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릉역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에 있는 교외선 철도역이다. 1961년에 처음 역사가 세워진 이후, 같은 해 7월 배치간이역(역장 없이 역무원만 배치된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해, 1964년에 보통역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교외선이 고양시에서 서울로 나가는 유일한 철도 교통수단이었던 때에는 하루에 수천 명의 승객이 이용할 정도였다.
수도권 전철 1호선과 중앙선이 개통되고 점차 고양시와 서울을 잇는 다른 교통수단들이 발달하면서 승객수가 감소함에 따라 1984년 무배치간이역(역무원도 없는 무인역)으로 격하되었다가, 2004년에는 여객영업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일부 포털사이트 검색에는 ‘폐역’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현재까지 드물게나마 인근 군부대나 코레일의 화물 수송 열차가 지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폐역은 아니다.
원릉역이라고 하면 흔히 근처에 ‘원릉’이라는 왕릉이 있다고 오해하기 쉬운데, ‘원당’과 ‘서삼릉’의 한 글자씩을 합쳐서 만든 역명이다. 조선 제21대 왕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元陵)’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원릉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역장님이 계셨던 곳이기도 하다. 정식 역장님은 아니고, 이용 승객이 감소한 원릉역을 폐쇄하는 대신 대매소(승차권 위탁발매소) 운영자셨던 강소득 할머니께 역사 관리를 맡긴 것이었다. 강소득 역장님은 칠순이 다 되신 나이에도 새벽 6시 34분의 첫차부터 마지막 열차의 운행이 끝날 때까지 열차와의 수신호, 매표, 집표, 청소 일까지 혼자서 다 해내며 2004년 여객영업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원당역을 지키셨다.
원당역은 2011년 개봉된 영화 「파수꾼」의 촬영장소로 알려져 잠시 유명해지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원릉역은 방황하는 사춘기 소년들이 친구들과 만나는, 비밀스러우면서도 쓸쓸한 공간으로 그려져, 한동안 영화팬들이 방문해 인증샷을 찍어 가기도 했다. 최근까지 원릉역은 역을 횡단할 수 없게 철책이 설치되어 있어 인근 주민들과 방문객들이 불편을 겪어야 했다. 특히 인근에 있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통학로가 철길로 막혀 100미터 이상의 거리를 돌아가야 하는 등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고양시는 2014년 원릉역 지하보도 공사를 시작했지만, 과거 통행로로 이용하던 사유지의 토지주와 협의하지 않고 보행로를 잘못 설치하는 바람에 토지주가 보상을 요구하며 2m 높이의 담장을 설치하는 등 문제가 발생했다. 다행히 토지주와의 원만한 협의가 이루어졌고 지금은 지하보도가 완성되어 주민들의 불편은 해소되었다. 지하보도의 벽에는 소박한 갤러리도 만들어 원릉역의 역사와 특징을 소개하고 있다.
원릉역 지하보도를 나가면 아파트단지의 산책로가 이어지고, 이 길은 성사체육공원까지 연결된다. 예전처럼 하루 수천 명의 승객이 오가는 역은 아니지만, 인근 주민들이 편하게 산책하고 운동하는 코스로 이용되고 사랑받고 있다. 고양시는 앞으로 원릉역 지하보도 주변을 도심공원으로 조성하고 주민들 소통 및 공동체 공간으로 제공하며 지속적인 개발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원주시 간현리는 원주시 지정면에 있다. 간현은 원래 간재라고 불렀고 ‘재’가 ‘현’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온다. 간현이란 이름이 숯돌고개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도 하고, 크다는 의미의 큰 골짜기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어떤 말이 정설인지 모르지만, 큰 강을 끼고 있고 골짜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간현이기에 얼추 맞는 이야기들인 셈이다.
간현유원지는 원주시 지정면 일대를 흐르는 원주천과 삼산천이 만나는 간현 협곡에 위치하고 있으며 협곡 동쪽으로 백사장을 갖추고 있다. 1980년대 후반에 강촌과 대성리 쪽으로 대학생들이 동아리 모임이나 MT 장소를 옮겨가기 전까지 원주 간현유원지는 1970년~1980년대 대학생들의 MT 장소로 널리 알려졌던 곳이다.
서울 청량리 역에서 중앙선 기차를 타고 간현역에 내리면 많이 걷지 않고 바로 섬강이 보인다. 간현유원지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청춘의 열정을 불태우며 모닥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 먹으며 낭만을 즐겼다. 2011년 중앙선 간현역이 폐쇄되면서 간현역에는 레일바이크가 들어섰고 지금은 넓은 주차장과 안내센터가 자리한 유원지가 유유히 흐르는 섬강과 더불어 찾아오는 이들을 반겨주고 있다.
간현유원지와 레일바이크, 소금산 출렁다리 등의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어서 지정면 인근의 마을 주민들은 관광자원과 더불어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원주레일바이크’는 중앙선 역인 ‘간현역’이 있던 장소에 설치되었다. ‘간현역’이 2011년 폐역되면서 2013년에 간현역은 ‘원주레일바이크’로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간현역에서 판대역까지의 6.5km 구간에 레일바이크가 운영되고 있다. 간현유원지가 있는 섬강은 예나 지금이나 여름철에 더 많은 피서객들을 맞이하고 있고 몇 년 전 개장된 출렁다리와 레일바이크 덕분에 평일에도 수천의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1980년대 간현유원지 인근에서 장사를 했던 김상순 할머니는 당시에도 간현유원지에 사람이 많이 찾아왔었다고 전한다.
1980년대 초반에 간현이 관광지로 개발되었을 때 유원지 근처에서 장사를 했어요. 그때도 여름이면 기차를 타고 찾아오는 관광객이 많았어. 그때는 여름에만 유독 사람이 많이들 찾아왔는데 그 당시에는 근처에 물건을 파는 곳이 없으니까 물건을 떼러 가려면 원주로 나가야했어. 물이 낮을 때 물건 들이기가 수월하니까 봄에 물건을 많이 떼 왔지.
김상순 할머니의 말을 들어보면 간현유원지는 그때도 찾는 이들로 분주한 공간이었다. 어느 해인가 큰 비와 함께 수해가 나서 섬강이 넘친 적이 있고 근처에 살고 있던 김 할머니네 집도 수해로 피해를 입었다. 강가에 산다는 것이 낭만적이고 좋은 부분도 많지만 한번씩 물이 범람하는 수해를 겪으면 그 피해가 이만저만하지 않다.
1980년대 당시 간현유원지에 있는 출렁다리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출렁다리를 건너 오형제 바위에 갈 수 있었고 강에 놓여있던 섶 다리는 가는 골 마을에서 개미둥지 마을을 이어주는 교량역할을 했다. 지금은 섶 다리가 놓여졌던 곳에 잠수교가 설치되었다. 섬강을 끼고 있는 간현유원지는 어른부터 아이까지 남녀노소가 찾는 곳이었기에 봄이면 인근 지정초등학교에서 봄 소풍을 나오는 학생들의 목소리로 간현유원지 인근이 시끌시끌했다.
간현관광지 내 소금산 등산로 입구에서 조금 올라서면 소금산 출렁다리를 건널 수 있다. 바닥을 내려다보면 아찔하다. 출렁다리 밑으로 보이는 절경을 감상하며 주변 정취에 취해서 다리를 건넌다. 출렁다리는 섬강에서 위로 100m 상공에 설치되어 있어서 하늘 위를 걷는 것 같은 스릴을 느낄 수 있다. 소금산 출렁다리가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2019~2020년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된 이유를 출렁다리를 건너본 사람은 누구나 알게 될 것이다. 간현유원지가 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국민관광지가 되고 인근에서 살아왔던 주민들이 나이 들어가는 긴 세월동안에도 섬강은 맑은 빛으로 유유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은 강원도 영월군 중동면 석항은 폐광이 된 후로는 점차 주민들이 줄어들기 시작하여 이제는 주민들이 500여 명이 채 남지 않은 자그마한 마을이다.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인 석항역은 영월군 중동면에 있는 태백선의 기차역으로 1957년 보통역으로 출발하여 과거엔 29만 명이 넘는 유동인구가 북적이던 장소였다. 하지만 1989년 석탄산업의 쇠퇴로 인하여 탄광들이 모두 문을 닫게 되고 2009년에는 여객 취급마저 중단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히고 있었다. 가끔 덜컹거리며 그 곁을 지나가는 화물열차 소리만이 활기 넘치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던 외로운 지역이 바로 석항의 모습이었다.
영월 석항트레인스테이. 처음 이름만 들어서는 어떠한 곳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말을 하나씩 풀어보면 쉽고 간단하며 흥미로운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Train Stay. 석항역 옆 ‘열차’를 개조하여 ‘스테이’ 즉 사람이 ‘머물 수 있게 만든 장소’를 의미한다. 석항트레인스테이는 2013년 영월군이 폐열차 9량을 이용해 만들었다.
낙후된 폐광지역의 주민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 대안을 구상한 공간인 석항트레인스테이는 “과거와 현재,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고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편안하고 특별한 휴식을 전하고 싶다.”고 한다. 석항 지역의 주민들이 시작했지만 2018년부터는 사회적기업 ㈜오요리아시아가 함께 운영한다. “주민 자립이 먼저”라고 외치는 ㈜오요리아시아의 이지혜 대표는 운영을 도우며, 주민들의 직업 훈련이나 역량 강화를 통한 일자리를 만들어왔고, 지금도 지역주민들의 경제적인 자립을 돕고 있다. ㈜오요리아시아의 도움으로 올 연말 정도에는 주민들이 마을기업이나 소셜 벤처를 만들 수 있지 않겠냐고 내다봤다.
석항트레인스테이는 각 지역에서 추억을 만들고자 방문하는 다양한 손님들에게 행복한 시간을 선사하고 있다. 단체 방문객을 위해서는 넓은 광장이 중앙에 준비되어 있고, 간이역 식당에서는 석항연탄치킨, 연탄삼겹살 같은 특색있는 음식들을 판매한다. 식당 간판 옆에는 “옛 간이역을 떠올리며 우리들의 기차여행은 새롭게 시작된다”고 적혀 있다. 숙소로 사용할 수 있는 객차는 4인실과 6인실, 도미토리로 나뉘어 있으며, 편하게 쉴 수 있는 온돌형 객실과 도미토리형 침대 객실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되어있다. 객차 안은 냉·난방 조절장치는 물론 욕실, 냉장고, 이불장, 벽걸이 TV가 갖춰져 있어 손님들이 불편함 없이 이용할 수 있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 끝에 펼쳐진 라운지와 테라스는 카페와 책방으로 꾸며져 있어 특별한 추억을 만들고 사진을 찍기엔 제격이다. 삶의 고단함으로 지친 현대인들에게 힐링을 선사할 수 있는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이 공간에서는 시기별로 애프터눈 티트레인 이벤트나 패밀리 쿠킹클래스, 친환경 블록 화분 만들기, 기차 할로윈 파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석항트레인스테이와 그곳에 자리 잡은 모든 객차는 기존에 운행했던 열차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이용하는 손님들에게 이색적인 분위기와 함께 ‘편하게 누워 장시간의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객실 열차가 이런 느낌이 아닐까’하는 특별한 여행의 설렘을 안겨준다. 외롭고 쓸쓸하던 과거와는 달리 멋지게 탈바꿈한 열차 내부의 모습을 하나씩 살피며 감탄하고 있으면 저 멀리서 하얀 연기와 함께 아스라이 기차의 기적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수원역에서 오산 방향으로 전철 길을 따라가다 보면 두 개의 급수탑을 만난다. 두 개가 굴뚝모양의 원통형 급수탑이다. 키가 큰 회색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것과 그 옆에 낮은 급수탑은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아담한 모양새이다. 출근길 늘 지나는 길을 무심코 지나치다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문득 발견할 때가 있다.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자꾸만 보니 사랑스럽다.
수원역 급수탑은 1924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제작되었다. 과거 수원역에는 일제강점기 개통한 수인선, 수여선 두 개의 협궤열차의 시종착역이었다. 이때 사용되었던 급수탑은 증기기관차 운행에 필요한 물을 저장했다가 물을 공급하는 시설이다. 두 협궤열차가 폐선되고 난 후 급수탑은 수원역 구내에 남아있었다.
2년 전 구청에서 보수공사를 진행해서 철로 옆 담을 허물어 지나는 사람들이 급수탑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기관사들이 목욕하던 목욕탕 등 남아있던 다른 부속시설들이 허물어져 이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세월은 지났고 바삐 달려와 수증기를 내뿜으며 숨을 고르던 열차의 모습은 이제 없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길을 따라 하루 하루를 바삐 시작하고 있다. 열차가 다니지 않는 급수탑의 시간은 이제 세월이 빗겨간 듯 느긋하게 흐르고 있다.
식민지 조선을 수탈하기 위한 일본에 의해 건설되어 표준궤도와 비교하면 절반에 불과했던 협궤열차는 인천에서 출발해 시흥, 안산, 화성, 시흥을 거쳐 수원까지 운행되었던 수인선과 수원에서 출발해 용인, 이천, 여주까지 운행되었던 수여선이다.
빵빵거리는 꼬마기차의 기적 소리가 울리면 역마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무거운 짐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들고 열차에 올랐다. 인천의 소금과 젓갈이 그렇게 내륙으로 들어갔고 여주, 이천 등지의 쌀과 채소들이 철도를 타고 다른 마을로 향했다. 학생들의 등하교시간에 서로 마주 보고 앉으면 무릎이 닿을 정도로 좁았던 열차에는 고단한 삶을 살던 젓갈 장수의 비린내가 풍겼고 소래에 김장젓갈을 사러가는 주부들과 인천 송도유원지로 여주 신륵사로 소풍가는 젊은 연인들과 학생들로 가득했다. 철길은 동네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신나는 놀이터였다. 서민들의 애환을 가득 담은 채 흔들흔들 달려가던 시속 20Km의 협궤열차, 지금은 비록 사라졌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있다.
지난날 내 기억에 언저리를 만나게 되는 공간, 생각만으로도 어린 시절의 훈훈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 공간을 만났을 때의 따뜻한 마음을 여행은 그렇게 우리 삶을 위로한다. 많은 이들이 만나고 떠났던 철길위에 이제는 두개의 급수탑만 남아있다.
* 두 개의 급수탑 중 콘크리트로 된 급수탑(준철도기념물 제11-시-02-14호)은 경부선에 사용되었고 붉은 벽돌로 된 낮은 급수탑(준철도기념물 제11-시-02-15호)은 수인선, 수여선에 사용하던 급수탑이다.
수인선은 1937년 8월 영업을 개시하여 1995년 12월 31일 폐선하였고
수여선은 1930년 12월 1일 개통하여 1972년 4월 1일 폐선하였다.
철도가 놓이기 전 춘천에서 서울까지는 얼마나 걸렸을까. 조선시대 춘천사람들이 서울로 가려면 2박 3일을 걸어야 했다. 도로가 생기면서 8~10시간으로 단축이 됐고, 철도가 들어서면서 3시간으로 단축됐다. 교통의 발달은 삶의 변화도 가져왔다. 신문물과 물자를 실어 나르던 기차를 타고 사람들은 춘천을 벗어나 조금씩 다른 지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갔다. 경춘선은 삶도 변화시켰다. 경춘선은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사철(私鐵)이다. 춘천에 철도가 없다는 이유로 강원도청이 철원으로 옮겨질 위험에 처하자 춘천지역 유지 12명이 경춘 철도 주식회사를 만들어 오늘의 경춘선을 만들었다.
1939년 경춘선은 서울 성동역을 출발하여 고상전 정류소, 월곡 정류소, 연천역(현재 광운대역), 신공덕역 등 24개역으로 운행을 시작하였으며, 1971년 10월 5일 성동-성북 구간이 폐선 되고, 2010년 12월 복선전철화가 완료되면서 춘천-서울은 1시간 거리가 되었다. 복선전철이 생기기 전 청량리간 춘천의 경춘선은 9개의 일반역과 9개의 간이역이 있었다. 역마다 들르는 비둘기호라도 탔다면 시간의 압박은 있을지라도 작은 간이역의 정취를 한껏 느끼며 춘천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 키 작은 소나무 하나’만 덩그러니 있을 것 같은 폐역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김유정역은 우리나라 최초로 사람의 이름이 붙여진 특별한 역이다. 1939년 개통 당시 신남에 위치해 있어 신남역이었다. 하지만 <봄봄>, <동백꽃> 등 유머와 해학을 통해 실제 삶의 애잔함을 밀도 있게 그려냈던 소설가 김유정의 고향이자 그의 작품들 실제 배경이 되었던 실레마을을 기념하자는 지역민들의 뜻을 모아 2004년부터 김유정역으로 바뀌었다. 작은 시골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드라마 ‘간이역’을 통해서다. 1996년 제작된 드라마 ‘간이역’은 철도원 아버지와 가족의 사랑을 그린 홈드라마로 전국적 인기를 끌었다. 기와를 멋스럽게 올린 신 김유정역 왼편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경춘선 무궁화의 마지막 운행 객차였던 7160호 디젤 기관차가 서 있다. 카페와 관광안내소, VR체험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옛 역사는 한국 철도공사의 철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대성리, 청평역과 더불어 대학생들의 MT장소의 메카였던 강촌역. 피암터널에서 멈춰 서던 열차는 없고 아스팔트가 깔렸다. 반복되는 아치형의 피암터널은 강촌역의 랜드마크다. 사실 피암터널은 생긴지 30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전에는 선로 옆 절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고 한다. 몇 번의 낙석사고가 생기자 그제서야 만들어졌다고 한다. 강촌역은 그래피티가 많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피 끓는 젊은이들의 집합소였으니 그들의 아우성이 낙서로 표현된 것이라 짐작된다. 거기에다 철도공사에서 대놓고 그래피티를 그려 넣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밖에 경춘선 운행당시 사용되던 표지판 및 이정표들 또한 그대로 남아 있다.
백양리역은 철로 상·하행선 한가운데 역사가 들어서 있는 특이한 공간 배치로 포토존과 영화촬영 명소로 이름을 날렸다. 백양리는 ‘하얀 버들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봄철 강가에 버들꽃이 온통 하얗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경춘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역사 안에는 비둘기호가 다니던 시절의 추억사진이 남아 옛 추억을 더듬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철길을 다 걷어내지 않고 백양리역 일부에 남겨두었다. 반대편 춘천행 열차가 다니던 구간은 걷어내고 임시도로를 만들어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게끔 했다. 크고, 화려해진 신백양리역은 빠르게 사람들을 옮겨 싣고 지나간다.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잠깐의 여유를 갖고 싶다면 구 백양리역을 둘러보면 좋을 것 같다. 소박한 간이역에서 따뜻한 정겨움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경기도를 벗어나면서 제일 먼저 도착하는 간이역은 경강역이다. 경춘선이 복선화되기 전까지 강촌역과 가평역 사이 경강역과 백양리역은 지역민들을 위한 간이역이었다. 1939년 개통 당시 서천역이었지만 충남 서천역과의 혼동이 생길까 경기도와 강원도 앞글자를 따서 이름짓게 되었다고 한다. 경강역 하면 영화 ‘편지’에서 최진실과 박신양의 운명적 만남이 있던 곳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지금도 경강역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쓴 편지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고, 엽서를 써서 넣으면 6개월 뒤에나 받아볼 수 있는 느린 우체통이 있다. 현재 경강역은 폐선로를 활용한 레일바이크의 매표소로 활용되고 있다.
“덜커덩~ 덜커덩”
시간이 흐르면서 겉모습은 바뀌었지만 기차는 여전히 춘천과 서울을 오가며 사람들의 이야기와 삶을 부지런히 실어 나른다. 옛 선로와 역사는 흥미와 재미가 가득한 레일바이크로, 낭만과 추억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배웅하던, 이별과 만남이 이뤄지던, 왁자지껄 청춘들이 젊음을 뱉어내던 경춘선. 이제 옛 간이역에서 연인들은 선로를 거닐고,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쌓는다. 역사에 들러 사랑의 대화를 남기고, 둘만의 밀어를 나누기도 한다.
영화나 드라마, 사진에 등장하는 간이역은 여행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사람들이 붐비는 큰 기차역과 달리 고즈넉한 풍경과 텅빈 역사가 오히려 사람 마음을 술렁이게 하기 때문이다. 현재 전국에 남아 있는 간이역은 800개 남짓이다. 여러 곳이 폐쇄되거나 철거되어 사라져 가고 있다.
화본역 역시 그 중 하나로 경북 군위군 산성면에 있다. 이곳에는 중앙선 무궁화호 열차가 다니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설명보다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나왔던 곳이라고 하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재하(류준열 분)는 자기를 잊지 못해 시골까지 찾아온 전 여자친구를 이 군위역에서 떠나보낸다.
이 동네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잘 담아내 많은 영화팬들의 시선을 끌었다. 도시 생활에 상처 받고 고향을 찾은 혜원(김태리 분)이 넓은 들판 한가운데를 자전거로 가로지를 때 등장한 아름드리 버드나무는 수령 350년의 오래된 버드나무다.
2014년 네티즌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역에 선정된 화본역. 화본역에는 1938년 2월부터 기차가 다녔다. 지금은 하루에 총 여섯 번 열차가 멈춘다. 청량리, 강릉 방면의 상행이 3번, 동대구, 부산 방면의 하행이 3번이다. 정차하지 않고 통과하는 여객열차나 화물열차는 40여 회 정도 된다. 천 원짜리 승차권을 파는데, 철길로 나가는 입장권이다. 하지만 선로 위에서 사진을 찍거나 선로를 넘나들면 위험하다. 적발되면 철도안전법에 의해 과태료를 내야 하니 선로 위는 피해서 사진을 찍도록 하자. 쭉 뻗은 철로가 뒤로 보이는 배경으로 인생샷을 찍을 수 있다.
2011년에 ‘화본역 그린스테이션 사업’으로 재단장을 하면서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처음 건축됐던 일제 강점기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오래된 역의 낡은 느낌은 벗고, 철길과 급수탑, 오랜 나무들이 만드는 멋진 풍경에 따뜻한 색감으로 외관을 새로 도장했다. 이전에도 아름다운 역으로 손꼽히던 화본역은 영화 촬영 뒤 다시 주목을 받아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사진을 촬영하기 좋은 장소로 유명하다. 역 풍경을 보고 영화 촬영지에 가려고 일부러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늘고 있다.
실제 운행되던 열차를 개조해 만든 레일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역시 영화 촬영지인 레일카페 옆 역전상회에 들러 주전부리도 살 수 있다. 50여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작은 슈퍼에는 초등학교 시절 즐겨 사먹었던 아폴로, 쫀디기, 뽀빠이 같은 군것질거리가 있다.
역 광장에 있는 박해수의 시비에는 ‘화본역’이라는 시가 적혀 있다. 산성면 주민들은 시장을 보려면 이 기차를 타고 신녕시장과 영천시장에 가야 했다. 역을 배경으로 펼쳐진 주민들의 삶에는 영화보다 더 흥미롭고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이다.
화본역(시인 박해수)
녹물 든 급수탑
억새풀 고개 숙인 목덜미
눈물 포갠 기다림,
설렘은 흰 겨울 눈꽃에 젖네
박해수 시인의 시비 너머로 보이는 25m 높이의 우뚝 선 급수탑은 증기기관차가 다닌 증거다.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했다. 얼른 생각하기에 증기기관차는 엄청 오래된 근대 초기의 유물처럼 여겨지지만 1899년부터 1967년까지 증기기관차가 전국을 달렸다.
급수탑 내부에는 탑 상층 물탱크에 끌어올리는 용도와 저장한 물을 증기기관차에 공급하는 용도로 쓰이던 파이프관 두 개가 있다. 1950년대에 디젤기관차가 등장하자 증기기관차의 흔적인 이 급수탑은 거의 사용할 일이 없었다. 급수탑 내부에 보면 벽면에 그때 당시 인부들이 ‘석탄정돈 석탄절약’이라고 써놓은 글자가 선명하다. 전국적으로 수십여 개에 달하던 급수탑이 이제는 화본역을 포함해 몇 개 남지 않았다.
화본역은 화본마을의 중심에 있다. 역을 뒤로 하고 5분 정도 걸으면 학교가 있다. 1950년 개교해 2009년까지 졸업생을 배출한 산성중학교는 이제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 추억박물관이다. 나무 책상과 의자, 풍금, 초칠을 해서 닦던 교실 바닥이 옛 모습 그대로고, 현금 대신 엽전을 사용하여 추억 여행하기에 제격이다. 입장료는 이천 원이고 학교 운동장과 뒤뜰에 여러 먹거리, 놀거리 체험이 있다. 가족과 함께 방문했다면 이곳에서 추억을 공유하고 벽화가 그려진 화본마을 구석구석을 살피고 돌아오면 좋을 듯하다.
경기도 동두천시 연천군청과도 가까운 연천군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경원선 ‘연천역’은 올해 2019년 4월 1일부로 2년간 열차운행이 중지된 곳이다. 2021년 동두천역에서 연천역까지 20.8km 구간에 전철(지하철 1호선) 연장공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연천역을 오가는 열차의 운행이 멈추게 되면서 역사운영도 중지되고, 현재 연천역은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장소가 되어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문 닫힌 자그마한 매표소와 그 앞 벽에 붙어있는 열차 운행 시간표는 가을의 분위기와도 어우러져 멈춰진 시간에 대해 쓸쓸함을 자아내고 있지만, 열차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천을 찾아온 관광객 사이에선 꼭 방문할 장소로 여전히 주목받고 있는 곳이다.
연천역은 38선 북쪽에 있어 6·25 전쟁 전에는 북한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는 곳이었으며, 이곳에 있는 화물 홈은 오래 전에 북한이 6·25 전쟁을 준비하며 전쟁 물자를 위해 만든 장소였다고 한다. 2년간 기차가 운행되지 않게 되면서 이를 대체하기 위한 교통수단으로 백마고지역에서 동두천역까지 버스가 운행되기 시작하고, 그 결과 자연스레 사람의 발길이 적어진 연천역은 작고 오래된 기차역이지만 그 세월만큼의 역사와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역에서 바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저 멀리에 우뚝 솟은 커다란 구조물 하나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쭉 이어진 길을 따라 나아가면 연천역의 바로 옆에는 작은 소공원이 있다. 공원에는 경원선의 옛 모습을 비롯해 급수탑의 과거 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2개의 연천역 급수탑, 미카형 증기기관차의 모습이 보이며 지금의 열차들과는 다른 고풍스러움과 멋이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어 구경하는 이들에게도 활기를 느끼게 해준다.
이 바로 옆에서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이 바로 그 유명한 철도 문화재인 연천역 급수탑이다. 1950년대 디젤기관차가 등장하면서 증기기관차는 점차 그 역할을 잃고, 많은 급수탑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강원도 도계역의 급수탑, 추풍령역의 급수탑, 충남 연산역에 있는 급수탑 등 ‘연천역 급수탑’을 비롯해 남아있는 급수탑들 대부분이 과거에 경인선을 달리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었다. 다른 오랜 급수탑들과 함께 철도 역사를 이해하고 그 중요성을 인정받은 연천역 급수탑은 근대 교통사를 연구하는 주요유산으로서 2003년 1월, 우리나라 등록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된 귀중한 철도 문화재이다.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연천역 급수탑은 길게 뻗은 원통형으로 생겨 마치 등대나 굴뚝같다는 인상을 준다. 23m나 되는 높이를 자랑하는 급수탑의 안에는 출입구 반대편에 계기 조작판이 자리 잡고 있으며 급수관 3개와 기계장치가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둥그런 급수탑의 바로 앞에는 사각으로 된 건물이 한 채 있는데, 이것이 바로 6·25 전쟁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간직한 두 번째 급수탑이다. 콘크리트 구조물로 이루어진 급수탑을 가까이 다가가 살피면 네모나게 깎여 쌓인 벽돌 위로 깊게 파인 탄환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보인다. 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남기고 있는 급수탑은 그 긴 세월과 아픔을 생각하게 한다.
과거에 이 급수탑들은 각 기관차들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한 시설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우선 우물의 물을 급수정으로 모은 후, 펌프를 통하여 급수탑 위의 급수 탱크까지 물을 보냈다고 한다. 기관차가 들어오면 급수 탱크의 물들은 그 수압을 이용해 배관을 타고서 철로로 이동하고, 철로 바로 옆에 설치된 ‘ㄱ’자 형태로 된 급수전을 거쳐 기관차로 보내졌다. 연천역 급수 탱크는 땅에서부터 15m 높이를 지닌 콘크리트로 만들어져있고, 그 길이는 7m이며 크기는 최대 100톤까지 물을 가둘 수 있었다고 한다.
1899년 9월, 서울에서 인천까지 가는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처음 등장한 증기기관차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중요한 교통수단을 담당하였다. 1914년에 연천역에서 급수탑을 건립할 당시만 해도 증기기관차들의 뒤에 달린 탄수차에 물을 공급하고 있을 동안에 이 땅을 찾은 사람들끼리의 대화나 물물교환 등 상거래가 활발하여 연천역 또한 그 시장의 중심에 있었다.
과거보다는 뜸해졌지만, 여전히 오랜 시간 사랑을 받는 연천역은 시간이 흘러 새로운 발전과 여행길을 개척하기 위한 길고도 짧은 휴식에 접어들었다. 이 휴식 기간을 거쳐 부디 연천역이 더욱 사랑받고 멋진 역으로 거듭나기를 바래본다.
대구광역시에는 반야월이라는 행정구역이 없다. 법정동명도 아니고, 행정동 명칭도 아니다. 단지 대구광역시 동구 율하동, 신기동, 안심동, 신서동 일대를 지칭하는 지역의 별칭이다. 그래도 대구 사람들, 특히 해당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반야월이라는 지명에 친근감을 표시한다. 반야월(半夜月)은 ‘깊은 밤에 뜬 달’ 혹은 ‘깊은 밤, 길을 비추는 달빛’이라는 뜻이다. 지명유래는 후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태조 왕건이 정예병을 거느리고 대구 팔공산 일대에서 견훤의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였다. 역사에 ‘공산 전투’로 알려진 싸움이다.
왕건은 공산 전투에서 크게 패해 퇴각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왕건 일행은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지금의 반야월 지역에 이르러서야 달을 보며 한숨 돌리고 안심했다고 한다. 반야월 지역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경산군 안심면이었다. 안심(安心)이라는 지명도 같은 전설에서 나왔다고 한다. 왕건의 패주로를 달빛이 비추어주었다는 또 다른 설도 있고, 조선 시대 숙종 임금이 인근에 왔다가 한밤중 달빛을 따라와 보니 동네가 있었다는 이설도 있다.
반야월은 대구에서 동쪽으로 경상북도 영천, 포항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한다. 1917년 조선 경편철도 주식회사는 대구~하양 간에 협궤철도를 부설하고, 경동선이라 이름 붙였다. 협궤 열차는 반야월 지역을 지나갔다. 경동선은 경상북도 동쪽 철도라는 의미일 것이다. 1918년에는 하양~포항까지 철도가 연결되었다. 개통된 구간은 1928년 모두 사철[개인회사의 철도]에서 국철[조선총독부 철도]로 편입됐다. 1938년 대구~영천 간 38.4㎞ 협궤 선로가 광궤로 확장되었다. 확장과 더불어 반야월역사가 건립되었다. 동대구역에서 동촌역을 지나면 반야월역이고, 다음 역이 청천역이었다. 동촌역사도 반야월역사와 같은 해에 지어졌다. 대구~영천 간 철도는 대구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안심 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대구선 중에서도 반야월역은 요충지였다. 영천, 포항 쪽으로 가는 시외버스 정류장도 반야월역 앞 광장에 있었다고 한다. 반야월역은 해방 이후 더욱 중요해졌다. 1960년 반야월역에 화물전용 홈이 개설되었고, 1971년에는 안심 연료산업단지의 석탄저장 수송역이 되었다. 같은 해 반야월역에서 한일시멘트를 잇는 전용선도 부설되었다. 반야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대구선 열차를 타고 대구로 통학·통근했다.
1980년대 말 대구선은 쇠퇴했다. 석탄 산업이 내리막길이었고, 도로망이 확충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1997년부터 대구선 이설 공사가 시작됐다. 2005년 반야월~청천 구간은 폐쇄되었고, 동대구~반야월 구간은 (구) 대구선이라 불리게 되었다. 여객열차는 운행되지 않았다. 대구선이라는 이름은 동대구~가천~정천을 연결하는 새 선로에 내주어야 했다. 마침내 2008년 동촌역과 반야월역은 폐지되었고 (구) 대구선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반야월역사는 1930년대 후반 조선총독부가 정한 철도역사 표준설계안에 따라 지어진 건물로서, 남부지방의 대표적인 역사(驛舍)에 해당한다. 오른쪽으로 눕힌 T자형 역사는 입구 정면과 플랫폼 쪽 개찰구 부분이 삼각형 박공으로 되어 있다. 박공은 이등변삼각형이어서 안정감을 준다. 반야월역사는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서, 2006년 등록문화재 제270호로 지정되었다. 반야월역사와 닮은꼴이지만 박공 등이 조금 다른 동촌역사는 등록문화재 제303호다.
반야월역사는 등록문화재임에도 보전을 두고 논란이 빚어졌다. 1997년 이미 도시 계획상 역사 폐쇄와 개발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야월역사는 결국 2009년 해체되었다가, 2010년 조성된 대구선 반야월 공원 내로 이전 복원하였다.
이듬해인 2011년 반야월역사는 작은도서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내부는 도서관으로 개조되었지만, 이등변삼각형 박공 등 외관은 원형대로 살렸다. 대구광역시 동쪽 반야월 지역의 랜드마크였던 반야월역사는 철도역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근대철도의 달빛이 되었다. 대구 지하철 반야월역은 구 대구선 반야월역과는 다른 역이다.
조선시대 광산지역에는 현재의 소촌동 신역마을에 역이 설치되었다. 그 역은 조선 후기에 황룡강변으로 옮겨왔는데, 그 위치는 영산강의 제1지류인 황룡강변 부근으로 송정취수보 일대였다. 조선시대 관리들은 나주목의 남평 광리역에서 영산강을 따라 올라오다가 황룡강 건너 장록원에서 숙식을 하고 말을 빌려탔다. 이렇게 숙식을 제공하고 말을 빌려 탈 수 있도록 편의를 돕는 곳이 역으로, 광주에는 전라좌도 소속의 경양역과 전라우도 소속의 선암역이 있었다.
1757년(영조33) ~1765년) 전국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엮은 전국 지리지인《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선암역은 광주 소지면에 속하였고 거주인구는 72호에 304명이 살고 있었으며 소속된 노비는 17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리들에게 빌려주는 말도 6필을 길렀다. 제주도로 유배갔던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이곳을 지나갔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 나주 대접주 오권선(1861∼?)의 동학군과 나주 수성군이 이곳에서 대치했다. 1890년대 일본인이 쓴 자료에는 선암역과 선암나루, 중보장 터에 주막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암나루는 황룡강 건너편 평동의 지로나루와 함께 북쪽의 광주와 남쪽의 나주를 최단으로 연결하는 나루였다. 한양으로 상경하거나 나주목으로 향할 때 이곳을 거쳐갈 수밖에 없었다. 광주와 나주의 경계지점으로 강을 통해 사람과 물자가 운반되던 조선조에는 선암나루가 중요한 요지였다. 일제강점기에 직선 제방을 쌓기 이전까지 나루터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황룡강이 매번 홍수철마다 강줄기를 바꿨기 때문이다. 지금의 송정취수보를 옛 선암나루터라고 부르는 것도 나루터가 제 역할을 했던 마지막 기억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까지 나루 주변에는 주막과 여관의 기능을 가진 장록원과 선암원이 입지해 있었으며 선암나루는 단순히 강의 양편을 이어주는 교통수단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현재 종래 선암역 터 주변에 동서남북 사방으로 진출입이 용이한 운수IC가 조성된 것도 예로부터 이곳이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1913년 이후 송정리를 통과하는 호남선이 개통되고 버스, 승용차 등이 등장하고, 장록교를 비롯한 다수의 교량이 건설되어 나루와 역의 기능은 소멸되고, 선암나루는 사라진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