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릉역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에 있는 교외선 철도역이다. 1961년에 처음 역사가 세워진 이후, 같은 해 7월 배치간이역(역장 없이 역무원만 배치된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해, 1964년에 보통역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교외선이 고양시에서 서울로 나가는 유일한 철도 교통수단이었던 때에는 하루에 수천 명의 승객이 이용할 정도였다.
수도권 전철 1호선과 중앙선이 개통되고 점차 고양시와 서울을 잇는 다른 교통수단들이 발달하면서 승객수가 감소함에 따라 1984년 무배치간이역(역무원도 없는 무인역)으로 격하되었다가, 2004년에는 여객영업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일부 포털사이트 검색에는 ‘폐역’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현재까지 드물게나마 인근 군부대나 코레일의 화물 수송 열차가 지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폐역은 아니다.
원릉역이라고 하면 흔히 근처에 ‘원릉’이라는 왕릉이 있다고 오해하기 쉬운데, ‘원당’과 ‘서삼릉’의 한 글자씩을 합쳐서 만든 역명이다. 조선 제21대 왕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元陵)’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원릉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역장님이 계셨던 곳이기도 하다. 정식 역장님은 아니고, 이용 승객이 감소한 원릉역을 폐쇄하는 대신 대매소(승차권 위탁발매소) 운영자셨던 강소득 할머니께 역사 관리를 맡긴 것이었다. 강소득 역장님은 칠순이 다 되신 나이에도 새벽 6시 34분의 첫차부터 마지막 열차의 운행이 끝날 때까지 열차와의 수신호, 매표, 집표, 청소 일까지 혼자서 다 해내며 2004년 여객영업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원당역을 지키셨다.
원당역은 2011년 개봉된 영화 「파수꾼」의 촬영장소로 알려져 잠시 유명해지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원릉역은 방황하는 사춘기 소년들이 친구들과 만나는, 비밀스러우면서도 쓸쓸한 공간으로 그려져, 한동안 영화팬들이 방문해 인증샷을 찍어 가기도 했다. 최근까지 원릉역은 역을 횡단할 수 없게 철책이 설치되어 있어 인근 주민들과 방문객들이 불편을 겪어야 했다. 특히 인근에 있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통학로가 철길로 막혀 100미터 이상의 거리를 돌아가야 하는 등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고양시는 2014년 원릉역 지하보도 공사를 시작했지만, 과거 통행로로 이용하던 사유지의 토지주와 협의하지 않고 보행로를 잘못 설치하는 바람에 토지주가 보상을 요구하며 2m 높이의 담장을 설치하는 등 문제가 발생했다. 다행히 토지주와의 원만한 협의가 이루어졌고 지금은 지하보도가 완성되어 주민들의 불편은 해소되었다. 지하보도의 벽에는 소박한 갤러리도 만들어 원릉역의 역사와 특징을 소개하고 있다.
원릉역 지하보도를 나가면 아파트단지의 산책로가 이어지고, 이 길은 성사체육공원까지 연결된다. 예전처럼 하루 수천 명의 승객이 오가는 역은 아니지만, 인근 주민들이 편하게 산책하고 운동하는 코스로 이용되고 사랑받고 있다. 고양시는 앞으로 원릉역 지하보도 주변을 도심공원으로 조성하고 주민들 소통 및 공동체 공간으로 제공하며 지속적인 개발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나는 쉬는 날이 되면 밀양으로 귀농한 부모님 집에 자주 내려갔다. 밀양으로 내려갈 때마다 부모님 댁 부근에 있는 표충비를 구경하러 가곤 했다. 표충비는 영조 18년(1742), 불교를 배척하던 조선시대에서 외면당했던 승려의 신분으로, 위기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앞장선 승병장 사명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밀양은 사명대사의 출생지라고 한다.
표충비는 무안파출소 옆에 자리해, ‘땀 흘리는 비’로 유명한데, 특별한 재질로 만든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이슬이 맺힐만한 환경도 아니기에 표충비가 땀을 흘리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거기다 유난히 땀을 많이 흘리는 시기가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라고 하니, 그저 ‘사명대사의 업적을 기리는 비’이기에 나라의 중대사에 대한 관심을 땀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냐고 추측할 뿐이다.
역사적으로 1894년 갑오농민전쟁, 1910년 한일합방, 1919년 3.1만세운동, 1945년 광복, 1948년 이승만 대통령 취임, 1950년 한국전쟁 시기에 표충비에선 땀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이처럼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표충비의 땀 혹은 눈물에 얽힌 스토리가 흥미로워서 밀양에 내려갈 때마다 들르는 편인데, 2018년 1월 25일, 이 날도 이틀 휴가를 받고 밀양으로 내려가 여느 때와 같이 표충비를 구경하러 갔다. 갈 때마다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이날따라 표충비를 보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갔는데 화장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표충비에서 물이 흐르고 있었다. 표충비의 땀을 보며 사람들은 인증샷을 남기기도 하고, 신기해하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기도 했다. 나 역시 신기해서 사진도 찍고 부모님에게도 소식을 알렸다.
사실 나라에 안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표충비에서 땀이 난다는 전설을 믿지 않았던 마을 주민들과 우리 가족은 눈물 흘리는 표충비를 보며 즐거워하기만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땐, 표충비의 전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이 되어 TV를 틀었는데, 밀양 세종병원에 화재가 났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망자만 47명에, 부상자가 무려 112명에 달하는 등 총 15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화재 참사였다. 어제 표충비의 눈물을 보며 함께 즐거워했던 마을 주민들과 우리 가족은 밀양 세종병원 피해자들을 안타까워하며 표충비 얘기를 나눴다.
얘기를 나누는 중에 세월호 참사 때도, 대통령 탄핵 시기에도 표충비가 땀 흘리는 걸 봤다는 주민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나라에 안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표충비는 세월호 때도, 대통령 탄핵 때도, 세종병원 화재 참사 때도 일어날 일을 미리 예상하고 슬피 울었던 것일까?
그날 이후, 무안리 주민들은 표충비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지 확인하러 가곤 한다.
강남 삼성동과 청담동의 경계에 있는 경기고 사거리에서 한강 쪽으로 쭉 직진하다 보면 봉은초등학교 정문이 나오고 그 바로 옆에 가로공원이라는 자전거 타기 좋은 작은 쉼터를 지나면 청담나들목이라는 터널이 나온다. 터널 속으로 백미터쯤 들어가다 보면 오른편에 화장실 표지판과 함께 지상으로 나있는 층계가 있다. 그 계단을 오르면 아스팔트로 잘 닦인 오솔길이 있고, 그 길 따라 한쪽 옆에 쉬어 갈 수 있는 의자와 화단이 있다. 화단 안에 주변을 전망할 수 있는 단아한 이층 정자가 있다. 정자 아래 비석에는 (청담 도로 공원 - 1987년 올림픽대로 준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된 공원으로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장소에 위치한 시민 휴식처)라고 적혀 있다. 올림픽대로가 한강종합개발이 되고 생긴 도로임을 알 수 있었다.
1981년 9월 ‘88서울올림픽대회’ 유치가 결정되면서 1981년 10월 23일 대통령의 지시인 ‘서울 지역 내 한강의 골재와 고수부지 활용방안을 검토할 것’에 힘입어 ‘한강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1982년 9월 28일에 기공하여 강남·북 도로를 확장하고, 주변 도시환경 정비사업도 함께 추진되어 1986년 9월 10일에 준공했다. 총사업비 9,560억원, 동원 연 인원 420만명, 동원 장비 100만2천대가 사용되었다. 공사비 가운데 1,962억원은 한강에서 파낸 골재를 팔아 충당하였고, 하수처리시설에만 5,427억원의 공사비가 투입되었다.
첫째, 치수사업을 통한 생활원수 공급을 원활하게 하고 둘째, 하천 공간의 고도를 이용하여 고수부지 및 공원화를 통한 휴식 공간 확보 셋째, 안전하고 쾌적한 동서교통망을 확보하는 올림픽대로 건설 넷째, 수질오염을 막아 한강물을 정화하기 위한 분류하수관로(分類下水管路)와 하수처리장 건설, 다섯째, 유람선과 수상 레저·스포츠시설 등 수자원 이용, 여섯째, 기타 관련 계획사업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한강개발을 통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강의 모습이 탄생한다. 물론 한강개발에는 명암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러한 대규모 토목 공사가 끝나고 현재 우리 마을의 모습이 완성된 것 같다. 기념비가 청담동에 세워진 것을 보면 이러한 한강개발이 강남권에도 막대한 생활의 편리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그 정자 앞에 바로 올림픽도로와 통하는 주차장이 있고 그 건너편에 위용을 자랑하는 기념비가 있다. 높이가 18미터나 된다. 그 당시 전두환 정권의 권력을 보여주는 기념비는 꽤 위압적이고 도도하다. 이렇게 찾기 힘든 곳에 고급 소나무가 즐비한 기념탑 분수 공원을 만들어 놓은 것은 시대착오적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다. 군사정권에선 시민들이 찾아오든 말든 그것은 중요치 않았나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인적이 많지 않고 스산하다. 그러나 양쪽 고속도로에서 들리는 차소리는 엄청나 공원으로써의 매력은 그닥 없다.
이 기념탑을 보기 위해 갈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청담 나들목을 통하는 방법과 올림픽대로를 타고 차로 가는 방법이다. 1982년 9월 28일 기공식이 거행된 후, 4년만인 1986년 9월 10일 한강종합개발사업 공사를 마치고 종합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아울러 올림픽대로 건설로 인하여 조성된 강변 유일의 공한지인 강남구 청담동 올림픽대로 하행선에 약 6,000여 평의 부지를 도로 휴식공원으로 조성, 한강종합개발사업을 길이 기념하기 위한 기념조형물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념탑은 누가 언제 만들었다는 표시도 없이 전두환 전대통령의 말씀이 궁서체로 새겨져 있다.
- 한강종합개발 -
우리나라의 역사와 함께 살아온 영원한
이 한강을 세계적인 강으로 맑히고 개발하여
미래의 후손들에게 길이 물려주고자 합니다.
1986년 9월 10일 대통령 전두환
애월(涯月)읍 항파두리(缸坡頭里)는 고성리(古城里)의 옛 지명이다.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한 삼별초의 아프고도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역사를 가진 유적지로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이 되는 유원지이자 모임장소로 사랑받고 있다.
아이들이 뛰어 놀기에도 좋고, 반려동물을 데리고 산책하기에도 좋다. 특히 여름엔 해바라기가 노랗게 피어있고 입구 쪽 수국은 빼어난 자태로 시민과 관광객들을 맞이해 인생사진 명소로 꼽히기도 한다. 10월~11월 가을엔 참빗살나무 단풍들이 예쁘고 11월에는 코스모스를 볼 수 있어 많은 이들이 꽃구경, 단풍구경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산책로가 잘 다듬어져 있고 멀리 애월바다와 한라산도 보인다. 잔디밭에서 피크닉을 즐기다가 숲에서 더위를 식히다가 또 걷다가 이렇게 다양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봄, 여름, 가을로 항몽유적지에서는 여러 문화 행사가 열려 제주도민들과 관광객들이 함께 참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평일엔 조용하여 푸른 잔디밭과 벤치 등에서 휴식을 취하기에 좋다.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보리밭, 메밀꽃밭이 펼쳐질땐 장관에 감탄하는 모습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항몽유적지는 1997년 4월 18일 사적 제396호로 지정된 면적 1,135.476㎡의 유적지로, 몽골의 침입에 맞선 삼별초가 최후까지 항쟁하다 1273년 순의한 마지막 보루이다. 해발 190~215m 지점에 있는 향파두리 토성은 여몽연합군에 대항하던 삼별초군이 주둔하다가 패배하고 제주도로 들어와 군사력을 재정비하는 시기에 축성한 곳이다.
이곳은 각종 방어시설 뿐 아니라 궁궐과 관아까지 갖춘 요새였으나 1274년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성이 함락되었는데 그 후 근대까지 방치되어 있다가 1976년 9월 9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그 이듬해에 성곽 일부를 보수하고 현재까지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토성을 복원하고 국난극복의 교육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항몽유적지의 주요 유적으로는 김통정의 전설이 얽힌 ‘장수물’이 있다. 김통정이 토성 위에서 뛰어내린 발자국이 바위에 파였고 그곳에서 샘이 솟아나게 되었다는 ‘장수물’은 ‘장수발자국’이라고도 하며 여기서 나오는 물은 사시사철 마르지 않아 약수로 알려지고 있다. 또 삼별초 군사들이 과녁으로 사용했다는 ‘살 맞은 돌’을 비롯해서 고려 고분, 돌쩌귀, 구시물, 옹성물, 연못지, 파군봉 등이 있다.(두산백과)
이처럼 뜨거웠던 삼별초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강화에서 진도, 그리고 제주도로 이어진 삼별초의 긴 항몽여정은 항몽유적지 유물전시관에 기록되어 우리 민족의 가슴에 남아 있다. 항몽유적지 길가에는 제주의 초등학교 아이들이 삼별초에 대해 쓴 시들도 현수막으로 인쇄되어 전시되어 있다. 아이들이 역사를 배우며 삼별초에 대한 솔직한 느낌들을 짧게 적어 놓았는데 그 순수한 마음들을 읽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희생된 분들을 기리는 탑 앞에서 잠시 숙연해지기도 한다. 무료주차, 무료전시관이기 때문에 아이들과 가보기에 유익하고 편안한 곳이다.
공산성은 공주사람들에게 친숙한 곳이다. 등하교 때 지나기도 하고, 소풍으로, 그리고 철마다 열리는 사생대회와 백일장으로, 주말이면 가족 나들이 장소로 인기 많은 장소다. 지난 2015년에는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공산성을 통해 백제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 속에 공산성은 조금 모습이 다르다. 한나라의 비통한 역사의 증인이기 때문이다. 한때, 백제는 고구려에 비등한 힘을 갖고 있는 나라였다. 백제 13대 왕인 근초고왕 때에는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고 한성을 도읍으로 삼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바닷길로 중국대륙의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더 멀리 있는 나라와도 교역했다. 백제의 교류는 동남아시아와 인도에 까지 닿았다고 전한다.
백제가 저물고, 나중에 일어난 나라 고려가 국제적인 교류를 할 수 있었던 토대가 백제시대 때 갖추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백제의 명운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475년 , 고구려의 장수왕이 친히 거느린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백제는 한성에 있던 도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치열했던 전투에서 개로왕이 전사했고, 개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주왕(백제22대왕)이 웅진(지금은 공주)으로 천도한다. 그 때 왕성으로 사용되었던 곳이 공산성이다.
웅진시대가 열렸다. 공주지역은 풍수지리상 배산임수 곧 길지였다. 그리고 적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곳이었다. 공주 일대를 껴안은 금강은 천혜의 방어선이었고, 공산성은 산성으로서 유사시에 평지에 쌓은 성보다 견고하게 적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금강수운이다. 한성에 도성이 있던 시기, 활발했던 해상활동은 고구려에 한성을 빼앗긴 뒤 주춤했지만 천도한 이후부터는 금강을 중심으로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따라서 금강을 따라 규모 있는 포구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 대개 그 포구들은 중국과 일본 등 다른 나라와 백제를 잇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처럼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 한 뒤,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자 전열을 재정비했다. 이미,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지만 새로운 변화의 물꼬를 트기위한 노력을 했던 곳이 바로 공산성이다. 그리고 이 산성은 웅진백제시대 5대 약 64년 동안 도성의 역할을 해냈다. 공산성 내부에는 왕궁터(추정)와 임류각, 연지, 총 네 곳의 문지(금서루, 진남루, 공북루, 영동루)와 백제 왕궁 관련 유적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곳 공산성은 인조에 얽힌 이야기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이괄의 반란(1624)으로 인조는 공주로 피난을 오게 되고 6일간 공산성에 머물렀다. 공산성 안에 어떤 두 나무 사이에서 반란이 종결되기를 기다렸다고 알려진다. 얼마 후, 인조의 바람대로 이괄의 난이 진압되자 인조는 자신과 함께 서 있었던 쌍수에 정삼품의 작위를 내렸고 쌍수가 보이는 곳에 쌍수정이라는 누정을 지었다. 그 이후부터 공산성을 쌍수산성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공산성에는 백제 왕궁 유적뿐만 아니라 쌍수정, 쌍수정사적비, 명국삼장비, 영은사, 연지 및 만하루 등 백제시대로부터 조선시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있다.
매년 10월이 되면 아름다운 금강과 공산성 일원에서 백제문화제가 열린다. 백제의 역사와 그들이 꽃피운 아름다운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축제다. 시민들은 백제 의복을 입고 퍼레이드를 하기도 하고, 공산성과 금강 사이에 부교를 띄워 백제의 혼이 깃든 곳을 거닐기도 한다. 삼국시대,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백제는 잊혀지지 않았고,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다. 매년 백제문화제를 통해서, 그리고 공산성에 깃든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서 말이다.
무령왕릉은 공산성과 함께 2015년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백제문화유적지구) 무령왕릉이 포함되어 있는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 웅진시대의 유적지로, 벽돌무덤/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고분군이 자리한 곳은 금강과 가깝고, 남쪽으로 트인 낮은 구릉지대다. 정상에 오르면 계룡산이 보이기도 한다.
무령왕릉은 우연한 계기로 세상에 알려졌다. 1971년 7월 한 여름, 송산리 고분군에서 배수로 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작업을 하다가 벽돌무덤을 발견했다. 현장에 급히 고고학자들이 모였고, 곧바로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고고학자들은 무덤을 막고 있는 돌들을 치워냈고, 그러자 곧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였다. 그 곳엔 돌판 두 장이 나란히 놓여 있었고(묘지석), 그 곁에는 무덤을 지키는 석수가 서 있었다. 돌판에는‘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글자가 새겨 있었다. 사마는 백제 25대왕 무령왕의 이름이고 ‘영동대장군’은 무령왕이 중국으로부터 받은 직책이었다.
무령왕릉의 특별함은 여기에 있다. 백제 어느 왕도 자신의 이름을 밝힌 무덤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무덤은 남겨진 유물을 조사하여 대략의 주인을 추정하기도 하는데, 무령왕릉은 초입부터 다른 조사나 연구가 필요 없었다. 또,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의 다른 무덤과 달리 도굴되지 않고 보전되어 있었다. 덕분에 왕과 왕비의 귀금속들, 부장품들을 온전히 발굴할 수 있었다. 금제 관장식, 베개와 발받침, 금제 뒤꽂이, 귀걸이, 청동거울 등 모두 백제의 미가 담긴 것들이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 중 우리나라 국보로 지정된 것만 12점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모든 위대한 왕들은 자신이 가졌던 권력만큼 무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거대한 소망이 담긴 무덤을 가진 진시황, 피라미드 무덤을 가졌던 파라오가 그 예다. 물론 무령왕릉이 거대하진 않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은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무덤을 남긴 무령왕이 누군지 궁금해진다. 무령왕은 어떤 왕이었을까?
무령왕은 462년에 태어나서 40세가 되던 해인 501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523년 5월에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사마 혹은 융이라고 불렸고, 왕이 죽고 난 뒤에 붙는 시호는 ‘무령’이었다. 역사서에 따르면 무령왕은 키가 크고, 용안이 아름답고 심성이 곱고 인자하여 많은 백성이 그를 좋아했다고 전한다. 무령왕은 501년(동성왕23 년) 동성왕이 사냥에 나갔다가 변을 당하자 그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무령왕이 왕위에 올랐을 당시 백제는 혼란의 시기였다.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였고, 반란으로 왕권도 약해져 있었다. 무령왕은 즉위하자마자 고구려에 맞서 싸우고,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고,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통제권을 강화했다. 그는 농업에 필수적인 수리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농사짓는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이것은 전염병과 굶주림에 고통 받는 백성들의 삶을 돌보려고 노력했다는 증거다. 다행이 그의 노력은 헛되이 되지 않았고 백제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훌륭한 군주로 남게 된다.
백제를 강건하게 세웠던 무령왕, 그의 업적에 따라 그의 무덤과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은 당시 백제가 중국 남조와의 교류로 세련되고 앞선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단 당시의 백제무덤과 무령왕릉은 양식이 달랐다. 백제시대에 흔했던 굴식 돌방무덤의 양식이 아니라, 벽돌로 된 방을 만들고 그 위를 흙으로 덮은 양식으로 주로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무덤양식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특이한 것은 왕과 왕비의 관이 일본 남부지역에서만 서식하는 ‘금송’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백제가 중국 남조 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찬란했던 문화의 본산지 백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무령왕릉. 문화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힘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다.
‘공주’하면 백제라는 키워드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공주 우금치 고개(금성동 일원)에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 펼쳐졌다. 바로 그 유명한 ‘우금치 전투’다. 공주 우금치 고개는 1894년 11월 겨울,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을 상대로 통렬한 최후의 격전을 벌인 장소다. 우금치 고개는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견준산 기슭의 고개로 우금고개, 우금재 또는 비우금 고개라고도 부른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로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평등사상을 특징으로 한다. 2대 교주인 최시형이 교단과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하지만 이는 당시 양반중심 사회에 반하는 사상이었다. 동학은 평등사상을 주장하며 봉건사회를 비판했고, 반외세사상을 내세우며 조선사회 안에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시작했다. 이에 조선은 조선사회의 근본 질서를 무너뜨릴 동학을 사교로 금지하고 혹세무민의 죄 값을 물어 교조 최제우를 처형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동학교도들을 탄압했다. 하지만 탄압이 거세질수록 일반 백성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정부의 동학에 대한 탄압은 교조신원운동(최제우에 대한 명예를 살리고자하는)을 불러왔고, 전라도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시발점이 되어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교도들이 전라도/충청도 일대에서 고부민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고부민란을 알아보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민란 관계자들을 역적으로 모는 바람에 동학농민운동의 불씨가 점화됐다. 1차 농민봉기가 반봉건의 기치를 내세웠다면 2차 봉기는 반외세 성격을 띤다. 조선은 일본군의 깊은 내정간섭을 받고 있었고, 심지어 경복궁까지 침입하며 고종을 감금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야만스러운 행태를 멈추지 않았다.
전봉준은 일본의 만행을 두고 볼 수 없어, 제 2차 기병을 준비했고, 9월 삼례에서 11만 명이 봉기하여집결, 서울로 향했다. 전봉준의 행보에 반일감정을 품고 있었던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지에서도 합류하여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남-북접의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한다는 소식이 정부에 보고되었고, 정부는 관군을, 일본은 일본군을 논산으로 향하게 했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은 세성산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으로 무수한 사상자를 낸 채 패배하였다.전봉준은 공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부군의 반격으로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양군은 공주를 앞에 두고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당시의 공주는 충청도 감영이 자리하고 있었던 중부 지역의 최대 거점으로 공주성을 확보하는 것은 앞으로 있을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요소였다. 또 우금치는 공주에서 부여 방면으로 넘어가는 길목이었고, 우금치를 장악하면 공주 점령의 기선을 잡을 수 있었다. 약 3만을 헤아린 농민군은 일본군 200명을 포함한 약 2,500명의 관군과 1894년 10월 23일부터 이인, 효포, 웅치에서의 싸움에 이어 11월 8일 드디어 우금치에서 결전을 치르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에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연합군의 우세한 화력공격에 죽검으로 맞선 동학농민군들은 거의 전멸했다.
우금치 전투 후, 전봉준은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처형된다.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전쟁은 이렇게 끝이 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라를 위해 일어난 농민들을 관군이 일본군과 손을 잡고 전멸시킨 셈이다. 이렇게 허망하게 스러진 동학농민군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73년에 동학혁명위령탑이 우금치 고개에 세워졌다. 동학농민전쟁 100년이 지난 1994년에야 우금치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고귀한 뜻은 오랜 세월 전해져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되었다.
현재 경기여고 교정에 있는 오층석탑과 ‘불교제중원’ 표석은 원래 덕수궁(경운궁) 선원전터에 있었던 것으로 경기여고의 정동 교지가 확장되면서 학교에 편입되었다가 1988년 경기여고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옮겨진 것이다. 조성시기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근대 불교 유산이라는 점에서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 42호로 지정되었다.
강남구 개포동에 자리한 경기여고도 100년의 역사를 가진 근대 교육의 상징인 학교이다. 학교를 가로질러 가다보면 학교 이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경기여고는 1908년 4월 서부 공조 후동(현 종로구 도렴동)에서 개교하여 1910년 재동으로 이전한다. 광복하던 해 1945년 10월 정동 교사로 옮겨 그 당시 최고 명문고로써 자리매김하다가 1988년 2월 개포동 너른 들에 터전을 잡고 지금까지 여성교육에 힘쓰고 있는 학교이다.
이 석물들의 원 소재지인 덕수궁(경운궁) 선원전터에는 1910년대에 불교중앙포교소(해인사 末寺)가 세워졌고 1923년에는 불교제중원이 설치되었다. 불교제중원은 당시로서는 현대적 의료기관으로서 내과, 외과, 조산과 등을 두었다고 하는데 1925년 재정적인 문제로 폐사되었다. 불교제중원이 비록 친일 승려인 이회광(李晦光 1862-1933)에 의해 설립되었다고는 하나 그 표석은 근대불교사의 자료로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오층석탑은 단층의 기단 위에 올려진 평면 방형의 석탑으로 탑신부의 체감이 완만하고 옥개석이 매우 두터워 투박하며 둔중한 느낌을 준다. 처마 네 귀퉁이의 전각은 급격한 반전을 보이고 있어 다소 과장된 느낌을 주며 상륜부는 복발 1석으로 조성하였다. 이 석탑은 조선시대 석탑의 전통을 잇고 있으나 매우 단순해진 형태로, 조성시기를 알 수 있는 근대 석탑 자료로서의 중요성이 있다.
한편, 석등은 평면 6각의 화사석 위에 육각 옥개석이 올려져 있는 형태로 석탑과 마찬가지로 둔중한 느낌을 주며 하대의 괴임돌 하나는 신재(新材)이다. 전체적으로 전통양식에서는 벗어난 형태이지만 근대 석조물의 한 양상을 나타내준다고 하겠다. 이 석물들은 조성시기를 알 수 있는 20세기 초의 석조물로 근대 불교와 관련하여 중요한 자료이다.
한 때 종교적인 이유로 경기고 교장이 이 석등과 석탑을 땅에 파묻어 세상에 묻힐 뻔하다가 이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서울시에서 감독하게 되어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근대유산을 이유로 파묻다니 교육자로서의 어찌 그런 일을 하는지 참 납득이 안되었다. 표시석과 석등에서 세월의 부딪침이 보이는 건 이런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현충사(顯忠祠)는 나타날 현, 충성 충, 사당 사를 쓰는, 충무공 이순신의 사당이다. 현충사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산 57에 위치하고 있다. 온양 시내에서 ‘온양민속박물관’을 향해 가다가 ‘곡교천’을 따라 가다보면 현충사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사실 이 장소는 이순신 장군이 유년기부터 청년기(8세~32세)까지 살았던 장소이다. 이순신 장군하면 임진왜란에서 대활약했던 전남 해남, 진도 근처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순신 장군은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외가가 있던 아산 지역에 내려와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렇기에 현충사에 와보면 우리가 위인전에서 읽었던 이순신 장군이 활쏘기 연습을 했던 ‘활터’, 이순신 장군의 갈증을 달래주던 ‘충무정’, 이순신 장군이 살았고 1969년까지 그 후손들이 살았던 ‘고택’,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본전’, 마지막으로 이순신 장군의 유물들을 모아놓은 ‘유물 전시관’이 있다.
특히 유물 전시관에는 흥미로운 것들이 많이 있다. 이순신 장군의 사진을 볼 때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 두 자루가 전시되어 있다. 한 자루에는 ‘삼척서천 산하동색’(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 길이의 칼로 하늘에 맹세를 하니 산하 즉, 천하가 떨고’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 자루에는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 ‘한번 휘두르니 피로 세상이 물든다.’라는 의미를 새겨놓은 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순신 장군의 포부와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그 유명한 ‘난중일기’가 전시되어 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 장군께서 전쟁 도중에 말 그대로 일기처럼 남겨놓은 기록이다. 난중일기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높은 지위의 지휘관이 직접 기록을 남긴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흔하지 않을뿐더러 역사적 사실까지 담아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현충사는 모든 계절을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다. 봄에는 벚꽃이 만개하고, 여름에는 온통 푸른빛이며, 가을에는 붉은 단풍이 사방을 물들여 현충사의 분위기를 더 고즈넉하게 만들어준다. 겨울에 눈이 오면 조용한 분위기에서 얼어붙은 웅덩이를 바라보며 사색을 즐기기에 좋다. 이처럼 현충사는 오로지 역사적인 부분에만 치중된 곳이 아니고 자연과 더불어 만들어놓은 장소이다. 이순신 장군의 대업뿐만이 아니라 그의 유년시절, 성장기가 궁금하다면, 팍팍한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의 품안에서 지친 자신을 치유하고 싶다면 현충사를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서울시를 상징하는 건물이 남대문이라면 제주시를 상징하는 건물은 관덕정(觀德亭)이라고 할 수 있다. 관덕정은 삼도1동(현: 삼도2동) 대로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제주시로 보면 한가운데 위치하며 역사가 가장 오래된 제주목 관아 건물이기 때문이다. 관덕정은 제주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조선시대 행정중심지였다. 제주도의 정치나 행정,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널따란 왕복 4차선 도로에 있는 떠억 버티고 선 관덕정은 많은 이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고 있고 낯선 이에겐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1993년에 지정된 보물 제322호 관덕정은 오래된 역사적인 장소일 뿐 아니라 한복 입고 사진을 찍는 외국인, 여행객들의 모습도 종종 눈에 띄는 아주 친근하고 익숙한 곳이다.
관덕정이란 이름은 평소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는다는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라는 예기의 글귀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따라서 활을 쏜다는 것이 단순히 무예가 아니라 평화 시에는 심신을 단련하고 비상 상황에서는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를 담아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새기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덕정 입구에는 엄청 넓은 마당이 있고 가운데에는 금붕어와 잉어들이 가득한 연못이 있다. 제주목 600년의 이야기라는 주제로 제주목 역사관을 관람할 수 있는데 이곳에선 옛 제주읍성의 모습과 설명을 볼 수 있고, 옛 시대 제주목의 역할에 대해 알 수 있다.
관덕정의 외형은 사실 규모가 크고 웅장하거나 건축적으로 미적으로 뛰어난 것은 아니다. 이중기단 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짜리 단층 팔작지붕으로, 창호문 없이 사방이 개방된 정자 형식이다. 이 관덕정은 세종 30년(1448)에 제주 목사 신숙청이 병사 훈련을 목적으로 지었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축을 거쳤다. 1924년에는 일제가 15척 이상 나온 처마를 2척 이상 잘라버려 외형이 크게 훼손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제주시민의 혼을 담은 복원사업이 민관합동으로 1999년 9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시행되었다.
관덕정에는 2019년 기준, ‘觀德亭’, ‘湖南第一亭’(호남제1정), ‘眈羅形勝’(탐라형승)이라는 현판 글씨가 걸려 있다. 또 관덕정에는 훼손되어 흐릿하지만 일곱 점의 작자를 알 수 없는 벽화가 남아있다. 제주도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벽화로, 매우 격조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수령 목사 이하의 사람은 말에서 내려 걸어가게 하라”는 표지석인 하마비(下馬碑)를 볼 수 있고, 중대문, 교방지 마구지 심약방지, 영주협당, 군관집무실 등 군관들이 근무하던 관청과 목사가 휴식을 취하던 공간 귤림당, 제주 앞바다로 침범하는 왜구를 감시하는 역할을 한 망경루도 관람할 수 있다.
특히 관덕정의 돌하르방은 또 다른 볼거리로 관덕정 앞 좌우에 한 쌍, 뒤뜰 좌우에 한 쌍 등 4기가 남아 있다. 제주읍성의 성문 밖에 있었던 것을 영조 30년(1754)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관덕정의 돌하르방은 모두 날씬하지만 얼굴이 크고 배에 붙은 긴 팔 때문인가 왠지 인상이 위압적이다. 제주의 중심부에서 읍성과 관아를 지켜서일까? 다른 곳의 친근한 돌하르방과는 좀 다르게 느껴졌다.
관덕정 주변부는 오늘날까지 뿌리 깊게 제주의 정치·경제·행정·문화의 일번지로 군림해왔고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도청 등 행정기관들이 밀집해 있었다. 특히 관덕정 앞 광장은 ‘제주 역사의 앞마당’이라고 할 정도로 근대에 이르러 풍운의 역사를 겪은 장소이다.
매주 일요일 오후엔 제주목 관아 수문장 교대식, 김수문 목사와 결사대 공연, 작은 음악회 등이 열린다. 관덕정은 제주의 유적지일 뿐 아니라 현재 제주시민들의 문화장소이다.
남문지못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의 조용한 인성리 마을 도로변에 위치한 작은 정자가 있는 못으로 ‘남문앞물’ 이라고도 불린다. 인성리 주민들의 공원으로 활용하라고 운동기구와 쉬어갈 수 있는 벤치가 설치되어 있고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옆으로는 넓은 양배추밭도 볼 수 있다. 아주 유명하지는 않지만 추사교차로에서 가까운 1132도로에 있어 접근이 용이하고 잠깐이나마 정자 위에서 연못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기에 사랑받는 곳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416년에 외부의 침략을 막고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유신현감이 축성을 건의하여 1418년에 축성작업을 시작할 무렵, 지나는 노승이 사방을 살피더니 축성 감독에게 그대로 작업을 하면 백성들이 피해가 많겠다고 하고 길을 재촉했다고 한다. 이에 감독이 노승의 말을 즉시 유신현감에게 고하자 현감은 그 노승을 모셔 오라 명하였고, 다시 온 노승은 서남쪽에 있는 산(모슬봉)이 화기가 비치니 남문 앞에 연못을 파서 화기를 누르면 백성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현감은 축성작업을 중단시키고 연못을 판 후 축성을 하니 마칠 때까지 마을에 아무런 재앙없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남문앞물은 백성에게 미치는 화기를 눌러준 고마운 연못으로 칭송되고 있다.
또 이곳엔 추사 김정희의 유배시절 모습을 담은 입석이 세워져 있다. 추사의 제자 소치 허련이 그린 것으로 제주도에서 유배살이하는 스승 김정희의 처연한 자태를 그렸다. 중국 송나라의 소동파를 그린 ‘동파입극도’에서 모티브를 얻어 그렸다고 한다. 당송팔대가 중 한 명인 소동파는 당대 최고 시인으로 높은 벼슬까지 올랐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해남도에 유배되는데 이는 추사가 탄탄대로의 벼슬길을 달리다가 정치적인 음모에 휘말려 제주에 유배된 것과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무려 9년여의 시간을 혼자 떨어져 유배생활을 했던 김정희는 유배지 주변을 돌아다니며 글을 쓰고 산책을 하며 나름 여유롭게 유배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제주에서 머물면서 학문과 예술을 심화시켰다.
김정희의 독창적이고 유명한 추사체는 대정현 유배 생활 중에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어지게 할 정도로 고독한 정진 속에서 완성되었다. 그러면서도 김정희는 유배 중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고 김정희에게는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제주 유배 시절에도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는 제주도 서귀포 대정읍과 안덕면, 한경면 일대인 조선시대 대정현은 추사 김정희 유배지로 알려져 있고 특히, 김정희의 추사유배길 집념의 길이 새로운 걷기 코스로 만들어지면서 이 길의 여행객이 남문지못을 많이 찾게 되었다.
못 위의 정자에 앉으면 단산과 멀리 산방산의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으며 추사 김정희 선생의 모습을 담은 희미해져버린 입석을 보고 있자면 유배기간 동안 그가 외로움과 슬픔을 달래기 위해 학문과 예술에 얼마나 전념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제주시의 용담동의 제주향교는 용담1동만의 특별한 자랑이다. 여러 유명한 유적지보다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외형적으로는 소박해보이지만 오랜 시간 깊이 있는 학문을 연구하고 배웠던 제주향교는 역사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는 장소로 이제는 제주도민이 참여하여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도심 속 보석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1392년(태조 원년) 창건된 제주항교는 제주도민을 교육, 교화하고 성현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원래는 제주성 교동에 세워진 뒤 5차례에 걸쳐 위치를 옮겼고 1827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1971년 8월 26일 ‘제주향교 경내’가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고, 1991년 6월 4일엔 조선시대 문과에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는 명부인 ‘용방록’이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고, 제주향교 ‘대성전’은 독특한 건축양식이 확인되어 2016년 6월 13일 국가지정 보물 제1902호로 지정되었다.
제주향교의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계성사, 좌우 협문 등이 있다. 정문 ‘대성문’을 지나면 ‘명륜당’이 눈에 들어온다. 대성문은 정말 딱 한 사람만 드나들 수 있는 크기로 드나듦에 있어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나 지금이나 입구와 출구를 꼭 지켜야하는 것이 규칙이라고 한다. 제주향교는 과거에 제주목에 있었던 향교 중 가장 규모가 컸다. 특히 명륜당은 향교에 부설되어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던 강당으로 실제로 수업이 이루어지는 곳이자 유생들을 가르치는 스승님들이 머물렀다. 이 오래된 명륜당에서 과거의 젊은이들이 학구열을 불태웠을 상상을 해보게 된다.
현재 제주향교는 5성위, 공문10철, 송조6현, 한국18현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봄가을에 ‘서건대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2회의 고유, 분향례를 지내고 있다. 또 명상아카데미, 탐라선비문화학당, 항교음악회, 전통혼인례, 인성예절교육 등 해마다 다양한 문화강좌를 개설하여 제주도민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그저 오래전 유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평생교욱의 장으로서 과거의 전통을 이어받아 제주 최고의 교육기관다운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제주향교를 거닐다 보면 가끔 도포 입은 어르신들이 지나가기도 하고, 한문을 배우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마치 조선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간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는 이곳에선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돈된다. 제주향교의 네 건물 중 계성사는 다섯 성현의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철종 5년에 지어진 사당으로 현무암을 바닥에 깔고 있는 제주만의 독특한 공간이다. 계성사 옆 계단을 오르면 ‘공부자동상’을 만날 수 있는데 이는 한국에 최초로 세워진 공자의 동상이라고 한다.
오랜 전통을 이어와 지금까지 탐라선비의 꿈을 이어나가는 곳, 제주 원도심에 위치한 제주 최초의 교육기관이었던 제주향교는 건축방식도 보존가치가 높지만 무엇보다 지역주민에게 개방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 수양의 목적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오산은 면적이 42.75km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이다. 주변에 있는 수원시의 면적이 121.01km 이고 평택시의 면적이 453.31km 에 달하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작은 도시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오산에는 정조의 효심이 어려있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 바로 독산성이다.
독산성은 오산시 지곶동에 있는 산성으로 만들어진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백제시대 때 축성된 성으로 추정된다. 또한 백제 때 만들어진 산성이지만 통일신라와 고려시대까지 계속 이용되어 왔던 요충지이기도 하다.
독산성은 1953년 임진왜란 때 전라도 관찰사이자 순변사였던 권율이 왜군을 물리친 장소로도 유명하다. 1750년 영조가 임진왜란을 기억하기 위해 방문하였고 10년 뒤 사도세자가 온양온천에 행차했다가 환궁하던 중에 장마로 인해 하루 머물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독산성은 한 때 위기를 맞는다. 풍수지리를 이유로 독산성을 없애야 한다는 논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산성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하루 머물러 백성들에게 인정을 베푼 의미 있는 곳이기에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풍수지리 논란을 이겨내고 독산성을 개축하도록 했고, 개축 이후 현재의 독산성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독산성은 세마역에서 차로 3분 거리에 있다. 독산성 주차장에 도착해 독산성 산림욕장과 보적사라고 적혀있는 안내판을 지나 쭉 올라가면 독산성의 동문을 만날 수 있다. 독산성의 동문을 지나면 보적사를 볼 수 있으며 아담한 보적사를 구경하고 나오면 드디어 독산성의 진짜 모습과 함께 오산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새로 지은 높은 건물들이 즐비한 동탄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독산성길에 앉아 확 트인 전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그림과 같이 나온다.
보적사에서부터 독산성길을 따라 쭉 걸으면 독산성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는 돌탑도 볼 수 있으며, 영조-사도세자-정조 3대와 얽힌 독산성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 안내판도 찾을 수 있고 독산성의 여러 문도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만나는 문은 남문이다. 남문은 말과 소가 다닐 수 있었고 주 출입구 역할을 했다. 현재의 모습은 1979년에 파손된 것을 복원한 것으로 문확석 2개만이 남아있다. 조금 더 걸으면, 암문도 만날 수 있다. 암문은 순조 4년에 현륭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서문을 폐쇄하고 만든 문으로 이 역시 복원된 것이다. 지도상에서는 서문과 북문도 확인할 수 있으나, 아직까지 복원중이기 때문에 아쉽게도 직접 볼 수는 없다.
독산성에서는 권율 장군의 전설과 얽혀있는 세마대도 볼 수 있다. 세마대는 권율이 진을 치고 왜적을 기다릴 때, 권율이 쌀을 말에 끼얹어 씻기는 시늉을 함으로써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이에 속은 왜적들이 퇴각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세마대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별하게 볼 것이 많지는 않지만 하나하나 역사와 얽힌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수원역에서 남쪽방향으로 조금 걷다보면, 두 개의 급수탑이 보인다. 과거에는 담장에 가려져있었지만, 몇 년 사이에 옛 수인선 철도 자리에 산책로를 조성하여 시민들에게 급수탑을 공개하였다. 특히, 급수탑 주변에 산책길을 조성하여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급수탑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급수탑(Water Tower)이란, 물을 공급하기 위해 탑 모양으로 물탱크를 설치한 구조물로, 당시 증기기관차에 물을 급수하였던 시설물을 말한다. 당시 증기기관차는 몇 개의 정류장을 경유하면, 기관차에 급수를 해야만 했다. 급수는 주로 10 여분 정도가 소요됐는데, 따라서 급수탑 주변에는 주로 물을 쉽게 공급할 수 있는 연못이나 저수지가 필요했다고 한다.
수원은 물의 근원이라 이름에 알맞게, 주변에 수원천이 존재하였을 뿐 아니라, 주요 간선의 중심에 있었다. 그래서 증기기관차의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을 설치하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수원역 남쪽에 총 두 개의 급수탑이 만들어졌는데, 벽도조 급수탑과 콘크리트조 급수탑이다. 이들은 협궤열차의 물 공급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특히 수원과 인천을 잇던 수인선의 중요한 물 공급책으로 활용되었다.
수원역 급수탑의 역사적인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수인선이라는 협궤 철도선에 대한 부가적인 내용을 조금 더 알 필요가 있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1937년부터 1995년까지 약 60여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운행이 되었다. 당시, 일반 열차의 1,435mm 철로보다 좁은 762mm 레일 넓이 위에서 달렸던 협궤열차는 마주 보면 무릎이 닿아서 꼬마열차라고도 불릴 정도로 작았다고 한다. 수인선은 인천광역시 송도와 수원을 잇는 협궤 철도선으로 총길이 57km, 일제강점기에는 수여선을 인천항까지 연결하는 중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이후 물량확대와 교통의 편리성 요구가 증대되자, 승객과 화물이 줄어들어 이용 빈도가 크게 감소하였다. 결국 수인선은 1973년 11월 종착역이던 남인천역이 폐쇄되고 1977년 화물수송이 중단되었으며, 1995년에는 여객운송을 중단하고 폐선하게 되었다고 한다.
급수탑은 이러한 증기기관차의 운행에 발 맞춰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지어졌으며, 1967년 8월 31일, 운행을 끝으로 급수탑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한국에서는 증기기관차를 일반 여객용으로 운행하지 않고 있어, 많은 역의 급수탑이 철거된 상태이다. 따라서 전국에 남은 급수탑은 약 20 여개 정도가 전부이다. 남아있는 급수탑 중 일부는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가 되었는데, 경부선과 수원역을 연결했던 수원역의 급수탑 역시 그 중 하나로, 현재 준철도 기념물 제 15,16호로 한국철도 공사 지정 철도문화재로 등록보존되고 있다.
이 두 개의 급수탑들은 두 개의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데, 하나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표준궤용 급수탑의 모양을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벽돌로 만들어진 급수탑으로 콘크리트 급수탑보다 크기는 작지만, 상층부가 더 넓고 크며 붉은색을 띄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붉은 급수탑은 실제로도 매우 드문 경우인데, 작고 아담한 크기이지만 상층부의 커다랗고 웅장한 모습은 당시 수인선의 급수를 담당하던 위용을 보여주는 듯하였다. 반면, 콘크리트 급수탑은 크기는 크지만, 세월에 벗겨진 콘크리트와 녹이 슨 철제 사다리의 모습을 하고 있어 더욱 고독하고 쓸쓸하게 보였다.
급수탑은 주로 원통형 평면을 지니고 있으며 상부와 하부로 나누어져 하부에는 석탄 등을 이용하여 물을 끓이기 위한 엔진과 상부의 물탱크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펌프로 설치가 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는 전기로만 움직이는 KTX 또는 전철이 보편화되고 일반적이라서, 과거에는 석탄과 물을 통해 열차를 움직였다는 것이 새삼 놀랍고 신기하였다.
이렇게 우리의 근대 철도 역사에서 그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가 있는 급수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또 희미한 추억으로 사라지고 있다. 수원역의 급수탑도 최근에서야 산책길로 조성이 되어 시민들에게 공개되었으나, 급수탑에 대한 설명이나 내용이 턱없이 부족하고 이야기의 전달력이 약하다는 한계점을 가진다.
교통의 중심지에서 수인선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수원역 급수탑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안전상의 보수를 확실히 하여 콘크리트 급수탑 위에서 바라보는 수원역의 전경이라던가, 아니면 수원의 철도 역사를 활용한 지역 문화콘텐츠의 활용이 필요하다. 관광상품 개발 등 적극적으로 지역문화원과 시민들이 힘을 합쳐 근대의 소중한 철도 역사를 간직한 문화재를 보존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영화나 드라마, 사진에 등장하는 간이역은 여행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사람들이 붐비는 큰 기차역과 달리 고즈넉한 풍경과 텅빈 역사가 오히려 사람 마음을 술렁이게 하기 때문이다. 현재 전국에 남아 있는 간이역은 800개 남짓이다. 여러 곳이 폐쇄되거나 철거되어 사라져 가고 있다.
화본역 역시 그 중 하나로 경북 군위군 산성면에 있다. 이곳에는 중앙선 무궁화호 열차가 다니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설명보다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나왔던 곳이라고 하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재하(류준열 분)는 자기를 잊지 못해 시골까지 찾아온 전 여자친구를 이 군위역에서 떠나보낸다.
이 동네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잘 담아내 많은 영화팬들의 시선을 끌었다. 도시 생활에 상처 받고 고향을 찾은 혜원(김태리 분)이 넓은 들판 한가운데를 자전거로 가로지를 때 등장한 아름드리 버드나무는 수령 350년의 오래된 버드나무다.
2014년 네티즌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역에 선정된 화본역. 화본역에는 1938년 2월부터 기차가 다녔다. 지금은 하루에 총 여섯 번 열차가 멈춘다. 청량리, 강릉 방면의 상행이 3번, 동대구, 부산 방면의 하행이 3번이다. 정차하지 않고 통과하는 여객열차나 화물열차는 40여 회 정도 된다. 천 원짜리 승차권을 파는데, 철길로 나가는 입장권이다. 하지만 선로 위에서 사진을 찍거나 선로를 넘나들면 위험하다. 적발되면 철도안전법에 의해 과태료를 내야 하니 선로 위는 피해서 사진을 찍도록 하자. 쭉 뻗은 철로가 뒤로 보이는 배경으로 인생샷을 찍을 수 있다.
2011년에 ‘화본역 그린스테이션 사업’으로 재단장을 하면서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처음 건축됐던 일제 강점기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오래된 역의 낡은 느낌은 벗고, 철길과 급수탑, 오랜 나무들이 만드는 멋진 풍경에 따뜻한 색감으로 외관을 새로 도장했다. 이전에도 아름다운 역으로 손꼽히던 화본역은 영화 촬영 뒤 다시 주목을 받아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사진을 촬영하기 좋은 장소로 유명하다. 역 풍경을 보고 영화 촬영지에 가려고 일부러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늘고 있다.
실제 운행되던 열차를 개조해 만든 레일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역시 영화 촬영지인 레일카페 옆 역전상회에 들러 주전부리도 살 수 있다. 50여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작은 슈퍼에는 초등학교 시절 즐겨 사먹었던 아폴로, 쫀디기, 뽀빠이 같은 군것질거리가 있다.
역 광장에 있는 박해수의 시비에는 ‘화본역’이라는 시가 적혀 있다. 산성면 주민들은 시장을 보려면 이 기차를 타고 신녕시장과 영천시장에 가야 했다. 역을 배경으로 펼쳐진 주민들의 삶에는 영화보다 더 흥미롭고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이다.
화본역(시인 박해수)
녹물 든 급수탑
억새풀 고개 숙인 목덜미
눈물 포갠 기다림,
설렘은 흰 겨울 눈꽃에 젖네
박해수 시인의 시비 너머로 보이는 25m 높이의 우뚝 선 급수탑은 증기기관차가 다닌 증거다.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했다. 얼른 생각하기에 증기기관차는 엄청 오래된 근대 초기의 유물처럼 여겨지지만 1899년부터 1967년까지 증기기관차가 전국을 달렸다.
급수탑 내부에는 탑 상층 물탱크에 끌어올리는 용도와 저장한 물을 증기기관차에 공급하는 용도로 쓰이던 파이프관 두 개가 있다. 1950년대에 디젤기관차가 등장하자 증기기관차의 흔적인 이 급수탑은 거의 사용할 일이 없었다. 급수탑 내부에 보면 벽면에 그때 당시 인부들이 ‘석탄정돈 석탄절약’이라고 써놓은 글자가 선명하다. 전국적으로 수십여 개에 달하던 급수탑이 이제는 화본역을 포함해 몇 개 남지 않았다.
화본역은 화본마을의 중심에 있다. 역을 뒤로 하고 5분 정도 걸으면 학교가 있다. 1950년 개교해 2009년까지 졸업생을 배출한 산성중학교는 이제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 추억박물관이다. 나무 책상과 의자, 풍금, 초칠을 해서 닦던 교실 바닥이 옛 모습 그대로고, 현금 대신 엽전을 사용하여 추억 여행하기에 제격이다. 입장료는 이천 원이고 학교 운동장과 뒤뜰에 여러 먹거리, 놀거리 체험이 있다. 가족과 함께 방문했다면 이곳에서 추억을 공유하고 벽화가 그려진 화본마을 구석구석을 살피고 돌아오면 좋을 듯하다.
수여선(水驪線)은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 수원~여주 간을 잇던 철도 노선이었다. 수여선은 궤간이 표준보다 좁고 운행속도가 낮은 협궤 철도였다. 열차의 크기 역시 표준보다 작아서 꼬마열차라고 불렸다. 1931년에 개통한 수여선은 수원, 용인, 이천, 여주등 20개의 역을 거쳐 달렸다. 연료를 달리하는 기관차와 동차, 두 종류의 열차가 수여선 철도를 달렸다. 수여선은 수원에서 여주까지 4시간 40분이 걸렸다.
수여선은 일제 강점기에 지역 물자를 강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설되었다. 사설 철도회사인 경동철도주식회사에서 1930년 수원~이천 구간을 먼저 개통하였고 이듬해에 이천~여주 구간을 개통하였다. 1937년에는 수원~인천을 잇는 수인선을 개통하여 여주에서 항구가 있는 인천까지 최단거리로 직결되는 경제수탈 노선을 완성하였다. 배를 이용해 해산물과 소금 석유 등을 수여선까지 운반해와 원주와 충주에 팔고 그 지역의 특산품을 다시 수여선 열차로 운반하였다. 수여선은 물자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당시 마을 청년을 실어 나르는 징병의 기능도 했다.
그러나 수여선은 가슴 아픈 역사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수여선은 물자수송을 큰 목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주민들의 이동 수단이 되기도 했다. 수여선이 생기기 전에는 수원~여주 간의 지역 교류는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수여선 개통 이후 떨어져 있던 지인들을 더 쉽게 만날 수 있게 되었고, 학생들은 용인과 수원으로 통학할 때 수여선을 이용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느리게 달리는 열차인 만큼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인연도 많았다. 승무원이 승객들의 행선지를 잘 알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지역 사람들은 수여선을 자주 이용했다.
특히 수여선을 자주 이용했던 사람들은 장사꾼이었다. 물건을 팔기 위해 장에 나가는 교통수단으로 수여선이 많이 이용되었다. 수여선 노선 부근에는 지역의 읍내장을 비롯하여 영동시장, 오천장, 김량장, 이천장 등이 있었다. 이 밖에 놀라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관광객들이 여주의 세종대왕릉과 신륵사에 가기 위해 수여선에 올랐다.
수여선은 해방 후에도 꾸준히 많은 이들의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지만 1960년 이후 도로 사정이 개선되면서 화물 수송량이 급감하였다. 거기에 승객의 수는 줄지 않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승객의 무임승차로 점점 적자가 증가했다. 정부는 연간 1억 7900만 원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하던 수여선을 1972년 3월 31일자로 폐지하였다. 수여선은 마지막 운행 날 ‘주민 여러분 안녕’이라는 현수막을, 여주에서 열린 수여선 종별 운행식에서는 ‘여주야 잘 있거라’라는 현수막을 달고 떠났다.
수여선은 지금 그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수여선이 다녔던 길의 대부분이 재개발되어 아파트, 도로 등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여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용인시청에서 양지까지 수여선이 지나던 길은 경기도가 경기옛길 영담길이라는 길을 만들어 ‘수여선 옛길’이라고 이름 지었다. 도보로 표지판을 따라 수여선이 지나던 길을 걸을 수 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갔던 화성역은 지금 버스 정류장의 이름이 되었고 수원역 광장의 남동쪽에서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을 볼 수 있다. 화성역 구간, 죽당역에서 매류역에 이르는 구간은 기찻길이 선형을 보존한 채로 도로가 되었다. 기흥역에서 송담대역까지의 노선은 수여선의 신갈~용인 구간의 노선과 거의 일치한다. 과거 이천역이 있던 자리에는 수여선과 이천역에 대한 설명이 새겨진 이천역 비석이 놓여있고 매류리 역촌마을의 마을회관 옆에는 60년대 역과 마을의 풍경을 보여주는 그림판과 수여선·수인선에 대한 짧은 설명이 적혀 있다. 한때 경기 지역의 주요하고 친근한 교통수단이었던 협궤열차 수여선의 자취는 이렇듯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경기도 동두천시 연천군청과도 가까운 연천군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경원선 ‘연천역’은 올해 2019년 4월 1일부로 2년간 열차운행이 중지된 곳이다. 2021년 동두천역에서 연천역까지 20.8km 구간에 전철(지하철 1호선) 연장공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연천역을 오가는 열차의 운행이 멈추게 되면서 역사운영도 중지되고, 현재 연천역은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장소가 되어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문 닫힌 자그마한 매표소와 그 앞 벽에 붙어있는 열차 운행 시간표는 가을의 분위기와도 어우러져 멈춰진 시간에 대해 쓸쓸함을 자아내고 있지만, 열차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천을 찾아온 관광객 사이에선 꼭 방문할 장소로 여전히 주목받고 있는 곳이다.
연천역은 38선 북쪽에 있어 6·25 전쟁 전에는 북한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는 곳이었으며, 이곳에 있는 화물 홈은 오래 전에 북한이 6·25 전쟁을 준비하며 전쟁 물자를 위해 만든 장소였다고 한다. 2년간 기차가 운행되지 않게 되면서 이를 대체하기 위한 교통수단으로 백마고지역에서 동두천역까지 버스가 운행되기 시작하고, 그 결과 자연스레 사람의 발길이 적어진 연천역은 작고 오래된 기차역이지만 그 세월만큼의 역사와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역에서 바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저 멀리에 우뚝 솟은 커다란 구조물 하나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쭉 이어진 길을 따라 나아가면 연천역의 바로 옆에는 작은 소공원이 있다. 공원에는 경원선의 옛 모습을 비롯해 급수탑의 과거 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2개의 연천역 급수탑, 미카형 증기기관차의 모습이 보이며 지금의 열차들과는 다른 고풍스러움과 멋이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어 구경하는 이들에게도 활기를 느끼게 해준다.
이 바로 옆에서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이 바로 그 유명한 철도 문화재인 연천역 급수탑이다. 1950년대 디젤기관차가 등장하면서 증기기관차는 점차 그 역할을 잃고, 많은 급수탑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강원도 도계역의 급수탑, 추풍령역의 급수탑, 충남 연산역에 있는 급수탑 등 ‘연천역 급수탑’을 비롯해 남아있는 급수탑들 대부분이 과거에 경인선을 달리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었다. 다른 오랜 급수탑들과 함께 철도 역사를 이해하고 그 중요성을 인정받은 연천역 급수탑은 근대 교통사를 연구하는 주요유산으로서 2003년 1월, 우리나라 등록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된 귀중한 철도 문화재이다.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연천역 급수탑은 길게 뻗은 원통형으로 생겨 마치 등대나 굴뚝같다는 인상을 준다. 23m나 되는 높이를 자랑하는 급수탑의 안에는 출입구 반대편에 계기 조작판이 자리 잡고 있으며 급수관 3개와 기계장치가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둥그런 급수탑의 바로 앞에는 사각으로 된 건물이 한 채 있는데, 이것이 바로 6·25 전쟁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간직한 두 번째 급수탑이다. 콘크리트 구조물로 이루어진 급수탑을 가까이 다가가 살피면 네모나게 깎여 쌓인 벽돌 위로 깊게 파인 탄환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보인다. 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남기고 있는 급수탑은 그 긴 세월과 아픔을 생각하게 한다.
과거에 이 급수탑들은 각 기관차들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한 시설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우선 우물의 물을 급수정으로 모은 후, 펌프를 통하여 급수탑 위의 급수 탱크까지 물을 보냈다고 한다. 기관차가 들어오면 급수 탱크의 물들은 그 수압을 이용해 배관을 타고서 철로로 이동하고, 철로 바로 옆에 설치된 ‘ㄱ’자 형태로 된 급수전을 거쳐 기관차로 보내졌다. 연천역 급수 탱크는 땅에서부터 15m 높이를 지닌 콘크리트로 만들어져있고, 그 길이는 7m이며 크기는 최대 100톤까지 물을 가둘 수 있었다고 한다.
1899년 9월, 서울에서 인천까지 가는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처음 등장한 증기기관차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중요한 교통수단을 담당하였다. 1914년에 연천역에서 급수탑을 건립할 당시만 해도 증기기관차들의 뒤에 달린 탄수차에 물을 공급하고 있을 동안에 이 땅을 찾은 사람들끼리의 대화나 물물교환 등 상거래가 활발하여 연천역 또한 그 시장의 중심에 있었다.
과거보다는 뜸해졌지만, 여전히 오랜 시간 사랑을 받는 연천역은 시간이 흘러 새로운 발전과 여행길을 개척하기 위한 길고도 짧은 휴식에 접어들었다. 이 휴식 기간을 거쳐 부디 연천역이 더욱 사랑받고 멋진 역으로 거듭나기를 바래본다.
원주시 간현리는 원주시 지정면에 있다. 간현은 원래 간재라고 불렀고 ‘재’가 ‘현’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온다. 간현이란 이름이 숯돌고개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도 하고, 크다는 의미의 큰 골짜기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어떤 말이 정설인지 모르지만, 큰 강을 끼고 있고 골짜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간현이기에 얼추 맞는 이야기들인 셈이다.
간현유원지는 원주시 지정면 일대를 흐르는 원주천과 삼산천이 만나는 간현 협곡에 위치하고 있으며 협곡 동쪽으로 백사장을 갖추고 있다. 1980년대 후반에 강촌과 대성리 쪽으로 대학생들이 동아리 모임이나 MT 장소를 옮겨가기 전까지 원주 간현유원지는 1970년~1980년대 대학생들의 MT 장소로 널리 알려졌던 곳이다.
서울 청량리 역에서 중앙선 기차를 타고 간현역에 내리면 많이 걷지 않고 바로 섬강이 보인다. 간현유원지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청춘의 열정을 불태우며 모닥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 먹으며 낭만을 즐겼다. 2011년 중앙선 간현역이 폐쇄되면서 간현역에는 레일바이크가 들어섰고 지금은 넓은 주차장과 안내센터가 자리한 유원지가 유유히 흐르는 섬강과 더불어 찾아오는 이들을 반겨주고 있다.
간현유원지와 레일바이크, 소금산 출렁다리 등의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어서 지정면 인근의 마을 주민들은 관광자원과 더불어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원주레일바이크’는 중앙선 역인 ‘간현역’이 있던 장소에 설치되었다. ‘간현역’이 2011년 폐역되면서 2013년에 간현역은 ‘원주레일바이크’로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간현역에서 판대역까지의 6.5km 구간에 레일바이크가 운영되고 있다. 간현유원지가 있는 섬강은 예나 지금이나 여름철에 더 많은 피서객들을 맞이하고 있고 몇 년 전 개장된 출렁다리와 레일바이크 덕분에 평일에도 수천의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1980년대 간현유원지 인근에서 장사를 했던 김상순 할머니는 당시에도 간현유원지에 사람이 많이 찾아왔었다고 전한다.
1980년대 초반에 간현이 관광지로 개발되었을 때 유원지 근처에서 장사를 했어요. 그때도 여름이면 기차를 타고 찾아오는 관광객이 많았어. 그때는 여름에만 유독 사람이 많이들 찾아왔는데 그 당시에는 근처에 물건을 파는 곳이 없으니까 물건을 떼러 가려면 원주로 나가야했어. 물이 낮을 때 물건 들이기가 수월하니까 봄에 물건을 많이 떼 왔지.
김상순 할머니의 말을 들어보면 간현유원지는 그때도 찾는 이들로 분주한 공간이었다. 어느 해인가 큰 비와 함께 수해가 나서 섬강이 넘친 적이 있고 근처에 살고 있던 김 할머니네 집도 수해로 피해를 입었다. 강가에 산다는 것이 낭만적이고 좋은 부분도 많지만 한번씩 물이 범람하는 수해를 겪으면 그 피해가 이만저만하지 않다.
1980년대 당시 간현유원지에 있는 출렁다리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출렁다리를 건너 오형제 바위에 갈 수 있었고 강에 놓여있던 섶 다리는 가는 골 마을에서 개미둥지 마을을 이어주는 교량역할을 했다. 지금은 섶 다리가 놓여졌던 곳에 잠수교가 설치되었다. 섬강을 끼고 있는 간현유원지는 어른부터 아이까지 남녀노소가 찾는 곳이었기에 봄이면 인근 지정초등학교에서 봄 소풍을 나오는 학생들의 목소리로 간현유원지 인근이 시끌시끌했다.
간현관광지 내 소금산 등산로 입구에서 조금 올라서면 소금산 출렁다리를 건널 수 있다. 바닥을 내려다보면 아찔하다. 출렁다리 밑으로 보이는 절경을 감상하며 주변 정취에 취해서 다리를 건넌다. 출렁다리는 섬강에서 위로 100m 상공에 설치되어 있어서 하늘 위를 걷는 것 같은 스릴을 느낄 수 있다. 소금산 출렁다리가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2019~2020년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된 이유를 출렁다리를 건너본 사람은 누구나 알게 될 것이다. 간현유원지가 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국민관광지가 되고 인근에서 살아왔던 주민들이 나이 들어가는 긴 세월동안에도 섬강은 맑은 빛으로 유유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원역에서 오산 방향으로 전철 길을 따라가다 보면 두 개의 급수탑을 만난다. 두 개가 굴뚝모양의 원통형 급수탑이다. 키가 큰 회색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것과 그 옆에 낮은 급수탑은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아담한 모양새이다. 출근길 늘 지나는 길을 무심코 지나치다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문득 발견할 때가 있다.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자꾸만 보니 사랑스럽다.
수원역 급수탑은 1924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제작되었다. 과거 수원역에는 일제강점기 개통한 수인선, 수여선 두 개의 협궤열차의 시종착역이었다. 이때 사용되었던 급수탑은 증기기관차 운행에 필요한 물을 저장했다가 물을 공급하는 시설이다. 두 협궤열차가 폐선되고 난 후 급수탑은 수원역 구내에 남아있었다.
2년 전 구청에서 보수공사를 진행해서 철로 옆 담을 허물어 지나는 사람들이 급수탑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기관사들이 목욕하던 목욕탕 등 남아있던 다른 부속시설들이 허물어져 이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세월은 지났고 바삐 달려와 수증기를 내뿜으며 숨을 고르던 열차의 모습은 이제 없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길을 따라 하루 하루를 바삐 시작하고 있다. 열차가 다니지 않는 급수탑의 시간은 이제 세월이 빗겨간 듯 느긋하게 흐르고 있다.
식민지 조선을 수탈하기 위한 일본에 의해 건설되어 표준궤도와 비교하면 절반에 불과했던 협궤열차는 인천에서 출발해 시흥, 안산, 화성, 시흥을 거쳐 수원까지 운행되었던 수인선과 수원에서 출발해 용인, 이천, 여주까지 운행되었던 수여선이다.
빵빵거리는 꼬마기차의 기적 소리가 울리면 역마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무거운 짐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들고 열차에 올랐다. 인천의 소금과 젓갈이 그렇게 내륙으로 들어갔고 여주, 이천 등지의 쌀과 채소들이 철도를 타고 다른 마을로 향했다. 학생들의 등하교시간에 서로 마주 보고 앉으면 무릎이 닿을 정도로 좁았던 열차에는 고단한 삶을 살던 젓갈 장수의 비린내가 풍겼고 소래에 김장젓갈을 사러가는 주부들과 인천 송도유원지로 여주 신륵사로 소풍가는 젊은 연인들과 학생들로 가득했다. 철길은 동네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신나는 놀이터였다. 서민들의 애환을 가득 담은 채 흔들흔들 달려가던 시속 20Km의 협궤열차, 지금은 비록 사라졌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있다.
지난날 내 기억에 언저리를 만나게 되는 공간, 생각만으로도 어린 시절의 훈훈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 공간을 만났을 때의 따뜻한 마음을 여행은 그렇게 우리 삶을 위로한다. 많은 이들이 만나고 떠났던 철길위에 이제는 두개의 급수탑만 남아있다.
* 두 개의 급수탑 중 콘크리트로 된 급수탑(준철도기념물 제11-시-02-14호)은 경부선에 사용되었고 붉은 벽돌로 된 낮은 급수탑(준철도기념물 제11-시-02-15호)은 수인선, 수여선에 사용하던 급수탑이다.
수인선은 1937년 8월 영업을 개시하여 1995년 12월 31일 폐선하였고
수여선은 1930년 12월 1일 개통하여 1972년 4월 1일 폐선하였다.
철도가 놓이기 전 춘천에서 서울까지는 얼마나 걸렸을까. 조선시대 춘천사람들이 서울로 가려면 2박 3일을 걸어야 했다. 도로가 생기면서 8~10시간으로 단축이 됐고, 철도가 들어서면서 3시간으로 단축됐다. 교통의 발달은 삶의 변화도 가져왔다. 신문물과 물자를 실어 나르던 기차를 타고 사람들은 춘천을 벗어나 조금씩 다른 지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갔다. 경춘선은 삶도 변화시켰다. 경춘선은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사철(私鐵)이다. 춘천에 철도가 없다는 이유로 강원도청이 철원으로 옮겨질 위험에 처하자 춘천지역 유지 12명이 경춘 철도 주식회사를 만들어 오늘의 경춘선을 만들었다.
1939년 경춘선은 서울 성동역을 출발하여 고상전 정류소, 월곡 정류소, 연천역(현재 광운대역), 신공덕역 등 24개역으로 운행을 시작하였으며, 1971년 10월 5일 성동-성북 구간이 폐선 되고, 2010년 12월 복선전철화가 완료되면서 춘천-서울은 1시간 거리가 되었다. 복선전철이 생기기 전 청량리간 춘천의 경춘선은 9개의 일반역과 9개의 간이역이 있었다. 역마다 들르는 비둘기호라도 탔다면 시간의 압박은 있을지라도 작은 간이역의 정취를 한껏 느끼며 춘천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 키 작은 소나무 하나’만 덩그러니 있을 것 같은 폐역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김유정역은 우리나라 최초로 사람의 이름이 붙여진 특별한 역이다. 1939년 개통 당시 신남에 위치해 있어 신남역이었다. 하지만 <봄봄>, <동백꽃> 등 유머와 해학을 통해 실제 삶의 애잔함을 밀도 있게 그려냈던 소설가 김유정의 고향이자 그의 작품들 실제 배경이 되었던 실레마을을 기념하자는 지역민들의 뜻을 모아 2004년부터 김유정역으로 바뀌었다. 작은 시골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드라마 ‘간이역’을 통해서다. 1996년 제작된 드라마 ‘간이역’은 철도원 아버지와 가족의 사랑을 그린 홈드라마로 전국적 인기를 끌었다. 기와를 멋스럽게 올린 신 김유정역 왼편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경춘선 무궁화의 마지막 운행 객차였던 7160호 디젤 기관차가 서 있다. 카페와 관광안내소, VR체험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옛 역사는 한국 철도공사의 철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대성리, 청평역과 더불어 대학생들의 MT장소의 메카였던 강촌역. 피암터널에서 멈춰 서던 열차는 없고 아스팔트가 깔렸다. 반복되는 아치형의 피암터널은 강촌역의 랜드마크다. 사실 피암터널은 생긴지 30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전에는 선로 옆 절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고 한다. 몇 번의 낙석사고가 생기자 그제서야 만들어졌다고 한다. 강촌역은 그래피티가 많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피 끓는 젊은이들의 집합소였으니 그들의 아우성이 낙서로 표현된 것이라 짐작된다. 거기에다 철도공사에서 대놓고 그래피티를 그려 넣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밖에 경춘선 운행당시 사용되던 표지판 및 이정표들 또한 그대로 남아 있다.
백양리역은 철로 상·하행선 한가운데 역사가 들어서 있는 특이한 공간 배치로 포토존과 영화촬영 명소로 이름을 날렸다. 백양리는 ‘하얀 버들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봄철 강가에 버들꽃이 온통 하얗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경춘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역사 안에는 비둘기호가 다니던 시절의 추억사진이 남아 옛 추억을 더듬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철길을 다 걷어내지 않고 백양리역 일부에 남겨두었다. 반대편 춘천행 열차가 다니던 구간은 걷어내고 임시도로를 만들어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게끔 했다. 크고, 화려해진 신백양리역은 빠르게 사람들을 옮겨 싣고 지나간다.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잠깐의 여유를 갖고 싶다면 구 백양리역을 둘러보면 좋을 것 같다. 소박한 간이역에서 따뜻한 정겨움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경기도를 벗어나면서 제일 먼저 도착하는 간이역은 경강역이다. 경춘선이 복선화되기 전까지 강촌역과 가평역 사이 경강역과 백양리역은 지역민들을 위한 간이역이었다. 1939년 개통 당시 서천역이었지만 충남 서천역과의 혼동이 생길까 경기도와 강원도 앞글자를 따서 이름짓게 되었다고 한다. 경강역 하면 영화 ‘편지’에서 최진실과 박신양의 운명적 만남이 있던 곳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지금도 경강역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쓴 편지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고, 엽서를 써서 넣으면 6개월 뒤에나 받아볼 수 있는 느린 우체통이 있다. 현재 경강역은 폐선로를 활용한 레일바이크의 매표소로 활용되고 있다.
“덜커덩~ 덜커덩”
시간이 흐르면서 겉모습은 바뀌었지만 기차는 여전히 춘천과 서울을 오가며 사람들의 이야기와 삶을 부지런히 실어 나른다. 옛 선로와 역사는 흥미와 재미가 가득한 레일바이크로, 낭만과 추억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배웅하던, 이별과 만남이 이뤄지던, 왁자지껄 청춘들이 젊음을 뱉어내던 경춘선. 이제 옛 간이역에서 연인들은 선로를 거닐고,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쌓는다. 역사에 들러 사랑의 대화를 남기고, 둘만의 밀어를 나누기도 한다.
상암동 부엉이 근린공원 끝자락에 생뚱맞은 일본군 관사 건물 두 채가 있다.
가보면 “왜 이곳에 이런 것이?”하는 의문이 생긴다.
알고 보면 지금 있는 상암 부엉이근린 공원 부근이 경의선 옆으로 1930년대 일본이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세운 일본군 장교용 관사촌이 있던 곳이었다. 지금도 옆으로 경의중앙선이 지나고 철도공사수색차량기지가 있어 수색교를 건너가다 보면 많은 철로를 볼 수 있다.
2005년경 서울시 산하 SH공사가 상암동에 대규모 택지를 조성하면서 일본군 장교관사로 추정되는 목조건물 22개동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1970년대 초 개발제한구역으로 정해지고 1990년대 초까지 쓰레기 매립지 인근이라 개발열풍에서 벗어났기에 일본인 관사 22개동이 70여 년 동안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다. 문화재청은 이곳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결정, 일본군관사 22개동 가운데 상태가 양호한 2개동을 2010년 지금 장소로 옮겨 복원하여 역사전시관으로 꾸몄다.
그러나 문화재 지정과 전시관을 개관하는 데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인근 주민들의 반발이 있었는데, 자랑스럽지 않은 역사의 흔적을 문화재로 등록해 관리 보존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그 이유였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일본군 관사 맞은편에 일본인 학교가 들어서면서 그곳 학생들에게 한국에 대한 우월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도 언급됐다.
하지만 당시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의원 황보영희는 “일제 관련 문화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항상 있어왔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문화유산뿐 아니라 치욕스러운 역사의 잔재물도 역사적 교훈을 주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상암동 일본군 관사가 ‘네거티브 문화재’로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역사의 치욕적인 잔재물을 보여주는 곳으로 활용되고 있는 옛 서대문형무소와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등이 있으며, 이런 문화적 유산을 ‘네거티브 문화재’라고 말한다.
이전, 복원 후 많은 의견들이 있었던 상암동 일본군 관사는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고 2015년부터 점차 이곳을 이용하여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있다.
2019년 7월~10월 사이 일본군 관사에서 배우는 독립운동이야기, ‘암호를 풀어라’처럼 흥미롭고 재미있게 독립운동가에 대해 알아가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이처럼 상암동 일본군 관사는 앞쪽의 소·중위급 일반 숙소 건물은 독립 운동가들의 사진과 업적들을 전시하고, 교육과 다양한 체험 학습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하며, 뒤쪽에 위치한 대위급 장교의 관사는 당시의 생활공간을 그대로 재현, 전시하는 전시공관으로 사용된다. 이 공간에는 소·중위급 일반 관사에서는 볼 수 없는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방안에 화로, 부엌, 욕실까지 과거의 모습 그대로 보존, 복원 되어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괜찮은 전시공간이다.
상암동 일본군 관사는 학생들 뿐 아니라 일반시민들에게도 좋은 교육의 장이 되어준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고, 주변에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어 산책이나 나들이할 때 둘러보기 좋다.
자유로에서 빠져나와 시끌벅적한 행주산성 음식문화거리의 끄트머리쯤에 이르면, 뜻밖에 조용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는 행주서원지와 마주치게 된다.
행주서원은 조선시대의 명장 권율 장군(1537~1599)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곳이다.
조선 24대 왕 헌종이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에 행차할 때마다 행주대첩을 이끈 충장공 권율의 제향을 지낼 건물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다가 행주산성이 잘 보이는 곳에 건립했다고 한다. 제향을 지낼 목적이었기에 처음에는 기공사(紀功祠)라는 사당이었지만, 고종 때 강학 공간을 갖춘 서원으로 발전해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았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담장 일부와 사당의 주춧돌만 남고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강당(전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과 기공사(사당)는 각각 1988년과 1997년에 복원한 것이다.
1970년대 정부가 행주서원을 복원하는 대신 행주산성 안에 충장사라는 권율장군의 사당을 새롭게 건립하고 권율 장군의 위패와 함께 행주서원 안에 있던 행주대첩비(중건비)까지 충장사로 옮겨버리면서, 이곳은 행주서원이 있던 옛터라 하여 행주서원지가 되었다. 충장사로 옮겨졌던 행주대첩비(중건비)는 2011년 3월 행주서원 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행주서원지까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행주산성 음식문화거리를 지나야 한다. 차 두 대가 겨우 오갈 수 있는 좁은 길 양쪽으로 즐비한 대형 음식점들 사이를 지나다 보면, 한국전쟁 때부터 시작된 행주서원의 수난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1985년 경기도문화재자료 제71호로 지정된 뒤 조금씩 복원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곳의 명칭이 아직 행주서원(幸州書院)이 아닌 행주서원지(幸州書院址)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원 내의 모든 건축물이 완벽하게 복원된 상태는 아니다.
권율 장군의 위패는 군사정권 시절 시멘트로 지은 신축사원으로 옮겨지고, 전통적으로 어업이 주업이었던 조용한 마을은 무장공비 침투를 막기 위해 어업이 금지되자 네온사인 화려한 음식점 마을로 변해버렸다.
심지어 평소에는 서원의 문을 굳게 닫고 일반인의 관람조차 허용하고 있지 않아, 마치 휘황찬란한 음식점들 사이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뻘쭘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매년 봄가을에 올리는 제례의식(춘향제와 추향제)과 계절별 유생체험, 고양 시티투어 등을 통해 끊임없이 시민과 가까워지려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체험 수업이나 제례 등의 행사는 예약만 하면 시민 누구든 참여할 수 있다.
언젠가는 소실된 내부 건물도 모두 재건하고, 권율 장군의 위패도 다시 모셔와, 행주서원지가 아닌 행주서원의 이름을 당당히 되찾게 되길, 마을주민으로서 빌어본다.
대한민국에서 장마가 시작될 때면 늘 상습침수구역이 있었다. 특히 서울에서 1984년 9월 3일부터 사흘 동안 334.4㎜의 폭우가 내렸던 적이 있었다. 이때 폭우로 인해 물이 잠기는 지역들이 뉴스에 심심찮게 오르내렸는데 ‘상습 침수지’라는 오명을 쓴 지역들은 송파구 풍납동, 마포구 망원동, 구로구 개봉동 등이다. 특히 풍납동은 1980년대에 이어 1990년대까지도 상습침수지였다. 과거와 현재는 이어져 있는 것일까?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가 그곳에 있다는 자료를 보고 더 궁금해졌다.
석촌역 3번 출구에서 200m 정도를 직진하다 보면 송파구 여성문화회관 옆 근린공원 인근에 두 개의 비석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하나는 암행어사 ‘이건창 영세불망비’이고, 또 하나가 바로 ‘을축년대홍수기념비’다. 암행어사 이건창 영세불망비가 왜 나란히 있는가 궁금해서 알아보니 이 비석은 암행어사 이건창이 신분을 숨기고 송파장터를 찾아가 백성들의 어려움을 감싼 공덕을 기리기 위해 1883년 송파장터 입구에 세워졌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에 휩쓸려 사라졌다가 1979년 향토사학자가 발견해 여기에 세웠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두 비석이 나란히 한 곳에 있게 된 것이다.
예전에 홍수는 얼마나 끔직한 재해였는지 오래전 외조모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높은 지대에 살았던 외조모는 소, 돼지들이 떠내려가는 것도 보았고, 아랫동네에 물이 가득차서 이재민이 올라와 외조모 집에 와서 기거했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자료를 찾다보니 그때 홍수가 바로 ‘을축년대홍수’라는 역사적 재해였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을축년대홍수는 1925년 7월 7일부터 9월 초까지 이어졌다. 그 시기에 무려 4개의 태풍이 빗겨가지도 않고 한반도를 연이어 강타했다. 첫 번째 홍수는 7월 7일 대만 인근에서 발생한 열대성 저기압(태풍)이 중부지방을 통과하면서 황해도 이남 지방에 집중호우가 쏟아지고, 결국은 한강·금강·만경강·낙동강 등이 넘쳤다. 연이어 7월 14일, 다시 비가 쏟아지고 16·17·18일까지 계속 내린 비는 한강과 임진강의 분수계 부근에서 최고 650㎜에 달하였고, 이로 인하여 임진강과 한강이 크게 범람하였다. 7월 18일 한강의 수위는 뚝섬 13.59m, 인도교 11.66m, 구용산 12.74m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였다. 현재 한강 잠수교 수위가 5.5m 이상이면 보행자 통행을 막고, 6.2m 이상이면 차량통행을 막는다고 한다. 이 수위를 예전의 그 수위와 비교해보면 어마어마한 재해였음을 알게 된다.
이 때 가장 피해가 심했던 곳은 서울에서는 동부이촌동·뚝섬·송파·잠실리·신천리·풍납리 등이었다. 용산의 철도청 관사는 1층 천장까지 물이 찼고 열차가 물에 잠겼다. 또한 뚝섬에 샛강이 생겨 신천(新川)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비가 많이 오면 강이 범람하고, 가옥 침수와 논밭이 물에 잠기고, 이재민 발생 등은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는 점이다.
4회에 걸친 호우 때문에 사망자 647명, 가옥 유실 6363호, 붕괴 1만 7045호, 침수 4만 6813호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논 3만 2183단보, 밭 6만 7554단보 등이 유실되어 피해액은 무려 1억 300만 원에 달하였다. 역사상 을축년홍수는 한강 유역에서 발생한 최고의 대홍수로 기록된다.
처음에는 이 기념비에 대하여 조사하면서 무슨 홍수를 기념하나 싶었는데, 조선일보 기사를 찾아보니 신천리와 잠실리 두 동에 약 1000호에 4000명이 물 속에서 절명 상태에 있었음에도 배가 들어갈 수 없어 구조할 도리가 없었고, 밤 10시경부터는 살려달라는 애호성(哀號聲)이 들려왔다고 한다. 그 당시의 참담함을 알게 되니, 기념비라는 것이 좋을 때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세운 것이 아닌가 싶어졌다.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는 큰 피해를 입었던 잠실 일대의 주민들이 홍수 이듬해인 1926년 7월 15일 세운 것이었다. 자연 재해에 대한 경각심을 잃지 않고, 이 일을 오래오래 기억하자는 취지였다. 원래 이 비석은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사무소에 세워졌는데 행정구역 편입 등으로 여기저기 이전을 하다가 2009년에 지금 이 장소에 자리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대홍수가 끼친 영향은 많다고 전해진다. 홍수로 인하여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임이 밝혀지게 되었고, 암사동 신석기 시대 유적이 발견된 것도 을축년 대홍수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물론 공식으로 인정받는 것은 훨씬 이후에 일이나 백제왕성에 대한 논란을 촉발시킨 계기임이 분명하다.
비석의 오른쪽에는 총탄자국이 있는데 6.25 전쟁으로 인한 총탄자국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시간이 흐르고 자연재해에 대한 대비는 한다고 해도,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인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만난 이 기념비는 오래전 재해에 대한 경각심을 갖자는 취지로 세워졌다. 하지만 누구나 걸어 다니는 버스 정류장 근처의 이 거리에서 아무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다. 잠실 제2롯데타워가 뾰족하게 보이는 이 곳에서, 100년 남짓한 사이에 서울은 너무나 변했고, 우리는 얼마나 무신경해지고 있는가 생각이 많아진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첫사랑과 두 팔 벌려 걷곤 하던 장소, 혹은 숨어있던 살인마가 덮칠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장소로 나오곤 하는 철길. 서울에 남아있는 세 군데 철길 중 하나가 서울시 구로구 오류동에 위치한 항동철길이다. 폐쇄된 철길 같지만 항동 철길은 구로구 오류동에서 시작해 경기 부천, 광명을 거쳐 시흥군부대까지 이르는 11.8km의 오류선의 일부로, 일시 중단된 군용철로이다.
7호선 천왕역에서 나와 400m정도 걸으면 옛날의 흔적을 담고 있는 기차와 정지 표지판이 보인다. 조용한 주택가 골목에서 아파트 옆으로 갑자기 나타나는 철로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일시 중단된 철길을 실감하게 그냥 철길만 놓여있는지라, 근처 주민들에게는 산책길 이전에, 등하교길이자 출퇴근길이다. 조용한 동네 풍경 속 한 길목이기만 했던 이곳이 서울에 몇 안남은 철길 중 하나라는 점과 ‘레트로 열풍’으로 인생사진 장소로 SNS로 알려지면서 최근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항동공공주택지구 개발사업동안 열차 운행을 일시 중지하기로 하면서 임시개방되었는데 점점 인기를 끌며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항동철길은 현재 사업이 끝난 후 재개를 놓고 갈등이 일고 있다. 항동철길을 연남동 경의선 숲길처럼 만들고 싶어하는 구로구와 비용 및 여러 사정상 폐선이나 운행중단은 어렵다는 국방부가 대립하고 있다. 이미 예정되었던 재개는 수차례 미뤄진 상태다. 일주일에 한두 번 군수품 수송하자고 서울 시민의 명소가 된 항동철길을 막을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고, 원래 국방부가 이용하던 길을 임시로 개방했던 것이기에 원래대로 돌려줘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폐선을 만들지, 안전장치 설치 같은 대책을 마련해 운행을 재개할지 방법적 협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길어지는 갈등 때문인지, 계절 때문인지 포토존이나 표지판, 수풀이 관리가 잘 안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끝없이 펼쳐진 철로를 걷다보니 망망대해에 떠 있는 기분이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에 기차가 지나다닌다면, 주변 건물들과 너무 가까워 위험하겠구나 하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도 스친다.
항동철길에는 연 61만 명이 방문한다고 한다. 인기 요소 중 하나는 항동철길의 산책코스를 다양하게 짤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이정표를 만나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근교 방문객, 재방문객이 꽤 된다. 마음먹기에 따라 그냥 철길을 따라 쭉 걸어 역이나 정류장을 이동하는 간단한 코스도 가능하고, 철로를 따라 걷다가 푸른 수목원으로 빠지는 코스도 있다. 수목원으로 빠지는 코스가 가장 인기가 많은데, 서울수목원이라고도 불리는 푸른 수목원은 연중무휴 무료로 운영되는 서울 최초의 수목원으로, 서울광장의 8배인 부지에 1700여종의 수목과 화초가 어우러져있다. 메타세쿼이아 길과 아름드리 나무 쉼터, 억새원, 습지원, 항동 저수지 등 다양한 생태군락으로 출사지이자 힐링 쉼터로 사랑받고 있다.
또한 성공회대학교로부터 반대로 도는 산책코스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24시간 개방된 천왕산 성공회대 순환길 중 일부인 이 코스에서는 1936년 건축된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별장 구두인관도 볼 수 있다. 이국적이면서도 복고적인 이 건물을 성공회대학교에서 매입하여 신학원장의 사택 또는 집회시설로 이용하였으며 민청학련 사건의 산실이기도 하다. 구두인관과 캠퍼스를 지나 천왕산의 산책길로 들어서면 신영복의 다양한 서화작품들이 이어지고 따듯하게 볕이 쏟아지는 소담한 추모공간이 나온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코스다.
쉬고, 걷기 위해서도 한참을 찾아 나가야 하는 게 현실인, 휴식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서울이기에 항동철길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언제나 새로운 트렌드를 찾는 젊은 세대들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동네 주민들에게 더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닿기 쉽고, 짧은 호흡으로도 긴 호흡으로도 산책을 즐길 수 있는 항동철길이 없어지지 않기를 많은 주민들이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인천 중구의 아트플랫폼 골목을 빠져나오면 큰 거리에 눈에 뜨이는 건물이 한 채 있다. 바로 인천건축사회 건물이다. ‘아무나 들어가도 될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입구에는 인천건축사회의 건물을 안내하는 표지글이 있고,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층은 협회 공간인데, 한쪽에 북카페가 있다. 건축 관련 잡지, 도서를 비치해 지역 동네 주민들이 언제든 와서 건축 상담도 할 수 있고, 책도 볼 수 있다. 사무실 겸 시민들을 위한 퍼블릭한 공간이다. 그곳을 시작으로 건물을 둘러보면 이곳이 일반 건축물과는 다른 건물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이곳은 90년된 목조건물로써 시기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사용된 공간이었다. 최근까지 이곳은 인천 사람들이 자주 찾았던 식당, 우정일식집이었다. 노포였던 만큼 지역민들이 발걸음 속에 30년 이상 영업을 지속했지만 상권이 활력을 잃어 가게도 폐업을 하였다.
그 건물을 최근 인천건축사회가 매입해서 새로운 공간으로 탄생시켰다.
1932년 지어진 이 건물은 일본의 건축양식에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로써 90년의 역사를 유지해왔다. 일본인 이케마츠가 중구 제물량로 203-1번지에 세운 이래 선구점(배에서 쓰는 노, 닻, 키 등의 기구를 파는 가게), 질소 카바이트 판매점 등으로 그 쓰임새는 계속 변화해왔다.
이후 한국미곡주식회사의 사무실로도 사용되었고, 대한통운주식회사의 인첨지점으로도 활용되었다. 그리고 우정일식집까지. 두 번의 화재를 겪으면서도 건물은 여전히 존재했다. 건물 내부에 화마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건물의 기나긴 역사들을 생각했을 때 그저 방치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인천건축사회가 건물을 매입하며 도시재생의 의미를 지키며 리모델링한 이 건물은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고 오래된 허약한 부분을 보강 강화하는 방식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후원업체들이 나타나면서 건물 복원의 활기는 더해졌다. 준비기간만 6개월 이상이 걸린 공사였다. 주변에선 목조건물의 화재의 흔적을 걱정했지만 구조기술사의 판단 아래 안전하게 공사는 진행되었다.
두 번의 화재로 인해 그을린 나무기둥을 노출시켜 건물의 역사성을 담으려 했던 노력들을 여실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창문은 옛 프레임을 그대로 살리며 틀의 몰딩을 알루미늄 소재로 교체하였다. 창문을 내리고 올리는 옛 도르레를 여전히 유지하였다. 화재의 흔적이 남아있는 까맣게 된 나무기둥은 보강목을 대어 안정성을 보완했고, 건물 지붕하중을 지탱하기 위해 철골보를 올려 기둥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이 건물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2층의 천장은 개방되어 옛 지붕의 구조를 볼 수 있다.
그런 노력으로, 아트 플렛폼과 함께 이 일대가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구도심을 재생시키자는 취지에 걸맞은 뉴트로 공간으로 탄생한 것이다. 이 공간은 고증과 함께 보수를 하며 옛 원형을 훼손시키지 않으며 리모델링한 좋은 사례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 건물을 중심으로 주변의 오래된 건물들을 단지 부수고 새로 짓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도시재생의 한 부분을 담당한 이 건물의 파급효과로 인해 이 일대의 건물들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가 숙제가 되었다.
인천건축사회는 2층의 공간을 지역 주민들, 도시재생 단체들 그리고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개방 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각종 전시, 세미나 등 주민들과의 소통에 맞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계획이다. 90년을 버텨낸 이 공간이 주민들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유지될 때 이 건물의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강화의 북쪽에 위치한 교동도에는 바다가 보이는 향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향교가 있다. 바로 교동향교다. 교동 섬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향교는 2014년 7월 교동대로의 개통으로 인해서 더욱 가까워졌다. 강화 본섬과 교동도를 잇는 교동대교를 지나 서해바다 너머로 이북의 땅이 가깝게 보이는 곳이다.
이곳은 고려 유학자인 안향이 공자상을 들고 들어왔던 곳이다. 안향은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주자학과 더불어 공자의 화상을 가지고 교동도로 들어왔다. 안향이 모시고 들어온 공자상 덕분에 그는 도착하자마자 제사를 지냈고 그 장소가 지금의 고구리 인근이었다. 그 후 교동향교는 조선 영조시대에 들어서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였다.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며, 동시에 교육기관이다. 지방 백성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곳으로써 국가에서 세운 기관이다.
이곳 교동향교는 대성전에 공자와 함께 맹자, 안자, 증자, 자사 등의 4명의 성인을 모시고 있다. 더불어 우리나라 유학자 18명, 송나라 유학자 2명 등 총 스물다섯명의 위패가 있다. 교동향교가 이곳으로 이전한 것은 300여년 전이지만, 문화재청의 감정에 따르면 건축양식이 820년은 된 것이라고 추정한다. 문화유산으로써의 가치가 분명한 장소이다.
옛 성현들의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과 함께 교실인 명륜당은 유학생들을 위한 교육공간이었다. 또한 양반출신 선비들의 기숙사인 종재, 평민출신의 기숙사인 서재, 동무, 서무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 향교는 우리나라 최초로 공자의 제사를 지낸 곳이라는 사실에 걸맞게 제향공간이 뒤쪽에 배치되어 있다.
강화에 위치했지만 수차례의 전란과 위기에도 다행히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그로 인해 오래된 유물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선비들이 사용하던 검박한 목침과 이곳 출신 선비 26명의 교지 등이 보존되어있다.
현재 교동향교에서는 향교의 뜻을 살린 역사 문화 학교가 진행되고 있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체험프로그램이 열린다. 문화재청과 인천시가 후원하고 강화군이 주최하는 ‘토요일, 토요일은 교동향교(토.토.교)’ 프로그램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끌고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겁게 참가할 수 있는 이 프로그램은 훈장님의 가훈쓰기, 파우치 함께 만들기, 주민들이 직접 담은 꽃차 마시기, 전통 놀이 체험, 선비 옷 입어보기 등이 무료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참가인들의 반응이 좋은 청화백자 만들기는 꼭 참가해볼만한 프로그램이다. 초벌구이가 된 백자 위에 회색 안료를 이용해서 전통무늬를 그려 넣는 재미가 있다.
2014년 교동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교동도를 가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부쩍 늘었다. 사계절 낚시가 가능해 강태공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고구저수지를 지나 교동도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교동향교를 만날 수 있다. 교동향교 대성전에서 바라보는 서해바다의 모습은 절경이다. 저 멀리 이북의 땅도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천천히 산책하다보면 사색과 함께 여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 탐방을 위한 답사의 일환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학생들 역시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이곳을 찾았다. 최근 남북화해 분위기 속에서 북한과 가장 가까운 향교인 이곳을 찾는 발걸음도 늘어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교동향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공간일뿐 아니라 우리의 전통 문화를 배우기에도 좋은 곳이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 전통 체험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열려있는 공간이다.
인천 신포시장은 닭강정과 신포만두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샛길로 빠지는 좁은 골목에 성광떡집이 자리잡고 있다. 방앗간으로 시작한 떡집은 이곳에 터를 잡고 변함없는 맛으로 칠십 여년을 지키고 있다.
성광떡집 이종복 사장의 하루는 새벽에 시작된다. 어둑한 새벽 4시에 떡집의 불이 환히 켜진다. 주문 받은 떡을 만들기 위해서 전날 불려놓은 쌀을 살핀다. 4~8시간 잘 불린 쌀에서 물기를 쫙 빼고 제분기에 넣으면 흰 가루가 나온다. 잘 빻아진 가루를 한 번 더 제분기에서 쏟아넣고 나면 뽀얀 쌀가루의 자태가 드러난다. 거기에 천일염을 고루 뿌리고 시루떡 틀에 넣어 평평하게 편 후, 꿀을 넣고 다시 그 위에 쌀가루를 쌓는다. 그리고는 강한 스팀으로 시간이 떡을 만들 때까지 기다린다. 이것이 이 가게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장 좋아하는 꿀설기다.
설탕이 귀했던 어린 시절에 그의 어머니가 만들어주셨던 꿀설기는 여전히 이종복 사장의 손을 통해서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투박하지만 우직하게 떡을 만드셨던 아버지의 손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에게 여전히 변하지 않는 맛을 전해주고 싶은 것이 이종복 사장의 바람이라고 한다. 떡을 먹으러 올 때마다 각각 추억 속의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말이다.
우리에겐 항상 떡이 존재했다. 백일과 돌잔치, 명절에도 떡이 있었고, 결혼식부터 장례식까지 일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떡이 있었다. 누군가를 정성스레 대접할 때도 항상 떡을 준비했다. 이종복 사장은 이것이 우리의 정서라고 말한다. 그가 떡에 대해 우직한 성실함과 자부심을 갖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성광떡집의 떡이 유난히 찰지고 쫀쫀하고 맛이 좋은 이유는 바로 손 맛, 즉 악력에 의한 반죽이 밑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가 해온 것처럼 온 몸이 기억해서 떡을 만들고 있다. 떡집에는 그 흔한 계량기, 계량컵 등은 볼 수 없다. 그냥 그의 몸이 딱 안다고 한다. 이 정도 지났으면 익었겠구나, 이 정도면 간이 맞겠구나 감이 온다.
전통 방식을 고수하며 만들어낸 떡은 공장에서 기계들로 생산해 내는 떡들과 비교하면 투박하지만, 애써 모양을 잘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떡은 맛이 중요하고, 본연의 맛을 고수하며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해 만드는 것이 성광떡집의 전통 방식이라고 한다. 양질의 쌀과 철마다 나는 재료를 수급하기 위해 애쓴다. 쑥떡의 재료로는 해풍 맞은 섬쑥이 좋다며 사장부부는 영종도, 강화도, 덕적도 등지에서 직접 쑥을 캔다. 이렇게 캔 쑥에 곱게 갈린 쌀가루를 넣고, 손의 힘으로 반죽을 하면 손님들의 입맛에 기억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1947년 방앗간으로 시작한 이 가게는 1956년에 떡집으로 재탄생했다.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받은 것은 1988년부터였다. 대를 이어 70년간을 이어온 이 집은 신포시장 내에서도 가장 오래된 떡집이다.
현재 그의 아들이 4년째 떡 만드는 것을 배우고 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계량화된 떡 레시피를 권유하기도 하지만 이종복 사장의 신념은 여전하다. 떡은 무엇보다도 가장 많이 만들어 본 사람이 제일 잘 만든다는 것. 그 신념으로 아들에게 여전히 전통방식으로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있다.
새벽 4시에 주문을 받고 떡을 만들고, 만들어진 떡을 일일이 배달하며 바쁜 하루를 보내는 성광 떡집은 70년이 지나도 여전히 이 자리에 있을 것만 같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에 위치하고 있는 미리내 성지는 천주교 신자는 물론 신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장소이다. 미리내는 은하수를 뜻하는 순우리말인데 어째서 성지 이름이 미리내가 되었을까?
1800년대 초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이곳 미리내와 인근 지역 산속에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루었다. 신자들은 곳곳에서 땅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 살았다. 밤이면 그들이 있는 곳에서 나오는 불빛이 마치 별들이 모여 있는 은하수처럼 보여 미리내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달빛 아래 흐르는 은하수’, 그곳이 바로 미리내 성지이다. 박해를 피해 온 그들이었기에 가장 중요시한 것은 아침.저녁으로 모여 기도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고된 삶이었지만 자신들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자 한 것이다.
주차를 하면 미리내 성지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곳에서 오른쪽을 보면 성체 조배실이 보인다. 성당을 안나간지 오래 되었지만 눈을 감고 조용히 짧은 기도를 올린다. 성체 조배실 옆으로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과 함께 ‘한국 순교자 현양의 발원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그 옆으로는 천국의 모습을 의미하는 큰 조형물이 있다.
잠시 조형물을 감상하다 주차장 왼쪽으로 있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십자가의 길은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는 환희의 순간부터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순간이 표현되어 있으며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103위 시성 기념성당이 나온다.
강하고 견고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모습이다. 웅장한 외관만큼이나 내부의 웅장한 모습도 보는 이의 뇌리에 강하게 들어온다. 성당은 지하 1층, 지상 2층이며 면적이 3,450m²에 이른다고 한다. 이 성당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성당 이름을 보고 도대체 103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다. 103위는 한국인 93명,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주교 3명, 신부 7명을 뜻하며 이들은 1984년 5월 한국순교복자 103위의 시성식(가톨릭 용어, 성인품(聖人品)에 오를 때에 드리는 예식)을 통해 복자(福者)(가톨릭 용어, 죽은 사람의 덕행과 신앙을 증거하여 공경의 대상이 될 만하다고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하여 발표한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에서 성인(聖人)(가톨릭 용어, 교회에서 일정한 의식에 의하여 성덕이 뛰어난 사람으로 선포한 사람)의 품위에 오르게 된다.
이곳에는 종교적인 이유만으로 참혹한 형벌을 당하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는 전시장이 있다. 너무 참혹해 제대로 볼 자신이 없어 눈시울을 붉히며 뒤돌아섰다.
미리내 성지를 얘기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김대건 신부이다. 26세의 꽃다운 나이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순교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이 안장 되어 있는 곳이 이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순교 후 시신도 모셔오지 못했으나 이민식 빈첸시오 청년과 몇몇 신자들이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 가매장되었던 시신을 찾아 미리내까지 옮겨와 안장했다고 한다.
103위 시성 기념성당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김대건 신부의 동상과 그의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경당이 나온다. 경당 앞에는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상이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어린 아들을 먼저 보내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을 말해 무엇하랴. 그 안에는 김대건 신부의 발뼈 조각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설명을 듣고 알면 알수록 숙연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순교자들에 대해 보고 나니 마음이 무거운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면서 종교가 무엇일까, 어떤 마음으로 삶을 살아야 할까 하는 아직은 답을 찾이 못하는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성체 조배실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가면 성요셉 성당이 나온다. 1906년에 지어진 이 성당은 교인들이 성당에 올 때 하나씩 들고온 돌을 모아 벽을 쌓았다고 한다. 내부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중 하악골(아래 턱 뼈)이 안치되어 있다. 하나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다.
성요셉 성당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산 속에 십자가가 보인다. 겟세마니 동산과 무명순교자 묘지로 가는 길이다. 겟세마니 동산은 예루살렘 감람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동산인데 예수는 이 동산에 올라 가끔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미리내 성지 겟세마니 동산에는 예수가 휴식을 하시는 모습을 동상으로 꾸며 놓았다. 그 모습이 평범한 인간다워 나도 모르게 ‘풉’하고 웃었다.
다가오는 서양세력에 따른 국가적 위기와 그 속에서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천주교 박해. 그 박해 속에서 목숨을 잃어간 순교자들을 기리는 공간 미리내 성지. 천주교 신자가 아니어도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 한 번쯤 들러볼 것을 권한다.
1866년부터 1871년까지 6년 동안 계속되었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는 6년 동안 8,000여 명에 이르는 순교자를 낸 사건이다. 이때 안성 죽산에서도 24명의 신자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순교했다.
그 후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던 순교의 땅은 1994년 강정근 신부가 죽산성당에 부임하면서 성지를 다지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강정근 신부는 순교자들이 잊혀져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매달 죽산에서 순교한 신자들을 기리는 기념미사를 성지 앞과 도로변에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젊은 신자들과 힘을 합쳐 성지 개발기금을 조성해 성지 개발에 착수했다. 그곳이 현재의 죽산순교성지가 되었다.
죽산순교성지는 ‘잊은 터’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금의 성원목장 자리는 고려 때 오랑캐들이 진을 친 ‘이진(夷陳)터’가 있었는데 이진터는 신자들을 처형하는 곳이었다. 이에 신자들 사이에는 이진터로 끌려가면 다시 오지 못한다 하여 그만 잊어버리라는 뜻에서 ‘잊은 터’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은 순교자 묘역이었다. 순교자 묘역으로 가는 문을 들어가 왼쪽으로 보면 ‘죽산에 한 옛날에’라는 제목의 글이 새겨져 있는 비석이 있다.
죽산에 한옛날에 천주학 신봉자들 , 산산이 찢겨지고 뼐골이 부서져도
은공의 주님사랑 세세에 전하고자 , 수없는 고통속에 목숨을 사루었다
많다던 포졸들은 이제는 간데없고 , 은총의 신도들이 성전을 이루고저
선조의 순교정신 만세에 현양코자 , 조용히 외람진곳 외로이 불탔어라 (후략)
당시 순교자들이 어떤 정신으로 그 고통의 순간을 견뎠는지를 보여주는 글이다.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한 감정이 올라왔다. 작년 6월 우연한 기회에 이곳을 잠시 들린 적이 있었다. 이곳은 6월이면 색색의 장미가 만발한다. 이 글을 읽고 나니 역사는 너무 참혹한데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피어나는 장미라, 무엇인가 아이러니한 느낌이 들었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입구에서 순교자 묘역까지 한 바퀴 돌면서 묵주기도를 할 수 있는 묵주기도의 길이 있다. 동글동글한 큰 돌들이 묵주알을 상징한다. 그 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한가운데 무명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양쪽에 12개씩 순교자 24위의 묘역이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순교자분들에 대한 설명이 적힌 비석이 있다. 부부가, 일가족이 그리고 어린 아이가 같은 날 죽음을 당한 것이다.
비석에 있는 글을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지나간 과거에 분노가 치솟는다. 동시에 목숨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킨 분들에 대한 경외감이 생긴다. 그 경외감에 짧은 기도를 드려본다.
묘역의 양쪽 끝에 길게 세워진 것은 자세히 보면 죽창 모양을 하고 있다. 순교자들이 당한 그날의 비극을 형상화 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이 외에도 죽산순교성지에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14처 십자가의 길과 예비 신학생들의 연수 공간으로 활용되는 영성관도 있다.
죽산성지에 와서 시간이 허락된다면 영성관 정문 바로 옆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팔봉산에 잠시 올라가 보는 것도 좋다. 흔들바위는 설악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성관 바로 뒤에 있는 팔봉산에도 흔들바위가 있다. 높이 2.1m, 둘레 10.4m의 거대한 바위가 초등학생이 흔들어도 흔들린다. 이런 곳에 흔들바위가 있으니 좀 더 신성한 느낌이랄까?
성지를 둘러보면 숙연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뼈아픈 역사이지만 그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나은 미래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기옛길은 지역의 문화유산을 걷는 길로 연결한 새로운 형태의 역사문화탐방로를 말한다. 2012년 삼남길을 시작으로 2015년에는 성남, 용인, 안성, 이천을 잇는 영남길이 개통되었으며 안성에서는 죽주산성길과 죽산성지가 들어가 있다. 경기옛길에 대해 더 궁금하다면 경기옛길 누리집을 참고하면 된다.
‘안성에는 죽주라는 지명이 없는데 왜 죽주산성일까?’하는 의문을 품으며 산길을 올라 죽주산성에 도착했다. 경기도 기념물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에 비해 다소 초라한 안내 자료에 조금은 당황했다. 안내자료를 보니 조금 전 품은 의문은 금방 해결되었다. 죽주가 죽산지역의 고려시대 지명이라고 한다. 안성시 죽산면은 지역의 분기점으로 삼국 시대부터 군사적 전략을 위해 중요한 곳이었다.
죽주산성이 언제 지어졌는지 연대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여러 기록에 의하면 6세기 중반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이곳에 산성을 짓기 시작하였고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까지 꾸준하게 보완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성, 중성, 외성이 있는 삼중성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모두 다른 시기에 축조되었다. 내성 1,125m, 중성 1,322m, 외성 602m이며 성벽 높이는 2.5m 정도이다. 삼중성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적의 침입을 막는 데 유리했고 이에 적은 수의 병사로도 많은 적을 막을 수 있었다.
주차를 하고 바로 옆에 보면 경사가 조금 가파른 길이 나온다. 그 길의 끝에 동문 입구가 있다. 동문지에서 남문지를 거쳐 북문지까지 걷다 보면 안성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다. 성벽 위를 따라 걸으면 1시간 남짓 걸린다. 막상 걸어보니 그 1시간의 산책은 자연에 동화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성벽을 따라 잘 조성된 길을 걷다 보면 보이는 것은 주변의 나무와 길에서 또 다른 길로 이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성벽을 따라 산책을 하고 다시 동문 쪽으로 내려오면 충의사라는 송문주 장군의 사당이 있다. 사당으로 가기 전에 송문주 장군을 소개하고 있는 안내글을 읽었다. 그 자료에서는‘신출귀몰한 장군’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고려 고종 23년(1236년)에 몽골은 3차 침입을 하였다. 당시 죽주 방호별감을 지내고 있던 송문주 장군은 몽골군이 산성을 에워싸고 항복하라고 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싸웠다. 적들의 전략을 예측하여 역공을 하였으며 적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이에 몽골군은 공격을 시작한지 보름이 지나 산성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신출귀몰’이라는 수식어가 딱 맞는 장군이다.
죽주산성을 오면서 도로 한복판에 서있는 동상을 보았는데 알고보니 그 동상이 송문주 장군 동상이었다. 2017년 안성시에서는 죽주산성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죽산삼거리에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사당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장군의 사후(1200년대 후반)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사당 앞에 가보니 벽면에는 당시 몽골군과 싸우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벽화를 보고 있자니 잠시나마 그 옛날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
2019년 16회를 맞이한 죽주대고려문화축제는 적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죽주산성을 널리 알리고 몽고의 침입에 맞서 큰 승리를 거둔 송문주 장군을 알리기 위해 매년 열리는 행사이다. 보통 9월에서 10월경에 축제가 열리며 죽주산성에서 하지는 않지만 죽주 가요제, 죽주 예술제, 문화 체험부스 등 볼거리가 꽤 있는 편이니 그 축제마당에 참여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릴 때와는 다르게 10여 년 전부터 절에 가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져 이곳저곳 절을 찾아다니곤 했다. 절에서 들을 수 있는 불경 소리와 풍경 소리 그리고 사찰 특유의 향까지 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 편안함을 다시 느껴보고자 안성시 죽산면에 위치하고 있는 칠장사를 찾았다. 칠장사는 안성 8경의 하나이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처음으로 창건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고려시대 혜소국사에 의해 중창된 기록이 있다.
칠장사(七長寺)가 있는 산이 칠현산이다. 칠현산은 11세기경 혜소 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설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일곱 명의 현인이 오래 머물렀다 하여 칠장사라 이름하였다. 사찰의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고려 시대 왜구의 침입으로 개천사에 있던 고려조의 실록을 이곳에 옮겼을 정도로 중요한 사찰이었으며 후에 인목대비는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칠장사 앞에서 절의 전경을 바라보면 유난히 색이 많이 바랜 누각이 보인다. 초라해 보이기보다는 연륜을 보여주는 장엄한 느낌이랄까. 숙연해지는 마음을 가지고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사천왕문이 나온다. 어느 사찰이든 이 사천왕문을 지날 때면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움찔하는 느낌이 든다. 이건 인간의 본성일까? 칠장사 사천왕상 역시 갑옷을 입고 늠름한 장군의 모습이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안성시 향토유적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종이 나오는데 만들어진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어 조선 후기의 범종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동종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대웅전이 있다. 이 대웅전은 2019년 8월 29일에 보물 제2036호로 지정된 법당으로 조선 후기 사찰의 건축 상황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어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크다. 대웅전 내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3호인 목조석가삼존불좌상과 불화 연구의 중요한 자료인 국보 제296호 칠장사 오불회괘불탱, 보물 제1256호 칠장사 삼불회괘불탱이 있다.
대웅전 앞에는 안성 죽림리 삼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9호로 지정되었는데, 만들어진 방식으로 볼 때 고려 전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탑을 볼 때마다 선인들의 지혜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대웅전을 나와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색색의 천이 가득 묶여 있는 박문수 합격다리가 나온다. 박문수가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칠장사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시험을 본 후 수석 합격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각종 시험 및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자신의 소원을 적어 다리 위에 묶어 둔다. 그냥 지나가면 괜히 손해 볼 것 같은 느낌에 한참이나 서서 나의 소원, 아이들의 소원을 적어보았다.
장원 급제한 어사 박문수의 길을 이어가고자 2009년부터 칠장사 어사 박문수 전국 백일장이 해마다 10월경에 개최된다. 이 백일장은 전국의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데, 국회의장상부터 교육부장관상까지 나름 규모가 큰 대회이니 기회가 된다면 참가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조금 더 돌아가면 보물 제 488호로 지정되어 있는 혜소국사비가 나온다. 혜소국사비는 혜소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전체적인 크기도 높이 3.4m로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이 외에도 칠장사 내에는 보물 제983호 안성봉업사지석조여래입상,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9호 칠장사 철당간, 안성시향토유적 제24호 칠장사 사적비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또한 궁예가 열 살 때까지 활쏘기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활터가 남아 있으며 임꺽정이 스승인 병해대사(갖바치 스님)에게 바친 꺽정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삼송역에서 나와 쇼핑몰을 지나쳐 산책하다보면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운동하시는 게이트볼장이 나온다. 그 곳 뒤를 살펴보면 머리없이 우두커니 서있는 석상이 있다. 차도 근처에 있어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석상의 이름은 ‘밥할머니 석상’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한 시대에 누군가에게 밥을 해주던 할머니이다. 과연 누구에게 어떻게 밥을 해주었길래 석상이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왜 현재 머리가 없는 채로 서 있을까?
‘밥할머니 석상’의 연원을 알기 위해서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밥할머니는 임진왜란 당시 고양시에 살고 있던 문옥형이라는 선비의 아내다. 그녀는 명문거족 출신이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파죽지세로 남쪽부터 조선을 침략하기 시작한 왜군들은 순식간에 고양시에 다다른다. 스스로 목숨을 지켜야했던 고양시의 백성들은 삼각산 노적봉 근처에 거적을 쌓고 새끼줄로 둘러쌌다. 멀리서 보기엔 쌀가마니가 쌓여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말이다. 또한 창릉천에는 석회를 풀어 마치 사람들이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어 뿌옇게 된 것처럼 위장하였다. 이것이 다 밥할머니의 머리에서 나온 지혜였다.
곧 왜군은 현재 원흥지역에 있는 창릉천까지 쳐들어왔다. 왜군들이 물을 살펴보고 물이 뿌옇게 된 이유를 물으니 사람들은 쌀뜨물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안심한 왜군들은 물을 마셨으나 곧바로 배탈이 나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게다가 멀리 바라보니 백성들이 쌓아둔 거적이 군량미를 비축해둔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 전력을 다할 수 없다고 판단한 왜군은 퇴각하였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밥할머니는 권율장군의 행주대첩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조선 병력이 모자랄 것 같자 49세라는 나이에 활쏘기를 배우고 여자들을 모아 맞서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운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 던지고 솥에 물을 끓여 부은 일화의 주인공이 바로 밥할머니와 여성들인 것이다. 전투에 직접 참가하며 관군들에게 밥을 해주고 끊임없이 구휼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녀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불심이 깊어 ‘보살할머니’라고도 불렸다 한다. 그래서일까? 밥할머니 석상은 약사여래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석상을 당시 한양의 입구인 의주대로에 놓았는데, 일제강점기 밥할머니의 위상과 숨은 역사를 알게된 일본군들이 석상의 목을 쳐 얼굴 부분을 훼손하였다. 이로 인해, 현재는 얼굴 없는 석상이 되어버렸다.
해방 이후에 시민들이 얼굴 부분을 따로 만들었지만, 만들 때마다 동네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겨 현재는 없앴다. 그리고 신도시사업과 길을 내는 과정에서 여러 곳으로 이동하였다가 201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면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여성의병으로 활동하며 나라를 지킨 밥할머니를 잊지 않고자 매년 밥할머니 추향제를 열고 있다. 또한 송덕비를 세워 밥할머니를 향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기록해놓았다.
흔히 제주는 바다와 오름이 있는 천혜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여행지로 생각하기 쉽다. 옛 제주의 모습을 상상할 때도 앞은 바다고 뒤에는 오름이 있는 시골 마을만 생각하기 쉬운데, 제주에도 번화했던 원도심이 있다. 오래된 도심은 엄청난 이야기를 품는다. 그대로 남은 옛 장소와 아주 사라진 빈터, 공간의 의미가 복원된 건물, 새로운 이야기를 담는 예술 공간이 함께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제주 원도심은 옛 제주읍성 안쪽이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곳이 제주도의 중심이었다. 성안(城內) 간다고 하면 번화한 이곳에 볼일 보러 간다는 말이었다. 극장이며 주점이 많아 사람들이 모이던 이곳에 300년 넘은 초가가 한 채 있다. 초가 마을이었을 때부터 한자리를 지키던 이 오래된 집에는 안순생(97세) 할머니가 7대째 살고 계신다. 이 마을에서는 제주 토박이들의 뚝심 있는 삶과 제주의 옛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제주에서는 부자 양반도 초가에 살았다. 기와를 굽지 않아 기와집은 없었기 때문이다. 제주에 있는 기와집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일본식 기와를 들여와 지은 것이다. 박씨 초가 집 앞에 있는 하마비(말에서 내릴 때 딛는 돌)와 우물터를 보면 역시 권세 있는 집이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집을 ‘박 판사네’라고 부른다. 지난해 ‘최순실 게이트’ 사건을 담당했던 박영수 특검의 아버지인 고(故) 박창택 판사네 집이기 때문이다. 박 판사의 부친은 고(故) 박명효 북제주군수였다. 지금 초가를 지키고 있는 안순생 할머니는 박 판사의 어머니이다. 어르신은 꽃 처녀일 때 시집와 이집에서 세 아이를 낳고 길렀다.
이 초가는 어르신의 삶이 담긴 집이자 제주 사람의 역사가 담긴 집이다. 어르신은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미리 준비해 놓은 수의를 보여주셨다. 세상 떠날 날을 위해 손수 장만해 두셨다고. 자식에게 빚지고 싶지 않아 직접 마련하셨다는 말씀에 평생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오셨는지 짐작이 간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 바람에 옛집들이 많이 사라졌다. 이후 건축사의 변화무쌍한 바람에도 박씨 초가는 초가지붕을 고수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문은 흰색 샤시 창호로 바뀌었지만. 콘크리트 건축물 사이에 있는 돌담에 둘러싸인 초가는 기품 있고 굳건해 보인다. 10년만 돼도 헌집 취급을 받는 요즘 생각으로 300년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세월이다.
원도심에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보물 제322호인 관덕정이다. 세종 때인 1448년 병사를 훈련시키기 위해 지은 곳으로 관덕정은 제주성의 광장이었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이곳 관덕정을 배경으로 벌어졌다. 제주 4.3사건의 발단이 된 1947년 발포 사건도 이곳에서 삼일절 행사가 있어 사람들이 모였을 때 일어난 일이다. 지금도 여기서 입춘굿, 콘서트 같은 큰 행사가 치러진다.
이 동네가 제주의 원도심인 이유는 조선 시대 제주의 행정중심지였던 제주목관아가 있기 때문이다. 제주목관아 앞이 그 시절 중심 상가였다. 각종 가게와 편의 시설이 자리하고 있었다. 최초의 교회, 초기의 극장, 종합병원이 이곳에 있다. 제주중앙성당 종탑은 여전히 12시에 맞춰 종소리를 흘려보낸다. 관덕정 길 건너에 있는 제주 개신교의 발상지, 성내교회는 독립군자금을 모금하다 일제의 핍박을 받았던 곳이다.
제주목관아는 관덕정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없어졌는데 1991년에 그 터에 복원을 해놓았다. 이 관아에서 바다까지의 거리는 불과 500m 바다 앞 옛 마을을 보기에 가장 적합한 여행지가 아닐까 싶다. 제주목관아에는 제주목 역사관이 있고 평일에 관람이 가능하고 1500원의 입장료가 있다.
유명 관광지로서의 제주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 예술을 품고 있는, 그동안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제주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원도심이다. 원도심에는 관덕정, 제주목관아 외에도, 옛 건물을 개조한 카페나 갤러리, 옷가게 등이 많다. 성내교회 옆에 있는 ‘모퉁이 옷장’도 JTBC 방송의 예능 프로그램인 ‘효리네민박’에 나와 명소가 되었다. 순아커피, 갤러리 코지왓, 예술공간 이아 등 옛 건물을 그대로 사용한 장소들이 공항 가기 전에 들러 사진 찍기 좋은 코스로 입소문이 나면서 여행자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인천 원도심 중의 한 곳인 동구에 경인전철을 끼고 있는 배다리 마을이 있다. ‘배다리’라는 이름은 예전에 이곳 마을 어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배와 배를 연결하여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녔다거나 배를 댈 수 있는 다리가 있어 붙여졌다. 인천 하면 자유공원과 차이나타운(청관)이 유명한데, 이곳이 일본과 청나라를 비롯한 외국 세력들의 침략과 침탈의 역사가 깃든 신중심지였다면, 배다리는 그곳에서 밀려나거나 쫓겨난 조선인들과, 주변부에 들어선 공장에 일자리를 찾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노동자들, 한국전쟁 이후 황해도 등지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뒤섞여 어려운 시절을 이겨온 고달픈 삶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나라의 위기와 삶의 힘겨움을 교육으로 극복하고 도와주기 위한 지식인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기도 하다.
광복을 맞이하며 시작된 헌책방은 한국전쟁 이후 거리를 형성하며 한 때 40여 개가 들어서 성업을 이룰 정도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배다리는 “인천 역사 문화의 모태”라고 말할 정도로 개항 이후 근대 종교와 교육, 산업, 노동, 교통, 상업의 시발지였고 중심지였다. 그러나 이곳도 곳곳에서 드러나는 도시 변화의 한 현상인 ‘원도심 쇠퇴’라는 직격탄을 피해가지 못했다. 도시가 확장되고 중심이 신도시로 옮겨가면서 배다리 마을 또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기억에서 멀어졌다. 그러던 이 마을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마을 중간을 관통하는 산업도로 공사 때문이었다. 인천시가 국책사업으로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었던 경제자유구역 조성사업 중 남쪽의 송도신도시와 북쪽의 청라신도시를 오가는 가장 빠른 길을 내려다 이곳 배다리 마을 주택가 한 복판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동네가 하루아침에 절단이 났고, 그렇게 파헤쳐진 마을의 모습은 폐허 그 자체였다. 오로지 속도와 효율, 이익만을 생각한 결과, 마을 하나쯤 없어져도 괜찮다는 생각이 그런 폐허를 만들었다.
이 도로가 지나가게 되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될 주민들이 먼저 나서서 반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던 지역의 시민문화예술단체와 활동가들이 동참했다. 특히 일부 문화예술단체와 공간들은 아예 이곳으로 둥지를 옮겨왔다. 그러던 중 이 일대를 전면 철거하려는 대규모 개발 계획이 수립되어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다.
주민들과 활동가들은 반대 싸움을 하면서 더불어 ‘배다리 역사문화마을 만들기’ 사업도 함께 했다. 지나온 삶의 가치와 정신을 오늘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접목시키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오래되어 방치된 건물을 부수지 않고 매입하거나 임대하여 옛 흔적과 사연을 잘 살려 매력 있게 변신시키는 개보수 작업과 더불어 이를 문화와 공동체 공간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후 지은 건물 다락방의 오래된 벽돌벽 위에 새 벽돌을 쌓아 천정을 높인 후 시집 전시실로 꾸며 매달 시낭송회 등을 개최해 온 아벨전시관, 막걸리를 만들던 옛 양조장 건물을 임대, 개보수하여 문화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스페이스 빔, 옛 조흥상회 건물을 되살린 배다리 생활문화공간 ‘달이네’와 독립서점 ‘나비날다’, 이 외에도 카페 ‘싸리재’, 잇다 스페이스, 20세기약방 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더불어 마을과 도시의 대안을 고민하고 논의하고 실험하는 활동들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예술가 거주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해 배다리 마을과 원도심 일대의 역사 문화 가치를 재조명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배다리 도시학교’를 통해 지역의 도시 현안과 이슈에 대한 문제의식과 혁신 사례를 공유하고 가능성을 타진했다. 하나의 가게를 여러 주인들이 요일별로 번갈아 사용하며 서로의 관심사와 재주, 수익을 나누는 ‘요일가게’는 공유경제의 작지만 모범적인 사례다.
무엇보다도 공사를 중단시키고 주민들의 품으로 온전히 돌려받기 위한 관점에서 산업도로 부지의 생태 숲 복원, 텃밭 가꾸기, 여름생태캠프 개최, 마을공동체를 위한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행사, 아이들을 위한 모험놀이터 조성 등은 이곳을 매연과 소음을 발생시키며 주민 피해만 끼치는 도로가 아닌. 생명과 생태, 공동체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싸움과 활동의 결과, 도로부지는 주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지하로 지나가게 되었고, 지상 부지는 주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꾸밀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개발 계획은 무산되어 이곳 주민들이 원하는 기반시설 개선과 편의시설 확충 등의 사업을 벌여 이제 배다리는 큰 위기를 넘겼다. 이렇듯 배다리는 위기를 넘기고 노력해온 보람을 느끼나 싶었는데, 현재는 또 다른 위기와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인천시 동구가 배다리를 관광지로 꾸미기 위해 구역을 나누고, 테마거리를 만들고, 조형물을 이곳저곳에 세우려는 계획을 주민들과의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세운 후 밀어붙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안적인 마을과 도시 만들기를 위해 배다리 마을의 주민과 활동가들은 지혜를 모으고 있다.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별명을 가진 곳이 있다. 1970~1980년대 추억의 풍경이 보고 싶다면 이곳을 추천한다. 인천 강화도의 교동도이다. 강화도의 교동도? 그렇다. 이곳은 섬 안에 있는 섬이다. 강화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15분을 가면 교동도 월선포 선착장이다. 섬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 교동도의 들녘은 가을이면 황금벌판으로 장관을 이룬다. 교동도는 섬이지만 주민들이 쌀 맛있다고 자랑하는 넓은 들판이 있다. 대부분의 주민은 농사를 짓고 고기잡이 하는 분이 더 적다. 바다를 막아 만든 인공저수지가 섬 양쪽에 있다. 간척으로 얻은 땅에 주민은 적으니 가구당 경작 면적도 전국에서 손꼽히게 넓은 편이다.
지난 2014년 교동대교가 연결돼 이제는 육지이지만 다리가 개통되기 전까지 이곳은 사람들이 잘 찾아가지 못하는 지역이었다. 망원경 없이도 북한의 연백평야를 볼 수 있을 만큼 북한과 가까워서 출입도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그 탓에 오랜 세월동안 진짜 섬처럼 외부와 단절을 겪었고, 옛 모습을 오랫동안 간직한 지역이 됐다.
조선시대의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로 유명했다. 이곳을 다녀간 왕족을 손으로 꼽자면 양손가락을 다 써야할 정도다. 광해군, 연산군을 비롯해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도 이곳에 유배했었고, 선조의 첫째 서자인 임해군과 인조의 동생인 능창대군 이곳에 머물렀다. 또 인조의 다섯째 아들인 숭선군과 철종의 사촌 익평군까지 시대별로 유명인들의 유배지였다.
그런데 교동도에는 역사의 흔적보다도 대룡시장 골목이 더 유명하다. 마치 1960년대 영화세트장을 꾸려놓은 것처럼 시장에 들어선 순간 과거가 펼쳐진다. 대룡시장은 월선포 선착장에서 가깝다. 큰길을 따라서 약 5킬로미터 쯤 가면 된다. 한국전쟁 때 황해도 연백군에 살던 주민들이 교동으로 잠시 피난 나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해 살았다. 고향을 바로 앞에 두고도 찾아가지 못하는 마음을 달래며, 살아생전 돌아갈 날을 꿈꾸며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다 도시로 나가도 연세 드신 분들은 이곳을 지키는 이유는 바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교동도 북단 율두산에 있는 망배단은 이런 실향민들이 명절 때 모여 차례를 지내는 곳이다. 그래서 교동도는 실향민의 섬이라고도 불렸다. 고향의 연백시장을 그리워한 실향민들은 그곳을 그대로 재현해 300m 정도의 골목에 대룡시장을 꾸렸다. 시장은 10분이면 다 둘러볼 정도로 짧고 성인 남자 둘이 나란이 가려면 어깨를 겹쳐야 하는 좁은 골목이이다. 하지만 이발소나 미장원, 분식점과 통닭집, 신발가게에 약방, 시계점, 전파사까지 있을 건 다 있다.
차가 다니기 힘든 골목에 키 낮은 가게가 있고 손 글씨로 쓰인 촌스런 이름의 간판이 얹어져 있다. 선팅이 벗겨진 유리문에 몇 번 덧칠된 가게 이름이 이 시장의 분위기를 대변한다. 보통 생각하는 시골의 전통시장하고도 분위기가 다르다. 약국이 아닌 약방, 고무신과 장화를 파는 신발가게, 낡은 이발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추억의 골목. 이 배경을 그냥 두기 아쉽다면 시장 한쪽 ‘교동사진관’에 마련된 옛 교복과 고무신을 차려 입고 추억의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시장통 담벼락의 벽화나 옛 포스터, 표어들이 훌륭하게 사진 구석을 장식해줄 것이다.
돼지네 식품, 붉은노을 호프 치킨, 와글와글 식당, 중앙신발, 민욱이네 담배 잡화 등 익숙한 듯 어색한 간판이 가득한 골목. 한국전쟁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은 집 두어 채 있던 벌판에 직접 시장을 만들었다. 산에서 직접 나무를 해다가 움막집을 짓고 그곳에서 떡을 팔고 국수를 팔았다. 물이 귀한 시절이라 이발관에서는 손님 머리 감길 물을 위해 물통 지고 산을 넘어 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전쟁이 끝나고, 장사로 돈을 번 사람들이 건물을 올리고 비로소 시장다운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초가지붕 대신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던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당시에 나라에서 지급받은 목재로 지은 건물들이 몇십 년 세월 동안 그저 그 모습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룡시장 골목에는 초가지붕 위에 또 슬레이트를 올린 건물도 몇 채 있다. 먹고살기 바쁘니 초가지붕 걷어낼 틈도 없었던 모양이다.
조용하던 이곳이 ‘빈티지’ 열풍에 한 번, ‘레트로’ 열풍에 또 한 번 유명세를 타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핫’한 듯하다. 이곳을 다니러 온 사람들에게는 영화 세트장을 보는 것 같겠지만 시장 상인과 주민들에게는 이곳이 삶의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을 찍거나 구경할 때도 시끄럽지 않도록, 여행자의 예의를 지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