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 성리에는 흥부마을이 있다. 1992년 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에서 흥부놀부 이야기의 배경 지역을 조사하였다. 조사에 따르면 조선 후기 남원에 살던 박춘보가 형 박첨지에게 쫓겨났다가 부자가 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흥부놀부 이야기가 형성된 것이라 한다. 실제로 「흥부전」에 나오는 마을 이름들이 남원시 아영면 성리 일대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도 증거가 되고 있다. 흥부마을에 가면 흥부가 출생한 곳과, 자리를 잡고 살며 복을 누린 곳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93년부터 매년 음력 9월 9일에 흥부제가 개최되어 흥부놀부 이야기와 관련된 행사가 진행되며 시민들이 참여하여 화합하는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옛날에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경계 지역 어름에 살던 놀부와 흥부 형제가 있었다. 형 놀부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유산을 혼자 다 차지하고서 동생 흥부를 내쫓았다. 흥부는 부인과 자식들을 이끌고 언덕에 움집을 지어 가난하게 살았다. 흥부는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일하였지만 많은 식구들을 챙기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놀부의 집을 찾아가 “형님, 식구들이 다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쌀 좀 나눠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쌀은커녕 매만 실컷 맞고 돌아오게 되었다.
어느 해 봄에 흥부네 집에 제비가 와서 집을 짓고 살았다. 흥부가 제비집 근처를 살피다 바닥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새끼 제비 한 마리를 발견하였다. 흥부는 제비를 가여워하여 다리를 매어주고 정성껏 돌보아 주었다. 다리가 낫게 된 제비는 흥부네 집을 떠났다가 다음 해 봄에 다시 찾아와 박씨를 물어다 흥부에게 주었다. 흥부는 박씨를 심었고 가을이 되자 큰 박이 많이 열렸다. 흥부가 박 속을 갈라보니 박에서 돈과 보물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흥부는 갑자기 큰 부자가 되었다.
놀부가 흥부의 소식을 듣고서 흥부에게 어떻게 부자가 된 것인지 묻자 흥부는 “다리가 부러진 제비를 치료해주었습니다. 그 제비가 준 박씨를 심었는데 박 속에서 돈과 보물이 나온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놀부는 제비를 잡아 일부러 다리를 부러뜨리고서 실로 매어주고 날려 보냈다. 다음 해 봄에 그 제비가 찾아와 박씨를 전했다. 놀부가 기쁜 마음으로 박을 심고 어느덧 박을 타는 날이 되었다. 박을 가르니 속에서 괴물들이 나타나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더니 결국 망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흥부는 놀부에게 돈과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형을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놀부는 흥부의 모습을 보고 지난 일을 반성하였고 흥부와 놀부 형제는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못된 형과 착한 동생이 등장한 형제의 이야기에, 제비가 은혜를 갚은 이야기와 박에서 재물이 나온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다. 흥부의 행동을 따라하려다 실패한 놀부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흥부와 놀부를 통해 서민사회의 모습과 서민계층의 생활과 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형제 간의 우애를 강조하고 있으며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급격하게 변해가는 현실에서도 계속해서 위세를 떨치려는 기존의 인식이 허무한 것임을 드러내는 “서민층의 현실주의적 세계관”이 담겨진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호랑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매우 많다. 그 중 사람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호랑이 이야기는 신화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이야기에서는 호랑이가 견훤의 됨됨이를 알아보고 갓난아기인 견훤을 보호해준다. 또 왕건의 5대조인 호경의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호랑이가 나온다. 이후로 이러한 호랑이의 유형이 민담으로 전해지면서 영웅이 아닌 효자나 효부, 열녀 같은 윤리적인 인물을 보호하는 존재로 바뀌게 되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전라남도 진도군에서는 호랑이에게 보호를 받은 주인공이 위기에 처한 호랑이를 구해주는 이야기도 전승되고 있다.
옛날 전라남도 진도군에 마음씨 착한 효자가 살았다. 효자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효자는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의 묘 앞에 천막을 치고 지냈다. 어느 날 밤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다. 효자는 잔뜩 겁에 질려 온몸이 덜덜 떨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효자를 위협하지 않고 아버지의 묘를 돌더니 효자의 곁에 누운 채 아침이 될 때까지 효자를 보호해주었다. 효자는 두려웠던 마음이 점점 누그러졌다. 그 후로 호랑이는 밤마다 찾아와 효자 곁을 지켜주고 아침에 떠나곤 하였다. 그렇게 아버지의 묘 곁에서 지낸지 3년이 되던 마지막 날 밤이었다. 효자가 깜빡 졸다가 꿈을 꾸었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내가 지금 해남의 어느 마을에 와있는데 덫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으니 당신이 오면 살 수 있고 오지 않으면 죽을 것이니 와서 나를 좀 구해주시오.” 라고 하였다. 효자가 놀라 일어나서 급히 배를 빌려 해남으로 향했다. 꿈에서 들었던 말대로 호랑이가 덫에 걸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기 직전이었다. 효자가 정신없이 달려가며 “해치지 마시오! 그 짐승은 내 호랑이란 말이오!” 라고 외쳤다.
사람들이 쳐다보니 상복을 입은 사내가 허둥지둥 달려오는 것을 보고 일단 멈추어 기다렸다. 효자가 그간의 사정을 전하니 사람들이 놀라며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사람들은 효자에게 “저 호랑이가 진정 당신의 것이라면 가까이 다가가 만질 수 있겠소? 호랑이를 만진다면 당신의 말을 믿고 죽이지 않을 것이니 어서 만져보시오.” 라고 하였다. 효자는 바로 호랑이의 등을 쓸어주었다. 호랑이는 효자에게 고마워하며 효자의 손을 핥았다. 이 모습을 본 해남 사람들은 효자에게 호랑이를 넘겨주었다. 효자는 호랑이와 함께 그 마을을 빠져나와 산길로 향했는데 호랑이는 어느 순간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 효자의 소문이 퍼져 궁궐에까지 전해지게 되었고 임금은 효자의 효행을 표창하여 정문(旌門)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호랑이가 아버지의 묘를 지키는 효자를 지켜주고, 효자가 덫에 걸린 호랑이를 구해준 이야기이다. 대체로 동물이 인간에게 은혜를 갚는 이야기가 많은데 여기에서는 사람이 호랑이가 베푼 호의에 보답을 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호랑이는 효자를 돕는 조력자로써 긍정적인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오히려 호랑이를 사람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는 대상으로 표현한 선조들의 지혜로움을 살필 수 있다.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은교리에는 콩쥐팥쥐마을이 있다. 여러 전문가들의 고증을 통하여 콩쥐팥쥐 이야기의 배경이 된 마을로 지정되었다. 마을의 담장 벽마다 콩쥐팥쥐 이야기의 장면들이 그려져 있으며 이야기의 배경이 된 장소들이 배치되어 있다. 캠핑장이나 한옥펜션같은 숙박 업소도 운영되고 있어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또한 근처에 완주군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이 세워졌는데 군민들에게 도서관 이름 짓기 공모를 한 결과 ‘콩쥐팥쥐 도서관’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콩쥐팥쥐마을은 콩쥐팥쥐 이야기를 통하여 완주군의 이색마을로 부각되고 있다.
옛날 완주군에 한 부부와 콩쥐라는 딸이 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새어머니와 새어머니의 딸 팥쥐가 오게 되었다. 새어머니는 아버지가 있을 때만 콩쥐에게 잘 해주고 다른 때에는 구박을 하며 온갖 일을 시키곤 하였다. 하루는 새어머니가 콩쥐에게 나무 호미를 주며 밭을 매라고 시켰다. 콩쥐는 열심히 밭을 맸지만 나무 호미는 금방 힘없이 부러지고 말았다. 콩쥐가 상심하여 울자 하늘에서 소 한 마리가 내려와서 밭매기를 도와주어 일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갓집에 잔치가 있는 날이었다. 새어머니는 팥쥐만 데리고 가면서 콩쥐에게 “독에 물을 붓고 벼를 찧고 베를 짠 다음 잔치에 오도록 하거라.” 라고 하고는 집을 나섰다. 콩쥐가 독에 물을 붓는데 아무리 부어도 차지 않아 살펴보니 밑이 깨진 독이었다. 콩쥐가 실망하고 있으니 두꺼비가 나타나서 독의 깨진 부분을 막아주었다. 콩쥐는 독에 물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콩쥐가 벼를 찧으려고 보니 그 양이 매우 많았다. 아무리 하여도 속도가 나지 않아 힘겨워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새떼가 우르르 날아와 금세 벼를 찧어주었다. 또 콩쥐가 베를 열심히 짜는데 어디선가 선녀가 내려와 베를 대신 짜주었다. 선녀는 금방 베를 다 짜고서 “이 옷과 신발을 신고 잔치에 가세요.”라며 옷과 신발을 내밀었다.
콩쥐는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은 뒤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 냇가가 있었는데 그만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우연히 원님이 잃어버린 신발을 발견하고 주인을 찾게 되었다. 이 신발이 인연이 되어 원님과 콩쥐는 혼인하게 되었다. 원님과 혼인한 콩쥐를 질투한 팥쥐는 음흉한 꾀를 내어 콩쥐를 연못에 빠뜨려 죽였다. 팥쥐는 콩쥐인 것처럼 행동하며 원님 곁에 머물었다. 콩쥐가 꽃으로 환생하여 팥쥐를 따라다니며 괴롭히자 팥쥐는 꽃을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렸다. 이때 이웃집 할머니가 불을 얻으러 왔다가 아궁이에 있는 구슬을 가지고 갔다. 구슬은 콩쥐로 변하여 원님에게 가서 “서방님 저는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서방님 곁에 있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팥쥐입니다. 부디 억울함을 풀어주셔요.”라고 하였다. 원님은 깜짝 놀라 서둘러 콩쥐의 시신을 찾아서 살려내었다. 또 곧바로 팥쥐를 죽여 그 시체를 새어머니에게 보냈다. 새어머니는 죽은 팥쥐를 보고 놀라 기절하여 죽었다.
이 이야기에는 콩쥐가 새어머니의 괴롭힘을 극복하고 원님과 혼인하게 된 과정과 팥쥐에게 죽임을 당한 뒤 환생하여 복수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앞부분의 이야기는 서양에서 전해지는 ‘신데렐라 이야기’와 대부분 비슷하다. 뒷부분은 동아시아 지역의 이야기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여성의 시련, 죽음, 환생의 과정을 통해 자기정체성을 확인하는 이야기다. 한국적인 정서가 반영되어 권선징악이라는 도덕적인 의식이 작용해 덧붙여진 구성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이 이야기는 「콩쥐팥쥐전」이라는 고소설로 다시 창작되었다는 점에서 소설의 전단계의 형태로 존재하는 설화라는 문학사적인 의의도 있다.
우리나라 이야기에는 동물이 은혜를 갚은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그중에서도 처녀에게 길러진 두꺼비의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천년 묵은 지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처녀를 구하기도 하고, 홍수에 떠내려 갈 뻔한 처녀를 구하기도 한다. 대부분 처녀가 밥을 주어 수년 간 기른 두꺼비가 위기에 처한 처녀를 돕는다는 큰 줄기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두꺼비 이야기 중에 섬진강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라남도 광양과 경상남도 하동 일대에서 전해지고 있다. 섬진강은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의 3도에 걸쳐 흐르는 강으로, 고려 말 왜구가 섬진강 어귀로 쳐들어와 공격했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큰소리로 울어 왜구가 피해갔다고 해서 ‘두꺼비 섬(蟾)’을 써서 섬진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옛날에 두치강이라는 강줄기 나루에 마음씨가 고운 한 처녀가 살았다. 하루는 처녀가 저녁을 차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두꺼비가 나타나서는 부엌으로 폴짝 뛰어들어 왔다. 두꺼비는 배가 고픈지 밥상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큰 눈동자를 끔벅거렸다. 처녀는 두꺼비에게 “배 많이 고프니? 왠지 지치고 외로워 보이는구나. 우리집에서 같이 살자.”라며 밥을 퍼주고 부엌 한 켠에 흙집을 지어주고는 두꺼비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두꺼비가 처녀의 집에서 지낸지도 3년이 훌쩍 지났다. 두꺼비는 어느새 솥뚜껑만큼 크게 자랐다. 어느 여름밤, 비가 쏟아 붓기 시작하더니 두치강 상류에 홍수가 났다. 순식간에 물이 불어, 온 동네가 물에 잠기기 시작하였다. 물결이 얼마나 센지 집도 사람도 가축도 둥둥 떠내려갔다. 처녀도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며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외쳤지만 도움 받을 곳이 없었다. 바로 그때 처녀가 기르던 두꺼비가 나타나 등에 타라는 듯이 엎드렸다. 처녀가 두꺼비 등에 올라타자 두꺼비는 있는 힘껏 강기슭으로 헤엄쳐 갔다. 한참을 이동해 간신히 뭍에 도착하여 처녀가 내리자 힘을 다 써버린 두꺼비는 그만 죽고 말았다. 처녀는 울면서 “두꺼비야, 네가 나를 살리느라 이렇게 죽고 말았구나. 미안하고 고마워.” 라며 어루만졌다.
처녀는 강기슭 언덕에 두꺼비를 묻고서 매년 제사를 지내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처녀와 두꺼비가 도착한 강기슭을 두꺼비 나루라고 하여 ‘섬진(蟾津)’이라 하였고, 그 강을 ‘섬진강(蟾津江)’이라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섬진강 언덕에는 두꺼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비가 와서 물이 불면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지만 평소에는 두꺼비가 헤엄치고 있는 듯한 형상처럼 보인다고 한다. 전라남도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사동(蛇洞)마을에서는 동네가 부유해지려면 이 바위가 물속에 잠겨서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풍수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처녀가 두꺼비에게 베푼 은혜와 두꺼비가 처녀에게 갚은 은혜 이야기를 통해 두꺼비나루와 두꺼비바위가 생기게 된 사연을 담고 있다. 마음씨 고운 처녀가 두꺼비를 기르고, 처녀가 위기에 닥쳤을 때 기르던 두꺼비가 처녀를 구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여기에서는 그중에서도 섬진강의 유래와 얽힌 두꺼비의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전통적으로 민간신앙에서 두꺼비가 집에 들어오면 죽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들어온 두꺼비를 잘 보살피면 복을 받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통해서도 동물이 은혜 갚은 이야기가 형성될 수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호랑이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운 이미지와 달리, 심성이 착하거나 성숙한 의식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에서는 그 인물을 돕고 보호하는 조력자로 나타나기도 한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향산리에는 열녀 정씨의 정려각이 있다. 열녀 정씨는 신녕현감 유혜지의 아내로, 25세의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된 여인이었다. 열녀 정씨가 남편의 무덤 앞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호랑이와 인연을 맺은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호랑이는 정씨가 열녀임을 알아보고 도움을 주며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 태종 때 신녕현감 유혜지는 젊은 나이에 병들어 죽고 말았다. 부인 정씨의 나이 스물다섯 때의 일이었다. 정씨의 친정에서는 딸이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것이 안타까워 다른 집에 재가할 것을 권하였다. 하지만 정씨는 “연로한 시아버지를 두고 재혼할 수 없습니다. 제가 정성껏 모실 것입니다.” 라며 친정의 권유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씨의 친정에서 정씨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친정에서는 아무리 정씨를 불러내도 오지 않기에 거짓으로 꾸며낸 말이었다. 정씨는 시아버지의 밥상을 차려놓고 친정으로 갔다. 친정에 가보니 자신을 재혼시키려고 꾀어낸 거짓말이었다. 정씨는 정색하고 다시 시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날은 어두워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하는 밤길이 매우 험난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호랑이가 나타나 정씨를 태우고 쏜살같이 달려가 시댁에 데려다 주었다. 정씨는 호랑이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로 정씨는 남편의 무덤가에 가서 움막을 짓고 살았다. 무섭고 힘든 일이었지만 어느 날 부터인가 밤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정씨 곁에 있으면서 아침이 될 때까지 지켜주고 사라지곤 하였다. 어느덧 정씨와 호랑이는 정다운 친구가 되었다. 며칠 뒤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자 정씨가 의아해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꿈에 호랑이가 나타나 “제가 함정에 빠졌습니다. 제발 좀 살려주십시오!”라며 애원하였다. 깜짝 놀라 일어난 정씨는 꿈에서 본 곳을 찾아가보니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마을 사람들이 해치려 하고 있었다. 정씨는 “이 호랑이는 저와 함께 남편의 묘를 지키는 착한 호랑이입니다. 제발 해치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호랑이의 소문을 들은 터라 더 이상 해치지 않고 놓아주었다. 호랑이는 함정에서 빠져나와 정씨를 등에 태우고 무덤가로 돌아왔다. 세월이 흘러 3년이 지나갔다. 삼년상을 마친 정씨는 남편의 묘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이제 당신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갑자기 남편의 무덤이 갈라져 열리기 시작했다. 정씨가 무덤으로 들어가 남편의 시신 옆에 누우니 무덤이 다시 닫혔다. 사흘 뒤 부부의 묘 앞에는 호랑이도 죽어 있었다. 이를 본 정씨의 가족들이 좋은 곳을 골라 호랑이를 묻어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정씨가 친정의 재혼 권유를 물리치고, 호랑이의 도움을 받아 남편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한 뒤 남편의 무덤에 들어가 합장하게 되었으며 또한 정씨를 따라 죽은 호랑이도 무덤에 묻히게 된 이야기이다. 호랑이가 정씨의 열녀적 면모를 알아보고 정씨를 돕는 조력자로 등장해 신성성을 드러냈다. 정씨는 부모도 아닌 남편의 시묘살이를 하면서 열녀의 이미지가 더 부각되었으며, 또한 재혼을 거부하며 시댁에 남게 됨에 따라 정절과 효도의 실천도 몸소 보여주었다. 정씨와 호랑이는 서로의 위기 상황에서 도움을 주며 우정을 쌓는다. 요컨대 열녀 정씨의 한결같은 사랑과 호랑이와의 우정이 잘 그려진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꾀쟁이 하인이야기는 하인이 상전이나 양반을 속이거나 조롱하는 이야기이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어 오래전부터 민간에서 구전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의 이름도 방학중, 막동이, 김복선, 유월삼 등으로 다양하다. 이중 방학중은 조선 후기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살았다고 전하지만, 이를 실증할 수 있는 문헌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영덕군 남정면 원천리 지푸심골에 방학중의 묘가 있어 실존인물임은 알 수 있다. 방학중에 관한 이야기는 주로 영덕군과 인근 지역에서 전승되며, 상전을 속이는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상전뿐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놀리고 속인 인물이다.
옛날 경상도 영덕에는 어린아이도 다 아는 별난 꾀돌이, 방학중이란 인물이 살고 있었다. 방학중이 장날이 되어 장 구경을 갔는데, 성격이 고약하기로 소문난 젊은 양반이 친구들과 함께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방학중은 젊은 양반을 골려주고 싶어 양반 옆에 털썩 앉아 “오늘 함께 술을 마시고 싶은데, 끼워주시면 안되겠습니까?”라고 정중히 말했다. 그러자 젊은 양반은 “우리와 함께 먹는 것은 허락하나, 무엇인가 보답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이에 방학중은 “그럼 제가 보답으로 저의 코를 베어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실컷 배불리 먹은 방학중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코를 베는 척하다가 코를 풀어 상위에 올려놓았다. 젊은 양반은 방학중이 코를 베긴 했으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에 술까지 먹은 방학중은 갑자기 배가 아팠다. 다급한 마음에 어느 양반집 문을 두드리며 통시 좀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안주인이 외간 남자를 집으로 들일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 너무나 급했던 방학중은 “그럼 천 냥을 주겠소.”라고 했지만, 또 거절을 했다. 이에 이천 냥을 주겠다고 하니 통시로 안내해 주었다. 방학중은 급한 볼일을 해결하고 나니 안주인의 행실이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인에게 자신이 지불할 이천 냥만큼 통시를 사용하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계속 버티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남편이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되자, 안주인은 방학중에게 “천 냥을 줄 테니 어서 나가시오.”라고 했다. 그래도 방학중이 나오지 않으니 안주인은 몸이 달아 이천 냥을 준다고 했지만 역시 나오지 않았다. 남편이 올 시간이 다 되도 나오지 않자 안주인이 삼천 냥을 주고 방학중을 나오게 했다.
방학중의 마을에 성질 나쁜 구두쇠 양선달이라는 양반이 살았다. 방학중은 양선달에게 백 냥을 빌리고 갚지 않았다. 양선달은 아침저녁으로 찾아와 돈을 갚으라고 했지만 방학중에게는 갚고 싶어도 갚을 돈이 없었다. 하루는 부인에게 “내가 시체처럼 누워 있을 테니, 당신은 곡을 하시오.”라고 했다. 양선달이 방학중의 집에 왔다가 방학중이 죽은 것을 보고 돈을 받지 못한 분한 마음만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방학중은 그날부터 양선달을 피해 다녔다. 어느 날, 방학중이 산길을 가다가 우연히 양선달을 만나게 되었다. 방학중은 양선달에게 저승에 갔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돌아가라고 하여 다시 살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이승으로 돌아오는 길에 양선달의 아버지를 만났는데 저승에서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보여 백 냥을 드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양선달이 증명하라고 하자 방학중은 같이 죽어 확인해보자고 하며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그러자 양선달이 받은 것으로 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방학중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한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는 월정교가 있다. 월정교는 신라시대 경덕왕 19년(760)에 건설된 다리인데, 조선시대에 와서는 이승의 어머니에게는 효이지만 저승의 아버지에게는 불효라는 뜻의 ‘효불효교(孝不孝橋)’로 불렸다고 한다. 이처럼 불린 까닭은 『동국여지승람』(1481)에 수록된 효불효교 설화에서 연유한다. 이 설화는 칠형제가 홀로된 어머니의 야행(夜行)을 위해 다리 놓았고, 이를 알게 된 어머니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고 있는 대다수의 이야기는 어머니가 ‘개가(改嫁)’하는 내용으로 변모되어 있다.
옛날 한 여인이 뼈대 있는 명문 집안이라고 하여 유씨 성을 가진 어린 남자에게 시집을 왔다. 그런데, 시집을 와 보니, 초가삼간에 화전만 조금 있을 뿐이었다. 가난한 집안 살림과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는 힘겨웠지만, 부부는 금슬이 좋아 슬하에 일곱 형제를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갑작스럽게 죽게 되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형편에 남편 없이 형제들을 키우려니, 어머니는 낮에는 농사일하고, 밤에는 삯바느질하며, 하루하루 힘겨운 나날들을 보냈다. 어느덧 십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형제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형제들이 장성하자 농사일을 거들었고, 심마니를 따라다니며 약초와 산삼을 캐 돈벌이도 하였다. 형제들은 모두 효자라 그간 어머니의 고생에 맘이 아팠던지라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형제들의 노력으로 살림살이는 늘어났고,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게 되자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얼굴은 피고, 피부도 고와졌는데, 문제는 긴 긴밤을 혼자 보내려니 잠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범골 외딴집에 혼자 사는 홀아비와 눈이 맞았다. 그때부터 형제들이 잠이 들면 몰래 나와 범골로 갔다가 동이 틀 무렵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는 어머니가 늦은 밤 나가는 것을 눈치챈 큰아들이 몰래 뒤를 따라가 보았다. 어머니가 엄동설한에 버선을 벗고 얼음물을 건너는 모습을 보자, 안타까웠던 큰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다리를 놓아야겠구나!’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이 되자 물에 홀딱 젖은 어머니가 다리를 다쳐서 집으로 왔다. 어머니는 급히 서둘러 오다가 개울에서 넘어져 발을 다친 것이었다. 형제들은 어머니가 다친 것을 알고, 약을 지어와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가 잠이 들자 큰형은 동생들에게 자신이 본 이야기를 하고, 어머니를 위해 다리를 만들자고 했다. 그러자 한 동생이 어머니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불평하자, 큰형은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고생하신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참된 효도가 아니겠느냐?”라며 동생을 꾸짖었다. 며칠 뒤 어머니는 다리가 낫자 다시 범골의 홀아비를 만나고 싶었고, 밤이 되어 형제들이 잠이 들자 길을 나섰다. 개울 앞에 선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개울에 다리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리를 확인해 보니 아들들이 만든 것이었다. 새로 생긴 다리 덕분에 어머니는 더욱 편하게 다녔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이 다리를 가리켜 이승의 어머니에게 효지만, 저승의 아버지에게 불효이기에 다리의 이름을 ‘효불효교’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칠 형제는 죽어서 북두칠성이 되었는데, 북두칠성 중 별 하나가 흐릿한 것은 다리를 놓자는 큰형의 말에 불평했던 한 아들의 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효자가 만든 다리에 관한 이야기는 칠형제가 홀로 된 어머니의 야행을 위해 다리를 놓았고, 어머니가 다리를 이용하여 편안하게 야행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문헌과 달리 구전되는 설화는 이야기의 결말이 어머니의 개가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결말 부분의 변모는 유교적으로 강제된 효가 아니라 본래의 인간적 효심이 반영된 것이다. 실제 고려시대까지 만해도 과부의 재가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유교가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과부의 재가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였고, 결국 성종 때에 이르러 재가 금지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설화에 담긴 진정한 효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머니를 위해 다리를 만든 형제들의 행동은 어머니를 단지 자신들의 모친으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여성으로, 더 나아가 한 개인으로서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이야기의 말미에 북두칠성 되었다는 표현은 형제들의 효행이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신성한 가치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끼의 간’ 이야기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수록된 ‘구토설화’에서 유래된 동물담이다. 구토설화는 동해 용왕이 병이 들자 신하였던 거북이가 토끼의 간을 구해와 용왕을 구했다는 이야기이다. 이후 판소리 ‘수궁가’와 판소리계의 소설 ‘토끼전’의 배경설화가 되었다. 또한 민간에서도 전승이 활발하여 토끼의 간 이야기로도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경상남도 사천시 서포면 비토도에는 사뭇 다른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비토도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토끼와 자라, 그리고 토끼 부인까지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 특이점이다. 토끼는 육지에 도착한 기쁨에 성급히 뛰어내리다가 바다에 빠져 죽고, 자라는 토끼가 죽자 어찌할 줄을 몰라 그 자리에서 돌이 된다. 그리고 토끼 부인까지 바위 밑으로 떨어져 죽는다. 결국 이들은 모두 죽어 섬이 되고, 후에 사람들은 ‘토끼섬’, ‘자라섬’, ‘묵섬’이라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옛날 바다에는 네 개의 큰 바다를 다스리는 용왕이 있었다. 이 용왕 중에서 남해를 다스리는 용왕이 갑자기 시름시름 앓더니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다. 바다에서 용하다는 의원들을 모두 불러 진맥하게 했지만, 치료는커녕 아무도 병의 원인조차 알지 못했다. 결국 인간 세상에서 소문난 명의 셋을 불렀다. 용왕의 병을 살펴보던 의원 중 한 명이 “용왕님의 병은 인간 세상에 사는 토끼의 간을 먹어야 낫는 병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용왕은 모든 신하들을 모아 놓고, “토끼의 간을 가져오는 자에 큰 상을 부여할 것이니, 누가 육지로 갈 것이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서로 다투기만 할 뿐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때 별주부 벼슬을 가진 자라가 자신이 다녀오겠다고 했다.
육지로 간 자라는 때마침 동물들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토끼를 만나 “이곳은 토끼님이 살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 같습니다. 곳곳에 토끼님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동물들이 너무 많으니, 저와 함께 용궁에 가시지요. 그곳에 가면 하루하루가 잔치라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토끼는 반신반의했지만,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말에 홀려 자라의 등에 올라탔다. 자라와 남해 용궁에 도착한 토끼는 자라의 말에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용궁에 도착하자마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자신을 밧줄로 묶고 용왕에게 끌고 갔기 때문이었다. 토끼를 본 용왕은 “너의 간을 내어놓아라.” 했다. 토끼는 눈앞이 깜깜했지만,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의 간은 누구나 탐내는 명약이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꼭꼭 숨겨두고 와서 지금은 없습니다.”라고 했다. 용왕이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계속되는 토끼의 거짓말에 결국 속고 말았다.
그리하여 용왕은 자라에게 토끼를 육지로 데려다주고 간을 받아오라고 명령했다. 다시 자라의 등을 타고 토끼는 용궁을 빠져나왔다. 육지에 도착한 토끼는 자라에게 “이 어리석은 자라야, 살아있는 짐승이 어떻게 간을 두고 다니느냐? 그래도 너의 정성을 봐서 약을 주겠다.”라며 까맣고 둥근 똥을 싸고 숲으로 도망쳤다. 자라는 도망간 토끼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하는 수 없이 토끼 똥을 가지고 용궁으로 가 용왕에게 약이라며 주었다. 다행히 용왕은 토끼 똥을 먹고 씻은 듯이 병이 나았고, 자라에게 큰 상을 주었다고 한다.
토끼의 간 이야기는 토끼가 꾀를 내어 죽을 위기를 극복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어떠한 어려움도 지혜만 있다면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다는 피지배계층의 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일정한 인간의 유형을 형상화하고 있다. 자라는 임금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관료, 토끼는 헛된 욕심에 위기에 처했다 살아남은 피지배계층, 용왕은 부당한 권력으로 상징되고 있다. 즉 이 설화는 동물들을 통해 우회적으로 피지배계층의 지배계층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내면서 현실적 욕구 불만을 해소하고 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1556~1618)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역사적으로도 많은 활동을 했던 인물이며, 이항복보다는 오성이라는 이름이 더 알려져 있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전쟁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은 백성들을 보살피며 내정에 힘썼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선조에게 오성부원군이라는 직책을 얻으면서 ‘오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항복은 살아 있을 때부터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현재까지도 그의 기지와 능력을 보여주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오성과 감나무’는 어린 이항복의 기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현재 이항복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에 소재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났던 오성 이항복의 여덟 살 때의 일이다. 오성의 집에는 큰 감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나무의 가지 하나가 오성의 옆집인 우찬성 권철 대감 집으로 뻗어있었다. 가을이 되어 오성의 집에 있는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렸고, 옆집으로 뻗어 있는 가지에도 당연히 감들이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오성은 자기 집 하인들에게 “저기 권대감 집에 넘어간 가지의 감을 좀 따다 주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하인들이 난색을 보였지만, 상전의 명령이라 하는 수 없이 감을 땄다. 그러자 권 대감 집의 하인들이 나와 “어째서 우리 집 감을 함부로 따느냐? 감을 놔두고 돌아가거라.”하며 호통을 쳤다. 오성네 하인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빈손으로 돌아와 이 사실을 오성에게 알렸다. 오성은 권대감 집의 하인들이 주인의 벼슬이 높다고 자신을 무시했다는 생각이 들어 버릇을 고쳐주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잠시 후, 오성은 권대감 집을 찾아가 대감을 뵙기를 청했다. 하인들이 옆집에 사는 오성이 찾아왔다고 전하니 권대감이 들어오라고 했다. 오성은 권대감의 방 앞으로 다가가 안으로는 들어가지는 않고, 문살 사이로 창호지를 뚫고 팔을 쑥 들이밀었다. 방 안에서 오성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던 권대감은 갑자기 방안으로 팔이 쑥 들어오자 깜짝 놀라며, “이것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냐?”라고 했다. 그러자 오성은 “대감님, 저의 무례함은 나중에 벌하시고, 지금 이 팔이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권대감이 “그것은 너의 팔이지, 누구의 팔이겠느냐?”라고 하니, 오성은 “그럼 대감님 댁으로 넘어온 저희 집 감나무는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되물었다. 대감은 “당연히 너의 집 감나무 아니겠느냐!”라고 답했고, 오성이 왜 이런 일을 벌인지 짐작하게 되었다. 오성은 권대감의 방 안으로 들어가 인사를 하고 말을 이어갔다. “왜 대감님 댁 하인들이 저희 집 감나무의 감을 못 따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권대감은 “무슨 말인지 알겠구나. 우리 집 하인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 크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마.”라고 했다. 그때서야 오성은 자신의 무례한 행동에 용서를 구하고, 문을 원래대로 고쳐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후에 이 사건이 인연이 되어 권대감의 손녀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성과 감나무 이야기에서 오성이 보여준 기지는 어린 아이라도 세상의 그릇됨을 비판할 수 있고,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오성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 다양한 유적, 풍부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어 문화콘텐츠로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효성 깊은 총각 이야기는 한국에서 가장 많이 전승되는 민담으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성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주로 아들을 주인공으로 하며, 부모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 강원도 춘천시 효자동에는 효자정문이 있었다. 반희언(1554~?)의 깊은 효성이 알려지면서 선조 41년(1608)에 임금으로부터 표창을 받았고, 지역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춘천에서 원주로 가는 길목에 이 효자정문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효자정문이 남아 있지 않고, 반희언의 효성에 얽힌 설화와 함께 ‘효자문 거리’와 ‘거두리’라는 지명만 전해지고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홀어머니를 모시는 총각 살고 있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병으로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총각은 어머니 약을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용하다는 의원과 약을 구해드렸지만, 어머니의 병은 점점 깊어지기만 했다. 어느 날, 효자가 간호하던 중에 깜빡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흰머리의 노인이 나타나 “너의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고 싶다면 대룡산 골짜기에 가보아라. 그곳에 세 구의 시신이 있을 테니, 그 중에서 가운데 시체의 머리를 잘라 푹 고아 어머니께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했다.
잠에서 깬 총각은 산신령이 자신을 돕기 위해 알려준 것으로 생각하고 바로 대룡산으로 갔다. 해가 저물 때까지 대룡산 곳곳을 살펴봤지만,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를 위해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찾다가 한 골짜기에서 시체 세 구를 찾았다. 효자는 너무 무서웠지만, 어머니의 약이라 생각하고 가운데 시체의 목을 잘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산에서 돌아온 효자는 가마솥에 잘라 온 머리를 넣고 푹 고아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그러자 이 물을 마신 어머니는 거짓말처럼 병이 나았다. 그러나 사체의 머리를 자른 총각의 죄책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저하다가 가마솥을 열었는데, 사람의 머리는 사라지고 사람 머리 모양의 산삼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총각이 시체의 머리를 들고 지나온 곳이라 하여 ‘거수리(擧首里)’로 부르다가 현재는 ‘거두리’로 부른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추운 겨울이 되었다. 병이 다 나은 어머니가 혼잣말로 딸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은 들은 효자는 딸기를 구하기 위해 다시 대룡산으로 갔다. 눈보라를 헤치며 딸기를 찾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맞은편 골짜기에서 밝게 빛나는 붉은 빛을 보게 되었다. 남은 힘을 모아 겨우 도착하니 탐스러운 딸기가 있었다. 총각은 이 또한 산신령을 도움으로 얻었다고 생각하고 크게 절을 한 후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날은 어두웠고, 눈보라는 더욱 거세져서 한 발짝 걸음을 옮기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총각은 쓰러졌고, 그렇게 의식을 일어갈 찰나 멀리서 반짝이 두 개의 빛이 점점 자신에게 다가왔다.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호랑이였다. 총각은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며 ‘이렇게 호랑이 밥이 되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호랑이는 이상하게도 총각 옆에 엎드리더니 등에 올라타라는 시늉을 했다. 총각은 두려웠지만 그래도 호랑이 등에 탔다. 그러자 호랑이가 산을 달려 총각의 집 앞에 내려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하늘이 도운 효자의 이야기가 입소문이 나자 왕은 총각의 효성을 높이 평가하여 상을 주고 효자정문을 세워 주었다. 그리하여 이 마을을 ‘효자문거리’라 불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한 총각이 병든 어머니의 약을 구하기 위해 시체의 머리를 잘라 먹였는데 나중에 보니 산삼이었다는 이야기와 한 겨울에 어머니가 먹고 싶은 딸기를 구하고 위기에 처했지만, 호랑이의 도움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결합하여 있다. 그런데, 총각의 효행이 가능했던 것은 ‘흰 머리의 노인’, ‘산신령’, ‘호랑이’ 등의 조력자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력자의 등장을 통해 효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하여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효에 대한 절대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김방(金倣)은 조선시대 초엽의 인물로 생몰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 15년(1415)에 김제군사로 파견되어 벽골제를 보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문헌상에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광주 지역에 있던 경양방죽을 쌓았던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김방은 1491년에 전라도의 절제사로 부임하면서 광주와 인연을 맺었고, 이때 경양방죽의 축조에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광주광역시 동구에 소재한 증심사의 오백나한과 10대 제자의 성상도 김방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광주 지역에는 김방에 관한 이야기가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조선 세종 때 김제군수로 있던 김방이 광주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김방 목사가 광주에 와 보니 평야지대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가뭄이 들어 흉년이 계속되었고, 오랜 가뭄으로 인하여 해가 지날수록 백성들은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었다. 김목사는 백성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김제에 벽골제를 만든 것처럼 광주에도 저수지를 만들면 좋겠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김목사는 백성들과 관군을 동원하여 방죽을 쌓기 시작했다. 그런데, 방죽을 만들기 위해 사람을 동원하면 식량이 필요했고, 오랜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했다. 저수지를 만드는 일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식량이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방죽을 쌓던 중 일꾼들이 엄청나게 큰 개미굴을 발견하였다. 개미굴에서는 수많은 개미가 살고 있었지만, 방죽을 쌓기 위해서는 개미굴을 허물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본 김목사는 개미들을 측은히 여겨 일꾼들에게 “개미가 한낱 미물일지라도 생명은 저마다 소중한 것이니, 개미떼를 장원봉 기슭으로 옮겨주어라.”하고 명령했다. 며칠 뒤 김목사는 오늘도 다치는 사람없이 방죽을 쌓도록 기원하려고 집 뒤뜰로 갔는데, 기이하게도 뒤뜰에는 수많은 개미들이 쌀들을 옮겨 놓고 있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뒤뜰에는 쌀이 쌓여 있었다. 김목사는 하느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개미떼를 보냈다고 생각하며, 백성들에게 쌀을 골고루 나눠주었다. 백성들도 이 사실을 알고 방죽을 만드는 일에 더욱 열과 성을 다했다. 그리하여 방죽이 완성되었고, 백성들은 이 방죽을 ‘경양방죽’이라 불렀다. 김목사의 생각대로 무등산 물줄기의 물이 경양방죽으로 모여들었고, 가뭄이 들어도 방죽 때문에 광주는 기름진 땅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광주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살기 좋은 땅이 되었다고 한다.
방죽공사를 마친 김목사는 개미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증심사에 나한전을 건립하고 오백나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공사 중에 김목사가 병이 나서 드러눕게 되었다. 의원을 불러 진맥을 하니 매일 닭똥집을 먹어야 낫는 병이라고 했다. 김목사는 불사를 짓고 있는 중이라 고기를 먹지 않으려 했으나, 병이 낫길 기원하는 백성들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닭똥집을 먹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종대왕이 낮잠을 자는데, 꿈속에 수백 마리의 닭이 찾아와 “대왕님, 광주목사 김방이 무등산 골짜기에서 역적모의를 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처형하십시오.”라고 했다. 잠에서 깬 세종대왕이 금부도사를 광주로 보내 김목사를 처형하라고 명령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의 꿈에 수백의 사마승들이 나와 “김방은 충신이고, 백성을 살리는 좋은 사람입니다.”라며 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세종대왕은 급히 파발마를 보내 금부도사를 돌아오도록 하였다. 먼저 떠난 금부도사가 증심사 입구에 도착하자 갑자기 말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날이 새기를 기다리며 쉬고 있는데, 왕이 보낸 파말마가 도착했고 그때서야 금부도사의 말도 움직였다. 이때 금부도사와 관군들이 배고픔을 달래며 날이 새기를 기다린 다리를 '배고픈 다리'라고 불렀다.
김방은 경양방죽과 증심사의 오백나한을 만든 인물로 역사에서 실존했던 인물이지만, 실제 성품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두 편의 이야기에서 그려지는 김방은 백성들을 아끼고, 미물의 생명 또한 소중히 여기며,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김방의 인물됨은 백성들이 원하는 지도자의 참된 모습을 투영시킨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