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김시습은 1435년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1439년(세종 21), 70세의 노정승 허조가 5세의 신동을 시험하러 찾아왔다. 허조가 ‘늙을 노(老)자’를 이용해 시를 지어달라고 하자, 김시습은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은 것이다(老木開花心不老)’라는 시구를 읊어 허조를 감탄하게 했다. 세종도 김시습을 불러 시험해 본 후 감탄하여 비단을 선사했는데, 어린 김시습이 묘안을 내어 무거운 비단을 자신의 힘으로 다 가져갔다. 비단 50필을 풀어 서로 엮은 뒤 허리춤에 묶고 끌고 나갔다. 성균관 근처에 살아서 김시습의 이웃에는 이름난 학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덕분에 김시습은 13세까지 대사성을 지낸 김반, 겸사성 윤상에게서 성리학 경전을 배웠다.
김시습은 15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후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승려가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을 방랑했다. 이 때문에 생육신(生六臣)으로 불린다.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후지를 썼다.
1465년(세조 11)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했다. 이곳에서 2년 후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6∼7년 후 상경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김시습은 승려로서 명성이 높았으나 원효를 본받아 절에만 있지 않고 직접 농사일을 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며 불교에서 얻은 깨달음을 삶에서 실천하고자 했다. 1481년(성종 12)에 환속했으나, 1483년 다시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59세(성종 14년)에 충청남도 부여의 무량사에서 죽었다. 무량사에는 그의 부도가 남아 있다.
김시습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한 기행들이 유명하다. 영의정의 행차를 가로막으며 욕을 하거나, 벼슬을 하는 친구가 찾아오면 방에 누워서 벽에 발을 대고 맞거나, 세조가 불교 행사에 부르자 참석하지 않기 위해 분뇨 구덩이에 일부러 빠졌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한다. 김시습은 그 절개와 함께 유교와 불교 사상을 담은 탁월한 문장의 시와 소설과 글로 당대는 물론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고 있다.
김시습의 수많은 작품들은 이세인, 이자, 윤춘년 등이 정리하여 간행했다. 1582년(선조 15)에는 왕명으로 김시습의 유고를 정리하고 이이(李珥)가 전기를 지은 『매월당집(梅月堂集)』이 간행되었다. 김시습의 불교 관련 저술로는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묘법연화경별찬(妙法蓮華經別讚))』이 전한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의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김시습의 본관은 강릉이다.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의 경포도립공원 내에 매월당김시습기념관이 있다. 김시습의 일대기를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와 『금오신화』 애니메이션, 매월당 문집 영상, 김육이 쓴 『기묘록』과 1796년 목판본으로 인쇄된 『장릉 사보』, 1800년대 쓴 것으로 추정되는 『동학사지』 등을 관람할 수 있다. 김시습의 사당도 있다.
시인 박재삼은 1933년 4월 10일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1936년 4세 때 귀국하여 어머니의 고향인 경상남도 삼천포시 서금동 72번지에 정착했다. 1946년 수남국민학교(현 삼천포초등학교), 1951년 삼천포중학교, 1953년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상급학교에 바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학비가 없어 진학하지 못했다. 훗날 박재삼은 이 때 느낀 절망감을 떠올려 「추억(追憶)에서 31」이라는 시를 썼다.
해방된 다음해/魯山노산 언덕에 가서/눈아래 貿易무역회사 자리/홀로 三千浦中學校삼천포중학교 입학식을 보았다./기부금 三천원이 없어서/그 학교에 못 간 나는/여기에 쫓겨오듯 와서/빛나는 모표와 모자와 새 교복을/눈물 속에서 보았다.// 그러나 저 먼 바다/섬가에 부딪히는 물보라를/또는 하늘하늘 뜬 작은 배가/햇빛 속에서 길을 내며 가는 것을/눈여겨 뚫어지게 보았다.// 학교에 가는 대신/이 눈물 범벅을 씻고/세상을 멋지게 훌륭하게/헤쳐 가리라 다짐했다.// 그것이 오늘토록 밀려서/내 주위에 너무 많은 것에 지쳐/이제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그것만 어렴풋이 배웠다.
박재삼은 진학 대신에 삼천포여자중학교에서 사환으로 일했는데, 이 때 삼천포여자중학교 교사였던 시조시인 김상옥을 만나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삼천포중학 병설 야간중학교에 입학하여 학비를 벌면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1948년 교내신문 「삼중」 창간호에 동요 「강아지」, 시조 「해인사」를 발표했다. 야간 중학교가 주간 중학교로 병합되면서 주간 중학교 학생이 되어 졸업했다. 제1회 영남예술제 ‘한글시 백일장’에서 시조 「촉석루」가 차상으로 입상했고 장원이었던 이형기와 교류하게 되었다. 1950년 김재섭, 김동일과 함께 동인지 『군상』을 펴냈다.
1953년 모윤숙의 추천으로 『문예』 11월호에 시조 「강물에서」를 발표,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1954년 김상옥의 소개로 현대문학사에 취직했다. 1955년 유치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 6월호에 시조 「섭리」,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 11월호에 시 「정적」을 발표했다. 같은 해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가 3년 뒤 중퇴했다. 대한일보사, 삼성출판사 등에서 일했다. 1961년 구자운, 박성룡, 박희진, 성찬경 등과 『60년대사화집』 동인으로 활동했다.
1962년 첫 시집 『춘향이 마음』을 간행한 이래 시집 『햇빛 속에서』(1970), 『천년의 바람』(1975), 『어린 것들 옆에서』(1976), 『추억에서』(1983), 『아득하면 되리라』(1984), 『내 사랑은』(1985), 『대관령 근처』(1985), 『찬란한 미지수』(1986), 『바다 위 별들이 하는 짓』(1987), 『박재삼 시집』(1987), 『사랑이여』(1987), 『울음이 타는 가을 강』(1987), 『다시 그리움으로』(1996),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1997) 등 다수의 시집을 발표했다. 수필집 『울밑에 선 봉선화』(1986), 『아름다운 삶의 무늬』(1987), 『슬픔과 허무의 그 바다』(1989) 등이 있다. 1997년 6년 8일 10여년의 투병 생활 끝에 영면에 들었다. 1998년 『박재삼 시전집1』이 출간되었다.
박재삼의 대표작으로 「울음이 타는 가을강」(1959)을 들 수 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네보담도 내보담도/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 소리가 사라지고/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가을, 해질녘, 강 등 자연을 매개로 사랑(이별), 죽음을 겪으며 느끼는 서러움, 눈물 등의 화자의 심상을 표출하고 있다. 서러움과 눈물은 인간이 유한함을 깨달으며 느끼게 되는 근원적 정서다. '∼고나, ∼것네'와 같은 토속적인 시어들이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박재삼은 일상생활과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향토적인 서정을 담은 시를 창작하여,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시의 맥을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8년 경상남도 사천시에 있는 노산공원에 「천년의 바람」이 새겨진 박재삼 시비가 세워졌다. 2004년 박재삼 생가 근처에 조형물과 시비가 설치된 박재삼 시인의 거리가 조성되었다. 2009년 노산공원에 전시실과 영상홍보실, 문예창작실, 다목적실 등을 갖춘 박재삼문학관이 건립되어 이 곳에서 해마다 '박재삼 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소설가 박태원은 1910년 1월 17일 청계천 광교 옆 다옥정 7번지에서 태어났다.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0년 일본 호세이대학 예과에 입학, 중퇴했다. 경성고보 3학년 때인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이 가작으로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단편 「적멸」(1930), 「수염」(1930),「꿈」(1930) 등을 발표하면서 소설 창작에 주력했다. 1933년 구인회에 가입했다.
단편 「사흘 굶은 봄 달」, 「피로」, 「오월의 훈풍」 등과 장편 『반년간』을 발표했다. 중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골목안」(1939), 장편 「천변풍경」(1936~1937), 「여인성장」(1941~1942)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작품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8), 「여인성장」(1942), 장편 「천변풍경」(1938) 등을 간행했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고 단편 「춘보」(1946), 장편 「임진왜란」(1949), 「군상」(1949~1950) 등을 발표했다.
한국전쟁 중에 월북하여 북한에서 역사소설 「계명산천은 밝았느냐」(1963~1964), 「갑오농민전쟁」(1977~1984)을 집필하였다. 「갑오농민전쟁」은 북한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1986년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박태원은 초기 구인회와 함께 소설의 문장과 기법에 주력한 모더니즘 경향의 작품을 발표했다가 「천변풍경」을 전후로 자신의 체험을 기반으로 쓴 세태소설과 역사소설을 창작했다.
박태원에게 서울은 고향이자 삶의 장소이며 문학적 공간이었다. 박태원의 많은 소설들은 서울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박태원의 대표작이자 자전적 소설인 「구보씨의 일일」에서 구보는 1930년대 식민지 경성의 광교와 종각, 화신상회, 청진동, 광화문통, 경성부청(서울시청), 남대문, 경성역(서울역)을 지나며 별다른 일 없는 하루를 보낸다. 「구보씨의 일일」은 서울의 모습을 통해 식민지 치하에서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당시 지식인들의 모습을 비춘다. 「천변풍경」에도 당시 서울의 또다른 모습이 담겨 있다. 「천변풍경」은 돈을 벌기 위해 가난한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당시의 청계천변을 조망한다.
자정이나 되어 천변에는 행인이 드물다. 이따금 기생을 태운 인력거가 지나고, 술 취한 이의 비틀걸음이 주위의 정적을 깨뜨릴뿐, 이미 늦은 길거리에, 집집이 문들은 굳게 잠겨 있다. 다만, 광교 모퉁이, 종로 은방 이 층에, 수일 전에 새로 생긴 동아 구락부라는 다맛집과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난 뒤, 점 안을 치우기에 바쁜 이발소와, 그리고 때를 만난 평화 카페가 잠자지 않고 있을 뿐으로, 더욱이 한약국 집 함석 빈지는 외등 하나 달지 않은 처마 밑에 우중충하고 또 언짢게 쓸쓸하다.
-박태원, 「천변풍경」, 문학과지성사, 2005, 108면
「천변풍경」 속에서 서울은 고달픈 서민들의 삶의 공간이다. 박태원의 소설은 뚜렷한 주제의식이 나타나지 않고 객관적인 묘사만 등장하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형식의 서사여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2007년 박태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문학제와 기념전시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 서울 야주개(현 당주동)에서 태어났다. 소파(小波)라는 호가 잘 알려져 있다. 1909년에 매동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전학하여 1913년에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했고, 1914년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했다. 1917년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의 딸 손용희와 결혼, 천도교를 기반으로 활동했다. 1917년 류광열, 이중각, 이복원 등과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하고 『신청년』(1919)을 펴냈다. 1917년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독립선언서를 돌리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1920년 개벽사 도쿄 특파원이자 천도교 청년회 도쿄 지회장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요대학 철학과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를 공부했다.
1920년 천도교에서 발행한 종합월간지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 여기서 ‘어린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1921년 서울로 돌아와 천도교소년회를 만들고, 같은 해 7월, 안데르센과 그림의 동화와 「아라비안나이트」 등을 번역해 사랑의 선물을 엮어서 다음해 출판했다. 1922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 창립 1주년을 기념해 제1회 어린이날을 제정했다.
1923년 3월 최초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같은 달 아동문제연구회인 색동회를 창립했다. 같은 해 5월 1일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고 조선소년운동협회 주최로 제1회 어린이날 행사가 치러졌다. 「어른에게 드리는 글」, 「어린 동무에게 주는 말」, 「어린이날의 약속」 등의 전단 12만 장이 배포됐다. 1925년 토요일마다 천도교기념관에서 방정환의 동화회가 열렸는데 1000장의 입장권이 항상 모자랄 정도로 사람들이 모였다. 같은 해 서울의 40여 소년단체를 통합해 ‘소년운동연합회’를 조직했다. 1927년 『어린이』 1월호부터 1930년 12월호까지 「어린이 독본」을 총 20회 연재했는데 당시 많은 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했다. 1927년 4월 개벽사 필화사건으로 차상찬과 함께 구속됐다가 석방됐다. 이후 방정환은 사상의 대립으로 소년운동단체가 분열하자 소년운동단체 일선에서 물러났다. 1930년 『어린이』 발행 부수가 삼만부를 상회했다. 1931년 7월 23일 과로와 스트레스 등으로 쓰러졌다.
방정환은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어, 독립된 존재이자 존중받아야 할 존재로서의 어린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그리고 ‘어린이’라는 말을 알리고, 강연회와 강습회, 동화구연대회, 소년지도자대회 등을 개최하면서 아동문화운동에 앞장섰다. 창작동화, 번역‧번안 동화, 수필과 평론을 발표했고, 『신여성』, 『학생』등의 잡지를 발간했다. 저서로는 사랑의 선물이 있다. 사후에 소파전집『소파동화독본』(1947), 『방정환아동문학독본』(1962), 『칠칠단의 비밀』(1962), 『동생을 찾으러』(1962), 『소파아동문학전집』(1974) 등이 발간되었다.
소년운동은 1937년 이후 일제에 의해 금지되었다가 광복 이후 재개되었다. 1957년 어린이날에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이 제정 선포되었고 같은 해 방정환의 기일에는 ‘소파상’이 제정됐다. 1971년 40주기를 맞아 방정환의 동상이 서울 남산공원에 세워졌다가 1987년 5월 3일 서울 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으로 이전됐다. 1983년 5월 5일 망우리 묘소에 ‘소파 방정환 선생의 비’가 세워졌다. 1987년 7월 14일 독립기념관에 방정환이 쓴 「어른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됐다.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90년 독립운동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1996년 소파 방정환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 1998년 한국방정환재단으로 개칭되었다.
소설가 백신애는 1908년 5월 경북 영천시 창구동 68번지에서 태어났다. 1923년 영천공립보통학교, 1924년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했다. 졸업생 중 여성은 백신애 한 명이었다. 영천공립보통학교와 자인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일했다. 1925년 조선여성동우회와 경성여성청년동맹에 가입하여 강연을 하는 등 활동했는데, 좌익성향 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해임을 당했다. 이후 백신애는 여성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경성여성청년동맹간부로 활약했다.
1927년 백신애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왔다. 러시아에서 일본 경찰에게 밀정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박계화라는 필명으로 쓴 「나의 어머니」가 당선되었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조성희라는 예명으로『모던 마담』에 출연, 영화배우로 활동했다.
1934년 단편 「꺼래이」를 『신여성』 1월호와 2,3월 합본호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6월 『신여성』에 시 「붉은 신호등」, 7월 『오사카매일신문』 조선판에 산문 「인텔리 여성의 집」, 11월 『개벽』,속간호에 「적빈」을 발표했다. 1935년 『소년중앙』1월호에 소년소설 「멀리 간 동무」, 5월 동인지『문원』2집에 산문 「초화」를 실었다. 1938년 단편소설 「광인수기」, 「소독부」, 「일여인」과 「어느 유언초」, 「봄 햇살을 맞으며」, 「나의 시베리아 방랑기」, 「청도기행」, 「혼명에서」를 발표했다. 1938년 6월 23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백신애의 작품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가난으로 고통 받았던 당시 조선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꺼래이」에는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었던 당시 조선인들의 실상이 담겨있다. 주인공 순이는 가족들과 국경을 넘다 군인들에게 잡혀서 감금되는데 그 곳에서 같은 처지의 조선 사람들을 만난다.
방안의 사람들은 모두 세 집 식구로 나누어 있는데 도합 열아홉이었습니다. 늙은이, 노파, 젊은 부부, 총각, 처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순이 모녀를 붙들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 함경도 사람들이며, 고국에는 바늘 한 개 꽂을 만한 자기들 소유의 토지라고는 없는 신세라 공으로 넓은 땅을 떼어 농사하라고 준다는 그 나라로 찾아온 것이었는데 국경을 넘어서자 ×××에게 붙들려 순이들처럼, 감금을 당했다가 이리로 끌려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는 돈 없는 사람 살기 좋다고 해서 이렇게 남부여대로 와놓고 보니 이 지경입꾸마. 굶으나 죽으나, 고국에 있었다면 이런 고생은 안 할 것을…….” 젊은 여인 하나가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우리는 몇 번이나 재판을 했으니 또 한 번만 더하면 놓이게 되어 땅을 얻어 농사를 하게 되든지 다시 이대로 국경으로 쫓아내든지 한답데.” 속옷을 풀어 제치고 이를 잡기 시작한 노파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죄일꼬…… 농사짓는 땅을 공띠어준다길래 왔지…….” 늙은이 하나가 끙끙 앓으며 이를 갈 듯이 말하자 “참말 그저 땅을 띠어준답두마, 우리는 바로 국경에서 붙들렸으까 ××탐정꾼들인가 해서 이렇게 가두어 둔 거지!”
결국 순이와 가족들은 춥고 황량한 시베리아 벌판으로 추방되고 할아버지는 길에서 숨을 거둔다. 백신애는 러시아에서 목도했던 조선인들의 비극적인 상황을 서사화하고 식민지 현실에 대한 저항 의식을 표출했다.
백신애가 태어난 경상북도 영천시 창구동에는 출생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며 ‘백신애 길’도 있다. 2008년 백신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영천 시민운동장 입구에 문학비가 건립되었고 이후 시립도서관 공원 마당으로 이전하여 설치되었다.
미당(未堂) 서정주는 1915년 5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1929년 줄포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상경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 1주년 기념 학생 운동을 주모한 혐의로 구속되어 퇴학당했다. 1931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으나 일본 교육과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 동맹 사건을 주동해 자퇴를 권고 받았다. 이 시기 많은 책을 접하면서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고승 박한영 문하에 있다가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 자퇴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었고 같은 해 김광균, 오장환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했다. 1940년 만주 간도에서 양곡주식회사 경리사원으로 일했고 용정에서도 체류했다. 1941년 첫 시집 『화사집』을 출간,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1941년 동대문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후 동아대학교, 조선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1960년 이후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시, 소설, 평론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의 시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동아일보사 문화부장,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 등을 역임했다.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 위원장을 지냈고, 1950년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로 일선부대에 나가 신문편집, 시낭송, 연설 등을 했다. 전쟁의 충격으로 조현증을 앓았다.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에 추천되었고,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시집으로는 『화사집』 (1941), 『귀촉도』(1948), 『서정주시선』 (1955), 『신라초』 (1961), 『동천』 (1969), 『질마재 신화』 (1975), 『떠돌이의 시』 (1976), 『서으로 가는 달처럼』 (1980),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안 잊히는 일들』 (1983), 『노래』 (1984), 『팔할이 바람』 (1988), 『산시』 (1991), 『늙은 떠돌이의 시』 (1993) 등을 출간했다.
서정주의 시는 한국의 전통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말의 특징을 잘 살려 향토적인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5·16 민족상, 자유문학상 등을 받았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0년 12월 24일 사망했다.
2001년 서정주의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서정주의 생가가 복원되고 미당시문학관이 건립되었다. 미당시문학관에는 서정주의 친필 시 액자, 육필 원고,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미당시문학관, 생가, 외가, 묘소가 있는 질마재 일대를 시집 『질마재 신화』와 관련된 민속마을로 조성했다. 『질마재 신화』는 고향인 질마재를 소재로 한 연작시를 엮은 시집이다. 서정주는 마을에 전해오는 민담, 전설, 풍속 등을 수집해 고향의 서정을 시화했다. 또한 서정주의 선산에 국화 꽃밭을 조성하여 2004년부터 질마재국화축제를 하고 있는데, 2009년부터 질마재문화축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05년부터 미당문학제도 개최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에 있던 서정주 자택은 기념관인 ‘미당 서정주의 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정주가 1970년 마포구 공덕동에서 이사와 2000년 12월 24일까지 30년간 살던 집이다. 서정주는 이 집의 이름을 ‘봉산산방(蓬蒜山房)’이라고 지었다. 곰이 쑥(蓬)과 마늘(蒜)을 먹으면서 웅녀가 됐다는 단군 신화에서 따온 이름으로 한국 신화의 원형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전한다. 미당 서정주의 집에는 서정주의 저서와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관악구와 고창군은 서정주를 매개로 자매결연도시를 맺었다. 2001년 중앙일보사에서 미당문학상을 제정했다.
시인 신동엽은 1930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69번지에서 출생했다. 1944년 부여초등학교, 1948년 전주사범학교, 1953년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64년 건국대학교대학원 국문과에 입학하여 한 학기를 수학했다. 1958년 충청남도 주산농업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60년에는 월간 교육평론사에서 근무했다. 1961년 명성여자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한 뒤 1969년 사망 전까지 재직했다.
1959년 장시(長詩)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조선일보』에 시 「진달래 산천」, 『세계일보』에 「새로 열리는 땅」을 발표했다. 1960년 『현대문학』에 「풍경」, 『조선일보』에 「그 가을」, 『학생혁명시집』에 「싱싱한 동자를 위하여」를 발표, 1963년 첫 시집 『아사녀』를 냈다. 1967년 『현대한국문학전집』 제18권 『52인 시집』에 「껍데기는 가라」, 「3월」, 「원추리」 등 7편의 시를 실었다. 같은 해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장편 서사시 「금강」을 『한국 현대 신작 전집』에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8년 『한국일보』에 시인 김수영 추모시 「지맥 속의 분수」,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보리밭」,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등을 발표했다.
신동엽은 향토성과 역사의식,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사실주의 경향의 시를 썼다.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1966), 평론 「시인정신론」(1961)도 발표했고 1968년에는 오페레타 『석가탑』을 드라마센터에서 상영했다. 1969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유저로 『신동엽시전집』(1975),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1979), 『신동엽전집』(1980)이 있다.
신동엽의 대표작은 「껍데기는 가라」(1967)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것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는 진정 필요한 것들을 돌아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고, 화합과 평화를 지향하는 시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한 “4월”이라는 시어에서 신동엽 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4‧19혁명을 떠올릴 수 있다. 혁명의 정신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시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이 시는 또한 신동엽 문학의 기반인 고향 부여와 금강을 연상할 수 있는 시다. 백제의 숨결이 살아있는 고장이자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가 선명한 부여와 금강에 대한 신동엽의 애착은 그의 또 다른 대표시인 「금강」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70년 신동엽의 고향 부여읍 동남리 금강변에 시비가 세워졌다. 1982년 신동엽창작기금이 조성되었고, 생가가 복원되었다. 1990년 단국대학교에 시비가 세워졌다.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금강」을 음악극화한 가극 『금강』이 초연되었다. 2003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13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신동엽길 12에 신동엽문학관이 건립되었다.
신석정은 1907년 7월 7일 전북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303-2번지에서 출생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1924년 『조선일보』에 소적(蘇笛)이라는 필명으로 「기우는 해」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등에 80여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1925년 『조선일보』에 「이국자의 노래」를 발표하면서부터 필명을 석정(夕汀)으로 바꾸었다. 출생일이 칠월 칠석(음력)이어서 ‘夕’자와 서해에 지는 낙조에 매료되어 ‘汀’자를 사용했다.
1931년 『시문학』 제3호에 「선물」을 발표하면서 시문학 후기 동인으로 가담했다. 1932년 유년시절을 보낸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집을 마련, ‘청구원(靑丘園)’이라 이름 짓고 본격적으로 작품 창작에 열중했다. 청구원에서 첫 시집 『촛불』(1939)과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1947)를 냈다. 1941년 『문장』과 『인문평론』이 폐간되고 친일문학지인 『국민문학』에서 원고를 청탁하자, 광복까지 절필하고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1945년 광복 직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결성에 참여했다. 고향에 학교를 세울 뜻을 품고 1946년 부안중학교를 개교, 교사가 부족하여 국어교사로 근무했다. 전북문화인연맹에 참여했다. 1952년 전쟁으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전주로 이주했다. 삼남일보사에서 일하다 이후 전주고등학교, 전북대학교, 영생대학, 김제고등학교, 전주상업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2년 『한국시인전집』(학우사 권1)에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방」 등 31편을 수록했다.
1960년 「동방반명」 등 4월 혁명을 촉구하는 시들을 『전북대학 교보』등에 발표했다. 1961년 5‧16 직후 ‘교원노조’를 지지하는 시 「단식의 노래」와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에 발표한 「춘궁은 다가오는데」, 「전아사」 등의 작품 때문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았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남노송동 175의 27번지로 이사, ‘비사벌초사’로 이름 지었다. 한국문인협회 전북지부장, 한국예총전북지부장을 역임했다. 1967년 월남파병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 시 「꿈의 일부」를 『신동아』에 발표했다. 1969년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취조를 받았다. 시집으로 『빙하』(1956), 『산의 서곡』(1967), 『대바람 소리』(1970)가 있다. 전라북도문화상(문학부분)(1958), 전주시 문화장(1965), 대한민국예술문학상(1973)을 수상했다. 1974년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같은 해 유고수필집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이 간행되었다.
신석정의 시는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다. 전원적인 이상향에 대한 희구가 나타나는 신성적의 초기 시는 탈속적이며 자연 지향적이어서 전원시인, 목가시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역사의식, 현실비판의식을 드러낸 시를 쓰며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신석정의 대표작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삼천리』, 1932)이다.
어머니/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를 끼고 돌면/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좁은 들길에 야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나려오면/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나리면/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서리까마귀 높이 날어 산국화 더욱 곱고/노란 은행잎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나와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1932년 식민지 현실 속에서 화자는 자연과 어머니로 상징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상향을 갈망한다. 이처럼 신석정의 시는 희망을 노래하면서 고달픈 현실을 위무했다.
1976년 전라북도 전주시 전주덕진공원에 ‘신석정 시비’가 건립되었고, 1986년 시비 옆에 동상이 세워졌다. 같은 해 10주기를 기념하여 ‘석정문학회’에서 『신석정대표시 평설』을 간행했다. 1991년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해창 ‘석정공원’에 시비가 건립되었다. 2004년 신석정시인 30주기 추모문학제가 개최되었고 2007년 ‘신석정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문학제’가 전국규모로 개최되었고 제1회 ‘촛불문학상’을 시상했다. 같은 해 유고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을 석정문학회에서 간행했다. 2009년 『신석정 전집』을 간행했다. 2011년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560번지 청구원 부근에 석정문학관이 개관했다.
경상남도 통영의 시인으로 유치환이 있다. 통영은 유치환의 고향이자 삶과 문학의 공간이었다. 유치환은 1908년 경상남도 통영시 태평동 552번지에서 출생했다. 유치환의 호는 청마(靑馬)로, 극작가 유치진의 동생이다. 통영보통학교를 졸업, 일본 도요야마중학교를 중퇴,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중퇴했다. 1923년 유치진이 중심이 된 동인지 『토성』, 1930년 유치진과 함께 만든 회람잡지 『소제부』에 시를 발표했다.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1932년 평양으로 이주했다가 고향에 돌아와 1934년 부산으로 이주했다. 1937년부터 통영협성상업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유치진은 통영여자중학교, 경남고등학교, 통영여자고등학교, 안의중학교, 경주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부산에서 문예동인지 『생리』를 주재하여 5집까지 간행했다.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발간했다. 여기에 초기의 대표작인 「깃발」, 「그리움」, 「일월」 등이 수록되었다. 1940년 가족과 만주 연수현으로 이주했다가 광복 직전에 귀국했다. 만주에서 느낀 허무의식과 생의 의지를 「절도」, 「수」, 「절명지」에 담아 두 번째 시집인 『생명의 서』에 수록했다. 광복 후에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맡아 민족문학 운동을 전개했고 6·25 전쟁 중에는 문총구국대로 종군했다. 전쟁의 경험을 담아 1951년 시집 『보병과 더불어』를 발표했다. 1953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교편을 잡았고, 1967년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교통사고로 작고했다.
시집으로는 『울릉도』(1948), 『청령일기』(1949), 『청마시집』(1954), 『제9시집』(1957),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미루나무와 남풍』(1964),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 등이 있다. 수상록 『예루살렘의 닭』(1953),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1959), 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1963) 등이 있다. 작고 후에 시조시인 이영도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 중 200통을 추려 모은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가 출간되었다. 서울특별회 문학상(1949), 경북문화상(1956), 자유문학상(1957), 한국시인협회상(1958), 대한민국 예술원상(1962), 부산시문화상(1964)을 수상했다.
유치환은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불렸다. 유치환의 시에서 생명에 대한 긍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치환의 시는 남성적 어조로 허무와 비애를 초극하고자 한다. 대표적인 시로 「깃발」(1939)이 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 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비애와 좌절의 서정 속에서도 이상향에 대한 동경과 의지가 나타나는 시다. 식민지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화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유치환이 머물렀던 곳마다 시비가 세워졌다.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공원, 부산 수정 가로 공원, 부산 용두산 공원, 부산영상예술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 통영남망공원 등에 시비가 있다. 2000년 경상남도 통영시 망일1길(정량동)에 생가가 복원되고 청마문학관이 개관되었다. 통영중앙동우체국이 있는 거리가 청마거리로 명명되었으며, 청마거리에 청마 유치환 상과 「향수」 시비가 건립되었다. 통영중앙동우체국에는 「행복」시비가 세워졌다. 2013년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산복도로에 '유치환 우체통 전망대'이라고 불리는 문화공간이 만들어졌다.
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지린성 북간도 명동촌에서 출생했다. 윤동주의 고향인 명동촌은 기독교에 대한 신앙심과 항일의식이 강한 지역이었고 윤동주의 할아버지는 기독교 장로였다. 윤동주는 신앙심과 민족의식을 키우며 자랐다. 아우 윤일주와 당숙 윤영춘도 시인이며 함께 자란 고종사촌 송몽규는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이다. 문익환도 명동촌 출신이며 윤동주와 함께 자랐다.
윤동주는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달라즈 중국인 관립학교를 거쳐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했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문을 닫아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에서 졸업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1942년 일본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 같은 해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했다. 1943년 항일운동 혐의로 송몽규와 검거되어 1945년 2월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사망했다.
광명중학교 4학년때 간도 연길에서 나온 『가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1936.11), 「빗자루」(1936.12), 「오줌싸개지도」(1937.1), 「무얼 먹구사나」(1937.3), 「거짓부리」(1937.10) 등을 발표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를 실었고, 연희전문학교 교지 『문우』에 「자화상」, 「새로운 길」을 게재했다. 사후인 1946년 『경향신문』에 시 「쉽게 쓰여진 시」가 발표되었다. 1941년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으나 하지 못하고 사후에 정병욱과 윤일주가 다른 유고와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를 간행했다. 윤동주는 식민지 지식인 청년의 상실감과 자아성찰을 서정적인 시어에 담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1941
윤동주가 활발한 시작활동을 했던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서울에 거주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입학 직후에는 기숙사 생활을 했고 1941년 5월부터 1941년 8월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9번지의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1941년 9월부터 북아현동의 하숙집에서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살았다. 이곳에는 1942년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전까지 머물렀다.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 누상동에서 함께 하숙을 했던 정병욱이 윤동주의 자필 시집을 보관했다가 윤동주 사후에 출간했다.
1968년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 교토 도시샤대학에도 윤동주의 친필과 일본어 번역이 새겨져 있는 「서시」 시비가 건립되었다. 2000년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윤동주 시문학상 수여, 윤동주 기념 강좌 등 선양 사업을 진행하고 2004년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기숙사로 사용되었던 연세대학교 핀슨홀에 사진 자료 및 서적을 전시한 윤동주기념실을 개관했다. 2012년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윤동주문학관이 개관했다. 친필 원고와 사진, 서명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윤동주의 시와 생애를 소개하는 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윤동주 문학관 옆에는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었다.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모임"이 2017년 교토 우지강변에 윤동주 기념비를 건립했다. 이처럼 윤동주의 삶과 시는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과 중국에서도 사랑받고 있다.
시인 오장환은 1918년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태어났다. 회인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안성으로 이주하여 안성 공립보통학교에서 졸업했다. 박두진과 같은 학교를 다녔다. 193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정지용에게 시를 배웠고, 문예반에서 교지 『휘문』을 만드는 일에 참여했고 시도 발표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후 일본 지산중학에서 수학했다. 1933년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6년 『낭만』, 『시인부락』,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참여했다. 1937년 메이지 대학 전문부 문과 문예과 별과에 입학했다. 첫 시집 『성벽』을 출판했고 시론과 작가론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938년 부친의 사망으로 메이지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 경성부 관훈정에 남만서방이라는 출판사 겸 서점을 냈다. 이 곳에서 두 번째 시집 『헌사』(1939년), 서정주의 『화사집』(1938년), 김광균의 『와사등』(1939년)을 출판했다. 1945년 인천에서 신예술가협회를 조직했고,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 1946년 번역시집인 『예세닌 시집』, 세 번째 시집인 『병든 서울』을 발간했다. 1947년 테러를 당해 치료와 이념 실현을 위하여 월북했다. 1948년 조선인민출판사에서 『남조선의 문학예술』을 출판, 이후 남포의 소련 적십자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모스크바의 시립 볼킨병원에서 요양했다. 1950년 소련 생활의 체험을 담은 마지막 시집 『붉은 기』를 출판했다. 1951년 한국 전쟁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장환은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당시 시단의 3천재로 불릴 정도로 문단의 호평을 받은 시인이다. 초기에는 현대적인 감각을 표현하고 새로운 기법의 실험을 보이는 등 모더니즘 시를 창작했으나 점차 리얼리즘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오장환의 시는 봉건적 인습, 전쟁, 식민지 근대 도시 문화를 비판하고 농촌현실을 고발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내용이 많다.
오장환의 대표작은 장시 「병든 서울」이다. 다음은 「병든 서울」의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는 일부분이다.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 품에
아모리 춤추는 바보와
술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人民(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랴
힘쓰는 이들을 ......
그리고 나는 웨친다.
우리 모든 人民(인민)의 이름으로
우리네 人民(인민)의
共通(공통)된 幸福(행복)을 위하야
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
아,
人民(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
오장환은 「병든 서울」에 병상에서 맞았던 해방에 대한 감격과 혼란한 해방 정국에 대한 비판,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열정을 담았다.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에는 오장환 생가가 보존되어 있으며, 생가 옆에 2006년 오장환문학관이 개관했다. 오장환의 시, 친필 엽서,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해마다 9~10월 오장환문학제가 열리며 백일장, 시그림그리기 대회, 시낭송대회, 문학강연 등이 열리고 있다.
작가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1910년 9월 23일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에서 출생했다. 큰아버지가 자식이 없어서 3세 때부터 통인동 본가 큰아버지의 집에서 성장했다. 1917년 신명학교에 입학하여 구본웅을 동기생으로 만났고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21년 신명학교, 1926년 동광학교,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했다.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면서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 표지도안 현상모집에도 당선되었다. 1930년 『조선』에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면서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31년 일문시(日文詩)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의 유희」, 「공복」, 「삼차각설계도」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다.
1933년에는 건강상의 문제로 직장을 그만두고 종로에서 다방 ‘제비’를 차려 경영했다.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윤태영, 조용만 등이 다방에 출입하여 교류했다. 1933년 『가톨릭청년』에 시 「1933년 6월 1일」, 「꽃나무」, 「이런 시」, 「거울」, 1934년 『월간매신』에 「보통기념」, 「지팽이 역사」, 『조선중앙일보』에 국문시 「오감도」 등 다수의 시작품을 발표했다. 「오감도」는 새로움과 난해함으로 발표 당시 독자들의 항의로 연재가 중단되었다. 1934년 구인회에 가입했고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1일」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1935년 다방을 폐업하고 1936년 창문사에 취직했다가 퇴사했다. 「날개」(1936), 「지주회시」(1936), 「동해」(1937) 등의 소설도 발표했다. 「소영위제」(1934), 「정식」(1935), 「명경」(1936) 등의 시와 「봉별기」(1936), 「종생기」(1937) 등의 소설, 「권태」(1937), 「산촌여정」(1935) 등의 수필을 발표했다. 일본 동경에서 1937년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었다가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 『이상전집』 3권이 1966년에 간행되었다.
이상은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언어유희와 역설 등을 사용한 새롭고 난해한 이상의 문학 세계는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지적인 반응으로, 현실을 초월하여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러케뿐이모혓소.(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길은뚤닌골목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이상의 연작시 「오감도」의 첫 작품인 「시제 1호」다. 1934년 7월 24일 『조선중앙일보』에 게재되었다.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을 주제로 한다고 분석하긴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추출해낼 수 없어 해석에 대한 논쟁이 많다.
서울특별시 종로구는 이상의 삶과 문학이 나서 자란 곳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154-10번지에 이상을 기리기 위한 “이상의 집”이 건립되었다. ‘이상의 집’은 이상이 1910년부터 1933년까지 거주했던 집터의 일부에 세워졌다. “이상과의 대화”, “이상의 문학에 대한 지정토론회” 등 많은 사람들이 이상을 기억하고 이상의 예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881번지에서 태어났다. 안동은 1894년 갑오의병이 일어난 곳이며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고장이다. 이육사는 안동에서 나고 자라면서 안동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체득했다. 이육사에게 안동은 고향이자 저항정신의 근원지였다.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綠), 이원삼(李源三)이다. 호인 육사(陸史)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264(二六四)’에서 딴 것이다.
이육사는 1919년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 1921년 백학학원에서 수학했다. 1923년 백학학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24년 일본 유학을 갔다. 1926년 베이징 쭝구어대학 상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1927년에 귀국,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후 이육사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에 일제를 배척하는 격문이 나붙는 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여러 번 일본 경찰에 검거, 투옥되었다.
1930년 첫 시 「말」을 '이활'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중외일보, 조선일보에서 일했다. 1932년 난징 근교 탕산에서 문을 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들어가 군사간부 교육을 받고 1933년 졸업, 상하이에서 루쉰(魯迅)을 만나고 귀국했다. 1934년 군사간부학교 출신이라는 것이 드러나 구속되었다. 1935년 『신조선』에 「춘수삼제」, 「황혼」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다. 1939년 「청포도」 발표, 1940년 「절정」, 「광인의 태양」 등을 발표했다. 1941년 한글 사용을 규제 받자 한시(漢詩)만 발표했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베이징으로 송치되어 1944년 1월 베이징 감옥에서 사망했다. 동생 이원조가 1945년 「꽃」, 「광야」를 소개하고 1946년 『육사시집』을 출판했다.
이육사는 시에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애, 일제에 대한 저항과 광복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이육사의 대표시인 「청포도」(『문장』, 1939.8)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광복에 대한 염원이 잘 나타나 있다.
내 고장 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화자가 간절히 기다리는 “내가 바라는 손님”은 이육사가 17번의 투옥을 감내하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조국의 해방이었을 것이다. 이육사의 또다른 대표시로는 「절정」(『문장』, 1940.1)이 있다.
매운 季節의 챗죽에 갈겨
마츰내 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高原
서리빨 칼날진 그우에서다
어데다 무릎을 꾸러야하나?
한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깜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된 무지갠가보다.
화자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육사의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이 잘 나타난 시다. 1968년 이육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안동에 이육사의 시비가 건립되었다. 2004년 이육사의 생가가 있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 생가가 복원되었고 이육사문학관이 개관되었다.
신소설을 쓴 이해조는 1869년 2월 27일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신평리 121번지에서 출생했다. 이해조의 가문은 고종의 종친이었다. 어릴 적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1887년 19세에 초시에 합격했으며, 25, 6세 무렵에는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한시를 즐기던 유학자들의 모임)를 주관했다. 1901년에 양지아문(量地衙門)의 양무위원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이주한 후에는 임낭굴(현재 익선동), 와룡동, 도렴동 등지에서 살았다. 양지아문은 토지와 측량을 담당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곳으로 양무위원이 되려면 산술과 외국어에 능통해야 했다. 1903년 1월에는 중추원 의관으로 임용되었다가 곧 면직되었고 이후 관직은 수행하지 않았다. 관직 수행의 경험으로 이해조는 신학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05년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면직 후 낙연의숙(洛淵義塾) 교원으로 일하다가 1906년 아버지 이철용이 설립한 포천의 신야의숙(莘野義塾)에서 근무했다. 1907년 돈명의숙(敦明義塾)의 숙감(塾監)으로, 사실상 학교를 운영했는데 폐교되고 말았다. 1907년 양기탁, 주시경 등과 함께 광무사를 조직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고 1908년 애국계몽단체인 대한협회, 기호흥학회의 일원이 되었다. 1909년 기호흥학회 소속 기호학교의 겸임교감까지 맡았다.
1906년 한국 최초의 소년 잡지인 『소년한반도』에 한문 소설 「잠상태」를 연재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소년한반도』가 폐간한 이후 『황성신문』, 『제국신문』에 취직, 1907년 6월 5일부터 『제국신문』에 소설 「고목화」를 연재했고 1910년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화세계」, 「화의 혈」, 「옥중화」 등 여러 작품을 연재하면서 신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빈상설」(1907), 「홍도화」(1908), 「원앙도」(1909), 「만월대」(1910), 「쌍옥적」(1911), 「월하가인」(1911), 「모란병」(1911), 「소양정」(1912), 「춘외춘」(1912), 「탄금대」(1912), 「홍장군전」(1918) 등을 발표했다. 미신타파를 주장한 「구마검」(1908), 정치소설로 사회개혁의식을 담고 있는 「자유종」(1910), 동학봉기가 소재인 「화의 혈」(1912), 추리소설 「구의산」(1912) 등이 대표작이다.
이해조는 일본어를 독학하여 「철세계」(1908), 「화성돈전」(1908), 「앵속화 제조법」 등을 번역했고,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별주부전」을 현대적 소설로 개작하여 각각 「옥중화」, 「강상련」, 「연의 각」, 「토의 간」으로 발표했다.
이해조는 이인직과 함께 신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해조는 근대의식과 계몽주의를 구어체와 사실적 서술에 담아 고전소설과는 다른 새로운 근대 양식의 소설인 신소설을 창작했다. 당시 신소설이 큰 인기를 얻어 후기로 갈수록 흥미 위주의 소설을 창작하기는 했지만, 계몽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근대적 소설을 창작한 뛰어난 소설가였다. 뿐만 아니라 외국의 소설들을 번역하여 당시 사회에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1927년 포천 자택에서 병사했다.
이해조를 기리는 사업이 이해조의 고향인 경기도 포천군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2005년 ‘동농 이해조 선생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이해조 관련 세미나 및 특별 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2017년 '이해조소설문학상'을 제정하여 수여하고 있다.
강원도 춘천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김유정을 들 수 있다. 김유정은 1908년 2월 12일 춘천의 이름난 가문에서 출생했다. 1914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했는데 이후 부모를 잃어 형제와 친지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재동공립보통학교,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를 휴학했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는 고향인 춘천의 실레마을에 머물면서 금병의숙이라는 간이학교를 설립, 학생들을 가르쳤다.
1933년 단편 소설 「산골나그네」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시기 폐결핵이 발병했다. 1937년 사망까지 다수의 단편소설과 수필을 발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가난한 농민과 서민 등 하층민의 삶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향토색이 짙고 해학적이다. 현재 춘천에는 김유정의 삶과 작품세계를 기리는 김유정문학촌이 조성되어 있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호밖에 못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주위가 이렇게 시적이니만치 그들의 생활도 어디인가 시적이다. 어수룩하고 꾸물꾸물 일만하는 그들을 대하면 딴 세상을 보는 듯하다......그리고 산골에는 잔디도 좋다. 산비알에 포근히 깔린 잔디는 제물로 침대가 된다. 그 위에 바둑이와 같이 벌릉 자빠져서 묵상하는 재미도 좋다. 여길 보아도 저길 보아도 우뚝우뚝 섰는 모조리 푸른 산이매, 잡음 하나 들리지 않는다. 이 산속에 누워 생각하자면, 비로소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요히 느끼게 된다.
김유정의 아름다운 고향산천에 대한 사랑은 그의 글 곳곳에 나타난다. 김유정의 소설에도 그의 고향이 등장한다.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김유정의 대표작인 「동백꽃」에서 점순이와 ‘나’가 애정의 실랑이를 벌이는 공간이 바로 김유정의 고향마을이다. 김유정의 소설 중에서도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노다지」, 「산골」, 「동백꽃」, 「만무방」, 「금따는콩밭」, 「안해」, 「가을」, 「두포전」의 배경이 고향이라고 알려져 있다. 작품 속에 고향의 지명이 나오지는 않으나, 강원도라는 지명과 주변의 고장인 회양, 강릉, 홍천 등이 등장하고 있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김유정의 고향인 춘천의 한 마을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따사로운 햇발이 숲을 새어든다. 다람쥐가 솔방울을 떨어치며, 어여쁜 할미새는 앞에서 알씬거리고. 동리에서는 타작을 하느라고 와글거린다. 흥겨워 외치는 목성, 그걸 억누르고 공중에 응, 응, 진동하는 벼 터는 기계 소리. 맞은쪽 산속에서 어린 목동들의 노래는 처량히 울려온다. 산속에 묻힌 마을의 전경을 멀리 바라보다가 그는 눈을 찌긋하며 다시 한 번 하품을 뽑는다. 이 웬 놈의 하품일까. 생각해보니 어젯저녁부터 여태껏 창자가 곯렸던 것이다.
「만무방」에 나타난 산골 마을의 정경이다. 경치는 아름답지만, 그 곳의 사람들은 가난에 허덕인다. 가을이 되어 추수는 했으나 지주에게 빚을 갚고 나면 식량으로 먹을 쌀마저도 없기 때문이다. 김유정은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한 서사에서 당시 농촌이 겪는 가난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 김유정은 직접 고향으로 내려와 학교를 설립하는 등 농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활동들을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향토애는 빈곤한 하층민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어 김유정의 삶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친다.
현재 김유정의 고향인 춘천의 실레마을에는 김유정문학촌이 조성되어있다. 김유정문학촌에는 김유정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작품 속 공간을 재현한 산책로, 기념전시관, 기념물들이 있고 매해 각종 문학축제와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김유정과 그가 사랑했던 고향 춘천을 잊지 않고 찾아온다.
아동문학가 정채봉은 1946년 11월 3일 전라남도 순천 해룡면 신성리에서 출생했다. 1948년 전라남도 광양으로 이주하여 광양에서 성장했다. 학비가 없어 학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광양농업고등학교에 입학, 학교 도서실에서 많은 문학작품을 접하게 되면서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대학시절 생 떽쥐베리의 작품을 접하면서 동화를 쓰기로 결심했다. 광양농업고등학교, 1975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샘터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했고, 동국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꽃다발」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83년 동화 「물에서 나온 새」로 대한민국문학상 우수상, 1986년 동화집 『오세암』으로 제14회 새싹 문화상, 1991년 『생각하는 동화』로 동국문학상, 2000년 『푸른 수평선은 왜 멀어지는가』로 제33회 소천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 동화 『초승달과 밤배』(1987), 『모래알 한가운데』(1989), 『느낌표를 찾아서』(1991), 『입 속에서 나온 동백꽃 세 송이』(1997), 『눈동자 속으로 흐르는 강물』(1997), 『푸른 수평선은 왜 멀어지는가』(2000), 『그대 뒷모습』(2001) 등을 발표했다. 2001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정채봉 문학세계의 사상적 기반은 불교와 가톨릭교이다. 정채봉은 불교의 영향 아래 성장했고,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지켜보면서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되었다. 정채봉의 동화는 불교와 가톨릭교의 철학적 기반 위에 환상적인 사건과 추리소설적인 구성을 얹어 흥미를 유발하면서 교훈을 준다. 이로 인해 정채봉의 동화는 소설보다 저급한 장르라는 동화에 대한 편견을 없애면서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다. 정채봉은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한국 동화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정채봉에게 고향은 외롭고 우울한 어린 자신을 보듬어준 자연이 있는 곳이었다. 정채봉의 어머니는 정채봉의 동생을 낳은 뒤 사망하고, 아버지는 일본으로 이주하여 정채봉은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이 때문인지 어린 시절의 정채봉은 심약하고 내성적이었다. 친구도 없었던 정채봉에게 위안을 준 것이 자연이었다. 정채봉의 동화 속에 바다와 나무, 꽃들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채봉의 고향은 정채봉 문학의 배경이자 문학적 상상력의 근원이다.
정채봉의 자전적 동화 『초승달과 밤배』에서 정채봉의 고향과 어린 시절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바다는 언제 보아도 초가을 배추처럼 싱싱하였다. 그리고 간혹 재수가 좋은 날은 멀리 어디론가 가고 있는 기선이 보였다. 난나는 그 은빛 나는 기선의 선장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초승달과 밤배』, 한국문학사, 1987, 10면
정채봉의 수필에도 고향의 모습이 보인다.
내 어린 날의 배경은 온통 바다로 메워져 있다. 어느 기억이고 바다와 떨어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고만고만한 초가들이 바지락 조개들처럼 바다를 향해 다소곳이 엎드려 있는 마을. 그 마을의 가장 위쪽에 우리집이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집의 마루에서는 앉거나 서거나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아침이면 섬들은 헤집고 말갛게 떠오른 해가 이슬마다에다 영롱하게 입을 맞추는 것을 보았고, 달이 뜨는 밤이면 달빛이 파도 소리와 함께 남실남실 문지방을 적셔들던 것을 보았다.
-「유년의 바다」, 『그대 뒷모습』, 제삼기획, 1990
2001년 『물에서 나온 새』 독일어판이 출판되었다. 2004년 애니메이션 『오세암』이 프랑스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초승달과 밤배』가 영화로 상영되었다. 2005년 정채봉전집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순천문학관 정채봉관이 2010년 개관했다. 2011년에 정채봉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정지용은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번지에서 출생했다.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등학교), 1918년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집안이 어려워 교비생(학교의 경비로 공부하는 학생)으로 학교를 다녔다. 정지용은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시 같은 학교를 다니던 홍사용, 박종화, 김윤식, 이태준 등과 교류했으며,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냈다. 1919년 3.1운동과 관련한 휘문사태를 주동하 정지용은 무기정학을 받았으며, 같은 해 12월 『서광』 창간호에 소설 「3인」을 발표했다.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정지용은 다음해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1926년 유학생 잡지인 『학조』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등 9편의 시, 『신민』, 『문예시대』에 「Dahlia」, 「홍춘」 등 3편의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의 『근대풍경(近代風景)』에 3년간(1926. 12~1928. 2) 「카페 프란스」, 「바다」, 「갑판위」 등 시 13편, 수필 3편을 발표했다.
정지용은 1927년 『신민』, 『문예시대』, 『조선지광』, 『청소년』, 『학조』에 「갑판우」, 「향수」 등 30여 편의 시를 발표했다. 1929년 도시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휘문고보 영어과 교사로 부임했다. 1930년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했고 이 시기부터 정지용은 1930년대 문단에서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조선지광』, 『시문학』, 『대조』, 『신소설』, 『신생』에 「겨울」, 「유리창」 등 20여 편의 시와 번역시 「소곡」(블레이크 원작)등 3편을 발표했다. 이후 지속적으로 시와 평론, 수필 등을 여러 잡지에 발표했다. 1933년 6월에 창간된 『가톨릭 청년』의 편집 고문역을 하며 많은 신앙시를 발표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구인회의 창립회원(이태준, 이무영, 유치진, 김기림, 조용만 등)이 되었다.
1935년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을 출간했다. 1939년 『문장』의 시 부문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켰다. 1941년 두 번째 시집 『백록담』을 출간했다. 1945년 이화여자전문학교(현재 이화 여자대학교)교수로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하기 시작하여 1948년까지 교수직을 수행했다. 경향신문사 주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로도 활동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구금되었는데 평양감옥에 수용되었다가 납북, 전쟁 중에 폭사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집 『지용 시선』(1946), 산문집 『문학독본』(1948), 『산문』(1949)을 간행했다.
정지용은 언어에 대한 자각이 각별한 시인이었다. 절제된 언어로 감각적인 시를 썼다. 「향수」(1927), 「유리창」(1930)이 정지용 대표작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활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의 시 「향수」에 나오는 고향은 충북 옥천이다. 이 시에서는 고향 옥천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도 찾을 수 있지만, 잃어버린 나라를 그리운 고향에 빗대어 잊지 않고 되찾을 것이라는 열망도 느낄 수 있다. 그 열망이 감각적이고 현대적인 시어에 담겨 있다. 정지용은 시작 초기에 이와 같은 감각적인 이미지즘의 시들을 발표했고, 1933년부터 1935년까지는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시, 이후부터는 동양적인 사상이 드러나는 산수시들을 발표했다.
정지용 문학은 그가 납북시인이라는 이유로 판금되어 있다가 1988년 해금되었다. 같은 해 지용회가 결성되어 5월 15일 세종문화회관 소강당과 6월 25일 고향인 옥천의 관성회관에서 제1회 지용제가 개최되었다. 1989년에 정지용의 시 「향수」에 김희갑이 작곡하여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이 노래를 불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같은 해 정지용문학상이 제정되었다. 1996년 옥천의 정지용 생가가 복원되고 2002년 5월 정지용 탄신 100주년 서울지용제 및 지용문학심포지움 개최했다. 2005년 정지용의 모교인 교토 도시샤 대학 교정에, 대학 후배 윤동주 시인의 시비 바로 옆에 정지용 시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같은 해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56에 정지용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정지용 문학관이 개관했다.
조태일은 1941년 전남 곡성 태안사에서 출생했다. 광주서중학교, 광주고등학교를 거쳐 1966년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아침 선박」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69년 『시인』을 창간하여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 등을 발굴했다. 1974년 고은, 백낙청, 신경림, 황석영, 염무웅, 박태순 등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립, 독재에 저항하다 여러 번 투옥되었고, 1980년부터 3년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1988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바뀌면서 초대 상임이사를 맡았다. 1989년 광주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99년 간암으로 작고했다.
편운문학상(1991), 전남도문화상(1992), 만해문학상(1996)을 수상했고,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시집 『아침 선박』(1965), 『식칼론』(1970), 『국토』(1975), 『가거도』(1983), 『연가』(1985), 『자유가 시인더러』(1987), 『산 속에서 꽃 속에서』(1991), 『풀잎은 꺾이지 않는다』(1995),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1999), 평론집 『고여 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1980), 『김현승 시 정신 연구』(1998)를 출간했다. 2000년 5·18 유공자로 등록돼 국립5·18민주묘지에 이장됐다.
조태일의 초기 시는 삶의 순수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점차 억압적인 정치 현실에 반발하여 민중적 연대를 통해 제도적 폭력에 맞서고자 하는 의지를 담은 시를 창작했다. 연작시 「식칼론」은 1970년대 참여시의 한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내 가슴속에 뜬 눈의 그 날카로움의 칼빛은,/어진 피로 날을 갈고 갈더니만/드디어 내 가슴살을 뚫고 나와서
한반도의 내 땅을 두루 두루 날아서는/대창 앞에서 먼저 가신 아버님의 무덤속 빛도 만나 뵙고/반장님 바로 옆집에서 홀로 계신 남도의 어머님 빛과도 만나 뵙고/흩어진 엄청난 빛을 다 만나 뵙고 모시고 와서/심지어 내 男根 속의 미지의 아들딸의 빛도 만나 뵙고/더욱 뚜렷해진 無敵의 빛인데도, 지혜의 빛인데도,/눈이 멀어서, 동물원의 누룩돼지는 눈이 멀어서,/흉물스럽게 엉뎅이에 뿔 돋친 황소는 눈이 멀어서,/동물원의 짐승은 다 눈이 멀어서 이 칼빛을 못 보냐.//생각 같아서는 먼눈 썩은 가슴을 도려 파버리겠다마는,/당장에 우리 나라 국어대사전 속의 「改憲」이란/글자까지도 도려 파버리겠다마는
눈 뜨고 가슴 열리게/먼눈 썩은 가슴들 앞에서/번뜩임으로 있겠다. 그 고요함으로 있겠다./이 칼빛은 워낙 총명해서 워낙 관용스러워서.-「식칼론 3―憲法을 위하여」, 『식칼론』, 시인사, 1970, 17면
조태일은 이후에도 분단 문제 등 정치, 역사적인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민중적 삶을 추구하는 시를 창작했다.
사람들은 풀꽃을 꺾는다 하지만/너무 여리어 결코 꺾이지 않는다./피어날 때 아픈 흔들림으로/피어 있을 때 다소곳한 몸짓으로/다만 웃고만 있을 뿐/꺾으려는 손들을 마구 어루만진다./땅속 깊이 여린 사랑을 내리며/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에/노래되어 흔들릴 뿐./꺾이는 것은/탐욕스런 손들일 뿐.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창작과비평사, 1995, 33면
풀꽃은 민중을, 꺾이지 않는 풀꽃은 민중의 힘과 생명력을 상징한다. 조태일의 고향인 전라남도 곡성군은 조태일의 삶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2003년 태안사 근처에 조태일시문학관이 개관했다. 조태일의 육필 원고와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시인 조병화는 1921년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 322번지에서 출생했다. 호는 편운(片雲)이다. 용인송정공립보통학교, 서울미동공립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 1943년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이과에 입학하여 물리‧화학을 전공했다. 1945년 귀국하여 경성사범학교, 제물포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5년 중앙대 강사, 1967년 이화여대 강사, 1959년부터 1980년까지 경희대 국문과 교수, 1981년 인하대 문과대학장과 부총장을 역임한 후 1984년 퇴임, 명예교수로 재직했다. 1957년부터 국제 P.E.N 대회, 1973년부터 세계시인대회에 참가하면서 세계의 문인들과 교류했다. 2003년 3월 8일 사망하였다.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하며 등단한 이후 『하루만의 위안』(1950), 『패각의 침실』(1952), 『인간고도』(1954), 『사랑이 가기 전에』(1955), 『서울』(1957), 『석아화(石阿花)』(1958),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1959), 『밤의 이야기』(1960), 『낮은 목소리로』(1962), 『공존의 이유』(1963), 『쓸개 포도의 비가』(1963), 『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1964), 『내일 어느 자리에』(1965), 『가을은 남은 거에』(1966), 『가숙(假宿)의 램프』(1968), 『내 고향 먼 곳에』(1969), 『오산 인터체인지』(1971), 『별의 시장』(1971), 『먼지와 바람 사이』(1972), 『어머니』(1973), 『남남』(1975), 『창안에서 창밖에』(1976), 『딸의 파이프』(1978), 『안개로 가는 길』(1981), 『머나먼 약속』(1983), 『나귀의 눈물』(1985), 『어두운 밤에도 별은 떠서』(1985), 『해가 뜨고 해가 지고』(1985), 『지나가는 길에』(1989), 『후회없는 고독』(1990), 『찾아가야 할 길』(1991), 『낙타의 울음소리』(1991), 『타향에 핀 작은 들꽃』(1992), 『다는 갈 수 없는 세월』(1992), 『잠 잃은 밤에』(1993), 『하루만의 위안』(1994), 『시간의 속도』(1995),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1998), 『공존의 이유』(1998) 등 많은 시집을 발간했다. 『밤이 가면 아침이 온다』(1958) 등의 시론집 4권과 『시인의 비망록』(1977)을 비롯한 27여 권의 수필집도 간행했다. 아세아 자유문학상(1960), 경희대문화상(1969)과 한국시인협회상(1974), 대한민국 예술원상(1985), 3‧1문화상(1990), 대한민국 문학대상(1992) 등을 수상했다. 조병화의 시는 인간의 삶과 고독의 문제라는 근원적이고 광범위한 주제와 일상적 언어를 사용한 시어로 문학성과 대중성 모두를 획득했다.
잊어버려야만 한다/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나도 또 하나 작은/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눈을 감으면/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잔디밭에 누워/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그날을 위하여 바쳐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그날이 오면/잊어버려야만 한다/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하루만의 위안」(1950)에는 죽음과 이별의 문제에 대한 슬픔과 고뇌가 담겨 있다.
2010년 고향인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에 조병화문학관이 개관되어 매년 조병화시축제가 열리고 있다. 전국 각지에 세워진 60여기의 시비를 소개한 조병화시비전이 2010년 조병화문학관에서 개최되었다. 1962년 조병화의 어머니가 별세하자 다음해 조병화가 어머니 묘소 옆에 세운 묘막인 편운재가 2016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편운재에는 조병화의 작업실이었던 혜화동 서재가 원형 그대로 옮겨져 있다.
시인 이장희는 1900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이장희의 집안은 대구의 부호였다. 1912년 대구보통학교, 1918년 일본 경도중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금성』 5월호에 시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 마리」, 「불놀이」, 「무대」, 「봄은 고양이로다」 와 톨스토이 원작의 번역소설 「장구한 귀양」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생장』, 『신여성』, 『여명』, 『신민』, 『조선문단』, 『문예공론』, 『중외일보』 등에 「동경」, 「석양구」, 「청천의 유방」, 「하일소경」, 「봄철의 바다」, 「고양이의 꿈」, 「눈은 나리네」, 「연」 등을 게재했다.
비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이상화, 양주동, 백기만, 유엽, 김영진 등 몇몇의 문인과만 교류했다. 일본어 통역 등으로 가업을 잇기 바라는 친일파 아버지와의 불화로 가난하게 살다가 1929년 11월 대구 자택에서 음독자살했다.
출간한 시집은 없고, 사후에 백기만이 이상화와 이장희의 시를 정리한 『상화(尙火)와 고월(古月)』과 『봄과 고양이』(1982), 『봄은 고양이로다』(1983), 두 권의 전집이 나왔다.
이장희는 섬세한 감각과 조형적 이미지를 시를 통해 보여주었다. 대표작은 「봄은 고양이로다」(1923)이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포근한 봄의 졸음이 떠돌아라./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고양이라는 한 대상과 봄이라는 현상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대응하고 있는 시로 시인의 관찰력과 분석력이 돋보인다.
또 다른 대표작인 「하일소경」(1926)에도 감각적인 이장희 시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雲母같이 빛나는 서늘한 테이블./부드러운 얼음, 설탕, 牛乳./피보다 무르녹은 딸기를 담은 琉璃盞./얇은 옷을 입은 저윽히 고달픈 새악시는/기름한 속눈썹을 깔아메치며/가냘픈 손에 들은 銀사슬로/琉璃盞의 살찐 딸기를 부수노라면/淡紅色의 淸凉劑가 꽃물같이 흔들린다./銀사슬에 옮기인 꽃물은/새악시의 고요한 입술을 앵도보다 곱게도 물들인다./새악시는 달콤한 꿈을 마시는 듯/그 얼굴은 푸른 잎사귀같이 빛나고/콧마루의 水銀같은 땀은 벌써 사라졌다./그것은 밝은 하늘을 비추어 작은 못 가운데서/거울같이 피어난 蓮꽃의 이슬을/헤엄치는 白鳥가 삼키는 듯하다.
여름날 딸기 화채를 만드는 여인의 모습을 흰색, 붉은 색, 푸른 색 등의 색감으로 묘사하고 있다. 서늘함과 부드러움, 고요함, 달콤함 등의 감각이 여러 가지 색감을 만나 구체화된다.
이장희의 감각적인 시는 1920년대 시들이 보여주었던 감상적인 시들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어서 문단의 관심을 받았고 이후 한국시의 발전에 한 계기가 되었다. 이장희의 시에는 주제의식이나 시인의 관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쥐약을 먹고 자살할 정도로 극심한 내적 갈등을 가졌던 이장희의 삶을 떠올린다면 주제의식과 관념이 배제된 이장희의 시에서 오히려 우울과 불안, 죄의식 등의 시대의식을 찾을 수 있다.
어린 시절 친모를 잃으면서 가지게 된 상실감, 복잡한 가족사를 만들며 친일로 부를 축적하는 아버지에 대한 저항심은 식민지 지식인 청년의 나라 잃은 상실감과 일본에 대한 저항심을 만나 그 비애와 분노가 증폭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친일파의 아들로서 가지게 되는 죄의식도 이장희의 내적 갈등을 심화시켰을 것이다. 감각적 시어로 완성한 이장희의 시는 이장희의 이러한 내적 갈등이 철저히 가려져 있기에 더욱 비장하다.
조지훈은 1920년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동탁(東卓)이다. 제헌(制憲) 및 2대 국회의원이며 한의학자인 조헌영의 둘째 아들이다. 중학 과정을 독학하고 전문학교 입학 자격 검정 시험에 합격, 1941년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1939년 3월 『문장』에 시 「고풍의상(古風衣裳)」, 같은 해 12월 「승무(僧舞)」, 1940년 2월 「봉황수(鳳凰愁)」가 추천을 받아 게재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하며 불경과 당시(唐詩)를 접했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5년 광복 후 명륜전문학교 강사, 한글학회 국어교본 편찬원,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찬원으로 일했다.
1946년 박목월, 박두진과 시집 『청록집』을 발표하면서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1946년 경기여고 교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김동리, 조연현 등과 함께 한국문학가협회 창립위원이 되어 순수문학과 민족문학을 옹호했다. 『사상계』 편집위원이었다. 6·25 전쟁 때는 종군작가로 활약했다. 1956년 자유 문학상을 받았고, 1961년에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회의에 참석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소장으로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 추진했다.
조지훈은 『청록집』(1946), 『풀잎단장』(1952), 『조지훈시선』(1956)에서 역사의식과 고전미를 시화하면서 불교와 유교를 철학적 배경으로 한 전통지향적인 시세계를 보여준다. 『역사 앞에서』(1959)에서는 시세계의 변화가 있어, 광복 이후의 혼란과 전쟁의 참상 등 현실에 대응하는 사실적인 시들이 등장한다. 그 외의 저서로 시집 『여운(餘韻)』(1964)과 수상록 『창에 기대어』(1956), 『지조론』(1962), 『돈의 미학』(1964), 평론집 『시의 원리』(1953), 『시와 인생』(1953), 『한국문화사서설』(1964), 번역서 『채근담(菜根譚)』(1959) 등이 있다. 조지훈은 민족의식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시인이자 학자이며 지사였다. 1968년 별세했다.
조지훈의 대표작은 초기시인 「승무」(1939)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 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지는 두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腦는 별빛이라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은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양 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자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승무가 보여주는 예술적 춤사위와 불교적 정신세계를 감각적인 언어에 담아 표현하고 있다. 전통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 민족의식을 상기시키는 시로,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1972년 서울 남산, 1982년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실에 시비가 건립되었다. 2007년 조지훈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 지훈문학관이 개관했다. 조지훈의 시, 저서,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매년 조지훈예술제도 열린다. 지훈문학관 주변에는 지훈시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아동문학가 이오덕은 1925년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덕계리(청송군 현서면 구평길 13)에서 출생했다. 1933년 화목공립심상소학교, 1943년 영덕공립농업실수학교를 졸업했다. 1944년 교원시험에 합격해서 청송 부동국민학교 교사로 발령받은 이후 1986년까지 경상북도 지역 농촌의 초등학교에서 교사, 교감, 교장직을 수행했다.
1954년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발표했고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꿩」이 당선되었다. 이오덕은 아동문학가로서 자신의 농촌 체험과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어린이를 존중하고 어린이의 현실이 잘 반영된 리얼리즘적 아동문학을 지향했다. 또한 글쓰기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우리말과 글을 잘 다듬어 사용할 것을 강조하며 우리말 연구에 앞장섰으며 어린이를 위한 ‘참교육’을 지향했다. 1972년 「부정의 동시」로 제2회 한국아동문학상, 1988년 교육자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제3회 단재상, 199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참교육상, 2002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1965년 첫 저서 『글짓기 교육의 이론과 실제』를 출간한 이후, 동시집 『별들의 합창』(1966), 『탱자나무 울타리』(1969), 『까만새』(1973), 『개구리 울던 마을』(1981), 동화집 『종달새 우는 아침』(1987), 『아기별이 사는 세상』(1987), 수필집 『삶과 믿음의 교실』(1982), 평론집 『아동시론』(1973), 『시정신과 유희정신』(1977),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1984) 등을 출간했다. 1978년에는 아이들의 시를 모아 『일하는 아이들』을 펴냈다. 1983년 교사들과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를 만들고, 퇴임 후 1988년 우리말연구소를 설립하여 글쓰기 교육운동과 우리말 연구에 힘썼다. 『우리문장 바로쓰기』(1992)와 『우리글 바로쓰기』(전3권, 1995), 『삶을 가꾸는 글쓰기교육』(1984),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1993) 등 50여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
1954년 한국아동문학회 창립 회원, 1963년 경북글짓기교육연구회 창립 회원, 1971년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창립 회원, 1980년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부회장, 1983년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창립 대표, 1984년 경북아동문학연구회 창립 회원, 1986년 민주교육실천협의회 공동대표, 1987년 전국초등민주교육협의회 창립 자문위원, 1988년 우리말연구소 창립, 1989년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창립 회장, 1998년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 창립 공동대표가 되는 등 아동문학과 교육 관련 단체에 참여하거나 모임을 조직하여 아동문학, 아동교육 발전과 교육민주화를 위한 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근무하던 학교 근방에 살던 아동문학가 권정생(權正生)을 발굴하여 문단에 알리고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2003년 사망했다.
이오덕에게 고향 청송은 삶과 문학 그리고 교육철학의 근원지였다. 이오덕을 기리는 사업이 청송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화목리에 이오덕문학비가 서 있으며, 2016년부터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에서 이오덕 문학 축제가 열리고 있다. 청송군에는 이오덕문학관도 건립 중에 있으며 이오덕 문학 테마길도 조성될 예정이다. 이오덕의 교육철학을 반영하여 일, 놀이, 공부를 기반으로 한 노작교육을 지향하는 이오덕 학교가 2003년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에 세워졌다. 이오덕의 장남인 이정우가 운영하고 있다.
김수영(金洙暎)은 1921년 11월 27일 종로2가 관철동 158번지에서 태어났다. 현재 종로2가 탑골공원 맞은편 길가에 생가터 표지석이 있다. 다음해 김수영 일가는 종로6가로 이사했는데, 김수영은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이곳에서 성장했다. 전쟁을 겪고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온 뒤 김수영은 아내와 함께 성북구 일대 셋방을 전전하다 마포구 구수동에 집을 장만하고 정착했다. 이곳에서 김수영은 글을 쓰며, 생활의 방편으로 닭을 키우며 지냈다.
한편 김수영의 집안은 선영이 있던 도봉구 도봉동 산 107-2번지로 옮겨와 살고 있었다. 김수영은 일을 그만둔 노모의 노후를 위해 도봉동 본가에 작은 양계장을 마련했다. 김수영은 이 양계장을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한 달의 절반 이상은 도봉동 양계 농장에 와서 지냈다. 김수영은 도봉산 골짜기를 무척 좋아했고, 글을 쓰거나 번역할 거리가 생기면 늘 도봉동으로 와서 작업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김수영은 모더니스트로 분류되던 시인이었다. 그의 초기 시는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의 시풍이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은 전쟁 체험과 4월 혁명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끌려갔다가 나중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이때 김수영은 자유에 대한 근원적 갈망을 품게 되었고, 그 갈망은 4월 혁명을 계기로 자유를 실현하는 사회 참여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자유의 실현은 이내 좌절되었고, 김수영은 혁명이 실패한 이유를 근본적으로 성찰하였다. 그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낙후된 현실을 끌어안았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거대한 뿌리」)
김수영은 숭고한 이상을 꿈꾸었지만, 더러운 세속도시에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을 부인하지 않았다. 자유와 풀을 노래한 김수영의 시와 산문들은 동묘와 구수동 등 서울의 골목골목을 배경으로 쓰였다. 특히 죽기 보름 전에 썼던 유작시 「풀」을 비롯한 말년의 많은 시편과 글들은 도봉동의 집필실에서 창작되었다.
1968년 6월 15일 밤, 김수영은 청진동의 선술집에서 문인들과 술을 마시고 귀가하다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쓰러졌고 다음날 생을 마감했다. 시인의 유해는 도봉산의 선영에 묻혔다. 다음해 무덤 앞에 시비가 세워졌는데, 이 비석은 1991년 4월에 북한산국립공원 도봉지구 내 도봉서원 입구 근처로 이전했다. 그리고 1994년 시인의 유해를 화장해 시비 아래에 묻었다. 시비가 곧 무덤이 되었다. 김수영의 시비에는 「풀」의 두 번째 연이 새겨져 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현재 김수영이 살았던 집들은 모두 재개발로 사라졌고, 도봉동 본가 터에 양계장 축사와 집필실로 사용되었던 조그만 기와집만이 남아 있다. 2013년 11월 27일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김수영문학관’이 건립되었다. 김수영문학관은 김수영의 육필원고와 애장도서, 김수영에 관련된 자료 등 자료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며, 각종 세미나와 전시가 열리는 등 문화공간으로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충청북도 진천군에는 송강 정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정송강사가 있다. 이곳에는 송강 정철의 묘소와 우암 송시열이 글을 쓴 송강정철신도비, 송강정과 유품을 보관하고 있는 송강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처음 송강 정철이 죽어 묻힌 곳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있는 송강마을인데, 1665년에 송시열의 권유로 이장하였다. 현재 송강마을에는 초장지 표석만 남아 있지만, 송강 정철의 부모님 묘소와 맏형의 묘 등 송강 가문의 유적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송강마을은 송강 정철이 부모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하며 6년간 머물렀고, 1585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4년간 지냈던 곳이다. 또한 송강이 「영자미화(詠紫薇花)」라는 한시를 남기며 아꼈던 기생 강아의 무덤도 있다. 이곳에는 송강시비공원과 송가문학관을 비롯하여 송강의 호를 딴 명소들이 많고, 매년 5월에는 송강정철문화축제도 열린다.
한편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의 ‘죽서루’에는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죽서루’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송강 정철은 45세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여러 명승지를 둘러보고 그 유명한 「관동팔경」을 지었다.‘송강 정철 가사의 터’ 표석은 1991년, 2월을 ‘송강 정철의 달’로 기념하기 위해 세운 2개의 표석 중 하나인데, 다른 하나는 바로 전라남도 담양군의 식영정에 있다.
전라남도 담양군은 송강 정철이 김윤제 등으로부터 문학 수업을 받은 곳이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수많은 시가를 남긴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식영정, 환벽당, 송강정을 정송강유적이라고 부르는데, 환벽당은 송강에게 글을 가르치게 된 김윤제와의 일화로 유명하고, 식영정은 「성산별곡」의 배경이며, 송강정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은 곳이다. 송강정은 본래 송강이 지은 죽록정을 후손이 새로 지은 것으로, 송강이라는 호는 죽록정 옆을 흐르는 죽록천에서 연유한 것이다.
「성산별곡」은 총 84행 168구로 이루어진 가사작품이다. 정철이 25세 이후에 당쟁으로 정계를 물러나 이곳에서 살 때 김성원(金成遠)을 위하여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의 문인 김성원이 세운 서하당(棲霞堂)·식영정(息影亭)을 중심으로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경치와 김성원의 풍류를 예찬한 노래다. 식영정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성산별곡」의 한 대목을 보자.
창계천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하늘의 은하수를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산 속에 달력이 없어서 사계절을 모르더니
눈 아래 펼쳐진 경치가 철을 따라 저절로 일어나니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신선이 사는 세상의 것이로다
시의 화자는 그림자도 쉬어가는 식영정에 앉아 은하수처럼 빛나는 푸른 시내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시간이 흐르는 줄도 까맣게 잊어버리는 선경이라고 노래한다. 식영정에 앉아 자연의 경치를 보며 「성산별곡」의 노랫말을 음미하면, 송강 정철이 왜 최고의 문장가로 불리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심훈은 1901년 9월 12일, 경기도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 지금의 서울 영등포구 노량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대섭(大燮)이다. 명문 양반 가문의 막내 아들이었지만, 봉건적인 제도와 인습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강했다. 서울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학생 때부터 심훈은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이 남달랐다. 경성고보 재학 때 일본인 교사에 항의하기 위해 백지 답안을 제출하여 유급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개월 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출옥 후 심훈은 중국행을 선택, 항주의 지강대학에 입학하여 문학을 공부하고 연극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중국에서 심훈은 민족주의자 이동녕과 이시영, 무정부주의자 신채호와 이회영, 공산주의자 여운형과 박헌영 등과 교류하며 민족 독립을 향한 의지를 굳건하게 다짐한다.
1924년 동아일보에 입사했지만, 언론운동을 벌여 해직되고 1927년에 영화를 공부하고자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6개월 만에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 를 직접 연출했다. 이 영화는 나운규의 「아리랑」 만큼이나 큰 인기를 끌었다. 1928년에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동방의 애인』(1930) 『불사조』(1931) 등의 소설을 연재하였으나 모두 일제의 검열로 중단되고 만다. 1932년 격정적인 항일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한다. 심훈은 생전에 시집을 내려고 했으나 역시 검열로 출간할 수 없었고, 1949년 둘째 형 심명섭에 의해 유고시집으로 세상에 나온다.
1931년에 심훈은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충남 당진군 송악면(松嶽面) 부곡리(富谷里)로 낙향하여 창작생활에 전념한다. 1934년에는 ‘필경사’라는 자택을 직접 설계하여 짓는데, 바로 이곳에서 『상록수』를 집필하였다. 심훈은 당시 부곡리에서 조카 심재영이 주도하는 ‘공동경작회’ 회원들과 어울리며 지냈는데, 『상록수』는 바로 심재영의 야학운동과 공동경작회 활동을 소재로 삼고 있는 작품이다. 『상록수』의 주인공인 수원고등농림학생 박동혁의 모델이 바로 심재영이다. 한편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은 당시 경기도 반월면 천곡리 샘골(현재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다 요절한 최용신이 모델이다. 『상록수』는 심재영과 최용신의 이야기를 연결하여, 두 남녀의 숭고한 사랑의 과정을 한 축으로 삼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상록수』의 두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은 각각 ‘한곡리’와 ‘청석골’로 내려가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는데, 그 지역은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군과 경기도 안산시에 해당한다. ‘한곡리’는 심훈이 살았던 부곡리와 그 인근의 한진리를 합쳐 만든 이름이며, 청석골은 최용신을 활동했던 샘골을 가리킨다. 『상록수』에는 박동혁이 한곡리에서 농우회를 조직하고 농우회의 회관을 짓는 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아마도 자신이 직접 필경사를 지으면서 겪은 경험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심훈은 『상록수』를 출판하기 위해 상경하여 간행 작업에 매진하다 장티푸스에 걸려 1936년 3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상록수』를 집필한 필경사는 1997년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에는 심훈기념관이 설립되어 있고, 매년 심훈상록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아울러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에 있는 상록수공원에는 최용신기념관과 최용신의 묘, 최용신기념비 그리고 심훈문학기념비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진우촌(秦雨村)은 1904년에 출생했다. 초명은 태원(泰源)이었으나 1919년에 종혁(宗爀)으로 개명했다. 유년시절을 인천에서 보내고, 극작가로서의 활동도 인천에서 전개했지만, 출생지가 인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아버지 진수(秦秀)가 세창양행에서 근무했다는 점, 진우촌 호적등본을 보면 당시 인천부 율목리와 내리, 송현리 등으로 이사를 다녔다는 사실에서 유추하건대, 인천이 출생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무엇보다도 유년시절을 인천에서 보냈고, 서울로 진학한 후에도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진우촌은 인천의 문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18년 서울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1922년 졸업했다. 그해 서울 출신 백용자와 결혼했다가 다음해 이혼했다. 1923~24년 사이 강화도의 합일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했다.
1923년 5월 진우촌은 『동아일보』 1,000호 기념 작품 공모에 「개혁」이 당선돼 등단했다. 이때 동화 부문에 「의조혼 삼남매」도 아울러 당선됐고 이어서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으로 실시한 『동아일보』 작품 공모에 「시드러가는 무궁화」도 당선된다. 1925년에 대표작 「구가정의 끝날」을 발표했다. 이때 필명으로 우촌(雨村)을 사용했다. 1926년에 『동아일보』에 「보옥화」라는 동화를 게재했고, 아울러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진우촌은 인천 지역에 기반을 둔 여러 문화운동 단체나 사회조직에 참가하여 주요 역할을 맡았다. 배재고보 학생들의 모임인 인배회(仁培會)에서부터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한용단, 제물포청년회, 인천소성노동회(仁川邵城勞動會) 등에 참여했다. 1925년 12월 진우촌은 이비도, 박형남 등과 인천유성회를 조직한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의 문예노선을 따르는 단체였다. 1926년 진우촌은 정암, 원우전 등 연극인으로 유명한 이들과 ‘칠면구락부’를 결성해 골즈워디의 「승리자와 패배자」 등의 작품을 상연했고 1927년에는 인천 최초의 문예지 『습작시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을 맡는다. 1942년 김필노미와 재혼했다. 1943년 동양극장에서 「왕소군」을, 1944년 현대극장에서 「뇌명」을 상연했고, 이는 현대극장의 후신 극예술협회에서 1948년 다시 상연된다. 해방 후 진우촌은 동양극장의 청춘좌와 좌파성향의 자유극장에 가담한다. 자유극장은 개관작으로 진우촌의 「망향」을 상연했고, 이는 「두뇌수술」로 개제돼 『신문예』 창간호에 실렸다. 1946년에는 극단 청탑에서 「보검」이란 작품을 상연하기도 했다.
진우촌은 사실주의 경향이 주를 이루었던 동시대 작가들과 달리 독특한 낭만적 작품 세계를 구축하며 한국전쟁 전까지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1951년 월북해 산업예술극단, 흥남질소비료공장, 국립출판사 등에서 일했고, 1953년에 사망했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경남 함안군 칠원면 출신의 문인이자 정치가다. 그는 가문에서 최초로 관직에 진출한‘흙수저’인데, 조선 중기 본격적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한 영남 출신 지방사림의 1세대 격으로 추정된다. 특출난 연줄이 없던 그는 남곤(南袞), 허자(許磁) 등의 추천을 받아 관직에 오를 수 있었는데, 이들은 훗날 기묘사화(己卯士禍), 을사사화(乙巳士禍) 등을 주도한 인물로 비판받았다. 이러한 그의 출세 배경은 주세붕의 관직 생활과 사림 가운데서의 평판을 두고두고 옭아맸다.
『조선왕조실록』의 사평(史評)에 따르면 주세붕은 너그럽고 온화하여 학문과 덕업(德業)을 닦고 어진 이와 선행을 좋아했으며,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관은 주세붕의 성품에 대한 호평 뒤편에 권력을 지닌 간신에게 굽신거리며 아첨했다는 비판을 덧붙인다. 주세붕은 자신을 정계에 추천했던 남곤이 몰락하거나 평소 교류가 있었던 이항(李沆)이 권신 김안로(金安老)에게 공격받을 때마다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김안로의 실각 이후 중앙에 복귀해서는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등에게 아부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들은 을사사화를 주도한 권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대 사림들이‘비루하다’고 비판했던 그의 행보는 아무런 연줄 없이 정계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흙수저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해석할 측면이 없지 않다.
주세붕은 풍기(豐基) 군수로 있던 1543년, 한반도에 성리학을 도입했다고 알려진 안향(安珦)의 고향에 그를 기리는 사당과 백운동서원을 건립한다. 2년에 걸친 가뭄 탓에 개인 재산을 풀어 백성을 구휼해야 할 정도로 고을 사정이 열악했지만, 주세붕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서원건립을 강행했다. 주자(朱子)를 숭배하는 사업에 열을 올렸던 안향을 ‘동방의 주자’처럼 떠받드는 사업에 앞장섬으로써, 안향을 숭배하는 자신의 정치적 위상과 사림 내부에서의 입지를 함께 강화하려 했다는 것이 학계의 해석이다.
안향 숭배작업으로 대표되는 그의 교육진흥사업은 경기체가와 시조작품 창작을 통해 시도한 성리학의 대중화와 일맥상통한다. 백운동서원에서 부르기 위해 창작한 경기체가와 시조, 황해도 지방관 시절에 창작한 훈민시조 등은 안향이 도입한 성리학의 이념을 우리말 노래로 풀어내 유생과 백성들에게 전파하려는 문학활동이었다. 동시대 사림들에게‘비루한 인물’로 비판받았던 주세붕은, 이러한 교육과 문화 양면의 기여 덕분에 성리학 전파에 이바지한 교육자로 새롭게 기억될 수 있었다.
김처(金處)는 광산군(光山君) 김약항(金若恒)의 맏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김약항은 본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키려 했으나, 친지들의 설득에 결국 조선왕조를 위해 일하기로 했다. 하지만 어려운 결심 끝에 시작한 김약항의 새로운 벼슬살이는 비극적인 최후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명 황제 주원장은 위화도회군, 정도전의 요동 정벌 등을 두고 조선을 의심하여, 외교 의례에서 각종 트집을 잡아 신생국 조선을 길들이려 했다. 이것이 바로 표전문(表箋文) 문제인데, 조선에서 작성한 외교문서에 명나라를 희롱하고 모독하는 뜻의 글자가 섞여있다는 내용이었다. 김약항은 바로 그 표전문의 작성자로, 해명을 위해 명나라에 갔다가 억류되었다. 「양촌집」 등 기록에 따르면 심한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는 모습에 감복한 주원장이 김약항을 풀어주었으나, 곧 생긴 또 다른 문제로 황제의 진노를 사서 양쯔강 지역에 귀양갔다가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김약항의 죽음은 만 1년이 지나 조선에 돌아온 사신 편에 전해졌다.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던 태조가 초상 치르는 것을 금지했기에, 명나라의 확인을 받을 때까지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했다. 가족들이 중국에 직접 찾아가 그의 시신을 찾았으나 빈손으로 돌아왔기에, 남아있는 옷가지로 예장(禮裝)을 치러야 했다.
시신도 못찾은 아버지의 기구한 죽음을 슬퍼하던 김처는 끝내 미쳐버렸다. 그는 교도(敎導), 판관(判官) 벼슬을 지낸 똑똑한 인물이었지만, 정신이상이 생긴 후에는 사리판단을 못 해 동네 어린아이나 여인들이 장난으로 한 거짓말에 매번 속아 넘어갔다고 한다. 「세종실록」에는 김처의 종 윤귀(允貴)의 기록이 있는데, 윤귀는 김처가 정신이 흐려진 것을 악용하여 주인을 마구 때리고 부려먹은 일로 처벌받았다. 노래를 잘했던 김처는 낮에는 종일 잠만 자다가 이따금 깨면 안축의 「관동별곡」을 부르며 춤을 추었고, 밤에는 시구를 중얼거리며 거리를 떠돌았다. 김처는 그렇게 방황하던 중 산에 내팽개쳐 있는 병자를 불쌍히 여겨 돌봐주다가 그만 전염병이 옮아 죽고 말았다.
김처의 기구한 운명 앞뒤에는 당대의 굵직한 정치적 분쟁과 대립이 있었다. 표전문 사건은 단순한 외교 문제를 넘어선 조선과 명나라의 주도권 싸움이었고, 요동 정벌을 명분으로 사병 혁파를 추진하던 정도전(鄭道傳), 중국의 힘을 빌려 그를 견제하려는 이방원(李芳遠)의 정치적 대립과 연관되어 있었다. 한편 김처를 핍박했던 종 윤귀(允貴)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종으로 행세하다가 적발되어 처벌을 받았는데, 이는 세종 치세 내내 문제행동을 일삼아 왕권에 위협이 되었던 양녕대군과 관련된 정치적 사건이었다. 세종은 방탕한 큰형의 여러 만행을 끝까지 감쌌지만, 신하들은 「연형제곡(宴兄弟曲)」 같은 악장을 통해 형제 사이의 우애도 군신의 예의를 거슬러선 안 된다고 끊임없이 권계(勸誡)했다. 윤귀의 처벌은 단순히 윤귀 개인의 범죄로서가 아니라, 양녕대군의 행태에 신하들이 보인 경계심의 연장선에서 상하(上下)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범죄로 처벌 받았던 것이다.
근재(謹齋) 안축(安軸)은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조카손자로, 죽계(竹溪, 오늘날 경상도 영주시 순흥면) 지역의 사대부다. 1307대 초 고려와 원나라 과거시험 양쪽에 급제했다. 당시 충숙왕은 고려 왕위를 빼앗으려는 심양왕 왕고(王暠)의 정치적 모함으로 원나라에 억류되었는데, 안축은 이때 왕을 변호하여 신임을 얻었다. 전리총랑, 전법판서, 판정치도감사 등 관직생활 동안 그가 거친 벼슬은 대개 토지 및 노비 문제를 다루는 법 관련 직책이었다. 토지나 노비를 억울하게 빼앗긴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종의 경제적 개혁정책에 참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심양왕과의 정치적 갈등에 지친 충숙왕이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원나라로 떠나버리면서, 안축은 상당한 정치적 좌절을 겪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충숙왕의 아들 충혜왕은 고려판 연산군이라 불릴만한 폭군이어서, 『고려사』에 따르면 왕의 행실을 기록하는 사관(史官), 또는 왕에게 충고하는 언관(言官)이 모두 사대부였기에 충혜왕은“본래도 사대부를 싫어했지만, 이 때문에 더욱 싫어했다”라고 한다. 충혜왕이 왕위에 오른 직후 안축은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과 영동(嶺東) 지방을 순찰하는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로 파견되었다. 정황을 고려하면 중앙에서 지방으로 좌천을 당한 셈이다. 폭정을 일삼던 충혜왕이 폐위되어 충숙왕이 복위한 뒤에도, 안축은 충혜왕의 측근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약 10년간 중앙관직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흔히 「관동별곡」하면 송강 정철의 가사(歌辭)가 유명하지만, 사실 관동별곡이라는 이름의 ‘원조’는 안축의 경기체가 「관동별곡」이다. 그는 지방관으로서 안변, 흡곡, 통천, 고성, 간성(지금의 속초 부근), 양양, 강릉, 삼척, 울진, 평해, 정선 등 강원도의 명승을 순찰한 내용을 9장의 「관동별곡」을 통해 노래했다. 근래의 연구에 따르면 「관동별곡」은 관동의 자연을 아름답게 묘사하면서도, 여러 가지 고사와 비유를 통해 외직으로 좌천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중앙에서 정치적 포부를 펼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 작품이기에 한자를 빌린 차자(借字)표기로 전하지만, 그의 경기체가는 고려 말 사대부가 한국어 노래를 어떻게 창작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관동별곡」 외에도, 충혜왕의 아들 충목왕이 성군의 자질을 보이던 시기를 배경으로 고향 순흥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죽계별곡」이 유명하다. 그는 한시 창작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관동별곡」과 같은 시기 창작된 시집 『관동와주』의 여러 시는 강원도 지역의 상황과 당대 정치의 폐단을 비판하고 근심하는 내용이다. 특히 삼척 죽서루 일대의 여덟 정경을 묘사한 팔경시 「삼척서루팔영」은 당대는 물론 조선시대 내내 수많은 문인들이 차운(次韻)한 걸작으로 손꼽힌다.
김말봉은 1901년 4월 3일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서 출생했다. 부산 일신여학교(현 동래여자고등학교)를 수료하고 1918년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했다. 황해도 재령의 명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7년 귀국하여 중외일보 기자로 일했다. 1932년 단편소설 「망명녀」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이 때는 보옥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는데, 다른 작품들에서는 노초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1935년 『동아일보』에 『밀림』, 1937년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연재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일본어로 창작 활동을 하고 싶지 않아 광복까지 절필했다가 광복 후 1945년 서울에서 「카인의 시장」과 「화려한 지옥」 등을 발표했다. 공창폐지운동을 주도했고 사회복지시설인 박애원을 경영했다. 1949년 하와이 시찰여행을 다녀왔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부산으로 피난 온 문인들을 도왔다. 1952년 베니스 세계예술가대회에 참석했다. 1954년 우리나라 기독교 최초의 여성 장로가 되었다. 한국 예술원 위원과 한국 문학가 협회 대표위원이었다.
소설집 『화려한 지옥』(1945), 『별들의 고향』(1950), 『생명』(1957), 『이브의 후예』(1960), 『바람의 향연』(1962)을 출간했으며, 『태양의 권속』(『서울신문』, 1952), 『파도에 부서지는 노래』(『희망』, 1952), 『새를 보라』(『영남일보』, 1953), 『바람의 향연』(『여성계』, 1953), 『푸른 날개』(『조선일보』, 1954), 『푸른 장미』(『국제신보』, 1957), 『화관의 계절』(『한국일보』, 1957), 『사슴』(『연합신문』, 1958), 『환희』(『조선일보』, 1958), 『제비야 오렴』(『부산일보』, 1959), 『장미의 고향』(『대구일보』, 1959), 『해바라기』(『연합신문』, 1959)등을 발표했다. 김말봉은 사위인 금수현의 가곡 「그네」의 가사를 썼다. 「그네」를 새긴 김말봉 문학비가 2009년 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세워졌다. 1961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김말봉은 애정을 주제로 사회 비판적 성격을 가진 작품을 많이 썼다. 김말봉의 대표작인 『찔레꽃』은 한국 멜로드라마의 원류로 평가받는다. 연인인 두 주인공, 청순하고 가련한 여학생과 가난하지만 재능 있는 청년이 현실의 고난을 극복해가는 서사 구조는 통속소설의 서사 유형으로 자리 잡게 된다. 김말봉은 사회 비판 의식을 작품 속에 담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실천에 옮겼다. 김말봉은 「화려한 지옥」에 공창 폐지의 필요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았다.
인신매매 금지령이 포고되자 유곽에 팔려 왔던 여인들은 자유의 몸이 되어 거리로 나왔지요. 그러나 그들이 갑자기 어디로 가겠어요. 그날 밤부터 재워주는 곳도 먹여주는 사람도 없는 형편이었어요.(중략) 전과 마찬가지로 여인들은 빚을 얻어 쓰고 포주는 여인을 착취하고……유곽은 훌륭히 부활을 하였지요. 공창 폐지 연맹이 조직된 원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공창을 폐지하자 그러나 공창을 근본적으로 구원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자는데 우리 연맹의 목적이 있는 거야요.
-김말봉, 「화려한 지옥」, 『김말봉전집4 가인의 시장/화려한 지옥』
공창 폐지의 사명은 횡으로 유곽의 여인들을 인도적으로 구원하자는 것과 또 종으로 민족 보건을 위하여 성병을 박멸하자는 민족의 보건 운동으로 볼 수 있고만요…… 공창 폐지 연맹이야말로 건국의 가장 초석적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말봉, 「화려한 지옥」, 『김말봉전집4 가인의 시장/화려한 지옥』
「화려한 지옥」에는 공창폐지연맹위원장인 “정민혜”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자전적 인물이다. 주인공 채옥은 정민혜를 통해 각성하고 공창폐지운동에 참여한다. 김말봉은 광복 직후 일제가 도입한 공창을 폐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1946년 8월에는 폐업공창구제연맹을 결성해 회장직을 맡았다. 공창 폐지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1946년 인신매매 금지령이 내려졌고, 1948년 2월 14일 공창제가 폐지되었다. 김말봉은 작품을 통해 당시 사회의 문제를 고발하고 기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삶을 살았다.
김소월은 1902년 8월 6일(음력)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정식이다. 오산학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도쿄 상대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중퇴했다. 김소월이 졸업하던 해, 오산학교는 총독부에 의해 폐쇄되었다. 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이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로서 참가했다가 투옥되었고, 오산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민족정신을 키웠으며 교사였던 김억의 지도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0년 「낭인의 봄」, 「야의 우적」, 「오과의 읍」, 「그리워」 등을 『창조』지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배재고보에 재학 중인 1922년에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닭은 꼬꾸요」, 「바람의 봄」, 「봄밤」 등을 『개벽』지에 발표했다. 김소월의 대표작이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서정시인 「진달래꽃」은 『개벽』 1922년 7월호에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24년 『영대』 3호에 「산유화」, 「밭고랑」, 「생과 사」 등을 발표했다. 1925년에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간행되었다.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하였으나 운영에 실패했다. 사업의 실패와 생활고, 건강상의 문제와 일본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를 힘들어했던 김소월은 1934년 12월 24일 음독자살했다. 154편의 시와 시론 「시혼」을 남겼다. 김소월은 민요의 음률인 7·5조의 정형률에 향토적 서정을 담아 한국의 한을 노래한 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김소월이 활발한 시작 활동을 했던 시기에 거주했던 곳이 배재학교가 있던 서울특별시다. 김소월은 「서울밤」과 「왕십리」에서 서울을 노래했다.
붉은 전등/푸른 전등/널따란 거리면 푸른 전등/막다른 골목이면 붉은 전등/전등은 반짝입니다/전등은 그물입니다/전등은 또다시 어스렷합니다/전등은 죽은 듯한 긴 밤을 지킵니다
나의 가슴의 속모를 곳의/어둡고 밝은 그 속에서도/붉은 전등이 흐득여 웁니다/푸른 전등이 흐득여 웁니다
붉은 전등/푸른 전등/머나먼 밤하늘은 새카맙니다/머나먼 밤하늘은 새카맙니다/서울 거리가 좋다고 해요/서울 밤이 좋다고 해요
붉은 전등/푸른 전등/나의 가슴의 속모를 곳의/푸른 전등은 고적합니다/붉은 전등은 고적합니다-김소월, 「서울밤」, 『진달래꽃』, 미래사, 1991, 34면
비가 온다/오누나/오는 비는/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온다고 하고/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가도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울려거든/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데./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김소월, 「왕십리」, 『진달래꽃』, 미래사, 1991, 73면
「서울밤」과 「왕십리」에도 김소월의 다른 시들처럼 서러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스며들어있다. 암울한 시대 상황과 가난하고 각박한 삶이 주는 서러움과 그리움이라는 원초적인 정서를 소박한 언어에 담아 표현하여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까지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는 시인으로 남아있다. 1981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97년 왕십리 사거리에 「왕십리」를 새긴 시비가 세워졌고, 2010년 왕십리 광장으로 옮겨지면서 김소월의 흉상도 함께 세워졌다. 1998년 신시 100돌을 기념해 한국일보사가 서울 남산공원 입구에 김소월의 시비를 세웠다. 김소월이 수학했던 배재고등학교 교정에도 「진달래꽃」 시비가 있다. 김소월의 시는 가곡으로도 불려지고, 「부모」, 「개여울」, 「못 잊어」, 「실버들」,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진달래꽃」 등은 대중가요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아기 기생 매창에 대한 소문은 한양에도 전파되고, 천민 출신이지만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유희경이 마침 부안에 들러 그녀를 만나니, 스물여덟 살 차이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시로 나누며 연인이 된다. 다음 해 임진왜란 발발로 둘은 곧 헤어져 15년 후에야 재회하는데 유희경과 서로를 그리는 애절한 마음을 읊은 두 사람의 시들은 가장 품격있는 연가들로 알려졌다. 시를 주고받은 것으로 확인된 인물들로는 ‘여자 친구 천향에게’라고 그녀를 지칭했던 권필을 비롯해 심광세와 임서, 한준겸 등이 있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문인들과 시를 주고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내들 술시중이 본업이지만, 이렇듯 당대의 문사들과 마음을 나누고 시를 노래하며 친구 관계를 유지했지만 첫사랑 유희경을 연모하는 매창은 다른 사내에게는 애써 시(詩)로서 화답하며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인하곤 했다.
최고 사대부 출신으로 탄핵과 파면과 복직을 거듭한 시대의 풍운아 허균은 부안에 첫 발령 당시 마주했던 매창에 대해 “빼어난 용모는 아니었으나 재주와 정이 있어 종일 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시로 화답했다”고 기록했다. 부안에서 몇 달 머물고 떠난 후에도 기회를 만들어 그녀를 방문해 문학과 풍류를 나누니 곧 각별한 벗이 되었다.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익명으로 펴내고 명나라에서 누이 난설헌의 시집을 내는 동안에도 그는 틈틈이 미천한 신분의 기생이던 그녀와 서신으로 교류하니, 매창은 허균을 통해 그의 누이 허난설헌의 시도 접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는 여러 차례 친구들까지 끌고 와 함께 유람하며 느낀 감회를 자신의 책에도 기록하며 매창과의 우정을 이어갔다. 불교에 심취한 죄목으로 파직당했을 때도 한양 자기 집이 아닌 부안에 와서 살 작정을 할 만큼 매창은 허균에게 든든한 동지였다.
송도삼절로 꼽히는 서경덕과 황진이와 박연폭포에 빗대어 부안 출신 시인 신석정은 유희경과 매창과 직소폭포를 ‘부안 삼절’로 꼽은 바 있다. 배꽃이 꽃비가 되어 흩날리던 어느 봄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매창이 읊은 ‘이화우 흩뿌릴 제’는 그녀가 남긴 시 중 가장 유명하며 유일한 한글 시조여서, 황진이의 작품에도 비견되곤 한다. 허균의 표현대로 “천성이 고고했던” 매창은 폐병으로 서른여덟에 숨을 거두었는데, 부음을 접한 허균은 눈물을 뿌리며 그녀를 애도하는 시를 지었다. 유배를 마친 1년 후 애장품 거문고와 함께 묻힌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 있는 그녀의 무덤을 찾아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던 그녀의 재주를 사랑해 교분이 막역했으며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亂)의 경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2수를 지어 슬퍼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곳은 1983년 8월 24일 전라북도의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의 여성 선비들은 스스럼없이 자신을 부를 수 있는 이름으로 자신의 거처를 뜻하는 ‘당호(堂號)’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정일당도 그런 이름인데 태몽도 남달랐던 그녀의 어머니 꿈에 외할머니가 나타나 “여기 덕을 갖춘 이를 보내니 잘 키우라.” 하시니, 정일당의 원래 이름은 그 뜻대로 ‘지덕(至德)’이었다. 가난하지만 명문가의 후손이고 총명해서 일찍이 글을 깨우치고 시문 읽기를 배웠던 정일당은 본디 충북 제천 출신이다. 조부모와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생활이 곤궁했던 탓에 바느질과 베 짜는 일로 홀어머니를 도우며 여섯 살 아래 남편 윤광연과 스무 살에 혼인했다. 시댁 형편도 세간을 마련해 줄 형편이 아니어서 친정에서 3년을 함께 살다 한양에 근접한 과천의 버려진 오두막에서 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배움을 멈추면 짐승과 다름없어진다며 남편은 오직 학문에 정진하도록 뒷바라지를 하니 아내의 뜻을 따라 그는 공부에 전념했다. 곁에서 바느질하면서 정일당은 남편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책을 함께 읽고 시를 외우며 강건하고 단정한 필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성의 이름으로 글을 남기기 어렵던 시절이라 남편 대신 그녀는 세상을 뜬 친척 어른들 행적이며 추도문을 써주는 식으로 유가의 가르침을 담은 문장이며 시들을 작성했다. 여성도 노력하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 믿었던 그녀는 진정한 도에 이르지 못하면 살아도 즐거울 게 없다고 여기는 전형적인 성리학자였다. 따라서 정일당의 시는 진리를 탐구하고 자족하며 수양에 힘쓰는 선비의 안빈낙도를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고, 산문 역시 자기 성찰의 내용을 담은 문장이 많다. 과거에 계속해서 낙방하는 남편에게 벼슬길을 접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서당을 열도록 권했고, 남편은 그녀 뜻을 따르며 학문적 동지가 된 것으로도 즐거웠다. 알뜰한 살림 덕분에 그들도 말년에는 재산을 모아 남대문 외곽 약현(藥峴, 지금의 중림동)으로 이사하여 더 많은 책을 탐독하며 폭넓은 지식을 쌓고, 조상도 가까운 곳에서 섬기려 선영으로 삼은 곳이 성남시 향토문화재 1호가 된 수정구 금토동 산75, 청계산 기슭이다.
아홉 아이를 출산했으나 모두 일찍 사망하고, 특히 쉰 이후로는 여러 질병으로 힘겨운 일상을 견뎌야 했던 정일당은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니 결국 본인이 손수 마련해 둔 자리, 청계산 기슭에 뼈를 묻게 되었다. 정일당은 윤광연에게 이미 스승과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고, 아내의 앞선 죽음을 애도한 윤광연은 자신의 이름으로 남긴 시문들을 원작자 이름으로 다시 바꾸고 남아 있던 저술을 간추려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라는 문집으로 간행했다. 여기에 그녀의 시 38수, 서(書) 7편, 짧은 편지 8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녀를 칭송하는 사람들은 정일당이 사임당과 윤지당의 재능을 겸비했다고 말한다.
전라북도 군산시를 대표하는 작가로 채만식이 있다. 대표작인 『탁류』의 배경이 군산과 그 일대다. 채만식은 1902년 6월 17일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에서 출생했다.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을 중퇴했다. 사립학교 교원, 『동아일보』 기자, 개벽사 편집자,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1924년 『조선문단』에 발표된 단편 「세 길로」로 등단하여 290여 편에 이르는 소설과 희곡, 평론, 수필을 썼다. 1936년부터는 전업 작가로 활동하다 1945년 낙향하여 1950년 익산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레디메이드 인생」(1934)으로 풍자 작가로서의 면모를 획득했다.
이 시기 카프 제2차 검거사건으로 2년간 문필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치숙』(1938), 『탁류」』(1937~1938), 『태평천하』(1938) 등의 대표작이 있다. 식민지 현실의 반영과 비판, 풍자가 채만식 작품 세계의 특징이다. 1942년부터 친일활동에 참여했다.
광복 후 자기 반성의 마음을 담은 중편소설 『민족의 죄인』을 발표했다. 1984년 월명공원에 문학비, 1996년 채만식소설비, 2002년 소설비가 건립되었고, 2001년 채만식문학관이 개관했다. 채만식은 『탁류』에 금강과 군산을 담고 있다.
금강······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동께서 남북으로 납작하니 째져가지고는-한강이나 영산강도 그렇기는 하지만-그것이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번 비행기라도 타고 강줄기를 따라가면서 내려다보면 또한 그럼직할 것이다. 저 준험한 소백산맥이 제주도를 건너보고 뜀을 뛸 듯이, 전라도의 뒷덜미를 급하게 달리다가 우뚝······ 또 한번 우뚝 ······ 높이 솟구친 갈재와 지리산, 두 산의 산협 물을 받아가지고 장수로, 진안으로, 무주로 이렇게 역류하는 게 금강의 남쪽 줄기다. 그놈이 영동 근처에서 다시 추풍령과 속리산의 물까지 받으면서 서북으로 좌향을 돌려 충청좌우도의 접경을 흘러간다. (중략)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 흥망의 꿈 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한창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 옳게 금강이다. (중략)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탁류』, 문학과지성사, 2014, 7-9면
급하게 경사진 언덕 비탈에 게딱지 같은 초가집이며 낡은 생철집 오막살이들이, 손바닥만 한 빈틈도 남기지 않고 콩나물 길 듯 주어 박힌 동네 모양새에서 생긴 이름인지, 이 개복동서 그 너머 둔뱀이로 넘어가는 고개를 콩나물고개라고 하는데, 실없이 제격에 맞는 이름이다. 개복동, 구복동, 둔뱀이, 그리고 이편으로 뚝 떨어져 정거장 뒤에 있는 ‘스래’, 이러한 몇 곳이 군산의 인구 칠만 명 가운데 육만도 넘는 조선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어깨를 비비면서 옴닥옴닥 모여 사는 곳이다. 면적으로 치면 군산부의 몇십분지일도 못 되는 땅이다. 그뿐 아니라 정리된 시구라든지, 근대식 건물로든지, 사회시설이나 위생시설로든지, 제법 문화도시의 모습을 차리고 있는 본정통이나 정주통이나 공원 및 일대나, 또 넌지시 월명산 아래로 자리를 잡고 있는 주택지대나, 이런 데다가 빗대면 개복동이니 둔뱀이니 하는 곳은 한 세기나 뒤떨어져 보인다.
『탁류』, 문학과지성사, 2014, 26면
채만식은 금강과 군산을 배경으로 "초봉"이라는 주인공의 험난한 일생을 통해 당시 세태를 치밀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당시 군산은 일본인들이 이주하여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하는 항구로 사용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쌀 뿐만 아니라 호남평야의 비옥한 땅들을 빼앗았다. 이 때문에 당시 많은 조선인들이 빈곤한 처지가 되어 군산의 조선인들은 낙후되고 비좁은 동네에서 모여살 수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어려운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타지를 떠돌았다. 채만식은 이러한 군산을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하여 식민지 치하 조선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재현하고 일본의 만행을 비판했다.
전라북도 군산시 월명공원 안에 문학비가 있다. 『탁류』의 배경인 군산과 금강을 바라보고 있는 곳이다. 소설비는 전라북도 군산시 장미동 구조선은행 건물 옆에 세워져 있다. 『탁류』의 공간인 미두장이 있는 미두의 거리다. 미두장의 실제 명칭은 군산미곡취인소로 미곡시세를 놓고 거래하는 일종의 도박장으로 일본이 자본 침탈을 위해 만들었다. 묘소는 고향인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군 임피면 축산리 계남마을에 있다. 전라북도 군산시에는 채만식의 삶과 작품세계를 기리는 채만식 문학관이 있다.
경기도 광명시의 작가로 기형도가 있다. 기형도는 1960년 인천시 옹진군에서 태어나 5세부터 29세 사망할 때까지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당시 시흥군 소하리)에서 거주했다. 1985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가 당선되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중앙일보에서 근무했다. 개인적인 내적 세계를 표현하면서도 사회비판적인 시선을 함께 보이는 개성적인 작품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입 속의 검은 잎」, 「전문가」, 「홀린 사람」 등이 대표작이다. 1989년 뇌졸중으로 별세했다. 기형도가 거주했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기형도 문학관이 있다. 「입 속의 검은 잎」은 기형도의 대표작이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중략)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입 속의 검은 잎」,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58~59면
이 시에는 1980년대 억압적이던 정치‧ 사회 분위기, 비판적인 시선과 발언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탄압이 난무하던 시대 상황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 회의와 절망이 나타난다. 평론가 김현은 기형도의 시에 대해 “아주 극단적인 비극적 세계관의 표현”(김현,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154면)이라고 평했다. 기형도의 이른 죽음은 이러한 비극적 세계관이 긍정적인 전망을 가질 기회를 주지 않았다. 기형도의 독특한 시적 세계는 한국 문학사에 인상적인 한 장면으로 남았다. 경기도 광명시에는 기형도의 삶과 작품 세계를 기리는 기형도 문학관이 설립되어 기형도와 그의 시, 그리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고 싶은 공간이 되고 있다.
경상남도 창원시의 시인으로 김달진이 있다. 김달진은 1907년 경상남도 창원군 웅동(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에서 태어났다. 계광보통학교, 서울의 중앙고보를 다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중퇴했다. 건강을 회복한 후 서울의 경신중학을 다니다 일본인 영어 교사 추방운동을 벌여 퇴학당했다. 이후 계광보통학교 교사를 했다. 1929년 『문예공론』에 시 「잡영수곡」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4년 금강산 유점사에 입산했다. 『시원』과 『시인부락』에 참여하며 꾸준히 시작활동을 했다. 1939년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를 졸업했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만주로 도피, 용정에서 안수길이 간행한 잡지 『싹』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유점사에서 하산하여 동아일보사에 잠시 근무하다 대구, 진해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62년 남면중학교(현 창원남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이후부터는 동양고전과 불경번역사업에 진력하여 동국대학교 역경원 역경위원으로 활동했다. 1989년 사망했다. 시집 『청시』(1940)를 비롯하여 시전집 『올빼미의 노래』(1983), 장편 서사시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1984), 선시집 『한 벌 옷에 바리때 하나』(1990), 수상집 『산거일기』(1990) 등을 남겼다. 김달진의 시는 불교와 노장 사상을 기반으로 세속적인 번뇌를 초월하여 절대적인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는 세계 있기에」는 김달진의 이러한 구도자와 같은 삶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시다.
그리는 세계 있기에/그 세계 위하여,
生의 나무의/뿌리로 살자.
넓게 굳세게./또 깊게,
어둠의 苦惱 속을/파고들어,
모든 才氣와 賢明 앞에/하나 어리석은 침묵으로-
그 어느 劫外의 하늘 아래/찬란히 피어나는 꽃과,
익어 가는 열매/멀리 바라보면서-
「그리는 세계 있기에」, 『김달진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78~79면
김달진은 「열무우 꽃-七月의 鄕愁」처럼 향수를 토로하는 시도 여럿 발표했다.
가끔 바람이 오면/뒤우란 열무우 꽃밭 위에는/나비들이 꽃잎처럼 날리고 있었다.
가난한 가족들은/배적삼에 땀을 씻으며/보리밥에 쑥갓쌈을 싸고 있었다.
떨어지는 훼나무 꽃향기에 취해,/늙은 암소는/긴 날을 졸리고 졸리고 있었다.
매미 소리 드물어 가고/잠자리 등에 석양이 타면/우리들은 종이 등을 손질하고 있었다.
어둔 지붕 위에/하얀 박꽃이/별빛 아래 떠오르면,
모깃불 연기 이는 돌담을 돌아/아낙네들은/앞개울로 앞개울로 몰려가고 있었다.
먼 고향 사람 사람 얼굴들이여/내 고향은 남방 천리,/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생각이여.
「열무우 꽃-七月의 鄕愁」, , 86~87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의 향토적인 모습을 그린 시다. 김달진에게 고향 창원은 늘 그립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김달진이 태어난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에는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김달진문학관도 건립되어 있다. 매해 김달진문학제가 열리고 김달진문학상도 수여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김달진을 기리기 위해 찾고 있다.
김달진에게 고향 창원은 늘 그립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김달진이 태어난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에는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김달진문학관도 건립되어 있다. 매해 김달진문학제가 열리고 김달진문학상도 수여하고 있다.
부산광역시의 대표적인 작가는 김정한이다. 김정한은 1908년 경상남도 동래군(현 부산광역시 동래구)북면 남산리에서 출생했다. 호는 요산이다. 중앙고등보통학교, 동래고등보통학교, 도쿄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에서 수학했다. 1928년부터 대원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는데, 조선인교원동맹을 조직하려다가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었다. 1932년 양산농민봉기사건에 관련되어 투옥됐다. 1936년 「사하촌」이 『조선일보』 신촌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은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1940년 한국어교육이 금지되자 『동아일보』에서 근무,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되자 절필했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했고, 『민주신보』 논설위원, 부산중학교 교사, 부산대학교 교수였다. 5·16 직후에는 부산대학교 교수직에서 한동안 물러나 『부산일보』 상임논설위원으로 활약했다. 1966년 「모래톱이야기」를 시작으로 다시 작품 활동을 했다. 「사하촌」, 「옥심이」, 「항진」, 「기로」, 「낙일홍」, 「수라도」 등 현실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재현한 리얼리즘 소설을 발표했다. 한국문학상(1969), 문화예술상(1971), 은관문화훈장(1976), 심산상(1994)을 수상했다. 1996년 별세했다.
「모래톱이야기」에서 김정한은 부산의 한 섬을 그려낸다. 하단 포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면 닿을 수 있는 낙동강 하구의 작은 섬이다. 작품 속에서는 “조마이섬”이라고 지칭되는데,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일 가능성이 높다.
길가 수렁과 축축한 둑에는 빈틈없이 갈대가 우거져 있었다. 쑥쑥 보기 좋게 순과 잎을 뽑아 올리는, 갈대청은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과는 판이하게 하늘과 땅과 계절의 혜택을 흐뭇이 받고 있는 듯, 한결 싱싱해 보였다. (중략) 길바닥까지 몰려나온 갈게들이, 둔탁한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이리저리 황급히 구멍을 찾아 흩어지는가 하면, 어느 하늘에선지 종달새가 재잘재잘 쉴 새 없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중략) 섬의 생김새가 길쭉한 주머니와 같다 해서 조마이섬이라고 불려온다는 건우의 고장에는, 보리가 거의 자랄 대로 자라 있었다. 강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푸른 물결이 제법 넘실거리곤 했다.
「모래톱 이야기」, 『김정한전집3』, 작가마을, 2008, 15~16면
김정한은 싱싱하게 자란 갈대청과 다르게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하늘과 땅과 계절의 혜택”을 받지 못했음에 주목했다.
우리 조마이섬 사람들은 지 땅이 없는 사람들이요. 와 처음부터 없기싸없었겠소마는 죄다 뺏기고 말았지요. 옛적부터 이 고장 사람들이 젖줄같이 믿어 오는 낙동강 물이 맨들어 준 우리 조마이섬은-” 건우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개탄조로 나왔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땅, 자기들 것이라고 믿어 오던 땅이, 자기들이 겨우 철 들락말락할 무렵에 별안간 왜놈의 동척 명의로 둔갑을 했더란 것이었다. (중략) 건우 할아버지는, 그렇게 해서 다시 국회의원, 다음은 하천부지의 매립허가를 얻은 유력자…… 이런 식으로 소유자가 둔갑되어간 사연들을 죽 들먹거리더니, “이 꼴이 대고 보니 선조 때부터 둑을 맨들고 물과 싸와가며 살아온 우리들은 대관절 우찌 대능기요?” 그의 꺽꺽한 목소리에는, 건우가 지각을 하고 꾸중을 듣던 날, “나릿배 통학생임더!”하던 때의 그 무엇인가를 저주하듯 한 감정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그들의 땅에 대한 원한이 컸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모래톱 이야기」, 『김정한전집3』, 작가마을, 2008, 25~26면
김정한에게 조마이섬은 “둑을 맨들고 물과 싸와가며 살아온” 사람들이 지키고 가꾸어온 땅으로 치열한 삶의 공간이자 고향이다. 김정한은 그러한 공간을 빼앗긴 섬 사람들의 애환을 통해 현실의 모순을 비판한다. 「모래톱이야기」는 주체적으로 자각하여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는 민중의 모습을 담은 소설로서 문학사적 의의를 가진다. 부산광역시 금정구에 김정환의 생가와 요산문학관이 있다. 매년 요산문학축전이 열리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김정한의 작품과 삶을 기리고 있다.
시인 김춘수는 1922년 11월 22일 경상남도 통영읍 서정 61번지에서 태어났다. 1935년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립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고교)에 입학, 1939년 자퇴하고 1940년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 입학했다. 1942년 12월 일본 천황과 총독 정치를 비방하여 세다가야 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서울로 송치되었다. 1945년 통영에서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고 1946년 8월 광복1주년 기념 시화집 『날개』에 「애가」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통영중학교, 마산중학교 교사, 해인대학(현 경남대학교), 경북대학교,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이 되어 문공위원으로 활동했다.
언어와 존재에 대한 철학이 담긴 시를 썼다. 의미에 대해 천착했던 그는 태도를 바꾸어 1970년대부터는 ‘무의미시’를 제시했다. 관념과 의미 이전의 존재의 본질에 대해 탐색하고자 하는 열망의 소산이었다. 또한 무의미시는 역사와 의미에 대한 허무 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1990년대 해체시의 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시집으로 『늪』(1950), 『기』(1951), 『인인』(1954),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 기타』(1969), 『처용』(1974), 『김춘수시선』(1976), 『꽃의 소묘』(1977), 『남천』(1977), 『비에 젖은 달』(1980), 『처용 이후』(1982), 『처용 단장』(1991), 『서서 잠드는 숲』(1993), 『들림, 도스토옙스키』(1997), 『의자와 계단』(1999) 등이 있고 시론집도 발표했다.
김춘수의 대표작은 「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꽃」, 『김춘수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58
「꽃」은 존재와 언어의 관계에 대한 고찰과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사유가 담겨있는 시다. 1952년 작품으로 김춘수가 의미의 문제에 빠져있을 때의 작품이다. 이후 김춘수는 마지막 시행의 ‘의미’를 ‘눈짓’으로 수정한다. 그의 시적 세계관이 무의미에 대한 관심으로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경상남도 통영시 항남동오거리에는 김춘수의 동상이, 경상남도 통영시의 남망산 공원 입구에는 「꽃」 시비가 세워져 있다. 경상남도 통영시 동호동에는 김춘수의 생가가 남아 있다. 경상남도 통영시 내의 미륵도에 있는 김춘수유품전시관에는 김춘수의 육필 원고와 출판물들을 비롯하여 김춘수가 생전에 사용했던 옷, 소파, 침대, 식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김춘수유품전시관에는 김춘수의 고향 바다에 대한 소회가 담긴 글이 있다. 김춘수는 자신의 시의 원천이 곧 고향 바다라고 말한다.
요즘도 나는 화창한 대낮 길을 가다가 문득 어디선가 갈매기 우는 소리를 듣곤 한다. 물론 환청이다. 갈매기의 울음은 고양이의 울음을 닮았다. 바다가 없는 곳에 사는 것은 답답하다. 바다가 보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 고향 바다는 너무나 멀리에 있다. 대구에서 20년이나 살면서 서울에서 10년 넘어 살면서 나는 자주자주 바다를 꿈에서만 보곤 했다. 바다는 나의 생리의 한 부분처럼 되었다. 바다, 특히 통영(내고향) 앞바다, 한려수도로 트인 그 바다는 내 시의 뉘앙스가 되고 있다고 나는 스스로 생각한다. 그 뉘앙스는 내 시가 그동안 어떻게 변해왔던 그 바닥에 깔린 표정이 되고 있다. 나는 그렇게 혼자서 스스로 생각한다.
시시때때로 가족과 어울려 시 짓고 풍류를 즐기며 한 점 거리낌이나 위축됨 없이 밝고 발랄하게 성장한 호연재의 성품은 ‘마음이 넓고 태연하다’(浩然)는 당호 그대로였다. 서로 술을 권하며 바둑을 두고 시문을 주고받던, 인류 문명을 통틀어 유례를 찾기 힘든 금실 좋고 다복한 부모 밑에서 아홉 남매와 함께 성장하며 일상의 희로애락을 시로 읊을 만큼 지성과 감성 교육을 충실히 받은 조선 최고의 규수, 하지만 명문가란 허울뿐, 격이 맞지 않는 배필과 혼인하며 성리학의 가르침이 얼마나 허술하고 모순인지를 통절히 깨달았다. 신혼 초부터 그녀 표현대로 적국(敵國·첩)을 배회하며 번번이 과거시험에는 낙방하는 서방님을 비롯해 가부장 남성들이 가문의 여성들을 제압하려 “마음이 불타듯 괴로울 때는 이를 벗 삼으라”며 작성한 규훈서의 요지는 여성들 ‘투기’에 대한 응징일 뿐이었다. 이에 대해 호연재 스스로 작성한 수양서 ‘투기를 경계하는 장’에는 “창녀와 즐기는 패륜”을 혐오하며 “지아비가 근실하게 행실을 닦으면 어찌 지어미가 투기하는 악행이 있겠는가”라고 왜곡된 현실부터 질타한다.
신혼부터 시작된 시집과의 불화와 관련해 호연재는 짐승 같은 무리에 맞서 이전투구하며 자신을 더럽히는 건 나를 기르신 부모님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며, ‘착한 여자 병’으로 제 인생을 쪽박 내는 부당한 통념을 유쾌히 물리친다. 한 10년 위태롭고 고단했던 시집살이에 도가 튼 호연재는 사시사철 꽃과 열매와 뿌리 골라 술 담그고, 시집 조카들을 잘 가르쳐 빛나는 숙모님이 되어 이들을 끌고 주변 경승을 찾아다니며 시 짓고 학문을 논하길 즐겼다. 그러다 잘 익은 술맛에 취해 “취하고 나니 천지가 넓고 마음을 여니 만사가 그만일세. 고요히 자리에 누웠노라니 즐겁기만 해 잠시 정을 잊었네”라는 시도 남겨두었다.
엄격한 사대부 가문 시댁 어른들과는 불화했으나, 그녀를 존경했던 시댁 후손들은 42세에 세상을 떠난 호연재의 활달하고 호방한 글들을 모아 《호연재 유고》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고, 그녀의 철학과 삶에 공감한 그 집안 딸과 며느리들은 호연재의 한문 시들을 우리말로 옮기고 이를 필사해 2백 년이 넘게 전수했다. 조금 앞서 사느라 애로가 많았던 그녀, 드디어 때를 만났다. 그녀의 시댁 자리였던 원래 은진 송씨 집성촌 대덕의 옛집 동춘당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90호로 지정되었고, 여기 세워진 그녀의 시비에는 다음 시가 새겨져 있다. “달빛 잠기어 온 산이 고요한데 샘에 비낀 별빛 맑은 샘 안개바람 댓잎에 스치고 비이슬 매화에 엉긴다. 삶이란 석자의 시린 칼인데 마음은 한 점 등불이어라. 서러워라 한해는 또 저물거늘 흰머리에 나이만 더하는구나.”
경상남도 하동의 작가로 박경리가 있다. 하동에 있는 최참판댁과 박경리문학관에는 박경리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박경리의 본명은 박금이로, 1926년 10월 28일 통영에서 출생했다. 진주여자고등학교와 수도여자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계산」과 1956년 「흑흑백백」을 『현대문학』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편소설 「전도」, 「불신시대」, 「벽지」 등과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토지』 등, 시집 『못 떠나는 배』 등을 발표했다. 2008년 5월 5일 폐암으로 사망했다. 사후 2008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현대문학 신인상(1957), 한국여류문학상(1965), 월탄문학상(1972), 인촌상(1991) 등을 수상했고, 1999년 20세기를 빛낸 예술인(문학)에 선정되었다.
박경리의 대표작은 『토지』로,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근대 한국의 역사를 담은 대하장편소설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가 『토지』의 주 무대다. 작품 속에서는 지리산과 섬진강을 낀 평사리의 넓고 비옥한 대지에 최참판댁과 마을 사람들이 생을 기탁하고 있다. 『토지』는 당대 여러 계층을 대표하는 많은 등장인물들을 통해 근대 한국인의 삶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이 작품으로 인해 박경리는 많은 한국인이 기억하는 중요한 작가로 남아 있다. 『토지』는 큰 인기를 얻어 여러 번 드라마로도 제작, 방영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는 이러한 『토지』의 공간을 실재화해 낸 장소인 최참판댁이 있다. 『토지』를 기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허구의 공간을 현실 속에 구현해 놓은 것이다. 지리산을 뒤에 두고 섬진강을 내려다보는 넓은 대지에 14채의 한옥으로 구성된 최참판댁은 『토지』를 기억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토지』와 박경리가 보여주고자 했던 한국인의 삶의 본질을 감각적으로 공감하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드라마 촬영지로 사용되면서 유명세도 더해지고 있다. 최참판댁이 건립된 장소는 1985년 처음으로 『토지』를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할 당시 박경리가 최참판댁이 있을만한 장소라고 언급했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박경리는 『토지』 를 완성하기 위해 무려 26년 동안 집필 작업을 했는데, 서울에 살면서 시작한 『토지』의 집필을 강원도 원주에서 마치게 된다. 이 때문에 강원도 원주에는 박경리의 삶과 작품을 기리는 박경리문학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박경리는 생전에 토지문화재단을 설립, 문학의 후진을 양성하는 사업을 추진하여 원주 사택 근방에 후배 문인과 예술인을 위한 창작공간인 토지문화관을 조성했다. 박경리의 고향이자 묘소가 있는 통영에는 박경리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곳곳에 자리한 박경리를 기리는 장소들은 박경리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이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김동리는 1913년 경상북도 경주 성건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시종이다. ‘동리’는 호로 큰 형인 동양철학자 김기봉이 지어준 것이다.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 계통의 학교인 경주 계남소학교와 대구 계성중학교, 서울 경신중학교에서 수학했다. 큰 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김동리는 학교를 중퇴하고 동양철학과 고전을 독학했다.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 입선, 1935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화랑의 후예」 당선,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산화」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편 「무녀도」(중앙, 1936.5.), 「바위」(신동아, 1936.5.) 등으로 당시 문단에서 주목을 받았다.
서정주,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과 함께 『시인부락』(1937)을 결성했다.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1946년 초대 회장이 되었다. 순수문학, 본격문학, 인간주의 문학을 주창했다. 사회 참여와 공리성을 부정하고 인간 본질을 탐구하는 문학을 지향했다. 향토적인 소재를 ‘생의 구경적 탐구’로 형상화하여 민족문학의 전통을 정립하고 확대했다.
김동리 작품의 철학적 기반은 방대하여, 한국에 토착화한 샤머니즘과 불교를 비롯한 동양철학,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보여준다. 주요 작품으로는 「역마」(1948), 「등신불」(1961), 「까치소리」(1966) 등의 단편소설, 『무녀도』(1947), 『황토기』(1949), 『실존무』(1955), 『등신불』(1963), 『바위』(1973), 『밀다원시대』(1975) 등의 단편집, 『문학과 인간』(1948), 『소설작법』(공저, 1965), 『고독과 인생』(1977), 『문학이란 무엇인가』(1984) 등의 평론집, 『바위』(1973) 등의 시집과 『자연과 인생』(1977), 『사색과 인생』(1973) 등의 수필집이 있다. 김동리의 소설은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있어서 1960~70년대에는 「역마」, 「무녀도」, 「극락조」, 「을화」, 「황토기」 등이 영화로 제작되었고, 1980년대에는 「등신불」이 드라마로 제작되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김동리는 서라벌예술대학, 중앙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한국문인협회 회장, 예술원 회장, 한국소설가협회 회장, 한일문화교류협회장 등을 역임하며 당시 한국 문단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1968년 『월간문학』, 1973년에는 『한국문학』을 창간했다. 아세아자유문학상, 예술원 문학부문 작품상, 3.1문화상 예술부문 본상, 서울시문화상 문학부문 본상, 5.16민족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국민훈장동백장과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여 받았다. 1990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다 1995년 81세로 사망했다.
김동리의 작품 대부분은 고향인 경상북도 경주를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무녀도」, 「황토기」, 「선도산」, 「허돌풀레」, 「유혼설」, 「을화」, 「까치소리」, 「바위」 등과 『회소곡』, 『기파랑』,『최치원』, 『수로부인』, 『우륵』, 『장보고』, 『원왕생가』, 『대왕암』, 『솔거』 등에서 경주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경주는 김동리가 기독교와 동양철학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던 곳이면서 민족적이고 토속적인 정서가 충만한 고장으로 김동리가 추구한 민족문학의 배경지로 가장 적당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에 김동리는 자전적 소설인 「선도산」에서 “…… 경주란 데는 산에서나 물에서나 들에서나 수풀에서나, 그리고 언제 어디서고, 여러분들이 진실로 구하고 원한다면 시와 소설과 그림과 음악이 물 솟듯 푹푹 솟아나는 고장입니다……”(김동리, 『김동리전집3: 등신불, 까치소리』, 「선도산」, 민음사, 1995, 427면)라고 주장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406-3(진현동 550-1)에 동리목월문학관이 있다.
전라남도 순천시의 작가로 김승옥이 있다.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1945년 귀국하여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성장했다. 순천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1962년 단편 「생명연습」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같은 해 김현, 최하림 등과 동인지 『산문시대』를 창간, 「건」, 「환상수첩」 등을 발표했다. 이후 1960년대에 1950년대 한국문학의 경향과는 다른 다수의 단편소설을 창작하며 한국문학사에서 196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기성세대의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욕망, 개인적 감수성을 감각적인 문체에 담아 소설적 완결성을 획득한 작품을 발표,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김승옥을 위시한 당시 1960년대 등장한 작가들을 4.19혁명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세대, 4.19세대로 일컬어진다. 「역사」,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60년대식」, 「다산성」, 「야행」, 「강변부인」 「서울의 달빛 0장」 등을 발표했다.
1967년 김동인의 「감자」를 영화화하면서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시나리오 작업에 열중하여 「장군의 수염」, 「영자의 전성시대」, 「내일은 진실」 등을 각색했다. 샘터사, 세종대학교에 재직했다. 1980년 동아일보에 『먼지의 방』을 연재하던 중 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자진 중단하고 1981년부터 신앙생활에 몰두하면서 소설을 쓰지 않았다.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했다. 동인문학상(1965), 이상문학상(1977), 대한민국예술원상(2012) 등을 수상했다. 김승옥은 대표작인 「무진기행」에 전라남도 순천시의 풍광은 담았다. 「무진기행」은 1964년 『사상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항구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럴 조건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심이 얕은 데다가 그런 얕은 바다를 몇백 리나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럼 역시 농촌이군요?” “그렇지만 이렇다 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 오륙만이 되는 인구가 어떻게들 살아가나요?”
“그러니까 그럭저럭이란 말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그들은 점잖게 소리내어 웃었다.
“원, 아무리 그렇지만 한 고장에 명산물 하나쯤은 있어야지.” 웃음 끝에 한 사람이 말하고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김승옥, 「무진기행」, 『김승옥소설전집1』, 문학동네, 1995, 126면
김승옥에게 안개로 둘러싸인 순천은 내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근원적인 공간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일상의 공간인 ‘서울’과 고향인 ‘무진’을 오가면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한다. 김승옥의 고향인 전라남도 순천시의 순천문학관 내에 김승옥관이 있어 김승옥의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다. 매년 김승옥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김승옥에게 안개로 둘러싸인 순천은 내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근원적인 공간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일상의 공간인 ‘서울’과 고향인 ‘무진’을 오가면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한다. 전라남도 순천시에는 순천과 인연이 깊은 작가들을 기리는 순천문학관 내에 김승옥관이 있어 김승옥의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다.
아름다운 용모와 본디 고상한 성품으로 태어난 난설헌의 집안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아버지와 그의 자녀들 모두 문장에 뛰어나 흔히 허씨 5문장(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이라고 불렸다. 일찍부터 여동생의 재능을 귀하게 여긴 오빠 허봉은, 서자라는 이유로 사회 진출의 길이 막혀 전국을 떠돌며 벗들과 어울려 시짓기를 즐기던 당대 최고의 시인 손곡 이달(李達)을 막내 동생인 허균의 스승으로 모실 적에 여동생도 함께 글과 시를 배울 수 있게 배려했다. 이렇듯 당대 조선에서 가장 지성적이고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사회 전반을 지탱하던 유교적 가르침은 물론 도교의 신선사상과 불교적인 사유까지 두루 익히며 난설헌은 오빠들 사이에서 함께 문장을 읽고 시를 짓는 교육의 기회를 실컷 누렸다. 덕분에 여덟 살에 신선 세계에 함께 노니는 자신을 표현한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라는 도가적 풍류의 시를 지어 신동 소리를 듣기 시작해, 도교적 유토피아에 일찍부터 심취해 남겨진 그녀의 시 213편 중 고단하고 비루한 세상을 벗어나 신선의 세계를 노래한 시가 128편에 이른다.
열다섯에 시집갔으나 조선을 대표하는 문장가 친정과 달리 당시 대부분 집안이 그러하듯, 글 읽고 시를 쓰는 며느리가 달갑지 않은 시댁에서 점점 외톨이가 되었고, 신혼 시절 외도하는 남편을 그리는 시를 짓기도 했으나 곧 남편과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며 자신이 겪는 불행의 원인으로 조선 땅에 태어난 것, 여자로 태어난 것, 남편과의 결혼, 셋을 꼽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친정은 정치적 풍파에 휘말려 그토록 존경하던 부친과 오라비가 외지에서 객사하고, 현실의 불행을 잊으려 통곡을 삼키는 시와 함께 점점 더 신선 세계를 동경하는 시들을 짓는 사이 돌림병에 어린 남매까지 잃고 배 속 아이마저 유산되는 끔찍한 불행을 연이어 겪으며 그녀는 아예 삶의 의욕을 포기한 채 시들어가는 비운의 여인으로 스물일곱에 세상을 떴다.
오늘날 페미니스트 작가의 선봉이라 불릴 수 있는 난설헌의 작품집, 그녀 유언에 따라 유작을 모두 태웠으나 동생 허균은 누이가 친정에 남겨둔 시들이며 자신이 암송한 시들을 모아 《난설헌집》을 엮었고, 마침 조선을 찾은 명나라 사신들에게 이를 보이자 그들 중 주지번이 경탄하며 가져가 중국에서 이 책을 출간했다. 1606년 그녀의 별세 후 18년 뒤 나온 이 시집이 중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이 책이 다시 동래에서 일본인 분다이야 지로 손에 들려 1711년 일본에서 출간되어 인기를 끌었다. 난설헌의 극히 일부를 뺀 나머지는 당나라와 원나라 시인들의 위작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그녀 스타일로 변형된 것이고 힘겨운 본인 삶의 단상들을 투영한 작품들로도 그녀의 시적 재능은 입증되었다는 반론이 있다.
모든 사유와 감성까지도 엄격한 성리학 전통의 토대 위에 작동한 18세기 조선후기, 여염집 여인으로서 가장 많은 한시를 남긴 김삼의당은 《삼의당김부인유고》에서 스스로를 “호남의 어리석은 부녀로 태어나 깊은 규방에서 성장해 경사(經史)를 넓게 살피지는 못했고, 그저 언문으로 《소학》을 해독하고 글 읽는 법을 깨우치며 여러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대략 섭렵했다”고 겸손히 소개한다. 이런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익히고 수양한 내용은 유교 가문에서 내려오는 규범이고 “여성이 지켜야 할 도리”였으니, 그건 곧 자신의 정체성을 터득하는 길이기도 했다. 혼인 후에는 삯바느질로 시부모를 부양하고 남편의 과거 수발을 하느라 오래도록 몹시 고단하게 살았던 그녀, 곤고한 생활 가운데 꾸준하게 작성한 시와 산문 260편은 조선후기 여성세계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다.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전통, 가문의 영달을 위해 남편은 결혼 후 부모 공양은 물론 가사 일체를 아내에게 떠맡긴 채 절에서 공부하고 한양에 올라가서 과거 준비에 매달린 채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는 형편이었다. 삼의당은 남원 서봉방 한동네에서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난 각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남편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과 외로움을 애달프게 읊은 시(時)들과 함께 초라해지는 감상을 애써 삼가고, 마음을 굳건히 하며 남편에게는 오로지 학업에 정진하실 것을 독려하는 기운 넘치는 당찬 시를 꾸준하게 작성했다. 십여 년을 그렇게 소진했으나 남편은 결국 벼슬길에 들지 못한 채 공부를 접고 낙향하니, 이들 부부는 진안으로 이사 후 안빈낙도하는 삶을 지키고 아름다운 자연과 전원생활을 노래하는 시들로 화답하며 더욱 도타운 사랑을 계속 읊었다.
평생소원이던 입신양명의 꿈을 접고 시골 살림으로 자족할 각오를 하고 진안에 안주 후에도 남편은 몇 번 더 과거에 응시하고 번번히 낙방하지만, 삼의당은 풀리지 않는 인생 항로에 색다른 운치를 담아 고즈넉한 전원시로 읊으면서 실망을 추슬렀다.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존경하고 마치 신선놀음을 하듯 서로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 삼의당과 담락당이라고 서로를 부르며 시로 화답하고 서로의 사랑을 완성했다. 그녀 사후에 출간된 유고 두 권은 총 111편 253수의 시집과 편지 6편, 서(序) 7편, 제문 3편, 잡지(雜識) 6편 등 총 26편이 실린 산문집으로 되어 있다. 진안군 백운면 덕현리에 남편 하립과 그녀의 합장묘가 있으며 마이산 탑영제 호반가에 이들을 기리는 시비가 있다. 삼의당이 태어난 남원 교룡산 관광 단지 내에도 그녀의 시비가 세워졌다.
사대부 남성 지식인의 독점물이었던 성리학의 핵심 원리를 꿰뚫었으나 이에 대해서 논의를 펼치는 그녀의 학문적인 접근 자체가 조선 시대 여성으로서는 대단히 특이한 사건이었다. 워낙 살림이 곤궁했으나 부친이 세상을 뜨고 생활이 더 어려워지니, 어머니는 살림을 줄여 충청북도 청주 인근 산골 옥화(玉華) 땅으로 이사를 했다. 공부를 좋아하는 오빠들 틈에서 그녀 또한 어깨너머로 공부를 시작했는데, 동생들을 가르치던 둘째 오빠 임성주는 여덟 살 먹은 여동생의 총명함이 예사롭지 않음을 곧 눈치를 챘다. 총명한 여동생이 학문에 각별한 재능을 보이니 마음이 어질고 반듯했던 오라비는 이를 가상히 여겨, 이상적 제왕의 상징인 문왕의 어머니와 부인 “태임(太任)과 태사(太女以)를 존경한다”는 뜻의 ‘윤지당’이라고 예쁜 당호를 지어주었다. 그러나 한편 그녀가 “대장부로 태어나지 못한” 걸 무척 안타까워했다.
19세에 혼인했으나 8년 만에 청상과부가 된 후에도 그녀는 말 그대로 안빈낙도를 즐기며 꾸준히 학문에 정진했다. 두 분의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효성을 다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하고, 두 시동생은 고매한 인격의 형수님이 73세 나이로 별세하기까지 어머니처럼 존경하며 모든 일을 여쭈었다 한다. 성리학적 탐구에 몰두하며 고금의 역사와 철학을 비판한 유려한 글도 썼으나, 그녀가 추구했던 건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학문을 통한 자기 수양과 인격적인 완성, 이를 통해 도학의 정상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사상적 시야를 펼칠 수 있을 만큼 최고정상에 이르러 그 시대의 대표적인 논쟁들에 끼어들어 마땅했으나,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의 선비들은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오빠 임성주와 서신 교류로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학문적인 토론 정도가 그나마의 큰 위안이었다.
학문의 계통만 따지면 윤지당은 조선 시대 최대 명문에 속하나, 증조부 이후 급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회적으로는 몰락한 가문 출신이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감상적으로 노래하는데 그친 대부분의 당대 지식인 여성처럼 그녀 역시 본명조차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윤지당은 조선의 사상적 주체인 선비들의 우주관인 ‘사단칠정론’을 새롭게 해석하며 억압과 차별을 당연시하던 시대적 한계를 해소했다.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본성에 차이가 없으니 삶에서 기인한 차이 정도는 노력으로 극복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동생 임정주가 정리한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에 담긴 이런 통찰이며 완성된 인간으로서의 윤지당의 명성은 특히 조선 사대부 여성들 사이에서 숭앙받았다. 이런 전통은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지다 서구적 사유의 유입과 함께 소멸하였으나, 그녀의 작업을 정통 성리학으로 인정한 충청도 유림에서는 꾸준히 전수되었다.
암울하고 어두웠던 일제강점기를 살던 지식인 심훈은 젊은 나이에 항일의 뜻을 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모가 거처하던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에 낙향해 새로운 문화운동을 시작했다.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 등 농촌계몽운동에 몸담으며, 그 과정의 일들을 기록하였다. 문학작품으로 탄생한 『상록수』는 계몽을 위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로 농촌계몽운동의 선구가 된 작품이다. 심훈의 상록수정신을 계승하고자 지역 인사와 출향인들이 모여 1973년에 ‘상록탑 건립 추진 위원회’를 결성했다. 모금 운동의 결과물인 상록탑은 1975년 11월 30일 충청남도 당진시 남산공원에 착공되고, 이듬해에 완공되었다. 1977년 10월 28일 상록수 정신의 계승과 민족 문화 및 향토 문화 발전 도모를 위해 당진 문화원장인 김석제 원장이 주도하여 제1회 심훈 상록문화제가 시작되었다. 이후 해마다 9~10월에 민간주도의 지역문화축제로 개최되고 있다.
초기 ‘심훈 상록문화제’는 심훈 선생 추모제를 정점으로, 주민화합을 위한 민속 행사와 체육 행사 등 6개 종목으로 대회를 진행했다. 점차 구성이 풍부해져 1990년대에는 20여종의 행사를, 200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콘텐츠로 구성된 60여 가지 행사를 열고 있다. 심훈이 낙향 후 부곡리에 직접 설계해서 지은 주택인 필경사에서 심훈 상록문화제 집행위원회와 부곡리 마을회 주관으로 '심훈 선생 추모제'를 개막한다. 필경사에서 '애향가 제창'을 하고, 집 주변에는 심훈 시 깃발을 전시한다. 그 후 행사는 당진시 대덕동 어름 수변 공원으로 옮겨서 '깃발 미술 전시'를 한다.
둘째 날에는 어름 수변 공원 무대에서 '개막식'을 비롯하여 '심훈 청소년 국악제', '마술쇼', '난타 공연', '연예인 축하 공연' 등을 베푼다. 셋째 날에는 '심훈 음악 콩쿠르', '청소년 어울 마당', '심훈 골든벨', '심훈 문학상 강연회', '충남 민요 경창 대회', '당진 전통 농악 시연', '그날이 오면 북 콘서트', '심훈 문학상 시상식', '시와 가곡의 밤' 등 다채로운 문화 예술 공연을 연다. 넷째 날에는 '국악 한마당'과 '음악 산책'을 시작으로 '크리에이션 및 종합 공연', '치어 리딩', '시민 노래 열전', '폐막식 및 시상식'으로 행사를 마무리한다.
1996년부터 상록문화제 기획분과위원회에서 기존의 상록수상을 폐지하고 심학문학상을 신설했다. 심훈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새로운 농촌 문학을 후원하기 위해 변경한 것이다. 심훈의 상록수와 같이 농촌문학을 발굴하고, 동시에 등단 10년 미만의 창작자들을 후원하기 위해 상을 준다. 당진시에 국한하지 않고 전국을 대상으로 월간문예지와 중앙 일간지에 공고해 당선작을 선발하고 상금을 수여한다.
박두진은 1916년 경기도 안성시에서 태어났다. 경성사범학교와 서울 우석대학교(현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1939년 6월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5호)에 시 「향현」, 「묘지송」 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박두진은 같은 해 9월 『문장』(8호)에 「낙엽송」, 다음해 1월 『문장』(12호)에 「의」, 「들국화」까지 총 3회의 추천을 받고 시를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박두진은 자연을 제재로 하여 민족의식을 시화했다. 1941년 4월 『문장』이 폐간된 이후에도 일제의 감시를 피해 한글로 시를 썼다.
1946년 박목월, 조지훈과 『청록집』을 발간, 이후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청록파’로 불리게 되었다. 1946년 박두진의 대표작인 「해」를 『상아탑』에 발표, 1949년 첫 번째 시집인 『해』를 발간했다. 6·25전쟁 시기에는 창공구락부(공군종군문인단)에서 활약했다. 1970년대에는 수석과 종교를 제제로 종교적 신념과 자연과의 교감을 주제로 한 시를 발표했다. 이화여대, 연세대 교수를 역임했다. 『오도』(1953), 『거미와 성좌』(1962), 『인간 밀림』(1963), 『하얀 날개』(1967), 『고산식물』(1973), 『사도행전』(1973), 『수석열전』(1973), 『야생대』(1981), 『포옹무한』(1981) 등의 시집을 발간하였고, 1984년에는 범조사에서 『박두진 전집』을 간행했다.
수상집으로 『생각하는 갈대』(1970), 『언덕에 이는 바람』(1973), 『그래도 해는 뜬다』(1986)와 시론서 『한국현대시론』(1970),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1976) 등이 있다. 아시아자유문학상(1956), 서울시문화상(1962), 3‧1문화상(1970), 예술원상(1976)을 수상했다. 1984년 은관문화훈장(2등급)을 받았다. 1998년 9월 16일,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박두진의 대표작은 「해」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
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
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
도 한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
려 보리라.
어둠의 세계가 가고 “해”로 상징되는 밝은 세계가 오길 바라는 화자의 소망이 표현되어 있는 시다. 해가 솟은 밝은 세계는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릴 수 있는 화합의 세계다. 발표 시기보다 앞서 창작했던 시로 박두진이 꿈꾸던 밝은 세계는 해방된 조선을 의미함을 짐작할 수 있다. 자연을 제재로 민족의식을 서정적인 시로 표현한 박두진 시의 특징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시다. 2001년 6월 고대 로마 유적지로 유명한 프랑스 남부도시 베종 라로멘에 안성시의 추천으로 「해」의 첫 구절이 쓰인 시비가 세워졌다. 앞면은 한국어로 쓰여 있고 뒷면은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있다.
2018년 경기도 안성시 남사당로 198-11에 박두진문학관이 개관했다. 박두진 저서, 친필원고, 유품, 수석, 글씨와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전시실 외에도 다목적실, 북카페 등이 있다.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오흥리 755번지 박두진의 집필실이 있는 곳에는 금광저수지를 따라 박두진 문학길이 조성되어 있다.
부산시 기장군을 대표하는 작가로 오영수가 있다. 오영수는 1909년 경상남도(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면 동부리 313번지에서 태어났다.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의 나니와중학 속성과, 동경 국민예술원을 수료하였다. 이후 고향에 돌아와 ‘청년회관’을 열어 마을 청년들을 가르치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고 결국 1942년에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만주 신경으로 갔다. 1943년 귀국하여 이후 경남여고 교사, 현대문학 편집장으로 근무했다. 1949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신천지』에 「남이와 엿장수」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머루」, 「갯마을」, 「명암」, 「메아리」, 「수련」 등이 대표작이다. 오영수는 자연과 고향에 대한 애정, 어린이와 도시의 서민과 농민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향토성과 서정성이 짙은 문체에 실어 서사화했다. 특히 고향인 언양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이 이러한 오영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 예술원상(1977), 문화훈장(1978)을 수상했다. 1979년 별세했다. 오영수는 만주에서 돌아온 1943년부터 2년 동안 고향에서 멀지 않은 경상남도(현 부산시) 기장군 일광면 화전리에서 가족들과 거주했는데, 이 시기 자신이 살고 있던 마을 앞 바닷가에 접한 마을인 학리를 배경으로 창작한 작품이 「갯마을」이다.
서(西)로 멀리 기차 소리를 바람결에 들으며, 어쩌면 동해 파도가 돌각담 밑을 찰싹대는 H라는 조그만 갯마을이 있다. 더깨더깨 굴딱지가 붙은 모 없는 돌로 담을 쌓고, 낡은 삿갓 모양 옹기종기 엎딘 초가가 스무 집 될까 말까? 조그마한 멸치 후리막이 있고, 미역으로 이름이 있으나, 이 마을 사내들은 대부분 철 따라 원양출어(遠洋出漁)에 품팔이를 나간다. 고기잡이 아낙네들은 썰물이면 조개나 해조를 캐고, 밀물이면 채마밭이나 매는 것으로 여느 갯마을이나 별 다름 없다. 다르다고 하면 이 마을에는 유독 과부가 많은 것이라고나 할까? 고로(古老)들은 과부가 많은 탓을 뒷산이 어떻게 갈라져서 어찌어찌 돼서 그렇다느니, 앞바다 물발이 거세서 그렇다느니들 했고, 또 모두 그렇게들 믿고 있다.
「갯마을」, 『오영수단편집』, 지만지, 2012, 75면
“H라는 조그만 갯마을”이 곧 학리다. 학리가 접한 기장 일대의 바다는 미역과 멸치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학리에는 물질을 해서 미역을 따고 멸치 잡는 일을 도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갯마을」의 주인공 혜순과 같은 어촌사람들이 있다. 바다는 이들에게 삶의 터전이면서 가족들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주인공 혜순의 순탄치 않은 삶, 그러한 삶을 준 바다를 고향이라고 그리워하며 결국 돌아오는 혜순의 모습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과 바다 및 고향에 대한 회귀 의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은 오영수를 비롯한 당대 사람들이 겪었던 고달픈 삶의 행로와 닮아 있다.
가난과 일본의 탄압으로 험난한 삶을 살았던 오영수가 평탄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던 기장군 일대의 바다는 오영수가 서정성을 키울 수 있었던 고향과 중첩되어 자연과 고향에 대한 애정,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공간으로 재현되었다. 「갯마을」은 1965년 영화로도 제작되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 때문에 일광해수욕장 옆 작은 공원에는 오영수 문학비가 세워져 있으며, 매해 5월에 일광해수욕장에서 기장갯마을 축제가 열려 오영수의 삶과 문학을 기리고 있다. 오영수의 고향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리에도 오영수문학관이 건립되어 많은 사람들이 오영수와 그의 작품을 만나고 있다.
이병주는 1921년 3월 26일 경남 하동군 북천면에서 출생했다. 이병주의 집안은 오랫동안 하동에 연고를 두고 있었고 근방에서는 “8형제, 8천석의 집안”이라고 불리며 권세가 높았다. 하동에서 북천보통학교와 양보공립보통학교를 다닌 이병주는 진주농업학교에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난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3고, 메이지대학 문예과 등에서 수학하고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국에서 머물다 광복 후 귀국, 서울과 진주 지역에서 교수 생활을 한다. 한국 전쟁 이후에는 부산에서 신문사 주필과 작가로 활약하며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발표했다.
이병주는 여러 글에서 자신의 고향인 하동군 북천면에 대해 이야기한다.
산촌에서 자랐다. 병풍처럼 산이 첩첩으로 둘러쳐진 마을이었다. 하늘은 그 첩첩한 산의 능선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나는 하늘의 원래 모양이 그런 것으로 알았다.
-「사랑을 위한 독백」, 회현사, 1979, 1쪽
하동을 내 고향이라고 하지만 내가 나고 자라며 소년기를 보낸 진짜 고향은 하동군 가운데에서도 북천면이란 곳이다. 서울에 앉아 고향의 산천을 그려보면 꿈나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경치가 좋았다는 뜻이 아니다. 전형적인 산수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러한 산, 그러한 시내, 그러한 들, 그러한 돌, 그러한 집들로 이루어진 가난한 마을과 마을에 불과하다. (중략) 이처럼 쓰고 있으면 무미건조할 뿐이고 사실 그러한데 어째서 고향이 이토록 그리우니 모를 일이다.
-「지리산 남쪽에 펼쳐진 섬진강 포구」, 한국인, 1987, 100-101쪽
이병주에게 하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기거나 이렇다 할 자랑거리가 있는 고장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리운 고향이다. 또한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게 한 한국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기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역사의 현장으로서의 하동과 지리산 일대의 모습을 담은 작품으로 이병주의 대표작인 「지리산」이 있다.
눈을 남으로 돌리면 산봉우리가 파도처럼 아득히 시야 속에서 물결치고, 서쪽과 북쪽으로 고개를 젖히고 쳐다봐야 할 산봉우리들이 첩첩이 쌓여 있었다.
-「지리산1」, 한길사, 2006, 22쪽
들이 끝난 곳에 개울이 나타났다. 징검다리 언저리에 엷은 얼음이 붙어 있었다. 개울물에 푸른 하늘이 구름을 띄우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어린 동생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정다워 뵈는 마을.
-「지리산1」, 한길사, 2006, 199쪽
이병주는 「지리산」에서 그리운 고향의 모습으로서의 하동의 모습을 잊지 않고 담으면서, 당대에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들을 장대한 서사로 엮어나갔다. 「지리산」에는 하동과 지리산이 품었던 한국 전쟁의 상처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하동에 있는 이병주 문학관에서는 이러한 이병주의 삶과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있으며 매년 세계의 작가들을 초대하는 국제 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경기도 양평을 대표하는 작가로 황순원이 있다. 양평에는 황순원의 삶과 작품세계를 기억하고자 조성된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이 있다.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에서 출생했다. 정주 오산중학교와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공부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제2고등학원,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1931년 시 「나의 꿈」을 『동광』에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35년 『삼사문학』 동인, 1937년 『단층』의 동인으로 활약했다. 첫 단편집 『늪』(1940)을 발간하고 이후 「별」(1941), 「그늘」(1942) 등을 발표한 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광복까지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황순원의 작가로서의 재능을 알아본 이광수가 일본어로 작품 활동을 할 것을 권유했으나 응하지 않았던 일화가 유명하다. 광복 후에 광복 전에 쓴 작품들을 포함하여 두 번째 단편집 『목넘이 마을의 개』(1948)를 간행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전쟁 이후 서울에 정착하여 서울중고등학교 교사, 경희대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이후 『별과 같이 살다』, 『카인의 후예』, 『인간접목』,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신들의 주사위』 등의 장편소설들을 발표했다. 황순원의 소설에는 고단했던 한국의 역사로 인해 고통 받았던 사람들의 모습과 이들에 대한 작가의 연민 어린 시선이 담겨 있다. 아시아자유문학상(1955), 예술원상(1961), 3·1문화상(1966), 국민훈장동백장(1970) 등을 수상하였다. 2000년 9월 14일 사망했다. 사망 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황순원 삶의 궤적에서 양평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지만, 황순원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양평은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로 회자되는 황순원의 작품 「소나기」의 배경이 양평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 이후인 1953년, 삭막한 현실 속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등장한 이 순수한 감성은 사람들의 마음에 큰 위안을 주었다. 작품 속 소년과 소녀의 애틋한 설렘과 슬픈 이별은 첫사랑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이후 한국 문학뿐만 아니라 문화계 전반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재창작되면서 사람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개울물은 날로 여물어갔다. 소년은 갈림길에서 아랫쪽으로 가 보았다. 갈밭머리에서 바라보는 서당골마을은 쪽빛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 보였다.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호두알을 만지작거리며, 한 손으로는 수없이 갈꽃을 휘어꺾고 있었다.
-「소나기」, 「학‧잃어버린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1981
양평은 전쟁이 미처 훼손할 수 없었던 사랑과 순수함이 보존된 공간으로 어린 소년과 소녀의 설렘이 공명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양평읍은 소녀가 소년을 기억하며 숨을 거두었던 장소다. 소녀의 죽음은 이들의 설렘을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 이 때문에 양평 일대에는 아직도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셀렘의 추억들을 만들고 있다. 경기도 양평에 조성된 소나기마을에서는 매년 황순원과 소설 「소나기」를 기억하는 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박용철은 1904년 전라남도 광산,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1916년 광주공립보통학교 졸업, 휘문의숙과 배제학당에서 수학했다. 일본 동경 아오야마학원 중학부를 거쳐 1923년 도쿄외국어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했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 자퇴했다. 아오야마학원 재학 때 김영랑과 교류하면서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비 내리는 날」을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문예월간』, 『문학』 등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시문학사를 주재하면서 김영랑, 정지용과 시문학동인으로 활약, 순수문학을 지향했다.
박용철은 서정적인 시 안에 민족의식을 담았다. 문예잡지 『시문학』(1930), 『문예월간』(1931), 『문학』(1934)과 『정지용시집』(1935), 『영랑시집』(1935)을 간행했다.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참여하여 외국의 시와 입센의 『인형의 집』 등 희곡을 번역하고 평론을 발표했다. 박용철은 해외 문학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여 당시 조선 문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1938년 서울에서 후두결핵으로 사망했다. 유작시집으로 『박용철전집』 2권이 1939년과 1940년에 간행되었다.
박용철의 대표작은 「떠나가는 배」(1930)다.
나 두 야 간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 거냐/나 두 야 가련다//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는 사람들//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앞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나 두 야 가련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 거냐/나 두 야 간다
정주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슬픔과 새로운 삶의 공간에 대한 희망이 교차하는 시다. 일제의 수탈로 가난에 허덕이다 생존을 위해 유랑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조선인들의 애환이 연상된다. 박용철의 민족의식이 서정적인 시어 속에 잘 드러나 있는 시다. 1980년대에 가수 김수철이 부르고 대중의 인기를 얻었던 “나도야 간다”라는 가요가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의 일부를 차용한 것이다. “나도야 간다”는 당시 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고래사냥”의 주제곡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천동에 박용철의 생가가 광주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존되어 있다. 「떠나가는 배」 시비도 세워져 있다. 송정공원에도 ‘용아 박용철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는 매해 박용철의 아호를 딴 ‘용아 문학제’, ‘용아 박용철 전국 백일장’이 열리고 있다. 광주 시내에는 '용아로'도 있다. 광주경찰청에서 광주여자대학교를 거쳐 첨단산업단지를 잇는 도로다. 이렇듯 광주광역시 곳곳에서 시인 박용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김현승 시인은 1913년 4월 4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창국 목사가 광주 양림교회로 부임한 1919년 4월부터 광주 양림동에서 자랐다. 이후 김현승이 생의 대부분을 보낸 공간이 광주다. 기독교계통의 숭일학교,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 1936년 숭실전문학교 문과 3년을 수료했다. 숭일학교 교사(1936), 조선대학교 교수(1951∼1959), 숭전대학 교수(1960∼1975),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1970) 등으로 활동했다.
숭실전문학교 재학 때인 1934년 장시(長詩) 「쓸쓸한 겨울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 양주동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게재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35년 「유리창」, 「철교」, 「이별의 시」, 「묵상수제」 등을 발표했는데, 민족의 비애를 낭만적이고 세련된 시에 담아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등의 찬사를 받는 등 당시 문단의 큰 관심을 받았다.
1937년 신사참배 항거사건으로 아버지와 누이동생과 함께 투옥돼 고문을 당했고 이 일로 누이동생이 사망했다. 이후 김현승은 광복이 되기 전까지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 1950년 「생명의 날」, 「가을 시첩」 등을 발표했는데 이때부터 인간의 고독이나 허무 등 삶의 근원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쟁 시기 4살 아들을 병으로 잃었다. 시 「눈물」에 그 애통함이 담겨 있다.
1951년부터 광주에서 계간지 『신문학』을 6호까지 간행했다. 1957년 첫 시집 『김현승시초』를 발간했다. 1963년 시집 『옹호자의 노래』에는 정치 현실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 있다. 이후 시집 『견고한 고독』(1968)과 『절대고독』(1970), 이론서 『한국 현대시해설』(1972)을 간행했다. 1974년 『김현승전시집』을 펴냈고, 유고시집 『마지막 지상에서』(1977), 산문집 『고독과 시』 (1977)가 간행되었다.
김현승의 삶과 문학은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인간주의의 실천으로 정의할 수 있다. 1955년 제1회 전라남도문화상, 1973년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다. 1975년 4월, 숭실대학교 채플 시간 도중 쓰러져 자택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생을 마감했다.
광주광역시는 김현승의 종교적 신념과 문학에 대한 열정의 고향이다. 김현승이 자란 양림동은 서구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광주에 정착한 곳으로 ‘광주의 예루살렘’, ‘신앙촌’으로 불릴 정도로 기독교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양림동에서 김현승은 신앙심을 키우며 시를 구상하고 작품 활동을 했다. 김현승의 광주광역시와 무등산, 그리고 차에 대한 사랑이 잘 나타난 시로 「무등茶」가 있다.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십일월의 긴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김현승, 「무등茶」, 『가을의 기도』, 미래사, 1991, 27면)
광주광역시와 무등산을 배경으로 김현승이 즐겨 마시던 차와 김현승 시의 주된 심상인 외로움이 등장하는 시다. 외로움이나 고독은 눈물, 기도와 함께 김현승 시에 자주 나오는 시어다. 김현승 시에서 외로움과 고독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정서로 나타난다. 고향과도 같은 공간에서 차를 마시며 삶과 인간에 대해 사색하는 김현승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시다.
호남신학대학 뒷산의 선교사 묘원으로 가는 길목은 김현승이 즐겨 찾던 산책로다. 김현승의 산책로에는 ‘시인의 길’이 조성돼 있고, 호남신학대학에는 「가을의 기도」 시비가 있고, 광주 남구 제중로 47번길에는 김현승을 기리기 위한 ‘다형다방’이 있다. 무인카페로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차를 마시고 쉬었다 갈 수 있다. 내부엔 양림동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카페 옆엔 ‘시인의 벤치’가 마련돼 있다. 시인이 30여년간 살았던 집(양림동 78번지)은 그 터만 남아 있다. 광주 무등산도립공원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충청북도 진천을 대표하는 작가로 조명희가 있다. 조명희는 1894년 충청북도 진천면 벽암리에서 태어났다. 진천소학교, 서울의 중앙고보에서 수학했다. 3‧1운동에 참가해 투옥되었다. 같은 해 일본의 도요 대학에 진학하여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고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에서 근무했으며 1925년 카프(KAPF)에 가담했다. 1928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촌에서 교사가 되어 한인 청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34년 결성된 소련작가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1937년 일본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낙동강』, 『붉은 깃발 아래에서』, 『짓밟힌 고려인』 등이 대표작이다. 조명희는 시, 소설, 희곡 등에서 일제의 탄압 하에서 고된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 농민의 계급투쟁을 재현했다. 우즈베키스탄, 중국 그리고 고향인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조명희의 삶과 작품 세계를 기리고 있다.
조명희의 대표작인 「낙동강」은 낙동강 하류 구포벌을 배경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낙동강 칠백 리 길이길이 흐르는 물은 이곳에 이르러 곁가지 강물을 한몸에 뭉쳐서 바다로 향해 나간다. 강을 따라 바둑판 같은 들이 바다를 향하여 아득하게 열려 있고 그 넓은 들 품안에는 무덤무덤의 마을이 여기저기 안겨 있다. 이 강과 이 들과 저기에 사는 인간-강은 길이길이 흘렀으며, 인간도 길이길이 살아왔었다. 이 강과 이 인간, 지금 그는 서로 영원히 떨어지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인가? (중략) 어느 해 이른 봄에 이 땅을 하직하고 멀리 서북간도로 몰려가는 한 떼의 무리가 마지막 이 강을 건널 제, 그네들 틈에 같이 끼여 가는 한 청년이 있어 뱃전을 두드리며 구슬프게 이 노래를 불러서, 가뜩이나 슬퍼하는 이사꾼들도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다 한다. 과연, 그네는 뭇 강아지떼 같이 이 땅 어머니의 젖꼭지에 매달려 오래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러나 그 젖꼭지는 벌써 자기네 것이 아니기 시작한 지도 오래였다. 그러던 터에 엎친 데 덮친다고 난데없는 이리떼 같은 무리가 닥쳐와서 물어 박지르며 빼앗아 먹게 되었다. 인제는 한 모금의 젖이라도 입으로 들어가기 어렵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이 땅에서 표박하여 나가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을 우리는 잠깐 생각하여 보자.
-낙동강, 254-255p
낙동강 지역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끼니를 연명하기 위해 만주, 연해주로 이주했다. 고향에서 살 수 없어 타지를 떠도는 낙동강 하류 사람들의 삶은 당대 조선인들의 처지이자 조명희의 현실이기도 했다. 조명희는 이러한 삶의 원인인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주인공 박성운은 독립운동을 하다 가족들을 이끌고 서간도로 가지만 이주지에서의 삶도 척박하여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고, 떠날 때보다 더욱 가난해진 고향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가 처음으로, 자기 살던 옛 마을을 찾아와 볼 때에 그의 심사는 서글프기 가이없었다. 다섯 해 전 떠날 때에는 백여 호 촌이던 마을이 그 동안에 인가가 엄청나게 줄었다. 그 대신에 예전에는 보지도 못하던 크나큰 함석지붕 집이 쓰러져가는 초가집들을 멸시하고 위압하는 듯이 둥누럿이 가로 길게 높여 있다. 그것은 묻지 않아도 동척 창고임을 알 수 있다. 예전에 중농이던 사람은 소농으로 떨어지고, 소농이던 사람은 소작농으로 떨어지고, 예전에 소작농이던 많은 사람들은 거의 다 풍지박산하여 나가게 되고 어렸을 때부터 정들었던 동무들도 하나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도회로, 서북간도로, 일본으로 산지사방 흘어져갔었다.
박성운은 고향에서의 삶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농민들과 함께 일제에 저항하고 소작쟁의를 일으킨다. 「낙동강」은 무산계습의 의식적인 정치투쟁을 다룬 본격적인 계급문학으로서 당시 카프 내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나보이 문학 박물관에는 조명희 기념실이 마련되어 있고 조명희 거리도 조성되어 있다. 중국 연변자치주에서도 포석조명희문학제를 매년 시행하고 있다. 조명희의 고향인 충청북도 진천군에는 포석문학공원과 포석조명희문학관이 건립되어 있으며 매년 포석조명희문학제를 시행하여 조명희의 삶과 작품 세계를 기리고 있다.
인천시의 작가로 강경애가 있다.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작품이자 대표작인 『인간문제』가 인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인천에서 강경애와 『인간문제』를 기리고 있다. 강경애는 1906년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했다. 강경애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사망하여 어머니는 강경애를 데리고 부유한 집안의 후처로 들어갔다. 장연여자청년학교, 장연소학교, 평양 숭의여학교, 서울 동덕여학교에서 수학했다. 평양 숭의여학교에서는 동맹휴학과 관련되어 퇴학을 당했다. 1925년에는 장연에 흥풍야학교를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신간회와 근우회 등에 참여하는 등 여러 사회 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1931년 『조선일보』에 단편소설 「파금」,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1931년 『혜성』과 1932년 『제일선』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부자」(1933), 「채전」(1933), 「지하촌」(1936) 등과 장편소설 『소금』(1934), 『인간문제』(1934) 등을 발표했다. 강경애는 서울, 장연, 간도 용정 등을 오가며 생활하면서 사회 문제 특히 농민과 노동자, 여성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시, 소설, 수필 등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특히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던 간도에서의 생활이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1999년 간도 용정 비암산에 강경애 문학비가 세워졌다.
『인간문제』는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열악한 현실이 잘 반영된 리얼리즘 소설이다. 고향인 황해도 장연과 인천 부두를 공간적 배경으로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의 삶과 이들이 계급의식을 자각하고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모습들을 보여줌으로써 현실 변혁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아직도 인천 시가는 뿌연 분위기 속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전등불만이 여기저기서 껌벅이고 있다. 신철이는 어젯밤 동무가 세세히 말해 준 대로 다시 한번 되풀이하며 거리로 나왔다. 인천의 이 새벽만은 노동자의 인천 같다! 각반을 치고 목에 타월을 건 노동자들이 제각기 일터를 찾아가느라 분주하였다. 그리고 타월을 귀밑까지 눌러 쓴 부인들은 벤또를 들고 전등불 아래로 희미하게 꼬리를 물고 나타나고 또 나타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부인들은 정미소에 다니는 부인들이라고 하였다.
『인간문제』, 창작과비평사, 1992, 253면
당시 인천은 조선의 식민지 자본주의화의 관문으로 큰 공장이 들어서 많은 노동자들이 생활하던 지역이었다. 『인간문제』의 대동방적 공장은 당시 인천 만석동에 실재했던 동양방적 공장이다. 강경애에게 인천은 식민지 현실의 모순점, 특히 노동자들의 문제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당대 인천의 사실적 재현으로 『인간문제』라는 최초의 노동운동을 담은,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소설이 탄생했다. 『인간문제』의 배경이 된 인천의 동구 만석동과 화수동 일대에서 『인간문제』 문학 답사가 진행되고 인천의 근대문학관에서 강경애와 『인간문제』를 소개하고 있다.
충청남도 천안을 대표하는 작가로 이기영을 들 수 있다. 이기영은 1895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출생하여 세 살 무렵 충청남도 천안시 안서동 중암마을로 이사하여 성장했다. 1922년 일본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24년 『개벽』 현상문예에 「오빠의 비밀 편지」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하여 주요 작가로 활동했다. 식민지 체제 하에서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농민들의 문제를 고민한 소설 「가난한 사람들」, 「민촌」, 「농부 정도룡」, 「홍수」, 「서화」, 『고향』 등을 창작했다. 특히 장편소설 『고향』(1933)은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과 농촌 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서사 형식에 담아내어 당대 계급문학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1945년 월북, 1984년 사망했다. 충청남도 천안에서는 이기영을 기리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기영 소설의 농촌 문제에 대한 관심은 자전적 체험에서 비롯된다. 『고향』, 『신개지』, 『봄』등 소설의 공간적 배경도 충청남도 천안의 농촌 마을이다. 대표작인 『고향』의 배경도 1920년대 중반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원터 마을이다.
산 밑으로 있는 원터 동리는 벌써 그늘이 지고 이집 저집에서 이는 저녁 연기가 동구 앞 대추나무 가지에 흰 장막을 걸친 것처럼 얽히었다. 해는 만리재 고개에서 최후의 발버둥을 치고 있다. 낙조는 한입 잔뜩 물은 피를 뿜은 것같이 핏방울은 봉화재 연봉 위로 돌아가는 조각 구름에도 풍긴 것처럼 점점 이 혈색을 토한다. 서늘한 저녁 바람이 앞내 여울의 잔물살을 거스르고 불어온다. 방축가로 심은 실버들가지는 바람에 흔들려 너울거리고 춤을 춘다.
『고향』, 문학사상사, 1994, 37면
원터 마을 풍경에 대한 묘사 부분으로 이기영의 예술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원터 마을은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농촌이지만 읍내와 가까운 탓에 급격한 근대화가 진행되어 황폐하게 변하고 있었다.
오 년 동안에 고향은 놀랄 만큼 변하였다. 정거장 뒤로는 읍내로 연하여서 큰 시가를 이루었다. 전등, 전화가 가설되었다. C사철은 원터 앞들을 가로 뚫고 나갔다. 전선이 거미줄처럼 서로 얽히고 그 좌우로는 기와집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읍내 앞 큰내에는 굉장하게 제방을 쌓았다. (중략) 그러나 그동안 변한 것은 그뿐만 아니었다. 상리로 올라가는 넓은 뽕나무밭-개울 옆으로는 난데없는 제사 공장이 높은 담을 두르고 굉장히 선 것이었다. 양회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밤낮으로 쏟아져 나왔다.
『고향』, 문학사상사, 1994, 45면
삭막한 풍경만큼 마을 사람들의 삶도 피폐해졌다. 일제의 자본 독점을 위한 수탈로 마을 사람들은 더한 가난에 허덕여서 끼니를 때우는 것이 힘든 사람들도 많았다. 이기영 자신의 모습이 반영된 소설의 주인공은 농촌의 현실을 바라보며 대안과 이를 실행하기 위한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뇌한다.
차장 밖으로 내다보이는 철도 연선의 살풍경인 촌락은 그로 하여금 감개 무량하게 하는 동시에 또한 그의 마을을 굳게도 하였다. 농촌은 오륙년 전보다도 더욱 황폐해지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는 고향에 돌아온 지가 벌써 일년이 되어간다. 그동안에 자기는 무엇을 했는가?
『고향』, 문학사상사, 1994, 57면
『고향』은 농민들과 공장 노동자들이 각성하여 쟁의를 벌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기영에게 충청남도 천안은 식민지 치하 농촌 현실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를 타개할 수 있는 행동을 실행하여 민족의 긍정적인 미래를 지향할 수 있게 하는 관념과 실천의 장이었다. 충청남도 천안에서는 이기영의 삶과 작품 세계를 기리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매년 추모제와 문학제가 열리고, 이기영의 삶과 소설과 관련된 장소에 표지판을 세우는 사업이 진행되어, 『고향』의 배경이 된 장소를 알리는 표지판들이 세워져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의 작가로 이무영이 있다. 이무영은 1908년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태어났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1925년 일본 세이조 중학교를 다니면서 일본 작가 가토 다케오에게서 문학을 배웠다. 1926년부터 작품을 발표했으며, 1932년 극예술연구회, 1933년 구인회 일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농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동아일보사에서 근무했고,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단국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충청북도 음성군에는 이무영 작가의 생가터와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이무영은 1939년 경기도 시흥군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 등의 대표작을 창작했다.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는 연작소설로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농민의 삶을 현실적으로 재현해내는 것을 통해 농촌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한다. 자전적 성격의 소설로 주인공은 이무영처럼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농촌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다. 농촌 소설을 쓰기 위해서다. 이무영과 달리 주인공은 고향으로 간 것이었는데, 그 고향이, 구체적인 지명이 등장하지는 않으나, 이무영의 고향인 충청북도 음성군이 연상되는 곳이다.
그의 고향은 지리적으로나 산물로나 도시와는 인연이 먼 농촌이었다. 읍에까지에는 문전에서 자동차가 다니기는 하나 오십리나 되었고 서울을 가재도 자동차길밖에 없었다. 노정은 삼백리 정도였으나 차임은 십원 각수나 되어 웬만한 사람은 서울 가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기계문명이 한창 기세를 올리던 현대에 살면서도 백 호나 되는 동민 중에는 기차나 전차를 본 사람은 불과 몇이 못 되었다. 경성 유학생이래야 그와 거기서 한 십리 떨어진 화석리라는 촌에서 한 사람, 전 면을 통해서 삼사인밖에 없었다. 기차를 타자면 조치원까지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조치원까지는 이백삼사십리나 되는 터라 부득이 경성을 갈 사람도 직로인 자동차를 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서울을 가본 사람도 기차를 타보지 못한 채 죽은 사람도 많았다.
「흙의 노예」, 『이무영문학전집1』, 국학자료원, 2000, 62면
서울과 멀리 떨어진 가난한 농촌인 고향에 대한 설명이다. 주인공에게 고향은 아름다운 정경을 가진 곳으로 기억되어 있었으나, 삶의 터전이 되면서 “보잘것없는 자연”을 가진 곳으로 비춰진다.
전에는 무심히 보아 그랬던지 자연도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으나 멀쑥한 포플러와 아카시아 숲이 실개천가에 하나 있을 뿐, 이렇다할 특징도 없는 산천이다.(중략) 숲속의 원두막 정취도 그지없이 시적인 듯이 기억이 되었으나 막상 가보니 그도 평범하기 짝이 없다.
「제1과 제1장」, 『이무영문학전집1』, 국학자료원, 2000, 27면
농촌은 서정적인 자연이 있는 곳이 아닌 농민들의 고단한 삶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무영에게 농촌은 고향이자 삶의 본질이다. “사람은 흙내를 맡아야 산다”, 그렇기에 농촌이 안정되는 것이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이 때문에 이무영은 농민 문학 창작에 매진했다. 충청북도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 2층에는 이무영 작가를 기리기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 공간에는 이무영의 삶과 작품에 대한 소개글과 함께 출판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남 장흥군의 작가로 이청준을 들 수 있다. 이청준은 1939년 전남 장흥군 대덕면 진목리에서 출생했다. 광주서중학교와 광주제일고등학교, 서울대학교에서 수학했다. 대학 시절 4‧19와 5‧16을 겪었고 그 경험이 삶과 문학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졸업 후 사상계에 입사, 같은 해인 1965년 『사상계』 신인상에 「퇴원」으로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병신과 머저리」(1966), 「석화촌」(1968), 「매잡이」(1968), 「소문의 벽」(1971), 『당신들의 천국』(1974), 「이어도」(1974), 「잔인한 도시」(1978), 「비화밀교」(1985), 『자유의 문』(1989) 등 문학적 완성도가 높으면서도 대중적 인기도 얻은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초기에는 장인의 삶과 정신, 이후에는 권력의 문제에 관한 작품을 썼다. 아세아 편집부에서도 기자로 근무하다 한양대와 순천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동인문학상(1967), 이상문학상(1978), 대한민국문학상(1985) 등을 수상했다. 이청준의 작품들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대중들의 호응을 얻었다. 1993년 임권택 감독이 만든 「서편제」는 최다 관객이 관람, ‘서편제 신드롬’을 만들기도 했다. 이청준의 고향에는 생가와 묘소가 있으며 묘소 근방에는 이청준 문학자리가 조성되어 있다. 「천년학」의 촬영 셋트장과 이청준을 비롯한 장흥 출신의 문인을 기리는 천관문학관, 천관산문학공원도 있다.
주막집은 장흥읍을 아직 10여 리쯤 남겨놓고 탐진강 물굽이의 한 자락을 끼고 돌아앉아 있었다. 이웃 고을 강진에서 장흥읍을 들어가는 지방도로 가로수열이 저만치 마주 달려가고, 장흥읍의 표상처럼 얘기되는 억불산 바위 정봉이 10여 리 저쪽 하늘 위로 뽀얗게 솟아올라 보이는 강물굽이-바로 이 탐진강 강물굽이의 버스길 양편에 10여 가호의 작은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고, 주막집은 이 작은 마을에서도 좀더 물가 가까이까지 아랫켠으로 자리를 내려가 앉아 있었다.
「소리의 빛」, 『서편제』, 열림원, 31면
「남도사람」 연작소설 중 두 번째 소설인 「소리의 빛」의 도입부다. 이청준은 소설 속에 고향인 장흥과 그 일대 고장의 모습을 담았다. 이청준의 소설 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서편제」를 첫 번째 소설로 하는 「남도사람」 연작소설 5편은 전남 장흥과 보성 일대에 성행했던 소리의 유파인 서편제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구성지고 애절한 서편제 가락에 어울리는 소리꾼 가족의 한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새와 나무」, 「여름의 추상」, 「살아 있는 늪」, 「잃어버린 절」, 「석화촌」, 「축제」, 「음화와 양화」, 「생명의 추상」, 「개백정」, 「키작은 자유인」, 「새가 운들」, 「선학동 나그네」, 「눈길」, 「해변 아리랑」, 「귀향 연습」, 「흰 옷」 등 이청준의 많은 소설들이 고향의 산하와 서정을 바탕으로 한다. 고향인 장흥은 이청준의 서사가 시작될 수 있게 한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이다. 장흥군 회진면에는 선학동 마을도 있다. 주민들이 이청준을 기리기 위해 마을 이름을 선학동으로 바꿨다고 한다. 매년 장흥군에서는 이청준문학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이청준의 소설을 즐겨 읽었던 사람들이 장흥군 일대의 이청준을 기리는 공간들을 방문하고 있다.
서울에서 활동하며 서울을 그려낸 작가로 이태준을 들 수 있다.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호는 상허(尙虛)다. 일찍 부모를 잃어 친척의 손에 자라면서 학비를 스스로 벌어 휘문고보에 입학했다가 동맹휴교를 주동하여 퇴학당했다. 1925년 『조선문단』에 「오몽녀」가 입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7년 도쿄 조치대학 예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했다. 1933년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39년 종합 문예지 『문장』을 주관했다. 이후 개벽사와 중외일보에서 근무, 이화전문학교, 이화보건전문학교, 경성보건전문학교에 출강했다. 이태준은 당시 문단에 큰 영향을 끼친 중요한 작가였으며, 이태준의 소설은 문체와 구성이 탁월하여 근대 소설 형식의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가마귀」, 「달밤」, 「복덕방」, 「해방전후」 등이 있으며 문장론인 『문장강화』가 잘 알려져 있다.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으로 활약하다 1946년 월북했다. 한국 전쟁 이후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태준은 단편 소설인 「달밤」, 「장마」, 「손거부」 등에 자신이 거주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성북동으로 이사 나와서 한 대엿새 되었을까, (중략) 그는 말 몇 마디 사귀지 않아서 곧 못난이란 것이 드러났다. 이 못난이는 성북동의 산들보다 물들보다, 조그만 지름길들보다, 더 나에게 성북동이 시골이란 느낌을 풍겨주었다.
「달밤」, 『까마귀』, 문학과지성사, 2006, 21면
나는 집을 나선다. 포도원 앞쯤 내려오면 늘 나는 생각, ‘버스가 이 돌다리까지 들어왔으면’을 오늘도 잊어버리지 않고 하면서 개울물을 내려다본다. 여러 날째 씻겨 내려간 개울이라 양치질을 하여도 좋게 물이 맑다.
「장마」, 『까마귀』, 문학과지성사, 2006, 59면
「손거부」는 「달밤」처럼 성북동에 사는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이태준의 소설에서 성북동은 “맑은 개울물”, “산보하기 좋은 데”로 번잡한 서울과는 다르게 자연과 어우러져 한적한 시골의 정취를 가진 동네로 그려지고 있다. 이태준은 성북동에서 가족들과 단란한 일상을 보냈고, 성북동은 이태준의 고단했던 삶에서 어쩌면 가장 평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한 공간이었다. 「장마」에는 성북동 뿐만 아니라 서울 일대가 등장하기도 한다. 「장마」는 자전적 소설로, 당시 작가의 하루 일과를 짐작해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성북동 집에서 나와 종로 일대를 돌아보고 조선중앙일보사, 찻집 낙랑, 대판옥서점 등을 들르면서 구인회 일원들을 만날 생각을 하기도 한다. 글쓰기를 위한 일상 보여주기와 소설을 완성하기 위한 소설 쓰기를 잘 보여주고 있는 이태준의 소설 속에는 이처럼 이태준이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공간인 성북동과 서울이 담겨 있다.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거주했던 가옥인 수연산방이 성북동(서울 성북구 성북로26길 8)에 보존되어 있다. 이태준은 이 집에 대한 이야기를 수필 「무서록」에 담기도 했다. 현재 수연산방은 이태준의 후손이 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이태준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어 기념관으로서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다. 이태준을 몰랐던 사람들도 고택의 운치에 끌려 찾아와 한국 근대 문학의 거장을 만나고 있다. 1992년 이태준을 기리는 상허학회가 결성되었으며, 2004년 10월 철원군 대마리 두루미평화관에 이태준 문학비와 동상이 건립되었다.
이효석은 1907년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 출생하여 평창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에서 공부했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시와 소설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경성농업학교 교사, 숭실전문학교 교수,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초기에는 동반자 작가(1930년대 전후에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동조한 작가들. 정식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회원은 아니었으나 사상적으로 카프의 작가들과 함께 했다는 의미에서 붙인 말.)로서의 면모를 보이나, 이후에는 고향과 자연에 대한 사랑, 이국적인 취향이나 성에 대한 관심이 드러난 작품을 발표한다. 시적인 단편소설을 쓴 작가로 평가된다. 대표작은 「메밀꽃 필 무렵」으로,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작가의 고향인 봉평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여러 작품 속에 나타나 「산협」, 「개살구」 등에도 봉평이 등장한다. 봉평에는 「메밀꽃 필 무렵」과 이효석을 기억하기 위한 이효석 문화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이즈러는졌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즘생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왼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혀 하얬었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메밀꽃 필 무렵」, 「이효석 전집2」
주인공인 장돌뱅이 허생원이 봉평장을 향해 가는 길을 묘사한 이 장면은 그 아름다움으로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로 꼽힌다. 허생원의 옛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달빛과 달빛을 닮은 하얀 메밀꽃, 당나귀 방울 소리와 같은 감각적인 소재들과 어우러지면서 서사의 서정성이 극대화된다. 이 소설은 이효석이 고향 마을의 물레방앗간에 얽힌 소문을 듣고 이를 소설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작가가 기억하는 봉평의 모습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물레방앗간, 충주집, 봉평장터, 대화장터는 어린 이효석의 추억이 담긴 장소다.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이 달빛을 받으며 걸었던 길은 평창에서 하숙을 했던 이효석이 봉평의 집을 다녀가면서 걸었던 그 길이라고 한다.
봉평의 이효석문화마을에는 「메밀꽃 필 무렵」의 실제 배경지인 물레방아간과 이효석 생가, 이효석의 평양집이 복원되어 있으며 이효석 문학관도 건립되어 있다. 매년 평창 효석문화제가 열리고 우수 작가에게 이효석 문학상을 수여한다. 「메밀꽃 필 무렵」의 아름다운 장면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메밀꽃과 달빛 아래 또 다른 사랑 이야기를 쓴다.
홍사용은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태어났다. 대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한학을 수학하고 17세에 상경하여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3개월 뒤에 풀려났다. 이 시기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재종형 홍사중을 설득해 ‘문화사’를 설립하고 문예지 『백조』와 사상지 『흑조』를 기획, 『백조』를 3회 간행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시를 창작, 발표했다. 1923년 근대극 운동의 선구적 극단인 토월회에 가담했고, 1927년에는 ‘산유화회’를 결성, 1930년에는 신흥극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1939년 희곡 『김옥균전』을 쓰다가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1947년 폐환으로 별세했다.
낭만주의 운동의 선구에서 감상적이면서 민족주의적인 주제의식을 가진 장시와 민요시를 창작했다.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 「나는 왕이로소이다」,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봄은 가더이다」 등이 대표작이다. 시작 활동 외에 소설, 평문, 희곡을 쓰기도 했다. 1947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홍사용의 대표작으로, 1923년 9월호 『백조』에 발표되었다. 9연의 산문시 중 마지막 두 연은 다음과 같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한식날 아침에/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그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아아, 그때부터 눈물의 왕은!/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은 소리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 둑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련(坎中連)하고 앉았더이다./아아, 뒷동산에 장군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 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홍사용전집』, 타라북스, 35~36면
“눈물의 왕”인 까닭은 “설움이 있는 땅”의 왕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현실에 대한 한탄으로 해석된다. 민족의식을 담고 있는 비애와 감상적 서정이 특색이다. 이러한 시적 경향은 당시 백조 동인들의 낭만주의적인 색채를 대표한다. 유년시절을 보낸 경기도 화성시 노작로에 홍사용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노작홍사용문학관이 있다. 홍사용은 문학관 뒤 노작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전라남도 목포시의 작가로 박화성이 있다. 박화성은 1903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목포의 정명여학교와 서울 숙명여고를 졸업했고 일본여자대학 문학부를 중퇴했다. 1925년 『조선문단』에 「추석전후」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는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1932년 「하수도공사」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했다. 이후 『백화』(1932), 『북국의 여명』(1933), 「홍수전후」(1934), 「한귀」(1935), 「불가사리」(1935), 「춘소(春宵)」(1936), 「고향 없는 사람들」(1936) 등 식민지 현실과 농민과 노동자의 가난한 삶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한 계급주의 사상을 담은 리얼리즘 경향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일제의 탄압 때문에 1940년 절필하고 낙향했다. 광복 후 다시 집필을 시작했는데, 「검정사포」(1945), 「봄 안개」(1946), 「광풍 속에서」(1948), 『고개를 넘으면』(1955), 『벼랑에 피는 꽃』(1957), 『내일의 태양』(1958), 『창공에 그리다』(1960) 등 애정문제나 일상의 문제들을 다룬 대중성을 띤 작품들을 발표했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소설가협회 상임위원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목포시문화상(1958), 한국문학상(1966), 대한민국예술원상(1970), 3·1문화상(1984) 등을 받았다. 1988년 사망했다.
박화성이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발표했던 「추석전후」는 1920년대 전형적인 리얼리즘 소설로 가난한 과부의 처지를 현실성 있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는 박화성의 고향인 목포의 당시 모습이 상세하게 재현되고 있다.
木浦의 낫은 참 보기에 애쳐러웁다. 南便으로는 늘비한 日人의 긔와집이오 中央으로는 草家에 부자들의 녯 긔와집이 셕겨 잇고 東北으로는 樹林 中에 西洋人의 집과 男女學校와 예배당이 솟아 있는 외에 몃 기와집을 내노코는 ᄯᅡ에 붓흔 초가ᄲᅮᆫ이다. 다시 건너편 유달산 밋흘 보자. 집은 돌 틈에 구멍만 ᄲᅡᆫ-히 ᄯᅮᆯ어진 도야지 막 갓흔 草幕들이 山을 덥허 完然한 빈민굴이다. 그러나 차별이 심한 도회를 안고 잇는 자연의 풍경은 극히 아름다웁다.(중략) 周圍의 風景은 그림 갓고 農村과 漁村 山村과 都會와 港口의 各色 맛을 다하야 가지고 잇는 木浦는 매일 움즉이고 時時刻刻으로 변하것만 그 裏面에 잠겨 있는 貧民의 生活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업슬 만한 悲慘한 살림이 숨어 잇는 것이다.
「추석전야」, 『박화성단편집』, 지식을만드는지식, 15~16면
빈부의 격차가 확연히 드러나는 목포 시가지의 모습과 그 중에서 빈한한 삶을 담당했던 조선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빈곤의 원인인 일본인들의 착취에 대한 문제 의식은 목포의 풍경을 묘사하는 데에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목포에는 목포문학관이 있는데, 박화성관이 있어 박화성의 삶과 작품 세계를 기리고 있다.
나도향은 1902년 서울특별시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나경손이다. 공옥학교,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문학을 공부하려고 가족 몰래 일본으로 갔다가 학비를 지원받지 못해 귀국했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21년 『배재학보』에 「출향」, 『신민공론』에 「추억」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2년 『백조』 동인으로 참여했다.
1926년 다시 일본에 갔다가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초기에는 감상적인 작품을 발표했으나 「행랑자식」, 「자기를 찾기 전」 등을 발표할 무렵부터 애정 문제와 함께 빈곤 문제를 다루며 척박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드러내는 사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인다.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이 대표작이다.
「벙어리 삼룡이」는 애정이라는 주제를 다룸에 있어 계급 갈등 등의 현실 문제를 반영하는 것을 놓치고 있지 않으며 ‘벙어리’와 ‘불’이라는 상징적 소재를 통해 암울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으로 문학적 의의를 높게 평가받고 있는 단편 소설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나도향이 태어난 청파동이다. 청파동은 푸른 언덕이 있는 동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때의 푸른 언덕이 연화산, 연화봉이다. 「벙어리 삼룡이」에는 작품이 발표된 1926년 즈음의 청파동과 변화하기 이전의 청파동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그곳을 청엽정이라 부르지만 그때는 연화봉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남대문에서 바로 내다보며는 오정포가 놓여 있는 산등성이가 있으니 이쪽이 연화봉이요, 그 새에 있는 동네가 역시 연화봉이다. 지금은 그곳에 빈민굴이라고 할 수밖에 없이 지저분한 촌락이 생기고 노동자들밖에 살지 않는 곳이 되어 버렸으나 그때에는 자기네만은 행세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집이라고는 십여 호밖에 있지 않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과목밭을 하고, 또는 채소를 심거나 아니면 콩나물을 길러서 생활을 하여 갔었다.
「벙어리 삼룡이」, 『나도향 전집』, 집문당, 1988, 220면
작품이 발표된 1926년 즈음에는 청파동의 연화봉이 있던 자리를 청엽정이라 불렀던 것이다. 청엽정의 모습은 과거 연화봉이었을 때와는 다르게 “빈민굴이라고 할 수밖에 없이 지저분한 촌락”으로 변화했다. 빈민굴로 전락한 현재의 청파동을 바라보며 나도향은 일제의 수탈로 더욱 삭막해진 현실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벙어리 삼룡이」는 1929년에는 나운규 감독이, 1964년에 신상옥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상영하여 많은 인기를 얻었다. 나도향은 서울에서 태어나고 사망했지만 청파동의 생가터나 남대문 근방의 사망시까지 머물렀던 가옥은 물론이고, 이태원에 있었던 묘지마저도 개발로 인해 현재에는 남아있지 않다. 나도향이 다녔던 배재고등보통학교, 현 배재고등학교에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경상북도 왜관의 시인으로 구상이 있다. 구상은 1953년 본적지이자, 가족사진을 찾을 수 있었던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있는 왜관으로 내려가 1974년까지 기거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낙동강이 보이는 왜관은 구상 시의 원천이었다. 구상과 왜관의 각별한 인연 때문에 경상북도 왜관에는 구상 문학관이 건립되어 있다. 구상의 본명은 구상준이며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얼마 후 아버지가 독일계 신부들이 개설한 교구의 교육 사업을 맡게 되면서 원산으로 이주했다. 성 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를 수료, 1941년 일본대학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 시절, 각 종교의 철학을 학습했고 사회주의에 경도되기도 했다.
1942년 귀국해 1945년까지 원산에서 『북선매일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이 광복 1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시집 『응향』에 「밤」,「여명도」, 「길」 등의 시를 발표했으나, 1947년 이들 시가 반인민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면서 월남했다. 1949년에는 『연합신문』 문화부장, 6‧25 전쟁 중에는 국방부기관지인 『승리일보』를 만들며 종군했다. 1952년부터는 『영남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을 했다. 1953년에 『민주고발』이라는 사회평론집을 냈으나 판매 금지되었고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이후 정계 입문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하고 효성여자대학, 서강대학교, 서울대학교, 중앙대학교, 미국 하와이대학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는 물론 희곡과 시나리오, 수필 등의 집필 활동에 매진했다.
구상의 시는 기독교와 동양 철학을 바탕으로 존재와 현상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시집 『구상시집』(1951), 『초토의 시』(1956), 『말씀의 실상』(1980), 『조화 속에서』(1991), 시론집 『현대시창작입문』(1988), 희곡 시나리오집 『황진이』(1994) 등을 발표했다. 금성화랑 무공훈장(1955), 서울시 문화상(1957), 국민훈장 동백장(1970), 대한민국 문학상 본상(1980), 대한민국 예술원상(1993), 금관문화훈장(2004)을 수상했다. 2004년 별세했다. 구상의 대표작은 1956년 발표한 연작시 「초토의 시」다. 6·25 전쟁을 소재로 한 시로, 종군 작가였던 구상이 목도했던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고발하고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이념을 초월한 민족애와 인간애를 주제화하고 있다.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썩어 문드러진 살떵이와 뼈를 추려/그래도 양지바른 드메를 골라/고히 파묻어 떼마져 입혔거니/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三十 리면/가루막히고//무인공산의 적막만이/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살아서는 너희가 나와/미움으로 맺혔건만/이제는 오히려 너희의/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바램 속에 깃드려 있도다.//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구름은 무심히도/北으로 흘러가고//어디서 울려오는 포성 몇 발/나는 그만 이 恩怨의 무덤 앞에/목 노아 버린다.
「초토의 시‧8-敵軍 墓地 앞에서」, 『구상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7~18면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에는 구상의 시와 삶을 기리는 구상문학관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의 시인으로 박목월이 있다. 박목월은 1915년 경상북도 월성(현 경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박영종이다. 1935년 대구의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부터 계성중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서라벌예대, 연세대학교, 홍익대학교, 한양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박목월은 시 뿐만 아니라 동시와 수필을 창작하기도 했다. 작품 활동은 동시로 시작했다. 1933년 『어린이』지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 『신가정』에 동요 「제비맞이」가 당선되면서부터 동시를 썼다. 1939년 9월 『문장』에 정지용의 추천으로 「길처럼」, 「그것은 연륜이다」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정지용은 박목월의 시를 김소월의 시와 견주며 극찬했다.
1946년 조지훈, 박두진과 3인 시집 『청록집』을 발행했다. 출판사 산아방, 창조사 등을 경영했다. 잡지 『아동』(1946), 『동화』(1947), 『여학생』(1949), 『시문학』(1950∼1951) 등을 편집, 간행했으며, 1973년부터 월간 시 전문지 『심상』을 발행했다.
1960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직을 맡았다. 아세아자유문학상(1955), 대한민국문예상 본상(1968), 서울시 문화상(1969), 국민훈장 모란장(1972)을 수상했다. 박목월은 1978년 별세했다. 박목월의 시는 향토적인 서정성과 민요의 율조를 계승한 운율로 특징지을 수 있다. 대표작은 『청록집』에 실린 「나그네」다.
江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나그네」, 『박목월 시 전집』, 집문당, 1984, 24면
향토적인 자연을 배경으로 한 애상적 분위기를 민요적인 가락에 담아낸 이 서정적인 시는 한국인의 삶과 운명에 대한 슬픔에 기반 한다. 조지훈의 시 「완화삼」에 화답한 시로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놀이여”라는 「완화삼」의 한 행을 부제로 달고 있으며 4연의 내용 역시 이와 관련되어 있다. 박목월은 여러 시에서 고향을 노래한다.
밤골짜기의 물소리.
구름이 밝혀든 초롱을.
아아 동해너머로 둥둥 떠가는 진보라빛 환한 봉우리 하나.-「吐含山」, 『박목월 시 전집』, 집문당, 1984, 78~79
흰달빛 / 紫霞門
달안개 / 물소리
大雄殿 / 큰보살
바람소리 / 솔소리
泛影樓 / 뜬그림자
흐는히 / 젖는데
흰달빛 / 紫霞門
바람소리 / 물소리-「佛國寺」, 『박목월 시 전집』, 집문당, 1984, 36~37면
1968년에 펴낸 시집 『경상도 가랑잎』에서는 경상도 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박목월에게 고향은 삶의 본질이다. 고향을 시에 담으면서 박목월은 삶과 죽음에 대한 달관의 자세를 보여준다. 경주에는 고향이 같은 두 문인, 김동리와 박목월을 위한 동리목월문학관이 있고 동리목월문학제와 동리목월문학상 등을 운영하며 이들의 삶과 문학세계를 기리고 있다. 경북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에는 박목월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고 「나그네」의 배경인 밀밭도 조성되어 있어 박목월과 「나그네」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있다. 박목월은 1978년 사망했으며 묘소가 용인공원에 있다. 박목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2015년 용인공원에 박목월 시의 정원이 조성되어 여러 개의 시비와 박목월 시인의 육필이 재현된 안내비가 세워져 있다.
김영랑은 1903년 전라남도 강진군 탑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윤식이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휘문의숙(현 휘문고등학교)에 입학, 이 시기부터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정지용, 이태준 등과 교류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체포되어 6개월 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0년 일본 아오야마학원(현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에 입학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면서 귀국, 고향에 머물렀다.
1930년 박용철,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동인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들 『시문학』 동인 즉 시문학파는 당시의 프로문학에 반발하여 순수시를 지향하며 1930년대 한국시단을 이끌었다. 1935년 『영랑시집』을 간행했다. 김영랑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광복 후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했다. 1950년 서울에서 포탄 파편에 맞아 사망했다.
김영랑의 시는 서정적이면서 애상적이다. 애상적인 것은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김영랑의 시 세계가 잘 드러난 김영랑의 대표작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1934년 4월 『문학』 3호에 발표되었고, 이듬해 『영랑시집』에 재수록 된 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서름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란이 피기까지는」, 『문학』, 1934, 4)
모란이 피는 봄을 기다리는 시적 자아는 그 봄이 오는 것이 “찬란한” 기쁨이면서 동시에 모란의 떨어짐을 봐야 하는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시들어 떨어지는 모란의 모습은 마치 죽음을 맞이해야하는 인간의 숙명과도 같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절망하지 않고 다시 모란이 피기를 기다린다. 인간의 비극적 운명과 운명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탐미적이고 서정적인 시어 속에 담겨 있다.
김영랑은 고향 강진의 말을 시에 담았다.
오매 단풍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네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호에 수록된 시다. 반복적인 운율과 사투리의 사용으로 향토적 정서를 낭만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다. 누이를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애정 어린 시선이 잘 느껴지는 이 시에 강진의 사투리를 사용해 고향에 대한 사랑도 담았다. 김영랑의 고향인 전라남도 강진에는 김영랑을 비롯한 『시문학』 동인인 시문학파의 삶과 문학세계를 기리는 시문학파기념관이 있다. 전라남도 광주공원에 김영랑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강원도 인제군의 시인으로 박인환이 있다. 박인환은 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났다. 1939년 서울 덕수공립소학교 졸업, 경기공립중학교,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서울 종로에서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 이한직, 김수영, 김경린, 오장환 등과 교류했다. 1946년 시 「거리」를 『국제신보』에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자유신문사, 경향신문사에서 기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1948년 김병욱, 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을, 1949년 김경린, 김수영 등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했다. 당시 한국문단의 주류였던 서정주와 청록파의 자연과 전통 지향적 서정에 반발하여 도시와 현실에 기반한 서정의 모더니즘을 지향했다.
1950년 김차영, 김규동, 이봉래 등과 피난지인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를 결성해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밤의 미매장」, 「목마와 숙녀」 등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다룬 시를 발표했다. 1951년 종군작가단에 참여했고 1955년 직장 업무 수행을 위해 미국에 다녀왔다. 1955년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을 낸 뒤 1956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세월이 가면」(1956)은 노래로 만들어져 대중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1976년 20주기를 맞아 『목마와 숙녀』가 간행되었다. 시 창작 외에도 「아메리카 영화시론」 등의 영화평,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하여 시공관에서 신협이 공연했다.
박인환의 대표작은 「목마와 숙녀」(1950)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세월은 가고 오는 것/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등대에……/불이 보이지 않아도/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목마는 하늘에 있고/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가을 바람 소리는/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목마와 숙녀」, 『박인환전집』, 실천문학사, 2008, 111~112면
이 시는 우울과 고독 등의 도시적인 서정과 시대 상황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고향인 인제에 대해 쓴 시도 있다.
인제/봄이면 진달래가 피었고/설악산 눈이 녹으면/천렵 가던 시절도/이젠 추억.//아무도 모르는 산간벽촌에/나는 자라서/고향을 생각하며 지금 시를 쓰는/사나이/나의 기묘한 꿈이라 할까/부질없고나.//그곳은/전란으로 폐허가 된 도읍/인간의 이름이 남지 않은 토지/하늘엔 구름도 없고/나는 삭풍 속에서 울었다/어느 곳에서 태어났으며/우리 조상들에게 무슨 죄가 있던가,//눈이여/옛날 시몽의 얼굴을 곱게 덮어 준/눈이여/너에게는 정서와 사랑이 있었다 하더라.//나의 가난한 고장/인제/봄이여/빨리 오거라.
「인제」, 『박인환전집』, 실천문학사, 2008, 199~200면
「인제」에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이 나타나 있다. 전쟁으로 파괴된 고향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의 고향 모습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은 「고향에 가서」(1956)에도 등장한다. 고향을 사랑했던 박인환의 삶과 작품세계를 기리는 문학관이 그의 생가가 있었던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에 있다. 박인환 문학관 근방에는 시인 박인환의 거리도 조성되어 박인환의 시가 새겨진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다. 서울 세종로에는 박인환이 살던 집터가 보존되어 있다.
대구광역시의 작가로 현진건이 있다. 현진건은 1900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1915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일본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수학했다. 1917년 귀국하여 대구에서 백기만, 이상화 등과 습작 동인지 『거화』를 발간했다. 같은 해 도쿄 세이조 중학교에 편입, 다음 해 중국 상하이 후장 대학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했다가 1919년 귀국하여 서울에서 살았다. 1920년 문예지 『개벽』에 「희생화」를 개재하면서 소설가로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백조』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1921년 1월 『개벽』에 단편소설 「빈처」를 발표하여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기행문과 번안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동명사, 시대일보사, 동아일보사에서 근무했다. 동아일보 손기정 선수 사진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인해 1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현진건은 작품 속에서 식민지 현실 속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했다. 작품 활동 후반기에는 역사소설을 창작했다. 민족의식이 드러난 작품 활동으로 1940년 『흑치상지』의 동아일보 연재가 중단되었으며 단편집 『조선의 얼굴』은 금서가 되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사업이 파산하여 빈곤을 겪다 1943년에 지병인 폐결핵과 장결핵으로 별세했다.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 장르와 사실주의를 개척한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단편 「빈처」(1921), 「술 권하는 사회」(1921), 「타락자」(1922), 「할머니의 죽음」(1923), 「운수 좋은 날」(1924), 「불」(1925), 「B사감과 러브레타」(1925), 「사립정신병원장」(1926), 「고향」(1926)과 장편 『적도』(1933~1934), 『무영탑』(1938~1939) 등이 있다.
현진건은 「희생화」에서 대구 사투리를 사용하고 「고향」에서 당시 대구의 실정을 생생하게 담으면서 당시 일제의 침략과 수탈로 척박해진 조선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그의 고향은 대구에서 멀지 않은 K군 H란 외딴 동리였다. 한 백 호 남짓한 그곳 주민은 전부가 역둔토를 파먹고 살았는데, 역둔토로 말하면 사삿집 땅을 부치는 것보다 떨어지는 것이 후하였다. 그러므로 넉넉지는 못할망정 평화로운 농촌으로 남부럽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뒤바뀌자 그 땅은 전부 동양척식회사의 소유에 들어가고 말았다. 직접으로 회사에 소작료를 바치게 되었으면 그래도 나으련만 소위 중간 소작인이란 것이 생겨나서 저는 손에 흙 한 번 만져보지도 않고 동척엔 소작인 노릇을 하며, 실지인에게는 지주 행세를 하게 되었다. 동척에 소작료를 물고 나서 또 중간 소작료인에게 긁히고 보니, 실작인의 손에는 소출이 삼 할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후로 ‘죽겠다’ ‘못 살겠다’ 하는 소리는 중이 염불하듯 그들의 입길에서 오르내리게 되었다. 남부여대하고 타처로 유리하는 사람만 늘고 동리는 점점 쇠진해갔다.
(중략)
돈을 모을래야 모을 수 없고 이따금 울화만 치받치기 때문에 한곳에 주접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화도 나고 고국산천이 그립기도 하여서 훌쩍 뛰어나왔다가 오래간만에 고향을 둘러보고 벌이를 구할 겸 구경도 할 겸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라 한다. “고향에 가시니 반가워하는 사람이 있습디까?” 나는 탄식하였다. “반가워하는 사람이 다 뭔기오? 고향이 통 없어졌더마.” “그렇겠지요. 구 년 동안이면 퍽 변했겠지요.” “변하고 무어고 간에 아무것도 없더마. 집도 없고, 사람도 없고, 개 한 마리도 얼씬을 않더마.” “그러면, 아주 폐농이 되었단 말씀이오?” “흥, 그렇구마. 무너지다 만 담만 즐비하게 남았더마. 우리 살던 집도 터야 안 남았겠는기오? 암만 찾아도 못 찾겠더마. 사람 살던 동리가 그렇게 된 것을 혹 구경했는기오?” 하고 그의 짜는 듯한 목은 높아졌다. “썩어 넘어진 서까래, 뚤뚤 구르는 주추는! 꼭 무덤을 파서 해골을 헐어 젖혀놓은 것 같더마.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기오? 백여 호 살던 동리가 십 년이 못 되어 통 없어지는 수도 있는기오? 후!” 하고 그는 한숨을 쉬며, 그때의 광경을 눈앞에 그리는 듯이 멀거니 먼 산을 보다가 내가 따라 준 술을 꿀꺽 들이켜고, “참! 가슴이 터지더마, 가슴이 터져” 하자마자 굵직한 눈물 두어 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그 눈물 가운데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을 똑똑히 본 듯 싶었다.
현진건, 「고향」, 『운수 좋은 날』, 문학과지성사, 2008, 209~212면
대구광역시에는 대구 출신의 문인들을 기리는 대구문학관이 있으며, 이곳에서 현진건의 삶과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다. 현진건이 1937년에서 1943년까지 살았던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는 현진건 집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권정생은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혼마치 소학교, 군마켄 우에하라 소학교에서 수학했다. 광복 후 1946년, 외가가 있는 경상북도 청송으로 귀국했다. 청송 화목초등학교, 안동 일직국민학교를 다녔다. 가난해서 가족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객지를 떠돌면서 돈을 벌어 생계를 연명했다. 이 시기 지병을 얻었고 평생 병고에 시달렸다. 1967년 교회 종지기로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의 교회 문간방에 정착했다.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 똥」으로 『기독교교육』의 제1회 아동문학상을 받으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71년 「아기양의 그림자 딸랑이」로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입선, 1973년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1975년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1984년부터 교회 뒤편에 흙집을 짓고 혼자 살면서 글을 썼다.
권정생의 작품은 많은 어린이의 사랑을 받았다. 2007년 5월 17일 세상을 떠나면서 “인세는 어린이로 인해 생긴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굶주린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쓰고 여력이 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서도 써 달라. 남북한이 서로 미워하거나 싸우지 말고 통일을 이뤄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이러한 유언에 따라 2009년 3월 어린이를 돕기 위한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
권정생의 삶과 작품은 기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소외된 것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권정생은 당시의 동화들이 다루지 않았던, 현실의 문제들을 극복해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어린이들에게 삶의 소중함을 알려주고자 했다. 『강아지 똥』, 『사과나무밭 달님』, 『하느님의 눈물』, 『몽실언니』, 『점득이네』, 『밥데기 죽데기』,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한티재하늘』,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무명저고리와 엄마』,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 『깜둥바가지 아줌마』 등과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수필집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우리들의 하느님』 등을 발표했다.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운산리 일대는 ‘몽실언니마을’로 불린다. 몽실공원과 몽실문화센터도 있다. 이 곳이 『몽실언니』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운산역, 운산장터, 노루실, 살강마을, 까치바위골 등이 『몽실언니』에 등장한다. 『몽실언니』는 불편한 다리를 가지고도 전쟁과 가난으로 힘든 현실을 꿋꿋이 헤쳐나가는 몽실이라는 한 여자 아이의 이야기다.
권정생에게 안동은 자신이 정착할 수 있었던 곳이자 많은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권정생은 삶의 희망을 얻고 사랑을 베풀 수 있었던 공간을 작품 속에 담아 자신이 그 곳에서 깨달았던 삶의 의미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에는 권정생이 거주했던 집이 보존되어 있으며,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구)일직남부초등학교에는 도서관과 시청각실, 강의실, 강당, 유품전시관, 소공연장, 들꽃학습장, 생태체험관 등이 있는 권정생 동화마을이 조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염상섭은 1897년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출생했다. 염상섭(廉想涉)의 본명은 상섭(尙燮)이며 호는 횡보(橫步)이다.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했고 교토부립중학을 졸업했다. 게이오 대학 사학과를 중퇴했다. 1919년 2월 8일 오사카 텐노지 공원에서 혼자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는데, 재오사카조선노동자대표라는 명의를 사용했다. 염상섭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투옥되고 자신을 변론하는 과정에서 일본 판사와 경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귀국 후 『동아일보』 기자가 된 데에는 그 영향이 있었다고 전한다. 1920년 『폐허』 동인에 가담했고 1921년 『개벽』에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담은 사실주의 소설들을 발표했다. 당시 문단의 두 흐름이었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중립적인 노선을 견지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동명』, 『시대일보』, 『매일신보』, 『경향신문』에서 일했다. 1936년 만주로 건너가 『만선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활약했다. 한국전쟁 중 해군 소령으로 복무했다. 한국전쟁 이후 1954년에는 예술원회원에 선임되었고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다. 1955년 서라벌예대 초대학장을 지냈고 1956년 제3회 아세아자유문학상, 1957년 예술원공로상, 1962년 삼일문화상 예술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1963년 3월 14일 아침 성북동 자택에서 직장암으로 타계했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천주교 묘지에 있다. 「만세전」,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금반지」, 「고독」, 「두 파산」, 「일대의 유업」, 「짖지 않는 개」와 장편 『삼대』, 『취우』 등을 발표했다.
염상섭의 작품에는 염상섭의 고향이자 문학 활동의 주 무대였던 서울의 당시 모습이 사실적으로 재현되어 있다. 특히 당대의 표준어가 잘 나타나 있어 언어적 측면에서도 가치가 높다. 염상섭의 대표작인 『삼대』(1931년 『조선일보』 연재)는 식민지 시대 서울을 배경으로 한 중산층 집안에서 벌어지는 세대 갈등을 그리고 있다. 유교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갈등 상황이 현실적으로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덕기의 행보를 따라가다 보면 효자동, 당주동, 서대문, 홍파동, 충독부 도서관 등 당시 서울의 각지를 만날 수 있다. 당시 서울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소설이다. 『취우』(1952년 『조선일보』 연재)에는 한국 전쟁 중 폐허가 된 서울의 모습이 담겨 있다.
개도 짖을 줄을 잊은 공포의 도시, 죽음의 거리에 잔잔한 새벽 바람에 날아오는 그 괴물의 발자취는 폭포 소리와 같고 썰물이 밀려가는 소리와도 같다. 자갈이 깔린 땅을 육중한 찻바퀴가 으깨면서 달리는 듯한 그 잔인한 살육의 아우성에 제각기 닥쳐올 제 운명을 생각해 보기에 잠간은 얼이 빠졌다.
소설 속 주요 공간은 천연동, 재동, 혜화동, 필운동, 회현동이다. 1996년 문학의 해에 염상섭이 한국근대문학의 대표 인물로 선정되어,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묘광장에 횡보 염상섭의 상이 세워졌다. 이후 이 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교보문고 앞에 이전 설치되었다. 서울 삼청공원에는 작가 염상섭의 동상이 있다. 2012년부터 서울에서 염상섭을 기리는 염상섭 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최길두(崔吉斗)는 1917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태어났다. 제주공립보통학교와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 구례군과 제주도의 농회기수(農會技手)를 지냈다. 1940년대 초, 항일청년들의 모임인 비밀독서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았다. 일어로 번역된 세계사상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읽는 독서모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조선의 독립과 나아갈 길을 고민하는 항일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이들은 라디오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수신하여 이승만의 구국연설을 청취하기도 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독서회의 멤버들이 밀항을 시도하다 체포되는데, 최길두는 이 사건의 주동자라는 혐의를 받고 1945년 1월 일제 경찰에 의해 수감되었다.
광복 후 제주상고와 제주중 등 여러 중학교 및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6년 1월 최길두는 이영복(李永福), 이시형(李蓍珩) 등과 함께 잡지 『신생』을 발간했다. 『신생』은 제주도 최초의 종합 교양잡지로, 제주도 문학의 기반을 닦은 중요한 매체다. 최길두는 ‘최일(崔一)’ 도는 ‘KT’라는 필명을 「폐허」, 「애민의 농자」, 「시인향」 등 시를 발표하는 한편, 요절한 제주의 향토시인 김이옥(金二玉)의 미발표 작품을 싣고 추모하는 글도 게재했다.
1947년에 3·1절 기념시위사건에 연루(連累)되어 포고령 위반죄로 5,000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1948년 제주4·3사건이 발발했을 때 제주도의 법조, 행정, 교육, 언론계를 대표하는 여러 인사들과 함께 제주공립농업학교에 감금되었다. 다행히 제주도청 상공과장 이인구의 도움으로 풀려나 죽음을 면하였다. 최길두는 훗날 농업학교 수용소에 자행된 만행에 대해 증언했다. 1957년 교편생활을 접고 작품 활동에 전념하면서, 1964년 1월 23일 시내 청춘다방에서 결성된 제주문인협회의 전신 제주문학자협회 결성에도 참가, 희곡분과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제주여자중고교 예술제 악극을 연출했고, 1965년 연합신문 주최 희곡 공모에서 입선되기도 하였다. 1978년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정소암 화전(鼎沼岩 花煎) 놀이」 연출을 맡았다.
일제강점기부터 시를 썼지만, 말년에 이르러 두 권의 시집 『무명토(無明土)』(1989)와 『이단(異端)의 요화(妖花)』1994)를 발간했다. 또한 1993년에 장편소설 『해산맥』을 쓰기도 했다. 『해산맥』은 이재수의 난과 제주4․3을 연결하는 중요한 작품이라고 평가받는다. 그 외 회고록 『黃昏의 길목에서』, 시나리오 작품집 『雪花』, 『비련(悲戀)의 강(江)』, 『素心草』 등이 있고, 무용가극으로 『봄의 頌歌』, 『봄을 기다리는 順伊의 집』 등이 있다. 2002년 사망하였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 22-1 버스를 타고 난실리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보이는 이정표가 ‘조병화 문학관’이다. 문학관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모습에 ‘여기가 맞아?’하는 것이 첫인상이었다. 그래도 문학관으로 향하는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꿈’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는 비석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꿈의 귀향’이라는 짧은 시가 있다.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천상병 시인이 이 세상에서 살다 간 것을 소풍에 빗대었다면 조병화 시인은 심부름으로 표현한 것일까?’하는 생각을 하며 문학관 건물로 발걸음을 옮기니 연세가 지긋하신, 백발이 멋스러운 분께서 환한 웃음으로 맞이해 주시면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문학관을 안내해 주신다고 먼저 말씀해 주신다.
가장 먼저 설명해 주신 것은 문학관 1층 복도에 있는 편운동산 그림이다. ‘그림? 시가 아니라?’하고 생각하는 순간, 이 그림이 조병화 시인이 직접 그린 그림이며 그가 평생을 이곳에서 지낸 이유와 이 그림이 그가 꿈꾸는 생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문학관과 부친의 묘소, 어머니를 기리는 묘막인 편운재, 자신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지은 청와헌 등 조병화 시인의 모든 것이 이 작은 그림 한 장에 표현되어 있다.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무엇을 짓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그려 놓고 그 이름에 ‘동산’을 붙인 그 의미를 문학관을 관람하고 나면 누구나 알 것이다.
1층 복도를 지나 제1전시실에 들어가면 ‘우와’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조병화 시인이 남긴 53권의 시집과 수필집을 비롯한 160여 권의 책은 물론이거니와 조병화 시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파이프, 베레모, 안경도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갑’으로 가득한 성적표(아, 그 옛날에는 갑을병정무로 성적이 나왔다고 한다.), 젊은 시절 즐겨 했던 럭비 관련 용품, 훈장 및 상패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벽에 걸려 있는 그의 작품은 ‘시’만이 아니라 ‘화’도 같이 있다는 것이고 그림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해설사분께 여쭤보니 조병화 시인은 물리를 전공했고 고등학교에서 수학 교사를 하셨다고 한다. 충격이다. 물리학도에게서 이런 감성이 나오다니. 그리고 나의 눈에 들어온 작품 ‘인생 방정식’. 자신의 인생을 방정식으로 풀어내다니! 참 조병화 시인답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작품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조병화 시인이 생전 직접 찍어 꾸며 놓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것을 즐겼고 어느 나라를 가든 대 문호들의 생가, 박물관, 음악관은 반드시 관람하셨다고 한다. 편운(片雲)이라는 자신의 호처럼 자유롭고 거기에 더해 멋스럽게 한평생을 사셨던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2층 전시실에 오르면 편운이 아닌 수많은 시인들의 얼굴과 이름이 적혀 있다. 무엇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편운 문학상 역대 수상자들의 모습이다. 편운 문학상은 1990년에 제정되었으며 1991년부터 1년에 2명의 수상자에게 각 1,000만원의 상금을 수여한다. 이 상금은 조병화 시인의 사비로 수여하고 있으며 시인의 유언에 따라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후배 양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시인의 모습에 절로 숙연해진다.
문학관을 나와 길을 따라 걸으면 편운재가 나온다. 편운재는 조병화 시인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만든 묘막이다. 현대인들에게는 조금 생소할 수 있는 묘막. 묘막은 무덤 가까이에 짓고 무덤을 지키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평생 어머니가 주신 가르침을 따라 산 조병화 시인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묘막을 짓고 생활했다고 한다.
편운재 옆에는 자신을 위해 지은 청와헌이 있다. 청와헌은 조병화 시인이 집필하고 휴식을 하던 곳으로 처음에 본 ‘꿈’이라는 비석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 비석에 숨겨져 있는 진실 하나. 이 비석에 있는 문구 중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는 살아 계신 어머님께 돌아왔다는 뜻이 아니라 돌아가신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자신도 돌아왔다는 뜻이다. 살아생전에 자신이 죽을 것을 예상하고 자신의 죽음을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돌아왔다고 표현한 것이다. 실제 이 비석은 만든 후 계속 가려 놨다가 조병화 시인의 49재에 제막했다고 하니 시인이 평생 어머니를 얼마나 그리워하며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크지 않은 문학관이지만 작품의 양이 워낙 많아 제대로 감상을 즐기려면 2시간은 소요된다. 아, 그리고 이 문학관에 갈 때 지녀야 할 마음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를 낭송할 수 있는 뻔뻔함.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소리 내어서 한 번 읽어 보시겠어요?”하는 해설사 분의 말씀에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건 잠시고 나도 모르게 심취해서 낭독하고 있을 테니까. 본래 낭송은 시를 이해해야 그 시의 의미를 제대로 살려 읽을 수 있는 법인데 조병화 시인의 시는 일상 언어로 돼 있어 누구나 쉽게 낭송할 수 있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중략)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누가 썼는지는 잘 모르더라도 위의 시를 한 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바로 안성의 대표적인 시인 혜산 박두진의 대표작이다. 시인 박두진은 그의 대표작처럼 일제의 극심한 탄압이 있던 1930년대 말 어둠을 밝히며 해처럼 등단한 시인이다. 등단 후 활발한 창작으로 한국 시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굵직한 흐름을 이어가는 박두진의 시 세계와 인간 박두진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박두진 문학관이 2018년 11월 안성시 안성맞춤랜드 한쪽 끝에 개관했다.
3층으로 지어진 이 문학관은 1층에는 1,500여권의 시집을 구비해 놓은 북카페, 박두진 관련 자료를 보관하는 수장고가 있다. 문학관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북카페에 편안하게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다. 2층에 있는 상설 전시실은 3부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박두진의 시를 읽다.’는 부제 아래 시인 박두진의 시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박두진은 시대의 흐름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등 한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시대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현실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시로 표현했다.
시 창작 활동 초창기에 시인은 생명력으로서의 자연을 노래하였는데 일제 강점기 말에도 감시를 피해 시 쓰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해방 이후 그의 문학은 『청록집』으로 빛을 보게 된다. 『청록집』은 1946년 6월 조지훈, 박목월과 함께 발간한 시집이다. 시집 발간을 계기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은 청록파 시인으로 불린다. 그 후 박두진은 1949년 5월 첫 개인시집 『해』를 발간하며 자신의 문학적 입지를 견고하게 다진다.
한국 전쟁 이후 박두진은 현실에 대한 저항정신과 휴머니즘이 잘 드러나는 작품을 쓰면서 역사의 흐름에 동참한다. 그 후 1970년대에 이르러 수석과 종교를 노래하며 시 세계의 변화를 맞이한다. 60여 년 동안 이어진 그의 시 세계는 ‘자연-역사-종교’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2층 상설 전시관에는 박두진의 시 세계를 자세히 알 수 있는 설명과 함께 그의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2부는 ‘박두진의 일상을 보다.’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는 시인은 새벽 시간에는 명상을 하며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였다고 한다. 독서, 글쓰기가 그의 삶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을 때는 수석 채집을 다녔다고 한다. 수석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극진했다. 3부는 ‘박두진의 예술세계와 만나다.’는 부제로 한평생 박두진이 관심을 갖고 함께한 글씨, 수석, 조각,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글쓰기를 넘어서 여러 예술 분야에서 종합적으로 활동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2층 상설 전시관을 나오면 박두진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박두진 문학상은 시인의 시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안성시의 지원으로 2006년 제정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강은교 시인도 역대 수상자에 있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강은교 시인의 ‘사랑법’를 잠시 떠올리며 3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3층은 초록의 인조 잔디밭이 있는 전망대이다. 이곳에 올라가면 안성맞춤랜드의 전체적인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또한 시인 박두진 초기 시의 근간을 이루는 자연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안성의 멋진 자연환경을 직접 볼 수 있다.
박두진 문학관에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어린이 문학 교실, 청소년을 대상으로는 청소년 인문학 특강, 성인을 대상으로는 우리 시대 작가와의 만남(문학 특강)을 운영한다. 수강료는 모두 무료이니 홈페이지를 참고해 참여해 보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박두진 문학관 관람은 화요일~일요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다. 휴관일도 있으니 관람을 원한다면 확인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
전라북도 전주시의 작가로 최명희가 있다. 최명희는 1947년 음력 10월 10일 전라북도 전주시 화원동(현 풍남동)에서 출생했다. 전주 풍남초등학교, 전주사범학교 병설중학교,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영생대학(현 전주대학교) 야간부 가정과 2년을 수료하고 1970년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편입, 1972년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전국 단위의 각종 백일장에서 입상, 뛰어난 문재를 보였다.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서울보성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했다. 1980년 1월 1일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단편 「쓰러지는 빛」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최명희의 대표작은 대하 장편 소설 『혼불』이다.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2천만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혼불』(제1부)이 당선되었다. 1988년 9월, 월간 『신동아』에 『혼불』 제2부 연재를 시작, 1995년 10월까지 만 7년 2개월간 제5부까지 연재하면서 국내 월간지 사상 최장기 연재기록을 세웠다. 최명희는 약 17년간 『혼불』 집필에 전념했고 육필 원고가 원고지 12,000장에 달했다. 1996년 『혼불』이 전 5부, 10권으로 출간되었고 약 150만부가 팔렸다. 당시 최명희는 “이 작품은 아직 완간이 아니다. 작품의 시대 배경은 해방공간 이후 6‧25, 4‧19, 5‧16 등 가까운 현대사까지 이어져 한국사의 격동기를 그리게 될 것” 이며 “쓰면 쓸수록 이야기가 샘솟듯 흘러나와 20권이 될지 30권이 될지 짐작을 할 수가 없다” 고 밝혔다.
그러나 최명희는 더 이상 집필을 계속하지 못하고 1998년 12월 11일 별세했다. 『혼불』은 식민지 시기인 1930년부터 1943년까지 전라북도 남원의 매안마을을 배경으로 유서 깊은 양반가의 종부 3대와 빈민촌 사람들이 겪어내는 질곡의 세월에 관한 서사다. 당시의 우리말, 세시풍속, 관혼상제 등의 전통 문화를 섬세하고 예술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민속학적, 인류학적 가치도 큰 소설이다. 문학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인기도 크게 얻은 작품이다.
최명희는 『혼불』 외에도 「탈공」(『문학사상』, 1980), 「정옥이」(『한국문학』, 1980), 「이웃집 여자」(서울신문사, 1983), 『제망매가』(『전통문화』, 1985~1986) 등을 발표했다. 1997년 제11회 단재상, 제16회 세종문화상, 전북 예향대상을 받았다. 1998년 제15회 여성동아대상과 호암상, 2000년 옥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1997년 독자들이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을 발족했다. 1999년 12월 교보문고가 각 분야 전문가 100명에게 의뢰한 조사에서 『혼불』이 ‘90년대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2000년 혼불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최명희 묘역에 혼불문학공원을 조성했고, 2001년부터 혼불청년문학상과 혼불학술상을 수여했고 혼불문학제를 개최했다. 『혼불』의 배경 지역인 남원시는 2004년 10월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에 ‘혼불문학관’을 개관했고 전주시는 2006년 4월 최명희가 태어나서 자란 완산구 풍남동에 ‘최명희문학관’을 개관했다. 최명희 생가터에 표지석이 세워졌고 최명희문학관으로 이르는 길이 최명희길로 명명되었다.
1901년 4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나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동경)의 양화연구소에서 공부한 후 귀국해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 강사로 재직하였다. 재직중 1922년 11월 나도향의 연재소설 「환희」 삽화를 그리면서 삽화가의 길을 걸었다. 같은 해 이기세가 주도한 극단 예술좌 공연에 출연하였고, 극단 토월회 창립회원으로 가입하였다. 1923년에는 박영희, 김복진 등이 주도한 경향파 문학작가 모임인 파스큘라에 참가하였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4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수업을 마쳤고, 1927년 극단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8월 미술감독 및 배우로 영화계에 입문하였으며, 12월 신문사 기자였던 이익상(李益相), 김기진(金基鎭) 등과 함께 영화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31년 7월 조선시나리오 작가협회 회원이 되었고 영화 「노래하는 시절」, 「바다여 말하라」, 「춘풍」 등의 대본을 썼으며 카프 영화 「화륜」의 대본을 공동으로 집필하였다. 1937년 8월 영화 「심청」을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하였고, 단편시나리오 「청미(靑眉)」를 기고하였으며, 10월 영화지 『영화보』 창간에 참여하였다.
1938년 8월 제17회 조선미술전람회 심사평을 기고하였고, 1939년 1월 ‘우리 영화의 향상은 어떻게 도모해야 할까’ 좌담회에 참석하였다. 1939년 8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지휘한 조선영화인협회 이사로 위촉되면서 본격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조하였다. 1940년 7월 ‘사변 3주년과 반도문화인의 여명’ 좌담회에 참석하여 일제의 영화통제를 옹호하였고, 12월 지원병 훈련소를 견학하고 「문화인도 입소필요」를 기고하였으며 같은 달인 12월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41년 3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지휘하는 조선영화인협회 상임이사에 임명되었으며, 징병을 권하는 영화를 연출하여 지원병제도와 황도정신을 옹호함으로써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조하였다.
1942년 9월 일제가 만든 영화회사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연출과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다수의 평론을 기고하여 전시체제 하에서 일제가 실시한 영화령을 비롯한 영화정책을 옹호하고 선전하였으며, 영화인의 전쟁협력과 전쟁참여를 역설하였고, 징병제 선전선동, 내선일체 강조, 황국신민의 의무를 피력하였다.
해방 후 조선영화건설본부 내무부 부장을 맡다가 조선영화건설본부가 조선영화동맹으로 결합한 뒤 중앙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 영화인들이 결집하였던 영화감독 구락부 결성을 주도하였다. 이 시기 중앙일보사 고문, 민주일보사 편집위원과 문화부장으로 재직하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사단법인 대한영화사 전무이사, 대한영화협회 이사장, 서울시 예술원 문화위원을 역임하였다. 1947년 서울중앙방송국 3·1절 기념 어린이 노래극 「우리의 소원은 독립」에서 주제가인 「우리의 소원」을 작사하였다. 1950년 2월 24일 사망하였다.
강원도 화천군의 시조 시인으로 이태극이 있다. 호는 월하(月河)다. 이태극은 1913년 7월 16일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방천리에서 출생했다. 1928년 양구보통학교, 1933년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934년 4월까지 강원도청 농무과에서 근무했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통신교육으로 와세다 대학 전문부에서 수학했다. 1934년 5월부터 1945년 10월까지 강원도 춘천, 홍천, 인제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47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편입, 1950년에 졸업했다. 동덕여자초급대학 강사, 서울대학교 강사를 거쳐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했다.
1953년 『시조연구』에 시조 「갈매기」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 시조전문지 『시조문학』 창간, 1965년 한국시조작가협회를 창립했으며 1966년 한국문인협회 산하에 시조 분과를 창설했다. 동곡문화상(1978), 외솔상(1983), 중앙시조대상(1985), 육당시조상(1986), 대한민국문화예술대상(1990), 대한민국 문화훈장(1994)을 수상했다. 2003년 4월 24일 사망했다.
이태극의 시조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추구하거나 자기 정체성에 대한 탐색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운율 안에 현대적인 감각을 담은 이태극의 시조는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이태극은 창작활동 뿐만 아니라 이론연구를 통해 시조가 서구의 시와 다르지 않음을 밝히면서 시조 형식의 유연함을 강조하고 시조의 음악성, 곧 창(昌)을 회복하여 대중성을 획득할 것을 제안하며 시조 문학의 발전과 부흥을 시도했다. 또한 시조전문지를 창간하거나 한국시조작가협회, 한국문인협회 시조 분과를 창립하는 등 시조 문학의 입지를 다지고자 다양한 방면으로 노력했다. 이태극은 『현대시조선집』(이병기 공편, 1958), 『시조개론』(1959), 『시조연구논총』(1965), 『고전문학연구논고』(1973) 등의 연구서와 『꽃과 여인』(1970), 『노고지리』(1976), 『소리‧소리‧소리』(1982), 『날빛은 저기에』(1990) 등의 시조집을 발간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서해상의 낙조」, 「삼월은」, 「산딸기」, 「갈매기」, 「교차로」, 「인간가도」 등이 있다.
진달래 망울 부퍼/발돋움 서성이고
쌓이던 눈은 슬어/토끼도 잠든 山속
三月은 어머님 품으로/다사로움 더 겨워―.
멀리 흰 山 이마/문득 다금 언젤런고.
구렁에 물소리가/몸에 감겨 스며드는
三月은 젖먹이로세/재롱만이 더 늘어―.-「三月은」, 『이태극 시조전집』, 태학사, 2010, 48면
골짝 바위 서리에/빨가장이 여문 딸기
가마귀 먹게 두고/山이 좋아 사는 것을
아이들 종종쳐 뛰며/숲을 헤쳐 덤비네
三冬을 견뎌 넘고/三春을 숨어 살아
되약볕 이 山 허리/외롬 품고 자란 딸기
알알이 부푼 情熱이사/마냥 누려 지이다.-「山딸기」, 『이태극 시조전집』, 태학사, 2010, 58면
이태극의 시조 중 가장 잘 알려진 「三月은」과 「山딸기」다. 이 시조들은 자연과 생명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있다. 감각적인 시어를 통한 사실적이면서도 미적인 묘사가 인상적이다. 강원도 화천군청은 이태극의 삶과 문학 세계를 기리기 위해 2010년 이태극 문학관을 개관했다. 이태극의 고향인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방천리가 화천댐 건설로 수몰되어서 이태극 문학관은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에 세워졌다. 이태극의 유품과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서울특별시의 문인으로 피천득이 있다. 1910년 5월 29일 서울특별시 종로에서 출생했다. 피천득은 시인이자 수필가이며 영문학자다. 호는 금아(琴兒)다. 피천득의 문재를 알아보았던 춘원 이광수가 붙여준 호다. 피천득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피천득의 어머니가 서화와 음악에 능했다. 이광수가 이를 듣고 피천득에게 ‘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뜻의 금아라는 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광수는 피천득의 중국 유학을 권유하기도 했다. 피천득의 아버지는 종로 일대의 땅을 소유한 거부였다. 피천득은 서울 제일고보 부속초등학교, 제일고보에서 수학했고 1927년 중국 상해로 유학을 가서 Thomas Hanbury Public Shcool을 거쳐 1937년 호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중국 유학 시 주요섭과 친밀하게 교류했으며, 피천득이 존경했던 도산 안창호를 만나기도 했다. 피천득은 안창호와의 만남에 대해 수필에 쓰기도 했다. 귀국하여 스탠다드 오일사의 직원, 경성중앙산업학원의 교사로 근무했다. 1945년부터 1946년까지 경성제국대학 예과교수, 1974년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54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하버드대학교에서 1년간 영문학을 연구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1991), 인촌상(1995), 자랑스런 서울대인상(1999)을 수상했다. 2007년 5월 25일 별세했다.
1930년 『신동아』 에 시 「서정소곡(抒情小曲)」, 「서곡」, 「파이프」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사상과 관념을 떠나 순수하고 본래적인 정서를 담은 시들을 발표했다. 피천득의 문학세계는 시보다는 수필을 통해 더 잘 알려져 있다. 피천득은 수필 「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1932), 「나의 파일」(1934) 등으로 호평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수필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피천득의 수필은 일상의 서정을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적인 문체로 표현하여 서정적인 수필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피천득은 자신이 추구하는 문학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시와 수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순수한 동심과 맑고 고매한 서정성, 그리고 위대한 정신세계입니다. 특히 서정성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시와 수필의 본령은 그런 서정성을 창조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수필도 시처럼 쓰고 싶었습니다. 맑은 서정성과 고매한 정신세계를 내 글 속에 담고 싶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시』, 샘터, 2008, 10~11면
「나의 사랑하는 생활」, 「인연」, 「수필」, 「은전 한 닢」, 「플루트 플레이어」 등의 수필은 교과서에 실리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대표작은 「인연」이다. 아사코라는 여성과의 세 번의 만남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수필로 아사코에 대한 연정과 그리움, 안타까움이 절제된 어조 뒤에 숨어 있다. 『서정시집』(1947), 『금아시문선』(1960), 『산호와 진주』(1969), 『수필』(1976), 『금아문선』(1980), 『금아시선』(1980), 『생명』(1993), 『삶의 노래』(1993), 『인연』(1996) 등을 출간했다.
2008년 서울특별시 송파구의 롯데월드 내에 피천득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피천득이 거주했던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의 아파트 거실과 서재 모습을 재현하고 저서와 유품도 전시하고 있다.
서울특별시의 소설가로 한무숙이 있다. 한무숙은 1918년 10월 25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에서 출생했다. 호는 향정(香庭)이다. 1931년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했고, 1936년 부산고등여학교를 졸업했다. 1937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김말봉의 장편소설 『밀림』의 삽화를 그렸다. 1942년 『신시대』의 장편소설 공모에 『등불 드는 여인』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조선연극문화협회 희곡 모집에 1943년 단막극 『마음』, 1944년 사막극(四幕劇) 『서리꽃』이 당선되었다. 1948년 『국제신보』 장편소설 모집에 『역사는 흐른다』가 당선, 1949년부터 폐간된 『국제신보』 대신에 『태양신문』에 『역사는 흐른다』가 연재되었다. 1950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1956년 첫 창작집 『월운』 이후, 『감정이 있는 심연』(1957), 『축제와 운명의 장소』(1963), 『우리 사이 모든 것이』(1987) 등을 출간했다.
장편소설로는 『벗의 계단』(1959~1960), 『만남』(1984~1985) 등이 있다. 1992년 『한무숙문학전집』이 출간되었다.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한국중앙박물관회 이사,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 등을 지냈다. 자유문학상(1957), 신사임당상(1973), 대한민국문화훈장(1986), 대한민국문학상(1986), 3‧1문화상(1989), 대한민국예술원상(1991)을 수상했다. 미술 작업도 놓지 않아서 서화전을 여러 번 개최했다. 1993년 별세했다.
한무숙의 문학은 현실 속 인간의 고통과 갈등을 인간애를 담은 시선을 통해 재현하고 있다. 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인습과 한, 사랑과 윤리의 문제를 다룰 뿐만 아니라 4‧19혁명 등 한국현대사에 대해서도 통찰력을 보인다. 대표작은 『역사는 흐른다』로, 조선 말부터 식민지 시기를 거쳐 해방까지의 격동하는 시대 속의 한국 사회를 풍양 조씨 가문 삼대의 흥망과 하층계급 인물들의 성장을 통해 보여준다. 등장인물의 내적 갈등과 각 계층의 풍속사를 정밀하게 형상화해 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중들의 큰 인기를 얻어 드라마로도 각색되어 1989년 9월 3일부터 1990년 9월 9일까지 KBS 1TV에서 방영되었다.
한무숙이 별세한 1993년, 남편 김진흥이 한무숙의 삶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한무숙재단을 설립했다. 김진흥은 한무숙이 40년가량 거주했던 한옥을 문학관으로 개조하여 공개했다. 한무숙이 가꾼 건물과 정원을 한무숙 생존 시와 같이 보존하고 사진, 의상, 장신구, 생활용품, 가구, 그림, 출판물과 육필원고, 필기구 등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한무숙재단은 1995년부터 한무숙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1995년 조지워싱턴 대학(GW)내의 한국학에 관한 한무숙(HMS) 콜로퀴움을 설립했다. 매년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개최되고 있는 HMS 콜로퀴움에서는 국내외 석학들이 모여 한국의 예술, 역사, 언어, 문학, 사상 등을 세계의 문맥에서 토론하고 있다. 조지워싱턴 대학의 시거(Sigur) 아시아학 센터는 1998년부터 HMS 콜로퀴움을 지원하고 있으며 콜로퀴움의 권위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
충청남도 홍성군의 문인으로 한용운이 있다. 한용운은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이며 시인이다. 호는 만해(萬海), 만해(卍海)다. 1879년 8월 29일(음력 7월 12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출생했다.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896년부터 속리사, 월정사, 백담사 등에서 불경을 공부했다. 서양 서적들을 통해 서양의 근대사상도 접했다. 1903년 세계일주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를 거쳐 귀국, 석암사를 거쳐 백담사에 입산, 1905년 수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08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 교토 등지의 사찰을 순례하고 임제종대학에서 6개월간 불교와 동양철학을 연구했다. 친일승려 이회광 일파가 원종종무원을 설립하고 1910년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체결하자, 이에 분개하여 1911년 승려대회를 개최, 친일불교의 획책을 폭로하고 저지했다. 조선불교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조선불교유신론』(1913)을 발표했다. 1918년 『유심』을 창간, 주재했고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독립선언 준비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3년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조선독립이유서」를 집필했다. 1922년 출옥 이후에는 각지를 돌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강연을 했고 1924년 불교청년회의 총재에 취임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간행하여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흑풍』(1935), 『후회』(1936), 『박명』(1938) 등 장편소설과 한시, 시조를 발표했다.
1927년 신간회의 발기인이 되었고 경성지부장을 역임, ‘조선불교동맹’과 ‘만당’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1931년 『불교』를 인수 ‧ 간행하여 불교청년운동 및 불교의 대중화 운동을 벌였다. 1933년 서울시 성북구에 심우장을 짓고 거주했다. 총독부를 바라보지 않기 위해 북향으로 지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944년 5월 9일 중풍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중장(1962)이 추서되었다.
한용운의 대표시는 「님의 침묵」(1926)이다.
님은갓슴니다 아아 사랑하는나의님은 갓슴니다
푸른산빗을ᄭᅢ치고 단풍나무숩을향하야난 적은길을 거러서 참어 ̇떨치고 갓슴니다
黃金의ᄭᅩᆺ가티 굿고빗나든 옛盟誓는 차듸찬ᄷᅴᄭᅳᆯ이되야서 한숨의微風에 나러갔슴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追憶은 나의運命의指針을 돌너노코 뒤ㅅ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
나는 향긔로은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ᄭᅩᆺ다은 님의얼골에 눈머렀슴니다
사랑도 사람의일이라 맛날ᄯᅢ에 미리 ᄯᅥ날것을 염녀하고경계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 리별은 ᄯᅳᆺ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슯음에터짐니다
그러나 리별을 쓸데업는 눈물의源泉을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ᄭᅢ치는것인줄 아는ᄭᅡ닭에 것잡을수업는 슯음의힘을 옴겨서 새希望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
우리는 맛날ᄭᅢ에 ᄯᅥ날것을염녀하는것과가티 ᄯᅥ날ᄯᅢ에 다시맛날것을 밋슴니다
아아 님은갓지마는 나는 님을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
제곡조를못이기는 사랑의노래는 님의沈默을 휩싸고돔니다
-「님의 침묵」, 『님의 침묵』, 안동서관, 1926, 1~2면
항일 의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시다. ‘님’은 잃어버린 조국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한용운이 밝힌 것처럼 이 시의 ‘님’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상실하여 혹은 결핍되어 되찾거나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님’이다. 조국, 민족 뿐만 아니라 진리, 정의, 연인 등이 ‘님’이 될 수 있다. 자유롭고 새로운 시의 형식, 독창적인 은유와 역설의 사용 등으로 한국 시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시로 평가된다.
1967년 파고다공원에 비가 건립되었고 1973년 『한용운 전집』(전6권)이 간행되었다. 경기도 광주시에 만해기념관이 개관했고, 한용운이 머물렀던 설악산 백담사 아래 마을인 강원도 인제군 북면에 만해마을이 조성되었다.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 318번길 83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생가 근처에 위패와 영정을 모신 만해사가 있다. 만해문학체험관도 건립되어 한용운의 삶과 문학세계를 기리고 있다.
충청북도 괴산군의 소설가로 홍명희가 있다. 벽초(碧初)라는 호가 잘 알려져 있다. 1888년 5월 23일 충청북도 괴산군 인산리에서 출생했다. 한학을 수학한 후 서울 중교의숙, 도쿄 타이세이중학을 졸업했다. 1910년 귀국 후 『소년』에 A 니에모예프스키의 산문시 「사랑」을 번역하여 소개하는 등 한국 근대 문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 삼재’라 불렸다. 1910년 8월 금산군수였던 아버지 홍범식이 경술국치에 항의하며 순국했다. 아버지의 죽음은 홍명희가 독립 운동에 투신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12년 상해 독립운동단체 동제사에 참여, 싱가포르 등지에서 활동하다 1918년 귀국했다. 3‧1운동 당시 괴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192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1925년 『시대일보』 사장, 1926년 오산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고, 신사상연구회, 화요회, 정우회, 조선사정조사연구회 등에서 활동했다.
1926년 『문예운동』에 프로문학의 역사적 필연성을 역설한 평론 「신흥문예의 운동」을 발표했다. 카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프로문학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1928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일보』와 『조광』에 대하장편역사소설 『임꺽정』을 연재하여 문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1927년 창립된 신간회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여러 번 옥고를 겪으면서도 독립 운동을 지속했던 홍명희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1942년경부터 해방 때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일체의 사회활동을 중단하고 은둔했다. 광복 후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47년 민족독립당 당수, 민족자주연맹 부의장으로서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중, 1948년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 참가차 평양에 갔다가 북한에 남았다. 1968년 3월 5일 사망했다.
홍명희의 대표작인 『임꺽정』에는 봉건제도에 대한 비판 의식이 담겨있다. 백정 출신 임꺽정의 활약상을 보여주면서 조선 시대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 대하장편소설은 서사의 길이도 특별히 장대했을 뿐만 아니라 민중성과 리얼리즘을 탁월하게 드러내고 있는 소설로 식민지 시기 대표적인 역사소설이자 한국문학사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역사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임꺽정』 연재는 홍명희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민중대회를 추진하다가 검거되면서 중단되었다가 1932년 출소한 후 다시 연재되기도 했다. 『임꺽정』은 13년 동안 연재되었다가 미완인 채로 집필이 중단되었고, 해방 후 10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임꺽정』은 조선 시대 여러 계층의 말이 풍부하게 채록되어 있어서 우리말 어휘의 보고라고도 불린다. 뿐만 아니라 “순 조선 것”을 쓰고자 했다는 홍명희의 의도대로 조선의 문장, 인물, 풍속 등 “순 조선 것”이 집대성되어 있다. 『임꺽정』은 일제에 저항하여 조선을 지키려 했던 홍명희의 문학적 대응이었다. 『임꺽정』은 해방 후 1948년 재출간되면서 다시 한 번 큰 인기를 얻었고, 1985년 재출간되면서 월북 이후 금기시 되었던 홍명희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하게 만들었다.
충청북도 괴산군은 홍명희의 민족의식과 문학적 감성을 키워준 곳이다.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에 있는 홍명희가 즐겨 찾던 제월대에 홍명희 문학비가 세워졌다. 제월리에는 홍명희가 거주했던 집의 일부가 남아 있다.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인산리의 생가도 복원되어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홍범식 가옥이자 홍명희 생가인 이 고택은 3‧1만세 운동의 본거지로서의 가치도 가지고 있다.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됐다. 충청북도 청주시와 괴산군에서는 1996년부터 홍명희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경상남도 창원시의 작가로 지하련이 있다. 본명은 이현욱이다. 지하련은 1912년 경상남도 거창에서 출생했고, 경상남도 마산(현 창원시)에서 성장했다. 1930년 동경소화고녀를 졸업, 1931년 동경경제전문학교를 수료했다. 1936년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임화와 결혼했다. 1940년 12월 단편소설 「결별」이 평론가 백철에 의해 『문장』에 추천, 게재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체향초」(『문장』, 1941.3), 「가을」(『조광』, 1941.11), 「산길」(『춘추』, 1942.3), 「도정」(『문학』, 1946.8), 「광나루」(『조선춘추』, 1947.12) 등을 발표했으며 1948년 작품집 『도정』을 출판했다. 현실에 맞선 등장인물의 내적 갈등을 섬세한 문체로 서사화했다. 결혼 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등 여성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고 1947년 월북했다. 1953년 임화가 처형된 이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하련은 창원에서 성장했고 1936년 결혼 후에도 창원에 거주했다. 지하련에게 창원은 삶과 사상과 문학의 장소였다. 지하련은 가족과 함께 상경했다가 1940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의 셋째 오빠 집으로 혼자 내려와 지병 치료와 요양을 했는데 이곳에서 등단작인 「결별」과 「체향초」 등을 집필했다. 지하련이 머물렀던 셋째 오빠의 집은 지하련 문학의 산실이었던 까닭에 ‘지하련 주택’이라 불린다. 지하련의 소설 「체향초」에는 산호리(산호동)에 대한 서술이 있다.
사흘 째 되든 날 아츰, 끝내 산호리(山湖里)로 옴기게 했든 것이다. (중략)
산호리는 조용해서 거처하기 가장 적당하다는, 이러한 것을 말슴 드린 후 (중략)
지금은 이렇게 시가지와 떠러진 산 밑에서 나무와 김생들을 기르고 날을 보내는 셈이다. (중략)
이제는 그의 다정한 고향 바다와, 산과 들을 생각할 때마다, 먼저 나무와 꽃이 욱어지고, 양과 도야지와 닭들이 살고 있는 양지바른 산호리, 그 축사(畜舍)와 같은 적은 집에 살고 있는 얼골 흰 오라버니를 잊을 수 없게 되었다.(중략)
또 삼히를 위해서 광선(光線)의 드라듦이 가장 알맞고 바다가 잘 보히고 하는 이러한 좋은 조건을 가진 방을 그에게 주었었다.
-「체향초」, 『지하련 전집』, 푸른사상, 2004, 112~113면
제목인 체향초(滯鄕抄)는 고향에 머물면서 겪은 일을 간단히 적은 글이라는 뜻이다. 주인공 삼히는 신병 치료 차 고향에 내려와서 전향한 사상가인 오빠가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일상을 보내는 것을 바라본다. 지하련의 처지가 그대로 반영된 소설이다. 소설 속 삼히의 오빠처럼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엄혹한 현실에 굴복해서 신념을 포기했다. 지하련의 오빠들과 남편인 임화도 그러했다. 「체향초」는 오빠들과 남편을 비롯한 당시 지식인들에게 보내는 지하련의 비판 어린 목소리다. 「체향초」는 지하련의 사상과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정이 담겨 있는 소설이다.
마산문학관에는 지하련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2015년 지하련 주택에 화재가 나면서 잊혀졌던 작가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빈 집으로 버려진 채 허물어져 가는 지하련 주택을 문학관으로 재생시키자는 목소리도 생겨났다. 지하련 주택은 일제 시대 목조 건축물이면서 식민지 시대 문학의 산실이었던 까닭에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경상남도 창원시의 시인으로 천상병이 있다. 천상병은 1930년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출생, 1945년 귀국하여 창원시에서 성장했다. 마산중학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수학했다. 1949년 마산중학교 5학년 때 『문예』에 시 「강물」, 1952년 『문예』에 시 「갈매기」, 1953년 『문예』에 평론 「사실의 한계: 허윤석론」, 1955년 『현대문학』에 「한국의 현역대가」 등을 발표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 이후 고문의 후유증에 평생 시달렸다.
제1시집 『새』(1971), 제2시집 『주막에서』(1979), 제3시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1984), 제4시집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1987), 제5시집 『요놈 요놈 요이쁜 놈』(1991), 3인 시집 『도적놈 셋이서』(1989), 산문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1990),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 등을 출간했다. 1985년부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에서 부인과 함께 까페 ‘귀천’을 운영하면서 문인들과 교류했다. 가난하고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았지만, 익살스러운 기행과 유머 그리고 긍정적인 세계관을 담은 시로 문인들과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3년 별세했다. 2003년 은관 문화 훈장이 추서되었다.
천상병의 시는 동심에 가까운 순진성이 특징이다. 자연과 인간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이 일상적인 언어에 담겨 있다. 대표작은 「귀천」(1970)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 『요놈! 요놈! 요 이쁜놈!』, 도서출판답게, 1991, 95면
인간의 유한한 삶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읊은 시다. 늘 병고에 시달리던 천상병이 죽음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천상병은 「고향이야기」에서 창원을 첫 번째 고향이라고 칭한다.
내 고향은 세군데나 된다.
어릴때 아홉 살까지 산/경남 창원군 진동면이 본 고향이고
둘째는 대학 2학년때까지 보낸/부산시이고
세째는 도일(渡日)하여 살은/치바켄 타태야마시이다.
그러니 고향이 세군데나 된다.
본 고향인 진동면은/산수(山水)가 아름답고/당산(堂山)이 있는 수려한 곳이다.
바다에 접해 있어서/나는 일찍부터/해수욕을 했고
영 어릴때는/당산(堂山)밑 개울가에서/몸을 씻었었다. (하략)
-「고향이야기」, 『요놈! 요놈! 요 이쁜놈!』, 도서출판답게, 1991, 62~63면
천상병에게 창원은 아름다운 고장이며 어린 시절의 즐거운 추억이 담긴 곳이다. 고향에 대한 기억은 천상병이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지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천상병을 기리는 사업들이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벌어지고 있다. 천상병의 생애를 담은 연극 『소풍』과 뮤지컬 『귀천』이 제작, 공연되었다. 천상병 시인이 거주했던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 입구에 ‘시인 천상병 공원’이 건립되었고, 철거된 집은 충청남도 태안군에 있는 대야도에 복원되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천상병 귀천공원’도 있다. 천상병이 강화도에서 「귀천」을 썼기 때문이다.
2004년부터는 천상병 시인의 부인이 거주했던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천상병 예술제’가 개최되고 ‘천상병 시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의정부 시내 둘레길 이름을 천상병의 시 「귀천」에서 따와 '소풍길'이라고 명명했다. 서울시 은평구에 천상병, 중광스님, 이외수를 기리는 ‘셋이서 문학관’이 있다. 경상남도 산청군에서는 매년 천상병 문학제가 열리며 천상병귀천문학상을 시상한다. 경상남도 산청군 중산 관광단지에 「귀천」 시비가 세워졌다. 경상남도 창원시 만날 공원에 「새」 시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