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에서 건진 돌부처가 있는 용궁사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에 소재한 용궁사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 백운산 동쪽 기슭에 용궁사(龍宮寺)라는 사찰이 있다. 용궁사는 신라시대인 670년에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는데, 당시에는 백운사(白雲寺)라 하였으며, 1854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의해 중수하면서 용궁사가 되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은 용궁사에 머무르면서 10년 동안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용궁사에는 예전에 옥(玉)으로 된 불상(佛像)이 안치되어 있었다.

     

    어부가 바다에서 건진 돌부처

    바다에서 건진 돌부처가 있는 용궁사

    옛날 영종도에 ‘손씨’라고 부르는 가난한 어부가 한 명 살고 있었다. 손씨는 비록 생활은 어려웠지만, 착하고 성실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평이 좋았다. 손씨는 마을에 살고 있는 다른 어부들과 마찬가지로 조그마한 어선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갔다. 음력 사월이 되었을 때, 영종도의 어부들은 연평도로 조기를 잡으러 가게 되었다. 손씨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연평도로 조기를 잡으러 갔다. 손씨도 연평도 인근 바다에 도착해서 그물을 내렸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 손씨는 그물을 끌어 올렸고, 그물이 평상시 보다 묵직하여 기대를 많이 했다. 그러나 그물 안에는 조기는 없고 돌부처가 한 개 들어 있었다. 


    손씨가 돌부처를 보니, 바다에서 오랫동안 있어서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쓸모없이 보여 바다로 던졌다. 연평도로 조기를 잡으러 같이 갔던 다른 어부들은 배가 가득하도록 조기를 잡아 영종도로 돌아갔다. 그러나 손씨는 조기를 잡지 못해 혼자 남아 그물을 다시 내렸다. 시간이 다시 지나서 그물을 올렸다. 이번에도 조기는 한 마리도 없고, 돌부처가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화가 난 손씨는 투덜거리며 다시 돌부처를 바다에 던지고 빈 배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손씨의 꿈에 백발의 도사가 나타나, “네가 오늘 바다에서 건진 돌부처는 원래 백운산 아래에 있는 용궁사에 있어야 할 분이다. 내일 네가 고기를 잡으러 나가면, 다시 돌부처를 건질 것인데, 영종도 태평암 위에 세워 놓아라.” 하였다. 깜짝 놀라 꿈에서 깬 손씨는 기이한 생각이 들어, 다음 날 날이 밝기도 전에 연평도로 가서 그물을 내렸다가 올렸다. 그랬더니 어제 건졌던 돌부처가 그물 안에 들어가 있었다. 손씨는 ‘꿈에 나타난 도사의 말이 사실이구나!’ 생각하고, 돌부처를 영종도로 가지고 와 태평암 위에 모셨다. 그 이후 매일같이 물고기가 잘 잡히고, 손씨의 후손들도 대대로 잘 되었다고 한다.

     

    태평암 위에 모셔진 돌부처

    한편, 돌부처를 모셔 둔 태평암 근처에는 하는 일 없이 활을 쏘면서 시간을 보내는 한량들이 많았다. 한 한량이 태평암 위에 돌부처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장난삼아 활을 쏘았다. 한량이 쏜 화살이 그만 돌부처 오른팔에 부딪혀 팔이 떨어졌다. 그런데 잠시 뒤 떨어진 팔이 다시 제자리에 붙고, 그 손 안에는 약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돌부처에 활을 쏜 한량은 그 자리에서 바로 즉사하였다. 


    태평암 위에 있던 돌부처는 오랜 시간이 흘러 용궁사에 있던 한 스님에 의해 용궁사로 모셔갔다. 용궁사에 돌부처를 모신 후부터는 용궁사 앞을 지나갈 때 소나 말을 탄 사람은 반드시 내려서 걸어가야 했다. 또한 담뱃대를 입에 물고 갈 수도 없었다. 소나 말을 탄 채 용궁사 앞을 지나가면 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담뱃대를 물고 가던 사람은 담뱃대가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부처 손에 쥐어 있던 약병의 약으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쳤다고 한다. 현재는 용궁사에 돌부처가 없으며, 일제강점기 때 약탈을 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