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인의 입맛까지 정복한 강원도의 맛, 속초 명란젓

    한국인이 식용하는 물고기 중에 별칭(別稱)이 가장 많은 물고기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한때 ‘국민생선’이라 불릴 정도로 흔했던 물고기였지만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2000년대 이후 주산지인 동해에서 자취를 감춘 ‘명태(明太)’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명태의 별칭으로는 선어(鮮魚) 상태인 ‘생태(生太)’, 명태를 말린 ‘북어(北魚)’, 명태를 얼린 ‘동태(凍太)’, 명태를 반건조한 ‘코다리’, 명태 치어인 ‘노가리’, 설악산의 덕장에서 40일 이상 자연 동결과 해동을 반복하면서 건조되어 노란색을 띠는 황태(黃太) 등이 있다. 북어 살이 보슬보슬해 ‘더덕북어’로도 불리는 황태는 기온, 가공형태, 건조과정 등의 조건에 따라 ‘낙태ㆍ무두태ㆍ백태ㆍ찐태ㆍ통태ㆍ파태’ 등으로 구분된다. 최근 일과 후에 맥주 한 잔 가볍게 할 때 가장 인기 있는 안주로 급부상한 ‘먹태’가 바로 황태를 말릴 때 날씨가 따뜻해져서 색깔이 검게 된 ‘찐태“의 별칭이다.

     

    다양한 명칭을 지닌 명태는 조선시대에는 의외로 16세기 이전만 해도 이름도 없고 잘 알려지지 않은 요즘말로 ‘존재감이 없는’ 물고기였다. 명태를 확인할 수 있는 오래된 문헌으로는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함경도 경성도호부(鏡城都護府)와 명천현(明川縣)의 토산물로 ‘무태어(無泰魚)’를 기록하고 있다. 1777년(정조 1)부터 2년간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재직하면서 함경도 지방의 풍토를 기록한 홍양호(洪良浩)의 『북새기략(北塞記略)』 중 ‘공주풍토기(孔州風土記)’에는 두만강 하구의 어선들이 함경남도까지 왕래하면서 출어하여 청어와 대구어는 그물로 잡고 “무태어는 낚시로 잡는다(無泰魚以釣)”는 기록이 확인된다. ‘무태어’는 명태의 다른 이름으로 1884년(고종 21) 황도연(黃度淵)이 편찬한 『방약합편(方藥合編)』에 “북어(北魚)는 명천(明川)에서 산출되는데 곧 무태어(無泰魚)이다”라고 고증한 데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명태 말린 것을 ‘북어’라고 하지만 원래는 ‘북쪽 지방에서 나는 물고기’라는 뜻에서 명태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이었다. 북쪽 지방은 바로 함경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럼 명태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사용하였을까? 현재까지 알려진 기록에 의하면 적어도 17세기 무렵부터는 명태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 1652년(효종 3) 9월 10일 기사에는 궁중에 바치는 음식물의 목록에 규정된 대구알젓 대신 명란젓을 바친 강원도의 담당관원을 엄하게 문책하라는 내용에 ‘명태란(明太卵)’으로 처음 등장한다. 17세기 말 숙종 때의 문신이었던 최창대(崔昌大)가 1691년(숙종 17) 막내 외삼촌 이인엽(李寅燁)과 함께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면서 쓴 ‘수성가(水城歌)’라는 시에도 “어부들이 날마다 명태를 잡아서 쌓인 것이 언덕과 산 같아서 셀 수 없을 정도이다(漁夫日捉明太魚 積如丘山不可數)”는 내용에서도 ‘명태어(明太魚)’가 등장한다. ‘수성(水城)’은 강원도 간성현(杆城縣, 지금의 강원도 고성군)의 옛 별호(別號)이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반에는 명태의 상세한 정보를 언급한 문건이 증가하고 있다. 그중 19세기 이규경(李圭景)이 편찬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북어변증설(北魚辨證說)’에서는 명태의 명칭으로 고지미(膏脂美)ㆍ북어ㆍ명태ㆍ동태(凍太, 여기서는 겨울에 잡은 명태를 말함)ㆍ춘태(春太)ㆍ동명태(凍明太, 지금의 동태) 등을 언급하였다. 명칭이 다양해진 것은 조선전기와는 달리 조선후기에는 명태가 다양하게 이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당시 명태의 용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매일 반찬으로 쓰인다. 마을의 가난한 백성들은 신령에게 제사를 모실 때 명태 말린 것을 제수로 삼는다. 가난한 선비의 집에서도 제사 때 이것으로 대신한다. 값은 싸지만 귀하게 쓰이는데, 단지 먹기만 하고 그 이름을 모르니 옳겠는가?(爲日用常饌 而閭巷細民 以此爲脯脩享神 儒家貧匱 亦充籩豆 物賤用貴者也 但食之而不識其名 可乎)

     

    조선후기 명태 수요의 증가는 17세기 이후 농업생산력의 발달로 인한 경제력 향상에 따른 식생활 변화의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18세기 말에는 이전 시기에 비해 곡물과 생선 등의 거래가 활발해졌고 그에 따른 어물의 수요도 증가하였다. 한편 18세기 중엽에는 도로와 바닷길 등의 유통망이 정비되면서 동해의 명태는 본격적으로 전국에 공급될 수 있었다. 특히 18세기 말에는 원산에서 강릉을 거쳐 평해, 울산, 부산을 연결하는 뱃길이 새로 열렸는데, 원산의 상인들은 북어를 배에 싣고 충청도 은진의 강경포구까지 운송하여 판매할 정도였다. 전국에 팔려나가는 명태는 북어의 형태로 가공되어 유통되었다.

     

    18세기 이후 일상식품으로 자리 잡게 된 명태는 버릴 것 없는 생선으로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명태는 국ㆍ구이ㆍ강정ㆍ순대ㆍ식해ㆍ전ㆍ조림ㆍ찌개ㆍ찜 등 다양한 음식으로 이용이 가능한 생선이다. 이에 대하여 18세기 유중림(柳重臨)이 지은 『증보산림경제』 치선(治膳)편에는 명태는 “모두 동쪽과 북쪽 바다에서 나는 것으로 맛 좋은 물고기이다. 탕, 구이, 젓갈 모두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명태의 아가미, 창자와 알은 각기 서거리젓, 창란젓과 명란젓으로 가공되어 김치용 젓갈과 밥반찬으로 사용되었다. 17세기 말 최창대가 강원도 간성의 어부들이 잡은 명태가 쌓인 것이 언덕과 산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명태는 흔한 생선이었지만, 명태알로 담근 명란젓만큼은 귀하게 여겨져서 궁중에서도 명란젓이 대구알젓을 대신하기에 이를 정도였다. 

     

    근현대시기에 들어서는 속초가 명태잡이와 명란젓 생산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1907년 원산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일본인 히구치 이츠하(樋口伊都羽)가 강원도 양양에 히쿠치점(樋口店)이라는 명란젓 가공공장을 개설하였다. 그는 당시까지 어민들이 만들어 먹던 명란젓을 상품화하여 ‘멘타이코(明太子)’라는 상품명으로 일본으로 수출하였고 시모노세키항을 통해 일본 전역에 팔려 나갔다. 일본에서 명란젓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수요가 높아지자 이후 일본 상인들이 국내에 진출하여 명란젓 제조업에 종사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명란젓갈

     

    2019년 기준으로 명란젓 소비량에 있어서 일본은 한국보다 10배 이상 높은 명란젓 최대 소비 국가이다. 일본에서 거의 국민식품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보니 일본인들은 ‘멘타이코’가 일본의 오래된 전통음식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규가 체결된 이후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온 김기수(金綺秀)가 남긴 일본 견문록인 『일동기유(日東記游)』에는 일본인이 본래 명태나 명란젓을 식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글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북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지금 박물원(博物院)에 설치된 어류[鱗族] 가운데 유독 북어만 보이지 않으니 일본사람들도 ‘없는 것은 북어뿐이라’고 하였다”. 김기수가 일본의 박물관을 견학하면서 어류 박제 전시물을 보고 남긴 소감이다. 글을 통해 일본에서는 명태가 식용 가능한 물고기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속초시는 1909년 부산에서 원산까지 운항하는 기선(汽船) 융희호(隆熙號)가 대포항을 경유하면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에는 속초항 개발을 계기로 동해안의 신흥도시로 부상하면서 인구도 급속히 증가하여 1942년 속초읍으로 승격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후반에는 부산에 이어 전국 제2의 어획고를 올리면서 속초는 우리나라 수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된 어획 어종은 명태와 오징어였다. 속초는 수산업의 활황에 따라 속초의 명물인 명란젓을 가공하여 수출하였다. 아직 한일관계가 복원되기 이전인 1959년 일본에 명란젓과 성게젓을 수출하였고, 1962년에는 미국에 최초로 ‘코드 피쉬 로우(Cod fish Roe)’라는 상표를 달고 명란젓을 수출하였다.


    속초시는 우리나라 명란젓을 처음으로 외국에 알리고 수출한 전진기지로서의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한때 최고의 어획고를 올렸던 그 많던 명태는 20세기 후반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양생태계의 변화로 말미암아 1990년대 후반부터 감소하기 시작해 2000년대 들어서는 동해안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명태가 사라진 이후에도 속초시는 비록 이웃집 것이지만 러시아산 수입 명란으로 젓갈 생산의 전통과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 '오뉴월 밴댕이'의 진한 맛, 태안 밴댕이젓

    젓갈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벼농사문화권에서 오래전부터 양념이나 반찬으로 이용해 온 발효식품이다. 젓갈은 주로 바다나 민물에서 나는 어패류나 갑각류 등을 소금에 버무려서 발효시킨 염장식품을 일컫는다. 젓갈은 옛날부터 부패하기 쉬운 어패류 등을 오랫동안 보관하면서 이용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졌다. 젓갈과 같은 식품의 염장법은 어패류 등을 말려서 보관하는 건조저장법 등과 더불어 지금처럼 냉동냉장 보관시설이 없었던 전통시대의 전형적인 식품보존을 위한 가공방법이었다. 

     

    지리적으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풍부한 해산물을 이용하여 다양한 종류의 젓갈이 만들어졌고 그 역사 또한 오래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젓갈의 역사는 선사시대 주거지에서 발견되는 패총 유적과 빗살무늬토기 등의 유물에서 우리 조상이 일찍이 굴과 조개, 생선류 등을 섭취했던 것에서 추정할 수 있다. 비록 관련 기록이나 유물이 없어 추측에 불과하지만, 선사시대 조상들이 주로 바닷가나 하천의 하구 등 물가에 주거하면서 어패류 등을 섭취하였고 저장도구를 제작하였다는 점에서, 그 시기 거칠게나마 원시적인 형태의 젓갈류도 만들어 졌을 것을 조심스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현전하는 기록가운데 젓갈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서기 683년 신문왕(神文王)이 김흠순(金欽純)의 딸을 부인으로 맞으면서 처가에 폐백으로 보낸 물품 가운데 ‘장(醬)∙메주(豉)∙젓갈(醢)’이 확인된다. 이 내용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에 우리 전통음식문화의 원형이 이미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젓갈을 비롯하여 장류와 메주가 모두 발효식품인 것에서 우리 음식문화의 특징 중에서 일찍이 발효식품이 발달한 것을 들 수 있다.

     

    정약용이 1819년에 저술한 어휘연구서인 『아언각비(雅言覺非)』에는 “장(醬)은 해(醢)이다. 방언으로는 젓갈이라 이른다(醬者 醢也 方言醢曰젓)”고 하였다. 즉 정약용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발효식품인 장류와 젓갈이 같은 계통이라고 하였다. 흔히 장이라 하면 간장, 된장을 일컫는다. 그런데 콩으로 메주를 쑤어 소금물에 숙성시켜 만든 된장과 간장은 식물성 장이지만, 사실 이보다 앞서 어패류를 이용한 젓갈에서 추출한 어장(魚醬) 즉 동물성 장의 역사가 더 오래되었다. 다만 어장은 산지가 제한되어 있지만 콩이 재배되기 시작한 이후 콩은 어디서나 재배가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장류의 중심재료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젓갈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크게 젓과 식해의 두 종류로 구분된다. 젓은 일반적으로 수산물을 소금에 버무려 항아리에 넣어서 발효시킨 식품이다. 식해는 함경도ㆍ강원도ㆍ경상도 등 우리나라 동해안에 위치한 지역에서 발달한 염장발효식품이다. 주로 소금에 절인 생선 등에 고슬고슬하게 지은 조밥(또는 쌀밥)과 소금에 절인 무채, 고춧가루, 양념 등을 버무려 발효시킨 음식을 말한다. 가자미식해와 명태식해, 도루묵식해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식해를 제외한 젓갈의 용도는 주로 김치나 음식에 간을 맞추는 양념과 젓갈 자체가 반찬으로 이용되는 두 가지로 나뉜다. 양념으로 사용되는 젓갈은 그냥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짠 고염도 식품으로 멸치젓이나 까나리젓 등이 해당한다. 반면에 반찬으로 바로 먹을 수 있는 젓갈은 명란젓을 비롯하여 창란젓, 오징어젓과 같은 저염도 젓갈이 해당한다. 

     

    만드는 방법과 재료에 따라 젓갈은 수 십 가지를 훌쩍 넘을 정도로 종류가 많고 지역적으로도 각기 고유한 젓갈이 있다. 지역별로 대표적인 젓갈을 한 가지씩 살펴보면 서울ㆍ경기는 새우젓, 충청도는 밴댕이젓, 강원도는 명란젓, 경상도는 멸치젓, 전라도는 황석어젓, 제주도는 자리젓을 들 수 있다. 그 중 밴댕이젓은 오래전부터 충청남도 태안반도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지역을 대표하는 젓갈이었다. 밴댕이젓은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국초부터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될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우리나라의 밴댕이는 명나라 3대 황제였던 영락제(永樂帝)가 가장 좋아하던 생선이기도 하였다. 영락제는 요즘 입맛이 없으니 밴댕이를 구해서 보내라고 조선의 사신에게 직접 지시한 사실까지 세종실록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밴댕이와 더블어 밴댕이젓도 중국에 진상하는 조공품목에 들었다.

     

    밴댕이젓은 조선 왕실에도 중요한 젓갈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별도의 관청을 세우고 관리를 파견하여 밴댕이의 어로(漁撈)와 생산을 감독할 정도로 중요시하였다. 궁중에서 임금의 수라를 비롯하여 궁중음식을 전담하였던 관서인 사옹원(司饔院)의 산하기관으로 밴댕이를 잡기 위한 소어소(蘇魚所)를 경기도 안산(安山)에 설치하였다. 1866년(고종 3)에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 이전(吏典) 사옹원 조에 소어소 설치 및 업무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데 소어소는 조선전기에 설치되어 조선후기까지 운영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宣祖)와 밴댕이에 관한 웃지 못 할 일화가 있다. 『선조실록』 1600년(선조 33) 3월 18일 기사에 선조는 “안산 어전(漁箭)의 감착관(監捉官)이 진상한 물고기가 모두 맛이 변했는데도 마릿수만 채워 냈으니 해당 관원은 책임을 묻고 담당 서리는 옥에 가두어 죄를 다스리라”고 했다. 이 기사를 쓴 사관(史官)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자중할 때 조잔하게 먹을 것이나 생각하는 국왕이 매우 한심하다는 조의 비평적인 사평(史評)을 실록에 기록하고 있다. 세간에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한심하고 무능한 군주로 지탄받는 선조의 일면을 짐작케 하는 사례에 공교롭게도 밴댕이가 결부된 것이다. 감착관은 소어소에 파견하는 관리로 소어소에 소속된 어민과 어장을 감독하고 어획한 밴댕이를 모아서 사옹원으로 이송하는 일을 맡았다. 밴댕이는 주로 젓갈로 만들어져서 궁중에서 사용하고 관리들에게도 지급하였다. 

     

    밴댕이는 청어목 청어과에 속하는 몸길이 약 5~10cm 정도의 바닷물고기로 지역에 따라 디포리ㆍ빈댕이ㆍ반댕이ㆍ빈징어ㆍ순뎅이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밴댕이의 경상도 방언인 디포리는 멸치와 더불어 육수의 재료로 사용되는 건어물의 보통명사로 시중에 널리 알려져 있다. 밴댕이라는 이름은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는 ‘반당어(伴倘魚)’, 서유구(徐有榘)의 『난호어명고(蘭湖魚名考)』에는 한자로 ‘소어(蘇魚)’, 우리말로는 ‘반당이’로 소개되어 있다. 아마도 이 반당이가 변화하여 밴댕이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밴댕이는 오사리(음력 5월 사리) 때에 잡히는 것을 최고로 쳤는데, 유중림(柳重臨)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치선(治膳) 편에는 “단오 뒤에 젓갈로 만들었다가 겨울철에 식초를 넣어 먹으면 맛있다”고 하여 밴댕이젓을 담그는 시기를 음력 5월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 속담 중에 ‘오뉴월 밴댕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속담은 비록 변변치 못해도 때를 잘 만났다는 것을 뜻하는 말로 음력 5월의 밴댕이가 맛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충청남도에서는 ‘빈댕이’로도 불리는 밴댕이는 태안군, 서산시, 당진시 등 태안반도 일대가 주산지이며, 밴댕이젓 말고도 밴댕이를 이용한 향토음식으로는 밴댕이조림ㆍ밴댕이찌개ㆍ밴댕이탕ㆍ밴댕이무침ㆍ밴댕이구이 등이 알려져 있다. 

  • 젓갈시장에서 열리는 '논산강경젓갈축제'

    IMF 시기에 시작된 축제

    논산강경젓갈축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업형 축제이다. “1930년대 최대 성시를 이루었던 옛 강경의 명성을 되찾고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물인 강경전통맛깔젓을 널리 알려 지역 경제 활성화와 지역 문화 및 관광산업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1997년 10월 제1회 강경발효젓갈축제”가 개최되었다. 젓갈이 단순히 염장식품이라는 개념을 탈피하기 위해 2007년부터 강경젓갈축제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논산강경젓갈축제는 논산시가 주최하고, 강경젓갈축제추진위원회가 주관하며 매년 10월에 강경금강둔치·옥녀봉·근대역사문화거리 등에서 개최된다. 2002년 국가지정 문화관광축제로 선정되었으며, 2019년 유망축제, 2006년·2008년~2012년·2016년~2018년 우수축제, 2013~2015년 3년 연속 최우수축제로 선정되었다. 

    논산강경젓갈축제 포스터 이미지
    논산강경젓갈축제 포스터(사진출처:논산시)

    강경 지역은 1930년대 최대의 성시를 이루었던 금강 상류의 내륙 항구이다. 강경은 해상 교통과 육상 교통의 요충지로 하루에 100척 이상의 각종 선박들이 서해와 남해 등지에서 잡은 생선과 건어물, 소금 등을 싣고 와 거래가 이루어졌다. 현재 강경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젓갈시장이 자리하고 있으며, 대형 도매와 소매 업소가 성업 중에 있다. 

     

    젓갈 드시러 오세요~

    논산강경젓갈축제는 ‘공식·문화행사, 체험행사, 특별행사, 상설행사, 부대행사’로 구성되어 있다. 공식·문화행사로는 ‘강경포구 라이브클래식, 강경포구 버스킹, 강경포구 변사극, 강경포구 전국여고동창가요제, 강경포구 콘서트, 강경포구 트로트가요제, 강경포구 팔씨름왕, 강경포구 풍물한마당, 강경포구 플래시몹, 강경표구 인형극장, 강나루 불꽃놀이, 개막퍼포먼스 및 축하공연, 구구팔팔 어울마당, 놀뫼예술인 한마당, 보부상 난전재현놀이, 세계민속공연, 스트리트 포구마술사, 예스민밴드 “파이팅 강경”, 전국 강경포구 마당극 경연대회, 청소년 포구어울마당, 충청도 웃다리풍장, 폐막축하공연, 포구 외줄타기, 포구나이트 “이용식의 강경포구 차차차”’ 등이 있다.


    체험행사로는 ‘가마솥 햅쌀밥과 젓갈시식, 강경포구 공예체험, 강경포구 다식체험, 강경포구 민속놀이, 강경포구 발효체험, 강경포구 젓갈딱지왕, 강경포구 탐방(조랑말·행복열차), 소원성취 종이배 띄우기, 양념젓갈 만들기, 어린이 물고기잡기 체험, 왕새우잡기, 젓갈 페이스 페인팅 및 네일아트, 젓갈김치 담그기, 추억의 교복포토존, 탑정호 갤러리’ 등이 있다. 특별행사로는 ‘강경포구 국악 한마당, 강경포구 사생대회, 강경포구 전국어린이동요제, 놀뫼 백일장, 부여국립국악단 공연, 사랑의 나눔 바자회, 전국 궁도대회, 전국 드론 경연대회, 젓갈김장열차, 청소년 가을희망 축제한마당, 축제연계공연’ 등이 있다.


    상설행사로는 ‘SNS포토 이벤트, 갈대숲 오솔길 걷기, 강경 옛모습 및 축제사진 전시, 강경 포구주막, 강경포구 “夜”한 거리, 강경포구 레스토랑, 강경포구 포토이벤트, 관광홍보 및 평창올림픽 기념홍보, 국화 포토존, 기업 우수제품홍보판매전, 놀뫼대장간, 예스민 농특산물 홍보·판매전, 젓갈 특설판매장, 젓갈마당쇠 퍼포먼스, 젓갈캐릭터 포토존, 조선3대시장 홍보관, 축산물 홍보 판매전, 축제 기념품 판매, 축제연계 전시관(순창·한산 등), 포구 푸드트럭’ 등이 있다. 부대행사로는 ‘각설이 공연, 인터넷 정보사냥대회’ 등이 있다.

     

    오랜 전통만큼 완성도 높은 축제 

    지역의 대표 특산물인 젓갈을 콘셉트로 추진한 축제이기에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다. 축제사무국에서 축제 전체를 담당하는 전문위원제도를 도입하고 지역의 대학교수와 전문가의 의견을 반영하여 축제를 추진하고 있다. 자원봉사 매뉴얼을 제작하여 지속적으로 축제 소양교육을 1년에 2회 실시함으로서 자원봉사자의 수준이 높다. 축제 행사장을 젓갈시장 부지로 변경하여 지역주민의 참여를 유도하고 지역의 수익 창출 효과를 도모하고 있다.

  • 한반도 최대 새우젓 집산지 광천장에서 열리는 ‘광천토굴새우젓광천김대축제’

    옹암토굴의 신선함을 이용한 새우젓 보관

    광천장은 조선시대부터 해안과 내륙을 잇는 주요한 포구의 배후 장시였다. 옹암포구를 거쳐 광천장을 보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염장된 어물과 젓갈, 김 등의 섬이나 해안 마을에서 생산된 물산을 싣고 드나들었다. 특히 광천장이 번성하게 된 것은 ‘광천토굴새우젓’이 유명세를 갖게 되면서부터이다. 연중 온도가 섭씨 14~15℃, 습도가 85% 이상 유지되는 최적의 자연조건을 갖춘 옹암포구의 천연토굴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새우젓이 자연 숙성되어 맛이 좋아지고 품질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1960년 지역주민인 윤명원 씨가 굴(窟)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젓갈시장으로서 광천장은 활기를 찾았다. 


    옹암리 포구 앞의 바위산은 활석암 암반을 판 토굴이 10여개 정도였는데, 후에 굴과 굴을 연결하고, 새로운 굴을 파면서 지금은 40개의 토굴을 사용하고 있다. 이 토굴은 일제강점기에 팠던 폐광이라고도 하고, 한국전쟁 때에 방공호였다고도 한다. 활석암을 높이 2m, 길이 200m로 팠기에 토굴이라기 보다는 석굴이라 할 만하다. 1970년대 말까지 전국 새우젓의 70%가 이곳에 보관되었을 정도로 활용도가 높았다. 지금도 수백 개의 드럼통에는 연간 2,500톤의 새우젓을 보관한다. 성수기인 8월 초부터 12월 초까지 김장철에 전국의 상인과 소비자가 젓갈 구입을 위해 이 곳을 찾는다. 젓갈을 담는 새우젓은 잡는 시기에 따라 오젓, 육젓, 추젓, 자젓 등으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 이중 육젓은 크기가 크고 살이 많아 김장을 담는 최고의 젓갈이며, 오젓과 추젓은 반찬용으로 사용하기에 좋다.


    재래김의 유통지로도 유명한 광천장

    광천장은 새우젓 뿐만 아니라 재래김의 유통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충청도의 도서지역과 해안지역에서 생산한 재래김은 광천장으로 들여왔다. 김 양식 이전에 생산된 질 좋은 재래김의 집산지였기에 우수한 품질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1980년대 중반 이후 현대적인 설비를 갖춘 맛김 생산업체들이 들어서면서 재래김 생산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광천장과 옹암포구에서는 토굴새우젓 이외에 까나리액젓, 어리굴젓, 재래김 등을 파는 장시가 서고 있다.

     

    김장철 젓새우 구입하고 관광도 하는 ‘광천토굴새우젓광천김대축제’

    이런 바탕 하에 1996년, 광천장 상인연합회가 주도하여 축제를 개최했다. 광천 토굴새우젓과 광천에서 생산된 재래김의 전통을 소개하는 장을 연 것이다. 이 시기에 본격화된 관광업과 연계하여 젓갈구입 여행상품을 운영하였다. 서울~광천 간 관광열차도 운행하고 있다. 광천 시장과 옹암포구 젓갈시장 주변 곳곳에서는 다양한 공연과 경연판이 벌어진다. 옹암리 당산제 재현, 국악인 초청공연, 연예인 초청공연, 군민 노래자랑, 풍물 놀이패 공연, 군민씨름대회 등이 개최된다. 토굴을 구경하고, 새우젓 전시관에서 광천 새우젓의 특징도 살핀 후에는 포구와 광천장의 점포에서 새우젓과 각종 젓갈, 재래김을 구입할 수 있다. 김장철을 맞아 필요한 새우젓을 구입하고 덤으로 축제도 즐길 수 있는 장이다.

    광천 토굴새우젓 광천김대축제 포스터 이미지
    광천 토굴새우젓 광천김대축제 포스터(사진출처:(사)광천토굴새우젓, 광천김대축제 추진위원회)

  • 밥도둑 인정, 서산 어리굴젓

    굴은 “바다에서 나는 우유”라고 불릴 만큼 영양가가 높다. 선사시대 유적지인 부산 동삼동이나 김해 회현리의 조개무지에서 조개와 굴 껍데기가 많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우리 조상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굴을 먹어 왔음을 알 수 있다.서양에서는 굴을 언제나 날로 먹을 수 없고, 영어나 불어로 달 이름에 ‘r'자가 없는 5~8월(May, June, July, August)에는 굴이 독성을 가지는 산란기이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주로 11월~3월에 날로 먹는다.


    ‘밥도둑’들 중 하나인 어리굴젓 하면 충청도 지방에서는 당진, 예산, 서산 간월도가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간월도산을 으뜸으로 꼽는다. 간월도에서 언제부터 젓갈을 담그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임금에게 진상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600년 이상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서산 굴은 개펄에서 채취하는 천연 굴로 큰 조수간만의 차로 성장이 늦어 작지만, 육질이 단단하고 감칠맛이 있다. 색이 거무스름하고 몸통이 작으며 맨눈으로 구분하기 힘든 날감지(잔털)가 있어 양념을 잘 흡수한다. 깜찍하게 생겨 깜장굴이라고도 하고 강굴이라고도 한다.

    어리굴젓
    어리굴젓

    충남 서산의 명물인 어리굴젓은 고춧가루를 사용한다는 것이 일반 굴젓과 다른 특징이다. 크기가 작은 굴과 고춧가루를 사용하기에 어리굴젓의 ‘어리’는 ‘아리다(맵다)’ 또는 ‘어리다’, ‘작다’에서 온 것이라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서산 어리굴젓은 다른 지방의 젓갈에 비하여 빛깔이 거무스름하고 단맛이 돌고 향기로우며 비린내가 안 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어리굴젓은 특히 기침에 좋고 몸 보양에도 좋다고 정평이 나 있다. 서산에서는 10월에서 다음 해 5월까지 어리굴젓을 담근다. 어리굴젓은 반찬과 술안주로 이용되는데 지금은 전국 어디서나 담그고 있다.


    서산시는 지역 특산물인 어리굴젓의 명품화 및 대중화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특히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에 어리굴젓 센터를 지어 수매, 가공, 유통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다. 2010년에 서산 어리굴젓은 간월도를 중심으로 전국 생산량의 약 29%인 연간 187톤을 생산했고 연 매출 30억 원을 올리고 있다.


    매년 정월 보름날 만조 시에 굴의 풍년을 기원하는 굴 부르기 군왕제가 간월도 어리굴젓 기념탑 앞에서 열린다. 굴 부르기 군왕제는 간월도 어리굴젓이 유명 특산물로 부상되면서 생산량의 증가를 기원하는 부녀자들 사이에 이어진 토속제이다. 이 행사에서 행해지는 ‘굴 부르는 소리’는 충남 해안 지역에 전승되는 소리로, 태안군 안면읍 황도리와 서산시 부석면 간월리에서 불리고 있다.


    재료

    생굴, 무, 배, 밤, 소금, 고운 고춧가루, 파, 마늘, 생강

    조리과정
    1. 1. 알이 작고 또렷한 싱싱한 굴을 소금물에 살살 흔들어 씻어서 채반에 건져 물기를 뺀다.
    2. 2. 무, 배는 껍질을 벗겨서 사방 1.5㎝ 네모로 납작하게 썰고 밤은 껍질을 벗겨서 굵은 채로 썬다. 파, 마늘, 생강은 곱게 채 썬다.
    3. 3. 무, 배에 먼저 고춧가루를 넣어 색이 고루 들게 굴을 버무리고 나머지 양념을 모두 넣고 버무려서 작은 항아리나 용기에 담는다.
    4. 4. 서늘한 곳에 두어 2∼3일 후부터 먹기 시작한다. 열흘을 넘기지 않도록 한다. *간월도 어리굴젓은 부재료를 넣지 않고 담가서 오래 저장할 수 있다.
  • “새우젓은 1년 되어야 살이 부서지고 젓국물이 구수하죠”

    새우젓은 잡는 시기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그중 뽀얀 살이 통통한 육젓이 가장 맛있다. 3~4월에 새우젓을 담그면 춘젓, 5월에 담그면 오젓, 6월에는 육젓, 9-10월이면 추젓이라 한다. 11월에는 동젓, 1~2월은 동백하젓이라고 하는데 이는 모두 음력을 기준으로 한다. 양력으로 바꾸어 말하면, 5월 하순까지 담근 것이 춘젓이고 6월 한 달은 오젓, 7월이 육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력 7월 한 달은 젓새우 금어기이다(전라남도 신안은 7월 15일부터 한 달간).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육젓은 어획량이 많지 않다. 그러니 가격이 비쌀 수밖에.

    논산강경시장
    논산강경시장
    새우젓
    새우젓

    강경젓갈시장에서 이른 아침부터 유난히 손님이 북적거리는 젓갈집이 있어 들어가 보았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평소에 좋아하셨다는 젓갈을 사러 온 딸도 있고 김장준비 때문에 시장을 보러 나온 아주머니도 있었다. 나이 지긋한 부부가 새우젓과 각종 젓갈을 자동차 트렁크 가득히 싣고 있기에 왜 그리 많이 사는지 물었다.

    김장하고 그럴 때 여 와서 애들 나눠주고 그러죠. 멸치액젓, 새우젓 사고 반찬으로 오징어젓, 창난젓 조금 사고, 이놈 걸리고 저놈 걸리고 그렇지. 여가 우리 작은 집이나 마찬가지여. 10년째 다니고 있거든. 그래 주인장이 꾹꾹 눌러 담는다.

    추젓은 강화도가 유명하지만 대체로 신안의 새우를 가져온다. 새우를 잡으면 선별작업을 한 후, 배 위에서 바로 소금을 뿌린다.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에는 소금의 양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새우와 소금의 비율이 6대 4였다고 하니 정말 이맛살을 찌푸릴 만큼의 짠맛이었을 것이다.


    새우젓은 숙성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젓갈을 판매하는 집마다 맛이 다른 이유는 저장온도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염의 비율이나 온도에 따라서 새우젓의 맛이 달라지고 보관 용기가 달라져도 차이가 난다. 냉장시설이 좋아진 요즘은 소금의 양이 많이 줄었다. 황해도 젓갈, 달봉가든의 이현달(남, 36세)씨는 25%의 소금이 좋은 향과 맛을 내는 적정량이라고 설명한다.

    예전에 어머니 하실 때는 저장시설이 열악하니까 한여름엔 새우와 소금을 50대 50으로 했대요. 장화 신고 새우젓에 올라가 눌러 밟기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요즘은 새우 75%, 소금 25%면 적당해요. 그리고 물건을 가져온 상태로 두면, 위에 변색이 돼서 우거지가 져버려요. 그러면 판매를 못 하죠. 새우젓이 담긴 윗부분을 거두어서 덜어내고 뚜껑을 덮어 보관해야 하는데 수분이 닿지 않으면 새우가 마르고, 산소하고 닿으면 변색이 돼요.

    어머니 박종순(여, 67세)씨는 인터넷 거래나 주문 배송이 많아지면서 아들에게 사업을 넘기게 됐다. 예전처럼 현장에서 소량으로 판매하는 방식이 아니다. 커다란 드럼통에 새우젓을 옮겨 담고 무거운 새우젓 통을 저장고로 들고나는 일은 힘겨워 보였다. 젓갈장사는 남자의 일이라는 젊은 사장의 말이 맞다.

    새우젓의 저장온도는 영하 4~5도가 적당해요. 오래 두면 익을수록 맛이 나는데 새우가 부서지고 단맛이 나는 거는 1년 이상 숙성된 거죠. 더 오래되면 곤죽처럼 돼요. 익으면 젓국물이 구수하고 맛있죠. 멸치액젓도 1~2년이 지나면 금가루가 뜨면서 아주 맛이 있어요.

    젓갈백반
    젓갈백반

    1년 넘게 잘 숙성한 새우젓의 젓국물 빛은 막걸리처럼 탁하다. 단백질이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으로 분해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현상이리라. 젓은 죽이 되어야 맛있다. 새우젓의 새우가 예쁘고 또렷한데 감칠맛이 나고 국물 빛이 묽다면 조미액을 따로 넣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왕 젓갈 구경을 왔으니 열네 가지 젓갈의 맛을 보아야겠다. 갈치속젓, 청어알, 창난젓, 낙지젓, 오징어젓, 꼴뚜기젓, 토하젓, 가리비젓, 아가미젓, 명란젓 등 젓갈로 먹을 수 있는 반찬은 모두 올려놓은 듯하다. 손님들에게 다양한 젓갈을 맛보게 하려다 보니 젓갈 이름을 묻는 손님들도 많다. 구구절절한 젓갈의 이름과 맛을 알려주고 뒤돌아서면 다시 묻는 통에 아예 젓갈을 올려놓는 쟁반에 이름을 써 붙였다. 좋은 생각이다. 젓갈 이름이 궁금하면 그릇을 들어 확인하면 된다. 세상에! 향긋한 젓갈에 밥 한 공기를 다 비웠다.

    젓갈이름 쟁반
    젓갈이름 쟁반
    돼지수육에 새우젓
    돼지수육에 새우젓

    순댓국에 새우젓을 넣으면 맛이 달라진다. 연둣빛 애호박에 새우젓을 넣어 볶으면 맛의 깊이가 다르다. 계란찜에도 새우젓이 조금 들어가면 맛깔스러워진다. 잘 삶은 수육에 투명한 붉은빛의 새우젓을 올려야 제대로 그 맛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맛을 좌우하는 간(鹽膽, 염담)이다.     

  • 들어는 보셨나요? 연평도 조기젓

    조기는 두개골 속에 돌같이 단단한 은황색의 뼈가 있다고 해서 한자로 석수어(石首魚), 석어(石魚)라고 불리며, 봄철에 바닷물을 따라 연안에 회유해 온다는 뜻에서 유수어(流水魚)라고도 불린다. 『해동역사(海東繹史)』 물산지(物産志)에 통일신라 이전까지의 어류 중 조기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조기는 일찍부터 식용되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기가 많이 잡히면 남아도는 조기를 소금에 절여 젓갈로 만들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연평도는 1950~6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조기 어장이었으나 현재는 꽃게잡이로 유명하다. 병자호란 때 임경업 장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세자를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던 중 선원들의 부식이 떨어지자 연평도에 배를 대고 나뭇가지를 꺾어 개펄에 꽂아두었더니 물이 빠진 뒤 가지마다 조기가 걸려 있었으며 이것이 조기잡이의 시초가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조기 무리가 서남 연안 일대와 동해 일부까지 회유하는데 중요한 어장은 칠산 바다와 황해도의 연평도, 평북 대화도 근해 등이다. 남쪽에서 월동한 조기 떼는 2월경에 북상하여 추자도 근해를 지나 3월경에 흑산도 연해에 도달하고, 4월에 영광 근해에서 산란한 후 점차 북상하여 연평도에 이른다. 구한말의 한 기록에는 연평바다에 황해도 중선 77척, 경기도 55척, 평안도 8척, 300척 이상이 전국에서 몰려왔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 천여 척이 몰려온 것을 보면, 연평도 조기 파시는 구한말부터 성장하여 급증하다가 일제 말기 최고 절정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50년대까지 흥청거리던 연평 파시는 조기가 급격히 사라지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조기젓은 연평도에서 나는 조기로 5월 초순에서 6월 중순쯤에 담근 것을 으뜸으로 꼽았다. 5~6월경 조기가 많이 생산될 때 담았다가 가을부터 먹는데, 연평도 조기젓은 조선 시대 이래 여러 용도로 쓰여 오고 있다. 예컨대, 갖은양념을 가미하여 먹을 때는 꼬들꼬들해진 조기젓 살을 크게 찢어서 다진 파ㆍ마늘, 고춧가루, 식초를 넣어 양념한다. 조기젓 그대로 밥상에 오르기도 하고, 국이나 찌개의 맛을 내는 데에도 쓰이며, 김치를 담그는 데 쓰이기도 한다. 조기젓은 공기와 접촉을 하면 산화되어 좋지 않으므로 목이 좁은 항아리에 담아 그늘지고 서늘한 곳에 저장하는 것이 좋다.


    재료

    황조기, 소금, 소금

    조리과정
    1. 1. 물과 소금의 비율이 2 : 1이 되게 소금물을 만들어 끓여 식힌다.
    2. 2. 신선한 조기를 물에 깨끗이 씻은 다음 소쿠리에 건져 물기를 뺀다.
    3. 3. 조기의 입과 아가미에 굵은 소금을 가득 넣고 항아리 밑에 소금을 깐 다음 조기를 나란히 놓고 소금을 켜켜이 뿌린다.
    4. 4. 이 과정을 반복하여 항아리에 70% 정도 조기를 담은 후에 대나무 쪼갠 것을 소독하여 얼기설기 넣는다.
    5. 5. 끓여 식혀 놓은 소금물을 조기가 찰 때까지 붓고 비닐을 나무 위에 올려놓은 뒤에 소독한 돌로 꼭꼭 눌러 밀봉하여 서늘한 곳에 두었다가 익으면 먹는다.
  • 충청남도 서천군의 자랑인 붉은보라빛 새우젓, 자하젓

    우리나라 특유의 저장 식품인 젓갈은 어패류를 염장 발효시켜 재료자체의 식감과 독특한 감칠맛이 나도록 만든 음식이다. 예로부터 입맛을 돋우는 반찬으로, 일종의 조미료 역할 및 김치의 재료로서 널리 애용되어 왔다. 젓갈은 부족해지기 쉬운 단백질과에 칼슘의 공급원이기도 하였다.


    자하는 새우의 일종으로 몸길이 2㎝ 이하이며 이쑤시개보다 가는 몸통을 지녔다. 바다 새우 중 잡았을 때 유일하게 몸체가 투명하지만 젓을 담그면 붉게 숙성되어 붉을자(滋)와 새우하(蝦)를 써 자하라고 불린다. 청정지역에서 서식하는 자하는 가을이 시작되는 8월말에서 11월 초가 한철이다. 갓 잡은 자하는 회나 회무침 으로 먹기도 하고 천일염과 버무려 젓갈로 만들어 먹는다.


    감동젓이라고도 불리는 자하젓은 충청남도 서천군의 특산품으로 서천음식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깔끔하고 담백한 맛의 자하젓은 예부터 귀한 손님이나 집안의 어른 밥상에만 올렸던 고급스런 젓갈이었다. 자하젓은 밥맛없는 여름철에 입맛을 돋우는 반찬으로도 그만이고 각종 요리에 맛을 더하는 조미료로도 한 부분을 차지했다.


    자하젓과 같은 새우젓은 각종 영양소 또한 풍부하다. 새우젓이 숙성되는 동안 혈액순환과 세포재생에 뛰어난 베타민 성분이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새우 껍질에 함유된 키틴이 일부 분해되어 키틴 올리고당으로 변화한다. 키틴 올리고당은 면역력을 키워 암 세포 발생과 전이를 억제하는데 효과가 있다.


    <표> 새우젓 종류
    이름
    설명
    풋젓
     음력정월(正月) 말경부터 4월 사이에 잡은 새우로 담근 젓갈
    오젓
     5월에 잡은 새우로 담근 젓갈
    육젓

     6월에 잡은 산란기의 새우로 담그며, 새우젓 가운데서 가장 상등품으로 친다. 육젓은 김장용 젓갈로 가장 선호된다. 

    차젓
     7월에 잡은 새우로 담근 젓갈
    자하젓

     충청남도 서천군의 특산품

    추젓

     가을철에 잡은 자잘한 새우로 담그며, 육젓보다 크기가 작고 깨끗하다. 각종 음식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새우젓이다.

    동젓

     11월에 잡은 새우로 담근 젓갈

    동백하

     2월에 잡은 새우로 담근 젓갈

    토하젓

     민물새우로 담근 젓갈, 전라남도의 특산물



    재료

    자하, 소금  

    조리과정
    1. 1. 자하는 깨끗한 물에 잘 헹군다.
    2. 2. 자하와 소금은 5:2 정도로 넣고 버무린다.
    3. 3. 항아리에 담아 2~3개월 정도 숙성시킨다.
  • 1920년대엔 흔했으나 1930년대엔 귀해진 명란젓

    『동아일보』 1931년 1월 30일 자 「자랑거리 음식솜씨」칼럼에는 명란젓을 다루고 있다. ‘명란젓은 날로 먹어도 좋고 파, 두부와 같이 찌개를 끓여 먹어도 좋습니다. 속담에 정월 지난 알젓은 마루밑의 개도 안 먹는다고 했지만 이것은 일본으로 건너가기전 흔하던 시절의 속담입니다. 최근에는 퍽 귀하고 비싸졌습니다.’  최근인 1931년에는 명란젓이 상당히 귀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전에는 흔했던 음식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1931년 1월 30일 자랑거리 음식솜씨(9)
    1931년 1월 30일 자랑거리 음식솜씨(9)(사진출처:동아일보)

    1924년에 출판된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는 명란젓이 흔한 음식이었음을 보여준다. ‘명난젓은 찌개를 하든지 날로 먹는데 움파나 겯들여 먹으면 보통 싫어하는 사람이 업나니. 이 젓은 정월이 지나면 먹기를 덜 하나니라. 이 젓이 워낙 흔하야 만히 먹으나 맛은 별맛 업나니라’라고 하였다. 1920년대에는 명란젓이 한국에서 흔했던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1920년대 이후 어떠한 일이 일어나서 명란젓은 귀해지게 된 것일까?

    1920년대 이전에는 명란젓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이것은 명란이 겨울 이외의 계절에는 쉽게 상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숭어, 연어, 민어의 알집은 껍질이 단단하여 소금에 절여 햇볕에 반쯤 말릴 수 있다. 이렇게 반 건조된 어란은 장기간 상온에서 보관할 수 있다. 그러나 명란은 알집이 단단하지 않아 소금에 절여 삭히는데 겨울 이외의 계절에는 상온에서 상한다. 그리하여 1920년대 이전에는 널리 유통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1914년 9월 16일 경성(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이 개통된다. 명태는 일제시기 원산, 함흥 등 동해안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잡히는 물고기였다. 따라서 명태의 알로 만드는 명란젓도 함경도 동해안 인근에서 흔했을 것이다. 이 명란젓이 경원선을 통해 경성으로 유입되었던 것이다.

    명란젓이 상당히 맛이 좋았는지 일본, 대만 등에도 수출하게 되었다. 명란젓이 대량으로 수출된 시기는 1920년대 중반 정도였는데 『동아일보』 1931.03.08. 「주요도시 순회좌담 홍원편」에서 ‘명란젓이 수출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4~5년 전인데 대개 일본과 대만에서 많이 수요합니다’라고 나온다. 이 기사에서 한국의 명란젓은 일본 북해도에서 산출된 명란젓보다 가공이 부족하여 2할 정도 할인한 가격을 받는다고 하였다. 원품은 조선산이 일본산보다 뛰어났음에도 말이다.

    1939년의 경우 명란젓은 함경남도 신창 군에서 164통이 만들어졌다. 그 신문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년 동해안 명물로 성가를 내외에 높이고 있는 명란젓이 금년의 명태어의 시기가 조금 빨라 9월 중순부터 이의 명태란의 제조에 착수한 업자들은 환희 중에 있는데 선월(先月)중 제조판매고는 164통에 달하고 전년 동기(同期)의 120통에 비하면 조금 나으며…. 판매가격으로 말하면 역시 전년보다 고가로 앵(櫻)에 20원 내외, 송(松)에 19원 내외, 죽(竹)에 17원, 매(梅)에 15원의 하관 시세로 인하여 지금이야 명태 풍어를 기대하고 호가 시기를 놓치지 않겠다고 50개소 업자들은 초조하고 있어 어촌 같은 기분을 거리에 띠고 있다.’(『동아일보』 1939.10.13. 「신창명태란판매 164통」)

    1934년 11월 1일 명란젓 제조장 카메라방문
    1934년 11월 1일 명란젓 제조장 카메라방문(사진출처:동아일보)

    여기서 명란젓이 앵, 송, 죽, 매의 등급으로 나뉘고 등급에 따라 20원부터 15원까지 가격이 매겨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등급은 어란의 상태에 의한 것인데 가장 최상급 명란젓의 상태는 ‘난소중에 잘 성숙하야 방금 산란하려는 것과 이미 방란하고 있는 것’이 가장 좋은 등급이었다. (『동아일보』 1934.11.01. 「명란젓 제조장 카메라방문」)

    일본 북해도산보다 뛰어난 원품인 한국의 명란젓이 1920년대 본격적으로 일본인에 의해 가공되어 일본으로 수출되었는데, 1908년에 후쿠시마 출신 히구치 이쓰하(1872~1956)가 부산에서 명란 제조를 하여 시모노세키로 보냈다.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해방 이전까지 부산 소재 히구치의 상점은 상당히 번창한 것으로 알려진다.

  • 염장만큼 숙성이 중요한 젓갈


    젓갈은 어패류의 근육·내장 등에 다량의 식염을 가하여 알맞게 숙성시킨 발효식품이다. 젓갈의 숙성은 생선의 근육 등 조직 자체에 들어 있는 자가소화효소에 의하여 진행된다. 이 효소가 단백질을 분해한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에 면하여 다양한 수산물이 있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젓갈을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시대부터 현대까지 유명한 젓갈생산 지역이 곰소만 일대였다. 곰소만은 전라북도 부안군과 고창군 사이를 좁고 깊게 들어간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다. 곰소만 일대에는 조선시대부터 자염(煮鹽)에서 천일염에 이르기까지 소금생산이 활발하였다. 곰소만 일대의 젓갈은 다양한데, 한 종류의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지역이 아니고 다양한 물고기가 잡혔기 때문이다. 곰소만 젓갈에 대해 유승훈의 주목할만한 연구(유승훈, 「곰소만의 젓갈 생산 풍습 -‘젓독의 이용’을 중심으로-」,『민속학연구』8, 2001.)를 바탕으로 젓갈에 대해 알아본다.

    곰소만에선 주로 농축된 바닷물을 솥에 넣고 끓여 자염을 생산했다. 그러다 태평양 전쟁 이후, 천일염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1940년대 일제가 연동, 곰소, 작도를 잇는 제방을 쌓았고, 섬이었던 곰소는 곰소항이 되었으며, 연동과 곰소 사이의 넓은 간척지는 천일 염전이 되었다. 일제가 패망하여 물러간 뒤 1946년 5월에 남선염업주식회사가 이어받았다. 이처럼 곰소만은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있어 젓갈생산이 발달되었다.

    마산어시장 젓갈가게
    마산어시장 젓갈가게

    곰소만 주민들이 직접 담아먹는 젓갈로는 황새기젓(황석어젓), 갈치속젓, 반지락젓, 게젓 등이 있다. 곰소만의 젓갈은 하나의 품종이 뚜렷하게 대종을 이루지 못하고 다양한 종류가 소량 생산되는 특성이 있다. 이런 젓갈 외에 깡다리를 비롯한 잡어젓갈이 있다. 곰소만에서 잡어는 전체 어류 어획량 중 18%를 차지한다. 조기나 갈치가 젓갈로 담그기보다는 염건(鹽乾)되어 팔려나가는 것을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잡어들이 젓갈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곰소만에서 젓갈생산지로 유명한 곳은 부안군 줄포면이었다. 줄포면에서는 조선시대부터 젓갈이 만들어 졌는데 1900년 초 사금융을 겸한 대상들인 객주들이 5~6명 있어서 어민들이 잡은 물고기와 젓갈을 사들였다. 줄포항이 커지면서 항구에 많은 어선이 들어와 젓갈 생산이 늘어났다. 1930년 경에는 20~30가구가 젓갈을 직접 담아 도․소매업을 했다. 1960년대까지 옛 어물전 거리를 따라 약 40여개 점포가 젓갈 제조판매를 했고, 줄포의 젓갈은 전북 전주, 정읍, 이리 등지와 서울의 동대문 시장에 까지 팔렸다. 그러나 토사로 인한 바다의 매몰로 선박의 입출항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면서 줄포항은 1970년대에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대신 어업조합과 부두노조는 곰소항으로 이전했다.

    1970년대부터 곰소항에서 젓갈을 대량으로 제조 판매하는 제조업자가 생겨났다. 소형 무동력선의 선주가 자기 집에서 자가(自家)탱크나 젓독 항아리를 마련하여 잡젓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1980년 말에는 교통이 개선되고 인근 관광지가 주목받으면서 관광객이 몰려들었고, 관광객 대상의 젓갈을 상품화하였다. 1990년 초반부터 곰소는 목포와 강화에 이어 서해안의 가장 유명한 젓갈산지로 알려지게 된다. 

    젓갈은 신선한 해산물을 잡은 즉시 바로 염장하여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숙성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젓갈을 숙성시키는데는 일정기간이 필요한데 어민들 중 대부분은 제조한 젓갈을 오래 숙성시켜 팔 경제력이 없었다. 이들은 경제적 여력이 있는 객주에게 갓 염장한 젓갈을 팔았고, 객주가 그 젓갈을 숙성시켜 장에 팔았다. 곰소만의 객주들은 곰소만뿐 아니라 임자도, 목포, 군산 등 서해안 일대에서 입도선매하는 방식으로 새우젓을 구입하여 충남 광천굴로 운반하여 숙성시켰다. 익은 새우젓을 다시 노량진, 양평 등으로 운반하여 경매를 부쳐서 팔아넘겼다.

    곰소항의 젓굴은 선창가 서쪽에 자리잡은 낮은 산속에 있어 드럼통이 약 100여 개 들어갈 수 있었다. 젓굴은 광천굴 외에 폐광, 폐터널도 이용하였다. 젓굴 외에 젓막도 있었는데, 젓막은 일정한 대여료를 받고 젓독을 보관해주는 곳이다. 젓갈은 젓독에 담아 젓막에 들어왔으며 소비자에게 팔릴 때도 젓독 째로 팔렸다. 젓막은 자본금이 풍부한 객주, 선주들이 운영했으며, 곰소항 주변에 4∼5개가 70년대 중반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 70년대까지 객주가 팔았던 강화도 새우젓

    새우젓은 김치를 담글 때 필수적으로 넣는 젓갈이고 국, 찜 등의 요리에도 들어간다. 새우젓이 대중화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조선전기까지 새우젓은 왕실과 양반가에서만 소비할 수 있는 진귀한 음식이었다. 새우젓의 원료가 되는 젓새우잡이 어업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고 젓새우를 염장할 소금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이 새우젓을 일상적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은 19세기 무렵이다. 젓새우잡이 어업은 황해도 해주에서 광양만에 이르는 서해안 일대에서 발달하였다. 젓새우가 큰강 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뻘 지역에 많이 살기 때문이다. 젓새우는 음력 3월부터 바다의 깊은 곳에 갔다가 8월 무렵 연안으로 회유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가을 무렵 젓새우를 잡아 염장한다. 

    새우젓

    19세기 초에는 한반도 서남해 낙월, 임자도 연안 지역이 젓새우잡이의 중심어장이었다가 1960년대 이후 강화도로 바뀌었다. 1980년대 이후 한강지역의 오염, 간척사업, 영종도 국제공항 건설 등으로 강화도 인근의 젓새우잡이는 위축되었다가 2000년대 지구온난화로 젓새우가 많이 출현하면서 강화도의 젓새우잡이는 다시 왕성해졌다.  2005년 이후 매년 ‘강화새우젓축제’가 열리고 있다. 윤형숙의 연구(윤형숙, 「강화도 젓새우잡이 어업의 발달과 변화」, 『도서문화』34, 2009.)를 중심으로 강화도 지역 새우젓에 대해 알아본다.


    강화도 내가면 외포리 인근에는 예부터 조기, 밴댕이, 민어, 병어와 함께 젓새우 어장이 있다. 1964년 북방어로 한계지역의 설정으로 강화도 인근 어장이 축소된다. 조기, 민어 밴댕이, 병어 등이 적게 잡히면서 일부 어민들은 인천으로 이주하고, 남은 어민들은 젓새우잡이 어업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강화군 통계연보를 보면 1962년부터 젓새우는 다른 어종보다 많이 잡혔다. 젓새우를 염장에는 강화도 삼산면 매음리 삼량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사용하였다. 삼량염전의 존재는 강화도 젓새우잡이 어업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젓새우잡이 어업이 발달하면서 배도 젓새우잡이에 맞게 변화하는데 앞이 뾰족한 일본식 범선인 나가사끼배가 도입되었고, 동력배로 변화하였다. 1980년대 이후 강화도의 젓새우잡이 배는 보다 먼 바다로 나가는데 인근지역이 오염되고 간척사업으로 젓새우가 줄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구정밥을 먹고 집에서 보름도 쇠지 못하고 전라도 신안, 목포지역으로 새우잡이를 떠났다.’ 장거리 어업은 1994년 정부의 연근해 어업 구조조정 사업 때 대부분 정리되었다. 대다수 어민들은 보상을 받고 젓새우잡이 어업을 그만두었다. 2008년 현재 강화도 관내의 젓새우잡이 어업은 주로 화도면 후포 어민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강화수협에서 거래되는 새우젓 위판량의 절반 이상이 후포어민들의 생산품이다. 2007년부터는 목포를 비롯한 서남해안 지역 어장에서 젓새우가 많이 나지 않아 전라도배가 백령도까지 올라가 조업을 하기도 한다.

    새우젓
    새우젓

    어획한 젓새우는 어선에서 염장 처리되어 새우젓으로 만들어진다. 조업어선에서 생산된 새우젓은 강화도에서 온 운반선을 통해 객주에게 운반된다. 외포리 어민들이 생산한 새우젓은 1982년 강화 수협을 통해 위판되기 전까지 강화·인천 객주, 생산지 객주 등을 통해 유통되었다. 객주체계는 어민에게 불리했다. 객주는 새우젓 하역비, 중개수수료, 새우젓 시세 등을 일방적으로 매겼다. 어업자금을 빌려야하는 어민들은 불공정한 거래라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위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장에 머물면서 장기간 조업해야 하는 어민들에게 객주는 필요한 존재이기도 했다. 객주에게 돈을 꿔간 어민들이 물건을 넘기지 않거나 빌린 돈을 갚지 않거나 어획량이 적어지면 객주는 파산하게 된다.


    일제는 수협을 만들어 모든 수산물의 계통출하를 적극 장려하고 수산물유통과정에서 전통적인 객주의 역할을 약화시키려 했으나 새우젓만은 객주상인들에게 계속 유통되었다. 1977년 수협중앙회의 강력한 지원 하에 경기지역 인천수협과 전남 목포수협이, 1982년에는 옹진, 강화수협 등이 수협을 통한 위판을 개시하기까지 새우젓 객주체제는 지속되었다. 조선시대 후기부터 객주와 상회를 통해 대량 유통되는 새우젓을 소비자에게 파는 역할을 한 사람은 보부상이었다. 이들은 새우젓을 지게에 지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팔았다. 새우젓 집산지인 마포포구에서 새우젓을 사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팔던 마포 새우젓장사 이야기는 유명하다. 


    집산지인 인천에서 마포항으로 들어간 생선, 젓갈, 건어물은 부상들이 받아 지게에 지고 골목을 다니며 팔았다고 한다. 외포리 어민 중에는 한국전쟁 이후 한강으로의 접근이 제한되기 전까지 마포시장에 가 자신이 잡아 담근 새우젓을 팔았다는 사람들이 있다. 부상대신 여성들이 외포항에 들어온 생선과 새우젓을 받아 다라이에 이고 강화도 안에 있는 마을을 찾아다니며 판매하기도 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에 다라이 장사들은 소비자에게 유용한 존재였다. 다라이 장사들은 생선과 새우젓을 외포리의 객주나 동네어민들에게 구입해 팔았다. 객주를 통해 판매되던 새우젓은 1982년 수협경매를 통해 판매된다.

  • 토굴 숙성 새우젓으로 유명한 광천토굴새우젓시장

    우리나라에서 새우젓으로 유명한 곳이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이다. 오서(烏棲)산에서 발원한 하천이 읍소재지를 통과해 흐르는데, 그 하천의 이름이 광천(廣川)이다. 그래서 지명도 ‘광천’이라 하였다. 광천은 민물이 흐르는 좁은 하천이 아니다. 염수와 혼합된 수로형(水路型)의 바다를 포괄하고 있다. 광천은“고려시대 때부터 새우젓 산지로 유명했다. 옹암포(饔巖浦) 등에 새우젓 장터가 있었으며, 조선시대 말에 서해안 10여 개 섬 배들이 새우를 팔기 시작하면서부터 더욱 활성화되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 광천은 “호남지역에서 세곡 등을 싣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조운선(漕運船)이 운행하는 길목이었다.” 그렇기에 강경과 함께 충청남도 최고의 경제 중심지였다.

    광천토굴새우젓시장 입구(서문2)
    광천토굴새우젓시장 입구(서문2)
    광천토굴새우젓시장
    광천토굴새우젓시장


    충청남도 최대의 오일장 광천장

    광천읍에 개설된 광천장은 충청남도 최대의 오일장이었다. 광천읍의 관문인 ‘옹암포’는 서해안 섬들의 유일한 통로였다. “보령시 원산도(元山島)와 안면도를 비롯한 서해안 일대 섬사람들은 여러 가지 해산물과 어패류를 가지고 옹암포로 왔다. 그리고 광천장에서 그것들을 팔아서 생필품으로 바꿔 저녁 무렵에 다시 섬으로 돌아갔다. 광천장이 서는 4일과 9일에는 150여 척의 배가 옹암포를 드나들었다.”고 한다. 한편 광천장은 내륙에서 생산한 쌀 등의 물품을 옹암포를 통해 주변 섬 지역으로 유통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무렵에는 인천이나 군산과 뱃길이 연결되었고, 금광도 개발되어 광천장은 크게 번영하였다.


    토굴에서 숙성시킨 광천 새우젓

    현재 옹암포에는 포구가 없다. “산 흙이 흘러내려 포구가 막혔다.”라고 한다. 1970년대부터 옹암포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뱃길로서의 기능이 축소되고, 도로의 발달과 대천항이 커지면서 광천시장은 점차 쇠퇴해 갔다. 다만, 1980년대 옹암리는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새우젓시장이 활성화되어 마을 주민들의 대부분이 새우젓 생산에 매달릴 정도였다. 이 시기에는 새우젓을 생산해서 판매하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주문을 받아서 토굴을 이용해 새우젓을 숙성하고 발효시켜 주고 노임을 받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에 광천시장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옹암포 마을 뒷산에 일제강점기 때 광산을 하기 위해 뚫어 놓은 토굴이 있는데, 그 굴에서 숙성시킨 새우젓이 맛있다는 것이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면서 광천시장이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광천 젓갈 토굴 입구
    광천 젓갈 토굴 입구
    광천토굴새우젓시장-새우육젓
    광천토굴새우젓시장-새우육젓


    전국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광천토굴새우젓

    현재 ‘광천토굴새우젓시장’은 토굴에서 숙성시킨 새우젓을 주로 판매한다. 시장의 상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새우젓을 파는 상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새우젓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광천토굴새우젓은 신안 앞바다에서 잡힌 질 좋은 새우에 1년간 간수를 뺀 천일염으로 간을 한다. 간을 맞춘 새우젓은 토굴 속에서 3개월간 숙성시킨다. ‘광천토굴새우젓’은 생산량이 많을 때에는 전국 새우젓 생산량의 약 60%를 차지할 정도로 유명하다.

  • 전남 강진군의 청정 1급수에서 나온 ‘밥도둑’, 옴천 토하젓

    옛말에 “강진에서는 음식 자랑하지 마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임금님 수라상 부럽지 않은 전라남도 강진군의 한정식을 두고 한 말이다.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 각기 특유의 한정식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강진 한정식은 으뜸으로 통한다. 강진은 남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지역이면서도 한정식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선시대에 유배의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에서 강진으로 유배 내려 온 관료와 문인들은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을 통해 현지에 그들의 양반문화를 전수하고 더 나아가 강진군의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특유의 강진문화를 창달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강진에서 약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라는 거작을 남겼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을 들 수 있다. 그는 유배생활 중에 인근지역의 향반(鄕班)들과 활발하게 교유하였다. 또한 그는 강진에 다산초당이라는 서당을 열고 중인(中人)들의 자제들에게도 글을 가르쳐 훌륭한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 중 가장 뛰어난 제자로는 강진 아전 출신의 아들인 황상(黃裳, 1788~1863)을 들 수 있다. 정약용과 황상의 사제관계는 너무도 각별하여 정약용 사후에는 정씨와 황씨 두 집안이 '정황계(丁黃契)'를 맺어 신분과 지역을 뛰어넘는 우의를 이어갈 정도였다. 이외에 정약용은 강진 일대의 승려들 중에도 많은 제자들의 양성하였으며, 특히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 의순(意恂)과의 교유는 너무도 유명하다.


    이와 같이 강진군은 양반문화와 어우러진 강진 특유의 문화와 육지와 바다를 아우르는 강진의 풍부한 물산이 어우러져 30첩이 넘는 강진 한정식과 같은 향토음식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한편 강진군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서민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이 있다. 바로 강진이 자랑하는 맛이자 탐진강 상류의 강진군 옴천면에서 생산되는 토하젓이다.


    토하는 절지동물 십각목(十脚目) 새뱅이과의 갑각류에 속하는 민물새우로 몸의 색깔은 어두운 갈색이고, 등 면 가운데에 등뼈 모양의 얼룩무늬가 있으며 5~7월에 산란한다. 토하는 청정 1급수와 기름진 흙에서만 생장하는 아주 작은 민물새우로서 토하젓의 주생산지인 전라남도에서는 주로 저수지나 논에서 서식한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생이’ 또는 ‘새비’라 부르고, 충청도 지방에서는 ‘새뱅이’라고 부른다. 토하젓은 토하를 소금에 절여 담근 젓갈이다. 조선시대에 옴천면의 토하젓은 궁중에 진상되었을 정도로 그 맛과 영양이 뛰어났다.


    소설가 황석영은 그의 산문집 『밥도둑』에서 토하젓을 일컬어 ‘고봉밥을 먹어치우는 밥도둑놈’으로 표현하고 있다.

    진짜배기 토하젓은 새우의 몸체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야 싱싱한 향내가 난다. 토하젓을 집어 씹어보면 몸이 탁탁 터지면서 향긋한 흙냄새가 난다. 그래서 토하젓이다. 이 토하젓을 한 젓가락씩 집어다 밥에 살살 비벼 먹으면 기가 막힌데 비벼서 잠깐 놓아두면 이내 밥알이 삭아 버린다. 그래서 소화제라고도 부른다.

    토하젓은 황석영의 산문에도 밥에 비벼 놓으면 밥알이 금방 삭는다고 표현되었듯이 예전에는 여름철에 보리밥을 먹고 체했을 때 토하젓을 먹으면 낫는다고 하여 ‘소화젓’으로 불렸다. 이런 효능 때문인지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이 토하젓을 상비약으로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토하젓은 이러한 소화촉진 기능 외에도 키틴올리고당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체내 암세포 증식을 억제하고, 지방분해효소인 프로타이제와 리파아제를 다량으로 함유하고 있어 돼지고기를 먹을 때 같이 먹으면 소화에 도움이 된다.


    재료

    민물새우, 굵은 소금

    조리과정
    1. 1. 싱싱한 민물새우를 깨끗이 손질한다.
    2. 2. 소독한 항아리에 민물새우와 굵은 소금을 번갈아 가며 쌓다가 굵은 소금으로 새우가 드러나지 않도록 마무리한다.
    3. 3. 항아리를 밀봉한 후 서늘한 장소에서 한 달 이상 숙성시킨다.
    4. 4. 숙성된 토하젓을 적당량 꺼내어 찹쌀밥과 다진 마늘과 파, 풋고추, 통깨 등의 양념으로 무쳐내어 먹는다.
  • 제주를 대표하는 생선 ‘자리돔’으로 담근 자리젓

    젓갈은 어패류의 살코기나 내장, 생식소(흔히 ‘알’로 알려진 암컷의 난소와 ‘곤’으로 알려진 수컷의 정소) 등을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염장식품을 말한다. 젓갈의 역사는 소금의 발견과 더불어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고 그 종류 또한 지역별로 다양하다. 젓갈의 발명은 식품의 보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초기 인류의 식생활은 자연에서 채집과 수렵, 어로(漁撈)에 의존하다가 이후 채집은 농경, 수렵은 목축 등 인간이 경영할 수 있는 형태로 진화하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수산물양식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 수산물만큼은 바다나 하천 등에서 자연상태로 어획하거나 채집한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필시 부패하기 쉬운 어패류는 운송과 보관 등에 문제가 있었다. 젓갈은 바로 이러한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고안된 일종의 가공식품이었다.


    젓갈이 우리나라 문헌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이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新羅本紀) 신문왕(神文王) 3년(683) 기사에는 ‘醬(장)∙豉(시)∙醢(해)’가 언급되어 있다. 그 중에서 醢(해)는 젓갈을 의미하는 한자로서 메주를 뜻하는 豉(시)와 간장, 된장 등 장류를 뜻하는 醬(장) 등이 이미 고대부터 만들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 저술한 어휘 연구서인 『아언각비(雅言覺非)』 1권의 ‘장(醬)’ 항목에는 “장(醬)이라는 것은 醢(해)이다. 방언으로는 젓갈이라 한다. 장은 다양한 품목이 있는데, 된장도 그중 하나다(醬者 醢也 方言醢曰젓 醬有多品 豉醬其一也)”고 정의하였다. 이는 모든 장류(醬類)식품의 원형이 동물성 재료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젓갈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자리젓은 자리돔이라는 생선을 소금에 절여 담근 젓갈로 제주특별자치도의 음식문화를 대표하는 향토음식이다. 제주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자리젓 이외에도 고등에젓(고등어젓), 깅이젓(게젓), 멜젓(멸치젓), 구젱기젓(소라젓), 게우젓(전복내장젓) 등 다양한 젓갈이 발달하였다.


    자리젓
    자리젓
    자리젓
    자리젓

    자리돔은 농어목 자리돔과에 속하며 우리나라 남해와 제주 연안의 수심 5~15m의 암초 지대에서 무리를 지어 서식하는 바닷물고기이다. 몸은 타원형이고 크기는 성체가 15㎝ 정도이며 산란기는 6~8월이다. 제주에서는 자리돔을 굳이 ‘돔’자를 붙이지 않고 그냥 ‘자리’라고 부른다. 자리돔은 자리젓 외에도 자리강회, 자리돔구이, 자리물회 등 다양한 음식으로 조리되어 제주인의 입맛을 지켜온 제주를 대표하는 어종이다.


    자리돔은 여러 곳을 회유하지 않고 일정한 장소에서 생애를 보내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잡히는 자리돔의 맛이 조금씩 다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제주 사람들은 자기 지역의 자리돔 맛에 대해서 자부심이 강하다고 한다. “보목리 사람이 모슬포 가서 자리물회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다른 마을에 가서 자기 마을의 자리돔 맛이 좋다고 하는 것은 곧 상개방 마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리젓은 보리 베기가 한창인 음력 4월의 자리돔으로 담그는 것을 최고로 친다. 이때의 자리돔은 산란기 바로 이전이어서 크기가 적당하고 알이 꽉 차 있으며 기름기가 돌기 때문에 가장 맛이 좋다고 한다. 자리젓은 자리돔과 소금을 4:1의 비율로 버무린 다음 단지에 담고 헝겊이나 종이로 입구를 봉한 후 뚜껑을 덮어 바람이 잘 통하는 서늘한 장소에서 한두 달 가량 숙성시킨다. 


    자리돔은 젓을 담가서 오래 두어도 육질이 단단하므로 살이 그대로 있어 몸통이 작은 것은 그냥 통째로 먹기도 하고, 큰 것은 잘게 썰어서 먹기도 한다. 제주에서 자리젓이나 멜젓은 보통 양념을 하지 않고 그냥 먹었지만, 지금은 고춧가루, 다진 마늘, 풋고추 등을 넣어 양념해서 먹는다고 한다. 또한 생 젓으로 그냥 먹거나 양념을 가미하여 먹는 것 외에 밥솥에 넣어 찌거나 냄비에 무를 넣고 조려 먹기도 한다.

  • 김치 맛을 더욱 살려주는 옹진 까나리액젓

    까나리는 우리나라 전 연안에 분포하며 특히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해에서 많이 잡힌다. 몸은 긴 원통형이고 몸길이는 15~25㎝ 정도 된다. 양미리와는 분류학적으로 다른 종이지만 강원도지역에서는 양미리라 부르기도 한다. 까나리는 낮에 많이 움직이고 밤에는 주로 모래 속으로 들어가 있다. 여름철 수온이 올라가면 까나리는 모래에 들어가 여름잠을 자는데, 수온이 떨어지는 10월쯤 잠에서 깨어 활동하는 특이한 습성이 있다.


    까나리는 뼈째 먹을 수 있는 고칼슘, 고단백 생선이다. 조림이나 구이, 찌개 등으로 조리하여 먹기도 하지만 주로 젓갈을 담가 먹는다. 어린 까나리가 몰려다니는 5월 초에서 6월 사이가 성어기이고, 이 시기에 충청남도 보령시 원산도와 인천 백령도에서 잡은 것으로 담근 젓갈이 인기가 높다. 까나리는 계절에 관계없이 어획이 가능하다. 하지만 성어기가 지난 후에는 잡어가 섞여 나오고 특히 성어가 된 까나리에서는 내장의 쓴맛이 있어 담백하고 고소하고 맛이 떨어진다. 이런 까나리젓을 걸러낸 것이 까나리액젓이다. 까나리액젓은 김치의 숙성을 촉진하고 신선도를 높여 줄 뿐 아니라 불포화지방산과 아미노산, 비타민B1, 비타민B2 등의 성분 함량이 많다. 잘 숙성된 까나리 액젓은 비리내와 역한 냄새가 없고, 맛이 깔끔하다.


    재료

    까나리, 소금

    조리과정
    1. 1. 까나리와 소금을 3 : 1 비율로 잘 버무린다.
    2. 2. 1을 항아리나 용기에 꼭꼭 눌러 담아 5개월 이상 발효시킨다.
    3. 3. 충분히 숙성 발효된 후 용기 내에 두 개의 층으로 구분되는데, 위층에 뜨는 까나리 건더기는 떠내고 아래층의 검붉은 색의 액젓을 걸러 보관 사용한다.
  • 강경포구와 강경장의 명성을 되살린 강경젓갈시장

    논산시 강경읍에 ‘강경젓갈시장’이 소재한다. 시장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강경은 우리나라에서 ‘젓갈’로 유명한 곳이다. 지도에는 ‘강경읍’이 육지 안쪽에 위치해 있지만, 과거에는 큰 포구가 있었던 곳이다. 흔히 “북한에 있는 함경남도 원산항이 가장 큰 포구였고, 강경이 두 번째로 큰 포두였다.”라고 한다. 육지 안에 있는 강경에 포구가 있었던 것은 군산만으로 흘러가는 금강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도로나 철도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강경포구에 “하루에 100척 이상의 배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논산강경시장
    논산강경시장
    논산강경시장
    논산강경시장


    해산물과 농산물이 만나는 강경포구

    강경포구는 조선시대 말기 ‘강경장’을 배경으로 크게 번성했던 포구다. 뱃길이 금강을 비롯해서 논산천, 강경천, 염천 등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서해안 해산물이 강경포구까지 배로 올라오고, 호남평야에서 생산한 농산물이 강경포구에 모였다가 충청도와 경기도로 간다. 또한 경기도와 충청도 내륙에서 생산한 물건들이 강경포구를 거쳐서 삼남지방으로 보내진다. 강경장이 한창일 때에는 어류 가운데 조기와 갈치의 전국 판매가 강경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민어, 홍어, 게, 전갱이, 새우젓 등도 강경포구를 통해서 판매지로 나갔다. 그러나 도로와 철도의 발달로 1978년을 마지막으로 강경포구에는 더 이상 배가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논산강경시장
    논산강경시장


    1930년대까지 우리나라 3대 오일장이었던 강경장

    1869년 강경장은 상장(上場)과 하장(下場)으로 분리되었다. 상장은 매월 4일·14일·24일에 열리고, 하장은 9일·19일·29일에 열렸다. 강경천 주변에 위치한 하장에서는 주로 수산물이 거래되고, 상장에서는 농산물이 거래되었다. 강경장은 19세기 초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보면 전국 15개 시장 중 하나로 꼽혔으며, 1930년대까지 강경장이 평양장, 대구장과 함께 우리나라에 큰 오일장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현재는 강경읍에 4일과 9일에 열리는 강경장과 상설시장으로 대흥시장과 강경젓갈시장이 소재해 있다.

    논산강경시장
    논산강경시장
    논산강경시장
    논산강경시장


    전국 새우젓 판매의 70%가 이루어지는 강경젓갈시장

    강경포구를 통해 서해안에서 많은 해산물이 올라왔다. 냉장시설이 없었던 시절에 해산물이 상하기 쉽기 때문에 강경장에서 팔고 남은 각종 해산물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소금에 절였다. 그 중 한 가지가 ‘젓갈’이다. 한때 “젓갈은 강경 젓갈이 최고!”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강경포구와 강경장의 쇠락으로 1980년대까지 새우젓·황석어젓 등을 공급하는 등 ‘강경전통맛깔젓’의 명성만 잇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와서 옛 강경장의 명성을 되찾고, 지역 특산물인 젓갈시장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일환으로 1997년부터 ‘강경발효젓갈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강경젓갈시장에서는 성수기인 7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하루 평균 약 250~300드럼의 젓갈이 거래되며, 전국 판매량의 70%에 달하는 새우젓이 공급되고 있다.

  •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마포나루새우젓축제

    마포나루새우젓축제는 과거 마포나루의 모습을 재현하고 한강, 새우젓, 황포돛배 등의 전통적 포구문화를 홍익대, 상암IT 등의 현대문화와 어우러지게 하는 문화관광축제이다. 2008년 제1회를 시작으로 매년 10월에 개최된다. 비교적 짧은 축제 연원에도 불구하고 전통 포구문화와 현대문화를 절묘하게 어우러지게 구성하여 빠른 시간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축제로 거듭나고 있다. 특히 10월은 김장을 앞두고 있는 계절이다. 겨울철 김장을 준비하는 주부들에게 전국 산지에서 올라온 신선하고 질 좋은 새우젓을 제공하여 농어촌에 경제적 혜택을 줌으로써 소통과 상생의 혁신적 사례로 자리잡고 있다.

    서울 마포 새우젓 축제

    마포나루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동 한강 강안에 있었던 나루터이다. 마포나루 강 건녀편에 여의도 백사장이 있다. 마포는 용산강 하류의 포구였고, 용산강은 서울의 남서방향 교통량이 많은 5강 중의 하나이다. 마포나루에는 삼남지방의 곡식, 새우젓 등 젓갈류가 모였다. 흥성하던 마포나루는 육로의 발달로 쇠퇴하였고, 마포나루 부근에는 소금배가 자주 왕래하였다. 때문에 소금을 매매하는 사람들의 집단 거주인 염리동이 생기기도 하였다. 용강동 일대는 젓갈류와 소금의 보관에 필요한 옹기를 구웠기 때문에 독막 또는 동막으로 불리웠다.


    마포나루 주변의 지명이 이런 식으로 모두 마포나루와 연관되어 있다. 마포나루는 마포대교의 건설로 그 기능이 상실되었다. ≪동국여지비고≫에는 마포에서 도성 서쪽 15리 지점에 있는 서강까지를 물이 잔잔한 호수 같다고 하여 서호라고 하였으며, 마호 · 삼호라고도 하였다. 삼호는 ‘마(麻)’자의 우리말 ‘삼’의 뜻이기도 하지만, 용산강과 양화진을 함께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삼개나루라고도 하였다.

    서울 마포 새우젓 축제

    마포나루새우젓축제는 2017년과 2018년 축제참여 관광객이 65만명 이상 찾아와 단기간에 큰 성과를 올렸다. 때문에 전국의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마포나루새우젓축제의 성공적 사례를 벤치마킹하기도 하였다. 처음 새우젓축제는 도화동에서 소규모로 시작되었는데 2008년부터 마포구 단위 행사로 확대된 것이다. 마포나루새우젓축제의 성공은 전통과 현대를 어우러지게 구성하여 다양하고 풍성한 즐길거리, 볼거리를 제공한 연출의 힘이 컸다. 마포나루의 정취와 과거 번성했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난지연못에 황포돛배를 재현해 만들었고, 전통초가집을 재현한 부스, 편백나무 터널 등을 설치했다.


    새우젓을 가득실은 황포돛배, 유등과 어울린 축제 경관은 전통과 현대문화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관광객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다양한 축제 콘텐츠도 한몫했다. 우마차 타기, 옥사체험, 새우젓만들기, 승경도 놀이 등 전통을 살리면서도 현대문화와 어울리도록 구성했다. 현대 사회에서 접하기 어려운 전통문화는 중장년층, 노년층의 추억을 불러왔고, 가족단위의 어린이에게는 전통의 체험장으로 기능했다. 여기에 지역 특산품 직거래 장터는 소통과 상생의 장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고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일조하였다. 

  • 꼬들꼬들 씹는 맛이 좋은 창난젓

    창난젓을 아시나요?

    한국인에게 익숙한 젓갈을 꼽아본다면 대표적으로 명란젓과 오징어젓, 낙지젓 정도가 있을 것이다. 젓갈을 좋아한다면 어리굴젓, 토하젓까지도 먹어봤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난이도가 쉬운 편이다. 흔히들 먹는 수산물을 젓갈로 담근 것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다. 그런데, 생선의 내장으로 만든 젓갈이라면 어떨까. 집에서 생선을 손질할 때, 내장은 다 버리기 마련이다. 마트에서 판매하는 생선 또한 내장이 제거된 상태로 판매된다. 


    따라서 생선 내장은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먹을 것이 부족하던 옛 시절에는 어떻게든 재료를 아껴 버리는 것을 최소화하는 데에 전념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생선 내장으로 담근 젓갈이다. 옛 중국 문헌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서는 한나라의 무제(武帝)가 동이족을 공격하러 왔다가 항아리 속에 생선내장을 넣고 젓갈을 담가 먹는 것을 보고 갔다고 기록되어있다.


    생선 내장으로 만든 갈치속젓과 창난젓

    생선 내장으로 만든 젓갈에는 대표적으로 고기 쌈에 올려 먹는 갈치속젓과 밑반찬으로 즐겨 먹는 창난젓이 있다. 갈치속젓은 갈치의 내장으로, 창난젓은 명태의 창자로 만든 젓갈이다. 특별한 재료로 만든 젓갈이라, 그 맛도 독특하다. 오징어젓이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라면 낙지젓은 조금 더 쫄깃하다. 여기서 조금 더 식감을 강하게 살리면 꼬들꼬들한 맛으로 이어지는데, 그 맛이 바로 창난젓에 있다. 젓갈의 양념이야 대체로 비슷하다지만, 원재료에 따라 식감이 크게 달라진다. 소 곱창과 돼지 막창이 쫄깃한 식감을 내듯이, 명태의 창자로 만든 창난젓 또한 식감이 독특하다. 그래서 씹는 식감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창난젓을 최고로 친다.


    꼬들꼬들한 식감이 일품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안다는 창난젓은 방송에서 언뜻 소개된 적이 있다. MBC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는 배우 유아인씨가 비 내리는 날 누룽지를 끓여 창난젓과 같이 먹고, 해외 출장을 다닐 때 챙겨갈 정도로 좋아한다고 해서 한때 창난젓이 불티나게 팔린 적이 있다. 창난젓은 깨끗이 씻어낸 명태의 창자를 3~4cm 크기로 자르고, 고춧가루를 버무려 빨갛게 물들인 뒤 홍고추, 다진마늘, 파채, 생강즙 등으로 만든 젓갈 양념에 버무린 뒤 소금 농도를 맞추어 염장을 해 만들어진다. 이후 한달 정도의 시간을 두고 숙성을 하면 간이 잘 배어들고 꼬들꼬들한 창난젓이 완성된다. 이렇게 만든 후에는 냉장고에 두고 입맛이 없을 때마다 조금씩 덜어 먹으면 된다. 기호에 따라 생마늘과 고추를 편으로 썰어 넣어서 아삭거리는 식감을 추가하여 먹기도 한다.


    창난젓으로 만드는 다양한 요리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흰쌀밥에 오독오독 씹히는 창난젓 한 점 올리면 그것으로 족하다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면 요리를 만들 수도 있다. 싱싱한 다시마 위에 밥 한 숟가락과 창난젓 한 젓가락에, 마늘, 고추, 쌈장을 올려 한입에 먹는 다시마 창난젓 쌈밥, 창난젓에 참기름을 둘러 밥과 비벼낸 창난젓 볶음밥, 무와 쪽파를 깍두기와 함께 버무려낸 창난젓 깍두기 등 조금의 창의력만 발휘하면 무궁무진한 재료로 사용되는 창난젓이다.

  • 명태 아가미젓과 고랭지 무의 조화, 서거리깍두기

    내장은 창난젓, 알은 명란젓, 아가미로 만든 아가미젓, 

    눈알은 구워서 술안주하고 괴기는 국을 끓여 먹고,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명태 


    - 강산에 7집, <명태> 中


    세상 힙(Hip)한 감성으로 강산에가 노래했듯, 명태는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예술가들에게는 “시가 되고 이야기가 되고”, 주당들에게는 “안주 되고 내가 되고 니가 되는” 남김없이 사랑받는 생선이다. 오죽하면 제사상에 빠지지 않고 오를까.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어느 한군데 소홀히 버리지 않음으로서 조상 제사에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로 올렸던 북어포의 주인공이 바로 명태다. 이를 손질한 음식 중 가장 특이한 것은 명태 아가미로 만든 아가미젓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역에 따라 아감젓, 서거리젓, 석어리젓 등으로 불린다.


    명태 아가미로 만든 서거리젓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많이 잡히지 않지만, 명태는 원래 겨울에 강원도 해안지역에서 많이 잡혔다. 차가운 바다를 좋아하는 명태를 잡아 차가운 겨울 바닷바람에 말리면 황태, 바로 냉동고에 들어가면 동태, 갓잡은 녀석은 생태 등으로 불렸다. 갓 잡아 올렸을 때 먼저 배를 갈라 알을 따로 빼내고 내장을 몸통과 분리해 보관한다. 몸통을 손질하고 나면 내장에서 창자를 빼내 씻어 따로 보관해두었다가 창란젓으로 만들고, 마지막에는 명태 아가미를 가위로 잘라내 소금에 바락바락 주물러서 핏기와 이물질을 제거한 뒤 젓갈을 담으면 강원도 사람들이 말하는 서거리젓이 된다. 


    강원도의 반찬에서 지역 별미로

    서거리깍두기는 서거리젓을 할 적에 무를 함께 넣어 시원하게 담그는 것으로, 명태의 고장이었던 강원도에서 반찬 및 막걸리 안주로 즐겨 먹던 향토음식이다. 강원도식 김치는 특유의 시원한 맛이 일품인데, 그 비결이 바로 명태다. 김장할 적에 명태를 좀 넣어서 같이 삭히면 단백질이 발효되며 김치에 시원한 맛이 배어든다. 마찬가지로 깍두기를 담글 때도 명태 아가미를 넣어 발효시키면 오독거리고 시원한 맛을 낸다. 특히 강원도 대관령의 고랭지 무로 담글 때 그 아삭한 식감이 배가되어 입맛 없을 때 최고의 찬거리가 된다. 

    이렇게 담가놓은 서거리깍두기는 흰쌀밥 위에 깍두기 한 점과 아가미젓 한 젓가락 올려 씹어먹으면 처음에는 아삭한 식감과 함께 무의 시원한 맛이 느껴지고 그 뒤에는 오독거리는 식감과 함께 달콤한 감칠맛이 이어진다.


    강원도의 향토음식점을 찾아다니다 보면 지역의 옛 향수를 담은 반찬과 음식의 조합을 잘 이루어낸 집들을 발견하게 된다. 오랫동안 지역 사람들의 소중한 반찬거리가 되었던 서거리깍두기는 이제 강원도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추어탕집의 독특한 반찬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 다른 명물인 아바이 순대의 찬거리로도 자주 활용된다. 추운 겨울동안 눈 소복히 쌓인 항아리 아래에서 익어간 서거리깍두기 한점, 그 시원 청량한 맛을 체험해보자.

  • 강화의 역사와 특산물이 한 그릇에, 강화도 젓국갈비

    새우젓과 돼지갈비가 들어간 강화 향토음식

    젓국갈비. 이름부터 생소하다. 젓국은 호박이나 두부를 넣어 맑은국으로 먹는 경우가 많은데 갈비를 넣는다고 하니 낯설기까지 하다. 젓국갈비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향토 음식이다. 강화군의 대표 특산물 중 하나인 새우젓을 넣고 맑게 끓여낸 국물에 돼지 갈비를 넣어 푹 끓여 만드는 갈빗국이다. 젓국갈비를 먹어보면 새우젓과 돼지갈비가 들어가서인지 고기가 잔뜩 들어간 국밥의 맛이 나기도 하고, 소고기뭇국의 맛이 나기도 한다. 보기에는 삼삼해 보이는 맑은 국물이 오래 끓이면 끓일수록 진국이 되는 것이 젓국갈비의 매력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임금의 수라로 시작된 음식

    이름도 생소한 이 음식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어 고려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중기에 몽골의 침략을 받아 수도를 강화로 옮겼을 때, 먹거리가 마땅치 않던 섬에서 신하들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임금의 수라였다. 다른 지역에서 식자재를 구해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하들은 강화도에서 나는 식재료 중 가장 귀하다고 여긴 것을 모아 요리를 해 임금의 수라로 올렸는데 이때 탄생한 것이 바로 젓국갈비이다. 강화도에서 키운 돼지를 잡아 푸성귀와 인삼을 넣고 새우젓으로 간을 하여 푹 끓여낸 젓국갈비는 위급했던 당시의 최대 보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전국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강화 새우젓

    젓국갈비에는 강화의 특산물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중에서도 국물을 내는 새우젓이 젓국 갈비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전국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강화의 새우젓은 껍질이 얇고 영양이 풍부해서 전국으로 공급되고 있다. 또한, 새우는 풍부한 타우린과 칼슘으로 피로 해소 및 고혈압 예방에 큰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건강에 좋은 새우젓이 듬뿍 들어간 국물에 기름기를 뺀 돼지갈비로 육수의 맛을 더하고, 두부, 버섯, 배추 등 강화에서 재배된 각종 채소를 듬뿍 넣으면 맑고 개운한 국물이 우러나는 것이다. 


    역사문화유산의 보고 강화도에서 만나는 젓국갈비

    강화도에 방문하여 젓국갈비를 판매하는 식당을 방문하면 젓국 갈비와 함께 각종 반찬을 함께 내어준다. 젓국 갈비 한 상이라 하여도 무방할 정도로 푸짐하게 차려진다. 강화에서 재배된 각종 채소로 무친 나물 반찬은 갈비와 잘 어울린다. 강화의 또 다른 특산물인 순무로 만든 무김치도 또 다른 별미다. 신선한 재료가 가득 담긴 젓국갈비는 웰빙, 슬로푸드로 호평을 받으며 강화군의 지역 향토 음식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역사문화유산이 풍부한 강화도에는 루지, 집라인과 같은 레포츠 시설이 추가되면서 2030세대를 비롯한 젊은 사람들의 여행지로 사랑받고 있다. 이에 따라 강화도의 자연환경을 배경 삼아 화려하게 조성된 새로운 카페, 음식점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때 조금 더 특별한 경험을 찾는다면 강화도의 향토음식, 젓국갈비를 잊지 않고 찾아보자. 더더욱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 새해 선물로 주고받던 귀한 깍두기, 감동젓무

    저장성이 좋은 발효의 맛 

    맛에 있어서 가장 원초적인 맛을 꼽으라면 소금 맛을 꼽는다. 동물도 소금을 섭취하기 위해 바위를 핥고 가장 첫 번째 인류가 발견한 맛 또한 소금의 짠 맛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의 맛은 양념의 맛이다. 갖가지 재료와 소금, 물을 적절히 배합하여 만들어낸 양념은 소스(sauce)라는 외래어로 더 친숙하다. 마요네즈 소스, 케첩소스, 스테이크 소스 등 당장 동네 마트에만 가도 수십가지 양념이 진열되어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의 맛은 바로 발효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식재료를 적정한 온도와 습도에서 일정기간 유지시켜 미생물들의 활동을 촉진하고 이를 통해 최고단계의 맛을 끌어내는 방법이다. 발효의 맛은 한단계 높은 차원의 맛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장성이 좋아 보관이 용이하다는 점이 장점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도 연중 내내 보관할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밥맛을 책임져왔다. 이러한 방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젓갈인데, 새우나 멸치, 조개 같은 작은 해산물이나 생선 내장, 알, 부속부위까지 소금에 절여 삭힌다. 


    곤쟁이로 담그는 감동젓

    젓갈의 대표격인 새우젓은 돼지고기를 먹을 때 곁들이거나 국의 간을 맞추기 위해, 그리고 김장할 때 사용된다. 우리는 흔히 새우젓으로 통칭하여 부르지만, 새우젓은 언제 잡은 새우로 젓갈을 담갔는지에 따라 풋젓, 오젓, 육젓, 추젓, 동젓과 같은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똑같은 새우라도 시기에 따라 그 맛과 향이 달라지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것이다. 새우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어종들도 젓을 담가 먹고는 했는데, 그중 하나가 곤쟁이다. 초가을 경에 잡히는 아주 작은 녀석들로, 이로 젓갈을 담근 것을 자하젓, 혹은 감동젓이라고 한다. 이 감동젓은 밥반찬뿐만 아니라 무김치를 담그는 데에도 사용된다.

     

    생굴, 낙지 등 고급 식재료들이 들어간 감동젓무 

    감동젓무는 조선 시대 때 왕에게 진상될 정도로 아주 귀한 대접을 받는 궁중음식이면서, 동시에 양반집에서 새해 인사를 드리러 갈 때 가져갔던 선물이었다. 그 재료를 보면 상당히 다양하다. 밤, 배, 생굴, 낙지, 북어, 미나리, 오이, 실파 등이 들어간다. 젓갈과 소금만을 넣어 만드는 일상적인 김치가 아니라 땅이 선물한 열매들과 바다에서 내어준 보배들을 정성스레 무쳐 담근 김치라는 점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날에만 먹는 김치였다. 귀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선물 포장 또한 특별했다고 한다. 청화백자 항아리에 잘 옮겨 담은 후 다시 붉은 보자기에 싸서 선물했다고 하니, 김치로서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감동젓무의 조리는 무를 써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보통의 깍두기를 썰 때처럼 주사위 모양으로 써는 것이 아니라 나박김치처럼 썰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감동젓과 설탕을 버무린 후, 밤, 배, 오이, 생굴, 낙지, 북어 등을 골고루 섞어 마저 버무려 주어야 한다.

  • 그물을 털며 후릿그물소리를 하던 경주 감포의 멸치잡이

    조선시대부터 어획량이 많았던 멸치

    19세기 초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는 멸치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해안에서는 멸치가 방어떼에 쫓겨 몰려올 때는
    그 세력이 풍도(風濤)와 같고,
    어민이 방어를 어획하기 위하여 큰 그물을 치면
    어망 전체가 멸치로 가득 차므로 멸치 가운데서 방어를 가려낸다.


    또 "멸치는 모래톱에서 건조해 판매하는데 우천으로 미처 말리지 못하여 부패할 때는 거름으로 사용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동해안에서 멸치 어업이 일찍부터 발달했음을 알 수 있었고, 멸치를 잡는 대망은 후릿그물로 추정할 수 있다. 멸치잡이 어망은 18세기부터 사용되었고, 정조 22년(1798년)에 이만영이 쓴 유서(類書, 백과사전)인 『재물보(才物譜)』 에 멸치라는 명칭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이른 시기부터 어획했다고 하겠다.

     

    감포에서는 유자망으로 멸치를 잡는다

    동남해안의 멸치 최고 산지가 경주 감포이다. 감포는 일제강점기에 항구를 조성해 경주의 주요 항구로 기능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유자망을 멸치를 잡는다. 1998년 신한일어업협정 체결 이전까지 멸치잡이어선이 즐비했다.


    감포 어부들은 멸치를 배에서 냉동하지 않고, 그물에 걸린 것을 그대로 가지고 포구로 돌아와 멸치를 턴다. 큰 대멸치는 선원 여럿이 그물을 틀고 후릿그물 소리에 맞추어 무거운 그물을 털었다. 머리와 내장이 떨어져 나간 멸치는 쓴 맛이 없어 소금에 절이면 맛있는 젓갈이 된다.

     

    일제강점기에 항구가 조성된 감포의 멸치잡이

    감포는 일제강점기에 항구가 조성된 마을이지만, 경주 내에서는 가장 큰 어촌마을이다. 회유하는 멸치의 밀집도가 높아 멸치잡이가 성하기 때문이다. 감포 어부들은 60세 전까지는 멸치잡이를 했다. 멸치잡이 어구는 후리와 초망이 있었다. 동력선이 보급된 후로는 유자망으로 멸치를 잡는다. 멸치를 잡으러 나간 선장은 갈매기가 있는 곳으로 우선적으로 간다. 멸치 떼가 있는 곳에는 갈메기 떼가 있기 마련이다. 최근에는 어군탐지기가 있어 손쉽게 멸치 떼를 찾을 수 있다. 

     

    경주의 멸치잡이는 그물로

    감포 어민들이 멸치를 잡는 어구는 그물이다. 일제강점기에 유장망이 도입된 후 지금까지 유자망을 사용하고 있다. 그물은 13~15폭을 1조로 꾸미며, 투망한 후 멸치가 걸리기를 기다린다. 그물은 양망기로 끌어 올린다. 그물에 걸린 멸치는 털어 냉장하지 않고 그물채 항구로 가져온다. 항구에 도착하면 뱃전에서 5~8명의 선원이 그물을 들고 턴다. 일렬로 서서 멸치를 털면 그물코에 박힌 채 멸치만 떨어진다. 

     

    멸치를 즐기는 방식도 다양해

    초기에는 멸치를 회, 찌개, 구이 등의 다양한 먹거리로 활용했다. 남은 멸치는 큰 가마솥에 넣어 끓인 후 건조해 사료로 판매했다. 1980년대 이후로는 젓갈이 상품화되기 시작하면서 젓갈 생산에 주력하고 있다. 멸치를 가지고 다니다가 구입자가 나서면 그 자리에서 소금에 버무려 주었다. 이후 점차 멸치젓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고, 지금은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한다. 낮은 염도로 멸치를 절이는 전통방식을 유지해 소금과 멸치만을 넣어 발효시킨 명품젓갈을 생산하고 있다.

  • 3대 젓갈 시장 중 한 곳인 부안의 곰소젓갈도매시장

    부안군 진서면의 중심 마을, 곰소리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곰소리에는 곰소젓갈도매시장이 있다. 곰소리는 동, 서, 북쪽으로 진서면 진서리와 인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황해와 접해 있다. ‘곰소’라는 명칭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예전에 소금을 곰소라고 불렀다고 전해지는 것과, 곰소 지역의 해안이 곰의 모양처럼 생긴 데다 작은 연못이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곰과 연못을 한자화한 웅연(熊淵), 웅소(熊沼) 등의 지명이 옛 지도에 나타나기도 한다.


    곰소리는 어업과 염전의 일을 주로 하고 있다. 진서면사무소를 비롯해 농협, 보건소, 곰소시외버스터미널, 변산중학교 등 주요 기관이 자리하고 있는 진서면의 중심 지역이다. 곰소리 곰소만에는 곰소항이라는 어항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줄포면에 있는 줄포항이 토사가 쌓여 수심이 낮아지면서 폐항하게 되었다. 그 대안으로서 일제가 제방을 쌓아 만든 곳이 곰소항이다. 곰소리는 줄포항의 기능을 옮겨 계획적으로 조성된 곳으로 잘 정비되어 있는 마을이다.

     

    서해안 지역 젓갈의 산지, 곰소젓갈도매시장

    곰소만에서 젓갈이 만들어지고 판매된 것은 사포나 줄포 같은 포구에서 시작되었다. 1930년대 2, 30가구가 젓갈을 직접 만들어 도매와 소매업을 경영하였으며, 1960년대까지도 40여 개의 점포가 젓갈을 판매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줄포항처럼 토사가 쌓이게 되자 줄포의 젓갈 판매도 쇠퇴하게 되었다. 이후 젓갈을 만드는 데 필수적 요소인 소금을 공급해 줄 염전을 가지고 있는 곰소항으로 젓갈 제조와 판매의 기능이 옮겨졌다.

    부안 곰소젓갈도매시장 입구
    부안 곰소젓갈도매시장 입구
    부안 곰소젓갈도매시장 전경
    부안 곰소젓갈도매시장 전경
    부안 곰소젓갈도매시장 전경
    부안 곰소젓갈도매시장 전경


    그렇게 해서 1970년대 이후 곰소항에서 젓갈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업자가 늘어났으나 이전의 줄포항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였다. 1980년대에는 곰소항의 어종이 부족해 다른 항구나 포구에서 젓갈을 사오거나 담아와서 판매하였다. 교통 상황이 좋아지고 변산반도 등 주변 관광지가 활성화되면서 곰소를 찾는 발길이 많아지자 자연스레 곰소 젓갈이 홍보되었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곰소 지역이 서해안 젓갈의 산지로 인식되며 유명해지자 젓갈 제조 공장과 판매점을 분리하여 곰소 젓갈 단지가 형성되었다.

     

    국내 3대 젓갈 시장인 곰소젓갈도매시장과 곰소젓갈발효축제

    곰소젓갈도매시장은 논산 강경, 보령 광천과 함께 국내 3대 젓갈 시장으로 유명하다. 곰소 염전의 소금을 기반으로 한 90여 개의 젓갈 생산업체가 성업 중이다. 새우젓, 멸치젓, 밴댕이젓 등의 젓갈류와 명란젓, 낙지젓, 오징어젓, 어리굴젓 등 양념으로 무친 젓갈류 등 다양한 젓갈류를 제조하여 판매하고 있다. 이밖에도 마른 멸치나 마른 새우 등의 다양한 건어물과 대구포, 아구포, 김 등도 취급하고 있다.


    곰소리에서는 매년 9월에서 10월경 곰소젓갈발효축제를 개최한다. 곰소만 인근의 어종과 곰소 염전의 천일염으로 발효한 곰소 젓갈을 홍보하고자 2004년부터 시작되었다. 곰소 젓갈 담그기, 곰소 젓갈로 김치 담그기, 삼색 소금 만들기 등 소금과 젓갈을 이용한 다양한 체험 행사가 진행된다. 곰소젓갈도매시장에 방문해 짭조름하게 입맛 당기는 다양한 젓갈도 맛보고, 곰소젓갈발효축제도 즐겨보기를 추천한다.

    곰소젓갈식품센터 내부
    곰소젓갈식품센터 내부
    곰소젓갈식품센터 내부
    곰소젓갈식품센터 내부
    곰소젓갈식품센터 조형물
    곰소젓갈식품센터 조형물

  • 명태와 좁쌀을 섞어 만든 저염식 젓갈, ‘명태식해’

    명태로 식해를 만든다

    말린 명태의 살을 발라내서 갖은 양념을 넣어 버무린 후 식힌 밥과 고춧가루, 엿기름 등을 더하면 맛있는 새콤달콤한 젓갈 식해가 된다. '식혜'는 엿기름을 발효해 달달한 맛을 내지만, '식해'는 밥과 생선을 넣어 만든 젓갈의 일종이다. 밥 식(食)자와 젓갈 해(醢)자를 써서 식해라고 부른다. 식혜와 식해는 글자 한 자만이 다르지만 그 맛은 전혀 다르다. 식해는 삭힌 생선과 고춧가루, 소금, 밥 등을 넣어 버무려 삭혀둔 것이기 때문이다.


    생선에 소금 조금과 쌀밥을 섞어 발효시키면 식해가 되는데, 이때 쌀의 전분이 발효되면서 유산이 만들어진다. 유산이 생선의 부패를 막아 독특한 맛을 만들어낸다. 식해는 조선 중엽 문헌인 1600년대 말 『주방문(酒方文)』에  생선, 곡물, 소금을 섞어 만든 음식이 수록되어 있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식해는 강원도를 비롯해 황해도, 함경도 등의 북부지역에서 주로 만들어 먹는다. 함경도에서는 조를 넣고, 다른 지역에서는 쌀이나 찹쌀로 만든 밥을 넣는다. 


    강릉 창녕조씨 종가의 별미, 포식해와 소식해

    강릉이나 영덕 지역에서는 어물을 곡물과 섞어 만든 식해를 제사상에 올린다. 강릉 창녕조씨 종가에서는 제사에 사용하고 남은 생선포로 포식해와 소식해를 만들었다. 포식해는 고춧가루를 넣어 만들며, 주로 알뜰하게 살라는 뜻에서 이바지 음식으로 사용했다. 소식해는 고춧가루를 넣지 않아 맵지 않고 담백하므로 주안상에 주로 올렸다. 지금도 제사상에 올린 포로 만든 식해는 내림음식으로 전한다. 


    강원도 명태식해와 북한의 명태식혜는 한 끗 차이

    강원도에 명태식해가 있다면, 북한에는 명태식혜가 있다. 북한의 가정집에서는 겨울철에 명태로 식혜를 만들어 먹었다. 6·25 전쟁으로 고향을 등진 실향민이 강원도에 정착하면서 전통을 살려 명태와 가자미로 식해를 만들었다. 북한의 명태식혜는 무만 넣지만 간혹 쌀을 함께 넣기도 한다. 강원도의 식해는 제사음식으로 올리는 오랜 향토음식이다. 제물로 올리는 식해는 고춧가루를 넣지 않는다. 과거와 달리 제사에 식혜밥을 올리는 전통이 늘면서 식해 전통은 사라지고 있다. 


    명태식해를 만들어 볼까!

    강원특별자치도의 특산물인 명태를 활용해 젓갈을 담아보자. 명태를 꿰어 말려 꾸덕해지면 겨울철에 식해를 담는다. 명태의 내장을 제거한 후 깨끗하게 씻어둔다. 6~8%의 소금을 넣고, 18~20시간을 절여둔다. 잘 절여진 명태는 물로 씻은 후 조밥, 엿기름가루, 마늘, 파, 고춧가루 등을 섞어 항아리에 담아 20℃에서 2~3주간 발효시킨다. 발효가 잘된 명태는 뼈가 물러져 뼈째 생선을 먹을 수 있게 된다. 

    명태와 좁쌀을 섞어 만든 저염식 젓갈, 명태식해
    명태와 좁쌀을 섞어 만든 저염식 젓갈, 명태식해

    명태식해를 얹은 막국수

    명태는 단백질은 많지만 지방이 적다. 발효하면서 뼈가 물러져서 뼈째 먹을 수 있으므로 주요 칼슘 공급원이기도 하다. 명태식해의 독특한 맛을 즐길 수 있는 메밀국수에 얹어 먹는 막국수가 별미로 자리 잡았다. 막국수의 고명으로 얹은 명태식해는 강원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강원도의 맛이다.

  • 젓갈이 유명한 부안 곰소항

    일제강점기때 전성기였던 항구, 곰소항

    젓갈로 유명한 곰소항은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에 위치한 포구이자 항구이다. 이름이 곰소라 붙여지게 된 것은 곰과 관련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곰과 관련된 ‘熊’자를 따서 ‘웅연(熊淵)’으로 불렸다. 그리고 곰소라고 붙은 이유는 그 앞에 연모(沼)가 있었기 때문이다.


    곰소항은 군산 다음으로 전라북도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이다. 1980-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수백 척의 선박이 찾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실제로 이 무렵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어선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루었다. 곰소항이 본격적으로 확장된 시기는 일제강점기이다. 근대 무렵 군산항의 발달과도 일정 부분 닮아있는데 부안을 비롯해 고창 등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일제가 항구로서 발전시킨 것이다. 적어도 그 이전까지의 곰소 지역은 섬에 불과했는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곰소(웅도)와 인접해 있던 작도를 연결하여 육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해산물이 곰소항을 통해 전국으로 유통

    곰소항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줄포(茁浦)이다. 줄포는 곰소와 함께 부안군에 속한 포구인데 역사적인 부분에서 보면 곰소보다 먼저 발전한 곳이다. 줄포는 곰소에 비해 내만에 위치해있어 곰소항이 발달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많은 어선이 곰소가 아닌 줄포를 찾았다. 곰소항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줄포항의 기능이 상실하면서부터이고, 곰소항은 1986년에 제2종 어항으로 지정이 된다.


    적어도 곰소가 항구로서 기능을 충실하게 하던 시기에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수많은 선박이 머물러 있었고 출어를 앞둔 어선들은 이 곳을 찾아 조업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여 배에 실었다. 곰소항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는 위도로 가는 여객선이 곰소항에서 출발하였고, 칠산어장과 동중국해를 오가는 조기잡이 어선들이 수시로 곰소항을 찾았다. 적어도 이 시기에는 전라북도 해안에서 잡힌 다양한 해산물이 곰소를 통해 전국 각지로 팔려나갔다.


    젓갈의 일등공신, 곰소염전

    곰소항이 항구로도 발전할 수 있던 또 다른 배경 중 하나는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곰소염전이다. 이 곳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곳으로 오늘날까지도 운영이 되고 있는데, 이 곳에서 생산된 소금은 염도가 적당하고 품질이 좋을 뿐만 아니라 이 일대에서 생산되는 싱싱한 생선을 염장하거나 혹은 젓갈 담는 데 사용되었다. 오늘날 곰소항이 전국에서 알아주는 젓갈의 명소로 자리를 잡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물론 곰소항에서 판매되는 해태와 건조된 생선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곰소항의 또 다른 매력은 주변에 좋은 명소가 많다는 점이다. 내소사를 비롯해 모항과 내변산은 수많은 관광객이 찾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비록 항구로서의 기능은 다소 약화되었긴 하나 오늘날의 곰소항에서는 다양한 멋과 맛을 만끽하고 있는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 한 겨울 굴밭에서 채취한 굴로 만든 간월도 어리굴젓

    천수만 안쪽의 유일한 섬, 간월도

    간월도
    간월도(사진출처:한국관광공사)

    서산시와 태안군의 해안은 육지로 깊숙이 내만되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고, 수심이 낮은 천수만(淺水灣)이다. 수심은 얕은데 조류의 흐름이 빠르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커서 갯벌이 넓게 드러난다. AB지구 방조제간척 이전에는 사면이 갯벌로 싸여 있어 유독 맛있는 굴이 생산되었다. 자연산 굴은 4월에 산란하며, 바위나 돌에 붙어 성장하며, 9월이 되면 채취할 수 있을 정도 성장한다. 일년 중 가장 맛이 좋은 굴은 매서운 추위와 바람을 무릅쓰고 채취한 1~2월의 굴이다. 크기가 작아 잔굴이라 부르는 간월도의 굿은 날감지가 발달하고, 조직이 조밀해 식감이 좋다. 

     

    간월도의 굴밭에는 잔굴이 난다

    간월도
    간월도(사진출처:한국관광공사)


    방조제 건립 이후 굴밭이 소실되었다. 1985년 이후 마을 앞 장벌에서 굴의 생육이 확인되어 1986년에 어촌계원이 주도하여 마을 앞쪽 큰말과 벗앞이 갯벌에 굴발을 만들었다. 어선 20여척을 동원해 돌을 옮겨다가 갯벌에 깔았다. 자연굴밭 30ha, 양식장 15ha에서 채취한 굴은 오랫동안 간월도의 특산물인 어리굴젓을 만들고 있다. 한겨울에 해풍을 맞으며 4~7시간동안 굴을 캐는 아낙네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거적을 뒤집어 쓴다. 꽁꽁 언 발이 동상에 걸리지 않도록 나막신을 신고 굴밭 이곳저곳을 다닌다.



    대장간에서 맞춘 조새의 방우새로 굴 껍데기를 쪼은 후 조새 아래쪽에 끼워둔 ‘ㄴ’자형의 조막이로 굴눈을 도려낸다. 굴눈은 물이 빠지도록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에 담은 후 다른 굴 껍데기를 쫀다. 허리를 굽히고 오랜 시간을 작업하는 아낙네들은 허리를 펴는 것이 소원이었을 정도로 고된 작업을 지속했다.


    크기는 작지만 거친 물살을 견디었기에 조직이 단단한 간월도 굴은 인근에서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났다. 소금에 절인 굴젓은 간월도 아낙네의 손맛이 더해져 어리굴젓으로 탄생했다. 서울까지 소문난 어리굴젓은 전국에서 상품으로 여겼다. 짜게 담아 둔 굴젓의 국물은 감칠맛을 내는 양념으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간월도 ‘굴부르기제’

    간월도
    간월도(사진출처:한국관광공사)
    간월도
    간월도(사진출처:한국관광공사)

    간월도 주민들의 생계를 책임졌던 굴이 많이 나기를 바라며, 음력 정월 초나흗날에 굴제를 지낸다. 밀물이 들어오듯이 굴이 몰려오기를 바라며 밀물이 가득 찬 ‘한 장궐 차는 시간’에 제사를 지낸다. “석화(石花, 굴)야, 석화야”를 연거푸 외치고, “천수만 일대 있는 굴은 간월도 굴밭으로 다 오라”, “도투마리[안면도의 끝] 밖에 있는 굴, 죽도 밑으로 있는 굴, 천수만에 있는 굴은 간월도 전부 오라”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 굴을 부르고, 굴을 쫓는 시늉을 하며, 굴 풍년을 기원하는 모습에서 간월도 주민의 간절한 소망을 엿볼 수 있다.

  • 내륙과 해안을 잇는 광천장의 초입이었던 옹암포구

    내포와 바다를 잇는 광천장 배후포구

    옹암포구는 어촌이라기보다 조선중기 이후 번성한 내륙과 해안을 잇는 대표 포구였다. 특히 홍성의 대표 장시인 광천장의 배후 포구로 외지에서 유입되는 해산물과 내륙의 물산이 교류되는 공간이었다. 내륙에 있지만 조선시대에 홍주목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뱃길이었기에 광천장이 크게 번성하면서 그 배후 포구로 발달했다. 충남 보령군에 속한 섬 주민들이 장을 보기 위해 이용하던 포구로, 물산의 집산지로서의 역할이 강했다. 섬 주민이 생산한 각종 건어, 젓갈을 비롯해 서해안에서 생산된 새우젓 등의 젓갈류가 주였다. 새우젓과 바지락젓, 밴댕이젓 김 등이 주로 거래되었다.


    일부 주민들은 고기잡이에 종사

    옹암리 전체에 300호 정도가 거주했으나 20호 정도가 배를 부렸다. 이들 중 황해도 분들이 덕적도에서 어획한 새우젓을 가지고 팔러 왔다가 정착해 살기도 했다. 황해도에서 조기배를 부리던 중 배를 가지고 남하해서 정착한 것이다.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옹암포구에는 장배가 주로 입항했기에 하구 쪽에 위치한 의식리 옷배미 마을에 어선을 냈다. 태안반도와 안면도 사이에 연륙교가 개통되면서 안면도 주민들이 서산장을 보기 시작하고, 동력선을 타고 대천항을 이용하기도 하고, 하굿둑이 막히면서 이제는 포구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옹암포구의 토굴 새우젓

    도서지역의 어선과 조기와 새우젓을 어획한 외지 배들이 어물과 젓갈을 판매하기 위해 광천장을 찾았다. 광천장으로 가는 입구에 위치한 옹암포구는 새우젓배와 조기배가 드나들었다. 도매업을 하는 상인들은 미리 전라도의 섬들을 돌며 선돈을 주고 생산한 젓갈의 전량 모두 매매하기로 계약을 한다. 새우젓과 김을 주로 구매했다. 포구에 배가 접안을 하면 하역을 맡은 이들이 물지게에 젓을 담아 광천장까지 지어 날랐다. 옮겨온 젓갈은 항아리에 보관했는데 젓갈이 과숙이 되면 판매할 수 없기에 금을 캐던 토굴에 젓갈을 보관하기 시작했다. 토굴은 일년 내내 14~16℃로 유지되어 품질을 유지할 수 있어 3~6개월을 숙성한 후 김장철에 판매한다. 광천장이 쇠퇴하면서 옹암포구는 토굴 새우젓으로 유명세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