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는 1921년 3월 26일 경남 하동군 북천면에서 출생했다. 이병주의 집안은 오랫동안 하동에 연고를 두고 있었고 근방에서는 “8형제, 8천석의 집안”이라고 불리며 권세가 높았다. 하동에서 북천보통학교와 양보공립보통학교를 다닌 이병주는 진주농업학교에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난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3고, 메이지대학 문예과 등에서 수학하고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국에서 머물다 광복 후 귀국, 서울과 진주 지역에서 교수 생활을 한다. 한국 전쟁 이후에는 부산에서 신문사 주필과 작가로 활약하며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발표했다.
이병주는 여러 글에서 자신의 고향인 하동군 북천면에 대해 이야기한다.
산촌에서 자랐다. 병풍처럼 산이 첩첩으로 둘러쳐진 마을이었다. 하늘은 그 첩첩한 산의 능선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나는 하늘의 원래 모양이 그런 것으로 알았다.
-「사랑을 위한 독백」, 회현사, 1979, 1쪽
하동을 내 고향이라고 하지만 내가 나고 자라며 소년기를 보낸 진짜 고향은 하동군 가운데에서도 북천면이란 곳이다. 서울에 앉아 고향의 산천을 그려보면 꿈나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경치가 좋았다는 뜻이 아니다. 전형적인 산수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러한 산, 그러한 시내, 그러한 들, 그러한 돌, 그러한 집들로 이루어진 가난한 마을과 마을에 불과하다. (중략) 이처럼 쓰고 있으면 무미건조할 뿐이고 사실 그러한데 어째서 고향이 이토록 그리우니 모를 일이다.
-「지리산 남쪽에 펼쳐진 섬진강 포구」, 한국인, 1987, 100-101쪽
이병주에게 하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기거나 이렇다 할 자랑거리가 있는 고장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리운 고향이다. 또한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게 한 한국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기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역사의 현장으로서의 하동과 지리산 일대의 모습을 담은 작품으로 이병주의 대표작인 「지리산」이 있다.
눈을 남으로 돌리면 산봉우리가 파도처럼 아득히 시야 속에서 물결치고, 서쪽과 북쪽으로 고개를 젖히고 쳐다봐야 할 산봉우리들이 첩첩이 쌓여 있었다.
-「지리산1」, 한길사, 2006, 22쪽
들이 끝난 곳에 개울이 나타났다. 징검다리 언저리에 엷은 얼음이 붙어 있었다. 개울물에 푸른 하늘이 구름을 띄우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어린 동생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정다워 뵈는 마을.
-「지리산1」, 한길사, 2006, 199쪽
이병주는 「지리산」에서 그리운 고향의 모습으로서의 하동의 모습을 잊지 않고 담으면서, 당대에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들을 장대한 서사로 엮어나갔다. 「지리산」에는 하동과 지리산이 품었던 한국 전쟁의 상처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하동에 있는 이병주 문학관에서는 이러한 이병주의 삶과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있으며 매년 세계의 작가들을 초대하는 국제 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홍사용은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태어났다. 대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한학을 수학하고 17세에 상경하여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3개월 뒤에 풀려났다. 이 시기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재종형 홍사중을 설득해 ‘문화사’를 설립하고 문예지 『백조』와 사상지 『흑조』를 기획, 『백조』를 3회 간행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시를 창작, 발표했다. 1923년 근대극 운동의 선구적 극단인 토월회에 가담했고, 1927년에는 ‘산유화회’를 결성, 1930년에는 신흥극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1939년 희곡 『김옥균전』을 쓰다가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1947년 폐환으로 별세했다.
낭만주의 운동의 선구에서 감상적이면서 민족주의적인 주제의식을 가진 장시와 민요시를 창작했다.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 「나는 왕이로소이다」,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봄은 가더이다」 등이 대표작이다. 시작 활동 외에 소설, 평문, 희곡을 쓰기도 했다. 1947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홍사용의 대표작으로, 1923년 9월호 『백조』에 발표되었다. 9연의 산문시 중 마지막 두 연은 다음과 같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한식날 아침에/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그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아아, 그때부터 눈물의 왕은!/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은 소리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 둑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련(坎中連)하고 앉았더이다./아아, 뒷동산에 장군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 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홍사용전집』, 타라북스, 35~36면
“눈물의 왕”인 까닭은 “설움이 있는 땅”의 왕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현실에 대한 한탄으로 해석된다. 민족의식을 담고 있는 비애와 감상적 서정이 특색이다. 이러한 시적 경향은 당시 백조 동인들의 낭만주의적인 색채를 대표한다. 유년시절을 보낸 경기도 화성시 노작로에 홍사용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노작홍사용문학관이 있다. 홍사용은 문학관 뒤 노작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경기도 광명시의 작가로 기형도가 있다. 기형도는 1960년 인천시 옹진군에서 태어나 5세부터 29세 사망할 때까지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당시 시흥군 소하리)에서 거주했다. 1985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가 당선되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중앙일보에서 근무했다. 개인적인 내적 세계를 표현하면서도 사회비판적인 시선을 함께 보이는 개성적인 작품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입 속의 검은 잎」, 「전문가」, 「홀린 사람」 등이 대표작이다. 1989년 뇌졸중으로 별세했다. 기형도가 거주했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기형도 문학관이 있다. 「입 속의 검은 잎」은 기형도의 대표작이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중략)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입 속의 검은 잎」,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58~59면
이 시에는 1980년대 억압적이던 정치‧ 사회 분위기, 비판적인 시선과 발언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탄압이 난무하던 시대 상황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 회의와 절망이 나타난다. 평론가 김현은 기형도의 시에 대해 “아주 극단적인 비극적 세계관의 표현”(김현,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154면)이라고 평했다. 기형도의 이른 죽음은 이러한 비극적 세계관이 긍정적인 전망을 가질 기회를 주지 않았다. 기형도의 독특한 시적 세계는 한국 문학사에 인상적인 한 장면으로 남았다. 경기도 광명시에는 기형도의 삶과 작품 세계를 기리는 기형도 문학관이 설립되어 기형도와 그의 시, 그리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고 싶은 공간이 되고 있다.
경상북도 왜관의 시인으로 구상이 있다. 구상은 1953년 본적지이자, 가족사진을 찾을 수 있었던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있는 왜관으로 내려가 1974년까지 기거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낙동강이 보이는 왜관은 구상 시의 원천이었다. 구상과 왜관의 각별한 인연 때문에 경상북도 왜관에는 구상 문학관이 건립되어 있다. 구상의 본명은 구상준이며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얼마 후 아버지가 독일계 신부들이 개설한 교구의 교육 사업을 맡게 되면서 원산으로 이주했다. 성 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를 수료, 1941년 일본대학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 시절, 각 종교의 철학을 학습했고 사회주의에 경도되기도 했다.
1942년 귀국해 1945년까지 원산에서 『북선매일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이 광복 1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시집 『응향』에 「밤」,「여명도」, 「길」 등의 시를 발표했으나, 1947년 이들 시가 반인민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면서 월남했다. 1949년에는 『연합신문』 문화부장, 6‧25 전쟁 중에는 국방부기관지인 『승리일보』를 만들며 종군했다. 1952년부터는 『영남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을 했다. 1953년에 『민주고발』이라는 사회평론집을 냈으나 판매 금지되었고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이후 정계 입문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하고 효성여자대학, 서강대학교, 서울대학교, 중앙대학교, 미국 하와이대학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는 물론 희곡과 시나리오, 수필 등의 집필 활동에 매진했다.
구상의 시는 기독교와 동양 철학을 바탕으로 존재와 현상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시집 『구상시집』(1951), 『초토의 시』(1956), 『말씀의 실상』(1980), 『조화 속에서』(1991), 시론집 『현대시창작입문』(1988), 희곡 시나리오집 『황진이』(1994) 등을 발표했다. 금성화랑 무공훈장(1955), 서울시 문화상(1957), 국민훈장 동백장(1970), 대한민국 문학상 본상(1980), 대한민국 예술원상(1993), 금관문화훈장(2004)을 수상했다. 2004년 별세했다. 구상의 대표작은 1956년 발표한 연작시 「초토의 시」다. 6·25 전쟁을 소재로 한 시로, 종군 작가였던 구상이 목도했던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고발하고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이념을 초월한 민족애와 인간애를 주제화하고 있다.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썩어 문드러진 살떵이와 뼈를 추려/그래도 양지바른 드메를 골라/고히 파묻어 떼마져 입혔거니/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三十 리면/가루막히고//무인공산의 적막만이/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살아서는 너희가 나와/미움으로 맺혔건만/이제는 오히려 너희의/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바램 속에 깃드려 있도다.//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구름은 무심히도/北으로 흘러가고//어디서 울려오는 포성 몇 발/나는 그만 이 恩怨의 무덤 앞에/목 노아 버린다.
「초토의 시‧8-敵軍 墓地 앞에서」, 『구상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7~18면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에는 구상의 시와 삶을 기리는 구상문학관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경상남도 창원시의 시인으로 김달진이 있다. 김달진은 1907년 경상남도 창원군 웅동(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에서 태어났다. 계광보통학교, 서울의 중앙고보를 다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중퇴했다. 건강을 회복한 후 서울의 경신중학을 다니다 일본인 영어 교사 추방운동을 벌여 퇴학당했다. 이후 계광보통학교 교사를 했다. 1929년 『문예공론』에 시 「잡영수곡」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4년 금강산 유점사에 입산했다. 『시원』과 『시인부락』에 참여하며 꾸준히 시작활동을 했다. 1939년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를 졸업했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만주로 도피, 용정에서 안수길이 간행한 잡지 『싹』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유점사에서 하산하여 동아일보사에 잠시 근무하다 대구, 진해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62년 남면중학교(현 창원남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이후부터는 동양고전과 불경번역사업에 진력하여 동국대학교 역경원 역경위원으로 활동했다. 1989년 사망했다. 시집 『청시』(1940)를 비롯하여 시전집 『올빼미의 노래』(1983), 장편 서사시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1984), 선시집 『한 벌 옷에 바리때 하나』(1990), 수상집 『산거일기』(1990) 등을 남겼다. 김달진의 시는 불교와 노장 사상을 기반으로 세속적인 번뇌를 초월하여 절대적인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는 세계 있기에」는 김달진의 이러한 구도자와 같은 삶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시다.
그리는 세계 있기에/그 세계 위하여,
生의 나무의/뿌리로 살자.
넓게 굳세게./또 깊게,
어둠의 苦惱 속을/파고들어,
모든 才氣와 賢明 앞에/하나 어리석은 침묵으로-
그 어느 劫外의 하늘 아래/찬란히 피어나는 꽃과,
익어 가는 열매/멀리 바라보면서-
「그리는 세계 있기에」, 『김달진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78~79면
김달진은 「열무우 꽃-七月의 鄕愁」처럼 향수를 토로하는 시도 여럿 발표했다.
가끔 바람이 오면/뒤우란 열무우 꽃밭 위에는/나비들이 꽃잎처럼 날리고 있었다.
가난한 가족들은/배적삼에 땀을 씻으며/보리밥에 쑥갓쌈을 싸고 있었다.
떨어지는 훼나무 꽃향기에 취해,/늙은 암소는/긴 날을 졸리고 졸리고 있었다.
매미 소리 드물어 가고/잠자리 등에 석양이 타면/우리들은 종이 등을 손질하고 있었다.
어둔 지붕 위에/하얀 박꽃이/별빛 아래 떠오르면,
모깃불 연기 이는 돌담을 돌아/아낙네들은/앞개울로 앞개울로 몰려가고 있었다.
먼 고향 사람 사람 얼굴들이여/내 고향은 남방 천리,/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생각이여.
「열무우 꽃-七月의 鄕愁」, , 86~87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의 향토적인 모습을 그린 시다. 김달진에게 고향 창원은 늘 그립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김달진이 태어난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에는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김달진문학관도 건립되어 있다. 매해 김달진문학제가 열리고 김달진문학상도 수여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김달진을 기리기 위해 찾고 있다.
김달진에게 고향 창원은 늘 그립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김달진이 태어난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에는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김달진문학관도 건립되어 있다. 매해 김달진문학제가 열리고 김달진문학상도 수여하고 있다.
시인 김춘수는 1922년 11월 22일 경상남도 통영읍 서정 61번지에서 태어났다. 1935년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립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고교)에 입학, 1939년 자퇴하고 1940년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 입학했다. 1942년 12월 일본 천황과 총독 정치를 비방하여 세다가야 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서울로 송치되었다. 1945년 통영에서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고 1946년 8월 광복1주년 기념 시화집 『날개』에 「애가」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통영중학교, 마산중학교 교사, 해인대학(현 경남대학교), 경북대학교,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이 되어 문공위원으로 활동했다.
언어와 존재에 대한 철학이 담긴 시를 썼다. 의미에 대해 천착했던 그는 태도를 바꾸어 1970년대부터는 ‘무의미시’를 제시했다. 관념과 의미 이전의 존재의 본질에 대해 탐색하고자 하는 열망의 소산이었다. 또한 무의미시는 역사와 의미에 대한 허무 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1990년대 해체시의 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시집으로 『늪』(1950), 『기』(1951), 『인인』(1954),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 기타』(1969), 『처용』(1974), 『김춘수시선』(1976), 『꽃의 소묘』(1977), 『남천』(1977), 『비에 젖은 달』(1980), 『처용 이후』(1982), 『처용 단장』(1991), 『서서 잠드는 숲』(1993), 『들림, 도스토옙스키』(1997), 『의자와 계단』(1999) 등이 있고 시론집도 발표했다.
김춘수의 대표작은 「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꽃」, 『김춘수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58
「꽃」은 존재와 언어의 관계에 대한 고찰과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사유가 담겨있는 시다. 1952년 작품으로 김춘수가 의미의 문제에 빠져있을 때의 작품이다. 이후 김춘수는 마지막 시행의 ‘의미’를 ‘눈짓’으로 수정한다. 그의 시적 세계관이 무의미에 대한 관심으로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경상남도 통영시 항남동오거리에는 김춘수의 동상이, 경상남도 통영시의 남망산 공원 입구에는 「꽃」 시비가 세워져 있다. 경상남도 통영시 동호동에는 김춘수의 생가가 남아 있다. 경상남도 통영시 내의 미륵도에 있는 김춘수유품전시관에는 김춘수의 육필 원고와 출판물들을 비롯하여 김춘수가 생전에 사용했던 옷, 소파, 침대, 식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김춘수유품전시관에는 김춘수의 고향 바다에 대한 소회가 담긴 글이 있다. 김춘수는 자신의 시의 원천이 곧 고향 바다라고 말한다.
요즘도 나는 화창한 대낮 길을 가다가 문득 어디선가 갈매기 우는 소리를 듣곤 한다. 물론 환청이다. 갈매기의 울음은 고양이의 울음을 닮았다. 바다가 없는 곳에 사는 것은 답답하다. 바다가 보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 고향 바다는 너무나 멀리에 있다. 대구에서 20년이나 살면서 서울에서 10년 넘어 살면서 나는 자주자주 바다를 꿈에서만 보곤 했다. 바다는 나의 생리의 한 부분처럼 되었다. 바다, 특히 통영(내고향) 앞바다, 한려수도로 트인 그 바다는 내 시의 뉘앙스가 되고 있다고 나는 스스로 생각한다. 그 뉘앙스는 내 시가 그동안 어떻게 변해왔던 그 바닥에 깔린 표정이 되고 있다. 나는 그렇게 혼자서 스스로 생각한다.
경상북도 경주시의 시인으로 박목월이 있다. 박목월은 1915년 경상북도 월성(현 경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박영종이다. 1935년 대구의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부터 계성중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서라벌예대, 연세대학교, 홍익대학교, 한양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박목월은 시 뿐만 아니라 동시와 수필을 창작하기도 했다. 작품 활동은 동시로 시작했다. 1933년 『어린이』지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 『신가정』에 동요 「제비맞이」가 당선되면서부터 동시를 썼다. 1939년 9월 『문장』에 정지용의 추천으로 「길처럼」, 「그것은 연륜이다」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정지용은 박목월의 시를 김소월의 시와 견주며 극찬했다.
1946년 조지훈, 박두진과 3인 시집 『청록집』을 발행했다. 출판사 산아방, 창조사 등을 경영했다. 잡지 『아동』(1946), 『동화』(1947), 『여학생』(1949), 『시문학』(1950∼1951) 등을 편집, 간행했으며, 1973년부터 월간 시 전문지 『심상』을 발행했다.
1960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직을 맡았다. 아세아자유문학상(1955), 대한민국문예상 본상(1968), 서울시 문화상(1969), 국민훈장 모란장(1972)을 수상했다. 박목월은 1978년 별세했다. 박목월의 시는 향토적인 서정성과 민요의 율조를 계승한 운율로 특징지을 수 있다. 대표작은 『청록집』에 실린 「나그네」다.
江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나그네」, 『박목월 시 전집』, 집문당, 1984, 24면
향토적인 자연을 배경으로 한 애상적 분위기를 민요적인 가락에 담아낸 이 서정적인 시는 한국인의 삶과 운명에 대한 슬픔에 기반 한다. 조지훈의 시 「완화삼」에 화답한 시로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놀이여”라는 「완화삼」의 한 행을 부제로 달고 있으며 4연의 내용 역시 이와 관련되어 있다. 박목월은 여러 시에서 고향을 노래한다.
밤골짜기의 물소리.
구름이 밝혀든 초롱을.
아아 동해너머로 둥둥 떠가는 진보라빛 환한 봉우리 하나.-「吐含山」, 『박목월 시 전집』, 집문당, 1984, 78~79
흰달빛 / 紫霞門
달안개 / 물소리
大雄殿 / 큰보살
바람소리 / 솔소리
泛影樓 / 뜬그림자
흐는히 / 젖는데
흰달빛 / 紫霞門
바람소리 / 물소리-「佛國寺」, 『박목월 시 전집』, 집문당, 1984, 36~37면
1968년에 펴낸 시집 『경상도 가랑잎』에서는 경상도 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박목월에게 고향은 삶의 본질이다. 고향을 시에 담으면서 박목월은 삶과 죽음에 대한 달관의 자세를 보여준다. 경주에는 고향이 같은 두 문인, 김동리와 박목월을 위한 동리목월문학관이 있고 동리목월문학제와 동리목월문학상 등을 운영하며 이들의 삶과 문학세계를 기리고 있다. 경북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에는 박목월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고 「나그네」의 배경인 밀밭도 조성되어 있어 박목월과 「나그네」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있다. 박목월은 1978년 사망했으며 묘소가 용인공원에 있다. 박목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2015년 용인공원에 박목월 시의 정원이 조성되어 여러 개의 시비와 박목월 시인의 육필이 재현된 안내비가 세워져 있다.
김영랑은 1903년 전라남도 강진군 탑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윤식이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휘문의숙(현 휘문고등학교)에 입학, 이 시기부터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정지용, 이태준 등과 교류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체포되어 6개월 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0년 일본 아오야마학원(현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에 입학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면서 귀국, 고향에 머물렀다.
1930년 박용철,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동인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들 『시문학』 동인 즉 시문학파는 당시의 프로문학에 반발하여 순수시를 지향하며 1930년대 한국시단을 이끌었다. 1935년 『영랑시집』을 간행했다. 김영랑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광복 후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했다. 1950년 서울에서 포탄 파편에 맞아 사망했다.
김영랑의 시는 서정적이면서 애상적이다. 애상적인 것은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김영랑의 시 세계가 잘 드러난 김영랑의 대표작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1934년 4월 『문학』 3호에 발표되었고, 이듬해 『영랑시집』에 재수록 된 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서름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란이 피기까지는」, 『문학』, 1934, 4)
모란이 피는 봄을 기다리는 시적 자아는 그 봄이 오는 것이 “찬란한” 기쁨이면서 동시에 모란의 떨어짐을 봐야 하는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시들어 떨어지는 모란의 모습은 마치 죽음을 맞이해야하는 인간의 숙명과도 같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절망하지 않고 다시 모란이 피기를 기다린다. 인간의 비극적 운명과 운명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탐미적이고 서정적인 시어 속에 담겨 있다.
김영랑은 고향 강진의 말을 시에 담았다.
오매 단풍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네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호에 수록된 시다. 반복적인 운율과 사투리의 사용으로 향토적 정서를 낭만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다. 누이를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애정 어린 시선이 잘 느껴지는 이 시에 강진의 사투리를 사용해 고향에 대한 사랑도 담았다. 김영랑의 고향인 전라남도 강진에는 김영랑을 비롯한 『시문학』 동인인 시문학파의 삶과 문학세계를 기리는 시문학파기념관이 있다. 전라남도 광주공원에 김영랑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강원도 인제군의 시인으로 박인환이 있다. 박인환은 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났다. 1939년 서울 덕수공립소학교 졸업, 경기공립중학교,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서울 종로에서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 이한직, 김수영, 김경린, 오장환 등과 교류했다. 1946년 시 「거리」를 『국제신보』에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자유신문사, 경향신문사에서 기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1948년 김병욱, 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을, 1949년 김경린, 김수영 등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했다. 당시 한국문단의 주류였던 서정주와 청록파의 자연과 전통 지향적 서정에 반발하여 도시와 현실에 기반한 서정의 모더니즘을 지향했다.
1950년 김차영, 김규동, 이봉래 등과 피난지인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를 결성해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밤의 미매장」, 「목마와 숙녀」 등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다룬 시를 발표했다. 1951년 종군작가단에 참여했고 1955년 직장 업무 수행을 위해 미국에 다녀왔다. 1955년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을 낸 뒤 1956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세월이 가면」(1956)은 노래로 만들어져 대중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1976년 20주기를 맞아 『목마와 숙녀』가 간행되었다. 시 창작 외에도 「아메리카 영화시론」 등의 영화평,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하여 시공관에서 신협이 공연했다.
박인환의 대표작은 「목마와 숙녀」(1950)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세월은 가고 오는 것/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등대에……/불이 보이지 않아도/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목마는 하늘에 있고/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가을 바람 소리는/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목마와 숙녀」, 『박인환전집』, 실천문학사, 2008, 111~112면
이 시는 우울과 고독 등의 도시적인 서정과 시대 상황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고향인 인제에 대해 쓴 시도 있다.
인제/봄이면 진달래가 피었고/설악산 눈이 녹으면/천렵 가던 시절도/이젠 추억.//아무도 모르는 산간벽촌에/나는 자라서/고향을 생각하며 지금 시를 쓰는/사나이/나의 기묘한 꿈이라 할까/부질없고나.//그곳은/전란으로 폐허가 된 도읍/인간의 이름이 남지 않은 토지/하늘엔 구름도 없고/나는 삭풍 속에서 울었다/어느 곳에서 태어났으며/우리 조상들에게 무슨 죄가 있던가,//눈이여/옛날 시몽의 얼굴을 곱게 덮어 준/눈이여/너에게는 정서와 사랑이 있었다 하더라.//나의 가난한 고장/인제/봄이여/빨리 오거라.
「인제」, 『박인환전집』, 실천문학사, 2008, 199~200면
「인제」에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이 나타나 있다. 전쟁으로 파괴된 고향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의 고향 모습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은 「고향에 가서」(1956)에도 등장한다. 고향을 사랑했던 박인환의 삶과 작품세계를 기리는 문학관이 그의 생가가 있었던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에 있다. 박인환 문학관 근방에는 시인 박인환의 거리도 조성되어 박인환의 시가 새겨진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다. 서울 세종로에는 박인환이 살던 집터가 보존되어 있다.
김소월은 1902년 8월 6일(음력)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정식이다. 오산학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도쿄 상대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중퇴했다. 김소월이 졸업하던 해, 오산학교는 총독부에 의해 폐쇄되었다. 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이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로서 참가했다가 투옥되었고, 오산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민족정신을 키웠으며 교사였던 김억의 지도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0년 「낭인의 봄」, 「야의 우적」, 「오과의 읍」, 「그리워」 등을 『창조』지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배재고보에 재학 중인 1922년에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닭은 꼬꾸요」, 「바람의 봄」, 「봄밤」 등을 『개벽』지에 발표했다. 김소월의 대표작이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서정시인 「진달래꽃」은 『개벽』 1922년 7월호에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24년 『영대』 3호에 「산유화」, 「밭고랑」, 「생과 사」 등을 발표했다. 1925년에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간행되었다.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하였으나 운영에 실패했다. 사업의 실패와 생활고, 건강상의 문제와 일본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를 힘들어했던 김소월은 1934년 12월 24일 음독자살했다. 154편의 시와 시론 「시혼」을 남겼다. 김소월은 민요의 음률인 7·5조의 정형률에 향토적 서정을 담아 한국의 한을 노래한 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김소월이 활발한 시작 활동을 했던 시기에 거주했던 곳이 배재학교가 있던 서울특별시다. 김소월은 「서울밤」과 「왕십리」에서 서울을 노래했다.
붉은 전등/푸른 전등/널따란 거리면 푸른 전등/막다른 골목이면 붉은 전등/전등은 반짝입니다/전등은 그물입니다/전등은 또다시 어스렷합니다/전등은 죽은 듯한 긴 밤을 지킵니다
나의 가슴의 속모를 곳의/어둡고 밝은 그 속에서도/붉은 전등이 흐득여 웁니다/푸른 전등이 흐득여 웁니다
붉은 전등/푸른 전등/머나먼 밤하늘은 새카맙니다/머나먼 밤하늘은 새카맙니다/서울 거리가 좋다고 해요/서울 밤이 좋다고 해요
붉은 전등/푸른 전등/나의 가슴의 속모를 곳의/푸른 전등은 고적합니다/붉은 전등은 고적합니다-김소월, 「서울밤」, 『진달래꽃』, 미래사, 1991, 34면
비가 온다/오누나/오는 비는/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온다고 하고/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가도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울려거든/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데./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김소월, 「왕십리」, 『진달래꽃』, 미래사, 1991, 73면
「서울밤」과 「왕십리」에도 김소월의 다른 시들처럼 서러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스며들어있다. 암울한 시대 상황과 가난하고 각박한 삶이 주는 서러움과 그리움이라는 원초적인 정서를 소박한 언어에 담아 표현하여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까지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는 시인으로 남아있다. 1981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97년 왕십리 사거리에 「왕십리」를 새긴 시비가 세워졌고, 2010년 왕십리 광장으로 옮겨지면서 김소월의 흉상도 함께 세워졌다. 1998년 신시 100돌을 기념해 한국일보사가 서울 남산공원 입구에 김소월의 시비를 세웠다. 김소월이 수학했던 배재고등학교 교정에도 「진달래꽃」 시비가 있다. 김소월의 시는 가곡으로도 불려지고, 「부모」, 「개여울」, 「못 잊어」, 「실버들」,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진달래꽃」 등은 대중가요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박두진은 1916년 경기도 안성시에서 태어났다. 경성사범학교와 서울 우석대학교(현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1939년 6월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5호)에 시 「향현」, 「묘지송」 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박두진은 같은 해 9월 『문장』(8호)에 「낙엽송」, 다음해 1월 『문장』(12호)에 「의」, 「들국화」까지 총 3회의 추천을 받고 시를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박두진은 자연을 제재로 하여 민족의식을 시화했다. 1941년 4월 『문장』이 폐간된 이후에도 일제의 감시를 피해 한글로 시를 썼다.
1946년 박목월, 조지훈과 『청록집』을 발간, 이후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청록파’로 불리게 되었다. 1946년 박두진의 대표작인 「해」를 『상아탑』에 발표, 1949년 첫 번째 시집인 『해』를 발간했다. 6·25전쟁 시기에는 창공구락부(공군종군문인단)에서 활약했다. 1970년대에는 수석과 종교를 제제로 종교적 신념과 자연과의 교감을 주제로 한 시를 발표했다. 이화여대, 연세대 교수를 역임했다. 『오도』(1953), 『거미와 성좌』(1962), 『인간 밀림』(1963), 『하얀 날개』(1967), 『고산식물』(1973), 『사도행전』(1973), 『수석열전』(1973), 『야생대』(1981), 『포옹무한』(1981) 등의 시집을 발간하였고, 1984년에는 범조사에서 『박두진 전집』을 간행했다.
수상집으로 『생각하는 갈대』(1970), 『언덕에 이는 바람』(1973), 『그래도 해는 뜬다』(1986)와 시론서 『한국현대시론』(1970),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1976) 등이 있다. 아시아자유문학상(1956), 서울시문화상(1962), 3‧1문화상(1970), 예술원상(1976)을 수상했다. 1984년 은관문화훈장(2등급)을 받았다. 1998년 9월 16일,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박두진의 대표작은 「해」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
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
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
도 한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
려 보리라.
어둠의 세계가 가고 “해”로 상징되는 밝은 세계가 오길 바라는 화자의 소망이 표현되어 있는 시다. 해가 솟은 밝은 세계는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릴 수 있는 화합의 세계다. 발표 시기보다 앞서 창작했던 시로 박두진이 꿈꾸던 밝은 세계는 해방된 조선을 의미함을 짐작할 수 있다. 자연을 제재로 민족의식을 서정적인 시로 표현한 박두진 시의 특징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시다. 2001년 6월 고대 로마 유적지로 유명한 프랑스 남부도시 베종 라로멘에 안성시의 추천으로 「해」의 첫 구절이 쓰인 시비가 세워졌다. 앞면은 한국어로 쓰여 있고 뒷면은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있다.
2018년 경기도 안성시 남사당로 198-11에 박두진문학관이 개관했다. 박두진 저서, 친필원고, 유품, 수석, 글씨와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전시실 외에도 다목적실, 북카페 등이 있다.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오흥리 755번지 박두진의 집필실이 있는 곳에는 금광저수지를 따라 박두진 문학길이 조성되어 있다.
박용철은 1904년 전라남도 광산,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1916년 광주공립보통학교 졸업, 휘문의숙과 배제학당에서 수학했다. 일본 동경 아오야마학원 중학부를 거쳐 1923년 도쿄외국어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했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 자퇴했다. 아오야마학원 재학 때 김영랑과 교류하면서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비 내리는 날」을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문예월간』, 『문학』 등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시문학사를 주재하면서 김영랑, 정지용과 시문학동인으로 활약, 순수문학을 지향했다.
박용철은 서정적인 시 안에 민족의식을 담았다. 문예잡지 『시문학』(1930), 『문예월간』(1931), 『문학』(1934)과 『정지용시집』(1935), 『영랑시집』(1935)을 간행했다.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참여하여 외국의 시와 입센의 『인형의 집』 등 희곡을 번역하고 평론을 발표했다. 박용철은 해외 문학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여 당시 조선 문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1938년 서울에서 후두결핵으로 사망했다. 유작시집으로 『박용철전집』 2권이 1939년과 1940년에 간행되었다.
박용철의 대표작은 「떠나가는 배」(1930)다.
나 두 야 간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 거냐/나 두 야 가련다//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는 사람들//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앞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나 두 야 가련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 거냐/나 두 야 간다
정주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슬픔과 새로운 삶의 공간에 대한 희망이 교차하는 시다. 일제의 수탈로 가난에 허덕이다 생존을 위해 유랑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조선인들의 애환이 연상된다. 박용철의 민족의식이 서정적인 시어 속에 잘 드러나 있는 시다. 1980년대에 가수 김수철이 부르고 대중의 인기를 얻었던 “나도야 간다”라는 가요가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의 일부를 차용한 것이다. “나도야 간다”는 당시 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고래사냥”의 주제곡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천동에 박용철의 생가가 광주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존되어 있다. 「떠나가는 배」 시비도 세워져 있다. 송정공원에도 ‘용아 박용철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는 매해 박용철의 아호를 딴 ‘용아 문학제’, ‘용아 박용철 전국 백일장’이 열리고 있다. 광주 시내에는 '용아로'도 있다. 광주경찰청에서 광주여자대학교를 거쳐 첨단산업단지를 잇는 도로다. 이렇듯 광주광역시 곳곳에서 시인 박용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김현승 시인은 1913년 4월 4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창국 목사가 광주 양림교회로 부임한 1919년 4월부터 광주 양림동에서 자랐다. 이후 김현승이 생의 대부분을 보낸 공간이 광주다. 기독교계통의 숭일학교,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 1936년 숭실전문학교 문과 3년을 수료했다. 숭일학교 교사(1936), 조선대학교 교수(1951∼1959), 숭전대학 교수(1960∼1975),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1970) 등으로 활동했다.
숭실전문학교 재학 때인 1934년 장시(長詩) 「쓸쓸한 겨울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 양주동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게재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35년 「유리창」, 「철교」, 「이별의 시」, 「묵상수제」 등을 발표했는데, 민족의 비애를 낭만적이고 세련된 시에 담아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등의 찬사를 받는 등 당시 문단의 큰 관심을 받았다.
1937년 신사참배 항거사건으로 아버지와 누이동생과 함께 투옥돼 고문을 당했고 이 일로 누이동생이 사망했다. 이후 김현승은 광복이 되기 전까지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 1950년 「생명의 날」, 「가을 시첩」 등을 발표했는데 이때부터 인간의 고독이나 허무 등 삶의 근원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쟁 시기 4살 아들을 병으로 잃었다. 시 「눈물」에 그 애통함이 담겨 있다.
1951년부터 광주에서 계간지 『신문학』을 6호까지 간행했다. 1957년 첫 시집 『김현승시초』를 발간했다. 1963년 시집 『옹호자의 노래』에는 정치 현실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 있다. 이후 시집 『견고한 고독』(1968)과 『절대고독』(1970), 이론서 『한국 현대시해설』(1972)을 간행했다. 1974년 『김현승전시집』을 펴냈고, 유고시집 『마지막 지상에서』(1977), 산문집 『고독과 시』 (1977)가 간행되었다.
김현승의 삶과 문학은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인간주의의 실천으로 정의할 수 있다. 1955년 제1회 전라남도문화상, 1973년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다. 1975년 4월, 숭실대학교 채플 시간 도중 쓰러져 자택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생을 마감했다.
광주광역시는 김현승의 종교적 신념과 문학에 대한 열정의 고향이다. 김현승이 자란 양림동은 서구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광주에 정착한 곳으로 ‘광주의 예루살렘’, ‘신앙촌’으로 불릴 정도로 기독교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양림동에서 김현승은 신앙심을 키우며 시를 구상하고 작품 활동을 했다. 김현승의 광주광역시와 무등산, 그리고 차에 대한 사랑이 잘 나타난 시로 「무등茶」가 있다.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십일월의 긴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김현승, 「무등茶」, 『가을의 기도』, 미래사, 1991, 27면)
광주광역시와 무등산을 배경으로 김현승이 즐겨 마시던 차와 김현승 시의 주된 심상인 외로움이 등장하는 시다. 외로움이나 고독은 눈물, 기도와 함께 김현승 시에 자주 나오는 시어다. 김현승 시에서 외로움과 고독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정서로 나타난다. 고향과도 같은 공간에서 차를 마시며 삶과 인간에 대해 사색하는 김현승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시다.
호남신학대학 뒷산의 선교사 묘원으로 가는 길목은 김현승이 즐겨 찾던 산책로다. 김현승의 산책로에는 ‘시인의 길’이 조성돼 있고, 호남신학대학에는 「가을의 기도」 시비가 있고, 광주 남구 제중로 47번길에는 김현승을 기리기 위한 ‘다형다방’이 있다. 무인카페로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차를 마시고 쉬었다 갈 수 있다. 내부엔 양림동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카페 옆엔 ‘시인의 벤치’가 마련돼 있다. 시인이 30여년간 살았던 집(양림동 78번지)은 그 터만 남아 있다. 광주 무등산도립공원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진우촌(秦雨村)은 1904년에 출생했다. 초명은 태원(泰源)이었으나 1919년에 종혁(宗爀)으로 개명했다. 유년시절을 인천에서 보내고, 극작가로서의 활동도 인천에서 전개했지만, 출생지가 인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아버지 진수(秦秀)가 세창양행에서 근무했다는 점, 진우촌 호적등본을 보면 당시 인천부 율목리와 내리, 송현리 등으로 이사를 다녔다는 사실에서 유추하건대, 인천이 출생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무엇보다도 유년시절을 인천에서 보냈고, 서울로 진학한 후에도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진우촌은 인천의 문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18년 서울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1922년 졸업했다. 그해 서울 출신 백용자와 결혼했다가 다음해 이혼했다. 1923~24년 사이 강화도의 합일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했다.
1923년 5월 진우촌은 『동아일보』 1,000호 기념 작품 공모에 「개혁」이 당선돼 등단했다. 이때 동화 부문에 「의조혼 삼남매」도 아울러 당선됐고 이어서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으로 실시한 『동아일보』 작품 공모에 「시드러가는 무궁화」도 당선된다. 1925년에 대표작 「구가정의 끝날」을 발표했다. 이때 필명으로 우촌(雨村)을 사용했다. 1926년에 『동아일보』에 「보옥화」라는 동화를 게재했고, 아울러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진우촌은 인천 지역에 기반을 둔 여러 문화운동 단체나 사회조직에 참가하여 주요 역할을 맡았다. 배재고보 학생들의 모임인 인배회(仁培會)에서부터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한용단, 제물포청년회, 인천소성노동회(仁川邵城勞動會) 등에 참여했다. 1925년 12월 진우촌은 이비도, 박형남 등과 인천유성회를 조직한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의 문예노선을 따르는 단체였다. 1926년 진우촌은 정암, 원우전 등 연극인으로 유명한 이들과 ‘칠면구락부’를 결성해 골즈워디의 「승리자와 패배자」 등의 작품을 상연했고 1927년에는 인천 최초의 문예지 『습작시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을 맡는다. 1942년 김필노미와 재혼했다. 1943년 동양극장에서 「왕소군」을, 1944년 현대극장에서 「뇌명」을 상연했고, 이는 현대극장의 후신 극예술협회에서 1948년 다시 상연된다. 해방 후 진우촌은 동양극장의 청춘좌와 좌파성향의 자유극장에 가담한다. 자유극장은 개관작으로 진우촌의 「망향」을 상연했고, 이는 「두뇌수술」로 개제돼 『신문예』 창간호에 실렸다. 1946년에는 극단 청탑에서 「보검」이란 작품을 상연하기도 했다.
진우촌은 사실주의 경향이 주를 이루었던 동시대 작가들과 달리 독특한 낭만적 작품 세계를 구축하며 한국전쟁 전까지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1951년 월북해 산업예술극단, 흥남질소비료공장, 국립출판사 등에서 일했고, 1953년에 사망했다.
시시때때로 가족과 어울려 시 짓고 풍류를 즐기며 한 점 거리낌이나 위축됨 없이 밝고 발랄하게 성장한 호연재의 성품은 ‘마음이 넓고 태연하다’(浩然)는 당호 그대로였다. 서로 술을 권하며 바둑을 두고 시문을 주고받던, 인류 문명을 통틀어 유례를 찾기 힘든 금실 좋고 다복한 부모 밑에서 아홉 남매와 함께 성장하며 일상의 희로애락을 시로 읊을 만큼 지성과 감성 교육을 충실히 받은 조선 최고의 규수, 하지만 명문가란 허울뿐, 격이 맞지 않는 배필과 혼인하며 성리학의 가르침이 얼마나 허술하고 모순인지를 통절히 깨달았다. 신혼 초부터 그녀 표현대로 적국(敵國·첩)을 배회하며 번번이 과거시험에는 낙방하는 서방님을 비롯해 가부장 남성들이 가문의 여성들을 제압하려 “마음이 불타듯 괴로울 때는 이를 벗 삼으라”며 작성한 규훈서의 요지는 여성들 ‘투기’에 대한 응징일 뿐이었다. 이에 대해 호연재 스스로 작성한 수양서 ‘투기를 경계하는 장’에는 “창녀와 즐기는 패륜”을 혐오하며 “지아비가 근실하게 행실을 닦으면 어찌 지어미가 투기하는 악행이 있겠는가”라고 왜곡된 현실부터 질타한다.
신혼부터 시작된 시집과의 불화와 관련해 호연재는 짐승 같은 무리에 맞서 이전투구하며 자신을 더럽히는 건 나를 기르신 부모님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며, ‘착한 여자 병’으로 제 인생을 쪽박 내는 부당한 통념을 유쾌히 물리친다. 한 10년 위태롭고 고단했던 시집살이에 도가 튼 호연재는 사시사철 꽃과 열매와 뿌리 골라 술 담그고, 시집 조카들을 잘 가르쳐 빛나는 숙모님이 되어 이들을 끌고 주변 경승을 찾아다니며 시 짓고 학문을 논하길 즐겼다. 그러다 잘 익은 술맛에 취해 “취하고 나니 천지가 넓고 마음을 여니 만사가 그만일세. 고요히 자리에 누웠노라니 즐겁기만 해 잠시 정을 잊었네”라는 시도 남겨두었다.
엄격한 사대부 가문 시댁 어른들과는 불화했으나, 그녀를 존경했던 시댁 후손들은 42세에 세상을 떠난 호연재의 활달하고 호방한 글들을 모아 《호연재 유고》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고, 그녀의 철학과 삶에 공감한 그 집안 딸과 며느리들은 호연재의 한문 시들을 우리말로 옮기고 이를 필사해 2백 년이 넘게 전수했다. 조금 앞서 사느라 애로가 많았던 그녀, 드디어 때를 만났다. 그녀의 시댁 자리였던 원래 은진 송씨 집성촌 대덕의 옛집 동춘당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90호로 지정되었고, 여기 세워진 그녀의 시비에는 다음 시가 새겨져 있다. “달빛 잠기어 온 산이 고요한데 샘에 비낀 별빛 맑은 샘 안개바람 댓잎에 스치고 비이슬 매화에 엉긴다. 삶이란 석자의 시린 칼인데 마음은 한 점 등불이어라. 서러워라 한해는 또 저물거늘 흰머리에 나이만 더하는구나.”
시인 오장환은 1918년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태어났다. 회인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안성으로 이주하여 안성 공립보통학교에서 졸업했다. 박두진과 같은 학교를 다녔다. 193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정지용에게 시를 배웠고, 문예반에서 교지 『휘문』을 만드는 일에 참여했고 시도 발표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후 일본 지산중학에서 수학했다. 1933년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6년 『낭만』, 『시인부락』,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참여했다. 1937년 메이지 대학 전문부 문과 문예과 별과에 입학했다. 첫 시집 『성벽』을 출판했고 시론과 작가론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938년 부친의 사망으로 메이지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 경성부 관훈정에 남만서방이라는 출판사 겸 서점을 냈다. 이 곳에서 두 번째 시집 『헌사』(1939년), 서정주의 『화사집』(1938년), 김광균의 『와사등』(1939년)을 출판했다. 1945년 인천에서 신예술가협회를 조직했고,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 1946년 번역시집인 『예세닌 시집』, 세 번째 시집인 『병든 서울』을 발간했다. 1947년 테러를 당해 치료와 이념 실현을 위하여 월북했다. 1948년 조선인민출판사에서 『남조선의 문학예술』을 출판, 이후 남포의 소련 적십자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모스크바의 시립 볼킨병원에서 요양했다. 1950년 소련 생활의 체험을 담은 마지막 시집 『붉은 기』를 출판했다. 1951년 한국 전쟁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장환은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당시 시단의 3천재로 불릴 정도로 문단의 호평을 받은 시인이다. 초기에는 현대적인 감각을 표현하고 새로운 기법의 실험을 보이는 등 모더니즘 시를 창작했으나 점차 리얼리즘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오장환의 시는 봉건적 인습, 전쟁, 식민지 근대 도시 문화를 비판하고 농촌현실을 고발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내용이 많다.
오장환의 대표작은 장시 「병든 서울」이다. 다음은 「병든 서울」의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는 일부분이다.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 품에
아모리 춤추는 바보와
술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人民(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랴
힘쓰는 이들을 ......
그리고 나는 웨친다.
우리 모든 人民(인민)의 이름으로
우리네 人民(인민)의
共通(공통)된 幸福(행복)을 위하야
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
아,
人民(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
오장환은 「병든 서울」에 병상에서 맞았던 해방에 대한 감격과 혼란한 해방 정국에 대한 비판,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열정을 담았다.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에는 오장환 생가가 보존되어 있으며, 생가 옆에 2006년 오장환문학관이 개관했다. 오장환의 시, 친필 엽서,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해마다 9~10월 오장환문학제가 열리며 백일장, 시그림그리기 대회, 시낭송대회, 문학강연 등이 열리고 있다.
신석정은 1907년 7월 7일 전북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303-2번지에서 출생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1924년 『조선일보』에 소적(蘇笛)이라는 필명으로 「기우는 해」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등에 80여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1925년 『조선일보』에 「이국자의 노래」를 발표하면서부터 필명을 석정(夕汀)으로 바꾸었다. 출생일이 칠월 칠석(음력)이어서 ‘夕’자와 서해에 지는 낙조에 매료되어 ‘汀’자를 사용했다.
1931년 『시문학』 제3호에 「선물」을 발표하면서 시문학 후기 동인으로 가담했다. 1932년 유년시절을 보낸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집을 마련, ‘청구원(靑丘園)’이라 이름 짓고 본격적으로 작품 창작에 열중했다. 청구원에서 첫 시집 『촛불』(1939)과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1947)를 냈다. 1941년 『문장』과 『인문평론』이 폐간되고 친일문학지인 『국민문학』에서 원고를 청탁하자, 광복까지 절필하고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1945년 광복 직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결성에 참여했다. 고향에 학교를 세울 뜻을 품고 1946년 부안중학교를 개교, 교사가 부족하여 국어교사로 근무했다. 전북문화인연맹에 참여했다. 1952년 전쟁으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전주로 이주했다. 삼남일보사에서 일하다 이후 전주고등학교, 전북대학교, 영생대학, 김제고등학교, 전주상업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2년 『한국시인전집』(학우사 권1)에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방」 등 31편을 수록했다.
1960년 「동방반명」 등 4월 혁명을 촉구하는 시들을 『전북대학 교보』등에 발표했다. 1961년 5‧16 직후 ‘교원노조’를 지지하는 시 「단식의 노래」와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에 발표한 「춘궁은 다가오는데」, 「전아사」 등의 작품 때문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았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남노송동 175의 27번지로 이사, ‘비사벌초사’로 이름 지었다. 한국문인협회 전북지부장, 한국예총전북지부장을 역임했다. 1967년 월남파병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 시 「꿈의 일부」를 『신동아』에 발표했다. 1969년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취조를 받았다. 시집으로 『빙하』(1956), 『산의 서곡』(1967), 『대바람 소리』(1970)가 있다. 전라북도문화상(문학부분)(1958), 전주시 문화장(1965), 대한민국예술문학상(1973)을 수상했다. 1974년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같은 해 유고수필집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이 간행되었다.
신석정의 시는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다. 전원적인 이상향에 대한 희구가 나타나는 신성적의 초기 시는 탈속적이며 자연 지향적이어서 전원시인, 목가시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역사의식, 현실비판의식을 드러낸 시를 쓰며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신석정의 대표작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삼천리』, 1932)이다.
어머니/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를 끼고 돌면/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좁은 들길에 야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나려오면/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나리면/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서리까마귀 높이 날어 산국화 더욱 곱고/노란 은행잎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나와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1932년 식민지 현실 속에서 화자는 자연과 어머니로 상징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상향을 갈망한다. 이처럼 신석정의 시는 희망을 노래하면서 고달픈 현실을 위무했다.
1976년 전라북도 전주시 전주덕진공원에 ‘신석정 시비’가 건립되었고, 1986년 시비 옆에 동상이 세워졌다. 같은 해 10주기를 기념하여 ‘석정문학회’에서 『신석정대표시 평설』을 간행했다. 1991년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해창 ‘석정공원’에 시비가 건립되었다. 2004년 신석정시인 30주기 추모문학제가 개최되었고 2007년 ‘신석정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문학제’가 전국규모로 개최되었고 제1회 ‘촛불문학상’을 시상했다. 같은 해 유고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을 석정문학회에서 간행했다. 2009년 『신석정 전집』을 간행했다. 2011년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560번지 청구원 부근에 석정문학관이 개관했다.
모든 사유와 감성까지도 엄격한 성리학 전통의 토대 위에 작동한 18세기 조선후기, 여염집 여인으로서 가장 많은 한시를 남긴 김삼의당은 《삼의당김부인유고》에서 스스로를 “호남의 어리석은 부녀로 태어나 깊은 규방에서 성장해 경사(經史)를 넓게 살피지는 못했고, 그저 언문으로 《소학》을 해독하고 글 읽는 법을 깨우치며 여러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대략 섭렵했다”고 겸손히 소개한다. 이런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익히고 수양한 내용은 유교 가문에서 내려오는 규범이고 “여성이 지켜야 할 도리”였으니, 그건 곧 자신의 정체성을 터득하는 길이기도 했다. 혼인 후에는 삯바느질로 시부모를 부양하고 남편의 과거 수발을 하느라 오래도록 몹시 고단하게 살았던 그녀, 곤고한 생활 가운데 꾸준하게 작성한 시와 산문 260편은 조선후기 여성세계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다.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전통, 가문의 영달을 위해 남편은 결혼 후 부모 공양은 물론 가사 일체를 아내에게 떠맡긴 채 절에서 공부하고 한양에 올라가서 과거 준비에 매달린 채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는 형편이었다. 삼의당은 남원 서봉방 한동네에서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난 각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남편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과 외로움을 애달프게 읊은 시(時)들과 함께 초라해지는 감상을 애써 삼가고, 마음을 굳건히 하며 남편에게는 오로지 학업에 정진하실 것을 독려하는 기운 넘치는 당찬 시를 꾸준하게 작성했다. 십여 년을 그렇게 소진했으나 남편은 결국 벼슬길에 들지 못한 채 공부를 접고 낙향하니, 이들 부부는 진안으로 이사 후 안빈낙도하는 삶을 지키고 아름다운 자연과 전원생활을 노래하는 시들로 화답하며 더욱 도타운 사랑을 계속 읊었다.
평생소원이던 입신양명의 꿈을 접고 시골 살림으로 자족할 각오를 하고 진안에 안주 후에도 남편은 몇 번 더 과거에 응시하고 번번히 낙방하지만, 삼의당은 풀리지 않는 인생 항로에 색다른 운치를 담아 고즈넉한 전원시로 읊으면서 실망을 추슬렀다.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존경하고 마치 신선놀음을 하듯 서로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 삼의당과 담락당이라고 서로를 부르며 시로 화답하고 서로의 사랑을 완성했다. 그녀 사후에 출간된 유고 두 권은 총 111편 253수의 시집과 편지 6편, 서(序) 7편, 제문 3편, 잡지(雜識) 6편 등 총 26편이 실린 산문집으로 되어 있다. 진안군 백운면 덕현리에 남편 하립과 그녀의 합장묘가 있으며 마이산 탑영제 호반가에 이들을 기리는 시비가 있다. 삼의당이 태어난 남원 교룡산 관광 단지 내에도 그녀의 시비가 세워졌다.
미당(未堂) 서정주는 1915년 5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1929년 줄포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상경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 1주년 기념 학생 운동을 주모한 혐의로 구속되어 퇴학당했다. 1931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으나 일본 교육과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 동맹 사건을 주동해 자퇴를 권고 받았다. 이 시기 많은 책을 접하면서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고승 박한영 문하에 있다가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 자퇴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었고 같은 해 김광균, 오장환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했다. 1940년 만주 간도에서 양곡주식회사 경리사원으로 일했고 용정에서도 체류했다. 1941년 첫 시집 『화사집』을 출간,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1941년 동대문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후 동아대학교, 조선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1960년 이후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시, 소설, 평론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의 시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동아일보사 문화부장,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 등을 역임했다.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 위원장을 지냈고, 1950년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로 일선부대에 나가 신문편집, 시낭송, 연설 등을 했다. 전쟁의 충격으로 조현증을 앓았다.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에 추천되었고,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시집으로는 『화사집』 (1941), 『귀촉도』(1948), 『서정주시선』 (1955), 『신라초』 (1961), 『동천』 (1969), 『질마재 신화』 (1975), 『떠돌이의 시』 (1976), 『서으로 가는 달처럼』 (1980),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안 잊히는 일들』 (1983), 『노래』 (1984), 『팔할이 바람』 (1988), 『산시』 (1991), 『늙은 떠돌이의 시』 (1993) 등을 출간했다.
서정주의 시는 한국의 전통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말의 특징을 잘 살려 향토적인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5·16 민족상, 자유문학상 등을 받았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0년 12월 24일 사망했다.
2001년 서정주의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서정주의 생가가 복원되고 미당시문학관이 건립되었다. 미당시문학관에는 서정주의 친필 시 액자, 육필 원고,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미당시문학관, 생가, 외가, 묘소가 있는 질마재 일대를 시집 『질마재 신화』와 관련된 민속마을로 조성했다. 『질마재 신화』는 고향인 질마재를 소재로 한 연작시를 엮은 시집이다. 서정주는 마을에 전해오는 민담, 전설, 풍속 등을 수집해 고향의 서정을 시화했다. 또한 서정주의 선산에 국화 꽃밭을 조성하여 2004년부터 질마재국화축제를 하고 있는데, 2009년부터 질마재문화축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05년부터 미당문학제도 개최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에 있던 서정주 자택은 기념관인 ‘미당 서정주의 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정주가 1970년 마포구 공덕동에서 이사와 2000년 12월 24일까지 30년간 살던 집이다. 서정주는 이 집의 이름을 ‘봉산산방(蓬蒜山房)’이라고 지었다. 곰이 쑥(蓬)과 마늘(蒜)을 먹으면서 웅녀가 됐다는 단군 신화에서 따온 이름으로 한국 신화의 원형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전한다. 미당 서정주의 집에는 서정주의 저서와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관악구와 고창군은 서정주를 매개로 자매결연도시를 맺었다. 2001년 중앙일보사에서 미당문학상을 제정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881번지에서 태어났다. 안동은 1894년 갑오의병이 일어난 곳이며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고장이다. 이육사는 안동에서 나고 자라면서 안동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체득했다. 이육사에게 안동은 고향이자 저항정신의 근원지였다.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綠), 이원삼(李源三)이다. 호인 육사(陸史)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264(二六四)’에서 딴 것이다.
이육사는 1919년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 1921년 백학학원에서 수학했다. 1923년 백학학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24년 일본 유학을 갔다. 1926년 베이징 쭝구어대학 상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1927년에 귀국,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후 이육사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에 일제를 배척하는 격문이 나붙는 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여러 번 일본 경찰에 검거, 투옥되었다.
1930년 첫 시 「말」을 '이활'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중외일보, 조선일보에서 일했다. 1932년 난징 근교 탕산에서 문을 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들어가 군사간부 교육을 받고 1933년 졸업, 상하이에서 루쉰(魯迅)을 만나고 귀국했다. 1934년 군사간부학교 출신이라는 것이 드러나 구속되었다. 1935년 『신조선』에 「춘수삼제」, 「황혼」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다. 1939년 「청포도」 발표, 1940년 「절정」, 「광인의 태양」 등을 발표했다. 1941년 한글 사용을 규제 받자 한시(漢詩)만 발표했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베이징으로 송치되어 1944년 1월 베이징 감옥에서 사망했다. 동생 이원조가 1945년 「꽃」, 「광야」를 소개하고 1946년 『육사시집』을 출판했다.
이육사는 시에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애, 일제에 대한 저항과 광복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이육사의 대표시인 「청포도」(『문장』, 1939.8)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광복에 대한 염원이 잘 나타나 있다.
내 고장 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화자가 간절히 기다리는 “내가 바라는 손님”은 이육사가 17번의 투옥을 감내하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조국의 해방이었을 것이다. 이육사의 또다른 대표시로는 「절정」(『문장』, 1940.1)이 있다.
매운 季節의 챗죽에 갈겨
마츰내 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高原
서리빨 칼날진 그우에서다
어데다 무릎을 꾸러야하나?
한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깜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된 무지갠가보다.
화자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육사의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이 잘 나타난 시다. 1968년 이육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안동에 이육사의 시비가 건립되었다. 2004년 이육사의 생가가 있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 생가가 복원되었고 이육사문학관이 개관되었다.
시인 조병화는 1921년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 322번지에서 출생했다. 호는 편운(片雲)이다. 용인송정공립보통학교, 서울미동공립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 1943년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이과에 입학하여 물리‧화학을 전공했다. 1945년 귀국하여 경성사범학교, 제물포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5년 중앙대 강사, 1967년 이화여대 강사, 1959년부터 1980년까지 경희대 국문과 교수, 1981년 인하대 문과대학장과 부총장을 역임한 후 1984년 퇴임, 명예교수로 재직했다. 1957년부터 국제 P.E.N 대회, 1973년부터 세계시인대회에 참가하면서 세계의 문인들과 교류했다. 2003년 3월 8일 사망하였다.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하며 등단한 이후 『하루만의 위안』(1950), 『패각의 침실』(1952), 『인간고도』(1954), 『사랑이 가기 전에』(1955), 『서울』(1957), 『석아화(石阿花)』(1958),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1959), 『밤의 이야기』(1960), 『낮은 목소리로』(1962), 『공존의 이유』(1963), 『쓸개 포도의 비가』(1963), 『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1964), 『내일 어느 자리에』(1965), 『가을은 남은 거에』(1966), 『가숙(假宿)의 램프』(1968), 『내 고향 먼 곳에』(1969), 『오산 인터체인지』(1971), 『별의 시장』(1971), 『먼지와 바람 사이』(1972), 『어머니』(1973), 『남남』(1975), 『창안에서 창밖에』(1976), 『딸의 파이프』(1978), 『안개로 가는 길』(1981), 『머나먼 약속』(1983), 『나귀의 눈물』(1985), 『어두운 밤에도 별은 떠서』(1985), 『해가 뜨고 해가 지고』(1985), 『지나가는 길에』(1989), 『후회없는 고독』(1990), 『찾아가야 할 길』(1991), 『낙타의 울음소리』(1991), 『타향에 핀 작은 들꽃』(1992), 『다는 갈 수 없는 세월』(1992), 『잠 잃은 밤에』(1993), 『하루만의 위안』(1994), 『시간의 속도』(1995),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1998), 『공존의 이유』(1998) 등 많은 시집을 발간했다. 『밤이 가면 아침이 온다』(1958) 등의 시론집 4권과 『시인의 비망록』(1977)을 비롯한 27여 권의 수필집도 간행했다. 아세아 자유문학상(1960), 경희대문화상(1969)과 한국시인협회상(1974), 대한민국 예술원상(1985), 3‧1문화상(1990), 대한민국 문학대상(1992) 등을 수상했다. 조병화의 시는 인간의 삶과 고독의 문제라는 근원적이고 광범위한 주제와 일상적 언어를 사용한 시어로 문학성과 대중성 모두를 획득했다.
잊어버려야만 한다/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나도 또 하나 작은/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눈을 감으면/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잔디밭에 누워/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그날을 위하여 바쳐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그날이 오면/잊어버려야만 한다/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하루만의 위안」(1950)에는 죽음과 이별의 문제에 대한 슬픔과 고뇌가 담겨 있다.
2010년 고향인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에 조병화문학관이 개관되어 매년 조병화시축제가 열리고 있다. 전국 각지에 세워진 60여기의 시비를 소개한 조병화시비전이 2010년 조병화문학관에서 개최되었다. 1962년 조병화의 어머니가 별세하자 다음해 조병화가 어머니 묘소 옆에 세운 묘막인 편운재가 2016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편운재에는 조병화의 작업실이었던 혜화동 서재가 원형 그대로 옮겨져 있다.
조태일은 1941년 전남 곡성 태안사에서 출생했다. 광주서중학교, 광주고등학교를 거쳐 1966년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아침 선박」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69년 『시인』을 창간하여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 등을 발굴했다. 1974년 고은, 백낙청, 신경림, 황석영, 염무웅, 박태순 등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립, 독재에 저항하다 여러 번 투옥되었고, 1980년부터 3년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1988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바뀌면서 초대 상임이사를 맡았다. 1989년 광주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99년 간암으로 작고했다.
편운문학상(1991), 전남도문화상(1992), 만해문학상(1996)을 수상했고,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시집 『아침 선박』(1965), 『식칼론』(1970), 『국토』(1975), 『가거도』(1983), 『연가』(1985), 『자유가 시인더러』(1987), 『산 속에서 꽃 속에서』(1991), 『풀잎은 꺾이지 않는다』(1995),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1999), 평론집 『고여 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1980), 『김현승 시 정신 연구』(1998)를 출간했다. 2000년 5·18 유공자로 등록돼 국립5·18민주묘지에 이장됐다.
조태일의 초기 시는 삶의 순수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점차 억압적인 정치 현실에 반발하여 민중적 연대를 통해 제도적 폭력에 맞서고자 하는 의지를 담은 시를 창작했다. 연작시 「식칼론」은 1970년대 참여시의 한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내 가슴속에 뜬 눈의 그 날카로움의 칼빛은,/어진 피로 날을 갈고 갈더니만/드디어 내 가슴살을 뚫고 나와서
한반도의 내 땅을 두루 두루 날아서는/대창 앞에서 먼저 가신 아버님의 무덤속 빛도 만나 뵙고/반장님 바로 옆집에서 홀로 계신 남도의 어머님 빛과도 만나 뵙고/흩어진 엄청난 빛을 다 만나 뵙고 모시고 와서/심지어 내 男根 속의 미지의 아들딸의 빛도 만나 뵙고/더욱 뚜렷해진 無敵의 빛인데도, 지혜의 빛인데도,/눈이 멀어서, 동물원의 누룩돼지는 눈이 멀어서,/흉물스럽게 엉뎅이에 뿔 돋친 황소는 눈이 멀어서,/동물원의 짐승은 다 눈이 멀어서 이 칼빛을 못 보냐.//생각 같아서는 먼눈 썩은 가슴을 도려 파버리겠다마는,/당장에 우리 나라 국어대사전 속의 「改憲」이란/글자까지도 도려 파버리겠다마는
눈 뜨고 가슴 열리게/먼눈 썩은 가슴들 앞에서/번뜩임으로 있겠다. 그 고요함으로 있겠다./이 칼빛은 워낙 총명해서 워낙 관용스러워서.-「식칼론 3―憲法을 위하여」, 『식칼론』, 시인사, 1970, 17면
조태일은 이후에도 분단 문제 등 정치, 역사적인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민중적 삶을 추구하는 시를 창작했다.
사람들은 풀꽃을 꺾는다 하지만/너무 여리어 결코 꺾이지 않는다./피어날 때 아픈 흔들림으로/피어 있을 때 다소곳한 몸짓으로/다만 웃고만 있을 뿐/꺾으려는 손들을 마구 어루만진다./땅속 깊이 여린 사랑을 내리며/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에/노래되어 흔들릴 뿐./꺾이는 것은/탐욕스런 손들일 뿐.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창작과비평사, 1995, 33면
풀꽃은 민중을, 꺾이지 않는 풀꽃은 민중의 힘과 생명력을 상징한다. 조태일의 고향인 전라남도 곡성군은 조태일의 삶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2003년 태안사 근처에 조태일시문학관이 개관했다. 조태일의 육필 원고와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경상남도 통영의 시인으로 유치환이 있다. 통영은 유치환의 고향이자 삶과 문학의 공간이었다. 유치환은 1908년 경상남도 통영시 태평동 552번지에서 출생했다. 유치환의 호는 청마(靑馬)로, 극작가 유치진의 동생이다. 통영보통학교를 졸업, 일본 도요야마중학교를 중퇴,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중퇴했다. 1923년 유치진이 중심이 된 동인지 『토성』, 1930년 유치진과 함께 만든 회람잡지 『소제부』에 시를 발표했다.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1932년 평양으로 이주했다가 고향에 돌아와 1934년 부산으로 이주했다. 1937년부터 통영협성상업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유치진은 통영여자중학교, 경남고등학교, 통영여자고등학교, 안의중학교, 경주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부산에서 문예동인지 『생리』를 주재하여 5집까지 간행했다.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발간했다. 여기에 초기의 대표작인 「깃발」, 「그리움」, 「일월」 등이 수록되었다. 1940년 가족과 만주 연수현으로 이주했다가 광복 직전에 귀국했다. 만주에서 느낀 허무의식과 생의 의지를 「절도」, 「수」, 「절명지」에 담아 두 번째 시집인 『생명의 서』에 수록했다. 광복 후에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맡아 민족문학 운동을 전개했고 6·25 전쟁 중에는 문총구국대로 종군했다. 전쟁의 경험을 담아 1951년 시집 『보병과 더불어』를 발표했다. 1953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교편을 잡았고, 1967년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교통사고로 작고했다.
시집으로는 『울릉도』(1948), 『청령일기』(1949), 『청마시집』(1954), 『제9시집』(1957),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미루나무와 남풍』(1964),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 등이 있다. 수상록 『예루살렘의 닭』(1953),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1959), 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1963) 등이 있다. 작고 후에 시조시인 이영도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 중 200통을 추려 모은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가 출간되었다. 서울특별회 문학상(1949), 경북문화상(1956), 자유문학상(1957), 한국시인협회상(1958), 대한민국 예술원상(1962), 부산시문화상(1964)을 수상했다.
유치환은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불렸다. 유치환의 시에서 생명에 대한 긍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치환의 시는 남성적 어조로 허무와 비애를 초극하고자 한다. 대표적인 시로 「깃발」(1939)이 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 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비애와 좌절의 서정 속에서도 이상향에 대한 동경과 의지가 나타나는 시다. 식민지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화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유치환이 머물렀던 곳마다 시비가 세워졌다.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공원, 부산 수정 가로 공원, 부산 용두산 공원, 부산영상예술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 통영남망공원 등에 시비가 있다. 2000년 경상남도 통영시 망일1길(정량동)에 생가가 복원되고 청마문학관이 개관되었다. 통영중앙동우체국이 있는 거리가 청마거리로 명명되었으며, 청마거리에 청마 유치환 상과 「향수」 시비가 건립되었다. 통영중앙동우체국에는 「행복」시비가 세워졌다. 2013년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산복도로에 '유치환 우체통 전망대'이라고 불리는 문화공간이 만들어졌다.
시인 박재삼은 1933년 4월 10일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1936년 4세 때 귀국하여 어머니의 고향인 경상남도 삼천포시 서금동 72번지에 정착했다. 1946년 수남국민학교(현 삼천포초등학교), 1951년 삼천포중학교, 1953년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상급학교에 바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학비가 없어 진학하지 못했다. 훗날 박재삼은 이 때 느낀 절망감을 떠올려 「추억(追憶)에서 31」이라는 시를 썼다.
해방된 다음해/魯山노산 언덕에 가서/눈아래 貿易무역회사 자리/홀로 三千浦中學校삼천포중학교 입학식을 보았다./기부금 三천원이 없어서/그 학교에 못 간 나는/여기에 쫓겨오듯 와서/빛나는 모표와 모자와 새 교복을/눈물 속에서 보았다.// 그러나 저 먼 바다/섬가에 부딪히는 물보라를/또는 하늘하늘 뜬 작은 배가/햇빛 속에서 길을 내며 가는 것을/눈여겨 뚫어지게 보았다.// 학교에 가는 대신/이 눈물 범벅을 씻고/세상을 멋지게 훌륭하게/헤쳐 가리라 다짐했다.// 그것이 오늘토록 밀려서/내 주위에 너무 많은 것에 지쳐/이제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그것만 어렴풋이 배웠다.
박재삼은 진학 대신에 삼천포여자중학교에서 사환으로 일했는데, 이 때 삼천포여자중학교 교사였던 시조시인 김상옥을 만나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삼천포중학 병설 야간중학교에 입학하여 학비를 벌면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1948년 교내신문 「삼중」 창간호에 동요 「강아지」, 시조 「해인사」를 발표했다. 야간 중학교가 주간 중학교로 병합되면서 주간 중학교 학생이 되어 졸업했다. 제1회 영남예술제 ‘한글시 백일장’에서 시조 「촉석루」가 차상으로 입상했고 장원이었던 이형기와 교류하게 되었다. 1950년 김재섭, 김동일과 함께 동인지 『군상』을 펴냈다.
1953년 모윤숙의 추천으로 『문예』 11월호에 시조 「강물에서」를 발표,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1954년 김상옥의 소개로 현대문학사에 취직했다. 1955년 유치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 6월호에 시조 「섭리」,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 11월호에 시 「정적」을 발표했다. 같은 해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가 3년 뒤 중퇴했다. 대한일보사, 삼성출판사 등에서 일했다. 1961년 구자운, 박성룡, 박희진, 성찬경 등과 『60년대사화집』 동인으로 활동했다.
1962년 첫 시집 『춘향이 마음』을 간행한 이래 시집 『햇빛 속에서』(1970), 『천년의 바람』(1975), 『어린 것들 옆에서』(1976), 『추억에서』(1983), 『아득하면 되리라』(1984), 『내 사랑은』(1985), 『대관령 근처』(1985), 『찬란한 미지수』(1986), 『바다 위 별들이 하는 짓』(1987), 『박재삼 시집』(1987), 『사랑이여』(1987), 『울음이 타는 가을 강』(1987), 『다시 그리움으로』(1996),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1997) 등 다수의 시집을 발표했다. 수필집 『울밑에 선 봉선화』(1986), 『아름다운 삶의 무늬』(1987), 『슬픔과 허무의 그 바다』(1989) 등이 있다. 1997년 6년 8일 10여년의 투병 생활 끝에 영면에 들었다. 1998년 『박재삼 시전집1』이 출간되었다.
박재삼의 대표작으로 「울음이 타는 가을강」(1959)을 들 수 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네보담도 내보담도/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 소리가 사라지고/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가을, 해질녘, 강 등 자연을 매개로 사랑(이별), 죽음을 겪으며 느끼는 서러움, 눈물 등의 화자의 심상을 표출하고 있다. 서러움과 눈물은 인간이 유한함을 깨달으며 느끼게 되는 근원적 정서다. '∼고나, ∼것네'와 같은 토속적인 시어들이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박재삼은 일상생활과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향토적인 서정을 담은 시를 창작하여,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시의 맥을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8년 경상남도 사천시에 있는 노산공원에 「천년의 바람」이 새겨진 박재삼 시비가 세워졌다. 2004년 박재삼 생가 근처에 조형물과 시비가 설치된 박재삼 시인의 거리가 조성되었다. 2009년 노산공원에 전시실과 영상홍보실, 문예창작실, 다목적실 등을 갖춘 박재삼문학관이 건립되어 이 곳에서 해마다 '박재삼 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아름다운 용모와 본디 고상한 성품으로 태어난 난설헌의 집안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아버지와 그의 자녀들 모두 문장에 뛰어나 흔히 허씨 5문장(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이라고 불렸다. 일찍부터 여동생의 재능을 귀하게 여긴 오빠 허봉은, 서자라는 이유로 사회 진출의 길이 막혀 전국을 떠돌며 벗들과 어울려 시짓기를 즐기던 당대 최고의 시인 손곡 이달(李達)을 막내 동생인 허균의 스승으로 모실 적에 여동생도 함께 글과 시를 배울 수 있게 배려했다. 이렇듯 당대 조선에서 가장 지성적이고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사회 전반을 지탱하던 유교적 가르침은 물론 도교의 신선사상과 불교적인 사유까지 두루 익히며 난설헌은 오빠들 사이에서 함께 문장을 읽고 시를 짓는 교육의 기회를 실컷 누렸다. 덕분에 여덟 살에 신선 세계에 함께 노니는 자신을 표현한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라는 도가적 풍류의 시를 지어 신동 소리를 듣기 시작해, 도교적 유토피아에 일찍부터 심취해 남겨진 그녀의 시 213편 중 고단하고 비루한 세상을 벗어나 신선의 세계를 노래한 시가 128편에 이른다.
열다섯에 시집갔으나 조선을 대표하는 문장가 친정과 달리 당시 대부분 집안이 그러하듯, 글 읽고 시를 쓰는 며느리가 달갑지 않은 시댁에서 점점 외톨이가 되었고, 신혼 시절 외도하는 남편을 그리는 시를 짓기도 했으나 곧 남편과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며 자신이 겪는 불행의 원인으로 조선 땅에 태어난 것, 여자로 태어난 것, 남편과의 결혼, 셋을 꼽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친정은 정치적 풍파에 휘말려 그토록 존경하던 부친과 오라비가 외지에서 객사하고, 현실의 불행을 잊으려 통곡을 삼키는 시와 함께 점점 더 신선 세계를 동경하는 시들을 짓는 사이 돌림병에 어린 남매까지 잃고 배 속 아이마저 유산되는 끔찍한 불행을 연이어 겪으며 그녀는 아예 삶의 의욕을 포기한 채 시들어가는 비운의 여인으로 스물일곱에 세상을 떴다.
오늘날 페미니스트 작가의 선봉이라 불릴 수 있는 난설헌의 작품집, 그녀 유언에 따라 유작을 모두 태웠으나 동생 허균은 누이가 친정에 남겨둔 시들이며 자신이 암송한 시들을 모아 《난설헌집》을 엮었고, 마침 조선을 찾은 명나라 사신들에게 이를 보이자 그들 중 주지번이 경탄하며 가져가 중국에서 이 책을 출간했다. 1606년 그녀의 별세 후 18년 뒤 나온 이 시집이 중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이 책이 다시 동래에서 일본인 분다이야 지로 손에 들려 1711년 일본에서 출간되어 인기를 끌었다. 난설헌의 극히 일부를 뺀 나머지는 당나라와 원나라 시인들의 위작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그녀 스타일로 변형된 것이고 힘겨운 본인 삶의 단상들을 투영한 작품들로도 그녀의 시적 재능은 입증되었다는 반론이 있다.
시인 신동엽은 1930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69번지에서 출생했다. 1944년 부여초등학교, 1948년 전주사범학교, 1953년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64년 건국대학교대학원 국문과에 입학하여 한 학기를 수학했다. 1958년 충청남도 주산농업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60년에는 월간 교육평론사에서 근무했다. 1961년 명성여자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한 뒤 1969년 사망 전까지 재직했다.
1959년 장시(長詩)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조선일보』에 시 「진달래 산천」, 『세계일보』에 「새로 열리는 땅」을 발표했다. 1960년 『현대문학』에 「풍경」, 『조선일보』에 「그 가을」, 『학생혁명시집』에 「싱싱한 동자를 위하여」를 발표, 1963년 첫 시집 『아사녀』를 냈다. 1967년 『현대한국문학전집』 제18권 『52인 시집』에 「껍데기는 가라」, 「3월」, 「원추리」 등 7편의 시를 실었다. 같은 해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장편 서사시 「금강」을 『한국 현대 신작 전집』에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8년 『한국일보』에 시인 김수영 추모시 「지맥 속의 분수」,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보리밭」,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등을 발표했다.
신동엽은 향토성과 역사의식,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사실주의 경향의 시를 썼다.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1966), 평론 「시인정신론」(1961)도 발표했고 1968년에는 오페레타 『석가탑』을 드라마센터에서 상영했다. 1969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유저로 『신동엽시전집』(1975),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1979), 『신동엽전집』(1980)이 있다.
신동엽의 대표작은 「껍데기는 가라」(1967)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것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는 진정 필요한 것들을 돌아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고, 화합과 평화를 지향하는 시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한 “4월”이라는 시어에서 신동엽 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4‧19혁명을 떠올릴 수 있다. 혁명의 정신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시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이 시는 또한 신동엽 문학의 기반인 고향 부여와 금강을 연상할 수 있는 시다. 백제의 숨결이 살아있는 고장이자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가 선명한 부여와 금강에 대한 신동엽의 애착은 그의 또 다른 대표시인 「금강」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70년 신동엽의 고향 부여읍 동남리 금강변에 시비가 세워졌다. 1982년 신동엽창작기금이 조성되었고, 생가가 복원되었다. 1990년 단국대학교에 시비가 세워졌다.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금강」을 음악극화한 가극 『금강』이 초연되었다. 2003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13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신동엽길 12에 신동엽문학관이 건립되었다.
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지린성 북간도 명동촌에서 출생했다. 윤동주의 고향인 명동촌은 기독교에 대한 신앙심과 항일의식이 강한 지역이었고 윤동주의 할아버지는 기독교 장로였다. 윤동주는 신앙심과 민족의식을 키우며 자랐다. 아우 윤일주와 당숙 윤영춘도 시인이며 함께 자란 고종사촌 송몽규는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이다. 문익환도 명동촌 출신이며 윤동주와 함께 자랐다.
윤동주는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달라즈 중국인 관립학교를 거쳐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했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문을 닫아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에서 졸업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1942년 일본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 같은 해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했다. 1943년 항일운동 혐의로 송몽규와 검거되어 1945년 2월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사망했다.
광명중학교 4학년때 간도 연길에서 나온 『가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1936.11), 「빗자루」(1936.12), 「오줌싸개지도」(1937.1), 「무얼 먹구사나」(1937.3), 「거짓부리」(1937.10) 등을 발표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를 실었고, 연희전문학교 교지 『문우』에 「자화상」, 「새로운 길」을 게재했다. 사후인 1946년 『경향신문』에 시 「쉽게 쓰여진 시」가 발표되었다. 1941년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으나 하지 못하고 사후에 정병욱과 윤일주가 다른 유고와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를 간행했다. 윤동주는 식민지 지식인 청년의 상실감과 자아성찰을 서정적인 시어에 담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1941
윤동주가 활발한 시작활동을 했던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서울에 거주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입학 직후에는 기숙사 생활을 했고 1941년 5월부터 1941년 8월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9번지의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1941년 9월부터 북아현동의 하숙집에서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살았다. 이곳에는 1942년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전까지 머물렀다.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 누상동에서 함께 하숙을 했던 정병욱이 윤동주의 자필 시집을 보관했다가 윤동주 사후에 출간했다.
1968년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 교토 도시샤대학에도 윤동주의 친필과 일본어 번역이 새겨져 있는 「서시」 시비가 건립되었다. 2000년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윤동주 시문학상 수여, 윤동주 기념 강좌 등 선양 사업을 진행하고 2004년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기숙사로 사용되었던 연세대학교 핀슨홀에 사진 자료 및 서적을 전시한 윤동주기념실을 개관했다. 2012년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윤동주문학관이 개관했다. 친필 원고와 사진, 서명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윤동주의 시와 생애를 소개하는 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윤동주 문학관 옆에는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었다.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모임"이 2017년 교토 우지강변에 윤동주 기념비를 건립했다. 이처럼 윤동주의 삶과 시는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과 중국에서도 사랑받고 있다.
작가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1910년 9월 23일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에서 출생했다. 큰아버지가 자식이 없어서 3세 때부터 통인동 본가 큰아버지의 집에서 성장했다. 1917년 신명학교에 입학하여 구본웅을 동기생으로 만났고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21년 신명학교, 1926년 동광학교,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했다.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면서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 표지도안 현상모집에도 당선되었다. 1930년 『조선』에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면서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31년 일문시(日文詩)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의 유희」, 「공복」, 「삼차각설계도」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다.
1933년에는 건강상의 문제로 직장을 그만두고 종로에서 다방 ‘제비’를 차려 경영했다.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윤태영, 조용만 등이 다방에 출입하여 교류했다. 1933년 『가톨릭청년』에 시 「1933년 6월 1일」, 「꽃나무」, 「이런 시」, 「거울」, 1934년 『월간매신』에 「보통기념」, 「지팽이 역사」, 『조선중앙일보』에 국문시 「오감도」 등 다수의 시작품을 발표했다. 「오감도」는 새로움과 난해함으로 발표 당시 독자들의 항의로 연재가 중단되었다. 1934년 구인회에 가입했고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1일」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1935년 다방을 폐업하고 1936년 창문사에 취직했다가 퇴사했다. 「날개」(1936), 「지주회시」(1936), 「동해」(1937) 등의 소설도 발표했다. 「소영위제」(1934), 「정식」(1935), 「명경」(1936) 등의 시와 「봉별기」(1936), 「종생기」(1937) 등의 소설, 「권태」(1937), 「산촌여정」(1935) 등의 수필을 발표했다. 일본 동경에서 1937년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었다가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 『이상전집』 3권이 1966년에 간행되었다.
이상은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언어유희와 역설 등을 사용한 새롭고 난해한 이상의 문학 세계는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지적인 반응으로, 현실을 초월하여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러케뿐이모혓소.(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길은뚤닌골목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이상의 연작시 「오감도」의 첫 작품인 「시제 1호」다. 1934년 7월 24일 『조선중앙일보』에 게재되었다.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을 주제로 한다고 분석하긴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추출해낼 수 없어 해석에 대한 논쟁이 많다.
서울특별시 종로구는 이상의 삶과 문학이 나서 자란 곳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154-10번지에 이상을 기리기 위한 “이상의 집”이 건립되었다. ‘이상의 집’은 이상이 1910년부터 1933년까지 거주했던 집터의 일부에 세워졌다. “이상과의 대화”, “이상의 문학에 대한 지정토론회” 등 많은 사람들이 이상을 기억하고 이상의 예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정지용은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번지에서 출생했다.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등학교), 1918년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집안이 어려워 교비생(학교의 경비로 공부하는 학생)으로 학교를 다녔다. 정지용은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시 같은 학교를 다니던 홍사용, 박종화, 김윤식, 이태준 등과 교류했으며,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냈다. 1919년 3.1운동과 관련한 휘문사태를 주동하 정지용은 무기정학을 받았으며, 같은 해 12월 『서광』 창간호에 소설 「3인」을 발표했다.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정지용은 다음해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1926년 유학생 잡지인 『학조』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등 9편의 시, 『신민』, 『문예시대』에 「Dahlia」, 「홍춘」 등 3편의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의 『근대풍경(近代風景)』에 3년간(1926. 12~1928. 2) 「카페 프란스」, 「바다」, 「갑판위」 등 시 13편, 수필 3편을 발표했다.
정지용은 1927년 『신민』, 『문예시대』, 『조선지광』, 『청소년』, 『학조』에 「갑판우」, 「향수」 등 30여 편의 시를 발표했다. 1929년 도시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휘문고보 영어과 교사로 부임했다. 1930년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했고 이 시기부터 정지용은 1930년대 문단에서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조선지광』, 『시문학』, 『대조』, 『신소설』, 『신생』에 「겨울」, 「유리창」 등 20여 편의 시와 번역시 「소곡」(블레이크 원작)등 3편을 발표했다. 이후 지속적으로 시와 평론, 수필 등을 여러 잡지에 발표했다. 1933년 6월에 창간된 『가톨릭 청년』의 편집 고문역을 하며 많은 신앙시를 발표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구인회의 창립회원(이태준, 이무영, 유치진, 김기림, 조용만 등)이 되었다.
1935년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을 출간했다. 1939년 『문장』의 시 부문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켰다. 1941년 두 번째 시집 『백록담』을 출간했다. 1945년 이화여자전문학교(현재 이화 여자대학교)교수로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하기 시작하여 1948년까지 교수직을 수행했다. 경향신문사 주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로도 활동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구금되었는데 평양감옥에 수용되었다가 납북, 전쟁 중에 폭사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집 『지용 시선』(1946), 산문집 『문학독본』(1948), 『산문』(1949)을 간행했다.
정지용은 언어에 대한 자각이 각별한 시인이었다. 절제된 언어로 감각적인 시를 썼다. 「향수」(1927), 「유리창」(1930)이 정지용 대표작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활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의 시 「향수」에 나오는 고향은 충북 옥천이다. 이 시에서는 고향 옥천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도 찾을 수 있지만, 잃어버린 나라를 그리운 고향에 빗대어 잊지 않고 되찾을 것이라는 열망도 느낄 수 있다. 그 열망이 감각적이고 현대적인 시어에 담겨 있다. 정지용은 시작 초기에 이와 같은 감각적인 이미지즘의 시들을 발표했고, 1933년부터 1935년까지는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시, 이후부터는 동양적인 사상이 드러나는 산수시들을 발표했다.
정지용 문학은 그가 납북시인이라는 이유로 판금되어 있다가 1988년 해금되었다. 같은 해 지용회가 결성되어 5월 15일 세종문화회관 소강당과 6월 25일 고향인 옥천의 관성회관에서 제1회 지용제가 개최되었다. 1989년에 정지용의 시 「향수」에 김희갑이 작곡하여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이 노래를 불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같은 해 정지용문학상이 제정되었다. 1996년 옥천의 정지용 생가가 복원되고 2002년 5월 정지용 탄신 100주년 서울지용제 및 지용문학심포지움 개최했다. 2005년 정지용의 모교인 교토 도시샤 대학 교정에, 대학 후배 윤동주 시인의 시비 바로 옆에 정지용 시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같은 해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56에 정지용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정지용 문학관이 개관했다.
시인 이장희는 1900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이장희의 집안은 대구의 부호였다. 1912년 대구보통학교, 1918년 일본 경도중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금성』 5월호에 시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 마리」, 「불놀이」, 「무대」, 「봄은 고양이로다」 와 톨스토이 원작의 번역소설 「장구한 귀양」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생장』, 『신여성』, 『여명』, 『신민』, 『조선문단』, 『문예공론』, 『중외일보』 등에 「동경」, 「석양구」, 「청천의 유방」, 「하일소경」, 「봄철의 바다」, 「고양이의 꿈」, 「눈은 나리네」, 「연」 등을 게재했다.
비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이상화, 양주동, 백기만, 유엽, 김영진 등 몇몇의 문인과만 교류했다. 일본어 통역 등으로 가업을 잇기 바라는 친일파 아버지와의 불화로 가난하게 살다가 1929년 11월 대구 자택에서 음독자살했다.
출간한 시집은 없고, 사후에 백기만이 이상화와 이장희의 시를 정리한 『상화(尙火)와 고월(古月)』과 『봄과 고양이』(1982), 『봄은 고양이로다』(1983), 두 권의 전집이 나왔다.
이장희는 섬세한 감각과 조형적 이미지를 시를 통해 보여주었다. 대표작은 「봄은 고양이로다」(1923)이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포근한 봄의 졸음이 떠돌아라./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고양이라는 한 대상과 봄이라는 현상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대응하고 있는 시로 시인의 관찰력과 분석력이 돋보인다.
또 다른 대표작인 「하일소경」(1926)에도 감각적인 이장희 시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雲母같이 빛나는 서늘한 테이블./부드러운 얼음, 설탕, 牛乳./피보다 무르녹은 딸기를 담은 琉璃盞./얇은 옷을 입은 저윽히 고달픈 새악시는/기름한 속눈썹을 깔아메치며/가냘픈 손에 들은 銀사슬로/琉璃盞의 살찐 딸기를 부수노라면/淡紅色의 淸凉劑가 꽃물같이 흔들린다./銀사슬에 옮기인 꽃물은/새악시의 고요한 입술을 앵도보다 곱게도 물들인다./새악시는 달콤한 꿈을 마시는 듯/그 얼굴은 푸른 잎사귀같이 빛나고/콧마루의 水銀같은 땀은 벌써 사라졌다./그것은 밝은 하늘을 비추어 작은 못 가운데서/거울같이 피어난 蓮꽃의 이슬을/헤엄치는 白鳥가 삼키는 듯하다.
여름날 딸기 화채를 만드는 여인의 모습을 흰색, 붉은 색, 푸른 색 등의 색감으로 묘사하고 있다. 서늘함과 부드러움, 고요함, 달콤함 등의 감각이 여러 가지 색감을 만나 구체화된다.
이장희의 감각적인 시는 1920년대 시들이 보여주었던 감상적인 시들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어서 문단의 관심을 받았고 이후 한국시의 발전에 한 계기가 되었다. 이장희의 시에는 주제의식이나 시인의 관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쥐약을 먹고 자살할 정도로 극심한 내적 갈등을 가졌던 이장희의 삶을 떠올린다면 주제의식과 관념이 배제된 이장희의 시에서 오히려 우울과 불안, 죄의식 등의 시대의식을 찾을 수 있다.
어린 시절 친모를 잃으면서 가지게 된 상실감, 복잡한 가족사를 만들며 친일로 부를 축적하는 아버지에 대한 저항심은 식민지 지식인 청년의 나라 잃은 상실감과 일본에 대한 저항심을 만나 그 비애와 분노가 증폭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친일파의 아들로서 가지게 되는 죄의식도 이장희의 내적 갈등을 심화시켰을 것이다. 감각적 시어로 완성한 이장희의 시는 이장희의 이러한 내적 갈등이 철저히 가려져 있기에 더욱 비장하다.
조지훈은 1920년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동탁(東卓)이다. 제헌(制憲) 및 2대 국회의원이며 한의학자인 조헌영의 둘째 아들이다. 중학 과정을 독학하고 전문학교 입학 자격 검정 시험에 합격, 1941년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1939년 3월 『문장』에 시 「고풍의상(古風衣裳)」, 같은 해 12월 「승무(僧舞)」, 1940년 2월 「봉황수(鳳凰愁)」가 추천을 받아 게재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하며 불경과 당시(唐詩)를 접했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5년 광복 후 명륜전문학교 강사, 한글학회 국어교본 편찬원,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찬원으로 일했다.
1946년 박목월, 박두진과 시집 『청록집』을 발표하면서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1946년 경기여고 교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김동리, 조연현 등과 함께 한국문학가협회 창립위원이 되어 순수문학과 민족문학을 옹호했다. 『사상계』 편집위원이었다. 6·25 전쟁 때는 종군작가로 활약했다. 1956년 자유 문학상을 받았고, 1961년에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회의에 참석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소장으로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 추진했다.
조지훈은 『청록집』(1946), 『풀잎단장』(1952), 『조지훈시선』(1956)에서 역사의식과 고전미를 시화하면서 불교와 유교를 철학적 배경으로 한 전통지향적인 시세계를 보여준다. 『역사 앞에서』(1959)에서는 시세계의 변화가 있어, 광복 이후의 혼란과 전쟁의 참상 등 현실에 대응하는 사실적인 시들이 등장한다. 그 외의 저서로 시집 『여운(餘韻)』(1964)과 수상록 『창에 기대어』(1956), 『지조론』(1962), 『돈의 미학』(1964), 평론집 『시의 원리』(1953), 『시와 인생』(1953), 『한국문화사서설』(1964), 번역서 『채근담(菜根譚)』(1959) 등이 있다. 조지훈은 민족의식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시인이자 학자이며 지사였다. 1968년 별세했다.
조지훈의 대표작은 초기시인 「승무」(1939)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 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지는 두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腦는 별빛이라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은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양 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자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승무가 보여주는 예술적 춤사위와 불교적 정신세계를 감각적인 언어에 담아 표현하고 있다. 전통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 민족의식을 상기시키는 시로,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1972년 서울 남산, 1982년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실에 시비가 건립되었다. 2007년 조지훈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 지훈문학관이 개관했다. 조지훈의 시, 저서,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매년 조지훈예술제도 열린다. 지훈문학관 주변에는 지훈시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김처(金處)는 광산군(光山君) 김약항(金若恒)의 맏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김약항은 본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키려 했으나, 친지들의 설득에 결국 조선왕조를 위해 일하기로 했다. 하지만 어려운 결심 끝에 시작한 김약항의 새로운 벼슬살이는 비극적인 최후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명 황제 주원장은 위화도회군, 정도전의 요동 정벌 등을 두고 조선을 의심하여, 외교 의례에서 각종 트집을 잡아 신생국 조선을 길들이려 했다. 이것이 바로 표전문(表箋文) 문제인데, 조선에서 작성한 외교문서에 명나라를 희롱하고 모독하는 뜻의 글자가 섞여있다는 내용이었다. 김약항은 바로 그 표전문의 작성자로, 해명을 위해 명나라에 갔다가 억류되었다. 「양촌집」 등 기록에 따르면 심한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는 모습에 감복한 주원장이 김약항을 풀어주었으나, 곧 생긴 또 다른 문제로 황제의 진노를 사서 양쯔강 지역에 귀양갔다가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김약항의 죽음은 만 1년이 지나 조선에 돌아온 사신 편에 전해졌다.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던 태조가 초상 치르는 것을 금지했기에, 명나라의 확인을 받을 때까지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했다. 가족들이 중국에 직접 찾아가 그의 시신을 찾았으나 빈손으로 돌아왔기에, 남아있는 옷가지로 예장(禮裝)을 치러야 했다.
시신도 못찾은 아버지의 기구한 죽음을 슬퍼하던 김처는 끝내 미쳐버렸다. 그는 교도(敎導), 판관(判官) 벼슬을 지낸 똑똑한 인물이었지만, 정신이상이 생긴 후에는 사리판단을 못 해 동네 어린아이나 여인들이 장난으로 한 거짓말에 매번 속아 넘어갔다고 한다. 「세종실록」에는 김처의 종 윤귀(允貴)의 기록이 있는데, 윤귀는 김처가 정신이 흐려진 것을 악용하여 주인을 마구 때리고 부려먹은 일로 처벌받았다. 노래를 잘했던 김처는 낮에는 종일 잠만 자다가 이따금 깨면 안축의 「관동별곡」을 부르며 춤을 추었고, 밤에는 시구를 중얼거리며 거리를 떠돌았다. 김처는 그렇게 방황하던 중 산에 내팽개쳐 있는 병자를 불쌍히 여겨 돌봐주다가 그만 전염병이 옮아 죽고 말았다.
김처의 기구한 운명 앞뒤에는 당대의 굵직한 정치적 분쟁과 대립이 있었다. 표전문 사건은 단순한 외교 문제를 넘어선 조선과 명나라의 주도권 싸움이었고, 요동 정벌을 명분으로 사병 혁파를 추진하던 정도전(鄭道傳), 중국의 힘을 빌려 그를 견제하려는 이방원(李芳遠)의 정치적 대립과 연관되어 있었다. 한편 김처를 핍박했던 종 윤귀(允貴)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종으로 행세하다가 적발되어 처벌을 받았는데, 이는 세종 치세 내내 문제행동을 일삼아 왕권에 위협이 되었던 양녕대군과 관련된 정치적 사건이었다. 세종은 방탕한 큰형의 여러 만행을 끝까지 감쌌지만, 신하들은 「연형제곡(宴兄弟曲)」 같은 악장을 통해 형제 사이의 우애도 군신의 예의를 거슬러선 안 된다고 끊임없이 권계(勸誡)했다. 윤귀의 처벌은 단순히 윤귀 개인의 범죄로서가 아니라, 양녕대군의 행태에 신하들이 보인 경계심의 연장선에서 상하(上下)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범죄로 처벌 받았던 것이다.
아기 기생 매창에 대한 소문은 한양에도 전파되고, 천민 출신이지만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유희경이 마침 부안에 들러 그녀를 만나니, 스물여덟 살 차이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시로 나누며 연인이 된다. 다음 해 임진왜란 발발로 둘은 곧 헤어져 15년 후에야 재회하는데 유희경과 서로를 그리는 애절한 마음을 읊은 두 사람의 시들은 가장 품격있는 연가들로 알려졌다. 시를 주고받은 것으로 확인된 인물들로는 ‘여자 친구 천향에게’라고 그녀를 지칭했던 권필을 비롯해 심광세와 임서, 한준겸 등이 있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문인들과 시를 주고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내들 술시중이 본업이지만, 이렇듯 당대의 문사들과 마음을 나누고 시를 노래하며 친구 관계를 유지했지만 첫사랑 유희경을 연모하는 매창은 다른 사내에게는 애써 시(詩)로서 화답하며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인하곤 했다.
최고 사대부 출신으로 탄핵과 파면과 복직을 거듭한 시대의 풍운아 허균은 부안에 첫 발령 당시 마주했던 매창에 대해 “빼어난 용모는 아니었으나 재주와 정이 있어 종일 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시로 화답했다”고 기록했다. 부안에서 몇 달 머물고 떠난 후에도 기회를 만들어 그녀를 방문해 문학과 풍류를 나누니 곧 각별한 벗이 되었다.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익명으로 펴내고 명나라에서 누이 난설헌의 시집을 내는 동안에도 그는 틈틈이 미천한 신분의 기생이던 그녀와 서신으로 교류하니, 매창은 허균을 통해 그의 누이 허난설헌의 시도 접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는 여러 차례 친구들까지 끌고 와 함께 유람하며 느낀 감회를 자신의 책에도 기록하며 매창과의 우정을 이어갔다. 불교에 심취한 죄목으로 파직당했을 때도 한양 자기 집이 아닌 부안에 와서 살 작정을 할 만큼 매창은 허균에게 든든한 동지였다.
송도삼절로 꼽히는 서경덕과 황진이와 박연폭포에 빗대어 부안 출신 시인 신석정은 유희경과 매창과 직소폭포를 ‘부안 삼절’로 꼽은 바 있다. 배꽃이 꽃비가 되어 흩날리던 어느 봄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매창이 읊은 ‘이화우 흩뿌릴 제’는 그녀가 남긴 시 중 가장 유명하며 유일한 한글 시조여서, 황진이의 작품에도 비견되곤 한다. 허균의 표현대로 “천성이 고고했던” 매창은 폐병으로 서른여덟에 숨을 거두었는데, 부음을 접한 허균은 눈물을 뿌리며 그녀를 애도하는 시를 지었다. 유배를 마친 1년 후 애장품 거문고와 함께 묻힌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 있는 그녀의 무덤을 찾아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던 그녀의 재주를 사랑해 교분이 막역했으며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亂)의 경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2수를 지어 슬퍼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곳은 1983년 8월 24일 전라북도의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의 여성 선비들은 스스럼없이 자신을 부를 수 있는 이름으로 자신의 거처를 뜻하는 ‘당호(堂號)’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정일당도 그런 이름인데 태몽도 남달랐던 그녀의 어머니 꿈에 외할머니가 나타나 “여기 덕을 갖춘 이를 보내니 잘 키우라.” 하시니, 정일당의 원래 이름은 그 뜻대로 ‘지덕(至德)’이었다. 가난하지만 명문가의 후손이고 총명해서 일찍이 글을 깨우치고 시문 읽기를 배웠던 정일당은 본디 충북 제천 출신이다. 조부모와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생활이 곤궁했던 탓에 바느질과 베 짜는 일로 홀어머니를 도우며 여섯 살 아래 남편 윤광연과 스무 살에 혼인했다. 시댁 형편도 세간을 마련해 줄 형편이 아니어서 친정에서 3년을 함께 살다 한양에 근접한 과천의 버려진 오두막에서 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배움을 멈추면 짐승과 다름없어진다며 남편은 오직 학문에 정진하도록 뒷바라지를 하니 아내의 뜻을 따라 그는 공부에 전념했다. 곁에서 바느질하면서 정일당은 남편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책을 함께 읽고 시를 외우며 강건하고 단정한 필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성의 이름으로 글을 남기기 어렵던 시절이라 남편 대신 그녀는 세상을 뜬 친척 어른들 행적이며 추도문을 써주는 식으로 유가의 가르침을 담은 문장이며 시들을 작성했다. 여성도 노력하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 믿었던 그녀는 진정한 도에 이르지 못하면 살아도 즐거울 게 없다고 여기는 전형적인 성리학자였다. 따라서 정일당의 시는 진리를 탐구하고 자족하며 수양에 힘쓰는 선비의 안빈낙도를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고, 산문 역시 자기 성찰의 내용을 담은 문장이 많다. 과거에 계속해서 낙방하는 남편에게 벼슬길을 접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서당을 열도록 권했고, 남편은 그녀 뜻을 따르며 학문적 동지가 된 것으로도 즐거웠다. 알뜰한 살림 덕분에 그들도 말년에는 재산을 모아 남대문 외곽 약현(藥峴, 지금의 중림동)으로 이사하여 더 많은 책을 탐독하며 폭넓은 지식을 쌓고, 조상도 가까운 곳에서 섬기려 선영으로 삼은 곳이 성남시 향토문화재 1호가 된 수정구 금토동 산75, 청계산 기슭이다.
아홉 아이를 출산했으나 모두 일찍 사망하고, 특히 쉰 이후로는 여러 질병으로 힘겨운 일상을 견뎌야 했던 정일당은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니 결국 본인이 손수 마련해 둔 자리, 청계산 기슭에 뼈를 묻게 되었다. 정일당은 윤광연에게 이미 스승과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고, 아내의 앞선 죽음을 애도한 윤광연은 자신의 이름으로 남긴 시문들을 원작자 이름으로 다시 바꾸고 남아 있던 저술을 간추려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라는 문집으로 간행했다. 여기에 그녀의 시 38수, 서(書) 7편, 짧은 편지 8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녀를 칭송하는 사람들은 정일당이 사임당과 윤지당의 재능을 겸비했다고 말한다.
최길두(崔吉斗)는 1917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태어났다. 제주공립보통학교와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 구례군과 제주도의 농회기수(農會技手)를 지냈다. 1940년대 초, 항일청년들의 모임인 비밀독서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았다. 일어로 번역된 세계사상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읽는 독서모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조선의 독립과 나아갈 길을 고민하는 항일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이들은 라디오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수신하여 이승만의 구국연설을 청취하기도 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독서회의 멤버들이 밀항을 시도하다 체포되는데, 최길두는 이 사건의 주동자라는 혐의를 받고 1945년 1월 일제 경찰에 의해 수감되었다.
광복 후 제주상고와 제주중 등 여러 중학교 및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6년 1월 최길두는 이영복(李永福), 이시형(李蓍珩) 등과 함께 잡지 『신생』을 발간했다. 『신생』은 제주도 최초의 종합 교양잡지로, 제주도 문학의 기반을 닦은 중요한 매체다. 최길두는 ‘최일(崔一)’ 도는 ‘KT’라는 필명을 「폐허」, 「애민의 농자」, 「시인향」 등 시를 발표하는 한편, 요절한 제주의 향토시인 김이옥(金二玉)의 미발표 작품을 싣고 추모하는 글도 게재했다.
1947년에 3·1절 기념시위사건에 연루(連累)되어 포고령 위반죄로 5,000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1948년 제주4·3사건이 발발했을 때 제주도의 법조, 행정, 교육, 언론계를 대표하는 여러 인사들과 함께 제주공립농업학교에 감금되었다. 다행히 제주도청 상공과장 이인구의 도움으로 풀려나 죽음을 면하였다. 최길두는 훗날 농업학교 수용소에 자행된 만행에 대해 증언했다. 1957년 교편생활을 접고 작품 활동에 전념하면서, 1964년 1월 23일 시내 청춘다방에서 결성된 제주문인협회의 전신 제주문학자협회 결성에도 참가, 희곡분과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제주여자중고교 예술제 악극을 연출했고, 1965년 연합신문 주최 희곡 공모에서 입선되기도 하였다. 1978년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정소암 화전(鼎沼岩 花煎) 놀이」 연출을 맡았다.
일제강점기부터 시를 썼지만, 말년에 이르러 두 권의 시집 『무명토(無明土)』(1989)와 『이단(異端)의 요화(妖花)』1994)를 발간했다. 또한 1993년에 장편소설 『해산맥』을 쓰기도 했다. 『해산맥』은 이재수의 난과 제주4․3을 연결하는 중요한 작품이라고 평가받는다. 그 외 회고록 『黃昏의 길목에서』, 시나리오 작품집 『雪花』, 『비련(悲戀)의 강(江)』, 『素心草』 등이 있고, 무용가극으로 『봄의 頌歌』, 『봄을 기다리는 順伊의 집』 등이 있다. 2002년 사망하였다.
충청남도 홍성군의 문인으로 한용운이 있다. 한용운은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이며 시인이다. 호는 만해(萬海), 만해(卍海)다. 1879년 8월 29일(음력 7월 12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출생했다.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896년부터 속리사, 월정사, 백담사 등에서 불경을 공부했다. 서양 서적들을 통해 서양의 근대사상도 접했다. 1903년 세계일주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를 거쳐 귀국, 석암사를 거쳐 백담사에 입산, 1905년 수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08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 교토 등지의 사찰을 순례하고 임제종대학에서 6개월간 불교와 동양철학을 연구했다. 친일승려 이회광 일파가 원종종무원을 설립하고 1910년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체결하자, 이에 분개하여 1911년 승려대회를 개최, 친일불교의 획책을 폭로하고 저지했다. 조선불교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조선불교유신론』(1913)을 발표했다. 1918년 『유심』을 창간, 주재했고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독립선언 준비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3년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조선독립이유서」를 집필했다. 1922년 출옥 이후에는 각지를 돌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강연을 했고 1924년 불교청년회의 총재에 취임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간행하여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흑풍』(1935), 『후회』(1936), 『박명』(1938) 등 장편소설과 한시, 시조를 발표했다.
1927년 신간회의 발기인이 되었고 경성지부장을 역임, ‘조선불교동맹’과 ‘만당’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1931년 『불교』를 인수 ‧ 간행하여 불교청년운동 및 불교의 대중화 운동을 벌였다. 1933년 서울시 성북구에 심우장을 짓고 거주했다. 총독부를 바라보지 않기 위해 북향으로 지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944년 5월 9일 중풍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중장(1962)이 추서되었다.
한용운의 대표시는 「님의 침묵」(1926)이다.
님은갓슴니다 아아 사랑하는나의님은 갓슴니다
푸른산빗을ᄭᅢ치고 단풍나무숩을향하야난 적은길을 거러서 참어 ̇떨치고 갓슴니다
黃金의ᄭᅩᆺ가티 굿고빗나든 옛盟誓는 차듸찬ᄷᅴᄭᅳᆯ이되야서 한숨의微風에 나러갔슴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追憶은 나의運命의指針을 돌너노코 뒤ㅅ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
나는 향긔로은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ᄭᅩᆺ다은 님의얼골에 눈머렀슴니다
사랑도 사람의일이라 맛날ᄯᅢ에 미리 ᄯᅥ날것을 염녀하고경계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 리별은 ᄯᅳᆺ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슯음에터짐니다
그러나 리별을 쓸데업는 눈물의源泉을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ᄭᅢ치는것인줄 아는ᄭᅡ닭에 것잡을수업는 슯음의힘을 옴겨서 새希望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
우리는 맛날ᄭᅢ에 ᄯᅥ날것을염녀하는것과가티 ᄯᅥ날ᄯᅢ에 다시맛날것을 밋슴니다
아아 님은갓지마는 나는 님을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
제곡조를못이기는 사랑의노래는 님의沈默을 휩싸고돔니다
-「님의 침묵」, 『님의 침묵』, 안동서관, 1926, 1~2면
항일 의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시다. ‘님’은 잃어버린 조국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한용운이 밝힌 것처럼 이 시의 ‘님’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상실하여 혹은 결핍되어 되찾거나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님’이다. 조국, 민족 뿐만 아니라 진리, 정의, 연인 등이 ‘님’이 될 수 있다. 자유롭고 새로운 시의 형식, 독창적인 은유와 역설의 사용 등으로 한국 시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시로 평가된다.
1967년 파고다공원에 비가 건립되었고 1973년 『한용운 전집』(전6권)이 간행되었다. 경기도 광주시에 만해기념관이 개관했고, 한용운이 머물렀던 설악산 백담사 아래 마을인 강원도 인제군 북면에 만해마을이 조성되었다.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 318번길 83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생가 근처에 위패와 영정을 모신 만해사가 있다. 만해문학체험관도 건립되어 한용운의 삶과 문학세계를 기리고 있다.
경상남도 창원시의 시인으로 천상병이 있다. 천상병은 1930년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출생, 1945년 귀국하여 창원시에서 성장했다. 마산중학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수학했다. 1949년 마산중학교 5학년 때 『문예』에 시 「강물」, 1952년 『문예』에 시 「갈매기」, 1953년 『문예』에 평론 「사실의 한계: 허윤석론」, 1955년 『현대문학』에 「한국의 현역대가」 등을 발표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 이후 고문의 후유증에 평생 시달렸다.
제1시집 『새』(1971), 제2시집 『주막에서』(1979), 제3시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1984), 제4시집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1987), 제5시집 『요놈 요놈 요이쁜 놈』(1991), 3인 시집 『도적놈 셋이서』(1989), 산문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1990),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 등을 출간했다. 1985년부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에서 부인과 함께 까페 ‘귀천’을 운영하면서 문인들과 교류했다. 가난하고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았지만, 익살스러운 기행과 유머 그리고 긍정적인 세계관을 담은 시로 문인들과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3년 별세했다. 2003년 은관 문화 훈장이 추서되었다.
천상병의 시는 동심에 가까운 순진성이 특징이다. 자연과 인간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이 일상적인 언어에 담겨 있다. 대표작은 「귀천」(1970)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 『요놈! 요놈! 요 이쁜놈!』, 도서출판답게, 1991, 95면
인간의 유한한 삶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읊은 시다. 늘 병고에 시달리던 천상병이 죽음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천상병은 「고향이야기」에서 창원을 첫 번째 고향이라고 칭한다.
내 고향은 세군데나 된다.
어릴때 아홉 살까지 산/경남 창원군 진동면이 본 고향이고
둘째는 대학 2학년때까지 보낸/부산시이고
세째는 도일(渡日)하여 살은/치바켄 타태야마시이다.
그러니 고향이 세군데나 된다.
본 고향인 진동면은/산수(山水)가 아름답고/당산(堂山)이 있는 수려한 곳이다.
바다에 접해 있어서/나는 일찍부터/해수욕을 했고
영 어릴때는/당산(堂山)밑 개울가에서/몸을 씻었었다. (하략)
-「고향이야기」, 『요놈! 요놈! 요 이쁜놈!』, 도서출판답게, 1991, 62~63면
천상병에게 창원은 아름다운 고장이며 어린 시절의 즐거운 추억이 담긴 곳이다. 고향에 대한 기억은 천상병이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지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천상병을 기리는 사업들이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벌어지고 있다. 천상병의 생애를 담은 연극 『소풍』과 뮤지컬 『귀천』이 제작, 공연되었다. 천상병 시인이 거주했던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 입구에 ‘시인 천상병 공원’이 건립되었고, 철거된 집은 충청남도 태안군에 있는 대야도에 복원되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천상병 귀천공원’도 있다. 천상병이 강화도에서 「귀천」을 썼기 때문이다.
2004년부터는 천상병 시인의 부인이 거주했던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천상병 예술제’가 개최되고 ‘천상병 시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의정부 시내 둘레길 이름을 천상병의 시 「귀천」에서 따와 '소풍길'이라고 명명했다. 서울시 은평구에 천상병, 중광스님, 이외수를 기리는 ‘셋이서 문학관’이 있다. 경상남도 산청군에서는 매년 천상병 문학제가 열리며 천상병귀천문학상을 시상한다. 경상남도 산청군 중산 관광단지에 「귀천」 시비가 세워졌다. 경상남도 창원시 만날 공원에 「새」 시비가 건립되었다.
심능숙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한 작가이다. 1782년에 태어나서 1840년 생을 마감하였다. 심능숙은 경기도 김포에 가문대대로 나라에서 받은 땅이 있어 주로 이곳에서 생애 전반을 보냈다. 본관은 청송이고, 자는 영수이며, 호는 소남이다. 심광세의 7세손이고, 아버지는 고부군수 심윤지이다. 광산 김씨와의 사이에서 1녀를 두었으며 광산 김씨가 죽자 전주 이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2남 1녀를 뒀다. 1829년에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 덕으로 벼슬을 얻어 감역이 되었다. 이후 1830년에 감찰(監察)·판관(判官)이 되고, 1832년부터 3년간인 1835년까지 태인현감을 지내기도 했다.
심능숙은 한문으로 지은 고전장편소설 『옥수기』의 저자이다. 고전소설의 대부분은 작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경우는 드문 경우라 하겠다. 『옥수기』는 한문장편소설로 4권 4책으로 되어 있다. 1888년(고종 25) 9권의 국문본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문학사적으로 『옥수기』는 서유영의 『육미당기』, 남영로의 『옥루몽』과 함께 당대 문인들이 가졌던 소설에 대한 관심을 살펴볼 수 있는 지표가 된다. 이뿐만 아니라 가문 소설의 국내 창작설에 대한 실제적인 증거 자료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옥수기』는 명나라를 배경으로 한 상층 귀족 영웅소설이다. 특권 사대부 계층과 나라에 공을 세우거나 큰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은 집안을 벌열이라고 하는데, 소설은 벌열과 세도 집단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내용을 살펴보면 가씨 가문을 중심으로 하여 ‘화·왕·진’씨 가문이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정치적으로 적대하기도, 갈등하기도 하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고난을 겪지만 도움을 받아 결국에는 성공하는 영웅의 일생기이며, 이는 당대 사대부의 완벽한 일생으로 볼 수 있다. 『옥수기』는 19세기 초 특권 사대부층의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당시 특권 사대부 계층과 벌열 집권에 대한 어느 정도의 비판을 보여주면서도 평민계층의 성장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옥수기』에는 도를 닦아서 인간 세상을 떠나 자연과 벗하여 늙지 않고 오래 사는 신선을 이상적인 인간으로 여기는 도가적 관점이 많이 보인다. 이로 인해 이 소설을 사대부적 세계관과 도선적 세계관이 조화되어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적 관점은 아니고 심능숙이 선가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심능숙의 선가에 대한 관심은 『옥수기』 뿐만 아니라 산문 『이은전』과 시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은전』은 재주가 보통 사람과 다르고 신통한 이은의 삶을 다룬 산문이다. 『이은전』의 주인공은 ‘이팽랭이’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초탈하여 지내는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도 심능숙의 선가적 관심을 살펴볼 수 있다. 심능숙은 『옥수기』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시인으로서도 뛰어났다. 일정한 격률(格律)과 엄격한 규범을 갖고 있는 근체시에 뛰어났고, 이미 7세에 시를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14세부터 한시를 짓는 문인의 모임인 시회활동을 하였다. 또한 산문문체의 하나로 조선후기 소설·가사·제문 등 여러 종류의 글을 모아 수록한 책인 잡록도 남겼다. 시문집으로 『후오지가』, 잡록으로 『문시』가 있다.
황진이는 조선 중기(16세기)인 중종·명종 때의 기생이다. 정확하게 언제 태어나서 언제 삶을 마감했는지는 알 수 없다. 황진이는 황진사와 황진사의 부인이 결혼할 때 데리고 온 여종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황진사의 부인이 자식이 없었던 관계로 황진이를 외동딸로 키웠다. 자신이 황진사 부인의 딸이 아닌 여종의 딸임을 알게 된 것은 그녀가 윤승지댁 아들과의 혼담이 깨지면서 황진사의 부인이 그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황진이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 기생이 되고자 결심한다. 당시 정식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식을 서자, 서녀라고 하였는데, 양반의 서녀의 경우 양반의 첩이 되어 살 수 있었다. 그런데 황진이는 이러한 일반적이고 보다 안정적인 삶을 거부하고 기녀가 된 것이다. 진이라는 이름 외에 진랑이라는 이름도 있었으며 기생 이름으로는 명월을 썼다.
황진이가 살던 당시의 여성들, 특히 양반가의 여성들은 남성들이 학문에 정진했던 것과 달리 남편과 시어른을 잘 섬기는 법, 첩을 거느리는 법, 자식을 잘 기르는 법 등 양육과 가사의 일만을 교육받았었다. 이에 반해 기생은 가장 신분이 낮은 천민이었지만 양반 사대부 남성들과 어울려 학문, 시, 시조를 창작하고 논할 수 있었으며 춤과 노래를 즐길 수 있었다. 황진이는 뛰어난 미모뿐만 아니라 뛰어난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당시 이름이 높았던 기생이었다. 춤과 노래뿐만 아니라 뛰어난 시인이자 작가였으며 서예가이자 음악가였으며 무용가였다. 당시 학식이 높았던 양반 사대부들과 견주어 학문을 논하고 시조를 나누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기생이었던 황진이는 일생을 살면서 많은 남자들을 만났지만 그 중에서도 기생이 되면서 자신의 신변을 보호해 주었던 황진사댁의 종이었던 놈이, 당대 최고의 군자였던 벽계수와 이사종이 있었다. 벽계수는 당시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던 학자였지만 황진이의 유혹에 결국 넘어가게 된다. 이사종은 황진이와 조선 팔도를 6년간 유람하며 사랑을 키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조선 당대의 신분질서에서 둘은 이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6년의 유람을 끝으로 남포에서 헤어지게 된다. 황진이는 벽계수를 유혹할 때도 이사종과 사랑을 키워갈 때도 모두 시조를 지어 마음을 전했다. 벽계수를 유혹할 때 지었던 것으로 「청산리 벽계수야」가 있고, 이사종과의 사랑이 오래 지속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담은 「동짓달 기나긴 밤을」이 그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또한 황진이를 박연폭포, 서경덕과 함께 송도3절이라고 하고, 이매창 김부용과 함께 조선 3대 기녀로 꼽힌다.
박인로는 1561년에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나서 조선의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 시대를 무인과 문인으로 살면서 1642년 삶을 마감한 인물이다. 그는 고려 말의 문신이었던 박진록의 10세손이며, 9대조는 대광보국숭록대부, 8대는 대제학, 7대는 대사헌 등의 벼슬을 하였으나 후대로 오면서 현감, 교수, 참봉 등 하위관직 벼슬을 하였다. 그의 부친은 승의부위라는 종8품의 무반 벼슬을 하였고, 박인로는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공을 인정받아 무과에 급제하여 조라포만호에 올랐다. 그리고 박인로의 둘째 아들이 효성으로 추천되어 창능참봉을 한 것을 끝으로 박인로의 집안에서 관직으로 진출은 더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인로 당시 이미 그의 집안은 명목상의 사대부에 속했을 뿐이었다. 실제적인 삶은 시골에 살면서 여러 대에 걸쳐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양반이었다.
박인로의 삶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가 임진왜란에 직접 참전한 무인이라면 후반부는 유학자이자 가곡, 가사, 시조를 직접 창작하여 부르던 가객으로서의 면모이다. 먼저 전반기 삶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2살이 되던 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 활동에 가담했다. 38살이 되던 해인 1598년에 강좌절도사인 성윤문 아래에서 수군으로 참여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1599년에는 무과에 합격하여 수문장·선전관에 임명되었다. 거제도 말단인 조라포(助羅浦)에 외적이 침입했을 때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된 만호부의 만호(萬戶)로 부임하였다. 당시 착하고 바르게 다스려서 선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이렇게 무인으로 전쟁터와 군대 안에 있으면서도 그는 붓과 먹을 가지고 다녔으며 싸움터와 부대 안에서도 시인의 정취를 잊지 않았다고 평가받는다.
박인로 삶의 후반부는 유학자이자 가곡, 가사, 시조를 직접 창작하여 부르던 가객의 삶이었다. 그의 나이 40세를 전후했을 때부터 그는 성인과 현인의 경전을 뜻풀이하는데 몰두하였다. 생애 말년에는 여러 도학자와 교유하였는데, 특히 이덕형과 친했다. 박인로는 이덕형을 처음 만났을 때인 1601년에 「조홍시가(早紅柿歌)」라는 시조를 지었으며, 이후 1605년에는 「선상탄(船上歎)을 짓기도 하였다. 이덕형이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숨어서 살고 있을 때 그를 찾아가 「사제곡(莎堤曲)」·「누항사(陋巷詞)」를 지었다. 1612년에는 도산서원의 의식에 참여하여 이황의 학문을 우러러 따랐다. 그 외에 조지산, 장여헌, 정한강 등과 교유하였고, 1630년에는 용양위보호군이라는 노인적을 받기도 하였다. 1635년에는 「영남가(嶺南歌)」라는 가사와 「노계가」를 지었다. 이외에 「입암별곡(立巖別曲)」과 「소유정가(小有亭歌)」라는 가사를 지었다. 박인로가 지어서 현재 전하고 있는 사가가 9편, 시조가 68수이다.
이후 가난한 삶을 살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겨 지키는 삶을 살다가 1642년 82세에 삶을 마감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는 지방의 선비들이 그를 우러러보아 1707년에 도계서원을 세워 제향하였다.
박인로는 생의 후반부부터 문인으로서 활동하였지만, 그의 작품 활동이나 국문학사에 미친 영향들이 적지 않았다. 박인로는 정철, 윤선도와 함께 조선 3대 시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노계집』과 필사본 등에 실려 전하였으나 이 밖에 많은 작품이 전해지지 못하고 없어졌다.
또한 시조를 즐겨 지었지만, 국문학상으로는 가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문학적 재능 역시도 가사에 더 잘 반영되어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조홍시가」, 「선상탄」, 「사제곡」, 「누항사」, 「영남가」, 「노계가」, 「입암별곡」, 「소유정가」 등이 있다.
윤선도는 1587년 윤유심의 둘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했던 명문가였다. 특히 그의 고조할아버지인 윤효정은 전라남도 해남에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면 대신 세금을 여러 번 내주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윤선도는 여덟 살 때 작은 아버지인 관찰공 윤유기(尹唯幾)의 양자로 들어간 후 작은아버지에게 직접 글을 배웠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산속의 절에 피난가 있으면서도 공부를 했고, 26살에 수석으로 진사에 급제했다.
그러나 당시 정치 상황은 광해군을 등에 업은 이이첨 일파가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 현실에 타협할 수 없었던 윤선도는 얼마 있지 않아 벼슬에서 물러났을 뿐만 아니라 이이첨 일파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이일첨 일파에 의해 경원, 기장 등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의 양아버지이자 작은아버지인 윤유기도 이 일로 관직에서 추방당했다. 윤선도는 유배지에서 농사를 짓고 그곳의 지식인들과 시를 지으면서 살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되면서 귀양에서 풀려나 7년만에 고향인 해남에 내려가게 되었다. 당시 임금인 인조는 윤선도를 의금부 도사로 임명했지만 그는 병을 핑계로 고향인 해남에 머물렀다.
1628년에는 장유의 추천을 받아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스승이 되었고, 이후 공조좌랑, 호조정랑, 한성서윤, 관서경시관, 세자시강원 문학 등의 주요한 관직을 거쳤다. 이때가 윤선도 생애 중에서 가장 화려한 정치생활을 하던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의정 강석기의 시샘으로 경상도 성산현감의 낮은 관직에 있다가 다음 해에 그마저 박탈당하고 다시 고향인 해남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1636년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윤선도는 해남의 젊은이와 집안의 남자종들을 데리고 당시 왕족이 피난해있던 강화도로 떠났다. 하지만 그가 강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뒤였다. 그는 배에서 내리지 않고 곧바로 제주로도 향하던 중 전라남도의 보길도를 발견하고 그곳의 경치에 반해 그곳에 터를 잡게 되었다.
보길도에 부용동이라는 이름을 짓고 낙서재라는 정자를 세운 후 보길도에서 남은 삶을 살기로 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강화까지 갔으나 임금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는 비난이 당시 신하들에게 제기되어 영덕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윤선도는 영덕에서 1년 정도의 유배생활을 한 후 다시 보길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이후 윤선도가 가르쳤던 효종이 임금이 되자 여러 차례에 걸쳐 조정에서 관직에 나와달라는 부름이 있었지만 다시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보길도에서 시를 짓고 속세를 떠나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며 편안하게 삶을 즐기며 제자들을 가르치며 지냈다.
이 당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다. 이것은 우리 가락과 어부들의 살아있는 언어의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시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 노래이다.
그러나 효종이 거듭해서 윤선도를 조정으로 불렀다. 이에 66살이 되던 해인 1652년에 정4품 성균관 사예로 관직에 다시 나가게 됐다. 곧이어 효종이 그를 동부승지로 승진시켜 자신의 곁에 머물게 하였는데,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견제가 심해지자 윤선도는 건강상의 문제를 들어 사직을 요청하고 다시 보길도로 돌아갔다. 1659년에는 효종이 승하하자 윤선도는 왕릉을 모실 장소를 심의하는 위원이 되었지만 그가 고른 장소는 그에 반대하는 신하들에 의해 선택되지 못했다.
더불어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상복문제로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었다. 삼수로 유배갈 당시 윤선도는 73세의 노인이었다. 혹독한 추위로 유명했던 삼수에서 6년이나 보낸 후 전라도 광양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2년을 더 보낸 후 81살이 되어서야 겨우 유배에서 풀려났다.
윤선도는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권력에 아부하지도 않았으며 의리와 원칙을 중요시하며 곧은 성품을 지녔다고 평가받았다. 따라서 윤선도는 정치적 이해 관계를 따지지 않고 원칙과 신의에 맞게 자신의 의견을 상소로 피력했다. 이 때문에 85년 동안 살면서 총 10년이 되지 않는 기간 동안만 관직생활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보다 긴 15년 동안 3번에 걸쳐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관직에서 물러나 있거나 유배 생활을 하는 가운데 쓴 시와 문장들은 현재 국문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특히 그의 시조는 우리 가락과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여 한국어의 예술적 가치를 잘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윤선도는 75수의 시조를 남기고 있고, 그의 시문집인 『고산유고』는 정조15년에 왕명에 의해 발간된 것이다. 『고산유고』에는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이 있다.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백기행이고, 백석은 글을 쓸 때 사용했던 필명이다. 1924년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학교 선배인 김소월을 동경하면서 시인을 꿈꿨다. 1929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조선일보』에서 주최한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었다. 조선일보사의 춘해장학회 장학생이 되어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과로 유학갔다. 백석은 일본 유학 당시 일본 시인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를 즐겨 읽었으며 기존의 전통 등을 부정하고 새롭고 혁신적인 문화의 창조를 추구하는 모더니즘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34년에는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하면서 서울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허준, 신현중 등과 사귀게 됐다. 1935년에는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한 월간종합잡지인 『조광』 창간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에 『조선일보』에 「정주성(定州城)」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고, 「주막」, 「여우난골족」 등의 시를 발표했다.
1936년에는 『사슴』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한정판으로 간행하였고, 같은 해에 조선일보사를 나와서 함경남도 함흥에 있었던 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함흥에서 생활하면서 소설가 한설야, 시인 김동명을 만나게 됐고, 자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기생 김진향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자야’라는 이름은 백석이 김진향에게 지어준 것이다. 이 당시 「고야」, 「통영」, 「남행시초(연작)」 등의 시를 발표했다. 1937년에는 소설가 최정희, 시인 노천명과 모윤숙 등과 어울리면서 「함주시초」, 「바다」 등의 시를 발표했다.
다음 해인 1938년에는 함경도 성천강 상류 산간지역을 여행하였고, 함흥 영생고보의 교사직을 그만두고 경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 「산중음(연작)」, 「석양」, 「고향」, 「절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물닭의 소리(연작)」 등의 시 22편을 발표했다. 다음 해인 1939년에는 자야와 함께 살면서 조선일보사에서 발간하던 월간지 『여성』의 편집 주간을 하다가 그만두고 자신의 고향인 평북 지역을 여행했다. 1940년 만주 신경(지금의 장춘)에서 만주국 국문원 경제부 직원으로 일하다가 창씨개명의 압박이 이어지자 그만두고 돌아와 만주에서의 체험이 담긴 시들을 써서 발표했다. 이 때 발표한 시가 「목구」, 「수박씨, 호박씨」, 「북방에서」, 「허준」 등이고, 1941년에는 「귀농」,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을 발표했다. 1942년에는 다시 만주에 가서 안둥 세관에서 일했다.
해방이 되자 고향인 정주로 돌아와서 그 해(1945년) 10월 조만식을 따라 소설가 최명익, 극작가 오영진 등과 함께 ‘김일성 장군 환영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백석은 이때 러시아어 통역을 했다. 백석은 1946년 결성된 북조선예술총동맹에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다가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고, 이때부터 집중적으로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였다. 「적막강산」,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등의 백석시는 1947년 말에서 1948년에 걸쳐 서울의 잡지에 실렸는데, 허준이 해방 전에 백석이 쓴 시를 가지고 있다가 실은 것이다. 1948년에 을유문화사에서 발행한 월간 종합 학술 문예지인 『학풍』 창간호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발표하였는데, 이 시가 남쪽 잡지에 발표한 마지막 시였다. 이후 이북에서 조선작가예술대회 이후 외국문학 분과원으로, 조선작가동맹 기관지인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으로,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 번역을 맡으면서 동시 등의 창작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 1957년 간행한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에 정현웅의 삽화를 넣고, 동시인 「멧돼지」, 「강가루」, 「기린」, 「산양」을 발표한 뒤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됐다. 같은 해 6월에는 「큰 문제, 작은 고찰」과 「아동문학의 협소화를 반대하는 위치에서」를 발표하여 아동문학 논쟁이 본격화되었고, 그 해 9월 아동문학토론회에서 자아비판을 하게 된다. 다음 해인 1958년에는 「제3인공위성」이라는 시를 발표하고, 같은 해 9월의 ‘붉은 편지 사건’ 이후 창작뿐만 아니라 번역을 포함한 모든 문학 활동이 중단되었다. 이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게 된다. 삼수군에 내려가서도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가르치거나 농촌체험을 담은 시 등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2년 이후 창작 활동이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삶을 마감했다.
백석은 김소월, 만해 한용운, 정지용이 만들어놓은 현대시의 기틀 위에서 새로운 시의 문법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 시인이다. 특히 자신의 고향인 평안도 지역의 방언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언어들을 시어로 쓰고, 옛언어와 토착어를 많이 사용하여 시어를 넓히고 모국어를 확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우리말의 입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잘 사용하여 경험세계를 감각적으로 재현하기도 하였다. 백석의 시는 장면 묘사와 서술 위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공감각적인 심상을 사용하였으며 사람들의 실제 삶의 풍속을 시로 잘 표현하였다. 대표작으로 「고향」, 「사슴」 등이 있다.
김려는 1766년에 태어나서 1822년 삶을 마감한 조선시대 문인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사정(士精), 호는 담정(潭庭)이다. 김려는 노론계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7대조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할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다. 하지만 이이첨이 김제남을 무고하여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증조부 상정도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그의 집안은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의 아버지인 재칠이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음서란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의 후손이 과거시험 없이 추천으로 벼슬을 하는 제도이다.
김려는 어렸을 때부터 똑똑했는데, 특히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15살에 성균관에서 유생으로 지내면서 179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함께 성균관 유생으로 지낸 이옥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문학적으로 교류가 있던 사람들의 글을 모아 편찬한 『담정총서』에 이옥의 글도 실려 있다. 1792년 정조의 문체반정에 이옥과 함께 연루되었다. 이옥은 이 일로 군대도 다시 가게 되고, 귀양도 다녀오고 결국은 벼슬을 접게 되었다. 이에 반해 김려는 정조의 명에 따라 시를 지어 바쳐 그 재능을 인정받는 등 문체반정으로 인해 크게 피해를 보지는 않았다. 문체반정이란 문체가 바른 곳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정조가 조선 후기 정통 고문이 아닌 패사소품체라고 부르는 소설식의 문체를 구사하는 문풍을 바로잡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문체반정을 피하고 자신이 지은 시로 정조의 칭찬을 받은 다음 해에 자신과 친했던 강이천이 유언비어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김려도 함께 이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김려는 함경도 경원 지역으로 유배가게 되었다. 1801년에는 김려가 천주교와 관련이 있다고 해서 조사를 받게 되었고 이 일로 다시 경남 진해에 유배를 당했다. 김려가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게 된 것은 1806년으로 그가 41살 되던 해였다. 그의 아들의 상소로 유배 생활이 끝나게 된 것이다. 그 후 1812년에 의금부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여생을 마칠 때까지 함양군수로 재직하였다. 1822년 56세의 나이에 삶을 마감하였다.
김려는 소품체 문장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악부시의 대가로 평가된다. 대표적인 시로는 「고시위장원경처심씨작 古詩爲張遠卿妻沈氏作」이 있는데, 장편서사시로 백정의 딸이 주인공인데 양반이 그녀를 며느리로 삼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공고했던 신분 차별과 평등을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는 시이다.
허균을 이어 전을 짓기도 했다. 의리 있고 걸출한 인물을 그린 〈가수재전 賈秀才傳〉·〈삭낭자전 索囊子傳〉·〈장생전 蔣生傳〉 같은 작품들이 남아 있다. 이들 작품은 그의 문집인 「담정유고 潭庭遺藁」의 「단랑패사 丹良稗史」에 실려있다. 「담정유고 潭庭遺藁」에는 악부시를 비롯한 한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으며, 일기·편지·전(傳)·발문·상량문(上樑文) 등도 수록되어 있다. 『담정총서 潭庭叢書』는 김려와 문학적인 교류를 했던 같은 취향 문인들의 글을 엮은 책인데, 이옥 외에 이안중, 이우신을 비롯한 당대 여러 문인의 글이 46편 수록되어 있어 문학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정사가 아닌 주위의 이야기들을 역사로 엮은 야사와 잡다한 것들을 글로 기록한 잡록을 모은 『한고관외사(寒皐觀外史』와 『광사(廣史』를 펴냈다. 김려가 지은 『우해이어보』는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와 함께 우리나라 어보의 쌍벽을 이룬다고 평가받는다.
정철은 우의정, 좌의정, 전라도 체찰사를 지냈던 정치가이자 박인로, 윤선도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히는 문인이다. 정철의 어릴 적 이름은 송강이었는데, 송강은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에 있는 강의 이름으로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정철은 그가 정치적으로 힘든 시기마다 이 송강을 찾았다. 정철은 1536년 태어나서 1593년 세상을 떠났으며,본관은 경북 영일이다. 그의 고조할아버지는 병조판서였고, 증조할아버지는 금제군수였다. 정철의 아버지인 정유침은 효자로 유명했다. 정철은 1563년 정유침과 죽산 안팽수의 딸 사이의 막내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누이가 인종의 후궁인 숙의였다.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의 부인이 된 막내누이 때문에 궁궐 출입이 자유로웠다. 이때 자신과 나이가 같았던 경원대군과 친분을 나눌 수 있었다. 경원대군은 훗날 명종이 되었다.
정철이 10세 되던 해인 1545년, 을사사화에 누이의 남편인 계림군이 관련되어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큰형인 정자는 광양으로 유배를 당하게 됐다. 아버지는 곧 유배가 풀렸지만 2년 뒤인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다시 경상도 영일로 유배를 당했다. 정철은 당시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에서 생활하게 된다. 큰형인 정자는 이때 매를 맞는 형벌인 장형을 받고 유배를 가던 중에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1551년에는 명종의 아들인 원자가 태어나면서 아버지의 귀양이 끝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당지산 아래에서 살게 되었다. 이곳에서 임억령에서 시를 배웠고, 양응정, 김인후, 송순, 기대승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들과의 인연은 정철이 최고의 국문 시가로 평가받는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던 자양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이, 성혼, 송익필과도 친분을 쌓았다.
17세에 문화 유씨 유강항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사남이녀의 자녀를 두었다. 25세가 되던 해인 1560년에 「성산별곡」을 지었다. 그렇게 전라도 담양에서 10여 년을 보내고 1561년인 26세에 진사시에 1등을 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 문과 별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를 거친 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좌랑, 현감, 도사를 역임하였다.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다음인 32세 때는 이이와 함께 호당에 뽑혀 공부하였고, 뒤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 암행어사를 거쳤다. 이후 정철이 35세 되던 1570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 뒤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서 각각 2년씩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했다. 40살에는 시묘살이를 끝내고 다시 벼슬길에 나갔다.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 등을 역임했으나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당쟁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정철이 창평에 있을 때 당시 임금인 선조가 몇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였다.
3년 뒤인 43세 때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 참판관 춘추관수찬관이 되어 정치에 몸담았다. 그러나 같은 해에 정철의 반대파에 탄핵을 받아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45세가 되던 해인 1580년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고,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었다. 이후 전라도 관찰사, 도승지, 예조참판, 그리고 함경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48세가 되던 해인 1583년에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다음 해에 대사헌이 되었으나 다시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4년을 생활하면서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가사뿐만 아니라 한시, 시조 등을 창작하였다. 정철이 창평에서 가졌던 시간은 단순히 벼슬에서 물러난 시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시간 동안 정철은 자연 속에서 생각하고, 호남의 유명한 선비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호남가단의 기풍과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54살에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가 좌의정을 거쳐 인성부원군에 봉해지기도 했지만 56살에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어 명천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진주로 옮겨졌다가 사흘 만에 강계로 유배되었다. 57세가 되던 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서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였다. 전쟁 중에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체찰사를 지내고, 그다음 해에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왔지만, 다시 반대파인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였다. 이후 강화의 송정촌에서 지내다가 58살에 삶을 마감하였다.
저서로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 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전한다. 정철의 작품으로는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4편의 가사와 함께 107수의 시조가 남아있다.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되었고, 죽은 후에 임금에게 받는 이름인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박인로, 윤선도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힌다. 특히 그의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최고의 국문 시가로 평가받는다.
태화동은 경상북도 안동시의 법정동이자 행정동으로 태화산에서 따온 지명이다. 안동시의 서남부 신개발지역인 태화동은 인구 밀집지역으로 KBS와 MBC 안동방송국이 있다. 태화동의 자연마을로는 불미골, 원골, 월남골 등이 있다. 원골은 조선시대 자제원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원동이라고도 한다.
불미골은 원동 서쪽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로 대장간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사격장이 들어서면서 총골이라고 하였다. 월남골은 월남에 파병되었던 전사자와 울진 무장 공비 소탕 작전에서 전사한 유가족을 위한 시영 주택이 건립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동김씨의 화심 묘소 보호석이 있어 화심골이라고도 하였다. 태화동의 문화유적으로는 이육사 생가(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호)와 관우 사당인 관왕묘(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0호)가 있다.
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에서 출생한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이다. 이육사는 대구교도소에서 받은 수감번호 264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육사는 일제에 의해 17번이나 투옥되었다. 「광야」와 「정절」에서 드러나듯이 이육사의 시는 식민지 조선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강렬한 저항 의지와 민족정신을 노래하고 있다.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이육사는 1944년 1월 16일에 중국 베이징의 감옥에서 세상을 마감한다.
이육사 생가는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에 있었다. 1976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현재의 위치인 태화동으로 옮겼다. 태화동으로 집을 옮기면서 한쪽 일각문 자리에 대문이 들어서고, 본래 대문 자리에는 이웃집 석축으로 인해 대문이 들어서지 못했다.
이육사 생가는 'ㅡ'자형 집으로 맞배지붕의 안채와 팔작지붕의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칸수가 같고 전후좌우 공간이 똑같다는 점이 특이하다. 안채와 사랑채 지붕은 서로 맞닿을 정도이며 그 사이에 대문간을 만들어 놓았다. 대문으로 들어가면 안채와 사랑채가 서로 마주 본다. 안채 구조는 부엌·방·대청·방이다. 사랑채는 3개의 방으로 이루어졌으며, 왼쪽 끝에 부엌이 설치되어 있다.
대문은 내당과 외당의 동쪽 끝에 판벽이 있고, 정중앙에 문주(門柱)를 만들고 기와를 이고 판벽을 두었다. 대문 맞은편 서쪽 끝에도 내당과 외당을 잇는 판벽과 일각문이 위치한다. 이육사 생가는 앞뒤가 'ㅡ'자형 집에 양쪽이 맞뚫려 있는 문이 있는데, 이러한 집 구조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는 특이한 것이다.
1973년 이육사 생가는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93년 이육사의 옛 집터에 ‘청포도’를 새긴 시비가 건립되었다. 이육사 생가 주변에는 이육사 문학관과 도산서원이 있다. 이육사 문학관은 2004년 개원했으며, 2017년 증축되어 재개관하였다.
안동시는 이육사가 노래했던 청포도 시에서 영감을 받아 '264 와인'으로 재탄생시켰다.
안동시는 ‘264청포도 와인’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2019년 5월 28일 이육사의 고향인 도산면에 와이너리를 완공하고 개소식을 개최하였다.
소촌동은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법정동이다. 원래 광산군 소지면에 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남성리, 상촌리, 선계리, 신역리, 신덕리, 월촌리, 우산면 향약리 등의 일부를 합하여 송정면 소촌리가 되었다. 1988년 광주직할시 광산구 소촌동이 되었다가 1995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이 되었다. 행정동은 어룡동이다. 소촌동은 마을 지형이 마치 가마솥처럼 생겼다고 하여 ‘정두(鼎頭)’라 불렀으며, 조선시대 말 ‘소촌’ 혹은 ‘솔머리’라 하였다. 소촌동의 자연마을로는 남계리·남성·뒷굴·신역·소촌거리·하신역 등이 있다. 소촌동의 문화유산으로는 용아생가(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3호)를 비롯하여 눌재집목판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 사암집목판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 그밖에 박상(朴祥)과 박순(朴淳)의 영정을 모신 송호영당(松湖影堂)이 있다.
1904년 용아생가에서 태어난 박용철은 광주 공립보통학교, 서울 배재고등학교,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23년 일본에서 귀국해서는 당진에 은거하고 있던 김영랑과 본격적으로 교류하면서 시 창작에 몰두하였다. 1931년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을 발간하고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 등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문예월간』, 『문학』 등을 발간하며 극예술연구회의 동인으로도 활동하였다. 박용철은 외국의 시 이론을 번역, 소개하기도 하였다. 순수시 운동에 전념하던 박용철은 1938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하였다.
용아생가는 우리나라 서정시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용아 박용철의 생가이다. 박용철의 고조부가 19세기 후반으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용아생가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서재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정면 5칸에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이다. 왼쪽은 부엌이고 중앙 2칸은 방으로 꾸몄다. 창호는 들어열개의 구조에 겹처마이다. 전면에는 원형기둥, 내부와 측면은 네모기둥을 사용하였다. 사랑채는 5칸 규모의 건물로 오른쪽부터 부엌, 방 2개, 마루의 순서로 배치된다. 사당은 정면 3칸에 측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에서 보면 ‘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서재는 원래 초가집이었던 것을 시멘트 기와로 이었다. 행랑채는 4칸 규모의 건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딸려 있다. 용아생가는 1970년대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초가지붕을 슬레이트와 시멘트 기와 등으로 개량하였다. 1995년 문화재 복원 사업을 통해 원래대로 초가지붕으로 복원하여 관리하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우리나라 현대문학 기수의 한 사람인 박용철을 기리기 위해 용아생가를 지방기념물로 지정하였다.
광주광역시 광산구는 2019년 6월 6일 용아 박용철 시인의 생가에서 ‘아시별의 꼬마시인’ 축제를 개최하였다. 아시별은 아이들의 시로 물드는 별의 준말이다. 아시별 축제는 문화재청의 생생문화재 사업의 하나로 마련된 것으로 “꼬마시인 경연대회, 시인의 노래 공연, 용아 박용철 이야기 전시”로 이루어졌다. 이밖에 상시체험 공간이 있어 참여자들에게 색다른 즐길 거리를 제공하였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는 시인 용아 박용철(1904~1938)이 태어난 집이 자리하고 있다. 박용철은 1904년 광주에서 태어나 1916년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17년 배재학당에 들어갔으나 1920년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자퇴하였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청산학원을 다니고, 1923년 동경외국어학교 독문학과에 들어갔으나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동경의 청산학원 재학 당시 영랑 김윤식과 친분을 맺으면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박용철은 사비를 들여 『시문학』, 『문예월간』, 『문학』 등의 문예 잡지를 간행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5년에는 정지용의 『정지용시집』, 김윤식의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시집과 문예지 등을 간행하며 정작 자신의 작품집은 출간하지 못하고 193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39년과 1940년에 박용철의 유작집 『박용철전집』 2권이 동광당 서점에서 간행되었다.
용아 박용철의 생가는 1800년대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와 사랑채, 사당과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부엌방과 방이 있으며 팔작지붕이 얹혀 있는 건물이다. 사랑채도 5칸의 집으로 부엌과 방, 마루가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맞배지붕이다. 행랑채는 4칸집이며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인해 초가지붕을 시멘트 기와로 교체했었으나 1995년 다시 초가지붕으로 복원하였다. 1986년 2월 7일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3호에 지정되었다.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위는 『시문학』에 실린 시 '떠나가는 배'의 일부이다. '떠나가는 배'는 박용철의 대표시라 할 수 있다. '떠나가는 배'의 시구는 1984년 가수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라는 가요에 활용되기도 하였다. 용아 생가에는 박용철의 생애를 그림으로 엮어놓은 ‘용아생가 이야기’ 표지판이 걸려 있어 박용철의 문학정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생가에는 2008년에 세워진 '떠나가는 배' 시비가 있다. 생가 바로 근처에 있는 송정공원에도 용아 박용철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전체적으로 돛단배의 형상을 하고 있다. 역시나 '떠나가는 배'가 새겨져 있고 박용철의 얼굴을 동판에 새겨 올렸다. 광주공원에는 박용철과 김윤식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한편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는 1992년부터 ‘용아 박용철 전국 백일장’이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또한 최근 박용철과 김윤식의 예술적 삶과 우정을 다룬 음악극 <나두야 간다>가 공연되기도 하였다. 광주 곳곳에 박용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 꽤 많은 듯하다. 생가와 공원들을 둘러보며 그의 순수했던 문학정신을 느껴보도록 하자.
만해 한용운은 우리에게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으로 익숙한 인물이다.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에서 태어난 한용운 선생은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듣고 자랐으며, 점점 쇠퇴해가는 나라와 그 속에서 일어나는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한 뒤 집을 나서게 되었다. 집을 나와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가면서 불교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한 후 1905년 한용운 선생은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연을 끊고 승려가 되었다.
한용운 선생은 1913년 한국불교의 상황을 개탄하며 “조선불교유신론”을 발간해 불교계 혁신운동을 위해 힘썼다. 또한 식민지 시대 암울했던 우리 민족의 입과 귀 역할을 자처하며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1919년 3.1운동에는 불교계 대표로 33인 중 하나로 서명하였고, 불교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을 도맡으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외쳤다. 그러한 그의 열정은 3.1운동이 낳은 최대의 저항시인이라는 평가로 남았다. 300여 편에 달하는 시조와 한시를 남겼으며, 죽음, 흑풍, 후회 등의 소설을 썼다. 그렇게 저항하고,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만해 한용운 선생은 독립을 목전에 둔 1944년 6월 29일 입적하였다.
강원도 인제군 내설악의 쾌청하고 넉넉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만해 마을이 2003년에 조성되었다. 인제 만해 마을은 한국문학의 대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 처음 불교와 인연을 맺고, 개혁을 위해 힘썼던 백담사를 배경으로 조성된 마을이다. 만해 문학박물관을 비롯해 법당과 북카페, 만해 마을 청소년 수련원 등과 관광객을 위한 가족호텔 ‘문인의집’ 등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주차장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러 시인들의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평화의 시벽’이나 야외 공연장인 ‘님의 침묵’ 광장 등 곳곳에 이름만으로도 만해 한용운의 뜻이 느껴진다. 또한 만해 선생의 모교인 동국대학교에서 만해 선생의 뜻을 기리고, 인문교육을 바탕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만해 마을 캠퍼스’를 만들어 청소년과 대학생이 수련할 수 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흉상이 반겨주는 만해문학박물관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일대기와 집필했던 다양한 작품들, 그리고 함께 독립을 위해 힘썼던 시인, 소설가,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함께 전시하고 있다. 교과서에서 이름만 보던 인물들에 대한 정보나 이야기를 통해 이름 석자 만으로는 알 수 없는 우리 역사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볼 수 있다.
박물관의 입장료는 정해져 있지 않다. 입장하는 사람이 1,000원 이상의 자율 기부를 하면 된다. 입장료는 모두 만해문학박물관 자료 구입, 보전, 관리를 위해 사용된다고 한다. 그의 작품이 담긴 다양한 서적과 기록, 독립을 위해 힘 쓴 많은 이들의 전시를 보며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박물관 전시실 창을 통해 보이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전신상은 왠지 우리를 향해 힘차게 걸어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아주 좋은 장소이다.
1899년 노량진(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과 제물포(현재 인천광역시)를 잇는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우리나라 철도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국에는 100개가 넘는 간이역이 생겨났다. 하지만 대부분 사라지고 경관과 보전가치가 뛰어난 일부 역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에 위치한 남평역은 경전선 간이역으로 1930년 12월 25일부터 영업을 개시했다. 경전선은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역에서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역을 잇는 마산선, 마산에서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역을 잇는 진주선, 광주광역시 광주송정역에서 광주역을 잇는 광주선, 진주와 전라남도 순천시를 잇는 구간을 합친 철도이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철도라는 의미로 각각 두 도의 첫 글자를 따서 경전선으로 부른다. 1948년 5월 3일 보통역으로 승격하였으나 1950년 6.25 전쟁으로 역사가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1956년 7월 17일 신축되어 현재까지 간이역으로 사용되고 있다.
남평역은 차량 72량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전성기 1968년에는 연간 승차인원 11만 1,291명, 강차인원 10만 4,745명이라는 실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가 지나자 점차 수송량이 감소하였고 2011년 10월에는 여객 취급이 중지되었다. 그러다 2013년 9월 남도해양관광열차 S트레인이 운영되기 시작하면서 남평역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이후 역사 내부를 옛 시골 간이역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복원하기로 결정되면서 전라남도 관광자원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남평역은 간이역을 배경으로 민중의 고달픈 삶을 다룬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의 무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사평역은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이지만 사람들은 곽재구 시인의 고향인 광주와 가까운데다가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평역이 사평역의 모델일 것이라고 추측해 왔다. 하지만 곽재구 시인의 말에 따르면 「사평역에서」의 모델은 ‘남광주역’이라고 한다. 남평역이 「사평역에서」와 관련이 있다고 잘못 알려진 것은 90년대 중반에 방영한 TV 프로그램의 영향이다. TV 프로그램에서 「사평역에서」를 재현하기 위해 남평역을 배경으로 촬영을 진행했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이 남평역이 사평역과 관련이 있다고 오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 곽재구, 「사평역에서」
남평역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소문이 나 있다. 1956년 신축 당시 옛 간이역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건축적, 철도사적 측면에서 가치가 높다. 이에 2006년 12월 4일에 국가등록문화재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남평역은 현재 기차역으로 기능하기보다 관광명소로서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2023년까지 역사 및 광장 부지에 철도문화관, 근대정원, 문화관광 등이 조성될 예정이다.
명동 멋쟁이 박인환의 고향은 강원도 인제다. 11살에 인제를 떠나 서울로 이사했지만, 강원도 인제사람이라는 정체성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박인환의 수필 『원시림에 새소리, 금강은 국토의 자랑』을 보면, 어린 시절 박인환이 경험했던 인제의 정과 아름다운 자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는 아직 나를 자랑할 수 없으나 확실히 강원도는 순박하고 순수하고 그리고 인간의 정서를 말하는 곳 같다. 아니 강원도의 산은 푸르고 강물은 맑고 달은 밝다. 10리도 못 가서 물이 흐르면 울창한 원시림에서는 끊임없이 새소리가 들린다. 겨울이면 구르몽의 ‘시몽’보다도 흰 눈이 내린다. 밤이 새어 창을 내다보면 어젯밤 눈은 오랜 절실과 같이 이어 나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추위도 모르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박인환, 『원시림에 새소리, 금강은 국토의 자랑』 중 일부, 1954년 발표”
박인환문학관의 전시실은 박인환이 주로 활동했던 서울 명동의 거리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꾸며졌다. 이곳에서 박인환은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을까?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시상은 무엇에 관한 것이었을까? 박인환이 자주 들린 다방과 술집 등을 돌아보며 박인환의 삶과 문학세계를 살펴보자.
그저 책이 좋아서, 박인환은 20살의 어린 나이에 ‘마리서사’라는 이름의 책방 주인이 됐다. 문학잡지, 화보집 등을 주로 팔았고, 김수영, 김광균, 김기림 등의 문학가와 예술인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한국모더니즘 시운동’이 이곳에서 일어난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마리서사가 있던 건물은 철거되지 않고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은 상업시설이 들어서 있어 문학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유명옥'은 박인환과 벗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수영 시인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빈대떡집이다. 문학도였던 둘은 친구였지만, 작품 스타일이 너무나 달았다. 김수영은 박인환이 사랑과 도시, 유행을 노래하는 것을 소양이 없다고 평가하곤 했다. 그러나 뭐가 어찌 됐든 유명옥은 문인들의 열띤 토론이 벌어지던 집합 장소이자, 동인지인 『신시론』 제1집 발간의 계기를 마련해 준 곳이다.
1950년대, 젊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술집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술집은 단순한 유흥주점이 아니라 이들의 고뇌가 교차하고, 어두운 시국에 관한 이야기로 꽃을 피우던 그런 곳이었다. ‘동방싸롱’은 박인환이 자주 들린 단골 술집이었고, ‘은성’ 역시 배우 최불암씨의 어머니가 운영했던 대포집으로 문화예술인들이 막걸리를 마시러 즐겨 찾던 곳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대포집 ‘경상도’는 박인환의 시에 이진섭(李眞燮 1922~1983년)이 곡을 붙여 즉석에서 만든 명곡, ‘세월이 가면’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박인환시선집』, 1955)”
정서(鄭敍)의 가문인 동래정씨(東萊鄭氏)는 대대로 동래 지역의 호장(戶長)을 지낸 집안이다. 증조부 정문도(鄭文道)는 동래지방에서 호장(戶長)을 지냈다. 하마정에 있는 그의 무덤인 ‘정묘(鄭墓)’는 명당으로 이름난 곳으로 지금도 화지공원 내에 자리한 부산의 명소이다. 이곳과 관련한 기록으로 조선시대 동래부사로 임명된 이들이 정묘에 참배하고 그를 기리는 시문을 남겼다. 조부 정목(鄭穆:1040~1105년) 때부터는 지방 세력가에서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정목은 18세에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상경, 33세가 되던 1072년(문종 26)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의 관리가 되었다. 그의 관직은 3품에 이르렀고, 3명의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문벌가문으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부친인 정항(鄭沆:1080~1136년)은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하여 종2품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까지 승차하였으며, 중앙정계의 문벌가문과의 혼인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는 영리하고 일처리를 잘하여 왕이 총애한 인물로 오랜 관직생활에도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했다.
정서(鄭敍)는 정항의 7자녀 중 넷째 아들로 개경에서 태어났다. 위로 3명의 형이 있었으나 어린 나이에 모두 사망하여 독자와 다름없이 자랐다. 그의 아명은 사문(嗣文), 호는 과정(瓜亭)이고, 문학적 재능과 묵죽화를 잘 그리는 등 기예가 뛰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왕국모(王國髦)의 딸로 친·외가 모두 명문인 가문에서 자랐으며, 임원후(任元厚)의 딸과 혼인하여 왕의 손아래 동서가 되었다. 그는 인종 때에 음직(蔭職)으로 장사랑사온승동정(將仕郞司醞丞同正)의 벼슬에 출사하고 10년 동안 승차를 거듭하여 1146년에 정5품 내시낭중에 이르렀다. 인종이 사망하고 의종(毅宗)이 18대 왕으로 즉위하자 그의 처지가 바뀌었다. 의종은 왕권강화에 방해되는 왕자들을 경계하였다. 1151년(의종 5) 환관 세력의 무고로 왕자 왕경(王暻)[대령후(大寧侯)]의 지위를 박탈하고 왕경과 어울렸던 정서를 탄핵하는 등 대령부를 폐쇄하고 많은 사람을 처벌하였다.
이때 정서는 동래로 유배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기록에 따르면 정서가 귀양온 곳은 동래현 남쪽 10리, 좌수영 북쪽 3리 [지금의 망미동]에 위치한 강기슭이었다. 그는 강변에 정자를 세우고 참외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과정이라는 호를 붙였다. 1157년 의종의 첫 왕자탄생 기념으로 죄인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이 있었지만, 정서는 동래로 귀양 온 지 6년 만에 다시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1170년 무신정변(武臣政變)으로 의종이 제거되고 명종(明宗)이 즉위한 후 정서는 유배생활 19년 만에 개경으로 돌아갔다.
중앙권력에서 밀려나 고향인 동래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된 정서의 생활상에 대하여 상세히 알려진 것은 없다. 비록 유배되어 왔지만 동래 정씨가 동래지역에 대대로 세거한 가문으로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정서는 동래로 유배되어 세월을 보내면서 복권되기를 기다렸다. 의종이 정서를 유배 보낼 때 이번 일은 조정의 공론으로 부득이 하게 결정한 일이니 곧 소환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다리는 왕의 부름은 없고 세월만 흘러가자, 자신의 신세를 서글픈 노래로 지어 부르고 참외밭을 일구며 과정(瓜亭)이라 호를 지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가 지은 노래를 작자의 호를 가져와 ‘정과정곡’이라 명명했다. 「정과정곡」은 고려·조선시대 문인과 학자들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현전하는 고려가요 중 연대와 작자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노래이다. 「정과정곡」의 가사는 고려말 『고려사』 「악지(樂志)」에 이제현(李齊賢)의 한역시 ‘정과정(鄭瓜亭)’과 16세기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삼진작(三眞勺)」의 한글가사가 있으며, 18세기 『대악후보(大樂後譜)』 5권 「진작(眞勺)」의 악보기록이 있다. 「정과정곡」은 조선시대 궁중아악으로 연주되었으며, 악공(樂工)선발 시 필수시험과목이었다. 그 밖에 『과정 잡저(瓜亭雜著)』 3권의 시화집을 지었다고 하나 전해진 것은 없다.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柏谷)이다. 김득신의 할아버지는 김시민(金時敏) 장군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로 진주성 대첩을 이뤘다. 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남봉 김치(金緻)이다. 김득신의 어머니는 사천목씨(泗川睦氏)로 목첨(睦詹)의 딸이고, 부인은 경주김씨이다.
김득신의 어릴 때 이름은 ‘노자의 꿈을 꾸고 태어난 아이’라는 뜻으로 ‘몽담(夢聃)’이라 불렸다. 김득신은 어릴 때 천연두를 심하게 앓아 머리가 나빠 어리석고 미련하였다고 한다. 당시 초등학교 수준의 교재인 『십구사략(十九史略)』을 공부하고 나서 첫 구절도 기억 못할 정도였으며 그의 외숙인 목서흠(睦叙欽)은 김득신에게 아예 공부를 그만두라고 했을 정도였다.
주변에서는 명문가(名門家)에 바보가 나왔다고 수군덕거렸지만, 김득신의 아버지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노력을 장려하였다. 김득신은 머리가 나쁘다고 하여 좌절하지 않았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밥을 먹을 때, 상(喪)을 치르는 중에도 늘 책과 함께했다. 이러한 노력은 목표를 달성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김득신은 같은 내용의 글을 수만 번 읽었으며,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노력을 기특하게 여겨 자신이 67세가 되었을 때는 만 번 이상 읽은 글의 편수와 횟수를 집계해 ‘고문삼십육수독수기(古文三十六首讀數記)’라는 글을 짓기도 하였다. 김득신은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과거에 도전하여 마침내 59세가 되는 해에 증광시에 급제하여 성균학유가 되어 본격적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김득신은 공부할 때 옛사람들이 남겨놓은 글들을 많이 읽었는데, 그 중 「백이전(伯夷傳)」은 11만 번 넘게 읽었다고 한다. 현재의 10만 번은 그 당시 1억 번에 해당하여 김득신은 자기 서재의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 하였다.
「독수기(讀數記)」에는 김득신이 같은 문장을 수만 번 반복했던 까닭이 전해진다.
“「백이전」과 「노자전」, 「분왕(分王)」을 읽은 것은
글이 드넓고 변화가 많아서였고,
유종원(柳宗元)의 문장을 읽은 까닭은 정밀하기 때문이다.
「제책」과 「주책」은 남다르게 독특해서이고.
「능허대기」, 「제구양문」은 담긴 뜻이 깊어서였다.
「귀신장」, 「의금장」, 「중용서」 및 「보망장」은 이치가 분명하기 때문이며,
「목가산기」는 웅건하고 중후하기 때문이다.
「백리해장」은 말은 간략하나 그 뜻이 깊고,
한유(韓愈)의 글은 규모가 크면서도 농후하기 때문이다.
무릇 이 여러 편의 각기 다른 문체들을 읽는 이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이처럼 김득신은 독서 자체의 즐거움과 문장의 완성을 위해 책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김득신은 갑술년(1634년)부터 경술년(1670년)까지 「사기」, 「장자」,「대학」, 「중용」, 「한서」도 여러 번 읽었지만 그 횟수가 만 번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여 기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김득신의 독서에 대한 열정을 본받기 위해 김득신의 후손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충청북도 증평군에 '독서왕김득신문학관'을 건립하여 김득신을 기념하고 있다.
김득신에게 공부를 그만두라고 했던 외숙 목서흠은 김득신이 23세가 되던 1626년(인조 3) 무렵 김득신의 시를 짓는 재주를 알아보고 인정하였다. 김득신은 자연의 생명을 조화롭게 읊은 시를 주로 지었으며, 당대 첫째 순위를 다툴 정도로 뛰어났다.
한문학에 정통해 당대의 조선 4대 문장가로 유명했던 이식(李植)은 김득신의 시를 두고 ‘백곡의 문장이 당금의 제일이다.’라는 최고의 칭찬을 하였다. 심지어 임금 효종은 김득신이 지은 ‘용호(龍湖)’를 두고 “당나라 시에 견줄만 하다.”라고 칭찬하였다. 이를 시기질투한 사람들은 김득신의 시는 출중하나 궁색한 사람이라는 뜻의 말 ‘시능궁인(詩能窮人)’으로 김득신을 조롱하기도 하였다. 김득신이 관직에 나갔을 때는 시에 빠져 일에는 소홀하다는 평가를 받아 지방 관직을 못하게 된 적도 있었다.
김득신은 『백곡집』을 남기고 80세가 되던 1683년(숙종 9)에 세상을 떠났다.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율리 산 8-1에는 김득신의 묘소가 남아 있다. 김득신 묘소를 중심으로 김치, 김천주 등의 묘역이 있다. 이들의 묘는 비석과 석물 등이 17세기 사대부 묘소의 배치를 보여주어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다.
괴산 취묵당 (槐山 醉墨堂)은 1662년(현종 3) 김득신(栢谷 金得臣)이 59세에 세운 독서재(讀書齋)이다. 괴산 취묵당은 충청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충청북도 괴산군 충민사길 45 (괴산읍, 정자)에 위치한다. 취묵당은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해 괴강의 자연경관과 전형적인 정자건축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취묵당은 김득신이「사기」와「백이전」을 수없이 읽었다고 하여 일명 억만재로도 불린다.
인문학이라는 말이 이곳저곳에서 많이 쓰인다. 하지만 참 딱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학문이 인문학이다.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인문학은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영역’을 의미한다. 자연과학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인간의 가치 탐구와 표현활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역사와 예술은 그럼 인문학에 포함되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의다.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어려운 인문학 테마 박물관이 강원도 양구에 있다. 양구는 자연생태환경이 잘 지켜지고 있고, 박수근 화백의 미술혼과 조선백자의 도자 문화가 살아 숨쉬는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양구인문학박물관은 2012년 12월 1일에 문을 열었다. 양구인문학박물관은 한국 철학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김형석, 안병욱 선생의 철학사상과 한국 시인들의 문학정신을 담고 있다.
전시관은 2개의 관으로 나뉘어져 있다. 1관은 ‘시(詩)가 있는 공간’이다. 이곳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10인의 시인들에 대한 전시가 되어 있다. 10인의 시인은 김소월, 김영랑, 박두진, 박목월, 백석, 서정주, 윤동주, 정지용, 조지훈, 한용운이다. 이 대표 시인들의 시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전시실 중앙에 시인들에 대한 소감이나 시 구절을 남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나무에 잎을 하나씩 남김으로써 전시에 함께 한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1관 입구에는 작가들의 시 문구를 도장으로 만들어놓았다. 이를 통해 추억을 남겨갈 수 있다.
2관은 ‘김형석, 안병욱의 집’이다. 이곳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철학자 안병욱 선생과 김형석 선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층은 안병욱 선생의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김형석 선생의 이야기가 전시가 되어 있다. 각 전시 입구에는 선생들의 말들이 남아 있는데 정말 철학적인 생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인트로라고 생각한다. 1층 안병욱 선생의 전시 시작에 적혀있는 ‘인생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어디에 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무엇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행하는 가가 중요한 것이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보람있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2층에 위치한 김형석 선생의 전시 시작 문구는 다음과 같다.
“글을 쓸 때 나도 모르게 평소에 갖고 있던 생각인
‘선하고 아름다운 삶’, ‘밝은 이상’ 같은 것을 찾아
나누고 싶은 심정일 뿐입니다.”
각자의 글을 중심으로 선생들에게 영향을 준 사람, 도움을 준 사람, 가족들과 그들의 이념과 사상에 대한 것들이 세세하게 전시되어 있다. 또한 서재공간이 재현되어 있어 선생들의 삶의 일부를 보는 느낌을 준다. 전시를 보면서 나와 나의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박물관이다. 이런 관람객의 느낌을 예상했다는 듯이 김형석 선생 전시의 끝부분에는 ‘사색의 방’이라는 공간이 있다. 사색의 방에는 편하게 앉아서 영상을 보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공간이다. 전시를 보고 그 여운을 충분히 느끼라는 박물관의 배려인 듯하다.
시화문화마을은 각화저수지와 무등산 무돌길 초입지에 자리하고 있다. 시화문화마을은 각화동의 쓰레기장이 되어 버려진 땅이었다. 각화동이라는 이름은 삼각산의 아랫동네라는 의미의 ‘각하(角下)’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마을 뒷산의 모양이 뿔과 같아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마을의 버려진 땅이 안타까웠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면서 마을이 변화했다.
각화동 마을주민들이 직접 꽃과 나무를 심고 담장에 좋아하는 시를 새기고, 벽화를 그렸다. 담벼락을 따라 폐현수막과 고물로 만든 조형물이 어우러지면서 골목 미술관이 만들어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각화동에서 시행한 아름다운 마을 만들기 사업의 성과가 명성을 얻으며 붙여진 이름이 시화문화마을이다. 2007년부터는 공모사업을 통한 기반 구축이 이루어졌고, 문화허브마을을 조성하기 위한 사업이 진행되면서 시화마을이 자리를 잡아갔다.
시화문화마을 속 금봉미술관이 만들어지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금봉 박행보 화백이다. 금봉 박행보 화백이 자신의 작품을 기증하여 미술관 건립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금봉 박행보는 1935년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태어났다. 남종화의 전통을 지켜온 의재 허백련 화백의 문화로 25세의 나이에 들어 본격적으로 문인화를 배웠다. 금봉이라는 호는 의재 선생이 지어준 이름이다. 이름은 박행보의 고향인 진도 군내면 금골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 이후에도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36세에는 소전 손재형 선생에게 서예를 배우고, 43세에는 한학자 만취 위계도 선생에게 한시와 한학을 배웠다.
박행보 화백은 국전에서 대나무로 4번의 특선을 수상하고, 모란으로 2번의 특선을 수상했다. 문인화 대전, 대한민국 서예대전, 미술대전 등의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후학 양성을 위해 전남대와 호남대에서 강의를 했다. 이러한 그의 열정을 인정받아 2003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는 2023년 기준으로 ‘88세’를 맞이했다. 그는 화업 63년을 기념하며 금봉미술관에서 ‘미수전(米壽展)’을 열며 끊임없이 연구하고 작품활동을 이어가 남도 문인화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금봉미술관은 시화마을 문화관과 광주문학관과 함께 시화문화마을에 있다. 금봉미술관은 일반 사람들에게 다소 어려울 수 있는 남도 문인화를 비롯한 한국화와 다양한 미술작품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향유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자 만들어진 미술관이다. 미술관의 소장품은 금봉 박행보 화백의 작품과 소장품 291점을 기증 받았다. 미술관 공간을 활용해 기획전시와 초대 전시 등 다양한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올해 2023년은 금봉 박행보 화백의 88세를 맞이하여 ‘미수전(米壽展)’을 열었다. 아직도 건강하게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박화백은 2023년 작품을 포함해 30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박 화백은 “미수(米壽)를 맞이해 자연의 섭리에 따라 변화하는 춘하추동 진풍경, 이 아름다운 잔상(殘像)을 화선지에 투영하고, 자신만의 필치로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화가의 꿈일 것이다.”면서 “저 또한 군더더기 없이 생동감이 넘치는 함축미(含蓄美)를 추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전시 소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