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읍에서 처음으로 세탁기계 도입한 중앙 세탁소는 45년이 다 되어가는, 강화읍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세탁소이다. 단순히 오래 되어서라기보다 세탁소 사장님의 손끝에서 나오는 기술과 그의 세탁소 운영 방식 덕분에 지역주민들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드르륵, 오래된 미싱으로 양복의 소매를 수선하는 그의 손길이 아주 가볍다. 딱히 집중 했다기 보다 몸이 기억해서 수선하는 듯 보인다. 오래된 숙련으로 체득된 몸짓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드라이클리닝 손님의 방문으로 미싱 소리는 잠시 중단되었지만, 찾아갈 옷에 단추를 달아 달라는 손님의 요청으로 인해 그는 다시 작업대에 앉았다. 바늘에 실을 끼우고 순식간에 단추를 달았다. 손과 혼연일체 된 듯 보이는 날이 잘 갈린 낡은 가위로 그는 단추 다는 것을 마무리 지었다.
그는 1977년에 군대에서 제대하고 곧장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은사님으로부터 빌린 30만원의 돈으로 세탁기계를 구입하면서 다른 세탁소들과 차별성을 두려 노력했다. 그는 강화읍에서 처음으로 세탁 기계를 도입하였고, 또한 당시에는 생소했던 건조기도 역시 도입하였다. 그는 “손님들을 위해서 항상 투자를 해야 한다”고 대화 중간마다 몇 번을 강조해서 말했다. 그에게 투자는 곧 세탁소가 살아남는 길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양복점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8남매를 키우느라 어려웠던 집안이었기에 그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숙식이 제공되는 양장점에 취직을 해서 양복점 일을 찬찬히 배워나갔다. 그 양재기술 덕분에 군대에서도 세탁병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야무진 손끝 기술로 수선과 미싱을 잘 돌렸기에 대대장님이 기회를 주셨다고 한다. 그는 세탁병을 했던 군대 시절부터 꿈을 키워나갔었다. 제대하자마자 세탁소를 차릴 야심찬 계획, 그러니까 이른 나이에 창업을 꿈꿨던 것이다.
그는 다른 세탁소들과의 차별성과 전문성을 위해서 세탁기계를 도입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빌린 30만원으로 과감히 투자를 한 것이다. 당시에 중앙 세탁소보다도 조금 더 오래된 ‘백신사’나 ‘단골 세탁소’가 있었지만 세탁기계를 도입한 곳은 이곳 중앙 세탁소뿐이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손님을 위한 투자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 당시 인천 신포동에 큰 세탁기계가 있었고, 세탁소에서 옷 보따리를 가져가면 거기서 세탁을 해주었다. 모든 것을 석유로 처리하던 시기라 세탁이 끝나면 가져와서 일주일씩 말렸다고 한다. 그런 시대에 세탁기계를 들인다는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투자였던 것이다.
지금은 손끝에서 나오는 기술로 어렵지 않게 하는 일이지만 세탁소를 시작한 초창기에는 실수도 많았다고 한다. 후배가 회색의 세무를 가져와서 검정색으로 염색해 달라 부탁하고 갔는데, 그는 의욕이 앞선 나머지 검정색 구두약을 칠해버리는 실수를 하고 말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고 창피한 기억이지만, 한편으로는 세탁소가 활기를 띠던 좋은 시절이라고 추억되기도 한다.
이제 동네엔 작은 세탁소를 찾아보기 힘들다. 무인 빨래방, 프랜차이즈 세탁업들이 대규모의 자본을 확보하고 물량 공세를 하고 있어 동네 세탁소들은 차츰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남아있는 세탁소들도 일감이 줄어가고 손님들도 예전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중앙세탁소에는 여전히 단골들이 찾아온다.
그의 옷에 대한 세심한 태도 덕분일 것이다. 원단들은 과거와는 비교되지 않게 좋아졌고, 스타일이란 명목으로 한철 입고 버려지는 옷들이 많지만, 잘만 손질하고 보관을 한다면 옷을 오랫동안 입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소재에 맞게 세탁만 잘해줘도 옷의 수명은 몇 년이나 늘어난다고 한다. 입지 않을 때는 세탁소 비닐에 싸 두고, 장마철에는 제습제를 넣어두는 것만으로 옷들은 오래 보관될 수 있다.
그는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세탁기계를 세 번이나 교체했다고 한다. 아직도 그는 단추 하나 다는 것을 허투루 여기지 않고 옷들을 소중히 대한다. 그것이 여전히 지역주민들과 단골손님이 이곳을 찾는 이유일 거다.
인천 신포시장은 닭강정과 신포만두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샛길로 빠지는 좁은 골목에 성광떡집이 자리잡고 있다. 방앗간으로 시작한 떡집은 이곳에 터를 잡고 변함없는 맛으로 칠십 여년을 지키고 있다.
성광떡집 이종복 사장의 하루는 새벽에 시작된다. 어둑한 새벽 4시에 떡집의 불이 환히 켜진다. 주문 받은 떡을 만들기 위해서 전날 불려놓은 쌀을 살핀다. 4~8시간 잘 불린 쌀에서 물기를 쫙 빼고 제분기에 넣으면 흰 가루가 나온다. 잘 빻아진 가루를 한 번 더 제분기에서 쏟아넣고 나면 뽀얀 쌀가루의 자태가 드러난다. 거기에 천일염을 고루 뿌리고 시루떡 틀에 넣어 평평하게 편 후, 꿀을 넣고 다시 그 위에 쌀가루를 쌓는다. 그리고는 강한 스팀으로 시간이 떡을 만들 때까지 기다린다. 이것이 이 가게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장 좋아하는 꿀설기다.
설탕이 귀했던 어린 시절에 그의 어머니가 만들어주셨던 꿀설기는 여전히 이종복 사장의 손을 통해서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투박하지만 우직하게 떡을 만드셨던 아버지의 손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에게 여전히 변하지 않는 맛을 전해주고 싶은 것이 이종복 사장의 바람이라고 한다. 떡을 먹으러 올 때마다 각각 추억 속의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말이다.
우리에겐 항상 떡이 존재했다. 백일과 돌잔치, 명절에도 떡이 있었고, 결혼식부터 장례식까지 일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떡이 있었다. 누군가를 정성스레 대접할 때도 항상 떡을 준비했다. 이종복 사장은 이것이 우리의 정서라고 말한다. 그가 떡에 대해 우직한 성실함과 자부심을 갖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성광떡집의 떡이 유난히 찰지고 쫀쫀하고 맛이 좋은 이유는 바로 손 맛, 즉 악력에 의한 반죽이 밑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가 해온 것처럼 온 몸이 기억해서 떡을 만들고 있다. 떡집에는 그 흔한 계량기, 계량컵 등은 볼 수 없다. 그냥 그의 몸이 딱 안다고 한다. 이 정도 지났으면 익었겠구나, 이 정도면 간이 맞겠구나 감이 온다.
전통 방식을 고수하며 만들어낸 떡은 공장에서 기계들로 생산해 내는 떡들과 비교하면 투박하지만, 애써 모양을 잘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떡은 맛이 중요하고, 본연의 맛을 고수하며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해 만드는 것이 성광떡집의 전통 방식이라고 한다. 양질의 쌀과 철마다 나는 재료를 수급하기 위해 애쓴다. 쑥떡의 재료로는 해풍 맞은 섬쑥이 좋다며 사장부부는 영종도, 강화도, 덕적도 등지에서 직접 쑥을 캔다. 이렇게 캔 쑥에 곱게 갈린 쌀가루를 넣고, 손의 힘으로 반죽을 하면 손님들의 입맛에 기억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1947년 방앗간으로 시작한 이 가게는 1956년에 떡집으로 재탄생했다.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받은 것은 1988년부터였다. 대를 이어 70년간을 이어온 이 집은 신포시장 내에서도 가장 오래된 떡집이다.
현재 그의 아들이 4년째 떡 만드는 것을 배우고 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계량화된 떡 레시피를 권유하기도 하지만 이종복 사장의 신념은 여전하다. 떡은 무엇보다도 가장 많이 만들어 본 사람이 제일 잘 만든다는 것. 그 신념으로 아들에게 여전히 전통방식으로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있다.
새벽 4시에 주문을 받고 떡을 만들고, 만들어진 떡을 일일이 배달하며 바쁜 하루를 보내는 성광 떡집은 70년이 지나도 여전히 이 자리에 있을 것만 같다.
한 가닥의 국수를 만드는 일은 무척이나 고되다.
20Kg 밀가루 한 포와 소금물을 부어 섞는다. 한껏 치대고 저며 얇아진 반죽이 기계에 들어가면 하얀 가락으로 변한다. 이것을 시누대(대나무로 만든 국수 대)에 척척 걸어 그늘과 햇볕에 이삼일 말린 후 자르면 비로소 면발이 만들어진다. 국수의 맛은 정성에서 나온다. 비가 와서도 안 되고 햇볕이 너무 강해도 안 된다. 날이 추워도 안 되고 너무 더워도 안 된다.
너부대 마을의 충남상회는 가내수공업 형태로 국수를 만든다. 10평 남짓한 가게 안은 국수를 말릴 곳이 없어 이른 새벽 반죽을 만들고 기계를 한쪽으로 치워놓아야 손님을 받을 수 있다.
김영이 씨는 20년 전에 남편과 함께 이곳으로 왔다. 고3 큰 아들과 중2 작은 아들 학원비라도 보태어 볼까 해서 살림집과 가게가 같이 붙어있는 연립상가를 얻었다고 한다. 영이 씨는 시장을 보러 왔다가 이곳에 국수기계를 상가와 함께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 덜컥 계약을 했다. 그런데 국수기계 전 주인은 며칠 국수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영이 씨의 고난이 시작됐다.
내가 고3 아들을 뒷바라지해야 되는데 고3이 내 뒷바라지를 했어. 국수가 추울 때 말리면 툭툭 끊어지고 안 되거든. 그 사실도 알려주지 않았던 거야. 한겨울 내내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지금은 하루에 밀가루 10포를 가지고 국수를 만드는데 처음엔 2포만 가지고도 하루가 금방 지나갔어.
온 가족이 이른 새벽부터 밤 10시까지 밀가루를 반죽하고 국수를 뽑아도 국수 만들기는 어렵기만 했다. 몇 년을 국수기계와 씨름하면서 영이 씨는 국수는 사람의 손 말고도 하늘이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충남상회의 국수는 영이 씨 가족들의 정성과 너부대마을의 바람과 햇빛 그리고 시간이 만든 것이다.
밀가루 한 포에 10분 국수 13통(1통에 4천원)이 나온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수는 1년에 한 번 하는 너부대마을 동네 잔치 때도 쓰이고 인근 식당에도 납품이 된다. 이 길을 오며가며 국수를 사는 단골들도 꽤 있다.
충남상회의 국수 포장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그저 흰 종이에 갈색 띠가 둘러져 있을 뿐이다. 영이 씨는 정식으로 국수집 간판을 내걸어 볼까도 했지만 행정절차는 까다롭기만 했다. 규모도 보다 갖춰야 했다.
그래도 우리집 국수 맛을 잊지 못해 멀리서도 오는 손님들이 있어. 요즘은 가정에서 워낙 외식도 많이 하고 대형마트도 많아서 타격이 있는가는 몰라도 우리는 꾸준하거든.
시간이 흐를수록 충남상회의 국수 맛도 깊어진다.
※ 영이씨가 전해주는 국수를 맛있게 만드는 법(TIP)
「잔치국수」
다시마멸치 육수가 핵심이다. 육수를 낼 때는 꼭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춰야 한다. 약간의 조미료를 더 해주면 감칠맛이 돈다. 이렇게 만든 육수를 여름엔 냉장고에 항상 넣어놓고 호박나물 정도 얹어내면 그만이다.
국수를 삶을 때는 후루룩 끓으면 불을 줄여 뜸을 들여야 한다. 국수 한 가닥을 꺼내 찬물에 넣어 투명하면 다 익은 것이다. 하얀 심이 보이면 더 익혀야 한다.
「칼국수」
칼국수의 미덕은 냉장고 속 재료가 무엇이든 있는 만큼만 넣어 끓여도 맛이 있다는 점이다. 조개가 있으면 조개를, 사골국물이 있으면 사골국물을, 아무것도 없으면 그저 다시마국물에 달걀만 풀어서 내도 깔끔한 맛이 난다. 충남상회 냉장고 속에서 막 꺼낸 국수를 사다가 우리집 냉장고를 열어 이것저것 넣고 끓여 칼국수의 무한한 변주를 즐기는 게 칼국수의 진정한 맛이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문 밖에서 멀리 떨어진 강남에 조선왕조의 능이 많이 세워졌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조선왕릉 중 가장 번화한 곳에 있는 선릉에는 성종, 정릉에는 중종이 모셔져 있고, 대모산 기슭에 자리 잡은 헌인릉은 태종과 원경왕후를 모신 헌릉, 순조와 순원왕후를 모신 인릉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왕릉은 아니지만 왕의 아들들 대군들의 무덤도 이 근방에 많이 조성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수서동에 위치한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드님인 광평대군 이여의 묘이다. 광평대군묘역에는 광평대군 내외 묘소,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무안대군 이방번 내외 묘소, 광평대군의 아들 영순군 이하 그 후손들의 묘소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광평대군의 묘역은 서울 근교에서 현존하는 왕손의 묘역 중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 총면적 413,300㎡의 산에 광평대군의 묘소를 비롯한 그 종문 700여 기의 묘소가 일대 장관을 이루고, 종가재실의 고옥이 있는 공동묘역이다. 또 이곳은 종가 재실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있어, 마을 이름을 궁말, 궁촌이라고 부른다. 도로명이 개편된 오늘날에도 이 마을의 도로명은 광평로이다.
공동묘역 끝자락 평지로 내려가면 오래된 전통가옥이 보이는데, 이 곳이 전주 이씨 광평대군 이여의 종가인 필경재이다. 필경재는 15세기 조선조 성종 때 건립된 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전통가옥으로서 1987년 4월 8일 문공부에 의해 전통건조물 제 1호로 지정되었다. 광평대군의 증손인 정안부정공 이천수가 건립하여 현재까지 대대로 19대를 이어오며 그 종손들이 살아온 전통한옥이다. 당시 개인 가옥으로서는 최대 허용치였던 99칸이었으나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많은 부분이 유실되고, 나머지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오다가 1994년에 해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1999년부터는 궁중요리를 선보이는 음식점으로 운영되고 있으나 가옥의 형태는 잘 보존되고 있다.
전주 이씨 광평대군 정안부정공의 종갓집으로 내려오고 있는 이 가옥에서는 북한산성을 축조한 숙종 때 영의정 이유와 효종 때 우의정 이후원, 헌종 때 우의정 이지연 등 3정승을 탄생시켰으며,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철기 이범석 장군과 헤이그 열사 중 한 분인 이위종 열사도 직계 후손이다. 이렇게 많은 문무관을 배출하였고, 일제 치하에서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기 위하여 설립된 중앙고등학교 광주분교로도 사용되었던 유서 깊은 가옥이다. 필경재(必敬齋)의 뜻은 ‘반드시 웃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자세를 지니고 살라’는 뜻으로 필경재가 건립될 당시 지어진 이 고옥(古屋)의 옥호(屋號: 집의 이름)이다.
어느 동네에나 동네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곳이 있다. 미용실과 이발소, 동네 구멍가게 등이 바로 그런 존재들인데 이발소와는 또 다른 이름의 이용원 간판을 보게 된 것은 참 오랜만이다. 남자들의 전용공간인 이발소와 이용원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남자는 이용원, 여자는 미장원 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많은 남성손님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용실이 동네마다 많아지고 새로운 첨단의 미용기술들을 익힌 남성들이 이발사가 아닌 미용사로 전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점 동네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해서 이제는 시골 읍. 면 등에서나 눈에 띄는 귀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이발사가 외과 의사를 겸했다고 한다. 이발소마다 돌아가는 상징적인 3색 원통의 의미가 청색은 정맥, 붉은색은 동맥, 백색은 붕대를 뜻한다고 한다.
울산 언양읍에 위치한 미진이용원은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곳으로 울산 언양읍에서 태어나 줄곧 살아온 이발사가 지금의 이용원에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미진이용원 주인아저씨는 먹고 살기 어려웠던 젊은 시절에 다른 사람의 이발소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며 기술을 익혔다. 그렇게 배운 이발 경력으로 치면 60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 한때 장사가 잘 될 때는 면도와 안마를 맡아주는 여자 종업원들을 많이 데리고 일을 하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소일삼아 두 부부가 함께 일을 하고 있다. 간혹 이용원이라는 간판을 달아놓고 불법행위를 하는 퇴폐업소들이 있어서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미진이용원은 어디까지나 남녀노소 동네사람들의 머리를 다듬어주고 이발을 해주는 공간이다.
이용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오래되고 손때 묻는 옷장이 보이고 왼편으로 머리를 감는 하얀 타일이 깔린 세면장이 있다. 지금의 이용원 자리로 이사 오기 전부터 사용하던 낡은 나무옷장은 세월의 흔적을 덧입고 그 자체로 존재가치를 빛내고 있다. 손잡이 부분은 손이 많이 닿아서 닳았다. 옷장의 손잡이가 이용원의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다. 머리를 감는 공간인 세면장의 타일은 이곳으로 이사 올 때 새로 깔았다고 한다.
40분 남짓 무뚝뚝하고 말수 적은 이발사가 머리 손질과 더불어 면도를 마치자마자 옆에서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담던 아내분이 면도를 마친 손님의 머리를 감겨주기 시작했다. 가위의 수명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물으니 한참 손님이 많고 바빴을 당시에 두 달에 한번 정도는 가위를 새로 교체했다고 한다. 지금은 물건이 흔하고 쉽게 살 수 있어서 덜 하지만 어려운 시절엔 단골들이 찾아와서 사용하던 가위를 얻어가기도 했다. 아저씨의 익숙한 가위질만큼 미용에 사용하는 가위, 면도칼, 면도크림 등이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오래된 것들이 주는 친숙함과 따뜻함 때문이다.
우리 남편이 이발 일을 오래했어요. 주변에서 오래된 가게라는 소문 듣고 찾아오기도 하고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하는데 워낙 말수가 적고 조용한 양반이라 알려지는 걸 싫어해서 인터뷰 안 해줬어요.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미진이용원 앞으로 차가 다니는 도로가 생겼고 낮은 주택과 집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신축 건물들이 들어섰다. 언양읍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며 영업을 계속해오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단골 고객들 중에도 미용실로 옮겨가는 이들이 늘고 있다. 세월의 흐름상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한다고. 지금 하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계속해온 두 부부는 다리가 버텨주고 건강이 허락하는 동안은 계속 미진이용원을 운영하고 싶다고 말한다.
영양정미소 주소는 '청양군 운곡면 영양리 524-22번지'이다. 건물 상량에 쓰인 단기 4295년이라는 한자로 1962년에 지은 걸 알 수 있다. 55년 된 정미소 건물은 2차선 도로 옆에 58평의 면적을 차지했다. 녹이 낀 푸른색 양철지붕과 칠이 벗겨진 벽에서 시간이 느껴진다. 철판에 페인트로 쓴 영양정미소 간판 글씨는 군데군데 벗겨졌다. 전화번호가 넷이다. 번호가 바뀔 때마다 수정하거나, 추가했던 모양이다. 붉은색 글씨가 가장 최근 것으로 보인다.
양철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면 정미소 내부가 보인다. 제법 높은 천장 아래 키 큰 기계가 자리했다. 2층 높이는 될 법한 기계 위로 먼지가 앉았다. 오랜 시간 쌓여 온 먼지다. 배석기 씨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먼지를 턴다. 그는 37년 동안 정미 기계와 함께했다. 가을마다 벼를 찧어 흰 쌀을 가마니에 담았다. 한 가마에 80kg. 장정 한 명의 무게다. 여전히 정미소는 돌아가지만 그때만큼의 무게를 감당하지는 않는다. 세월과 함께 공간은 비어지고 어느새 먼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영양정미소의 낡아 가는 외양은 그래서 조금 쓸쓸하다.
배석기 씨는 1980년 5월쯤 이곳을 양민석 씨와 함께 인수했다. 당시 정미소는 2,600만 원이었다. 양민석 씨와 1,300만원씩 부담했다. 동네에 정미소는 하나였다. 동네에서 내놓았다는 얘길 듣고 벼농사보다는 벌이가 나을 것 같아 인수했다. 장가갈 때 받아 나온 논 서 마지기와 밭 두 마지기를 팔고 빚도 얻어 샀다.
배석기 씨가 혼자 정미소를 운영하게 되자 아내인 윤정숙 씨도 돕기 시작했다. 그때는 구멍 난 자루를 꿰매서 다시 쓰기도 했다. 성수기엔 하루 종일 여덟 시간 작업해서 100가마 이상 찧었다. 80kg 한 가마에 4kg을 삭고로 뗐다.
1980년대에는 80kg짜리 쌀 한 가마에 3만 원 정도 했다. 젊을 때 별일을 다 했다. 남의 밭 갈아 주고, 경운기 짐 실어 주고 품값을 받았다. 되는 대로 가리지 않고 일했다. 정미소 인수하고도 악착같이 일을 했다. 바지런함이야말로 부부의 가장 큰 밑천이었다. 한창 때는 서울, 천안, 여수도 갔다 왔다.
곡주들한테 위탁을 받거나, 벼를 찧는 양이 적으면 쌀을 매입해서 팔았다. 부부가 쌀가마를 한 가득 트럭에 싣고 가서 낯선 도시에 일일이 배달을 하는 일이 고생스러웠을 텐데도, 그 이야기를 하는 배석기 씨의 눈에 웃음이 어린다.
엔진의 힘으로 이 큰 기계가 돌아가고 벼는 정미 기계를 거쳐 흰 쌀이 되어 나온다. 그 과정은 비교적 단순하다. 벼를 운반해 기계에 넣는다. 바닥의 작은 홈이 그 입구다. 벼를 넣으면, 첫 단계로 석발기가 돌과 이물질을 골라낸다. 현미기로 들어가서, 왕겨풍구를 거쳐 왕겨가 배출된다. 완전히 벗겨진 현미하고 덜 벗겨진 벼하고 분리한다. 도정기에 보관을 했다가 정미기로 간다. 1단 정미기, 2단 정미기, 3단 정미기 세 대를 거친 다음 쌀 미각기, 연미기를 통해서 쌀 받는 데로 나온다. 그러고는 쌀을 자루에 담는다. 쌀을 제때 담고, 옮기는 게 일이다. 기계는 쉴 새 없이 돌아가기에 벼를 넣는 쪽, 쌀을 받는 쪽 최소 두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꽤 오랜 시간 배석기 씨와 윤정숙 씨는 한 조를 이루어 영양정미소의 심장인 엔진과 함께 움직였다.
2010년도야, 한 가마가 12만원 할 때. 도둑을 두 번 맞았어. 경보기 소리가 나서 나오니까, 차를 놔두고 슬슬 걸어가더라고. 뭐라고 말을 거니까 얼렁뚱땅 대답도 했어. 차도 훔친 거였어. 그냥 보내 줬지.
그 뒤로는 쌀 지키려고 정미소에서 잤다. 다행히 그 두 번 외에는 도둑이 얼씬거린 일이 없지만, 이제는 도둑맞을 쌀이 쌓여 있는 날도 많지 않다. 도둑이 들던 시절은 그래도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았을 때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55년의 시간이 쌓인 이 공간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날짜가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이곳에 길이 날 예정이라고 한다.
정미 기계의 본체는 영구적이다. 그런데 정미기 아미라고 하는 걸 수시로 교체해 줘야 한다. 그래야 쌀 도정이 잘된다. 고무, 정미기 롤러를 교체하고, 스쿠도 오래쓰면 교체해 주고 바가지도 닳아서 교환해 줘야 하고, 내부 부속을 항상 교환해 줘야 한다. 그렇게 제 몸 돌보듯 기계를 오래 들여다보아 왔다.
100가마라든지, 한 번에 찧는데 고장 안 나고 잘 빠져나가면 기분이 좋지. 잘 돌아가면.
일하면서 좋을 때는 언제냐고 물으니, 기계가 순조롭게 잘 돌아가 한 번에 찧어지는 때 그는 기분이 좋다고 한다. 기계와 작업자의 합이 잘 맞는 순간이다. 배석기 씨가 영양정미소와 함께한 건 37년이다. 낡아 버린 기계에는 그 시간만큼 먼지가 앉았지만 여전히 너끈히 벼를 찧는다. 당연하게 이어 온 삶의 장면들이었다. 영양정미소의 그 서늘한 침묵과 기계에 오랜 시간 걸려 내려앉은 먼지는 우리를 먹먹하게 한다.
판교 시장 근처의 중국집을 찾았다. 동생춘(同生春). 여태껏 만나 본 중국집 이름 중에 가장 특이하고 예쁘다. 간판에는 수타면 전문이라 쓰여 있다. 가게 앞에 사람이 북적북적하다. 출입문 앞에 주인아저씨로 보이는 캐리커처가 그려진 현판이 붙어 있다. 현판을 유심히 바라보다 출입문 앞에 서 있던 아주머니에게 “이게 뭐예요?”라고 물으니, “뭐긴 뭐여, 우리 아저씨지.”라는 간단한 답이 날아왔다. 알고 보니 아주머니는 동생춘의 주인이다.
주방과 가까운 자리에 앉았는데, 창문을 통해 주방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주방에 있는 주인아저씨는 군밤 모자를 썼는데, 아저씨와 한 몸인 양 모자가 퍽 잘 어울린다. 오랫동안 중국집을 운영한 것 같아 이것저것 물었다. 독산리 굴이 최고라는 아주머니는 음식에 들어가는 해산물 사러 기차를 타고 대천이며 웅천이며 다닌다고 한다. 아저씨는 요리를 한 지 67년이 되었다. 고향이 예산이라고 한다. 아저씨는 10살이라는 어린 나이 때부터 예산에 있는 중국집에서 주방일을 했는데, 그 중국집 이름이 '동생춘'이었다고 한다. 예산에 있던 동생춘이 없어지자, 그 이름을 빌려와 서천에서 다시 열었다.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일을 했냐고 물으니, 아저씨는 말이 없다. 아저씨를 대신해 아주머니는 “그때 10살이면 으른이여. 아주 막 못 먹고 눈치로만 살은 사람이여.”라고 답해줬다.
주인아주머니는 예산 인근 지역에서 태어나 자랐다. 젊은 적에 미모가 빼어나 남자깨나 울렸다고 한다. 미스코리아였을 것 같다는 말에 “아휴 옛날에는 그랬는데 진에서 똑 떨어져서 말아 버렸지. 옛날에 인기도 많이 끌었어.”라며 농담을 던지곤 웃어 보인다. 아저씨도 젊었을 적엔 한 인기 했다고 말한다. 동생춘은 미남미녀가 하니 장사가 잘 안 될 수 없는 서천의 명물인 셈이다. 그렇게 선남선녀가 만나 연애하고 결혼해서 동생춘을 운영하며 아들 넷도 잘 길러 냈다.
배도 든든히 채우고 한참 이야기를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은 어느새 추적추적 찬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주인아저씨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말없이 앉아 우릴 바라봤고, 아주머니는 “비와, 언능 가, 인제.”라며 배웅했다. 배나 채울 생각으로 들어갔다가 따끈하게 마음도 함께 채워 든든하게 길을 나섰다.
그 미닫이문 열어보고 싶게 생겼다. 생긴 외양마냥 이름마저 순정한 ‘등대이발관’(부안 행안면 대초리). 있어 보이려는 허세 어린 치장은 없다. 다만 정성껏 솜씨를 발휘했을 뿐. 유리창에 손으로 그리고 오려붙인 글씨와 그림들은 서투른 듯 귀염성 넘친다. 그 중 압권은 ‘모름지기 남자 머리라면∼’이라고 무언으로 호객하는 나름 멋쟁이 남자 그림. 과거의 시간에 멈춰선 듯한 풍모이지만 뱅글뱅글 돌아가는 이발소 표시등이 말한다. ‘지금 영업중이라고 전해라∼’. 들어서면 낡은 이발의자가 한가운데서 육중하게 존재감을 발하고 있고, 구석에는 물뿌리개 놓인 세면대가 있다. 요금표에 적힌 ‘조발 12000원’이란 표기(‘이발’이 아니고)도 이곳에 고색창연함을 더한다. 나이든 집기와 살림들이 한데 집합한 이곳. 구석구석 칸칸이 그가 수납한 것은 물건이 아니라 ‘시간’ 같다.
“오는 사람들도 다 오래 됐어”라고 말하는 이발사 류현열(74)씨. ‘오래’는 단골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나이이기도 하다. 고향이 부안 줄포인 그는 한동안 서울 생활을 하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 이래 주욱 이발관을 꾸려 왔다. 어렸을 적 그의 집은 “동네에서 두 번째로 부자”였더란다.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온 식구 이끌고 서울로 이사한 아버지가 새로이 벌였던 일이 바로 이발관. 시대를 반영하듯 상호는 ‘협동’이었다. 아버지한테 이발기술이 있었던 건 아니라 이발사랑 미용사를 따로 고용했다.
"집이 이발관인게 학교 갔다오문 자연히 이발을 돕게 돼. 이발관 바로 옆에가 논이 있고, 논 가운데가 바가지샘이 있었어. 거그서 물을 길어다 써. 학교 갔다 오문 물 길어오는 것이 내 담당이었지. 쉽게 말해 시다 노릇을 했어." 늘 어깨 너머로 지켜보던 이발이었지만 직업으로서의 이발사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근디 아버지가 갑자기 중병에 걸려서 치료하느라 돈을 다 쏟아붓고 나니 가세가 기울어부렀어.” 중학교는 겨우 졸업했지만 고등학교는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다. 망하다시피 식구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서울에 남아 홀로 제 몫의 삶을 꾸려가기 시작했다. “서른 살 때쯤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지.”
부안 지역 여러 동네를 전전하며 이발소를 하다 이 자리에 정착한 지가 스무 해 남짓이다. ‘등대’는 1993년 읍내에서 이발소 할 때부터 써온 상호. “누구에게든 빛을 드리는 존재가 되고픈 맘으로” 내건 이름이다.
점점 사람이 귀해지는 시골이다.
“사람이 없어, 통 죽어불고 이사가 불고. 시골이다본게 해마다 줄어들어.”
이발사인 류현열 씨한테 줄어드는 사람이란 줄어드는 손님과도 동의어. “늘 돌아가셔”라는 담담한 말에 고적함이 깔린다.
“새 손님이 일 년에 다섯 분 늘어났다 하문 돌아가신 분은 열 분 이상이여.”
의자 팔걸이 위에 걸쳐 어린 아이들의 키를 돋우던 나무판도 여전히 한피짝에 간수해 두었지만 쓸 일이 없다.
예전엔 명절이면 대기 번호표를 나눠줘야 할 만큼 북적거리던 이발소.
“옛날에는 명절의 맛이 있었지. 기다리는 손님들이 술도 묵고 윷도 놀고. 아무리 번호를 불러도 안 오는 손님은 술 묵고 취해서 어디 둔눠버린 경우고. 옛날에는 여중고생 상고머리도 이발소에서 깎았어. 동네서 애사 말고 경사, 근게 결혼식이나 돌잔치라도 가고 그러문 손님 많았지. 봄에 한창 꽃필 때 단체로 놀러갈 때도 그랬고.”
이제는 손님 한 명도 없는 날이 예사다.
“요참 월화수요일 쭈욱 한 명도 없었어. 제로여.”
거울 위에 걸린 이용사 면허증에 박힌 연도는 1973년이다. 어엿한 이발사가 되기까지 수련과 인내의 시간 길었다. 가위와 면도칼은 로망이었다.
“이발소에 취직을 했어도 오 년이 되아도 칼도 안 줘. 머리카락 쓸고 머리 깜겨주는 일만 해. 근게 고무풍선에 바람 넣어서 비누칠을 해갖고 칼로 슥슥 밀어봄서 면도 연습을 했어. 실실 조심해서 밀어도 까딱 잘못하문 풍선이 터져부러. 그러문 살을 빈 거나 마찬가지여. 실패지. 대고 연습할 사람이 없응게 연구해서 고무풍선을 생각해 냈지. 풍선 수없이 많이 터쳤어.”
가위 들고 이발 하는 사람이 제일 부러웠던 시절. “면도하는 사람은 ‘중함빠’, 고데나 드라이 하는 사람은 ‘함빠’라 했어. 큰 이발관 같으문 머리 감기는 세발사도 있고 손톱 깎는 아가씨도 따로 있고 한 일곱 명씩 정도는 일했지.”
아이 아닌 어른 이발을 드디어 처음 하던 때의 긴장감이나 설렘은 지금도 기억한다. 그렇듯 어렵사리 도달한 이발사의 길. 도중에 호떡장사도 해보고 미장 일도 해보고 그랬지만, 천직은 이발사였다.
“뭐이든 하다 안 되문 다시 이발로 돌아오고, 돌아오고. 이발이 내 인생의 비빌 언덕이었어.”
네 평 남짓한 이 이발소는 여전히 그의 삶의 척추 같은 공간이다.
“손님이 이발하고 난 다음에 거울 쳐다보고 뺑긋이 웃고 가는 그 모습을 보면 희열을 느끼지.”
그래서 벽 한피짝에 ‘눈 뜨면 즐겁고 눈 감으면 황홀하고’라고 써두셨는가. 이발의자에 앉았다 일어서기까지 누리는 궁극의 즐거움이 그 말에 다 함축돼 있다.
술담배는 멀리했다. 가위나 칼 잡은 손끝이 떨리면 이발사로서 끝이기 때문.
“앞으로도 계속 해야지. 수족이 안 떠니까 평생 할 거여. 내가 문 닫으문 요 근동 사람들은 더 멀리로 이발소 찾아가야혀. 근게도 해야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마음이다.
매년 4월이면 벚꽃축제가 한창인 제주의 전농로거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1동의 이 도로는 양쪽 도로변을 따라 왕벚나무가 끝없이 이어져 봄에는 벚꽃길로, 가을엔 단풍거리로 입소문이 나 있다. 봄에 길을 걸으며 만개한 벚꽃 구경을 하고, 한 여름 다른 곳에서 신나게 놀다가 가을이 되면 또 생각나는 곳이 전농로이다.
전농로는 총 길이 1.2km, 폭 15m의 왕복 2차선 도로로, 제주 지역 자생종인 왕벚나무가 양쪽 도로변을 따라 이어져 있다. 이곳의 왕벚나무는 대부분이 수령 20~100년 이상 되었으며 제주도 전체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제주시는 지역 자랑거리인 전농로의 왕벚나무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해 1992년 제1회 제주왕벚꽃축제를 개최했고 이후에도 매년 빠짐없이 개최해오고 있다. 그래서 제주도민 뿐 아니라 각지에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 30만 명이 넘게 참석하는 대규모 축제로 성장했다. (두산백과)
또 제주왕벚꽃축제와는 별도로 삼도1동 마을회에서는 2005년부터 매년 서사라문화거리축제를 열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전농로의 작은 카페에 앉아 단풍을 보며 가을 감성을 제대로 느끼고 나면 꼭 찾는 곳이 있다. 삼도동 전농로에 위치한 원이조 설농탕이다. 이곳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설렁탕집으로, 유명한 핫플레이스라기 보다는 정말 지역주민들에게만 소문난 맛집이다. 허름해 보이지만 가게 입구에서부터 오래된 기운이 확 풍기며 세월의 흔적들을 느낄 수 있는 아날로그한 감성을 가득 담고 있는 곳이다.
노란색깔 원이조 설농탕 간판 아래로, 가게 옆으로, 앞으로 나무들과 꽃이 심어져 있고 가게 안에도 커다란 나무들이 보인다. 사장님이 엄청 자연을 사랑하시는 듯하다. 들어가면 옛날 식탁과 의자들이 홀에 놓여있고 좌식으로 앉아서 먹는 공간도 있다. 얼핏 느껴지기엔 가정집 같기도 한데 주인장의 취미인 듯 오래된 그림들이 걸려있고 상도 정말 어릴 적에 집에서 쓰던 밥상 그대로 놓여있다. 정감 있는 가게 내부에 숨겨진 각종 골동품 찾는 재미에 빠져 있으면 설렁탕 한 상이 차려진다.
분위기만 진국이 아니라 국물이 정말 진국이다. 정갈하지만 무거운 사기그릇에 담겨진 반찬들과 진한 설렁탕 국물에 그때그때 달라지는 콩밥, 조밥, 보리밥. 오래된 밥이 나온 적이 없고 국물은 한마디로 깔끔하고 구수하다. 어릴 적 할머니가 끓여주신 그 설렁탕을 다시 먹는 기분이다. 모든 음식은 당일 준비된 것만 판다고 하는데 저녁에 가면 재료가 떨어져 먹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부추김치, 배추김치, 파김치, 등등 김치 종류가 바뀌면서 많이 나오곤 하는데 모든 김치는 할머님이 직접 담그신다고 한다. 그리고 원이조 설농탕에서 가장 독특한 것은 설렁탕에 소면이 아니라 메밀면(소바)을 넣어준다는 것. 소바향이 풍겨나면서 여기에 빨간 양념장까지 풀어 먹으면 칼칼하고 시원하다.
가격도 저렴한 편으로 설렁탕 한 그릇에 8000원이다. 설렁탕엔 고기가 가득 들어있어서 마음도 배도 실컷 부르고 만족스럽다. 설렁탕 한 그릇인데 이상하게 몸보신 되는 느낌이다. 제주도민들이 대개 그러하듯 지나친 친절은 없어도 자주 가면 알아봐주시기도 하고 아이를 데려가면 좋아하신다. 이곳을 자주 찾는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오래된 설렁탕집이라서가 아니라 항상 진심과 정성이 느껴지는 반찬과 국물 때문에 잘 되는 거라고 한다. 10년 전 학창시절부터 원이조 설농탕의 단골이라는 지인은 가성비도 좋지만 이곳에서 먹는 밥은 이상하게 더 든든하다며 추천하곤 한다.
원이조 설농탕은 제주공항 근처 유명한 전농로 거리에 있기에 여행객들에게도 돌아가기 전에 한번쯤 들러 맛보고 가면 좋겠다. 50년 된 원이조 설농탕은 사장님 부부의 연륜이 묻어있는 가게로 도가니탕, 수육 등 메뉴도 다양하고 몸과 마음이 서늘해지는 시기가 되면 꼭 한 그릇 먹고 싶어지는 설렁탕이다.
송탄에는 유명한 음식집이 생각보다 많다. 송탄 부대찌개로 유명한 김네집, 최네집 등이 있으며 방송 프로그램에서 몇 번 언급된 미스리 햄버거도 있다. 그 외에도 백종원이 방문해 유명해진 분식집도 있다. 그러나 송탄 토박이로서 송탄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음식집 중 하나는 지성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성원은 평택시 지산동에 위치한 중국음식점으로 영업시간은 오전 10:30~20:50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무이다.
지성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13년이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배가 고팠는데 돈이 별로 없었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도 있었지만 그날따라 분식집에 가기 싫었고, 그러던 중 친구가 알바하는 지성원이 생각났다. 꽤 거리가 멀었지만 열심히 걸어서 지성원에 갔다. 당시 짜장면의 가격이 2,500원이었다. 가난하고 매일 먹어도 배고팠던 고등학교 시절 혜성같이 등장한 지성원은 혁명 같은 곳이었다. 가격도 저렴한데 맛도 있고 양도 많았다. 짜장면의 양은 항상 배고픈 고등학생의 배를 채우고도 남았다. 거기다가 갓 나온 따끈따끈한 탕수육은 얼마나 맛있는지! 저렴하다고 하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탕수육 가격이 비쌌는데 갈 때 마다 친구들과 돈을 모아 사먹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가격이 조금 올라 짜장면 3,000원, 탕수육 9,000원, 짬뽕 4,000원이다. 여전히 저렴한 가격을 자랑하고 있다. 볶음밥 등 밥류는 5,000원에서 시작하며, 요리도 대부분 2만원 내외로 먹을 수 있다. 다른 요리 메뉴도 다른 중국음식 전문점에 비하면 저렴하다. 여러 명이 가면 다양한 메뉴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 때문인지 지성원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혼자 간단하게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 가족끼리 먹으러 온 사람, 포장을 하러 온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한다. 배달을 하지 않아 방문해서 먹어야 하고, 매장이 넓지 않아 가게에 사람이 항상 가득해서 그런지 활기가 넘친다.
많은 평택시민들이 방문하는 지성원에서는 가끔 아는 사람을 마주치기도 한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과 음식점에서 마주치는 것은 뭔가 두근거리고 신기한 기분이다. 지성원이 평택시민들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짜장면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음식이다. 또 특별한 때에 먹는 음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지성원에 얽힌 추억 하나 없는 송탄시민은 없을 것이다. 혹시 오랜 시간동안 평택시민들의 허기를 책임지고 있는 지성원을 모르는 평택시민이 있다면 싸고 저렴한 가격에 맛도 있고 활기찬 기운이 넘치는 지성원에 꼭 방문하기를 바란다.
수원 깡우동은 수원 영통구 먹자골목의 한 골목에 있다. 지금은 체인점도 몇군데 있지만 이곳이 본점이다. 학창시절,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먹자골목 근처의 학원에 곧장 가곤 했는데, 생각해보면 항상 터줏대감처럼 그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빠르게 바뀌는 다른 가게들과는 달리, 살짝 낡은 외관과 촌스러운 간판을 가지고 늘 그 곳에 서 있는 깡우동.
학원이 끝나고 나오는 10시쯤에는 얼굴이 빨간 어른들이 가게 앞에서 아이처럼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친구들과 항상 “우리 나중에 어른이 되면 저기서 술 먹자”며 우정을 다짐하곤 했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그 해 겨울, 친구들과 함께 모여 그곳에서 우동 한 그릇에 소주 한 잔을 마시며 각자의 미래를 그렸다. 아이러니 하게도 깡우동은 갓 스무 살이 되는 아이들이 포부를 얘기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냄새가 가득했던 그런 곳이었다. 오히려 40대쯤 되는 아저씨들이 퇴근 후에 우동과 소주 한잔을 즐기며 과거를 돌아보기 좋았던 곳이라 하는 것이 맞겠다. 그럼에도 깡우동에서 술을 먹던 빨간 얼굴의 어른들을 보고 자란 우리는, 마치 그 곳에서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곤 했었다.
이 오래된 가게에는 메뉴가 4개뿐이다. 7000원 짜리 우동과 어묵, 8000원 짜리 어묵우동, 그리고 가장 비싼 18000원 짜리 어묵탕이 전부이다. 사실 이 가격을 들으면 ‘어? 우동치고는 조금 비싼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6000원, 그리고 더 이전에는 5000원이면 우동을 먹을 수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가격도 같이 올라 우동치고는 조금 비싼 가격이 되었다. 하지만 뜨끈한 우동 국물을 한 입 마시는 순간 가격에 대한 생각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우동과 어묵은 순한맛, 중간맛, 매운맛을 선택할 수 있는데 양념장으로 매운맛을 조절 해주시기 때문에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은 순한맛으로 주문한 뒤에 양념을 추가하는 것도 깡우동을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깡우동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국물이다. 깡우동만의 양념장, 쑥갓, 유부, 파 등이 들어간 이 국물은 추운 겨울에는 단단히 얼어버린 몸을 녹여주고, 더운 여름에는 더위로 지친 몸에 활력을 주며 이열치열이 무슨 의미였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국물은 술을 마시고 있지만 해장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게 만들기 때문에 사실 술안주로 최고다. 양념장이 들어가지만 짜지 않고 속이 뻥 뚫리는 이 국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이곳을 찾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깡우동의 면은 다른 우동집보다 얇고 쫄깃한 편인데 우동국물을 가득 머금은 유부와 면을 함께 먹으면 입 안이 우동향으로 가득해진다. 그리고 어떤 메뉴를 시켜도 항상 그 위에 쑥갓이 듬뿍 올라가 있어 향이 일품이다. 반찬은 단무지밖에 없지만 깡우동과 단무지의 조합을 먹고 있으면 다른 반찬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 오래된 가게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인테리어다. 깡우동 내부의 벽은 노랗게 바랜 신문지로 덮여 있는데, 오래된 가게임을 증명하듯이 그때 그 시절하면 떠오르는 사건들부터‘인력구함’처럼 소소한 기사들까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가득하다. 우동 한 그릇에 우리 사회를 다시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물론, 늘 함께 간 사람들과의 대화에 집중하며 우동을 먹느라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신문은 그냥 벽지처럼 느껴지긴 한다.
신문지로 가득한 벽에 둘러싸여 동그란 스텐 식탁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친구, 가족, 애인과 특별할 것 없는 얘기를 하며 우동 한 그릇, 소주 한 잔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집의 가장 큰 매력이며 10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누구나 학창시절을 회상해보면 떠오르는 추억의 분식집이 하나씩 있을 것이다. 하교하는 길에 들러 친구들과 먹은 기억, 점심시간에 외출증 끊어서 몰래 떡볶이를 먹고 들어온 기억, 그리고 야자 중간 저녁시간에 잠깐 나가 친구들과 수다 떨며 먹은 기억.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중했던 시간들과 빛바랜 추억 속 떡볶이 집이 그리울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때를 대비하여 강동구 주민 20년차로서 강동구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한 번씩은 꼭 가보았을 즉석떡볶이집을 소개하려고 한다.
명일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사거리가 보인다. 사거리에서 직진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면 핸드폰 대리점이 있는데 한 칸 더 직진하면 그 사이에 골목이 있다. 이런 곳에 맛집이 있다고? 의문이 들 정도의 좁은 골목인데 조금 올라가면 약간은 예스러운 노란색 벽에 '꾸러기 분식'이라는 빨간색 글자가 적힌 노란색 간판이 보인다. 가게 창문에 '명일역 짜장 떡볶이 맛집', 그리고 '톱스타 조인성이 즐겨먹는 짜장 떡볶이'라는 로고가 붙어있다면 잘 찾았다.
동네 사람들한테는 톱스타 조인성이 단골이었던 떡볶이 집으로 유명하다. 이 근처에서 살았다는 조인성이 배재고에서 농구하고 이 곳 떡볶이를 먹으러 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예전에는 성덕여자상업고등학교 근처 떡볶이 맛집으로도 유명했는데 어느새 성덕여상이 성덕고등학교로 바뀌었다. 이렇듯 명일역 주변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꾸러기 분식은 30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여러 방송에서 소개되었는지 방영 당시 사진과 연예인들의 사진과 사인이 붙어있다. 물론 조인성 씨 사인도 있다. 가게 내부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상당히 느껴진다.
보통 즉석 떡볶이 집은 떡볶이 종류를 다양하게 파는데 이곳은 오직 짜장 떡볶이만 판다. 2인분에 11,000원, 3인분에 16,000원이다. 저렴한 가격은 아니지만 추억의 값이라고 생각하고 시켰다.
프라이팬에 떡, 오뎅, 계란, 야끼만두, 라면사리 등 떡볶이 재료들이 담겨 나온다. 잡다한 재료들을 넣어먹는 것이 즉석 떡볶이의 소소한 재미다. 테이블마다 세팅되어 있는 가스레인지 위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벽면에 붙어 있는 사장님의 꿀팁 '꾸러기 짜장모듬 떡볶이를 맛있게 조리하는 법'을 참고해서 조리하면 먹을 준비 끝. 조리법은 다음과 같다. 불을 켜고 1분 후에 가운데를 중점으로 골고루 잘 저은 뒤 약 3~4분 후에 불을 약간 줄이고 천천히 저으면서 맛을 본다. 그렇게 3~4분 정도 후에 끄고 맛있게 먹는다.
보통 짜장 떡볶이는 시꺼먼 색인데 여기는 갈색이다. 완전 짜장 맛이 아니고 일반 떡볶이에 춘장이 섞인 맛이다. 예전부터 완전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가끔 생각나는 추억의 맛이다. 꾸러기 분식의 비법은 양념장에 있다고 한다. 텁텁함을 없애주기 위해 파인애플과 사과를 넣고 우엉까지 넣어 끓여낸 육수가 비법의 핵심이라고 한다. 육수에 고춧가루와 고추장, 그리고 춘장을 섞어주면 꾸러기 분식만의 특별한 양념장이 완성된다고 한다.
즉석 떡볶이의 마무리는 볶음밥이다. 이상하게 즉석떡볶이를 먹고 볶음밥을 먹지 않으면 포만감이 들지 않는다. 특히 꾸러기 분식의 비법인 떡볶이 양념장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선 볶음밥이 필수다. 떡볶이를 다 먹고 볶음밥을 시키면 남은 떡볶이 국물에 밥과 야채를 볶아주신다. 다 볶고 바닥에 꾹꾹 누르면 맛있는 볶음밥이 완성된다.
학교 다니면서 자주 갔던 분식집이 꽤나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이전했거나 없어졌다. 남은 곳은 이곳이 유일한 것 같다. 즉석떡볶이를 좋아하고 2000년대 초반 특유의 감성을 느끼고 싶다면 꾸러기 분식을 강력 추천한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하나씩은 만들고, 꼭 가지고 있어야하는 기본적인 물건 중 하나가 바로 ‘도장’이다. 도장은 작지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또 다른 신분증으로서 은행이나 회사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시간을 들여 수작업으로 하나씩 만들어가던 도장들은 이제 기계와 컴퓨터를 통해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게끔 변하였다.
서울구 종로구 관철동에는 오래된 수제 도장가게인 ‘박인당’이 있다. 청계천로 앞 빌딩에 있는 박인당은 관철동에 자리를 잡은 지 45년, 박인당이라는 상호를 내건지 올해로 41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박인당을 운영하고 있는 석재 박호영 대표는 컴퓨터로 조각하는 도장은 분명 간단하고 편하지만, 그만큼 위조하기가 쉽다고 말한다. “손으로 새긴 도장은 같은 글자라도 똑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으니 위조할 수 없는 거지. 나는 내 일을 사람의 재산을 보호해주는 동시에 명예를 지켜주는 일이라 생각해요.” 그는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글자를 새겨 만든 도장들을 보여주며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과 빼어난 실력을 드러냈다. 그에게 도장은 모두 오랜 연륜과 기술이 녹아든 하나의 작품이었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손님이 그걸 받아보고 흡족해해야 스스로 가슴을 펴고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법이죠.” 박 대표는 상대방을 향한 정성이야말로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가장 큰 철학이자 소중한 원칙이라고 말한다. 손님을 위한 마음이 없으면 어떠한 멋진 작품이더라도 값어치가 없다는 것이 박인당의 신념이다.
도장을 새기는 기술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하는 박호영 대표는 2004년 정부로부터 ‘명장’ 칭호를 받았다. 박인당은 넓을 박(博)자에 도장 인(印)자를 써서, 도장에 대해서 넓게 많이 안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박 대표는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인장업뿐만 아니라 여러 사업을 했다. 문구도 취급하고 인쇄업에도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사업은 쉽지 않았고, 경제적인 위기를 겪게 되어 끝내 회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일을 정리한 후에서야 그는 본격적으로 인장업에 뛰어들었다. 예문사, 창문사를 거치고 난 1978년, 그는 자신의 가게에 ‘박인당’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는 그 비싼 상아에서부터 물소 뿔, 벽조목(霹棗木), 청옥 같은 귀한 재료들이 그의 손에 의해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귀한 도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름을 새겨온 그는 “박인당의 간판을 거는 그 순간부터 이것이 천직이라고 생각하며 걸었다”고 회고한다.
그 뒤로 수십 년이 지나고 젊음과 열정으로 넘쳐나는 종로의 먹거리 골목에 위치해 있었던 도장가게 대부분이 점차 높아지는 임차료와 재개발 문제를 피할 수 없어 문을 닫게 되었다. 하지만 박인당 만큼은 자리를 옮겨 계속 그 이름을 이어갔다.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된 것도 정확히 8년째가 된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받은 명장 증서에 적혀있는 ‘한국 최고의 영예’라는 글자가 무색하게도 자신의 작품으로 손님들을 만족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였다.
그는 박인당의 손님들 중에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자신이 명장이 되기도 전부터 지금까지 잊지 않고 박인당을 꾸준히 찾아오는 한 단골에 대해 말을 꺼내며 자신이 만든 도장이 어쩌면 그 손님에게 큰 의미를 만들어준 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 무척 기쁘다고 했다. 오래된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하고 일에 대한 보람을 느낄 때면 늘 힘이 난다고 덧붙였다.
박인당은 단순히 오래된 도장가게가 아니라 많은 사람의 이름과 삶이 숨 쉬며 교차하는 공간으로서 관철동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려운 상황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박인당에 찾아가 도장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오래전 박인당을 찾아온 손님이 도장이 필요할 때면 늘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처럼, 분명 누군가에게는 그곳에서 만든 도장 하나가 큰 의미가 될지도 모른다.
중구 저동 을지로 골뱅이골목 너머로는 수많은 회사빌딩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하늘 위로 높게 뻗어있는 빌딩들을 하나씩 눈으로 더듬으며 나아가면 그 가운데에 자리 잡은 ‘종로양복점’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빌딩 6층에 자리 잡고 있는 종로양복점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선반과 그 안에 차곡하게 쌓여있는 옷감들, 그리고 그 곁에 줄지어 걸려있는 양복들이 방문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자신의 주인이 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양복들은 모두 종로양복점의 대표인 이경주 대표의 손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이다.
올해로 문을 연 지 103년이 된 수제 양복점인 종로양복점은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서울의 유명한 가게 중 하나다. 본래 보신각 앞에 자리하고 있었던 종로양복점은 1942년에 종로1가로 한번 자리를 옮겨갔다. 이후 광화문 신문로 대로변 2층으로 다시 자리를 옮기고 10년, 2010년 지역 재개발로 인해 또다시 자리를 옮기게 되어 지금 이 장소에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자리를 옮겼어도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는 전통과 우리가 만드는 수제 양복의 가치는 변함이 없다”며 이경주 대표는 자랑스레 웃었다. 이경주 대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3대째 이 양복점을 이어나가고 있다.
‘종로양복점’의 역사는 창업주이자 이 대표의 할아버지이신 이두용 씨가 1916년 보신각 옆에서 가게를 차리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양복 학교를 다니며 유학을 했던 할아버지는 뛰어난 솜씨로 당시 개성과 함흥에 분점을 내기까지 했다. 그의 아버지이자 종로양복점의 2대 대표인 이해주 씨는 지성무식(至誠無息)의 마음으로 손님을 향해 정성을 다했고, 그러한 아버지의 신념은 아들인 이 대표에게도 물려졌다. 대대로 이어져 온 이 기술과 정성이야말로 지금의 종로양복점을 있게 만들어준 가장 큰 공로자이자 자랑거리인 것이다.
백여 년이라는 오랜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진 만큼, 종로양복점에도 크고 작은 위기는 있었다. 1950년 6·25로 인해 1·4후퇴가 일어나던 날. 어린 소년이었던 이 대표는, 가족들과 공장 직원들 모두가 양복점에 있던 옷감들을 한가득 어깨에 짊어지고 도망치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피난을 가서 대구까지 내려간 그들은 그곳에서도 자그마한 공간을 찾아 그 자리에 종로양복점의 간판을 다시 내걸었다. 피난을 가서도 자신들의 삶인 가게를 쭉 이어간 것이다.
빠르게 변해가는 지역사회 속에서도 꿋꿋하게 그 이름을 지키며 가게를 이어가고 있는 종로양복점은 누구나 이름을 아는 연예인들이나 박정희·김영삼 전 대통령,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같은 유명 인사들을 포함한 다양한 손님들이 찾아든다. 103년간 이어온 가업은 곧 브랜드가 되어 입소문을 타고, 그 소문을 들은 전국 각지에서 손님들이 방문하고 있는 것이다. 저 멀리 부산과 제주는 물론 바다 건너에 있는 일본에서도 일감이 온다. 이경주 대표는 요즘은 기성복이 슬림화되어 있고 대중들에게 편하게 퍼져있는 만큼 자신에게 제대로 맞는 옷과 나만의 매력과 개성을 찾으려는 20, 30대의 젊은 층의 손님들도 많이 찾아온다고 이야기했다.
존경하는 스승이자 하나뿐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재단 가위를 잡게 된 그는 모든 것이 어려웠던 처음과 달리 일이 익숙해진 지금도 틈틈이 백화점 매장을 돌아보며 기성복 트렌드를 살피고 외국 양복잡지를 펼쳐본다. “오래된 가게라는 것만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느냐, 그 이상으로 특별하고 자랑스러운 가게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쌓아온 세월뿐만 아니라 앞을 향해 발전하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경주 대표의 얼굴에는 세대를 뛰어넘는 뜨거운 열정이 담겨있다.
그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한, 이 일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 한다. 부디 이 뜻깊은 전통과 역사, 그리고 깊은 신념이 살아 숨 쉬는 서울의 ‘종로양복점’이 오래 그 뜻을 이어 펼쳐나가길 바라본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음악과 그림을 사랑하고 문화를 즐기며 예술을 구가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해진 오늘날, 회색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글을 쓰고 귀농을 꿈꾸며 자신들이 원하는 자유로운 예술을 즐기고자 지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젊은 예술인들이 늘고 있다.
시원한 공기와 맑게 지저귀는 산새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자유로운 땅 충북에는 그러한 젊은 예술인이 모여 지내고 있는 대표적인 예가 자리하고 있다. 충북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에 있는 ‘괴산 탑골 만화방’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구석진 시골 지방에 있는 만화방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의아함을 안겨 주기 쉽다. 어째서 이런 곳에 만화방이 있는 것인지, 어떠한 장소인 것인지 등 그 물음은 다양할 것이다. 신기리의 탑골마을 어귀에 있는 괴산 탑골 만화방은 노란 낙엽이 흩날리는 아름다운 은행나무 길로 유명한 문광저수지의 옆, 주민이라고는 겨우 열 네 가구뿐인 작은 마을에 위치해있다. 고려시대에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송주산의 아래에 사찰이 하나 있었다고 하는데, 그 안에 있던 탑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사람들은 그 탑으로부터 이름을 따 이 땅을 탑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괴산 탑골 만화방 안으로 발을 내딛으면 그 안은 마치 잠시 쉬었다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편안한 쉼터를 연상시킨다. 투박한 형태의 목제 의자들은 그 평온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으며, 한쪽 벽면에는 만화방답게 수많은 종류의 만화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어 찾아든 이들이 자연스럽게 손을 뻗게 만든다. 이곳을 방문한 손님을 환영하는 것처럼 놓여있는 알록달록한 장난감들과 다른 벽면에 위치해 있는 넓은 칠판에는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남겨둔 색색의 흔적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온화한 온기로 감싸여져 있는 탑골 만화방은 매월 마지막 주의 토요일마다 ‘탑골다방’을 열어서 방문한 손님들과 직접 원두를 볶는 일과 직접 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시간을 갖고, 조그마한 영화제를 열어 단편영화나 독립영화같은 것들을 함께 보거나 우쿨렐레를 배우는 소모임의 장소로서 이용되고 있다. 그 외에도 일 년에 두 번씩 ‘만화 세미나’가 열리기도 한다.
“목적 없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만들었어요, 이용하는 사람들에 따라 목적이 달라요.” 탑골 만화방의 주인인 양철모 대표의 말이다. 다양한 놀이거리와 강의를 기획하여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많은 이들이 서로에게 배우는 시간과 ‘상호 학습’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만드는 만큼 기업에서 일하는 회사원이나 협동조합의 활동가, 귀농한 청년과 여행을 통한 방문객 등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손님이 찾아든다.
탑골 만화방에 모인 이들은 밥을 짓고 청소하는 일등을 다함께 나눠서 하는 것은 물론 ‘사다리타기’등의 게임을 통해서 담당자를 지명하거나 자발적인 분업을 통하여 각자의 몫을 나눈다. 마당에 있는 평상에 둘러 앉아 다 같이 저녁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주말마다 이 주변에서 농장을 하는 만화방 손님의 밭에 찾아가 일손을 돕거나 다른 이들이 일하는 동안 노래를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흥을 돋우기도 한다. 말 그대로 모두를 위한 자유롭고 멋진 젊은 예술인들의 장소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탑골 만화방은 ‘시골 마을에도 분명한 쾌락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방으로 내려온 예술가인 양철모 대표와 ‘공공미술삼거리’의 예술인들이 폐가였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만화방이다. 2011년의 어느 날, 공공미술이 이런 도시 중심에만 있고 왜 시골마을에는 없느냐는 날카로운 질문에서 시작된 작은 모임은 뜻이 맞는 예술가들이 모여 공공미술 및 문화예술기획 분야에서 활동하는 미술인 비영리민간단체 공공미술삼거리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삼거리의 대표이기도 한 그는 도시 속에서 강제하고 제한해왔던 답답한 삶의 방식을 탈피하고, 모두가 함께 배우고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예술의 장을 꾸려나가는 것으로서 마을 문화 활성화에 힘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탑골 만화방이 바로 그 상징인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고 다정하고 친근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을 통하여 마을에 생기를 돌게 만들고 싶었다는 양철모 대표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괴산 탑골 만화방은 이처럼 지역 주민들뿐만 아니라 각지에서 찾아오는 많은 손님들에게 있어서 더없이 특별한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단순히 휴식만을 즐기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자유와 예술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염원과 훈훈한 정이 담겨있는 장소이다. 탑골을 여행한다면 꼭 한번 방문하여 그 마음을 접해보는 것은 어떨까.
문경에는 경북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관이 있다. 동로의 한 자리를 지킨 현대이발관이 바로 그곳이다. 1970년대의 예전 모습을 21세기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현대이발관은 최근에 하얀 컨테이너 건물로 옮겨 깔끔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뉴스를 통해 본 슬레이트 지붕에 전체적으로 빛바랜 페인트, 전형적인 블록집의 모습을 생각하며 찾아갔다면 그 시절의 정취를 잃어버렸다는 마음에 잠시 아쉬움을 느낄 수 있겠지만, 이발관 안으로 들어서면 정겨운 분위기가 여전히 반기고 있다.
거울 위로 이용 자격증, 이용사 면허 등이 액자에 걸려 있다. 나무판에 붓으로 쓴 ‘현대이발관’이라는 간판은 세월에 지워져 이발관이라는 글씨만 겨우 알아볼 수 있다. 면허, 자격증과 함께 걸려있는 이용요금표에는 ‘조발·면도·세발·드라이 10000원’이라고 적혀있다. 안쪽 벽에는 달력과 현대이발관의 기사가 실린 대구신문이 걸려 있다. 신문 전면에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가 바로 현대이발관의 주인 박용덕 씨다.
박용덕 씨는 1957년부터 무려 60여 년 동안 이발을 하며 살아왔다. 현대이발관에는 그가 오랫동안 사용해 손에 익은 이용도구들이 있다. 섬세한 이발이 끝나면 이발관 한편에서 머리를 감는다. 현대식 샤워기는 없다. 대신 오래된 파란색 물뿌리개로 거품을 씻어낸다. 개업부터 박용덕 씨와 함께한 낡은 금고와 절연테이프로 전선을 감은 은빛 드라이기, 손때 묻은 이발 가위. 현대이발관의 정취는 박용덕 씨와 그의 도구들이 만들어내고 있다.
1960년대에는 이발 비용이 2, 30원이었다. 1970년대에는 그보다 열 배 정도의 금액인 2, 300원이었다. 박용덕 씨는 10원으로 장을 볼 수 있던 그 시대에 하루 8만원까지 벌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바쁘게 일했다. 손님이 몰려 일일 150명의 머리카락을 이발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요즘 맛집에서나 나눠주는 대기표를 현대이발관에서 발권하기도 했다. 그 수가 100번이 넘어갔다. 그 시대에는 사람들이 특별한 일이 있거나 중요한 날에 이발관을 찾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의 손끝에서 다듬어진 행복들이 어떤 모습을 띠고 있었을지 어렴풋이 가늠이 된다. 박용덕 씨는 여전히 전기 이발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막가위와 톱가위, 두 종류의 가위를 쓴다. 옛날에는 직접 가위를 갈아 쓰기도 했었다.
박용덕 씨는 15살 어린 나이에 이발 가위를 쥐었다. 단돈 10원이라도 자기 손으로 벌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자격증이 없었던 그는 누군가의 신고로 이발을 그만둬야 할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이용자격증 시험에 단번에 붙은 그는 뿌듯함을 느꼈다. 그때가 1972년이었다. 손님이 많을 때는 너무 힘들어서 이발소를 그만둘까도 고민했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가 떠나면 머리를 만질 곳이 없다며 붙잡았다. 한두 사람이라면 그냥 떠났겠지만 너무 많은 이들이 부탁해서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1990년대 들어서는 손님이 뜸해졌다. 미용실이나 전문 헤어샵의 등장으로 이발소의 위상이 점차 줄었기 때문이다. 3일과 8일 문경에 장이 서는 날이면 손님이 찾아오지만 한 달 15명 정도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이발관에 들어가면 스스로 50년 단골, 60년 단골이라 자랑스럽게 말하는 손님들이 있다.
논밭이 펼쳐진 동네에는 현대이발관이 유일한 이발관이다. 박용덕 씨는 집에만 있는 것이 지루해서 외출을 자주 즐긴다. 점촌 시내로 나가있기도 하고 오미자 밭에서 밭일을 하기도 한다. 이런 이발사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 단골 손님들은 이발을 하러 오기 전에 꼭 그에게 연락해서 이발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본다고. 박용덕 씨는 여전히 이발을 한다. 그는 100살까지 이발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경북지역의 최고령 이발관, 현대이발관의 장수를 기원한다.
우연하게 듣게 된 귀에 익은 노래, 언젠가 맡아본 것 같은 익숙한 향기, 그리고 어떤 공간에 들어설 때 느껴지는 느낌을 따라, 순간적으로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될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기억일 수 있는 학교 앞 문방구에 관한 추억은 아름다운 유년의 기억 한 자락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마련이다.
등하굣길에 단골손님처럼 드나들던 그곳에서의 추억을 꺼내다보면 어느새 마냥 해맑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착각이 들만큼 골목 안에 자리 잡은 문방구는 사람들의 추억을 저장하고 있는 기억저장소이다.
이러한 문방구들이 어느 사이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초등학교에서 필요한 학습준비물인 문구류를 일괄로 지급해주고 있어서 더 이상 학교 준비물을 문방구에서 사지 않아도 되는 시절이고, 유일한 군것질거리였던 불량식품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먹을거리가 흔한 세상이다.
초등학교 시절, 기억 속의 문방구는 아이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만물상이었다. 학용품을 비롯한 장난감과 간식류인 과자들까지도 한 번에 얻을 수 있었던 보물창고 말이다.
이태원의 경리단길을 따라한 것인지 경주에도 황리단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골목이 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등장하면서 조금 더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황리단길은 2017년 초부터 조금씩 두각을 드러내며 젊은이들과 경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경주 황리단길이 있는 황남동 주변에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예쁘고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즐비하고 60~70년대의 추억을 소환하는 오래된 건물들이 보존되어있어서 경주를 찾는 방문객들이 자주 찾는다.
경주 황리단길 안에 위치한 천마문구사(천마문구완구백화점)은 낡은 간판이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는 경주의 오래된 가게이다. 1978년에 개업해 4대째 41년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예전에는 등교시간에 좁은 가게 안에 아이들이 가득했어요. 준비물 안 챙겨오는 아이들이 꼭 있어서, 그런 아이들 위해서 학년별로 미리 준비물을 챙겨놨다가 챙겨주기도 했고, 아침시간에 좁은 가게에 아이들이 들어차면 서로 서로 물건을 빨리 달라고 아우성이고 미처 돈을 준비 못한 아이들에게는 외상으로 물건을 주고 나중에 받기도 하고 그랬지요. 그때는 다들 그랬어요.”
과거 이야기를 하는 주인장의 얼굴에는 아빠 미소가 번지고 있다. 듣다보니 나의 초등학교 시절이야기라서 함께 웃으며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문방구 안을 둘러보니 익숙하고 낯익은 것들이 보인다. 아폴로, 쥐포, 밭두렁 같은 불량식품이라 불렸던 간식거리들이 어린 시절 입맛을 상기시킨다. 가게 한쪽에 한때 유행하던 피카추 인형과 남자아이들의 로망이었던 장난감 칼이며 소꿉놀이 세트 등이 최신 장난감인 슬라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의 놀이문화도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천마문구점에 놓인 장난감들을 보며 느끼게 된다.
기억 속의 문방구 앞에 놓여있던 뽑기 기계와 오락기 앞에는 늘 단골손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초등학교 시절 학교 앞 문방구에는 종이인형과 딱지, 공깃돌 같은 것들이 아이들의 인기상품이었는데 요즘 아이들에게는 슬라임과 비누 방울 등이 좀 더 인기를 얻고 있단다. 추억의 군것질류는 황리단길을 찾는 어른들이 옛 생각에 많이들 사간다고 한다.
문방구의 주인인 아이들은 점차 적어져 보기 어렵고 아이들이 쉴 틈 없이 드나들었던 추억의 문방구를 기억하는 관광객과 방문객들의 발걸음만이 가득해져, 조금은 씁쓸한 천마문구사를 돌아 나오며 그곳을 거쳐 갔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더듬어본다.
경주 황리단길에 들러볼 일이 있다면 한번쯤 천마문구사를 찾아가보자. 운이 좋다면 어린 시절 꼭 한번쯤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발견할 수도 있을 테고 그곳에서 잃어버린 유년의 추억 한 자락을 발견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광주문화재단에서 오래된 가게로 소개받은 공원물방을 찾았다. 염료 가게라고 하는데 이름이 물방이다. 물감을 판매하는 물감방의 줄임말인 듯하다. 처음에는 인터뷰를 거절하셨던 사장님과 지역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음을 열고 지난 이야기를 해주신다.
“지금 내가 66살인데, 예전에는 염료가게가 지방마다 있었지. 전에는 배달도 많고 했지만 요즘은 소득이 없으니까 하려는 사람들이 없어.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지배 할 때부터 공원물방이 있었다고 하니 그때부터 계산해보면 이 가게가 100년이 넘었지. 내가 처음 입사했을 때는 건물이 일본식 주택이니까 겨울철에 다다미집에서 고생하며 지냈어. 내가 19살부터 일했으니까 여기서 일한지 47년이 되었지. 처음에 7년간 근무하고, 내가 인수한지 40년이 된 건데. 내가 입사할 때 물방 사장님은 우리 아저씨 되시는 분 친구였어, 그분이 잠깐만 일 좀 봐달고 했던 건데, 잠깐 한다는 게 47년이 되부렀어.”
50년 가까이 한 가지 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그렇게 오랫동안 물방을 운영해온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장사가 잘 되던 시절은 지나가고 지금은 단골손님 몇몇만이 가게를 찾는다고 한다. 가게 문을 닫으면 그 손님들은 이 지역에서 염료를 살 곳이 없다.
“공원물방이 원래 있던 자리는 일본식 건물은 철거되고 주차장이 됐어요. 여기로 온지는 십년 조금 넘었는데, 물방이 이제 광주에는 저밖에 없어요. 색깔 내는 방식을 알아야 하는데 요즘에는 아는 사람들도 없지. 면사에 쓰는 염료, 나일론 염료가 다 다르지. 염료 부호를 알아야해. 어디에 쓴다 하면 바로 알아야지. 전에는 독일제가 제일 좋았어요. 이제는 염료를 선진국에선 안 만들고 후진국에서 만들고 있지, 환경문제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생산을 안해요. 상표는 변함이 없으니까 그렇지. 국내산 나오는 것도 천연염료뿐이에요. 화학염료는 전부 수입품이지. 옛날에는 소득이 좋았어, 광목에 염색 할 때, 특히 명절에는 줄섰지. 그리고 인근 지역에서 염료를 받아다가 장사하는 사람들 많았어요. 옛날에는 직물공장이 있었잖아.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을 때만해도 염료를 수입해서 염색해서 수출하고 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섬유를 생산하는 공장들이 없어졌잖아요. 그러니까 산업구조가 바뀐거죠. 이 업종은 이제 사양산업이 된 거야. 점원들 다 보내고 혼자 일한지도 10년이 넘었는데, 이제 하는데 까지 하다가 말아야지 뭐.”
예전에 호남지방의 염료는 부산을 통해서 공급되었다고 한다. 고체화된 양잿물, 물감, 조단이라는 첨가물이 주종이었다. 부산에서 여수로 들어온 원료들은 호남 각지의 도매상에게 판매되었고 도매상을 통해서 보부상들이 인근 지역 소매상들에게 물건을 공급했다. 원하는 색상의 물감과 양잿물과 조단을 섞어 뜨거운 물에 끓이면 흰 무명옷감이 원하는 색깔로 염색이 되었다. 당시에 염료는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활필수품 이었다. 그러나 예전의 무명옷들은 이제 화학섬유로 대체되고 기존의 물방들은 나전칠기에 사용되는 염료를 주로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사용되는 염료의 양은 턱없이 줄어들어 상인들은 생계를 이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전라도 광주에 마지막 남은 염료가게, 공원물방을 지키고 있는 문경필 사장님의 뒷모습이 더욱 작아 보인다.
의왕시 고천동은 오밀조밀 가깝게 붙은 주택 사이로 골목이 정겨운 마을이다. 좁은 골목 어딘가에서 한 무리 꼬마들이 함께 어울려 놀자고 소리치며 달려 나올 것만 같다.
고천동 골목골목을 쏘다니다 보니 국수 뽑는 가게와 국수 끓이는 가게가 나란하게 붙어있는 모습이 보인다. ‘칠갑산국수’라는 간판을 보니 칠갑산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니 좁은 가게 안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국수 만드는 집기들을 볼 수 있었다. 국수를 직접 뽑아 말려서 납품하는 모양인지 국수 뽑는 기계와 말리는 건조대까지 모두 갖춰져 있다. 쑥 국수, 잔치국수, 칼국수 등 면의 종류에 따라 뽑아내는 기계도 달라진다.
‘칠갑산국수’는 수작업으로 국수를 만드는 곳이다. 의왕시에서 유일하게 남은 ‘국수 뽑는 집’이다. 1950년생인 전덕순 님은 시누 남편이 운영하던 가게를 물려받았다.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부터 세어보면 어느덧 30년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칠갑산국수’는 충남 청양 칠갑산이 전덕순 님의 고향이라 붙인 이름이다.
수작업으로 국수를 만드는 공정은 여러 단계를 거친다. 우선 밀가루를 그릇에 넣어 물로 반죽을 하고 기계를 돌려 면을 뽑는다. 그다음 대나무로 된 건조대에 면을 걸어서 이틀 정도 말리는데,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자연스럽게 부는 바람에 말리는 것이지만, 상황에 따라 선풍기를 돌려가며 말리기도 한다.
한겨울에는 손님도 적고 작업이 힘들고 날이 더우면 반죽이 금세 굳어진다. 국수는 날씨에 매우 민감하고 건조가 중요해서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은 국수 말리기가 쉽지 않다.
칼국수용 면은 반죽할 때 소금을 쓰지 않는다. 칼국수를 조리할 때 대부분 우려낸 국물에 면을 넣어 끓여 먹기 때문에 국물에 간이 배는 것을 고려해서 반죽할 때 간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일반 잔치국수용 면은 반죽할 때 적당량의 소금물을 쓴다. 그래야 더 맛있는 국수가 만들어진다. 잘 마른 국수는 일일이 잘라서 개별포장을 한다. 국수 한 묶음이면 15명이 먹을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국수 한 묶음 가격이 5,000원. 10년 동안 변함없는 가격이다. 어째서 가격이 변함이 없냐고 물으니 밀가루 값이 변함없으니 국수 가격도 변함없이 판다는 주인아주머니의 당연하다는 듯 한 대답이 돌아왔다.
‘칠갑산국수’는 주로 소매로 많이 팔린다. 도매로 나가거나 영업점에 납품하기엔 단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오랜 기간 믿고 찾는 단골이 사 간다. 작년까지만 해도 장사가 잘되었다는데, 올해처럼 힘들어 보기는 처음이라고 하신다. ‘칠갑산국수’ 가게가 있는 고천동 지역이 재개발 예정지역으로 정해지며 점차 손님이 줄어들었단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선물한다고 찾아오는 단골들이 있어요. 부모님 계신 경로당에 단체로 선물한다고 사가기도 하고, 아무래도 연세 있는 어르신들이 국수를 좋아하니까, 젊은 사람들은 라면을 좋아하잖아. 나이가 좀 있는 단골들이 많은 편이에요. 우리 집 국수를 한번 먹어보면 시중에 파는 국수를 못 먹어요. 맛이 확실히 다르거든. 우리 가게가 문이 닫혀있어서 어쩌다 찾아온 단골들이 국수를 못 살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시중 국수를 사 먹었다가 후회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 국수는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던 든든한 한 끼 식사였다. 쌀이 귀하고 밀가루가 흔했던 그 시절, 집에서 식사 대신 국수나 수제비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국수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던 음식이다. 조선시대에는 국수는 아주 귀한 음식이었는데, 주로 혼인이나 환갑, 돌잔치 같은 경사스러운 날 잔칫상에 올라가던 음식이었다. ‘잔치국수’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나왔다. 결혼을 앞둔 이들에게 언제 국수 먹여줄 거냐고 묻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칠갑산 국수’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국수도 단연 잔치국수다. 옛날에는 시장이나 터미널, 기차역처럼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가락국수집이 보이곤 했다. 급하게 기차를 타기 전에 후루룩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국수는 많은 사람에게 가슴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칠갑산국수’를 나와 이웃한 국숫집에 들어섰다. 따끈한 멸치육수에 금방 끓여낸 국수 한 그릇을 받아들었다. 국수 뽑는 가게와 국수 끓이는 가게가 서로 이웃하며 정겹게 지켜온 마음씨만큼이나 ‘칠갑산국수’의 면과 ‘국숫집’ 국물의 맛이 조화롭다. 따끈한 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고천동 골목 사이를 걷는다. 국수 한 그릇으로도 온전히 채워질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콧잔등에 돋아난 땀을 닦는다.
동두천 상패교 앞에 위치한 동두천 56하우스는 대를 이어 운영하는 오래된 경양식 집이다. 이곳은 오충호 대표의 부친이 미군 부대에서 셰프로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1969년에 문을 열었으니 그야말로 50년 전통의 경양식집이다. 56하우스라는 이름은 ‘오’씨 가족 ‘6’식구가 운영한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50년 전통의 한식집은 낯설지 않지만 50년 전통의 양식집은 보기 드물다. 56하우스를 이어받은 오충호 대표는 미군 부대 옆에서 미국의 문화를 어려서부터 익혔기 때문에 50년 전통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동두천에는 경양식이 하나의 문화로 형성되어 있었다. 도시락에 계란 하나 넣기도 힘들었던 시절이었지만, 미군 부대가 주둔한 동두천은 햄버거를 비롯한 미국 음식이 흔했다. 오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도넛이나 바나나 우유 등 귀한 미국 제품들을 맛보며 자랐다. 미국의 맛이 익숙했던 당시 동두천 일대에는 햄버거나 피자를 비롯한 경양식을 하는 식당이 즐비했다. 그중 지금까지도 전통을 지키고 있는 곳은 56하우스뿐이다.
56하우스의 입구에 들어서면 살아있는 랍스터가 수조에서 반긴다. 입구 모습도 그랬지만 내부 인테리어에도 7, 80년대의 정서가 가득 담겨있다. 그 시절 고급 레스토랑을 찾아갔던 특별한 날의 향수마저 느껴진다. 이런 풍경 때문일까. 56하우스를 자주 찾는 방문객들은 종종 50년 동안 변함없는 맛이라고 외치곤 한다. 그러나 오 대표는 50년 전의 그 맛은 아니라고 말했다. 미군이 주 고객층이었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미군부대 이전으로 미군이 줄었다. 이 때문에 오 대표는 한국인 손님들을 대상으로 맛을 조금씩 변화시켜왔다.
오 대표는 어려서부터 56하우스에서 요리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요리를 하게 되었다. 동두천에서 유명 호텔까지 출퇴근을 하면서도 어머니와 아내를 도와 56하우스 메뉴 개발에 힘썼다. 그가 막상 호텔을 그만두고 56하우스를 경영하려고 보니 막막했다. 요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한국인으로 고객층을 바꾼 것도 그 시기였다. 그때부터 음식에 밥이 곁들여 나오고 김치와 단무지를 반찬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샌드위치 가게에서는 샌드위치, 파스타 가게라면 파스타만 주력으로 파는 형태로 고급화 된 현대의 식당과 달리 56하우스는 오랜 경양식집답게 메뉴판의 메뉴도 화려하다. 이렇게 많은 메뉴를 고루 맛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오 대표가 그만큼 노력하고 공부한 결과이다. 랍스터는 수조에서 꺼내 싱싱한 상태로 조리한다. 스테이크 소스는 직접 레드와인을 졸여 만든 비법 소스이다. 이런 랍스터 요리와 스테이크를 함께 먹을 수 있는 56하우스 스페셜부터 다양한 스파게티나 라이스 등의 메인메뉴도 눈길을 사로잡지만, 직접 만든 패티가 들어간 56하우스의 햄버거도 빼놓을 수 없는 이곳의 자랑이다. 계란이 들어간 햄버거는 어린 시절 운동회 날 먹었던 햄버거 맛을 떠올리게 한다. 포장도 가능하기 때문에 햄버거 포장을 주문하는 손님도 많다.
동두천 일대의 도시개발로 56하우스의 음식 맛을 고향의 맛처럼 느끼던 이웃 주민이 많이 사라졌다. 그 때문에 56하우스에는 동네 주민 보다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찾아오는 외지인의 비중이 늘었다. 그 중에는 몇 십 년 전 56하우스에서 식사를 했던 손님도 있다. 2, 30년 전의 추억을 느끼려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연애할 때 오던 손님이 손주를 데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오씨 가족이 6명에서 5대가 될 정도의 시간이 지났지만 오 대표는 5년 정도 밖에 지나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동두천에 관한 추억이 없는 사람도 그 시절의 향수를 가지고 있다면 56하우스를 방문하기 위해 동두천으로 발걸음을 향할 이유가 충분해 보인다.
1929년 전주 한복판 중앙동(당시 지명 다이쇼오마치(大正町))에 3층짜리 일식집(우동집)이 문을 열었다. ‘박다옥(博多屋)’으로 알려진 일식집은 3층 건물이었는데, 1개 층 건평이 약 200㎡(60평)이었다. 아쉽게도 박다옥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3개 층 모두를 음식점으로 사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1개 층만 일식당이었다 해도 상당히 넓다.
1930년대 전주 다이쇼오마치를 찍은 사진을 보면 도로 양편에 한옥과 일본식 건물이 줄지어 있다. 대체로 2층 높이다. 반면 박다옥 건물은 최고 높이 12.3m인데다, 콘트리트 블록 구조에 외면의 장식성까지 더한 근대식 건축 기법으로 지어졌다. 박다옥은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대형 일식집 박다옥은 일본 상권이 전주를 완벽하게 장악했기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한다.
경술국치 이전 일본인 상권은 전주읍성 서문 밖에 형성되었다. 1909년 성곽이 철거되고 1911년부터 도로 개설·정비 작업이 진행되면서 일본인들은 전주시내로 진출했다. 1930년경이 되면 전주 중앙동 일대는 일본인 상점이 즐비한 전주 최대의 상가로 이미 변신한 상태였다. 전북도청과 우체국이 자리 잡았고, 금융기관, 요릿집, 술집, 시계점, 양복점, 양품점, 가구점이 도열하듯 늘어섰다. 가네우치 토시요시(金內利吉)가 건축주인 박다옥은 전주를 상징하는 전주객사, 풍남문, 구 전북도청(전라감영 자리)에서 불과 300~500m 거리다.
박다옥의 주 출입구는 정면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주 출입구 꼭대기에 오각형 인조석으로 박공벽 장식을 두었다. 2층과 3층 사이에는 사각뿔 형태의 인조석 8개를 돌출시켜 장식했다. 건물 모서리도 인조석을 장식적으로 처리했다. 당시 유행하던 상업용 건축물의 전형적인 양식이라 평가되지만,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관공서나 업무용 건물의 분위기를 풍긴다.
박다옥 건물은 1940년 남선수력전기주식회사로 넘어갔다. 현재 상부 박공벽 중앙에 선명하게 보이는 번개 문양은 남선전기 시절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후에는 삼풍산업, 한국신탁은행, 서울신탁은행에서 사용하다가 1995년 완산새마을금고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는 사이 마루였던 2층과 3층의 바닥은 콘크리트 슬래브로 바뀌었다. 함석 지붕도 샌드위치 패널 지붕으로 변했다.
해방 후 건물의 소유주들은 전 층을 모두 쓰지 않고, 다양한 상점에 임대를 주었다고 한다. 임대를 위해 1층 외벽이 철거되어 넓은 유리창으로 대체되었고, 점포마다 셔터 박스를 설치했다. 2층에는 다방이 들어서 영업을 했는데, 1960년대 박다옥 2층 다방은 전주의 시인과 예술가들이 모이는 장소로 이름이 높았다.
1990년대 초반부터 전주의 상권은 중앙동에서 전주객사 뒤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박다옥이 있던 근처는 현재 ‘웨딩거리’라는 특화된 상권으로 변모했다. 전주에 근대적 상권이 형성된 이래 양복점, 금은방, 시계점이 유명했던 거리에 걸맞은 변신이라 하겠다. 박다옥 건물은 2005년 등록문화재 제173호로 지정되었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 한테 반해서, 비단이 팔아 모은 돈 퉁퉁 털어서 다 줬소.
1938년 2월 발표된 김정구의 ‘왕서방연서’(김진문 작사, 박시춘 작곡)란 대중가요의 노랫말이다. 한때는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던 노래다. 한국으로 이주했던 중국인 중에 왕(王) 씨가 많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래에 나오는 왕서방은 한국 화교를 부르는 상징적인 이름이었다. 이 ‘왕서방들’은 청요리집 주인이나 비단장수로 유명했다.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중국인 이주자 가운데 벽돌공 등의 건축기술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전주의 아름다운 천주교회인 전동성당(사적 제288호)도 중국의 소주, 상해 등지에서 온 화교 건축기술자들이 지은 것이다. 전동성당은 1908년에 건축을 시작해 1931년 완공되었다. 중국인 기술자 1백여 명이 참여해 23년 동안 대역사를 벌였다. 5명의 목수와 100명의 석공이 가마를 설치하고 65만 장에 이르는 벽돌을 찍어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중국인 기술자들은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과 다가동이 만나는 길목에 모여 살았다. 중국인 거리가 현재의 ‘차이나타운’이 되었다.
건축기술자들이 국내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화교가 경영하는 포목점도 생겨났다. 화교들이 포목상점을 운영하게 된 것은 산동성을 근거지로 한 중국 자본이 서울과 인천에 진출해 대형 주단포목상점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상해로부터 영국산 면직물과 중국산 비단 등을 대량 수입했다. 내부 결속력이 좋은 화교는 비단을 독점적으로 싸게 들여올 수 있는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고 소매상, 도매상이 거미줄처럼 얽혀 전국적 판매망을 형성했다.
산동(山東)인들은 고향을 떠날 때 칼 세 개를 가지고 간다는 말이 있다. 비단 가위와 이발 가위, 요리 칼을 갖고 가면 어디에 가서도 포목점이나 이발소, 음식 장사를 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강한 생활력과 잘 짜인 상호협력시스템 덕택에 화교 포목상들은 1912~1924년 조선에서 소비되는 비단판매의 40%를 차지했다. 당시 포목상점의 지배인을 ‘장꾸이(掌櫃)’라고 했는데 한국인들이 중국인을 비하해 지칭할 때 쓰던 비속어 ‘장께’는 ‘장꾸이’가 변한 말이라고 한다.
전주 차이나타운에 있는 다가동 구 중국인 포목상점도 전동성당 건축에 참여했던 중국인 건축기술자들이 지은 건물이다. 1920년대에 지은 단층 건물로 중국 상해의 전통적인 비단 상가 형태를 따랐다. 중국인 두 사람의 합자로 소점포 13개를 통합하여 주로 비단을 취급하는 상점으로 시작되었다.
건물은 상점 2개가 연속된 형태인데, 출입구 상부에는 형태가 같은 작은 삼각형 박공을 두었다. 신축 당시의 건물 외벽은 적벽돌로 쌓았고, 벽기둥은 돌출한 형태였으며 거기에 인조석 씻어내기 수법으로 마감했다고 하나, 현재 건물 외벽에는 붉은색 수성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전주시가 2004년 다가 우체국과 충경로를 잇는 250m 길이의 구도심에 12억여 원을 들여 차이나 특화 거리로 조성할 당시 건물 외부에 페인트칠했다고 한다.
해방 후 포목상점이 문을 닫으면서 수차례 건물의 용도가 바뀌었고 그로 인해 내부 구조에 변화가 있었지만, 전주 다가동 구 중국인 포목상점은 근대기 화교의 유입과 전주 화교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재청은 2005년 6월 18일 이 건축물을 등록문화재 제174호로 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