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하동의 작가로 박경리가 있다. 하동에 있는 최참판댁과 박경리문학관에는 박경리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박경리의 본명은 박금이로, 1926년 10월 28일 통영에서 출생했다. 진주여자고등학교와 수도여자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계산」과 1956년 「흑흑백백」을 『현대문학』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편소설 「전도」, 「불신시대」, 「벽지」 등과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토지』 등, 시집 『못 떠나는 배』 등을 발표했다. 2008년 5월 5일 폐암으로 사망했다. 사후 2008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현대문학 신인상(1957), 한국여류문학상(1965), 월탄문학상(1972), 인촌상(1991) 등을 수상했고, 1999년 20세기를 빛낸 예술인(문학)에 선정되었다.
박경리의 대표작은 『토지』로,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근대 한국의 역사를 담은 대하장편소설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가 『토지』의 주 무대다. 작품 속에서는 지리산과 섬진강을 낀 평사리의 넓고 비옥한 대지에 최참판댁과 마을 사람들이 생을 기탁하고 있다. 『토지』는 당대 여러 계층을 대표하는 많은 등장인물들을 통해 근대 한국인의 삶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이 작품으로 인해 박경리는 많은 한국인이 기억하는 중요한 작가로 남아 있다. 『토지』는 큰 인기를 얻어 여러 번 드라마로도 제작, 방영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는 이러한 『토지』의 공간을 실재화해 낸 장소인 최참판댁이 있다. 『토지』를 기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허구의 공간을 현실 속에 구현해 놓은 것이다. 지리산을 뒤에 두고 섬진강을 내려다보는 넓은 대지에 14채의 한옥으로 구성된 최참판댁은 『토지』를 기억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토지』와 박경리가 보여주고자 했던 한국인의 삶의 본질을 감각적으로 공감하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드라마 촬영지로 사용되면서 유명세도 더해지고 있다. 최참판댁이 건립된 장소는 1985년 처음으로 『토지』를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할 당시 박경리가 최참판댁이 있을만한 장소라고 언급했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박경리는 『토지』 를 완성하기 위해 무려 26년 동안 집필 작업을 했는데, 서울에 살면서 시작한 『토지』의 집필을 강원도 원주에서 마치게 된다. 이 때문에 강원도 원주에는 박경리의 삶과 작품을 기리는 박경리문학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박경리는 생전에 토지문화재단을 설립, 문학의 후진을 양성하는 사업을 추진하여 원주 사택 근방에 후배 문인과 예술인을 위한 창작공간인 토지문화관을 조성했다. 박경리의 고향이자 묘소가 있는 통영에는 박경리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곳곳에 자리한 박경리를 기리는 장소들은 박경리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이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경기도 양평을 대표하는 작가로 황순원이 있다. 양평에는 황순원의 삶과 작품세계를 기억하고자 조성된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이 있다.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에서 출생했다. 정주 오산중학교와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공부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제2고등학원,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1931년 시 「나의 꿈」을 『동광』에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35년 『삼사문학』 동인, 1937년 『단층』의 동인으로 활약했다. 첫 단편집 『늪』(1940)을 발간하고 이후 「별」(1941), 「그늘」(1942) 등을 발표한 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광복까지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황순원의 작가로서의 재능을 알아본 이광수가 일본어로 작품 활동을 할 것을 권유했으나 응하지 않았던 일화가 유명하다. 광복 후에 광복 전에 쓴 작품들을 포함하여 두 번째 단편집 『목넘이 마을의 개』(1948)를 간행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전쟁 이후 서울에 정착하여 서울중고등학교 교사, 경희대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이후 『별과 같이 살다』, 『카인의 후예』, 『인간접목』,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신들의 주사위』 등의 장편소설들을 발표했다. 황순원의 소설에는 고단했던 한국의 역사로 인해 고통 받았던 사람들의 모습과 이들에 대한 작가의 연민 어린 시선이 담겨 있다. 아시아자유문학상(1955), 예술원상(1961), 3·1문화상(1966), 국민훈장동백장(1970) 등을 수상하였다. 2000년 9월 14일 사망했다. 사망 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황순원 삶의 궤적에서 양평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지만, 황순원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양평은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로 회자되는 황순원의 작품 「소나기」의 배경이 양평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 이후인 1953년, 삭막한 현실 속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등장한 이 순수한 감성은 사람들의 마음에 큰 위안을 주었다. 작품 속 소년과 소녀의 애틋한 설렘과 슬픈 이별은 첫사랑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이후 한국 문학뿐만 아니라 문화계 전반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재창작되면서 사람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개울물은 날로 여물어갔다. 소년은 갈림길에서 아랫쪽으로 가 보았다. 갈밭머리에서 바라보는 서당골마을은 쪽빛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 보였다.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호두알을 만지작거리며, 한 손으로는 수없이 갈꽃을 휘어꺾고 있었다.
-「소나기」, 「학‧잃어버린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1981
양평은 전쟁이 미처 훼손할 수 없었던 사랑과 순수함이 보존된 공간으로 어린 소년과 소녀의 설렘이 공명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양평읍은 소녀가 소년을 기억하며 숨을 거두었던 장소다. 소녀의 죽음은 이들의 설렘을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 이 때문에 양평 일대에는 아직도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셀렘의 추억들을 만들고 있다. 경기도 양평에 조성된 소나기마을에서는 매년 황순원과 소설 「소나기」를 기억하는 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인천시의 작가로 강경애가 있다.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작품이자 대표작인 『인간문제』가 인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인천에서 강경애와 『인간문제』를 기리고 있다. 강경애는 1906년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했다. 강경애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사망하여 어머니는 강경애를 데리고 부유한 집안의 후처로 들어갔다. 장연여자청년학교, 장연소학교, 평양 숭의여학교, 서울 동덕여학교에서 수학했다. 평양 숭의여학교에서는 동맹휴학과 관련되어 퇴학을 당했다. 1925년에는 장연에 흥풍야학교를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신간회와 근우회 등에 참여하는 등 여러 사회 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1931년 『조선일보』에 단편소설 「파금」,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1931년 『혜성』과 1932년 『제일선』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부자」(1933), 「채전」(1933), 「지하촌」(1936) 등과 장편소설 『소금』(1934), 『인간문제』(1934) 등을 발표했다. 강경애는 서울, 장연, 간도 용정 등을 오가며 생활하면서 사회 문제 특히 농민과 노동자, 여성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시, 소설, 수필 등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특히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던 간도에서의 생활이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1999년 간도 용정 비암산에 강경애 문학비가 세워졌다.
『인간문제』는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열악한 현실이 잘 반영된 리얼리즘 소설이다. 고향인 황해도 장연과 인천 부두를 공간적 배경으로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의 삶과 이들이 계급의식을 자각하고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모습들을 보여줌으로써 현실 변혁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아직도 인천 시가는 뿌연 분위기 속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전등불만이 여기저기서 껌벅이고 있다. 신철이는 어젯밤 동무가 세세히 말해 준 대로 다시 한번 되풀이하며 거리로 나왔다. 인천의 이 새벽만은 노동자의 인천 같다! 각반을 치고 목에 타월을 건 노동자들이 제각기 일터를 찾아가느라 분주하였다. 그리고 타월을 귀밑까지 눌러 쓴 부인들은 벤또를 들고 전등불 아래로 희미하게 꼬리를 물고 나타나고 또 나타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부인들은 정미소에 다니는 부인들이라고 하였다.
『인간문제』, 창작과비평사, 1992, 253면
당시 인천은 조선의 식민지 자본주의화의 관문으로 큰 공장이 들어서 많은 노동자들이 생활하던 지역이었다. 『인간문제』의 대동방적 공장은 당시 인천 만석동에 실재했던 동양방적 공장이다. 강경애에게 인천은 식민지 현실의 모순점, 특히 노동자들의 문제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당대 인천의 사실적 재현으로 『인간문제』라는 최초의 노동운동을 담은,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소설이 탄생했다. 『인간문제』의 배경이 된 인천의 동구 만석동과 화수동 일대에서 『인간문제』 문학 답사가 진행되고 인천의 근대문학관에서 강경애와 『인간문제』를 소개하고 있다.
충청남도 천안을 대표하는 작가로 이기영을 들 수 있다. 이기영은 1895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출생하여 세 살 무렵 충청남도 천안시 안서동 중암마을로 이사하여 성장했다. 1922년 일본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24년 『개벽』 현상문예에 「오빠의 비밀 편지」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하여 주요 작가로 활동했다. 식민지 체제 하에서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농민들의 문제를 고민한 소설 「가난한 사람들」, 「민촌」, 「농부 정도룡」, 「홍수」, 「서화」, 『고향』 등을 창작했다. 특히 장편소설 『고향』(1933)은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과 농촌 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서사 형식에 담아내어 당대 계급문학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1945년 월북, 1984년 사망했다. 충청남도 천안에서는 이기영을 기리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기영 소설의 농촌 문제에 대한 관심은 자전적 체험에서 비롯된다. 『고향』, 『신개지』, 『봄』등 소설의 공간적 배경도 충청남도 천안의 농촌 마을이다. 대표작인 『고향』의 배경도 1920년대 중반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원터 마을이다.
산 밑으로 있는 원터 동리는 벌써 그늘이 지고 이집 저집에서 이는 저녁 연기가 동구 앞 대추나무 가지에 흰 장막을 걸친 것처럼 얽히었다. 해는 만리재 고개에서 최후의 발버둥을 치고 있다. 낙조는 한입 잔뜩 물은 피를 뿜은 것같이 핏방울은 봉화재 연봉 위로 돌아가는 조각 구름에도 풍긴 것처럼 점점 이 혈색을 토한다. 서늘한 저녁 바람이 앞내 여울의 잔물살을 거스르고 불어온다. 방축가로 심은 실버들가지는 바람에 흔들려 너울거리고 춤을 춘다.
『고향』, 문학사상사, 1994, 37면
원터 마을 풍경에 대한 묘사 부분으로 이기영의 예술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원터 마을은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농촌이지만 읍내와 가까운 탓에 급격한 근대화가 진행되어 황폐하게 변하고 있었다.
오 년 동안에 고향은 놀랄 만큼 변하였다. 정거장 뒤로는 읍내로 연하여서 큰 시가를 이루었다. 전등, 전화가 가설되었다. C사철은 원터 앞들을 가로 뚫고 나갔다. 전선이 거미줄처럼 서로 얽히고 그 좌우로는 기와집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읍내 앞 큰내에는 굉장하게 제방을 쌓았다. (중략) 그러나 그동안 변한 것은 그뿐만 아니었다. 상리로 올라가는 넓은 뽕나무밭-개울 옆으로는 난데없는 제사 공장이 높은 담을 두르고 굉장히 선 것이었다. 양회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밤낮으로 쏟아져 나왔다.
『고향』, 문학사상사, 1994, 45면
삭막한 풍경만큼 마을 사람들의 삶도 피폐해졌다. 일제의 자본 독점을 위한 수탈로 마을 사람들은 더한 가난에 허덕여서 끼니를 때우는 것이 힘든 사람들도 많았다. 이기영 자신의 모습이 반영된 소설의 주인공은 농촌의 현실을 바라보며 대안과 이를 실행하기 위한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뇌한다.
차장 밖으로 내다보이는 철도 연선의 살풍경인 촌락은 그로 하여금 감개 무량하게 하는 동시에 또한 그의 마을을 굳게도 하였다. 농촌은 오륙년 전보다도 더욱 황폐해지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는 고향에 돌아온 지가 벌써 일년이 되어간다. 그동안에 자기는 무엇을 했는가?
『고향』, 문학사상사, 1994, 57면
『고향』은 농민들과 공장 노동자들이 각성하여 쟁의를 벌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기영에게 충청남도 천안은 식민지 치하 농촌 현실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를 타개할 수 있는 행동을 실행하여 민족의 긍정적인 미래를 지향할 수 있게 하는 관념과 실천의 장이었다. 충청남도 천안에서는 이기영의 삶과 작품 세계를 기리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매년 추모제와 문학제가 열리고, 이기영의 삶과 소설과 관련된 장소에 표지판을 세우는 사업이 진행되어, 『고향』의 배경이 된 장소를 알리는 표지판들이 세워져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의 작가로 이무영이 있다. 이무영은 1908년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태어났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1925년 일본 세이조 중학교를 다니면서 일본 작가 가토 다케오에게서 문학을 배웠다. 1926년부터 작품을 발표했으며, 1932년 극예술연구회, 1933년 구인회 일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농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동아일보사에서 근무했고,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단국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충청북도 음성군에는 이무영 작가의 생가터와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이무영은 1939년 경기도 시흥군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 등의 대표작을 창작했다.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는 연작소설로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농민의 삶을 현실적으로 재현해내는 것을 통해 농촌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한다. 자전적 성격의 소설로 주인공은 이무영처럼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농촌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다. 농촌 소설을 쓰기 위해서다. 이무영과 달리 주인공은 고향으로 간 것이었는데, 그 고향이, 구체적인 지명이 등장하지는 않으나, 이무영의 고향인 충청북도 음성군이 연상되는 곳이다.
그의 고향은 지리적으로나 산물로나 도시와는 인연이 먼 농촌이었다. 읍에까지에는 문전에서 자동차가 다니기는 하나 오십리나 되었고 서울을 가재도 자동차길밖에 없었다. 노정은 삼백리 정도였으나 차임은 십원 각수나 되어 웬만한 사람은 서울 가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기계문명이 한창 기세를 올리던 현대에 살면서도 백 호나 되는 동민 중에는 기차나 전차를 본 사람은 불과 몇이 못 되었다. 경성 유학생이래야 그와 거기서 한 십리 떨어진 화석리라는 촌에서 한 사람, 전 면을 통해서 삼사인밖에 없었다. 기차를 타자면 조치원까지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조치원까지는 이백삼사십리나 되는 터라 부득이 경성을 갈 사람도 직로인 자동차를 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서울을 가본 사람도 기차를 타보지 못한 채 죽은 사람도 많았다.
「흙의 노예」, 『이무영문학전집1』, 국학자료원, 2000, 62면
서울과 멀리 떨어진 가난한 농촌인 고향에 대한 설명이다. 주인공에게 고향은 아름다운 정경을 가진 곳으로 기억되어 있었으나, 삶의 터전이 되면서 “보잘것없는 자연”을 가진 곳으로 비춰진다.
전에는 무심히 보아 그랬던지 자연도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으나 멀쑥한 포플러와 아카시아 숲이 실개천가에 하나 있을 뿐, 이렇다할 특징도 없는 산천이다.(중략) 숲속의 원두막 정취도 그지없이 시적인 듯이 기억이 되었으나 막상 가보니 그도 평범하기 짝이 없다.
「제1과 제1장」, 『이무영문학전집1』, 국학자료원, 2000, 27면
농촌은 서정적인 자연이 있는 곳이 아닌 농민들의 고단한 삶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무영에게 농촌은 고향이자 삶의 본질이다. “사람은 흙내를 맡아야 산다”, 그렇기에 농촌이 안정되는 것이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이 때문에 이무영은 농민 문학 창작에 매진했다. 충청북도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 2층에는 이무영 작가를 기리기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 공간에는 이무영의 삶과 작품에 대한 소개글과 함께 출판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남 장흥군의 작가로 이청준을 들 수 있다. 이청준은 1939년 전남 장흥군 대덕면 진목리에서 출생했다. 광주서중학교와 광주제일고등학교, 서울대학교에서 수학했다. 대학 시절 4‧19와 5‧16을 겪었고 그 경험이 삶과 문학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졸업 후 사상계에 입사, 같은 해인 1965년 『사상계』 신인상에 「퇴원」으로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병신과 머저리」(1966), 「석화촌」(1968), 「매잡이」(1968), 「소문의 벽」(1971), 『당신들의 천국』(1974), 「이어도」(1974), 「잔인한 도시」(1978), 「비화밀교」(1985), 『자유의 문』(1989) 등 문학적 완성도가 높으면서도 대중적 인기도 얻은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초기에는 장인의 삶과 정신, 이후에는 권력의 문제에 관한 작품을 썼다. 아세아 편집부에서도 기자로 근무하다 한양대와 순천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동인문학상(1967), 이상문학상(1978), 대한민국문학상(1985) 등을 수상했다. 이청준의 작품들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대중들의 호응을 얻었다. 1993년 임권택 감독이 만든 「서편제」는 최다 관객이 관람, ‘서편제 신드롬’을 만들기도 했다. 이청준의 고향에는 생가와 묘소가 있으며 묘소 근방에는 이청준 문학자리가 조성되어 있다. 「천년학」의 촬영 셋트장과 이청준을 비롯한 장흥 출신의 문인을 기리는 천관문학관, 천관산문학공원도 있다.
주막집은 장흥읍을 아직 10여 리쯤 남겨놓고 탐진강 물굽이의 한 자락을 끼고 돌아앉아 있었다. 이웃 고을 강진에서 장흥읍을 들어가는 지방도로 가로수열이 저만치 마주 달려가고, 장흥읍의 표상처럼 얘기되는 억불산 바위 정봉이 10여 리 저쪽 하늘 위로 뽀얗게 솟아올라 보이는 강물굽이-바로 이 탐진강 강물굽이의 버스길 양편에 10여 가호의 작은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고, 주막집은 이 작은 마을에서도 좀더 물가 가까이까지 아랫켠으로 자리를 내려가 앉아 있었다.
「소리의 빛」, 『서편제』, 열림원, 31면
「남도사람」 연작소설 중 두 번째 소설인 「소리의 빛」의 도입부다. 이청준은 소설 속에 고향인 장흥과 그 일대 고장의 모습을 담았다. 이청준의 소설 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서편제」를 첫 번째 소설로 하는 「남도사람」 연작소설 5편은 전남 장흥과 보성 일대에 성행했던 소리의 유파인 서편제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구성지고 애절한 서편제 가락에 어울리는 소리꾼 가족의 한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새와 나무」, 「여름의 추상」, 「살아 있는 늪」, 「잃어버린 절」, 「석화촌」, 「축제」, 「음화와 양화」, 「생명의 추상」, 「개백정」, 「키작은 자유인」, 「새가 운들」, 「선학동 나그네」, 「눈길」, 「해변 아리랑」, 「귀향 연습」, 「흰 옷」 등 이청준의 많은 소설들이 고향의 산하와 서정을 바탕으로 한다. 고향인 장흥은 이청준의 서사가 시작될 수 있게 한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이다. 장흥군 회진면에는 선학동 마을도 있다. 주민들이 이청준을 기리기 위해 마을 이름을 선학동으로 바꿨다고 한다. 매년 장흥군에서는 이청준문학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이청준의 소설을 즐겨 읽었던 사람들이 장흥군 일대의 이청준을 기리는 공간들을 방문하고 있다.
서울에서 활동하며 서울을 그려낸 작가로 이태준을 들 수 있다.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호는 상허(尙虛)다. 일찍 부모를 잃어 친척의 손에 자라면서 학비를 스스로 벌어 휘문고보에 입학했다가 동맹휴교를 주동하여 퇴학당했다. 1925년 『조선문단』에 「오몽녀」가 입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7년 도쿄 조치대학 예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했다. 1933년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39년 종합 문예지 『문장』을 주관했다. 이후 개벽사와 중외일보에서 근무, 이화전문학교, 이화보건전문학교, 경성보건전문학교에 출강했다. 이태준은 당시 문단에 큰 영향을 끼친 중요한 작가였으며, 이태준의 소설은 문체와 구성이 탁월하여 근대 소설 형식의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가마귀」, 「달밤」, 「복덕방」, 「해방전후」 등이 있으며 문장론인 『문장강화』가 잘 알려져 있다.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으로 활약하다 1946년 월북했다. 한국 전쟁 이후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태준은 단편 소설인 「달밤」, 「장마」, 「손거부」 등에 자신이 거주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성북동으로 이사 나와서 한 대엿새 되었을까, (중략) 그는 말 몇 마디 사귀지 않아서 곧 못난이란 것이 드러났다. 이 못난이는 성북동의 산들보다 물들보다, 조그만 지름길들보다, 더 나에게 성북동이 시골이란 느낌을 풍겨주었다.
「달밤」, 『까마귀』, 문학과지성사, 2006, 21면
나는 집을 나선다. 포도원 앞쯤 내려오면 늘 나는 생각, ‘버스가 이 돌다리까지 들어왔으면’을 오늘도 잊어버리지 않고 하면서 개울물을 내려다본다. 여러 날째 씻겨 내려간 개울이라 양치질을 하여도 좋게 물이 맑다.
「장마」, 『까마귀』, 문학과지성사, 2006, 59면
「손거부」는 「달밤」처럼 성북동에 사는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이태준의 소설에서 성북동은 “맑은 개울물”, “산보하기 좋은 데”로 번잡한 서울과는 다르게 자연과 어우러져 한적한 시골의 정취를 가진 동네로 그려지고 있다. 이태준은 성북동에서 가족들과 단란한 일상을 보냈고, 성북동은 이태준의 고단했던 삶에서 어쩌면 가장 평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한 공간이었다. 「장마」에는 성북동 뿐만 아니라 서울 일대가 등장하기도 한다. 「장마」는 자전적 소설로, 당시 작가의 하루 일과를 짐작해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성북동 집에서 나와 종로 일대를 돌아보고 조선중앙일보사, 찻집 낙랑, 대판옥서점 등을 들르면서 구인회 일원들을 만날 생각을 하기도 한다. 글쓰기를 위한 일상 보여주기와 소설을 완성하기 위한 소설 쓰기를 잘 보여주고 있는 이태준의 소설 속에는 이처럼 이태준이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공간인 성북동과 서울이 담겨 있다.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거주했던 가옥인 수연산방이 성북동(서울 성북구 성북로26길 8)에 보존되어 있다. 이태준은 이 집에 대한 이야기를 수필 「무서록」에 담기도 했다. 현재 수연산방은 이태준의 후손이 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이태준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어 기념관으로서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다. 이태준을 몰랐던 사람들도 고택의 운치에 끌려 찾아와 한국 근대 문학의 거장을 만나고 있다. 1992년 이태준을 기리는 상허학회가 결성되었으며, 2004년 10월 철원군 대마리 두루미평화관에 이태준 문학비와 동상이 건립되었다.
이효석은 1907년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 출생하여 평창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에서 공부했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시와 소설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경성농업학교 교사, 숭실전문학교 교수,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초기에는 동반자 작가(1930년대 전후에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동조한 작가들. 정식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회원은 아니었으나 사상적으로 카프의 작가들과 함께 했다는 의미에서 붙인 말.)로서의 면모를 보이나, 이후에는 고향과 자연에 대한 사랑, 이국적인 취향이나 성에 대한 관심이 드러난 작품을 발표한다. 시적인 단편소설을 쓴 작가로 평가된다. 대표작은 「메밀꽃 필 무렵」으로,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작가의 고향인 봉평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여러 작품 속에 나타나 「산협」, 「개살구」 등에도 봉평이 등장한다. 봉평에는 「메밀꽃 필 무렵」과 이효석을 기억하기 위한 이효석 문화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이즈러는졌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즘생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왼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혀 하얬었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메밀꽃 필 무렵」, 「이효석 전집2」
주인공인 장돌뱅이 허생원이 봉평장을 향해 가는 길을 묘사한 이 장면은 그 아름다움으로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로 꼽힌다. 허생원의 옛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달빛과 달빛을 닮은 하얀 메밀꽃, 당나귀 방울 소리와 같은 감각적인 소재들과 어우러지면서 서사의 서정성이 극대화된다. 이 소설은 이효석이 고향 마을의 물레방앗간에 얽힌 소문을 듣고 이를 소설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작가가 기억하는 봉평의 모습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물레방앗간, 충주집, 봉평장터, 대화장터는 어린 이효석의 추억이 담긴 장소다.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이 달빛을 받으며 걸었던 길은 평창에서 하숙을 했던 이효석이 봉평의 집을 다녀가면서 걸었던 그 길이라고 한다.
봉평의 이효석문화마을에는 「메밀꽃 필 무렵」의 실제 배경지인 물레방아간과 이효석 생가, 이효석의 평양집이 복원되어 있으며 이효석 문학관도 건립되어 있다. 매년 평창 효석문화제가 열리고 우수 작가에게 이효석 문학상을 수여한다. 「메밀꽃 필 무렵」의 아름다운 장면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메밀꽃과 달빛 아래 또 다른 사랑 이야기를 쓴다.
부산시 기장군을 대표하는 작가로 오영수가 있다. 오영수는 1909년 경상남도(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면 동부리 313번지에서 태어났다.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의 나니와중학 속성과, 동경 국민예술원을 수료하였다. 이후 고향에 돌아와 ‘청년회관’을 열어 마을 청년들을 가르치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고 결국 1942년에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만주 신경으로 갔다. 1943년 귀국하여 이후 경남여고 교사, 현대문학 편집장으로 근무했다. 1949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신천지』에 「남이와 엿장수」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머루」, 「갯마을」, 「명암」, 「메아리」, 「수련」 등이 대표작이다. 오영수는 자연과 고향에 대한 애정, 어린이와 도시의 서민과 농민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향토성과 서정성이 짙은 문체에 실어 서사화했다. 특히 고향인 언양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이 이러한 오영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 예술원상(1977), 문화훈장(1978)을 수상했다. 1979년 별세했다. 오영수는 만주에서 돌아온 1943년부터 2년 동안 고향에서 멀지 않은 경상남도(현 부산시) 기장군 일광면 화전리에서 가족들과 거주했는데, 이 시기 자신이 살고 있던 마을 앞 바닷가에 접한 마을인 학리를 배경으로 창작한 작품이 「갯마을」이다.
서(西)로 멀리 기차 소리를 바람결에 들으며, 어쩌면 동해 파도가 돌각담 밑을 찰싹대는 H라는 조그만 갯마을이 있다. 더깨더깨 굴딱지가 붙은 모 없는 돌로 담을 쌓고, 낡은 삿갓 모양 옹기종기 엎딘 초가가 스무 집 될까 말까? 조그마한 멸치 후리막이 있고, 미역으로 이름이 있으나, 이 마을 사내들은 대부분 철 따라 원양출어(遠洋出漁)에 품팔이를 나간다. 고기잡이 아낙네들은 썰물이면 조개나 해조를 캐고, 밀물이면 채마밭이나 매는 것으로 여느 갯마을이나 별 다름 없다. 다르다고 하면 이 마을에는 유독 과부가 많은 것이라고나 할까? 고로(古老)들은 과부가 많은 탓을 뒷산이 어떻게 갈라져서 어찌어찌 돼서 그렇다느니, 앞바다 물발이 거세서 그렇다느니들 했고, 또 모두 그렇게들 믿고 있다.
「갯마을」, 『오영수단편집』, 지만지, 2012, 75면
“H라는 조그만 갯마을”이 곧 학리다. 학리가 접한 기장 일대의 바다는 미역과 멸치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학리에는 물질을 해서 미역을 따고 멸치 잡는 일을 도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갯마을」의 주인공 혜순과 같은 어촌사람들이 있다. 바다는 이들에게 삶의 터전이면서 가족들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주인공 혜순의 순탄치 않은 삶, 그러한 삶을 준 바다를 고향이라고 그리워하며 결국 돌아오는 혜순의 모습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과 바다 및 고향에 대한 회귀 의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은 오영수를 비롯한 당대 사람들이 겪었던 고달픈 삶의 행로와 닮아 있다.
가난과 일본의 탄압으로 험난한 삶을 살았던 오영수가 평탄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던 기장군 일대의 바다는 오영수가 서정성을 키울 수 있었던 고향과 중첩되어 자연과 고향에 대한 애정,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공간으로 재현되었다. 「갯마을」은 1965년 영화로도 제작되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 때문에 일광해수욕장 옆 작은 공원에는 오영수 문학비가 세워져 있으며, 매해 5월에 일광해수욕장에서 기장갯마을 축제가 열려 오영수의 삶과 문학을 기리고 있다. 오영수의 고향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리에도 오영수문학관이 건립되어 많은 사람들이 오영수와 그의 작품을 만나고 있다.
충청북도 진천을 대표하는 작가로 조명희가 있다. 조명희는 1894년 충청북도 진천면 벽암리에서 태어났다. 진천소학교, 서울의 중앙고보에서 수학했다. 3‧1운동에 참가해 투옥되었다. 같은 해 일본의 도요 대학에 진학하여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고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에서 근무했으며 1925년 카프(KAPF)에 가담했다. 1928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촌에서 교사가 되어 한인 청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34년 결성된 소련작가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1937년 일본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낙동강』, 『붉은 깃발 아래에서』, 『짓밟힌 고려인』 등이 대표작이다. 조명희는 시, 소설, 희곡 등에서 일제의 탄압 하에서 고된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 농민의 계급투쟁을 재현했다. 우즈베키스탄, 중국 그리고 고향인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조명희의 삶과 작품 세계를 기리고 있다.
조명희의 대표작인 「낙동강」은 낙동강 하류 구포벌을 배경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낙동강 칠백 리 길이길이 흐르는 물은 이곳에 이르러 곁가지 강물을 한몸에 뭉쳐서 바다로 향해 나간다. 강을 따라 바둑판 같은 들이 바다를 향하여 아득하게 열려 있고 그 넓은 들 품안에는 무덤무덤의 마을이 여기저기 안겨 있다. 이 강과 이 들과 저기에 사는 인간-강은 길이길이 흘렀으며, 인간도 길이길이 살아왔었다. 이 강과 이 인간, 지금 그는 서로 영원히 떨어지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인가? (중략) 어느 해 이른 봄에 이 땅을 하직하고 멀리 서북간도로 몰려가는 한 떼의 무리가 마지막 이 강을 건널 제, 그네들 틈에 같이 끼여 가는 한 청년이 있어 뱃전을 두드리며 구슬프게 이 노래를 불러서, 가뜩이나 슬퍼하는 이사꾼들도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다 한다. 과연, 그네는 뭇 강아지떼 같이 이 땅 어머니의 젖꼭지에 매달려 오래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러나 그 젖꼭지는 벌써 자기네 것이 아니기 시작한 지도 오래였다. 그러던 터에 엎친 데 덮친다고 난데없는 이리떼 같은 무리가 닥쳐와서 물어 박지르며 빼앗아 먹게 되었다. 인제는 한 모금의 젖이라도 입으로 들어가기 어렵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이 땅에서 표박하여 나가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을 우리는 잠깐 생각하여 보자.
-낙동강, 254-255p
낙동강 지역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끼니를 연명하기 위해 만주, 연해주로 이주했다. 고향에서 살 수 없어 타지를 떠도는 낙동강 하류 사람들의 삶은 당대 조선인들의 처지이자 조명희의 현실이기도 했다. 조명희는 이러한 삶의 원인인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주인공 박성운은 독립운동을 하다 가족들을 이끌고 서간도로 가지만 이주지에서의 삶도 척박하여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고, 떠날 때보다 더욱 가난해진 고향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가 처음으로, 자기 살던 옛 마을을 찾아와 볼 때에 그의 심사는 서글프기 가이없었다. 다섯 해 전 떠날 때에는 백여 호 촌이던 마을이 그 동안에 인가가 엄청나게 줄었다. 그 대신에 예전에는 보지도 못하던 크나큰 함석지붕 집이 쓰러져가는 초가집들을 멸시하고 위압하는 듯이 둥누럿이 가로 길게 높여 있다. 그것은 묻지 않아도 동척 창고임을 알 수 있다. 예전에 중농이던 사람은 소농으로 떨어지고, 소농이던 사람은 소작농으로 떨어지고, 예전에 소작농이던 많은 사람들은 거의 다 풍지박산하여 나가게 되고 어렸을 때부터 정들었던 동무들도 하나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도회로, 서북간도로, 일본으로 산지사방 흘어져갔었다.
박성운은 고향에서의 삶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농민들과 함께 일제에 저항하고 소작쟁의를 일으킨다. 「낙동강」은 무산계습의 의식적인 정치투쟁을 다룬 본격적인 계급문학으로서 당시 카프 내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나보이 문학 박물관에는 조명희 기념실이 마련되어 있고 조명희 거리도 조성되어 있다. 중국 연변자치주에서도 포석조명희문학제를 매년 시행하고 있다. 조명희의 고향인 충청북도 진천군에는 포석문학공원과 포석조명희문학관이 건립되어 있으며 매년 포석조명희문학제를 시행하여 조명희의 삶과 작품 세계를 기리고 있다.
전라남도 목포시의 작가로 박화성이 있다. 박화성은 1903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목포의 정명여학교와 서울 숙명여고를 졸업했고 일본여자대학 문학부를 중퇴했다. 1925년 『조선문단』에 「추석전후」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는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1932년 「하수도공사」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했다. 이후 『백화』(1932), 『북국의 여명』(1933), 「홍수전후」(1934), 「한귀」(1935), 「불가사리」(1935), 「춘소(春宵)」(1936), 「고향 없는 사람들」(1936) 등 식민지 현실과 농민과 노동자의 가난한 삶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한 계급주의 사상을 담은 리얼리즘 경향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일제의 탄압 때문에 1940년 절필하고 낙향했다. 광복 후 다시 집필을 시작했는데, 「검정사포」(1945), 「봄 안개」(1946), 「광풍 속에서」(1948), 『고개를 넘으면』(1955), 『벼랑에 피는 꽃』(1957), 『내일의 태양』(1958), 『창공에 그리다』(1960) 등 애정문제나 일상의 문제들을 다룬 대중성을 띤 작품들을 발표했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소설가협회 상임위원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목포시문화상(1958), 한국문학상(1966), 대한민국예술원상(1970), 3·1문화상(1984) 등을 받았다. 1988년 사망했다.
박화성이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발표했던 「추석전후」는 1920년대 전형적인 리얼리즘 소설로 가난한 과부의 처지를 현실성 있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는 박화성의 고향인 목포의 당시 모습이 상세하게 재현되고 있다.
木浦의 낫은 참 보기에 애쳐러웁다. 南便으로는 늘비한 日人의 긔와집이오 中央으로는 草家에 부자들의 녯 긔와집이 셕겨 잇고 東北으로는 樹林 中에 西洋人의 집과 男女學校와 예배당이 솟아 있는 외에 몃 기와집을 내노코는 ᄯᅡ에 붓흔 초가ᄲᅮᆫ이다. 다시 건너편 유달산 밋흘 보자. 집은 돌 틈에 구멍만 ᄲᅡᆫ-히 ᄯᅮᆯ어진 도야지 막 갓흔 草幕들이 山을 덥허 完然한 빈민굴이다. 그러나 차별이 심한 도회를 안고 잇는 자연의 풍경은 극히 아름다웁다.(중략) 周圍의 風景은 그림 갓고 農村과 漁村 山村과 都會와 港口의 各色 맛을 다하야 가지고 잇는 木浦는 매일 움즉이고 時時刻刻으로 변하것만 그 裏面에 잠겨 있는 貧民의 生活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업슬 만한 悲慘한 살림이 숨어 잇는 것이다.
「추석전야」, 『박화성단편집』, 지식을만드는지식, 15~16면
빈부의 격차가 확연히 드러나는 목포 시가지의 모습과 그 중에서 빈한한 삶을 담당했던 조선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빈곤의 원인인 일본인들의 착취에 대한 문제 의식은 목포의 풍경을 묘사하는 데에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목포에는 목포문학관이 있는데, 박화성관이 있어 박화성의 삶과 작품 세계를 기리고 있다.
나도향은 1902년 서울특별시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나경손이다. 공옥학교,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문학을 공부하려고 가족 몰래 일본으로 갔다가 학비를 지원받지 못해 귀국했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21년 『배재학보』에 「출향」, 『신민공론』에 「추억」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2년 『백조』 동인으로 참여했다.
1926년 다시 일본에 갔다가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초기에는 감상적인 작품을 발표했으나 「행랑자식」, 「자기를 찾기 전」 등을 발표할 무렵부터 애정 문제와 함께 빈곤 문제를 다루며 척박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드러내는 사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인다.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이 대표작이다.
「벙어리 삼룡이」는 애정이라는 주제를 다룸에 있어 계급 갈등 등의 현실 문제를 반영하는 것을 놓치고 있지 않으며 ‘벙어리’와 ‘불’이라는 상징적 소재를 통해 암울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으로 문학적 의의를 높게 평가받고 있는 단편 소설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나도향이 태어난 청파동이다. 청파동은 푸른 언덕이 있는 동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때의 푸른 언덕이 연화산, 연화봉이다. 「벙어리 삼룡이」에는 작품이 발표된 1926년 즈음의 청파동과 변화하기 이전의 청파동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그곳을 청엽정이라 부르지만 그때는 연화봉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남대문에서 바로 내다보며는 오정포가 놓여 있는 산등성이가 있으니 이쪽이 연화봉이요, 그 새에 있는 동네가 역시 연화봉이다. 지금은 그곳에 빈민굴이라고 할 수밖에 없이 지저분한 촌락이 생기고 노동자들밖에 살지 않는 곳이 되어 버렸으나 그때에는 자기네만은 행세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집이라고는 십여 호밖에 있지 않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과목밭을 하고, 또는 채소를 심거나 아니면 콩나물을 길러서 생활을 하여 갔었다.
「벙어리 삼룡이」, 『나도향 전집』, 집문당, 1988, 220면
작품이 발표된 1926년 즈음에는 청파동의 연화봉이 있던 자리를 청엽정이라 불렀던 것이다. 청엽정의 모습은 과거 연화봉이었을 때와는 다르게 “빈민굴이라고 할 수밖에 없이 지저분한 촌락”으로 변화했다. 빈민굴로 전락한 현재의 청파동을 바라보며 나도향은 일제의 수탈로 더욱 삭막해진 현실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벙어리 삼룡이」는 1929년에는 나운규 감독이, 1964년에 신상옥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상영하여 많은 인기를 얻었다. 나도향은 서울에서 태어나고 사망했지만 청파동의 생가터나 남대문 근방의 사망시까지 머물렀던 가옥은 물론이고, 이태원에 있었던 묘지마저도 개발로 인해 현재에는 남아있지 않다. 나도향이 다녔던 배재고등보통학교, 현 배재고등학교에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전라북도 군산시를 대표하는 작가로 채만식이 있다. 대표작인 『탁류』의 배경이 군산과 그 일대다. 채만식은 1902년 6월 17일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에서 출생했다.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을 중퇴했다. 사립학교 교원, 『동아일보』 기자, 개벽사 편집자,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1924년 『조선문단』에 발표된 단편 「세 길로」로 등단하여 290여 편에 이르는 소설과 희곡, 평론, 수필을 썼다. 1936년부터는 전업 작가로 활동하다 1945년 낙향하여 1950년 익산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레디메이드 인생」(1934)으로 풍자 작가로서의 면모를 획득했다.
이 시기 카프 제2차 검거사건으로 2년간 문필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치숙』(1938), 『탁류」』(1937~1938), 『태평천하』(1938) 등의 대표작이 있다. 식민지 현실의 반영과 비판, 풍자가 채만식 작품 세계의 특징이다. 1942년부터 친일활동에 참여했다.
광복 후 자기 반성의 마음을 담은 중편소설 『민족의 죄인』을 발표했다. 1984년 월명공원에 문학비, 1996년 채만식소설비, 2002년 소설비가 건립되었고, 2001년 채만식문학관이 개관했다. 채만식은 『탁류』에 금강과 군산을 담고 있다.
금강······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동께서 남북으로 납작하니 째져가지고는-한강이나 영산강도 그렇기는 하지만-그것이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번 비행기라도 타고 강줄기를 따라가면서 내려다보면 또한 그럼직할 것이다. 저 준험한 소백산맥이 제주도를 건너보고 뜀을 뛸 듯이, 전라도의 뒷덜미를 급하게 달리다가 우뚝······ 또 한번 우뚝 ······ 높이 솟구친 갈재와 지리산, 두 산의 산협 물을 받아가지고 장수로, 진안으로, 무주로 이렇게 역류하는 게 금강의 남쪽 줄기다. 그놈이 영동 근처에서 다시 추풍령과 속리산의 물까지 받으면서 서북으로 좌향을 돌려 충청좌우도의 접경을 흘러간다. (중략)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 흥망의 꿈 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한창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 옳게 금강이다. (중략)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탁류』, 문학과지성사, 2014, 7-9면
급하게 경사진 언덕 비탈에 게딱지 같은 초가집이며 낡은 생철집 오막살이들이, 손바닥만 한 빈틈도 남기지 않고 콩나물 길 듯 주어 박힌 동네 모양새에서 생긴 이름인지, 이 개복동서 그 너머 둔뱀이로 넘어가는 고개를 콩나물고개라고 하는데, 실없이 제격에 맞는 이름이다. 개복동, 구복동, 둔뱀이, 그리고 이편으로 뚝 떨어져 정거장 뒤에 있는 ‘스래’, 이러한 몇 곳이 군산의 인구 칠만 명 가운데 육만도 넘는 조선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어깨를 비비면서 옴닥옴닥 모여 사는 곳이다. 면적으로 치면 군산부의 몇십분지일도 못 되는 땅이다. 그뿐 아니라 정리된 시구라든지, 근대식 건물로든지, 사회시설이나 위생시설로든지, 제법 문화도시의 모습을 차리고 있는 본정통이나 정주통이나 공원 및 일대나, 또 넌지시 월명산 아래로 자리를 잡고 있는 주택지대나, 이런 데다가 빗대면 개복동이니 둔뱀이니 하는 곳은 한 세기나 뒤떨어져 보인다.
『탁류』, 문학과지성사, 2014, 26면
채만식은 금강과 군산을 배경으로 "초봉"이라는 주인공의 험난한 일생을 통해 당시 세태를 치밀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당시 군산은 일본인들이 이주하여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하는 항구로 사용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쌀 뿐만 아니라 호남평야의 비옥한 땅들을 빼앗았다. 이 때문에 당시 많은 조선인들이 빈곤한 처지가 되어 군산의 조선인들은 낙후되고 비좁은 동네에서 모여살 수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어려운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타지를 떠돌았다. 채만식은 이러한 군산을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하여 식민지 치하 조선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재현하고 일본의 만행을 비판했다.
전라북도 군산시 월명공원 안에 문학비가 있다. 『탁류』의 배경인 군산과 금강을 바라보고 있는 곳이다. 소설비는 전라북도 군산시 장미동 구조선은행 건물 옆에 세워져 있다. 『탁류』의 공간인 미두장이 있는 미두의 거리다. 미두장의 실제 명칭은 군산미곡취인소로 미곡시세를 놓고 거래하는 일종의 도박장으로 일본이 자본 침탈을 위해 만들었다. 묘소는 고향인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군 임피면 축산리 계남마을에 있다. 전라북도 군산시에는 채만식의 삶과 작품세계를 기리는 채만식 문학관이 있다.
전라남도 순천시의 작가로 김승옥이 있다.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1945년 귀국하여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성장했다. 순천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1962년 단편 「생명연습」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같은 해 김현, 최하림 등과 동인지 『산문시대』를 창간, 「건」, 「환상수첩」 등을 발표했다. 이후 1960년대에 1950년대 한국문학의 경향과는 다른 다수의 단편소설을 창작하며 한국문학사에서 196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기성세대의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욕망, 개인적 감수성을 감각적인 문체에 담아 소설적 완결성을 획득한 작품을 발표,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김승옥을 위시한 당시 1960년대 등장한 작가들을 4.19혁명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세대, 4.19세대로 일컬어진다. 「역사」,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60년대식」, 「다산성」, 「야행」, 「강변부인」 「서울의 달빛 0장」 등을 발표했다.
1967년 김동인의 「감자」를 영화화하면서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시나리오 작업에 열중하여 「장군의 수염」, 「영자의 전성시대」, 「내일은 진실」 등을 각색했다. 샘터사, 세종대학교에 재직했다. 1980년 동아일보에 『먼지의 방』을 연재하던 중 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자진 중단하고 1981년부터 신앙생활에 몰두하면서 소설을 쓰지 않았다.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했다. 동인문학상(1965), 이상문학상(1977), 대한민국예술원상(2012) 등을 수상했다. 김승옥은 대표작인 「무진기행」에 전라남도 순천시의 풍광은 담았다. 「무진기행」은 1964년 『사상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항구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럴 조건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심이 얕은 데다가 그런 얕은 바다를 몇백 리나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럼 역시 농촌이군요?” “그렇지만 이렇다 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 오륙만이 되는 인구가 어떻게들 살아가나요?”
“그러니까 그럭저럭이란 말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그들은 점잖게 소리내어 웃었다.
“원, 아무리 그렇지만 한 고장에 명산물 하나쯤은 있어야지.” 웃음 끝에 한 사람이 말하고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김승옥, 「무진기행」, 『김승옥소설전집1』, 문학동네, 1995, 126면
김승옥에게 안개로 둘러싸인 순천은 내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근원적인 공간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일상의 공간인 ‘서울’과 고향인 ‘무진’을 오가면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한다. 김승옥의 고향인 전라남도 순천시의 순천문학관 내에 김승옥관이 있어 김승옥의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다. 매년 김승옥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김승옥에게 안개로 둘러싸인 순천은 내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근원적인 공간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일상의 공간인 ‘서울’과 고향인 ‘무진’을 오가면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한다. 전라남도 순천시에는 순천과 인연이 깊은 작가들을 기리는 순천문학관 내에 김승옥관이 있어 김승옥의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다.
대구광역시의 작가로 현진건이 있다. 현진건은 1900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1915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일본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수학했다. 1917년 귀국하여 대구에서 백기만, 이상화 등과 습작 동인지 『거화』를 발간했다. 같은 해 도쿄 세이조 중학교에 편입, 다음 해 중국 상하이 후장 대학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했다가 1919년 귀국하여 서울에서 살았다. 1920년 문예지 『개벽』에 「희생화」를 개재하면서 소설가로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백조』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1921년 1월 『개벽』에 단편소설 「빈처」를 발표하여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기행문과 번안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동명사, 시대일보사, 동아일보사에서 근무했다. 동아일보 손기정 선수 사진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인해 1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현진건은 작품 속에서 식민지 현실 속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했다. 작품 활동 후반기에는 역사소설을 창작했다. 민족의식이 드러난 작품 활동으로 1940년 『흑치상지』의 동아일보 연재가 중단되었으며 단편집 『조선의 얼굴』은 금서가 되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사업이 파산하여 빈곤을 겪다 1943년에 지병인 폐결핵과 장결핵으로 별세했다.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 장르와 사실주의를 개척한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단편 「빈처」(1921), 「술 권하는 사회」(1921), 「타락자」(1922), 「할머니의 죽음」(1923), 「운수 좋은 날」(1924), 「불」(1925), 「B사감과 러브레타」(1925), 「사립정신병원장」(1926), 「고향」(1926)과 장편 『적도』(1933~1934), 『무영탑』(1938~1939) 등이 있다.
현진건은 「희생화」에서 대구 사투리를 사용하고 「고향」에서 당시 대구의 실정을 생생하게 담으면서 당시 일제의 침략과 수탈로 척박해진 조선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그의 고향은 대구에서 멀지 않은 K군 H란 외딴 동리였다. 한 백 호 남짓한 그곳 주민은 전부가 역둔토를 파먹고 살았는데, 역둔토로 말하면 사삿집 땅을 부치는 것보다 떨어지는 것이 후하였다. 그러므로 넉넉지는 못할망정 평화로운 농촌으로 남부럽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뒤바뀌자 그 땅은 전부 동양척식회사의 소유에 들어가고 말았다. 직접으로 회사에 소작료를 바치게 되었으면 그래도 나으련만 소위 중간 소작인이란 것이 생겨나서 저는 손에 흙 한 번 만져보지도 않고 동척엔 소작인 노릇을 하며, 실지인에게는 지주 행세를 하게 되었다. 동척에 소작료를 물고 나서 또 중간 소작료인에게 긁히고 보니, 실작인의 손에는 소출이 삼 할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후로 ‘죽겠다’ ‘못 살겠다’ 하는 소리는 중이 염불하듯 그들의 입길에서 오르내리게 되었다. 남부여대하고 타처로 유리하는 사람만 늘고 동리는 점점 쇠진해갔다.
(중략)
돈을 모을래야 모을 수 없고 이따금 울화만 치받치기 때문에 한곳에 주접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화도 나고 고국산천이 그립기도 하여서 훌쩍 뛰어나왔다가 오래간만에 고향을 둘러보고 벌이를 구할 겸 구경도 할 겸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라 한다. “고향에 가시니 반가워하는 사람이 있습디까?” 나는 탄식하였다. “반가워하는 사람이 다 뭔기오? 고향이 통 없어졌더마.” “그렇겠지요. 구 년 동안이면 퍽 변했겠지요.” “변하고 무어고 간에 아무것도 없더마. 집도 없고, 사람도 없고, 개 한 마리도 얼씬을 않더마.” “그러면, 아주 폐농이 되었단 말씀이오?” “흥, 그렇구마. 무너지다 만 담만 즐비하게 남았더마. 우리 살던 집도 터야 안 남았겠는기오? 암만 찾아도 못 찾겠더마. 사람 살던 동리가 그렇게 된 것을 혹 구경했는기오?” 하고 그의 짜는 듯한 목은 높아졌다. “썩어 넘어진 서까래, 뚤뚤 구르는 주추는! 꼭 무덤을 파서 해골을 헐어 젖혀놓은 것 같더마.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기오? 백여 호 살던 동리가 십 년이 못 되어 통 없어지는 수도 있는기오? 후!” 하고 그는 한숨을 쉬며, 그때의 광경을 눈앞에 그리는 듯이 멀거니 먼 산을 보다가 내가 따라 준 술을 꿀꺽 들이켜고, “참! 가슴이 터지더마, 가슴이 터져” 하자마자 굵직한 눈물 두어 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그 눈물 가운데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을 똑똑히 본 듯 싶었다.
현진건, 「고향」, 『운수 좋은 날』, 문학과지성사, 2008, 209~212면
대구광역시에는 대구 출신의 문인들을 기리는 대구문학관이 있으며, 이곳에서 현진건의 삶과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다. 현진건이 1937년에서 1943년까지 살았던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는 현진건 집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김동리는 1913년 경상북도 경주 성건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시종이다. ‘동리’는 호로 큰 형인 동양철학자 김기봉이 지어준 것이다.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 계통의 학교인 경주 계남소학교와 대구 계성중학교, 서울 경신중학교에서 수학했다. 큰 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김동리는 학교를 중퇴하고 동양철학과 고전을 독학했다.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 입선, 1935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화랑의 후예」 당선,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산화」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편 「무녀도」(중앙, 1936.5.), 「바위」(신동아, 1936.5.) 등으로 당시 문단에서 주목을 받았다.
서정주,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과 함께 『시인부락』(1937)을 결성했다.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1946년 초대 회장이 되었다. 순수문학, 본격문학, 인간주의 문학을 주창했다. 사회 참여와 공리성을 부정하고 인간 본질을 탐구하는 문학을 지향했다. 향토적인 소재를 ‘생의 구경적 탐구’로 형상화하여 민족문학의 전통을 정립하고 확대했다.
김동리 작품의 철학적 기반은 방대하여, 한국에 토착화한 샤머니즘과 불교를 비롯한 동양철학,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보여준다. 주요 작품으로는 「역마」(1948), 「등신불」(1961), 「까치소리」(1966) 등의 단편소설, 『무녀도』(1947), 『황토기』(1949), 『실존무』(1955), 『등신불』(1963), 『바위』(1973), 『밀다원시대』(1975) 등의 단편집, 『문학과 인간』(1948), 『소설작법』(공저, 1965), 『고독과 인생』(1977), 『문학이란 무엇인가』(1984) 등의 평론집, 『바위』(1973) 등의 시집과 『자연과 인생』(1977), 『사색과 인생』(1973) 등의 수필집이 있다. 김동리의 소설은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있어서 1960~70년대에는 「역마」, 「무녀도」, 「극락조」, 「을화」, 「황토기」 등이 영화로 제작되었고, 1980년대에는 「등신불」이 드라마로 제작되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김동리는 서라벌예술대학, 중앙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한국문인협회 회장, 예술원 회장, 한국소설가협회 회장, 한일문화교류협회장 등을 역임하며 당시 한국 문단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1968년 『월간문학』, 1973년에는 『한국문학』을 창간했다. 아세아자유문학상, 예술원 문학부문 작품상, 3.1문화상 예술부문 본상, 서울시문화상 문학부문 본상, 5.16민족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국민훈장동백장과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여 받았다. 1990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다 1995년 81세로 사망했다.
김동리의 작품 대부분은 고향인 경상북도 경주를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무녀도」, 「황토기」, 「선도산」, 「허돌풀레」, 「유혼설」, 「을화」, 「까치소리」, 「바위」 등과 『회소곡』, 『기파랑』,『최치원』, 『수로부인』, 『우륵』, 『장보고』, 『원왕생가』, 『대왕암』, 『솔거』 등에서 경주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경주는 김동리가 기독교와 동양철학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던 곳이면서 민족적이고 토속적인 정서가 충만한 고장으로 김동리가 추구한 민족문학의 배경지로 가장 적당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에 김동리는 자전적 소설인 「선도산」에서 “…… 경주란 데는 산에서나 물에서나 들에서나 수풀에서나, 그리고 언제 어디서고, 여러분들이 진실로 구하고 원한다면 시와 소설과 그림과 음악이 물 솟듯 푹푹 솟아나는 고장입니다……”(김동리, 『김동리전집3: 등신불, 까치소리』, 「선도산」, 민음사, 1995, 427면)라고 주장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406-3(진현동 550-1)에 동리목월문학관이 있다.
김말봉은 1901년 4월 3일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서 출생했다. 부산 일신여학교(현 동래여자고등학교)를 수료하고 1918년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했다. 황해도 재령의 명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7년 귀국하여 중외일보 기자로 일했다. 1932년 단편소설 「망명녀」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이 때는 보옥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는데, 다른 작품들에서는 노초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1935년 『동아일보』에 『밀림』, 1937년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연재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일본어로 창작 활동을 하고 싶지 않아 광복까지 절필했다가 광복 후 1945년 서울에서 「카인의 시장」과 「화려한 지옥」 등을 발표했다. 공창폐지운동을 주도했고 사회복지시설인 박애원을 경영했다. 1949년 하와이 시찰여행을 다녀왔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부산으로 피난 온 문인들을 도왔다. 1952년 베니스 세계예술가대회에 참석했다. 1954년 우리나라 기독교 최초의 여성 장로가 되었다. 한국 예술원 위원과 한국 문학가 협회 대표위원이었다.
소설집 『화려한 지옥』(1945), 『별들의 고향』(1950), 『생명』(1957), 『이브의 후예』(1960), 『바람의 향연』(1962)을 출간했으며, 『태양의 권속』(『서울신문』, 1952), 『파도에 부서지는 노래』(『희망』, 1952), 『새를 보라』(『영남일보』, 1953), 『바람의 향연』(『여성계』, 1953), 『푸른 날개』(『조선일보』, 1954), 『푸른 장미』(『국제신보』, 1957), 『화관의 계절』(『한국일보』, 1957), 『사슴』(『연합신문』, 1958), 『환희』(『조선일보』, 1958), 『제비야 오렴』(『부산일보』, 1959), 『장미의 고향』(『대구일보』, 1959), 『해바라기』(『연합신문』, 1959)등을 발표했다. 김말봉은 사위인 금수현의 가곡 「그네」의 가사를 썼다. 「그네」를 새긴 김말봉 문학비가 2009년 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세워졌다. 1961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김말봉은 애정을 주제로 사회 비판적 성격을 가진 작품을 많이 썼다. 김말봉의 대표작인 『찔레꽃』은 한국 멜로드라마의 원류로 평가받는다. 연인인 두 주인공, 청순하고 가련한 여학생과 가난하지만 재능 있는 청년이 현실의 고난을 극복해가는 서사 구조는 통속소설의 서사 유형으로 자리 잡게 된다. 김말봉은 사회 비판 의식을 작품 속에 담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실천에 옮겼다. 김말봉은 「화려한 지옥」에 공창 폐지의 필요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았다.
인신매매 금지령이 포고되자 유곽에 팔려 왔던 여인들은 자유의 몸이 되어 거리로 나왔지요. 그러나 그들이 갑자기 어디로 가겠어요. 그날 밤부터 재워주는 곳도 먹여주는 사람도 없는 형편이었어요.(중략) 전과 마찬가지로 여인들은 빚을 얻어 쓰고 포주는 여인을 착취하고……유곽은 훌륭히 부활을 하였지요. 공창 폐지 연맹이 조직된 원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공창을 폐지하자 그러나 공창을 근본적으로 구원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자는데 우리 연맹의 목적이 있는 거야요.
-김말봉, 「화려한 지옥」, 『김말봉전집4 가인의 시장/화려한 지옥』
공창 폐지의 사명은 횡으로 유곽의 여인들을 인도적으로 구원하자는 것과 또 종으로 민족 보건을 위하여 성병을 박멸하자는 민족의 보건 운동으로 볼 수 있고만요…… 공창 폐지 연맹이야말로 건국의 가장 초석적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말봉, 「화려한 지옥」, 『김말봉전집4 가인의 시장/화려한 지옥』
「화려한 지옥」에는 공창폐지연맹위원장인 “정민혜”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자전적 인물이다. 주인공 채옥은 정민혜를 통해 각성하고 공창폐지운동에 참여한다. 김말봉은 광복 직후 일제가 도입한 공창을 폐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1946년 8월에는 폐업공창구제연맹을 결성해 회장직을 맡았다. 공창 폐지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1946년 인신매매 금지령이 내려졌고, 1948년 2월 14일 공창제가 폐지되었다. 김말봉은 작품을 통해 당시 사회의 문제를 고발하고 기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삶을 살았다.
염상섭은 1897년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출생했다. 염상섭(廉想涉)의 본명은 상섭(尙燮)이며 호는 횡보(橫步)이다.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했고 교토부립중학을 졸업했다. 게이오 대학 사학과를 중퇴했다. 1919년 2월 8일 오사카 텐노지 공원에서 혼자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는데, 재오사카조선노동자대표라는 명의를 사용했다. 염상섭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투옥되고 자신을 변론하는 과정에서 일본 판사와 경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귀국 후 『동아일보』 기자가 된 데에는 그 영향이 있었다고 전한다. 1920년 『폐허』 동인에 가담했고 1921년 『개벽』에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담은 사실주의 소설들을 발표했다. 당시 문단의 두 흐름이었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중립적인 노선을 견지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동명』, 『시대일보』, 『매일신보』, 『경향신문』에서 일했다. 1936년 만주로 건너가 『만선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활약했다. 한국전쟁 중 해군 소령으로 복무했다. 한국전쟁 이후 1954년에는 예술원회원에 선임되었고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다. 1955년 서라벌예대 초대학장을 지냈고 1956년 제3회 아세아자유문학상, 1957년 예술원공로상, 1962년 삼일문화상 예술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1963년 3월 14일 아침 성북동 자택에서 직장암으로 타계했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천주교 묘지에 있다. 「만세전」,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금반지」, 「고독」, 「두 파산」, 「일대의 유업」, 「짖지 않는 개」와 장편 『삼대』, 『취우』 등을 발표했다.
염상섭의 작품에는 염상섭의 고향이자 문학 활동의 주 무대였던 서울의 당시 모습이 사실적으로 재현되어 있다. 특히 당대의 표준어가 잘 나타나 있어 언어적 측면에서도 가치가 높다. 염상섭의 대표작인 『삼대』(1931년 『조선일보』 연재)는 식민지 시대 서울을 배경으로 한 중산층 집안에서 벌어지는 세대 갈등을 그리고 있다. 유교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갈등 상황이 현실적으로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덕기의 행보를 따라가다 보면 효자동, 당주동, 서대문, 홍파동, 충독부 도서관 등 당시 서울의 각지를 만날 수 있다. 당시 서울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소설이다. 『취우』(1952년 『조선일보』 연재)에는 한국 전쟁 중 폐허가 된 서울의 모습이 담겨 있다.
개도 짖을 줄을 잊은 공포의 도시, 죽음의 거리에 잔잔한 새벽 바람에 날아오는 그 괴물의 발자취는 폭포 소리와 같고 썰물이 밀려가는 소리와도 같다. 자갈이 깔린 땅을 육중한 찻바퀴가 으깨면서 달리는 듯한 그 잔인한 살육의 아우성에 제각기 닥쳐올 제 운명을 생각해 보기에 잠간은 얼이 빠졌다.
소설 속 주요 공간은 천연동, 재동, 혜화동, 필운동, 회현동이다. 1996년 문학의 해에 염상섭이 한국근대문학의 대표 인물로 선정되어,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묘광장에 횡보 염상섭의 상이 세워졌다. 이후 이 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교보문고 앞에 이전 설치되었다. 서울 삼청공원에는 작가 염상섭의 동상이 있다. 2012년부터 서울에서 염상섭을 기리는 염상섭 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부산광역시의 대표적인 작가는 김정한이다. 김정한은 1908년 경상남도 동래군(현 부산광역시 동래구)북면 남산리에서 출생했다. 호는 요산이다. 중앙고등보통학교, 동래고등보통학교, 도쿄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에서 수학했다. 1928년부터 대원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는데, 조선인교원동맹을 조직하려다가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었다. 1932년 양산농민봉기사건에 관련되어 투옥됐다. 1936년 「사하촌」이 『조선일보』 신촌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은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1940년 한국어교육이 금지되자 『동아일보』에서 근무,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되자 절필했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했고, 『민주신보』 논설위원, 부산중학교 교사, 부산대학교 교수였다. 5·16 직후에는 부산대학교 교수직에서 한동안 물러나 『부산일보』 상임논설위원으로 활약했다. 1966년 「모래톱이야기」를 시작으로 다시 작품 활동을 했다. 「사하촌」, 「옥심이」, 「항진」, 「기로」, 「낙일홍」, 「수라도」 등 현실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재현한 리얼리즘 소설을 발표했다. 한국문학상(1969), 문화예술상(1971), 은관문화훈장(1976), 심산상(1994)을 수상했다. 1996년 별세했다.
「모래톱이야기」에서 김정한은 부산의 한 섬을 그려낸다. 하단 포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면 닿을 수 있는 낙동강 하구의 작은 섬이다. 작품 속에서는 “조마이섬”이라고 지칭되는데,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일 가능성이 높다.
길가 수렁과 축축한 둑에는 빈틈없이 갈대가 우거져 있었다. 쑥쑥 보기 좋게 순과 잎을 뽑아 올리는, 갈대청은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과는 판이하게 하늘과 땅과 계절의 혜택을 흐뭇이 받고 있는 듯, 한결 싱싱해 보였다. (중략) 길바닥까지 몰려나온 갈게들이, 둔탁한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이리저리 황급히 구멍을 찾아 흩어지는가 하면, 어느 하늘에선지 종달새가 재잘재잘 쉴 새 없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중략) 섬의 생김새가 길쭉한 주머니와 같다 해서 조마이섬이라고 불려온다는 건우의 고장에는, 보리가 거의 자랄 대로 자라 있었다. 강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푸른 물결이 제법 넘실거리곤 했다.
「모래톱 이야기」, 『김정한전집3』, 작가마을, 2008, 15~16면
김정한은 싱싱하게 자란 갈대청과 다르게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하늘과 땅과 계절의 혜택”을 받지 못했음에 주목했다.
우리 조마이섬 사람들은 지 땅이 없는 사람들이요. 와 처음부터 없기싸없었겠소마는 죄다 뺏기고 말았지요. 옛적부터 이 고장 사람들이 젖줄같이 믿어 오는 낙동강 물이 맨들어 준 우리 조마이섬은-” 건우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개탄조로 나왔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땅, 자기들 것이라고 믿어 오던 땅이, 자기들이 겨우 철 들락말락할 무렵에 별안간 왜놈의 동척 명의로 둔갑을 했더란 것이었다. (중략) 건우 할아버지는, 그렇게 해서 다시 국회의원, 다음은 하천부지의 매립허가를 얻은 유력자…… 이런 식으로 소유자가 둔갑되어간 사연들을 죽 들먹거리더니, “이 꼴이 대고 보니 선조 때부터 둑을 맨들고 물과 싸와가며 살아온 우리들은 대관절 우찌 대능기요?” 그의 꺽꺽한 목소리에는, 건우가 지각을 하고 꾸중을 듣던 날, “나릿배 통학생임더!”하던 때의 그 무엇인가를 저주하듯 한 감정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그들의 땅에 대한 원한이 컸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모래톱 이야기」, 『김정한전집3』, 작가마을, 2008, 25~26면
김정한에게 조마이섬은 “둑을 맨들고 물과 싸와가며 살아온” 사람들이 지키고 가꾸어온 땅으로 치열한 삶의 공간이자 고향이다. 김정한은 그러한 공간을 빼앗긴 섬 사람들의 애환을 통해 현실의 모순을 비판한다. 「모래톱이야기」는 주체적으로 자각하여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는 민중의 모습을 담은 소설로서 문학사적 의의를 가진다. 부산광역시 금정구에 김정환의 생가와 요산문학관이 있다. 매년 요산문학축전이 열리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김정한의 작품과 삶을 기리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은 1435년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1439년(세종 21), 70세의 노정승 허조가 5세의 신동을 시험하러 찾아왔다. 허조가 ‘늙을 노(老)자’를 이용해 시를 지어달라고 하자, 김시습은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은 것이다(老木開花心不老)’라는 시구를 읊어 허조를 감탄하게 했다. 세종도 김시습을 불러 시험해 본 후 감탄하여 비단을 선사했는데, 어린 김시습이 묘안을 내어 무거운 비단을 자신의 힘으로 다 가져갔다. 비단 50필을 풀어 서로 엮은 뒤 허리춤에 묶고 끌고 나갔다. 성균관 근처에 살아서 김시습의 이웃에는 이름난 학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덕분에 김시습은 13세까지 대사성을 지낸 김반, 겸사성 윤상에게서 성리학 경전을 배웠다.
김시습은 15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후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승려가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을 방랑했다. 이 때문에 생육신(生六臣)으로 불린다.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후지를 썼다.
1465년(세조 11)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했다. 이곳에서 2년 후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6∼7년 후 상경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김시습은 승려로서 명성이 높았으나 원효를 본받아 절에만 있지 않고 직접 농사일을 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며 불교에서 얻은 깨달음을 삶에서 실천하고자 했다. 1481년(성종 12)에 환속했으나, 1483년 다시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59세(성종 14년)에 충청남도 부여의 무량사에서 죽었다. 무량사에는 그의 부도가 남아 있다.
김시습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한 기행들이 유명하다. 영의정의 행차를 가로막으며 욕을 하거나, 벼슬을 하는 친구가 찾아오면 방에 누워서 벽에 발을 대고 맞거나, 세조가 불교 행사에 부르자 참석하지 않기 위해 분뇨 구덩이에 일부러 빠졌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한다. 김시습은 그 절개와 함께 유교와 불교 사상을 담은 탁월한 문장의 시와 소설과 글로 당대는 물론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고 있다.
김시습의 수많은 작품들은 이세인, 이자, 윤춘년 등이 정리하여 간행했다. 1582년(선조 15)에는 왕명으로 김시습의 유고를 정리하고 이이(李珥)가 전기를 지은 『매월당집(梅月堂集)』이 간행되었다. 김시습의 불교 관련 저술로는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묘법연화경별찬(妙法蓮華經別讚))』이 전한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의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김시습의 본관은 강릉이다.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의 경포도립공원 내에 매월당김시습기념관이 있다. 김시습의 일대기를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와 『금오신화』 애니메이션, 매월당 문집 영상, 김육이 쓴 『기묘록』과 1796년 목판본으로 인쇄된 『장릉 사보』, 1800년대 쓴 것으로 추정되는 『동학사지』 등을 관람할 수 있다. 김시습의 사당도 있다.
소설가 박태원은 1910년 1월 17일 청계천 광교 옆 다옥정 7번지에서 태어났다.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0년 일본 호세이대학 예과에 입학, 중퇴했다. 경성고보 3학년 때인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이 가작으로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단편 「적멸」(1930), 「수염」(1930),「꿈」(1930) 등을 발표하면서 소설 창작에 주력했다. 1933년 구인회에 가입했다.
단편 「사흘 굶은 봄 달」, 「피로」, 「오월의 훈풍」 등과 장편 『반년간』을 발표했다. 중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골목안」(1939), 장편 「천변풍경」(1936~1937), 「여인성장」(1941~1942)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작품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8), 「여인성장」(1942), 장편 「천변풍경」(1938) 등을 간행했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고 단편 「춘보」(1946), 장편 「임진왜란」(1949), 「군상」(1949~1950) 등을 발표했다.
한국전쟁 중에 월북하여 북한에서 역사소설 「계명산천은 밝았느냐」(1963~1964), 「갑오농민전쟁」(1977~1984)을 집필하였다. 「갑오농민전쟁」은 북한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1986년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박태원은 초기 구인회와 함께 소설의 문장과 기법에 주력한 모더니즘 경향의 작품을 발표했다가 「천변풍경」을 전후로 자신의 체험을 기반으로 쓴 세태소설과 역사소설을 창작했다.
박태원에게 서울은 고향이자 삶의 장소이며 문학적 공간이었다. 박태원의 많은 소설들은 서울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박태원의 대표작이자 자전적 소설인 「구보씨의 일일」에서 구보는 1930년대 식민지 경성의 광교와 종각, 화신상회, 청진동, 광화문통, 경성부청(서울시청), 남대문, 경성역(서울역)을 지나며 별다른 일 없는 하루를 보낸다. 「구보씨의 일일」은 서울의 모습을 통해 식민지 치하에서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당시 지식인들의 모습을 비춘다. 「천변풍경」에도 당시 서울의 또다른 모습이 담겨 있다. 「천변풍경」은 돈을 벌기 위해 가난한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당시의 청계천변을 조망한다.
자정이나 되어 천변에는 행인이 드물다. 이따금 기생을 태운 인력거가 지나고, 술 취한 이의 비틀걸음이 주위의 정적을 깨뜨릴뿐, 이미 늦은 길거리에, 집집이 문들은 굳게 잠겨 있다. 다만, 광교 모퉁이, 종로 은방 이 층에, 수일 전에 새로 생긴 동아 구락부라는 다맛집과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난 뒤, 점 안을 치우기에 바쁜 이발소와, 그리고 때를 만난 평화 카페가 잠자지 않고 있을 뿐으로, 더욱이 한약국 집 함석 빈지는 외등 하나 달지 않은 처마 밑에 우중충하고 또 언짢게 쓸쓸하다.
-박태원, 「천변풍경」, 문학과지성사, 2005, 108면
「천변풍경」 속에서 서울은 고달픈 서민들의 삶의 공간이다. 박태원의 소설은 뚜렷한 주제의식이 나타나지 않고 객관적인 묘사만 등장하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형식의 서사여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2007년 박태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문학제와 기념전시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소설가 백신애는 1908년 5월 경북 영천시 창구동 68번지에서 태어났다. 1923년 영천공립보통학교, 1924년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했다. 졸업생 중 여성은 백신애 한 명이었다. 영천공립보통학교와 자인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일했다. 1925년 조선여성동우회와 경성여성청년동맹에 가입하여 강연을 하는 등 활동했는데, 좌익성향 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해임을 당했다. 이후 백신애는 여성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경성여성청년동맹간부로 활약했다.
1927년 백신애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왔다. 러시아에서 일본 경찰에게 밀정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박계화라는 필명으로 쓴 「나의 어머니」가 당선되었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조성희라는 예명으로『모던 마담』에 출연, 영화배우로 활동했다.
1934년 단편 「꺼래이」를 『신여성』 1월호와 2,3월 합본호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6월 『신여성』에 시 「붉은 신호등」, 7월 『오사카매일신문』 조선판에 산문 「인텔리 여성의 집」, 11월 『개벽』,속간호에 「적빈」을 발표했다. 1935년 『소년중앙』1월호에 소년소설 「멀리 간 동무」, 5월 동인지『문원』2집에 산문 「초화」를 실었다. 1938년 단편소설 「광인수기」, 「소독부」, 「일여인」과 「어느 유언초」, 「봄 햇살을 맞으며」, 「나의 시베리아 방랑기」, 「청도기행」, 「혼명에서」를 발표했다. 1938년 6월 23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백신애의 작품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가난으로 고통 받았던 당시 조선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꺼래이」에는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었던 당시 조선인들의 실상이 담겨있다. 주인공 순이는 가족들과 국경을 넘다 군인들에게 잡혀서 감금되는데 그 곳에서 같은 처지의 조선 사람들을 만난다.
방안의 사람들은 모두 세 집 식구로 나누어 있는데 도합 열아홉이었습니다. 늙은이, 노파, 젊은 부부, 총각, 처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순이 모녀를 붙들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 함경도 사람들이며, 고국에는 바늘 한 개 꽂을 만한 자기들 소유의 토지라고는 없는 신세라 공으로 넓은 땅을 떼어 농사하라고 준다는 그 나라로 찾아온 것이었는데 국경을 넘어서자 ×××에게 붙들려 순이들처럼, 감금을 당했다가 이리로 끌려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는 돈 없는 사람 살기 좋다고 해서 이렇게 남부여대로 와놓고 보니 이 지경입꾸마. 굶으나 죽으나, 고국에 있었다면 이런 고생은 안 할 것을…….” 젊은 여인 하나가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우리는 몇 번이나 재판을 했으니 또 한 번만 더하면 놓이게 되어 땅을 얻어 농사를 하게 되든지 다시 이대로 국경으로 쫓아내든지 한답데.” 속옷을 풀어 제치고 이를 잡기 시작한 노파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죄일꼬…… 농사짓는 땅을 공띠어준다길래 왔지…….” 늙은이 하나가 끙끙 앓으며 이를 갈 듯이 말하자 “참말 그저 땅을 띠어준답두마, 우리는 바로 국경에서 붙들렸으까 ××탐정꾼들인가 해서 이렇게 가두어 둔 거지!”
결국 순이와 가족들은 춥고 황량한 시베리아 벌판으로 추방되고 할아버지는 길에서 숨을 거둔다. 백신애는 러시아에서 목도했던 조선인들의 비극적인 상황을 서사화하고 식민지 현실에 대한 저항 의식을 표출했다.
백신애가 태어난 경상북도 영천시 창구동에는 출생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며 ‘백신애 길’도 있다. 2008년 백신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영천 시민운동장 입구에 문학비가 건립되었고 이후 시립도서관 공원 마당으로 이전하여 설치되었다.
작가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1910년 9월 23일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에서 출생했다. 큰아버지가 자식이 없어서 3세 때부터 통인동 본가 큰아버지의 집에서 성장했다. 1917년 신명학교에 입학하여 구본웅을 동기생으로 만났고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21년 신명학교, 1926년 동광학교,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했다.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면서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 표지도안 현상모집에도 당선되었다. 1930년 『조선』에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면서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31년 일문시(日文詩)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의 유희」, 「공복」, 「삼차각설계도」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다.
1933년에는 건강상의 문제로 직장을 그만두고 종로에서 다방 ‘제비’를 차려 경영했다.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윤태영, 조용만 등이 다방에 출입하여 교류했다. 1933년 『가톨릭청년』에 시 「1933년 6월 1일」, 「꽃나무」, 「이런 시」, 「거울」, 1934년 『월간매신』에 「보통기념」, 「지팽이 역사」, 『조선중앙일보』에 국문시 「오감도」 등 다수의 시작품을 발표했다. 「오감도」는 새로움과 난해함으로 발표 당시 독자들의 항의로 연재가 중단되었다. 1934년 구인회에 가입했고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1일」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1935년 다방을 폐업하고 1936년 창문사에 취직했다가 퇴사했다. 「날개」(1936), 「지주회시」(1936), 「동해」(1937) 등의 소설도 발표했다. 「소영위제」(1934), 「정식」(1935), 「명경」(1936) 등의 시와 「봉별기」(1936), 「종생기」(1937) 등의 소설, 「권태」(1937), 「산촌여정」(1935) 등의 수필을 발표했다. 일본 동경에서 1937년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었다가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 『이상전집』 3권이 1966년에 간행되었다.
이상은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언어유희와 역설 등을 사용한 새롭고 난해한 이상의 문학 세계는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지적인 반응으로, 현실을 초월하여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러케뿐이모혓소.(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길은뚤닌골목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이상의 연작시 「오감도」의 첫 작품인 「시제 1호」다. 1934년 7월 24일 『조선중앙일보』에 게재되었다.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을 주제로 한다고 분석하긴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추출해낼 수 없어 해석에 대한 논쟁이 많다.
서울특별시 종로구는 이상의 삶과 문학이 나서 자란 곳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154-10번지에 이상을 기리기 위한 “이상의 집”이 건립되었다. ‘이상의 집’은 이상이 1910년부터 1933년까지 거주했던 집터의 일부에 세워졌다. “이상과의 대화”, “이상의 문학에 대한 지정토론회” 등 많은 사람들이 이상을 기억하고 이상의 예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신소설을 쓴 이해조는 1869년 2월 27일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신평리 121번지에서 출생했다. 이해조의 가문은 고종의 종친이었다. 어릴 적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1887년 19세에 초시에 합격했으며, 25, 6세 무렵에는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한시를 즐기던 유학자들의 모임)를 주관했다. 1901년에 양지아문(量地衙門)의 양무위원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이주한 후에는 임낭굴(현재 익선동), 와룡동, 도렴동 등지에서 살았다. 양지아문은 토지와 측량을 담당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곳으로 양무위원이 되려면 산술과 외국어에 능통해야 했다. 1903년 1월에는 중추원 의관으로 임용되었다가 곧 면직되었고 이후 관직은 수행하지 않았다. 관직 수행의 경험으로 이해조는 신학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05년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면직 후 낙연의숙(洛淵義塾) 교원으로 일하다가 1906년 아버지 이철용이 설립한 포천의 신야의숙(莘野義塾)에서 근무했다. 1907년 돈명의숙(敦明義塾)의 숙감(塾監)으로, 사실상 학교를 운영했는데 폐교되고 말았다. 1907년 양기탁, 주시경 등과 함께 광무사를 조직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고 1908년 애국계몽단체인 대한협회, 기호흥학회의 일원이 되었다. 1909년 기호흥학회 소속 기호학교의 겸임교감까지 맡았다.
1906년 한국 최초의 소년 잡지인 『소년한반도』에 한문 소설 「잠상태」를 연재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소년한반도』가 폐간한 이후 『황성신문』, 『제국신문』에 취직, 1907년 6월 5일부터 『제국신문』에 소설 「고목화」를 연재했고 1910년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화세계」, 「화의 혈」, 「옥중화」 등 여러 작품을 연재하면서 신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빈상설」(1907), 「홍도화」(1908), 「원앙도」(1909), 「만월대」(1910), 「쌍옥적」(1911), 「월하가인」(1911), 「모란병」(1911), 「소양정」(1912), 「춘외춘」(1912), 「탄금대」(1912), 「홍장군전」(1918) 등을 발표했다. 미신타파를 주장한 「구마검」(1908), 정치소설로 사회개혁의식을 담고 있는 「자유종」(1910), 동학봉기가 소재인 「화의 혈」(1912), 추리소설 「구의산」(1912) 등이 대표작이다.
이해조는 일본어를 독학하여 「철세계」(1908), 「화성돈전」(1908), 「앵속화 제조법」 등을 번역했고,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별주부전」을 현대적 소설로 개작하여 각각 「옥중화」, 「강상련」, 「연의 각」, 「토의 간」으로 발표했다.
이해조는 이인직과 함께 신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해조는 근대의식과 계몽주의를 구어체와 사실적 서술에 담아 고전소설과는 다른 새로운 근대 양식의 소설인 신소설을 창작했다. 당시 신소설이 큰 인기를 얻어 후기로 갈수록 흥미 위주의 소설을 창작하기는 했지만, 계몽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근대적 소설을 창작한 뛰어난 소설가였다. 뿐만 아니라 외국의 소설들을 번역하여 당시 사회에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1927년 포천 자택에서 병사했다.
이해조를 기리는 사업이 이해조의 고향인 경기도 포천군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2005년 ‘동농 이해조 선생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이해조 관련 세미나 및 특별 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2017년 '이해조소설문학상'을 제정하여 수여하고 있다.
강원도 춘천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김유정을 들 수 있다. 김유정은 1908년 2월 12일 춘천의 이름난 가문에서 출생했다. 1914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했는데 이후 부모를 잃어 형제와 친지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재동공립보통학교,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를 휴학했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는 고향인 춘천의 실레마을에 머물면서 금병의숙이라는 간이학교를 설립, 학생들을 가르쳤다.
1933년 단편 소설 「산골나그네」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시기 폐결핵이 발병했다. 1937년 사망까지 다수의 단편소설과 수필을 발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가난한 농민과 서민 등 하층민의 삶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향토색이 짙고 해학적이다. 현재 춘천에는 김유정의 삶과 작품세계를 기리는 김유정문학촌이 조성되어 있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호밖에 못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주위가 이렇게 시적이니만치 그들의 생활도 어디인가 시적이다. 어수룩하고 꾸물꾸물 일만하는 그들을 대하면 딴 세상을 보는 듯하다......그리고 산골에는 잔디도 좋다. 산비알에 포근히 깔린 잔디는 제물로 침대가 된다. 그 위에 바둑이와 같이 벌릉 자빠져서 묵상하는 재미도 좋다. 여길 보아도 저길 보아도 우뚝우뚝 섰는 모조리 푸른 산이매, 잡음 하나 들리지 않는다. 이 산속에 누워 생각하자면, 비로소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요히 느끼게 된다.
김유정의 아름다운 고향산천에 대한 사랑은 그의 글 곳곳에 나타난다. 김유정의 소설에도 그의 고향이 등장한다.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김유정의 대표작인 「동백꽃」에서 점순이와 ‘나’가 애정의 실랑이를 벌이는 공간이 바로 김유정의 고향마을이다. 김유정의 소설 중에서도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노다지」, 「산골」, 「동백꽃」, 「만무방」, 「금따는콩밭」, 「안해」, 「가을」, 「두포전」의 배경이 고향이라고 알려져 있다. 작품 속에 고향의 지명이 나오지는 않으나, 강원도라는 지명과 주변의 고장인 회양, 강릉, 홍천 등이 등장하고 있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김유정의 고향인 춘천의 한 마을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따사로운 햇발이 숲을 새어든다. 다람쥐가 솔방울을 떨어치며, 어여쁜 할미새는 앞에서 알씬거리고. 동리에서는 타작을 하느라고 와글거린다. 흥겨워 외치는 목성, 그걸 억누르고 공중에 응, 응, 진동하는 벼 터는 기계 소리. 맞은쪽 산속에서 어린 목동들의 노래는 처량히 울려온다. 산속에 묻힌 마을의 전경을 멀리 바라보다가 그는 눈을 찌긋하며 다시 한 번 하품을 뽑는다. 이 웬 놈의 하품일까. 생각해보니 어젯저녁부터 여태껏 창자가 곯렸던 것이다.
「만무방」에 나타난 산골 마을의 정경이다. 경치는 아름답지만, 그 곳의 사람들은 가난에 허덕인다. 가을이 되어 추수는 했으나 지주에게 빚을 갚고 나면 식량으로 먹을 쌀마저도 없기 때문이다. 김유정은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한 서사에서 당시 농촌이 겪는 가난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 김유정은 직접 고향으로 내려와 학교를 설립하는 등 농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활동들을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향토애는 빈곤한 하층민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어 김유정의 삶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친다.
현재 김유정의 고향인 춘천의 실레마을에는 김유정문학촌이 조성되어있다. 김유정문학촌에는 김유정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작품 속 공간을 재현한 산책로, 기념전시관, 기념물들이 있고 매해 각종 문학축제와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김유정과 그가 사랑했던 고향 춘천을 잊지 않고 찾아온다.
펄벅기념관은 부천이 전 세계에서 21번째로 유네스코 문화창의도시에 선정될 수 있도록 많은 기여를 한 곳이다. 사실 펄벅기념관이 부천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펄벅과 부천의 인연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녀의 생애를 알 필요가 있다.
펄벅(Pearl Buck 1892년 6월 26일 ~ 1973년 3월 6일)은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한 소설가이며 사회사업가이다. 펄벅은 태어나자마자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10여 년 간 어머니와 왕(王)노파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 후 대학교육(1910년~1914년)을 위해 미국에 머문 때를 제외하고, 1934년 미국에 정착하기 전까지 대부분을 중국에서 보냈다. 1917년 중국농업연구가 존 로싱 벅(John Lossing Buck 그녀의 필명은 여기서 온 것) 박사와 결혼했다. 그들 사이에는 두 딸이 있었는데, 첫딸은 극도의 정신지체아였다. 첫딸의 존재가 펄벅을 작가로 만든 중요 동기가 되었다. 『대지』에 등장하는 왕룽의 딸의 모델이 펄벅의 첫딸이라고 알려져 있다.
1927년 국민정부군이 난징을 공격했을 때, 온 가족이 몰살당할 위기를 겪으면서 펄벅은 중국과 서양간의 깊은 감정의 골을 자각한다. 그 후 그는 중국에서 자라나 중국을 사랑하는 미국인으로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한다.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첫 작품『동풍·서풍』의 성공에 힘입어, 빈농으로부터 입신하여 대지주가 되는 왕룽[王龍] 일가의 역사를 그린 3부작『대지』(1931)를 집필한다. 『대지』는 전세계로 출판되고, 영화화되면서 큰 성공은 거둔다. 그 작품으로 그녀는 퓰리쳐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펄벅은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에 애정을 가졌는데 우리나라도 그중 하나였다. 1960년 펄벅이 처음 한국을 방문한 이래 1969년까지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녀의 작품 중 『살아있는 갈대』(1963)는 6‧25 전쟁 후 한국의 수난사를 그린 작품이고,『새해』(1968)는 한국의 혼혈아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펄벅이 한국에 남기고 간 것이 소설 뿐만은 아니었다. 6‧25로 인한 전쟁고아와 혼혈아동들을 위해 1965년에 다문화 아동 복지기관 펄벅재단 한국지부를 설립했고, 1967년에는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로부터 유한양행 소사 공장의 일부를 기증받아 소사희망원을 세웠다. 소사희망원에는 2,000여 명의 아동들이 있었다. 펄벅은 한국을 방문할 때 마다 소사희망원에 2~3개월씩 머물면서 아이들을 손수 먹이고 입히고 씻기면서 시간을 보냈다.
소사희망원은 펄벅의 사망 이후 해체되었다가 2006년 펄벅기념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2001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부인 이희호 여사가 미국의 펄벅 인터내셔널(Pearl S. Buck International)로부터 ‘올해의 여성상’을 받으면서 부천시와 함께 옛 소사희망원 자리에 펄벅기념관을 설립한 것이다. 이것이 펄벅 기념관이 부천 소사구에 위치하게 된 이유이다.
지금은 당시 소사희망원 자리 대부분에 주택이 들어서 펄벅기념관은 작은 근린공원 같은 느낌이다. 기념관 정원 한쪽에 마련된 운동기구에서 운동을 하는 주민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펄벅 기념관 전시실 안에는 펄 벅의 생애와 그녀의 소설들에 대한 기록과 함께 집필한 각종 서적,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사용했던 가방을 포함한 개인 소지품 등 200점 이상의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전시물은 산수화인데, 펄벅이 돌봤던 1030명의 아이들이 펄벅의 80번째 생일에 선물한 것이다. 앞면에는 멋진 산수화가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당시 소사희망원 재원 어린이 1030명과 28명의 직원 이름이 적혀있다. 뒷면에 흐릿하게 한자한자 적혀있는 경숙, 미향, 상철, 철우, 마이크, 영훈 등의 이름들을 읽고 있자니, 1960년대 이곳에 머물렀던 아이들이 생각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부천시는 2019년 10월 5일부터 두 달간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펄벅 인터내셔널에서 ‘펄벅, 부천에 살다展(Pearl S. Buck’s legacy lives on in Bucheon.)’을 열었다. 전시회 오픈식에서 최의열 펄벅기념관장은 “단순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넘어 펄벅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한국의 모습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 기쁘며 소사희망원 1030 산수화 족자의 영구 임대를 통해 펄벅기념관의 내실화를 도모하고 앞으로도 펄벅의 유산이 우리 시에 널리 퍼질 수 있도록 콘텐츠 개발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전라북도 전주시의 작가로 최명희가 있다. 최명희는 1947년 음력 10월 10일 전라북도 전주시 화원동(현 풍남동)에서 출생했다. 전주 풍남초등학교, 전주사범학교 병설중학교,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영생대학(현 전주대학교) 야간부 가정과 2년을 수료하고 1970년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편입, 1972년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전국 단위의 각종 백일장에서 입상, 뛰어난 문재를 보였다.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서울보성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했다. 1980년 1월 1일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단편 「쓰러지는 빛」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최명희의 대표작은 대하 장편 소설 『혼불』이다.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2천만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혼불』(제1부)이 당선되었다. 1988년 9월, 월간 『신동아』에 『혼불』 제2부 연재를 시작, 1995년 10월까지 만 7년 2개월간 제5부까지 연재하면서 국내 월간지 사상 최장기 연재기록을 세웠다. 최명희는 약 17년간 『혼불』 집필에 전념했고 육필 원고가 원고지 12,000장에 달했다. 1996년 『혼불』이 전 5부, 10권으로 출간되었고 약 150만부가 팔렸다. 당시 최명희는 “이 작품은 아직 완간이 아니다. 작품의 시대 배경은 해방공간 이후 6‧25, 4‧19, 5‧16 등 가까운 현대사까지 이어져 한국사의 격동기를 그리게 될 것” 이며 “쓰면 쓸수록 이야기가 샘솟듯 흘러나와 20권이 될지 30권이 될지 짐작을 할 수가 없다” 고 밝혔다.
그러나 최명희는 더 이상 집필을 계속하지 못하고 1998년 12월 11일 별세했다. 『혼불』은 식민지 시기인 1930년부터 1943년까지 전라북도 남원의 매안마을을 배경으로 유서 깊은 양반가의 종부 3대와 빈민촌 사람들이 겪어내는 질곡의 세월에 관한 서사다. 당시의 우리말, 세시풍속, 관혼상제 등의 전통 문화를 섬세하고 예술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민속학적, 인류학적 가치도 큰 소설이다. 문학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인기도 크게 얻은 작품이다.
최명희는 『혼불』 외에도 「탈공」(『문학사상』, 1980), 「정옥이」(『한국문학』, 1980), 「이웃집 여자」(서울신문사, 1983), 『제망매가』(『전통문화』, 1985~1986) 등을 발표했다. 1997년 제11회 단재상, 제16회 세종문화상, 전북 예향대상을 받았다. 1998년 제15회 여성동아대상과 호암상, 2000년 옥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1997년 독자들이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을 발족했다. 1999년 12월 교보문고가 각 분야 전문가 100명에게 의뢰한 조사에서 『혼불』이 ‘90년대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2000년 혼불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최명희 묘역에 혼불문학공원을 조성했고, 2001년부터 혼불청년문학상과 혼불학술상을 수여했고 혼불문학제를 개최했다. 『혼불』의 배경 지역인 남원시는 2004년 10월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에 ‘혼불문학관’을 개관했고 전주시는 2006년 4월 최명희가 태어나서 자란 완산구 풍남동에 ‘최명희문학관’을 개관했다. 최명희 생가터에 표지석이 세워졌고 최명희문학관으로 이르는 길이 최명희길로 명명되었다.
서울특별시의 소설가로 한무숙이 있다. 한무숙은 1918년 10월 25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에서 출생했다. 호는 향정(香庭)이다. 1931년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했고, 1936년 부산고등여학교를 졸업했다. 1937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김말봉의 장편소설 『밀림』의 삽화를 그렸다. 1942년 『신시대』의 장편소설 공모에 『등불 드는 여인』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조선연극문화협회 희곡 모집에 1943년 단막극 『마음』, 1944년 사막극(四幕劇) 『서리꽃』이 당선되었다. 1948년 『국제신보』 장편소설 모집에 『역사는 흐른다』가 당선, 1949년부터 폐간된 『국제신보』 대신에 『태양신문』에 『역사는 흐른다』가 연재되었다. 1950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1956년 첫 창작집 『월운』 이후, 『감정이 있는 심연』(1957), 『축제와 운명의 장소』(1963), 『우리 사이 모든 것이』(1987) 등을 출간했다.
장편소설로는 『벗의 계단』(1959~1960), 『만남』(1984~1985) 등이 있다. 1992년 『한무숙문학전집』이 출간되었다.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한국중앙박물관회 이사,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 등을 지냈다. 자유문학상(1957), 신사임당상(1973), 대한민국문화훈장(1986), 대한민국문학상(1986), 3‧1문화상(1989), 대한민국예술원상(1991)을 수상했다. 미술 작업도 놓지 않아서 서화전을 여러 번 개최했다. 1993년 별세했다.
한무숙의 문학은 현실 속 인간의 고통과 갈등을 인간애를 담은 시선을 통해 재현하고 있다. 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인습과 한, 사랑과 윤리의 문제를 다룰 뿐만 아니라 4‧19혁명 등 한국현대사에 대해서도 통찰력을 보인다. 대표작은 『역사는 흐른다』로, 조선 말부터 식민지 시기를 거쳐 해방까지의 격동하는 시대 속의 한국 사회를 풍양 조씨 가문 삼대의 흥망과 하층계급 인물들의 성장을 통해 보여준다. 등장인물의 내적 갈등과 각 계층의 풍속사를 정밀하게 형상화해 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중들의 큰 인기를 얻어 드라마로도 각색되어 1989년 9월 3일부터 1990년 9월 9일까지 KBS 1TV에서 방영되었다.
한무숙이 별세한 1993년, 남편 김진흥이 한무숙의 삶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한무숙재단을 설립했다. 김진흥은 한무숙이 40년가량 거주했던 한옥을 문학관으로 개조하여 공개했다. 한무숙이 가꾼 건물과 정원을 한무숙 생존 시와 같이 보존하고 사진, 의상, 장신구, 생활용품, 가구, 그림, 출판물과 육필원고, 필기구 등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한무숙재단은 1995년부터 한무숙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1995년 조지워싱턴 대학(GW)내의 한국학에 관한 한무숙(HMS) 콜로퀴움을 설립했다. 매년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개최되고 있는 HMS 콜로퀴움에서는 국내외 석학들이 모여 한국의 예술, 역사, 언어, 문학, 사상 등을 세계의 문맥에서 토론하고 있다. 조지워싱턴 대학의 시거(Sigur) 아시아학 센터는 1998년부터 HMS 콜로퀴움을 지원하고 있으며 콜로퀴움의 권위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
충청북도 괴산군의 소설가로 홍명희가 있다. 벽초(碧初)라는 호가 잘 알려져 있다. 1888년 5월 23일 충청북도 괴산군 인산리에서 출생했다. 한학을 수학한 후 서울 중교의숙, 도쿄 타이세이중학을 졸업했다. 1910년 귀국 후 『소년』에 A 니에모예프스키의 산문시 「사랑」을 번역하여 소개하는 등 한국 근대 문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 삼재’라 불렸다. 1910년 8월 금산군수였던 아버지 홍범식이 경술국치에 항의하며 순국했다. 아버지의 죽음은 홍명희가 독립 운동에 투신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12년 상해 독립운동단체 동제사에 참여, 싱가포르 등지에서 활동하다 1918년 귀국했다. 3‧1운동 당시 괴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192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1925년 『시대일보』 사장, 1926년 오산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고, 신사상연구회, 화요회, 정우회, 조선사정조사연구회 등에서 활동했다.
1926년 『문예운동』에 프로문학의 역사적 필연성을 역설한 평론 「신흥문예의 운동」을 발표했다. 카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프로문학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1928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일보』와 『조광』에 대하장편역사소설 『임꺽정』을 연재하여 문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1927년 창립된 신간회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여러 번 옥고를 겪으면서도 독립 운동을 지속했던 홍명희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1942년경부터 해방 때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일체의 사회활동을 중단하고 은둔했다. 광복 후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47년 민족독립당 당수, 민족자주연맹 부의장으로서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중, 1948년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 참가차 평양에 갔다가 북한에 남았다. 1968년 3월 5일 사망했다.
홍명희의 대표작인 『임꺽정』에는 봉건제도에 대한 비판 의식이 담겨있다. 백정 출신 임꺽정의 활약상을 보여주면서 조선 시대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 대하장편소설은 서사의 길이도 특별히 장대했을 뿐만 아니라 민중성과 리얼리즘을 탁월하게 드러내고 있는 소설로 식민지 시기 대표적인 역사소설이자 한국문학사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역사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임꺽정』 연재는 홍명희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민중대회를 추진하다가 검거되면서 중단되었다가 1932년 출소한 후 다시 연재되기도 했다. 『임꺽정』은 13년 동안 연재되었다가 미완인 채로 집필이 중단되었고, 해방 후 10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임꺽정』은 조선 시대 여러 계층의 말이 풍부하게 채록되어 있어서 우리말 어휘의 보고라고도 불린다. 뿐만 아니라 “순 조선 것”을 쓰고자 했다는 홍명희의 의도대로 조선의 문장, 인물, 풍속 등 “순 조선 것”이 집대성되어 있다. 『임꺽정』은 일제에 저항하여 조선을 지키려 했던 홍명희의 문학적 대응이었다. 『임꺽정』은 해방 후 1948년 재출간되면서 다시 한 번 큰 인기를 얻었고, 1985년 재출간되면서 월북 이후 금기시 되었던 홍명희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하게 만들었다.
충청북도 괴산군은 홍명희의 민족의식과 문학적 감성을 키워준 곳이다.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에 있는 홍명희가 즐겨 찾던 제월대에 홍명희 문학비가 세워졌다. 제월리에는 홍명희가 거주했던 집의 일부가 남아 있다.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인산리의 생가도 복원되어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홍범식 가옥이자 홍명희 생가인 이 고택은 3‧1만세 운동의 본거지로서의 가치도 가지고 있다.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됐다. 충청북도 청주시와 괴산군에서는 1996년부터 홍명희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경상남도 창원시의 작가로 지하련이 있다. 본명은 이현욱이다. 지하련은 1912년 경상남도 거창에서 출생했고, 경상남도 마산(현 창원시)에서 성장했다. 1930년 동경소화고녀를 졸업, 1931년 동경경제전문학교를 수료했다. 1936년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임화와 결혼했다. 1940년 12월 단편소설 「결별」이 평론가 백철에 의해 『문장』에 추천, 게재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체향초」(『문장』, 1941.3), 「가을」(『조광』, 1941.11), 「산길」(『춘추』, 1942.3), 「도정」(『문학』, 1946.8), 「광나루」(『조선춘추』, 1947.12) 등을 발표했으며 1948년 작품집 『도정』을 출판했다. 현실에 맞선 등장인물의 내적 갈등을 섬세한 문체로 서사화했다. 결혼 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등 여성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고 1947년 월북했다. 1953년 임화가 처형된 이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하련은 창원에서 성장했고 1936년 결혼 후에도 창원에 거주했다. 지하련에게 창원은 삶과 사상과 문학의 장소였다. 지하련은 가족과 함께 상경했다가 1940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의 셋째 오빠 집으로 혼자 내려와 지병 치료와 요양을 했는데 이곳에서 등단작인 「결별」과 「체향초」 등을 집필했다. 지하련이 머물렀던 셋째 오빠의 집은 지하련 문학의 산실이었던 까닭에 ‘지하련 주택’이라 불린다. 지하련의 소설 「체향초」에는 산호리(산호동)에 대한 서술이 있다.
사흘 째 되든 날 아츰, 끝내 산호리(山湖里)로 옴기게 했든 것이다. (중략)
산호리는 조용해서 거처하기 가장 적당하다는, 이러한 것을 말슴 드린 후 (중략)
지금은 이렇게 시가지와 떠러진 산 밑에서 나무와 김생들을 기르고 날을 보내는 셈이다. (중략)
이제는 그의 다정한 고향 바다와, 산과 들을 생각할 때마다, 먼저 나무와 꽃이 욱어지고, 양과 도야지와 닭들이 살고 있는 양지바른 산호리, 그 축사(畜舍)와 같은 적은 집에 살고 있는 얼골 흰 오라버니를 잊을 수 없게 되었다.(중략)
또 삼히를 위해서 광선(光線)의 드라듦이 가장 알맞고 바다가 잘 보히고 하는 이러한 좋은 조건을 가진 방을 그에게 주었었다.
-「체향초」, 『지하련 전집』, 푸른사상, 2004, 112~113면
제목인 체향초(滯鄕抄)는 고향에 머물면서 겪은 일을 간단히 적은 글이라는 뜻이다. 주인공 삼히는 신병 치료 차 고향에 내려와서 전향한 사상가인 오빠가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일상을 보내는 것을 바라본다. 지하련의 처지가 그대로 반영된 소설이다. 소설 속 삼히의 오빠처럼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엄혹한 현실에 굴복해서 신념을 포기했다. 지하련의 오빠들과 남편인 임화도 그러했다. 「체향초」는 오빠들과 남편을 비롯한 당시 지식인들에게 보내는 지하련의 비판 어린 목소리다. 「체향초」는 지하련의 사상과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정이 담겨 있는 소설이다.
마산문학관에는 지하련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2015년 지하련 주택에 화재가 나면서 잊혀졌던 작가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빈 집으로 버려진 채 허물어져 가는 지하련 주택을 문학관으로 재생시키자는 목소리도 생겨났다. 지하련 주택은 일제 시대 목조 건축물이면서 식민지 시대 문학의 산실이었던 까닭에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심능숙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한 작가이다. 1782년에 태어나서 1840년 생을 마감하였다. 심능숙은 경기도 김포에 가문대대로 나라에서 받은 땅이 있어 주로 이곳에서 생애 전반을 보냈다. 본관은 청송이고, 자는 영수이며, 호는 소남이다. 심광세의 7세손이고, 아버지는 고부군수 심윤지이다. 광산 김씨와의 사이에서 1녀를 두었으며 광산 김씨가 죽자 전주 이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2남 1녀를 뒀다. 1829년에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 덕으로 벼슬을 얻어 감역이 되었다. 이후 1830년에 감찰(監察)·판관(判官)이 되고, 1832년부터 3년간인 1835년까지 태인현감을 지내기도 했다.
심능숙은 한문으로 지은 고전장편소설 『옥수기』의 저자이다. 고전소설의 대부분은 작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경우는 드문 경우라 하겠다. 『옥수기』는 한문장편소설로 4권 4책으로 되어 있다. 1888년(고종 25) 9권의 국문본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문학사적으로 『옥수기』는 서유영의 『육미당기』, 남영로의 『옥루몽』과 함께 당대 문인들이 가졌던 소설에 대한 관심을 살펴볼 수 있는 지표가 된다. 이뿐만 아니라 가문 소설의 국내 창작설에 대한 실제적인 증거 자료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옥수기』는 명나라를 배경으로 한 상층 귀족 영웅소설이다. 특권 사대부 계층과 나라에 공을 세우거나 큰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은 집안을 벌열이라고 하는데, 소설은 벌열과 세도 집단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내용을 살펴보면 가씨 가문을 중심으로 하여 ‘화·왕·진’씨 가문이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정치적으로 적대하기도, 갈등하기도 하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고난을 겪지만 도움을 받아 결국에는 성공하는 영웅의 일생기이며, 이는 당대 사대부의 완벽한 일생으로 볼 수 있다. 『옥수기』는 19세기 초 특권 사대부층의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당시 특권 사대부 계층과 벌열 집권에 대한 어느 정도의 비판을 보여주면서도 평민계층의 성장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옥수기』에는 도를 닦아서 인간 세상을 떠나 자연과 벗하여 늙지 않고 오래 사는 신선을 이상적인 인간으로 여기는 도가적 관점이 많이 보인다. 이로 인해 이 소설을 사대부적 세계관과 도선적 세계관이 조화되어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적 관점은 아니고 심능숙이 선가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심능숙의 선가에 대한 관심은 『옥수기』 뿐만 아니라 산문 『이은전』과 시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은전』은 재주가 보통 사람과 다르고 신통한 이은의 삶을 다룬 산문이다. 『이은전』의 주인공은 ‘이팽랭이’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초탈하여 지내는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도 심능숙의 선가적 관심을 살펴볼 수 있다. 심능숙은 『옥수기』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시인으로서도 뛰어났다. 일정한 격률(格律)과 엄격한 규범을 갖고 있는 근체시에 뛰어났고, 이미 7세에 시를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14세부터 한시를 짓는 문인의 모임인 시회활동을 하였다. 또한 산문문체의 하나로 조선후기 소설·가사·제문 등 여러 종류의 글을 모아 수록한 책인 잡록도 남겼다. 시문집으로 『후오지가』, 잡록으로 『문시』가 있다.
이옥은 1760년에 태어나서 1815년에 생을 마감한 조선 후기의 문인이다. 이옥은 서족이자 군사와 관련된 벼슬인 무반 집안 출신이었다. 이옥이 서족 출신인 이유는 이옥의 고조할아버지가 본부인이 아닌 다른 부인에게 태어난 서자였기 때문이다. 서족이자 무반 집안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와 문체반정의 대표적인 희생자로 평생 힘든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23편의 전은 문학적인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고 있다.
문체반정이란 문체가 바른 곳으로 돌아간다는 뜻인데, 정조가 조선 후기 정통 고문이 아닌 패사소품체라고 부르는 소설식의 문체를 구사하는 문풍을 바로잡고자 한 것을 말한다. 소설식 문체, 해학적 표현 등을 구사한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문체반정의 계기가 되었다. 이 일로 박지원은 반성문을 쓰기도 하였다. 이옥 역시 문체반정으로 인해 벼슬길이 좌절되고 군대도 2번이나 다녀오는 등 일평생 고초를 겪었다.
이옥의 호는 문무자이다. 그의 본관은 전주이고 본가는 경기도 남양이다. 이옥은 젊은 시절 성균관의 유생으로 한양에서 지냈다. 그의 아버지인 이상오는 진사에 급제했고, 이옥 역시 성균관 유생 시절에 생원시에 급제했다. 생원시에 급제했을 때가 1790년이었다. 이옥이 성균관의 유생으로 있었을 당시 그가 지은 글이 소설문체로 작성되었다고 지적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사륙문 50수를 매일 지어 문체를 바르게 한 후에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했는데, 정조는 당시 성균관 유생이었던 이옥이 지은 글이 문제가 된다고 판단하여 과거 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고, 충청도 정산현에 충군되었다. 충군은 조선 시대에 죄인을 군대에 복무하게 하던 제도로 가장 엄한 형벌의 하나였다. 당시 선비들 사이에서는 패사소품체인 소설식의 문체가 유행했었는데, 이옥의 문체가 여기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과거 시험을 봤지만 다시 문체가 문제가 됐다. 이후 다시 과거 시험을 봐서 1등을 했지만 그의 문체가 또 문제가 되어 정조는 그의 이름을 합격자 명단의 가장 끝에 붙이도록 했다. 이후 다시 군에 복무하기도 하는 등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옥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가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체 지적으로 인해 끊임없이 고초를 겪으면서도 지속적으로 과거에 도전했다. 그러나 이미 그의 문체는 당대에 바른 글이라고 인정받았던 고문과는 거리가 먼 소설식 문체인 패사소품체로 고착되어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옥은 글을 통해 천지 만물은 모두 그 자체로 가치가 있고, 남녀 간의 정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총 23편의 전이 남아 있는데, 대표작으로 『이언』, 『심생전』, 『김광억전』 등이 있다.
채수는 1449년 남양부사 채신보와 유승순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468년(세조1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69년(예종1)에 식년 문과에 1등으로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477년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에 대한 합당한 예우를 해야 한다는 청을 올렸다가 당시 왕인 성종과 인수대비에게 노여움을 사서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후에 연산군대의 큰 화를 모면하는 일이 된다. 1485년 성종의 노여움이 풀린 후 채수는 다시 관직으로 나아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두 번이나 다녀오고 성균대사성을 거쳐 호조참판에 올랐다. 연산군이 왕이 된 이후에는 중앙 관직은 모두 거절하고 지방 수령직인 외직만을 전전하였다.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면서 일으킨 갑자사화로 채수는 곤장을 맞고 유배된다. 그 이유는 정희왕후가 한글로 쓴 폐비 윤씨의 죄를 적은 기록을 채수가 사관에게 건넸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행히 채수는 유배에서 풀렸났고, 이 일 이후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채수는 당시 반정 측에 가담하여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한 정국 공신 4등으로 기록되었다. 그 뒤에는 모든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에 쾌재정을 짓고 독서로 남은 생을 보냈다. 시문에 특히 뛰어났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패관소설에까지 자세히 알았다. 그러나 독실한 유학자는 못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불교와 도교 사상이 짙게 드러나는 「설공찬전」이라는 소설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그가 쾌재정에 머물 때 지은 것이다.
「설공찬전」은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차례 기록이 나올 만큼 당대에 큰 문제가 됐던 소설이다. 이 소설은 죽은 귀신인 설공찬이 설공침에게 들어가 저승 이야기를 전해주는 내용인데, 그 설정이 조선이 표방했던 유교사상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설공찬이 들려주기를 저승에서는 여성도 능력이 있으면 벼슬을 할 수 있으며, 반역으로 왕의 자리를 뺏은 자는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하였다. 이 부분은 중종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힐 수 있어 문제적이었다. 이로 인해 「설공찬전」은 금서가 되어 불태워지기도 했다. 「설공찬전」이 이렇게까지 문제가 됐던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채수의 「설공찬전」은 국문학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설공찬전」은 「금오신화」와 『기재기이』를 이어주는 소설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와 두번째 소설이라고 여겨졌던 『기재기이』 사이에는 80여 년의 시간차가 존재한다. 「설공찬전」이 발견됨으로써 「금오신화」와 『기재기이』의 중간에 있던 문학사적 공백기가 메워졌다. 「설공찬전」은 한문본이고, 「설공찬이」라는 국문본도 함께 존재했는데, 현재 한문본은 전해지지 않고, 국문본인 「설공찬이」는 1996년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채수의 작품으로 「설공찬이」 외에 『나재집』 2권이 있다. 채수는 1515년 생을 마감하였고, 죽은 이후에 왕에게 양정(襄靖)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김만중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저자이다. 1637년 태어나 1692년 생을 마감했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호는 서포(西浦)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광성부원군인 김만기의 동생으로, 인경왕후의 숙부였다. 그의 어머니는 해남부원군 유두수의 4대손이자 영의정 윤방의 증손녀이면서 이조참판 윤지의 딸이었다. 김만중의 아버지는 정축호란 때 강화도에서 자결한 김익겸이다. 김만중은 외부에 스승을 두지 않고, 어머니와 형, 어머니의 할아버지에게서 교육받았다. 지금으로 보면 홈스쿨링을 통해 교육받은 것이다. 특히 김만중의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자라는 아들들을 위해 교육에 정성을 쏟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어머니의 헌신은 김만중의 삶과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가정교육으로 공부하여 김만중은 14세에 향시에 합격하고 16세에는 진사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29살에는 정시에서 1등으로 합격하였다.
김만중은 60여 개의 중요한 직책을 120여 차례 거치는 등 17세기 정치 문화사의 큰 인물이다. 일평생 국가기관의 중요한 직책을 두루 맡았지만 평탄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직책에 임명되었다가도 박탈 당하기도 하고, 여러 차례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특히 김만중이 유배 중에 어머니 윤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그는 어머니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 역시 56세의 나이에 남해의 적소에서 유배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전의 관직과 작위가 복구된 것은 그가 죽은 뒤인 1698년이었다. 또한, 1706년에는 효행에 대한 정표가 내려지기도 했다.
김만중은 고전소설인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외에도 수필집과 비평집인 『서포만필』을 남겼다. 「구운몽」은 몽이라는 글자로 끝나는 환몽소설의 시작이자 환상 문학의 원형이라고 평가받는다.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소설변증설(小說辨證說)」에 의하면 「구운몽」은 김만중이 귀양 간 곳에서 자신의 어머니인 윤씨 부인을 위해서 하룻밤 사이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소설인 「사씨남정기」는 현재는 국문본과 한문본이 함께 전하고 있지만, 김만중은 한글로 썼다. 「사씨남정기」 국문본은 「홍길동전」과 함께 우리나라 국문소설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뿐만 아니라 한시 역시 다수 남겼는데, 5언 절구, 5언 율시, 5언 고시, 7언 절구, 7언 율시, 7언 고시 등모든 한시를 다 썼다.
박지원은 1737년(영조13) 2월 5일에 박남 박씨 사유의 2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한양의 반송방 야동, 지금의 새문안에서 태어났다. 박지원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했던 명문대가였다. 박지원의 부모는 그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이에 박지원은 큰형 부부 밑에서 자랐는데, 할아버지인 박필균이 경기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당시 5살이었던 박지원은 할아버지를 따라가 공부하게 되었다. 박지원은 어렸을 때부터 약하고 잔병이 많아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 할아버지가 그를 종들과 같이 뛰어놀면서 자라게 하였다. 16세 되던 해에 이보천의 딸과 혼인하여 장인에게서 맹자를 배웠다. 박지원의 장인인 이보천은 벼슬에 나가지 않고 농사에 힘썼던 사람이었다.
이후 박지원은 부인의 삼촌인 이영천에게 가르침을 받아 실제 생활에 쓸모있는 학문인 실학을 주로 공부했다. 박지원은 이영천에게 공부를 배우면서 『신능군전』을 함께 배웠는데, 이것이 후에 박지원이 소설을 쓰는 데 큰 영향을 준다. 이 당시 박지원은 「충무공전」을 썼다. 이양천이 귀양 후 바로 죽자 19살이었던 박지원은 정신적으로 방황을 하게 됐다. 20살에는 봉원사에 가서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허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됐고, 후에 『허생전』을 쓰게 된다. 1760년, 박지원이 24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인 박필균이 돌아가시자 그의 삶이 어렵게 되기 시작하였다. 25살에는 북한산에 들어가서 책을 읽으며 김이소 등과 만나 공부를 하게 되고, 이윤영에게 『주역』을 배웠다. 같은 해에 홍대용을 만났고, 28살에는 『양반전』, 『광문전』 후서를 쓰기도 했다.
32살에는 박제가가 그의 제자로 들어오고 북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북학파란 조선 후기 철학, 소설, 농학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던 사람들로, 상업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중국의 기구를 편리하게 쓰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넉넉하게 해서 백성을 돕는 이용후생에 관한 것들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41살에는 홍국영의 박해를 피해, 금천의 연암 골짜기로 가서 숨어살았는데, 이때부터 연암이란 호를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4살에는 8촌 형인 금성도위 박명원이 청나라 고종의 70수를 축하하기 위해 연경으로 사신을 가게 됐는데, 이 길에 따라 갔다오며 청나라의 문물을 소개하는 기행문 형식의 『열하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50살에는 유언호라는 친구가 선공감 감역에 박지원을 추천하여 임명되었다. 이전까지 박지원은 과거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벼슬을 한 적이 없었다. 69살이 되던 해인 1805년 10월 20일 서울 가회방 재동 자신의 집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연암집』은 박지원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종간이 아버지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간행한 문집이다. 『연암집』은 조선후기 이용후생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박지원의 사상과 문학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여기에는 청나라를 다녀온 후 기행문 형식으로 쓴 『열하일기』가 있고, 『열하일기』 안에 「허생전」이 있다. 당대 양반의 실상을 고발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잘 반영하고 있는 「양반전」, 「마장전」, 「예덕선생전」 등도 연암집에 실려 있다.
신광한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호는 낙봉(駱峯)과 청성동주(靑城洞主)를 함께 사용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신광한은 공조참판 신장(申檣)의 증손이고, 조부는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이다. 내자시정(內資寺正) 신형(申泂)과 사포(司圃) 정보(鄭溥)의 딸 사이에서 1482년(성종15)에 태어났다. 그의 나이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비교적 늦은 나이인 15살에 공부를 시작하여 26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승문원박사, 홍문관부수찬·교리·정언(正言)·공조정랑을 거친 후 홍문관전한으로 경연의 시강관(侍講官)도 함께 겸하였다. 이후 특명으로 대사성에 올랐으나 그 다음 해인 1519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낮은 관직인 삼척부사로 좌천되고 그다음 해에 파직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기묘사화는 1519(중종 14)년 11월에 일어난 사화로 조선 초기 세조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했던 훈구파가 조광조 등의 신진파를 죽이거나 귀양보낸 사건을 말한다. 당시 신광한은 조광조의 일파로 몰려 기묘사화의 화를 입은 것이다.
기묘사화로 좌천과 파직에 이어 다시 여주로 추방당하게 되었다. 이후 18년 동안 숨어서 살다가 1538년 윤인경이 이조판서가 되면서 기묘사화에서 화를 입었던 사람들이 다시 기용되자 그도 대사성으로 복직하게 되었다. 대사성으로 복직된 이후 대사간, 경기도관찰사·한성부우윤·병조참판을 거친 후 1540년에는 대사헌이 되었다. 이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좌찬성, 지성균관사와 지경연사를 겸하는 등 여러 중요한 관직을 거친 후 1553년에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인 기로소에 들어갔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궤장은 70세 이상의 대신들에게 내렸던 하사품인데, 지팡이였다. 궤장을 받기 위해서는 벼슬이 1품이어야 하고, 궤장을 하사할 때 잔치를 함께 베풀어주기 때문에 영광으로 여겼다. 1554년 사직한 후 그 다음해에 병사하였다.
신광한은 15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학문을 시작하였으나 유교 경전인 사서에 정통하고 문장에 뛰어났다. 특히 시문을 많이 지었고, 그가 대사성이 되었을 때 학도들이 그에게 모였다. 학문은 맹자와 한유를 기준으로 하였고, 시문은 두보를 본받았다. 저서로 『기재집(企齋集)』이 있다.특히 신광한의 『기재기이』는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잇고 허균 등으로 시작되는 본격적인 소설시대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소설사적 의의가 크다. 『기재기이』는 전기소설집으로 『기재기(企齋記)』라고도 한다. 『기재기이』에는 「안빙몽유록」, 「서재야회록」, 「최생우진기」, 「하생기우전」 등의 네 작품이 실려 있다.
김소행은 조선후기 「삼한습유」라는 한문으로 된 장편소설을 지은 문인이다. 호는 죽계이다. 1765년에 태어나서 95세인 1859년까지 살다가 삶을 마감하였다. 김소행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고, 남긴 문집도 없기 때문에 그의 삶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만 알 수 있다. 김소행은 서출이었는데,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정식 부인이 아닌 다른 부인에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김소행의 집안은 조선의 학문을 주도했던 명문가인 안동 김씨였다. 하지만 김소행은 서출이라 실력이 뛰어났음에도 벼슬을 하지 못하고 일평생을 불우하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김소행의 형은 김경행이었는데, 그 역시 시와 문장에 뛰어났다. 김경행과 김소행은 충주를 중심으로 하는 충청권에서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삼한습유」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서발에 글을 써준 사람들을 통해 김소행의 인간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삼한습유」의 서발에는 홍석주, 홍길주, 홍현주, 홍직필, 김매순 등이 나오는데, 홍씨들은 모두 농산 홍씨들이었고, 김매순은 김소행과 같은 집안 사람이었다. 홍석주, 김매순, 홍길주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학 연구자들이었다. 특히 김매순은 「삼한습유」의 서발에서 김소행이 뛰어난 재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일생을 보내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삼한습유」는 1702년(숙종 28)에 경상도 선산에서 실제로 있었던 향랑의 이야기를 소재로 가지고 와서 신라시대의 일로 설정을 바꿔 쓴 소설이다. 향랑은 평민 여성으로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구박받던 끝에 버림받은 후 친정으로 쫓겨나 살다가 주위에서 재혼하기를 권하자 자살하는 것으로 자신을 지켰다는 것이 실제 이야기이다. 향랑은 죽으면서 <산유화가>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 노래와 향랑의 이야기가 세상에 퍼지면서 당대 많은 문인들의 한시나 전 잡록의 소재가 되었다.
김소행의 「삼한습유」는 향랑의 실제 이야기를 소재로 가지고 오면서 향랑의 개가담을 바꾸었다. 전통사회에서 열녀란 한 남편만을 목숨을 다해 섬기는 것을 말했다. 「삼한습유」의 향랑은 환생한 후 다시 결혼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면서도 소설에서는 그녀를 의열녀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 김소행은 당대의 인식과는 다른 여성에 대한 새로운 윤리를 제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 양반 남성이라면 벼슬을 통해 세상에 나가 자신의 뜻하는 바를 펼쳤다. 그러나 김소행은 신분으로 인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었는데, 그런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여 「삼한습유」를 쓴 김소행은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뜻을 펼쳐보이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김려는 1766년에 태어나서 1822년 삶을 마감한 조선시대 문인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사정(士精), 호는 담정(潭庭)이다. 김려는 노론계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7대조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할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다. 하지만 이이첨이 김제남을 무고하여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증조부 상정도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그의 집안은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의 아버지인 재칠이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음서란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의 후손이 과거시험 없이 추천으로 벼슬을 하는 제도이다.
김려는 어렸을 때부터 똑똑했는데, 특히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15살에 성균관에서 유생으로 지내면서 179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함께 성균관 유생으로 지낸 이옥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문학적으로 교류가 있던 사람들의 글을 모아 편찬한 『담정총서』에 이옥의 글도 실려 있다. 1792년 정조의 문체반정에 이옥과 함께 연루되었다. 이옥은 이 일로 군대도 다시 가게 되고, 귀양도 다녀오고 결국은 벼슬을 접게 되었다. 이에 반해 김려는 정조의 명에 따라 시를 지어 바쳐 그 재능을 인정받는 등 문체반정으로 인해 크게 피해를 보지는 않았다. 문체반정이란 문체가 바른 곳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정조가 조선 후기 정통 고문이 아닌 패사소품체라고 부르는 소설식의 문체를 구사하는 문풍을 바로잡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문체반정을 피하고 자신이 지은 시로 정조의 칭찬을 받은 다음 해에 자신과 친했던 강이천이 유언비어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김려도 함께 이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김려는 함경도 경원 지역으로 유배가게 되었다. 1801년에는 김려가 천주교와 관련이 있다고 해서 조사를 받게 되었고 이 일로 다시 경남 진해에 유배를 당했다. 김려가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게 된 것은 1806년으로 그가 41살 되던 해였다. 그의 아들의 상소로 유배 생활이 끝나게 된 것이다. 그 후 1812년에 의금부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여생을 마칠 때까지 함양군수로 재직하였다. 1822년 56세의 나이에 삶을 마감하였다.
김려는 소품체 문장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악부시의 대가로 평가된다. 대표적인 시로는 「고시위장원경처심씨작 古詩爲張遠卿妻沈氏作」이 있는데, 장편서사시로 백정의 딸이 주인공인데 양반이 그녀를 며느리로 삼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공고했던 신분 차별과 평등을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는 시이다.
허균을 이어 전을 짓기도 했다. 의리 있고 걸출한 인물을 그린 〈가수재전 賈秀才傳〉·〈삭낭자전 索囊子傳〉·〈장생전 蔣生傳〉 같은 작품들이 남아 있다. 이들 작품은 그의 문집인 「담정유고 潭庭遺藁」의 「단랑패사 丹良稗史」에 실려있다. 「담정유고 潭庭遺藁」에는 악부시를 비롯한 한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으며, 일기·편지·전(傳)·발문·상량문(上樑文) 등도 수록되어 있다. 『담정총서 潭庭叢書』는 김려와 문학적인 교류를 했던 같은 취향 문인들의 글을 엮은 책인데, 이옥 외에 이안중, 이우신을 비롯한 당대 여러 문인의 글이 46편 수록되어 있어 문학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정사가 아닌 주위의 이야기들을 역사로 엮은 야사와 잡다한 것들을 글로 기록한 잡록을 모은 『한고관외사(寒皐觀外史』와 『광사(廣史』를 펴냈다. 김려가 지은 『우해이어보』는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와 함께 우리나라 어보의 쌍벽을 이룬다고 평가받는다.
허균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전소설이자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의 저자이다. 허균은 1569년 조선의 명문가에서 태어났고, 한 세기에 한 명 날까 말까 한 천재적인 예술성을 타고났지만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는 화합하지 못했다. 허균은 당시 높은 벼슬을 누리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허균은 어렸을 때 서자 출신의 시인인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이달을 스승으로 두면서 정식 부인이 아닌 다른 부인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은 능력이 뛰어나도 등용되기가 어려운 당시 사회에 불합리함을 느끼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나중에 그가 쓴 「손곡산인전」에 잘 드러나 있다.
허균의 누이는 조선의 유명한 여류작가였던 허난설헌이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누이와 함께 신동으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벼슬길에 오른 것은 그의 천재성에 비하면 좀 늦은 편이었다. 21살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6살이 되어서야 겨우 사관의 벼슬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늦게 얻은 벼슬길도 평탄하지는 않았다. 관아에서 부처를 모시고 염불을 했다거나 부모 상중인데 기생과 함께 놀았다는 등의 비난을 받아 결국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뒤 다시 벼슬길에 오르기도 하고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다가 다시 유배를 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고 역적모의를 했다는 죄명으로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때가 1618년이었다.
허균은 성리학을 나라의 기본으로 하는 조선시대에 양반가에서 태어나 유학을 기본으로 공부했으나 당시 사회에서 이단으로 여겼던 불교와 도교에도 깊이 빠졌다. 당대 사회에서 금지했던 종교에 빠졌던 것만으로도 그가 사회와 화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중국에 갔을 때, 당시 서학이라고 했던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허균은 그가 살았던 당시 사회에서는 금기시되던 사상을 가지고 삶을 살았지만 그로 인해 국문학사에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허균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의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이식이 지은 『택당집(澤堂集)』의 기록에서도 「홍길동전」이 허균의 작품임을 분명히 하고 있고, 그가 남긴 논설문인 「호민론(豪民論)」에 나타난 사상이 「홍길동전」에서 그리고 있는 사상과 연결된다. 허균의 문집으로는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가 있다.
최요안은 1916년 경기도 인천에서 태어났다. 최요안은 세례명이고 필명으로 일초, 함초원 등을 썼다. 일본의 니혼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948년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주최한 공모전에 「세뱃돈」이라는 작품으로 응모하여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방송작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방송작가로 활동하면서 그는 만필, 유머소설, 어린이극, 인생 역마차라는 드라마 형식의 글 등등의 많은 글을 썼다. 한국전쟁 중에도 방송작가로 글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부산의 피난지에서는 최요안 혼자서 거의 문예 방송을 이끌어 갈 정도였다. 부산에서 서울로 방송국으로 옮긴 후에는 문예방송의 문예계장으로 방송의 계획뿐만 아니라 작품 선정까지도 도맡았다.
최요안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마음의 샘터』이다. 이 책은 KBS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HLKA 라디오 프로그램인 「마음의 샘터」의 원고를 책으로 펴낸 것이다. 「마음의 샘터」는 처음에는 주1회 방송하다가 청취자들의 인기에 힘입어 격일로 방송하게 됐다. 이후에는 매일 방송했는데, 거의 20여 년을 방송한 장수 프로그램이었다. 『마음의 샘터』은 이 프로그램의 애청자들의 요청에 의해 나온 책이다. 이 책은 상권, 하권 2권으로 나왔는데, 당시 중고등학교 졸업 선물로 인기가 있었던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1958년에는 관심이 필요한 소년에게 따뜻한 마음을 기울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느티나무 있는 언덕」이라는 드라마의 대본을 썼다. 이외에도 「주막에서 만난 미녀」, 「잃어버린 노래」, 「파랑새의 꿈」, 「그대 목소리」, 「돌다리」, 「이른 봄 나비의 죽음」 등 단막극의 원고를 썼다. 연속극으로는 「뻐꾹새가 된 처녀들」, 「옥단춘」 등과 「최창익의 마지막 그림자」 같은 드라마도 집필하였다. 최요안은 방송극 외에도 신문과 잡지에 소설을 발표하고, 소설집을 내기도 했다. 1949년에는 소설 「돌담 모퉁이의 삽화」를 『민성』에 발표하였고, 1955년에는 소설 「달밤과 의복」을 『경향신문』에, 1956년에는 소설 「평범」을 『현대문학』에 발표하였다. 이외에 소설집 『은하의 곡』과 『그대 목소리』를 펴냈고, 방송극집인 『느티나무 있는 언덕』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소년 소설도 발표했다. 1954년에 발표한 「별과 얘기하는 소년」, 1955년에 발표한 「하얀 길」, 1957년에 발표한 「달과 구름」이 있다. 동화로는 「나는 둘」이 있다. 동화 「나는 둘」은 2000년대에도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추천된 바 있다.
최요안은 방송극, 소설, 아동문학 등의 여러 분야에서 글을 집필하였는데, 그가 가장 애착을 가졌던 분야는 라디오 드라마였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말, 당시로서는 유일한 방송 전문지였던 『방송』에 「방송극은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장기간 연재한 바도 있고, 1963년에는 『방송극 연구』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1987년 인천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최요안은 1957년에 제1회 방송극 작가협회상을 수상하였고, 1958년에는 문예부분에서 제1회 방송문화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에 한국방송 협회 부이사장을 맡았다. 1977년에는 방송공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2001년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최요안은 우리나라 방송문예사에 있어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방송극과 그 대본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방송극뿐만 아니라 소설과 아동문학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겨 현재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부곡리에는 필경사라는 고택이 있다. 필경사는 1934년 작가 심훈(1901~1936)이 직접 설계하여 지은 주택이다. ‘심훈’ 하면 대번 떠오르는 유명한 소설 「상록수」가 이곳에서 집필되었다. ‘필경사(筆耕舍)’라는 집의 이름은 심훈이 1930년 발표한 「필경(筆耕)」이란 시에서 유래한 것이다. 시의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붓끝은 날마다 흰 종이 위를 갈[耕]며 나간다.
한 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쟁기요, 유일(唯一)한 연장이다.
거칠은 산(山)기슭에 한 이랑[畝]의 화전(火田)을 일려면
돌뿌리와 나무 등걸에 호미 끝이 부러지듯이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었던고?
[이하 생략]”
붓은 쟁기, 밭은 흰 종이로 비유되어 ‘종이에 농사를 짓는 집’이란 의미로 파악된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의 마음을 자유롭게 표현하고픈 심훈의 의지가 담겼다고 할 수 있다. 필경사는 일자형의 초가집으로 방과 부엌, 욕실, 집필실 등이 있다. 필경사는 심훈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기도처로 사용되다가 부곡교회에 매매되었다. 1970년 심훈의 조카 심재영이 다시 매입하였다가 당진시에 희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07호에 지정되었다.
심훈은 1930년 『조선일보』에 여러 작품들을 연재하다 일제의 검열로 인해 중단되자, 부모님이 계신 충청남도 당진으로 내려와 창작활동에만 몰두하였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장편소설 「직녀성」을 연재하면서 이때 받은 원고료로 필경사를 짓게 된 것이다. 필경사에서 지내며 심훈은 그 유명한 「상록수」를 집필하게 된다. 1935년 동아일보사의 농어촌 문제를 주제로하는 장편소설 공모전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심훈은 신문기사를 통해 경기도 수원에서 농촌 교육에 헌신하다 과로로 세상을 떠난 최용신이라는 여성을 접했다. 또한 당진에서 조카 심재영이 농촌 계몽 운동과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심훈은 심재영과 최용신 이 두 인물을 모델로 해 53일 만에 소설 「상록수」를 집필하였다. 이렇게 탄생된 「상록수」는 당당히 동아일보사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필경사 일대에는 심훈을 기념하는 상록수 문화관과 심훈기념관이 있으며, 심훈의 묘소도 자리하고 있다. 또한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 「눈밤」이 새겨진 시비도 세워져 있다. 필경사와 멀지 않은 곳에 소설 「상록수」와 관련된 장소도 있다. 남주인공 박동혁의 실제 모델인 심훈의 조카 심재영의 고택, 채영신이 박동혁을 찾아갔던 한진포구 등이다.
또한 당진 남산공원 내에는 심훈의 상록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세운 상록탑이 있다. 남산공원에서 1977년부터 현재에 이르도록 상록문화제가, 필경사 일원에서도 심훈문학제가 개최되고 있다. 당진은 실로 심훈의 문학세계가 구현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필경사 일대를 방문해 심훈 문학의 발자취를 느껴보도록 하자.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에는 예전에 용화광산의 선광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이 있다. 선광장은 광물을 부수어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여 거르는 곳을 의미한다. 근처의 일월산에서 광물을 캐내어 용화광산 선광장으로 옮겼다. 선광장에서 광물을 거르고 선별하는 작업을 거쳐 금·은·동·납·아연 등이 생산되었다. 생산된 광물은 고스란히 일제에 넘겨졌다.
용화광산 선광장은 1936년 일본인이 광업권을 등록하여 1939년 일본의 중천광업주식회사에 의해 개광되었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 광업권이 위임되었고 1964년 영풍광업에서 인수해 1966년부터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후 1976년 영풍광업의 탐광이 종결되어 휴광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1994년 광업권이 소멸되어 폐광 처리되었다. 용화광산 선광장은 근대 선광장의 공정을 알 수 있고 광업 발달사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써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6월 19일 국가등록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되었다.
광물을 선별하여 생산해내는 시설들이 15도에서 28도의 기울기로 경사진 일월산 자락을 따라 15층의 계단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석축으로 단을 쌓아 터를 닦은 뒤 여러 공정에 필요한 구조물들을 짓기 위해 콘크리트를 사용하였다. 콘크리트 구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풍화된 탓인지 흙빛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선광장의 구조물들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선광장의 위쪽에는 일월산에서 캐낸 광물을 옮기는 운반용 광차가 전시되어 있다. 선광장은 광차로 옮겨진 광물을 컨베이어를 사용해 단계별로 위에서부터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분쇄되고 걸러지는 과정을 거치도록 구성되어 있다. 콘크리트 구조물의 아래쪽에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광물들이 탱크에 보관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선광장의 휴광은 폐광이나 다름없었다. 1976년 폐광 후 약 30년간 선광장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 그 사이 선광장 일대의 토양은 독성물질로 오염되고 말았다. 선광장이 운영될 당시 근처에 제련소가 있었는데 금속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화학성 독성물질이 필요했다. 폐광물과 화학물질로 오염된 선광장은 풀 한 포기, 고기 한 마리도 살 수 없는 척박하고 황폐한 땅이 돼버리고 말았다.
이에 영양군은 2001년 선광장 앞면의 오염된 땅을 완전히 매립하고 일월산에 자생하는 야생화를 심어 ‘일월산자생화공원’을 조성하였다. 오염으로 얼룩진 황무지라는 이미지를 벗어나 자연적으로 회복된 생태 공간이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공원 조성과 함께 선광장도 정비되었다. 선광장 양쪽으로 계단이 설치되어 산의 경사를 따라 올라가며 구조물을 관람할 수 있으며, 정상에 전망대가 있어 일월산과 선광장 및 자생화공원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용화광산 선광장은 흔치 않은 근대의 광업시설이다. 일제의 수탈과 환경오염이라는 아픔도 겪었지만, 이제는 꽃들이 펼쳐진 공원과 함께 우뚝 서서 많은 이들의 애정과 관심을 바라고 있다. 선광장 주변은 다양한 체험프로그램과 청정한 자연으로 인기가 있는 대티골 마을이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호 용화리 3층석탑도 있어 함께 둘러볼만 하다.
인천광역시 동구 만석동에는 일제강점기 대규모 방적 업체였던 동양방적이 세운 공장이 있었다. 1934년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동양방적은 1955년에 동양방적공사 이사장 서정익에게 인수되면서 동일방직이 되었다. 동일방직 인천 공장 내에는 1950년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일방직 의무실이 있다. 동일방직 의무실은 공장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한옥 형태로 지어져 눈길을 사로잡는다.
단층 규모의 목조 건물인 동일방직 의무실은 우리나라의 전통양식과 서양식, 일본식이 어우러져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지붕선, 기와, 창살문양 등은 전통양식을 따랐지만 지붕틀, 기둥의 형태, 복도 등 내부 구조는 일본식을 따르고 있다. 동일방직은 2017년 12월부터 운영이 중단된 상태이며 일부 건물은 현재 물류창고 등으로 쓰이거나 비어 있다. 동일방직 의무실뿐만 아니라 기숙사, 정자, 관리동 등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역사적 건물들이 이곳에 함께 남아 있다.
인천광역시는 개항 이전만 하더라도 소박한 어촌이었다.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을 빌미로 인천은 1883년 개항이 이루어지고 근대 도시로의 성장 발판이 마련되었다. 개항 이후 인천은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외국의 영사관과 무역회사가 지어지고 병원과 교회가 생겨났다.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후에도 인천은 여전히 항만 도시로 성장해 나갔다. 많은 노동자들이 모이고 무역과 상업의 발달로 공장들도 늘어났다.
1930년대를 거치면서 일제는 여러 나라를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우리나라를 군사 작전에 필요한 물자 보급 기지로 이용했다. 이에 일제는 공장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인천 바다를 매립하고, 도로를 넓히는 등 군수기지 인프라를 확충하고자 했다. 인천광역시 송현동, 만석동, 화수동 일대는 이 시기에 군수 공장들이 들어섰던 곳이다. 동일방직의 전신인 동양방적도 이러한 배경에서 1934년에 설립된 공장이었다.
한편, 동양방적 인천공장은 소설가 강경애가 1934년 8월 1일부터 12월 22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인간문제』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공간이다. 『인간문제』는 일제강점기 방적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의 삶을 그린 작품으로 식민지 근대 리얼리즘 소설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용현 마을의 가난한 머슴 딸로 태어난 주인공 선비는 최하층 여성이 겪을 만한 고된 삶을 살아간 인물이다. 마을을 떠나기 전에는 아버지를 죽음을 이르게 한 지주 덕호에게 기식하는 신세로 살아가고, 마을을 떠난 후에는 공장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다 병에 걸린다. 강경애는 이 작품을 통해 농민 운동과 노동자의 투쟁을 정면에 제시하여 일제강점기 농민과 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현재까지 동일방직 의무실의 건립 경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나 이를 알고 있는 관계자가 없다. 독특한 구조를 지닌 이 건물은 해방 후 건축 양식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보존 가치가 크다. 이에 동일방직 의무실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라남도 목포시 남교동에는 목포청년회가 건립한 청년회관이 남아 있다. 목표청년회는 1920년대 목포 지역의 청년 운동을 이끌었던 단체이다. 이들은 1924년부터 회관 건립을 위한 모금 운동을 진행하고 남교동에 땅 100평을 확보하여 1925년에 목포청년회관을 건립했다. 이후로 목포청년회관은 목포 청년들의 민족운동 중심지가 되었다. 1927년에는 신간회 목포지회 창립식과 항일여성 운동 단체인 근우회 목포지회 창립식이 이곳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이처럼 목포청년회관은 노동, 여성, 항일 운동을 담당했던 단체들이 모여 집회와 강연회, 회의 등을 여는 장소로 쓰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서 청년단체가 설립되었고, 청년들이 모여 적극적인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목포에서는 목포청년회뿐만 아니라 기독청년회, 목포수양회, 천도교청년회 등이 결성되었다.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단체는 목포청년회였다. 목포청년회는 1917년을 전후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이 신문에 상세하게 소개되었을 정도로 명성 있는 단체였던 듯하다.
1917년 6월 21일자 『매일신보』에 ‘목포청년단’이 대운동회 개최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운동회에 참석한 인원만 500여 명에 달했다. 목포청년회는 당시 청년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1920년 1월에 야구단을 조직하고, 4월에는 축구대회를 개최하는 등 운동 관련 행사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당시 체육 활동이 활발했던 이유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체육이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 체육 구락부와 황성 기독교 청년회 운동부 등 다양한 체육 단체가 설립되기도 했다. 민족주의 이념의 한 표현이었던 체육 활동은 민족의 에너지를 결집함으로써 항일 민족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1920년 5월 9일에는 목포청년회 발기총회가 개최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목포지역의 청년 운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20년 5월 13일자 『매일신보』에서도 목포청년회 설립과 관련된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목포청년회는 “지식계발과 친목, 체육장려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목표청년회는 운동회와 강연회를 중심으로 활발히 청년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하나의 과제가 남아 있었는데, 바로 청년회관의 건립 문제였다. 청년회관 건립은 발기총회에서부터 결의된 사안이었으나, 몇 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1923년이 되어서야 이사회를 열어 청년회관 건립에 박차를 가했다. 1924년 4월부터 지역 인사들을 대상으로 기금을 모으고 남교동 일대에 100평 가량의 대지를 매입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25년에 비로소 목포청년회관이 완공되었다.
목포청년회관은 소설가 박화성의 1934년작 단편소설 『헐어질 청년회관』에서도 등장한다. 이 작품에는 청년회관의 위상, 그리고 청년운동이 점차 침체되면서 청년회관이 잊혀져가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목포청년회관은 광복 이후 임마누엘 목표교회 건물로 사용되다가 2011년 남교소극장으로 개관해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002년 9월 등록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