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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인물들이 보여주는 ‘나라를 빛내는 방법’

지역인물들이 보여주는 '나라를 빛내는 방법'
나라를 빛내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답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나라를 위해 힘써온 인물들이 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오늘을 우리에게 선물해준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

첫번째

왕과  나라를  지킨  자들

고양 한천두 이미지

고양 한천두

한천두(韓天斗)는 임진왜란 중 종묘사직의 위패를 지킨 공적을 인정받아 위성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한천두는 관직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괄의 난 당시 인조를 호위하고, 정묘호란에도 임진강을 방어한 공으로 호성공신으로 책록되었으며 불천위의 예전이 내려져 현재도 후손들이 그를 모시고 있다.

부산 정발 이미지

부산 정발

정발(鄭撥)은 조선시대 무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577년 무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여 선전관, 해남현감·거제현령, 비변사 낭관, 위원군수·훈련원부정을 역임했다. 1592년 부산진첨절제사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부산진을 지키다 순절했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 동래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서울 박세채 이미지

서울 박세채

박세채(朴世采)는 조선후기 소론을 이끌었던 문인이다. 그가 살았던 조선 후기는 당쟁이 점차 격화되던 시기로 두 차례의 예송(禮訟) 논쟁이 벌어졌던 때이기도 하다. 박세채는 율곡 이이의 학문을 계승한 문인으로 예송 당시 서인의 학문적,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공주 김종서 이미지

공주 김종서

김종서(金宗瑞)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33년 야인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수양대군에 의하여 1453년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되고 대역모반죄라는 누명까지 쓰고 효시됨으로써 계유정난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두번째

지식으로  나라의  내실을
다지다

서산 유방택 이미지

[천문학자] 서산 유방택

유방택(柳方澤)은 고려 후기의 관리이자 천문학자이다. 사사오경을 공부하는 경학(經學)과 천체 관측에 능했다. 조선 개국 직후인 1395년(태조 4) 태조는 신료(臣僚)들에게 명하여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 정도 크기의 돌에 1,467개의 별을 새겨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라는 「석각천문도」를 제작하게 하였다. 「석각천문도」에는 제작자 12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의 이름은 문필가 권근(權近)‧서예가 설경수(偰慶壽)와 함께 첫 번째로 등장하고 있다.

서울 김정호 이미지

[지리학자] 서울 김정호

김정호(金正浩)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지도인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대동여지도』의 역사적 명성에 비해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자신이 편찬한 지도를 보다 많은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목판에 지도를 새겨 넣었으며, 다양한 자료들과 과학적인 방법을 연구하여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정읍 권승욱 이미지

[한글학자] 정읍 권승욱

권승욱(權承昱)은 고창고보 스승인 정인승의 권유로 조선어사전 편찬에 참여하게 된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때문에 1년 옥고를 치르지만, 포기하지 않고 1957년 한글날 『조선말 큰사전』 여섯 권이 발간될 때까지 조선어사전 편찬에 헌신하였다. 서울시와 한글학회는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을 세워 일제강점기에 목숨을 걸고 우리말·우리글을 지켜낸 조선어학회 선열들을 기리고 있다.

부산 손진태 이미지

[국사학자] 부산 손진태

손진태(孫晋泰)는 부산 사하구 출신 인물로 1919년 구포장터 3·1만세운동에 참가하여 4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해방되고 서울대 사학과 교수, 서울사범대학장, 서울문리대학장을 역임했다. 6·25전쟁으로 삼각산에 은신했으나 발각되어 납치 북송되었다. 북한에서의 특별한 활동행적이 확인되지 않으며 1960년대 중반 별세했다. 그는 계습사관을 배격한 신민족주의 사학자이자, 한국 민속학분야에서 최초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학문업적을 남겼다.

세번째

붓으로  문화를 선도하다

충주 김생 이미지

[서예가] 충주 김생

김생은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평생을 글쓰기와 불교에 심취한 남북국시대 서예가이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여산폭포시」, 「창림사비」 등의 작품을 낸 서예가이다. 고려 때 사신 홍관(洪灌)이 송(宋)에 갔을 때 김생의 글씨를 보이자 사람들은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인 왕희지의 글씨와 견주어도 결코 손색이 없다고 김생의 명필을 극찬하였다.

서울 이병직 이미지

[서화가] 서울 이병직

이병직은 근현대기에 활동한 서화가이다. 호는 송은(松隱) · 고경당(古經堂)이다. 1896년 강원도 홍천에서 출생하여 주로 경성에서 활동하였다. 내시(內侍) 가문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관련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병직은 김규진의 영향을 토대로 사군자에 주력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묵죽을 잘 그렸다. 그리고 서화이론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서화감식으로도 유명하였다.

강릉 허초희 이미지

[시인, 화가] 강릉 허초희

허초희(許楚姬)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경번(景樊), 당호는 난설헌(蘭雪軒)으로, 강릉 애일당에서 태어나 초당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초당 허엽(許曄), 오빠가 허봉(許篈), 남동생이 허균(許筠)으로 명문가문 출신의 여성이다. 조선여성으로 이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인물로 당대에 이미 중국·일본까지 명성이 자자했던 여류시인이다.

대전 호연재 김씨 이미지

[시인] 대전 호연재 김씨

김호연재(金浩然齋)는 고성군수를 지낸 김성달(金盛達)의 딸이며, 소대헌(小大軒) 송요화(宋堯和)의 부인이다. 호연재는 〈청룡도(靑龍刀)〉와 〈무후(武候)〉에서 때를 못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청룡도와 제갈량의 삶을 통해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사대부의 기상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자신이 여자로 태어나 사회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한하며 사회와 정치 현실에 참여하고픈 소망을 간접적으로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족과  문화를  모두
지켜내다

무안 초의선사 이미지

무안 초의선사

초의(草衣) 선사는 15세에 운흥사(雲興寺)에서 출가해 19세에 대흥사(大興寺)의 완호스님에게서 구족계(具足戒)와 초의라는 호를 받은 승려이다. 초의 선사는 학문에 두루 통달했으며 시(詩)·서(書)·화(畵)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의 나이 24세 때 그보다 24세 더 많던 강진 유배 시절의 다산 정약용을 만나 시문과 서화, 그리고 차를 매개로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다.

당진 김대건 이미지

당진 김대건

김대건(金大建)은 조선 후기 병오박해 당시의 신부이다.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이기도 하다. 1846년 5월 서양성직자 잠입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되었다. 이에 정부는 그에게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선고하고 처형하였다. 김대건의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여에 지나지 않지만 투철한 신앙과 신념으로 성직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진주 강상호 이미지

진주 강상호

강상호(姜相鎬)는 진주 천석꾼 양반가에서 태어났지만 당대에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의 인권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진보 지식인과 백정들이 힘을 합쳐 형평사를 만들어 백정의 인권을 위해 신분을 철폐하고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였다. 강상호는 가난에 시달리다 숨을 거두지만 그의 장례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백정들의 애도 속에 치러진다.

서울 계훈제 이미지

서울 계훈제

계훈제(桂勳梯)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권력에 저항했던 사회운동가다. 그는 우리 민족의 현실과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회장으로서 학생운동을 주도하였고 5.16군사정변 이후로는 군사독재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등 평생토록 권력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던 계훈제는 재야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이다.

우리는 그 시절 어떤 지역인물이었을까?

우리는 그 시절 어떤 지역인물이었을까?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과거에도 우리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가 만약 그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나랏일이라면 주도적으로 나서는 사람이거나, 자신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공부에 힘썼을 수도 있다. 아니면 자연을 보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거나, 신앙을 통해 답을 찾아내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선택지를 따라 나와 비슷한 삶을 추구한 지역인물을 알아보자.

나라의 부강함이 곧
나의 부강함이다.

늘 우리 곁에 있는, 지역인물

늘 우리 곁에 있는, 지역인물
우리 지역에서 태어난 지역인물들은 각자의 할 일을 마치고 그들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갔다.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방면으로 힘쓰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 매일 걷는 길에 그들의 이름을 따서 이름 붙이거나, 그들의 업적을 동상, 시비, 기념탑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그들이 남긴 유물을 한곳에 모아 박물관과 기념관을 건립하여 그들의 정신을 계속 이어 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사가정
공원

사가정공원은 2005년 4월 13일 개장한 서울 용마산 자락에 있는 공원이다. 공원의 명칭은 용마산 부근에서 거주했던 조선 전기의 문인인 서거정 선생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그의 호를 따서 지어졌다. 그의 대표적인 시 4편을 골라 시비를 만들어 설치해 산책하면서 명시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문 조각 시비인 ‘독좌(獨坐)’에서는 관가에서 퇴근하고 집에서 한가롭게 지내는 서거정의 여유로움을 볼 수 있으며, 오동잎 조각 시비인 ‘수기(睡記)’는 서거정이 여름날 낮잠을 자다가 빗소리에 깬 후의 순간적인 느낌을 형상화한 것이다. 책 조각 시비인 ‘한중(閑中)’에서는 한가로움을 사랑한 서거정의 삶을 엿볼 수 있고, 붓 조각 시비 ‘춘일(春日)’에서는 이른 봄의 풍경과 계절적 변화에 대한 서정적 심회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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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재연로

어재연로는 경기도 이천시 중리동 231부터 이천시 창천동 147-7까지 이러지는 길이 약 578m의 길이다. 프랑스와 미국에 맞서 싸워 나라를 지킨 어재연 장군의 이름을 반영했다. 어재연은 조선 말기의 무신으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선봉장이 되어 과성진을 수비했다.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그를 진무중군에 임명하여 광성진을 수비하게 했다. 어재연 장군은 임금의 명을 받아 6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미군은 다양한 대포로 사격하며 총공세를 퍼부었으나 어재연 장군 부대는 물러서지 않고 돌과 대포알 등을 던지며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슬프게도 어재연 장군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었지만, 우리들은 그의 이름을 딴 도로를 만들어 그를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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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남
박물관

규남박물관은 2011년 11월에 개관한 조선 후기 호남의 4대 실학자 중 한 명인 규남 하백원을 기리기 위한 박물관이다. 규남 하백원은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에서 태어났다. 벼슬을 하던 몇 년을 제외하고는 일생의 대부분은 고향에서 자승차, 자명종, 방적기 등 다양한 발명품을 만들며 살았다. 또한 만국지도, 동국지도를 그리는 등 실용학문을 탐구하며 지냈다고 한다. 규남박물관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285호 ‘하백원의 만국전도와 동국지도’를 비롯하여 서화, 간찰, 전적, 인장 등 940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은 전시실인 천공관(天空館), 사당인 영당(影堂)과 사무실인 규남재(圭南齋)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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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
기념관

주기철 목사 기념관은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의 신앙정신, 애국애족 및 독립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기념관이다. 주기철 목사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항일운동을 펼치다 순교하였으며 그의 순교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기 위해 2015년 목사의 고향인 웅천에서 개관했다. 주기철목사기념관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은 제1전시실인 면류관, 임마누엘 영상실(다목적홀)이 있으며 2층에서는 제2전시실인 나라사랑, 기획전시실, 소양홀, 십자바위 구국기도실, VR체험관, 사무실, 회의실, 수장고가 있다. 창원시에서는 주기철 목사를 기리기 위해 주기철 목사 기념관부터 시작하는 주기철 목사 성지 순례길 코스도 제공하고 있다. 이를 통해 종교와 역사를 동시에 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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