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 장로회 선교사들은 1904년 광주 지역 선교를 위해 양림리 지역 땅을 사들였다. 읍성이 멀지 않았으나 땅값이 헐했기 때문이다. 버드나무 숲이 무성하고, 산죽(山竹)으로 화살을 만들어 왕실에 바치기나 했던 양림(楊林)에는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다. 숨진 어린아이를 짚으로 싸서 나무에 달아 풍장(風葬)을 지내던 외진 변방이었다. 식민지 근대와는 다른 근대의 길은 그렇게 광주에 도착했다.
유진 벨(Eugene Bell, 한국이름 배유지), 클레멘트 오웬(Clement Owen, 한국이름 오기원) 등 선교사들은 교회와 사택을 짓고, 교육과 의료 사업에 착수했다. 선교사들은 1904년부터 10여 년 동안 오늘날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일대에 10여 곳의 건물을 세웠다. 광주 사람들은 사직공원과 호남신학대학교 사이의 길을 ‘서양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은 충장로를 중심으로 근대 시가지를 만들어 간 반면, 미국 선교사들은 양림동을 중심으로 근대의 계몽에 힘을 쏟았다. 양림동에 있는 계몽 근대의 장소를 보려면 일단 호남신학대학교 쪽으로 들어가는 게 좋다. 사실 호남신학은 원래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 해방 후인 1955년 양림동 옆 동네인 백운동에 설립되었다가 1976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호남신학대학교가 이전한 양림산이 바로 미국 남 장로회의 선교기지 자리다. 산길의 이름마저 유진벨길, 오웬길, 윌슨길 등 선교사들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선교사들이 지었던 사택 가운데 유진 벨 선교사 등의 사택은 한국전쟁 시기에 불탔고, 윌슨(Robert Willson, 한국이름 우일선) 선교사의 사택이 양림산에 남아 있다.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05~1911년 사이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1921년 증축됐다. 선교사들이 자신들 고향에서 가져다 심은 이국적인 고목들 속에 2층으로 지어진 건물이며 입구 현관이 인상적이다. 고급 사교장의 역할을 하기도 했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고아원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 서쪽으로도 몇 채의 선교사 사택이 더 남아 있다. 사택 앞 길 끝에는 양림동 호랑가시나무가 있다. 잎의 가시와 빨간 열매가 예수의 탄생과 부활을 상징한다 하여 선교사들이 아끼던 나무다.
우일선 사택 북쪽으로 산책로를 따라 가면 선교사 묘원이 나온다. 1909년 숨을 거둔 오웬 선교사를 비롯하여 유진 벨, 윌슨 선교사들이 여기에 묻혀 있다. 광주 지역에서 활동하다 별세한 선교사 22기만 있었으나, 서울특별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서 이장해 온 23기를 추가돼 현재는 45기가 안장돼 있다. 선교사 묘원에 안장된 오웬 선교사를 기리기 위해 1914년 지어진 ‘오웬 기념각’은 양림산 동쪽 기독간호대학 교내에 있다. 광주 최초의 서양음악회가 열리기도 했고, 광주 YMCA가 창립된 장소로서 광주 시민사회에서 잘 알려진 곳이다.
양림산 남쪽 광주 수피아 여자 중·고등학교는 학교 자체가 선교의 결실이다. 선교사들은 교회 다음으로 교육과 의료에 힘썼는데, 선교사들이 세운 남자학교는 숭일학교였고, 여자학교는 광주여학교였다. 광주여학교는 1911년 미국인 재니 스피어(Jennie Speer)의 언니가 헌금한 자금으로 학교 건물을 지으면서 동생의 이름을 따 수피아 여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수피아 홀은 등록문화재 제158호다. 학교 안에는 또한 학교 설립자인 유진 벨 선교사를 기념하여 1925년에 지은 커티스 메모리얼 홀(등록문화재 제159호), 1927년 건립된 윈즈버로우 홀(등록문화재 제370호), 1935년 준공된 수피아 강당 등 건축사적으로나 교육사적으로나 가치가 높은 문화재가 있다.
숭일학교의 경우 불령선인 양성소라 하여 1931년 중학교 과정이 폐지되었고, 1937년에는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며 소학교도 자진 폐교했다. 해방 후 다시 숭일학교라는 이름을 되찾았으나, 양림동이 아니라 광주시의 다른 지역에 학교가 위치했기 때문에 양림동에서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양림동 시절 숭일학교의 자리에는 현재 무등파크맨션이 들어서 있다. 수피아 여학교도 광주 3·1 만세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1940년 조선총독부가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함으로써 폐쇄되었다가 해방으로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다.
의료선교의 결실은 광주기독병원의 전신인 광주 제중원이다. 의료선교사들은 선교사 사택에서 진료를 시작해서 1905년 제중원을 열었다. 1911년 그라함기념병원을 건립했고, 이듬해는 광주 나병원을 시작했다. 의료선교사들은 나환자 진료와 결핵 치료에 헌신적으로 앞장섰다. 유진 벨 선교사의 외손자인 인세반(미국명 스티브 린튼)과 인요한(존 린튼)은 1995년 유진 벨 재단을 설립해 북한 결핵 퇴치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밖에도 양림동에는 한국의 근대 초기 활약했던 선교사들의 흔적이 여러 곳 남아 있다. 1910년대에 광주 시내에 세웠다가 양림동으로 옮겨온 양림교회가 대표적이다. 양림교회는 해방 후 기독교 교단이 분화되는 과정에서 3개의 교회로 나뉘었지만, 뿌리는 미 남 장로회 선교기지에 있다.
물론 양림동에 미국 선교사들의 근대 유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양림동에는 ‘이장우 가옥’, ‘최승효 가옥’ 등 전통적인 건축물도 있고, 시인 김현승(金顯承, 1913~1975)이나 음악가 정율성(鄭律成, 1914~1976)의 흔적도 있다. 무엇보다도 광주가 근대도시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양림동에 터 잡고 살면서 근현대사의 영욕을 몸으로 겪어낸 양림동 보통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골목마다 가득하다.
양림동 사람들은 2000년 무렵부터 스스로 ‘다 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같은 프로그램을 스스로 발전시켜왔다. 광주광역시도 2010년을 전후해 양림동을 근대역사문화마을로 지정하고, 답사 코스를 만드는 등 근대 광주의 한 축인 양림동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현재 양림동은 광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명 관광지로 부상했다. 기독교 선교의 자취가 생생하고, 전통이 한편에 공존하는데다, 여러 분야의 작가들이 문화 예술의 향기를 발산하는 장소들을 꾸준히 지켜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서양촌’에서 시작하든, 양림오거리에서 출발하든 근현대사가 던지는 다양한 의미의 켜를 음미하면서 산책하기 좋은 동네가 양림동이다.
학교는 거기서 누가 무엇을 왜 가르치고 배우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개항기의 학교와 일제강점기의 학교, 해방 후의 학교, 21세기의 학교라는 장소의 의미는 다 다르고, 달라야 정상이다. ‘광주광역시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 서석초등학교’의 역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서석초등학교는 을미개혁(1896년)의 하나로 공포된 소학 교령에 의해 세워진 학교다. 광주향교 옆 사마재에서 문을 연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는 초기에 학생이 없어 애를 먹었다고 한다. 유교의 전통으로 인해 남자 학생들은 삭발하기 싫어 오지 않았고, 여자들은 체조가 기생춤 같다 하여 꺼렸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모인 학생들도 대개 16~17세였다. 더러 장가를 든 학생도 있었다. “모여서 잡담도 나누고 토론도 벌이다가, 책을 읽기도 하고, 마치 노는 것 같았다.” 광주 공립소학교의 풍경은 아니지만, 당시 근대 교육의 현장을 둘러본 외국 선교사가 남긴 기록을 보면, 개항기 근대 교육의 현장은 자유분방했던 모양이다. 규율과 훈육에 익숙한 서양인의 눈에는 무척 이질적으로 보였던 듯하다.
공립소학교는 1906년 공립 광주 보통학교가 되었다. 학교 공간도 이듬해 현재의 전일빌딩 자리로 옮겼다. 경술국치 후 교명은 광주 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되었고, 자리도 1927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1930년에는 강당이 지어졌다. 1933년에는 화재가 발생해 교실이 타버려 1935년 본관을 새로 건립해야 했다. 바로 전 해인 1934년 학교 이름은 광주 제1 공립보통학교로 또 한 번 바뀌었다.
1938년에는 광주 서석 공립 심상소학교, 1941년에는 광주 서석 공립초등학교가 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초등교육 정책 변화에 따른 것이었는데, 주목되는 점은 서석이라는 교명이다. 서석(瑞石)은 광주의 상징 무등산의 다른 이름이다. 광주도 예전엔 서석읍이었다. 본때 없는 이전 교명과는 비교도 안 되는 훌륭한 이름짓기였다고 하겠다. 서석 공립초등학교는 1943년 별관을 신축했다.
1930년 건립된 강당과 1935년에 지어진 본관은 2002년에, 1943년에 건축된 별관은 2007년에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세 건물은 현재 등록문화재 제17호다. 강당은 체육관이기도 했는데, 현재는 서석당이라 불린다. 서석당은 지을 당시 전국에서 유일한 대강당이어서 타지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일부러 들러 구경하고 갔다고 한다. 서석당 현관 위층의 둥근 창은 벽체와 같은 재료인 붉은 벽돌로 둥글게 감쌌는데, 정교한 솜씨가 돋보인다.
본관도 붉은 벽돌 2층 건물로서, 모서리마다 벽돌을 둥글게 쌓았다. 지붕에는 반원형 아치 형태로 환기창을 두었다. 당시로써는 최고급 벽돌과 목재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별관도 마찬가지다. 별관은 특히 교실마다 굴뚝을 세운 점이 이채롭다.
학생을 한 명도 구하기 어려웠던 광주 최초의 근대 공립학교는 일제강점기 누구나 가기 원하는 학교가 되었지만, 체벌로 훈육하는 규율 공간이기도 했다. 1920년대에 광주 공립보통학교에 다녔던 졸업생의 증언에 따르면 행동이 산만하거나 수업료를 내지 못하면 매를 맞았다고 한다. 근천 헌병대에서 아침마다 부는 나팔 소리가 수업시간에도 들리던 시절 얘기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근대 교육이 도입된 이래 전국의 학생들은 집을 나서며 큰 소리로 인사했다. 광주 서석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오늘도 근대문화유산이 된 아름다운 학교에 간다. 근대교육과 학교는 지난 120년 동안 달라졌고, 지금도 달라지고 있다.
근대 교육을 실시하려면 학생을 가르칠 교사가 필요하다. 근대 교사 양성기관의 기원은 갑오개혁 직후인 1895년 설립된 한성사범학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대교육에 대한 열망이 갈수록 커지면서 한성사범 이후 민립 사범학교가 전국적으로 세워졌다. 1906년 ‘사범학교령’이 공포되어 교원 양성 체계가 정비되었으나, 1911년 조선총독부는 ‘조선교육령’을 통해 사범학교를 폐지해 버린다. 교사는 관립 고등보통학교에 1년제 사범과를 두는 방식으로 배출했다.
그러나 교육열이 더욱 커짐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1922년 ‘2차 조선교육령’을 내려 경성·대구·평양에 다시 관립 사범학교를 설치했다. 이듬해인 1923년에는 각 도에도 사범학교를 허가했다. 이에 따라 전국에 15개 사범학교가 설치되었다. 광주에도 전라남도 공립 사범학교가 설립되었다. 당시의 사범학교는 지금으로 치면 중·고등학교 과정을 통해 초등 교사를 배출하는 방식이다. 남자는 6년제, 여자는 5년제였다. 경성·대구·평양 사범학교 졸업생은 1종 훈도(訓導), 각 도의 사범학교 졸업생은 2종 훈도 자격증을 주었다. 같은 교사라도 등급을 달리했다는 얘기다.
1929년 11월 3일 나주에서 시작되어 광주와 목포를 비롯한 전라도는 물론 전국으로 학생독립운동이 확산되었다. 조선 학생과 일본 학생의 충돌이 확산되면서 독립을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간 당시 학생들의 의거는 오늘날 ‘광주학생독립운동’이라고 부른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전라남도 공립 사범학교 학생들도 대거 참여했다. 11월 중순 시위가 본격화되었을 때 전라남도 공립 사범학교 학생들은 합류하지 못했다. 학교 측이 적극적으로 막아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해 전라남도 공립 사범학교 학생 수십 명이 퇴학조치를 당했다. 공교롭게도 1929년 광주사범학교는 재정난을 이유로 문을 닫았다.
일제 강점기 조선 사람들의 교육 열망은 뜨거웠다. 조선인 교육을 최대한 억제하려 했던 조선총독부였지만 학교를 늘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38년 광주에 다시 사범학교가 문을 열었다. 광주사범학교라는 명칭으로 설립되었지만, 광주의 사범학교 뿌리는 1923년 전라남도 공립 사범학교에서 찾는 게 당연하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두 학교의 역사를 통합해 뿌리를 인정하는 일은 2012년에야 이루어졌다. 광주교육대학교 홈페이지 연혁은 1923년을 본교의 시작이라고 명기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 사범학교는 중학교 졸업생이 입학하는 학교가 되었다. 당시의 중학교는 오늘날의 중학교와는 달리 중·고 통합과정이었다. 해방 후에도 역시 교사 배출이 부족하여 다양한 방식의 연수과정 등을 통해 초등 교사 자격을 부여했다. 195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사범학교를 2년제 초급 대학으로 개편하자는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1962년부터 사범학교는 2년제 국립 교육대학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광주교육대학교 교육박물관은 1957년 지어졌다. 건축 당시의 용도는 광주사범의 본관이었다. 초등학교 교사를 꿈꾸는 입학생들이 강의를 받는 공간이었다는 얘기다. 건축은 당시 전라남도와 광주의 건축을 이끌었던 김한섭(金漢涉)이 맡았다. 김한섭은 건축 자재도, 건축 전문 인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모더니즘 양식을 최대한 살리려 고심한 끝에 본관 건물을 완성했다.
김한섭은 1920년 제주 출생으로, 송정공업학교(현재의 전남제일고등학교)와 일본대학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했다. 송정공업학교를 나와 만주국 건축 부서에 취업했으나, 건축을 더 공부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유학 시절 당시 오영섭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다시 일본으로 가 새로운 건축을 익혔고, 1955년부터 전남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활동했다. 광주사범 본관은 이 시기에 건축한 작품이다.
1950년대 중반 철근 등 건축자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김한섭은 벽돌을 쌓아 거푸집을 만들고 콘크리트를 부어 기둥을 만드는 방식으로 오늘날의 광주교육대학교 교육박물관 건물을 지었다. 지붕도 평 슬래브를 올릴 형편이 되지 않았기에, 목구조 틀 위 완만한 경사의 지붕을 올렸다. 그럼에도 김한섭은 창호와 벽돌 기둥을 배열하여 리듬감을 주었고, 출입구 현관도 곡선을 섬세하게 설계해 산뜻한 느낌의 모더니즘 건축물을 완성시켰다. 김한섭은 1960년대 초반까지 광주 용아빌딩, 광주 YWCA 빌딩, 광주극장 등 광주 지역에서 여러 건축물을 설계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제주도의 건축에도 큰 족적을 남겼는데, 제주 동문시장과 동양극장, 제주소방서, 남제주군청사 등이 김한섭의 작품이다.
옛 광주사범은 1963년 2년제 광주교육대학이 되었고, 1981년에는 4년제로 개편되었다. 1993년에는 국립 교육대학교로 발돋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7년 본관 동으로 건축된 건물은 부설 초등학교의 교사(校舍)로 쓰이기도 하고, 초등교육연수원, 학훈단 등으로 사용되다가 2008년 호남 최초의 교육박물관으로 리모델링되었다. 전시공간으로 개조하느라, 내부 구조는 일부 바뀌었으나 김한섭의 최초 설계의 뼈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원본 설계도도 현재 남아 있다. 광주교육대학교 교육박물관은 2014년 교육사에서 차지하는 학교의 의미와 지역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644호로 지정됐다.
광주광역시의 상징이 무등산이라면, 조선대학교의 랜드마크는 무등산 깃대봉 중턱에 자리 잡은 본관이다. 19개의 박공 건물이 370m 길이로 이어진 조선대학교 본관은 마치 학 한 마리가 깃대봉에서 나래를 좍 펼치고 날아오르려는 모습으로 비유된다. 건물 전체가 흰색으로 칠해져 백악(白堊) 캠퍼스라고 하지만 백학 캠퍼스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조선대학교 본관 19개 박공 건물 가운데 초기에 지어진 5개 건물은 2004년 등록문화재 제 9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대학은 한국 최초의 민립대학이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추진되었던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조선총독부의 방해로 무산되었으나 운동의 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해방 직후인 1946년 8월 ‘조선대학 설립동지회’가 창립되었고, 한 달 만인 1946년 9월 광주야간대학원(光州夜間大學園)이라는 명칭으로 대학이 개교했다.
광주야간대학원은 두 달 뒤인 1946년 11월 조선대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조선대학 설립동지회’는 계속해서 호남을 돌며 기금을 모았다. 설립동지회 회원권은 쌀 두 말 값인 100원이었다고 하는데, 지식인의 참여는 물론이고 관리와 지주부터 머슴과 촌부까지 회원권을 샀다고 한다. 1년 뒤인 1947년 말에는 무려 7만2,000명이 설립동지회원으로 가입했다.
조선대학 본관 신축 공사는 1947년 4월 착공해서 1955년 말 5개의 박공 건물로 완공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건축자재가 불에 타는 등 곡절을 겪으며 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1950년 사진을 보면 가운데 박공 건물 좌우에 상자형 건물이 붙은 형태이고, 2년 뒤인 1952년 사진은 3개 건물 모두 박공 형태다. 이어서 좌우로 또 각각 박공 건물을 세워 1955년 낙성을 보았다. 가운데 건물은 7층 높이이고, 좌우 건물은 6층, 또 옆 건물은 5층이다.
초기 본관 건물엔 크고 작은 강당 형 강의실이 모두 79개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대학의 원래 계획은 더 웅대해서 모두 294개 강당을 짓는 것이었다. 1977년부터 5개 동 본관에 잇대어 좌우로 각각 3개의 박공 건물을 더 세웠고, 1970~1980년대에 걸쳐 또 한 차례 좌우 대칭이 되게 각각 4개씩 박공 건물을 지어, 조선대학교 본관은 모두 19개 박공을 가진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조선대학은 이미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상태였다.
조선대학교는 한국 최초의 민립대학이지만 뼈아픈 역사도 갖고 있다. 조선대학 설립운동 당시 운동을 주도했던 서민호[徐珉濠] 당시 전라남도 도지사는 전라남도 운수과장이었던 박철웅[朴哲雄]에게 설립동지회 실무를 맡겼다. 박철웅은 메이지대학을 졸업했고, 일제강점기에 교육행정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대학의 초대 학장도 박철웅이 맡았다.
그러나 박철웅은 호남 촌부들까지 뜻을 모아 세운 대학의 설립자처럼 행세하기에 이르렀다. 1980년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박철웅의 학교 운영권을 박탈했으나, 1982년 박철웅은 조선대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복귀했다. 박철웅은 교비 횡령, 입시부정 등 사학비리에다 교수와 학생을 폭행하고 전횡을 일삼아 원성을 샀다.
급기야 1987년 조선대학교 학생들과 교수들이 박철웅 총장 퇴진과 민립대학 환원을 요구하며 113일간 장기농성에 돌입했다. 1988년 1월 8일 새벽 공권력이 투입되어 투신자와 중화상자가 발생하는 비극마저 빚어졌다. 조선대학교 역사는 이를 ‘1·8 항쟁’이라고 부른다. 이후 조선대학교는 정상화의 길로 들어섰으나, ‘독재자 총장’이 남긴 그늘이 꽤 깊었다.
1946년 조선대학 설립동지회의 권유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황토로라도 담을 쌓고, 창호지로라도 문을 발라서, 허청[헛간]에서라도…….” 호남인들의 교육 열망이 모여 탄생한 조선대학과 대학 본관은 모든 역사를 지켜보며 인재 양성이라는 소임을 다해왔다. 조선대학교 본관은 광주광역시의 랜드 마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