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현, 청안현을 통합하여 괴산군을 정했다. 괴산군의 중심지는 이전에는 일도면이라 불렀던 괴산면으로 삼았다. 괴산면에서도 동진천 주변인 동부리와 서부리 일대에 관아 대신 근대 행정기관들이 들어서고 시가지의 모습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동진천은 괴산군 남동쪽 소백산맥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 남한강에 합류하는 달천의 지류다. 동부리에 이 무렵 전통 한옥 한 채가 지어졌다. 이 한옥이 해방 후인 1950년 괴산군에 기증되어 괴산군수의 관사로 최근까지 사용된 집이다.
전통 한옥이 지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다. 대체로 1919년 무렵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1914년경이라는 주장도 있다. 최초 소유자와 일제강점기 소유권 변동도 입증자료가 현재는 없다. 해방 후의 서류에는 1948년 초까지 서부리 박승관이라는 사람이 소유한 집이라고 돼 있다. 괴산에서는 1950년 2월 괴산의 최 씨 성을 가진 부자가 군수 관사로 써달라고 기증했다는 이야기만 전해진다. 박 씨로부터 최 씨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경위도, 최 부자가 괴산군에 집을 기증한 이유도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다.
어쨌든 1950년 이래 괴산군수는 이 전통한옥을 관사로 사용했다. 1995년 지방자치제도 실시에 따라 선출된 민선 괴산군수도 한옥 관사를 썼다. 집의 일부를 주민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최근까지 본채(안채)는 관사였다. 지어진 지 100년이 된 한옥이 자치단체장의 관사로 이용된 사례는 전국적으로 괴산이 유일하다. 지역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가끔 수리만 하면 관사로 사용해도 별 무리가 없을 만큼 집이 튼튼하고, 구조가 나쁘지 않았다는 의미다.
한옥은 크게 안채, 사랑채, 행랑채 세 부분으로 나뉜다. 솟을대문 대문을 들어가면 행랑채가 나온다. 각 채는 담장으로 나뉘어져 독립 공간을 이룬다. 행랑채에서 협문으로 들어가면 안채이고, 사랑채로 통하는 쪽문도 있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는 각각 독립된 마당이 있어, 세 개의 마당이 조화를 이룬다. 유기적인 동선(動線)을 고려한 배치다. 안채는 기역 자 건물이며, 방이 3개, 거실 격인 대청, 다용도실, 주방을 갖춘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가옥 형태를 보여준다. 응접실 격인 사랑채는 도로와 접해 있는데, 도로 쪽으로 드나드는 문도 따로 있다. 사랑채는 한 일 자로 지어졌는데, 방이 2개이고, 대청과 부엌이 있다. 사랑채의 유리문에는 산수화 문양이 보인다. 사랑채는 2000년부터 마을 노인 사랑방처럼 운영되었고, 사단법인 대한시조협회 괴산군지회가 사용하기도 했다. 행랑채는 방과 창고로 이루어졌다. 면적은 안채가 85㎡, 사랑채가 39㎡, 행랑채 및 부속채가 49㎡다.
괴산군수 관사 일대는 근대가 시작되던 일제강점기에 집들이 많이 지어졌고, 도로를 따라 ‘괴산 산막이 시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5일장이 열린다.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괴산 고추 오일장’이다. 괴산은 고추가 많이 생산되는 고장이다. 전국 고추 생산량의 10%가 괴산 고추라고 할 정도다. 괴산에서는 해마다 9월에 고추 축제가 열린다.
시장의 이름인 ‘산막이’는 산으로 막혀 더는 갈 수 없는 막다른 동네를 가리킨다. 물론 괴산읍내가 산막이는 아니고 괴산읍의 남동쪽 칠성면에 있다. 1960년대까지 호랑이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지역인데, 괴산군에서 약 4㎞를 ‘산막이 옛길’로 조성해 놓았다. ‘산막이 옛길’은 숲길, 산길에 괴산호를 내려다보며 걸을 수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 칠성면에서 더 내려가 괴산군 청천면에 가면 대한민국 명승 가운데 하나인 화양계곡과 선유동계곡이 있다.
괴산군수 관사에서 북쪽으로 동진천 괴산교를 넘어가면 ‘홍범식 고가’가 나온다. 일완 홍범식(一阮 洪範植, 1871~1910)은 괴산 출신으로 태인군수, 금산군수를 지냈고,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자결한 지사(志士)다. 홍범식의 아들이 일제강점기 ‘조선 3대 천재’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던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熹, 1888~1968)다. 홍명희가 일제강점기에 발표한 『임꺽정』은 걸출한 역사소설로 지금도 회자된다. 도로명 주소를 제정할 때 ‘홍범식 고가’에서 괴산읍 아성리에 이르는 길의 이름을 ‘임꺽정로’로 정할 만큼 홍명희의 소설은 큰 영향을 남겼다. 홍범식이 살았고, 홍명희가 태어난 집은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복원되어, 2002년 충청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괴산군의 인구는 1965년 16만 명을 정점으로 1990년에는 10만 명 이하로 줄었고, 2015년 3만8,000명 수준으로 감소했다. 괴산군에서 가장 컸던 증평읍은 2003년 충청북도 증평군이 되어 별도 행정구역으로 독립하기도 했다. 괴산읍 시가지가 1910년대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괴산군 동부리 괴산군수 관사는 근대 100년의 풍상을 겪어낸 전통 가옥이자, 반세기 훨씬 넘게 관사로 사용된 의미를 인정받아 2004년 등록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구 충북산업장려관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건립되었다. 구 충북산업장려관의 개관 당시 명칭은 충북물산장려관이었다. 충북물산장려관은 신축 충청북도 도청의 부속 건물이었는데, 충청북도 청사 본관보다 준공 시점이 6개월 빠르다. 도청을 새로 지으면서 물산장려관을 먼저 선보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물산장려관은 근대 자본주의의 핵심 상징인 ‘상품’을 대중에게 알리는 시설을 지칭했다. 일본의 경우 1890년 오사카에 처음으로 상품진열소가 문을 연 이래 전국 각지에 물산진열소 또는 상품진열소라는 이름으로 상품 전시·판매 공간이 조성되었다.
근대 공업의 최신 생산품을 과시하여 욕망을 자극하고 소비를 촉진한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초기의 물산장려관은 일종의 박람회 성격을 띠었다. 일본의 풍조는 대한제국으로도 건너와, 1899년 경성상품진열소가 창립되었고, 1905년에는 부산에도 생겨났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는 지방 도청 소재지를 중심으로 상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충청북도에도 1928년 물산장려관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충청북도 도청 물산장려관의 전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충북물산장려관과 충청북도 청사가 들어선 자리[현재 지명으로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화동]는 원래 잉어배미라는 넓은 논이 있던 곳이다. 잉어배미의 연못에서는 잉어를 기르기도 했고, 겨울철에는 스케이트장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못을 메우고 들어선 자리에 근대 상공업의 꽃인 상품 진열 공간과 근대 행정기관이 들어선 것이다. 문화동 일대는 1910년대부터 계획적인 시가지 조성이 시작되어, 1930년대 후반에 이르면 충청북도 청주의 새로운 중심지역으로 부상했다. 충북물산장려관은 큰 신작로가 교차하는 사거리 모퉁이에 자리 잡았다. 누구나 새로운 청주 시가지에 들어서면 쉽게 알아보고 들어올 수 있도록 배치한 것이다.
충북 물산 장려관은 1936년 12월 23일 문을 열었는데, 개관기념으로 3일간 충청북도 내 특산물 시험 판매회가 열렸다고 한다. 충북 물산 장려관은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유사 전시장의 명칭을 산업 장려관으로 변경함에 따라 1937년 1월 충북 산업 장려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충북 산업 장려관은 사거리 모퉁이에 있는 건물답게 주 출입구를 사거리 방향으로 만들었다. 위에서 보면 니은 자(ㄴ) 평면의 꺾어지는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문을 낸 것이다. 2층 건물인 충북 산업 장려관은 전시 공간이어서 홀을 통짜로 하고, 천정을 높이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대에 건물의 용도가 여러 차례 변경되면서, 원래의 내부 모습은 크게 변형되었다.
충북 산업 장려관 건물은 충청북도 청사와 거의 동시에 지어졌음에도 건물의 외관은 많이 다르다. 건물의 용도를 살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주 출입구의 캐노피가 특징적이고, 건물 오른쪽 아래위 둥근 창이 돋보인다. 전반적으로 대중에게 친근감을 주면서 간결한 모더니즘 양식의 건물이다. 충북 산업 장려관은 해방 직후 미국의 대외원조기관인 USOM(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과 미국 공보관 사무실로 잠시 쓰였다. 1957년에는 원래의 기능을 되찾아 충북 상공장려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그러나 산업이 발달하고, 근대 자본주의 체제가 뿌리를 내리면서, 관 주도로 상품을 과시하는 공간이 필요 없게 되자 또다시 용도가 바뀌어, 충청북도 도청 민원실, 충청북도 지방경찰청의 사무실 등을 거쳐, 도청의 문서고 신세가 되었다. 충청북도 도청보다 6개월 먼저 준공되어, 충청북도 내에 현존하는 근대 건축물 가운데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꼽히는 구 충북 산업 장려관은 2007년 352번째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충청북도 도청은 등록문화재 제55호다.
1930년대 들어 청주 유지들 사이에 상업학교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정책은 초보적인 초등교육 중심이어서, 조선인들은 상급학교 설립을 간절히 바랐다. 청주 사람들은 상업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를 원했다. 하지만 재원 부족으로 몇몇 시도가 수포가 되었다. 상업학교 설립은 석정 김영근(錫定 金永根 · 1888~1976)이 거금을 내놓음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석정은 청암 김원근(淸巖 金元根 · 1886~1965)의 아우였다. 청암은 이미 1922년 청주에 ‘김원근 상회’를 세운 큰 부자였고, 1924년 천도교계에서 설립했던 대성학원을 인수해 대성 보통학교를 개교한 바 있다. 대성 보통학교는 194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공립학교로 강제병합 당할 때까지 수업료를 받지 않는 무상교육을 실천한 학교다.
석정과 청암 두 형제와 청주 유지들이 힘을 모아 1935년 청주상업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조선총독부는 공립을 원했으나, 설립자들이 강력하게 사립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고 한다. 곧이어 학교 건물 신축에 들어갔다. 부지는 당시로써는 인가가 드문 뽕나무밭이었던 우암산 자락 바깥덕벌[외덕리]였다. 학교 본관은 이듬해인 1936년 완공되었다. 본관이 완성되기도 전, 가교사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은 기꺼이 책상 걸상을 이고 지고 새 학교로 이사했다. 본관은 붉은 벽돌로 단정하게 지어진 2층 건물이다. 붉은 벽돌은 청주상업학교 본관 신축을 계기로 청주에 널리 알려졌고, 이후 청주의 여러 건물이 붉은 벽돌을 쌓아 지어졌다. 청암과 석정이 주도해 건립한 유서 깊은 청주상업학교의 본관은 2002년 등록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 청주상업학교 강당에는 ‘士魂商材’(사혼상재 · 선비의 정신을 갖춘 상업 인재)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청주상업학교는 상업 실무를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곧고 올바른 상인을 길러내는 요람을 지향했다. 3학년과 4학년이 되면 ‘상업 도덕’을 정식 교과목으로 가르쳤다. 6년제였던 청주상업학교는 해방 후 대성중학교와 청주상업 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1994년에는 본관 건물 뒤로 5층 신관이 지어졌다. 일제강점기부터 인재들이 입학경쟁을 벌이던 상업학교였으나, 시대가 변하면서 상고 진학 희망자가 줄어들자, 2002년 청주상업 고등학교는 인문계로 전환해 청주 대성고등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청암 김원근이 세웠던 대성학교는 1965년 부활 개교했다. 지금의 대성초등학교다. 청암과 석정은 앞서 1947년 청주상과대학을 설립했고, 대성 여중(1959)과 대성여자상업고등학교(1960)를 잇달아 개교했다. 1975년엔 청석고등학교도 설립했다. 청주대는 1981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1991년 학교법인 대성학원은 1991년 학교법인 청석 학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청주상업 고등학교를 비롯한 청석 학원 산하 학교가 지금까지 배출한 동문이 20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청주상업학교는 설립 초기부터 스포츠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국가대표 축구선수였던 최순호, 이운재와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인 전기영 등이 청주상업 고등학교 출신이다.
양조장은 식민지 근대에 생겨난 말이다. 일제는 술에 세금을 매기는 근대 주세법을 도입하면서 사적으로 술을 빚는 관습을 폐지시켰다. 가양주(家釀酒)가 사라지면서 집집마다 술 익는 마을 대신 술 빚는 공장이 들어섰다. 물론 탁배기 한 잔이 건네는 위로는 여전했다. 시름이 더 많아졌기에 양조장은 번성했다. 덕산양조장은 1925년 은밀히 막걸리를 빚어 파는 집으로 시작되었다.
맛으로 입소문 나면서 1929년 옛 구말장터 자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정식 허가를 받았다. 1930년 9월 지금의 덕산양조장이 완공되었다. 지금도 ‘소화 5년 경오 구월 초이일 미시 상량 목수 성조운’이라는 상량문을 확인할 수 있다. 양조장 건물은 온도 유지가 핵심이다. 뜨거운 여름이든 칼바람 겨울이든 섭씨 20도 정도를 유지해야 발효와 숙성이 제대로 된다.
덕산양조장은 백두산에서 자생하는 전나무와 삼나무를 충청북도 진천까지 가져와 썼다. 벽체는 최고 90㎝까지 두껍게 쌓았다. 우선, 대나무와 볏짚을 엮은 황토벽을 2중으로 세우고 가운데 공간을 두었다. 빈 곳은 왕겨로 채웠다. 외벽은 목재로 비늘판 벽으로 덮었다. 왕겨는 보온과 단열 효과가 뛰어나다. 천장 판자 위에도 왕겨를 채워 넣었다. 환기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일단 양조장 앞 화단에 측백나무를 넉넉하게 심었다. 작은 숲을 연상시킬 정도다. 측백나무들은 한여름 근처 한천천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열기를 한 번 걸러준다. 바람은 양조장 상부 처마 틈으로 들어가 발효와 숙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기를 몰고 외부로 자연스럽게 빠져나간다.
덕산양조장 측은 훗날 도로확장 때문에 화단의 측백나무들이 잘려나갈 위기에 놓이자, 양조장 소유 부지 쪽으로 도로선을 바꾸도록 함으로써 측백나무들을 지켰다. 덕산양조장의 막걸리는 첫맛은 묵직하고, 뒷맛은 깔끔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묵직한 느낌을 요즘 용어로 바꾸면 바디감일 터이다. 양조장의 연륜이 쌓이면서 공장 안팎에 야생 효모균까지 더해져 술맛의 유명세는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1960년대 말에는 공장 증축 공사를 벌여야 했다. 1972에는 약주를 만드는 제2공장을 지었다. 덕산양조장은 세왕양조 주식회사가 되었다.
하지만 지역의 경제 규모가 축소되고, 막걸리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1990년 덕산양조장은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1998년 3대째 가업을 이은 이규행 씨가 양조장 재개를 결심하고, 2000년 수리에 들어갔다. 70년을 이어온 양조장의 전통을 살리기 위해 양조 시설 부분은 최대한 원형을 유지하도록 했다. 2001년부터 재생산에 들어간 덕산양조장의 막걸리는 옛 맛을 잃지 않았고, 금세 명성을 되찾았다. 이후 막걸리 붐을 타고 덕산 생막걸리는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덕산막걸리는 그동안 대통령상을 세 차례나 받았다. 덕산양조장 본체 건물은 2003년 등록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후퇴하던 국군은 양조장 건물이 적의 진지로 쓰일까 염려하여 불을 지르려고 했다. 덕산양조장의 설립자인 이장범 씨가 당시 돈 45원과 장작 두 트럭, 소 한 마리를 주고서 겨우 말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덕산양조장은 TV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 ‘할아버지의 금고’ 편에 등장하는 ‘대왕 주조’의 모델도 덕산양조장이 모태인 세왕주조다. 덕산양조장은 생거진천의 문화 1번지로 꼽힌다.
충청북도는 담배 농사 짓기 알맞은 땅이 많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농사’로 꼽히지만 환금성이 좋은 작물이어서 충청북도 곳곳에서 일찍부터 연초 재배 농가가 증가했다. 미원(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미원면 일대)에서 1912년 엽연초경작조합이 설립되었고, 1913년에는 충주, 1918년에는 제천에도 엽연초경작조합이 생겼다. 1927년 통계에 따르면 충청북도 내 엽연초 재배 면적은 4,415정보(1,320여만 평)에 이르고 경작인원이 2만4,000명이나 됐다고 한다.
제천은 조선시대 국내 최대 연초 생산지였던 영월과 인접해 있고, 국내 최초로 황색종 엽연초를 재배했던 충주시와도 멀지 않다. 제천 엽연초경작조합은 제천 지역과 단양 일부를 관할했다. 현재 남아 있는 제천 엽연초생산조합 구 사옥은 1935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이전에는 조합 설립과 동시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측 조사 결과 1935년으로 밝혀졌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천 엽연초생산조합 구 사옥’ 항목)
제천 엽연초생산조합 구 사옥은 첫인상이 독특하다. 주 출입구를 앞쪽으로 돌출시키고 큼직한 아치형 벽체를 둘렀다. 주 출입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건물 전체는 기능성을 중시하여 실용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주 출입구 쪽의 전실과 사무실·회의실이 하나의 축선으로 분할되어, 3개의 출입구가 업무 편의 중심으로 연결되도록 했다. 경사가 급한 우진각 지붕도 선이 단순하다.
구조는 간단하지만 창문 조형과 벽면 마감은 신경을 썼다. 아치형 벽체 위의 창호도 아치형으로 만들어 조화를 꾀했다. 아치형 창문의 창살은 뻗어나가는 기하학적 선으로 만들었다. 주출입구 오른쪽 창호도 아치형으로 했고, 길쭉한 오르내리창 위에는 작은 상하 회전형 창문을 설치했다. 외벽의 경우 수평으로 네 부분으로 나눈 다음 각기 다른 형식으로 마감 처리하기도 했다. 정면 출입구가 오른쪽으로 치우친 까닭은 건립 이후 왼쪽을 증축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1910년 연초세를 도입해 잎담배 경작과 판매에 세금을 부과했다. 1914년에는 제조세와 소비세가 추가됐다. 연초 제조가 허가제로 바뀌어 영세업자들이 몰락했다. 1921년에는 연초가 전매 품목이 되었다. 1920년대 연초 전매를 통해 조선총독부가 거둬들인 돈이 전체 세입의 15~20%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속 답답하거나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서민들이 시름을 잊어볼까 날리는 담배 연기의 대가가 상당했던 셈이다.
해방 후 1950년 무렵부터 제천의 담배 농사는 황색종이 주종을 이뤘다. 황색종은 수확한 담뱃잎을 건조실에 매달아 선명한 귤색이나 엷은 노랑이 될 때까지 말리는 담배의 한 종류다. 제천은 황색종 엽연초의 국내 주 생산지가 되었다. 제천 엽연초경작조합은 1963년 엽연초 생산조합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4년 해산한 단양조합을 인수했다. 1989년에는 제천 엽연초 생산협동조합으로 다시 한 번 변모했다.
제천 조합은 1977년 신 사옥을 지었고, 1979년에는 관사도 새로 지었다. 구 사옥은 남았으나 옛 관사는 철거되었다. 국내 담배 농사는 1970년대까지 꾸준히 재배면적과 생산량이 늘었으나 1980년대 들어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한 개비 피우는 데 고작 5분이지만 담배 농사는 꼬박 1년 손이 가는데다, 수입산에 밀려 수익률은 떨어지기만 했기 때문이다. 요즘 출시되는 국산 담배 제조에 쓰이는 국내산 엽연초의 비율은 26%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2006년 건물 원형을 복원한 제주 엽연초생산조합 구 사옥은 2003년 등록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 이래 담배 농사와 수매의 역사를 간직한 공간으로서 가치가 높다. 구 사옥과 같은 부지에 있는 제천 엽연초수납취급소도 등록문화재 제273호다. 수납취급소에는 감정실 원형레일, 습도조절장치, 아연도금 함석지붕 환기구 등 과거 엽연초 산업을 확인할 수 있는 시설이 남아 있다.
근대 이전 충청북도 제천은 남한강 수운(水運)의 중요 요충 가운데 한 곳이었다. 산지가 많은 탓에 육로로는 물자를 실어 나르기 힘들었기 때문에, 서울 쪽에서는 소금을 실은 배가 남한강 물길을 따라 오고, 제천 지방의 목재와 황색 연초(煙草) 등을 선적한 배는 서울 쪽으로 흘러갔다. 중앙선 철도의 개통은 내륙 수운의 고장 제천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941년 9월 일제의 대륙 침략 의도로 건설된 중앙선 철도가 완공되었다. 중앙선이 종단하는 제천은 경상북도, 충청북도, 강원도 등 남한 동부내륙의 물자를 수송하는 거점으로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했다.
1930년 설립된 조선 미곡창고 주식회사(조선미창)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조선미창은 철도 및 항만과 연결되는 창고업과 관련 화물 운송 사업의 망을 전국적으로 뻗치고 있었다. 조선미창은 1941년 제천역 바로 앞에 제천지점 건물을 짓고 영업을 개시했다. 조선미창이 바로 후일의 대한통운이다. 철도는 대량 운송 수단이지만, 쌀을 비롯한 물자를 옮기려면 철도역까지 실어올 수단이 필요하다. 채만식의 단편 소설 ‘화물자동차’(1932년 작)는 달구지나 구루마(리어카)로 쌀가마를 옮기던 종래의 방식이 화물차 운송으로 바뀌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한 번에 마흔 덩이씩이나 싣고 하루에 여섯 번이나 다니니까
화물자동차 한 대만이라도 웬만한 때에는 척척 실어 날랐고
급한 때에는 두 대 세 대라도 들여대었다.
화물자동차가 구루마의 짐을 집어삼키기는 가마니뿐만이 물론 아니다.
벼나 쌀이나 그밖에 들뭇들뭇한(크고 무거운) 짐은 다 집어삼켜 버린다.(채만식, ‘화물자동차’에서 인용)
구루마꾼들은 하루아침에 밥그릇을 넘겨주어야 했다. 일단 도로가 깔리면, 구루마로는 넘기 힘든 고개도 화물차는 수월하게 넘어간다. 도로는 갈수록 늘어났기 때문에, 화물차 운송업은 철도 수송을 보조·보완하는 수단으로 확고히 자리 잡아 나갔다.
제천의 위상은 해방 후 더욱 높아졌다. 강원도 지역을 연결하는 태백선 공사가 계속 진행되었고, 제천과 충청북도 내륙을 잇는 충북선이 1958년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제천은 남북으로 중앙선, 동서로 태백선과 충북선이 연결되면서, 강원도의 무연탄, 충청북도 단양의 시멘트, 충청북도 충주의 비료가 수송되는 길목의 중심이 되었다. 예전에는 강원도 영서 지방에서 채굴된 무연탄을 충주 지역 공장으로 운반하려면 400㎞ 거리를 돌아야 했지만, 충북선으로 제천을 거치면 29㎞ 남짓으로 충분했다.
제천역을 이용하는 승객은 1960년 71만 명 수준에서, 1969년엔 110만 명, 1980년엔 164만으로 계속 늘어났다. 화물 수송량도 1960년 15만7,000t에서 1980년엔 159만2,000t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철도 화물 수송량의 증가는 화물자동차 운송 양의 증가를 수반하게 마련이다. 1960년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비롯해서 한국의 고도 성장기에 철도 교통의 요지 제천에서 대한통운의 실적도 크게 늘어났다고 추정된다. 조선미창은 1950년 한국 미곡창고 주식회사로 상호를 바꾸었고, 1962년 한국운수(주)를 합병한 뒤, 1963년 대한통운 주식회사가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철도의 전성시대는 저물어갔다. 제천역 철도 이용객은 1991년 정점을 찍었다. 시멘트와 석탄은 사양 산업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대신 도로는 점점 더 늘었고, 자동차 수송 비중은 커졌다. 1968년 대한통운은 민영화되어 동아그룹 계열사가 되었고,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동아그룹에서 떨어져 나왔다. 대한통운은 2012년 CJ그룹에 인수되어 CJ대한통운이라는 현재의 이름을 얻었다.
대한통운 제천지점의 전성기는 1962년부터 1997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경제가 고도 성장을 거듭하던 시기와 대략 일치한다. 1990년대 들어 제천역의 중요성은 줄어들었지만, 화물 수송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철도 화물의 감소는 결국 제천지점의 영업 활기를 점차 앗아갔다. 더욱이 택배 업무가 별도로 분리되면서, 대한통운 제천지점의 역사적 역할은 사라졌다. 제천지점은 언제부터인가 제천영업소가 되었다.
1941년 건립된 대한통운 제천영업소 건물은 화강석을 완자형으로 쌓고, 우진각 지붕을 얹은 건물이다. 연면적 201.65㎡(약 61평)에 사무실과 숙직실, 창고 등이 있었다. 1953년 한국전쟁 시기에 소실된 지붕을 새로 했고, 1960년대엔 바닥을 교체했다. 2013년에 내벽을 수리한 기록도 있다. 제천역 광장 북쪽에 인접한 대한통운 제천지점 건물의 관리자는 제천시로 되어 있다. 한창 잘 나가던 시절 제천 사람들이 화물 탁송이나 이삿짐을 부탁하기 위해 드나들었던 건물에는 현재 시락국(시래깃국의 사투리) 식당이 영업 중이다. 대한통운 제천영업소 건물은 2003년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고, 2013년 등록문화재다운 모습으로 정비하겠다는 제천시의 발표가 있었으나, 진척 소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헤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한국인의 사랑을 받는 애송시 ‘향수’의 첫 대목이다. ‘향수’를 남긴 정지용의 고향이 충청북도 옥천이다. 정지용은 옥천 죽향초등학교 제4회 졸업생으로 되어 있다. 정지용은 1910년 죽향초등학교의 전신인 옥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14년 졸업했다. 당시 옥천보통학교는 4년제였다.
죽향초등학교의 역사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다. 역시 옥천이 고향인 범재 김규흥(1872~1936)이 세운 창명학교가 시작이다. 창명학교 설립 시기는 기록에 따라 1905년과 1909년으로 엇갈린다. 범재 설립이 확실하다면 1905년이 더 신빙성이 있다. 범재는 1908년 중국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범재는 자신 소유인 목화밭을 학교 부지로 내어주었다고 한다. 1909년은 창명학교가 설립인가를 받은 해로 추정된다. 범재는 을사늑약 이후 전국적으로 애국인사들이 앞다퉈 사립 교육기관을 설립하던 시기에 창명학교를 세웠고, 학교가 당국으로부터 공식 인가를 받은 해가 1909년인 듯하다.
죽향초등학교 교정에는 2018년 범재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범재는 중국으로 가서 신해혁명(1911년)에 참가했다. 이후 중국 정부에서 중요 임무를 수행했다. 다만, 최근 들어 범재 김규흥이 일본의 고위급 밀정이었다는 증거가 제기되면서,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점은 아쉽기만 하다.
강제로 대한제국을 집어삼킨 일본은 창명학교를 1910년 옥천보통학교로 흡수해버렸다. 정지용은 이때 입학했다. 정지용은 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 휘문고보로 진학했다. 하지만 시 ‘향수’의 서정은 어린 시절을 보낸 학교와 무관할 리 없다. ‘죽향’이라는 훗날 학교 이름은 옥천읍 죽향리라는 지명에서 따 왔다. 마을 뒤로는 대나무 숲, 마을 앞으로는 향나무여서 죽향이라 부른다고 전해진다. 옥천보통학교는 옥천제2심상소학교를 거쳐 1941년 죽향초등학교가 되었다.
현재 옥천교육역사관으로 쓰이는 죽향초등학교의 옛 건물은 1936년 건립됐다. 1926년 지어진 교사 자리에 새로운 교실을 지었다. 건축 면적이 79.5㎡였으니 교실 1칸 규모다. 이후 1977년 237㎡로 늘렸고, 1985년 264㎡로 증축했다. 늘려 짓기는 했으나, 1936년 지어질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살렸다. 내벽 밖으로 나무 판재를 비늘 형태로 붙인 판벽(비늘판벽)을 만들었다. 지붕은 함석이다. 교실 세 칸이 나란히 붙은 구조인데, 복도에서 보면 천장의 목구조가 그대로 드러난다. 현재, 한 칸은 장작난로까지 설치한 옛 교실을 재현해 놓았고, 또 한 칸은 죽향초등하교 교육역사관, 나머지 한 칸은 향토역사관으로 꾸며져 있다.
옥천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6일 두 곳에 ‘독립만세’ 혈서가 나붙으면서 시작되었다. 한 곳은 옥천읍 하계리 유석구의 집 담벼락이고, 다른 한 곳은 옥천보통학교 3학년 교실 앞 바윗돌이다. 3일 뒤인 3월 19일 저녁에 문정리와 죽향리 등 옥천의 구시가지(구읍)에서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누가 피로써 ‘독립만세’를 썼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죽향초등학교는 2019년 108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누적 졸업생은 1만3,340명이다. 죽향초등학교 졸업생에 대해 거론할 때면 정지용 외에 또 한 명이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1925~1974)다. 육영수는 옥천 출신으로 죽향초등학교 제27회 졸업생이다. 연대로 보아 옥천교육역사관이 된 옛 교사에서 공부했을 것이다. 최근 들어, 죽향초등학교와 관련된 인물로 가수 김현식(1958~1990)도 거론된다. 김현식은 1965년 2학년으로 전학 와서, 5학년 때인 1968년 다시 서울로 전학 갔다. 졸업생은 아니지만, 김현식은 옥천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매우 그리워했다. “너무너무 좋았다”는 김현식의 육성이 7집 앨범에 담겨 있다. 차마 잊히지 않는 고향이라는 고백이다. 김현식은 ‘봄여름가을겨울’, ‘사랑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 ‘내 사랑 내 곁에’ 등 여러 히트곡을 남기고 요절했다.
한 세기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죽향초등학교 교정에는 눈길을 끄는 기념물이 여럿 있다. ‘육영수 휘호탑’이 1974년 세워졌고, 1988년에는 정지용의 시비(詩碑)와 ‘지용 유적 2호’라는 동판이 만들어졌다. 앞서 언급한 대로, 설립자인 범재를 기리는 비도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문화재도 한 점 있다. 고려 후기 석탑의 전형적 특징을 보여주는 ‘옥천 죽향리사지 3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충북문화재 자료 제51호다. 한편, 죽향초등학교 뒤에는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해태상 3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없어진 상태다.
죽향초등학교 구 교사는 새로운 본관이 지어진 이래 1996년까지 병설 유치원 교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약 60년간 교실로 쓰였기에, 수선과 손질이 거듭될 수밖에 없었을 터이고, 실제로 철거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옥천의 근대사를 증언해주는 건물이라는 옥천 사람들의 인식 덕분에 옛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문화재청은 2003년 죽향초등학교 구 교사를 등록문화재 57호로 지정했다. 죽향초등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지용 생가, 복원된 육영수 생가가 있다.
역사 속에서 진실은 수없이 왜곡되어 왔다. 특히 위정자나 강대국의 범죄가 은닉되거나 정당화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기억투쟁’은 강하지 못한 피해자나 진실을 원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범죄를 저지른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혹은 나중에 있을지 모르는 처벌을 모면하기 위해서 증거를 인멸하고 이슈화를 방해하며 관련자들의 기억을 조작하기 위해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한다. 피해자들은 이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다. 나중에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되어 그들을 처벌할 수 있을 때까지 진실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 똑같은 억울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기억은 중요하다. 한국의 근현대사에는 기억투쟁을 벌여야 했던 사건이 많다. 그중에 하나가 한국전쟁 초기에 벌어졌던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 소재한 쌍굴다리에서 미군이 양민 수백 명을 학살했다.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쪽을 향해 밀고 내려왔다. 국군은 계속 후퇴를 했고 민간인들은 피란을 떠나야 했다. 피란의 와중에 노근리 사건이 일어났다.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들은 미군 제1기병사단이 시키는 대로 1950년 7월 26일 대구 쪽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피란 행렬이 하가리-서송원리-노근리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던 중 난데없이 아군으로부터 폭격을 당했다. 주민들에게 피란을 떠나라고 했던 미군의 소행이었다. 미군이 피난민 속에 인민군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해 벌인 일이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폭격을 피해 경부선 철로를 떠받치고 있던 쌍굴다리 밑으로 숨었다. 하지만 미군의 공격은 폭격으로 멈추지 않았다. 미군은 폭격에 더해 기관총을 동원해 저항하지 못하는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학살은 26일부터 29일까지 사흘간 60시간 동안 계속됐다.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회에 따르면 무고한 희생자가 4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확인된 피해자는 사망 135명, 부상자 47명 모두 182명이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비밀에 붙여졌다. 1960년 유족들이 미국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기각되었다. 증거불충분과 시효만료가 이유였다. 미군의 주둔이 필요한 한국정부 역시 학살에 대해 침묵했다. 유가족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상태에서 외로운 기억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정은용 씨는 1994년 노근리 사건을 다룬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간했다. 같은 해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도 설립되었다. 사건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알려진 것은 1999년 외신이 보도하면서였다.
그전에도 국내 언론이 사건을 기사화하긴 했지만 이슈화되지 못했던 것을 미국 AP통신이 사건의 전말을 고발하면서 재조명됐다. 1년 반이나 취재에 공을 들여 AP통신이 특종을 터뜨리자 국내외의 많은 언론사가 앞을 다퉈 보도하기 시작했다. 노근리에서 학살사건이 벌어진지 50년이 지난 후였다. 미국은 사건을 부정하려 하였으나 진상규명의 여론이 비등하자 2001년 한미 양국 정부의 진상 조사가 시작되었다.
1년간 조사가 이뤄졌으나 사실관계와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지는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사건을 부정하려고 했던 미국 정부와 미군의 주둔이 필요한 한국 정부의 합동조사였으니 처음부터 진실 규명의 의지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미 공동발표문 및 성명서를 통해 미국 정부가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이라는 실체를 인정했을 뿐이었다. 미국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나 보상은 없었다. 대한민국 국회는 2004년 '노근리사건특별법'을 제정했다. 현재, 노근리 사건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려 한국전쟁의 공식 기억이 되었다.
민간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비극이 벌어진 노근리 쌍굴다리는 영동군 경부선 철도에 1934년 건설되었다. 황간면 노근리와 영동읍 주곡리를 연결하기 위해 개근천(愷勤川) 위에 놓인 철도교각이다. 영동역에서 하행하여 황간역에서 3km 정도 못 미치는 지점에 있다. 지상 1층 철근콘크리트조이며 길이 24.5m, 높이 12.25m(내부/10.35m), 폭 6.75m, 두께 1.9m이다. 2개의 아치 형태를 하고 있어 쌍굴다리라고 불리는 이 교각에는 아직도 집단학살의 흔적이 남아있다. 미군의 총탄과 파편 흔적(○, △ 표시)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1999년 액체방수공사를 실시해 내부의 탄흔 일부는 가려졌으나 쌍굴다리 후면에는 보호망이 설치되어 비극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2003년 6월 30일 노근리 쌍굴다리를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했다.
노근리사건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쌍굴다리 옆에 희생자 추념을 위한 노근리평화공원(황간면 목화실길 7 (노근리, 방문자센터))이 건립되었다. 4만여 평에 이르는 공원 내에는 학살사건의 전모와, 사건의 진실을 밝혀낸 과정이 전시되어 있는 평화기념관이 세워져 있으며 평화와 인권에 대해 교육할 수 있는 교육관, 위령탑 등이 있다. 이곳에는 물의 정원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해마다 노근리 희생자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1924년 충청북도 청주시 문화동에 특이한 건물이 들어섰다. 경사가 급한 지붕을 네 방향에서 십자가 형태로 지은 ‘뾰족집’이었다. 고대광실 한옥은 익히 알려져 있었고,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의 집 형태도 어느 정도 눈에 익었으나, 2층으로 지은 뾰족집은 특이했다. 집이 들어선 문화동 일대를 당시에는 동정(東町)이라는 일본식 거리명으로 불렀다.
원래 청주읍성 동쪽이라 하여 동리(東里)라고 했는데, 일본인들이 제멋대로 정(町)이라는 자기네 방식의 가로명을 붙인 동네다. 뾰족집은 관사였다.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지부장(飯田國夫로 추정됨)의 살림집을 겸한 손님맞이 집이라고 했다. 뾰족집은 경사가 급한 네 방향 지붕이 만나는 지점마다 삼각형 박공을 만들어낸다. 이등변 삼각형 형태의 박공이 네 개나 있으니 집은 세모로 만든 집 같다. 청주 당산(현재 당산공원)이 보이는 지점의 박공에는 창이 나 있고, 작은 나무 발코니까지 달려 있다. 창을 열고 경치를 보라는 배려인 듯하다. 뾰족집은 살림집이라기보다는 전망 좋은 관광지에나 있을 법한 방갈로처럼 보인다. 왜 이런 집을 지었을까.
1908년 충청북도의 중심지가 충주에서 청주로 옮겨온 이래 청주는 일본인들이 장악한 상태에서 근대도시로 바뀌어갔다. 1911년부터 1915년까지 ‘시구개정’이라는 이름 아래 도시 정비 사업이 펼쳐졌다. 청주읍성이 허물어졌고, 도로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청주 시가지 정비는 다른 도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다. 일반적으로 일본인 주거지를 중심으로 신시가지를 만들고 가로망을 형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 읍성 내의 도로를 직선화하고 폭을 넓히는 방식이었다.
1922년에는 도시기반시설과 문화와 교육 시설을 확충하는 ‘대청주계획’이 수립됐다. 과거 읍성의 동쪽, 즉 문화동과 서운동에도 새로운 주거지 겸 상업지역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뾰족집’은 이 같은 분위기를 타고 지금까지 청주 사람들이 본 적 없는 집을 지어야겠다는 구상이 낳은 건축물로 추정된다. 뾰족집은 1922년 공사에 들어가 1924년 준공되었다.
건축주인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충북지부는 당시 청주에서 조선식산은행 다음으로 잘 나가는 금융기관이었다. 원래 금융조합은 1907년 농민 조합원의 서민금융을 목적으로 출범했다. 그러나 1918년 금융조합령이 공포된 이후 성격이 바뀌었다. 도시의 상공업자도 조합원이 되는 도시 금융조합이 가능해졌다. 각 도마다 금융조합연합회가 설치되어 산하 금융조합을 통제했다. 금융조합의 예금액은 1920년대 들어 100배 이상 성장했다. 대출을 통한 수익도 급증했다. 일본 금융시장의 자금이 조선식산은행을 거쳐 각 도 금융조합연합, 지역 금융조합에 흘러들어가 막대한 수익을 거둬들이는 구조였다.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충북지부가 근사한 관사를 지은 배경이 짐작된다.
관사는 서양식과 일본식이 절충된 방식으로 건축됐다. 우선 1층은 지부장의 살림집이었다. 현관으로 들어서면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고, 중복도를 따라 가면 독립적인 거주 공간으로 통하는 구조였다. 2층은 접객실이었다. 발코니까지 설치된 창 달린 방이 손님맞이 공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창문 열어 전망을 감상하기 좋았고, 방도 하나 있어 묵어갈 수 있었을 듯하다. 마당에는 수목이 울창한 정원도 가꾸어져 있었다. 1937년에는 서쪽으로 200m 지점쯤에 충청북도 도청이 들어섰다.
그러나 ‘뾰족집’은 21년 뒤 해방을 맞으면서 적산가옥이 되었다. 적산가옥을 불하받은 사람은 기독교인이었는데, 1946년부터 2층을 교회로 사용했다. 월남한 교인들이 중심이 된 청주중앙교회가 1948년 교회를 신축할 때까지 ‘뾰족집’ 2층을 예배 공간으로 사용했다. ‘뾰족집’은 1954년 청주YMCA로 넘어가 1980년까지 YMCA 회관이 되었다. 청주YMCA는 1955년 정원이 있던 자리에 예식장 겸 집회 공간으로 활용할 강당을 지었다. 뾰족집의 연면적이 133㎡(약 40평)이고, 1층의 면적은 84㎡(약 25평)인데 비해 강당 연면적은 141㎡(약 43평)이다. 부속건물 격인 강당이 더 크다.
1980년대부터 ‘뾰족집’에는 ‘우리예능원’이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강당은 유치원으로 변했다. ‘우리예능원’은 2019년 현재까지 거의 50년 가까이 ‘우리예능원’이다. 청주 토박이들이 건물의 이력은 몰라도 ‘우리예능원’이라고 하면 금방 알아듣는 게 당연하다. ‘우리예능원’은 이영순 원장이 어린이 음악교육을 꾸준히 진행하면서 이름난 연주자들을 길러냈다. 이 원장은 특히 마림바(marimba)가 국내에 생소할 때 이 악기를 가르쳤다. 마림바는 실로폰의 일종으로서, 울림통이 달려 있는 악기다. 아프리카에서 라틴 아메리카로 건너간, 멕시코 등지의 민속 악기로 알려져 있다. 서양식과 일본식 절충 양식으로 지어진 뾰족집에서 수십 년간 흘러나온 마림바 연주는 청주 사람들에게 추억의 소리로 기억된다.
뾰족집은 2002년 등록문화재가 처음으로 지정될 당시 첫 10건 속에 들어갔다. 청주에서는 청주 대성고등학교(구 청주상업학교) 강당이 제6호이고, ‘우리예능원’이 제9호다. 전국적으로 보았을 때도 눈에 먼저 뜨이는 소중한 근현대 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최초 지정 당시에는 문화재 명칭이 ‘청주 우리예능원’이었으나 지금은 ‘청주 문화동 일·양 절충식 가옥’으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다. 우리예능원에서 200~500m 안에는 충청북도 도청 본관(등록문화재 제55호), 도지사 관사(제353호), 구 충북산업장려관(제352호) 등 여러 건의 등록문화재가 있다.
영국 성공회 선교사들은 조선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번역했다. 영국 성공회 선교부에서 발행한 선교잡지의 제목이 ‘The Morning Calm[朝鮮] ’이었다. 1890년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첫발을 디딘 선교사들은 서울과 강화도에서 시작하여 선교 영역을 점차 넓혀나갔다. 영국 성공회는 1905년 충청북도 진천을 한반도 중부 내륙의 선교 거점으로 선택하고 1907년 김우일[영국 이름 Wilfred N. Gurney] 신부를 내려보냈다. 진천교회의 시작이다.
김우일 신부는 1908년 성당을 지었으나, 1920년 소실되었다. 현재 성당의 원형은 유신덕[영국 이름 George E. Hewlett] 신부가 1923년 다시 지은 ‘성모와 성 요한 성당’이다. 성당은 1974년 도시 계획상 소방도로 개설에 따라 방향을 틀어 다시 지어졌다가, 2002년 11월 아예 해체하여 현재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 한옥 성당은 이건 직전인 2002년 2월 등록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한옥 성당은 2003년 새로 지어진 대한성공회 진천성당의 현재 본당 옆에 있다.
진천성당은 ‘선교 지역 토착화’라는 성공회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자 한 한옥 성당이다. 가로로 긴 한옥을 세로축으로 전환하여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 공간을 조성한 방식에서부터 성공회 선교 초기의 정신이 잘 드러난다. 진천성당에 앞서 지어진 강화 성당이나 온수리 성당도 같은 방식을 사용한 한옥 성당이다. 일제강점기까지 지어진 성공회의 성당은 대부분이 한옥으로 건축되었다.
붉은 벽돌로 벽을 쌓고 기와로 팔작지붕을 올린 진천성당의 내부로 들어가 보면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나무기둥들이 서양 성당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천장의 목조 가구(架構)도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방식으로 성당 내부의 장엄함을 강조하는 서양 건축적 요소를 살렸다. 창호 역시 목조나 높은 창을 두어 서양 요소를 접목시켰다. 한마디로 한국의 전통사찰 건축방식과 서양 공간의 결합이다.
진천성당은 설립 이래 충청북도는 물론이고 충청남도 천안 일대와 경기도 남부 그리고 강원도 원주까지 성공회를 선교하는 거점 역할을 했다. 성공회 선교는 의료와 교육을 중시했으므로, 진천에는 교회와 거의 동시에 병원이 들어섰다. 강화 온수리에서 의료 선교를 하던 노인산[영국 이름 Arther F. Laws] 의사 부부가 진천으로 와 애인병원(愛人病院)을 세웠다.
애인병원은 입원실과 수술실까지 갖춘 근대 의료시설인 데다, 노인산 의사의 의술이 뛰어나 외지의 환자들까지 찾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애인병원은 1941년 일제의 선교사 추방 정책에 따라 폐쇄되었다. 진천성당은 1912년 신명학교도 설립했다. 진천의 신명 학교는 1937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삼수 학교로 강제 흡수당할 때까지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신명 학교는 기숙사를 마련해 공동생활을 통한 교육도 지향했다. 진천성당은 1929년 진천유치원을 세워 유아교육에도 힘썼다.
가난과 질병 퇴치, 근대 교육에 힘을 쏟은 결과 진천성당은 신도가 크게 늘었다. 1923년 통계에 따르면 세례 신자만 940명에, 주일학교 출석 어린이가 25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가장 신도가 많았던 시기 진천성당 재적 교인은 3,000명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일요일에는 성당 마당에 큰 가마솥을 5개나 걸고 밥을 준비했다고 한다.
병이 다 나으면 꼭 우리 성당에 오지 않아도 됩니다. 집 가까이에 있는 어느 교단의 교회든 다니시면 됩니다.
애인병원 노인산 의사가 환자들에게 당부하곤 했다는 말이다. 단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진천 한옥 성당에 들어서면, 가난하고 병든 식민지 백성들을 보듬으려고 헌신했던 당시 선교사들의 사랑이 전해지는 듯하다. 한옥 성당 한쪽에는 거울이 달린 고풍스러운 풍금이 놓여 있고, 한복 차림을 한 성모 마리아의 그림도 걸려 있다.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괴산리 괴산중학교 옛 본관은 가로 길이가 77m나 되는 “돌집”이다. 건물 기초는 물론이고 외벽을 전부 다듬은 화강석으로 지었다. “돌집” 교사 착공에서 완공까지 무려 4년이 넘게 걸렸다. 준공 시점은 1951년 6월이다. 한국전쟁 중에도 공사가 이어졌다는 얘기다.
해방되자 한반도의 교육 열망이 폭발했다. 괴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괴산의 근대 교육은 1909년 선교사인 밀러(F. E. Miller · 한국이름 민노아) 목사가 일도면 면부리에 교회 부설로 세운 돈신소학교가 효시다. 돈신학교 이후 몇몇 사립 교육기관이 설립되었으나 1910년대에 모두 폐교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괴산군에도 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섰다. 1911년 괴산 공립보통학교와 청안 공립보통학교 이래 1개 면에 1개 초등교육기관이 모두 세워진 시점은 25년이나 흐른 1936년이다. 곳곳에 간이학교와 심상소학교가 문을 열었으나, 괴산의 교육열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정규 중등교육기관은 괴산을 통틀어 한 곳도 없었다.
괴산 사람들의 숙원은 1946년에야 풀렸다. 괴산 공립 초등중학교가 3년제 6학급 규모로 인가를 받은 것이다. 괴산군민들은 개교하자마자 학교 건축 준비에 들어갔다. 김응규 옹이 토지를 희사하고, 면별로 비용을 할당해 거뒀다.
학교 건물은 처음부터 화강암 석조로 짓기로 작정했다고 추정된다. 이미 석재를 가져올 장소도 물색해 두었다고 한다. 건축 시공은 당대 최고 수준인 서울중앙산업주식회사에 맡겼다. 서울중앙산업은 특히 석조 건축 잘하기로 소문난 회사였다. 멋들어진 중학교를 짓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서울중앙산업은 1947년 3월 1호관 건립 공사에 착수했다.
“돌집”의 석재는 충청북도 괴산과 음성의 경계에 있는 토옥골[고사리 밭골] 치마바위를 깨트려 마련했다. 발파작업을 하여 큰 덩어리 돌로 쪼갠 다음 석공 20명이 달려들어 다듬었다. 석공들은 무려 3년간이나 토옥골에 머물면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치마바위 산 맞은편의 시루산 공기 바위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장수 두 명이 음성 읍내와 시루산에서 서로 마주 보고 바위를 공기놀이하듯 던져 주고받으며 하루해를 보냈다는 것이다. 공기 바위는 지름이 2m가 넘는 큰 바위다. 더구나 두 산은 10㎞ 이상 떨어져 있다. 괴산중학교 옛 본관이 된 치마바위의 크기를 미루어 짐작게 해 주는 옛이야기다. 어쨌든 1호관이 1947년 3월 완공되자, 1947년 7월부터 2호관 공사에 들어갔다. 맞붙어 있는 1호관과 2호관은 규모도 같고, 외양도 똑같다.
괴산중학교 구 본관이라 함은 한 몸인 듯 건축된 두 동을 일컫는다. 2호관 공사 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나, 기록에 따르면 공사는 1951년 6월 준공되었다고 한다. 괴산중학교 구 본관에는 모두 8개의 방이 있다. 5개는 교실이고, 나머지는 교무실, 서무실, 교장실로 쓰였다. 창문이 4개 난 방은 교실이고, 창문 6개 방은 교무실이며, 서무실과 교장실은 각각 2개의 창을 냈다고 한다. 해방 후 목조 아니면 벽돌조로 교사를 짓던 시절에, 석조로 장중하게 지어진 학교는 충청북도를 통틀어 한 곳도 없다.
교실은 1948년 6년제 괴산중학교가 되었다가, 1977년 괴산고등학교가 분리되면서, 중학교의 본관으로 쓰였다. 1994년 이후에는 어학실, 생물실, 체육관 등 특별교실로 사용되던 “돌집” 본관은 이후 도서실, 음악실 등으로 바뀌었다. 화강암의 질감이 살아있는 괴산중학교 구 본관은 2007년 등록문화재 제354호로 지정되었다.
청주시 상당구 수동에 위치한 ‘충북문화원’은 1939년부터 71년간 충청북도지사 관사로 사용된 곳을 리모델링하여 개관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충청북도지사 구 관사는 1937년 충청북도청 본관이 건립된 후 충청북도지사의 거처를 위해 마련한 사택이다. 충청북도지사 관사는 원래 1912년에 지어졌으나, 1936년에 충청북도청이 충주에서 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자리로 이전하면서 신축된 것이다. 구 관사는 1대 윤하영 도지사부터 14대 김효영 도지사까지 사용했다.
1층 규모의 관사는 목조구조를 기본형식으로 하는 일본 상류층 주택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전면은 서양식, 후면은 일본식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내부는 외부 접견실과 주 생활공간이 구분되어 있으며, 공간에 따라 건축 양식도 다르다. 접견실은 서양식 창호를 설치하였으며, 생활공간에는 다다미와 미닫이 창호를 설치했다. 다다미가 설치된 맨오른쪽 큰 방을 도지사가 사용하고, 그 옆방은 자녀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서양식으로 꾸며진 접견실은 조찬모임, 회의 등에 자주 사용되었다.
청주 충청북도지사 구 관사는 1969년에 새 관사가 지어진 이후로 회의실 또는 타 시도에서 방문한 손님이나 해외인사, 대통령 등에게 만찬을 베푸는 영빈관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시민들에게 개방된 후 2012년부터 충북문화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충북도청의 소재지는 본래 충청북도 충주시였다. 충주에 관찰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1896년(고종 33)에 반포한 칙령 36호에 36개의 부(府)와 13개의 도(道)를 둔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충청도는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로 분리되면서 각각 충주와 공주에 관찰부가 생겼다. 1908년(순종 1)에 칙령 30호가 반포되면서 관찰도의 위치는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되었다. 관찰부가 청주로 옮겨오게 된 데는 충주 관찰부 일본인 서기관 가미타니 다카오(神谷卓男)의 의견이 크게 작용했다. 충주가 산악으로 둘러싸여 있어 반란군의 근거지가 되기 쉽다는 것과 청주가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더 적합하다는 내용이었다.
1908년 충주에서 청주로 옮긴 관찰부 청사는 현재 상당구 남문로2가에 있는 중앙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전 준비 없이 이전한 탓에 별도의 청사 건물을 두지 못하고 청주 관아와 병영의 건물을 임시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후 1937년 김동훈 지사 재임 당시 도청부지를 이전했다. 당시 도청부지에는 ‘잉어배미’라고 불리는 연못이 있었는데, 건물을 올리기 위해서는 연못을 메워야 했다. 이에 청주향교 앞 우암산 자락을 깎아 흙을 퍼서 연못을 메우고, 산을 깎은 자리에는 도지사 관사를 지었다.
충청북도지사 구 관사는 현재 도민을 위한 복합문화예술공간이 되어 시민들의 발길을 반기고 있다. ‘문화의 집’으로 거듭난 구 관사는 신 관사를 활용한 ‘숲속갤러리’, 야외공연장과 함께 충북문화관의 핵심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문화의 집을 방문하면 각 시군을 대표하는 충북 문인 12명의 작품과 시대별 문학사, 관사에 대한 시설 등과 관련된 자료를 관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