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음식문화 중 주식(主食)의 식재료로는 단연코 쌀이 수위를 차지한다. 학창시절 교과서를 통해 우리나라는 전통 농업 국가였고 삼국시대부터 벼농사를 지은 이래 쌀을 주식으로 삼았다는 말은 수 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쌀을 주식으로 삼았다는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국토의 약 70% 이상이 산지지형인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어느 시대이든 인구 대비 쌀 생산량이 넉넉한 정도는 아니었다.
옛날의 농사는 지금처럼 농지개량과 농사기술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천수답이 대부분이어서 자연재해라도 들면 쌀은 커녕 초근목피에 의존해야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특히 봄철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보릿고개는 1960년대까지 이어질 정도였던 상황에서 쌀밥은 더욱 요원한 것이었다. 그래서 전통시대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사회변혁을 도모했던 이들이 구호로 삼았던 “신분의 귀천 없이 누구나 이팝에 고깃국을 먹는” 세상을 외쳤던 것에서도 당대에 쌀밥이 귀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농촌이 고령화되어 농지가 줄고 쌀 생산량이 감소하여도 소비가 되지 않아 쌀이 지천으로 남아도는 요즘 세상에서는 납득하기가 어려운 사실(史實)이다.
그다음 우리 주식의 식재료는 밀가루이다. 사실상 밀가루는 현대 한국사회 음식문화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당장 국민간편식의 대명사인 라면을 비롯한 짜장면, 칼국수 등의 면류와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빵, 햄버거, 피자, 과자류 등이 모두 밀가루가 들어간 식품이다. 그 소비량 또한 쌀에 대비해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쌀과는 달리 밀가루는 거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수입한 밀을 가공한 것이다. 우린나라의 기후와 풍토는 밀농사에 적당하지 않아서 예로부터 밀가루는 ‘진가루(眞末)’로 불릴 정도로 귀한 식재료로 취급을 받았다.
과거에는 귀했던 밀가루가 지금은 흔한 식품으로 자리 잡은 것은 한국전쟁 이후부터이다. 한국전쟁 시기부터 1960년대 말까지 미국으로부터 무상으로 원조 받은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바로 밀가루였다. 예전에는 귀했던 밀가루가 전국에 구호물자로 풀리면서 농촌에서 도시에 이르기까지 밀가루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수제비, 칼국수, 떡볶이 등의 분식문화도 사실상 1950년대 이후 원조 밀가루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요즘도 1960년도 이전에 태어나 보릿고개를 제대로 경험한 세대에서는 수제비나 국수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어른들이 많다. 양념이나 반찬도 넉넉지 못한 어렵던 시절 원조 밀가루로 만든 밍밍한 수제비나 국수, 장떡을 질리도록 먹은 트라우마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옛날에 선조들은 쌀과 밀 대신에 무엇을 주로 먹었는지 궁금해진다. 예전에 쌀이나 보리와 더불어 주식으로 삼았던 곡물은 좁쌀과 메밀이었다. 좁쌀은 조선시대 여러 재정기록에 ‘소미(小米)’로 표기될 정도로 주요작물이었고, 지역적으로는 쌀농사가 어려웠던 함경도와 평안도, 황해도 북부지방에서는 좁쌀을 주곡으로 삼았다. 찰기가 많아 차좁쌀로 불리는 차조는 쌀밥에 섞거나 그 자체로 쌀밥을 대체할 수 있는 곡물이었다.
메밀은 거친 황무지에서도 잘 자라는 곡종으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구황작물로서도 오래전부터 전국적으로 재배한 작물이다. 특히 찰기가 없고 성질이 냉한 메밀은 예전부터 밥보다는 가루를 내어 면의 재료로 주로 사용하였고, 전국 각 지역마다 메밀로 만든 면을 이용한 국수가 발달하였다.
전국 최대의 메밀 생산지역인 제주도는 거친 화산지형으로 인해 논농사가 거의 불가능하여 오래전부터 메밀을 주식으로 삼았고, 메밀을 이용한 음식문화가 매우 발달한 지역이다.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꿩모멀국수와 모멀조베기(메밀수제비)가 있다. 그다음으로 메밀 생산이 많은 강원도는 막국수ㆍ꼴두국수ㆍ콧등치기국수 등 다양한 메밀국수가 향토음식으로 전해온다. 평안남도와 경상남도는 메밀 면을 사용하는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함경도지방은 너무 척박하고 기후가 낮아서 메밀보다는 감자전분으로 만든 농마국수가 발달하였다.
경상북도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 위치한 안동분지 등이 옛날부터 주요 메밀 생산 지역이어서 안동을 중심으로 건진국수와 누름국수 같은 ‘국시문화’가 발달하였다. 충청북도는 민물고기를 이용한 생선국수, 어죽국수와 충청도식 막국수인 토리면 등이 있다. 충청남도 지역은 서해안에서 나는 풍부한 해산물과 메밀면을 조화시킨 밀국낙지칼국수가 대표적인 국수이다. 우리나라의 곡창지대인 전라도지방은 콩국수나 팥칼국수 등이 알려져 있다.
서울과 인천을 포함하는 경기지역은 예로부터 팔도의 국수가 모이는 곳이었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경기지역은 다른 지방에 비해 고유한 음식문화가 약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경기지역 메밀국수 음식으로는 경기도 양주시의 양주메밀국수,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의 천서리막국수와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메밀칼싹두기가 있다. 그런데 양주메밀국수와 천서리막국수는 꿩고기육수와 동치미국물 사용하는 점에서 평양냉면, 속껍질을 제거하지 않은 메밀가루로 만든 굵은 메밀면을 사용하는 점에서는 강원도의 막국수와 비슷한 음식이다. 그런 점에서 강화도의 칼싹두기는 가장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옛 경기지방의 향토음식이라 할 수 있다.
칼싹두기는 메밀반죽을 칼로 싹둑싹둑 잘라 면을 만든다고 해서 칼싹두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메밀은 점성이 약하여 뚝뚝 끊어지기 때문에 굵직하게 썰고 길이도 들쭉날쭉한 면을 멸치와 바지락으로 우려낸 육수에 끓여 먹는 소박한 음식으로 칼국수와 닮아 보이지만 엄연히 다른 음식이다. 멸치와 바지락을 넣고 우려낸 육수에 메밀면을 투박하게 썰어 넣고 끓인 후 잘게 썬 김치와 김을 고명으로 얹어낸다. 메밀을 품고 걸쭉해진 국물을 들이킬 때 뱃속으로 전해지는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은 소박하기 그지없는 칼싹두기만의 오롯한 맛이다.
강화도와 이웃하고 있는 경기도 개풍군 출신의 소설가 고 박완서의 산문집 『호미』에는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 해 먹던 칼싹두기에 대해 소상하게 추억하고 있다.
우리 집에서 칼싹두기하면 으레 메밀로 하는 걸로 되어있었다. 밀가루로 하는 칼국수보다 면발이 넓고 두툼하고 짧아서 국수보다는 수제비에 가까웠다. 그건 아마 꼭 그렇게 해야 된다는 조리법이 있는 게 아니라 메밀가루가 밀가루보다 덜 차지기 때문에 저절로 그리 되었을 것이다. (중략) 메밀가루도 밀가루도 집에서 맷돌에 갈아 체로 친 거였으니까 요새 우리가 먹는 것보다 훨씬 거칠고 빛깔도 희지 않았다. 그 중에도 메밀은 더 누렇고 거뭇거뭇한 티도 많았다. 그걸 적당히 반죽해 다듬이 방망이로 안반에다 밀어서 칼로 썩둑썩둑 썰어서 맹물에 삶아서 약간 걸쭉해진 그 국물과 함께 한 대접씩 퍼 담는 것으로 요리 끝이었다. 따로 양념장을 곁들이지도 않고 꾸미를 얹지도 않았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무던하고 구수한 메밀의 순수 그 자체였다.
박완서는 “칼싹두기의 소박한 맛에는 이렇듯 각기 외로움 타는 식구들을 한 식구로 어우르고 위로하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고 하였다. 소박하기 만한 칼싹두기는 작가와 그 가족에게 그냥 음식 이상의 의미를 지닌 진정한 힐링푸드였던 것이다. 칼싹두기는 인공적인 감칠맛이 넘쳐나고 미각을 충동하는 달고 짜고 매운 맛이 미덕인 시대에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찬으로 곁들여 먹는 강화도 특산물 순무김치의 알싸한 맛이 어우러져 다소 텁텁하고 맹맹할 수도 있는 칼싹두기의 맛을 보완해준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는 ‘대선정식당’이라는 향토음식점이 40여 년간 강화도 칼싹두기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무더운 여름철이 되면 더위를 식혀줄 대표적인 음식 중 하나로 시원한 냉면이나 막국수 등이 떠오른다. 살얼음이 설컹설컹하게 언 고기 육수나 김칫국물에 메밀로 만든 면을 말고 그 위에 각종 고명을 얹어낸 냉면이나 막국수 등은 여름철 음식으로 사랑을 받는 식품이다. 그런데 의외로 냉면이나 막국수와 같은 메밀국수류는 옛날에는 여름철보다 겨울철에 주로 먹는 음식이었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여름철에 파종하여 늦가을에 수확하는 가을메밀을 주로 경작하였다. 한겨울이 되면 가을에 수확한 메밀가루를 익반죽하여 면을 만들고, 겨우내 먹기 위해 김장으로 담갔던 동치미국물이나 김칫국물에 말아서 먹었다. 엄동설한의 추운 겨울 밤 따뜻한 아랫목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얼음이 살짝 언 동치미 국물에 메밀국수를 말아서 먹는 맛은 별미였다.
1849년(헌종 15) 홍석모(洪錫謨)가 우리나라의 풍속과 행사를 월별로 정리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1월편에 “메밀국수에 무김치와 배추김치로 양념하고 돼지고기를 곁들인 것을 냉면이라고 한다(用蕎麥麵沈菁菹菘菹和猪肉名曰冷麵)”고 하여 냉면을 음력 11월에 먹는 시식(時食)으로 소개하고 있다. 음력 11월은 절기상으로 동지(冬至)가 시작되는 양력 12월 20일경부터 소한(小寒)과 대한(大寒)이 포함된 이듬해 1월 20일 경까지로 동지가 들어가 있어서 ‘동짓달’로 불리기도 한다. 옛날에는 가을추수와 김장이 끝난 한겨울에 들어서면 지금과는 달리 먹을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가을에 수확한 메밀과 김장김치로 만든 메밀국수는 기나긴 겨울밤 우리 선조들의 심심한 입과 배를 든든히 채워주는 훌륭한 야식(夜食)이었던 것이다.
메밀은 고온다습하고 수분이 많은 토양에서 생장하는 벼와 달라서 건조한 토양과 서늘한 기후, 비가 적게 내리는 토양에서 잘 자란다. 또한 벼나 보리에 비해 생장기간이 60~100일 정도로 짧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메밀은 옛날부터 흉년이나 재해 때 대표적인 구황작물이었으며, 주로 벼농사가 적당치 않은 산간지역에서 많이 재배하였다. 우리나라 메밀의 주산지인 강원도는 지형의 대부분이 산지여서 예로부터 메밀농사를 많이 지었다. 그러다 보니 메밀을 이용한 국수, 수제비, 떡, 만두 등 다양한 음식이 발달하였다. 강원도의 메밀국수 종류에는 메밀막국수와 콧등치기국수 등이 유명하다. 그 중 ‘막국수’로 통칭되는 메밀막국수는 원래 강원도 산간지역의 향토음식이었으나 1960년대 후반 정부의 화전(火田) 정리 사업으로 도시로 나온 화전민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막국수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 이후 현재는 강원도를 대표하는 향토음식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강원도에 막국수가 있다면 충청북도에는 오래전부터 메밀로 만든 국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제천시의 향토음식인 토리면이다. 혹자는 토리면을 일컬어 ‘충청도식 막국수’라고도 한다. 아마도 재료와 조리법이 유사한데서 그런 별명이 붙은 듯하다. 토리면과 막국수는 메밀면과 동치미국물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같다. 다만 국수에 얹는 고명에서 토리면이 도토리묵ㆍ돼지고기 편육ㆍ동치미무ㆍ삶은 계란 등을 얹어내는 점에서 막국수와 차이가 있다. 토리면이 제천시의 향토음식으로 정착한 데에는 제천의 풍토와 지리가 크게 작용하였다. 제천은 태백산맥에서 분기한 소백산맥과 차령산맥에 둘러싸인 지역으로 백운산, 구학산, 대미산, 문수산, 금수산 등 해발 1,000m를 전후한 12여 개의 산이 사방을 에워싼 산지지형 가운데 제천분지가 위치한다. 특히 북쪽으로는 강원도 원주시, 동쪽으로는 강원도 영월군과 접경하고 있어서 행정구역상으로는 충청북도에 속하지만 역사와 문화적으로는 예로부터 강원도와 밀접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제천은 강원도 못지않은 메밀의 산지였다. 심지어 지명가운데도 ‘메밀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봉우리가 있을 정도이다. 메밀봉은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억수리에 있는 산으로 월악산국립공원 내 월악산과 대미산의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충주목 제천현 조에 의하면 제천의 풍토는 “땅이 메마르며, 산이 높고 기후가 일찍 추워진다(厥土塉山高 風氣早寒)”고 하였고, 주요 농산물 중 하나로 메밀[麥]을 기록하고 있다. 『국역 조선왕조실록』에는 ‘맥(麥)’을 단순히 ‘보리’로 해석하여 표기하고 있지만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편의 범례에는 ‘맥(麥)’이 보리[眞麥]와 메밀(蕎麥)을 모두 포함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전형적인 산간지형인데다 강원도와 이웃하고 있는 제천은 예로부터 재배했던 메밀로 만든 토리면을 비롯한 제천 특유의 국수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제천시에는 ‘약초막국수’가 토리면과 더불어 제천 특유의 국수문화를 상징하는 메밀국수로 들 수 있다. 약초막국수는 삶아 낸 메밀 면에 양지머리 고기와 구기자, 산사, 황기 등의 약재를 끓여서 식힌 육수를 붓고 고명을 얹어낸 음식이다. 이 음식도 제천이 조선시대부터 약초의 고장으로 소문난 지역이었던 것과 관계가 깊다. 1757년(영조 33) 영조의 명에 따라 1765년에 완성된 관찬 읍지(邑誌)인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 제천 조를 보면 제천현에서 국가에 바치는 진상품의 대부분이 약재였다. 진상했던 약재의 종류는 황기(黃芪)ㆍ시호(柴胡)ㆍ백급(白芨)ㆍ백출(白朮)ㆍ백청(白淸)ㆍ황백(黃栢)ㆍ강활(羌活)ㆍ오미자(五味子)ㆍ은금화(錦銀花)ㆍ연교(連翹)ㆍ여로(藜蘆) 등 다양하였다.
약초의 고장 충청북도 제천시의 토리면을 비롯한 약초막국수 등은 비록 이웃하고 있는 강원도의 춘천 막국수처럼 전국적인 유명세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의병사(義兵史)에 큰 족적을 남긴 ‘제천의병(堤川義兵)’이 탄생한 충절의 고장답게 우직하고 묵묵하게 맛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밥 다음으로 가장 많이 먹는 음식은 아마도 국수와 같은 면(麵) 종류일 것이다. 면을 만드는 재료로부터 시작해서 국수에 들어가는 재료와 조리법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는 매우 다양하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가짓수에 있어서는 면 음식의 종주국이라고 알려진 중국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한국인의 국수에 대한 사랑은 조리법이 간단하여 요즈음도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는 인스턴트 라면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2018년 세계인스턴트라면협회(World Instant Noodles Association)의 자료에 의하면 2017년 한국인은 1인당 연간 73.7개의 라면을 섭취해 라면 소비량 세계 1위로 집계되었다.
사실 인스턴트 라면을 최초로 개발한 나라는 일본이다. 1963년 삼양식품이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여 국내에서 최초로 인스턴트 라면을 제조하여 판매하기 시작한 이래 불과 반세기 만에 종주국 일본을 넘어서는 라면 대국이 되었다. 현재 한국의 라면제품이 종주국 일본을 제치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각광을 받으며 음식한류의 첨병역할을 하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라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의 국수문화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우리의 것만 고집하지 않고 외래의 음식문화까지도 과감히 수용하여 우리 것으로 재탄생 시키는 문화적 개방성과 창의성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단적인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자장면에서 확인된다. 자장면은 구한말 인천 개항장에 유입된 중국 노동자들인 쿨리(苦力, Coolie)의 식사로 출발한 음식이었다. 자장면은 본래 ‘작장면(炸醬麵, 자장미엔)’이라는 중국 산동지방에서 건너온 외래음식에서 비롯되었지만 1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한국인의 국민음식이 되었다. 심지어 지난 2006년 당시 문화관광부에서 발표한 ‘대한민국 100대 민족문화상징’에 우리 전통음식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국수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1123년(인종 원년) 북송(北宋)의 사신으로 고려에 체류하며 고려의 풍속을 기록으로 남긴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제33권 ‘궤식(饋食)’편에는 고려의 항구에 도착한 중국 사신에게 대접한 “10여 가지 음식 중에 국수가 으뜸이다(食味十餘品 而麵食爲先)”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사찰에서 국수를 만들어 파는 제면업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찰은 국수를 만드는 절이라 하여 ‘조면사(造麵寺)’로 불렸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세종(世宗) 때 어의(御醫)를 지낸 전순의(全循義)가 1450년경에 지은 『산가요록(山家要錄)』에 다양한 국수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다. 『산가요록』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조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면법(麵法)’이라는 항목에는 계란면(鷄卵麵)ㆍ만이창면(漫伊昌麪)ㆍ생치저비(生雉著飛)ㆍ세면(細麵)ㆍ육면(肉麵)ㆍ진주면(眞珠麵)ㆍ창면(昌麪) 등 다양한 종류의 면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도 국수문화가 가장 발달된 지역을 꼽는다면 어디일까? 그 대답은 단연코 경상북도 지방이며, 그중에서도 대구광역시일 것이다. 대구광역시는 근현대 시기 이후 경상도 지역의 국수문화 중심지 역할을 도맡고 있다. 이렇게 경상북도와 대구광역시가 국수로 이름난 것은 이 지역의 사회사와 지리적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이래 지금의 경상북도의 경주ㆍ대구ㆍ상주ㆍ성주ㆍ안동ㆍ예천 등 여러 지역에는 퇴계 이황을 종사(宗師)로 하는 영남유학을 추숭하는 지방사족들이 세거하였다.
특히 ‘안동국시’로 이름난 안동은 퇴계 이황을 배출한 영남 성리학의 본산지이자 안동김씨, 안동권씨, 진보이씨, 예안이씨, 풍산류씨 등 명문거족이 운집한 양반의 고장이었다. 또한 대구는 조선 중기 이후 경상감영이 주재하는 경상도 행정의 중심지였다. 한편 안동시를 비롯한 예천군과 영주시 등지의 경상북도 북부지역은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이 분기하는 산지 사이에 위치한 지형으로 예로부터 서늘한 기후와 습기가 적고 건조한 토양에서 잘 자라는 메밀이나 밀을 많이 재배하던 지역이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지방사족의 거주 비율이 높았던 사회적 배경과 메밀이나 밀의 산지였던 지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오래전부터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국수문화가 발달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전체 소비량 가운데 99%를 수입에 의존하는 밀가루는 쌀보다도 못한 흔해빠진 곡물 취급을 받지만 근대 이저까지만 해도 ‘진말(眞末)’이라고 불릴 정도로 귀한 고급식재료였다. 진말은 우리말로 해석하면 ‘진짜 가루’라는 말이 된다. 우리나라의 기후와 토질은 물론이고 쌀농사와 이모작을 할 수 없었던 밀은 고려시대에도 중국에서 수입해 먹을 정도로 귀하였다. 그러다 보니 전통시대에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매우 귀한 음식에 속했고 주로 왕실이나 여유가 있는 반가(班家)의 음식이었고, 민가에서는 잔치나 제사, 귀한 손님 대접 때나 맛볼 수 있던 음식이었다. 이러한 역사와 지리적 배경을 바탕으로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건진국시, 제물국시 등 다양한 국수문화가 발달하였다.
국수와 관련하여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고, 국시는 밀가리로 맹근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국시는 국수, 밀가리는 밀가루, 맹근다는 만들다’의 경상도 방언인 것쯤은 누구나 알 법하다. 국수에 대한 경상도 사람들의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의미가 경상도 방언에 투영된 말이다. 경상북도 지역 국수의 역사는 경상북도 영양군 재령이씨 집안의 안동장씨(安東張氏)가 1670년경 저술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한글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통해 알 수 있다. 17세기 경상도 지역 양반가의 음식문화를 알 수 있는 『음식디미방』에는 ‘난면, 별챡면, 싀면, 챠면’ 등의 면을 만드는 방법과 그러한 면을 이용한 음식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 한글로 ‘챠면’이라고 기록된 ‘착면(着麵)’의 조리법은 면을 만드는 방법에서 현재의 칼국수의 원형에 해당하는 음식이다.
근현대 이후로는 대구광역시가 경상도 국수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대구는 전국에서 밀가루 소비가 최고인 것은 물론이고, 1일 국수 소비량도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다. 또한 대구광역시에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국수공장인 풍국면이 있고, 토종 국숫집 중 프랜차이즈로 성공한 업소도 가장 많은 지역이어서 이른바 ‘국수의 메카’로 불리기도 한다. 지방자치제 이후 각 지역마다 지역문화를 부각하여 관광산업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일환으로 해당지역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을 지정하여 홍보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대구광역시에서는 2006년 대구광역시를 대표하는 향토음식 10가지를 이른바 ‘대구10味’라 명명하여 지정하였다.
그 열 가지 대표음식 중 밀가루를 이용한 음식은 누른국수, 납작만두, 야끼우동 등 무려 3종이나 지정되었고, 그중에서도 국수 종류는 누른국수와 야끼우동 2종이 포함되었다. 그중에서 누른국수는 대구광역시의 10가지 대표음식 중 가장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닌 향토음식이다. 누른국수는 홍두깨로 반죽을 밀어 국수를 만든다는 의미로 경상도식 칼국수의 별칭이다. 칼국수는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이어졌던 밀가루 무상원조와 1970년대 분식장려운동의 영향으로 인해 전국적인 분식으로 자리 잡은 음식 중 하나이다. 대구에도 1970년대 무렵 칼국수를 상품음식으로 만들어 파는 식당들이 생겼는데, 대구백화점 남문 맞은편의 ‘경주할매칼국수’, 명덕네거리 근처의 ‘명덕할매집칼국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의 ‘동곡할매손칼국수’ 등이 대표적인 칼국수 노포(老鋪)이다.
칼국수는 만드는 방식에 따라 크게 건진국수와 제물국수의 두 가지로 나뉜다. 건진국수는 면을 따로 삶아서 찬물에 씻어낸 뒤 준비한 육수에 넣고 고명을 얹어 낸 국수를 말한다. 이에 반해 제물국수는 면을 따로 삶아 준비하지 않고 육수에 바로 삶아낸 국수이다. 즉 제물은 ‘음식을 익힐 때 처음부터 부어 둔 물’을 의미한다. 제물국수는 건진국수에 비해 조리과정이 간편하고 면을 익힐 때 우러나는 밀가루와 육수가 혼합되면서 약간은 걸쭉하면서도 국물 맛이 깊은 특징이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깔끔한 건진국수는 양반의 국수이고, 걸쭉한 제물국수는 서민의 국수로 여겨지기도 했다. 대구 누른국수는 제물국수에 속하는 칼국수이다. 멸치와 다시마로 진하게 우려낸 멸치육수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는 반죽을 칼로 얇게 썰어 멸치육수에 끓이다가 야채를 넣어서 한소끔 더 끓여 먹는 음식이다. 그런데 최근의 누른국수는 직접 면을 만들기보다는 제면소의 면을 받아서 사용한다. 일반 칼국수의 면이 거친 반면에 누른국수의 면발은 좀 더 가늘고 곱다. 채소는 얼갈이나 청방배추를 쓰고, 고명으로는 김, 볶은 쇠고기, 호박채 등을 올린다.
태백산맥의 줄기에 위치한 강원도는 비탈이 많은 산지지형이어서 토질이 척박하고 기후도 저온 건조하여 쌀과 보리농사가 적절하지 않아 예로부터 메밀ㆍ콩ㆍ감자ㆍ옥수수ㆍ 수수 등을 재배하여 주식으로 삼았다. 메밀을 비롯한 밭작물은 쌀이나 보리에 비해 찰기가 적어 밥을 지어 먹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보니 가공식품이 발달하였다. 메밀을 비롯한 밭작물은 가루를 낸 후 반죽하여 만든 국수ㆍ노치ㆍ떡ㆍ만두ㆍ수제비ㆍ전병 등의 음식으로 가공하여 섭취하였다.
강원도 영월군은 국수의 고장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국수음식이 발달했다. 영월군도 태백산맥 줄기와 소백산맥이 분기(分岐)하는 지점에 위치한 산지여서, 이 곳 사람들은 많이 재배하는 메밀ㆍ옥수수ㆍ감자와 산에 지천으로 널린 칡을 이용하여 다양한 종류의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시원한 동치미 국물에 매콤하고 새콤달콤하게 말아내는 동치미국수, 구수하고 얼큰한 맛의 칡국수 그리고 다소 투박해 보이지만 걸쭉하고 담백한 꼴두국수 등이 영월군의 대표적인 면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영월군에는 그밖에도 국수의 주된 재료로 사용하는 메밀과 칡을 이용한 냉면ㆍ막국수ㆍ비빔국수ㆍ칼국수ㆍ콩국수 등 다양한 국수가 있다. 특히 메밀은 맷돌에 갈아서 메밀 알갱이의 고운 가루에서부터 껍질에 붙어 있는 거친 가루까지 모두 이용한다. 고운 가루는 노치를 굽거나 만두를 하고, '나께미'라 불리는 메밀의 거친 가루는 꼴두국수의 재료로 이용한다.
영월군의 다양한 국수 중에 ‘꼴두국수’는 그 이름부터가 흥미롭고 호기심이 생긴다. 과연 어떤 음식이기에 그러한 이름이 붙었는지가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칭의 유래를 들어보면 요즘 젊은 층이 쓰는 표현으로 ‘웃프다’를 떠올리게 된다. ‘웃프다’는 우스우면서도 서글프다는 뜻을 지닌 신조어이다. 바로 ‘꼴두국수’는 “질릴 정도로 하도 지겹게 먹어서 꼴두(꼴도) 보기 싫다”는 의미에서 ‘꼴두’가 이름으로 붙었다고 한다. 명칭은 언뜻 재미있어 보이지만 그 유래만큼은 척박한 토양에서 나는 거친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주식으로 삼아야 했던 원주민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도회지나 농촌에서는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쌀밥이나 점성(粘性)이 높고 부드러운 밀가루를 이용한 국수를 만들어 먹을 때, 강원도 지역은 근현대시기에 이르기까지 다른 지역에서는 흉년이나 재해가 들 때에나 먹던 구황음식이 이들의 일상음식이었다는 점에서 숙연해진다. 그런데 꼴두국수의 반전(反轉)은 더 재미있다. 요즘은 맛집 탐방과 같은 식도락 여행이 늘어나면서 꼴두국수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꼴딱꼴딱 넘어 간다하여 ‘꼴딱국수’로 불린다고 한다.
꼴두국수는 영월군에서는 주천면(酒泉面)이 유명하다. 주천면은 강원도 영월군의 북서쪽에 위치한 면으로 남쪽으로 한반도면과 북쪽으로 무릉도원면에 경계를 접하고 있다. 술이 나오는 샘이 있었다는 고사에서 지명이 유래한 주천면은 예로부터 강원도 평창과 원주, 충청북도 제천을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번창했던 고을이었다. 서봉교의 시집 『계모 같은 마누라』에 수록된 ‘주천장 가는 날’이라는 시에서 주천면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두릉 강가의 방앗간 앞에서 중방을 지나 명마동 건널 때 나룻배 타고 북적북적 한 장터 입구에 오면 … 5일 만에 왔으니 살 것도 많겠지만 고무신 몇 켤래 난전(亂廛)에서 고르다 놓아 버리고 왕방울 눈깔 사탕 하나면 만족하는 것을 우시장 간 아부지 오기 전에 먼저 집을 향하고”라는 시의 일부 내용에서 옛날에는 5일마다 서는 주천장은 면단위 장이었지만 우시장까지 설 정도로 제법 규모가 큰 장시(場市)였다. 강원도 영월군의 한우가 인근 횡성 한우와 더불어 강원도 소고기의 명가로 이름난 것도 주천면의 우시장 및 이 지역의 한우사육의 역사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주천면에는 40여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제천식당’을 비롯하여 ‘신일식당’ 등 꼴두국수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 있다. 꼴두국수는 보릿고개 시절 먹던 음식이다보니 면의 재료는 100% 거친 메밀가루를 반죽해서 국수를 만들어 된장을 풀어 끓인 국물에 넣고 익혀먹는 음식이다. 육수를 된장으로 내는 것도 그 흔한 멸치조차 옛날에는 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다시마ㆍ멸치ㆍ무 등으로 육수를 내어 국수를 끓인 후 김과 참깨 등을 고명으로 얹어내기도 한다. 꼴두국수는 음식재료 및 만드는 방법에서 바로 이웃하고 있는 강원도 정선군의 ‘콧등치기국수’와 이름만 다를뿐 사실상 같은 음식이다. 콧등치기국수도 면을 후루룩 삼킬 때 구불구불한 면발이 콧등을 친다하여 붙은 재미있는 명칭이다.
메밀은 감자와 더불어 연상되는 강원도의 대표적인 작물이다. 강원도 평창군 출신의 소설가 이효석(李孝石)은 그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라고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강원도 메밀밭의 정경을 묘사하였다. 또 당나라 시인 백낙천은 메밀꽃의 아름다움을 ‘밝은 달에 메밀꽃, 눈과도 같네’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메밀음식을 즐기는 일본에서는 매년 섣달그믐에 메밀국수를 먹으면 기다란 면발처럼 오래 산다는 전통이 내려오기도 한다. 예로부터 밀가루가 귀했던 우리나라에서는 메밀가루를 면의 재료로 많이 사용하였다. 요즘과는 달리 국수는 잔치나 제사 때 구경할 수 있을 정도로 귀한 음식이었다. 잔치음식으로 내던 우리나라 국수는 장수나 백년해로를 상징하는 음식이었다. 상대방의 결혼의사를 물을 때 “국수 언제 먹여 줄 거야?”라는 말도 옛날 혼인잔치에서 대접하던 잔치국수에서 유래된 말이다.
메밀은 루틴(Rutin) 성분과 함께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다. 특히 지방성분은 80% 이상이 불포화지방산이다. 메밀의 루틴 성분은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고 고혈압, 당뇨, 비만에도 효능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방에서는 메밀을 교맥(蕎麥)이라 하여 약재로 사용한다. 효능으로는 만성설사나 전염병인 이질에 좋고 종기의 독을 제거하며, 화상을 입었을 때 메밀가루를 개어 붙이면 효과가 있다고 한다.
강원도 영월군은 ‘영월10경’이라 하여 조선조 비운의 국왕이었던 6대 단종(端宗)이 유배생활을 하였던 청령포(淸泠浦)와 그의 무덤인 장릉(莊陵)ㆍ김삿갓 유적지ㆍ법흥사 적멸보궁(法興寺 寂滅寶宮)ㆍ천연기념물 제219호 고씨굴ㆍ우리나라 하천지형의 보고(寶庫)인 어라연(魚羅淵)ㆍ영월군 한반도면 선암마을의 한반도지형 등 다양한 역사유적 및 천혜의 자연경관을 둘러보면서 꼴두국수를 비롯한 영월군의 향토음식을 맛볼 수 있다. 최근에는 2006년 영월군을 배경으로 개봉한 영화 '라디오스타'의 촬영지였던 옛 KBS영월방송국이 ‘라디오스타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영월읍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었다. 또한 영월읍의 별마로천문대와 천문대로 향하는 길목의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별총총마을’의 마을벽화를 둘러보는 것도 좋은 관광거리이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의 대부도(大阜島)는 서해안에서 강화도를 제외한 가장 큰 섬으로 섬의 명칭도 ‘큰 언덕’을 뜻하는 ‘大阜(대부)’라 하였다. 대부도는 선감도ㆍ불도ㆍ탄도ㆍ풍도ㆍ유도 등 5개의 유인도와 중유도ㆍ장도ㆍ큰가리섬ㆍ작은가리섬ㆍ할미섬 등 12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도에는 남사리를 비롯하여 섬 전역에 분포된 패총유적을 통해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고, 개펄에 서식하는 굴이나 조개, 그 외의 다양한 해양생물들을 채집하면서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대부도는 매우 넓은 개펄이 발달해 있어서 인근의 오이도갯벌, 시화갯벌 일대와 더불어 우리나라 서해안 조개의 최대 주산지 중 하나였다. 대부도에서는 바지락ㆍ동죽ㆍ대합ㆍ맛조개 등 다양한 조개류가 생산된다. 이렇게 대부도 갯벌에서 풍부하게 채취하는 조개류를 재료로 이용하여 만들어진 대부도의 대표적인 명물이자 향토음식이 바지락칼국수이다.
칼국수는 우리나라에서 한글로 기록된 조리서 중 가장 오래된 17세기 경상도 영양의 안동 장씨가 쓴 『음식디미방』에 ‘차면법(着麵法)’으로 소개될 정도로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면음식이다. 칼국수는 만드는 방식과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우선 만드는 방식은 ‘건진국수’와 ‘제물국수’의 두 가지로 크게 나뉜다. 건진국수는 면을 따로 삶아서 물에 헹군 다음 준비된 육수를 붓고 고명을 얹어 내는 국수이다. 제물국수는 칼국수 면을 따로 삶지 않고 육수에 함께 끓여 낸 국수를 말한다. 제물은 음식을 익히기 위해 처음부터 끓여 둔 국물을 말한다. 지역적으로 살펴보면 내륙지역에서는 지역에 따라 닭 육수ㆍ사골 육수ㆍ멸치 장국 등으로 칼국수를 끓인다. 해안지역에서는 바지락 장국을 비롯하여 다양한 어패류를 이용한 육수로 칼국수를 끓이기도 한다.
바지락칼국수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 밀가루가 대량으로 보급된 이후 대부도와 같이 바지락이 많이 생산되는 해안지역에서 만들어 먹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대부도에서는 시화방조제가 한창 건설 중이던 1980년대 후반 대부도의 시화방조제 연결지점 인근에 위치한 방아머리를 중심으로 바지락칼국수 전문식당이 들어서면서 대부도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등장하였다. 바지락칼국수가 점차 유명해지면서 소문이 퍼지자 1990년대 이후에는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남도 등 서해안의 연안지역에서도 각기 고유한 조리법과 맛을 지닌 바지락칼국수들이 등장하였고 현재에 이르러는 전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안산 대부도의 바지락칼국수는 다시마와 멸치를 우린 육수에 바지락을 넣고 끓이다가, 바지락을 건져내어 살을 분리해 내고 국물을 걸러 바지락육수를 만든다. 칼국수 면은 밀가루ㆍ 날콩가루ㆍ계란ㆍ소금ㆍ물을 섞어 만든 반죽을 얇게 썰어 육수에 넣고 끓인다. 준비해 둔 바지락살과 납작하게 썬 호박, 굵게 채 썬 양파, 실파 등을 넣고 끓이다가 다진 마늘과 국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이에 비하여 충청남도와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북어ㆍ다시마ㆍ대파ㆍ양파 등으로 육수를 만든다. 우려낸 육수에 바지락, 채 썬 당근과 애호박 등을 넣고 끓이다가, 밀가루로 반죽한 면을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하여 익혀낸 다음 양념장을 곁들인다.
바지락칼국수의 주재료인 바지락은 백합과의 연체동물로서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갯벌에 주로 서식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천광역시 선재도ㆍ충청남도 안면도ㆍ전라북도 줄포만ㆍ전라남도 강진만ㆍ경상남도 사천만 등지가 바지락의 주산지로 유명하다. 바지락은 지역에 따라 바지라기ㆍ반지락ㆍ반지래기ㆍ빤지락ㆍ빤지래이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바지락이라는 이름은 바닷가에서 바지락 껍데기가 켜켜이 쌓인 곳을 밟을 때, 바지락 껍질이 서로 부딪치며 나는 소리 때문에 ‘바지락’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혹은 바지락이 모여 있는 바닷가에서 밤새 바닷물이 출렁일 때에도 바지락들이 서로 부딪치며 나는 소리 때문에 ‘바지락’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도 한다.
바지락은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 ‘천합(淺蛤)’, 속명으로는 ‘반질악(盤質岳)’으로 소개되어 있다. 바지락은 살이 풍부하고 맛이 좋다고 하였다. 바지락을 껍데기째 삶으면 시원하고 감칠 맛이 나는 뽀얀 국물이 우러난다. 바지락 국물의 감칠맛은 글루탐산ㆍ베타인ㆍ이노신산ㆍ호박산 등의 아미노산 성분이 어우러져 내는 맛이다. 바지락은 예로부터 간의 기능이 약해서 황달기가 돌거나 쉽게 피로를 느끼는 사람을 위한 식품으로 권하였다. 이는 바지락에 다량 함유되어 있는 타우린과 함황아미노산 성분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의 월곶포구와 오이도해양단지를 지나면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에 속한 대부도까지 연결되는 총연장 12.7㎞에 이르는 시화방조제가 놓여있다. 1987년부터 1994년까지 7년에 걸친 공사기간을 통해 건조된 시화방조제는 2010년 새만금방조제가 완공되기 전까지 동양 최대의 방조제였다. 옛날에 섬이었던 대부도는 시화방조제의 건설로 연륙지화 되면서, 1990년대 이후 시화방조제와 대부도를 연결하는 관광코스를 많은 외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2005년 경기도는 대부도 방아머리 먹거리타운을 음식문화 시범거리로 지정하여 바지락칼국수를 비롯하여 생선회, 조개구이 등 이 지역에서 나는 다양한 수산물을 맛볼 수 있다.
다른 지방에서는 돼지고기국물을 잘 이용하지 않지만 제주지역에서는 돼지고기 국물을 이용한 국, 육개장, 찌개, 몸국 등의 음식이 많은 것도 특색이다. 제주에서는 많은 손님을 접대하는 잔치가 있을 때 돼지를 도축하여 고기는 편육으로 이용하고, 뼈와 부산물들은 국이나 순대 등의 재료로 쓰이는데, 고기국수는 이 돼지 삶은 국물을 국수의 육수로 사용한다.
고기국수는 기원이 오래 되지 않은 향토음식이다. 제주도에 건면을 생산하는 국수공장이 설립된 시기는 일제강점기 때였다. 그 시기는 물자도 부족하고 생활 형편이 좋지 못해 집안 경조사에 제대로 된 음식을 내놓을 수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돼지 뼈를 우려낸 국물에 국수를 말아 대접했는데, 1970년대 분식장려 정책에 힘입어 섬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 얘기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접대음식의 간소화 정책에 의해 결혼식에 참석한 손님들에게 고기국수나 멸치국수를 대접하면서 일명 ‘잔치국수’라고도 하였다. 돼지고기육수에 국수를 넣고 돔베고기라는 편육을 고명으로 얹어 낸 고기국수는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보통, 멸치나 쇠고기 육수에 소면을 사용하는 육지의 잔치국수와 달리 제주에서는 돼지고기육수에 대부분 중면을 사용한다. 원래는 돼지 삶은 국물을 사용했으나 요즈음은 돼지사골을 우린 국물만을 쓰기도 하고, 멸치육수를 일부 섞기도 한다. 섞는 비율에 따라 그 집만의 독특한 맛을 내며, 멸치육수를 섞으면 돼지의 누린내가 많이 없어진다고 한다.
국수, 돼지 앞다릿살, 돼지등뼈, 대파, 유부, 당근, 마늘, 소금, 후추
조리과정겨울을 나는 구룡포는 한적하다. 구룡포항 근처의 공용주차장을 지나면 우체국과 근대역사문화의 거리가 있고 그 너머에는 구룡포 공원이 있다. 이곳 전설에 의하면 오랜 옛날 비바람을 뚫고 열 마리의 용이 승천하다가 한 마리가 바다에 떨어졌다. 그 이후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곳이라 하여 구룡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용이 살던 곳이라 그럴까, 수산자원이 풍부하여 동해안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어른들은 이야기한다.
한때는 생태, 꽁치, 아귀, 오징어, 게가 구룡포 어판장에 넘쳐나던 시절이 있었다. 고단한 뱃일이 끝나면 수협 직원과 중매인들은 수협 앞에 모여 그날 잡은 생선과 국수를 넣고 얼큰한 탕을 끓여 먹었다. 그렇게 시작한 식당들이 하나둘씩 모여 구룡포의 명물인 모리국수 골목이 되었다. 누가 먼저 시작하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래도 개중에 가장 오래되었고 맛있다는 집이 있어 찾아가 보았다.
까꾸네 모리국수 이옥순(75세) 할머니는 오십 일 년째 모리국수를 팔고 있다. 스무 살에 경주에서 시집올 때만 해도 구룡포에 가면 쌀밥만 먹고 잘 살 줄 알았다. 아이를 낳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뱃사람들을 상대로 국수를 삶았다.
옛날에는 구룡포가 젤 살기 좋다고 그랬다. 오징어, 꽁치가 산더미루 치쌌어. 그때는 우리 같은 사람 가가 막 소쿠리로 갖다 먹고 그런 시절이었지. 일 끝나고 중매원(중매인), 바닷가 사람들이 오징어도 놓고, 비린 거 좋아하는 사람은 꽁치도 갔다 여코, 낙지도 여코, 뭐 골뱅이도 여코. 그때는 내가 재료를 준비하는 게 아니야. ‘까꾸 엄마 안주 해주소. 술안주 하게요. 국수 해주소. 배가 고푸요.’ 이래가주고 판잣집에서 시작했다.
큰 아이는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골목에 내어놓고 키웠다. 이름도 없이 변변치 못했던 식당을 찾는 사람들은 눈이 똘망똘망한 아이를 보고, ‘까꿍 까꿍’ 어르며 귀여워했다. 큰 아이가 태어나면서 살림도 피기 시작했고 까꾸네로 불리게 되었다.
원래 음식 이름도 없이 국수를 팔았거든. 그래 동네 중매원들, 수협 직원하고 한 솥에 여섯 명이 앉아가지고 ‘까꾸 엄마가 만들기는 하더라도 이름이 없으니까, 이거 여럿이 모디가('모이다'의 경상도 사투리) 먹으니까 모디국수라고 하자.’ 그랬거든. 처음에는 모디국수였는데 모리국수가 된 기야.
당시에는 1인분에 얼마를 팔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고된 노동을 하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푸짐하게, 맛있게, 빨리 대접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배가 들어와 어판장의 일이 끝나면 손님들이 몰려왔다. 그런데 연탄불에 음식을 조리한다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미리 생선을 손질해서 양푼에 담아 수북이 쌓아놓고 고무로 된 큰 그릇에 국수를 삶아 놓았다.
손님들은 사람 수가 많으면 큰 냄비를 선택하고, 수가 적으면 작은 냄비를 선택했다. 각자가 선택한 냄비를 연탄불이 있는 식탁에 얹어 놓고 손님들의 양대로 국수를 집어다가 넣어 먹는 방식이었다. 지금은 생태를 보기가 어렵지만, 그때는 생태가 많았고 물메기도 많았다. 얼큰하고 뜨끈한 탕에 국수를 넣고 먹으면 식사와 안주로는 그만이었다.
모리국수는 계절에 따라 재료가 조금씩 달라진다. 아귀와 아귀 내장, 새우, 홍합, 콩나물을 주로 넣고 여름에는 홍합 대신 게를 넣는다. 먼저 아귀와 내장을 삶다가 새우와 콩나물을 넣고 시원하게 육수를 만든다. 다른 냄비에는 납작 국수를 삶는다. 생선이 다 익을 무렵 고춧가루와 파, 마늘 등을 넣고 붉은 국물이 우러나올 때 삶은 국수를 합친다. 살살 저어 한소끔 끓이면 생선 육수와 국수가 만나 뜨겁고 걸쭉한 막을 친다.
모리국수에는 생각보다 많은 재료가 들어가 있다. 그리 맵지는 않다. 먹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뜨거운 국수보다 아귀를 먼저 공격해야 한다. 칼칼한 양념이 밴 부드러운 아귀로 건조한 식도를 달랜 뒤, 토실한 홍합과 내장을 먹는다. 어느 정도 식으면 홀홀 국물을 마시면서 국수를 먹으면 되는데 천천히 먹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리국수는 불어야 맛이 있기 때문이다.
재료를 끓여가 많이 넣으니 맛있지?
납작 국수는 불어서 호로록 넘어가야 맛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깜깜한 밤이 되었다. 할머니와 함께 세월을 견디며 자리를 지킨 골목식당, 작은 아이가 까르륵거리며 골목을 뛰어간다. 양은 냄비에 따듯한 기억을 담아두었다가 다시 찾으러 와야겠다.
까꾸네 모리국수 이옥순(75세) 할머니는 오십일 년째(2018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들이 도와주고 있지만,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손님들을 위해 모리국수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메밀 반죽 한 덩이를 유압기에 넣자마자 보슬보슬한 면들이 줄줄이 떨어진다. 거뭇한 면이 뜨거운 물에 닿자마자 휘휘 저어 채로 건진다. 재빨리 찬물로 옮겨 쭉쭉 당기고 손으로 감아 옆의 찬물 그릇으로 던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줌으로 마무리된 면들을 얌전히 그릇에 담는다. 그 손놀림에 거침이 없다. 메밀 면은 조리시간이 길어지면 안 된다. 따라서 면 뽑는 기술은 메밀 면의 맛을 좌우하는 비법 중 하나이다.
경기도 남한강 부근의 천서리에는 십여 개의 막국숫집이 있다. 천서리란 지명은 신래천(神來川)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천서리 막국수 촌의 메밀국수 맛은 집집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저마다 조리비법을 지니고 경쟁을 하다 보니 각각의 특징이 있다. 개인의 입맛에 따라 국숫집을 선택하면 된다.
여주 천서리에서 처음 막국숫집을 시작한 곳은 강계봉진막국수이다. 평안북도가 고향이었던 부친이 이곳에 막국수의 터전을 잡게 되었다. 입소문이 난 비빔국수의 붉은 양념장을 있는 그대로 비벼 먹으면 입안이 남아나질 않는다. 귀가 놀랄 매운맛이다.
홍원막국수는 명성만큼이나 대단하다. 식당에 들어서서 주문하자마자 5분 만에 음식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고 면이 불었거나 맛이 덜하지 않다. 그만큼 운영방식이나 조리법이 시스템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입맛 당기는 동치미 육수, 칼큼하게 매운 양념으로 맛을 내는 막국숫집도 있다.
윤희정(남, 60세) 씨는 막국수로 장사를 시작할 때, 다른 식당의 솥에 무엇이 들어있는지가 제일 궁금했다고 한다. 젊은 날, 맛을 내기 위해 남의 집에서 버린 쓰레기 봉지를 뒤져도 보았다. 물맛이 중요하다 하여 정수기로 동치미를 숙성시켜 보기도 했다. 마음이 앞설 때는 손님들이 식중독에 걸린 적도 있었다. 그때는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그러나 밤잠을 설쳐가며 메밀국수의 맛을 찾고자 보낸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가장 어려운 것은 매운맛을 찾는 거였어요. 단맛, 신맛, 매운맛 요거를 지켜야지. 손님 중 3분의 2가 비빔 막국수를 드세요. 양념장에 열네 가지가 들어가는 데 채소가 들어가기 때문에 자주 만들어야 하거든. 그거를 하다 보면 얼마나 땀이 나는지 몰라. 비빔국수는 먹고 나서 뒤끝이 깨끗하고 여운이 남지. 그게 맵지만 개운한 맛이야.
잘 달인 사골국과 익은 동치미 국물. 후루룩 면부터 건져 먹고 남은 국물을 들이켜 본다. 사골, 양지, 무, 배, 다시마, 좋은 소금.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재료가 전부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감히 맛을 낼 수 없는 비법은 그들의 땀이다. 툭툭 던져 넣는 채소와 고기 몇 점에는 그들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한 긴 시간이 담겨 있었다. 동의보감에는 메밀이 차가운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체내의 열을 내리고 소화를 도와 오랫동안 쌓인 체기를 없앤다고 기록돼 있다. 그래서인지 속이 답답한 날에는 그 집의 동치미 막국수가 생각난다.
■ 도움 주신 분
윤희정(남, 60) 씨가 '천서리막국수'의 명성을 30년째 지키고 있다.
봄내음이 콧가를 살랑거릴 무렵이면 서해안을 간다. 나른한 봄볕이 달궈지기 전에 서둘러 출산준비를 하는 바지락을 만나기 위함이다. 이 시기에는 조개를 좋아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칼국수를 즐기는 사람들도 서해안으로 몰려든다. 전국적으로 바지락이 생산되고 있지만, 서해안의 바지락이 제일 맛있다. 바지락은 껍데기가 두껍고 동그란 모양이다. 황갈색의 다양함도 그렇지만 줄무늬 또한 각양각색이다. 그 기하학적인 디자인을 감히 누가 따라 할 수 있을까.
필자가 처음 제부도를 갔을 때는 바닷길이 열리는 시간을 몰라 송교리 끝자락에서 허망하게 바다만 바라보아야 했었다. 제부도는 경기도 화성시에 속한 작은 섬(면적 0.98㎢)이다. "저비섬", "접비섬"이라고 불린 적도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조 중엽 이후에는 "제약부경(濟弱扶傾)"을 몸으로 실천하는 곳이라 하여 ‘제’자와 ‘부’자를 따서 제부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제부도로 가려면 송교리를 지나야 한다. 지금이야 제부도로 가는 길이 시멘트 도로로 포장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바다가 밀려 나가는 시간에 맞추어 갯고랑(조류의 통로)을 이용해야 했다. 발이 쑥쑥 빠지고 미끄러운 갯벌을 넘어지지 않고 걷는 것은 힘이 드는 일이다. 그래서 어린이는 업고 노인은 부축해서 건네주어야만 제부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제부(濟扶)’, 참으로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이름이다. 자연환경이 ‘효’를 선양(煽揚)한 셈이다.
제부도 모세의 길이 하루에 두 번 열리면 4~5m 깊이의 바닷물이 양쪽으로 빠져나간다. 그리고 바닷속에 잠겨 있던 2.3km의 길이 마법처럼 드러난다.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도 좋다. 바다에 깔린 붉은 우뭇가사리가 단품처럼 곱다. 바다 위에 떠 있던 작은 배들도 갯벌 위에 얌전히 앉았다. 제부도를 찾던 날은 운 좋게 하늘이 맑았다. 마치 바닷물이 하늘로 올라간 듯 갯벌 너머로 하늘이 푸르다. 제부도는 지하수 맛이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물맛도 음식 맛도 좋다. 갯벌체험 장소로도 유명하다. 갯벌이 깊지 않고 부드러워서 어린이가 놀기 좋고 조개와 게, 쏙, 고둥도 캘 수 있다. 섬은 북쪽의 자갈밭과 해수욕장을 제외하면 모두 갯벌이다. 20년 전만 해도 바지락을 캐서 팔았다. 바다에 들어가기만 하면 갯벌에 숨은 바지락을 한 양동이씩 캐왔다. 가슴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삽과 갈퀴, 양동이면 족했다. 낙지도 많았다. 지금은 바지락도 낙지도 그전만 못하다.
바지락은 해감(바닷물 따위에서 흙과 유기물이 썩어 생기는 냄새나는 찌꺼기)을 빼는 것이 중요한데 해감을 잘 못 하면 먹을 때 불편하기도 하고 국물맛이 텁텁해진다. 해감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흐르는 바닷물에 4시간을 담가두면 된다. 깨끗하게 조개껍질도 닦아야 한다. 물속에서 껍질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바지락 거리며 청명하다. 통통한 바지락으로 육수를 내는 것은 대파와 호박이면 된다. 바지락의 통통한 속살이 뽀얗게 부풀어 오를 때 쫄깃하게 잘 뽑은 칼국수를 살살 풀어 넣는다. 뽀얀 국물의 농도가 짙어지면서 칼국수 면발이 설설 끓는 국물 위로 올라온다.
먹는 순서가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먼저 그릇을 들어 국물을 맛보아야 한다. ‘이야~’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것이다. 깊은 바다에 풍덩 빠졌다가 떠오른 기분이다. 뜨거운 것을 잘 못 먹는 필자도 바지락칼국수는 작은 그릇에 덜어 먹지 않는다. 국물을 절반쯤 홀홀 마시면서 바지락 향기로 온몸을 적신 후 칼국수에 젓가락을 댄다. 이때 주의할 점은 바지락 향에 빠진 칼국수를 실컷 맛본 후 다른 반찬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바지락 때문에 밍밍해진 입안을 얼큰하고 시원한 김치로 달래고 싶겠지만 참는 것이 좋다. 그래야 바지락칼국수의 맛을 가슴에 남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혹 어떤 이들은 칼국수에는 김치를 싸서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바지락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맨 나중에 한 점으로 마무리하면 어떨까? 단무지가 나온다면 그것으로 대신해도 좋다.
바지락칼국수는 양념이 과하지도 않고 조리방법이 어렵지도 않다. 먹는 방법도 간편하고 가격도 저렴하다. 그러나 제부도의 바지락칼국수가 특별한 이유는 신선한 바지락과 좋은 물, 그리고 신비한 갯고랑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닌 제부도가 건강하게 유지되길 바란다. 멀리 갯벌체험을 하는 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 도움 주신 분
'중앙횟집' 김수남(남) 제부도에서 식당을 한 지 20년 되었다. 바지락 어획량이 점차 줄어드는 것을 걱정한다.
밀국수는 돌잔치나 혼인, 회갑 등 특별한 날에 먹던 음식이었다. 국수 재료인 밀가루가 고려 시대까지 중국에서 수입할 정도로 희소성 높은 곡물이었고, 조리 공정 또한 손이 많이 가고 복잡했기 때문이다. 밀국수가 우리의 식탁에 자주 올라오게 된 것은 한국전쟁 당시 외국 원조구호물자와 함께 대량의 밀가루가 반입되면서부터다. 한국전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밀국수는 허기를 달래는 대표 음식이었다.
구포는 낙동강 유역의 대표적인 물류 거점이었다. 그래서 구포는 각지에서 몰려든 물자로 장시를 이루었다. 이렇게 모인 물산이 낙동강을 따라 멀리 안동까지 오갔다. 특히 1905년 인근에 구포역이 생기고 밀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집하된 밀로 누룩을 빚어 막걸리를 만들어 마셨다. 그러나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주세령이 시행되어 더 이상 막걸리를 빚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누룩의 주 원료였던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기 시작했다.
구포에서 국수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으로 피난민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구포동으로 모여든 피난민들은 싸고 맛있는 구포국수로 허기를 채웠다. 1959년 10월에 20개의 국수 공장들이 ‘구포건면생산조합’을 결성하고 상표 등록을 해 구포국수를 생산했다. 1960~1970년대에는 구포에 국수 제면 공장이 30여 곳에 달하였다. 국수 제면 공장에서는 국수를 자체 생산하기도 했지만, 서민들이 배급받은 밀가루로 국수를 뽑아주고 삯을 받는 형식으로 ‘삯국수’를 제공하였다. 삯은 돈으로 지불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일정량의 밀가루로 대체하였다. 그 후 1980년 와서 구포국수는 부산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국수가 다른 곳에서도 대량 생산되고 유통되면서 구포국수는 1990년대 이후부터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구포국수는 구포시장을 방문한 이들이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음식으로 유명해졌다. 구포국수는 쫄깃쫄깃하고 짭조름한 면발이 특징인데, 국숫발을 낙동강 강바람과 해풍에 말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수를 만들려면 밀가루, 소금, 물을 혼합해 반죽한다. 면발 제조는 ‘반죽→압연[반죽 밀기]→절출[면 자르기]→건조→절단’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강도를 조정하면 굵기가 다른 소면, 중면 등의 국수가 만들어진다. 구포국수의 종류는 두 가지다. 두께가 얇은 ‘소면’은 익는 시간이 짧고 쉽게 불기 때문에 비빔국수나 낙지볶음·골뱅이무침 등 비벼 먹는 요리에 알맞고, 두께가 두꺼워 좀 더 쫄깃한 맛을 내는 ‘중면’은 주로 국물에 말아 먹는 용도로 많이 쓰인다.
조선 시대부터 구포는 곡물이 모인 곳으로 일제침략시기에는 제분·제면 공장이 성업하였다. 구포에서 국수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피난민이 6·25 전쟁으로 모여들면서부터이다. 20개의 국수 공장들이 1959년 10월 ‘구포건면생산조합’을 결성하고 구포 국수를 상표 등록을 하였고 국수 생산에 힘썼다. 1960~1970년대에는 구포에 30여 곳의 국수 제면 공장이 있었다. 1980년대까지 구포 국수는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구포 국수는 전쟁 기간의 무상 지원, 혼분식을 장려하는 정책으로 인해 많이 팔렸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국수가 대량 생산되고 유통이 되기 시작하면서, 1990년대 이후부터 구포 국수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구포 국수를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면 밀가루, 소금, 물을 혼합해 반죽한다. 면발 제조는 "반죽→압연[반죽 밀기]→절출[면 자르기]→건조→절단"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구포연합식품의 경우 "쌍롤러 두 쌍이 서로 맞물려 반죽을 눌러 붙이면서 넓고 긴 반죽 띠를 만들면, 일반 롤러 6개가 차례로 압축해 국수 면발을 쫄깃하고 탄력 있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롤러마다 부착된 핸들로 반죽의 강도를 조정하면 굵기가 다른 소면, 중면 등의 국수가 만들어진다."
구포 국수의 특징은 면발이 짭짤하고 쫄깃하다는 것이다. 이는 한강 이북에 살다가 내려온 피난민들이 면을 가늘게 뽑는 기술이 있었고, 면을 널어 말릴 때 바다와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염분을 함유한 바람이 면발에 닿아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부산은 피난민의 도시로 제대로 반듯하게 갖춰진 것이 없었고, 여기에 내동댕이쳐진 피난민들도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남자들이 실업난·주택난에 허둥거릴 때 집안의 아낙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이때 가장 손쉽게 좌판에서 팔 수 있는 것이 국수였다. 구포국수는 고향 음식을 닮았지만 어딘가 낯선 음식이었다. 이북식 메밀 냉면이 피난지에서 밀가루를 만나 밀면이 되었고, 밀양·합천·함안 출신 할머니들의 손을 거친 돼지국밥이 이제는 부산을 상징하는 음식이 된 것처럼, 구포국수 역시 한국전쟁기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화산토양으로 이루어진 제주도는 벼농사가 적합하지 않아 메밀, 조, 보리 등 잡곡의 밭농사가 행해졌고, 이를 이용한 조배기(수제비의 제주방언) 형태의 분식문화가 발달하였다. 꿩메밀칼국수는 이러한 제주의 풍토를 배경으로 탄생한 꿩고기 특유의 고소함과 메밀의 조화가 잘 어우러진 향토음식이다.
예로부터 제주도 서귀포 지역에서는 메밀 수확을 마친 늦가을이나 겨울에 마을 남자들이 함께 모여 꿩 사냥을 나가는 풍속이 있었다. 제주 사람들의 가을철 꿩사냥이 오래되었다는 것은 옛 문헌에서도 확인된다.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은 제주도 전 지역을 순력한 사실을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라는 화첩으로 남겼다. 그 중에 「교래대렵(橋來大獵)」이란 그림에는 1702년 10월 11일 지금의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橋來里) 일대에서 산짐승을 사냥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과 포획한 산짐승의 종류와 숫자를 열거하였는데, “꿩은 22마리를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의 꿩은 산란기인 봄부터 여름까지는 맛이 떨어지다가 가을로 접어들면 맛이 있어진다. 예전에는 겨울에 꿩을 잡으면 눈 위에서 그대로 얼렸다가 가슴살은 육회로 먹고, 다른 부위는 포를 떠서 건조시켜 육포로 만들어 먹었다. 그 외 꿩고기는 만두나 칼국수, 수제비 등을 만들어 먹었고 제주도의 특산품인 꿩엿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메밀은 추운 지방과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랄 뿐만 아니라 파종하고 나서 다른 작물보다 비교적 짧은 60∼100일이면 수확을 할 수 있는 곡물이다. 거친 환경과 특히 재해에도 강한 특성 때문에 메밀은 옛날부터 구황작물로 많이 재배되었다. 그런 까닭에 전통적으로 쌀이 부족했던 제주의 음식은 구황식품의 특징을 많이 지니고 있다. 제주의 메밀 재배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15세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제주목」편에 기장, 밭벼, 보리, 피와 함께 메밀을 재배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제주 한라대학교의 오영주 교수에 의하면 꿩메밀칼국수의 원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제주도 음식에서 칼국수는 없고 칼국이 있다. 보통 칼국수와 만드는 방법은 같지만 칼국수 보다 두껍고 넓으며 길이는 짧다. 즉, 육지의 수제비와 칼국수의 중간 형태이다. 먹을 때도 젓가락으로 먹지 않고 국처럼 숟가락으로 떠서 먹는다.
엄밀하게 말하면 꿩메밀칼국수는 ‘칼국수’가 아니라 ‘칼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꿩을 사냥하는 풍속이 없어지면서 농장에서 사육한 꿩고기를 사용하여 일부 향토 음식점에서 판매되는 정도이다. 면의 형태도 밀가루와 메밀을 혼합하여 만든 육지식 칼국수로 변하였다.
꿩메밀칼국수는 저지방 고단백 식품인 꿩고기, 칼슘이 풍부한 꿩뼈에서 우려낸 육수, 루틴 성분이 풍부한 메밀의 전분과 단백질 그리고 비타민이 풍부한 무 등으로 구성된 음식이다. 풍부한 단백질과 더불어 현대인의 영양에서 부족하기 쉬운 칼슘과 비타민을 보충할 수 있어 성장기의 어린이, 노약자 등에게 적합하다.
꿩, 메밀가루, 물, 계란, 깨소금, 무, 소금, 참기름, 청장, 파
조리과정
쫄면의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우선 1970년대 인천 중구 경동의 광신제면에서 비롯된다. 광신제면에서 냉면 면을 뽑다가 사출 구멍을 잘못 써서 굵은 면발이 나왔는데 버리긴 아까워서 이웃 분식집에 공짜로 줬고 분식집 주인이 이걸 고추장 양념에 비벼서 만든 게 쫄면의 시초라고 흔히 알려져 있다.
또 다른 설은 삼성 식품 공업사를 운영하며 1970년 3월경 인천광역시 남구청에서 면류 제조업 1호로 허가를 받은 정돈시씨에 대한 설이다. 정씨는 두껍고 질긴 면발을 개발하여 인천광역시 중구 인현동에 소재한 맛나당이라는 분식집에 납품하여 팔게 되었는데, 처음에 시식해 본 학생들은 너무 질겨 고무줄 국수라고 하는 등 반응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음식에 쫄면이라 이름을 붙이고 자극성이 강한 매운 양념을 개발하여 판매하다 보니 쫄면을 먹은 학생들이 강한 매운맛 탓에 자주 찾게 되어 인기 메뉴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당시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동에서 신포 우리 만두를 운영하던 박기남 회장이 직원들과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면발을 더욱 쫄깃하게 하고, 색다른 고추장 양념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쫄면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됐다. 현재 신포 우리 만두의 쫄면은 순수 국산 브랜드로 전국에 체인점을 갖고 있으며 1호점이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동에 있다.
1960~1970년대의 대한민국은 쌀, 보리가 식량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고, 공급량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기였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1969년 미곡 소비 억제를 위한 행정 명령을 고시해서 모든 음식 판매 업소는 25% 이상 보리쌀 혼식하고,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은 쌀을 원료로 한 음식 판매를 금지하는 등으로 1969년부터 1976년까지 분식 장려 정책을 펴게 되었다. 이때 분식을 주력으로 하는 분식점들이 생겨났고, 이 시기에 개발된 쫄면은 분식점의 가장 인기 있는 메뉴의 하나로 자리 잡아 짜장면과 함께 인천에서 유래된 음식으로 지금까지 사랑을 받고 있다.
쫄면, 콩나물, 오이, 당근, 양배추 4장, 초고추장 1/4컵, 소금(약간), 통깨(약간)
조리과정건진국수는 밀가루에 생콩가루를 섞어 반죽하여 삶은 면을 찬물에 헹구어 그릇에 담아 육수를 붓고 고명으로 얹어낸 경상북도 안동시의 향토음식이다. 국수가 지금과는 달리 옛날에는 귀한 음식이어서 안동지역에서는 불천위제사나 종가제사의 상차림에도 국수를 올렸으며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던 음식이었다. 별칭으로는 안동손국수, 안동칼국수라고도 부른다. 안동은 예로부터 건진국수과 함께 누름국수 등 이른바 ‘안동국시’로 통칭하는 국수문화가 크게 발달한 지역이다.
지금은 국수를 비롯하여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누구나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밀가루의 가격도 다른 곡물에 비해 싼 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지금과 사정이 크게 달라서 밀가루는 귀한 곡물이었고,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매우 귀한 음식으로 여겼다. 그 이유는 고려시대에 기록된 『고려도경(高麗圖經)』 제22권 향음(鄕飮)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라(고려) 안에 밀이 적어 모든 상인들이 송나라 수도의 동쪽 지방[京東道]에서 사온다. 그러므로 면(麵)값이 매우 비싸서 큰 의식[盛禮]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國中少麥 皆賈人販自京東道來 故麵價頗貴 非盛禮不用)
『고려도경』은 1123년 북송(北宋)의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 16대 예종(睿宗)의 국장(國葬)을 조문하기 위해 고려에 와서 머무는 동안에 고려의 다양한 제도와 문물, 풍속 등을 기록한 문헌이다. 『고려도경』의 언급과 같이 우리나라는 기후적으로 밀 재배에 적합한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밀가루는 귀한 곡물 취급을 받았다. 조선시대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혼례나 회갑과 같은 잔치 또는 큰 제사 때나 얻어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그렇다면 안동에서는 어떻게 국수문화가 크게 발달할 수 있었을까? 경상북도 안동시는 예로부터 퇴계 이황을 배출한 진보 이씨를 비롯하여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 의성 김씨, 재령 이씨, 풍산 류씨 등 유명 성씨의 명문반가(名門班家)와 종택이 즐비한 고장이다. 이들 가문 대부분은 향리에 전답을 경영하는 경제력을 지닌 지주인 동시에, 지방의 향반(鄕班)에 머물지 않고 대대로 급제자를 배출하여 중앙에 관료로 진출하는 등 ‘양반’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양반은 가문을 결속하기 위한 장치인 ‘봉제사(奉祭祀)’와 양반사회의 네트워크를 공고하게 이어주는 매개체인 ‘접빈객(接賓客)’을 중시하였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접대하는데 필수적인 것이 술과 음식이었고, 안동에서는 가문별로 정성을 담은 다양한 음식들이 개발되어 안동음식문화를 형성하였다. 안동의 국수문화 또한 이러한 배경 하에서 양반들의 음식으로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동의 국수문화를 양반계층에서 주도하였다는 사실은 조선시대 경상도 지역의 양반가에서 저술한 고문헌을 통해 확인된다. 1540년경 안동사람 김유(金綏)가 지은 조리서인 『수운잡방(需雲雜方)』에는 안동지역의 121가지 음식조리법이 수록되었는데, 그 중에서 고기국수와 녹두국수 등 국수 만드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1670년경 안동 인근 영양군의 안동 장씨 부인이 지은 『음식디미방』에는 세면법[가는 녹두국수], 탁면법[녹말국수], 싀면법[실국수], 난면법[계란국수], 차면법[메밀국수], 별착면법[밀가루국수] 등 무려 6종의 국수 조리법을 수록하고 있다.
밀가루를 깨끗이 체에 쳐서 녹두가루와 반씩 섞어 반죽하고 얇게 밀어 썰어 삶아서 찬물에 건져 아주 차게 되면 깻국이나 오미자국에 넣고 토장법처럼 한다.
위의 인용문은 『음식디미방』에 실린 밀가루국수에 해당하는 별착면법(別着麵法)의 내용인데, 재료의 차이를 제외하면 건진국수 만드는 법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내용 중에 토장법은 ‘녹두나화’라 하여 녹두가루를 중탕하여 익은 것을 채 썰어서 오미자국에 넣은 것을 착면이라 하는데, 그 방법에 준하라는 것이다. 별착면법은 귀한 식재료인 밀가루를 사용하기 때문에 조리법에 ‘별’자가 붙은 것으로 보인다.
밀가루, 생콩가루, 닭, 계란, 애호박, 소금, 석이버섯, 소금, 식용유, 국간장, 양념장(간장, 고춧가루, 다진 마늘, 다진 파늘, 청고추, 홍고추, 참기름)
조리과정칼국수는 조선시대 가장 오래된 한글조리서인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에서는 절면(切麵)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다. 절면은 주재료로 메밀가루를 사용하고 찰기를 주기 위해 밀가루를 섞고 있다. 이처럼 메밀가루를 주로 사용했던 조선시대의 칼국수는 오늘날의 칼국수와 재료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밀가루 구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밀은 주로 남부지방에서 재배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메밀은 흉년으로 기근이 들면 심는 구황작물로 척박한 땅에서도 재배가 가능했기에 우리나라에서는 밀가루 보다는 메밀을 이용하여 만든 국수가 일반적이었다.
조선시대에 국수는 양반들이나 먹을 수 있는 고급음식이었다. 일반 서민들은 평소에 국수를 쉽사리 먹지 못했지만, 6월 15일(유두)을 전후로 밀을 수확했던 까닭에 햇밀로 부침과 국수를 만들어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즉 한 여름에나 먹을 수 있었던 별미가 칼국수였으며 긴 국수 가락이 장수를 의미한다고 믿고 무병장수를 기원하였다. 칼국수에는 각 지역의 특산물을 장국재료로 이용했기에 그 종류도 다양하고 국수 맛을 살려주는 감자와 애호박은 여름에 풍성한 맛이 드는 작물이기 때문에 칼국수의 부재료로 애용되었다.
현재의 칼국수처럼 밀가루 반죽을 이용하는 조리법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 나타나 있다. “양밀가루를 물에 반죽할 때에 장을 조금 쳐서 주무르고 여러 번 친 뒤에 방망이로 얇게 밀어 잘게 썬다. 밀가루를 뿌려 한데 붙지 않도록 한 뒤에 끓는 물에 삶아내어 물을 다 빼버리고 그릇에 담은 뒤에 맑은장국을 끓여 붓고 국수장국에 얹는 고명을 얹는다.”고 하였다.
칼국수는 6·25전쟁 이후 대량의 밀가루가 미국의 구호품으로 들어오면서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값싼 밀가루의 보급과 정부의 혼분식 장려정책으로 조선 양반가 음식이던 칼국수가 국민음식으로 변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밀가루, 장국용멸치, 애호박, 건표고버섯, 실고추, 식용유, 설탕, 참기름, 간장, 소금, 고춧가루, 대파, 마늘, 깨소금
조리과정비빔당면은 삶은 당면에 비빔장과 고명을 얹어 즉석에서 비벼 먹는 부산의 향토음식이다. 먹을거리가 귀했던 한국전쟁 시절 고구마 또는 감자에서 추출한 녹말가루로 면을 만들어 먹었던 데서 유래한다. 비빔당면이 탄생한 지역은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에 위치한 부평시장이다. 피난시절 시장상인들의 허기를 달래는 음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부평시장의 명물 음식이 되었다. 비빔당면은 한국전쟁이라는 시간과 부평시장이라는 공간이 어우러진 부산의 현대사가 만들어낸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부평시장은 일제가 한반도를 병탄하던 해인 1910년 조선 최대의 공설시장으로 개설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각종 통조림을 비롯한 식료품을 노점상들이 팔기 시작하면서 ‘깡통시장’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부평시장은 1970년대 전후 전쟁에서 귀국하는 부대와 군인들을 통해 미군의 물품이 대거 반입되면서 베트남전쟁의 특수를 누리기도 했다. 부산의 근현대사에서 부산유통경제의 중심지였던 부평시장은 현재 풍물시장의 면모를 갖추고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먹을 것이 귀했던 피난시절, 부평시장 상인과 부산에 유입된 피난민에게 당면은 중요한 먹을거리로 등장하였다. 당면은 국수와 달리 삶아 놓아도 불지 않고 쫄깃한 식감을 유지하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당면을 미리 삶아 준비하였다가 현장에서는 별도의 조리과정 없이 즉석에서 바로 먹을 수 있는 비빔면의 형태로 정착하게 되었다. 특히 1950년 5월 부평시장 건너편 지금의 부산광역시 중구 창선동에 국제시장이 개설되면서 이른바 먹자골목이 형성되어 비빔당면을 파는 수많은 좌판과 상점들이 부산의 명물이 되었다.
2009년 부산광역시는 부산지역 향토 음식을 관광상품화하기 위해 13개 음식을 향토음식으로 지정하였다. 선정된 향토음식은 곰장어구이, 낙지볶음, 동래파전, 돼지국밥, 밀면, 붕어 찜복어 요리, 생선회, 아구찜, 장어요리, 재첩국, 해물탕, 흑염소 불고기 등이다. 비록 비빔당면은 향토 음식 지정에 포함되지 못했지만 유명세만큼은 절대 뒤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짧은 역사와 재료의 소박함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부산의 가장 서민적인 향토 음식으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초기의 비빔당면은 삶은 당면에 고추장 양념과 참기름만 얹은 단순한 형태였지만, 차츰 고명이 추가되면서 지금의 비빔당면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재료의 증감과 관계없이 즉석에서 바로 먹을 수 있는 향토 음식으로서 부산의 역사가 낳은 패스트푸드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당면, 김, 단무지, 당근, 시금치(또는 부추), 어묵, 양념장
조리과정우리나라의 향토음식은 본래 특정 지역의 자연적 환경과 문화적 배경이 만들어낸 고유한 음식이었다. 그러나 교통과 물류가 발달한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는 그 향토음식이 존재했던 지역을 넘어 다른 지역에서도 맛보거나 접할 수 있는 전국적인 음식으로 보편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그 지역에서 유독 전통을 이어오면서 그 지역에서만 맛 볼 수 있는 향토음식도 적지 않다. 그 중 부산광역시의 ‘부산 밀면’이 그러한 향토음식 중의 하나이다.
부산 밀면이 부산광역시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은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현대사에 속한다. 1950년의 6·25전쟁 과정에서 전시 피난 수도였던 부산은 전국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이 전한 각기 고유의 음식문화들이 어우러져 새롭고 독특한 부산 특유의 향토음식문화를 만들어냈다.
지금도 부산을 방문하는 외지인들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향토음식으로 부산 밀면을 비롯하여 자갈치시장의 곰장어구이, 서면의 돼지국밥, 부평깡통시장의 비빔당면, 남포동의 냉채족발, 구포 국수 등이 있다. 이 음식들이 바로 먹을 것이 귀했던 6·25전쟁 시기 피난민의 허기를 달래준 음식으로 생겨났거나 또는 피난민들이 고향에서 먹던 음식이 부산에서 새로운 향토음식으로 거듭난 것들이다.
밀면은 밀국수냉면의 약칭이다. 즉 일반적으로 알려진 전통적인 냉면에는 메밀가루로 만든 면을 사용하는 평양식 냉면과 감자 전분으로 만든 면을 사용하는 함흥냉면으로 알려진 함경도의 농마국수가 있다. 물론 경상남도 진주시에도 조선시대부터 진주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으로 냉면이 있었으나 이 또한 메밀로 만든 면을 사용한다.
이에 반해 부산 밀면은 이름 그대로 메밀이나 감자가루 대신에 밀가루를 재료로 사용하여 만든 냉면이다. 밀가루로 만든 면을 사용하게 된 유래는 흥남철수 등으로 인해 이북지역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전쟁 통에 메밀가루를 구할 수 없자 당시 미국에서 대량으로 원조하던 밀가루로 면을 만들어 냉면을 만들어 먹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의 잉여 농산물인 밀가루가 대량 유입되면서 부산지역에는 밀면 이외에도 지금의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일대에 국수공장들이 들어서면서 구포시장을 중심으로 이른바 ‘구포 국수’가 피난민의 허기를 달래준 피난음식이었다가 현재는 부산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부산 밀면을 누가 먼저 시작하였는지의 원조에 대한 논란은 분분하다. 그 중 하나는 함경남도 흥남시 내호리 내호시장에서 1919년부터 ‘동춘면옥’을 운영하였던 고 이영순 씨가 1·4 후퇴로 지금의 부산광역시 남구 우암2동에 ‘내호냉면’이라는 가게를 열고 밀면을 팔기 시작했다는 설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함흥 지역에서 피난 내려온 모녀가 부산에 냉면집을 열었는데, 메밀로 만든 냉면이 부산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자 밀가루로 만든 밀면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그 외에 진주냉면으로 유명한 진주시는 원래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였는데, 1925년 4월 경상남도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밀면이 전해졌다는 설이 전하기도 한다.
부산밀면은 비빔밀면과 물밀면의 두 종류가 있는데, 둘 다 양념고추장이 들어가는 것이 특징이고 삶은 계란과 깨, 오이, 노른자 지단, 수육 등이 고명으로 업어진다. 물밀면이 여름에 시원하게 즐겨 먹는 데 반해 겨울에는 따뜻하게 먹을 수 있는 온밀면도 있다 온밀면에는 잘 익은 김치를 고명으로 얹어서 얼큰한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부산 밀면은 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이후부터 부산이 공업화되는 과정에 맞물려 인구가 지속적으로 유입되면서 서민들에게 저렴하면서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선호를 받게 된다. 1970년대 전후로는 부산 여러 곳에 밀면집들이 생겨나면서 대중음식으로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지금도 부산에서 밀면집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 중에서 남구 우암2동의 내호냉면, 부산진구 개금동의 개금밀면과 가야동의 가야밀면, 연제구 거제1동의 국제밀면, 해운대구 우동의 초량밀면 등이 부산 밀면의 명소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칼국수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칼로 얇게 썰어서 장국에 끓인 음식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칼국수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자료가 없어 정확한 연대를 확정하기는 어렵다. 칼국수는 우리나라에서 한글로 표기된 조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1670년경 안동장씨(安東張氏) 부인이 저술한 『음식디미방』에 메밀가루를 재료로 만든 절면(切麵)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음식디미방』 이후 『주방문(酒方文)』과 같은 조선후기의 조리서에 소개된 칼국수의 주재료는 모두 메밀가루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칼국수 재료로 점성이 떨어지는 메밀가루를 사용한 것은 밀가루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123년(고려 인종 1) 북송(北宋)의 사신 서긍(徐兢)이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나라(고려) 안에 밀이 적어 모두 상인들이 송나라 수도의 동쪽 지방[京東道]에서 사온다. 그러므로 면(麵)값이 매우 비싸서 큰 의식[盛禮]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國中少麥 皆賈人販自京東道來 故麵價頗貴 非盛禮不用)”고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밀 재배에 적합한 지역이 아니어서 밀이 귀했고, 밀가루로 만든 국수도 오래전부터 귀한 음식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즘도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미혼 남녀에게 결혼의사를 타진할 때 “언제 국수 먹여 줄거야?”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 이 말은 긴 국수가락이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동시에 부부가 오래도록 해로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깃든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래서 국수는 옛날에는 혼례나 회갑잔치 같이 경사스럽고 특별한 날의 잔치에서나 맛볼 수 있는 고급음식이었다.
칼국수를 비롯한 밀가루 식품이 저렴하고 흔해 빠진 서민음식으로 대중화 된 것은 현대에 들어서의 일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미국에서 밀가루가 무상원조품목으로 대량 유입되면서부터 밀가루는 가난한 서민의 식재료가 되었고, 칼국수를 비롯한 분식문화가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칼국수뿐만 아니라 짜장면, 떡볶이 등 분식류가 전국음식으로 퍼지게 된 것도 미국에서 무상으로 원조한 밀가루가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녹차칼국수는 밀가루에 녹차가루를 넣어 반죽하여 만든 면을 멸치장국에 넣어 끓인 경상남도 하동군의 향토음식이다. 전통적으로 녹차의 산지인 하동군에 소재한 쌍계사를 비롯한 불교사찰에서는 다도(茶道)문화와 더불어 녹차를 이용한 다양한 음식이 발달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녹차칼국수였다. 사찰에서도 차밭을 만들고 찻잎을 따 차를 제조하였다. 사찰에서는 육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표고버섯과 다시마를 이용하여 우려낸 장국에 녹차가루와 밀가루를 섞어서 만든 면을 넣어 끓인 국수가 바로 녹차칼국수의 원형이다. 그래서 사찰에서 유래된 음식이라 하여 사찰국수로 불리기도 한다.
녹차칼국수의 주재료인 녹차에는 레몬의 5배에 해당하는 비타민C와 카테킨이라는 떫은맛을 내는 폴리페놀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는 식품이다. 카테킨은 몸 안의 유해한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강력한 항산화작용이 있어 심혈관 질환과 암 예방에 효능이 크고, 노화방지와 면역력 증강에도 도움이 된다. 또한 카테킨은 지방분해기능이 있어서 기름진 음식을 먹은 후 녹차를 마시면 지방질이 몸속에 축적되는 것을 방지한다. 중국인들이 주로 기름에 볶거나 튀긴 음식을 섭취하면서도 살이 찌지 않는 것은 차를 물처럼 많이 마시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에서 차의 효능이 드러난다. 또한 녹차에는 칼륨을 비롯한 아연, 철, 구리, 망간과 같은 무기질을 함유하고 있어 체내 신진대사에 여러 가지 유익한 작용을 한다.
제주 해안가에 있는 서귀포 지역은 사시사철 싱싱한 생선들이 많이 잡혀 생선을 이용한 음식이 발달하였다. 바다 생선을 이용해 육수를 내어 국수를 말아먹는 생선 국수도 그중의 하나이다. 생선 국수의 주요 재료는 서귀포 지역에서 많이 잡히는 옥돔, 붉바리, 장태, 볼락 등 흰 살 생선이다. 이 재료들은 비린내가 거의 없고 흰살생선 특유의 담백함이 뛰어나다는 점이 특징이다.
생선이라고 하면, 통상 물에서 잡아낸 모든 물고기를 호칭하는 보통명사이지만 제주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제주도에서는 ‘옥돔’만을 ‘생선’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그 외의 나머지 물고기는 이름으로 부르거나 ‘잡어’라고 하였다. 해산물이 풍부한 제주도에서는 옥돔 정도는 되어야 생선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워낙 다양하고 풍부한 생선이 잡히는 서귀포 지역의 특성상 고급어종에 속하는 도미 정도는 되어야 생선 취급받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제주도에 살던 어떤 사람이 서울에 사는 친척집에 놀러 갔는데, 생선을 사오라는 부탁을 받고 시장에 갔다. 그 제주도 사람은 시장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옥돔을 찾을 수 없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이다.
서귀포의 생선 국수가 바다 생선 국수라면 내륙에는 민물 생선 국수가 있다. 바로 충청북도 옥천군의 향토 음식인 생선 국수를 말한다. 팔도 중 유일하게 바다가 없는 내륙지역인 충청북도에서는 주로 하천이나 호수에서 천렵한 모래무지, 메기, 빠가사리 등 민물고기를 이용한다는 점이 바닷고기를 사용하는 서귀포의 생선 국수와 다르다. 옛날부터 옥천군의 주민들은 강이나 냇가에서 잡은 민물고기를 오래도록 얼큰하게 끓인 천렵국이라는 것을 먹었는데, 천렵국에 국수를 만 것이 생선 국수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옥돔, 국수, 계란, 파, 양파, 고춧가루, 깨소금, 다진 마늘, 간장, 소금, 후추
조리과정옥수수는 강원도의 척박한 산간 지역이나 농촌 지역에서 많이 재배하였다. 옛날에는 화전을 이용해 옥수수를 경작했으며 수확한 옥수수를 말려 두었다가 맷돌에 갈아 잡곡과 함께 쌀에 섞어 밥을 짓기도 하였다. 강원도 옥수수는 찰기가 많고 알이 굵기로 유명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이용됐다. 옥수숫대 전체를 베어 가축 사료로 이용하거나 옥수수를 잘 말려 강냉이밥, 강냉이 수제비 같은 주식과 옥수수 범벅, 옥수수엿, 옥수수 시루떡, 옥수수 국수(올챙이 국수)와 같은 별식의 재료로 활용하였다. 특히 올챙이 국수는 재미있는 이름으로 인하여 강원도의 유명한 향토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올챙이국수는 옥수수 앙금으로 끓인 걸쭉한 죽을 구멍 뚫린 바가지나 체에 내리면 바쳐둔 냉수에 떨어진 모양이 올챙이와 닮았다 해서 불린 이름이다. 올챙이 묵, 옥수수 묵이라고도 하고 올창묵이라고도 부른다. 노란색을 띠는 올챙이 국수에 멸치 육수를 붓고 열무김치 등을 얹어 먹거나, 양념장을 넣어 비벼 먹는다. 올챙이국수는 끈기가 없어 면이 쉽게 끊어지기 때문에 젓가락 대신 숟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올챙이 국수는 옥수수 특유의 달콤한 맛과 부드러운 질감으로 여름철 강원도 지역의 별미로 사랑받고 있다.
말린 옥수수 알갱이, 물, 열무김치, 양념장
조리과정메밀이 언제 한국으로 전해 내려왔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고려 고종 대의 『향약구급방』 에 기재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백제 유적지에서 탄화된 메밀이 발굴된 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에서는 5세기 이전에 전파되어 재배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메밀은 단백질이 많고 독특한 맛이 있어 국수, 냉면, 묵, 만두 등의 음식에 널리 쓰인다. 특히 메밀의 생육조건에 적합한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지방에서는 수확량도 많고 질이 좋아 메밀로 만든 막국수나 냉면이 향토음식으로 발달하였다.
메밀의 생산이 많은 강원도에서는 메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는데 처음에는 반죽을 만들어 칼로 썰어서 만들던 것이 차츰 기계화되면서 간단한 국수틀로 눌러서 만들었다. 국수틀은 거의 가정마다 설치하고 있어서 쉽게 만들 수 있는 국수 음식이었다. 메밀은 열을 가하면 쉽게 끊어져서 국수를 만들 때는 메밀가루와 밀가루를 7:3 정도의 비율로 섞는다.
막국수라는 이름의 유래도 '막 만들어서 막 먹는 국수'로 통용되지만, 주문 들어오자마자 ‘막 만든 국수’라는 의미에서 막국수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일제 강점기 쌀 수탈량이 증가하여 국내 식량 사정이 악화하자 일제는 그 해결책으로 만주에서 상당량의 메밀을 수입하였다. 그에 따라 메밀국수 식당도 번창하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메밀국수는 급속도로 사라져 갔는데 결정적 이유는 미국의 구호물자로 들어온 밀가루 때문이었다. 거기에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으로 값이 저렴한 밀가루 음식이 성행하였다.
춘천에서는 메밀국수의 명맥을 웬만큼 유지하였는데, 춘천이 강원 지역의 곡물 집산지였던 것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강원도의 메밀이 모이여 제분 산업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또 메밀국수 식당도 유지되었다. 1965년 춘천댐, 1967년 의암댐, 1973년 소양강댐이 완공되면서 춘천은 호반 도시란 낭만적인 이름을 얻었고, 서울 시민들의 하루 관광 코스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특히 1970~80년대 경춘선 기차를 타고 춘천을 방문하는 관광객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들은 춘천의 메밀국수를 맛보았고 이 메밀국수를 막국수라 부르는 것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춘천에 오면 막국수를 먹는 것이 당연한 일인 듯이 여겼고 춘천의 막국수는 닭갈비와 함께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메밀국수 사리, 오이, 김칫국물, 깨소금, 김치 썬 것, 고춧가루, 고추 양념
조리과정식습관의 변화로 인해 육류나 지방 섭취가 많은 현대인은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고 있다. 콩은 식물성 단백질이 풍부한 식품으로 콩이나 콩으로 만든 두부, 된장 등은 피로회복에 좋고 동맥경화 예방에 효과가 있다. 밭에서 나는 고기라 불리는 콩이야말로 현대인들에게 최고의 건강식품이라 할 수 있다.
콩국수의 기원이나 유래는 명확하지 않지만, 19세기 말에 편찬된 『시의전서』에 콩국수와 깻국수의 조리법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즐겨왔던 음식이라 짐작할 수 있다. 예부터 여름이 되면 서민들은 콩국수를 양반들은 깻국수를 즐겨 먹었다.
찬 성질을 갖고 있는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몸의 열을 내려주는 작용을 해주므로 한 여름 콩국과 잘 어울린다. 시원한 콩국에 국수를 말아 볶은 깨와 잘 익은 열무김치를 곁들이면, 여름철 기력을 충전시켜주는 소박하면서도 영양학적으로 균형 잡힌 음식이 된다. 콩국수는 여름철의 보양식이면서 별미 음식이기도 하다.
국수, 콩, 오이, 소금, 깨소금
조리과정금강의 지류인 보청천은 물고기가 많아 옥천군 청산면 사람들이 한여름에 천렵(민물고기 잡이)을 즐기던 장소였다.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이고 여기에 쌀을 넣어 어죽을 만들어 먹거나 국수를 넣어 먹기 시작한 것이 생선 국수의 유래가 되었다.
어탕국수라고도 불리는 충청북도 옥천군의 향토 음식인 생선 국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매운탕에 단지 국수만 말아놓은 것이 아니다. 붕어, 잉어, 메기, 누치, 칠어 등 여러 종류의 신선한 민물고기를 2~3시간 센 불에 끓인 뒤 중불에서 4~5시간을 더 끓이면 가시가 흐물흐물해질 정도가 되면서 비린내도 없는 육수가 만들어진다.
이 걸쭉한 ‘진국’ 국물이 옥천 생선 국수의 가장 큰 특징이다. 옥천 생선 국수는 일정 시간 생선을 끓인 후 가시를 체로 걸러내는 일반적인 방식과 달리 칼슘이 풍부한 생선의 뼈와 가시가 국물에 녹아들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끓여내 보양식으로도 손색이 없다.
옥천군 청산면에는 40년 전 선광집이라는 식당에서 처음 생선국수를 팔기 시작했는데, 그 후로 생선 국수를 전문으로 파는 가게들이 하나, 둘 늘어 이 지역을 ‘생선 국수 골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끓이는 사람의 오랜 시간과 정성이 담겨 있는 생선 국수는 옥천군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으로 지정되었고 지금은 지역주민뿐 아니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민물고기(모래무지, 메기, 빠가사리 등), 국수, 애호박, 미나리, 깻잎, 풋고추, 대파, 물, 마늘, 고추장, 소금, 후춧가루 약간
조리과정대구광역시는 경상북도 남부 중앙에 위치한 도시로 이곳 중심부에 '서문시장'이 있다. 서문시장은 과거 조선시대 3대 시장 중 하나였던 '대구장'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정기시장에서 상설시장화 되었다. 현재는 5,000여 개의 점포에서 3만여 명의 상인들이 자리하고 있다. 주거래 품목인 섬유관련 제품을 비롯해 다양한 상품과 먹을거리가 있어 하루 평균 4~5만여 명의 사람들이 방문하는 대구의 대표 전통시장이다.
'대구장'은 조선시대에 강경, 평양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큰 3대 시장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대구성 북문 밖에 개설되었던 소규모의 장으로 매월 2일과 7일에 장이 열렸다. 임진왜란 이후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되었고, 대구가 영남지방의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때 대구장은 감영이 있던 서문 밖으로 이전하였고, 서문 밖에 있는 시장이라는 의미로 '서문시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18세기 후반 대구 지역에는서문시장을 중심으로 주변에 13개의 향시가 개설되었으며, 장날이 되면 "서울, 평양, 의주, 원주, 충주, 공주, 전주, 광주 등지에서 활동하는 대상인들이 찾아와 상거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서문시장은 대구시가지가 확대되면서 1922년 공설시장으로 개설 허가를 받고, 지금의 위치인 대신동으로 이전하였다. 당시 대구 부윤(현재 시장)이었던 일본인 마쓰이 노부스끼(松井倍助)가 천왕당못이 있던 자리를 매입해서 시장을 만들었다. 1지구, 2지구, 3지구, 4지구, 건해산물상가 등이 이때 개설허가를 받았다. 이중 3지구는 1975년에 발생한 화재로 소멸되었으며, 현재 그 자리에는 주차타워와 소방서가 자리하고 있다.
대구는 우리나라 섬유 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950년대 서문시장의 취급품목 중 섬유관련 제품들이 많았는데, 서문시장의 전체 점포에서 40%에 해당하는 점포들이 섬유 관련 상품들을 취급했다고 한다. 또한 1960년대 섬유산업이 국가의 전략산업으로 육성되면서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직물도매업자들이 제조업에 참여하면서 섬유산업의 성장을 이끌기도 하였다.
대구사람들은 대구의 국수를 ‘누른국수’로 부른다. 누른국수는 경상도식 칼국수를 부르는 다른 이름으로 멸치, 다시마, 양파, 무, 대파 등을 넣어 우려낸 육수에 면을 넣고, 애호박과 배추를 넣고 끓인 다음 김가루나 지단 등의 고명을 올린 것이다. 대구의 누른국수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국내 대표적 제면 업체인 풍국면, 별표국수, 곰표국수, 소표국수 등의 회사들이 자리하면서 '국수의 본고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서문시장에는 300여 개의 국수가게들이 모여 국수골목을 형성하고 있다.
'구포시장'은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위치하며, 조선중기에 개설되었던 '구포장'의 명맥을 잇는 전통시장이다. 구포장은 매월 3일과 8일에 열렸던 오일장으로 1932년 상설시장이 되었고, 이때부터 상설시장과 오일장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현재 구포시장에는 675개의 점포가 조성되어 있고, 농산물, 수산물, 약재, 야채와 과일, 가축, 먹을거리를 파는 거리로 나뉘어 있다. 더욱이 장날이면 전국에서 모여든 상인들 골목골목 자리를 펴고, 500여 개의 노점들이 조성되고 있다.
구포는 조선시대 낙동강 수운과 동래를 잇는 포구로 각종 물산이 집산되는 곳이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고, 1682년 세곡을 저장하던 '감동창(甘同倉)'이 설치되면서 구포의 상권은 크게 성장하였다. 구포장이 언제 개설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동국문헌비고』(1770)에는 “구포장은 구포 안쪽으로 들어오는 공터와 골목에서 매월 3일과 8일 열렸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때부터 이미 구포장이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포시장은 조선시대에 개설되었던 구포장의 전통을 잇는 시장이다. 구포장은 1932년 당시 구포의 면장이었던 장익원이 습지를 매립해 마련한 터에 목조로 건물을 만들면서 상설시장이 되었고, 이때부터 '구포시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1972년 구포시장번영회가 만들어지면서 곡물・생선을 취급하는 선어구와 곡물구가 조성되었다. 현재 구포시장은 노후화된 시설을 현대화사업을 통해 정비하였고, 2011년 문화관광형 시장을 선정되면서 시장의 이름도 ‘정(情)이 있는 구포시장’으로 바꾸고 시장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구포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먹거리는 '구포국수'이다. 구포국수는 강바람과 바닷바람에 말려서 면이 쫄깃하면서 짭짤한 맛이 특징이다. 한국전쟁 때 구포동으로 모여든 피난민들이 저렴하고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에 의해 구포국수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밀면은 6·25 전쟁 시기에 탄생한 음식이다. 밀면의 시작은 "1·4 후퇴로 함경남도 흥남시 내호에서 동춘면옥이라는 냉면집을 하던 정한금 씨가 친정어머니와 함께 임시수도 부산으로 피난와 피난촌에서 '내호냉면'이라는 냉면집을 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전쟁으로 메밀을 구하기가 어려웠고, 부산 사람들에게 메밀면은 익숙지 않은 재료였다. 이에 당시 미군의 원조로 풍부했던 밀가루에 전분을 넣어 쫄깃한 면을 만들었고, 이것이 밀면의 시작이라고 한다. 처음에 밀면을 '경상도 냉면'이라 했다.
이렇듯 함흥냉면은 밀면의 뿌리이다. 고향인 함흥에서 먹던 음식을 피난지 부산에 맞게 변형하여 새로운 음식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고 냉면이 경상도 지역에 없지는 않아, 조선시대부터 서부경남지역의 진주, 사천에는 진주냉면이 존재했다. 이 냉면은 경상도 고유의 음식으로 해물 육수와 육전을 사용했다.
밀면은 유사한 음식인 냉면에 비해 가격이 비교적 저렴하다. 밀가루를 사용했기에 그렇다. 질긴 메밀 냉면 면발을 먹기 힘들어 한 부산 사람들에게 밀면은 크게 인기를 끌었다. 밀면의 굵기는 쫄면과 소면 중간 정도이고, 가게에 따라서는 면의 굵기를 소면급으로 하거나 쫄면급으로 하는 등 각기 다르게 한다.
현재 부산에는 많은 밀면 전문점이 성업 중이고, 여름철마다 부산 근처의 지방에서 많이 찾는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밀가루에 전분이 뿐 아니라 쑥즙을 넣은 쑥밀면도 있다. 냉면에 비해 밀면은 국물에 짠맛과 단맛이 강하고, 돼지고기 누린내를 잡기 위해 한약재를 넣기 때문에 약재 향기가 나는 경우도 많다. 밀면의 대중성은 부산과 경남의 웬만한 거리에는 밀면집이 있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부산 출신의 사람들에게 밀면은 고향을 생각나게 하고, 타지에서는 먹고 싶어도 못 먹는 향토음식이다. 추석이나 설날은 밀면 가게의 대목인데 그 이유는 외지에 나갔던 부산 사람들이 고향 온 김에 먹고가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냉면은 북한이 원조이지만 밀면은 부산의 기후나 음식문화에 맞게 변형된 음식으로, 부산의 향토음식이 되었다.
비빔당면은 먹을거리가 없는 6·25 전쟁 시절에 , 가루를 감자나 고구마의 녹말로 내어 국수처럼 먹은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면 자체가 당면은 국수와는 달리 부풀어도 쫄깃하게 씹을 수 있고, 적은 양으로도 포만감을 느끼게 해 주어 당면은 피난 시절부터 주요한 먹을거리가 되었다. 부평 시장에서 1963년부터 비빔당면을 팔고 있는 서성자에 의하면, "깔끔한 맛을 좋아하던 시어머니가 잡채의 느끼한 맛이 나지 않는 당면 요리를 구상하다가 비빔당면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또한 "초기에는 좌판에서 당면에 참기름과 고추장 양념만 얹은 소박한 형태로 출발하였지만, 조금씩 고명을 추가해 지금의 비빔당면의 형태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비빔당면을 만드는 방법은 당면을 미리 삶아 말아 놓고 뜨거운 육수에 한 번 풀어서 그릇에 담은 다음, 시금치·어묵·단무지·김 가루 등의 고명을 당면위에 놓고 양념장을 참기름·고춧가루·깨소금 등으로 만들어 얹으면 완성된다
혹자는 조리법과 맛이 비빔당면은 부산의 기질과 닮은 점이 많다고 하는데, 이는 급한 성미의 부산 사람이 선호하는 매운맛을 첨가한 것을 보고 부산 기질이 잘 반영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조리법이 간단한 비빔당면은 즉석에서 빨리 만들수 있는 특성과 당면의 미끄덩거리는 속성상 오래 입속에서 씹기보다 빨리 삼키게 된다는 점에서 그 특성이 어느 음식보다 빠르게 먹게 된다는 것이다. 당면 음식은 먹을 거리가 부족한 피난 시절, 시장에서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쉽게 포만감을 느끼면서도 빨리 만들어 빨리 먹을 수 있어 대표적인 음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면이 곧 잡채라고 여겼던 사람들에게 국수도, 잡채도 아닌 비빔당면은 처음 경험해 보는 맛이었고 바로 즉석에서 해 주는 조리적 특성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지금의 당면집은 국제 시장과 부평 시장 일대에 많이 있으며, 일본 여행객과 타 지역 사람들에게 더 인기를 끌고 있는 음식점이 되었다.
창선동 먹자골목은 일명 ‘약국 거리[과거 약국들이 많이 모여 있던 장소라서 붙여진 이름]’라 불리는 위치인 아리랑 거리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북적거리며 좁은 골목길에 매대로 인한 통행이 불편해도 이 조차도 독특한 먹자골목의 풍경으로 바라보며, 삶의 활력을 찾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곳은 장사를 하루 중 오후에 시작한다. 오후가 되며 오전에는 깨끗하게 비어 있던 골목이 한 떼의 아지매들이 몰려들어 단지 매대와 앉은뱅이 의자만을 놓고 장사를 시작, 야간이면 장사가 끝나 골목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모든 매대가 사라지고 빈 공간이 된다.
비빔 당면은 창선동 먹자골목의 먹거리 가운데 가장 특색 있는 먹거리이다. 비빔 당면은 매운 맛과 당면의 조화가 독특한 느낌을 준다. 또한 부산항 특성을 반영하는 어항(漁港)에서 유부주머니는 어묵과 일제 강점기의 흔적을 보여어 역시 부산 다운 향토 음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독특성에 기반하여 창선동 먹자골목은 기무라 타쿠야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히어로」의 배경이 되었고, "「1박 2일」, 「런닝맨」" 등에서 먹거리 투어 코스로 부산을 대표하여 소개되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부산 시민들의 추억의 공간으로 부산 시민들에게 인식되던 이곳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로까지 부산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공간으,독특한 먹거리 공간으로 인식되어 그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주변의 "BIFF 거리, 깡통 시장, 자갈치 시장 등"과 연결되어 있어 사람들에게 이곳은 부산 투어를 하기에 좋은 곳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
6·25전쟁 당시 피난민들은 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내려와 터를 잡고 살았다. 전쟁통에 식량배급이 힘들었던 그 당시 미군의 원조 물품은 전통 음식문화를 통째로 뒤집어 놓았다. 서민들의 전쟁음식이 이제는 모두가 즐기는 음식으로이어져 가고 있다. 전후음식을 파는 식당은 저마다 수십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들은 전쟁통에 먹을 것이 없어 대충 있는 재료를 휙휙 쓸어담아 먹은 게 시초인 음식들이기도 하다.
칡은 생명력이 강한 식물이다. 산기슭의 양지에서 자라나는 식물로, 유난히 강한 생명력 덕분에 옛사람들이 보릿고개를 버틸 수 있도록 도와준 구황작물이다. 혹독한 한반도의 겨울 추위 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고 대부분의 줄기가 살아남을 정도이니, 식재료를 얻기 힘들었던 산간지역에서 칡은 배고픔을 달래주는 중요한 자원이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간지역인 강원도에서는 이 칡을 활용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었고, 그 대표적인 음식이 영월의 칡국수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칡은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였기 때문이다.
산에 넓게 퍼져 덩굴처럼 자라는 칡은 신발을 만들거나 가마니를 짜는 재료로 사용하던 식물이다. 산간에는 흔하게 널려있지만 약재로도 쉽게 다룰 수 없는 재료였기 때문에 칡을 식용으로 인식한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칡을 식재료로 인식하고 먹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라고 전해진다. 세종대에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 대신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하는데 일본에 다녀온 통역인 윤인보와 윤인소가 일본인들이 흉년에 칡뿌리를 먹는 것을 보고 와 이를 활용해보자고 제안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왜통사 윤인보 등을 시켜 백성에게 칡뿌리 캐먹는 법을 전수시키다.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2월 22일 癸未 3번째기사)
또한 사료에 따르면 이를 식재료로 활용하게 된 것은 성종 대에 칡뿌리의 껍데기를 벗겨 분말로 만들어 식재료로 활용하는 왜인들의 모습에 착안해 조정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면서부터라고 한다. (한명회가 칡을 채취하여 기근에 대비하게 할 것을 아뢰다, 성종실록 6권, 성종 1년 6월 8일 을묘 3번째기사) 칡이 식재료로 활용되는 과정은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어떻게든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하고자 노력했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칡은 뿌리에 녹말 성분이 많고 소화가 잘 되어 떡이나 국수를 만들어 먹기에 좋은 재료이다. 밀가루가 귀하던 시절에는 칡을 가루로 내어 국수를 만들었으나 밀가루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밀가루를 섞어 식감을 살린다고 한다. 밀가루와 칡가루를 적정비율로 섞어 쫄깃해진 면에 멸치로 육수를 낸 국물과 김, 달걀, 부추, 감자 등의 고명을 올려 맛과 색감을 꾸며낸다. 취향에 따라 김치, 청양고추, 다진 양념 등을 넣어서 먹으면 얼큰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칡에 함유된 녹말 때문에 국물이 걸쭉해지는데 이 또한 칡국수의 또 다른 매력이 된다. 영월군의 유명 관광지인 고씨동굴 근처에는 칡국수를 판매하는 식당들이 모여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강원도의 음식에는 강원도의 자연환경이 그대로 담겨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척박했던 환경에서 나름대로 영양을 보충하고자 노력했던 모습이 음식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다소 투박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소박함과 구수함은 칡국수 뿐만 아니라 다른 강원도 음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소박하고 구수한 매력의 강원도의 음식들은 이제 시대가 바뀌어 건강을 위해 일부러 찾아 먹는 음식이 되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는 ‘강화국수’라는 식당이 있다. 강화국수는 1950년대에 문을 열어 60년 넘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강화군에서 가장 오래된 국숫집이다. 강화국수의 창업주는 최선희 씨이다. 최선희 씨가 국숫집을 차렸던 곳은 인항여객의 차부였다. 차부는 버스 종점을 의미한다. 당시 인항여객이라는 버스 회사가 인천과 강화를 오가는 버스를 운행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강화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래서 ‘차부국수’라고도 불렸다. 버스 기사들과 승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입소문이 퍼져 늘 손님이 북적였다. 최선희 씨는 국수를 만들고, 남편은 배달을 하면서 부부가 열심히 노력했다.
1998년 강화 터미널이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강화국수도 경찰서 인근으로 이전하였다. 옮겨갔던 건물 2층에 ‘수정다방’이라는 다방이 있었는데 그 영향으로 ‘수정국수’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2016년 강화국수가 있던 건물이 팔리면서 한 차례 더 이전하여 현재의 위치로 정착하게 되었다. 현재는 최선희 씨의 며느리 차윤희 씨가 대를 이어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최선희 씨 부부가 그러했듯, 차윤희 씨는 국수를 만들고 남편 이상돈 씨는 배달을 돕는다. 차윤희 씨가 최선희 씨의 손맛을 잘 이어받은 덕택인지, 긴 세월 동안 몇 차례 자리를 옮겼는데도 강화국수를 찾는 이들은 끊이지 않았다. 국수의 맛을 잊지 못하는 단골손님을 비롯해 강화군의 주민은 물론이고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온다. 입소문을 타고 방송 프로그램에도 소개되면서 강화군의 명물로 부상하며 명실공히 강화군 맛집으로 자리 잡았다.
강화국수의 대표 메뉴는 비빔국수와 잔치국수이다. 삶자마자 찬물에 여러 차례 헹궈서인지 면발이 탱글탱글하다. 잔치국수는 멸치로 육수를 내어 깊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달걀 지단과 김, 호박 등의 고명이 국수와 조화를 이룬다. 잘 익은 김치와 함께 후루룩후루룩 입 속으로 넘기면 절로 식욕이 돋는다. 비빔국수도 인기가 좋다. 강화국수만의 ‘비빔국수 맛있게 먹는 법’이 따로 있다. 그냥 먹어도 매콤한 양념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맛 좋은 국수지만, 반쯤 먹다가 따뜻한 멸치육수를 부어 먹으면 감칠맛이 좋은 국물 국수가 된다.
비빔국수를 시키면 두 가지 스타일의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맛있고 특별한 국수를 오래도록 선보이며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창업주 최선희 사장 때부터 이어져 온 손님에 대한 ‘친절’이 강화국수를 있게 한 배경인 듯하다. 손님에게 베푸는 친절과 푸근한 인심이 국수의 맛에 더해져 찾아갈 수 밖에 없는 맛집이 된 것 같다. 그 전통과 역사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기원하며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방문한다면 강화국수에서 국수 한 그릇 맛보며 깊고 한결같은 맛을 느껴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