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항에 일본 어부들이 드나들기 시작한 시기는 1900년경이다. 1902년 돔을 잡으러 나선 일본어선 50여 척이 구룡포에 정박한 일이 있었고, 1909년 고등어 풍어를 계기로 구룡포에 아예 눌러 살려는 일본인들이 늘어났다. 이미 1883년 조일통상장정이 체결되었고, 1889년에는 조일통어장정에 따라 일본 배도 조선 해역에서 어업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은 어업 정책이 혼선을 빚은 데다 남획으로 근해 어획이 고갈된 상태였다. 근대 어업을 조선보다는 일찍 받아들인 상태여서 배와 도구 모두 조선 어부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구룡포는 일본 어부들이 정착하기 전에는 조선인이 살지 않는 지역이었다는 이야기가 정설인 듯 전해지지만, 최근 구술 연구 등에 따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조선인은 바닷가 쪽이 아니라 해안 구릉지 위쪽에 살았다. 구룡포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구릉지 아래 바닷가 쪽에 정착했다. 구룡포가 항구로 발전해 나가는 초기부터 일본인과 조선인은 거주 지역이 달랐고, 이 구도는 해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인 이주자가 많아지면서 일본인 거리는 바닷가를 따라 점점 길어졌지만, 조선인이 사는 구릉 쪽으로는 확장되지 않았다.
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구룡포로 건너온 일본인 가운데는 시코쿠의 가가와현 어부들이 많았다. 가가와에서 내해(內海) 건너 혼슈 와카야마현 등 다른 지역 출신들도 있었지만, 가가와현 출신의 비중이 절반 이상이었다. 이들은 ‘가가와현민회’를 구성해 뭉쳤는데, 현민회의 중심 인물은 하시모토 겐키치(橋本善吉)였다. 하시모토는 1909년 구룡포에 정착해 활어를 나르는 사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하시모토는 1923년 일본인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2층 저택을 지었다. 평범한 일본식 점포 주택과는 격이 다른 집이었다. 일본에서 직접 자재를 가져다 완벽하게 일본식으로 지은 하시모토의 집이 현재 바로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 쓰이는 건물이다.
하시모토가 이끄는 가가와현민회와 경쟁하는 관계였던 다른 일본 지역 출신들은 와카야마현에서 온 도가와 야스브로(十河彌三郞)다. 하시모토와 도가와는 방파제를 쌓고 항구를 만드는 일에는 협력했다. 일본인의 집 2층에서 바다로 직접 다이빙을 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일본인 거주지는 바다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서나 고기잡이를 위해서나 축항은 시급한 과제였다. 1926년 1차 축항 작업이 완공되었고, 1935년 2차 축항 공사가 완료됐다.
일본인들은 50m쯤 더 바다 쪽에 방파제를 쌓고자 했으나, 미역이 붙어 자라는 바위(곽암) 주인들인 조선인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건 말고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구룡포에서 부딪친 사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조선인은 대부분 영세한 어민이거나 일본 어선에 고용된 신세였고, 거주 공간은 아예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룡포의 조선인 사회와 일본인 사회는 다른 삶을 살았을 뿐이다.
구룡포의 일본인들은 번창했다. 일제강점기 구룡포항에는 성어기(초가을~겨울)에 600여 척의 어선과 1만 명가량의 선원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600척 가운데 500척은 일본인이 선주였고, 동력을 갖춘 어선이 많았다. 조선인의 배 100척은 작은 목선이 고작이었다. 일본 어부들은 고기를 잡아 돈을 벌었고, 일본 상인들은 항구에 들어온 배에 식량과 생필품을 공급해 돈을 벌었다. 방파제를 쌓아 안전해진데다 매립으로 새로 생긴 땅까지 더해 일본인 거리는 해안을 따라 커져만 갔다.
고급 여관(대등여관), 일급 요릿집(일심정), 기업 규모로 커진 회사들이 일본인 거리에 생겨났다. 반면 어로작업을 하는 선원의 95%는 조선인이었다. 구룡포 만의 통계는 없으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어획 소득 비중은 60%에서 53%로 줄어든 반면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소득 비중은 40%에서 47%로 늘었다. 1941년 기준으로 한반도 전체 어업 인구의 2%도 안 되는 일본 어부들이 어획에 따른 소득의 절반을 가져갔다는 얘기다. 구룡포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인들은 1917년 일본인 주거지와 조선인 주거지 사이에 위치한 면사무소 부근에 신사를 지었다. 구룡포항이 내려다보이는 신사로 가려면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1944년에는 계단 양옆으로 120개 돌기둥을 세워 구룡포항 축항에 기여한 일본인들의 이름을 새겼다. 언덕에는 일본에서 나무화석을 가져다 도가와 야스브로를 기리는 송덕비도 세웠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에게 부를 안겨준 구룡포에서 영원히 번영하기를 기원했을 듯하다. 그러나 1년 후 그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해방 직후 돌기둥은 거꾸로 박히고, 일본인 이름들은 지워졌다. 송덕비 비문에도 시멘트가 발라졌다.
포항시는 2011년부터 예전 구룡포 일본인 거리를 복원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사업 초기 명칭은 ‘구룡포 일본인가옥 거리 조성사업’이었으나, 중간에 ‘구룡포 근대문화역사 거리’ 사업으로 바뀌었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가옥 가운데 남은 집은 51채로 파악되었다. 470여m에 이르는 거리의 예전 일본인 집을 복원하고, 하시모토의 집은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 꾸몄다. 대등여관은 호호면옥으로, 요릿집 일심정은 일본식 찻집 후루사토야로 바뀌었다. 적산가옥이 즐비했던 뒷골목은 관광객이 다시 찾는 ‘테마거리’로 새롭게 조명 받았다.
포항시는 2008년 일본인 가옥 가운데 5채를 선정해 문화재청에 등록문화재 지정을 신청했으나 보류되었다. 하시모토의 집도 2013년 문화재위원회 근대문화재 심사에서 등록문화재로 인정되지 못했다. 하시모토의 집이 일본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90년 된 건축물이라는 평가는 받았으나,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서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짚어내 살리지 못한 점이 지적되었다. 식민지 시절 일본인 거리를 드라마 세트장(‘여명의 눈동자’, ‘동백꽃 필 무렵’)으로 쓰는 일이야 나무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식민지 근대’의 자취를 관광자원으로만 활용하려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다.
러시아와 일본은 1899년 마산포(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가 개항될 무렵부터 진해만 일대에 눈독을 들이고 치열하게 경합했다. 러시아는 극동함대(태평양함대)의 보급기지이자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을 확보하고 싶어 했고, 일본은 한반도와 대륙으로 가는 길목인 대한해협을 독차지 하려는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마산포 부근에 조차지를 확보하는 경쟁에서 앞선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웅천(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군인을 상륙시켜 군항(軍港) 건설에 착수했다. 일본은 러일전쟁 직전부터 수심이 깊고 잔잔한 진해만의 진해가 군항으로 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일본군은 막무가내였다. 농경지 주인의 허락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졸지에 농토를 빼앗긴 주인이 항의하자 끌고 가 무자비하게 태형을 가했다. 심하게 매를 맞은 밭주인이 평생을 병마에 시달리다 숨졌다는 기록도 있다. 농민도, 어민도, 고을 아전들도 급작스레 들이닥친 일본군을 피해 달아나기 바빴다. 대한제국 정부의 내부대신(이지용)은 오히려 일본을 적극 도와주라는 명령을 현지에 내렸다. 추후 토지보상이 이뤄졌으나, 통역과 관리들의 협잡 등으로 주민들은 정당한 보상을 받기 어려웠다.
일본은 1910년 진해에 “동양 최대 군항을 세운다”고 선전하며 공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명분과는 달리 1916년 진해에는 군항보다 한 등급 낮은 요항(要港)이 들어섰다. 진해 요항부 동쪽, ‘중평 한들’이라 부르는 비옥한 들판에 시가지 건설도 진행되었다. 역시 조선인들은 쫓겨나, 현재의 진해구 경화동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진해 시가지는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도시였다. 시가지는 제황산 바로 동쪽에 중원로터리를 조성하고 8갈래로 길을 냈다.
욱일기 문양을 생각나게 하는 배치다. 8갈래 거리는 다시 바둑판처럼 도로를 조성했다. 이른바 방사직교(放射直交)형 거리가 만들어졌다. 일본은 시가지에 500동 정도의 집을 지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가로변 건물은 반드시 2층 이상이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8갈래 길이 시작되는 지점에는 독일 프랑스 영국 등 8개 나라의 건축양식을 따른 건물을 지었다.
유일하게 현재까지 초기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건물이 하나 있다. 1912년 지어진 러시아 풍 진해우체국이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 우체국의 지붕과 난간까지 모두 공출해 갔지만 1980년대에 복원됐다. 정면 현관에 배흘림 원기둥이 인상적인 진해우체국 건물은 사적 제291호로 지정돼 있다. 진해우체국에서 중원로터리 건너 거리에는 ‘육각집’ 혹은 ‘뾰족집’이라 부르는 6각 지붕의 3층 건물이 있다. 역시 1912년 지어진 이 건물은 당초 여기 한 곳만이 아니라 중원로터리 주변에 2채가 더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이 건물만 남았다. 중국풍 건물인 육각집 3층에서는 진해시가지 전망이 들어온다. 지붕과 3층을 제외하면 건물 전체의 모습은 원형과는 거리가 있다. 이름난 술집이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음식점(새수양회관)이다.
중원로터리에서 남동쪽으로 가면 일본식 다가구 주택이라고 할 수 있는 장옥(長屋)이 거리를 따라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엔 장옥이 이 근처에만 세워지지 않았다. 가로 곳곳에 장옥이 있었지만 현재는 이곳이 원형에 가깝다. 일본말로 ‘나가야’라고 부르는 장옥의 1층은 점포이고, 2층은 살림집이었다. ‘장옥거리’ 더 남쪽에 있는 음식점(선학곰탕)은 1930년대에 지어졌다. 원래는 진해해군 통제부 병원장이 사택으로 쓰던 건물이다. 응접실은 서양식이고, 뒤편 주거 공간은 일본식인 목조 주택으로서, 등록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될 만큼 일제강점기 건축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중원로터리에서 북쪽 길로 곧장 가면 진해역이 나온다. 진해역은 1926년 일본이 해군기지 유지를 위해 부설한 진해선(창원역~통해역)의 역사다. 진해선은 경부선 및 경전선(경상남도~전라남도)의 지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지방 철도의 역사 모습을 잘 보여주기 때문에 등록문화재 192호가 되었다. 원래 모습을 완전히 잃었으나 일제강점기 진해를 잊지 못하게 하는 장소는 제황산(107m) 위에 있다. 일제는 1927년 제황산 위에 ‘러일전쟁 승리 기념탑’을 세웠다.
제황산은 예전에는 부엉등, 부엉산으로 불렸고, 봉우리는 두엄봉이라 했다. 부엉등 북쪽에 제왕이 태어날 명당이 있다는 전설이 당시에도 전해졌는데, 명당의 기운을 누르려고 승전탑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진해 사람들 사이에 돌았다. 전함의 마스트(갑판에 세운 수직 기둥) 모형으로 건립되었던 탑은 해방 후 헐렸다. ‘탑산’이라는 별칭도 제황산으로 바로잡혔다.
일본 해군의 탑이 있던 자리에는 1967년 한국 해군의 군함을 상징하는 높이 28m 9층의 탑 모양 건물이 들어섰다. 1층과 2층은 시립 진해박물관으로 1998년 개관했고, 위에는 전망대가 있다. 중원로터리에서 제황산으로 오르는 길은 365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1년 계단’이라고 불린다. 보행이 힘든 사람들을 위해 모노레일 카도 운행된다. 일제강점기 진해 신시가지의 건물 대부분은 시간이 흐르면서 당연히 외관도, 내부도 크게 바뀌었다.
중원로터리 서쪽 갈래 거리에 지어진 1911년 건물은 해방 후 진해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음식점이 되었다. ‘6각집’ 다음 거리에 위치한 이 중국음식점(원해루)은 한국전쟁 때 중공군으로 왔다가 포로 생활을 했던 중국인이 차렸다고 알려져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다녀가기도 했다는 중국집은 진해에서 해군 복무를 한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다녀갔다고 할 만큼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이후 건조물이기는 하지만 북원로터리의 충무공 이순신 동상도 의미가 깊다. 충무공 동상은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1952년 건립됐다. 충무공 동상으로는 국내에서 최초로 세워진 동상이어서, 철저한 고증작업을 통해 충무공의 모습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고 알려져 있다. 후일 세워진 충무공 동상은 진해의 동상을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오늘날 전국에서 봄이면 인파가 몰리는 진해 군항제는 충무공 동상 제막 후 연 추모제에서 비롯됐다. 1950년대에는 진해에 해군, 육군, 공군 사관학교가 모두 있었다. 전쟁 때문에 공군사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가 임시로 진해에서 교육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남원로터리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시비(詩碑)도 진해 군항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백범은 1946년 진해를 방문해 해안경비대(오늘날의 해군) 장병들을 격려했고, 이순신 장군이 남긴 한시 가운데 한 구절을 친필로 써 남겼다.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바다에 서약하니 물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맹산초목지(盟山艸木知·하늘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원래 백범의 친필 시비는 북원로터리에 있었으나, 정적 이승만 대통령의 진해 방문 당시 진해역 창고에 넣어 두었다가 나중에 남원로터리로 옮겼다고 한다. 비석은 깨어진 부분을 붙인 흔적이 있다. 이승만에게 충성하던 장교가 집어던졌다고 하고, 좌익 소행이라 하기도 하는데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다. 어찌 됐든, 해방 공간의 어수선한 대립 정국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중원로터리에서 북원로터리 쪽으로 있는 ‘문화공간 흑백’은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진해 일대의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 역할을 했던 곳이다. 건물은 1912년 진해 시가지가 형성될 때 지어졌는데, 작곡가 이별걸이 ‘칼멘’이라는 상호로 운영하던 다방을 1955년 유택열 화백이 인수해 1층은 고전음악다방으로 2층은 작업실로 썼다고 한다. 흰 벽과 선명하게 대조되는 검은 출입문과 창호로 하여 ‘흑백(BLACK & WHITE) 다방’이라고 했다. 흑백다방은 유치환, 김춘수, 전혁림 등 경상남도의 예술인이 자주 드나들던 장소로 유명하다. 현재는 연주와 전시 등 복합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시간의 지층을 화석처럼 보여주는 진해의 근대문화 유산은 90곳이 넘는다. 이 가운데 진해우체국은 국가사적이고, 구 진해 요항부 사령부를 비롯한 군사적 유산과 진해역은 등록문화재다. 충무공 이순신 동상, 백범 김구 선생 친필 시비, 진해탑, 흑백다방 등은 창원시 근대건조물로 지정돼 있다. 역시 시 지정 근대건조물인 여좌천 제방은 일제강점기 석축으로서, 로망스 다리와 함께 진해 군항제 때 벚꽃을 즐기려는 관광객에게 인기가 높은 코스다.
진해시는 2010년대 들어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3개 지역을 ‘진해 군항 역사길’로 조성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장옥이 늘어선 지점에서 통제부 병원장 사택에 이르는 ‘장옥거리’, 군복에 마크를 달아주는 점포가 밀집한 중원로터리에서 공설운동장 간 ‘마크사 거리’, 중원로터리에서 제황산으로 오르는 코스다. 2015년부터는 진해역 혹은 ‘해군의 집’에서 출발해 북원로터리 이충무공 동상~문화공간 흑백~군항마을 역사관~군항마을 테마공원~6각집(뾰족집)~원해루~남원로터리 김구선생 친필시비~선학곰탕(통제부 병원장 사택)~장옥거리~진해우체국~제황산~진해역에 이르는 투어코스를 운영한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시작하더라도 근대와 현대가 진해에 남긴 역사를 음미할 수 있다.
대중가요 <목포의 눈물>과 <목포는 항구다>는 목포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도, 타관사람에게도 항구도시 목포가 지닌 아련한 슬픔을 전해준다. <목포는 항구다>의 노랫말처럼 목포에는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이 있었다. 1897년 개항한 전라남도 목포시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조선 4대 항구이자 6대 도시로 꼽히는 근대도시로 성장했다. 현재 유달동, 만호동에 해당하는 목포의 구 도심은 일본 등 외국자본에 의해서 간척된 계획도시였다. 그래서인지 목포에는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건물이 유난히 많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만호동과 유달동 일대의 번영로에 근대건축 유산이 집중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2018년 8월 6일 이 일대 11만4,038㎡(602필지)를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제718호로 지정했다. 대한제국 시대,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의 생활사를 동시에 보여주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근·현대를 관통하는 이 거리에 서면 왜 목포를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부르는지 실감하게 된다. 걸음걸음마다 역사의 흔적이고 골목골목마다 옛 삶의 자취가 역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갈피마다엔 ‘항구의 슬픔’이 알알이 박혀있다.
개항기 일본이 목포를 계획도시로 개발하면서 조선인의 삶은 궁지로 내몰렸다. 대대로 살아오던 삶터에서 내쫓겼기 때문이다. 도시개발은 일본인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일본인들은 ‘구 각국공동거류지’에 마을을 형성했고 계급차별과 민족차별이라는 이중적 착취를 당해야 했던 조선인들은 ‘구 목포부 부내면 쌍교리’ 일대에 마을을 형성했다. 당시 쌍교리에는 무덤이 많았는데 일본인들에게 밀려난 조선인들이 목포에서 갈 곳은 쌍교리 밖에 없었다고 한다. 삶터를 빼앗긴 조선인들은 무덤을 옮기고 그 자리에 마을을 형성했다.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인들은 무덤 터에 만들어진 마을에서 빈곤과 착취, 형편없는 주거환경에 시달려야 했다.
반면 유달산 남쪽에 있어 ‘남촌’이라 불렸던 일본인 거주 지역은 일본식 기와집이 즐비했고 집집마다 수돗물이 나왔다. 빈민굴로 불렸던 조선인 거주지 ‘북촌’에서는 물 부족으로 인해 걸핏하면 급수제한 조치가 있었다. 조선인들은 물 한 지게를 얻으려면 하루 종일 수도 앞에 줄을 서야 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이렇듯 고생을 한 터이니 조선인들의 일제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은 적지 않았다. 따라서 해방 후 일본인의 흔적인 적산에 대해서도 보존보다는 철거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컸다. 따라서 일본인의 공간이었던 ‘남촌’에 밀집된 적산가옥과 일본풍 건축물 중 많은 수가 철거되기도 했다. 목포경찰서(1907년 건립, 1983년 철거), 목포우체국(1929년 건립, 625 때 소실), 부산세관 목포지서(1908년 건립, 1968년 철거), 조선은행 목포지점(1924년 건립, 1988년 철거), 조선식산은행 목포지점(1910년 건립, 1997년 철거) 등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존을 주장하는 시민들의 ‘목포의 근대 문화유산 살리기 운동’ 덕분에 많은 수의 근대건축물이 살아남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에 남아있는 건축물 역시 개발논리, 반일감정 속에서도 용케 살아남았다. 특히 이곳은 오랜 기간의 개발지체로 인해 철거를 면했는데 개발에서 뒤처진 덕에 문화재가 된 것이다. 이중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개별 건축물은 15개이다. 일본식 가옥 4곳(제718-1, 2, 3, 4호), 구 목포부립병원 관사(제718-5호), 구 목포 일본기독교회(제718-6호), 상가주택 6곳(제718-7, 8, 9, 10, 12, 13호), 구 동아부인상회 목포지점(제718-11호), 목포 해안로 붉은 벽돌창고(제718-14호), 구 목포 화신연쇄점(제718-15호)이 근대역사문화공간에 포함되어 있다.
1935년에 지어진 구 목포 화신연쇄점은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 마을의 경계이자 상업지역이었던 오거리에 있으며, 화신백화점의 체인점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2층 건물로 2층 난간에는 바로크풍의 기둥장식이 되어 있으며 다케우치(竹內)라는 상징이 붙은 철제 금고가 남아 있다. 해방 전에는 화신백화점이 이용했고 해방 후에는 대한통운이 사용했던 금고이다. 구 목포 화신연쇄점은 폐점 이후 호남 최초의 여류화가 김영자 갤러리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개인 소유 건물로 비어있다.
구 동아부인상회 목포지점 건물은 마치야(2층 일식상가) 구조로 역시 1935년에 지어졌다. 이곳은 화신백화점에 맞서 조선인 부인들이 경영한 민족자본의 상점 건물로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현재는 문화예술협동조합이 운영하는 ‘나무숲’이란 복합문화공간 겸 창작센터가 됐다. 한편 번화로와 해안로 일대에는 2층 목조 상가 주택이 늘어서 있으며 골목마다 적산가옥이 빼곡하다.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내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15채의 건물 외에도 적산가옥(敵産家屋)이 100여 채에 이르며 ‘목포진지’, ‘구 목포 일본영사관’,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구 목포공립심상소학교’ 등 다양한 근대건축 유산이 남아 있다.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은 기존 ‘점’(點) 단위 개별 문화재 중심의 보존에서 탈피해 문화재청이 ‘선(線)‧면(面)’ 단위 문화재 등록제도를 도입한 첫 사례이다. 근대 시기에 형성된 거리, 마을, 경관 등 역사문화자원이 집적된 지역을 통째로 보존함으로써 활용을 통한 도시 재생 활성화를 촉진하기 위한 정책이다. 그에 따라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에서는 지역축제인 ‘문화재야행’ 매년 개최되고 있다. 문화재야행은 개별 역사문화유산을 연계해 옛 풍취가 배어있는 도시경관과 건축물, 유물을 찾아볼 수 있게 하고 문화재와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한 지역의 명물 시장과 먹거리, 전시회, 공연, 숙박시설 등을 하나로 묶어 효율적이자 더욱 풍성한 역사문화관광이 이루어지게 하는 축제이다.
1899년 경인선 영등포역이 영업을 시작했을 때, 영등포 일대가 공업지대로 변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시흥군 북면에 속했던 영등포 일대는 자주 범람하는 안양천 하류의 저지대 한촌이었다. 철도변 신흥 도시들이 그러했듯이, 일본인들이 들어와 상권을 형성하는 정도였다. 1905년 영등포가 경인선과 경부선이 갈라지는 분기점이 되었을 때도, 상권과 도시화가 빨리질 것을 눈치챈 일본인들만 역 주위에 더 몰려들었을 뿐이다. 통감부가 향후 경성 인근에 공장지대를 만들 경우 영등포를 후보지 가운데 하나로 점찍었으나 실제로 추진되지는 않았다.
영등포에 최초로 들어온 큰 공장은 1911년 영등포역에서 북쪽으로 꽤 떨어진 당산리에 자리 잡은 조선피혁주식회사였다. 일본인이 세운 조선피혁은 조선의 질 좋은 쇠가죽으로 군수용(軍需用) 피혁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그나마도 경성에서 한강 건너 영등포에 자리 잡기를 꺼려하는 사주에게 조선총독이 강력히 요청해서 겨우 입지가 결정되었다. 조선총독은 경인선 영등포역에서 조선피혁까지 경인선과는 별개의 인입 철로까지 깔아주었다.
두 번째 큰 공장은 철도차량을 제작하는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영등포공작창)이었다. 1919년 상당한 규모의 부지를 확보한 영등포공작창은 현재 도로명 주소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산로 36 일대에 자리 잡았다. 1980년대 공작창 기능이 대전으로 옮겨가면서 영등포공작창은 폐쇄되었다. 당산동 조선피혁이나 영등포공작창 자리는 모두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흔적을 찾기 어렵다.
세 번째 큰 공장은 1923년 영등포역 가까운 곳에 건립된 경성방직주식회사 공장이다. 조선인 자본으로 만든 최초의 주식회사, 해방 후 증권시장에 상장된 1호 기업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경성방직은 전국의 조선인들이 주주로 참여한 민족자본 공장이었다. ‘태극성’이라는 상표로 면직물을 생산한 경성방직은 조선인들이 자부심과 애착을 느끼던 민족기업이었다. 경성방직 역시 현재는 ‘경방 타임스퀘어’라는 복합 쇼핑몰 공간으로 바뀌었지만, 당시 사무실로 쓰던 건물만은 남아 있다. 붉은 벽돌 건물인 경성방직 사무실은 경성방직의 의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영등포는 1910년 당시 시흥군의 중심지가 되었고, 1917년에는 시흥군 북면에서 독립하여 영등포면(영등포리·당산리·양평리)이 되었다. 약간의 자치권도 가지고 있던 면(지정면)이었다. 영등포에 조선피혁, 영등포공작창, 경성방직까지 자리 잡았다 해도 공업지대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으나, 1930년대 들어 분위기가 바뀌었다. 일본이 조선에서도 공업 진흥책이 필요하다고 보고, 경성 근처에서 영등포를 점찍었기 때문이다. 교통 편리하고, 땅값 싸며, 용수 풍부한 영등포에 공장 터를 확보하는 일본의 독점 자본도 늘어났다.
1934년에는 대일본맥주가 영등포역 뒤편 서쪽에, 기린맥주가 영등포역 뒤편 동쪽에 들어왔다. 대일본맥주와 기린맥주는 일본에서 선두를 다투는 맥주회사들이었다. 두 맥주회사 공장 자리는 조선요업과 경성요업의 공장이 있던 곳이다. 1936년에는 종연방적주식회사가 경성방직과 근처에 공장을 지었고, 이듬해에는 종연방적 서쪽에 동양방적이 들어왔다. 대일본방적도 1939년 당산동 조선피혁 근처에 공장을 지었다. 제분회사인 일청제분주식회사도 1936년 경성방직과 종연방적 부근에 공장을 세웠다.
현재, 옛 기린맥주 공장 자리에는 영등포공원이 조성돼있다. 공원이 되기 전에는 OB맥주 생산 공장이었다. OB맥주는 1997년 경기도 이천으로 옮겨갔다. 영등포공원에는 OB맥주 시절 맥아와 홉을 끓이던 대형 담금솥이 기념물로 남아 있다. 대일본맥주 자리에는 후일 하이트맥주가 생산되는 공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푸르지오)가 들어서 있다. 종연방적 자리는 마지막에 방림방직 공장이었다가 현재는 ‘에이스 하이테크’라는 첨단 지식산업 센터가 들어서 있다. 종연방적은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었는데, 고려방직-태창방직을 거쳐 1960년대 재일교포 서갑호(徐甲虎)가 세운 판본방직 공장이 되었다가 방림방직으로 상호가 변경되었다. 경성방직, 방림방직 공장들은 1970년 이후 섬유산업이 쇠퇴하자 결국 공장을 포기한 경우다.
일청제분은 1953년 조선제분이 되었다가 1958년에는 대한제분 공장으로 가동되었다.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 대선제분에서 생산 가공되는 밀가루는 서민들에게는 요긴한 양식이었다. 대선제분 영등포공장은 2013년 충청남도 아산으로 옮겨갈 때까지 가동되었다. 대선제분 공장 내에는 대형 사일로와 창고 등 23동에 이르는 건물이 남아 있다. 대한제분 공장은 2015년 영등포 도시재생활성화 지역에 포함되어, 현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하는 중이다.
영등포 일대는 1930년대 중반에 경성(서울)으로 편입되면서, 본격적인 공업지구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방직 공장과 음식료 공장 등 경공업 중심이던 영등포에도 1940년대 들어 일본의 군수물자 생산과 관련되는 금속·기계공업 공장이 속속 들어왔다. 하지만 여전히 경공업이 중공업보다 우세했다. 일제강점기 말이 되자, 인천에서 부평과 부천을 거쳐 영등포에 이르는 경인로는 연속적인 공업지대로 연결되었다. 식민지 근대 공업화라는 뒤틀린 측면이 강했지만 영등포는 공업화의 한 축으로 작동했다. 해방 후 본격적인 중공업 투자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영등포 일대는 한국 공업화의 상징인 경인공업지대의 서울 쪽 끝단이었다.
영등포역의 서쪽 영등포구 문래동은 일제강점기에 도림동의 일부분이었다가 해방 후 독립된 동이 된 곳이다. 문래동이라는 동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근대가 시작되면서 ‘글[文]이 왔다[來]’ 해서 문래동이 되었다는 설과 고려 말 문익점(文益漸)과 연결시켜 설명하는 설이 전해진다. 그런데, 문래동 동쪽에 굵직한 방직회사들이 많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실을 잣는 기계 ‘물레’가 변하여 문래동이 되었다는 설이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정작 문래동을 유명하게 만든 업종은 ‘철공업’이다. 1960년대부터 청계천의 철공소들이 공업지대인 영등포 서쪽으로 하나둘 옮겨 와 철공소 밀집지역을 이루었다. 1970년대부터 문래동 철공소들은 ‘철판으로 사람 빼고는 못 만드는 것이 없다’고 할 만큼 다양한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철판을 실은 트럭들이 문래동 철강공단 거리에서 여의도까지 기차처럼 줄을 지어 대기했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
문래동 철강공단 거리에는 1990년대 말부터 중국산 부품이 밀려오고, 철강 산업이 기계화되면서 문을 닫는 철공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빈자리에 2000년대 초부터 예술인들이 찾아와 둥지를 트는 경우가 늘어났다. 빈 철공소나 가동 중인 철공소 위층을 얻어 예술 작업을 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임대료가 쌌다. 이에 따라 문래동 ‘샤링 골목’을 중심으로 철공소 노동자들과 예술인들이 함께 공존하면서 각자 자신의 일을 하는 공간이 자리 잡았다. ‘샤링’이란 영어 ‘셰어링(Shearing)’의 일본식 발음으로서 철판을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의미한다. 2015년에는 서울문화재단이 문래동에 ‘문래동 창작촌’을 만들고 예술가들 지원에 나섰다.
문래동 철강공단 거리에서 서쪽으로 몇 블록 가면 문래동 영단주택 단지가 나온다. 조선총독부가 1941년 영등포 공업지구의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세운 주택단지다. 조선총독부는 20평 규모에서부터 8평 정도까지 여러 크기로 주택을 지어 분양했는데, 이 영단주택 단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오백 채(혹은 이백 채)를 한꺼번에 지었다 하여 ‘오백채 마을’(혹은 ‘이백 채 마을’)로 불렸던 문래동 영단주택 단지는 일제강점기 영등포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당시 영단주택에 사는 사람은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 영등포역에서 철로를 따라 형성된 ‘쪽방촌’은 근대 개발이 시작된 이래 살 곳을 잃은 사람들의 거주지였다.
오늘날의 영등포는 일제강점기보다 훨씬 넓다. 경성 남쪽 교외 공업도시에서 경성의 공업지구로, 해방된 나라의 산업화를 이끌던 지역으로 커지면서 인접 동네들을 계속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래 예전 공장들 상당수가 사라졌다. 현재의 영등포를 보면 공업도시의 이미지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대선제분 공장, 경성방직 자리, 문래동 철강공단, 문래동 영단주택 등 공업화 초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천천히 거닐며 영등포의 근현대사를 음미하기에 적합한 장소들이다.
대전광역시는 2017년부터 대전 근대문화예술특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오늘날 대전시의 모태 격인 중구와 동구 일대의 근현대사를 문화예술과 접목시켜 대전 원도심에 역사성을 소환하고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자는 취지다. 대전 근대문화탐방로도 특구 사업의 일환으로 지정했다. 약 5.2㎞에 이르는 탐방로는 대표적인 근현대 건축물 9곳을 돌아보도록 짜여 있다. 대전시가 파악하기로 특구 안에 등록문화재만 11곳, 근대건축물은 32곳이 있기 때문에 모두 다 살펴보게 코스를 설정하기는 어렵다. 탐방로를 기준으로 근현대사 산책을 시작하되, 더 깊이 느끼고 싶은 장소는 발길 가는대로 찾아가는 게 좋다.
탐방로 시작점은 대전근현대사 전시관이 가장 적당하다. 대전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볼 자료가 풍부한데다, 전시관 자체가 등록문화재 제18호인 근대문화유산이다. 전시관은 원래 충청남도 도청이 1932년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오면서 도청 건물로 지어졌다. 대전역과 동-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도청이 들어서자 이후 역과 도청을 잇는 현재의 중앙로를 따라 관공서와 상권이 발달했다. 역사를 음미하려면, 역사가 형성된 메인 스트리트를 천천히 걸어보는 게 좋다.
대전역에서 시작하는 방법도 괜찮다. 대전이 철도 도시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경부선(1905년)이 놓이기 전까지 대전은 그저 작고 한적한 농촌에 불과했다. 대전은 1914년에 개통된 호남선과 경부선의 분기점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근대 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대전역 동편 동구 소제동에는 1930년대 철도에 종사하는 일본인들을 위해 지어진 관사촌이 있다. 원래 100채 정도 지어졌다고 하는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40동 가량이 남았다.
일본인은 호수 소제호를 1927년 매립한 자리에 관사촌을 지었다. 관사촌과 이어진 솔랑시올길, 철갑길은 철도 도시 대전의 원초 모습을 짚어볼 수 있는 장소다. 철도와 관련된 대전역 근처 근대유산은 하나 더 있다. ‘구 철도청 대전지역 사무소 보급창고 3호’(등록문화재 제168호)다. 나무 비늘판벽인 인상적인 창고는 1956년에 지어졌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분기하는 역답게 대전역에서는 열차 정비창도 있었는데, 보급창고는 수리와 정비에 쓰이는 자재를 보관하던 곳이다. 다른 창고들은 헐리고 3호 창고 1개 동만 남았다.
대전역에서 근대문화탐방로를 따라 옛 도청(대전근현대사 전시관) 쪽으로 중앙로를 따라가기 전에 대전로로 남쪽부터 가볼 수도 있다. 대전로는 대전역 앞에 남북으로 놓인 대로다. 조금 내려가면 신한은행 대전역 금융센터가 나오는데, 이 건물은 원래 조흥은행 대전지점이었다. 등록문화재 제20호인 옛 조흥은행 대전지점의 현 건물은 1957년 지어졌다. 물론 조흥은행 대전지점은 일제강점기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 1912년 조선 최초의 상업은행인 한성은행 대전지점으로 시작하여 1943년 은행이 이름을 바꿈에 따라 조흥은행 대전지점이 되었다. 1950년대 건물치고는 세련된 모더니즘 양식을 보인다. 탐방로를 따라 갈 경우 대전역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들리는 지점이다.
이왕 대전로를 따라 나선 길이라면 더 남쪽으로 내려가 악명 높은 동양척식회사 대전지점(대전로 735)까지 보는 게 좋다. 1922년 건립된 2층 붉은 벽돌 건물로서, 등록문화재 제98호다. 현재는 일반 점포들이 들어서 있는데, 정면 상부에 인상적인 릴리프는 그대로 있다. 동양척식회사가 대전과 충청남도 농민들의 고혈을 짜내던 기관이라는 사실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구 동양척식회사에서 대전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동구 인동 한국전력공사 쪽으로 접어들면 ‘한전 대전보급소’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 제99호가 된 근대유산이 나온다. 1930년 대전 최초로 지어진 근대산업 시설이다. 2층 높이인 발전소와 3층 높이인 업무시설이 붙어 있는 맞배지붕 붉은 벽돌 건물이다. 1930년대 대전의 밤을 밝히는 역할을 했던 이곳은 현재 전기를 이용한 첨단 기술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근현대를 관통하는 전기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지만 건물만 등록문화재일 뿐 관련 내용이 전시되는 공간은 아니다.
이제 대전역에서 중앙로를 따라 발길을 옮겨 보자. 처음 눈에 띄는 근대유산은 구 산업은행 대전지점 건물이다. 1937년 조선식산은행 대전지점으로 출발하여 해방 후 산업은행으로 간판을 바꾼 르네상스 양식의 은행건물은 현재 안경점으로 변했지만, 일제강점기 은행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구 산업은행 대전지점은 등록문화재 제198호다. 구 산업은행을 지나 서쪽으로 가면 대전천 위에 놓인 목척교가 나온다. 목척교는 대전을 동서로 가르는 대전천에 1912년 처음 놓였다. 이전에는 대전천을 건너려면 징검다리를 이용해야 했다고 한다. 목척교는 1932년 콘크리트 다리로 다시 건설되었고, 대전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간직한 추억의 다리로 기억된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목척교가 만남의 장소였다고 한다. 1970년대에 대전천 복개에 따라 용도를 잃었다가 2000년대 후반 복원되었다. 하지만 예전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목척교 지나 곧장 올라가면 옛 도청이고, 옛 도청에서 보문로를 따라 대전고등학교 건너편까지 오면 엣 충청남도 도지사 공관이 있다. 옛 도지사 공관은 1932년 지어졌으며, 충청남도청이 2012년 내포신도시로 이전한 후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공관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49호다. 다음은 대전여중 강당을 찾아갈 차례다. 1937년 마치 파도의 모습을 본뜬 듯한 지붕과 측면의 큼지막한 네모 창들의 조화가 인상적인 건물이다.건물의 모서리들도 벽돌로 정교하게 쌓은 모습이 돋보인다. 현재는 대전광역시 교육청 대전갤러리로 활용되는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6호다.
대전여중 강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흥동 성당이 있다. 대흥동 성당은 1960년대 초기에 지어진 성당이다. 서양 고딕 성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수직과 수평의 형태로 지어졌다. 수직으로 뻗은 전면은 가운데로 갈수록 높이 올려 종탑을 설치했는데, 마치 두 손바닥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모더니즘 성당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643호가 되었다. 대흥동 성당 맞은편에는 옛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충청지원 건물이 있다. 1958년 건립된 건물은 기능주의에 충실하게 동선 위조로 설계되었고, 창문에 설치한 사각 프레임이 돋보인다. 대전에서도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히며, 등록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돼 있다. 현재는 대전시립미술관 대전창작센터다.
대전의 근대문화유산을 돌아보면서 ‘뾰족집’을 빼놓을 수는 없다. 1929년 대전 철도국장의 관사로 지어진 건물이다. 현관 부분 1층과 2층이 원통형으로 돌출되어 있는데, 안의 구조는 천장 쪽으로 원뿔 모양이다. 서양 성(城)의 원뿔형 건축을 연상시킨다. 일본 양식과 서양 양식을 절충시켜 특이하게 건축한 것이다. 사실 이 건물은 여기에 있지 않았다. 등록문화재 제377호이지만 2010년 재개발 과정에서 무단 철거되었다가 현재의 위치(대흥동 37-5)에 다시 지어졌다.
대전 근대문화탐방로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꼭 들러볼만한 장소들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중구 중촌동에 있는 옛 대전형무소와 망루는 1919년 이곳에 들어섰던 대전형무소 시절의 유구로서, 한국근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수감되었던 장소이자, 한국전쟁 때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된 장소여서 대전 다크 투어리즘의 대표적 장소에 해당한다. 또한 중구 동서대로에 있는 옛 옥동성당(현재 거룩한말씀의수녀회 성당)은 1921년 대전에서는 처음으로 지어진 성당이다. 이 성당에서 순교한 사제만 12명에 이르고, 민간인도 수백 명 학살되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로 시작되는 노래 <대전 부르스>는 원래 1963년 안정애가 부른 곡이다. 가사에 나오는 ‘대전발 0시50분’ 열차는 1년 정도 운행했을 뿐이지만, 대전 사람은 물론 전국에서 사랑받는 노래였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분기하는 대전이 20세기 초반부터 지금까지 겪어낸 세월과 역사를 몇 번의 산책으로 모두 파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근대문화탐방로를 따라 가든, 원도심의 골목을 내키는 대로 걷든 대전의 역사를 확인할 장소들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부산광역시 중구 용두산 공원 동쪽 기슭에는 17세기부터 초량왜관(倭館)이 설치되어 있었다. 왜관은 일본 상인들이 조선인들과 교역을 하는 거주지다. 초량왜관은 1876년 일본이 힘으로 조선의 부산포를 강제 개항시키면서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로 성격이 바뀌었다. 조금 일찍 서구의 근대를 받아들였을 뿐인 일본인들이 자신들조차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근대를 조선에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초량왜관은 10만 평 규모로 확장되어, 일본이 전권을 행사하는 전관거류지가 되었다. 근대도시 부산의 원도심은 이로부터 차츰 모습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부산은 일본이 중요시한 항구였으므로 1902년부터 1908년까지 이른바 ‘북빈매축사업’이 진행되었다. 현재 중구 중앙동 일대 바닷가를 매립하고 토목공사를 벌여 시가지를 정비하는 사업이었다. 중앙동 북쪽 영주동 쪽으로 시가지를 넓히는 공사는 1909년에서 1913년까지 진행되었다. 해발 50m 정도였던 영성산이 이때 완전히 사라졌다. 항만을 만드는 공사는 1911~1918년 1차 공사를, 1919~1928년 2차 공사를 진행해 부산항이 건설되었다. 일련의 공사를 통해, 경부선과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관부연락선을 연계시킬 수 있게 됐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관청들은 용두산 일대에 자리 잡았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용두산의 정기를 끊기 위해 용의 눈에 해당하는 자리에 쇠말뚝을 박고, 용 허리를 가르는 도로를 냈으며, 용의 꼬리 격인 용미산을 아예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부산부청을 세웠다고 한다. 부산부청이 있던 자리는 현재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들어서 있다. 중구 중앙동과 남포동 건너편은 원래 절영도라 불리던 섬이었다. 사람은 별로 살지 않고 군마를 기르던 곳이었는데,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 빨리 달린다 하여 절영도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절영도가 바로 현재의 영도다. 영도 쪽으로는 우선 근대식 조선소들이 들어섰다. 1887년 일본인이 세운 목선 조선소를 시작으로, 영도구 대평로 일대에 수많은 조선소와 선박 수리점, 부품점이 생겨났다. 1937년에는 철강으로 큰 배를 건조하는 조선중공업(훗날 한진중공업)이 들어섰다.
남포동 맞은편 영도에는 일명 ‘깡깡이길’이라는 코스가 있다. 고장 난 선박을 수리하기 위해 ‘깡깡이질’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거리다. ‘깡깡이질’이란 배를 수리하기 전에 배에 들러붙은 패각류를 떼어내고, 부식된 도료를 벗겨내는 일을 가리킨다. 망치를 들고 선체를 두드리며 작업을 하는 동안 ‘깡깡’ 하는 소음이 쉴 새 없이 나기 때문에 ‘깡깡이질’이라 부른다. 주로 가난한 부녀자들이 이 작업을 했는데, 작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도 ‘깡깡’ 하는 환청이 계속 들렸다고 한다.
1934년 중앙동과 영도를 잇는 다리인 영도대교가 개통되었다. 초기에는 부산대교라고 불린 이 다리는 배가 들어올 때면 들어 올려지는, 최초의 도개교였다. 중앙동 쪽 다리 구간이 서서히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장관이어서 수많은 구경꾼 인파가 몰려들곤 했다. 하루 2~7회 들어 올려지던 다리 위로는 전차도 다녔다. 영도다리는 한국전쟁 시기 피란민들이 혹시 헤어질 경우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에도 영도다리가 등장한다. 영도다리 주변에는 애타게 상봉을 기다리는 이산가족에게 점을 쳐주는 점집이 70여 곳이나 들어서기도 했다. 영도다리는 1966년 교통량이 늘어나 도개를 중단했다. 2013년부터 하루 1차례 오후 2시에 시범적으로 도개 작업이 진행된다.
1925년 경상남도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해온다. 부산은 개항 이후 일본 상품이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항구였고, 거주 일본인이 급격하게 늘어난 도시였다. 1925년 무렵엔 부산 거주 일본인이 4만 명을 넘어섰다. 진주 사람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청 이전이 강행되었다. 당시 지은 도청 건물이 서구 부민동에 남아 있다. 등록문화재 제41호인 이 건물은 해방 후 한국전쟁 시기의 용도가 더욱 강조되어 ‘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등록되어 있다. 한국전쟁 때 부산은 1023일간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다. 당시 대통령도 부산에 내려와 예전 경상남도 도시사가 관사로 쓰던 집에서 살았다.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현 임시수도 기념관)는 ‘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현 동아대하교 박물관) 인근에 있는데, 일대 거리 전체가 ‘대한민국 임시수도 기념거리’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내내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였던 부산은 해방 후 급증하는 유입 인구로 몸살을 앓게 된다. 해방 직후엔 배를 타고 돌아온 귀국 동포 가운데 약 15만 명이 부산에 터를 잡았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50만 명이 피란해 옴으로써 극심한 주택난과 도시기반 시설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실업자 또한 넘쳐났다. 유입 인구는 서구, 중구, 동구, 영도구 등의 산 중턱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부산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보수동, 초량동, 영주동, 수정동 산길을 따라 줄줄이 판잣집이 들어섰다. 1960년대 중반 이들 동네를 연결하는 산복도로가 개설됐다. 말 그대로 산(山)의 배(腹)를 따라 낸 길이었다. 서구 아미동의 경우 예전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납골당 위에도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산복도로 주민들은 산 아래 도심으로 내려가기 위해 계단 길을 이용해야 했다. 168계단, 200계단, 500계단 등 여러 계단 아래로 내려가 일거리를 찾아야 했고, 먹을 물을 긷고 수백 개나 되는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땅 부산에는 정주민과 이주민이 갈등하고 섞이며 만들어낸 근대의 궤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인구가 400만 명에 이르는 대한민국 제2의 대도시 부산의 근대 자취를 요약하는 일은 사실 불가능하다. 산복도로 마을들로 오르는 길만 해도 수십 곳이다. 용두산에서, 영도에서, 산복도로에서 부산을 삶터로 삼은 시민들이 겪어낸 고통과 좌절, 다시 되찾은 희망과 용기는 직접 돌아보지 않고는 실감할 수 없다.
부산관광공사는 2015년부터 ‘부산 원도심 스토리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원도심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있는 길을 계속 개발 중이다. 2019년 운영한 스토리투어의 경우 6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영도다리 건너 깡깡이길을 걷다, 용두산 올라 부산포를 바라보다, 이바구길 걷다, 국제시장 기웃거리다, 흰여울마을 만나다, 공동어시장 남항을 품다, 이렇게 6개 코스다. 각 길을 따라 가면 개항 이후 부산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부산의 근대는 이들 코스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근대가 부산에 무엇을 가져다주었고, 던져준 문제점과 숙제는 무엇이며, 어디서부터 미래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는 부산에 가서 생각해볼 일이다.
경남관광공사가 추천하는 경상남도 진주시 근대역사문화 코스는 중앙시장 체험 길이다. 진주성 북쪽 비봉산(138m) 아래 비봉루에서 출발해서 수정봉 아래 옥봉성당을 거쳤다가 천황식당과 진주 중앙시장을 돌아 배영초등학교 구 본관과 진주초등학교 강당을 살펴본 후 진주성에 이르는 경로다. 조선시대 내내 경상남도의 중심 도시였던 진주가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겪어야만 했던 변화를 진주 중앙시장 체험 길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도록 짜여 있다.
진주시 창렬로 205-17 비봉루(飛鳳樓)는 1939년 세워진 누각이다. 비봉루에 오르면 진주 시가지와 진주성, 남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9~1392)가 쉬려고 찾아오곤 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포은의 후손 정상진이 지었다고 한다. 정상진은 명태 유통업으로 재산을 모으기 시작해 만석꾼도 아니고 ‘3만석꾼’이라 불리던 진주 부자였다. 비봉산 일대가 전부 그의 땅이었다고 할 정도다. 거부가 된 후손이 절경이라 소문난 땅에 역사 인물 조상의 행적을 기려 일제강점기 말에 전통 누각을 세운 사연이 흥미롭다.
비봉루가 지닌 의미는 한 가지 더 있다. 정상진의 장남이자 서예가인 정명수가 비봉루에서 1969년 진주차례회(晋州茶禮會)를 조직한 것이다. 진주차례회 설립은 서울차인회 창립으로 이어졌고, 서울차인회는 한국차인회의 결성을 낳았다. 한국의 차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진주차례회가 시발점이 된 것이다. 정명수는 최범술, 박종한, 최규진과 교류하면서 차의 깊은 맛을 알게 되었고, 차 문화 보급에 뜻을 모았다. 최범술은 차의 대가였고, 박종한은 진주 대아중·고등학교 설립자이자 교장으로서, 경상남도 남해의 하천재를 하천다숙으로 바꾼 장본인이다.
비봉루 남서쪽 옥봉성당은 수정봉 아래에 있다. 경상남도 천주교 전래 역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옥봉성당은 1911년 문산성당 옥봉공소로 시작해, 1933년경 현재의 성당을 완공했다. 옥봉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종탑이 특히 아름답다. 옥봉성당은 등록문화재 제582호다. 옥봉성당이 자리 잡은 수정봉은 가야 시대 고분군이 발견된 유서 깊은 장소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수정봉 가야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을 무리하게 해석해 임나일본부설의 증거가 발견됐다고 억지 주장을 폈다.
옥봉성당에서 진주 중앙시장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천황식당(촉석루 207번길 3)이 나온다. 전주비빔밥 못지않게 유명한 진주비빔밥으로 전국에 소문난 집이다. 천황(天凰)이란 하늘의 봉황을 뜻한다. 천황식당은 1927년 ‘대방네’라는 상호로 영업을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현재 3대에 걸쳐 비빔밥 전문집으로 영업 중이다. 식당 건물은 1948년경 지어졌다고 한다. 제철 나물을 잘게 손질하고, 소고기 육회를 얹어 비벼 먹는 진주비빔밥은 조선시대 궁중에서도 즐겨 먹는 음식이었다고 전해진다. 진주에는 천황식당 외에도 진주비빔밥이 맛있기로 손꼽히는 음식점이 몇 곳 더 있다.
다음 코스는 진주중앙시장이다. 그러나 진주중앙시장의 역사를 살피려면 먼저 옥봉동 진주 상무사부터 살펴봐야 한다. 상무사(商務社)는 1895년 설립된 상인조직이다.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전국적으로 보부상이 크게 늘어났는데, 이들을 조직화하기 위해 조선 정부가 만든 조직이 상무사다. 명칭은 상무회의소, 상무회, 상무사 등 여러 차례 바뀌었고, 일제강점기에 각 지역 상공회의소가 설립되면서 해체되었다.
보부상은 원래 봇짐장수(보상)와 등짐장수(부상)를 가리키는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5일장을 떠돌면서 행상을 하던 상인이 보부상이었다. 그런데, 보부상은 근대에 들어서면 고정된 자리에 자신의 점포를 갖고 장사를 하는 상인으로 점차 변해 간다. 진주의 경우 1890년대 초부터 정주(定住) 상인이 등장하기 시작해서 1890년대 후반이 되면 점포가 상당히 늘어나는 양상을 보인다. 진주 중앙시장의 기원은 이렇듯 자리를 잡고 상업에 종사하는 점포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주는 전국에서 가장 땅이 비옥한 지역이다. 또한 남강을 통해 북으로는 낙동강, 서남으로는 남해와 물길이 원활하다. 게다가 진주는 경상도 남쪽의 행정과 군사 중심지였다. 기름진 농토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남해의 수산물, 서쪽 지리산의 목재와 약재 등이 진주에 모이기 좋은 위치였기 때문에 진주에는 일찍부터 시장이 발달했다. 1900년경에도 진주성 북문 밖에는 곡물 객주가 100여 호나 즐비하게 늘어설 정도였다. 진주 상무사는 진주 관할 17개 군의 상인들을 통솔하는 조직이었다. 상호부조는 물론이고 상도(商道)를 규율하는 역할도 했다.
진주 상무사는 초기엔 조선 정부의 지휘·감독을 받는 조직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민간조직이었다. 주목되는 사실은 1910년 상무조합 진주지부가 조직될 때 친일인사는 아예 배제했다는 점이다. 이미 진주는 1902년 무렵부터 일본인들이 진출해 일부 업종의 상권을 장악했지만, 보통의 조선 상인들은 일본 상권에 맞서 자생적 상인 조직으로 버텨나가려 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진주 상무사가 처음으로 자체 건물을 지을 때는 전국의 보부상들이 자금을 모아 지원했고, 1936년 대홍수로 건물이 무너진 뒤 1938년 새로 현재의 상무사 건물을 다시 지을 때도 지역상인 120여 명이 모금에 참여했지만, 일본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읍내에서 옥봉동으로 위치를 옮겨 신축된 진주 상무사 건물은 전통 목조기와로 지어진 한옥이다. 1939년 진주 상공회의소가 설립되면서 결국 진주 상무사는 해체되고 말았다. 진주 상공회의소 초기 회원 명부에는 일본인이 100명 가까이 이름을 올렸다. 진주 상무사 건물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33호다. 진주 상무사에서 보관하던 예전 문서와 인장 등 근대 초기 상업활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유물은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진주 중앙시장은 4가지 업종(四廛)으로 출발했다. 포목을 취급하는 포전, 생선과 과자를 파는 어과전, 비단을 거래하는 금전, 종이를 다루는 지전이다. 진주의 면포는 ‘진목(晋木)’이라 하여 국내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포목으로 꼽혔다. 진주 비단 역시 전국 생산량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거래량이 많았다. 이웃 고을인 경상남도 산청과 함양에 잠업 농가가 많았고, 진주 남강 물로 비단을 염색하면 때깔이 좋다 하여 사려는 사람이 몰렸기 때문이다. 1910년대에는 진주 시장이 전국 5대 시장 가운데 하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진주 중앙시장의 취급 품목도, 매출액도 달라졌다. 1966년에는 큰 화재가 발생해 점포 모두가 전소됐다. 현재의 시장은 1967년 진주중앙공설시장으로 다시 문을 열었으나 1970년대 들어 시장부지가 개인 소유로 바뀌었다. 전국의 전통시장이 그렇듯이 진주 중앙시장도 대형 마트가 들어서고, 소비자들의 생활 패턴이 달라지면서 예전만큼 활기차지는 않다. 그래도 활어와 채소류를 파는 새벽시장은 활기를 이어가고 있고, 비단과 한복을 파는 주단가게도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중앙시장에서 나와 진주성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들를 장소는 배영초등학교 구 본관과 진주초등학교 강당이다. 배영초등학교는 1908년 진주에 들어온 일본인 자녀 교육을 위해 설립된 진주공립심상소학교로 출발했다. 해방 후 한국 어린이를 위한 학교가 되면서 ‘배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배영초등학교 구 본관은 1938년 지어졌는데, 학교가 1998년 이전해 나가고 운동장 자리에 들어온 진주교육지원청 뒤편에 있다. 서양 고전양식을 일본식으로 변형한 배영초등학교 구 본관은 등록문화재 제582호다. 배영초등학교 옆 진주초등학교는 1895년 경상우도소학교로 시작되었다. 1934년 지어진 강당은 당시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아담한 건물로 평가된다. 배영초등학교와 진주초등학교 자리는 원래 신라 고찰의 전설이 서려 있는, 대사지(大寺池)라는 천연해자였는데, 일본인 읍장이 1930년대에 메워버렸다고 한다.
식민지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 진주는 ‘북 평양, 남 진주’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큰 고을이었다. 그러나 1925년 경상남도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고, 대사지가 매립되는 등 일제강점기 진주는 전통의 모습을 잃고 근대도시로 변모해야 했다. 진주 중앙시장 체험 길은 근대의 시간이 진주를 경과하면서 남긴 역사를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다.
미국 남 장로회 선교사들은 1904년 광주 지역 선교를 위해 양림리 지역 땅을 사들였다. 읍성이 멀지 않았으나 땅값이 헐했기 때문이다. 버드나무 숲이 무성하고, 산죽(山竹)으로 화살을 만들어 왕실에 바치기나 했던 양림(楊林)에는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다. 숨진 어린아이를 짚으로 싸서 나무에 달아 풍장(風葬)을 지내던 외진 변방이었다. 식민지 근대와는 다른 근대의 길은 그렇게 광주에 도착했다.
유진 벨(Eugene Bell, 한국이름 배유지), 클레멘트 오웬(Clement Owen, 한국이름 오기원) 등 선교사들은 교회와 사택을 짓고, 교육과 의료 사업에 착수했다. 선교사들은 1904년부터 10여 년 동안 오늘날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일대에 10여 곳의 건물을 세웠다. 광주 사람들은 사직공원과 호남신학대학교 사이의 길을 ‘서양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은 충장로를 중심으로 근대 시가지를 만들어 간 반면, 미국 선교사들은 양림동을 중심으로 근대의 계몽에 힘을 쏟았다. 양림동에 있는 계몽 근대의 장소를 보려면 일단 호남신학대학교 쪽으로 들어가는 게 좋다. 사실 호남신학은 원래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 해방 후인 1955년 양림동 옆 동네인 백운동에 설립되었다가 1976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호남신학대학교가 이전한 양림산이 바로 미국 남 장로회의 선교기지 자리다. 산길의 이름마저 유진벨길, 오웬길, 윌슨길 등 선교사들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선교사들이 지었던 사택 가운데 유진 벨 선교사 등의 사택은 한국전쟁 시기에 불탔고, 윌슨(Robert Willson, 한국이름 우일선) 선교사의 사택이 양림산에 남아 있다.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05~1911년 사이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1921년 증축됐다. 선교사들이 자신들 고향에서 가져다 심은 이국적인 고목들 속에 2층으로 지어진 건물이며 입구 현관이 인상적이다. 고급 사교장의 역할을 하기도 했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고아원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 서쪽으로도 몇 채의 선교사 사택이 더 남아 있다. 사택 앞 길 끝에는 양림동 호랑가시나무가 있다. 잎의 가시와 빨간 열매가 예수의 탄생과 부활을 상징한다 하여 선교사들이 아끼던 나무다.
우일선 사택 북쪽으로 산책로를 따라 가면 선교사 묘원이 나온다. 1909년 숨을 거둔 오웬 선교사를 비롯하여 유진 벨, 윌슨 선교사들이 여기에 묻혀 있다. 광주 지역에서 활동하다 별세한 선교사 22기만 있었으나, 서울특별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서 이장해 온 23기를 추가돼 현재는 45기가 안장돼 있다. 선교사 묘원에 안장된 오웬 선교사를 기리기 위해 1914년 지어진 ‘오웬 기념각’은 양림산 동쪽 기독간호대학 교내에 있다. 광주 최초의 서양음악회가 열리기도 했고, 광주 YMCA가 창립된 장소로서 광주 시민사회에서 잘 알려진 곳이다.
양림산 남쪽 광주 수피아 여자 중·고등학교는 학교 자체가 선교의 결실이다. 선교사들은 교회 다음으로 교육과 의료에 힘썼는데, 선교사들이 세운 남자학교는 숭일학교였고, 여자학교는 광주여학교였다. 광주여학교는 1911년 미국인 재니 스피어(Jennie Speer)의 언니가 헌금한 자금으로 학교 건물을 지으면서 동생의 이름을 따 수피아 여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수피아 홀은 등록문화재 제158호다. 학교 안에는 또한 학교 설립자인 유진 벨 선교사를 기념하여 1925년에 지은 커티스 메모리얼 홀(등록문화재 제159호), 1927년 건립된 윈즈버로우 홀(등록문화재 제370호), 1935년 준공된 수피아 강당 등 건축사적으로나 교육사적으로나 가치가 높은 문화재가 있다.
숭일학교의 경우 불령선인 양성소라 하여 1931년 중학교 과정이 폐지되었고, 1937년에는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며 소학교도 자진 폐교했다. 해방 후 다시 숭일학교라는 이름을 되찾았으나, 양림동이 아니라 광주시의 다른 지역에 학교가 위치했기 때문에 양림동에서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양림동 시절 숭일학교의 자리에는 현재 무등파크맨션이 들어서 있다. 수피아 여학교도 광주 3·1 만세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1940년 조선총독부가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함으로써 폐쇄되었다가 해방으로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다.
의료선교의 결실은 광주기독병원의 전신인 광주 제중원이다. 의료선교사들은 선교사 사택에서 진료를 시작해서 1905년 제중원을 열었다. 1911년 그라함기념병원을 건립했고, 이듬해는 광주 나병원을 시작했다. 의료선교사들은 나환자 진료와 결핵 치료에 헌신적으로 앞장섰다. 유진 벨 선교사의 외손자인 인세반(미국명 스티브 린튼)과 인요한(존 린튼)은 1995년 유진 벨 재단을 설립해 북한 결핵 퇴치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밖에도 양림동에는 한국의 근대 초기 활약했던 선교사들의 흔적이 여러 곳 남아 있다. 1910년대에 광주 시내에 세웠다가 양림동으로 옮겨온 양림교회가 대표적이다. 양림교회는 해방 후 기독교 교단이 분화되는 과정에서 3개의 교회로 나뉘었지만, 뿌리는 미 남 장로회 선교기지에 있다.
물론 양림동에 미국 선교사들의 근대 유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양림동에는 ‘이장우 가옥’, ‘최승효 가옥’ 등 전통적인 건축물도 있고, 시인 김현승(金顯承, 1913~1975)이나 음악가 정율성(鄭律成, 1914~1976)의 흔적도 있다. 무엇보다도 광주가 근대도시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양림동에 터 잡고 살면서 근현대사의 영욕을 몸으로 겪어낸 양림동 보통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골목마다 가득하다.
양림동 사람들은 2000년 무렵부터 스스로 ‘다 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같은 프로그램을 스스로 발전시켜왔다. 광주광역시도 2010년을 전후해 양림동을 근대역사문화마을로 지정하고, 답사 코스를 만드는 등 근대 광주의 한 축인 양림동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현재 양림동은 광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명 관광지로 부상했다. 기독교 선교의 자취가 생생하고, 전통이 한편에 공존하는데다, 여러 분야의 작가들이 문화 예술의 향기를 발산하는 장소들을 꾸준히 지켜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서양촌’에서 시작하든, 양림오거리에서 출발하든 근현대사가 던지는 다양한 의미의 켜를 음미하면서 산책하기 좋은 동네가 양림동이다.
인천광역시 자유공원은 제물포의 근대사를 조망하기 좋은 산이다. 인천 앞바다와 월미도는 물론이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인천의 근현대사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자유공원 자체가 제물포 근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자유공원의 애초 이름 ‘만국공원’에서부터 1883년 개항과 동시에 제물포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각국이 경쟁하던 역동성이 감지된다.
제물포 개항과 동시에 일본이 가장 먼저 조계지를 설정했다. 항구에서부터 응봉산 아래까지 일본의 조계지가 되자, 청나라가 1884년 일본지계 서쪽에 청국지계를 잡았고, 일본조계 북동쪽에 각국이 앞다투어 조계지를 만들었다.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보면, 바로 앞은 각국 조계지, 더 아래쪽은 일본 조계지, 그 오른쪽 옆이 청국 조계지였다. 조계지 확정 이후 여러 나라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공원을 만들자 하여 조성된 것이 바로 ‘만국공원’이다. 만국공원은 1889년 러시아의 토목기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해 조성되었다. 세레딘사바틴은 인천 해관(세관)을 비롯해 당시 주요한 건물을 다수 설계한 인물이다. 만국공원은 한반도 최초의 근대 공공시설이라 할 수 있다.
1880년대까지만 해도 제물포의 일본인 조계지는 상대적으로 초라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인천광역시 기념물 51호) 서쪽 청국 조계지의 건물들이 더 번듯하고 화려했다. 제물포에 들어와 성공한 일본인들이 있었으나, 청나라 사람들의 광목과 옥양목이 더 잘 팔렸고, 설탕 밀가루 성냥 비누 등 이른바 ‘개화 상품’도 청나라 사람들의 상술이 더 뛰어났다. 하지만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제물포의 주도권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청국 조계지는 오늘날 ‘인천 차이나타운’의 모태다. 1908년 중국 상인들의 숙소로 지어진 ‘공화춘’(등록문화재 제246호)을 비롯해 차이나타운 특유의 분위기를 간직한 다양한 건물과 음식점들이 지금도 영업 중이다. 자유공원에서 인천중부경찰서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삼국지 벽화거리’도 있고, 더 아래쪽에는 한중문화관도 있다.
개항기 제물포에서는 청과 일본 외에도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이 경쟁을 벌였다. 지금의 올림포스 호텔 옆에 있던 인천 해관도 독일인 외교 고문의 조언으로 설치되었고, 초기 해관의 장은 영국인이거나 프랑스인이었다. 독일인 무역회사인 세창양행은 현 자유공원 자리에 근사한 사원 숙소를 짓기도 했고, 타운센트 회사, 마어어 회사, 홀름 링거 회사 등이 제물포에 사무소를 두고 조선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했다. 자유공원 남동쪽 기슭의 제물포구락부는 여러 나라 상인과 외교관들이 우아한 파티 이면에서 협력하고 경쟁하던 장소였다. 1901년 지어진 제물포구락부 건물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다. 그러나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가장 치열했던 일본이 결국 제물포를 차지했다. 제물포 개항과 동시에 인천지점을 설치한 일본우선(郵船)주식회사는 1888년 지점 건물을 신축했는데,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일본군병참사령부로 지점을 사용토록 하는 등 조선 연안 해운의 독점권을 차지하기 위해 온힘을 기울였다. 현재 인천아트플랫폼 사무실로 쓰이는 일본우선주식회사 옛 인천지점 건물은 등록문화재 제248호다.
일본의 은행도 속속 제물포에 들어왔다.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1883년 개설, 현 인천개항박물관), 일본제18은행 인천지점(1888년 개설, 현 인천근대건축전시관), 일본제58은행 인천지점(1892년 개설, 현 중구요식업협회) 등 일본의 금융기관은 조선의 화폐발행과 경제를 틀어쥐기 위해 위법적인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본의 금융기관들은 당연히 일본 조계지에 자리 잡았다. 일본 조계지에 남아 있는 일본 회사 가운데는 대화조 사무소가 대표적이다. 개항 직후 일본식 점포-주택의 한 양식으로 지어진 대화조 사무소는 현재 카페로 운영 중이며 원형을 살린 복원의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567호가 되어 있다. 예전 일본 조계지에는 현재 당시 풍으로 꾸민 일본풍 거리도 관광용으로 조성돼 있다. 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청도 당시 일본영사관 자리에 1933년 지어진 옛 인천부 청사 건물이다. 1960년대에 3층으로 증축되기는 했으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등록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돼 있다.
자유공원 남동 방향 거리에만 인천의 근대를 되새겨볼 공간들이 존재하는 건 물론 아니다. 항만 쪽으로 인천 세관 옛 창고와 부속동(등록문화재 제569호)도 있고, 더 북쪽의 북성포구도 파시가 장관을 이루던 인천 근대의 중요한 단면이다. 답동성당, 내리교회 등 종교시설들도 개항기 인천의 면모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장소이고, 자유공원 너머 제물포고등학교, 동구에 속하는 창영초등학교 일대에도 소중한 근대 교육의 현장들이 남아 있다.
일본인들이 자국 조계지에서 축현역(현 동인천역)으로 넘어가는 지름길을 내기 위해 1900년대에 산줄기를 뚫어 만든 홍예문도 인천의 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조물이다. 더구나 자신들의 땅에서 외국 세력이 각축하는 시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들의 삶과 관련된 흔적은 훨씬 더 많다. 개항기 제물포의 역동성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더 깊은 연구와 발품이 필요하다.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살펴본 근대역사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공원은 1919년 3·1만세운동 직후 13개 도의 대표가 회동해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결정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서공원으로 바뀌었다가 해방 뒤인 1957년 자유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전쟁 시기에 인천의 근대기 유산은 상당수 파괴되었다. 맹렬한 포격 속에서 인천상륙작전이 수행되었기 때문이다. 자유공원에는 1957년에 맥아더 동상이, 1982년에는 한미수교 백주년 기념탑이 세워졌다. 어쩌면 자유공원의 역사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천착한다면 인천의 근대를 꿰뚫을 길이 열릴지 모른다.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은 전국에서 가장 작은 읍이다. 면적이 7.01㎢에 2017년 현재 인구가 1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근대 초기 조선 2대 포구, 조선 3대 시장으로 꼽히던 시절 읍 인구가 2만~3만 명을 헤아리고, 명절 대목 장날이면 전국 각지에서 10만 명이나 몰려들었다는 얘기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강경읍 중심가에는 전성시대의 유산들이 거리마다, 골목마다 여전히 남아 있다. 등록문화재만 해도 9곳이 넘고, 근대 건축물은 150여 채를 헤아린다. 전국 최초, 호남 최초, 충남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은 장소도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다. 단지 강경의 과거 영광을 보여주는 근대의 흔적으로서가 아니라 강경에, 한국인에게 근대는 무엇이었는지 말을 걸어오는 문화유산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강경에서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으로 금강을 건너가는 황산대교 북쪽에 황산 등대가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세워져 수십 년간 강경포구로 드나드는 배들의 밤 뱃길을 밝혀주다가 1987년 철거되었던 등대는 2008년 복원됐다. 강에 등대가 건립되었을 정도로 강경포구는 야간에도 배가 붐비는 선창이었다. 강경 북옥리 옥녀봉 바위에 1860년대에 새겨진 해조문(海潮文) 역시 하항(河港) 강경이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 보여준다. 밀물과 썰물 시간을 암벽에 음각해 안전을 기원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근대 기술문명이 전해지면서 금강과 논산천, 강경천, 대흥천은 근대식 제방이 축조되고, 아예 물길조차 바뀌는가 하면 주변 습지가 매립되었다. 대흥천에는 1924년 갑문이 설치되어 근대 이전에는 실현하지 못했을 안전한 포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의 근대 기술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지만,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고 자율적으로 근대 기술을 수용했다면 한국인의 손으로 강경포구는 충분히 안전한 항구로 발전해 나갔을 게 분명하다. 강경은 일제강점 이전부터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수운과 교역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강경읍 중앙리 일대는 현재 강경근대역사문화거리로 지정돼 있다. 길을 따라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상가와 주택들이 즐비하다. 포구와 선창 주변이 번창하였으므로 당연히 관청과 금융기관과 학교와 종교시설이 읍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식민 당국이 근대 시가지를 개발하면서 지어진 건축물들이다. 강경의 근대 모습을 보여주는 풍경은 그 자체로 소중하지만, 만약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강경 중심가의 경관은 더 다채롭고 풍부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개항기에 조선에서 각축하던 여러 나라의 건축 양식이 수용되면서 한국의 근대 건축으로 발전해 나갔을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금융기관도, 학교도 마찬가지다.
강경의 근대사를 들여다보면, 근대와 전통의 갈등이나 일본 당국과 조선인의 충돌 사례도 적지 않다. 1899년 전라북도 익산 나바위 성당의 프랑스인 신부와 비신자들이 부딪친 ‘강경포 사건’은 외래 종교가 토착 정서와 맞부딪친 경우다. 힘으로 조선을 누르고자 했던 일본은 1919년 3·1운동 당시 교회 자리를 알아보러 강경에 온 영국인 선교사(존 토머스)를 시위 참가자로 몰아 구타했다. 결국 이 문제는 일본과 영국의 외교 문제로 비화했고, 그 배상금으로 한옥으로 지어진 강경 성결교회가 탄생했다.
식민 당국과 조선인 객주들의 대립은 꽤 끈질기게 이어졌다. 강경의 상권은 하시장이든, 상시장이든 강경 객주들이 좌지우지했다. 객주 가운데는 배를 10여 척이나 소유한 상인들도 20여 명이나 되었다. 식민 당국은 어떻게든 강경 객주들의 손발을 묶으려고, 어획물의 선상 판매를 금지하고, 이동을 제한하는 규칙을 제정했다. 1920년대에는 일본 상인들의 어업 진출을 지원하면서, ‘어업조합’을 구성해 객주들을 휘어잡으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경 객주는 1930년대까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식민 당국은 강경 객주들과 끊임없이 대립하고 협상해야만 했다. 1910년대에 설립된 강경노동조합도 강경 객주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항구에서 뱃짐을 하역하는 노동자 780명이 참여한 강경노동조합은 1925년 조합 건물을 2층으로 번듯하게 지었다. 한국전쟁 중에 2층이 파손되어 1953년 단층으로 개축한 강경노동조합(현 역사문화안내소)은 등록문화재이기도 하다.
기미년에는 강경 사람들의 만세시위가 한 달 이상 계속되었다. 3월10일 1차 시위부터 7차(4월) 야간 봉화 시위까지 강경 사람들의 저항이 이어졌다. 강경성결교회에 다니던 강경공립보통학교 학생(윤판석)은 1924년 일본역사 수업을 거부하고, 훈계하는 교장을 컵으로 내리친 뒤 자퇴했다. 이 해 신사참배를 거부한 교사(김복희)와 학생 62명이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가혹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강경 사람들이 보여준 저항의 모습은 주목할 만하다.
강경이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를 열어가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 선교사와 지역 유지가 힘을 합쳐 학교(만동학교)를 세웠다는 사실은 식민지근대를 겪지 않고도 근대를 열어갈 의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어떤 역사 경로를 거치든 근대 철도와 도로의 발달은 불가피했고, 수운의 시대는 저물 수밖에 없을 터이므로 강경이 계속 번성하는 도시로 지속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그래도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를 맞고, 근대의 진통을 이겨냈더라면, 지금의 모습과는 다른 근대문화유산을 둘러볼 수 있었을 것이다.
금강의 포구 도시 강경의 최대 유산은 오늘날의 강경 젓갈시장이다. 내륙 포구로서 강경 사람들은 소금으로 해산물을 오래 보관하는 방법을 발달시켰다. 강경 사람들이 찾아낸 토굴 형 저장창고는 젓갈류를 위생적으로 보관하는데 적합한 시설이다. 연중 섭씨 10~15도를 유지하는 덕분에 강경 젓갈은 신선하고 맛이 좋다. 젓갈이 출하되는 시기 강경읍내는 전국에서 찾아오는 소비자들로 북적인다. 강경의 근대유산을 따라 거리를 산책하다가 염천리 젓갈시장에 들어서면 격랑의 역사 속에서도 어떻게 하든 헤쳐 나갈 방도를 찾아내는 강경의 지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경상북도 영주시 광복로 17 영광중학교 서쪽 담 옆으로 난 길의 이름은 두서로다. 조선시대 초기, 삼촌 세조가 조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는 사건을 본 공주 이 씨 가문이 영주로 내려와 두문불출한 마을이라 해서 두서(杜西)라는 지명이 생겼다. 영주 사람들은 뒤새 마을이라고 하는 마을길은 1980년대 이전까지 5번국도(거제~중강진)와 영주 시가지를 이어주는 진입로였다고 한다. 1930년대 중앙선 철도 부설 공사가 진행될 때 뒤새 마을 위로 관사촌이라는 마을이 생겨났다. 철도일 하는 사람들의 관사가 줄지어 들어섰기 때문이다. 영주의 근대 주거지는 뒤새 마을과 관사촌 일대에서부터 형성되어 나갔다.
두서로는 영주의 진산인 철탄산 서쪽 자락이다. 하늘에서 보면 달리는 말의 형상인 철탄산은 해발 250m로 높지 않으나 쇠(鐵)도 삼킬(呑) 기세라 하여 그런 이름을 얻었다. 철탄산 남쪽자락의 거리 이름은 광복로다. 두서로와 광복로는 영광중학교에서 만난다. 영주의 근대 주거지는 두서로를 넘어 광복로를 따라 점차 확산되었다. 영주시는 2018년 두서로와 광복로 일대 152필지 2만6,377㎡를 근대역사문화거리로 삼겠다고 문화재청에 요청했고, 문화재청은 이 거리를 등록문화재 제720호로 지정했다.
영광중학교를 따라 걸으면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충분한 거리이지만,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에는 발길을 멈추고 근대 생활사를 깊이 음미해볼 장소가 여러 곳 있다. 일본식으로 지어졌으나 거쳐 간 세월과 사람들의 흔적이 밴 철도 관사, 흥미로운 전설이 스민 근대 한옥, 추억에 잠길 수 있는 이발관, 쌀 찧는 소리 요란했을 정미소, 시대의 아픔 그리고 개인의 소망을 두 손 모아 기도했던 교회가 줄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영주 근대문화역사거리가 지정될 때 이 6곳도 함께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구 영주역 5호 관사’는 제720-1호, ‘구 영주역 7호 관사’는 제720-2호, ‘영주 영주동 근대한옥’은 제720-3호, ‘영주 영광이발관’은 제720-4호, ‘영주 풍국정미소’는 제720-5호, ‘영주 제일교회’는 제720-6호다. 건축 측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 장소도 있으나, 한 자리에서 몇 세대에 걸쳐 영주의 근현대 생활을 지켜온 곳들이라 등록문화재가 될 수 있었다. 영주시는 이들 장소만이 아니라 지정 지역 전체를 다양한 생활사의 재발견 공간으로 재생시킨다는 계획을 진행시켜 나가는 중이다.
철도 관사는 현재 9채 정도가 남아 있으나 보전 상태가 양호한 2동이 등록문화재로 선정됐다. 부역장 급이 거주했던 5호 관사와 역장 급이 살았던 7호 관사 모두 1930년대 중반 지어질 당시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다. 영주역은 1941년 중앙선 개통과 함께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으나, 철도 부설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관사가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영주는 중앙선 기차가 서게 되면서 도시화가 촉진되었다. 중앙선 개통 직전인 1940년 읍으로 승격한 영주는 해방 후 1955년 영암선(현재의 영동선), 1966년 경북선이 완공되면서 더욱 중요한 교통요지로 부상했다. 특히 경북선은 경부선이 지나가는 경상북도 김천과 중앙선이 통과하는 영주를 연결하는 철도여서, 영주의 위상을 더 올려주었다.
‘영주 영주동 근대한옥’은 조선 중기 천하명의로 소문났던 이석간(李碩幹)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집이다. 가난한 선비로서 독학으로 의학서적을 독파한 이석간의 명성은 중국 명나라에도 소문이 났던 모양이다. 명의 황제가 황태후(어머니)의 원인 모를 병을 고치기 위해 이석간을 초청했다. 어디선가 ‘등이 붙은 청년들’이 나타나 치료법을 알려 주었고, 이석간은 침으로 황태후를 완치시켰다고 한다. 황제는 조선 이석간의 고향 영주에 아흔아홉간 대저택을 선물로 주었다. 송별연에서 이석간이 몰래 넣어온 황제의 천도복숭아 씨앗은 이 씨 집안의 가보인 술잔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명 황제의 선물인 대저택은 본채 외에도 별채를 여러 채 지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현재의 집이라 한다. ‘근대한옥’이라 한 이유는 대저택은 세월이 흘러 다 헐리고, 하나 남았던 별채를 1920년대에 개량한옥으로 신축했기 때문이다. 이석간의 전설이 아니라도, 이 주택은 근대의 주택이 변해가는 양상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한의원으로, 하숙집으로 쓰이기도 해서 여러 면에서 생활의 흔적이 누적된 집으로 평가된다. 본채가 있었다는 자리에는 현재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다.
영광이발관은 1930년대부터 ‘국제이발관’으로 개업하여 ‘시온이발관’이 되었다가 현재는 ‘영광이발관’이라는 간판으로 이용업을 계속하고 있다. 풍국정미소는 1940년대에 정미기를 돌리기 시작해 2009년까지 쌀을 찧었다. 영주 시내에서 가장 큰 정미소였다는 풍국정미소에는 도정 기계와 지금은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저울 등 손때 묻은 기구가 상당수 보존되어 있다. 1907년 창립된 영주 제일교회는 예배당이 한국전쟁 시기에 불에 타는 바람에 1954년부터 1958년까지 교인들이 손수 돌을 날라지었다는 고딕풍 석조 건물이다. 제일교회는 일제강점기 말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목회자들이 투옥되기도 한 역사도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다. 영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이자, 한 세기 넘게 영주 사람들과 애환을 함께 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등록문화재의 가치가 충분하다.
영주시의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으라면 1961년 7월 11일 새벽에 발생한 대홍수를 들 수 있다. 영주 일대에 4시간 사이 215㎜의 비가 쏟아졌다. 영주 위 소백산 골짜기에서 쏟아져 내려온 물은 오전 8시쯤 영주 서천 제방을 무너뜨렸다. 영주 시가지 4분의 3이 물에 잠겨버렸다. 지천의 제방을 잘라내 물을 빼면서 오후 들어 시가지의 모습이 다시 드러났으나, 피해는 막대했다. 14명이 숨지고 52명이 부상했다. 떠내려가거나 부서진 집이 700채가 넘고, 이재민이 1만5,000명 넘게 발생했다.
대홍수는 영주 시가지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수해 복구에 나선 정부는 군을 투입해 서천 직강공사를 벌였다. 서천이 구불구불 흘러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남쪽으로 새로운 시가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복구공사는 1962년 마무리 되었으나, 수해를 입었던 영주역은 1973년 신시가지 지역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철도의 중요성은 1980년대부터 침체의 길을 걸었다. 결국 1990년 이후 철탄산 자락의 구 도심은 예전의 활력을 점점 잃어버렸다.
영주시가 두서로와 광복로 일대를 근대역사문화지구로 지정한 이유도 공동화(空同化)하는 구도심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영주시의 근현대 생활의 모습이 켜켜이 쌓인 구 도심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일은 영주의 정체성 문제와 맞닿은 과제이기도 하다.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단지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현대 도시의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기에 좋은 장소다.
전라북도 군산시내에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은 대략 170건 정도로 추산된다. 1899년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산업화 시대 초기까지 50년 이상 된 건물로서, 찬찬히 둘러보며 군산의 근현대사, 한국의 근대를 되새겨볼 공간만 헤아린 숫자다. 여기에 근대 이야기를 품은 거리와 골목까지 더하면 군산은 며칠 아니 몇 달을 돌아다녀도 모자라다고 할 만큼 돌아볼 곳이 많다. ‘군산은 한국 근대의 타임캡슐’이라는 표현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물론, 도시는 변화 위에 변화를 쌓으면서 변모하게 마련이므로, ‘타임캡슐’은 단지 비유일 뿐 정확한 묘사라고 할 수 없다. 군산 또한 군산 나름의 속도로 그때그때 마주친 현실을 헤쳐 나왔을 따름이다. 군산이라는 도시를 산책하는 일은 ‘타임캡슐’의 봉인을 풀고 켜켜이 쌓인 생활의 흔적과 의미를 묻는 흥미로운 작업에 해당한다.
군산 내항은 물론이고, 일제강점기 군산 개발이 진행되기 전까지 장미동, 금암동, 월명동 일대는 금강 하구의 저습지였다. 조선시대에 전라도와 충청도 24개 고을의 세곡을 모아 배로 실어 보내던 군산창이 있었고, 죽성포(째보선창)라는 포구가 있었던, 중요한 금강~서해 뱃길이었을 뿐이다. 1899년 개항이 결정되고, 여러 나라 조계지가 들어서면서 군산은 근대 도시로 첫 발을 떼었다. 특히 자국으로 쌀 실어내기 좋은 항구라고 본 일본이 지배권을 장악하면서 군산은 한반도에서 손꼽아주는 항구 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문화재청은 2018년 군산 내항 일대 15만2,400여㎡를 등록문화재 제719호로 지정했다. 현재는 항구로서 기능을 잃었지만, 내항 59필지 전체를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자는 취지다. 이와 함께 내항의 뜬다리 부두와 부잔교는 제719-1호, 호안시설은 제719-2호, 내항 내 철도는 제719-3호, 구 제일사료 창고는 제719-4호, 경기화학약품상사 저장탱크는 제719-5호로 지정됐다. 밀물 때는 올라오고, 썰물 때는 내려가서 상황에 맞춰 하역이 가능하도록 해 주는 뜬다리, 항구 건설의 기초공사에 해당하는 축대 1㎞, 항구 안까지 연결된 철도, 내항을 이용하던 회사의 창고, 주정(후에는 당밀)을 보관하던 대형 저장탱크는 내항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시설들이기 때문이다.
이 시설들은 한꺼번에 설치되지 않았다. 뜬다리 부두는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 호안시설은 1930년대 후반에 공사가 이뤄졌고 철도시설은 1920년대 동안 계속 이어져 나갔다. 제일사료 창고는 1930년대에 있던 창고 자리에 1970년 초 다시 지었고, 경기화학약품 저장탱크도 1970년대에 세웠다. 공통점이 있다면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후 산업화시기에 이르기까지 군산 내항의 가치와 의미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내항을 둘러보면서 쌀 수탈의 역사, 부두노동자들의 삶, 산업화와 항구의 관계 등을 다각도로 짚어볼 수 있다.
군산 내항 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구 군산세관 본관은 사적 제545호가 되었다. 1908년 벨기에에서 벽돌을 수입해와 지었다는 구 세관 건물은 지붕 위 3개 첨탑이 인상적인 대한제국 시기 건축물이다. 구 세관 옆에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 있다. 건물 자체가 근대 유산은 아니지만, 군산의 근대가 궁금하다면 반드시 들러봐야 할 장소다.
내항 앞 도로의 명칭은 해망로다. 속칭 째보선창이라 불리던 죽성포 앞을 지나 구 세관으로 이어지는 동서 방향의 도로다. 해망로 주변에는 주요한 근대 건축물이 여럿 있다. 군산을 근거지로 삼은 일본인들의 자금줄 역할을 한 조선은행 군산지점(현 군산 근대건축관), 제18은행 군산지점(현 군산 근대미술관)이 불과 두 블록 떨어져 있고, 조선은행 앞은 196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명성을 날리는 중화요리집 빈해원이 있다. 조선은행과 18은행, 빈해원은 모두 등록문화재다. 군산시는 2000년대 들어 이 일대를 ‘군산 근대문화유산 거리’로 조성해왔다.
군산에 정착하는 일본인은 계속 늘어났다. 1920년대 군산인구 1만4,000여 명 가운데 일본인이 5,600여 명이 넘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비율이 6대4였다는 얘기다. 조선총독부는 내항 건너편을 시가지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바둑판처럼 가로가 조성되고, 주거지와 상업지역이 조성됐다. 그곳에 살던 한국인들은 외곽지역(창성동, 개복동 등)으로 밀려났다.
신시가지에는 일본식 지명이 붙여졌고, 시가지 확장과 건축은 1930년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2018년 군산 내항, 빈해원과 함께 등록문화재가 된 ‘군산 구 조선운송주식회사 사택’은 1932년 금동에, ‘군산 구 남조선전기주식회사’는 1935년 신창동에, ‘군산 구 법원 관사’는 1940년 월명동에 지어졌다. 상당수 근대 유산이 군산 근대 답사 필수코스로 꼽히는 ‘신흥동 일본식 가옥(’히로쓰 가옥‘)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일본 승려들이 지은 일본식 사찰 동국사도 몇 블록만 가면 나온다. 이 근방에서는 어느 골목에 들어서도 근대유산을 만날 수 있다는 얘기가 과장이 아니다.
군산은 조선에서 6번째로 개항한 항구이고, 해방 무렵에 조선 9번째 중요 도시였다. 쌀 수탈만 보자면, 일본이 한국에서 가져가는 쌀의 4분의 1이 군산 내항을 거쳐 실려 나갔다. 일본인들은 군산을 영원히 지배하고 싶어 했다. 해방 직후 이 땅에서 손쉽게 그러모은 재산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며 귀화신청을 한 일본인 대지주까지 있었다. 그러나 해상 수송보다 육상 운송이 중요해진 시기가 도래하면서 군산시는 침체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군산 내항은 토사가 쌓이면서 항구 기능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군산시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군산의 근대를 둘러볼 수 있는 코스들을 소개해 준다. 군산시가 2013년 상표 등록을 한 구불길 가운데 8개 코스(162.2㎞)와 테마 길 3개 코스(45.2㎞) 가운데는 군산의 근현대사와 맞닿은 코스가 여러 곳 있다. 정해진 길을 따라 가지 않더라도 군산은 근대 산책자에게 다양하게 대화를 건네는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