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상대사를 사모한 선묘낭자의 혼이 깃든 부석사

    의상대사가 세운 부석사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에는 부석사가 있다. 부석사는 여러 국보와 보물 등 다수의 문화재 자료가 존재하며,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 절이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세운 절로 유명하다. 의상대사는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며 화엄종을 연구하였다. 귀국한 뒤에 부석사를 세우고 화엄사상을 전파하고 제자를 길러냈다. 의상대사와 제자들로 인하여 화엄사상이 신라 사회에 널리 퍼지면서 큰 영향을 미쳤으며 부석사를 비롯하여 10개의 절이 지어졌다. 옛 문헌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의상대사가 절을 짓게 된 배경에 대한 이야기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그중에 부석사 창건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는 경상북도 영주시를 비롯한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서 널리 전승되고 있다. 

     


    선묘낭자의 헌신과 희생으로 가능했던 부석사

    의상은 불교의 교리를 공부하기 위하여 당나라로 떠났다. 등주(登州)의 바닷가에 도착하여 어느 불교 신자의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 주인에게는 아리따운 용모의 선묘(善妙)라는 딸이 있었다. 선묘는 의상을 지켜보며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에게 불교의 깨달음을 전하였다. 이때 선묘는 영원히 의상을 따를 것을 결심하고 의상이 불교 공부하는 것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의상은 종남산의 지엄(智儼)을 찾아가 화엄사상을 연구하였고, 신라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선묘의 집에 들러 그 동안 편하게 지내게 해준 데 대하여 감사 인사를 하고 바로 배를 타러 갔다. 의상이 떠난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선묘는 급히 배를 타는 곳으로 가보았지만 배는 이미 저만치 떠가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이 입을 옷과 여러 물건들을 담은 상자를 배를 향해 던져 의상에게 전했다. 그러면서 ‘스님이 무사히 돌아가 불교의 교리를 잘 펼치시게 해주십시오.’ 빌고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선묘는 용으로 변하였고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여 무사히 신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용이 된 선묘는 계속 의상을 보호하였다. 신라에 도착한 의상은 화엄사상을 펼칠 곳을 찾아 경상북도 영주시 봉황산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다른 종파의 스님들이 수백 명이나 살고 있어 의상의 뜻을 펼칠 수 없었다. 이때 선묘가 큰 바위로 변하여 절의 건물 위를 덮어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로운 상황을 만드니 스님들이 놀라고 두려워 모두 도망갔다. 그제서야 의상이 그곳에서 화엄경을 만들어 날마다 강론하니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교리가 전파되었다. 의상은 큰 바위가 공중에 떴다고 해서 절의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고 지었다. 현재에도 부석사에는 부석이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용이 된 선묘가 변하였던 바위라고 전해진다. 

     

    화엄사상의 전파와 용이 된 선묘의 헌신

    이 이야기는 부석사가 생기게 된 유래를 전하고 있다. 의상이 당나라에서 화엄사상을 배워와 신라에 전파하는 과정이 나타나는데, 화엄사상이 다른 종파를 대체하며 그 터전을 확보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선묘는 의상에 대한 사랑으로 불교에 귀의하게 되며 용으로 변하여 의상을 돕는다. 선묘의 조건 없는 헌신과 용으로의 변신이라는 흥미로운 요소로 인해 이 이야기가 중국과 일본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하늘과 땅의 경계에 우뚝 선, 영주 부석사 안양루

    영주 부석사 안양루
    영주 부석사 안양루

    널리 알려진 절집에는 오래되거나 멋스러운 누각들이 있다. 순천의 선암사 강선루, 영주의 부석사 안양루, 구례의 화엄사 보제루, 완주의 송광사 종루와 화암사 우화루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들 누각은 세워진 위치, 건축 양식, 쓰임새가 제각각이다. 쓰임새를 보면 선암사 강선루와 부석사 안양루는 사람들이 출입하는 문루로, 화엄사 보제루와 화암사 우화루는 대웅전 같은 불당과 마주하며 법회를 여는 강당으로, 송광사 종루는 범종을 걸어두는 누각으로 각각 이용되고 있다. 쓰임새가 다른 만큼 건축 양식도 다르다. 누각은 사방을 탁 트이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강당과 같이 사용되는 보제루·우화루는 한 면만 개방되고 세면은 벽으로 막혀 있다.


    우리나라 사찰의 누각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영주 부석사 안양루이다. 부석사의 역사성과 건축적 양식, 주위의 자연환경과 어우러진 안양루는 단연 독보적이다. 부석사는 신라 676년(문무왕 16) 의상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절집이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해서 석등·조사당·조사당 벽화·소조여래좌상 등 국보만 무려 다섯 점이 있다.


    가람의 배치나 건축미도 빼어나다. 사찰의 경내로 진입하는 일주문과 당간지주, 사천왕상이 있는 천왕문과 법고·목어가 있는 범종각을 차례로 오르면 높다란 막돌 기단위에 우뚝 선 안양문이 천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안양(安養)’이란 극락, 곧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불국토를 의미한다. 이 안양문을 지나야만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과 마주할 수 있다.


    안양문 아래가 세속의 세계라면, 안양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천상의 세계, 극락의 세계로 변모한다. 이제 ‘안양문’도 천상의 세계에서는 ‘안양루(安養樓)’로 탈바꿈한다. 같은 건물이라도 용도에 따라 그 이름이 달라지는 것이다.  ‘안양문에서 안양루로.’  안양루는 이단으로 쌓은 기단 위 높은 자리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은 팔작지붕이다. 안양문 아래에서 보면 2층 구조이지만, 마주한 무량수전에서 보면 단층 누각같이 보인다. 누각 아래 1층은 자연석 초석 위에 그랭이질한 기둥을 세웠다.

    안양문
    안양문
    안양루
    안양루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정말 신선의 세계이고, 천상의 세계이다. 가까이는 범종각·천왕문·일주문이 발아래 도열해 있고, 멀리는 소백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봄이면 일주문까지 초록의 은행잎과 하얀 사과 꽃이,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과 빨간 사과가 장관을 이룬다. 멀리 보이는 소백산은 해질 무렵, 비 온 뒤에는 더욱 장관이다. 누구나 안양루에 올라서면 신선이 된다.


    조선 시대 가장 바람같이 신선같이 살다간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도 방랑 시인 김삿갓으로 불렸던 김병연(金炳淵)이 아닐까. 그런 그가 안양루에 올라 자연의 아름다움과 세월의 무정함을 노래한 시가 지금도 안양루에 걸려있다.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우주 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백 년 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 있네.

    안양루
    안양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