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와 횡성군, 영월군 사이에 걸쳐서 치악산(雉岳山)이 있다. 치악산은 높이 1,282m의 산으로 원래는 적악산(赤岳山)이라 불렀으며, 1984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이다. 원주시 신림면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성황림’을 통해서 치악산에 오르면 상원사(上院寺)가 있다. 상원사는 신라시대에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도 하며, 경순왕 때 무착(無着)이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상원사는 6.25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68년에 중건한 절이다. 상원사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은혜 갚은 꿩’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사찰로 많이 알려져 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해 치악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새 우짖는 소리가 들려 주위를 살펴보니, 큰 구렁이가 나무 아래서 꿩을 휘감아 먹으려 하고 있었다. 나그네는 재빨리 활을 꺼내 구렁이를 쏘았다. 다행히 꿩은 살아서 공중으로 날아갔다. 나그네는 다시 가던 길을 갔다. 걷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어갈 인가를 찾았다. 마침 외딴집의 불빛을 보게 되어, 문 앞에 서서 하룻밤 묵어 갈 것을 청하였다. 집 안에서는 어여쁜 여인이 나와 나그네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먹을 것을 주었다. 나그네는 여인이 내어준 것을 먹고, 피곤에 지쳐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숨을 쉴 수가 없이 답답해 눈을 떴다. 큰 구렁이 한 마리가 자신의 몸을 칭칭 감고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구렁이는 나그네에게 “너는 낮에 내 남편을 죽였으니 그 원수를 갚겠다.”고 하였다. 나그네는 “오늘 내가 당신의 남편을 죽인 것은 꿩을 잡아먹으려 하기에 순간적으로 활을 쏜 것이니, 용서해 주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구렁이는 “그러면 내기를 하자. 이 산중에 아무도 살지 않는 절의 종이 있는데, 그 종이 세 번 울리면 너를 살려주겠다.”라고 하였다. 아무도 살지 않는 절에서 종이 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나그네는 체념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땡-”하고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두 번의 종소리가 더 울렸다. 그러자 구렁이는 나그네를 풀어주고 사라져 버렸다. 정신이 든 나그네는 절을 찾아 나섰고, 종 아래에서 머리가 깨져 죽은 꿩을 발견하였다. 나그네가 낮에 구해준 꿩이었다. 비록 미물이지만 자신에게 은혜를 갚은 꿩을 보고, 나그네는 감사해 그 근처에 꿩을 묻어 주었다. 그 이후로 적악산이 꿩 치(雉)자를 써서 치악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위의 이야기에 더해서 꿩과 나그네를 잡아먹으려 했던 구렁이의 실체에 대해서 전해지는 설화가 있다. 어느 해 상원사 주지는 종을 만든다면서 수십 만 가구에서 식구 수대로 숟가락을 시주받았다. 주지는 처음에는 불심(佛心)으로 종을 만들려 하였으나, 욕심이 생겨 거두어들인 숟가락 중 반을 숨겨놓고 나머지로 종을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절에서 수행하고 있는 보살과 정을 통하였다. 주지는 종을 만들어 놓고 전국에서 사람들을 모아 타종식을 거행하고자 하였다. 타종식에 온 사람들은 거창한 종을 보고, 주지를 칭찬하며, 종치기를 기다렸다. 타종식 시간이 되어 종을 치니, 종소리가 나지 않았다. 몇 번을 쳐 보아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 때 허공에서 주지의 욕심을 질타하는 부처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리고 주지와 보살은 구렁이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곧 은혜 갚은 꿩 이야기에서 구렁이는 욕심 많은 주지와 보살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구렁이의 실체를 알려준 설화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은혜 갚은 꿩’이야기만 알려져 있다. ‘은혜 갚은 꿩’이야기는 1952년 간행한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 「종소리」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1960년대까지 초등학생들에게 읽혔던 설화다. 곧 ‘은혜 갚은 꿩이 울린 상원사 동종’설화는 ‘치악산(雉岳山)’이라고 불리게 된 유래를 설명하는 지명유래담이며, 동물보은담의 한 유형으로 꿩이 자신을 살려 준 인간에게 스스로를 희생하여 목숨을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구렁이의 존재와 관련해서 “부처님의 저주를 받아서 구렁이로 된 주지와 보살”이라는 설화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에서 치악산(雉嶽山)으로 오르는 입구에 구룡사(九龍寺)가 소재한다. 신라시대의 고승인 의상(義湘)이 668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구룡사는 강원도 영서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내부에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보광루, 적묵당, 심검당 등의 건물들이 있고, 입구에는 황장금표[黃腸禁標, 궁궐에서 사용하는 소나무인 황장목을 베지 못하게 하는 표시]가 있으며, 구룡사 창건설화의 증거물이라 할 수 있는 용소와 거북바위 등도 있다.
의상이 치악산에 사찰을 창건하기 위해 구룡골로 들어갔다. 구룡골은 치악산 정상인 시루봉을 바라보는 아늑한 협곡(峽谷)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의상은 구룡골 가운데서도 좋은 자리를 찾아 절을 짓기 위해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의상이 둘러보니, 연못 있는 자리에 대웅전(大雄殿)을 앉히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못을 메우려 하였다. 이 때 연못 안에 있던 아홉 마리의 용들이 의상에게 나타나 “우리가 사는 곳을 메우려 한다니, 그런 일이 어디 있소.”라며 항의를 하였다. 의상은 용들에게 “부처님을 모시려면 너희들이 사는 연못 자리여야 하는데, 어떻게 하냐?”라며 용들을 설득했지만 용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내기를 해서 이기는 쪽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다.
용들이 먼저 먹구름을 일으키며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러자 천둥번개가 치면서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져 계곡이 넘쳐 스님이 서 있던 곳까지도 잠겨 버렸다. 그런데 의상은 용들이 비를 내리게 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시루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를 매어놓고 태연하게 자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의상은 “그럼 이번에 내가 한번 해볼까?”라며, 부적을 한 장 써서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는 연못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더운 김이 오르더니 연못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였다. 용들은 뜨거워 견딜 수 없어서 하늘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눈먼 용 한 마리는 도망가지 못하고 근처에 있는 연못으로 옮겨 갔다. 결국 내기에서 의상이 이겨 연못 자리에 대웅전을 짓고, 구룡사를 창건하였다. 구룡사에서 치악산을 보면 여덟 개의 골이 보이는데 그 골들이 그 당시 도망친 여덟 마리의 용이 지나간 길이라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구룡사가 쇠락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 대부분을 궁궐로 올려 보냈는데, 구룡사의 주지가 공납의 책임자 역할을 하였다. 산나물이 좋든 그렇지 않든 구룡사 스님이 결정을 하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구룡사 주지에게 뇌물을 바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구룡사는 물질적으로 풍성해지기는 하였지만, 정신도량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하루는 몰락해 가는 구룡사를 안타까워한 스님이 구룡사를 찾아 “이 절이 발전을 못하는 것은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그 혈(血)을 끊으라.”라고 하였다. 구룡사 주지는 그 말을 듣고,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다. 그런데 절이 나아지기는커녕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욱 줄어드는 것이었다. 급기야는 폐찰이 될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스님 한 분이 찾아와 “절이 쇠락하는 이유는 이름 때문이오. 본래 이 절은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가 지켜왔는데, 불행하게도 누군가가 그 혈맥을 끊어 놓았으니, 시간이 지나면 이 절이 없어질 수도 있소”라고 하였다. 구룡사 주지가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스님은 한참 생각하더니, “거북을 다시 살린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아홉 구(九)자 대신에 거북 구(龜)자로 고쳐보시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구룡사(龜龍寺)로 바뀌었다고 한다.
위의 설화는 구룡사 창건을 설명하고 있다. 구룡사는 “현재 부도가 있는 자리에 사찰을 세우려 하였으나, 하룻밤 사이에 재목들이 스스로 연못으로 옮겨진 것을 부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그곳에 구룡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찰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용은 그 역할에 따라 선룡(善龍)과 악룡(惡龍)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구룡사의 경우는 악룡에 속하며, 불교와 충돌한다. 한편, 설화에 용이 개입하고 사찰 이름에 용이라는 글자를 넣어 작명한 것은 ‘용신사상’이 일부 결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원도 양양군에는 통일신라시대인 671년에 창건한 낙산사(洛山寺)가 있다. 낙산사는 의상(義湘)이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고 창건하였으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음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에 동양에서 가장 큰 ‘해수관음입상’을 낙산사 경내에 세웠고, 의상이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난 곳이라는 홍련암(紅蓮庵)과 참선을 하였다는 의상대(義湘臺) 등이 있다. 현재 낙산사는 사적 제495로 지정되어 있으며, 의상과 원효(元曉)가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는 과정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우리나라 화엄종을 연 의상이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돌아왔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관음보살의 진신이 동해의 한 동굴 안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의상은 관음보살을 친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기 위해 심신을 깨끗이 하고, 금기를 지키며, 일주일간 재계(齋戒)를 하였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그가 깔고 앉아 있던 자리를 이른 새벽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龍天八部,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의 시종들이 동굴 안으로 이끌었다. 의상이 동굴의 공중을 향해서 참례(參禮)를 했더니 수정으로 된 염주(念珠) 한 개를 얻을 수 있었다. 동해의 용왕도 의상에게 여의주 한 개를 바쳤다.
그 후 다시 일주일 동안 재계를 하자,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날 수 있었다. 관음보살의 진신이 의상에게 “네가 앉아 있는 산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솟아날 것인데, 그곳에 반드시 부처님을 모셔야 한다.”라고 하였다. 의상은 그 말을 듣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바로 자신이 있던 동굴 위에서 대나무 한 쌍이 솟는 것이 보였다. 의상은 대나무 한 쌍이 솟아난 곳에 불전(佛殿)을 짓고 부처님을 모셨다. 그리고는 그곳을 낙산(落山)이라 부르고는, 수정 구슬 두 개를 안치하고 그곳을 떠났다고 한다.
한편, 같은 시대를 살았던 원효도 관음보살이 동해의 한 동굴에 머물러 있다는 말을 듣고 낙산사를 향했다. 원효가 낙산사 남쪽 부근에 도착하였을 때, 논에서 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는 여인에게 “그 벼를 제게 주시오.”라며 장난을 쳤다. 여인도 장난삼아 “벼가 잘 익지 않아 줄 수가 없소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길을 가다가 이번에는 다리 아래에서 월경개짐[생리대]을 빨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원효가 그녀에게 “물을 좀 주시오.”라고 하자, 그 여인은 월경개짐을 빨던 물을 떠서 원효에게 주었다. 원효는 그 물을 쏟아 버리고 다시 물을 떠서 마셨다.
그때 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의 파랑새 한 마리가 “원효 스님은 그만 두시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고, 소나무 아래에는 신발 한 짝만 남아 있었다. 원효가 낙산사에 도착해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찾아갔다. 그 때 관음보살이 있던 자리에 관음보살은 없고, 자신이 소나무 아래에서 보았던 신발과 똑같이 생긴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그제서야 원효는 낙산사로 오는 중간에 만난 여인이 관음보살의 진신임을 깨달았다. 또한 원효가 동굴로 들어가 관음보살 진신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거친 풍랑이 일어 동굴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결국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지 못하고 떠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위의 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도 수록되어 있다. 낙산사 창건 배경을 담고 있는 설화다. 통일신라시대 두 고승(高僧)이었던 의상과 원효가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러 낙산사 동굴을 찾지만, 원효는 관음보살의 진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의상만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게 된다. 결국 위의 설화는 의상이 화엄사상과 관음사상을 결합해서 불교의 대중화를 이루어 내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에는 만어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삼국시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세운 것이라 전해진다. 신라시대에는 왕들이 불공을 드리는 장소로 쓰였고 그뒤로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문화재로는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만어사삼층석탑이 보물 제466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어사는 새벽에 구름이 바다처럼 넓게 깔리는 풍경이 아름다워 밀양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또한 밀양 3대 신비의 하나로 꼽히는 만어사 경석이 있다. 만어사 앞에 깔려있는 경석은 말 그대로 두드리면 종소리가 난다. 만어사 경석은 천연기념물 제5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처럼 만어사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풍경을 가진 사찰로 많은 사람이 방문하고 있다. 만어사에 대한 이야기는 밀양시 밀양읍, 삼랑진읍 일대에서 두루 전해진다.
옛날 자성산 근처에 가락국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알에서 나와 왕이 된 수로왕이 있었다. 그때 가락국의 옥지(玉池)라는 연못에 독룡(毒龍)이 살고 있었고,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나찰녀(羅刹女)가 만어산에 살고 있었다. 독룡과 나찰녀가 서로 왕래하며 어울려 지낸 까닭에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며 우박이 쏟아져 4년 동안 곡식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수로왕이 주문을 외우고 술법을 써서 독룡과 나찰녀가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지만 불가능하였다. 수로왕은 ‘부처님 제발 도움을 주십시오.’라고 빌며 인도 쪽을 향해 부처를 청하였다. 부처가 신통력으로써 6비구와 1만의 천인(天人)들을 데리고 왔다. 부처의 설법을 통하여 독룡과 나찰녀가 항복하였고 이후에 모든 재앙이 사라졌다. 이때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돌로 변하였다. 그 돌들은 두드리면 종소리가 났다. 돌들이 많이 깔린 곳에 수로왕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도 있다.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은 자신의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서 낙동강 건너의 무척산(無隻山)에 사는 신승(神僧)을 찾아갔다. 용왕의 아들은 신승에게 “제가 새로 지낼 곳을 알려주십시오.”라고 부탁하였다. 신승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곧 인연이 되는 곳이니 그곳에 터를 잡으십시오.”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용왕의 아들이 길을 떠나니 수많은 물고기 떼가 뒤를 따라왔다. 용왕의 아들이 가다가 멈추어 쉰 곳이 곧 만어사였다. 그 후 용왕의 아들은 만어사에서 큰 미륵바위로 변하였고 수많은 물고기 떼는 크고 작은 돌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현재 만어사의 미륵전 안에는 5m 정도 되는 바위가 있는데 이는 용왕의 아들이 변한 미륵바위라고 한다. 미륵바위에 소원을 빌면 자식을 원하는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한다. 미륵전 아래에는 수많은 돌무더기가 깔려 있는데 이는 물고기 떼가 변해서 된 만어석(萬魚石)이라 한다. 두들기면 맑은 종소리가 나기 때문에 종석(鐘石)이라고도 한다.
이 이야기는 「불설관불삼매해경」이라는 불교 경전에 실린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가락국의 김수로가 독룡과 나찰녀를 물리치고 만어사를 짓게 된 이야기로 변화되었다. 김수로왕을 등장시켜 만어사가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절임을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로 변화된 것이다. 요컨대 불교 경전을 재구성한 불교 설화이자 사찰 창건설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로써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동해 용왕의 아들 이야기는 만어사 주변의 돌무더기나 미륵바위의 유래를 알리는 것으로 전승되고 있다.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 자락에는 송광사가 있다. 송광사는 우리나라 조계종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으며, 경남 합천의 해인사, 경남 양상의 통도사와 함께 한국의 삼보사찰(三寶寺刹) 중 한 곳이다. 송광사의 창건은 통일신라의 승려였던 혜린(慧璘)선사가 송광산[조계산의 옛지명]에 이르러 ‘길상사(吉祥寺)’라는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에는 40여 명의 스님이 살았던 작은 절이었으나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오면서 절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고, 절의 이름도 길상사에 송광사로 바꾸었다. 특히 송광사는 지눌스님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초기의 고봉국사까지 열여섯 명의 국사를 배출해 승보사찰(僧寶寺刹)이 되었으며, 새로운 한국불교의 중심지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신라시대 말엽, 혜린선사가 십여 명의 제자들과 산속에서 수도하고 있었다. 하루는 제자들이 괴질에 걸려 몹시 괴로워했고, 혜린선사가 약초를 뜯어 치료했으나 효험은커녕 아픈 사람들이 더 늘어나기만 했다. 걱정이 컸던 혜린선사은 제자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부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정결한 기도처를 찾아 나섰다. 혜린선사는 산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연못을 발견했는데, 연못 가운데는 문수보살 석상이 우뚝 서 있었다. 혜린 선사는 깜짝 놀랐지만, 제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생각이 들어 무척이나 기뻤다. 바로 제자들과 함께 문수보살을 마주 보고 앉아 기도를 시작하였고, 기도는 그렇게 7일 동안 이어졌다.
기도가 끝나는 날, 부처님이 혜린선사의 꿈속에 나타나 “이제 너와 제자들의 모든 시련이 끝났으니, 이 길로 새 절터를 찾아 절을 짓고 중생을 구제하도록 하여라.” 했다. 꿈에서 깨어 보니 시름시름 앓던 제자들이 모두 건강해졌다. 혜린선사는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문수보살 석상에게 가는 길을 인도해 달라고 다시 기도를 드렸다. 혜린선사가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자 언제 오셨는지 노승 한분이 온화한 미소로 혜린선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승은 부처님의 불보를 전하면서 “제자들과 함께 전라도 남쪽에 있는 송광산으로 가시오. 그곳에 불보를 모시고 절을 지어 불법을 전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혜린선사는 제자들과 함께 송광산으로 떠났다. 여러 날이 지나 드디어 송광산 아래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는데, 그때 한줄기 빛이 송광산 기슭을 비추었다. 혜린선사는 빛이 비춘 곳에 절을 만들어 부처님을 모셨고, 절의 이름을 ‘길상사’라 했다고 한다.
송광사에 얽힌 설화는 혜린선사가 창건한 송광사에 관한 내력이 담긴 이야기이다. 송광사의 창건에서는 역사적 사실보다 사찰의 신성함을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혜린선사가 세운 송광사의 절터는 부처님이 계시를 해준 성스러운 땅이며, 이러한 성스러운 땅에 혜린선사로 하여금 절을 창건하게 하여 송광사의 신성함과 영험함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보조국사 지눌스님은 혜린선사가 창건한 길상사를 번성시킨 인물이다. 이후 송광사에서는 보조국사 지눌 스님을 포함하여 열여섯 명의 국사를 배출하였고, 그 결과 큰스님을 가장 많이 배출한 승보사찰이 되었다.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로 잘 알려진 미륵사(彌勒寺)의 터 ‘미륵사지(彌勒寺址)’가 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 2년(601)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백제의 절로는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절이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크게 번성하였으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점차 쇠락한 것으로 추정한다. 미륵사지는 1962년에 사적 제150호로 지정하여 관리하였지만, 현재는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과 ‘미륵사지당간지주(彌勒寺址幢竿支柱)’만이 외롭게 남아 있을 뿐이다. 미륵사지석탑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지만, 이것도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말하는 듯 많이 쇠약해진 모습이다. 특히 미륵사지석탑은 훼손 상태가 심각하여 2001년부터 수리를 시작해 2018년 7월에 보수 작업을 완료하였고, 2019년 4월 30일에 열린 준공식에서 복원된 모습을 공개하였다.
백제의 30번째 왕은 무왕이다.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로 홀로 집을 짓고 살던 중 못의 용과 정을 통하여 무왕을 낳았다. 무왕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넓은 아이였고, 집이 가난하여 생계를 위해 마를 캐어 팔았다 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를 ‘마동’ 또는 ‘서동’이라 불렀다. 어느 날,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경주로 갔다. 경주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며 노래를 가르쳐 주었는데, ‘선화공주가 서동과 몰래 만나 정을 통한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노래는 아이들에 의해 경주 전역에 울려 퍼졌고, 결국 진평왕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진평왕은 선화공주의 부정한 행실을 문제 삼아 먼 시골로 유배를 보냈는데, 왕후는 황금을 주며 노잣돈으로 쓰라고 했다. 선화공주가 길을 떠나는 도중에 갑자기 서동이 나타나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나 선화 공주는 서동을 믿었고 좋아했다. 후에 서동의 이름을 들은 선화공주는 자신이 서동의 부인이 될 운명임을 알고 서동을 따라갔다.
서동과 함께 백제에 도착한 선화공주는 왕후가 준 황금을 팔아 생활을 꾸리자고 했다. 그러자 서동은 웃으면서 “내가 마를 캐던 곳에는 이것이 산처럼 쌓여 있소.”라고 했다. 선화공주는 깜짝 놀라며, “이것은 죽을 때까지 부자로 살 수 있는 진기한 보물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부모님께 보내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서동이 좋다고 했지만, 문제는 산처럼 쌓인 황금을 보낼 방도가 없었다. 이때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가 신통력으로 황금을 수송해주겠다고 했다. 지명법사는 신통력으로 선화공주의 편지와 황금을 진평왕에게 보냈고, 진평왕의 마음을 얻은 서동은 백제의 무왕이 되었다. 하루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용화산 아래의 큰 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수레를 멈추고 내려와 공손하게 절을 했다. 미륵삼존을 본 후 선화공주는 “이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라고 무왕에게 말했다. 무왕은 공주의 소원대로 못을 메워 절을 짓고, 절의 이름을 ‘미륵사’라 하였다.
미륵사에 얽힌 설화는 우리에게 「서동요」의 배경설화이며, 서동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미륵사의 창건은 백제 무왕에게 있어 왕권 강화의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당시 백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이상을 심어주고 싶은 백제 무왕의 신념이 담긴 이야기이다. 설화에서는 선화 공주의 부탁으로 미륵사가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2009년 미륵사지석탑을 보수 과정에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에는 선화공주가 아닌 당시 좌평이었던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는 백제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관음사가 있다. 관음사는 백제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사찰이며, 분서왕 4년(301)에 옥과 출신의 처녀 성덕이 세운 절이다. 절 이름은 성덕이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와 절을 완성하고, 그 이름을 ‘관음사’라 부른 것에서 연유한다. 관음사에는 백매 선사가 쓴 『관음사사적』(1729)이 전해지는데, 「심청전」의 근원설화로 알려진 원홍장이야기와 처녀 성덕의 관음사 창건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관음사는 현재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보전되고 있다.
백제 때 대흥(지금의 충남 예산 지역)이라는 고을에 원량이라는 장님과 원홍장이라는 어린 딸이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홍장은 아름다웠으며, 심성 또한 고와 어릴 적부터 앞 못 보는 아버지를 정성스럽게 모시는 효녀였다. 어느 날, 원량은 길에서 홍법사의 법당을 짓는 일을 맡은 성공(性空)이라는 스님을 만났다. 성공 스님은 부처님의 뜻이라며 원량에게 우리 절의 큰 시주님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스님의 말에 몸 둘 바를 몰랐던 원량은 “저는 가난하여 먹고 살 양식도 없는데, 어떻게 시주하겠습니까? 다만 효성 지극한 딸이 있으니 그 아이라도 데려가서 보탬이 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스님은 기뻐하면서 돌아갔고, 원량은 자신이 했던 말을 땅을 치며 후회했다.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원량은 딸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다.
약속은 약속인지라 홍장은 스님을 따라 홍법사로 향했다. 며칠째 걷기를 반복하다가 피곤한 몸을 달래기 위해 소랑포 부두에서 쉬게 되었다. 이때 멀리서 두 척의 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더니 홍장이 있는 나루터에 멈추었다. 그리고 배 위에 있던 사자가 다가와 홍장의 얼굴을 보고, 황후마마라며 절을 하였다. 홍장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자, 사자는 자신은 진나라 사람이고, 황후가 돌아가셨는데, 황제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새 황후가 백제에서 태어나 장성했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하여 황제의 명으로 예물을 가지고 모시러 왔다는 것이다. 홍장은 스님에게 예물을 모두 드리고, 사자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홍장은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지만, 홀로 남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장인을 시켜 자신의 원불(願佛)로 관음보살상을 만들게 하였다. 그 후 관음보살상을 배에 싣고 백제국으로 보내며, 인연이 있는 곳에 닿아 봉안되기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곡성 옥과(현재 곡성군 옥과면)에 성덕이라는 처녀가 살았다. 하루는 성덕이 바닷가를 걷고 있는데, 수평선을 바라보니 돌배 하나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배속에 빛이 가득했고, 안에는 관음보살상이 앉아 있었다. 성덕은 엎드려 절을 하고, 관음보살상을 업었더니 깃털처럼 가벼웠다. 성덕은 관음보살상을 모실 인연의 땅을 찾아 숱한 들과 마을을 지났다. 지금의 곡성군 오산면에 있는 고개를 지날 때 갑자기 관음보살상이 태산처럼 무거워서 한 발 짝도 뗄 수가 없었다. 성덕은 그곳에 관음보살상을 모시고, 절을 세워 그 이름을 ‘관음사’라 하였다. 그 후 사람들은 관음사를 품고 있는 산을 ‘성덕산’이라 이름 짓고 그녀의 덕을 기렸다고 한다.
관음사에 얽힌 설화는 관음사 창건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부각하고, 원홍장의 효성과 성덕의 정성이 이어져 관음사가 창건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설화에서 원홍장과 성덕은 모두 관음의 화신으로 형상화되어 있으며, 이러한 인식은 관음사와 관음보살의 신성화를 통해 불교의 대중화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함으로 보인다. 한편 원홍장에 관한 이야기는 그 구조와 내용이 「심청전」과 유사하여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의 배경설화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법왕사는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금평로 314-246번지(어단리 926번지), 칠성산 중턱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1930년 주교(胄敎)가 세운 「칠성암기적비(七星庵紀蹟碑)」에 의하면, 634년(신라 선덕여왕 3)에 자장(慈藏)이 창건하였다. 신라시대 말에 범일(梵日)이 출가하여 수도한 수선 도량이라 한다. 일설에는 범일의 제자들이 참선 도량으로 이 절을 세웠다고도 한다. 창건 당시의 사찰명과 창건 이후의 연혁에 관해서는 전하지 않는다.
1896년 진사 정은(鄭溵)이 독서재(讀書齋)로 짓고 글을 가르쳤다. 정은이 물러나자 마을 사람들이 독서재를 불당으로 개조하여 칠성암(七星庵)이라 하였다. 그 후 운곡(雲谷)이 10여 칸의 법당과 요사를 건립하면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1946년 주지 청우(淸雨)가 거사 차인철로부터 시주를 받아 중창하여 사찰을 일신하였다. 이때 부처님의 정법을 계승하고, 범일의 유지를 본받는 수행도량이라는 의미로 절 이름을 법왕사로 바꾸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법당을 1958년 중창하였다. 1966년과 1988년 요사 1동씩을 신축하였다. 1974년 혜운(惠雲)이 청우당을 건립하고, 1976년 청우당사리탑을 세웠다. 1978년 범종각을, 1985년 반야선원을, 1991년 마당을 넓히고 염불당을 신축하였다. 1995년 천불전을 준공하고 천불을 봉안하였다. 1999년 대웅보전을 신축하고, 2002년 석조미륵입상을 세웠다.
1970년대 삼성각을 건립할 때의 일이다. 혜운이 도로 확장 공사로 피곤해 깜박 낮잠을 잤다. 혜운 앞에 한 노인이 나타나 흐르는 계곡물에 땀을 씻고 목을 축인 후 “나는 이 산에 살고 있지만 오랫동안 나의 거처가 마련되지 않았소. 공사하는 끝에 이왕이면 내가 살 집을 마련하여 주면 고맙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곧바로 산으로 사라졌다. 이에 혜운은 삼성각을 건립하고 세칭 ‘칠성부처님’과 나란히 산신탱화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법왕사의 건물로는 대웅보전, 염불당, 천불전, 반야원, 동종각 등의 전각이 있다. 대웅보전은 2층 건물로, 1층은 천불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천불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로 1995년에 건립되었다. 천불전 위에 1999년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대웅보전을 증축하였다. 1층 천불전에는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이 삼신불로 모셔져 있고, 천불을 봉안하였다. 불화로는 1996년에 조성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고, 내부 벽면에는 비천상과 나한도를 그려놓았다. 그리고 2003년 조성한 동종이 있다.
2층 대웅보전은 외벽에 팔상도를 그려 놓았으며, 내부에는 금동석가여래좌상과 좌우 문수보살·보현보살 입상이 모셔져 있고 삼세불 후불탱을 봉안하였다. 법당 오른쪽에 관음보살좌상과 천수천안관음탱이, 왼쪽에 지장보살좌상과 지장시왕탱이 각각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1998년 조성한 신중탱과 범종이 있다. 그리고 경내에는 오층석탑, 칠성암기적비, 청우당 대선사 사리탑 및 탑비 등이 있으며, 법왕사 입구 왼쪽에 계월당(桂月堂)·월봉당(月蜂堂)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석종형 부도가 있다. 법왕사 부도는 법왕사가 위치한 곳이 옛 사지(寺祉)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등명낙가사는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괘방산길 16번지(정동진리 산 17번지), 괘방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창건 당시 절 이름은 수다사(水多寺)였다. 자장은 고구려와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 불사리를 모신 탑을 세우고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자장이 이 절에 머물 때의 일이다. 자장의 꿈속에 중국 오대산 북대(北臺)에서 보았던 스님이 나타나 “내일 저 큰 소나무 밑에서 꼭 만나자.”라고 하였다. 이튿날 자장은 스님이 말한 소나무 밑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였다고 한다.
자장의 호국 의지로 창건한 수다사는 신라시대 말기에 방화로 소실되었으며, 고려시대 초기에 중창되면서 절 이름이 등명사(燈明寺)로 개칭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명사는 강릉부 동쪽 30리에 있다고 하였다. 등명사는 풍수지리상 강릉도호부 중에서 암실(暗室) 등화(燈火)와 같은 자리에 있고, 이곳에서 공부한 사람이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에 등산하여 불을 밝히고 기도드리면 급제를 빨리할 수 있다는 말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중기에 폐허가 된 등명사를 1956년 경덕(景德)이 중창하였다. 그리고 절 이름을 등명낙가사로 바꾸었다. 1977년 경덕(景德)이 영산전(靈山殿)을 건립하였고, 1983년 주지 청우(淸宇)가 삼성각을 시작으로, 영산전(1984년), 범종각(1987년), 요사 및 종무소(1988년), 극락보전과 만월보전(1991년), 일주문(1996년) 등을 건립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조선시대 중기에 등명사가 폐허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 임진왜란 때 왜군들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둘째, 왕의 눈병 때문에 폐사되었다는 것이다. 왕이 눈병이 심해지자 점술가에게 물어봤다. 점술가는 동해 정동 방면에 자리한 큰 절의 쌀뜨물이 동해로 흘러가서 용왕이 노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왕의 특사가 동해 정동에 와서 보니 점술가의 말과 같았으므로 등명사를 폐사하였다고 한다. 셋째, 등명사의 위치 때문에 폐사되었다는 것이다. 한양의 궁궐에서 볼 때 등명사가 위치한 곳은 정동(正東) 쪽에 해당한다. 궁중에서 받아야 할 일출(日出)을 부처를 모신 사찰이 먼저 받는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정동의 등불을 끄면 조선의 불교는 자연적으로 소멸한다.”라고 하여 폐사시켰다고 한다.
등명낙가사는 동해 일출을 보기 좋은 장소로 알려진 일주문을 지나 5분 정도 올라가면 극락보전이 나온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관음·세지보살이 모셔져 있고 극락회상도와 신중탱이 있다. 극락전 오른쪽으로 종무소가 있고, 그 뒤 아래로 난 길을 따라가면 요사와 만월보전이 구역이 나온다. 여기에 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오층석탑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오층석탑 앞에는 안상과 연꽃이 조각된 배례석이 있다. 예전에는 석탑 앞에서 엎드려 절을 올렸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구전에 의하면, 창건 당시 자장은 3기의 탑을 세웠는데, 1기는 현재 등명낙가사에 있는 오층석탑이고, 1기는 한국전쟁 당시 함포사격으로 소실되었으며, 1기는 절 앞의 바닷속에 있는 수중탑(水中塔)이라고 한다. 오층석탑 옆에는 빈혈·위장병·신경통·부인병 등의 병에 효험이 있다는 등명약수(燈明藥水)가 있다. 이밖에 동해안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해안선과 철길 옆 소나무 숲길, 10분 거리에 있는 등명 해수욕장도 볼거리 중 하나이다.
신흥사는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신흥사길 17-34번지(상안리 72-16), 구봉산의 당산 아래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구봉산은 해발 165m의 산으로, 서해를 통해 들어오는 모든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이곳에 삼국시대 성곽인 당성(唐城)이 있다. 당성은 1971년 4월 15일 사적으로 지정된 둘레 1,200m의 테뫼식과 포곡식을 결합하여 축성한 복합식 산성이다. 당항성(黨項城)이라고도 한다.
신흥사는 1934년 덕인(德仁) 스님과 한영석 거사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 인근 마을에 살던 한영석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당성 안에 석불이 있으니 모셔다가 절을 지으라고 하였다. 이튿날 한영석이 당성에 올라가 보니 기와가 널려 있는 옛 절터의 수풀 속에 돌로 만든 관세음보살상이 있었다. 한영석은 절터를 구하고 덕인을 모셔와 절을 창건하였다. 이후 다시 한영석의 꿈에 스님이 나타나 대부도 근처에 있는 불도라는 섬에 석불이 있다고 하였다. 한영석이 불도에 가보니 반쯤 땅에 묻힌 아미타불 석불이 있었다.
1941년 법당을 중수하였고, 1981년 설럽당을 신축하였다. 1990년 큰법당을 지어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하였다. 1973년 청소년수련원을 개원하였고, 1989년 100평 규모의 현대식 청소년수련원을, 1992년 제2청소년수련원을 건립하였다. 1994년 구법당 관음전을 허물고 어린이 법당을 만들었다. 1995년 진신사리탑을 조성하였으며, 1997년 종각을 신축하고 범종을 주성하였다. 2001년 천왕문을 세웠다. 2012년 10월 부처님 교화공원을 조성하였다.
신흥사는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지만, 화성에서 널리 알려진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어린이·청소년 포교를 중심으로 성장한 신흥사는 일반불자들의 교육과 신행도량으로 변모하고 있다. 어린이 법당과 청소년수련원이 있는 신흥사는 ‘전국 어린이 부처님 그리기 대회’, 일일출가 수련대회, 어린이 여름불교학교 등 다양한 자체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포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어린이 여름불교학교나 청소년수련법회가 열리면 수많은 불자가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있다.
수타사는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영귀미면 수타사로 473번지(덕치리 9번지), 공작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수타사는 708년(신라 성덕왕 7)에 창건하여 우적산(牛寂山) 일월사(日月寺)라 하였다. 창건 이후 영서 지방의 명찰(名刹)로 손꼽히던 일월사는 1568년(선조 2) 현재 절의 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공작산 수타사(水墮寺)로 개칭하였다. 지금과 발음은 같으나 의미는 조금 다르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완전히 불타버린 수타사는 40여 년간 방치되었다가 1636년(인조 14) 공잠(工岑)이 법당을 중건하였고, 1644년 학준(學俊)이 선당(禪堂)을 건립하였다. 1647년 계철(戒哲)과 승가(僧伽)가 승당(僧堂)을 신축하였고, 1650년(효종 1) 도전(道佺)이 정문(正門)을 건립하였다. 1658년 승해(勝海)와 정명(正明)이 흥회루(興懷樓)를 건립하면서 사찰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다.
1670년(현종 11) 정상(正尙)·정지(正持)·천읍(天揖)이 대종(大鐘)을 주조하여 봉안하였고, 1674년 여담(汝湛)이 사천왕상을 조성하였다. 그 뒤로도 1683년(숙종 9)까지 상흘(尙吃)·선찰(善察)·성념(省念)·성민(性敏)·여민(汝敏)·지해(智海)·지행(智行)·찬원(贊源)·찬징(贊澄) 등이 백련당(白蓮堂)·송월당(送月堂)·청련당(靑蓮堂)·향적전(香積殿) 등의 건물을 차례로 중건하여 옛 모습을 재현하였다.
1811년(순조 11) 절 이름을 수타사(水墮寺)에서 수타사(壽陀寺)로 바꾸었다. 1861년(철종 12) 윤치(潤治)가 중수하였으며, 1878년(고종 15) 동선당(東禪堂)을 중건하였고 칠성각(七星閣)을 신축하였다. 수타사는 강원도 지역에서 한국전쟁 때 전란을 겪지 않은 몇 안 되는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1976년 심우산방(尋牛山房)을 중수하였고, 1977년 삼성각을 건립하였으며, 1992년 관음전을 신축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수타사의 심우산방 옆에는 수령이 500년 된, 높이 5m에 달하는 주목(朱木) 한 그루 서 있다. 강원도 보호수 제166호로 지정된 주목은 수타사의 이전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1568년 수타사를 이전할 때의 일이다. 한 노스님이 평소 짚고 다니던 주목 지팡이로 용안수(龍眼水)의 근원을 찾고, 그 옆에다가 지팡이를 꽂아두었다. 이 지팡이가 살아나서 지금과 같은 나무로 자랐다. 마을 사람들은 주목이 수타사를 지켜주는 신중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용안수는 위치상 대적광전 동북쪽 계곡에 있는 용담과 수맥이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한편, 용안수 옆에는 아랫부분만 남아 있는 대형 맷돌이 자리하고 있다.
수타사는 중앙 위쪽으로 근래에 새로 지은 원통보전이 있고, 그 왼쪽으로 금당인 대적광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원통보전과 대적광전 사이에 삼성각이 있고, 대적광전 앞 왼쪽으로 종무소와 식당으로 사용하는 백련당이, 그리고 그 건너편에 심우산방이라 부르는 동선당인 요사가 자리하고 있다.
수타사의 중심 법당인 대적광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시대 후기 사찰 전각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뒤쪽 중앙에 불단을 설치하였으며 불단 위에는 목조 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원통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근래에 신축한 것이다. 내부에는 목조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음보살좌상과 좌우 불단에 작은 천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대적광전 뒤쪽에 있는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로, 1977년에 건립한 것이다. 내부의 중앙에는 1895년 그린 칠성탱이 있고, 좌우로 1900년에 그린 산신탱과 독성탱이 모셔져 있다. 수타사 삼층석탑은 높이 150㎝의 화강암재 석탑으로, 현재 많은 부분이 결실되어 있다. 삼층석탑은 1984년 강원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수타사 입구의 부도밭에는 10기의 부도와 3기의 비석이 남아 있다. 부도는 기허당(騎虛堂)·서곡(瑞谷)·유화당(遊華堂)·중봉당(中峯堂)·청송당(靑松堂)·홍우당(紅藕堂)·홍파(洪波) 등 수타사에 머물던 고승의 것이다.
흥룡사는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포화로 236-73번지(도평리 38), 백운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백운산은 높이 903m로,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경기도의 명산이다. 백운계곡이 시작되는 곳에 흥룡사가 자리하고 있다.
흥룡사(興龍寺)의 연혁은 1706년 「백운산내원사사적(白雲山內院寺事蹟)」과 1732년 「백운사중수기(白雲寺重修記)」, 1927년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 1997년 『봉선사본말사약지(奉先寺本末寺略誌)』, 「흥룡사대웅전상량문(興龍寺大雄殿上樑文)」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흥룡사는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 절 이름은 내원사였다. 도선국사가 절터를 정할 때 나무로 된 새 3마리를 만들어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그 가운데 한 마리가 백운산에 앉아서 그곳에 절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백운사중수기」에 의하면, 고려시대 태조 왕건이 흥룡사를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지정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 무학(無學)이 중창하였으며, 1407년(태종 7) 왕실의 복을 기원하는 88개 자복사(資福寺) 중 하나로 천태종에 속하였다. 1638년(인조 16) 무영(無影)이 중건하였으며, 1639년 무영이 지혜(智慧)로 하여금 옛 절터를 찾아 선원을 세우게 하여 상선암(上禪庵)이라 하였다. 1648년(숙종 32) 청암(淸巖)이 보문암(普門庵)을 창건하였다. 1706년 「백운산내원사중수기」를 썼다. 1781년(정조 5) 성라십전(星羅十殿) 안에 모셔진 시왕·동자·장군·졸이(卒吏) 등의 상(像)을 새로 칠했다. 1786년(정조 10) 승려 태천(泰天)이 사찰을 중수하고 절 이름을 백운사(白雲寺)로 고쳤으며, 지감(智鑑)이 중수기문을 썼다.
1918년 승려 동호(東湖)가 큰방을 중건하였고, 1922년 승려 설하(渫河)가 대웅전을 중수하고 절 이름을 흑룡사(黑龍寺)로 고쳤다가 다시 흥룡사로 변경하였다. 1922년 박한영이 「흥룡사대웅전사량문」을 지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건물이 모두 불타 버렸다. 1957년 현재 절 위치에 관음전(현 요사)을 세웠으며, 1982년 백운당을 건립하였다. 1987년 대웅전을 건립했으며, 1990년 원각당을 세웠다. 1993년 대웅전, 2002년 삼성각을 중건하였다.
흥룡사는 인조 때 500여 칸의 건물과 선암(禪庵) 백 수십 칸, 요사 50여 칸 등 총 700여 칸 규모의 대사찰이었는데 그 규모가 창건 당시와 같았다고 한다. 흥룡사는 조선시대 건물 규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당시 유물로 보이는 것으로는 정조 때까지 있었다는 도선국사 부도와 세조가 하사한 어필족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창건 당시 도선국사가 주조했다는 철조약사여래상과 석가불도 있었는데 일제가 팔았다고 한다.
흥룡사는 축대 위에 조성된 대웅전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석조지장보살입상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입상(無毒鬼王立像)이 있으며, 아래쪽에 원통당과 오층석탑, 요사채와 청산 다원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은 모두 한국전쟁 이후 복원한 건물이다. 흥룡사는 천 년 이상 된 오래된 사찰이지만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것은 흥룡사청암당부도(興龍寺淸巖堂浮屠)와 흥룡사묘화당부도(興龍寺妙化堂浮屠) 2기만 남아 있다.
흥룡사청암당부도는 높이 170㎝의 팔각원당형으로, 인조 때 50여 칸의 보문암을 지었던 청암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흥룡사묘화당부도는 전체 높이 152㎝의 석조형 부도로, 보문암에서 입적한 것으로 추정되는 묘화당의 것으로, 1681년에 건립된 것이다. 흥룡사청암당부도와 흥룡사묘화당부도는 1986년 포천시 향토유적 제35호로 지정되었다.
용암사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742-28번지(용미리 산 11번지), 장지산 기슭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용암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용암사의 역사는 절 뒤에 있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용미리석불입상과 관계가 깊다. 용미리석불입상은 11세기에 만든 쌍석불(雙石佛)로서, 석불의 조성 배경과 용암사의 창건에 얽힌 전설이 전승되고 있다. 용암사는 석불이 만들어진 때를 창건연대로 삼고 있다. 용암사를 쌍석불사라고도 한다.
용문사는 창건 이후의 역사가 거의 전하지 않는다. 1936년 파주군의 유지들에 의해 옛 절터 위에 새롭게 중창되었다. 1953년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용암사를 방문했고 그 이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어머니가 절을 다녀갔다. 용암사 입구의 길이 넓혀진 것도 이때였다. 1978년 서호스님이 착공한 대웅전 불사가 1979년 현정스님에 의해 완성되었다.
1980년 대웅전에 지장탱화와 감로탱화가 조성되었다. 1982년 이래 요사를 꾸준히 증·개축하였다. 1984년에는 종각을 짓고 범종을 봉안하였다. 1997년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 몇 년 전에 재건축했으나 재원 부족으로 대웅전은 완성되지 못한 상태이다. 현재 스님들은 임시불전에서 거처하고 있다. 범종각에 안치된 범종(높이 197㎝, 종입구 115㎝)은 봉덕사종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다.
마을에서 속칭 ‘쌍미륵’이라 부르는 고려시대 쌍석불입상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고려 선종은 뒤를 이를 아들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후궁인 원신궁주(元信宮主)의 꿈속에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말하기를 “우리는 파주 장지산에 산다. 식량이 떨어져 곤란하니 그곳에 있는 두 바위에 불상을 새겨라. 그러면 소원을 들어주리라.” 하였다. 이를 기이하게 생각한 원신궁주는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였더니, 꿈속에서 두 도승이 말한 것처럼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서 있었다. 그래서 서둘러 불상을 만들었다. 그때 꿈에서 보았던 두 도승이 다시 공사장에 나타나서 왼쪽 바위는 미륵불로, 오른쪽 바위는 미륵보살상으로 조성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모든 중생이 와서 공양하며 기도하면,
아이를 원하는 사람은 득남하고
병든 사람은 쾌차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이후 불상이 완성되고 그 아래 절이 창건되자, 원신궁주의 몸에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그가 곧 한산후(漢山侯) 윤(昀)이었다고 한다. 용미리석불입상은 예로부터 아기 갖기를 원하는 부인들의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용미리석불입상은 바위 사이에 세로로 생긴 자연적인 틈을 이용해 만든 것으로, 흔히 왼쪽을 미륵불, 오른쪽을 미륵보살로 부른다. 왼쪽 미륵불은 전체 높이가 19.85m에 달한다. 한편, 1953년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용암사를 방문한 기념으로 왼쪽 바위에 있는 불상의 어깨 위에 조그마한 동자상 한 개와 그 아래쪽에 칠층석탑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를 요사 뒤쪽으로 옮겨 놓았다.
정암사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 1410번지(고한리 산 213번지), 태백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의 말사이다. 정암사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가운데 하나로 갈래사(葛來寺)라 하였다. 『갈래사사적기』에 의하면 자장이 말년에 강릉 수다사(水多寺)에 머물 때의 일이다. 하루는 자장의 꿈에 이승(異僧)이 나타나서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리라.”
하고 말하였다. 아침에 자장이 꿈속의 계시대로 대송정에 갔더니 문수보살이 나타나서 “태백산 갈반지(葛磻地)에서 만나자.” 하고는 사라졌다. 자장은 다시 태백산으로 들어가 갈반지를 찾아 다녔다.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똬리를 튼 것을 발견한 자장은 제자에게 이곳이 갈반지라 이르고 석남원(石南院)을 지었다. 이 절이 바로 정암사라는 것이다.
정암사와 관련하여 문수보살과 자장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설화가 전해온다. 자장이 정암사를 창건하고 문수보살이 오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이었다. 늙은 거사가 떨어진 방포를 걸치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와서는 “자장을 만나러 왔다.”라고 말했다. 시인(侍人)은 거사에게 대국통인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나무랐다. 거사는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여라.”라고 말했다.
시인은 마지못해 자장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자장은 미친 사람이라 생각하고 만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거사는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라는 말과 동시에 삼태기를 쏟았다. 죽은 강아지는 사자보좌(獅子寶座)로 변했고 거사는 그 보좌에 앉아 찬란한 빛을 발하며 가버렸다. 이 말을 들은 자장이 황급히 뒤쫓아 갔으나 거사는 벌써 멀리 가버려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자장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고, 그의 뼈를 석혈(石穴)에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정암사 일대는 ‘정암사의 열목어 서식지’로 천연기념물로 제73호로 지정되었다. 열목어는 눈에 열이 하도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북방계 어종인 열목어는 한여름에도 수온이 20℃ 이하인 곳에 서식한다. 그리고 열목어가 숨을 공간과 월동할 수 있는 늪이 있어야 하고, 물이 얕고 유속이 느리고 바닥에 자갈이 있어 알을 낳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정암사 일대는 이런 열목어의 서식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근래 보호구역 내의 수목이 일부 변형되었으며, 광산개발에 따른 수량 감소 등 열목어 서식 환경이 파괴되고 있다.
정암사는 남북으로 흐르는 계곡물을 따라 수행 공간인 적멸궁이 자리한 공간과 관음전, 육화정사, 요사 등의 생활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정암사 입구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일주문이 세워져 있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1977년 완공한 선불장(選佛場)이 있고, 오른쪽에 적멸보궁이 있다.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적멸궁’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적멸보궁에는 선덕여왕이 자장에게 하사했던 금란가사(金襴袈裟)가 보관되어 있었으나 1975년에 도난당했다고 한다.
적멸보궁 뒤쪽에 보물 제410호로 지정된 수마노탑이 있다. 또한 냇가에는 범종루가 있고, 선불장 옆에는 무량수각과 자장각, 삼성각이 있다. 정암사에 있는 전각 대부분은 1975년부터 1979년 사이에 이루어진 중건 불사 때 건립된 것이다. 이밖에 적멸보궁 입구의 석단에 선장단(禪杖壇)이란 고목이 자리하고 있다. 선장단은 자장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심은 것으로, 만약 이 나무에 꽃이 피게 되면 자장이 소생한다고 전해진다.
백담사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 백담로 746번지(용대리 690번지), 설악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백담사가 위치한 백담계곡은 설악산에서 수량이 가장 풍부한 곳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백담사는 647년(신라 진덕여왕 1) 자장이 설악산 한계리에 절을 세우고,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고 절 이름을 한계사(寒溪寺)라 하였다. 690년(신라 신문왕 10) 실화(失火)로 절이 소실되었으며, 719년(신라 성덕왕 18)에 재건되었다. 이때 중건과 관련된 전설이 「심원사사적기」에 수록되어 있다.
지금은 강원도 화천군으로 바뀐 낭천현(狼川縣)에 비금사(琵琴寺)라는 절이 있었다. 산 주변에 짐승들이 많아 사냥꾼이 득실거려서 산수가 더럽혀졌다. 비금사 승려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 채 매일 샘물을 길어 부처님께 공양하였다. 더러운 것이 싫었던 산신령이 절을 하룻밤 사이에 설악산 대승폭포 밑에 있는 옛 한계사 터로 옮겼다. 승려와 과객이 아침에 깨어보니 비금사는 비금사인데, 좌우로 기암괴석이 늘어섰고 전후로 폭포가 쏟아지는 등 이전과는 산이 달랐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하면서 어떻게 된 것인지 연유를 물을 때 난데없이 관음청조(觀音靑鳥)가 날아가면서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로 옮겼노라.”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785년(신라 원성왕 1) 다시 화재로 전소되었으며, 790년 종연(宗演)·광학(廣學) 등이 한계사 터 아래 30리 지점에 절을 옮겨 짓고, 운흥사(雲興寺)로 고쳤다. 984년(고려 성종 3) 다시 화재로 전소되어 운흥사지 북쪽 60리 지점으로 절을 옮겨 짓고 987년 심원사(深源寺)라 하였다. 1432년(세종 14) 네 번째 화재가 발생하여 절이 전소되었다. 1434년 동하(洞下) 30리 지점으로 절을 옮겨 짓고, 선구사(旋龜寺)라고 개칭하였다. 이때 의준(儀俊)·취웅(翠雄)·해섬(海暹) 등이 법당과 극락전, 요사채 2동을 건립하였다.
1443년 화재로 다시 절이 소실되었으며, 1447년 옛 절터에서 서쪽으로 1리쯤 떨어진 지점에 절을 세우고 영축사(靈鷲寺)로 고쳤다. 1455년(세조 1) 화재로 절이 소실되자, 신열(愼悅)·재익(載益)·재화(載和) 등이 옛 절터에서 상류로 20리 지점에 절을 중건하고 백담사라 하였다. 1775년(영조 51) 겨울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절이 전소되자, 최붕(最鵬)·태현(太賢)·태수(太守) 등이 인법당(因法堂)을 짓고 심원사(尋源寺)라 개칭하였다. 1783년(정조 7) 최붕·설담(雪潭)이 절을 중건하면서 다시 백담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5년 겨울에 화재가 발생하여 불상과 탱화 20여 위(位)를 제외한 70여 칸의 건물과 경전·범종 등이 모두 불타버렸다. 1919년 4월 법당과 화엄실(華嚴室)을 각각 20칸으로 중건하였으며, 1921년 봄 응향각(凝香閣)과 사무실 30칸 등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종과 북을 새로 만들어서 낙성법회(落成法會)를 개최하였다. 백담사는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57년부터 재건을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백담사는 거듭되는 화재를 피하고자 하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주지는 거듭되는 화재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주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대청봉에서 일백 개째 되는 웅덩이 옆에 절을 세우라고 하였다. 이튿날 주지는 노승이 점지한 대로 일백 번째 되는 웅덩이 옆에 절터를 잡아 중건하고 절 이름에 웅덩이 ‘담(潭)’를 넣어 절 이름을 백담사라 하였다. 이후 백담사에는 오랫동안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백담사의 건물로는 중심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법화실, 산령각, 요사채, 정문(正門), 화엄실 등이 있으며, 마당에는 삼층석탑 1기가 있다. 백담사에는 옛 문화재가 남아 있지 않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이 삭발하고 수도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용운은 백담사에서 『님의 침묵』, 『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등을 집필하였다. 백담사 앞 계곡에는 무수히 많은 돌탑이 서 있는데, 이 돌탑들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쌓아놓은 것이다.
조사장소 : 전주시 완산구 교동 승암사 도량에서
조사일시 : 2000. 6. 17.
제 보 자 : 도광스님(승람 33세)
미륵 상하생경에 의해서 우리가 미륵님을 만날 수 있거든요. 상하생경 미륵상생경 미륵하생경에 보면, 미륵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는 십선법이 유행하게 된다. 소위 그 열 가지 좋은 일, 열 가지 그런 아주 좋은 징조가 일어날 때 온다 그랬거든요. 열 가지 좋은 일, 바로 그것이 정토이고 극락이지요. 죽어 극락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미륵님이 오실 때에는 현세에 그 행복 그것을 갈구해서 그런거든요. 그러지 못하다 보니까 우리가 미륵을 갈구하게 되고 현실적인 욕망을 다 충족할 수 없으니까, 미래불인 미륵을 제시하고 있거든요. 미래불인 미륵을 제시하는 것이 대부분이 머냐하면 거기에 근본 가치라든가 목적하고 부합되지 않는 이야기라. 아들 딸 잘 낳고 구하고. 그래서 어 이 미륵님도 많이 마모가 됐어요. 그래서 머 막 캐간거요. 쪼아 간거라. (조사자 : 아들 딸 낳을려구요?)
그래요. 그랬다고 그려요. 그래서 스님들이 그런 거 자체를 전혀 여기 스님들은 간섭을 안했답니다. 거기 보며는 밑에가 두리벙벙허거든. 근데 음 땅에 묻혀 있는데, 그런 것도 궁그러 다니는 것을 한 40년대에 그렇게 혀 놓았다고 그려요. 그러니까 여기가 전주천이 소위 그 한벽루가 전주 몇 경에 들어가잖아요? 남고천의 빨래하는 아이들이라든가 전주천의 그 아낙들 말이여. 그런 모습을 혔다고 그려요. 전주천이 굉장히 넓었어요. 전주천을 아낙네들이 발을 걷고 건너왔대. 그런데 상당히 물이 차고. (조사자: 미륵님 만나기 위해선가요?)
그렇지. 건너와가지고 미륵님에게 참배하고. 참배까지 했으면 좋은데. 돌을 코 있는데 그것을 깎아가고 그렸다고 그려요. 그래서 마모가 됐다. (조사자 : 미륵님이 영험하셨나 봐요? 전주천 물을 건너오고.) 전주에 유독 미륵님이 없습니다. 몇 군데 있기는 있는데, 다른데 보다도 그 불상을. 음 불상을 요 전주 요 부근에는 미륵님이 없어요. 익산이라든가 정읍 고창 저런 쪽으로 가면 있는데, 부안쪽으로 가면 많이 있는데 여기는 유독 없는 편이요.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스님들이 가져가라고 혔다고 그려요. 물 건너올 것 없이 당신들 그렇게 뽑고 싶으면 가지고 가라고 혔어. 크기는 사람의 무릎 정도 이만 밖에 안혀요. 지금 파서 돌 위에다 올려놓았어요. 마모가 아주 심허고.
청룡사는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지길 147번지(오량리 561-1번지), 청계산에 있는 한국불교법화종 소속 사찰이다. 청룡사의 창건연대와 창건주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에 절이 번창했고, 조선시대까지 향화(香火)를 이어왔으나 근대에 들어서 폐사되어 터만 남아 있다. 그런데 청룡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청룡사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도승에 의해 창건되었다. 청룡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어느 화창한 봄날 한 도승(道僧)이 청계산 근처를 지날 때였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급히 나무 밑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공중에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갖고 장난을 치다가 땅에 떨어트렸다. 용 한 마리가 날래게 여의주를 향해 내려오다가 청계산 위로 올라갔다. 여의주가 큰 빛을 발하다 사라지고 용도 함께 사라지며 비도 멈췄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도승이 산세를 살펴보니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 길지(吉地)였다. 도승은 용의 힘이 꼬리에 있다는 기억하고 그곳에 암자를 세우고 절 이름을 청룡사라 하였다.
1392년(태조 1) 보각국사(普覺國師)가 청룡사에서 은거하다가 입적하자, 태조가 보각국사를 애도하여 대사찰을 중창하였다. 1921년 혜종(惠宗)이 폐허로 남은 옛 절터의 북쪽 암자 자리에 전각을 짓고 절을 중창하였다. 1959년 절을 중수하였으며, 1996년 주지 현우가 요사를, 1998년 법당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굴지의 명찰로 유명했던 청룡사가 폐사하게 된 내력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조선시대 말기 민씨들이 세도를 부릴 때의 일이다. 당시 판서로 있던 민대룡(閔大龍)이 이곳에 소실의 묘를 쓰기 위해 머슴을 시켜 청룡사에 불을 지르게 하였다. 이때의 화재로 청룡사는 폐사가 되었으며, 머슴은 인다락 고개를 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 뒤 민대룡은 청룡사 위쪽에 소실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이 소실의 무덤을 찾아 묘역을 돌보면 해를 입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소실의 무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지금도 민대룡의 후손은 먼발치에서 산소를 바라보고 청룡사에서 참배하고 올라간다. 소실의 무덤에 잡초가 무성하면 청룡사의 주지가 풀을 베어 준다고 한다.
현재의 청룡사에서 200m 떨어진 지점에 고려시대부터 번창했던 청룡사의 절터가 남아 있다. 이곳에는 국보인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普覺國師定慧圓融塔)과 보물인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전사자석등·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과 적운당(跡雲堂)사리탑과 청룡사위전비(位田碑) 등이 남아 있다.
청룡사의 건물로는 요사를 겸하는 법당과 삼성각이 있다. 법당 내부에는 약사여래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근래에 조성한 신중탱화·감로탱화가 모셔져 있고, 법고와 동종이 있다. 중앙에 있는 목조 여래상은 높이 420㎝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법당의 서북쪽에 있는 삼성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삼성각 뒤쪽 벽면은 자연 암벽을 활용하여 건립한 점이 특이하다. 즉 건물 절반이 자연 암반으로 지어진 것으로, 내부에는 칠성상·산신상·독성상을 마애불상 형식으로 조성하였다.
창룡사는 충청북도 충주시 고든골길 63-89번지(직동 336번지), 금봉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법주사의 말사이다. 창룡사는 금봉산 중턱 언저리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형적으로 보아 명소임을 알 수 있다. 창룡사의 역사는 1730년에 쓴 「창룡사관음상연기문(蒼龍寺觀音像緣起門)」, 1913년에 쓴 「충청북도충주군남변면금봉산창룡사중건후불준병기(忠淸北道忠州郡南邊面錦鳳山蒼龍寺重建後佛準竝記)」, 1939년에 쓴 「창룡사성불봉안기(蒼龍寺聖佛奉安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창룡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건하였으며, 조선 선조 때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1652년(효종 3) 대대적으로 중수되었고, 1730년(영조 6) 관음상을 봉안하였다. 당시 대웅전·요사 등의 건물이 제법 컸다고 한다. 1870년(고종 7) 당시 충주목사인 조병로(趙秉老)가 현재의 세무서 자리에 군사시설인 수비청(守備廳)을 건축하기 위해 창룡사의 법당을 헐었다.
그래서 창룡사는 요사 1채와 불상 1개만 남아 겨우 사찰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1905년 여신도 박씨의 원력(願力)으로 법당을 건립하였고, 1913년 후불탱화를 봉안하였으며 불상을 개금하였다. 1938년 새로운 불상 1체를 봉안하였다. 1951년 동인(東寅)이 중건하였고, 1975년 도관(道觀)이 중창하였다. 1993년 정도(靜道)가 기존의 대웅전을 해체하고 현재의 극락보전으로 새로 중건하였다. 이때 칠성각을 철거하고 산신각을 세웠다.
창룡사에는 창건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창룡사는 금봉산 중턱에 있는 고찰이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가 충주 고을을 지나다가 한 객주에 묵었다. 원효는 꿈속에서 여의주를 물고 날아가는 푸른 용을 보고 하염없이 뒤를 쫓아갔다. 원효가 목이 타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름다운 처녀를 보았다. 처녀는 표주박에 물을 떠주면서 원효에게 “이곳이 참 좋지요?” 하고 물었다. 처녀가 건넨 물을 먹으니 꿀맛 같았다. 잠에서 깬 원효는 그것이 관음보살의 현몽으로 여기고 자신이 꿈에서 본 장소를 찾아 나섰다. 마침내 지금의 절터에 이르렀을 때 꿈속에서 본 장소와 일치하여 절을 짓고 아미타불을 모시고 창룡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창룡사의 건물로는 극락보전·산신각·요사 등이 있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반,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93년에 기존의 대웅전을 해체하고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가운데 아미타불이 있고, 좌우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극락보전 아미타삼존의 좌협시 보살상인 목조 관음보살상은 높이는 98㎝, 어깨 폭은 47㎝로 1730년에 조성하여 봉안한 것이다.
산신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93년에 기존의 칠성각을 해체하고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한 독성도와 산신도가 모셔져 있다. 창룡사에는 높이 63㎝, 지름 38㎝ 정도의 범종이 있다. ‘창룡사 주지 이유환’, ‘동경시 매전제’ 등의 글씨가 새겨진 것으로 볼 때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수입한 제품으로 보인다. 창룡사 앞뜰 석축 위에 청석탑이 세워져 있다. 청석탑의 높이는 97㎝이고, 옥개석만 9층으로 쌓아 올려진 모습이다. 청석탑은 비록 파손되고 결실된 부재가 많지만, 치석과 장식 방식이 우수하여 2006년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되었다.
학림사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덕릉로 129가길 241번지(상계동 1번지), 수락산 남쪽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학림사는 온통 하늘을 뒤덮은 느티나무 숲이 경내를 감싸고 있다. 학림사란 절 이름은 산세의 모양이 마치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학포지란(鶴抱之卵)의 형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학림사는 예로부터 나한 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또한 약사여래의 가피력(加被力)이 커서 기도를 통해 병마를 극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학림사는 671년(신라 문무왕 11) 원효(元曉)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학림사에 머물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 1624년(인조 2) 무공(無空)이 폐허가 된 학림사에 법당을 지어 중건하였다. 1780년(정조 4) 최백(崔伯)·궤징(軌澄)이 중수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단청을 새로 하였다. 1830년(순조 30) 추담(秋潭)이 중창하였다. 1880년(고종 17) 영성(影惺)·경선(慶船)이 판관(判官) 하도일(河道一)의 주선으로 왕실의 하사금으로 절을 중수하였다. 1918년 4월 주지 금운(錦雲)이 네 번째로 중수하였다. 연응(淵凝)이 쓴 「학림암대방여각전각중수기(鶴林庵大房與各殿閣重修記)」에 의하면, 당시 상황을 “전각이 낡고 기울어 거꾸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고, 이를 보다 못한 금운화상이 발심하여 작은 물건까지도 모두 보시하여 다시 세우니, 가히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하다.”라고 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일부 건물이 소실되어 퇴락한 절을 도원이 주지로 있으면서 각종 불사를 일으켜 사격(寺格)을 크게 신장시켰다. 1985년 기존의 전각을 허물고 개축하였고, 대웅전·오백나한전·설법전 등 여러 건물을 신축하였다. 1994년 노원역 부근에 600평 규모의 불교회관을 완공하였다. 학림불교회관은 각종 법회뿐만 아니라 경전 강의, 문화강좌 등을 운영하여 포교와 교육의 도량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학림사는 유치원과 노인대학을 통하여 복지 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학림사의 건물로는 대웅전·오백나한전·설법전·선불장·청학루·삼성각·약사전·요사 3동·식당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사면에 터를 다듬어 세웠다. 내부에는 단층의 닫집을 설치하여 신라시대 말엽에 조성되었다는 청동석가여래상과 소형의 아미타여래와 탄생불이 있고, 석가여래후불탱화와 지장탱화,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오백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2012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약사여래삼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석조약사여래삼불좌상은 가운데 약사여래가 있고 좌우에 여래상이 자리하고 있다. 약사불의 높이는 58㎝이고, 좌우 협시불은 각각 52.2㎝, 46.2㎝이다. 석조약사여래삼불좌상이 본래 삼세불 성격으로 함께 제작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약사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2006년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높이 77㎝, 어깨너비 53㎝, 좌대 높이 42㎝의 석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삼성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1985년 조성한 산신탱화·독성탱화·칠성탱화가 모셔져 있다. 설법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청학루라고도 한다. 선불장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요사이다. 2006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학림사 삼신불괘불도(三身佛掛佛圖)는 가로 256㎝, 세로 443㎝로, 1749년(영조 25)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석종형(石鐘形) 부도 2기가 있다.
청룡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망산길 65번지(숭인동 17-1번지)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이다. 청룡사(靑龍寺)는 922년(태조 5) 도선국사의 유언에 따라 왕명으로 지어졌다.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하는 능선에 지었으며 절 이름을 청룡사라 하였다. 제1대 주지로 비구니 혜원(慧圓)이 주석한 이래 계속 비구니 스님만이 주석한 것이 특징이다. 1036년(정종 2)에 만선(萬善)이 처음으로 중창하였고 1158년(의종 12) 회정(懷正)이 두 번째로 중창하였다. 이때 보문사(普門寺) 창건 이후로 처음 건립된 절이라 하여 “새절 승방”이라 하였다. 1299년(충렬왕 25) 몽골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절을 지환(知幻)이 중창하였다.
1405년(태종 5) 무학(無學)을 위해 왕명으로 중창하였다. 청룡사는 도선국사 이래 두 번째로 왕명에 의한 중창되었다. 1512년(중종 7)과 1624년(인조 2) 법공(法空)과 예순(禮順)에 의해 각각 중창되었다. 1771년(영조 47)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가 청룡사에 머물렀다고 하여 영조가 직접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내리고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 절 이름을 잠시 정업원이라 불렀다. 영조 때 만든 비석과 비각은 아직도 절에 남아 있다.
1813년(순조 13)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814년 묘담(妙潭)·수인(守仁)이 중창하였다. 1823년(순조 23) 왕명으로 본래 이름인 청룡사로 고쳤다. 1902년(고종 6) 정기(正基)·창수(昌洙)가 중창하였고, 1918년과 1932년 상근(詳根)이 중창하였다. 1954년~1960년 사이에 윤호(輪浩)가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 대웅전은 1973년에 다시 중창한 것이다.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권을 찬탈당한 뒤 영월로 유배되었다. 정순왕후는 단종과 이별한 후 단종이 있는 영월 방향이 가장 잘 보이는 청룡사에 머물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출가하여 허경(虛鏡)이란 법명을 받았으며, 정순왕후를 따라온 일행 5명도 전부 비구니가 되었다. 정순왕후는 청룡사에서 수도 정진하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청룡사 앞에 있는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단종이 유배 간 동쪽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동망봉(東望峯)’이라 불렀다. 훗날 영조가 ‘동망봉’이라는 글자를 써서 그곳 바위에 새기도록 하였는데, 일제강점기 때 비행장을 만들면서 글씨가 새겨진 바위를 깨트려 없었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청룡사에서 65년간 수도하다가 82세의 나이로 열반하였다. 1698년(숙종 24)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의 비인 정순왕후도 함께 복위되었다. 영조는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청룡사 경내에 ‘정업원구기’라는 친필을 하사해서 비각을 세우게 하는 등 정순왕후의 넋을 위로하였다.
청룡사의 건물로는 대웅전·명부전·산신각·심검당(尋劒堂)·산령각·칠성각·독성각·우화루 등이 있다. 청룡사의 건물들 대부분은 최근에 신축된 것인데 전각을 산지중정형(山地中庭形)으로 배치하여 조선시대 중기의 전형적인 사찰 구성을 보여준다.
청룡사에는 2014년 보물로 지정된 17세기에 조성한 석지장삼존상과 시왕상 일괄이 있고, 1868년(고종 5) 제작한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칠성도(七星圖), 현왕도(現王圖)와 1898년(광무 2) 제작한 감로도(甘露圖), 1902년 제작한 신중도(神衆圖), 가사도(袈裟圖), 석조삼불상(石造三佛像) 등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이밖에 청룡사와 관련된 고적으로는 동망봉·자주동·영리교 등이 있다.
자재암은 경기도 동두천시 평화로 2910번길 145번지(상봉암동 산1), 소요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자재암은 654년(신라 무열왕 1) 원효(元曉)가 창건한 고찰이다. 자재암 창건과 관련해서는 원효가 관음보살을 만나 자기의 수행력을 인증받았다는 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자재암 창건 이래의 역사는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따르면, 974년(고려 광종 25) 각규(覺圭)가 태조의 명으로 중창하였다. 1153년(고려 의종 7) 화재로 건물이 유실된 것을 각령(覺玲)이 대웅전과 요사를 복구하였다. 1872년(고종 9) 원공(元空)·제암(濟庵)이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영원사(靈源寺)로 잠시 바꿨다. 이 당시에 건물로는 독성각(獨聖閣)·만월보전(滿月寶殿)·별원(別院)·산신각(山神閣)·영산전(靈山殿) 등이 있었다고 한다.
1907년 화재로 만월보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1909년 성파(性坡)·제암이 다시 절을 중창하고 절 이름을 본래대로 자재암으로 고쳤다. 이때 전각(殿閣)뿐만 아니라 약사여래상과 관음보살상·지장보살상 등의 불상과 함께 자재암의 유래와 관련이 깊은 원효·의상(義湘)·윤필(尹弼) 등의 화상(畵像)을 제작하여 봉안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건물이 다시 소실되었다. 1961년 진정(眞靜)이 대웅전을, 1968년 성각(性覺)이 요사채를, 1977년 법조(法照)가 삼성각(三聖閣)을 세웠다. 1984년 자재암 부설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83년부터 1985년 사이에 구건물을 허물고 새롭게 건립하였다.
자재암이 있는 소요산은 비록 산은 높지 않으나 깊고 넓어서 곳곳에 풍광 좋은 절경이 많다. 자재암의 남쪽 일주문 위로 원효폭포가 있어 여름이면 장관을 이루고, 원효봉에 오르면 사방을 두루 볼 수 있다. 원효봉 부근을 백운대라 한다. 백운대는 높이에 따라 달리 부르는데, 원효폭포가 있는 곳을 하백운대, 자재암 근처를 중백운대, 산의 정상 부근을 상백운대라 한다. 자재암 앞 10m 거리에 옥류폭포가 있고, 다시 그 앞으로 동굴이 있다. 동굴 안에 원효대사가 기거하면서부터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원효정이 있다. 하백운대 일대에는 원효와 요석공주와의 전설에 얽힌 요석궁지와 조선 태조의 행궁터가 있다. 요석궁지는 요석공주가 원효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고 양육하던 곳이다.
행궁터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1398년(태조 7) 태조 이성계는 왕위를 물러나 상왕의 위치에서 자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이 형제간의 난을 일으키고 14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에 태조는 서울을 떠나 함흥으로 은둔해 버렸다. 태종은 태조를 다시 서울로 모시기 위해 여러 번 사신을 보냈다. 완강히 태종의 권유를 물리치던 태조는 함흥에서 1년 만에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태조는 바로 한양으로 가지 않고 소요산에서 잠시 머물다가 회암사로 옮겼다. 태조가 소요산에 머물 때 만든 것이 행궁터라고 한다. 그러나 태조가 자재암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하지 않는다.
자재암은 역사가 오래된 사찰로서 그에 상당한 유적과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나, 절에 남아 있는 유물은 1994년 보물 제1211호로 지정된 『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 언해본(金剛般若波羅密多心經略疎諺解本)』 1책을 제외하고는 모두 최근 것들이다. 『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 언해본』은 한문으로 된 『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간추려서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자재암에 소장된 『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 언해본』은 1464년(세조 10) 간경도감에서 발간한 것으로 국내에 2점만 남아 있다. 책의 크기는 가로 19㎝, 세로 26㎝로, 각 장은 8행 19자로 되어 있다. 『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 언해본』은 국역 당시 국어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봉선본말사지』에 의하면, 중국 명나라 숭정 황제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친필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흥왕사는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당전로 345-4번지(중암리 438번지), 소달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소달산은 높이 358m로, 경기도 양평군 천송리 신륵사 하구로 흐르는 금당천과 여주시 북내면 중암리를 가로질러 흐르는 완장천 사이에 있다. 흥왕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고려시대 초기 소달(蘇達) 또는 고려시대 말기 혜근(惠勤)이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봉은본말사지』에 의하면, 1905년 이전까지 흥왕사는 상왕사라 불렀다고 한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의 일이다. 소달이라는 도승이 절을 세우려고 이 산꼭대기에서 백일기도를 드렸다. 5월 말에 백일기도를 마치고 산을 둘러보니, 지금 절이 위치한 자리에만 초여름인데도 새하얀 서리가 내렸다. 소달은 이곳이 부처님이 정해준 절터라고 여기고 절을 지어 상왕사(霜旺寺)라고 하였다. 이후 소달의 이름을 따서 산 이름을 소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흥왕사는 여주의 이름난 고달사와는 형제와 같은 절로, 다음과 같은 소달과 고달 형제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고달과 소달은 형제였다. 고달이 고달사를 창건한 것은 이 절에서 태어날 장사를 훌륭히 키워 국가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반면 소달은 절을 진리의 도량으로 생각하고 오랫동안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겠다는 소망으로 상왕사를 창건하였다. 그래서 고달사는 한때 고려의 명문 사찰로 이름을 날렸으나 일찍 폐사되었고, 상왕사는 조용히 은거하며 그 법을 이어가 지금도 법등(法燈)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흥왕사와 관련된 사적은 1905년 창석산인(蒼石散人) 쓴 「상왕사법당중건상량문(霜旺寺法堂重建上樑文)」과 단하거사(丹霞居士)가 쓴 「소달산상왕사불상개금기(蘇達山霜旺寺佛像改金記)」가 『한국사찰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두 기록에는 고려시대 말에 불교의 중흥조였던 나옹선사가 상왕사에 머물며 공덕원을 세웠다고 한다. 흥왕사는 창건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의 역사는 전하는 바가 없다.
1900년대가 지나서 중수한 사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조선시대에 사세가 기울었거나 아니면 폐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 돈묵(頓黙)이 법당을 중건하였고, 1922년 성묵(性黙)이 중수하였다. 1932년 윤익(潤益)이 중수하고 1933년 다시 동쪽 요사를 신축하였다. 1938년 서쪽 요사를 신축하고, 1943년 법당을 중건하였다. 1966년 장지윤(張智潤)이 칠성각을 단청하고 대방을 보수하였으며, 1968년 사찰 진입로를 정비하여 사찰을 일신하였다.
1974년 성진(性眞)이 주지로 부임하였고, 1992년 선과(禪棵)가 주지로 취임하여 기존의 전각을 허물고 대웅전·삼성각을 신축하였다. 근래 주지로 부임한 영정이 극락전을 비롯하여 범종각, 삼성각, 요사채 2동을 조성하여 옛 사찰의 모습을 복원하고 있다. 흥왕사의 문화유산으로는 1892년 제작된 아미타후불탱화·독성탱화·아미타탱화·신중탱화(2점)와 1905년에 돈묵이 중건하면서 모신 산신탱화·칠성탱화·현왕탱화가 있다.
삼화사는 강원도 동해시 삼화로 584번지(삼화동 172번지), 두타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삼화사는 강원도 국민관광지 제1호로 지정된 두타산의 무릉계곡 초입에 있는 거대한 무릉반석 조금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 동해시 최대의 사찰이다. 삼화사는 예전에 삼공사(三公寺) 또는 흑련대(黑蓮臺)라고도 하였다. 삼화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3가지 설이 전해진다.
첫째, 고려시대 말기 식영암(息影庵) 스님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말의 어느 날이었다. 세 신인(神人)이 각기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이곳에 와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논의하였고 돌아갔다. 지방 사람들은 이곳을 ‘삼공(三公)’이라 이름하였다. 얼마 뒤 범일(梵日)이 이곳에 들러 절을 창건하고는 삼공사라 하였다고 한다.
둘째, 읍지(邑誌)에 의하면, 642년(신라 선덕여왕 11)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慈藏)이 오대산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성적(聖蹟)을 유람하다가 두타산에 와서 흑련대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삼화사라는 것이다.
셋째, 고적(古蹟)에 의하면, 약사삼불(藥師三佛)인 백(伯)·중(仲)·계(季) 3형제가 서역에서 돌배[石舟]를 타고 유력하다가 우리나라 동해 두타산에 이르렀다. 첫째는 검은색 연꽃을 가지고 흑련대(黑蓮臺)에, 둘째는 푸른색 연꽃을 가지고 청련대(靑蓮臺)에, 셋째는 금색 연꽃을 가지고 금련대(金蓮臺)로 갔다. 이렇게 해서 창건된 절이 지금의 삼화사·지상사·영은사라는 것이다.
삼화사는 임진왜란 때 왜군들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 1747년(영조 23) 홍수와 산사태로 무너졌다. 그래서 옛 절터에서 조금 위쪽으로 옮겨 중창하였다. 1820년(순조 20) 화재로 소실되자 1824년 중건하였다. 1829년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정원용(鄭元容)·이기연(李紀淵)·이광도(李廣度) 등이 협력하여 중건하였다. 1869년(고종 6) 화운(華雲)·덕추(德秋)가 단청하였고, 1873년(고종 10) 참선수행처인 선당(禪堂)을 건립하였다.
1896년 학송(鶴松)·창명(彰明)·의경(誼鏡)이 승당(僧堂)을 세웠다. 1905년 삼척 지방 의병이 봉기하여 삼화사를 거점으로 삼자, 1907년 왜병이 대웅전·선당 등 200여 칸의 건물에 불을 질렀다. 1908년 승려와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대웅전·칠성당·요사 등을 신축하였다. 1977년 쌍용양회 동해공장의 채광권에 속하자, 1979년 8월 지금의 자리로 옮겨 절을 중건하였다. 이때 1908년 중건된 건물을 전부 그대로 옮겨왔다.
삼화사는 1977년 현재의 부지로 이전하면서 새롭게 정비되었다. 현재 삼화사는 적광전을 중심으로 여러 전각이 있는 영역과 삼층석탑 영역, 그리고 비로전 영역으로 삼등분할 수 있다. 삼화사의 건물로는 적광전·극락전·약사전(藥師殿)·비로전·칠성당·일주문·천왕문·범종각·요사 등이 있다. 적광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삼화사의 중심 법당이다. 190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08년 신축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었는데, 보물 제1292호로 지정된 철조 노사나불좌상을 봉안하면서 적광전으로 변경하였다.
극락전은 근래에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예전 대웅전에서 모셨던 불상들과 불화들을 그대로 옮겨 봉안하였다.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97년에 건립되었다. 내부에는 중앙에 약사삼존불이 있고, 좌우로 소형의 원불(願佛)을 배치하였다. 비로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최근에 건립한 것이다. 삼화사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삼화사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칠성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08년 중건 당시 건립되었다.
일주문은 1980년에 건립된 것으로, ‘두타산삼화사(頭陀山三和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글씨는 탄허(呑虛)의 필적이다. 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0년에 건립되었다가 2000년에 중수되었다. 범종각 앞에는 현재 보물 제1277호로 지정된 높이 4.9m의 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 삼층석탑 주변에 1979년 건립한 삼층석탑 1기와 석등 2기가 있다. 동해불교대학 뒤쪽 부도밭에 석종형 운암당상준대사부도(雲巖堂尙俊大師浮屠)와 원곡당대선사부도(元谷堂大禪師浮屠), 그리고 최근에 건립한 만각당영해대화상부도(晩覺堂永海大和尙浮屠)와 성암 큰스님 부도 등이 있다.
동대 관음암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432-91번지(동산리 1), 오대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산내 암자이다. 월정사에서 큰길을 따라 400m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작은 골짜기와 함께 산길이 나타난다. 이 길을 따라 2㎞가량 올라가면 높은 축대를 쌓고 건축한 동대암(東臺庵)이 있다. 동대암은 오대산의 동대(東臺)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대암을 관음암(觀音庵)이라 지칭하는 것은 오대산의 동대(東臺)가 1만 관세음보살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믿음과 더불어 보천(寶川)태자의 유언에 따라 관음방(觀音房)을 세우고 창건하였기 때문이다.
보천태자는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의 아들이자 제33대 성덕왕(聖德王)의 형이다. 신문왕의 두 아들인 보천과 효명은 오대산에서 여러 부처의 진신을 참배하고 각각 암자를 짓고 수도하였다. 어느 날 신문왕의 동생이 왕권을 다투다가 쫓겨나자 신하들이 오대산으로 와서 보천태자를 왕으로 옹립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보천태자는 울며 한사코 왕위를 거절하였다. 이에 효명태자를 왕으로 옹립하였으니 그가 바로 성덕왕이다. 보천태자는 임종 직전에
“이 오대산은 백두산의 큰 줄기이며,
각 대(臺)는 진신이 언제나 머물러 계신 곳이다. …
동대에는 마땅히 관음방을 두어 원상관음(圓像觀音)과 함께
푸른 바탕에 1만 관음상을 그려 봉안하며,
복전(福田) 5원(五員, 5명)을 두어
낮에는 8권의 금광명경(金光明經)과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 천수주를 독송하게 하고
밤에는 관음예참(觀音禮懺)을 염하게 하라.
그리고 그 결사의 이름을 원통사(圓通寺)라 하라.”
는 유언은 남겼다. 보천태자의 유지를 받들어 창건 이래 천 년이 넘도록 관음신앙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한국전쟁 때 군의 작전에 따라 소각된 이후 20여 년 동안 폐허가 된 동대암을 1971년 조용벽(趙龍壁)·장랑진(張琅鎭)의 보시로 인법당(因法堂)과 요사채를 중건하였고, 1996년 월면(月面)이 요사채를 허물고 새롭게 지었다. 동대암 법당 내부에는 예전 전통대로 관세음보살좌상을 모셔 놓았다.
동대 관음암에는 불교도들에게 모범이 되는 구정(九鼎)의 수행담이 전해지고 있다. 동대 관음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그마한 토굴이 하나 있다. 이 토굴은 구정이 출가하여 공부하던 곳이라 전한다. 옛날 비단 장사를 하던 청년이 있었다. 청년이 고개를 넘다가 길가에 가만히 서 있는 스님을 보았다. 청년은 스님에게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노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내 몸의 피를 빨아먹는 중생들의 공양 시간이라네. 피를 잘 빨아먹으라고 가만히 서 있지.”라고 대답하였다. 노스님은 말을 끝내고 발걸음을 옮겼다. 청년은 스님의 말씀에 감동하여 자기도 모르게 노스님을 따라 동대암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출가하게 되었다.
청년이 행자 생활하던 때였다. 하루는 노스님이 솥을 새로 걸어야겠다고 하며 행자에게 그 일을 맡겼다. 행자는 정성스럽게 솥을 걸고 노스님에게 “솥을 다 걸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노스님은 “이곳이 삐뚤어졌으니 새로 걸어라.”라고 말하고는 그냥 들어가 버렸다. 행자는 자기가 봤을 때 조금도 틀어진 곳이 없지만 노스님의 말씀대로 다시 솥을 걸었다. 그렇게 솥을 걸고 허물기를 무려 아홉 번이나 하였다. 마침내 노스님은 행자에게 “솥을 바로 걸었다.”라고 하였다. 노스님은 행자가 솥을 아홉 번 고쳐 걸었다고 하여 구정(九鼎)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대선사 무염(無染)임을 밝혔다.
어느 날 구정은 무염을 찾아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물었다. 무염은 “즉심이 불이니라” 하였다. 구정은 ‘즉심이 부처’라는 스승의 말을 ‘짚신이불’이라는 말로 잘못 알아들었다. 그날부터 구정은 자기 짚신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어째서 이 짚신이 부처인고?” 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하루는 “짚신아, 네가 어째서 부처냐?”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짚신의 끈이 뚝 끊어지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하였다고 한다. 이후 많은 스님이 동대 관음암을 찾아왔다. 동대 관음암 입구에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 부도 22개가 있다. 대부분 석종형 부도로, 금성당(金聖堂)·운공성관대사(雲空性觀大師)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부도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 고승으로 짐작된다.
만일사(晩日寺)는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천흥4길 503번지(천홍리 63번지), 성거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만일사는 921년(고려 태조 4)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도선은 898년 입적하였다. 또한 고려시대 혜종 때 만일(晩日)이 이 절에서 머물면서 석굴 안의 석상을 조성하고 오층석탑을 세운 이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현재 대웅전에 봉안된 동제관음보살상 뒷면에 ‘통화(統和) 20년’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1002년(고려 목종 5) 무렵에 절이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1982년 만일사 경내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삼국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 만일사의 창건연대를 소급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만일사의 역사적 기록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만일사(萬日寺)’라는 절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전기까지 명맥을 이어오던 만일사는 1799년 편찬된 『범우고』에서는 폐사되었다고 한다. 1876년(고종 13) 관음전이 신축되었으며, 1970년 기존의 건물을 허물고 현재의 법당을 신축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고려시대 초기 도선이 이곳에 다다랐을 때의 일이다. 백학 한 쌍이 내려와 불상을 조성하고 있었다. 백학은 사람의 인기척이 나자 조성을 중단하고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에서 성거산을 굽어보던 백학들은 현재의 만일사 자리가 불상을 만들 최적의 장소라고 여겼다. 그래서 백학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그만 날이 어두워지자 작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해가 저물어 불상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절 이름을 만일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 마애불은 만일사의 관음전과 영산전 사이의 동쪽 암벽 위에 자리하고 있다. 위의 이야기는 한 쌍의 백학(白鶴)이 하늘에서 내려와 석불좌상을 조각하다가 해가 저물어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불상과 사찰 연기 전설이다.
만일사의 건물로는 대웅전·관음전·영산전(靈山殿)·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1970년대 개축한 것이다. 대웅전을 해체·복원할 때 본래의 주춧돌 등 부재를 묻어버렸다고 한다.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50호로 지정되었다. 만일사 오층석탑은 높이 227㎝로,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1970년 대웅전을 해체하여 복원할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놓은 것으로,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5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1층 답신은 복원할 때 잘못하여 거꾸로 되어 있다.
만일사 마애불은 법당 뒤의 자연 암반에 부조된 것으로 미완성인 형태이다. 풍화로 인한 마멸이 심해 윤곽을 알아보기 어렵다.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55호로 지정되었다. 만일사 석불좌상은 관음전 뒤쪽 축대 위에 있는 자연 동굴 속에 조각되어 있다. 석불좌상의 높이는 164㎝ 크기로 대좌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대형 석불같이 보인다. 석불좌상의 무릎 사이의 너비는 1m이며,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만일사 금동불상은 배면 아래쪽에 ‘통화이십년천흥사(統和二十年天興寺)’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1002년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금동불상의 높이는 127㎝, 연화대좌의 높이는 34㎝, 보관 높이는 13㎝, 어깨 폭은 33㎝, 팔 길이는 41㎝이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감로수 병의 크기는 16㎝이다. 일제강점기 때 사금을 채취하던 사람들이 땅속에서 발견한 것으로, 일본인이 매입하여 보관하였다가 철물공출 때 공출된 것을 임홍근 주지가 수거하여 지금의 만일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영감사는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713-77번지(동산리), 오대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산내 말사이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를 향해 2㎞가량 가다가 서북쪽으로 1㎞ 정도 떨어진 곳에 영감사가 자리하고 있다. 영감사는 645년(신라 선덕왕 14) 자장(慈藏)이 월정사와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1396년(고려 공민왕 18) 나옹(懶翁)은 공민왕의 곁에 있으라는 청을 마다하고 영감사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무르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영감사는 수행과 기도 도량보다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찰로 더 유명하다.
임진왜란 이후 조정에서는 풍수설에 근거하여 오대산·마니산·묘향산·태백산의 4곳에 외사고(外史庫)를 설치하였다. 1606년(선조 36) 퇴락한 영감사를 중창하여 오대산 사고로 만들었다. 이후 영감사는 사고를 돌보는 절이라 하여 사고사(史庫寺)라 하였다. 『사고절목(史庫節目)』에는 1717년(숙종 43) 응원(應元) 등이 조정에 올린 상소문이 남아 있다. 상소문에 따르면, 사고에는 화재의 위험이 따르므로 봄가을로 20명씩 수직(守職)을 세우고 그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60명의 수호군과 20명의 승군을 배치하고 월정사 주지를 수호총섭(守護總攝)으로 삼아 사고의 수호 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수호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토지를 하사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참봉 2명을 임명하여 교대로 관리하게 하였다.
이때 사고 건물은 2층 누각식 기와집 건물 2동을 지었다. 하나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각(史閣)이었고, 다른 하나는 왕실의 계보를 기록한 『선원보략』 등을 보관하던 선원각(璿源閣)으로 사용하였다. 사고에서는 3년에 1번씩 춘추관의 기사관급(記事官給)을 파견하여 『조선왕조실록』을 꺼내 바람에 쏘이고 볕에 말리는 포쇄(曝曬)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는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사각 앞에서 4번 절하고 나서 사고 문을 열었고, 포쇄가 끝나면 봉인하고 4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14년 3월 3일 총독부 소속 관원과 평창군 서무주임 등이 오대산 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강릉 주문진을 통해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운반하였다. 당시 총독이었던 데리우치[寺內]가 이른바 ‘한일합방의 선물’로 『조선왕조실록』을 강탈해 갔던 것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불타 버리고, 외부에 대출되었던 45책만 무사하였다. 그중 27책이 1932년 5월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다.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최근 월정사가 중심이 된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의 노력으로 일본에 남아 있던 나머지 『조선왕조실록』도 환수하여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었다.
실록 반출 이후 비어 있던 사각과 선원각은 한국전쟁 때 불타버리고 말았다. 사고지는 1963년 사적 37호로 지정되었다. 1961년 비구니 뇌묵(雷默)이 예전 사고지가 있던 앞쪽에 절을 중창하고 사고사라 하였다가 다시 영감사로 개칭하였다. 영감사의 건물로는 ‘영감난야’라는 편액이 걸린 입법당이 있다. 법당에는 아미타불좌상과 후불탱, 신중탱 등이 모셔져 있다. 영감사에서 남쪽으로 300m 떨어진 거리에 주춧돌만 남아 있던 옛 영감사지에 1992년 사각과 선원각을 복원하였다. 월정사에서는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이 본래 자리인 이곳 사고지에서 보관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무암사는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청풍호로 39길 285번지(성내리 1번지), 금수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이다.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 안말마을로 진입하여 마을회관 오른쪽 도로를 따라 금수산을 2.5㎞ 정도 올라가면 무암사가 나온다. 무암사는 크게 3단의 평탄 대지로 이루어졌다. 산의 경사진 장소에 사찰을 건립한 관계로 경내 곳곳에 단단한 석축이 축조되어 있다. 석축에 사용한 석재들은 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으로 다듬은 화강암이고 막쌓기와 바른층쌓기를 병행하였다. 무암사는 사방으로 금수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동쪽으로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무암사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문헌이나 유물·유적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기와 편과 도자기 편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무암사가 번창했던 시기는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절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여지도서』에 한때 무림사의 규모가 대단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극락전의 지붕 기와에 ‘건륭오년명(乾隆五年銘)’이라 새겨진 글씨로 보아 1740년 무렵 절을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요사 앞 자연 암반 내부의 석굴에 1920년으로 짐작되는 명문이 새겨진 디딜방아가 있다. 1960년대 안현경이 주석하며 당시 지금의 사찰 터전을 마련하였다. 주지 황도(黃道)가 상주하며 2000년부터 극락전을 비롯하여 주지실과 요사채를 보수하거나 신축하였다.
극락전 건너편 산등성이에 노장암(老丈巖)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노장암은 높이 5m, 둘레 3m 정도의 검은빛을 띤 화강암으로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노스님이 깊은 참선에 들어간 듯한 모습을 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노장암과 무암사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무암사에 터를 잡고 절을 세웠더니, 노장암이 위치한 서쪽 골짜기에 봄·여름·가을에 늘 안개가 자욱하였다. 더욱이 안개가 노장암을 감쌀 때 오히려 노장암이 더욱 뚜렷하게 보여 마치 살아 있는 노스님 같았고, 안개가 걷히면 희미해지는 이상 현상이 발생하였다. 무암사 스님들은 안개가 끼면 더욱 정진하고, 안개가 걷히면 잠시 휴식을 취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 안개의 자연 현상으로 인해 한때 절 이름을 무림사(霧林寺)라 부르기도 하였다.
무암사의 건물로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산신각, 칠성각, 객실, 요사채, 수호실 등이 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붕의 기와에 1740년에 해당하는 연호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이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는 목조 아미타불좌상과 지장보살상이 있고, 불화로는 아미타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있다. 그리고 1922년 일본에서 제작한 동종과 조선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목재 위패 2개가 있다. 목조 아미타불좌상은 전체 높이 85㎝, 2002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칠성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1926년 성응하(成應荷)가 그린 가로 155㎝, 세로 123㎝ 크기의 칠성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산신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산신상과 1989년 조성한 산신탱화가 있다. 무암사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칠성각과 산신각은 건립된 지 10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무암사에서 200m 떨어진 ‘소부도골’에 수월당(水月堂) 부도와 우부도(牛浮屠)가 자리하고 있다. 수월당 부도는 높이 180㎝로, 조선시대 부도이다. 수월당 부도는 원래 땅속에 묻혀 있는데, 1959년 안현경 스님의 현몽으로 발굴되었고, 1961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봉안하였다. 우부도는 높이 190㎝로, 현재 탑신만 남아 있다. 일명 ‘소부도’라고도 한다. 무암사를 창건할 때 황소 한 마리가 목재를 나르며 열심히 일하다가 그만 쇠약하여 죽고 말았다. 스님들은 비록 소였지만 그 공을 잊지 못해 화장했더니 영롱한 사리가 많이 나왔다. 그래서 부도를 조성하여 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보석사는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보석사1길 30번지(석동리 산5번지), 진락산(眞樂山) 남동쪽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보석사는 885년(신라 헌강왕 11) 조구(祖丘)가 창건하였다. 창건할 때 절 앞산에서 채굴된 금으로 불상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절 이름을 보석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보석사의 역사와 관련된 사적기나 고승의 비문은 전하지 않는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조에 보석사가 현존하는 사찰로 나온다. 그런데 1799년 편찬된 『범우고』에는 보석사가 ‘금폐(今廢)’라고 되어 있다.
현재 일주문 왼쪽에 있는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가 1839년(헌종 6) 5월에 건립되었으므로 이 시기에 보석사가 중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부 자료에서는 고종 때 명성황후 또는 그의 오빠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현재 도량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일제강점기 때는 전국 31본산의 하나로 위봉사(威鳳寺)와 더불어 전라북도 지역 33개 사찰을 총 관장했던 사찰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보석사에 설치된 강원을 통해 많은 학승이 배출되어 불교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93년 일주문을 신축하였으며 1995년 요사 2동과 담장 등을 지었다.
한편 보석사 입구에는 1990년 천연기념물 제365호로 지정된 높이 40m, 둘레가 10.4m, 수령 1,100년의 은행나무가 서 있다. 지역 주민들에 의하면,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은행나무가 온종일 울음소리를 낸다고 한다.
보석사의 건물로는 대웅전·산신각·심검당(尋劒堂)·응향각(凝香閣)·진영각·체실(體室)·요사채 등이 있다. 현재 보석사 사역 전체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양 측면에 방풍장(防風障)이 설치되어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로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왼쪽에 있는 신장탱화는 ‘사십오년임자이월이십육일신장정조성(四十五年壬子二月二十六日神將幀造成)’이라는 연도가 남아 있다. 화기 앞부분이 명확하지 않으나 1912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1993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진영각에는 휴정(休靜)·유정(惟政)·영규(靈圭) 3명의 영정을 모셨으나 근래에 영정을 도난당하였다. 범종은 높이 95㎝, 하부 너비 63㎝ 크기로, 1760년(영조 30)에 청동으로 제작되었다. 무게는 170근으로, 절 문의 오른쪽에 걸려 있다. 보석사 경내의 동남 기슭 입구에 5기의 부도가 있다. 부도는 모두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탑신에 주인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적조당(寂照堂) 부도는 높이 160㎝로, 팔각원당형의 형태를 갖춘 조선시대 부도이다. 채도당(採道堂) 부도는 높이 160㎝로, 1매석으로 기단부를 조성하고 그 위에 석종형 탑신을 안치하였다. 송월당(松月堂) 부도는 높이 150㎝로, 방향 기단 위에 안치된 석종형 부도이다.
동암당(東岩堂) 부도는 1990년에 조성한 부도로 팔각원당형의 형태이다. 적조당 부도를 모델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전춘당(栓椿堂) 부도는 높이 130㎝로, 방향의 기단 위에 안치된 석종형 부도이다. 의병승장비는 1839년 5월 금산군수 조취영이 임진왜란 때 순절한 영규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화강석재의 비석이다. 1940년 일제에 의해 비각이 헐리고 자획이 파괴된 채 매장되었던 것을 광복 후 재건하였다. 1979년 비각을 보수하고 1980년 영규대사 국역비를 건립하였다.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2호로 지정되었다. 비의 정면에는 ‘의병승장(義兵僧將)’ 명이 있고, 후면에는 비문과 건립연대가 남아 있다.
백운암은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내창로 617-80번지(괴동리 223번지), 백운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법주사의 말사이다. 백운암은 충주 시내에서 북쪽으로 23㎞ 떨어진 백운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백운산을 ‘빌미산’이라 부른다. 백운암은 1886년(고종 23) 무당출신으로 진령군이라는 작호를 받은 파평윤씨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백운암 창건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명성황후가 궁녀 복장을 하고 대궐을 빠져나가 처음에는 서울에 있는 화계동의 윤태준의 집에서 은신하였다. 명성황후는 사태가 위급해지자, 전 임천군수 이근영의 경기도 광주집을 거쳐 민영위의 본가가 있는 여주로, 그리고 다시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갔다. 그래도 명성황후는 계속 신변에 불안함을 느껴 충주 노은에 있는 국망산(國望山) 아래로 피신하였다. 이때 파평윤씨 집안의 한 무당이 한양의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명성황후에게 곧 좋은 소식이 도착하여 환궁할 것이라 예언하였다.
이 말을 들은 명성황후가 뒷산에 올라가서 고종의 소식을 간절하게 기다렸다. 그래서 그 산 이름을 국망봉이라 하였다. 명성황후는 무당 윤씨의 예언대로 궁으로 환도하자, 윤씨를 서울로 불러올려 용하다는 칭찬과 함께 ‘진령군’이란 작호와 함께 여대감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그 뒤 고향으로 내려온 진령군에게 어느 날 꿈속에서 부처님이 나타나서 내가 거처할 집을 지어달라고 하였다. 진령군의 꿈에 나타난 부처는 억정사(億政寺) 절터에 버려두었던 철불이었다. 진령군은 급히 상경하여 명성황후에게 절을 건립할 것을 간청하고 내탕금을 받아 지금의 백운암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진령군이 백운암을 창건할 당시 법당과 요사를 함께 사용하였다. 1977년 법당과 요사를 분리하고 법당을 대웅전이라 하였다. 1991년 삼성각을 건립하고 요사를 수리하며 현재의 사찰 형태를 갖추었다. 1999년 주지 진송(眞松)이 국비로 대웅전을 재건하였으며, 2002년 축대 보수와 도로 공사를 통해 사찰 진입로를 정비하였다.
백운암의 건물로는 대웅전·삼성각·요사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건물로, 내부에는 철불좌상과 관음·세지보살상의 삼존상과 아미타후불탱화·지장탱화·신중태화와 동종이 있다. 충주권에는 백운암, 단호사, 대원사에 3기의 철불좌상이 있는데, 이중 백운암 철불좌상이 가장 아름다운 철불이라 평가받고 있다. 1976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된 백운암 철불좌상은 2006년 개금과 녹을 걷어내고 결손된 부분을 보수하여 2007년 '충주백운암철조여래좌상'이란 이름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91년에 지어졌다. 내부에는 1888년(고종 25)에 조성한 독성도·산신도·칠성도가 봉안되어 있다. 칠성도는 가로 156㎝, 세로 114㎝로 화면 가운데 칠성여래가 앉아 있고, 그 앞에 십대왕이 서 있고 여래불 좌우로 보살과 성중(聲衆)이 줄지어 있다. 원래는 보현암(普賢庵) 칠성각에 봉안되어 있던 것이다. 독성도는 가로 60.5㎝, 세로 77㎝로 백발노인인 독성이 홀로 앉아 있다. 산신도는 가로 68㎝, 세로 90㎝로, 백발노인이 큰 호랑이를 뒤에 두고 있다. 그리고 백운암에는 높이 52㎝, 지름 29㎝의 동제로 만든 범종과 지름 44㎝ 동철제로 만든 반자(飯子)가 있다.
강천사는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옥천3길 56-10번지(시곡리 산79-6번지), 송학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재단법인 선학원 소속 사찰이다. 강천사 마당에서 내려다보면 제천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사찰이다. 강천사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 돌확, 기와 편 등으로 볼 때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조선시대 중기까지 절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있던 절이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45년 7월 15일 노로당(老老堂) 이대휘(李大徽)가 옛 소악사지(小岳寺祉)에 초막을 짓고 불상을 모신 것이 지금의 강천사의 시작이다.
1947년 강천사에서 관음전을 지었다. 관음전 자리는 강원도 영월 법흥사(法興寺), 강원도 정선 정암사(淨巖寺),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중간 위치에 해당하는 명당자리라고 한다. 이후 불자들이 증가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81년 도로와 전기가 가설되었으며, 1986년 다용도 건물인 3층 설법보전을 신축하였다. 1990년 기존 법당을 허물고 새 법당을 중건하고 비로자나삼존불을 봉안하였고, 범종각을 세우고 범종과 법고를 조성하였다. 강천사는 능엄기도와 나한기도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강천사가 규모 있는 사찰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노로당 이대휘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휘의 법명은 대휘(大徽)이며, 법호는 노로(老老)이다. 1907년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에서 출생하였다. 1927년 선산 도리사에서 하정광(河淨光)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이후 이석우(李石牛)에게 사미계를 수계하고, 도리사 강원에서 사교와 대교과를 수료하였다. 1937~1942년 중국 상주 천녕사, 진산 금산사 등에서 안거하였으며, 귀국한 이후에는 통도사 백련암, 극락암, 묘향산 상원사, 범왕대, 금강산 마하연암 선원 등 국내 여러 사찰과 선원을 순회하였다. 일본 만복사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로 1년을 지냈다. 이대휘는 청담(靑潭)·영암(映巖)·성철(性徹) 등 근대 고승들과 도반(道伴)으로서 경학에 밝고 계율에 엄격하며 선서화(禪書畵)에 능했다고 한다. 1992년 음력 9월 20일 열반하였다.
강천사의 건물로는 대광명전· 관음전·나한전·산신각·독성전·범종각·요사 등 많은 건물이 있다. 전각 대부분은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강천사 입구에 고려시대 양식으로 보이는 삼층석탑 1기가 있으며, 조성한 지 오래되지 않은 석조미륵입상이 있다. 대광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기존의 대웅전을 허물고 1990년에 신축한 것이다. ‘대광명전’이라 쓴 현판은 통도사(通度寺)에서 탁본해 온 것을 복각(覆刻)한 것이다.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청동으로 된 석가불·노사나불이 모셔져 있고, 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나한전은 팔작지붕의 시멘트 건물로, 1972년에 건립되었다. 내부에는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 그리고 동자상 2체가 있다. 요사는 1968년에 지은 3층 현대식 건물이다. 건물 앞쪽에 ‘설법보전(說法寶殿)’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내부에는 석가불좌상과 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신중탱화는 가로 100㎝, 세로 82.5㎝로 1800년(정조 24)에 조성한 것이다. 제석천을 중심으로 주변에 천왕들이 배치되었다. 강천사 입구에 삼층석탑이 있다. 삼층석탑은 높이 320㎝, 단층 기단의 길이와 폭이 각각 100㎝로 비교적 작은 규모의 탑이다.
덕주사는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미륵송계로 2길 87번지(송계리 3번지), 월악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덕주사는 월악산 남쪽 능선의 덕주산성 동문을 지나서 정상을 향해 오르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덕주사의 창건연대는 587년(신라 진평왕 9)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덕주사는 신라 창건설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충주목(忠州牧) 불우조(佛宇條)에 “덕주사는 월악산 밑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덕주부인(德周夫人)이 이 절을 세웠기 때문에 인하여 이름지었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10세기 중엽에 창건된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마의태자는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동생 덕주공주와 함께 금강산으로 향했다. 덕주공주는 덕주사 마애불이 위치한 곳에 머물러 절을 짓고,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과 어느 정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덕주사는 창건연혁은 전하는 바가 없다. 처음에 덕주사는 1964년 보물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 앞에 있었다. 1951년까지 고색창연한 기도 사찰이었으나 군의 작전상 이유로 절이 소각되었다. 이때 소각된 절을 상덕주사라 부른다. 상덕주사는 현재 덕주사에서 1.7㎞ 정도 떨어진 자리에 있었다. 상덕주사의 극락전 자리에서 1622년(광해군 15)에 만든 명문 기와와 석불두·백자잔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지금의 덕주사가 위치한 곳은 예전부터 ‘절골’로 불렸다. 덕주사 주변에 수많은 기와 조각과 주춧돌, 장대석, 석등 부재 등이 발견되어 옛날 이곳에 큰절이 번창했음을 보여준다. 1963년 지암 권정철이 중창하였으며, 1970년 주지 박재찬이 법당을 중수하였다. 이때 1206년(고려 희종 2)에 조성된 금구(禁口)가 발견되었다. 1985년 성주가 다시 중건하였다. 이때 충주댐 건설로 수몰 지역에 포함된 한수면 역리의 정금사(淨金寺)에 있던 고려시대 석조약사여래입상을 덕주사로 옮겨와 봉안하였다.
덕주사 위쪽에는 거대한 암벽에 선각(線刻)으로 조각된 높이 13m나 되는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196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마애여래입상 아래에 우공탑(牛公塔)이라 부르는 작은 탑이 하나 서 있다. 우공탑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스님들이 덕주사 건물이 비좁아서 부속건물을 더 지어야겠다고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어디선가 소 한 마리가 나타났다. 스님들은 아무 생각 없이 수레에 재목을 실어 놓았다. 그런데 소가 수레를 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님들이 소를 따라가 보니 지금의 마애불상 있는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래서 스님들은 마애불상 밑에 부속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소는 혼자서 부지런히 재목을 실어 나르고는 그만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소의 불심에 탄복한 사람들이 우공(牛公)의 넋을 기리고자 우공탑을 세웠다고 한다.
덕주사의 건물로는 1998년 신축한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약사전·관음전·산신각·요사 4동이 있다.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 석가불·비로자나불·아미타불의 삼불과 각각의 불상 뒤에 후불탱화 3점이 모셔져 있다. 약사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5년 한수면에서 옮겨온 석조약사여래입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뒤에 1991년 조성한 후불탱화가 있다. 석조약사여래입상은 높이 232㎝로, 얼굴이 너무 커서 양쪽 어깨가 움츠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12~14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196호로 지정되었다.
관음전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대웅보전을 건립하기 전에는 금당으로 사용하였다. 내부에는 관음상과 후불탱화·지장탱화·칠성탱화·신중탱화가 있는데 모두 근래에 봉안한 것이다. 산신각은 자연 암반을 이용해 건립한 것으로, 내부에 마애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요사 뒤에 조선시대 부도 4기가 있다. 서쪽 산기슭에 있던· 갓을 옮겨 세운 것으로 주인공의 이름은 왼쪽부터 홍파당(洪波堂)·용당(龍谷堂)·부유당(浮遊堂)·환적당(幻寂堂)이다.
백련사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명암로5길 414번지(명암리 325번지), 감악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감악산은 높이 800m로 치악산의 지맥이다. 백련사는 감악산의 정상 가까운 깊은 산속에 자리하고 있어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백련사로 오르는 산길 초입에 크게 한자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새겨 놓은 염불바위가 서 있다.
백련사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직전인 662년(신라 문무왕 2)에 의상이 백련지(白蓮池) 동쪽에 작은 암자를 짓고 백련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692년(신라 효소왕 1) 큰 비가 쏟아져 산사태가 일어나 백련지가 묻히고 절도 없어졌다. 819년 무착(無着)이 중창하였다. 1358년(고려 공민왕 1) 나옹(懶翁)이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를 창건하고 이어 제천의 백련사를 중수하였다. 1587년(선조 20) 벽운(碧雲)이, 1624년 취운(翠雲)이 중수하였다.
1798년(정조 22) 처봉(處峰)이 중수하고 산 이름을 따서 감악사(紺岳寺)로 고쳤다. 1910년(융희 4) 욱일(旭日)이 중수하였으나 1916년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었다. 1916년 10월 주지 윤인선(尹仁善)이 감악산성 내의 현재 위치로 절을 옮겨서 절 이름을 백련사라 하였다. 1947년 무룡이 중수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절 일부가 소실되었다. 1957년 박현장이 중창하였고, 1959년과 1962년에 각각 중건하였다. 1977년 법당을 지었으며, 2004년 보응문을, 2005년 무염당을 신축하였다.
백련사의 건물로는 대웅전·삼성각·요사인 무염당·보응문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9년에 건립하였다.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영산후불탱화·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나한도 벽화 4점과 동종이 모셔져 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 75㎝, 어깨 폭 45㎝로, 1736년(영조 2)에 조성된 것이다. 처음에는 단양군 서면 금수산 조계사(曹溪寺)의 삼존불 가운데 주불로 봉안되던 불상이었으나 언제인지 모르나 지금의 백련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2002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유물 중에는 목판본인 『대불수능엄신주(大佛首楞嚴神呪)』 다라니경이 있다. ‘을해(乙亥)’라는 간기(刊記)와 목판 제작 상태로 보아 불상이 조성된 시기와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62년에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치성광여래상·산신상·독성상이 모셔져 있고, 불화로는 영산회상도·신중도·산신도·독성도·칠성도 등이 봉안되어 있다. 영산회상도와 신중도는 1941년 보경 보현(寶鏡普現) 금어가 그렸으며, 칠성도와 독성도, 산신도는 1959년에 조성한 것이다. 백련사 동남쪽 200m 정도 떨어진 일명 병풍바위가 있는 산중에 부도가 있다. 부도는 높이 150㎝에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며, 백련사를 중창한 무착의 것으로 전해져 일명 ‘무착조사 무원석’이라 부른다. 부도는 사각형 기단 위에 석종형 탑신을 얹힌 조선시대의 전형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불교는 기원전 5세기경 인도 태생의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부다 가야(Buddha Gaya)의 보리수 아래에서 진리[달마(達磨, dharma)를 깨우치고 부처[佛陀, Buddha: 깨친 사람]가 되어 창설한 종교이다. 고구려 372년(소수림왕 2) 때 전진(前秦)의 순도(順道)가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불교를 전파하였다. 삼국 시대 불교는 국가 이념과 사상의 통일, 호국 사상 고취 등 고대 국가 체제 정비와 왕권 강화에 이바지하였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된 이후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와 문화, 풍속과 문화관습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불교는 역사와 사상, 제도 등을 통해 이해할 수도 있으나 사찰의 창건과 관련해서 고승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원효·의상·자장 등의 고승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나 암자에 관한 유래담과 절 이름이 유래하게 된 이야기 등이 문헌과 구전을 통해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다. 이런 유형의 이야기를 사찰연기설화·불사창시설화·사찰창건설화 등으로 부른다.
사찰연기설화는 해당 사찰의 주변 인물인 승려, 신도 등에 의해 창작되는데, 이때 기존의 민간설화나 불경, 기타 불교 관련 문헌에 수록된 이야기들을 빌려 해당 사찰의 창건과 절 이름의 내력을 설명하게 된다. 사찰연기설화의 창작 동기는 설화에 등장하는 사찰을 신성화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불교 사상의 생활화를 통해 부처에 귀의하게 하려는 종교적 목적하에 이루어진다. 여기에 일반 대중들의 영험함과 신령성을 갈망하는 민간 신앙적 사고도 크게 작용하였다. 예를 들어 사찰 창건의 전조(前兆)가 되는 영이담(靈異譚), 사찰의 터를 해당 장소에 정하게 되는 신이담(神異譚), 사찰의 이름을 명명하게 된 유래담 등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사찰연기설화를 형성하게 된다. 이때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 또는 사건과 결부함으로써 전설의 형태로 전승하게 된다는 것이다.
승려와 불교 신자들이 모여 수행과 의례 등을 통해 불도를 닦으며 교법을 구현하는 장소를 가리켜 사원·사찰·가람(伽藍)이라고도 부르며 우리말로는 절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사원을 ‘절’이라 부르게 된 이유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전한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파될 때 아도(阿道)가 일선군(一善郡) 모례(毛禮) 집에 묵었다. 그것이 우리말로 ‘털레의 집’이라 하였으며, ‘털’이 ‘덜’로, ‘덜’이 다시 ‘절’로 바꿨다고 한다. 속설로는 절을 많이 하는 곳이기에 ‘절’이라 불렀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고대 우리나라 사찰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도시 중심지에 건립하였다. 하지만 시대 상황과 사회적 여건에 따라 수행 또는 포교에 역점을 두는 절이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사찰은 입지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특징적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찰은 입지 조건에 따라 크게 평지가람형(平地伽藍型), 산지가람형(山地伽藍型), 석굴가람형(石窟伽藍型)의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 우리나라 사찰은 산악숭배 경향, 호국호법(護國護法)의 의지, 초세속주의(超世俗主義) 경향 때문에 산지가람형이 많은 편이다.
사찰에서 중요한 구조물은 당우와 탑이다. 사찰은 수도하는 곳으로, 수행·포교·교육의 세 가지 기능을 발전시켜 왔다.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여러 건축물을 갖추게 되었다. 당우는 칠당가람의 원칙에 따라 건립되는데, 불전(佛殿)·강당(講堂)·동사(東司: 측간)·산문(山門)·승당(僧堂)·욕실·주고(廚庫)가 그것이다. 당우와 함께 중요한 것이 탑이다. 가람 배치는 탑의 배치형식에 따라 일탑식(一塔式) 가람 배치, 쌍탑식(雙塔式) 가람 배치,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 가람 배치로 구분한다. 우리나라 사찰의 가람 배치는 이 3가지 유형을 기본으로 하여 편의에 맞게 개조하거나 조금 변형한 것이 대부분이다.
1911년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을 반포하여 31본산제도를 확립하였다. 31본산제도는 우리나라 사찰을 지역별로 구분하고, 각 본산 아래에 말사를 두어 본산에서 말사를 관장하는 제도로, 당시 1,384개소의 사찰이 말사로 등록되었다.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이 통합종단으로 출범하면서 25본산제도를 확립하였다. 25본사는 “①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 ② 용주사(龍珠寺), ③ 신흥사(神興寺), ④ 월정사(月精寺), ⑤ 법주사(法住寺), ⑥ 마곡사(麻谷寺), ⑦ 수덕사(修德寺), ⑧ 직지사(直指寺), ⑨ 동화사(桐華寺), ⑩ 은해사(銀海寺), ⑪ 불국사(佛國寺), ⑫ 해인사(海印寺), ⑬ 쌍계사(雙磎寺), ⑭ 범어사(梵魚寺), ⑮ 통도사(通度寺), ⑯ 고운사(孤雲寺), ⑰ 금산사(金山寺), ⑱ 백양사(白羊寺), ⑲ 화엄사(華嚴寺), ⑳ 선암사(仙巖寺), ㉑ 송광사(松廣寺), ㉒ 대흥사(大興寺), ㉓ 관음사(觀音寺), ㉔ 선운사(禪雲寺), ㉕ 봉선사(奉先寺)”로, 말사로는 1,068개의 사찰이 소속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대 종단인 조계종 이외에도 진각종·천태종·태고종 등의 종단이 있다.
진관사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길 73번지(진관동 354), 삼각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진관사는 “동쪽의 불암사, 서쪽의 진관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라 하여 예로부터 손꼽히는 서울 근교의 4대 사찰 중 하나였다.
진관사는 고려 현종이 진관대사를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헌애왕후는 고려 제5대 경종의 왕비로 목종의 생모였다. 헌애왕후는 981년 경종이 죽자 천추태후가 되었다. 천추태후는 파계승인 김치양(金致陽)과 몰래 정을 통해 사생아를 낳았다. 이 추문을 들은 성종이 김치양을 유배 보냈다. 천추태후는 997년 성종이 죽고 아들인 목종이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되었다. 천추태후는 유배지에 있던 김치양을 불러들이고 우복야겸 삼사로 삼았다. 목종에게 아들이 없자, 헌종왕후가 낳은 대량원군(大良院君)을 왕위 계승자로 삼았다.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 난 아들을 왕위에 앉히고자 목종에게 참소하여 대량원군을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호시탐탐 살해할 기회를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대량원군을 진관(津寬)이 혼자 수도하고 있던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기게 하였다. 진관이 혼자 수도하고 있으므로 대량원군을 죽이기 쉬울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눈치챈 진관은 본존불이 안치된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서 12살인 대량원군을 피신시켜 천추태후가 보낸 자객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게 하였다.
3년 뒤 목종이 죽자 1009년 대량원군은 개성으로 돌아가 고려 제8대 현종이 되었다. 1011년 현종은 자기를 보살펴준 진관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신혈사 자리에 절을 짓고 절 이름을 진관사로 바꿨다. 1090년(선종 7) 10월 선종이 진관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베풀었고, 1099년(숙종 4) 9월과 1110년(예종 5) 10월에도 왕이 진관사에 행차하여 참배하고 각종 물품을 시주하였다. 이처럼 진관사는 왕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라 하여 여러 왕으로부터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조선시대 진관사는 수륙재(水陸齋)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1397년(태조 6) 태조는 진관사에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여러 차례 행차하여 수중과 육지의 넋과 아귀를 위해 법식(法食)을 공양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1413년(태종 13) 태종이 진관사에 행차하여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지냈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하사했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내려 수륙재가 지속되게 하였다. 이후 진관사에서는 매년 1월 혹은 2월 15일에 수륙재를 지냈다.
1463년(세조 9) 화재가 발생하여 사찰 일부가 소실된 것을 1470년(성종 1) 벽운(碧雲)이 중수하였다. 1707년(숙종 33) 진관사 서쪽 언덕에 정소의(定昭儀) 묘가 들어서면서 절에 정원당(定願堂)이라는 전각이 건립되었다. 1854년(철종 5)과 1858년 각각 중수되었다. 1879년(고종 16) 경운(慶雲)이 대방 34칸을 중수하였고, 1908년 송암(松庵)이 오층석탑을 세웠다. 1910년 대웅전의 삼존상을 개금하였고 아울러 명부전을 수리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하였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신축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1964년부터 비구니 진관(眞觀)이 부단한 정진으로 사찰을 일신하여 현재는 대웅전을 비롯한 나한전·대방(大房)·독성전(獨聖殿)·명부전·선원(禪院)·일주문·종각(鐘閣)·칠성각·홍제루(弘濟樓) 등을 갖춰 비구니 수도 도량으로 이용하고 있다.
2013년 진관사 수륙재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10년 나한전에서 발견된 독립신문류와 항일독립운동승려 백초월(白初月)의 태극기 등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는 2002년 지정된 명호스님초상, 산신도(山神圖), 소삼존불상(塑三尊佛像), 소십육나한상(塑十六羅漢像), 십육나한도(十六羅漢圖),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칠성도(七星圖) 등이 있다. 문화재자료로는 2002년 지정된 독성도, 소 독성상, 석불좌상과 2006년 지정된 독성전과 칠성각 등이 있다.
장경사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676번지(산성리), 남한산성 내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남한지』에 의하면, 1624년(인조 2) 남한산성 축성 때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고 팔도에서 승군을 모집하여 성을 쌓게 하였다. 이때 역승(役僧)들의 숙식을 위하여 9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9개의 사찰 중에서 망월사와 옥정사는 신라시대부터 존재했고, 장경사를 비롯하여 개원사·국청사·남단사·동림사·천주사·한흥사의 7개 사찰은 새로 건립하였다.
장경사는 1638년(인조 16)에 창건되었다. 장경사는 9개의 사찰 중에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보존한 유일한 절이다. 효종이 북벌(北伐)을 계획했을 때 장경사에 총섭을 두어 승군을 훈련하였고, 남한산성 내의 8개 사찰뿐만 아니라 전국의 승군을 통솔하는 국방사찰(國防寺刹)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종 때까지 전국에서 선발된 270명의 승려를 교체하면서 항상 번승(番僧)을 상주입번(常駐立番)하게 하였다. 장경사는 승군의 숙식과 훈령을 위해 건립된 군막사원이었다.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령으로 남한산성 안에 있던 무기고와 화약고가 파괴되었다. 이때 남한산성 내에 있던 다른 사찰들은 대부분 파괴되었는데, 장경사만은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고 한다. 1975년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중창하였다.
장경사는 창건에 따른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옛날 금단선사라는 도인이 있었다. 금단선사는 한 소년과 그의 어머니 병을 고쳐주기로 약속했다. 금단선사가 축지법을 써서 묘향산의 깊은 계곡에 들어가 대추와 곶감을 구해서 소년과 만나기로 한 날짜에 약속 장소로 갔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소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로도 금단선사는 소년과 만나기로 한 고개의 바위에서 기다렸으나 끝내 소년의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한편 소년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크게 상심한 나머지 잠적해 버렸다. 훗날 소년을 잊지 못한 금단선사가 바위 옆에 절을 지었는데, 그 절이 바로 ‘장경사’라는 것이다.
남한산성 내 장경사 안내판을 따라 비탈진 산길을 올라가면 오른쪽에 장경사로 가는 안내판과 왼쪽에 망월사로 가는 안내판이 나란히 붙어 있다. 오른쪽으로 진입하면 남한산 장경사의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 있다. 남한산성 동문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소요된다.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왼쪽에 종무소가 있고 좌우로 요사채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일주문 정면으로 9층 석탑이 있다. 9층 석탑에서 조금 걸어가면 오른쪽에 장경사 현판이 붙은 또 하나의 요사채가 있다. 요사채 뒤로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왼쪽에 대웅전과 범종각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규모로, 조선시대 후기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인 동향 건물이다. 대웅전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오른쪽에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장경사는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개심사는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로 321-86번지(신창리 1번지), 상왕산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수덕사의 말사이다. 개심사는 654년(백제 의자왕 14) 혜감국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창건 당시 절 이름은 개원사(開元寺)였다. 1350년(고려 충정왕 2) 처능(處能)이 중창하면서 개심사라 하였다. 개심(開心)은 “마음을 열어 깨달음을 얻어라.”라는 의미로, 개심사는 충청남도의 4대 사찰 중 하나라고 한다.
1475년(성종 6) 충청도 절도사 김서형(金瑞衡)이 사냥을 하다가 산불을 내서 절이 소실되었다. 1619년(광해군 11) 한여현(韓汝賢)이 편찬한 사찬읍지(私撰邑誌)인 『호산록(湖山錄)』에 의하면, “절은 이미 무너져 숲이 무성하게 자랐고, 다만 절 뒤편에 새로 지은 3칸짜리 부도전(浮屠殿)만이 있다.”라고 하였다.
1941년 대웅전을 해체하여 보수할 당시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475년(성종 6) 불에 탄 대웅전을 1484년(성종 15) 다시 중건하였으며, 1740년(영조 16) 중수되었다고 한다. 1955년 대대적으로 절을 보수하였으며, 1983년 2월 28일 개심사는 전통 사찰 제38호로 지정되었다.
개심사의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무량수각, 명부전, 범종각, 심검당, 안양루, 팔상전, 오층석탑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484년(성종 15)에 중창된 것이다.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상을 비롯해 후불탱화·칠성탱화·신중탱화·괘불함이 있다. 후불탱화는 근래에 조성한 것이고, 칠성탱화는 1886년에 조성된 것이다. 대웅전은 1963년 보물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지장삼존상을 비롯하여 판관·녹사·사자·동자·인왕상이 각 2체씩 봉안되어 있다. 1987년 조성한 지장후불탱화가 걸려 있다. 명부전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4호로 지정되었다. 심검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건물 왼쪽으로 정면 3칸, 측면 5칸의 덧집을 달아서 건물이 ‘ㄴ’자 형태로 되어 있다. 심검당은 17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8호로 지정되었다.
개심사 괘불도는 입상(立像)의 석가여래본존불을 중심으로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을 양 협시로 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이다. 괘불도는 괴량감과 비대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비현실적 신체 비례와 복잡하게 도안화한 문양이 18세기 후기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화기에는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있다. 괘불도는 ‘개심사 영산회괘불탱’이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1264호로 지정되었다.
보물 제1619호로 지정된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2004년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불상의 중수 기록에 의하면,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1280년 11월에 보수되었다. 일반적으로 불상을 조성하고 50~100년이 지나서 개금한다는 점에 비추어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조성 시기는 대략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추정에 따르면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현존하는 예배 대상 목조 불상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리고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각적인 측면에서도 완성도가 아주 높은 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란사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1-25번지(쌍북리 산1번지), 부소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고란사는 부소산 북쪽 기슭 백마강 강가에 자리하고 있다. 고란사 뒤쪽 암벽에 고란초(皐蘭草)가 기생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란초는 양치류에 속하는 은화식물로서 이끼류의 일종이다. 제주도에서는 불로초라 불리는 희귀식물이다. 고란사 뒷마당 바위 담장 밑에 고란수라는 약수가 있다. 고란천(皐蘭泉)이라고도 한다.
고란약수는 백제시대 궁녀가 물동이에 고란 잎을 띄워 궁궐로 운반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고란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백제 때 왕들이 놀기 위해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1028년(고려 현종 19)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落花巖)에서 죽은 삼천궁녀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창건한 사찰이라고도 전한다. 한때 ‘골란사’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1959년 절을 중건할 때 발견된 1797년(정조 21)에 쓴 상량문에 고란사를 백제시대의 고찰이라 하였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는 찾을 수 없다. 1629년과 1797년 각각 중수되었다. 고란사의 조선시대 중엽의 모습은 서경(西坰) 유근(柳根)의 시에서 엿볼 수 있다. 1900년 부여군 은산면 각대리에 있던 숭각사(崇角寺)에서 건물과 불상을 고란사로 옮겨 왔다.
고란사 일원이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다. 고란사는 동향(東向)을 정면으로 하고 법당과 요사, 영종각이 자리하고 있다. 법당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숭각사에서 옮겨와 지은 것이다. 1959년 중건 때 발견된 상량문으로 1797년에 중건된 건물임이 알려졌다.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근대에 제작한 탱화 3점도 모셔져 있다. 벽면에는 편액 2점과 1903년 중수기문 등 많은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1795년(정조 19) 9월 정약용은 부여 현감 한백원(韓百源)의 안내로 부소산 일원의 백제 고적을 구경하였다. 정약용 일행은 9월 14일 저녁에 배를 타고 당나라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는 조룡대(釣龍臺)를 거쳐 고란사에 올라갔다. 그리고 고란사에서 다시 배를 타고 자온대 아래에 이르렀다. 정약용은 한백원에게
“노래와 퉁소 소리 강물 위에 맑아라
[가소청절수중앙(歌簫淸絶水中央)]
당나라 용양장군이 전투하던 이곳에
[당대용양구전장(唐代龍驤舊戰場)]
자온대 경관이 적벽만 하다면
[약파온대당적벽(若把溫臺當赤壁)]
정 선생이 소동파를 비웃을 텐데
[회교정자소소랑(會敎丁子笑蘇郞)]”
라는 시를 지어주었다. 정약용은 당나라군과 백제군이 교전했던 강에서 가을 달밤에 한백원과의 뱃놀이를 소식이 적벽에서 뱃놀이하는 것에 비교하면서 백마강의 자온대 풍경이 적벽의 경관에 못 미쳐 아쉽다고 장난스레 표현하였다.
광덕사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사길 30번지(광덕리 640번지), 광덕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광덕사는 광덕산에 있는 사찰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광덕사는 652년(신라 진덕여왕 6) 자장(慈藏)이 창건하였고, 832년(신라 흥덕왕 7) 진산(珍山)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680년(숙종 6) 안명로(安命老)가 편찬한 「광덕사사적기」에는 진산(珍山)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진산이 광덕사를 창건할 당시에는 8종루(鐘樓), 9승당(僧堂), 9층 범각(梵閣), 3층 법전이 있었으며 광덕산 동남쪽 기슭에 석가의 진신사리와 3폭의 불화가 모셔진 천불전과 불경 판목을 소장한 80여 칸의 만세각이 있었다. 당시 광덕사에는 이채로운 기운과 신령한 빛이 하늘로 솟아 새들도 감히 절 위를 날지 못했다고 한다.
1344년(고려 충혜왕 복위 5) 절이 세 번째로 중창되었다. 1414년(태종 14) 7월 일본왕이 승려 규주(圭籌) 등 왜승 4명을 보내 『대장경』을 달라고 요청하자 태종은 일본 국왕에게 여주 신륵사의 『대장경』을, 왜승 규주에게는 광덕사의 『대반야경』을 주었다. 1457년(세조 3) 세조가 온양온천에 갔다가 광덕사에 들렀으며, 1461년 5월 진신사리를 세 차례에 걸쳐 분신(分身)하였다. 1463년 한계희(韓繼禧)가 「광덕사사리각명기」를 지었으며, 1558년 『금강경』을 간행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는데, 1598년 희묵(熙黙)이 중수하였다.
1665년(현종 6) 석심(釋心)이 금불상과 종을 개수하였으며, 1671년 청소(淸宵)가 입적하자 그의 제자인 상민(尙敏)이 부도를 세웠다. 1679년(숙종 6) 상민(尙敏)이 왕에게 상소하여 중창하였다. 1680년 안명로가 「광덕사사적기」를 지었으며, 1874년(고종 14) 연봉(練鳳)의 제자인 누성(累星)이 「광덕사감세기(廣德寺減稅記)」를 지었다. 1981년 대웅전·종각 등을 신축하고 천불전을 증축하였다. 1996년 철웅(哲雄)이 15년 동안의 대작 불사를 마무리하여 1996년 대웅전·명부전·범종각·천불전·적선당·보화루 등을 중창하였다. 이 중에서 천불전은 1998년에 소실되었다.
광덕사의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산신각·범종각·보화루·일주문·적선당·자광당 등이 있는데, 주요 전각들은 대부분 근래에 신축한 것이다. 광덕사는 주된 공간이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대웅전과 명부전을 앞쪽에 두고 그 좌우에 적선당과 요사 1동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대웅전 정면에 보화루와 종루가 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개울을 건너면 남동향의 극락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요사가 있고, 일주문 앞뒤로 ‘태화산광덕사’, ‘호서제일선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3년 해체하여 복원할 때 이전 건물보다 크게 건립하였다. 내부에는 조선시대 후기에 봉안된 아미타불·석가불·약사불상의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각각의 존상마다 후불탱화가 있다. 이 중에서 중앙에 있는 석가후불탱화는 1741년(정조 17)에 조성된 것이고, 나머지 불화는 근래에 조성하였다. 광덕사 대웅전은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45호로 지정되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지장삼존상을 비롯하여 시왕상, 동자상 7체, 판관·녹사·인왕·사자상 각 2체가 있다. 그리고 1974년 철웅이 주지로 주석할 당시의 「명부전중창기」가 있다.
광덕사 노사나괘불탱은 1749년(영조 25)에 만든 것으로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2대보살, 2대제자, 사천왕, 화불 등의 군도(群圖) 형식으로 되어 있다 1932년 일부 보수되었으며, 1997년 보물 제1261호로 지정되었다. 6책으로 구성된 「광덕사고려사경(廣德寺高麗寫經)」은 보물 제39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높이 250㎝, 하대석 너비 145㎝로, 1985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인 양식과 균형미로 볼 때 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진산화상 부도는 광덕사 뒤쪽 작은 봉우리에 자리하고 있다. 진산화상 부도는 석종형부도이나 화려한 장식을 갖춘 이층 기단 위에 안치된 것이 특징이다.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53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광덕사 일대에는 호두나무가 많기로 유명하다. 대웅전 앞에 서 있는 호두나무는 유청신(柳淸臣)이 700여 년 전 중국에서 처음 들여와 심은 것이라 한다. 광덕사가 호두나무의 원적지이다.
동학사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동학사1로 462번지(학봉리 789번지), 계룡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동학사는 계룡산 동쪽 계곡 상류 근방에 위치해 계곡을 따라 연천봉으로 올라갈 수 있고, 그곳에서 서북쪽으로 하산하면 갑사(岬寺)에 이르고, 서남쪽으로 하산하면 신원사가 나온다.
724년(신라 성덕왕 23) 상원(上願)이 암자를 세웠던 자리에 회의(懷義)가 절을 창건하고 절 이름을 청량사(淸凉寺)라 하였다. 920년(태조 3) 태조의 명으로 도선(道詵)이 중창한 다음 태조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936년(태조 19) 신라가 망하자 개국공신 유거달(柳車達)이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기 위해 사당을 짓고 사찰을 확장한 뒤 절 이름을 동학사(東鶴寺)로 바꾸었다.
절 이름을 동학사라 지은 것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동학사가 계룡산 동쪽에 있고, 절 인근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동학사라 했다는 설과 삼은각(三隱閣)을 짓고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鄭夢周) 등을 제향하여 동학사(東學寺)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동학사(東學寺)로 기록되어 있다.
1394년(태조 3) 길재(吉再)와 동학사 승려 운선(雲禪)이 단(壇)을 설치하고 고려 태조·충정왕·공민왕 등의 초혼제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고, 1399년(정종 1) 유방택(柳芳澤)이 정몽주·이색(李穡)·길재 등의 초혼제를 지냈다. 1400년 공주목사 이정한(李貞翰)이 단을 삼은단(三隱壇)이라 이름하고, 삼은각(三隱閣)을 건립하였다.
1457년(세조 3) 김시습(金時習)이 이축(李蓄)·조상치(曺尙治)·조려(趙旅) 등과 함께 삼은단 옆에 단을 쌓고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이어서 단종의 제단을 증설하였다. 1458년 세조가 동학사에 와서 제단을 살펴본 뒤 단종·정순왕후(定順王后)·안평대군(安平大君)·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과 사육신, 그리고 세조 찬위 과정에서 원통하게 죽은 280여 명의 이름을 비단에 써 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하였다. 이후 초혼각(招魂閣)을 짓고 토지와 동학사(東鶴寺)라는 현판을 하사하며 승려와 유생이 함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1728년(영조 4) 신천영(申天永)의 난 때 초혼각을 포함한 절의 전각이 모두 불타버렸다. 1785년(정조 9) 정후겸(鄭厚謙)이 위토(位土)를 팔아 제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1814년(순조 14) 월인(月印)이 예조에 상소하여 10여 칸의 사옥과 혼록봉장각(魂錄奉藏閣)을 건립하였다. 1827년(순조 27) 홍희익(洪羲翼)이 인신(印信)을 봉안하는 집을 따로 세웠다. 충청좌도어사 유석(柳奭)이 300냥을 내놓고 정하영(鄭河永)이 제답(祭畓)을 시주하면서 다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1864년(고종 1) 봄, 금강산에서 동학사로 온 만화 보선(普善)이 옛 건물을 전부 헐어버리고 건물 40칸과 초혼각 2칸을 건립하였다.
1904년 초혼각은 숙모전(肅慕殿)으로 이름을 바꿨다. 1950년 한국전쟁 때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1965년 육화원(六和院)과 강설전(講說殿)을 지었고, 1972년 염화실(拈和室)과 범종루를 건립하였다. 1980년 대웅전을 짓고 이어서 1984년 조사전, 1985년 설향당(雪香堂), 1986년 화경헌, 1990년 실상료(實相寮) 등을 건립하였다. 동학승가대학은 경상북도 청도 운문사 강원과 함께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유명하다. 산내 암자로는 관음암·귀명암·길상암·문수암·상원암·미타암 등이 있다.
동학사의 건물로는 대웅전·강설전·동림당·동학강원(東鶴講院)·범종각·삼성각·숙모전·실상선원·염화실·육화당·조사전·화경헌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팔작지붕 건물로, 1980년에 건립되었다. 석가여래를 주존으로 하고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가 안치되어 있으며, 근래에 제작된 목각삼불탱화와 1898년(광무 2)에 조성한 약사탱화·신중탱화·아미타탱화·현왕탱화가 모셔져 있다. 대웅전 동쪽에 있는 실상선원에는 ‘동학사(東鶴寺)’ 사액이 걸려 있다. 실상선원은 근대의 선풍(禪風)을 진작시킨 경허(鏡虛)가 견성성불한 토굴 자리에 세운 것이다.
대웅전 서쪽에 있는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818년에 지어진 것이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내부에는 가운데에 칠성탱화, 좌우로 산신탱화와 독성탱화가 모셔져 있다. 숙모전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되었으며, 계룡산 초혼각지(招魂閣址)는 사육신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높이 176㎝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었다. 삼층석탑은 창건 당시인 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이라는 자료가 있으나, 석탑의 양식으로 보았을 때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동학사에서 북쪽으로 2.8㎞ 떨어진 곳에 보물로 지정된 두 기의 남매탑이 있다.
갑사(甲寺)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갑사로 567-3번지(중장리 52번지), 계룡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갑사는 계룡산 연천봉에서 서북쪽으로 전방이 환하게 트인 곳에 양쪽으로 작은 계곡을 끼고 낮은 산등성의 끝부분에 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갑사로 들어가는 길은 수목이 울창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어 예로부터 산사의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갑사(岬寺), 갑사사(甲士寺), 계룡갑사(鷄龍甲寺), 계룡사(鷄龍寺)라고도 한다.
갑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온다. 「갑사사적비」와 『문화유적총람』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때 자장(慈藏)이 창건하고, 혜명(慧明)이 증축하였다고 한다. 이밖에 420년 아도(阿道) 창건설과 556년(신라 진흥왕 17) 혜명(惠明) 창건설, 아도가 창건하고 혜명이 중창했다는 설 등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503년(백제 무령왕 4) 천불전(千佛殿)을 신축하였다는 설도 있다.
679년(문무왕 9) 의상(義湘)이 중수하였다. 최치원이 찬술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해동(海東)의 화엄대학(華嚴大學)이 십산(十山)에 있으니 중악공산의 미리사, 남악 지리산의 화엄사, 북악 부석사, 강주 가야산의 해인사와 보광사, 응주 가야협의 보원사, 계룡산 갑사(岬寺), 삭주 화산사, 양주 금정산의 범어사, 비슬산 옥천사, 전주 모악산 국신사이다.”라고 하였다. 의상이 당나라 종남산에서 지엄(智儼)에게 화엄의 오묘한 뜻을 배워 깨닫고 신라로 돌아와 화엄의 큰 뜻을 고취하면서 국내의 신령스러운 땅에 제자들과 함께 화엄십찰을 지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계룡산 갑사라고 한다.
859년과 887년 크게 중창 불사가 이루어졌다. 1424년(세종 6) 4월 국가에서 사원의 승려 수와 토지의 규모를 정했는데, 이때 예조(禮曹)에서 “충청도 공주 계룡사는 원래 100결의 토지가 있었지만 이제 50결을 더해서 70명의 승려를 거주토록 할 것”을 건의하여 시행되었다. 1583년(선조 16) 여름 정문루(正門樓)를 중수하였고, 1584년 여름 무게 8,000근으로 대종(大鐘)을 새로 주조하였다. 그것은 기존에 있던 종은 북쪽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한 화포를 제작하는데 공출되었기 때문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전각들이 모두 불타버렸다. 1604년(선조 37) 인호(印浩)· 경순(敬淳) 등이 대웅전과 진해당(振海堂)을 중건하였다. 1654년(효종 5) 사정(思淨), 신휘(愼徽) 등이 관찰사 강백년(姜栢年)의 도움으로 절을 중창하여 사찰을 일신하였다. 불사 당시의 상황은 이지천(李志賤)이 지은 「공주 계룡산 갑사 사적비문」에 새겨져 있다.
1738년(영조 14) 영조의 명으로 표충원(表忠院)을 세웠다. 1797년(정조 21) 원선사(圓禪師)가 중창되었고, 1845년(현종 11) 갑사 남쪽 기슭에 있던 표충원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 1875년 중수되었으며, 1899년 적묵당(寂默堂)을 신축하였다. 갑사의 부속 암자로는 내원암(內院庵), 대성암(大聖庵), 대자암(大慈庵), 대적암(大寂庵), 신흥암(新興庵) 등이 있다.
갑사의 가람 배치는 크게 대웅전 구역과 대적전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대웅전 구역은 갑사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대웅전, 강당, 삼성각, 응향각, 진해당, 적묵당, 종각, 팔상전, 표충원, 요사 등이 있으며, 대적전 구역에는 대적전과 요사가 자리하고 있다. 갑사의 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갑사철당간 및 지주, 갑사 승탑, 갑사동종, 월인석보목판, 갑사 삼신불 괘불탱 등이 있으며,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갑사 강당, 갑사대웅전, 갑사대적전,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 갑사 석조보살입상, 갑사사적비 등이 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영규대사묘, 갑사 표충원, 갑사 삼성각, 갑사중사자암지삼층석탑, 영규대사비, 천진보탑 등이 있다.
이 밖에 갑사 강당에 걸려 있는 ‘계룡갑사(雞龍甲寺)’라는 현판은 절도사 홍재의(洪在義)가 쓴 것이고, 표충원에는 휴정(休靜), 유정(惟政), 기허(騎虛)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갑사 동종은 높이 127㎝, 입지름 91.5㎝로, 1584년(선조 17) 주조되었다. 갑사 동종은 일제강점기 때 쇠 공출물로 빼앗겼다가 광복 후 인천에서 되찾아온 것이다.
영은사는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길 1162번지(궁촌리 942번지), 태백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영은사는 891년(신라 진성여왕 5) 범일(梵日)이 궁방산(宮房山) 밑 마전평(麻田坪)에 절을 창건하고 절 이름을 궁방사(宮房寺)라 한 것이 영은사 창건의 시작이다. 『척주지(陟州誌)』에는 “궁방산 밑에는 쌍석돌들이 있는데, 이는 옛 부도들이다. 하나는 선혜(善惠)의 사리를 두었고, 또 하나는 어느 사미(沙彌)가 죽은 뒤 화장하여 두골을 간직한 것이라 한다. 후에 요사스러운 기운이 있어 부도를 헐어 없앴으며, 현재 돌독만 남아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조선시대 억불정책에 따라 궁방사가 폐사되었음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1567년(명종 22) 사명당 유정이 궁방사와 다소 거리가 먼 현재의 위치로 절을 옮겨 중창하였고 절 이름을 운망사(雲望寺)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전소되자, 1641년(인조 19) 벽봉(碧峰)이 중건하고 절 이름을 영은사(靈隱寺)로 개칭하였다. 1804년(순조 4) 봄에 화재가 발생하여 대웅보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전소되었다. 1805년 삼척 부사 심공저(沈公著)의 도움으로 절을 중건하였다. 1810년(순조 10) 학송(鶴松)이 석가여래삼존불을 봉안하였고, 1855년(철종 6) 서암(西巖) 괘불을 조성하였다. 1864년(고종 1) 심검당을 건립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영은사는 강원도 일대에서는 옛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영은사에는 동해시 삼화사(三和寺)와 더불어 약사삼불(藥師三佛)이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삼화사사적』에 의하면, 삼화사 숲속에 삼층보탑이 있다. 약사삼불인 백(伯)·중(仲)·계(季) 3형제가 서역에서 돌배를 타고 유세하다가 우리나라 동해안에 이르렀다. 첫째는 흑련화(黑蓮花)를 들고 지금의 삼화사인 흑련대(黑蓮臺)에 머물렀고, 둘째는 청련(靑蓮)을 들고 지장사가 있었던 청련대(靑蓮臺)에 머물렀다. 셋째는 금련(金蓮)을 들고 지금의 영은사로 머물러 금련대(金蓮臺)라 하였다고 한다.
영은사의 건물로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된 대웅보전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7호인 팔상전, 심검당, 설선당, 칠성각, 요사 등이 있으며,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8호로 지정된 괘불이 있다.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1805년에 중건한 것이다. 내부에는 1810년 봉안한 석가모니불·문수보살·보현보살의 삼존불이 있고, 이 당시 조성한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1941년 주조된 신라양식의 범종이 있다.
팔상전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영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다. 팔상전은 1804년 화재 때 유일하게 화마를 면한 건물로, 1641년 건립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팔상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근래에 신축한 것이다. 내부에는 1760년(영조 36)에 부처의 일생을 그린 너비 100㎝, 길이 157.5㎝ 크기의 팔상탱화 8점이 봉안되어 있었다. 지금은 팔상탱화를 별도로 보관하고 있다. 영은사 팔상탱화는 강원도 사찰에서는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현재는 조선시대 후기의 신중탱과 최근작인 석가여래탱이 봉안되어 있다.
칠성각에는 1923년 조성한 칠성·산신·독성 탱화와 함께 범일과 사명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괘불탱은 1855년 서암이 조성한 것으로, 괘불을 펼치면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영은사 입구에는 1770년(영조 46) 건립한 높이 160㎝ 크기의 월파당선사부도(月波堂禪師浮屠) 등 3기의 부도와 1830년(순조 30) 세운 높이 96㎝, 폭 42㎝의 사적비가 있다.
신흥사는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양리길 220번지(동막리 1332번지), 태백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삼척시에서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다가 근덕면 근덕해수욕장을 지나면 동막(東幕) 마을이 나타난다. 동막 마을은 물길 동쪽을 막아 논을 개간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막 마을에서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계곡을 따라 4㎞ 정도 올라가면 양평중학교가 나온다. 이곳이 신흥사의 입구이다. 여기서 다시 다리를 건너 골짜기로 들어가면 산문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사적비와 부도와 탑비가 나란히 서 있다.
신흥사는 838년(신라 민애왕 1) 범일(梵日)이 동해시 관내인 지흥리에 절을 세우고 지흥사(地興寺 또는 智興寺)라 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쳤으며, 1674년(현종 15)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창하고 절 이름을 광운사(廣雲寺)라 하였으며 이후 다시 운흥사(雲興寺)로 바꾸었다. 1770년(영조 46) 화재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고, 1771년 영담(影潭)이 주민들의 시주로 중건하였다. 1821년(순조 21) 삼척 부사 이헌규(李憲圭)의 시주로 절을 크게 중창하였고, 절 이름을 신흥사로 개칭하였다. 1863년(철종 14) 중수하였고, 이때 이헌규 부사를 위해 은중각(恩重閣)이란 사당을 세우고 매년 1차례씩 제사를 지냈다. 1983년 주지 재황(載璜)이 학서루(鶴棲樓)를 건립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신흥사는 양평중학교 인근부터 시작한다. 신흥사의 건물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산신각·설선당·심검당·요사·일주문·학서루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1771년 중건할 때 세웠다고 한다. 내부에는 가운데 석가여래삼존불과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예전에 역사가 오래된 삼존불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이운되었다. 지금은 최근에 조성한 후불탱이 걸려 있다.
삼성각은 대웅전 옆에 있으며,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삼성각은 1868년 이헌규 부사를 위해 건립한 은중각 건물을 허물고 신축한 것이다. 내부에는 칠성탱·독성탱·산신탱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아래쪽 마당 좌우로 심검당과 설선당이 자리하고 있다. 심검당과 설선당은 1821년 건립하고 1863년 중수한 것으로,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심검당은 진영각이라고도 하며, 내부에는 종파당(宗波堂)을 비롯한 10점의 고승 진영이 보관되어 있다. 설선당은 신흥사의 큰 스님이 설법할 때 사용하던 건물로, 현재도 요사로 이용되고 있다.
신흥사 입구에는 4기의 석종형 부도와 2기의 비가 세워져 있다. 화운당(華雲堂) 부도는 높이 162㎝이고, 송파당(松波堂) 부도는 높이 147㎝이며, 주운당(珠雲堂) 부도는 160㎝이다. 그리고 높이 127㎝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부도가 서 있다. 2기의 비는 1771년 세운 화운당대사비와 신흥사의 중창주인 영담대사비이다. 그 외에 신흥사 주변에는 민물고기전시관, 해신당공원, 해양레일바이크, 황영조기념공원 등의 볼거리가 있다.
신흥사는 강원도 속초시 설악산로 1137번지(설악동 170번지), 설악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이다. 신흥사는 653년(신라 진덕여왕 7) 자장(慈藏)이 절을 창건하고 9층사리탑을 세워 불사리를 봉안하고 절 이름을 향성사(香城寺)라 하였다. 자장이 창건할 때의 절의 위치는 지금의 켄싱턴호텔 자리라고 한다. 자장은 향성사와 함께 계조암(繼祖庵)과 능인암(能仁庵)도 함께 창건하였다. 698년(신라 효소왕 7) 화재가 발생하여 향성사와 능인암이 불타버렸다. 701년(효소왕 10) 의상(義湘)이 능인암 터에 다시 절을 건립하고 선정사(禪定寺)라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선정사는 1642년(인조 20) 화재가 발생하여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1644년(인조 22) 영서(靈瑞)·연옥(蓮玉)·혜원(惠元), 이 3명의 승려가 중창을 발원할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세 승려의 꿈에 향성사 옛터에서 비범한 신인이 나타나 “이 터는 만대에 이르러 삼재가 감히 침범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널리 불법을 펼 수 있는 도량이 되리라.”라고 하면서 오늘날 신흥사 자리를 점지해 주었다. 세 승려는 이튿날부터 중창을 시작하여 1647년 절을 완공하였다. 그리고 신인이 영원히 흥할 곳에 절터를 잡아주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신흥사(神興寺)’라 하였다.
1661년(현종 2) 해장전(海藏殿)을 짓고 『법화경(法華經)』·『중례문(中禮文)』·『결수문(結手文)』 등의 목판본을 두었다. 1715년(숙종 41) 설선당(說禪堂)이 불에 타 버리자 1717년(숙종 43) 취진(就眞)·익성(益成) 등이 설선당을 중건하였다. 1725년(영조 1) 해장전을 중수하였고, 1737년(영조 13) 명부전을 창건하고 지장보살상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1801년(순조 1) 벽파(碧波)·창오(暢悟) 등이 용선전(龍船殿)을 건립하고 열성조(列聖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813년(순조 13) 주운(周雲)·철수(喆修)·윤찬(潤贊) 등이 불이문(不二門)과 단속문(斷俗門)을 세웠으며, 벽파·창오·승기(勝琦) 등이 보제루(普濟樓)를 중수하였다.
1821년(순조 21) 거관·근민(近旻) 등이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수하였고, 1858년(철종 9) 벽하(碧河)·명성(明成)이 구월산 패엽사(貝葉寺)로부터 16나한상을 옮겨와서 해장전에 봉안하고, 해장전을 응진전(應眞殿)으로 고쳤다. 1909년 용선전을 헐어 냈고, 1910년 응진전이 불탔으며, 1919년 응진전을 중건하였다. 1924년 설선당과 후각(後閣) 32칸을 중건하였다. 1965년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가 되어 강릉·속초·양양 등지의 사찰과 암자를 관장하고 있다. 1995년 영동 지역 불교를 새롭게 부흥시키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절 이름을 ‘신흥사(神興寺)’에서 ‘신흥사(新興寺)’로 개칭하였다.
신흥사의 건물로는 극락보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호), 명부전·삼성각·종각·보제루(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4호)·사천왕문·일주문· 적묵당(寂默堂)·운하당(雲霞堂)·수각(水閣)·종무소·요사채 등이 있다. 지정문화재로는 보물 제443호인 향성사지삼층석탑과 보물 제1981호인 신흥사 대웅전 기단,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호인 경판(經板) 등이 있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신흥사의 중심 법당이다. 극락보전은 신흥사라는 이름으로 중창할 때 세운 오랜 역사를 지닌 건물이다. 극락보전 왼쪽에 있는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737년에 지은 것이다. 극락보전과 명부전 사이에 있는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1892년 신흥사와 관련된 고승들의 영정을 봉안한 진영각(眞影閣)이 무너지자, 그 목재를 활용하여 삼성각을 건립한 것이다. 극락보전 오른쪽에 있는 범종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시대 후기에 지어졌다고 한다. 내부에는 1748년(영조 24) 주조된 대종이 있다. 하지만 대종은 한국전쟁 때 총상을 입어 현재 사용하지 않는다.
극락보전 건너편에 자리한 보제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1644년에 건립된 것이다. 1770년과 1813년, 그리고 1971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보제루에는 ‘백설루(白雪樓)’, ‘외설악루(外雪嶽樓)’, ‘해악루(海嶽樓)’ 등 한때 보제루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하던 현판이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설악산신흥사(雪嶽山神興寺)’ 편액이다. 신흥사의 첫 관문인 일주문 옆에는 철책과 담장으로 가린 부도밭이 있다. 부도밭에는 신흥사사적비, 대원대선사비, 용암대선사비, 벽파당비, 월암당탑 등 20여 기의 부도가 있다. 그리고 일주문 앞에는 높이 14.6m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청동불좌상이 봉안되었다. 청동대불은 통일을 기원하며 건립한 것으로, 일명 ‘통일대불’이라고도 한다.
마곡사는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로 966번지(운암리 567번지), 태화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이다. 마곡사는 태화산의 지맥으로 둘러싸인 명승지에 위치한 공주의 대표적인 고찰이다. 『택리지(擇里志)』와 『정감록』 등에서 우리나라에서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
마곡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 자장 창건설이다. 1785년(정조 9) 제봉(霽峰)이 쓴 「마곡사대광보전중창기(麻谷寺大光寶殿重創記)」에 의하면, 마곡사는 643년 자장(慈藏)이 창건하였다. 자장은 나라에 많은 사찰을 세웠는데, 마곡사는 자장이 세운 세 번째 사찰이라고 한다. 범일(梵日)이 두 번째로 중창하였으며, 도선(道詵)이 세 번째로 중창하였다. 보조(普照)가 네 번째로 중창하였으며, 각순(覺淳)이 다섯 번째로 중창하였다고 한다. 둘째, 삼곡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충청남도 청양 장곡사와 공주 마곡사, 지금은 사라진 충청남도 예산 안곡사를 이곳에서는 삼곡사라 불렀다. 긴골·삼골의 이름을 장곡(長谷)·마곡(麻谷)으로 고쳤다고 한다.
셋째, 무염(無染) 창건설이다. 신라시대 승려 무염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마곡사를 짓고, 스승인 마곡보철(麻谷寶徹)을 사모하는 의미로 절 이름을 마곡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넷째, 마곡사가 세워지기 전에 마씨(麻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여 마곡사가 되었다고 한다. 다섯째, 일제강점기에 30본말사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문건에는 신라 때 보조(普照)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선교양종대본산마곡사연기약초」라는 자료에도 똑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충청남도지에 번역 발췌문이 수록되어 있다. 마곡사의 창건과 관련해서 현존하는 자료에 의하면 창건주는 자장율사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마곡사는 본사답게 다수의 전각과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마곡사 건물로는 대웅보전, 국사당, 대광보전, 명부전, 영산전, 응진전, 천왕문, 해탈문, 범종루, 흥성루 등이 있고, 요사도 고방(庫房), 매화당(梅花堂), 심검당(尋劒堂), 연화당(蓮華堂), 염화실(拈花室), 우화궁(雨花宮) 등 여러 채가 있다. 그밖에 마곡사에는 오층석탑이 있고 천왕문과 해탈문 사이에 부도 5기가 있다. 2002년부터 마곡사에서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마곡사에는 보물 7점을 비롯하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6점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5점 등 모두 18점의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것으로는 『감지은니묘법연화경(紺紙銀泥妙法蓮華經)』, 『감지은니묘법연화경(紺紙銀泥妙法蓮華經)』 권제6, 마곡사 오층석탑(麻谷寺 五層石塔), 마곡사 영산전(麻谷寺 靈山殿), 마곡사 대웅보전(麻谷寺 大雄寶殿), 마곡사 대광보전(麻谷寺 大光寶殿), 「마곡사 석가모니불괘불탱(麻谷寺 釋迦牟尼佛掛佛幀)」의 7점이 있다.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는 마곡사 동제은입사향로(麻谷寺 銅製銀入絲香爐), 마곡사 동종(麻谷寺 銅鐘), 마곡사 심검당 및 고방(麻谷寺 尋劍堂 및 庫房), 마곡사 표고당 범종,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목삼세불상, 「공주 마곡사 영산회상도」 의 6점이 있다.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것으로는 마곡사 천왕문(麻谷寺 天王門), 마곡사 국사당(麻谷寺 國師堂), 마곡사 명부전(麻谷寺 冥府殿), 마곡사 응진전(麻谷寺 應眞殿), 마곡사 해탈문(麻谷寺 解脫門)의 5점이 있다.
봉곡사는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도송로 632번길 138번지(유곡리 595번지), 봉수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봉곡사는 아산 지역을 대표하는 고찰 가운데 하나이지만, 절의 내력은 대부분 구전에 의한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봉곡사는 887년(신라 진성여왕 1)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려 의종 대에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중창하였으며, 1419년(세종 1) 함허(涵虛)에 의해 다시 중창되었다. 당시 벽련암(碧蓮庵)·보조암(普照庵)·상암(上庵)·태화암(太和庵) 등 여러 개의 암자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하나 이와 관련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1584년(선조 17) 중수하면서 봉서암(鳳棲庵)이라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1646년(인조 24) 중창되었고, 1794년(정조 18) 경헌(敬軒)·각준(覺俊)이 중수하고 절 이름을 봉곡사로 고쳤다. 1825년(순조 25) 요사를 수리하고 2층 누각을 신축하였다. 1872년(고종 9) 서봉(瑞峰)이 요사 후방을 증축하였다. 1891년 서봉이 다시 법당을 중수하였고, 1931년 또 한 차례 중수하였다. 2001년부터 최근까지 몇 차례에 걸쳐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다. 한편, 봉곡사와 직접 관련된 자료로는 1864년(고종 1)에 쓴 「태화산봉곡사산령각서문(泰和山鳳谷寺山靈閣序文)」이 『충청남도 사찰자료집』에 수록되어 있다.
봉곡사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 사찰이다. 봉곡사의 주요 인물로는 창건주인 도선국사, 중창주 보조국사 지눌과 함허당 기화, 그리고 정약용과 만공 등을 들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1795년(정조 19)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밀입국 사건으로 7월에 충청남도 청양의 금정도찰방으로 좌천되어 5개월간 근무하였다. 정약용은 1795년 10월 26일부터 11월 5일까지 열흘간 봉곡사에 머물면서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종손자인 이삼환(李森煥)과 함께 성호 이익의 유고를 정리·교정하였다. 그 당시 내포 지역의 명문자제들과 문답한 내용으로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를 저술하였으며, 봉곡사에서 지은 시 한 수가 전한다.
근대에는 불교 중흥에 이바지한 만공 월면(滿空月面)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만공은 23세 때인 1893년부터 2년간 봉곡사에 머물며 면벽수행을 하였다. 1895년 7월 26일 활연대오(豁然大悟)의 깨달음을 얻은 만공은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고 한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빈 산의 이치와 기운은 고금 밖인데]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흰 구름 맑은 바람은 스스로 오고 가누나]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에서 건너왔는고]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축시에는 닭이 울고 인시에는 해가 뜨네]”
봉곡사의 건물 중에서 대웅전·요사채·고방은 고건축물이고, 향각전과 삼성각 등은 근래에 건립한 것이다. 대웅전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석가불좌상과 후불탱화·신중탱화·지장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지장탱화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42호로, 대웅전은 옆에 있는 고방과 함께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3호로 지정되었다. 고방은 사찰의 보관 창고 건물이다. 요사채의 정면은 불전으로 꾸며져 있고, 내부에는 목조문수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봉곡사에는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불화 1점이 있었으나 1985년 도난을 당해 현재 소재 불명인 상태이다.
신안사는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신안사로 970번지(신안리 52번지), 신음산(神陰山)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신안사에 이르는 긴 계곡을 포함하여 주변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경내에 호화롭고 장엄한 건물들이 다수 세워져 있어 스님들이 많이 머무르며 수행하던 거찰(巨刹)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대광전과 극락전 2동의 건물과 요사 1동만이 세워져 있어 다소 적막한 느낌을 주고 있다.
신안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자료마다 서로 다른 내용을 수록하고 있어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먼저 583년(신라 진평왕 5) 무염(無染)에 의한 창건설이 일부 자료에 전한다. 무염은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창자인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801~888년)을 가리키는 것으로 연대가 맞지 않는다. 또한 651년(신라 진덕왕 5)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자장이 인근의 충청북도 영동에 있는 영국사(寧國寺)에서 수행할 때 가끔 이곳 절에 머물렀는데,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으므로 신안사라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창건설로는 보석사의 창건주로도 알려진 조구가 신라 헌강왕 때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신안사는 뚜렷한 문헌적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각종 구전 자료와 현대 자료에 근거하여 창건을 추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신안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가람고』에 현존하는 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신안사는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사세(寺勢)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신안사가 전성기일 때는 대웅전·극락전·요묵당(寥默堂)·진향각(眞香閣) 등 호화롭고 장엄한 건물이 많았으며, 승려 3,000여 명의 수행하던 거찰(巨札)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보석사의 말사가 되었으며, 한국전쟁 때 전각 다수가 불타버렸다.
신안사의 건물로는 대광전·극락전·요사채가 있다. 경내 석축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5단 내외의 높이로 쌓았으며, 과거 모습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대광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정면은 겹처마, 후면은 홑처마로 되어 있는 조선시대 후기 건물이다. 내부에는 닫집이 마련된 불단 가운데 비로자나불이 있고 좌우로 약사여래와 석가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은 1973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건물은 1996년 보수한 것이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아미타불과 좌우에 협시보살을 봉안하였으며, 1935년 조성된 탱화가 있다. 1985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극락전 앞에 칠층석탑이 서 있는데, 전체적인 형태가 엉성한 것으로 보아 단일 석탑의 부재로 생각되지 않는다. 신안사에는 『금강반야바라밀경』, 『대승기신론소』, 『사십이경』, 『위산경책』, 『조계시집』, 『조심무』, 기타 문집류 등 7종 86매의 목판을 소장하고 있다. 신안사로 들어오는 마을 입구에 종형 부도 2기가 있다. 1기의 답신석에는 ‘청신여보인지탑'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밖에 극락전 옆에 수조(水槽)로 이용하는 110×120×25㎝ 크기의 맷돌이 있고, 장독대 주변에 높이 74㎝, 너비 32㎝의 석등 간주석이 있으며, 장대석들과 절구 석재 등이 남아 있다.
신원사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신원사동길 1번지(양화리 8번지), 계룡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신원사는 계룡산의 동서남북에 있는 4대 사찰 중 남쪽 사찰에 해당한다. 신원사는 651년(백제 의자왕 11) 열반종(涅槃宗)의 개조(開祖)인 보덕(普德)이 창건하였다. 보덕은 원래 고구려의 승려로 평양 영탑사(靈塔寺)를 세우고 연복사(演福寺)에도 주석한 고승이다. 고구려 보장왕이 도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펼치자 이에 반발하여 백제로 건너와서 전라북도 완산주에 경복사(景福寺)를 세우고 백제 불교를 중흥시킨 인물이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 신원사 근처를 지나다가 법당만 남은 절을 중창하였고, 1298년(고려 충렬왕 24) 무기(無寄)가 중건하였다. 1394년(태조 3) 무학(無學)이 크게 중창하였다. 이때 영원전(靈源殿)을 건립하였다. 1644년 주지 삼욱(三旭)이 영준(靈俊)의 증명 아래 괘불을 조성하였다. 1866년(고종 3) 관찰사 심상훈(沈相薰)이 중수하면서 신정사(神定寺)에서 신원사(新元寺)로 이름을 바꿨다. 1644년 조성된 괘불의 화기에 ‘신정사’라 쓰여 있고, 18세기의 문헌인 『가람고』와 『범우고』에는 ‘신원사’로 되어 있다. 1876년 보연(普延)이 중건하였다. 1879년 계룡산 중악단(中嶽壇)을 설치하여 묘향산 상악단(上嶽壇), 지리산 하악단(下嶽壇)과 아울러 왕실의 기도처로 삼았다. 1946년 만허(滿虛)가 중수하였다. 부속 암자로는 고왕암(古王庵)·남암(南庵)·등운암(騰雲庵)·마명암(馬鳴庵) 등이 있다.
신원사 건물은 계룡산 천왕봉의 남서쪽 산등성이를 배경으로 하여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신원사의 건물로는 대웅전, 영원전, 독성전, 사천왕문, 세진당, 종무소, 계룡선원 등이 있다. 신원사는 가운데 자리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쪽 좌우에 영원전과 요사가 있고, 서쪽에는 독성각이 대웅전을 바라보고 있다.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사천왕문이 있고, 그 서쪽에 범종각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서쪽에 있는 요사는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신원사(新元寺)’라는 사액이 걸려 있다. 절 입구 동쪽에 서향으로 건립된 계룡선원은 외국인을 위한 국제 선방으로 사용된다. 신원사에서 동북쪽으로 100m 떨어진 산기슭에 백곡당(白谷堂)· 추월당(秋月堂) 부도 등 8기의 부도가 한 줄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984년(고려 성종 3) 여철(如哲)이 중수하였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다시 중수한 것이라 한다. 지금 대웅전은 1876년(고종 13) 보연(普延)이 중건하였고 1906년 일봉(日峰)이 중수하였으며, 1946년 만허가 다시 중수한 것이다. 내부에는 아미타여래를 주존으로 하여 왼쪽에 관세음보살이,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후불탱화로는 20세기 초에 제작한 영산회상도가 모셔져 있고 같은 시기에 그린 신중탱화가 대웅전 서쪽 벽에 걸려 있다. 대웅전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었다.
영원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서쪽을 향하고 있다. 내부에는 뒷면에 ‘ㄷ’자 모양의 단을 조성하여 지장보살, 도명보살, 지장삼존, 시왕, 판관, 녹사, 사자, 인왕 등이 모셔져 있다. 영원전은 일반 사찰에서는 명부전이라 부른 전각이다. 독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형태의 소형 건물로 남쪽을 향하고 있다. 최근에 그린 독성도와 1907년 그린 칠성도, 보련당(寶蓮堂)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신원사 대웅전을 향해 오른쪽에 중악단이 자리하고 있다. 중악단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팔작지붕 건물로, 조선시대 말기 건축물 중에서도 우수한 편에 속한다. 내부 중앙 뒤쪽에 단을 설치하고 계룡산신의 위패를 모셨다. 보물 제1293호로 지정된 중악단은 국가적 산신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층석탑은 중악단에서 동남쪽으로 30m 떨어진 곳에 있는 고려시대 석탑이다. 현재 탑신부가 4층만 남아 있는데, 본래는 오층석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75년 보수 공사 때 사리구와 함께 고려시대 동전 등이 발견되었다. 오층석탑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신원사 노사나불괘불탱은 1644년에 조성한 것으로 조선시대 후기 불화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노사나불괘불탱은 국보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쌍계사는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중산길 192번지(중산리 21번지), 작봉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쌍계사는 작봉산의 계곡이 깊고 삼림이 울창한 산기슭에 북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1739년(영조 15)에 건립된 중건비(重建碑)에 의하면 고려시대 이행재(李杏材)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절의 창건 연대와 창건주는 미상이다. 쌍계사는 예전에 극락전, 관음전, 동당, 명월당, 백월당, 삼보, 서당, 선원, 장경각, 향로전, 해회(海會), 요사 등 500~600여 칸의 전각으로 이루어진 충청도 지방의 대가람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후기에 화재로 절에 있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된 것을 성능(性能), 극찰(克察) 등이 각지의 시주를 얻어 중창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쌍계사의 중심 전각이다. 대웅전은 조선시대 후기의 단아한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보물 제408호로 지정되었다. 쌍계사 대웅전은 산지 사찰의 특성을 잘 살려 평지에다 1m 정도 높이에 단을 쌓고 건물을 건립하였다. 대웅전은 전체적으로 커다란 규모의 장중함과 섬세한 조각이 잘 조화된 아름다운 전각이다. 내부에는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 오른쪽에 약사불이 있다. 석가여래는 높이 180㎝, 무릎 폭 130㎝로 비교적 큰 규모이다.
삼세불상은 2013년 ‘논산 쌍계사 목조 석가여래삼불좌상’이란 이름으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25호로 지정되었다가 2015년 ‘논산 쌍계사 소조 석가여래삼불좌상’이란 이름으로 보물 제1851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삼세불 뒤에 영산회상도, 극락회상도, 약사여래도 등 각각 독립된 3점의 불화가 걸려 있다. 이들 불화는 1923년에 조성한 것으로, 전체적으로 색감과 양식이 똑같다. 이밖에 대웅전에는 지장보살상과 신중탱화, 동종 등이 있는데 모두 최근에 만든 것이다. 대웅전 정면에 달린 다섯 칸의 여닫이문은 국화, 모란, 연꽃무늬 등 서로 다른 꽃문양 살로 제작되었다.
쌍계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나한전과 칠성각이 위치하고, 정면 왼쪽에 명부전과 오른쪽에 요사가 자리하고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1983년에 만든 지장보살상·시왕상·지장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를 비롯하여 16나한상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모두 최근에 만든 것이다.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1976년에 조성한 산신탱화·칠성탱화·독성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봉황루는 사찰에서 처음 만나는 전각으로, 대웅전 정면에 자리하고 있다. 봉황루 정면에는 쌍계사라 쓴 편액이 걸려 있으며, 내부에는 1966년 조성한 법고가 있다. 쌍계사 입구에는 1739년에 세운 쌍계사중건비와 부도 9기가 있다. 쌍계사중창사적비의 내용은 화재로 소실된 사찰을 중건하고 그 시말과 시주 명단을 적은 것이다. 부도는 조선시대 중기 이후 쌍계사에서 주석했던 고승들의 묘탑(廟塔)이다. 부도의 양식은 대부분 석종형으로, 높이는 115~178㎝로 다양하다. 그리고 대웅전 뒤쪽에 관음보살좌상과 관음보살비문이 있다.
일락사는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일락골길 501번지(황락리 1번지), 상왕산(象王山)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이다. 일락사는 해미읍성에서 5㎞가량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포장길 끝에 자리하고 있다.
일락사는 663년(신라 문무왕 3) 의현(義賢)이 일락사(日樂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창건 이후의 연혁은 알 수 없으나 한때 폐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8년 쓴 「일락사 대웅전 중창기」에 의하면, 1479년(성종 10), 1487년(성종 18), 1540년(중종 35), 1574년(선조 7), 1649년(인조 27)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중수되었다. 특히 1649년 해미읍성의 객사를 중건할 때 일락사의 대웅전을 함께 중수하였다. 1910년 기존의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975년 명부전과 요사 3동을 신축하거나 중수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해미현 불우(佛宇)조와 1957년 토지대장에는 일악사(日岳寺)로 되어 있다. 지금처럼 일락사가 부르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인 듯하다. 현재 대웅전은 1993년 기존의 건물을 해체하여 원래 있던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옮겨 세운 것으로, 이때 ‘명부전’이란 현판을 달았다. 원래 대웅전이 있던 자리에는 대적광전을 신축하였다. 1988년 6월 18일 일락사는 전통 사찰 45호로 지정되었다.
일락사의 건물로는 대웅전, 대적광전, 현음당, 객실 및 요사 3동과 3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대적광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93년 예전 대웅전 자리에 새로 지은 전각이다. 예전 대웅전에 있었던 불보살상 등의 상설(像設)은 거의 그대로 대적광전으로 옮겨놓았다. 대적광전의 삼신불은 모두 금분이 덧입혀져 있으나 본래 중앙의 비로자나불는 흙, 왼쪽의 석가불은 나무, 오른쪽의 노사나불은 철로 제작되었다. 노사나불은 높이 80㎝, 무릎 너비 60㎝로, 일락사철불(日樂寺鐵佛)이란 이름으로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지정되었다.
일락사철불의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았을 때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일락사철불은 현재 수덕사 성보 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 중이다. 현재 대적광전에 있는 노사나불은 1999년에 새로 봉안한 것이다. 또한 대적광전에는 1759년(영조 35) 5월에 조성한 일락사 범종이 있었다. 1970년대 후반에 잃어버려 행방을 알 수 없다. 현재 대적광전에 모셔진 작은 종은 1990년대 후반에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대적광전 불화로는 독성탱화, 산신탱화, 칠성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 중에서 칠성탱화와 신중탱화는 1919년에 조성된 것으로 칠성탱화는 가로 156.5㎝, 세로 130㎝, 신중탱화는 가로 129㎝, 세로 157㎝이다.
명부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현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예전에는 대웅전이었으나 1993년 지금의 자리로 해체하여 이전하면서 명부전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대웅전에 봉앙되었던 불보살상 등은 대적광전에 거의 그대로 모셨다. 명부전은 조선시대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1919년 중창되었다. 삼층석탑은 대적광전 앞에 있으며,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성 기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다. 현재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00호로 지정되었다.
태고사는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청림동로 440번지(행정리 산29번지), 대둔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태고사는 대둔산 마천대 아래 위치하여 뛰어난 자연경관으로 유명하고, 전국 12승지(勝地) 중 하나로 이곳을 꼽고 있다. 태고사는 신라시대 원효가 창건하였다. 원효가 이곳을 발견하고 너무 기쁜 나머지 3일 동안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만해 한용운도 태고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둔산 태고사를 보지 않고 천하의 승지를 논하지 말라.
태고사라는 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 말에 태고 보우(太古普愚)가 중창하였고, 조선시대 중기에 진묵(震黙)이 다시 중창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서 수학하였다는 관련 자료도 전한다. 태고사는 일제강점기 30본말사법이 시행되었을 때 보석사의 말사였다. 한국전쟁 때 사찰이 전소된 것을 주지 도천(道川)이 30여 년간 태고사에 머물면서 대웅전·무량수전·요사·지장전을 신축하고 108계단을 조성하였다. 108계단을 한 걸음씩 걸어 올라갈 때마다 절을 찾는 사람들의 번뇌도 하나씩 사라진다. 한편, 전단향나무로 만든 삼존불상을 개금할 때 갑자기 뇌성벽력과 함께 장대비가 쏟아져서 금칠을 말끔히 씻어버렸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태고사의 건물로는 대웅전·극락전·관음전·산신각·요사 2동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7칸, 측면 2.5칸의 팔작지붕에 ‘ㄷ’자 형태의 건물로, 1977년 신축되었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아미타여래·약사여래의 3불을 모셨다.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되었다. 극락전은 1978년 건립되었으며, 내부에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지장보살 등이 모셔져 있고, 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관음전은 3면 5칸 건물로, 1977년 건립되었으며 내부에는 관세음보살과 뒷면에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산신각은 1980년에 건립된 건물로, 내부에 칠성탱화·산신탱화·독성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태고사 경내에는 부도 3기가 있다. 부도는 모두 기본적으로 석종형을 하고 있다. 그중 전체 높이 105㎝, 탑신 지름 50㎝의 부도는 화강암 석재로 조성되었다. 방형의 지대석 위에 원형 하대석을 마련하였다. 하대석에는 앙련(仰蓮)의 연꽃을 모각하였고, 그 위에 석종형 탑신을 올려놓았다.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부도 중 하나인 높이 109㎝, 탑신 지름 50㎝의 부도는 방향의 지대석 위에 연화문을 모각한 원형 하대석을 마련하였다. 탑신은 상부에 보주가 모각된 종형이며, 보주는 3단의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하나의 부도는 높이 108㎝, 탑신 지름 50㎝로 석재는 화강암이다. 방형의 지대석과 연화문이 배치된 원형 하대석을 마련하였다. 탑신석은 상부에 연화상의 보주가 모각되었다. 태고사 경내 입구에 자연석 바위의 틈으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암문(巖門)이 설치되어 있다. 암문 외부 입구에 음각된 ‘석문(石門)’은 송시열의 친필이라 전한다. 글씨 크기는 길이 40㎝, 너비 30㎝ 정도이다.
향천사는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사로 117-20번지(향천리 59번지), 금오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수덕사의 말사이다. 향천사는 예산읍 동북쪽으로 12㎞가량 떨어진 금오산 향로봉 남쪽 기슭에 있다. 652년(백제 의자왕 12) 의각(義覺)이 창건한 고찰이다. 652년 의각은 일본에 가서 잠시 머물다가 그해 당나라 오자산(五子山)에 가서 불법을 닦았다. 의각은 3년 동안 석불 3,053상을 비롯하여 전단향(旃檀香) 나무로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아미타불·16나한상 등의 불교 조각을 조성하였다.
655년, 의각은 백제 사신을 따라서 귀국하면서 이 석불들을 돌배에 싣고 바다를 건넜다. 그런데 백제 오산현 북포 해안에 도착했으나 마땅한 절터를 잡지 못했다. 석불은 몇 달 동안 배에 보관하였다. 이때 배 안에서 종 치는 소리가 해변 마을에 진동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종성리라 하였다. 어느 날 금오(金烏) 한 쌍이 날아와 배 주위를 돌고 날아갔다. 의각이 금오를 뒤따라갔더니 지금의 향천사 자리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의각이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향내가 그득한 샘물이 흘러나왔다. 의각이 샘물 자리에 절을 짓고 향천사라 하였다. 그리고 산 이름을 금오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의각에 이어 도장(島藏)이 절에 주석하였다. 698년(신라 효소왕 7) 왕의 도움으로 동관음전, 서로전, 동선당, 서선당 등 모두 400여 칸의 전각과 암자를 지어 충청도 지역의 손꼽히는 명찰로 만들었다. 고려시대 지눌이 네 번째로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때 천불전을 제외한 건물 전체가 소실되었다. 1596년(선조 29) 멸운(滅雲)이 절을 중창하여 100여 칸에 달하는 전각을 새로 지었다. 1924년 호서 은행장 김진섭이 18점의 불화를 조성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보산(寶山)이 약 10년간 주석하면서 절을 중건하였다. 1971년 극락전, 1982년 서선당과 단월당을 신축하였다. 1985년 천불전과 나한전을 해체하여 복원했으며, 1986년 종각을 건립하였다.
향천사의 건물로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나한전·천불선원·동선당(東禪堂)·서선당·단월당(檀越堂)·승방(僧房)·범종각 등이 있다. 극락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원래 지금보다 왼쪽에 있었는데, 1980년대 후반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내부에는 조선시대에 조성한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을 비롯하여 후불탱화·지장탱화·신중탱화·산신탱화 등이 모셔져 있다. 불화는 대부분 1993년에 조성한 것이다.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2019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천불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크기의 건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3호로 지정되었다. 천불전 내부에는 토단(土段) 3면에 높이 15㎝ 이상의 크고 작은 1,516개의 좌불상이 모셔져 있다. 작은 불상들은 대부분 석고상이고, 큰 불상들 가운데는 석재(石材)로 만든 것도 있다. 천불천에서 서쪽으로 70m 떨어진 곳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9호로 지정된 부도 2기가 있다. 1기는 향천사를 창건한 의각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때 승군을 조직하여 금산 전투에 참여했던 멸운의 부도로, 1708년(숙종 30)에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근래에 건립한 보산 대선사 부도탑 1기가 더 있다.
나한전 앞에는 화강석재로 만든 9층 석탑이 있는데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4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탑은 2대 주지였던 도장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웠는데 임진왜란 때 파손되어 4층부터는 답신이 손실되었다. 향천사 범종은 전체 높이 102.6㎝, 입지름 64.3㎝, 두께 5.8㎝로, 제작연대와 발원자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자료적 가치가 높다. 범종은 일제강점기 때 전쟁물자로 공출되어 예산역까지 반출되었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다시 향천사로 돌아왔다고 한다. 현재 향천사 범종은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각연사는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각연길 451번지(태성리 38번지), 보개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때 유일(有一) 창건하였다. 유일이 창건했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설 형태로 전해진다. 유일이 지금의 칠성면 쌍곡리 사동 근처에 절터를 잡고 공사를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가 나타나서 제각기 대팻밥과 나무 부스러기를 물고 날아갔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유일이 까마귀 떼의 뒤를 따라갔다. 까마귀들은 조그마한 연못에 물고 온 대팻밥을 떨어뜨리고는 합창하듯이
‘까욱! 까욱!’
하며 울어댔다.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이 인도한 것으로 생각한 유일은 지체하지 않고 돌아갔다. 유일은 다른 스님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다 같이 연못으로 왔다. 스님들은 연못이 천하의 명당이라 칭송하며 합심하여 연못을 메워가며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연못 속에서 환한 광채가 빛나 살펴보니 물 속에 석불 한 구가 있었다. 석불을 절에 안치했는데, 지금의 비로전에 모셔진 비로자나불이 바로 그 불상이라고 한다. 각연사는 “유일대사가 연못 속에 불상이 있음을 깨달았다(覺有佛於淵中)”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후 이 불상에 지성으로 기도드리면 영험이 크다고 하여 참배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시대 초기에 통일(通一)이 중창하면서 각연사는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고려 혜종 때 다시 중수하였다. 1648년(인조 26)과 1655년(효종 6) 비로전 법당을 중수하였다. 1678년(숙종 4)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768년(영조 44) 대웅전을 이전하여 중수하고 불화를 조성하는 등 대규모 중창이 이루어졌다. 이때 자리를 옮겨 신축한 대웅전은 현재도 장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1899년(광무 3) 비로자나불상을 개금(改金)하고 비로전을 중수하였다.
1927년 한 차례 더 중수하였다. 1940년 칠성탱화를 봉안하였고, 1967년 칠성각과 요사를 신축하였다. 1975년 비로전을 중수하였고, 1979년 비로전의 후불탱화를 봉안하였다. 1987년 동종을 봉안하였고, 1988년 신중탱화를 조성하고 경내 축대를 보수하였다. 1989년 사찰 진입로를 포장하고, 칠성·산신·독성 등의 탱화를 봉안하였다. 1992년 선원·요사 등을 신축하였다. 1993년 비로전과 대웅전 기와 불사를 했고, 통일대사탑비를 보수하였다. 1994년 대웅전 극락회상도를 봉안하고, 1996년 삼성각·종각을 신축하였다.
각연사의 건물로는 비로전·대웅전·칠성각·산신각·요사채 2동 등이 있다. 이중 비로전은 각연사의 중심이 되는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비로전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의 건물은 1648년과 1655년 중수한 것을 기본적인 골격으로 하여 1980년에 보수한 것이다. 비로전은 1982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되었으며, 내부에는 1966년 보물 제433호로 지정된 전체 높이 302㎝, 불상 높이 128㎝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768년 이전·중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내부에 석가불을 주존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한 삼존상이 봉안되었다. 1982년까지만 해도 석가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 때문인지 삼존상 뒤에는 석가·아미타·약사불의 삼세불 탱화가 그대로 있다. 대웅전은 1982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각연사에서 동남쪽으로 1㎞ 떨어진 곳에 통일대사탑비가 있다. 통일대사탑비는 전체 높이 470㎝로서, 비문은 대부분 마멸되어 3,500자 중 260자 정도만 띄엄띄엄 남아 있다. 고려시대 초기의 웅건하고 직선적인 탑비의 경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2003년 보물 제1295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 각연사에는 통일대사부도, 범종(梵鐘), 석조귀부, 팔각옥개석 등 풍부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북대 미륵암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1215-89번지(동산리 308-10), 오대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산내 암자이다. 상원사 입구에서 큰길을 따라 4㎞ 정도 올라가면 길 바로 옆에 북대(北臺)가 있다. 북대 미륵암은 신라 성덕왕 때 보천태자의 유언에 따라 창건되었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태자와 효명태자는 속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오대산으로 들어와 중대와 북대 아래 푸른 연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초가집을 짓고 불법을 닦았다.
보천태자는 석가모니불과 오백나한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진 북대에 나한당(羅漢堂)을 짓고 절 이름을 백련사(白蓮寺)라 하였다. 보천태자의 유언에 따라 북대암에는 석가모니불 당시의 영산회상(靈山會上)을 그대로 재현하였고, 수백 년 동안 나한도량으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현재 북대에는 석가모니불과 나한상 대신 미륵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암자 이름도 나한당이 아닌 미륵암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렇게 북대의 성격이 변하게 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1360년 나옹(懶翁)이 오대산에 들어와 북대에서 머물렀다. 당시 북대는 상두암(象頭庵)이라 불렀다. 그것은 북대를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코끼리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나옹은 공민왕의 부름을 받기 전까지 1년 넘게 상두암에서 머물렀다. 북대 미륵암은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현재의 북대 미륵암은 한국전쟁 이후에 중건한 것이다. 북대 미륵암에는 현재 너와로 지붕을 얹은 법당을 비롯하여 산신각과 요사 등이 있다. 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상호가 매우 원만한 미륵보살좌상과 근래에 조성한 후불탱이 모셔져 있다. 미륵보살좌상은 손에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둥근 구슬을 쥐고 있는데, 이와 같은 지물(持物)을 손에 쥐고 있는 미륵보살은 다른 사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오대산에 있던 승려들은 북대에 있는 16나한상을 상원사로 옮기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무거운 16분의 나한상을 10리도 넘는 상원사로 옮기는 것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나옹은 자청해서 혼자서 모두 옮기겠다고 하였다. 마침내 16나한상을 옮기기로 약속한 날이 되었다. 그런데 나옹은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한상을 옮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답답해진 승려들이 언제 나한상을 옮길 것이냐고 독촉했지만 나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옹은 해가 질 무렵이 되자 주장자를 들고 나한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나한상 앞에 서서
“이미 옮긴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제 발로 옮겨갈 일, 이 화상이 업어서 옮겨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하면서 주장자로 나한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러자 나옹에게 머리를 맞은 나한상이 벌떡 일어나더니 법당 밖으로 날아갔다. 이런 방식으로 16나한상을 차례대로 상원사를 향해 날아가게 하였다. 승려들이 상원사에 가서 확인해보니 15나한상만 도착해 있었다. 승려들이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칡덩굴에 걸려 있는 나한상을 발견하고 상원사로 모셨다. 나옹은 오대산 산신에게 이운불사(移運佛事)를 방해한 칡덩굴을 오대산에서 없애라고 명하였다. 이때부터 오대산에서는 칡덩굴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위의 설화는 단순히 흥밋거리의 이야기가 아니다. 북대에 봉안된 나한상이 상원사로 옮겨졌으며, 이후 북대에는 미륵보살을 주불로 모시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암자 이름도 미륵암으로 개칭되었을 것이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나한을 자유자재로 옮기고 오대산 산신에게 이운불사를 방해한 칡덩굴을 없애라고 명하는 등 나옹의 도력과 당시 사람들의 나옹에 대한 외경심도 함께 담겨 있는 것이다.
감추사는 강원도 동해시 해안로 120번지(송정동 산12-1번지)에 있는 한국불교태고종 소속 사찰이다. 동해시에서 삼척시 방향으로 해변 도로를 따라 4㎞ 정도 달리면 왼쪽에 간이 주차장이 나오고, 그 아래쪽 바닷가에 감추사가 자리하고 있다. 감추산과 감추해수욕장 사이이다. 감추사의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선화공주와 관련된 창건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는 백제 무왕과 결혼한 후 백풍병(白風病)이 들었다. 선화공주는 여러 약을 써보았으나 병에 차도가 없었다. 선화공주는 익산의 용화산 사자사(獅子寺)에 머물던 지명법사(知命法師)를 찾아갔다. 지명법사는 선화공주에게 동해안 감추로 가보라고 권하였다. 선화공주는 2칸 크기의 자연 석굴에 불상을 안치하고 매일 낙산 용소(龍沼)에서 목욕재계하며 3년 동안 치성을 드렸다. 마침내 병을 고친 선화공주가 감추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감추사 창건 당시의 절터 흔적은 찾을 수 없으며, 다만 선화공주가 기도를 드렸다는 석굴만이 현재 감추사 입구에 남아 있다. 감추사는 오랫동안 폐사되었다가 1902년 중창하고 신건암(新建庵) 또는 대은사분암(大恩寺分庵)이라 하였다. 1959년 해일로 석실과 불상이 유실되었다. 1965년 주지 인학(仁學)이 법당과 요사를 세웠다. 감추사는 관음 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병든 사람이 기도하며 쾌차한다고 하여 사람이 많이 찾고 있다고 한다.
감추사 입구 계단 옆에는 1979년에 건립한 특이한 형태의 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감추사를 즐겨 찾던 어느 여신도가 임종할 때 아들 박복수(朴福壽)에게 절에 석탑을 세워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여신도의 아들은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고자 감추사에 오층석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한편, 감추사 입구에 있는 샘물에서는 약수가 흘러넘친다. 수중지수라 하여 감로수(甘露水)라 부른다. 마을에서는 가뭄이 심할 때 감로수에서 기우제를 올린다고 한다.
감추사는 바닷가에 인접하여 관광객들이나 해수욕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감추사 주변에는 한섬해변과 한섬감성바닷길이 있다. 한섬해변은 동해선 철길 아래 있는 호젓하고 아담한 해변으로, 동해 시민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한섬감성바닷길은 감추사 육교~한섬~고불개~가세마을을 연결하는 길이 2.2km의 해변 산책로이다.
감추사의 건물로는 법당과 삼성각, 용왕각, 요사 등이 있다. 건물 4채가 저마다 바위틈에 교묘하게 자리 잡고 있다. 감추사는 바람이 센 날은 사찰 벽에 파도가 부딪칠 만큼 바다와 가깝다. 법당으로는 2007년 신축한 관음전이 있다. 법당 가운데에는 관세음보살좌상과 아미타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불단 왼쪽으로 지장보살좌상과 지장명부시왕도가 모셔져 있고, 오른쪽에 신중탱화를 모신 신중단이 있다. 삼성각은 1965년에 지은 것으로 정면 1칸과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내부에는 산신·칠성·독성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천은사는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안로 816번지(내미로리 758번지), 두타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천은사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천은사는 758년(신라 경덕왕 17) 인도에서 용 혹은 돌배를 타고 온 3명의 승려인 두타삼선(頭陀三仙)에 의해 창건되었다. 두타삼선은 두타산의 네 모퉁이에 절을 창건하였다. 동쪽은 청련(淸蓮)을 갖고 와서 지상사(池上寺)를, 남쪽은 금련(金蓮)을 갖고 와서 영은사(靈隱寺)를, 북쪽은 흑련(黑蓮)을 갖고 와서 삼화사(三和寺)를, 서쪽은 백련(白蓮)을 갖고 와서 천은사를 지었다.
천은사는 839년(신라 문성왕 1) 범일(梵日)이 극락보전을 창건하면서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1304년(고려 충렬왕 30) 이승휴(李承休)가 자기의 별장을 절에 시주하여 간장암(看藏庵)을 건립하였고, 1322년(고려 충숙왕 9) 이승휴의 장남인 이임종(李林宗)과 차남인 승려 담욱(曇昱)이 중수하였다. 1598년(선조 31) 휴정(休靜)이 절을 중건하고, 절의 남서쪽 봉우리가 검푸른 것을 보고 흑악사(黑岳寺)라 하였다.
1706년(숙종 32) 화재가 발생하여 절이 소실된 것을 1707년 중건하였다. 1831년(순조 31)과 1837년(헌종 3)에도 중수되었다. 1899년(광무 3) 조선 태조의 4대조인 목조(穆祖)의 능을 수축하고 천은사를 원당 사찰로 삼았다. 이때 “임금의 은혜를 입었다.”라고 하여 흑악사를 천은사로 개칭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절이 완전히 불타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였다. 1976년 일봉(一峰)이 주지로 부임한 이래 불사를 거듭하여 오늘날과 같은 사찰의 규모를 조성하였다.
『삼척군지』에는 조선시대 이전 천은사의 역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절은 세 차례나 다래 덤불 속에 들어갔고, 세 차례나 화재를 겪었으며, 세 차례 중건하였다고 한다. 첫째는 포수(砲手)가 사슴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는데 산척(山尺)을 이곳에서 얻어 절을 지었다. 산척과 총은 극락전 등보 위에 전해 왔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둘째는 이승휴가 간장암을 지은 것이요, 셋째는 황색 비단 가사(袈裟) 한 벌이 있었는데, 3~4인을 덮을 만한 가사로서 나옹조사의 것이라 하여 전해오던 것이 없어졌다.”라는 이야기이다. 위의 기록은 한 포수에 의한 천은사의 중창과 나옹 선사와 천은사의 관련성을 짐작할 수 있다.
천은사의 건물로는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삼성각·약사전·영월루·요사·육화료·종각 등이 있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세음보살, 오른쪽에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1976년 아미타불을 개금(改金)할 때 복장에서 ‘간장사(看藏寺)’라 쓴 『법화경』과 함께 ‘가경삼년무오사월십육일개금(嘉庚三年戊午四月十六日改金)’이란 글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아미타불은 1779년(정조 3)에 개금한 사실과 더불어 불상이 조성된 시기가 1779년 훨씬 이전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목조 아미타삼존불상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 옆에 자리한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8호로 지정된 높이 7㎝ 크기의 금동약사여래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고려시대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현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극락보전 오른쪽 위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에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1962년 그린 산신탱, 2003년 그린 용왕탱, 근래 봉안된 독성상과 독성탱 등이 모셔져 있다. 한편, 천은사 입구에 있는 천은사기실비(天恩寺記實碑)는 1921년 3월에 세운 사적비이다.
법흥사는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무릉법흥로 1352번지(법흥리 422-1번지), 사자산(獅子山)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법흥사는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자장(慈藏)이 창건한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 가운데 한 곳이다. 창건 당시 절 이름은 흥녕사(興寧寺)였다. 882년 석운(釋雲)은 금강산 장담사(長潭寺)에 머물던 징효대사 절중(折中)에게
“노승(老僧)이 있는 이곳은 작은 그릇이 있을 곳이 아니니
대사가 여기에 주석(駐錫)한다면 가장 적합할 듯합니다.”
라고 하며 영월 사자산 흥녕사에 머물 것을 부탁하였다. 흥녕사는 절중이 머물면서 사자산문의 개산(開山) 사찰이 되어 크게 번창하였다. 신라 헌강왕은 흥녕사를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키고 국가 차원에서 사찰을 지원하였다. 891년(신라 진성여왕 5) 병화로 소실되었다가 944년(고려 혜종 1) 중건되었다. 그 뒤 다시 불에 탄 법흥사는 천년 가까운 세월을 조그마한 사찰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大圓覺)에 의해 30칸의 사찰이 중창되었다. 이때 법흥사로 개칭하였다. 1912년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30년 다시 중건되었다. 1931년 산사태로 옛 사지 일부와 석탑이 없어졌다. 1946년 적멸보궁을 중수하였고, 1991년 적멸보궁을 중창하였다. 1995년 범종을 주조하였다.
법흥사 건물로는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극락전, 금강문, 만다라전, 산신각, 삼성각, 심우장, 원음루, 일주문, 조사전 등이 있다. 법흥사의 경내는 크게 흥녕선원지의 중심 권역, 징효대사의 부도와 부도비 권역, 적멸보궁 권역 등 3개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법당 내부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다. ‘적멸’이란 시비와 분별이 끊어진 영원한 평화의 세계를 말하고, ‘보궁’이란 지혜와 자비의 공덕으로 건립한 부처의 궁정을 말한다. 현재 적멸보궁에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샘솟는 샘이 있고, 전국에서 수많은 신도가 찾아오고 있다. 현재 적멸보궁은 1902년 세운 보궁을 헐고 1993년 재건축한 것이다. 새로운 단청으로 깔끔한 느낌을 주지만, 옛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적멸보궁 왼쪽 뒤쪽으로 자장이 수도하였다는 석굴이 있다. 석굴의 내부 높이는 160㎝, 깊이는 150㎝, 너비는 190㎝로, 고려시대에 축조했거나 보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굴 왼쪽에 자장이 진신사리를 담아서 사자의 등에 싣고 왔다는 석함이 자리하고 있다. 『범우고』에는 “절 뒤쪽 1리에 토굴이 있고, 그 굴 안에 석함이 있는데 전하는 이야기로는 승려들의 불경을 소장하는 석함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근래에 적멸보궁이 중건되면서 앞부분을 대리석으로 높은 축대를 쌓아서 원형이 훼손된 상태이다. 석실과 석함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 944년 건립된 영월흥녕사지징효대사탑비(보물 제612호)와 영월 징효국사 부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2호), 영월 법흥사 부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3호), 영월 법흥사 석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9호), 영월 흥녕선원지(강원도 기념물 제6호) 등이 남아 있다.
대조사는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성흥로197번길 112번지(구교리 760번지), 성흥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대조사는 임천면 소재지의 동쪽에 있는, 성흥산성의 남쪽 중턱 계곡에 자리한 규모가 크지 않은 사찰이다. 「대조사미륵실기(大鳥寺彌勒實記)」와 『부여읍지』에는 다음과 같은 창건 연기 설화가 전한다.
백제 때 승려 겸익(謙益)이 인도 상가나율자(常伽那律者)에서 5년간 수학하였다. 겸익은 범문에 능통해서 아담장(阿曇藏) 5부 율문(律文) 가져다 75권의 역본을 제작하여 흥륜사에 두었다. 어느 날 겸익의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역본이 잘 되었다고 칭찬하고는 큰 새로 변해 가림성(嘉林城) 위로 날아와서는 사라졌다.
다음 날 겸익이 꿈에 새가 앉았던 곳을 찾아가 보니 바위 위에 관음보살이 앉아 있었다. 겸익은 527년(백제 성왕 5)부터 532년까지 석불을 조성하였다. 그것이 대조사 뒤쪽에 있는 석조 미륵불이다. 이에 절을 창건하고 대조사라 하였다. 겸익이 인도에서 범문의 경전을 가져다가 흥륜사에 둔 사실은 「미륵불광사사적(彌勒佛光寺事蹟)」에도 전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한 노승이 바위 밑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노승은 큰 새 한 마리가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 후 노승이 잠에서 깨어보니 어느새 바위가 미륵보살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 절을 짓고 대조사라 하였다고 한다. 고려 원종 때 부여 무량사의 진전장로(陳田長老)가 불상을 중수하였다. 1989년 명부전, 1993년 종각, 1994년 미륵전을 각각 신축하였다.
대조사의 건물은 미륵보살입상을 중심으로 전각이 세워져 있다. 미륵불상 남쪽으로 원통보전과 명부전이 있고, 동쪽으로 용화보전이 건립되어 있다. 원통보전과 명부전 축대 밑에 동쪽으로 치우쳐 요사 2동이 건립되어 있고, 서쪽으로 범종각이 자리하고 있다. 원통보전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 조선시대 동헌(東軒) 건물로 사용하던 것이다. 1900년대 초에 대조사로 옮겨왔다. 내부에는 관음보살상과 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다.
용화보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 별도의 불상이 봉안되어 있지 않다. 유리문을 통해 미륵불상을 친견하게 되어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지장보살과 시왕도를 봉안하였다. 산신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탱을 봉안하였다.
대조사 미륵보살입상은 보물 제217호로 지정된 석불로, 천연 암반을 이용하여 조성한 것으로 보개(寶蓋)만 별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제적으로 몸통이 지나치게 비대화 되었고, 하반부의 표현이 간략하게 되어 있어 매우 어색한 느낌을 준다. 논산의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 초기의 양식을 지닌 것으로 추정되나, 「대조사미륵실기」에는 고려 원종 대인 13세기에 조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대조사 삼층석탑은 본래 옥개석 3매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석탑 부근에서 탑신이 발견되어 현 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현 높이는 4.55m로,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0호로 지정되었다.
부석사는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부석사길 243번지(취평리 154-1번지), 도비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이다. 부석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먼저 부석사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677년(문무왕 17)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친 의상이 뱃길로 귀국하면서 서해안에 상륙하여 가장 먼저 이곳에 와서 절을 짓고 부석사라 하였다고 한다.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 다음으로 지은 절이 서산 부석사라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고려시대 말의 충신 유금헌(柳琴軒)과 관련된 것이다. 유금헌은 조선이 개국하자 망국의 설움을 품고 이곳에 와서 별당을 짓고 독서하며 세월을 보냈다. 유금헌이 죽고 적감(赤感)이 별당을 절로 바꾸고 부석사라 하였다. 부석사에서 바라다보이는 서해안 바다 한가운데 마치 바위처럼 떠 있는 섬이 있어서 절 이름을 부석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부석사 창건 이후의 연혁은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무학이 중건하였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만공 월면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쳤다고 한다.
부석사는 바다를 향하여 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부석사의 건물로는 극락전·심검당·목룡장·안양루·산신각·설법전·금종각·회랑·수지채·요사채·항적당(공양간)·사찰음식체험관·운거루·선녀다방(찻집)·정진선원(사무실)·일주문 등이 있다. 부석사는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195호로 지정되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95년 해체·복원하였는데, 이때 일제강점기에 중수한 내용이 담긴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내부에는 아미타상을 비롯하여 영산회상탱화·칠성탱화·신중탱화·산신탱화 등이 조성되어 있다. 영산회상탱화는 가로 195㎝, 세로 164㎝로, 1867년에 제작된 것이다. 그림 아래 화기에 금어, 해명, 봉은 등의 이름이 있다. 칠성탱화는 가로 196㎝, 세로 117.5㎝로, 1924년 금호 약효(錦湖若效)가 조성한 것이다. 신중탱화는 화기 일부가 없어서 정확한 제작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남은 화기에 춘담 봉은의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영산회상탱화와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극락전 앞 처마에 걸려 있는 ‘부석사’ 편액은 만공의 글씨이며, 극락전 뒤쪽으로 대나무와 향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다. 극락전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나 1980년 도난당했다.
심검당에는 ‘심검당’과 ‘무량수각’의 두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산신각에는 ‘산신각’, ‘선묘각’, ‘용왕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심검당 앞에 부석약수가 있고, 극락전 옆에 ‘부석’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부석바위가 있으며 만공이 수도하였다는 만공토굴이 있다. 한편, 1669년(현종 10) 조성된 부석사 동종은 원래 극락전에 안치되어 있었으나, 종의 상부가 파손되어 현재 수덕사 성보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전체 높이가 93㎝, 입지름이 69.5㎝, 두께 6.7㎝이다. 부석사 동종은 조선시대 후기 범종을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부석사에서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템플스테이는 한국불교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산찰(山刹)에서 수도자의 일상을 경험하는 전통문화체험 프로그램이다. 부석사의 휴식형 템플스테이는 연중 어느 때나 가능하며 주중에는 휴식형으로, 주말에는 참가자가 5인 이상일 경우 체험형으로 진행된다.
죽사는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갓고개길 242-24번지(성리 산 37-1번지), 비룡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수덕사의 말사이다. 인지면의 최북단에 위치한 성리는 1914년 전국 행정구역 통폐합 때 성동(星洞)을 중심으로 내동, 신동, 쌍효동, 용암동, 행제동 일부를 합쳐 성리라 하여 서산군 인지면에 속했다. 1995년 서산군과 서산시가 통합되면서 서산시 인지면 성리가 되었다. 성리에 있는 마을들은 고도가 높은 관계로 화훼와 채소 등 밭작물을 주로 재배하고 있다.
죽사는 비룡산 남동쪽에 솟아 있는 큰 암벽 아래 위치하여 풍광이 좋은 절로 유명하다. 비룡산의 산길에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죽사에 나온다. 가파른 언덕에 절이 세워져 돌담을 높게 설치하였다. 죽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구전에 의하면 백제 의자왕 때 도감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또 다른 구전에 의하면, 죽사 부근의 풍전리 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빌기 위해 수백 년 전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죽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죽사는 1988년 6월 18일 전통 사찰로 지정된 비구니 수행 도량이다.
오랜 옛날 이곳에 대나무와 바위가 있었다. 대나무와 바위는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뽐내곤 하였다. 어느 날 대나무와 바위는 50장 정도 높이를 누가 먼저 올라가는지 내기를 했다. 대나무는 몸이 가늘어 위태롭게 위로 올라갔지만, 바위는 옆으로 넓게 퍼지며 거침없이 올라갔다. 바위가 대나무보다 더욱 높이 솟아올라 거의 승리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산에는 용이 살고 있었다. 용은 바위가 점점 커지면서 자기가 지내고 있는 공간이 비좁아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화가 난 용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바위를 향해 벼락을 치며 불을 뿜었다. 바위가 주춤하는 틈을 타서 결국 대나무가 내기에서 이기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절 이름을 ‘죽사(竹寺)’, 산 이름을 비룡산(飛龍山)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죽사의 건물로는 원통전, 산신각, 종각, 요사채가 있다. 대웅전에 해당하는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근래에 중건하였다. 내부에는 금동석가불상을 본존으로 왼쪽에 관세음보살상이,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상이 협시하고 있다. 그 뒤쪽으로 후불탱화가 그려져 있다. 그 밖에 신중탱화, 산신탱화, 지장탱화, 칠성탱화가 있다. 승려 석교가 1977년 지장탱화를, 1986년 산신탱화와 신중탱화를 조성하였다. 칠성탱화에는 화기(畵記)가 없어 언제 조성되었는지 알 수 없다. 종각은 암벽 위에 조성되었다. 절 양편으로 길쭉한 모양의 큰 바위가 호위하듯 자리를 잡고 있으며, 절 뒤쪽 바위틈으로 대나무가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탁 트인 벌판과 바다가 어울려 전망이 뛰어나다.
공림사(公林寺)는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괴산로 공림길 104번지(사담리 산11번지), 낙영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공림사는 괴산군 지역의 대표적인 명찰 중 하나로, 유구한 역사와 빼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1688년(숙종 14) 경일(敬一)이 편찬한 「낙영산공림사사적비(落影山空林寺事蹟碑)」에는 다음과 같은 창건 연기와 관련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옛날 신라 경문왕 때 고승 자정(慈淨)이 있었다. 자정은 도덕과 탁월한 수행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으며, 왕도 그의 명성을 듣고 흠모하였다.
경문왕은 자정을 국사로 모시고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란 벼슬을 내렸다. 하지만 자정은 이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고 낙영산에 띠로 지은 집을 짓고 숨어 살았다. 이 같은 내용을 전해 들은 임금이 보방(寶坊)을 지어 주고 ‘공림사(空林寺)’라는 절 이름도 하사하였다. 이후 명나라 건문(建文) 연간에 함허당(涵虛堂) 득통(得通)이 자정의 자취를 흠모하면서 법당과 여러 요사 등을 중건하고 절의 면모를 일신하니 사람들이 ‘함허의 도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낙영산공림사사적비」에 의하면, 자정이 창건하고 함허당 득통이 법당과 여러 요사를 건립하는 등 대규모 중창 불사를 이룩하였다는 것이다.
1407년(태종 7) 자복사찰(資福寺刹,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한 사찰)을 명찰(名刹)로 대체하라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 자은종(慈恩宗) 소속의 공림사가 자복사찰이 되었다. 15세기 중반 세조가 공림사에 행차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대웅전을 제외한 전각이 모두 불타버렸다. 사적기에 의하면, 당시 여러 건물이 불에 탈 때 갑자기 바람이 반대로 불어와서 대웅전만큼은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1688년(숙종 14) 「낙영산공림사사적비」를 건립하였다.
1720년(숙종 46) 여러 곳의 시주로 중창 불사가 진행되었다. 1727년(영조 3) 비구니 도형(道炯)이 중건하였으며, 1776년(정조 1) 범종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1912년 일제가 시행한 30본말사법에 의해 법주사의 산외말사로 등록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사찰 대부분이 불에 타버렸다. 1965년 삼주가 극락전과 요사 1동을 건립하고, 극락전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개금하였다. 1981년 탄성(呑星)의 주관으로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시작하여 1994년에 13년 동안 진행된 대규모 중창 불사가 마무리되었다.
공림사의 건물로는 대웅전, 관음전, 삼성각, 범종루, 영하문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 요사 및 ‘감인선원(堪忍禪院)’, ‘선심당’으로 부르는 선원 등이 있다. 그리고 1993년 조성한 적광탑과 석가탑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 내부에 석가삼존불상이 모셔져 있고 각각의 불상에 해당하는 영산회상후불탱화·문수후불탱화·보현후불탱화가 있다. 관음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 관음보살좌상이 있고 목각 관음후불탱·신중탱·감로탱화가 있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독성탱화·산신탱화·칠성탱화가 모셔져 있다. 범종은 요사 마루에 있는데, 1776년에 조성한 것이다. 범종은 높이 66㎝, 지름 55㎝의 중종으로, 공림사에 있는 문화유산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단호사는 충청북도 충주시 충원대로 201번지(단월동 453-104번지)에 있는 대한불교태고종 소속 사찰이다. 단호사는 서쪽으로 달천(達川)과 이웃해 있으며 맞은 편에는 충렬사(忠烈祀)가 자리하고 있다. 단호사의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조선시대 숙종 때 중건하고 나서 절 이름을 약사(藥寺)라 개명하였다. 1954년 겨울에 단호사로 개칭되었다. 대웅전에 모셔진 철불좌상(鐵佛坐像)이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절의 창건 시기를 고려시대로 추정할 수 있으나 철불좌상이 처음 봉안된 장소를 알 수 없어 창건 연대가 불확실하다. 현재 단호사의 주지는 근행이고, 매월 첫째·셋째 일요일, 초하루와 보름에 정기 법회를 진행하고 있다. 단호사는 충주 시내 평지에 자리하고 있어 단아하면서도 잘 정돈된 모습이 주위 환경과 잘 어울린다.
단호사 경내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500년이 넘는 소나무가 있다. 소나무의 높이는 8.5m, 둘레는 2.1m이다. 이 소나무와 관련된 전설이 ‘하단마을 자랑비’라는 비문에 쓰여 있다. 소나무는 조선시대 초기에 심어진 것이다.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강원도에서 문약국을 운영하던 사람이 자식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노인이 이 사람에게 “충주의 단호사에서 불공을 드리면 득남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혼자 단호사에 와서 불당을 짓고 불공을 드렸다. 그는 적적해서 뜰에 나무를 심고 정성껏 가꾸었다. 불공을 드리던 어느 날이었다. 꿈에서 이 사람은 고향 집으로 돌아가 집 마당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 안방에 부처를 모시는 꿈을 꾸었다. 같은 날 강원도에 있는 부인도 단호사 법당이 자기 집 안방으로 바뀌는 꿈을 꾸었다. 부인은 남편과 같이 살라는 계시로 여기고 집을 정리하고 단호사로 와서 법당 옆에 살게 되었다. 그 후 부인은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되었다. 이후로 많은 사람이 단호사를 찾아와 득남하기를 기원하고 소원성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단호사의 건물로는 대웅전·약사전·칠성각·요사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28평 규모의 다포식 건물이며, 내부에는 보물 제512호로 지정된 단호사 철불좌상이 주존불로 모셔져 있고, 왼쪽으로 대세지보살과 지장보살이, 오른쪽으로 관세음보살이 있다. 칠성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고, 요사는 8칸의 목조기와집이다. 약사전 앞뜰에 있는 삼층석탑은 높이 214㎝로, 최근 석탑에 대한 정밀 조사 결과 원래는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조선고적조사보고서(朝鮮古蹟調査報告書)』에는 “읍남약사전삼층석탑신라(邑南藥師殿三層石塔新羅)”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삼층석탑을 통일신라 때 작품으로 추정하기도 하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다. 약사전 북쪽 뒤뜰에 미륵불입상이 있다. 미륵불입상은 1973년에 조성한 것으로, 높이 6m가량의 시멘트로 만든 것이다. 단호사의 후불탱화는 길이 184㎝, 폭 180㎝로, 나이론 포(布) 바탕의 채색화이다. 이에 1960년 제작된 산신탱화·신중탱화·칠성탱화가 있다. 이밖에 전 주지 김보근의 부도가 있고, 부도비 뒤쪽으로 공덕비 2기가 세워져 있다.
상원사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상원사길 292번지(연수리 220-5), 용문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상원사는 용문산 중턱에 있는 용문사와 윤필암(潤筆庵) 사이에 위치한다. 상원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상원사에 관한 첫 기록은 태고 보우의 제자인 유창(維昌)이 쓴 「이웅존자시원증행장(利雄尊者諡圓證行狀)」으로, 그의 문집인 『태고화상어록부록(太古和尙語錄附錄)』에 수록되어 있다. 「이웅존자시원증행장」의 내용은
“1330년(충숙왕) 경오 봄에
용문산 상원암에 들어가 관음보살께 예배하고,
열두 가지 큰 서원(誓願)을 세울 때에 지극한 정성은
허파를 갈라 나왔고 우는 눈물은 줄줄 흘렀다.
그 뒤로는 지혜가 앞에 나타나 마치 한 자루의 칼과 같았다.”
라는 짤막한 기사이다. 요컨대 보우가 용문산 상원사에 들어가 관음보살께 12대 서원을 세웠다는 것이다. 다만, 보우가 언제 상원사에 들어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398년(태조 7) 조안선사(祖安禪師)가 중창하였고, 왕사를 그만둔 무학대사가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1450년 1월 24일 세종이 정효강(鄭孝康)을 보내 상원사에서 구병수륙재(救病水陸齋)를 베풀었다.
1463년(세조 9) 8월 세조가 그의 비와 세자와 함께 경기도를 순행하다가 효령대군의 원찰이었던 상원사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백의의 관세음보살이 나타나고 상서롭고 아름다운 빛이 비치고 음악이 들리다가 한참 후에 흩어졌다. 이 모습에 감격한 세조는 쌀 200석을 하사하고 내관을 시켜 향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세조는 한양으로 돌아와서 죄인을 사면하였고 정부 관원들은 축배를 들어 경하하였다. 훈부(勳府)에서는 상원사에 불상을 만들어 건물에 봉안케 하였고, 관음보살상을 그림으로 그려서 전국에 배부하였다. 그리고 신숙주, 호응, 전균을 상원사에 보내 다시 깊이 공양하였다. 세조가 상원사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당시 정황은 최항이 쓴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에 기록되어 있다.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는 현재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상원사의 이후 450여 년간의 역사는 알 수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범우고』 등에 절 이름만 나온다. 용문산 주변의 사찰과 마찬가지로 상원사도 20세기 들어 몇 차례 방화로 건물이 불타버렸다. 1907년 의병 봉기 때 일본군의 방화로 법당을 제외한 건물이 모두 전소되었다. 1918년 화송(華松)이 큰방을 복원하였고 1934년 경언(璟彦)이 객실을 신축했다.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된 것을 1969년 덕송(德松)이 초막을 지어 다시 법등을 이었다.
1970년 경한(鏡漢)이 요사를 신축하였고, 이에 1972년 삼성각을, 1975년 대웅전을 각각 복원하였다. 1977년에는 용화전과 청학당을 세웠다. 현재 상원사의 건물들은 모두 1970년대 이후 지어진 것이다. 상원사에는 현존하는 중요 문화재는 없다. 원래 효령대군이 봉안한 범종(梵鐘)과 세조가 모신 관세음보살상, 세조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당시 모습을 그려 전국에 배포하였다는 관음탱화, 그리고 석사자(石獅子) 1구와 팔각석탑등(八角石塔燈)이 있었다고 전한다.
인왕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일로 18가길 16-1번지(무악동 산3번지) 인왕산 자락에 있는 전통 사찰이다. 인왕사는 본래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뒤 경복궁을 수호하는 호국도량(護國道場)으로 창건한 사찰이라 전한다. 1503년(연군산 9) 인왕사가 경복궁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한때 철거되었으나 얼마 안 돼 다시 세워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불타 없어졌다.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1912년 박선묵(朴詵黙)이 선암정사(禪巖精舍, 현 본원정사)라는 암자를 세웠다.
1914년 탄옹(炭翁)이 대원암(大願庵)을 세웠고, 1922년 서옹(西翁)이 극락전을 지었다. 1924년 자인(慈仁)이 안일암(安逸庵)을 세웠고, 1927년 춘담(春潭)이 다시 극락전을 세웠다. 1930년 묘법(妙法)이 치성당(致誠堂)을 신축하는 등 10여 개의 암자가 한 터에 군집하였다. 1942년 분리된 여러 개의 암자를 통합하여 ‘인왕사’라는 이름으로 봉은사의 말사로 등록하였다. 현재 인왕사는 단일 사찰이 아닌 5개 종단 11개의 작은 암자들이 ‘인왕사’라는 하나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각각 암자마다 종단이 다르고 주지도 별도로 있다. 인왕사는 4년에 한 번씩 사찰을 대표하는 총 주지를 선출하여 운영되고 있다. 인왕사는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경복궁을 수호하고 있다.
인왕사 부근에 2개의 큰 돌이 있는데, 이를 선바위[선암(禪岩) 또는 입암(立岩)]라 부른다. 선바위는 바위 모습이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모습이라거나 조선 태조와 왕비의 상이라고도 한다. 선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하여 기자암(祈子岩)이라고도 한다. 선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태조가 한양도성을 쌓을 때였다. 무학과 정도전이 선바위를 성안에 넣을 것인가 아니면 성 밖으로 내놓을 것인가를 두고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그것은 선바위가 성안에 있으면 불교가 흥성하고, 반대로 선바위가 성 밖에 있으면 유교가 불교를 누르게 되기 때문이다. 태조는 수많은 논의 끝에 정도전의 의견을 따라 선바위를 성 밖으로 내놓기로 하였다. 이때 무학대사가 “이제 중이 선비의 책 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게 되었구나.”하고 크게 탄식했다고 한다. 선바위는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인왕사는 여러 개의 암자가 일관된 계획 없이 조성되어 절의 분위기나 배치가 유기적인 연관성을 갖지 못한다. 또 1910년대도 이후에 건립된 근대식 건물이어서 문화재적 가치도 별로 없는 편이다. 인왕사에서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암자는 본원정사(本願精舍)이다. 본원정사는 대웅전·요사·유물관인 심우장(尋牛莊) 등에서 주요 법회와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인왕사는 무속신앙과 관련된 국사당(國師堂)과 그 안에 있는 무신도(巫神圖), 그리고 선암(禪岩) 등이 있어 더욱 주목받고 있다. 특히 국사당은 무속신앙의 상징이면서도 불교와 융합된 요소가 많으므로 인왕사에 있는 각각의 암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한다.
국사당은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神堂)으로, 본래 남산 꼭대기에 있었다. 1925년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세우면서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자리한 국사당을 못마땅하게 여겨 인왕사 부근 선바위 아래로 이전한 것이다. 국사당을 옮길 때 재료를 그대로 가져와 복원하였다고 한다. 국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내부는 11평 정도이다. 동서 양쪽에 있는 온돌방은 나중에 만든 것이다. 국사당 마루 좌우 일부와 윗면과 앞면에 무신도가 걸려 있다.
국사당에는 21점의 무신도와 7점의 명두(明斗)가 있는데, 무신도를 그린 작가는 알 수 없다. 국사당 건물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사당은 조선 태조 때부터 국가의 공식 행사인 기우제와 기청제를 지냈다. 이곳에서의 개인적인 제사는 금지되었다. 조선시대 말엽 국가적인 제사를 올리는 일은 사라졌고 다만 별궁(別宮) 나인들이 치성을 드리는 정도였다고 한다. 명성황후도 궁중 나인들을 시켜 이곳에서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연주암은 경기도 과천시 자하동길 63번지(중앙동), 관악산 연주봉 남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관악사는 개성 송악산, 가평 화악산, 포천 운악사, 파주 감악산과 더불어 경기 오악의 하나로 불렸다. 관악산에는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 자리한 연주암을 비롯한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연주암 중건기 등의 자료에 의하면, 677년(신라 문무왕 17) 의상(義湘)이 관악산에 의상대를 짓고 수행하였으며, 그 밑에 관악사(冠岳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관악사라는 절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된 고찰임을 알 수 있다.
1392년(태조 1) 이성계가 의상대를 중건하였다. 1396년 연주암을 신축하였으며, 1411년(태종 11) 효령대군이 현 위치로 옮겨 중건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1868년(고종 5) 명성황후가 하사금을 내려 극락전과 용화전을 수리하였고, 1883년에 대방을 개축하고 기와 불사하였다. 1886년 행문(幸文)이 법당과 나한전을 개수하였고, 1886년 명성황후가 내린 하사금으로 전각과 요사를 수리하였다.
1918년 경산(慶山), 1929년 재운(在芸), 1936년 교훈(敎訓)이 중수하였다. 1975년 송원(松園)이 대웅전을 신축하였으며, 1979년 연주대와 삼성각을 수리하였다. 1981년 요사를 개축하고, 1996년 관음전을 보수하였으며, 2003년 영산전을 중수하였다. 2005년 연주대를 대수선하였다.
연주암이라는 절 이름에 관해서는 두 가지 유래담이 전해지고 있다. 첫째는 고려 말 충신과 관련된 내용이다. 고려 말 충신이었던 강득룡, 남을진, 서견 등이 관악산에 은거하면서 의상대에서 멀리 송도를 쳐다보며 고려왕조를 그리워해서 연주대라 불렀다고 한다. 둘째는 태종의 두 아들과 관련된 내용이다. 태종의 첫째 아들인 양녕대군과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은 아버지 태종이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유랑 길을 떠났다. 두 대군은 의상이 창건한 관악사를 찾아와 수행을 통해 왕위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자 노력하였다. 당시 관악사에서는 멀리 왕궁이 보였으므로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현재의 위치에 40칸 규모의 건물을 짓고 거처를 옮겼다. 이후 사람들이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마음을 기리는 의미로 의상대를 연주대로,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연주암의 건물로는 대웅전·관음전·영산전·연주대(응진전)·삼성각·효령각이 있다. 대웅전은 1975년에 건립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해발 638m의 높은 산정에 세웠다는 데 의미가 있다. 대웅전 앞에는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삼층석탑이 서 있다. 삼층석탑은 높이 3.2m로, 연주암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재이며 1980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해발 629m의 기암절벽 정상에 자리한 연주대는 서울 교외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1973년 경기도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다. 효령각에는 효령대군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무봉사는 경상남도 밀양시 영남루1길 16-11(내일동 37번지) 영남루 근처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다. 무봉사는 절 아래로 밀양강이 흐르고, 절 인근에 있는 밀양의 대표적 문화재인 영남루와 함께 그림 같은 풍광을 자랑하여 예부터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무봉사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는 영남루의 가을 달빛과 더불어 이른바 밀양 팔경의 하나로 손꼽힌다.
무봉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773년(신라 혜공왕 9)에 법조 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다. 법조 대사는 당시 신라 9대 사찰의 하나였던 영남사에 참배하러 왔다가 커다란 봉황이 날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때 봉황이 앉을 자리에 절을 창건했는데, 그것이 무봉사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고려시대 범률 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다.
조선시대 밀양 출신의 신국종이 편찬한 「무봉암중건기」에 의하면, 이곳에 주석하던 범률 국사가 밀양의 지세가 봉황이 춤추는 형국이라 절 이름을 무봉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의 삼문동에 봉황이 많은 알을 낳게끔 밤나무를 심어 안락한 환경을 만들었다. 그리고 주변 암자에서 종을 치자, 그 소리를 듣고 봉황이 날아갔다고 전한다.
무봉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5년 혜징 대사가 중건하였다. 이때 법당과 칠성각․수월루를 신축하였다. 1628년경의 대사가 다시 중창하였고, 1899년 경봉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942년 여러 전각을 증축하였다.
밀양에는 태극나비 전설, 표충비각의 땀, 밀양 얼음골의 신비, 만어사의 어산불영(魚山佛影) 경석의 4대 불가사의가 있다. 무봉사에는 예부터 태극나비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전의 일이다. 나비가 나올 춘삼월도 아닌 어느 날, 갑자기 나비가 떼를 지어 날아와 영남루가 서 있는 무봉산을 뒤덮었다. 며칠 동안 온산을 뒤덮던 나비가 홀연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나비의 날개에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어 이를 태극나비라 불렀다. 사람들은 나라가 혼란스러운 때라, 어떤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여겼다.
이런 일이 생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려가 건국되고 사회 혼란이 가라앉고 태평성대를 맞이하였다. 그 후에도 가끔 태극나비가 나타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라에 경사가 생겼다. 그래서 고려 초 왕명으로 태극나비를 보호했고, 이를 국성접(國成蝶)이라 불렀다. 1945년 8월 15일 오후 3시경 손바닥 크기의 태극무늬 날개를 가진 나비가 무봉사 법당에 날아들었으며, 8월 19일과 10월 25일에도 태극나비가 나타났다. 그래서 무봉사를 참배하고 나면 경사로운 일이 생긴다고 전한다.
무봉사 대웅전에는 영남사에서 이전하여 봉안한 보물 제493호로 지정된 높이 97㎝의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하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하였다. 굵직한 나발의 머리칼에 얕은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있다. 양 볼에 살이 오른 얼굴은 풍만한 인상을 준다. 근래에 백호를 새로 조성하고 눈과 입술 등을 채색하여 원래 모습과 조금 달라졌다. 그러나 가늘게 내리뜬 눈과 우뚝한 코, 그리고 꼭 다문 입에 남아 있는 엷은 미소는 통일신라 불상의 품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무봉사 석조여래좌상은 간략해진 옷 주름과 단정하고 양감 있는 신체 표현, 화려하면서도 복잡해진 광배의 표현 등으로 미루어 보아 9세기에 조성한 불상으로 추정된다.
영화사(峨嵯山)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영화사는 아차산의 남서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아차산은 삼국시대의 역사가 깃든 공간이다. 고구려의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에 관한 전설이 아차산에 전해지고 있으며,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에 대항하여 세운 아차산성은 한강 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패권 다툼이 벌어졌던 곳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지이다.
영화사는 통일신라 시대인 672년(문무왕 12) 의상대사가 ‘화양사(華陽寺)’라는 이름으로 용마봉 아래 창건했다고 전한다. 의상대사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화엄종 전교를 위해 세웠다는 화엄십찰(華嚴十刹)에는 포함되지 않아 다른 시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창건 이후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전하지 않으며 사찰에 관한 단편적인 사실만 확인될 뿐이다. 억불정책이 시행되었던 조선시대에는 1395년(태조 4) 태조가 사찰의 등불이 궁궐에 비친다는 이유로 용마산 기슭의 군자동으로 사찰을 옮기게 했다고 한다. 이후 화양사는 중곡동으로 이전했는데, 중곡동에는 ‘절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 과거에 사찰이 있었던 사실을 보여준다.
영화사는 조선 시대에 제작된 지도와 지리지에 역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한성동역도(漢城東域圖)에서는 중앙의 ‘극락보전’과 앞쪽의 ‘미륵당’의 모습이 확인되며, 김정호가 최성환과 함께 편찬한 지리지인 『여도비지(輿圖備誌)』에는 ‘화양사’가 언급되어 있다. 이렇게 화양사는 19세기까지 사세를 유지했다. 화양사는 1907년(고종 44) 현재의 위치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황태자비 민 씨가 세상을 떠나자, 지금의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묘소 ‘유강원(裕康園)’을 조성하게 되면서, 법도에 따라 북쪽에 있던 화양사를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화양사는 태고종 산하의 사찰이 되었다가, 다시 조계종 소속이 되면서 영화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영화사에는 극락보전과 미륵전, 삼성각 등의 전각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극락보전에는 석가모니불상과 관음상, 지장상이 모셔져 있으며, 미륵전은 야외에 있던 미륵불을 실내에 모시기 위해 지어진 건물로 미륵불을 봉안하고 있다. 극락보전의 오른쪽 뒤편에 자리한 삼성각에는 독성탱화・칠성탱화・산신탱화 등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이중 독성탱화의 왼쪽 아래에는 그림의 내력을 기록한 화기(畵記)가 남아 있다. 화기에 따르면 해당 탱화는 상궁 이 씨 등 6명의 시주를 통해 조성될 수 있었으며 1880년 5월 15일에 조성 작업이 착수되어 같은 달 25일에 완료되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화양사의 탱화 조성에 관여했던 조선시대 상궁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미륵전에 봉안된 미륵불에는 신비로운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조선시대에 세조가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영화사를 찾아 이 미륵불에 불공을 드렸는데 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미륵불은 불교에서 석가모니의 뒤를 이어 인간 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할 것이라고 믿어지는 부처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미륵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미륵신앙이 널리 영향을 미쳤다. 미륵불을 봉안한 미륵전을 사찰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 미륵신앙의 영향이다. 영화사에 봉안된 미륵불의 영험은 이처럼 세조의 일화를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홍제사는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동부동안길 4(무안리 903-2번지) 영축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다. 무안은 ‘물안’에서 유래되었다. 지금의 창녕군 부곡면 학포와 인교 인근의 낙동강 물이 치받쳐 올라와 호수처럼 물이 많이 고이어 있는 안쪽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사명대사의 불력으로 안전한 피난처가 된다는 의미에서 무안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홍제사에는 ‘땀 흘리는 비석’로 널리 알려진 조선시대 승병장인 사명대사의 표충비가 있다. 주민들은 표충비를 ‘사명당영당비(四溟堂影堂碑)’라고 부른다. 홍제사는 사명대사의 표충사당과 표충비각을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해 세운 수호 사찰이다. 무안면은 사명대사의 출생지일 뿐 아니라 사명대사가 창건한 백하암(白霞庵)이 있었다. 홍제사는 사명대사가 열반한 뒤 백하암에 세운 표충사의 후신이다.
1710년(숙종 36) 밀양부사 김창석이 사명대사의 초상화를 모신 영당을 짓고 사당을 정리하였다. 이후 태허당 남붕선사가 국가로부터 ‘표충서원(表忠書院)’을 사액을 받고, 현재의 터에 표충비각을 지었다. 일제강점기에 대처승이 허물어진 원당과 요사를 철거하고 현대식 법당과 요사를 짓고, 비각을 보존하였다. 1977년 동조 스님이 홍제사라는 이름으로 재창건하고, 국가의 지원을 받아 표충비각을 중수하였다.
1978년 표충비를 보호하는 보호각을 세웠고, 주위에 담장과 삼비문, 인법당을 건립하였다. 1981년 설법보전을 신축하고 이후 경충당, 범종각, 사적비, 요사 등 현재 홍제사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홍제사는 밀양시가 추진한 사명대사 성역화 작업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홍제사는 표충비각 구역과 홍제사 구역으로 가람의 형성이 구분되어 있다. 표충비각 구역에는 삼비문을 비롯해 삼대사(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대사)의 진영을 모신 표충각이 있다. 삼비문 안에 사명대사의 비인 표충비가 세워져 있다. 표충비는 좌대 포함 총 높이는 380㎝이다. 비신 높이는 275㎝이고, 폭은 98㎝이며, 두께는 56㎝의 비석이다. 비석 정면에 ‘송운대사영당비명병서(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서산대사의 공덕과 기허대사의 사적을 찬미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측면에는 표충사사적비(表忠寺事蹟碑)가 음각되어 있다.
표충비는 국가의 중대사나 위기가 있을 때를 전후해서 땀이 흘러내리는 신비로운 현상을 보인다. 이런 현상을 사람들은 사후에도 나라를 걱정하는 사명대사의 영험함의 표현으로 여긴다. 표충비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표충비보다는 “땀 흘리는 비석”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표충비각 앞에는 1738년 남붕선사가 표충비의 건립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향나무가 있다. 본래 향나무는 곧게 자라는 성질을 지녔는데, 표충비 앞 향나무는 가지가 팔방으로 뻗은 특이한 형태이다. 그것은 원줄기를 베고 옆 가지를 사방팔방으로 퍼지게 하여 지금처럼 나무 형태를 다듬고 가꾼 것이다. 홍제사 향나무는 전국에서 유일한 것으로,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되었다.
율곡사는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율곡사길 182(율현리 1034번지) 지리산의 지맥인 정수산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의 말사다. 절에서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651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930년 감악조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 고려시대의 내력을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율곡사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명맥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1679년 지금의 대웅전을 중건하고 1684년 괘불탱을 조성하였다. 1729년 괘불탱을 중수하였고, 1749년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며 삼존불에 상금(上金)하였다. 1854년 대웅전의 기와를 새로 얹고 향로전을 중건하였다. 1870년 현당(玄堂)을 중건하였고 1897년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이후 대웅전은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가 이루어졌다. 2002년 대웅전을 해체 보수하고 석축을 정비하였다. 2003년 대웅전 삼존불의 개금불사가 이루어졌다.
율곡사의 대웅전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어느 날 대목수 한 사람이 와서 자신이 대웅전을 맡아서 짓겠다고 하였다. 마침 목수를 찾고 있던 절에서는 몇 가지 물어보고 그 사람에게 공사를 맡겼다. 그런데 목수는 석 달 동안 목침만 만들었다. 답답했던 상좌승은 목수 몰래 목침 한 개를 감추었다. 며칠 뒤 느닷없이 목수가 연장을 챙기면 공사를 중단하고 떠나겠다고 하였다. 스님이 그 연유를 묻자, 목수는 다듬어 놓은 목침이 모자란다고 하면서 이런 정신으로는 큰 불사를 이룰 수 없다고 하였다. 그때 상좌승이 감춰둔 목침을 내놓으며 사과하였다. 목침을 돌려받고 목수가 다시 일을 시작하여 대웅전을 완성하였다.
대웅전 공사가 끝나고 단청할 때의 일이었다. 화공이 대웅전 내부 단청을 제일 마지막에 하면서 스님들에게 7일 동안 누구도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법당 안으로 들어간 화공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마지막 7일째 되는 날이었다. 정오가 지나도 조용하기만 하자, 참다못한 상좌승이 몰래 문구멍으로 법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법당 안에서는 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인기척을 느낀 새가 갑자기 붓을 떨어뜨리고 문틈으로 날아가서 절 위쪽에 있는 바위에 앉았다. 이후 새는 간 곳이 없었고, 바위 이름을 새신바위라 하였다. 그래서 법당 천정과 좌우 벽면에 있는 2점의 산수화가 미완성인 채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율곡사는 현재 대웅전, 삼층석탑, 삼성각, 요사채만 있는 조그만 규모의 절이다. 하지만 대웅전은 화려하고 단아하다.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잘 다듬은 돌로 3층의 기단을 만들었다. 정면 창호는 팔각불발기와 띠살문을 혼합한 특이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산속에 있는 비교적 큰 규모의 조선시대 중기 건물로 1963년 보물 제374호로 지정되었다. 율곡사에는 화면 가득 보살상만을 단독으로 그린 가로 475㎝ 세로 827㎝의 괘불탱이 있다. 보물 제1316호로 지정된 괘불탱은 보존 상태가 좋을 뿐만 아니라 필선(筆線), 체구 비례, 색채, 문양 표현 등이 매우 뛰어나다. 괘불탱은 17세기 불화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은 조선시대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크기가 1m 이상으로 사람의 앉은키만 한 불상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73호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은 등을 세우고 고개를 약간 숙인 반가부좌상의 형태로, 전체적으로 균형감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금산 보리암은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보리암로 665(상주리 2065번지) 금산 남쪽 봉우리 아래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이다. 경상남도 하동군과 남해군을 연결하는 남해대교를 지나 20㎞ 정도 달리면 금산 입구에 다다른다. 금산은 해발 681m로, 기암괴석과 숲으로 이루어져 예부터 소금강산이라 불리던 남해의 명산이다. 금산은 한려해상공원 가운데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멋진 일출을 만끽할 수 있는 조망대와 가장 커다란 바위로 알려진 상사암, 여덟 명의 신선이 놀았다는 팔선대 등이 있다. 상주 마을 금산 입구에서 3㎞ 정도 올라가면 금산 보리암이 나온다.
금산 보리암은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과 인천광역시 강화도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관음신앙의 3대 기도처 중 하나이다. 한편, 금산 보리암은 남해 용문사․화방사와 함께 남해 3대 사찰이기도 하다. 금산 보리암은 683년(신문왕 3년)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전국의 산천을 순례하던 원효대사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이후 산 이름을 보광산, 절 이름을 보광사(普光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금산 보리암은 이름난 기도 사찰로 알려진 바에 비해 창건과 관련된 옛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이성계의 조선 건국 관련 구전설화를 통해 보광산이 금산으로 지명이 바뀌게 된 내력이 전할 뿐이다.
보광산에서 금산으로 부르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태조 이성계와 왕이 되기 전이었다. 이성계는 왕이 되기 위해 백두산과 지리산에서 기도를 드렸으나 효험이 없었다. 금산에 와서 백일기도를 드리던 어느 날이었다. 이성계 꿈에 금산 산신령이 나타나 왕으로 만들어줄 터이니 보광산 전체를 비단으로 감싸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성계는 금산 산신령의 요구를 수락하고 왕이 되었다. 그런데 보광산 전체를 비단으로 둘러쌓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비단 ‘금(錦)’ 자를 써서 보광산을 ‘금산(錦山)’으로 불렀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 조에 보리암은 상도솔암, 중도솔암과 함께 금산에 있으며 남쪽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금산 보리암은 1660년에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으로 개명하였고, 1901년 낙서와 신욱 스님이 중수하였다. 1969년 양소황 주지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금산 보리암의 건물로는 극락전, 보광전, 산신각, 종무소인 간성각, 종각, 요사 등이 있다. 경내 입구의 계단을 내려가면 종무소인 간성각이 나온다. 간성각 오른쪽에 극락전이, 왼쪽에 보광전이 자리하고 있다. 보광전은 2004년 새로 중수한 것이다. 보광전 아래 남해를 바라다보고 서 있는 해수관음상이 있고, 그 앞에 삼층석탑이 있다. 삼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석을 갖추고 있다. 삼층석탑은 683년 원효대사가 보광사 창건을 기념하기 위해 인도 월지국에서 김수로 왕비 허황옥이 가져온 석탑을 이곳에 가져다 세웠다는 전설이 전한다. 삼층석탑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된 석조물로, 보리암의 역사를 말해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삼층석탑 바로 건너편 삼불암 아래 높이 2m, 너비 60㎝의 남해금산영웅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남해금산영웅기적비는 1903년 의정부 찬정(贊政) 윤정구가 임금의 명으로 글을 짓고 세운 비석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에 이곳에서 기도를 드려 효험을 얻었다는 내용과 보광산이 금산으로 개칭한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용화사는 경상남도 통영시 봉수로 107-82(봉평동 404번지) 미륵산 아래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이다. 100대 명산이 이름을 올린 미륵산은 울창한 숲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각양각색의 기암괴석과 바위굴이 유명하다. 미륵산에는 용화사 이외에도 미래사와 도솔암이 있다. 미륵산에는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고란초, 석곡(石斛), 춘란(春蘭), 통영병꽃나무, 풍란(風蘭) 등이 자생하고 있다. 미륵산 꼭대기에 오르면 한려해상공원의 다도해를 바라볼 수 있고, 날씨가 맑은 날에는 일본 대마도가 보인다.
용화사 입구는 벚꽃으로 유명하다. 주민들은 매년 4월이 되면 이곳에서 봉숫골 꽃 나들이 잔치를 연다. 용화사 입구에서 관음전에 이르는 길옆으로 소나무와 잡목이 숲을 이뤄 산책로도 안성맞춤이다. 관음암을 지나 도솔암을 거쳐 미륵봉 정상에 도달하면 띠밭이 장관을 이룬다.
용화사는 선덕여왕 때 은점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당시 이름은 정수사(淨水寺)였다. 위치도 지금보다 더 위쪽이었다고 한다. 943년 도솔선사가 산내암자로 도솔암을 창건하였는데, 1260년 큰비로 산사태가 나면서 무너졌다. 3년 후 자리를 옮겨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천택사(天澤寺)로 고쳤다.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것을 1616년 금강산에서 수도한 성화 스님이 중창하였다. 1622년 폭풍으로 절이 허물어지자, 벽담 스님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 중창하고 절 이름을 용화사로 바꾸었다.
숙종 때 옛 정수사 터에 산내암자인 관음암을 세웠다. 천택사에서 용화사로 절 이름을 바꾼 내력을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벽담 스님은 천택사를 중창하기 위해 미륵산 봉우리 아래에서 7일 동안 쉬지 않고 미륵부처님께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회향하는 날 밤이었다. 벽담 스님의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나는 당래교주 미륵불이다. 이 산은 미래세에 용화회상(龍華會上)이 될 도량이니 이곳에 가람을 짓고 용화사라 한다면 만세에 길이 전하리라.” 하였다. 벽담 스님은 미륵불의 계시대로 절을 짓고 이름을 용화사라 하였다.
미륵산 등산로 입구의 대형주차장에서 왼쪽에 용화사 가는 길이 있다. 이곳에서 몇 분 걸어가면 오른쪽의 둔덕진 곳에 부도밭이 나온다. 무성한 전나무숲을 지나면 용화사 경내로 들어가는 계단이 나온다. 계단 왼쪽에 작은 연못이고, 그 연못 뒤에 해월루(海月樓)라는 누각이 자리하고 있다. 해월루 옆 계단을 통해 경내로 진입하면 오른쪽에 불사리를 모신 사자탑(獅子塔)이 있다. 해월루 맞은편에 금당인 보광전이 있다. 보광전 왼쪽에 명부전, 영각, 용화전이 자리하고 있다. 해월루 아래 왼쪽으로 올라가면 팔작지붕의 종각이 나온다. 종각 옆에는 조계종 초대 종정을 역임한 효봉 스님의 동상과 사리탑이 있다.
지정 문화재로는 용화사 보광전, 용화사 금고, 용화사 명부전 지장시왕상이 있다. 보광전은 1748년에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되었다. 1784년에 제작된 용화사 금고는 너비 12.6㎝ 안지름 54.8㎝ 바깥지름 67.7㎝로 절에서 사용하는 금속으로 만든 타악기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63호로 지정되었다. 목조지장시왕상은 1680년에 조성된 것으로, 1903년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에 있던 영은사가 폐사되면서 용화사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진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64호로 지정되었다.
안정사는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 안정1길 363 벽방산(碧芳山)에 자리한 대한불교법화종 사찰이다. 벽방산은 일명 벽발산(璧鉢山)이라고도 한다. 옛 『통영지』에 의하면, 벽발산은 산세가 거대한 뱀이 꼼틀거리는 위세를 한 산으로, 그중 한 산맥이 힘차게 옆으로 내뻗다가 곧장 바다로 들어가 터전을 열었다고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안정사가 위치한 안정리 황리마을은 한적한 농어촌마을이었으나 지금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주요 국가산업단지로 변모하였다.
안정사는 654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 14방(坊) 규모의 커다란 사찰이었다. 방은 전각을 기준으로 한 소규모 구역을 말하는 것임으로 14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연혁은 자세히 알 수 없다. 고려시대 때 회월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각이 모두 소실되어 1616년 중창하였다.
또 다른 사중 기록에 의하면, 1626년 원민대사가 중창하였고, 1736년에도 중창이 있었다. 특히 1736년 중창은 안정사에 전해지는 금송패(禁松牌)로 미루어 보아 왕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와 19세기에 시왕전과 나한전을 중수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것을 설호 스님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정사의 금송패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예부터 안정사 주지 스님은 안정리 동회에 참석하였다. 안정리의 한 세도가가 동회에 참석한 안정리 주지인 한송 스님에게 솔숲의 일부를 양도할 것을 강요하였다. 당시 안정사는 인근 5개 면에 100만 평의 솔숲은 소유하고 있었다. 한송 스님은 당쟁을 피해 안정사로 피신하였다가 승려가 된 인물이다. 한송 스님이 안정사 주지가 되었을 때, 동문수학했던 이한종이 고성군수로 부임하였다.
고성군수는 마을 세도가가 안정사의 솔숲을 탐낸다는 것을 알고 이장을 벌하였다. 그러나 이장은 장독에 죽고 말았다. 세도가는 이를 빌미로 이장의 아버지를 부추겨 소나무에 관한 송사를 벌였다. 한송 스님은 송사를 위해 머리를 길러 상경하였고 8년에 걸친 소나무 관련 송사는 마침내 안정사의 승소로 마무리되었다. 고종은 안정사의 새 주지에게 인수, 궤 등과 함께 3개의 금송패를 하사하였다. 이후로 안정사의 솔숲을 도벌하면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절에서 직접 그 사람을 체벌할 수 있게 되었다.
사찰 입구를 알리는 일주문을 지나 해탈교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안정사가 나온다. 안정사의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나한전, 만세루, 명부전, 응향각, 칠성각, 탐진루, 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이다. 임진왜란 때 건물이 전소된 것을 1751년에 중건한 것이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수한 것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과 명부전 사이에 위치한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이다. 칠성각루는 대웅전과 마주한 자리에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1686년 신축되었으며, 1841년 중수되었다. 조선시대 후기 사찰 누각 양식을 잘 보에는 고종의 사진과 함께 임금이 하사한 인수와 금송패가 전시되어 있다. 만세존하고 있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5호로 지정되었다.
만세루 옆에 2층 팔모지붕을 한 종각이 자리하고 있다. 1층에는 근래에 조성한 범종이 걸려 있고, 2층에는 조선시대 후기에 만든 범종, 법고, 복어, 운판 등이 있다. 2층에 걸려 있는 범종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3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전라남도 담양의 추월산 용천사에서 조성한 것으로, 임진왜란 때 용천사가 폐사되자 안정사로 옮겨온 것이다. 괘불은 폭 10m 길이 12m로, 1702년 조성된 뒤 1875년과 1934년에 중수한 것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2호로 지정되었다.
안정사에 소장된 연과 금송패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4호로 지정되었다. 연은 가마를 말하는 것이다. 이 가마는 큰 불사나 행사가 진행될 때 부처님을 이운하거나 불구(佛具)나 불경 등의 귀중한 물품을 옮길 때 사용하였다. 1752년 선희궁에서 안정사 주지에게 사찰 주위의 솔밭 관리는 명령하는 문서를 포함하여 인장과 금송패를 실어서 하사한 것이다. 금송패는 모두 3개로, 큰 것은 ‘안정사국내금송패(安靜寺局內禁松牌)’이고 중간 것과 작은 것은 ‘안정사금송패(安靜寺禁松牌)’라 적혀 있다. 연과 금송패는 안정사가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번창하였던 사찰임을 짐작게 한다.
주사암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면 도계서오길 251-355(천촌리 1195번지) 오봉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다. 오봉산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면과 건천읍에 걸쳐 있는 688m의 산으로, 여근곡에서 입산하여 부산성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천년고도 경주의 역사와 전설을 느끼기에 제격이다. 여근곡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여 마을로 들어가 유학사로 가면 여근곡의 옥문지 약수를 맛볼 수 있다.
유학사에서 산속 오솔길로 들어서면 636년 선덕여왕이 매복한 백제군을 섬멸하였다는 여근곡이 나온다. 오봉산 정상에는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주사암이 있다. 창건 당시 절 이름은 주암사(朱巖寺)였다. 주사암은 창건 이후의 연혁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현존하는 전각과 불상은 조선시대 후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주사암의 내력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신라시대 때 한 도인이 이 절에서 신중삼매(神衆三昧)를 얻었다. 도인은 “적어도 궁녀가 아니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귀신의 무리가 도인을 시험하기 위해 궁녀를 새벽에 절에 데려왔다가 저녁에 돌려보냈다. 궁녀는 두려워서 임금에게 사실대로 고하였다. 임금은 궁녀에게 잠자는 곳을 붉은 모래로 표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무사에게 명하여 붉은 모래로 표시한 장소를 찾게 하였다. 무사는 수색 끝에 바위 위에서 궁녀가 표시해 놓은 붉은 모래의 흔적을 발견하였다. 바위 위에는 한 노승이 유유자적하며 앉아 있었다. 임금은 그 소리를 장수와 군사를 보내 노승을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노승은 편안한 모습으로 조용히 눈을 감더니 주문을 한 번 외웠다. 산과 계곡에서 수만의 신중이 나타나 노인을 호위하자, 군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돌아갔다. 임금은 노승이 이인(異人)임을 깨닫고 궁궐로 모신 다음 국사(國師)로 삼았다. 궁녀가 붉은 모래로 자신의 위치를 알렸기에 절 이름이 지금의 주사암이 되었다고 전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주사암 뒤에 자리한 부산성을 축성할 때의 일이다. 일명 주사산성이라고도 한다. 의상대사는 이 절을 성에 두면 신라는 결단코 폐망하지 않을 것이라 예언하였다. 그래서 부산성을 축성할 때 절을 성벽 바깥에 두었다. 의상대사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이 지난 뒤에 신라는 폐망하였다. 부산성은 신라시대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산성의 기능을 계속 유지하였다. 산성 내에는 큰 창고 터․우물․망대 등이 남아 있고, 본래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된 남문 자리가 있다. 부산성은 경주 인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었다. 한편, 주사암에서는 지금까지 죽어서 나간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불사처라 이른다.
주사암의 가람은 영산전, 관음전, 산신각, 요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시대 후기에 지어졌다. 자연석으로 높게 쌓아 올린 석단 위에 건립되었다. 주사암 옆에는 김유신 장군이 부산성에서 지휘할 때 술을 마셨다는 에피소드가 전하는 마당바위가 있다. 마당바위 곳곳에 움푹 파인 자국 이 있는데, 이는 말발굽 흔적이라 한다.
대곡사는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대곡사길 80(봉정리 894번지) 비봉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의 말사다. 비봉산은 해발 579m로 시대에 따라 태행산(太行山)․대항산(大恒山)으로도 불렀다. 대곡사는 1368년 인도 지공과 고려 나옹선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창건 당시 절 이름은 대국사(大國寺)였다.
대국사라는 절 이름은 인도 승려 지공이 원나라와 고려의 두 나라에서 불법을 편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1960년 대곡사 ‘탑밭’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 보살상과 이규보가 지은 시 ‘대국사’를 통해 볼 때 13세기 초중반에 이미 대국사라는 절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대국사의 창건은 통일신라시대 말 혹은 고려시대 초 무렵으로 볼 수 있으며, 지공과 나옹선사 두 스님이 대곡사를 중창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597년 정유재란 때 불에 탄 사찰을 1605년 탄우가 중창하였다. 이때 범종각․요사 등을 신축하였다. 1687년 태전(太顚) 스님이 중창하였다. 태전은 비봉산에 올라가서 주위를 살펴보고 100리나 되는 긴 계곡이 보인다고 하여 절 이름은 대곡사(大谷寺)로 바꾸었다. 대곡사로 바뀐 이후의 연혁은 기록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 1990년 법의 주지가 나한전․산신각․일주문을 건립하였고, 1999년 산내암자인 적조암의 화장실을 신축하였다. 2000년 법종루의 범종을 조성하였고, 2001년 경내 사방공사와 황토방 개축, 석축 조성 등 도량을 정비하였다.
현재 대곡사에는 현판 5점이 전한다. 그중 고려시대 말기 문신인 이규보가 쓴 시 한 편이 전한다. 시 제목은 ‘제대국사(題大國寺)’이며, 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돌길이 높고 낮아 울퉁불퉁한데(石路高低平不平) / 한가하게 과하마 타고 채찍질해 간다(閑騎果下彈鞭行) / 가벼운 바람은 조용히 연기 빛을 쓸어가고(輕風靜歸煙光去) / 지는 달은 새벽 빛과 함께 밝구나(落月時兼曉色明) / 짧은 기슭 앞머리에서 절의 전각을 보고(短麓前頭着寺枋) / 비낀 배 곁에서 여울 이름을 묻는다(橫丹側畔問灘名) / 외로운 마을 어느 곳에서 부는지 쓸쓸한 피리 소리(孤村何處吹寒笛) / 타향에서 병을 앓으니 쉽게 슬퍼지는 구나(抱病他鄕易惱情)”
위의 시문은 『동문선』에도 「십칠일입대곡사(十七日入大谷寺)」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규보의 시를 간접적으로나마 대곡사의 사격(寺格)을 느낄 수 있다. 대곡사에는 3가지 자랑거리가 있다. 첫째 대곡사는 달빛이 좋은 절이라 달빛에 반해서 들른 과객들이 지은 시들이 책 한 권을 엮을 만큼 많다고 한다. 둘째 대곡사는 10대 명산에 속할 만큼 자연 풍경이 수려한 비봉산 자락에 조성되어 있다. 셋째 대곡사는 물이 맑기로 유명한 절이다.
대곡사는 일주문을 들어서면 다층석탑을 중심으로 정면에 대웅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0호)이 있고 좌측에 나한전이 있으며, 우측에 명부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39호)이 있다. 법당 맞은편에 범종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1호)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