니다. 마을이름을 바꾸시면 뱀의 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마을이름을 돼지 해(亥)자에 편안 안(安)자로 바꿔 쓰십시오.” 스님에게 점심공양을 주었던 집주인은 그 길로 마을사람들을 모아서 해안의 지명을 돼지 해자에 편안 안자로 바꿔 쓰기로 했다. 그렇게 마을 지명을 바꾸고 나자 정말 감쪽같이 그 많던 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해안면의 이름이 돼지 해자에 편안 안자를 쓰게 되었다.
강원도 동해시 묵호동은 물도 바다도 물새도 검어 묵호동(墨湖洞)이라 했다는 지명유래가 전한다. 또 학문과 선비가 있는 고장이라 하여 한묵(翰墨)의 뜻으로 묵호라 했다고 한다. 묵호에는 묵호항이라는 항구가 있는데 동해에서 가장 큰 항구이다. 이 묵호동은 1980년 명주군 묵호읍과 삼척군 북평읍이 합해 동해시로 승격될 때 묵호읍과 묵호진리가 합해 묵호동이 되었다. 묵호는 옛 문헌에 의하면 묵진(墨津)이라 했다. 이것이 18세기에서 일제강점기 사이에 지명 개편이 되면서 진(津)자가 호(湖)자로 바뀌었다. 1914년에는 게구석, 산짓골, 논골의 3개 마을이 합해 묵호진리(墨湖津里)라 했으니, 이때는 진과 호가 다 들어가 있었다.
묵호항에는 예부터 고기잡이가 잘되었다. 어부들은 고기를 잡아 바닷가에 와서 선별할 때 작은 물고기는 던져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할 정도로 물고기가 흔했다. 어부들이 던져주는 물고기를 얻어먹으려 온갖 새들이 몰려들었는데, 그중 덩치도 크고 싸움을 잘하는 까마귀가 항상 제패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까마귀가 많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까마귀 오(烏)자와 마을 리(里)자를 써서 오리라 했고, 여기에 나루 진(津)자가 붙어 오리진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사람들은 까마귀가 검은 색인데다 시체를 보면 울어대는 새여서 흉조로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리진(烏里津)을 오이진(梧耳津)으로 바꿨다. 오동나무 오(梧)자와 귀 이(耳)자다. 때문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오동나무 오자를 써서 오진(梧津)으로 표기되어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 지명은 묵호(墨湖)로 굳어지게 되는데, 그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조선조 순조 때 이곳에 굶주림이 극심해서 강릉부사 이응유가 파견되어 민심을 달래려고 왔다. 이응유가 와보니 바다가 깊어 물이 검고 먼바다도 검게 보였다. 게다가 까마귀 떼가 하늘을 덮으니 새도 까맣게 보였다. 그래 이응유는 “이곳은 물도 검고 바다도 검고 물새도 검은 항구이니 묵호(墨湖)라 하는 게 좋겠구나.”라고 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이곳을 부를 때 묵호라 하게 되었다. 또 하나는 묵호의 옆 마을 발한(發翰)은 글을 잘 짓는 선비(文翰)가 나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지은 지명이다. 이것을 본 묵호의 선비들은 문한의 필묵을 넣어 글도 잘하고 글씨도 잘 쓰는 한묵(翰墨)이 나는 마을이라 하여 검을 묵(墨)자에 큰 바다를 뜻하는 호수 호(湖)자를 넣어 묵호라 했다고 한다.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신읍리 설성은 음죽현의 마을 이름이면서 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어떤 장군이 죄를 지어 사형에 당하게 되었을 때 그를 아끼는 신하들이 왕께 살려줄 것을 간청했다. 이에 왕이 5일 만에 성을 완성하라 명을 내렸는데 그때 쌓은 성이 설성이라는 전설이다. 또 하나는 어떤 임금이 왜구의 난을 피해 이 산에 왔는데, 성을 쌓으려 하니 이상하게도 성을 쌓을 곳을 흰 눈이 돌아가며 표시를 해서 설성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라 때 무용과 지략이 뛰어난 한 장수가 있었다. 그가 나라에 큰 죄를 짓고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평소에 주변 사람들에게 아주 잘하였고, 나라에 충성하는 장수였다. 그래서 장군의 자질을 아끼던 중신들이 임금께 그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자 임금은 그의 죄를 사하여주는 대신 성을 쌓는 벌을 내렸다. “5일의 말미를 줄 터이니 혼자의 힘으로 산에 성을 쌓아라. 그러면 용서하여 주리라.” 장군은 산에 올라 성을 쌓았다. 그러나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는 성을 완성할 수 없었다. 장군은 탄식을 하며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그를 아끼던 중신들이 몰래 사람을 보내 성 쌓는 일을 도왔다. 성은 기일 안에 완성이 되었다. 그날 밤이었다. 임금의 꿈에 장군의 모습이 보였다. 흰 눈이 덮인 산속에서 장군이 혼자 언 손을 입김으로 불어가면서 성을 쌓고 있었다. 꿈을 깬 왕은 그 장군을 측은히 여겨 죄를 용서해 주었다. 그 성을 설성(雪城)이라 부르게 되었다.
옛날 어떤 임금이 왜구의 난을 피해 이천의 산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 또 왜구들이 이 산중으로 쳐들어올지 몰랐으므로 왕은 성을 쌓기로 했다. 성을 쌓으려고 준비를 하자 이상하게도 성이 쌓일 자리로 돌아가면서 하얀 눈이 내렸다. 왕은 눈이 내린 곳을 따라가면서 성을 쌓도록 했다. 이윽고 성이 완성되었는데, 왕은 눈이 내린 자취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해서 성 이름을 눈 설(雪)자 성 성(城)자를 써서 설성이라 했다.
강원도 삼척시 남양동에 있는 적노동(積老洞)은 무로리(無老里)가 바뀐 지명이다. 이 마을 인근에는 미로면(未老面)이 있고, 미로면에는 거로리(巨老里)도 있다. 이 지명들은 오래 사는 것을 염원한 옛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지명들이다.
적노동은 강원도 삼척시 남양동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원래 늙지 않는 마을이라 하여 없을 무(無)자에 늙을 로(老)자를 썼다. 그런데 마을 이름과는 달리 예부터 노인이 적고 단명(短命)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원인을 알 수 없어 마을 사람들은 고심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무로리를 해석하기를 ‘늙지 않는 마을’이 아니라, ‘노인이 없는 마을’이라 하였다. 그러고 보니 정말 마을에는 노인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바꾸기로 하고 무로리를 적노리로 바꾸었다. 적노동은 쌓을 적(積)자에 늙을 로(老)자를 썼다. ‘노인이 마을에 가득 쌓인다’는 뜻으로 그렇게 지었다. 그 때문일까 노인들이 죽지 않고 장수를 하며 마을에는 노인들이 가득 쌓였다. 마을이름을 바꾸어서 효과를 제대로 본 것이다. 실제로 1987년 마을인구가 763명인데 60이상 노인이 93명으로 인구의 12%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 당시 다른 지역의 노인 인구에 비해 곱절이나 됐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우리 한자숙어에 삼척동자(三尺童子)라는 말이 있다. 키가 석 자도 안 되는 아이라는 뜻이다. 보통 어린아이, 또는 철없는 아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삼척동자도 안다.’라는 표현처럼 말이다. 물론 삼척시의 삼척(三陟)이라는 한자는 다르다. 삼척에는 미로면도 있다. 미로면은 아닐 미(未)자에 늙을 로(老)자를 쓴다. ‘늙지 않는다.’라는 의미로, 불로(不老)와 같은 뜻이니, 장수마을이 되기를 기원한 흔적이다. 게다가 미로면에는 거로리(巨老里)도 있다. 크게 늙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장수(長壽)한다는 뜻이다.
삼척시 근덕면 교가리는 근덕면사무소와 보건소 등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강원도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된 20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마을이름 교가리(交柯里)는 한자로 사귈 교(交_자와 나뭇가지 가(柯)자를 쓰는데, 이 느티나무가 도로를 교차하고 있다고 하여 교가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이 나무를 자르려다 그 자리에서 바로 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1년에 한 번씩 나무에 제사를 지냈다. 고려 공민왕 때와 조선조 고종 때 두 차례 불이 났는데도 죽지 않고 여태까지 건재하다고 한다. 도로와 나무가 교차하는 이곳 교가리에 손가락과 도끼가 교차하여 대나무가 난 이야기가 전한다.
혈죽열녀는 여인이 남편을 살리려고 손가락을 도끼로 잘라 피를 입에 넣었는데, 그 도끼에서 대나무가 자랐다고 하여 피 혈(血)자 대 죽(竹)자를 써서 혈죽열녀, 곧 피묻은 도끼에 대나무가 자라게 한 열녀라는 뜻이다. 당시 이 내용은 <매일신보>에 기사로 실렸다.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 교가리에 사는 김기선의 아내 박기성은 당시 31살이었다. 부인은 김 씨 집으로 출가하여 온 이래로 십 년을 하루와 같이 시부모에게 효도하며 지극히 살림에 부지런하였다. 조금도 변하는 기운이 없이 한결같이 정성을 다하였다. 그래서 그 일대에서는 현숙한 여인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1920년 음력 정월 사흗날부터 그 남편이 갑자기 유행성 감기가 들었다. 그런데 병세가 점점 위독하여 박 씨 부인은 밤낮으로 남편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를 하였다. 그리고 밤중이면 하늘에 기원하며 남편의 쾌차를 바라면서 부르짖었다. 그러나 정성과 약효는 효험을 보지 못하고 그달 초파일에 그만 세상을 떠났다. 박 씨는 하늘이 무너진 듯 기가 막혀 애통을 하면서 도끼를 집어 가지고 왼손의 무명지를 찍어서 댓줄기 뿜듯 하는 뜨거운 피를 남편의 입에 흘러 넣었다. 그랬더니 하늘이 그 여인의 정성에 감흥함인 지 죽었던 남편은 얼마 안 되어 다시 살아나 눈을 떴다. 아내의 지극한 정성과 진정한 사랑에 죽었다가 회생한 남편은, 그 아내의 열렬한 마음에 감사라도 하듯 말은 못 하고 다만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아내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약 20분 만에 다시 저세상으로 떠났다. 죽었던 남편이 살아난 것에 기쁜 눈물을 흘리던 박 씨는 또다시 기막힌 최후를 맞았다. 그래서 박 씨는 다시 오른쪽의 무명지마저 자르려고 하였다. 이에 집안사람들이 억지로 말리면서 도끼를 뺏어 소를 먹이는 외양간에 감추어 두었다.
그 뒤 박 씨는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그 남편을 따라 자결하려 하였으나, 워낙 집안사람들의 감시가 심하여 한시라도 박 씨 옆을 떠나지 않으므로 남편을 따라 죽을 수가 없었다. 박 씨는 남편을 잃은 설움에 가슴이 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남편을 정갈한 산에 안장한 후 항상 남편을 생각하였다. 장사를 지내고 이튿날 박 씨는 남편의 지청을 만들려고 도끼를 찾아서 본 즉 참으로 기이하기도 하였다. 박 씨의 피가 묻은 시퍼런 도끼날에 죽순 두 개가 솟아 나왔다. 하도 이상하여서 박 씨는 시부모에게 그런 사실을 말씀드렸다. 박 씨의 시부모는 도끼에서 죽순이 솟아난 사실을 면장에게 알렸고, 면장은 군청에 이런 사실을 또 알렸다. 그래서 군청 직원들은 박 씨 집에 와서 도끼에 죽순이 솟아난 사실을 조사하고 사진까지 찍어서 가져가서 세상에 알렸다. 죽순의 크기는 1개는 굵기가 2푼(푼은 1자의 100/1이니까, 3.3mm)이요 길이가 6푼이며, 또 하나는 굵기가 1푼이요 길이가 3푼이었다. 이처럼 기이한 일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라 하였다.
강원도 동해시 망상동 노봉 앞바다 백사장. 노봉마을 뒤에는 노봉이라는 산이 있고, 마을 앞으로는 마상들이라는 들이 있는데, 마상들을 가로질러 마상천이라는 냇물이 흐르고, 냇물의 하구에는 바다와 너른 백사장이 있다. 이 냇물의 입구 백사장에 '노고암(老姑岩)'이란 바위 2개가 우뚝 서 있다. 그중 큰 바위를 '할아버지 바위(감투바위)', 작은 바위를 '할머니 바위(넓적바위)'라 하고,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바닷속에 있는 바위를 ‘딸 바위(마당바위)’라고 한다. 노봉마을은 마을 뒤에 있는 노봉(魯峯)이라는 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중국 노나라 때 공자를 낳기 위해 아버지가 이구산(泥丘山)에서 빌었는데, 이구산의 별칭이 노산(魯山)이다. 그런데 동해시 망상동에 있는 산이 노산과 닮아서 사람들은 노봉(魯峯)이라 이름 지었고, 그 산의 명칭을 따서 마을을 노봉마을이라 했다.
옛날 노봉마을 앞 바닷가에 늙은 부부가 늦게 외동딸을 낳아 길렀다. 노부부의 외동딸은 무남독녀로 같이 놀아 줄 남매가 없었다. 집 주변에는 또래의 친구도 없어서, 노부부가 일을 나가면 언제나 외톨이가 되었다. 그래서 외동딸은 집 앞의 바닷가에 나와서 백사장에 흩어진 조개를 주우며 놀았다. 그렇게 혼자 백사장에서 놀 때면 또래의 남자아이가 바다로부터 나와서 같이 놀아주었다. 그 아이는 다름 아닌 동해 용왕의 아들이었다. 여자아이가 혼자 노는 것이 안쓰러워 인간의 모습을 하고 바다에서 나왔던 것이다. 용왕의 아들과 노부부의 딸은 그렇게 서로 만난 지 몇 해가 흘러 어느덧 처녀와 총각이 되었다. 둘은 자연히 서로 좋아하게 되었고, 급기야 보고 있어도 그리운 사이가 되었다. 용왕의 아들이 결혼해서 용궁으로 가서 같이 살자고 했다. 노부부의 외동딸은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용궁으로 들어가는 날, 용왕의 아들이 조건을 한 가지 달았다. 용궁으로 들어가는 길에 절대로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외동딸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용왕의 아들 손을 잡고 뒤를 따랐다. 그때였다. 막 용궁으로 가려는데, 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을 불렀다. 외동딸은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외동딸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외동딸의 어머니는 ‘넓적바위’가 되고, 그 뒤를 따르던 외동딸의 아버지는 '감투바위’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외동딸은 바다 한복판에 ‘마당바위’가 되었다. 그래서 넓적바위를 할미바위라 하고, 감투바위를 할아버지바위라 하고, 마당바위를 딸바위라고도 한다. 딸바위는 바닷물 속에 있다. 노고암 중 할미바위에서 아들 못 낳는 사람들이 와서 금줄을 치고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진다. 또한 일 년에 한 번씩 가물 때 수송아지를 제물로 하여 저녁에 기우제를 지내는데, 그 자리에서 소를 잡고 소의 피를 바위에 묻히고 소머리는 잘라서 바다에 띄웠다. 그러면 바로 비가 왔다고 한다. 신위는 ‘사해(四海) 용왕신(龍王神)’으로 쓴다. '해신(海神; 龍王神)'은 하늘에서 물 관리 하는 신이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비두리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비두리는 문막읍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과 동남쪽으로 흥업면과 귀래면에 접해 있고, 서쪽은 부론면 손곡리, 북서쪽은 궁촌리와 경계하고 있다. 여기서 비두는 비석의 머리라는 뜻이다. 이곳을 비두리라 부르는 이유는 이곳에 있던 비석이 부론면 정산리 쪽으로 넘어갔다고 해서 비두넘이 또는 비두네미, 비두골이라 불렀다. 그것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한자로 비두리라 부르게 되어 오늘에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비두리의 유래에 관한 것으로 일종의 지명 설화이다. 비두리에 화강암을 조각하여 부론면 정산리 거돈사의 승묘탑비의 비갓을 만들어 옮겼다는 것이다. 신비성까지 개입돼 있어서 아주 재미있다.
문막읍 비두리에는 옛날 질이 좋은 화강암이 산출되어 비석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비두리와 관련하여 원주 거돈사(居頓寺)에 세워진 승묘탑비를 세울 때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승묘탑비의 비신과 좌대는 완성했으나 비갓을 만들 만한 재료가 마련되지 않아 거돈사 주지는 사방으로 찾아다니다가 비두네미란 마을 근처에 화강암이 나는 것을 알았다. 석공을 데리고 가서 알맞은 바위를 떠 용이 구름에 쌓여 있는 양각무늬까지 쪼았다. 그러나 막상 이 비갓을 옮기려하니 어떻게나 무거운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 당시는 조그만 일에도 귀신과 관련시키는 그런 시대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건 무슨 곡절이 있는 게 아닐까?”
“그 비신(碑身)에는 이 비갓이 맞지 않는가 봐.”
“무리를 하다가 탈이 나면 어떻게 하지.”
라고 말들이 오갔다. 그러자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슬며시 꽁무니를 빼고 없어졌다. 그러니 사찰 측에서는 심히 난처하게 되었다. 사찰 측에서 “수고비는 얼마든지 줄 터이니 비갓을 옮겨다 놓을 수는 없는가.”라고 물으면, 동네 장정들은 “그러다가 성한 몸 다치면 어떻게 하지.” 라며 한사코 일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귀신의 조화로 생각하고 아무도 하려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애를 태우고 있는데, 어느 날 정체 모르는 스님이 근처 농가에 들렸다. 그러더니 “이 댁에서 먹이는 소를 좀 빌립시다.”라고 했다. 그래서 농부는 “무얼 하시려고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비갓을 실어 옮겨야겠는데 댁의 황소면 거뜬히 할 수 있을게요.”라고 하였다.
마음씨 좋은 농부는 선뜻 승낙하였다. 그리고선 쇠죽(여물)을 잔뜩 먹여 외양간에서 끌어내어 앞마당 두엄 옆에 고삐를 매어 놓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금방이라도 소를 끌고 갈 듯한 스님이 해가 다지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농부는 “흥 실없는 중이로군. 익힌 밥 먹고 선소리치는 사람이로군.” 하며, 얼마간 못마땅한 채 혀를 찼다. 바로 이때였다. 그 스님이 나타나서
“촌옹 고맙소이다.
소는 긴히 부리고 보시는 바와 같이 돌아왔습니다.”
라고 하였다. 농부는 스님의 말이 몹시 놀라웠다. 종일 마당 가에 소가 매여있었는데 언제 소를 끌고 갔다 돌아왔다는 말인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스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 “네, 등신은 그대로 두고 소의 혼만 데리고 가서 작업을 마치고 무사히 왔어요. 보세요. 몹시 힘겨웠던 모양이지요. 땀을 흠뻑 흘리고 있는 것을 보니.”라고 했다.
농부는 이상한 생각으로 소를 자세히 살펴보니 스님의 말대로였다. 아무래도 괴이한 일이라 농부는 비갓을 옮겨갔다는 비두네미골에 가 보았다. 이미 비갓은 분명히 옮겨지고 그것을 끌고 간 자취가 분명히 있었다. 농부는 “허허 귀신이 곡할 노릇이로군.”하고 또 한 번 어이없는 헛웃음을 쳤다. 이로부터 이곳 마을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비두네미로 오랫동안 불러오다가 행정구역명으로 ‘비두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 화장터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옛날 방동리 휴양림 쪽으로 한 20리 들어가면 산골에 화전민이 칠십 세대 정도 살았다. 지금은 한 집도 살지 않지만 예전에는 그 골짜기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옛날엔 귀틀집을 짓고선 지붕을 나무껍질로 만든 굴피, 나무판자로 만든 너와, 새풀로 만든 새집 등으로 했다. 너와도 못이 없어 지붕에 얹고는 돌을 눌러 고정했다. 그리고는 산짐승을 막기 위해 울타리를 둘러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가 어떻게 울타리를 넘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붕을 타고 올라와서 너와집 지붕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들어와 아주머니를 물고 달아났다. 아침이 되어 남편은 강 건너 진대리에 사는 여동생네를 소리쳐 불렀다. 매제가 나가보니, 처남이 뭐라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강이 넓고 범람해서 건널 수는 없고 소리만 치는 것이었다. “매제, 엊저녁에 무사했는가? 아, 우리는 엊저녁에 호랑이가 왔었네. 동생은 괜찮냐고!!” 물었다. 동생네 집에서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그냥 호랑이가 "갔다"라는 말만 겨우 들었다. 그렇게 이삼일이 지나서 물이 좀 줄어 매제가 강을 건너가 보니, 호랑이가 처남댁을 물고 간 것이었다.
그래서 매제는 동네 사람들을 모아서 쫓아가기로 하였다. 산골이라 사람도 몇 없어 부랴부랴 모을 수 있는 사람을 모아 길을 나섰다. 가다 보니 호랑이가 처남댁을 끌고 간 자리에 풀이 누운 자국이 생겨 있었다. 풀이 누운 자국은 강을 건너 나 있었다. 강을 건너서 말등바우를 지나 큰살두까지 장정들이 계속 자국을 따라갔다. 큰살두에 찾아드니 여자의 몸은 없고 머리만 딱 끊어서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자세히 보니 호랑이에게 물려간 바로 그 여자였다. 동네 사람들은 “야, 이거 큰일 났다.”라고 하면서도 날이 어두워 더는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날은 그냥 철수를 하고 다음 날 일찍 준비해서 올라갔다. 그러나 그사이 호랑이는 이미 머리도 다 뜯어먹고 뼈만 남아 있었다. 깊은 골짜기 바위 위에 머리뼈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에서 나무를 모아 불을 피우고 남아 있는 머리카락과 뼈를 모두 태웠다. 그리고 돌을 주워 주위를 둘러놓고 무덤을 만들어서 그곳에 그렇게 장사를 지냈다. 그때부터 큰살두 골짜기를 화장터라고 부른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돌을 둘러놓고 나무를 때서 화장을 한 흔적이 있다고 한다.
강원도 산골에는 이런 호식총, 곧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은 사람의 무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강원도는 산이 깊은 탓에 호랑이도 많이 살고 있었고, 그 때문에 피해도 많이 보았다. 우리 설화 중에는 이런 실제담으로 구성된 호랑이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 태백의 경우는 호식총만 사진을 찍고 위치를 적어 모아놓은 것이 한 권의 책으로 될 정도로 많았다. 소도당골에서 태백산으로 올라가다 보면 길가 오른쪽에 돌무더기로 쌓아 올린 돌탑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호환에 간 사람의 무덤인 호식총이다. 인제군도 예외가 아니어서 <호랑이가 머리 빗긴 여인>과 같은 이야기가 전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호랑이가 먹고 남긴 머리를 불에 태워 화장을 화고, 돌담을 쌓고, 떡시루를 엎어 놓고, 큰 쇠꼬챙이인 가락을 꽂아두는 것은 박지원의 <호질>에서 보듯 창귀라는 귀것의 작태를 막기 위한 것이다. 호환에 가면 창귀가 생겨서 호랑이에게 자꾸 사람을 잡아먹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그런 창귀가 나오지 못하도록 불로 태우고 돌로 눌리고 뜨거운 떡시루를 엎어두고 쇠꼬챙이로 찔러 더이상 호환이 없도록 예방을 하는 것이 우리의 풍속인 것이다. 어쩌면 이런 풍속은 단순한 호환만 방지한 것이 아닐 것이다. 호환을 방지하듯 다시는 어떤 세력으로부터 백성들의 피해가 없도록 방지하는 예방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상남3리 학칠령에 얽힌 지명유래 이야기다. 아버지 상을 당한 상주가 지관을 불러 명당을 잡아 달라 하였지만 지관의 말을 따르지 못해 명당터에 있던 학이 날이간 이야기이다.
옛날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상남3리에 살던 어떤 사람이 아버지 상을 당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를 명당에 모실 생각으로 지관(地官)에게 산소를 보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랬더니 그 지관은 “산소 자리를 내가 잡아주되 내 말을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됩니다.”라며 다짐을 요구했다. 상주는 지관에게 그러하겠다고 쉽게 약속을 했다. 지관은 양지바른 한 골을 묘지로 잡아 주면서 “산 자리를 파 들어 갈 때 넓적한 돌이 나오면 더이상 파지 말고 하관을 하십시오. 그러면 자손 중에 귀인이 나와 집안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묘지를 팔 때 아무리 친한 사람이 찾아오더라도 아는 체 하지 말고 인부들이 바위를 뒤적이지 않도록 지키십시오.” 하고 일러 주었다.
장삿날이 와서 상주는 지관이 가르쳐 준 곳에 묘를 팠다. 상주는 처음에는 지관의 말을 지키느라고 인부들이 묘를 팔 때 잘 지켜보았으나 평평한 돌은 나오지 않았다. 그럴즈음 그곳으로 이웃사람이 찾아와 그와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묘지를 지켜보지 않았다. 이때 묘혈을 파던 인부들은 넓적한 돌을 발견했다. 인부들은 그 돌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몰랐기 때문에 돌을 파서 일궈냈다. 그랬더니 그 속에서 학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올라 고개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뒤늦게 이를 본 상주는 날아간 학을 잡고 싶어했지만 허사였다. 상주는 후회막급이었다. 묘지에서 학이 날아간 후 묏자리를 보아준 지관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그 상주의 후손 중에서는 지관의 말처럼 그 집안을 일으킬 만한 인재는 영영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마을을 묘지에서 학이 나와 산 너머로 넘어갔다고 해서 ‘학칠령’이라 부른다.
강원도 정선군 화암면 화암리와 용마소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화암리(畵岩里)는 글자 그대로 그림바우마을이다. 바위로 그림을 그렸다고 할 만큼 절경이다. 이곳에는 화암동굴도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그림바우 아래에는 용마소가 있어 그림바우를 비추고, 절경을 만들어낸다. 용마소는 용마가 빠져 죽은 곳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조선조 중엽 김 씨 부인이 이 마을에서 화전을 일구어 잡곡을 심고 산채를 뜯어서 연명을 하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 부부는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늦게야 귀한 아기를 출산하게 되었다. 부부가 꿈에도 고대하던 옥동자였다. 초롱초롱 빛나는 까만 눈, 훤한 이마, 토실토실한 얼굴에 오뚝한 코, 몸집도 큰 데다 팔다리가 모두 훤칠해 대장부의 기개를 풍기는 듯했다. 옥동자를 이리 바라보고 저리 굽어보며 부부는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나 기뻐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남편은 이제 아기를 위해서 더욱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며 일찍 밭으로 나갔다. 몸도 채 풀지 못한 부인도 이틀 만에 빨래하러 잠깐 나갔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부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가 없어진 것이다. 한참을 찾다 보니 아이가 실광 위에 올라가 있었다. 부인은 늦게 돌아온 남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남편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자라면 큰 인물이 될 것은 틀림없는데, 이를 관가에서 알기라도 한다면 역적으로 몰려 아기는 물론 삼족을 멸하는 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했다.
며칠을 두고 고심하던 부부는 아기가 커서 큰일을 저지르기 전에 없애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부부는 갓난아기가 잠이 들자 배 위에 떡 치는 암반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아기는 그 무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숨을 고르게 쉬면서 편안히 잠을 잤다. 부부는 그 암반 위에 다시 맷돌과 콩가마니 세 개를 더 올려놓았으나 아기는 끄떡도 하지 않고 잠을 잤다. 그래서 부부는 어딘가에서 들은 대로 아기의 겨등랑이를 살펴보았다. 역시 그곳에 날개가 돋아 있었다. 부부가 인두를 화롯불에 시뻘겋게 달구어 겨드랑이 밑을 지져대자, 그렇게 모질던 아기의 목숨은 끊어지고 말았다. 아기가 죽은 지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거대한 용마가 나타나 집 주위를 맴돌며 아기를 찾았다. 얼마를 휘돌며 아기를 찾던 용마는 아기가 없음을 알자 미친 듯이 날뛰다가 소에 빠져 버렸다.
아기를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묻어준 부부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누워 비통해하며 왜 이런 슬픔이 찾아왔는가 생각했다. 아기가 태어나기 얼마 전에 아기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장례를 지내던 날 저녁이었다. 집 앞을 지나던 스님이 들어와 하룻밤 묵어갈 것을 청했다. 평소 같으면 쾌히 승낙할 일이나, 장례 준비에 분주해 스님을 재워줄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인근에 마땅하게 머물 집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부부는 장소가 없으니, 헛간이라도 괜찮으시다면 쉬어가시라고 했다. 스님은 헛간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스님이 헛간에 들었어도 부부는 경황이 없어 대접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스님은 떠나면서, “내 하룻밤 쉬어가는 보답으로 묏자리를 하나 보아 드리지요.” 했다. 마침 마땅한 묏자리를 잡지 못한 터라 남편은 “스님, 고맙습니다. 잘 부탁합니다.”하며 고마워했다. 한참 사방 지세를 살펴보던 스님은 “저기 삼봉(三峰)이 연하여 있는 한 곳에 묘를 쓰면 훗날 삼장(三將) 삼무(三巫)가 날 것이오.” 이런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남편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스님이 일러준 대로 자리를 골라 아기의 조부 묘를 썼다.
남편은 옛일을 떠올리다가 “그 중놈이 우리를 못살게 하려고 일부러 한 짓일 게다.” 생각했다. 그래서 아기를 죽인 부모는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이렇게 달래고 곧바로 아버지의 묘를 이장했다. 지금도 용마소 봉우리 한가운데에 움푹 파인 곳이 있는데, 그곳이 부부가 아버지 묘를 썼던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기를 찾아 울부짖던 용마가 빠져 죽은 웅덩이를 용마소라 부르기 시작했고, 용마의 꼬리에 맞아 부서진 바위가 지금과 같은 절경을 낳았다고 한다.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 있던 우양리(禹梁里)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우양리는 지금은 작은 둔덕 밖에 남지 않았지만 옛날에는 신매리 밑에 북한강 바닥까지 합쳐서 백여 호가 모여 사는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 마을이 우양리로 불린 것은 우(禹) 씨와 양(梁) 씨들이 모여 대대로 살아서였다. 장자못 전설의 변이형태인 지명유래담을 따라가 보자.
옛날 우양리 동네에 우 씨도 양 씨도 아닌 착한 노인이 한 분 살고 있었다. 우양리 마을은 우 씨와 양 씨가 대성(大姓)을 이루고 살면서 마을에 작은 일 큰일 할 것 없이 두 씨족끼리 아귀다툼을 했다. 우 씨네가 찬성하면 양 씨네가 반대하고 반대로 양 씨네가 찬성을 하고 나서면 이번에는 우 씨네가 절대 반대를 하고 나서니 무슨 일을 하나 우 씨네와 양 씨네는 사사건건 대립을 하고 사소한 일에도 편을 갈라서 흉을 보고 시비를 걸어서 조용한 날이 없었다. 마음씨가 착한 타성바지의 이 노인은 우 씨 양 씨간의 대소 시비를 중지해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우양리 마을 사람들은 이 노인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반성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 여전히 싸움만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 씨 노인이 현 고산 아래 눈늪 큰 연못에서 큰 잉어 한 마리를 잡았다. 집에 돌아와 부엌에 거니 물고기의 크기가 처마에서 땅에 닿을 정도였다. 이 잉어는 눈늪 연못의 제일 큰 고기로, 마을 사람들 누구나 이 잉어가 그 못에 살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우 씨 노인이 큰 잉어를 잡았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자 우 씨와 양 씨는 각기 삼삼오오 떼를 지어 와서 시비를 걸었다. 양씨들은 이 잉어는 자기들이 먼저 알고 있었고, 맡아놓은 것인데 우 씨가 잡아버렸다고 시비를 걸어왔고, 우 씨 측은 무주대택(無主大澤), 즉 주인 없는 큰 못에 있던 고기를 잡은 사람이 임자지 무슨 잔소리냐고 맞서고 나섰다. 마음씨 착한 타성바지 노인이 우 씨 노인 집에 와보니 둘 간의 싸움이 그칠 기미가 없었다. 타성바지 노인이 거듭 화해를 종용했지만 아무도 노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기둥에 매달려 있던 큰 잉어가 왕방울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우가야 양가야, 우가야 양가야”하고 거듭 소리를 질러 댔다.
마음씨 착한 타성바지 노인은 잉어의 이 말을 듣고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우 씨 노인에게 연못에 도로 갖다 놓을 것을 권했으나 우 씨 노인은 콧등으로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마음씨 착한 노인이 초저녁 선잠에 꿈을 꾸니 백발이 허연 노인이 나타나서 “이 큰 잉어 탓으로 용왕이 노해서 필경 내일은 이 도포(道浦, 길가의 포구) 우양리가 물나라로 변할 것이니 내일 새벽, 가솔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가거라.” 했다. 꿈을 깬 노인은 꿈이 하도 생생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으나 아무도 이 노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노인 홀로 가족들을 일깨워 가재도구 등을 강 건넛마을 옥산포 쪽에 서둘러 옮기고 온 가족도 다가올 물난리를 피하려고 그리로 피난을 갔다. 그날 오전까지는 하늘이 청청하였으나 먹구름이 한 점 일기 시작하더니 그것이 다시 뭉게뭉게 퍼지고 이내 하늘을 새까맣게 덮더니 소나기가 폭우로 변해서 쏟아졌다. 그리고 삽시간에 강물이 바다처럼 불어나서 우양리 마을을 덮쳐 버리고 고산과 금산리를 잇는 뒷 둔덕산이 무너지면서 고산 아래의 큰못, 눈늪을 휩쓸고 내려가 새로 고산 밑에서 덕두원까지의 강길이 열렸다고 한다. 우양리 마을 두 종족의 다툼은 마을이 물이 잠김으로써 끝나버렸다. 이 이야기는 장자못전설의 변이형태로, 장자못전설에서는 부자인데도 인색해서 벌을 받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우양리의 지명유래는 두 종족 간의 불화로 인해서 살던 터가 물바다가 되어 죽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같은 마을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쳐서 일을 추진해도 부족할 판에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여 무엇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다.
강원 춘천시 퇴계동과 공지천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공지천은 대룡산에서 발원하여 북한강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원래 곰짓내에서 바뀌었다고 하는데, 이 강에는 많은 전설이 있다. 소위 수많은 사람들이 스토리텔링을 한 결과이다. 최근에는 춘천마임의 원천소스로 활용하여 세계 3대 마임축제를 이끌어내었다. 수많은 이야기 중 이 퇴계와 관련된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지금의 춘천 퇴계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하루는 강아지가 집으로 들어오더니 글을 가르치고 있는 마루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귀를 쫑긋 세우고는 퇴계의 가르침을 경청하였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강아지는 가지 않았다. 퇴계는 강아지가 기특하여 끼니때마다 자기 밥의 반을 덜어서 강아지에게 주었다. 반찬도 반을 덜어서 강아지에게 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삼 년, 강아지는 배울 것을 배웠다고 생각했는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웬 초립동이가 퇴계를 찾아왔다. 그는 전복을 입고 초립을 쓰고 있었다. 초립동이는 퇴계에게 큰절을 하고 나서 공손하게 말하였다. “저는 용왕의 아들입니다. 아버님께서 선생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셔서 이렇게 선생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용왕께서 어째서 나를 부르시는고?” “제가 용궁에서 학업을 게을리하고 아버님 말씀을 잘 안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 진노하시어 저에게 개 탈을 씌워 주시며 퇴계 선생님 댁 마루 밑에 가서 삼 년을 엎드려 있다가 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삼 년 동안 마루 밑에 있으면서 선생님의 좋은 말씀을 듣고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거기다가 선생님께서 끼니때마다 제게 밥을 주시어 황공할 뿐입니다. 아버님께서 이런 사정을 아시고 감지덕지하시어 선생님을 용궁으로 모셔오라고 하신 것이지요.” “그렇지만 세속 사람이 용궁에를 어찌 갈 수 있는고?” “저를 따라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퇴계는 초립동이를 따라나섰다. 물가에 이르러 초립동이가 주문을 외자 물이 양쪽으로 갈라지고 길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선녀들과 초립동이의 안내를 받아 퇴계는 용궁에 이르렀다. 용궁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용왕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퇴계는 며칠을 잘 지냈다. 용궁에서 나오는 날 용왕은 퇴계에게 짚 한 오라기를 주며 말하였다. “이것을 조금씩 잘라서 반찬으로 드십시오.” 초립동이와 선녀들이 퇴계를 세상으로 안내해 나왔다. 작별하면서 초립동이가 퇴계에게 말하였다. “아버님께서 주신 것, 꼬리부터 자르지 마시고 머리부터 잘라 드십시오.”
집에 돌아와 퇴계는 지푸라기를 조금 잘라 지져보았다. 자를 적에는 지푸라기인데, 지져놓고 보니 고기였다. 그것은 용궁에서 먹던 그 진미의 고기였다. 오래오래 두고 먹다 보니 지푸라기 끝이 조금만 남게 되었다. 퇴계는 그것을 개울에 넣었다. 그랬더니 그것이 수많은 고기가 되었다. 그 후로는 개울에 손을 넣기만 하면 고기가 한 마리씩 잡혔다. 맛이 일품인 그 고기가 바로 공지어라는 것인데, 그로부터 그 개울을 공지어가 살고 있는 강이라 하여 공지천(孔之川)이라고 일러온다. 그때 퇴계가 살았던 곳이 춘천의 퇴계동이 되었다.
외동산 또는 부래산은 철원군 서면 청양1리 청양들의 남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둘레 350m에 높이 50m의 산이다. 이 산은 다른 지역과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들 가운데 외따로 봉긋하게 솟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따로 있는 동산이라 해서 외동산이라 부르고, 또 어디서 떠내려온 산이라고 해서 뜰 부(浮)자에 올 래(來)자를 써서 부래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산에는 전국적으로 비슷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철원의 외동산은 다른 지역과 달리 현감이니 부사니 하는 관 차원이 아니고 땅주인이 찾아와 세를 내라고 한다. 그럼 아이의 재치를 볼 수 있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먼 옛날 철원군의 외동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두 사람의 건장한 청년이 마을 구석에 조그마한 외동 봉우리가 있는 마을에 찾아왔다. 이들은 산 주인을 찾아와서 다짜고짜로 “저 산은 우리 산이오. 우리가 육대조(6代祖) 때 잃어버리고 그 후 대대로 찾아다니던 끝에 오늘에야 찾아냈소.”하고 외동산이 자기들의 산이라고 우겼다. 그들은 큰 생색이나 내는 것처럼 “그동안 몇백 년의 세를 다 받을 수는 없어 탕감해 줄 터이니 오늘부터 세를 내야겠소. 금년 동짓날 올 터이니 금년 세를 장만해 두시오.”하고 요구했다. 그들의 태도와 말투는 당당했다. 외동산의 산 주인은 대대로 나무를 해서 때 왔는데 청천벽력으로 딴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더구나 그 생김새로 봐서 모두들 어디서 떠내려온 산일 것으로 생각하니 세를 안 물겠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외동산의 산 주인은 마을 노인들을 찾아가서 의논해 보았으나 별 묘한 대책이 없었다. 이리하여 몇 해 산세를 물었다.
그러던 어느 해였다. 세금을 내기 전날 외동산의 주인은 또 억울한 산세를 물어야 할 일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때 잠을 못 이루는 아버지를 보고 10살밖에 안 된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다.“아버지,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외동산 주인은 어린 아들에게까지 걱정을 시켜 주지 않으려고 처음에는 얘기를 하지 않았으나 아들의 간청 때문에 결국은 외동산에 얽힌 사연을 알려주었다. 어린 아들은 이야기를 듣고 한참 생각하더니 “아버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년부터 제가 세를 안 물도록 할 테니까요.”하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이튿날 장골의 형제가 예년대로 산세를 받으러 왔다. 어린 아들은 아버지를 물리치고 그들을 응대하러 나섰다. “여보시오 손님, 마침 오셨으니 이번에는 그 산을 제발 좀 떠가지고 가시오. 이제는 우리도 우리 논에 농사를 지어야 하겠소. 몇백 년 농사 못 지은 손해 배상을 받을 것이지만 산을 지금 떠가지고 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금년 치 산세의 2배만 내시오.” 하고 의젓이 맞섰다. 어린애의 뜻밖의 말에 장골 형제는 서로 마주 보았다. 산을 떠갈 수야 없지 않은가? 장골 형제는 몇 해 동안 산세 받아간 것을 전부 반환하라고 요구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어린이의 관대한 것 같은 처분에 백배사례하고 도망치듯 돌아갔다. 그들은 그 후부터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어린이의 꾀로 마을은 다시 평안해졌다 한다.
이 설화는 전국에 걸쳐 있는 광포전설의 일종이다. 각 지역에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산에는 이런 설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이런 유형의 설화를 통칭 ‘부래산전설’이라고 한다. 이런 부래산전설은 아주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중에 압권은 어린아이의 지혜이다. 어른들과 노인들이 풀 수 없었던 문제를 10살도 안 된 어린아이가 쉽게 풀어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아주 맹랑한 것인데, 결국 건장한 청년들이 한마디도 못 하고 도망간다. 우리는 이런 설화를 들으면서 통쾌함을 느낀다. 그 통쾌함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해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어린아이가 어른들보다도 생각이 앞서고 쉽게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바보로 알았던 사람이 천재가 풀지 못한 문제를 우습게 풀고, 기성세력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일을 새로운 세력이 더 빨리 더 정확하게 해결하는 재치가 있기 때문이다. 바보민담이 보여주는 특징과 비슷하다. 내가 아니면 못할 것 같으나 오히려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교훈을 주는 설화이다.
강원도 양구군 동면에 가면 팔랑리(八郞里)라는 마을이 있다. 처음 그 지명을 들으면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한다. 무슨 뜻이지? 그러나 그 사연을 듣고 나면 수긍을 할 수 있다. 이야기 주인공도 대단하지만 이 이야기 때문에 지명이 생긴 것도 아주 재미있다. 팔랑(八郞)은 한자로 여덟 팔(八)자에 사내 랑(郞)자를 쓴다. 이곳에서 젖이 4개 달린 여자가 4쌍둥이씩 두 번을 출산하여 8형제가 태어나서, 모두 낭관(郎官)벼슬을 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팔랑리로 불린다. 팔랑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 중기쯤, 함경도에 전주 이 씨인 이학장(李學長)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도사(都事: 관리의 감찰과 규찰을 맡아보던 조선조의 종5품 관직)벼슬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남으로 내려오면서 방방곡곡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가 태백산맥의 골짜기를 더듬어 오다가 양구 동북방 도솔산 남쪽에 있는 지금의 동면 팔랑리(八郞里)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대암산 용늪이라는 명산이 위치하고 있었다. 산이 높으면서 먹을 것이 풍부해서 한평생 머무를 수 있는 곳임을 직감했다. 산수와 마을의 인심이 가히 자기의 뼈를 묻을 만 한 곳이라 몇몇 친족들과 함께 여기에 터를 닦고 살게 되었다. 이학장은 여기에 터를 잡고 집도 세웠으나 늘 허전했다. 이학장이 허전해하는 것을 본 이웃 사람들은 “큰 집을 짓고 그것을 혼자 지키니 그럴 만도 하지. 집을 지었으면 아내를 맞아 가정을 이뤄야 할 것이 아닌가?” 하며 이학장의 혼인을 권했다. 이학장은 결국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이웃 마을에서 아리따운 낭자를 천거 받아 그 낭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를 맞이한 첫날, 이학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리따운 아내의 가슴에는 마치 짐승과 같이 네 개의 젖이 달려 있었다. 이학장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이것도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며 배필이라고 생각하고 젖이 넷 달린 신부를 그대로 맞아 살기로 결심했다. 이학장의 신혼생활은 그럭저럭 지나갔다. 그래도 이학장은 아내의 심기를 생각해서 정성으로 사랑하고 보듬으며 즐거운 신혼을 보냈다. 두 사람이 혼인을 한 지 일 년이 채 못 되어 이학장의 아내는 아이를 가져 출산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학장의 아내는 네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몇 해 있다가 또 출산을 했는데, 또 네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이학장의 아내는 두 번에 걸쳐 아들 여덟 명을 낳았다. 그제야 이학장은 자신의 아내가 젖이 네 개 달린 수수께끼를 풀게 되었다. 두 부부는 8명의 아들을 정성을 다해 잘 길렀다. 어느덧 8형제는 장성해서 성인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기골이 장대했으며 무술이 뛰어났다. 어느 해 봄 8형제는 나라에서 행하는 과거시험을 보고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래서 나란히 낭관(郎官)벼슬(조선조의 6품관 벼슬)을 했다고 한다. 그 뒤로 이 마을은 여덟 사내아이를 낳아 낭관벼슬을 시킨 곳이라고 해서 팔랑리(八郞里)리라고 불렀으며, 지금까지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팔랑리는 자랑할 것이 많은데, 그 중에 팔랑민속관과 곰취를 소개한다. 팔랑리에는 팔랑폭포 조금 위쪽으로 팔랑민속관과 지게 박물관이 있다. 이 팔랑민속관은 1998년 12월에 건립 개관하였다. 이것이 개관하게 된 배경은 1994년과 1996년 두 번에 걸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강원도 대표로 나가서 두 번 다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덕분이다. 1994년에는 <바랑골민요>로, 1996년에는 <돌산령지게놀이>로 출전을 하였다. 그래서 이 <돌산령지게놀이>는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고, 팔랑리에서 새농어촌건설운동을 하면서 강원도의 지원과 양구군의 지원으로 팔랑민속관을 건립했다. 이곳에 가면 음향과 비디오 시설을 갖춰서 <돌산령지게놀이>의 전 과정을 볼 수 있다. 아울러 각종 농기구를 비롯한 민속품을 관람할 수 있다. 그 옆의 지게박물관에서는 전 세계의 지게를 볼 수 있다. 또 팔랑리는 매년 5월에 곰취축제를 연다. 곰취는 산나물의 일종인데 그 맛과 향이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특히 이 지역은 대암산에서 곰취가 많이 났는데 산이 높고 기후가 순조로워 그 맛이 전국에서 제일 간다. 이에 이곳 사람들은 산에서 곰취 씨앗을 채취해 국내 최초로 곰취를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곰취 대량 생산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곰취축제는 이를 전국에 알리고자 시행한 것이다. 곰취축제에 가면 곰취를 활용한 다양한 요리와 채취를 비롯한 각종 체험을 함께할 수 있다.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에는 화상천을 중심으로 여러 마을을 아우르는 수동골이 있다. 수동골을 형성하는 강이 화상천인데, 화상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왼쪽 산 구부능선에 갓모양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그리고 그 맞은편 어느 집 뒤켠에는 대나무 숲에 감싸인 채 족두리를 쓴 모양의 바위가 있다. 이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은 두 바위와 화상천을 중심으로 슬픈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전설과 함께 마을 이름도 갓바위 마을이라 하며, 한자로 입암리(笠岩里)라 부르고 있다.
입암리에는 화상천을 중심으로 화상천 북쪽엔 풍미골이 남쪽에는 홍성골이 있는데, 이곳에는 슬픈 전설이 전하고 있다. 옛날 풍미골엔 마음씨 고운 풍미라는 색시가 살고 있었고, 홍성골엔 홍성호라는 건장한 청년이 살았다. 이들은 화상천을 오가며 사랑을 나누다가 결혼하게 되었다. 잔칫날 신랑은 신붓집을 향해 떠났다. 가마가 떠나자 교군과 하객들도 뒤를 따랐다. 가마를 메고 내에 이른 가마꾼들이 나무다리를 건너다가 삐끗하여 냇물에 빠졌다. 가마꾼과 가마가 빠진 곳이 깊은 곳이어서 가마꾼들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나왔으나, 가마에 탄 신랑은 가마 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신랑이 물에 빠진 사실을 모르는 색시는 곱게 단장하고, 신랑이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색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대문 쪽에 귀를 기울였지만, 신랑이 올 때가 지나고 영 예감이 안 좋았다.
그때 바깥이 소란하더니 청천벽력 같은 기별이 전해졌다. 색시는 기별을 듣자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옆에 있던 사람의 부축으로 겨우 정신을 차린 색시는 예복을 입은 채로 냇가로 허겁지겁 뛰어갔다. 색시는 냇가에 가서 땅을 치며 통곡하다가 물에 뛰어들었다. 색시가 물속으로 뛰어들자 갑자기 하늘엔 먹구름이 끼고 천둥이 요란하게 치더니 콩알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며 굵은 빗줄기가 사정없이 내리치더니 금세 냇물이 불어났다. 비가 한바탕 회오리치고 난 다음 물살에 신랑신부가 떠내려왔다. 떠내려오던 그들은 장광에 얹혔는데,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이상한 일이 생겼다. 두 사람이 누워 있던 옆에 바위 두 개가 솟아올랐는데, 하나는 갓처럼 생겼고 또 하나는 족두리처럼 생겼다. 부모들은 혼례를 치르지 못하고 죽은 두 사람을 위해 혼례를 치러주고 나서 갓처럼 생긴 갓바위는 음짓말에 놓고 족두리처럼 생긴 쪽돌바위는 양짓말에 갖다 놓았다. 그래서 갓바위가 있는 골은 총각의 이름을 따서 홍성골이라 하고, 쪽돌바위가 있는 골은 색시의 이름을 따서 풍미골이라 했다. 지금도 입암리 마을엔 갓바위와 쪽돌바위가 화상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조동리(鳥洞里)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조동은 함백탄광이 있던 지역으로, 이곳에는 경주 이 씨들이 오랜 기간 살고자 풍수를 불러 터를 잡았던 곳이다. 봉소포란(鳳巢抱卵)형으로 사람들이 살기 좋은 지형이었는데, 어느 날 스님이 나타나서 마을이 망할 것이라 했다. 정말 함백탄광이 생기면서 경주 이 씨들은 새골에서 모두 떠났다. 풍수로 지명유래를 만들고, 풍수로 예언을 한 이야기이다.
옛날 함백탄광 자리에 새골(鳥洞)이 있었다 새골은 한자로 조동(鳥洞)이라고 쓰는데, 마을 인근의 산의 형세가 새를 닮았다고 해 생겨난 이름이다. 마을을 둘러싼 산의 형국이 봉황새가 둥지에서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봉소포란(鳳巢抱卵)형이어서 봉동(鳳洞)이라고도 부른다. 이 새골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경주 이 씨들이다. 그중에 이 진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진사는 무척 가난했지만 성품이 좋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더없이 존경을 받았다. 그런 그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어버리자, 마을 사람들은 묘를 잘 써야 후손들이라도 번창한다며 지관을 불러 좋은 터를 정해 장례를 치렀다. 지관의 말로는 이곳은 금 거북이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형국인 금구입수(金龜入水)형이어서 앞으로 후손들이 잘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곧, 물에 사는 거북이가 물을 만나서 노니는 형국이므로 만사형통하게 될 명당이었다. 그렇게 잡아서 이진사가 묻힌 묘는 함백탄광의 중앙사택이 있던 장소다.
그렇게 묘를 쓰고 난 후, 이곳을 지나던 한 스님이 혀를 차며 말을 했다. “묏자리는 참으로 좋으나, 몇백 년 후에는 앞 연못에 물이 마를 것이고, 뒷산으로는 철마가 지나갈 것이다. 물이 없는 거북은 죽은 거나 다름없고, 생기를 발현하는 꼬리가 잘리니, 어찌 발복할 수 있겠는가. 뿔뿔이 흩어지고 말겠지.”라고 했다. 그러나 그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넓은 연못이 마를 리 없고 산으로 철마가 지나갈 리 없다는 생각에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스님을 동정했다. 스님이 뭘 모르고 지껄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백여 년쯤 지났다. 그런데 이곳에 탄맥이 발견되면서 스님의 말이 딱 맞아떨어지고 말았다. 마을이 있던 곳은 모두 파헤쳐져 삼거리가 되었고, 그 길로 자동차가 오가게 되었다. 그리고 뒤의 산에는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태백선 철도를 내게 되었다. 그 철도는 봉황새의 목덜미에 해당하는 부분을 잘라버려 더이상 날아갈 수 없는 새의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이 진사의 묘 뒤로는 기찻길이 나 철마가 달리기 시작했고, 앞 연못도 1972년 홍수가 난 이후 광업소 사택을 짓기 위해 매립해 버렸다. 이 때문에 묏자리를 잘 써서 크게 번창한 나날을 보내려던 새골의 경주 이 씨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새골에 살던 경주 이 씨들이 정착했던 이야기는 전설로만 전해 내려온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연하리에 삼척산이라는 산이 있다. 삼척산은 마을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산인데, 이곳의 지명은 보통 오무라고 한다. 오무는 연하리 사슴목장과 삼척산이 있는 곳으로 마을 뒷산의 지형이 까마귀가 춤을 추는 형상이므로 까마귀 산이라는 의미의 한자를 써서 '오산(烏山)' 또는 까마귀가 춤을 춘다고 하여 까마귀 오자 춤출 무자를 써서 '오무(烏舞)'라 한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데 의미를 따져보면 바로 삼척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생긴 것이다. 곧, 삼척산은 특이하게도 마을 한가운데 다른 산과 연결되지 않은 채 솟아있으므로 ‘외따로 있는 산’이란 의미의 '외메'가 된다. 외따로 또는 외롭다의 '외(孤)'는 음차(音借)현상에 의해서 '오'가 되었고 '메'는 '산(山)'이라는 뜻이 되므로 '외메(외따로이 있는 산)'가 되었다. 그 후 우리말의 지명이 한자식으로 표기되면서 '외'는 '오(烏),로, '메'는 '산(山)'으로 변하여 '오메→오산(烏山)'이 되었다. 이때 외는 오로 바뀌면서 까마귀 오(烏)자로 바뀌어 표기된 것이다. 그러니까 오무는 외따로 있는 산인 외메가 바뀌어서 된 것이다.
아주 옛날 삼척에 김 씨가 살고 있었는데, 인품이 유순하고 재산도 많았다. 그런데 그 지방의 토호(土豪)가 김 씨의 재산을 탐내어 죄를 씌워 재산을 뺏으려 하였다. 김 씨는 피신하여 영월에 와서 살았는데, 오무산이 있는 근처에 정착하면서 토지를 사들일 때 이 산도 같이 사놓았다. 시간이 지난 후 삼척에 사는 토호는 김 씨가 영월에 있다는 것을 알고 영월까지 찾아왔다. 그리고 이 산이 김 씨의 산인 것을 알게 된 그는 김 씨가 삼척에서 세금을 내지 않았으니, 그 대신 이 산을 삼척군 재산으로 몰수할테니 산에 대한 세금을 매년 삼척에 바치라고 하였다. 그때는 그 결정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매년 세금을 바쳤다. 그렇게 지내오는 동안 삼척의 토호는 늙고 병들어 세금 받는 일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삼척의 고을 원을 개입시켰다. 삼척 원님은 납세자가 자기 고을 백성도 아니니 마음대로 세금을 인상시켰다. 그래서 김 씨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세금을 내게 되었다. 이 때문에 김 씨는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김 씨에게는 만득(晩得)이라는 일곱 살 난 막내아들이 있었다. 그 아이는 유달리 영특하여 부모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하루는 만득이가 아버지의 근심하는 모습을 보다 못해 그 이유를 캐물었다. 아버지는 나이 어린 네가 알 일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만득이가 집요하게 캐묻자 삼척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던 만득이는 한참 생각하더니 “아버지가 그 세금을 물지 않고 있으면 기다리다 못해 그들이 세금을 받으러 올 것입니다. 그때 제가 해결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나 싶으면서도 얼마간 위로가 되기에 세금을 내지 않고 미뤘다. 이윽고 삼척의 벼슬아치가 이른 봄에 세금을 받으러 왔다. 김 씨네 사랑방에서 거만하고 도도하게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그에게 만득이는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서 수작을 붙여보았다.
"이 산을 삼척산이라 해 높고 세금을 받는 모양인데, 이 산은 소출도 없고, 우리에겐 이 산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산을 아예 삼척으로 가져가십시오. 우리는 가져가시기 좋게 그 둘레에 칡을 심어놓을 것인즉, 올 가을에는 칡덩쿨이 자랄 것이니 칡으로 얽어서 가져가도록 하시고, 세금을 받아갈 생각을 마십시오. 이 말을 삼척 원님에게 꼭 그대로 전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벼슬아치는 기가 막혔지만, 조리가 정연하여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돌아가 삼척 원에게 이 사실을 그대로 보고 하였다. 그랬더니 삼척 원은 무릎을 탁치며 “과연 기발한 응답이로다. 세금을 또 받으러 갔다가는 그 아이한테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다.”하고 김 씨에게 세금 받는 일을 중단시켰다. 한편 김 씨네는 다가 올 사태를 대비하여 그 산기슭에다 많은 칡을 심어 두었다. 그래서 지금도 삼척산에는 칡이 무성하다. 이 이야기는 떠내려온 산에 관한 이야기라 하여, 부래산설화라고 한다. 대체로 이런 설화는 아이의 지혜를 보는 지혜담, 문화 전파에 의한 문화전이, 지역 간의 세력다툼에 의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풀 수 없는 것을 어린아이를 개입시켜서 해결한다는 어린이의 기발한 지혜담으로, 옛날 사랑방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들의 상상력을 키워준 이야기라 할 것이다.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造山里)는 산을 쌓아 만들어서 생긴 지명유래이다. 비보풍수 때문에 지명이 생긴 마을이다. 이 마을은 낙산해수욕장 맞은편 길 건너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의식은 어느 정도 풍부하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승이 지나가기에 물었더니 산을 만들어 마을의 기를 보충하라는 것이었다. 스님의 말대로 산을 만들었더니, 마을에서 벼슬하는 사람이 나왔다. 양양에서 전승하는 이야기를 따라 가 보자.
양양에서 속초 방면으로 10리쯤 가면 낙산사가 나온다. 낙산사 좀 못 미쳐서 한 마을이 있는데, 바로 조산이라는 아담하고 조용한 마을이다. 이곳은 최 씨가 많이 살고 있어 조산 최 씨로 통하고 있다. 옛날 몹시 무더운 여름날, 마음에 노승이 나타났다. 금강산 쪽에서 왔다는 그는 이곳에 당도하여 두루 지세를 살피고 있기에 노인들이 대사를 불러 무엇 때문에 이곳의 지세를 그리도 세심하게 살피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노승은 “지세의 형국이 하도 잘 되어 살피고 있었소.” 하고는 노인들 곁에 와 앉으면서 “이 마을은 먹고 사는 데는 걱정이 없으나 아직 훌륭한 인물이 나지 못하였구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노인들은 호기심이 동했다. 사실 옛날부터 뛰어난 인물이 없었기에 이 마을에서는 훌륭한 인물을 배출시키려고 온갖 힘을 다하였다. 그래서 똑똑하다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투자를 했으나 한 번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마을의 숙원사업이 훌륭한 인물을 배출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형편이니 노인들이 노승의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이는 건 당연했다. “이 마을이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으나 훌륭한 인물이 나지 않는 까닭을 말씀해 주십시오. 또 어떻게 해야만 훌륭한 인물을 배출시킬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노승은 노인의 진지한 물음에 다시 한번 지세를 살피고는 대답했다. “온 마을 사람이 힘을 합하여 인물 나기를 염원하고 있으나 지세가 잘렸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곧, 이 마을 뒷산의 주맥이 설악산 주봉에서 잘 흘러 내려오다가 마을 뒤쪽에서 끊기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인물이 못 나는 이유는 끊긴 맥 때문입니다. 그러니 방법은 주봉을 잇는 것입니다. 온 마을 사람이 힘을 합하여 끊긴 곳에 인공으로 산 하나를 만드십시오. 그러면 얼마 안 되어 이 마을에는 훌륭한 인물이 날 것입니다.”라고 일러 주었다. 이 말을 듣고 그날부터 마을 사람 모두가 힘을 합하여 산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얼마 안 되어 그곳에는 원래 없던 산이 하나 만들어졌다. 지금 보이는 마을 뒷산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노승의 말대로 이 산을 만든 후부터 인물이 많이 나왔고, 인력으로 산을 만든 마을이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조산(造山)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월정리(月井里)에 얽힌 지명유래이다. 남북이 분단되면서 최북단 기차역으로 알려진 월정역(月井驛)이 있는 마을이다. 월정역은 아주 아담하고 예쁜 기차역으로, 그곳에는 간이역에 얽힌 추억과 전쟁의 상흔, 아름다운 달의 화신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아버지 병환을 낫게 하려고 밤새 천 번이나 물을 길어 날랐던 달의 화신 처녀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월정(月井)은 달 월(月)자에 우물 정(井)자를 쓴다. 우리말로 하면 ‘달우물’이 된다. 밤하늘을 밝히는 달과 우물이라는 생명수가 만났다. 또 달은 풍요를 뜻하니 그보다 더 나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달우물 전설에는 아주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아주 먼 옛날 월정리 어느 산골에 이름 모를 병으로 고생하는 홀아비와 그를 지성으로 봉양하는 딸아이가 살고 있었다. 딸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병이 깊어지자 병을 낫게 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노력하였지만 모두 허사였다. 첩첩산중에서 오로지 아버지에게 의지하여 살던 처녀는 앞길이 막막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처녀는 예전에 정월 대보름날이나 한가위 때 아버지가 달을 향해 두 손 모아 빌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딸아이가 곱게 커서 좋은 남편을 만나서 잘살기를 매번 빌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녀는 마지막으로 밤하늘을 밝히는 달님께 아버지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빌기로 했다. 처녀는 지극 정성으로 아버지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밤마다 달님께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처녀는 달님께 빌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백발도사가 나타나서 말을 했다. “나는 달의 화신인데 너의 정성이 지극하여 이르노니 집 옆 바위 위에 가보면 물이 고여 있을 것이니 달이 지기 전에 너의 손으로 천 모금을 길어 아버님께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다” 처녀는 허둥지둥 꿈에 들은 곳을 찾아가서 물을 길어다 아버지 입에 넣기를 기백 번을 했다. 얼마 남지 않은 달은 서편으로 기울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한 딸은 온몸을 바위에 부딪쳐 몸은 찢어지고 피가 흘렀으나 멈추지 않고 계속 왔다 갔다 하며 물을 길었다. 처녀가 가냘픈 손으로 드디어 천 번째 물 깃기를 마치자 서천의 달도 지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아버지 병환은 말끔히 나았다. 그러나 효녀는 지쳐 쓰러졌고, 영영 깨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아버지가 딸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의 눈에는 차디찬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사람들은 바위 위에 물이 고였던 자리를 ‘달의 우물’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 역시 달 월(月)자에 우물 정(井)자를 써서 월정리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 가면 처녀가 달을 들고 있는 형상을 만들어 놓았다.
월정역(月井驛)은 서울에서 원산까지 가던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다. 현재 월정역은 남한에서는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는 역이다. 남방한계선에 근접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철원안보관광의 대표적인 경유지이다. 현재는 객차 잔해 일부분만 남아 있는데, 열차의 앞부분은 6.25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후퇴할 때 가져가고, 남아있는 것은 뒷부분의 객차와 화차의 일부이다. 이곳에 가면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염원을 담은 팻말과 함께 분단된 민족의 한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경원선의 건립은 아주 특별하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주민들을 강제동원하고 당시 러시아(구소련)의 10월 혁명으로 추방된 러시아인을 고용하여 건설하였다. 개통일자는 1914년 8월 16일이다. 이 철도는 강원도 내에서 제일 먼저 부설되었는데 서울 ↔ 원산간 221.4km를 연결한 산업 철도였다. 철원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원산의 해산물, 서울에서 생필품 등을 수송하는 역할을 했다. 현재의 월정역사는 철원안보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88년 복원하였다.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후탄리 꽃병마을에 얽힌 지명유래담이다. 신분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남녀가 신랑바위와 각시바위가 되었고, 마을이름은 꽃병마을이 되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슬픔을 이해하고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 저승에서라도 이루라고 마을이름을 지어 기원했다. 꽃병마을 지명이 생긴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옛날 김삿갓면 후탄리 마을에 신진사(辛進士)라는 이가 살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 많은 재산을 풀어서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어 인근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었다. 신진사에게는 늦게 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매일 나룻배를 타고 강 건너 옹정리에 있는 서당에 다니며 학문에 열중하였다. 나룻배를 젓는 사공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도령을 건네주며 가슴 뿌듯함을 느끼곤 하였다. 지체 높은 양반집 도령답지 않게 항상 다정하고 따뜻하게 사공을 대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 사공은 나이 들고 기력이 쇠하여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고, 몸져누워서 착한 도령을 건네주지 못해 어떡하나 걱정했다.
나룻배가 거른 지 사흘째 되던 날 아침 신 도령이 나루터에 나가니 희뿌연 물안개 속으로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나룻배에는 웬 아리따운 아가씨가 노를 젓고 있었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이 처녀에게 넋을 잃은 신 도령은 그만 첫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이 처녀는 뱃사공의 무남독녀로서 아버지가 병을 얻어 몸이 아픈 중에도 신 도령 걱정을 하니까 아버지 대신 나룻배를 저었던 것이다. 그 후, 도령과 처녀뱃사공의 만남이 계속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갔다. 그러자 신진사댁 도령은 공부도 잘되지 않을 뿐 아니라 머릿속에는 사공의 딸 생각으로 가득 찼다. 당시만 하여도 사공들은 천민으로서 냉대를 받고 있었으니 부모님께 사공 딸과의 관계를 말씀드릴 수도 없었으므로 신 도령의 얼굴은 나날이 야위어 갔다. 신진사댁 내외는 아들이 너무 공부에 열중하다 보니 그러려니 하며 속으로만 안타까워할 뿐 그 사정은 짐작도 못했다.
그 후, 병석에서 털고 일어나 다시 배를 젓게 된 사공은 도련님의 얼굴이 야위어 가는 것이 걱정되어서 그 이유를 물었다. “도련님! 요사이 도련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이 혹시 무슨 큰 걱정이라도 있습니까?” 이에 신 도령은 이때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사공의 딸을 사랑하고 있으니 결혼을 하겠다고 말하였다. 사공은 자신에게 하나 뿐인 외동딸이 신 도령의 눈에 든 것은 기쁘나 두 집의 신분 차이를 생각할 때 눈앞이 깜깜해졌다. “도련님! 도련님 같이 지체 높으신 분이 저희 같은 천한 것의 딸을 생각하시다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신 진사 어른께서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지니 아예 우리 딸년일랑 잊어버리십시오.” 했다. 그러나 신 도령은 서당에도 안 가고 집안 어른의 눈을 피해 가면서 계속 뱃사공의 딸을 만났다. 이런 소문이 마을 전체에 퍼지면서 신 진사 내외에게도 알려지게 되었고 신 도령에게는 꾸지람과 함께 금족령이 내려졌다. “이놈아! 네가 그 천한 사공의 딸을 만나 우리 가문을 욕되게 하겠단 말이냐? 앞으로 한 번만 더 만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하지만 신 진사의 금족령도 이 두 남녀의 만남을 끊을 수는 없었다. 이에 신 도령은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은 절벽에 있는 토굴에 갇히게 되었으며 늙은 뱃사공 부녀도 붙잡혀서 곤장을 맞은 후, 사흘 안으로 이 마을에서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뱃사공의 딸은 곤장을 맞고도 매일 신 도령이 갇힌 강 건너 토굴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다가 마을을 떠나야 하는 3일 째 되는 날 아침, 족두리를 쓴 채 강 건너 토굴 속에 갇힌 신 도령을 애타게 부르면서 벼랑 아래의 강물로 몸을 던졌다. 이 소식을 들은 신 도령도 자결했다. 이때 맑은 하늘에서는 갑자기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생기면서 후탄리 절벽 위에는 사모관대를 한 신 도령을 닮은 바위가 우뚝 솟아났으며, 그 강 건너편 옹정리의 사정도 마을에는 족두리를 쓴 바위가 생겨나서 서로 마주보고 서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신랑바위’와 ‘각시바위’라고 부르고 이들 신랑 신부가 결혼할 때 절개를 상징하는 푸른 대나무와 소나무를 꽂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마을 이름도 ‘꽃병’이라고 부르면서 현생에서 이루지 못한 두 사람의 인연이 저승에 가서라도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강원도 춘천시 서면 당림리(塘林里)를 예전에는 ‘마당골’이라 불렀다. ‘당림’이라는 지명은 신(神)을 모시는 ‘당 숲’이 마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 숲’ 또는 ‘당림(堂林)’이라고 한다. 당 숲 안에 말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당(馬堂)이 있었기에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마당골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언덕 ‘당(塘)’자를 쓴다. 마당골은 춘천시에 소재한 보안역, 안보역, 경기도 가평군의 상천역을 잇는 역로(驛路)에 있는 마을로, 춘천시 덕두원에서 석파령을 넘어 서울로 향하는 길에 있는 첫 마을이다.
서울에서 춘천을 오가는 관원과 나그네들은 당림리에 앞서서 안보리를 지나야 한다. 안보리는 북쪽에 계관산이 있고, 남쪽에 북한강이 흐르는 교통이 편리한 마을로, 조선시대 안보리에 ‘안보역(安保驛)’이 있었다. 지금도 안보역이 있던 곳을 ‘고역터’, ‘고역촌(古驛村)’ 등으로도 부른다. 조선시대 춘천으로 부임하는 관원들은 안보리와 당림리를 거쳐 석파령(席破嶺)을 넘어서 춘천에 부임하게 되는데, 석파령은 전임 관원과 신임 관원이 교체하는 곳이다. 관원들이 교체할 때 관인(官人)이 자리 한 개만을 가지고 와서 양쪽을 나누어 하나씩 앉았기에 석파령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춘천에서 석파령을 넘어 서울로 가는 길에 있는 첫 번째 역인 안보역에는 40~50마리 정도의 역마(驛馬)가 있었다. 그런데 역마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은 말 한 필은 안보역에서 일하는 역졸도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했다. 역졸들의 일부는 열 살은 넘었을 것이라고 했지만, 스무 살도 훨씬 넘었을 것이라고 하는 역졸도 있었다. 또한, 석파령을 넘어 오랫동안 서울과 춘천을 오르내린 나그네 가운데는 서른 살은 되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30~40년 전에도 그 말을 타고 춘천까지 다녔던 것을 구체적으로 회상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나그네들이 여러 명 있어서, 늙은 말의 나이는 자꾸 불어나 사십이나 오십도 넘었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늙은 말에 대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이유가 있었다. 늙은 말은 안보역에 적을 두고, 춘천의 보안역(현재 강원대학교병원 자리)과 경기도 가평의 상천역까지 약 32㎞를 오르내렸다. 역마 가운데도 성실하였으며,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르는 자기 일을 묵묵히 하였다. 그런데 늙은 말이 당림리 ‘당 숲’ 앞에 이르러서는 항상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의 등에 태운 사람을 강제로 내리게 하고, 짐도 내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당 숲 안쪽에 있는 무덤을 향해서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춘천을 오르내렸다. 당 숲을 지날 때면 절하는 것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심지어는 당 숲을 향해 절을 하는 그것을 못 하게 하면, 숲속을 다닐 때 말이 목숨을 빼앗는다는 소문까지도 있었다. 그래서 역졸들은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당 숲 앞을 지날 때, 과객이나 관리들도 내리게 한 다음, 말이 당 숲을 향해 절을 한 다음에야 다시 정중하게 말에 오를 것을 요청하였다.
늙은 말이 당 숲을 향해 절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늙은 말의 어미도 안보역에게 속해 있는 역마였다. 어미 말도 늙은 말이 당 숲을 지날 때 사람과 짐을 내리게 하고 절을 했던 것과 똑같이 하였다. 그러던 중, 화가 난 어느 관원에게 매를 맞았다. 어미 말은 관원을 태운 채로 숲속에서 발버둥을 치다가 관원이 크게 다쳤다. 그 후 관졸들에게 어미 말은 맞아 죽었다. 그런데 그 어미 말의 어미 말도 똑같이 하다가 역졸들에게 맞아 죽었었다. 곧 할미 말이 죽은 곳에서 어미 말이 할미 말의 무덤을 향해 절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던 것이었다. 늙은 말이 어렸을 때 어미 말의 죽음을 보게 되었고, 그 이후 당 숲을 지날 때마다 어미 말의 무덤이 있는 당 숲을 향해서 절을 하느라 강제로 사람과 짐을 내리게 했던 이러한 사연을 안 역졸들은 비록 인간은 아닌 동물이지만, 어미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늙은 말이 당 숲 앞에서 절을 하는 행위를 기다려 주었다.
어느 날 당림리를 지나던 고을 원이 늙은 말의 효성을 기특하게 여겨, 말이 절을 하게 하지 말고, 사람들이 말의 안녕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당 숲 둔덕에 말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당이 지어지고, 마을 이름도 ‘마당리’라 불렀다고 한다. 「말 효성에 감복해 말 사당을 지었던 마당골」은 대대로 이어지는 말의 효성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물인 말의 어미에 대한 효를 통해 인간들의 효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강원도 영월군 연하리에는 ‘숯가마’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예전에 마을에 숯을 굽는 ‘숯가마’가 있었기에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 숯가마는 영월읍 소재지에서 4㎞ 정도 중동면 석항리로 가는 길에 위치하며, 영월읍 연하리로 들어서는 초입에 있는 마을이다. 숯가마는 ‘초리’, ‘허부령골’, ‘배나무골’, ‘음지마을’, ‘양지마을’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다. 지금은 폐쇄되었지만, 태백선의 ‘두평역’이 자리하고 있던 곳이기도 하다.
‘숯가마’는 강원도 영월군에서 정선군, 태백시, 삼척시 등으로 통하는 길목에 해당한다. 마을 앞으로 ‘석항천’이 흐르는데, 석항천은 예전에 마을 서편 산 아래로 흘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앞은 비옥한 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도 석항천과 맞붙어 있는 들을 ‘숯가마들’이라고도 한다. 옛날 두평역 동쪽 산 아래에 부자가 한 명 살고 있었다. 예전에는 숯가마에 주막이 없어서 마을을 가로질러 정선이나 태백, 삼척 등을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부잣집에 들러서 쉬었다 가곤 하였다. 부잣집 사람들이 매일 접대해야 하는 길손들이 수십 명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부잣집에 사는 아녀자들은 매일같이 몰리는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항상 힘들어했다. 손님을 맞지 않고 편안하게 살기를 염원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나이가 많은 스님 한 명이 부잣집 대문 앞에 서서 시주하기를 청하였다. 부잣집의 아녀자들은 항상 그랬던 거처럼 곡식을 후하게 퍼서 스님 바랑에 넣어주었다. 스님이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부잣집 아녀자 가운데 한 명이 “우리 집은 손님 접대에 볼일을 못 볼 지경인데, 어떻게 하면 손님들이 오지 않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스님은 “손님들이 찾아오는 것은 찾아올 법해서 오는 것이 너무 귀찮게 여기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도 계속해서 손님이 더 오지 않게 하는 방법을 묻자, 스님은 “굳이 그것을 원하신다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충분히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부잣집의 아녀자들은 손님 접대에 지쳐있었기에 스님에게 그 방법을 알려달라고 계속해서 물었다. 시주를 더 두둑하게 하고는 손님이 오지 않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스님은 하는 수 없어서 “정이 그러하시면, 이 앞들에 밭을 개울물을 막아서 모두 논으로 만들면 될 것입니다.”라고 손님이 오지 않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스님의 말을 듣고는 그날 저녁 부잣집 아녀자들이 김부자에게 앞들을 모두 논으로 만들자고 하였다. 김부자도 밭농사를 짓느니 논으로 만들어 논농사를 짓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아녀자들의 말을 듣고는 개울을 막아서 밭을 모두 논으로 만들었다. 그랬더니 스님의 말처럼 다음날부터 매일 수십 명씩 찾던 손님들의 점차 발길이 끊어졌다. 손님들을 대접하지 않아도 되어서 부잣집 아녀자들은 매우 만족하게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부잣집은 자주 자연재해를 입었다. 밭을 논으로 만든 지 몇 년 안 되어서는 집안 형편까지도 어려워져 결국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부잣집이 있는 마을의 지명이 ‘숯가마’이다. 부잣집이 부자가 된 것은 지명처럼 숯불이 이글이글하듯이 그 재산이 일어났던 것이기 때문이다. 밭을 논으로 만든 것은 숯가마 아궁이에 물을 뿌려서 불을 꺼버린 것과 같은 것이기에, 결국 부잣집은 몇 해 지나지 않아 망하고 말았다. 「숯불이 이글거리듯 부자가 되는 강원도 영월의 숯가마」는 아녀자 때문에 지형의 변화로 망한 부자를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에 의해 지맥을 손상해 집안이 망했다는 지명유래로 이와 같은 지명유래는 전국적으로 전승한다.
치악산은 우리나라 16번째 국립공원으로 1984년에 지정되었다. 치악산의 정상은 주봉인 비로봉으로 해발 1,288m이다. 비로봉의 주소는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산 33번지이다. 치악산은 남대봉·천지봉·향로봉·매화산·삼봉·투구봉 등 1,000m가 넘는 고봉들이 있어 예로부터 산세가 뛰어나고 험난하기로 유명하다. 치악산은 원주시 소초면·판부면·신림면·반곡동·행구동, 횡성군 강림면·안흥면·우천면 그리고 영월군 무릉도원면 등 세 개 시·군의 9개 면·동에 걸쳐있는데, 치악산 전체 면적 중 많은 부분은 횡성군에 속한다.
치악산은 예전에 가을 단풍이 아름다워 적악산(赤岳山)이라 불리던 산인데, 아래 전설로 인하여 지금과 같이 치악산(雉嶽山)으로 변했다고 한다.
“옛날 시골에 사는 한 젊은이가 과거를 치르러 한양으로 향하였다. 한참을 가다가 강원도 적악산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깊은 산중에서 갑자기 꿩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주변을 살펴보니 구렁이가 꿩 새끼를 잡아먹으려고 접근하자 암꿩과 수꿩이 크게 짖고 있었다. 매우 다급함을 느낀 젊은이는 지니고 있던 활시위를 당겨 구렁이를 쏘았다.
젊은이는 구렁이를 죽이고 계속해서 가던 길을 갔다. 산속이라 날이 금방 어두워지자 젊은이는 잘 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불빛을 발견하였다. 빠른 걸음으로 가보니 작은 집이 하나 있었다. 젊은이는 집 문을 두드리며 주인을 불렀다. 집에서 젊은 여인이 나왔다. 젊은이는 사정을 얘기하고 하룻밤 묵기를 청했다.
젊은 여인은 잘 곳을 안내해 주었다. 젊은이는 피곤하여 금방 잠들었다. 그런데 젊은이가 갑자기 숨을 쉴 수 없어서 눈을 뜨니 구렁이가 자신의 몸을 감고 있었다. 젊은이가 숨을 헐떡이며 얼굴이 하얗게 되자 구렁이는 ‘나는 오늘 낮에 네 화살에 맞아죽은 구렁이의 아내이다.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너를 죽여야겠다. 그래도 기회를 주겠으니, 종소리가 세 번 울리면 너를 풀어주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밤중 깊은 산속에 누가 있어 종소리를 울리겠는가. 젊은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감고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어디선가 종이 ‘뎅! 뎅! 데엥!’ 하고 세 번이 울렸다. 종소리에 젊은이는 물론 구렁이도 깜짝 놀랐다. 구렁이는 ‘약속을 했으니 풀어주겠다.’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젊은이는 날이 밝자마자 종소리가 난 곳을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 종루가 있었는데, 종 아래에는 전날 자신의 새끼들을 살리려고 크게 짖던 암꿩과 수꿩 두 마리가 머리가 깨져 죽어 있었다. 젊은이는 꿩이 자신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종을 울리고 죽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과거시험 치기를 포기하고 꿩을 양지 쪽에 묻어주고 절을 세워 꿩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적악산을 치악산이라 불렀고, 젊은이가 세운 절은 원주시 신림면에 있는 치악산 상원사이다.”
전설에 따라서는 꿩이 까치, 구렁이가 뱀, 젊은이가 한량·선비 또는 나그네 등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이들 전설의 내용은 다르지 않다.
치악산은 일반인들이 정상인 비루봉까지 오르기는 어려움이 있다. 이에 원주시에서는 2019년 4월부터 치악산둘레길 개발을 시작하여 2021년 5월에는 1코스 꽃밭머리길, 2코스 구룡길, 3코스 수레너미길, 4코스 노구소길, 5코스 서마니강변길, 6코스 매봉산자락길, 7코스 싸리치옛길, 8코스 거북바위길, 9코스 자작나무길, 10코스 아흔아홉골길, 11코스 한가터길 등 총연장 139.2㎞의 둘레길을 개통하였다. 특히 치악산둘레길은 치악산 곳곳에 있는 역사현장 및 문화·생태자원을 살펴봄으로써 자연스레 학습이 될 수 있도록 각 코스의 모든 길을 연결하였다.
칠우고개는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반곡리 무리개에서 원주시 호저면 광격리로 넘어가는 길에 위치한 고개이다. 예전에는 우마차도 다닐 수 없는 아주 좁은 소로였다고 한다. 길은 좁고 주변에 나무가 우거져 낮에도 해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춘천-금호구간 55번 중앙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주변의 나무가 베어지고 예전보다 많이 낮춰진 까닭에 현재는 고개보다 언덕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나지막하다.
아울러 예전에 걸어 다녔던 칠우고개는 현재 중앙고속도로 옆으로 길을 내어 도로포장이 되어 자동차가 다니고 있으며, 도로 이름은 ‘광학로’이다. 도로명이 광학로인 것은 원주시 호저면 광격리와 횡성군 횡성읍 학곡리 사이의 길임을 밝히기 위해 광격리에서 ‘광’자를 따고 학곡리에서 ‘학’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옛날에는 이곳 칠우고개에 아름드리 나무가 꽉 차 있어서 낮에도 길이 어두웠다고 한다. 이렇듯 고갯길이 낮이고 밤이고 어두우니 담력이 있는 젊은 남자라도 혼자 넘어가기를 꺼렸다고 한다. 더욱이 이곳 칠우고개 주변에 집이라고는 없어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주변에 있는 마을까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에 이곳은 인적이 드물었고 이런 점을 노린 도적들이 수시로 나타나 지나가는 행인들의 봇짐을 강탈하기도 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이런 일을 당하니 주민들은 관아에 몰려가 대책을 세워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관아에서도 도적을 잡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도적 하나를 열 사람이 못 지킨다고 신고를 받고 출동하면 도둑은 이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관아에서는 방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다.
누구든지 이 고개를 넘을 때는 혼자서 넘지 말고 최소한 7명이 모여 길동무를 해서 넘어가시오!
이후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을 때 고개 아래에서 기다렸다가 7명이 모인 후에야 함께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이에 마을에서는 칠우고개 또는 칠우현(七友峴)이라 했다.
횡성군 반곡리에서는 ‘칠우고개’, ‘칠우현(七友峴)’이라 하는데, 같은 고개를 가리키고 유래 또한 다르지 않음에도 원주시 광격리에서는 치루개재 또는 ‘칠고개’, ‘칠개재’ 등으로 부른다. 그러나 ‘치루개재’는 ‘칠우개재’의 연철로 이해할 수 있고, ‘칠고개’, ‘칠개재’ 등의 표현 또한 칠우고개처럼 ‘칠’을 의미한 것으로 이해되어 ‘칠우’와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예전에 원주시 호저면 광격리·고산리·옥산리 주민들은 1일·6일·11일·16일·21일·26일에 5일장이 서는 횡성장을 많이 이용했다. 이들 지역은 행정상으로는 원주시에 속하지만, 예전에는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까닭에 가까이 있는 횡성장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했다. 그런데 이곳 주민들도 횡성장을 오가려면 반드시 칠우고개를 넘어야 했다. 도적들은 그때를 기다렸다가 나타나서 물건 뺏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장에 올 때는 이웃들이 함께 움직여서 한두 명의 도적은 문제가 없으나, 장을 보고 뒤쳐져서 늦게 혼자 가는 경우에는 도적이 나타나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횡성장에 왔다가 막걸리 한잔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