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와 횡성군, 영월군 사이에 걸쳐서 치악산(雉岳山)이 있다. 치악산은 높이 1,282m의 산으로 원래는 적악산(赤岳山)이라 불렀으며, 1984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이다. 원주시 신림면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성황림’을 통해서 치악산에 오르면 상원사(上院寺)가 있다. 상원사는 신라시대에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도 하며, 경순왕 때 무착(無着)이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상원사는 6.25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68년에 중건한 절이다. 상원사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은혜 갚은 꿩’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사찰로 많이 알려져 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해 치악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새 우짖는 소리가 들려 주위를 살펴보니, 큰 구렁이가 나무 아래서 꿩을 휘감아 먹으려 하고 있었다. 나그네는 재빨리 활을 꺼내 구렁이를 쏘았다. 다행히 꿩은 살아서 공중으로 날아갔다. 나그네는 다시 가던 길을 갔다. 걷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어갈 인가를 찾았다. 마침 외딴집의 불빛을 보게 되어, 문 앞에 서서 하룻밤 묵어 갈 것을 청하였다. 집 안에서는 어여쁜 여인이 나와 나그네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먹을 것을 주었다. 나그네는 여인이 내어준 것을 먹고, 피곤에 지쳐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숨을 쉴 수가 없이 답답해 눈을 떴다. 큰 구렁이 한 마리가 자신의 몸을 칭칭 감고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구렁이는 나그네에게 “너는 낮에 내 남편을 죽였으니 그 원수를 갚겠다.”고 하였다. 나그네는 “오늘 내가 당신의 남편을 죽인 것은 꿩을 잡아먹으려 하기에 순간적으로 활을 쏜 것이니, 용서해 주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구렁이는 “그러면 내기를 하자. 이 산중에 아무도 살지 않는 절의 종이 있는데, 그 종이 세 번 울리면 너를 살려주겠다.”라고 하였다. 아무도 살지 않는 절에서 종이 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나그네는 체념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땡-”하고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두 번의 종소리가 더 울렸다. 그러자 구렁이는 나그네를 풀어주고 사라져 버렸다. 정신이 든 나그네는 절을 찾아 나섰고, 종 아래에서 머리가 깨져 죽은 꿩을 발견하였다. 나그네가 낮에 구해준 꿩이었다. 비록 미물이지만 자신에게 은혜를 갚은 꿩을 보고, 나그네는 감사해 그 근처에 꿩을 묻어 주었다. 그 이후로 적악산이 꿩 치(雉)자를 써서 치악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위의 이야기에 더해서 꿩과 나그네를 잡아먹으려 했던 구렁이의 실체에 대해서 전해지는 설화가 있다. 어느 해 상원사 주지는 종을 만든다면서 수십 만 가구에서 식구 수대로 숟가락을 시주받았다. 주지는 처음에는 불심(佛心)으로 종을 만들려 하였으나, 욕심이 생겨 거두어들인 숟가락 중 반을 숨겨놓고 나머지로 종을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절에서 수행하고 있는 보살과 정을 통하였다. 주지는 종을 만들어 놓고 전국에서 사람들을 모아 타종식을 거행하고자 하였다. 타종식에 온 사람들은 거창한 종을 보고, 주지를 칭찬하며, 종치기를 기다렸다. 타종식 시간이 되어 종을 치니, 종소리가 나지 않았다. 몇 번을 쳐 보아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 때 허공에서 주지의 욕심을 질타하는 부처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리고 주지와 보살은 구렁이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곧 은혜 갚은 꿩 이야기에서 구렁이는 욕심 많은 주지와 보살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구렁이의 실체를 알려준 설화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은혜 갚은 꿩’이야기만 알려져 있다. ‘은혜 갚은 꿩’이야기는 1952년 간행한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 「종소리」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1960년대까지 초등학생들에게 읽혔던 설화다. 곧 ‘은혜 갚은 꿩이 울린 상원사 동종’설화는 ‘치악산(雉岳山)’이라고 불리게 된 유래를 설명하는 지명유래담이며, 동물보은담의 한 유형으로 꿩이 자신을 살려 준 인간에게 스스로를 희생하여 목숨을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구렁이의 존재와 관련해서 “부처님의 저주를 받아서 구렁이로 된 주지와 보살”이라는 설화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강원도 양양군에는 통일신라시대인 671년에 창건한 낙산사(洛山寺)가 있다. 낙산사는 의상(義湘)이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고 창건하였으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음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에 동양에서 가장 큰 ‘해수관음입상’을 낙산사 경내에 세웠고, 의상이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난 곳이라는 홍련암(紅蓮庵)과 참선을 하였다는 의상대(義湘臺) 등이 있다. 현재 낙산사는 사적 제495로 지정되어 있으며, 의상과 원효(元曉)가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는 과정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우리나라 화엄종을 연 의상이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돌아왔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관음보살의 진신이 동해의 한 동굴 안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의상은 관음보살을 친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기 위해 심신을 깨끗이 하고, 금기를 지키며, 일주일간 재계(齋戒)를 하였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그가 깔고 앉아 있던 자리를 이른 새벽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龍天八部,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의 시종들이 동굴 안으로 이끌었다. 의상이 동굴의 공중을 향해서 참례(參禮)를 했더니 수정으로 된 염주(念珠) 한 개를 얻을 수 있었다. 동해의 용왕도 의상에게 여의주 한 개를 바쳤다.
그 후 다시 일주일 동안 재계를 하자,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날 수 있었다. 관음보살의 진신이 의상에게 “네가 앉아 있는 산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솟아날 것인데, 그곳에 반드시 부처님을 모셔야 한다.”라고 하였다. 의상은 그 말을 듣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바로 자신이 있던 동굴 위에서 대나무 한 쌍이 솟는 것이 보였다. 의상은 대나무 한 쌍이 솟아난 곳에 불전(佛殿)을 짓고 부처님을 모셨다. 그리고는 그곳을 낙산(落山)이라 부르고는, 수정 구슬 두 개를 안치하고 그곳을 떠났다고 한다.
한편, 같은 시대를 살았던 원효도 관음보살이 동해의 한 동굴에 머물러 있다는 말을 듣고 낙산사를 향했다. 원효가 낙산사 남쪽 부근에 도착하였을 때, 논에서 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는 여인에게 “그 벼를 제게 주시오.”라며 장난을 쳤다. 여인도 장난삼아 “벼가 잘 익지 않아 줄 수가 없소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길을 가다가 이번에는 다리 아래에서 월경개짐[생리대]을 빨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원효가 그녀에게 “물을 좀 주시오.”라고 하자, 그 여인은 월경개짐을 빨던 물을 떠서 원효에게 주었다. 원효는 그 물을 쏟아 버리고 다시 물을 떠서 마셨다.
그때 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의 파랑새 한 마리가 “원효 스님은 그만 두시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고, 소나무 아래에는 신발 한 짝만 남아 있었다. 원효가 낙산사에 도착해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찾아갔다. 그 때 관음보살이 있던 자리에 관음보살은 없고, 자신이 소나무 아래에서 보았던 신발과 똑같이 생긴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그제서야 원효는 낙산사로 오는 중간에 만난 여인이 관음보살의 진신임을 깨달았다. 또한 원효가 동굴로 들어가 관음보살 진신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거친 풍랑이 일어 동굴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결국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지 못하고 떠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위의 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도 수록되어 있다. 낙산사 창건 배경을 담고 있는 설화다. 통일신라시대 두 고승(高僧)이었던 의상과 원효가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러 낙산사 동굴을 찾지만, 원효는 관음보살의 진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의상만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게 된다. 결국 위의 설화는 의상이 화엄사상과 관음사상을 결합해서 불교의 대중화를 이루어 내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에는 만어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삼국시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세운 것이라 전해진다. 신라시대에는 왕들이 불공을 드리는 장소로 쓰였고 그뒤로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문화재로는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만어사삼층석탑이 보물 제466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어사는 새벽에 구름이 바다처럼 넓게 깔리는 풍경이 아름다워 밀양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또한 밀양 3대 신비의 하나로 꼽히는 만어사 경석이 있다. 만어사 앞에 깔려있는 경석은 말 그대로 두드리면 종소리가 난다. 만어사 경석은 천연기념물 제5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처럼 만어사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풍경을 가진 사찰로 많은 사람이 방문하고 있다. 만어사에 대한 이야기는 밀양시 밀양읍, 삼랑진읍 일대에서 두루 전해진다.
옛날 자성산 근처에 가락국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알에서 나와 왕이 된 수로왕이 있었다. 그때 가락국의 옥지(玉池)라는 연못에 독룡(毒龍)이 살고 있었고,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나찰녀(羅刹女)가 만어산에 살고 있었다. 독룡과 나찰녀가 서로 왕래하며 어울려 지낸 까닭에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며 우박이 쏟아져 4년 동안 곡식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수로왕이 주문을 외우고 술법을 써서 독룡과 나찰녀가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지만 불가능하였다. 수로왕은 ‘부처님 제발 도움을 주십시오.’라고 빌며 인도 쪽을 향해 부처를 청하였다. 부처가 신통력으로써 6비구와 1만의 천인(天人)들을 데리고 왔다. 부처의 설법을 통하여 독룡과 나찰녀가 항복하였고 이후에 모든 재앙이 사라졌다. 이때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돌로 변하였다. 그 돌들은 두드리면 종소리가 났다. 돌들이 많이 깔린 곳에 수로왕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도 있다.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은 자신의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서 낙동강 건너의 무척산(無隻山)에 사는 신승(神僧)을 찾아갔다. 용왕의 아들은 신승에게 “제가 새로 지낼 곳을 알려주십시오.”라고 부탁하였다. 신승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곧 인연이 되는 곳이니 그곳에 터를 잡으십시오.”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용왕의 아들이 길을 떠나니 수많은 물고기 떼가 뒤를 따라왔다. 용왕의 아들이 가다가 멈추어 쉰 곳이 곧 만어사였다. 그 후 용왕의 아들은 만어사에서 큰 미륵바위로 변하였고 수많은 물고기 떼는 크고 작은 돌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현재 만어사의 미륵전 안에는 5m 정도 되는 바위가 있는데 이는 용왕의 아들이 변한 미륵바위라고 한다. 미륵바위에 소원을 빌면 자식을 원하는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한다. 미륵전 아래에는 수많은 돌무더기가 깔려 있는데 이는 물고기 떼가 변해서 된 만어석(萬魚石)이라 한다. 두들기면 맑은 종소리가 나기 때문에 종석(鐘石)이라고도 한다.
이 이야기는 「불설관불삼매해경」이라는 불교 경전에 실린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가락국의 김수로가 독룡과 나찰녀를 물리치고 만어사를 짓게 된 이야기로 변화되었다. 김수로왕을 등장시켜 만어사가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절임을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로 변화된 것이다. 요컨대 불교 경전을 재구성한 불교 설화이자 사찰 창건설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로써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동해 용왕의 아들 이야기는 만어사 주변의 돌무더기나 미륵바위의 유래를 알리는 것으로 전승되고 있다.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 자락에는 송광사가 있다. 송광사는 우리나라 조계종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으며, 경남 합천의 해인사, 경남 양상의 통도사와 함께 한국의 삼보사찰(三寶寺刹) 중 한 곳이다. 송광사의 창건은 통일신라의 승려였던 혜린(慧璘)선사가 송광산[조계산의 옛지명]에 이르러 ‘길상사(吉祥寺)’라는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에는 40여 명의 스님이 살았던 작은 절이었으나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오면서 절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고, 절의 이름도 길상사에 송광사로 바꾸었다. 특히 송광사는 지눌스님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초기의 고봉국사까지 열여섯 명의 국사를 배출해 승보사찰(僧寶寺刹)이 되었으며, 새로운 한국불교의 중심지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신라시대 말엽, 혜린선사가 십여 명의 제자들과 산속에서 수도하고 있었다. 하루는 제자들이 괴질에 걸려 몹시 괴로워했고, 혜린선사가 약초를 뜯어 치료했으나 효험은커녕 아픈 사람들이 더 늘어나기만 했다. 걱정이 컸던 혜린선사은 제자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부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정결한 기도처를 찾아 나섰다. 혜린선사는 산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연못을 발견했는데, 연못 가운데는 문수보살 석상이 우뚝 서 있었다. 혜린 선사는 깜짝 놀랐지만, 제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생각이 들어 무척이나 기뻤다. 바로 제자들과 함께 문수보살을 마주 보고 앉아 기도를 시작하였고, 기도는 그렇게 7일 동안 이어졌다.
기도가 끝나는 날, 부처님이 혜린선사의 꿈속에 나타나 “이제 너와 제자들의 모든 시련이 끝났으니, 이 길로 새 절터를 찾아 절을 짓고 중생을 구제하도록 하여라.” 했다. 꿈에서 깨어 보니 시름시름 앓던 제자들이 모두 건강해졌다. 혜린선사는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문수보살 석상에게 가는 길을 인도해 달라고 다시 기도를 드렸다. 혜린선사가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자 언제 오셨는지 노승 한분이 온화한 미소로 혜린선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승은 부처님의 불보를 전하면서 “제자들과 함께 전라도 남쪽에 있는 송광산으로 가시오. 그곳에 불보를 모시고 절을 지어 불법을 전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혜린선사는 제자들과 함께 송광산으로 떠났다. 여러 날이 지나 드디어 송광산 아래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는데, 그때 한줄기 빛이 송광산 기슭을 비추었다. 혜린선사는 빛이 비춘 곳에 절을 만들어 부처님을 모셨고, 절의 이름을 ‘길상사’라 했다고 한다.
송광사에 얽힌 설화는 혜린선사가 창건한 송광사에 관한 내력이 담긴 이야기이다. 송광사의 창건에서는 역사적 사실보다 사찰의 신성함을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혜린선사가 세운 송광사의 절터는 부처님이 계시를 해준 성스러운 땅이며, 이러한 성스러운 땅에 혜린선사로 하여금 절을 창건하게 하여 송광사의 신성함과 영험함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보조국사 지눌스님은 혜린선사가 창건한 길상사를 번성시킨 인물이다. 이후 송광사에서는 보조국사 지눌 스님을 포함하여 열여섯 명의 국사를 배출하였고, 그 결과 큰스님을 가장 많이 배출한 승보사찰이 되었다.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로 잘 알려진 미륵사(彌勒寺)의 터 ‘미륵사지(彌勒寺址)’가 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 2년(601)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백제의 절로는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절이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크게 번성하였으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점차 쇠락한 것으로 추정한다. 미륵사지는 1962년에 사적 제150호로 지정하여 관리하였지만, 현재는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과 ‘미륵사지당간지주(彌勒寺址幢竿支柱)’만이 외롭게 남아 있을 뿐이다. 미륵사지석탑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지만, 이것도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말하는 듯 많이 쇠약해진 모습이다. 특히 미륵사지석탑은 훼손 상태가 심각하여 2001년부터 수리를 시작해 2018년 7월에 보수 작업을 완료하였고, 2019년 4월 30일에 열린 준공식에서 복원된 모습을 공개하였다.
백제의 30번째 왕은 무왕이다.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로 홀로 집을 짓고 살던 중 못의 용과 정을 통하여 무왕을 낳았다. 무왕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넓은 아이였고, 집이 가난하여 생계를 위해 마를 캐어 팔았다 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를 ‘마동’ 또는 ‘서동’이라 불렀다. 어느 날,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경주로 갔다. 경주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며 노래를 가르쳐 주었는데, ‘선화공주가 서동과 몰래 만나 정을 통한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노래는 아이들에 의해 경주 전역에 울려 퍼졌고, 결국 진평왕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진평왕은 선화공주의 부정한 행실을 문제 삼아 먼 시골로 유배를 보냈는데, 왕후는 황금을 주며 노잣돈으로 쓰라고 했다. 선화공주가 길을 떠나는 도중에 갑자기 서동이 나타나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나 선화 공주는 서동을 믿었고 좋아했다. 후에 서동의 이름을 들은 선화공주는 자신이 서동의 부인이 될 운명임을 알고 서동을 따라갔다.
서동과 함께 백제에 도착한 선화공주는 왕후가 준 황금을 팔아 생활을 꾸리자고 했다. 그러자 서동은 웃으면서 “내가 마를 캐던 곳에는 이것이 산처럼 쌓여 있소.”라고 했다. 선화공주는 깜짝 놀라며, “이것은 죽을 때까지 부자로 살 수 있는 진기한 보물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부모님께 보내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서동이 좋다고 했지만, 문제는 산처럼 쌓인 황금을 보낼 방도가 없었다. 이때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가 신통력으로 황금을 수송해주겠다고 했다. 지명법사는 신통력으로 선화공주의 편지와 황금을 진평왕에게 보냈고, 진평왕의 마음을 얻은 서동은 백제의 무왕이 되었다. 하루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용화산 아래의 큰 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수레를 멈추고 내려와 공손하게 절을 했다. 미륵삼존을 본 후 선화공주는 “이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라고 무왕에게 말했다. 무왕은 공주의 소원대로 못을 메워 절을 짓고, 절의 이름을 ‘미륵사’라 하였다.
미륵사에 얽힌 설화는 우리에게 「서동요」의 배경설화이며, 서동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미륵사의 창건은 백제 무왕에게 있어 왕권 강화의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당시 백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이상을 심어주고 싶은 백제 무왕의 신념이 담긴 이야기이다. 설화에서는 선화 공주의 부탁으로 미륵사가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2009년 미륵사지석탑을 보수 과정에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에는 선화공주가 아닌 당시 좌평이었던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는 백제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관음사가 있다. 관음사는 백제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사찰이며, 분서왕 4년(301)에 옥과 출신의 처녀 성덕이 세운 절이다. 절 이름은 성덕이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와 절을 완성하고, 그 이름을 ‘관음사’라 부른 것에서 연유한다. 관음사에는 백매 선사가 쓴 『관음사사적』(1729)이 전해지는데, 「심청전」의 근원설화로 알려진 원홍장이야기와 처녀 성덕의 관음사 창건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관음사는 현재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보전되고 있다.
백제 때 대흥(지금의 충남 예산 지역)이라는 고을에 원량이라는 장님과 원홍장이라는 어린 딸이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홍장은 아름다웠으며, 심성 또한 고와 어릴 적부터 앞 못 보는 아버지를 정성스럽게 모시는 효녀였다. 어느 날, 원량은 길에서 홍법사의 법당을 짓는 일을 맡은 성공(性空)이라는 스님을 만났다. 성공 스님은 부처님의 뜻이라며 원량에게 우리 절의 큰 시주님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스님의 말에 몸 둘 바를 몰랐던 원량은 “저는 가난하여 먹고 살 양식도 없는데, 어떻게 시주하겠습니까? 다만 효성 지극한 딸이 있으니 그 아이라도 데려가서 보탬이 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스님은 기뻐하면서 돌아갔고, 원량은 자신이 했던 말을 땅을 치며 후회했다.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원량은 딸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다.
약속은 약속인지라 홍장은 스님을 따라 홍법사로 향했다. 며칠째 걷기를 반복하다가 피곤한 몸을 달래기 위해 소랑포 부두에서 쉬게 되었다. 이때 멀리서 두 척의 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더니 홍장이 있는 나루터에 멈추었다. 그리고 배 위에 있던 사자가 다가와 홍장의 얼굴을 보고, 황후마마라며 절을 하였다. 홍장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자, 사자는 자신은 진나라 사람이고, 황후가 돌아가셨는데, 황제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새 황후가 백제에서 태어나 장성했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하여 황제의 명으로 예물을 가지고 모시러 왔다는 것이다. 홍장은 스님에게 예물을 모두 드리고, 사자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홍장은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지만, 홀로 남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장인을 시켜 자신의 원불(願佛)로 관음보살상을 만들게 하였다. 그 후 관음보살상을 배에 싣고 백제국으로 보내며, 인연이 있는 곳에 닿아 봉안되기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곡성 옥과(현재 곡성군 옥과면)에 성덕이라는 처녀가 살았다. 하루는 성덕이 바닷가를 걷고 있는데, 수평선을 바라보니 돌배 하나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배속에 빛이 가득했고, 안에는 관음보살상이 앉아 있었다. 성덕은 엎드려 절을 하고, 관음보살상을 업었더니 깃털처럼 가벼웠다. 성덕은 관음보살상을 모실 인연의 땅을 찾아 숱한 들과 마을을 지났다. 지금의 곡성군 오산면에 있는 고개를 지날 때 갑자기 관음보살상이 태산처럼 무거워서 한 발 짝도 뗄 수가 없었다. 성덕은 그곳에 관음보살상을 모시고, 절을 세워 그 이름을 ‘관음사’라 하였다. 그 후 사람들은 관음사를 품고 있는 산을 ‘성덕산’이라 이름 짓고 그녀의 덕을 기렸다고 한다.
관음사에 얽힌 설화는 관음사 창건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부각하고, 원홍장의 효성과 성덕의 정성이 이어져 관음사가 창건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설화에서 원홍장과 성덕은 모두 관음의 화신으로 형상화되어 있으며, 이러한 인식은 관음사와 관음보살의 신성화를 통해 불교의 대중화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함으로 보인다. 한편 원홍장에 관한 이야기는 그 구조와 내용이 「심청전」과 유사하여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의 배경설화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 속초시 도문동(道門洞)은 자장율사가 도의 문을 통과했다고 붙여진 지명이다. 도문동은 설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쌍천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양양 낙산사 방면에서 물치를 지나 설악산으로 올라가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면서 옹기를 구워 팔았다고 해서 잘 알려지기도 했다.
자장율사는 신라시대 스님이다. 어느 날 낙산사 의상대에 올랐다가 자기도 모르게 설악산 쪽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쌍천의 물길이 시원하게 흘러내리고 가까이 설악산의 위용이 곧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자장율사는 발길도 가볍게 그 지역을 통과하게 되었다. 워낙 산길이라 길을 가는 도중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길을 가다가 지금의 벼락바위 있는 곳을 지나는데 웬 사람이 있길래 길을 물었다. “지금 소승이 지나는 곳이 어디 입니까?” “도문(道門)이라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길을 알려준 사람은 조금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 자장율사는 그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또 길을 가다가 보니 그 사람이 있었다. 자장율사는 또 길을 물었다. “지금 소승이 지나는 곳이 어디 입니까?” “도문을 지나고 있습니다.” 자장율사는 그렇게 세 번이나 그 사람을 만났고 세 번 다 물으면 도문을 지나고 있다고 했다. 훗날 이곳 지명이 상도문, 중도문, 하도문으로 된 사연이다. 자장율사는 그렇게 설악산으로 향하다가 날이 저물어 잠을 자게 되었다. 그때 어디선가 노루가 나타나서 자장율사 부근을 배회했다. 자장율사는 날도 쌀쌀하고 해서 노루를 불러 목을 베고 하룻밤을 잤다. 훗날 이곳은 노루목이 되었다.
설악산에 올라 자장율사는 좋은 곳을 찾아 향성사라는 절을 짓고 머물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서 향성사는 계속 불길에 휩싸였다. 자장율사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자장율사가 잠을 자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을 했다.“ 이 꼭대기로 올라가 서북방 쪽으로 더 가면 싸리나무가 큰 게 있으니 그 싸리나무가 있는데 절을 지으면 좋을 것이오.” 자장율사가 깨어보니 꿈이었다. 자장율사는 산신령이 시킨 대로 올라가서 절을 지었다. 그리고 신이 점지하여 흥할 절이라 하여 신흥사(神興寺)로 이름을 지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흥국사는 신라 문무왕 때(서기 661년) 창건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유서 깊은 절이다.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북한산에 머물 때 북서쪽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일어 찾아가보니 약사여래상이 있었다고 한다. 약사여래는 병이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서원한 부처님이다. 원효대사는 불상을 모신 다음 장차 이곳에서 많은 성인이 배출될 것이라 예견하며 흥성암(興聖庵)이라 이름 지었다.
암자가 절이 된 계기는 조선 영조 때다. 영조 임금은 무수리로 출신으로서 자신을 낳은 어머니 숙비 최 씨의 묘(소녕원)에 다녀오는 길에 이 암자에 들렀다. 영조는 손수 지은 시를 편액으로 하사하고, 절 이름을 흥성암에서 흥국사로 고쳐지었다. 숙비 최 씨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이자, 나라의 번영과 안녕을 비는 절이라는 의미다. 흥국사라는 절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도 있는데, 이 절 역시 왕실의 원찰이다. 남양주 흥국사도 신라 진평왕 때(서기 599년)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지은 절이었는데, 조선 선조가 자신의 친부 덕흥대원군의 원찰로 삼았다.
고양 흥국사는 근대 격동기에 간절한 기도의 장소로 등장한다. 영친왕(英親王)의 어머니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가 1904년 여덟 살 된 아들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만일회’를 고양 흥국사에서 열기로 한 것이다. ‘만일회’란 1만 날 동안 기도를 이어가겠다는 다짐으로서, 햇수로 환산하면 28년이나 된다. 순헌황귀비는 ‘엄비’, ‘엄상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찍이 궁에 들어가 민비(훗날 명성황후)의 상궁이 되었고, 왕의 승은을 입어 고종의 일곱 째 아들(垠)을 낳았으나, 민비의 미움을 사 1885년 궁에서 쫓겨났다. 10년 후 을미사변(1895년)으로 명성왕후가 시해된 후 고종이 엄비를 궁으로 들어오게 했다.
고종은 엄비를 아꼈다. 을미사변 이후 새로운 왕비가 간택되었으나 ‘춘생문 사건’이 발생하여 새 왕비는 궁에 들어오지 못했고, 고종은 사실상 엄비를 왕비처럼 대했다 한다.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엄비는 순헌황귀비가 되었다. ‘춘생문 사건’이란 1895년 을미사변 후 친미파와 친러파 신하들이 왕을 궁 밖으로 모셔 나가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춘생문 사건’에는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들도 연루되어 있었다. 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 했다가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일련의 사건이 1890년대에 숨 가쁘게 전개되었다. 왕비가 시해되고, 왕의 생명조차 위태로운 시기이니, 엄비는 자기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고양 흥국사 대방은 엄귀비의 ‘만일회’로 궁중 사람들이 계속 드나들게 되면서 지어졌다. 수행에 정진하는 승려들과 속세의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고 생활하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시기 대방은 신성한 공간과 세속 공간이 절충·혼합된 공간이었다. 고양 흥국사는 원래 아미타불을 모신 미타전을 1912~1915년 무렵에 개조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쪽에는 부엌이 만들어졌고, 일부는 승려들이 거처하는 방이었다. 대방 뒤는 고양 흥국사의 중심 불전인 약사전이 있었고, 대방은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의 구실도 했다.
삼남 지방 전통 고찰에는 대방이 별도로 없다. 대방은 주로 서울과 경기도, 충청남도 예산의 보덕사 등지에 있다. 대방이 있는 고양 흥국사도, 남양주 흥국사도, 서울 흥천사(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예산 보덕사도 모두 왕실의 원찰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고찰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은 터에서 왕실 사람들이 불공을 드리게 하려다 보니 지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가람배치 원리와는 맞지 않지만, 불교 사찰도 근대의 물결 앞에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양 흥국사 대방은 등록문화재 제592호이고, 남양주 흥국사 대방은 등록문화재 제471호, 서울 흥천사 대방은 등록문화재 제583호다.
엄귀비는 고양 흥국사 대방에서 ‘만일 기도’를 올리기 시작할 정도로 간절했지만, 상황은 계속 나빠졌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삼아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에게 왕위를 잇게 했다. 엄귀비의 아들 영친왕은 허울이나마 왕위 승계 서열 1위인 왕세제(王世弟)에 책봉되었으나,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엄귀비는 강제병탄 이듬해인 1911년 숨을 거뒀고, 영친왕은 해방이 되고도 귀국하지 못하다가 1963년 돌아왔으나 곧 세상을 떴다. 대한제국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한반도의 근대는 황실도, 백성들도 “나무아미타불”을 수없이 읊조리면서 살아야 하는 고된 시간이었다.
고양 흥국사 대방은 1910년대에 지어진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용도가 바뀌면서 내부 구조가 변경되었다. 그러나 근대 시기 불교 건축의 변화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고양 흥국사는 크지 않은 절이지만, 중요한 불교 문화재도 여러 점 전해지는 사찰이다. 아미타여래좌상, 약사전은 경기도 문화재자료이고, 대방에 있는 극락구품도, 나한전의 괘불은 경기도 유형문화재다. 나한전도 향토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나한전 뒤 노고산 입구에 위치한 흥국사 명상의 공간은 북한산 백운대·노적봉·의상대를 한눈에 조망하면서, 정토를 간절히 희구한 근대 한국인들의 마음을 되새겨보기에 좋은 장소다.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 ‘큰 법당’은 1970년 지어졌다. 봉선사가 고려 광종 때인 서기 969년 창건된 운악사(雲岳寺)로부터 비롯된 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밀레니엄(1,000년)의 세월이 흐른 뒤다. 운악사가 봉선사라는 이름을 얻은 조선 예종 1년(1469년)부터 따져도 500년이다. 봉선사는 선왕 세조의 능인 광릉을 받들어 모시기 위해 중창되었다. 천년 고찰의 중심 법당이 1970년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봉선사는 여러 차례 전쟁의 화를 입었다. 임진왜란 때도 불탔고, 병자호란 때도 전화를 피하지 못했다. 조선 시대 교종(敎宗)의 우두머리 절인 봉선사는 난리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지어지곤 했다. 봉선사는 한국전쟁도 비껴가지 못하고 소실되었는데, 1960년대부터 복원되기 시작했다. 봉선사 복원을 이끈 인물은 운허 용하(雲虛 龍夏 · 1892~1980) 스님이다. 법호가 운허이고, 법명이 용하인 스님은 1959년 봉은사 주지로 부임했다.
봉선사 ‘큰 법당’은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다. 겉모습은 팔작지붕에 다포(多包·기둥과 보 사이를 여러 부재로 짜 맞추어 짓는 방식) 형식의 목조 법당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콘크리트로 다포까지 만들었다. 전통사찰처럼 단청을 입혔으므로 얼핏 보아서는 영락없는 전통 목조 건물이다. 콘크리트로 다포 형식을 정교하게 모사하기 위해, 건축 초기부터 목수들이 여럿 참여했다고 한다.
산업화 바람이 한창이던 1960년대 말 전통 문화재도 철근 콘크리트로 보수 복원하는 방식이 연구되었다. 1968년 복원되었던 광화문은 철근 콘크리트로 재현한 문화재였다. 봉선사 큰 법당도 같은 맥락에서 시도되었다. 한국의 사찰 건물 가운데 봉선사 큰 법당은 콘크리트로 지어진 최초의 건물로 꼽힌다. 광화문은 훗날 헐렸으므로, 봉선사 큰 법당은 당시의 성공과 실패를 알려주는 사료적 가치가 있다.
일반적으로 석가여래를 모신 가람의 전각을 대웅전이라 부른다. 그러나 봉선사 큰 법당도 석가모니불이 주불이지만, ‘큰 법당’이라는 풀어 옮긴 이름이 붙었다. 운허 스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다. 운허 스님은 청년 시절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다가 불가에 귀의했고, 평생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역경 사업에 매진했다. ‘큰 법당’이라는 현판 글씨는 서예가 운봉 금인석(雲峰 琴仁錫)이 썼다.
운허 스님은 19세에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21세에 일경에 쫓겨 강원도 깊은 산중의 절에 은신했다가 출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대의 학승들에게 배운 운허 스님은 1964년 동국대학교 역경원장이 되었다. 운허 스님은 열반에 들 때까지 한글 대장경 사업의 기초를 닦았다. 봉선사 큰 법당 내부 3면에는 한글로 옮겨진 화엄경 동판 125장과 한문 법화경 동판 227매가 붙어 있다. 봉선사 큰 법당의 주련(柱聯·기둥에 붙여둔 문장)도 한글 문장이다.
소실되기 전 봉선사의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이었다고 한다. 복원된 큰 법당은 정면 규모가 3칸으로 줄었다. 봉선사 큰 법당의 기단 부분이나 앞의 층계 그리고 뒤편의 화계(花階·단을 쌓아 꽃을 심어 가꾼 꽃 계단)는 조선 시대 것이어서, 봉선사 큰 법당은 천년 고찰의 전통과 현대의 기법이 공존하는 사찰로 평가된다. 봉선사 큰 법당은 2012년 등록문화재 제522호로 지정되었다. 봉선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25교구 본사로서 고양을 제외한 한강 이북 10개 시·군의 말사를 관장한다. 봉선사가 위치한 광릉 숲은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이다.
봉선사는 유서 깊은 고찰이어서, 봉선사 대종은 보물 제397호다. 조선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 씨의 명으로 제작된 봉선사 대종은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조선 시대 종 가운데 걸작으로 꼽힌다. “종소리 사바세계에 울려 퍼지매 참답고 진실한 교법이 일어나느니.” 강희맹(姜希孟)이 지었다는 종의 명문(銘文) 첫 구절이다. 조선 시대 교종의 우두머리 사찰답다. 봉선사는 조선 정조 때는 전국의 사찰을 총괄하는 5규정소 가운데 하나로서, 함경도의 사찰을 관장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김성숙(金星淑) 등 봉선사 승려가 중심이 되어 1919년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읍 부평리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터키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하기아 소피아)는 현재 박물관이다. 터키어로 ‘성스러운 지혜’를 뜻하는 ‘아야 소피아’는 원래 그리스 정교회의 대성당으로 지어졌다. 약 900년간 정교회의 지혜를 간직해온 성당은 비잔티움(이스탄불)의 주인이 바뀌면서 잠시(50여 년) 로마 가톨릭 성당이 되었다가, 15세기 중반부터는 이슬람 사원으로 변모한다. 480년가량 무슬림의 성스러운 공간 모스크였던 ‘아야 소피아’는 오스만터키 제국의 멸망 이후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변모했다. 대성당의 운명은 기구한 것일까, 신비로운 것일까.
전라남도 목포시 무안동 오거리문화센터는 원래 일본 불교의 포교당으로 지어졌다. 해방 후 10여 년간 한국 불교의 사찰로 변했다가 1957년 소유권이 교회로 이전되었다. 예불이 이뤄지던 장소에서 찬송가가 울려 퍼지게 된 것이다. 한반도에 근대가 도래한 이래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감안할 때 경이로운 일이라 할만하다. 반세기 동안 목포중앙교회로 불리던 건물은 교회가 2007년 이전한 후 우여곡절을 거쳐 문화센터로 다시 태어났다.
일본 정토진종이 목포에 동본원사(東本願寺)의 지원(支院)을 설치한 해는 1898년이다. 목포가 개항 당한지 1년 뒤다. 정토진종 뿐만 아니라 일본 불교의 주요 종단은 1877년부터 앞다퉈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일본 불교는 조선 침략의 정신적 기둥 역할을 자임했다. 일본 불교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융합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스스로 떠맡았다. 일본 교토의 동본원사가 목포에 지원을 둔 이유도 명백했다.
동본원사 목포지원은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에 자리 잡았다. 목포지원은 곧바로 목포심상고등소학교를 열었다. 일본인 자녀 교육기관인 목포심상소학교가 지금의 유달초등학교의 시작이다. 목포지원은 1905년 현 위치(당시 지번으로는 무안통 4정목)에 법당을 지었다. 1907년 목포지원은 목포별원으로 한 등급 높아졌다. 원래 법당은 일본 전통 사찰과 마찬가지로 목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목포별원은 1930년대 초 목조 법당을 현존 형태의 석조 건물로 개축했다.
건물 본체의 높이가 5.5m인데, 지붕은 7m나 된다. 한눈에 일본 사찰이라고 직감할 수 있다. 화강암을 쌓아 올린 석조 건물인데도, 장식은 일본 목조 사찰의 세부를 살리려고 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채로운 동본원사 목포별원 건물은 해방이 되자 한국 불교의 정광사(淨光寺)가 되었다.
정광사는 해방 직후 무엇보다도 시급한 ‘교육 불사’가 이뤄지는 중심 역할을 했다. 호남의 5대 사찰(백양사, 대흥사, 화엄사, 송광사, 선암사)가 출자하여 정광중학교가 설립됐다. 정광중학교는 정광사 자리에 있다가 1948년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으로 옮겨갔다. 1950년대 중반까지 정광사는 목포 불교의 중심 공간으로 여겨졌다. 목포역에서 불과 300m 거리에 있는 정광사는 큰스님들이 목포에 들렀을 때 설법을 하는 장소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1957년 정광사가 돌연 목포중앙교회에 건물을 넘겼다는 사실이다. 불교 사찰을 인수해 기독교 예배 처소로 삼은 사례는 희귀하다. 어떤 연유로 목포중앙교회가 건물과 공간을 인수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목포중앙교회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가 1923년 설립한 교회로 1934년 죽동에 예배당을 세웠다. 1957년 불교 사찰, 그것도 일본식 불교 사찰을 매입한 목포중앙교회는 법당을 교회로 단장했다. 법당으로 들어가는 일본식 박공(가라하후)에 십자가를 걸었다. 목포중앙교회는 2008년 옥암동으로 신축 이전하기까지 정광사, 동본원사 목포별원 법당을 교회로 사용했다.
예전 사진을 보면 일본식 박공에 목포중앙교회 시절 걸었던 성경 문구가 선명하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구약성서 이사야서 56장 7절의 일부다. 불상 앞에서 합장하고 올리던 간구도 넓은 의미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섬기는 신은 엄연히 다르나, 같은 공간에서 한 세기 가까이 엎드려 기도한 불자나 기독교 신자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문화재청은 2007년 구 동본원사 목포 별원을 등록문화재 340호로 지정했다.
목포중앙교회 시절 이 공간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인사들이 모이던 장소이기도 했다. 교육관으로 쓰인 지하 1층에서 목포 지역 목회자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인물들이 뜻을 모으고, 대응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유신 시절부터 1980년 5·18 민주항쟁, 1987년 6월 항쟁까지 중요한 결정들이 이곳에서 이뤄졌다는 기념표지석이 마당에 서 있다. 2008년 교회가 옮겨 가자 잠시 철거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으나 손질하여 문화센터로 쓰기로 했다. 2010년 오거리문화센터가 된 공간에서는 이제 독경과 설법, 찬송가와 설교 대신 문화공연과 전시회가 열린다.
일본 불교의 조선 포교는 1877년 부산 개항 때부터 공식화되었다. 서세동점의 시기에 서양의 기독교가 본의든 아니든 제국주의 팽창의 첨병이었다면, 일본 불교는 조선과 대륙 침략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정신적 기둥 역할을 했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종군 승려들을 한반도에 데려왔고, 1904년 러일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을미사변 당시 궁궐에 난입해 황후를 살해한 일당 가운데도 승려(다케다 한시)가 있었다. 1932년 조선총독부는 서울 장충단 옆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라는 절을 버젓이 짓기도 했다. 일본 불교는 식민지 조선 불교 타락의 빌미도 제공했다.
1899년 일본이 군산을 개항시키고, 갈대밭 자리에 새로운 시가지를 조성한 뒤인 1909년 우치다 붓칸이라는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승려가 군산에 금강선사라는 포교당을 차렸다. 우치다는 이미 70대 후반에 접어든 노승이었는데, 그가 왜 군산에 와서 절을 시작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당시 조선에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출한 정토종, 조동종, 일련종 등 일본 종단이 한반도 곳곳에 포교당, 별원이라는 이름의 절을 늘려가고 있었다. 군산에도 이미 3개의 절이 있었다.
우치다는 군산에 사는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아 절을 빠르게 성장시켰다. 1913년 우치다는 군산시 금광동 현재의 동국사 자리에 금강사(錦江寺)라는 절을 공식적으로 허가받아 지었다. 우치다가 선의로 군산 거주 일본인 포교를 위해 절을 지었다 하더라도, 금강사는 호남평야에서 조선 농민을 수탈해 부를 축적한 일본인 부호들로부터 거액의 시주를 받았다. 절터 역시 일본인 거부가 기부한 땅이다. 금강사는 자신들의 나라 일본과 자국민들의 무운과 번영을 빌었다. 금강사 납골당에는 일본인들의 유골과 전사한 일본군의 위패도 있었다.
금강사는 1919년 일본 교토에서 만든 종을 들여와 종각을 지었다. 종도 일본식이어서 한국의 사찰에 있는 종과는 달랐다. 한국 종은 종 자체로부터 소리가 울려 나오는 모양인데 비해, 금강사 종은 매달린 종 아래 항아리를 묻어 울림통 역할을 하도록 했다. 금강사 본당은 1932년 다시 지어졌는데, 한눈에 보아도 일본 사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붕의 기울기(물매)가 가파르며, 본당과 요사채가 붙어 있는 구조다. 관음상을 새긴 석물(石物)도 밀교의 영향이 짙은 일본식이고, 한국의 사찰 건축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공포(拱抱)도, 색색 단청도 없다. 금강사의 목재는 일본 삼나무이고, 대들보만 백두산에서 가져온 금강송을 썼다고 전해진다.
금강사는 해방 후 전남 종무원장 신동오 스님이 인수해 본당(대웅전) 뒤에 붙어 있던 납골당을 해체했다. 일본인들의 유골은 바다에 뿌려졌다. 절을 이어받은 전북 종무원장 김남곡 스님은 절 이름을 아예 금강사에서 동국사로 바꾸었다. 패망 시 황망히 돌아갔던 일본인 후손들은 1965년 동국사로 찾아와 사라진 유골 대신 절 마당의 흙을 퍼가기도 했다 한다. 일본군 위패는 동국사 측에서 다른 장소로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 초 일본식 기와를 걷어내고 시멘트 기와를 올렸다. 그 무렵 어느 스님이 대웅전 보산개(보배로 장식한 우산 모양의 휘장) 귀퉁이의 금도금 용머리 장식을 도끼로 부숴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절 입구 대리석에 새겨진 ‘소화’라는 일본 연호도 파낸 흔적이 있다.
동국사에는 한국의 보물도 있다. 해방 후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사 대장전에 있던 소조여래삼존상을 동국사로 옮겨와 대웅전 부처님으로 모셔두었는데, 불상에서 복장유물(腹藏遺物)이 출토된 것이다. 복장유물의 기록을 통해 불상이 조선시대 중기인 1650년대 응매(應梅)라는 조각승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함께 나온 전적(典籍)들도 소중한 유물로 판명되었다. 동국사 소조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은 2011년 보물 제1718호로 지정되었다.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릴 당시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 대웅전도 철거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동국사는 선운사의 말사로서 엄연히 조계종 재산이라 헐리는 일은 면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전국에 세워진 일본 불교 사찰 500여 곳 가운데 지금도 사찰로 사용되는 절은 전라북도 군산시 동국사와 대구광역시 동구 삼덕동의 관음사뿐이다. 전라남도 목포시의 옛 동본원사 목포별원은 해방 후 교회가 되었다가 현재는 문화센터로 쓰이고, 경상북도 경주시의 서경사도 용도가 여러 차례 변경되어 지금은 사찰이 아니다. 따라서 군산 동국사는 일본 불교와 한국 불교의 악연과 인연을 모두 간직한 희귀한 사례다. 동국사 대웅전은 2003년 등록문화재 64호로 지정되었다.
동국사 종각 옆에는 의미 있는 건조물이 더 있다. 일본 조동종의 참회문을 담은 비문과 평화의 소녀상이다. 일본 조동종은 1993년 과거 침략에 앞장섰던 조동종의 과오를 인정하는 ‘참사문’을 발표했다. “우리 조동종은……당시의 정치권력이 자행한 아시아 지배 야욕에 가담하거나 영합하여 수많은 아시아인의 인권을 침해해 왔다.” “우리는 맹세한다. 두 번 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 동국사에 2012년 세워진 비석은 참사문을 발췌하여 새겼다. 건립비용은 이치노헤 쇼코 스님의 주도로 일본 불교계가 모금했다. 평화의 소녀상은 전국에서 11번째, 전라북도에서는 처음으로 2015년 세워졌다. 소녀상 앞에는 검은색 타일로 만든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송정신사는 광산구 소촌동 산 4-1에 있다. 원래 이 자리는 대정 11년(1922년)에 설립된 신명신사(神明神祠)가 있었던 장소인데 1940년 8월 28일 대총여평(大塚輿平) 외 53인이 승격을 요청하여 신명신사가 폐지되고 송정신사로의 승격을 승인받았다. 1941년 4월 17일 설립된 송정신사에서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배향하고 매년 10월 11일 예제(例祭)를 지냈다. 당시 송정신사의 경내 총 부지 규모는 10,878평에 이르렀으며, 참배대상 가구는 2,545가구, 인구는 12,565명이었다.
현재 송정신사는 금선사로 활용되고 있다. 금선사는 송정공원의 북쪽 언덕에 있으며, 특별한 출입문이나 경계 담장 없이 남향의 대웅전과 동향의 요사채가 자리하고 있다. 금선사의 건립과정을 보면 만암 송종헌 스님이 1946년에 세운 정광학원에서 일부 학생 스님들이 기존의 일본 신사건물을 불교 도량으로 사용하면서 시작된 사찰이다. 1948년 정광학원과 지방유지들이 건물을 중수하여 금선사의 교당을 창립하였다. 현재 건물은 정광학원(淨光學院), 부지는 산림청의 소유이다. 신사 본채는 대웅전으로, 신사 바깥채는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다. 전체 외형은 일본 목조양식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내부만 사찰 용도로 변용하였고, 2004년에 전체적으로 지붕 개량을 하였다.
금선사 대웅전의 건축 형식은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에 7량의 일자형 솟을지붕집이다. 내부는 중앙렬에 기둥을 세워 통간으로 처리하였고, 전면 중앙부 3칸은 2층 높이로 지붕을 높게 하여 통층으로 처리하였다. 후벽부에 불단을 두었으며, 주전불로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반자로 꾸몄고, 중앙 출입구에는 커다란 일본식 미세기 격자문을 두었다. 반면 좌우단부 각각의 2칸은 중앙부보다 지붕을 낮게 두고 종이반자로 꾸몄다. 그리고 정면과 측면에는 격자살창을 두었다.
콘크리트 기단 위에 사각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사이에 수평 인방재를 끼워 창호와 서까래를 받고 있다. 기둥 위에는 장식 없이 단순히 처리하였고, 서까래는 홑처마에 각재를 병렬하여 배치하고 있다. 측면의 전열 칸에는 쌍기둥 형식으로 기둥을 넣어 보강하고 있다. 지붕은 막새를 둔 개량 한식골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이다.
금선사는 일제 강점기에 송정권에 세워진 신흥사찰로서 순수 일본식 건축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근대적 문화유산으로 평가되며 민족사적 교훈을 시사하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2020년 광주광역시에서 안내문을 설치하였는데, 안내문에 의하면 ‘송정신사는 1941년에 세워졌으며, 신사에는 신전, 배전, 신찬소 등 4개 건물이 있었다. 현재 신전(신사의 신를 모시는 전각)과 신찬소(신령에게 올릴 음식을 준비하는 장소)는 없어지고, 배전(기도하고 참배하는 장소)과 사무소만 남아있다. 한국 내에 남아있는 신사 가운데 유일하게 목조로 만들어진 건물이다.’라고 한다.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 석등롱 역시 신사의 부속물이고, 금선사 입구의 나무아미타불탑도 원래는 일제의 황국신민서사탑이었다. 정광학원은 금선사 일대를 일제강점기와 관련한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설명도 추가되어 있다.
금선사(송정신사)가 있는 송정공원에는 송정도서관을 비롯하여 궁도장, 게이트볼 경기장, 현충탑, 용아 박용철 시비, 국창 임방울 기념비, 의병대장 금제 이기손 의적비, 나무아비타불탑, 항일노동운동을 주도했던 박인오 송정노동조합장의 기념비 등이 있다.
석비 가운데 박인오 노동조합장의 항일 노동운동의 비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濟我衆生, 卓彼先覺 우리나라 많은 사람을 구제하려거든 상대의 뛰어남을 먼저 알아야 한다
導者以化 愛之以德 고침으로서 앞장을 서고 덕으로서 공중을 사랑하니
居者安樂 病者得甦 살기에는 편안하고 병든사람 다시 살아났네
公歸十我 頌登萬口 바른일 편이되어 십년 칭송의 소리 여러 사람 입에 올랐다네"
비문에 새겨진 내용은 일제의 눈치를 살펴 예각을 감추고 있어 격화소양(隔靴搔癢)처럼 미흡하고 답답하지만 당시 송정지역에 뿌리 깊은 항일노동운동의 일면목을 살필 수 있다.
송정지역은 1913년 호남선의 개통으로 일본인들이 몰려들었고, 송정리에만 일본인들 소유의 점포가 100여개 이상이라, 조선인 노동자들의 저항심이 커져갔다. 당시 송정리에 있었던 일본인 기업체로는 박하공장, 운수업체 마루보시, 동양척식회사 등이 있었다. 송정노동조합은 일제가 기승을 부리던 초기에 결성되었으며 전국적으로 독보적인 존재였다. 한번씩 조선 노동자의 쟁의가 발생하면 조업을 중단하고 쉬어야 했으며, 경찰도 일본인들도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송정노동조합은 일본 기업인들의 횡포에 당당하게 맞서 항일노동운동의 선봉에 선 조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