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이 척박하던 시절, 먹고사는 것이 우선이었던 시절에도 서민들에게 숨통 트이는 시간을 제공하며 해방구가 되어주었던 통로가 있었다. 빛바래고 낡은 포스터가 붙어 있고 손 그림으로 그려진 그림간판이 걸리던 극장에서 서민들은 꿈을 꾸거나 쉼을 얻을 수 있었다. 수없이 많았던 향토극장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이 자리 잡은 지도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오래된 극장에서 누렸던 호사인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 추억 속 필름영화의 감성은 두고두고 가슴 속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광주극장은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 46번길에 있는 영화관이다. 광주에 향토극장으로는 지금은 사라진 무등극장과 두 개정도의 극장이 더 있었으나 이제는 오롯이 광주극장 하나가 남아있다. 광주극장은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1935년 개관하여 오늘까지 8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1933년 법인이 설립되고 부터로 본다면 올해 84주년이다. 지금은 구도심이 되어버렸지만 많은 한복집과 보석상들이 자리 잡았던 충장로 골목이 과거에는 중심지이자 번화가였다. 광주극장은 바로 그 충장로에 자리잡고 있다.
광주극장은 1968년 한차례의 큰 화재로 원래 건물이 소실되었지만 복원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다. 전소되기 전엔 좌석이 1000석인 극장이었다. 연극, 공연, 권투경기 등 영화상영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것들을 볼 수 있는 문화공연장이었던 셈이다.
디지털 영화가 보편화되기 전인 2000년대 초반까지 극장에서의 영화 상영이란 필름상영이었다. 20분 분량의 35미리 필름 6권이 필름 캔에 담겨 전국에서 상영하는 극장 상영관으로 옮겨졌고 각 상영관마다 영사실로 보내져 영사기사의 익숙한 솜씨에 따라 편집되었다. 광주극장에서는 지금도 필름 영사기를 보관하고 있으며 일 년에 3~4번 정도는 필름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20년 이상 극장에서 일하셨던 영사기사 두 분이 디지털과 필름 영사기를 돌리며 극장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낡은 극장 건물의 외관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영화간판학교’라고 적힌 그림간판이다. 손 간판을 꾸준히 작업해온 마지막 간판쟁이 박태규 선생의 뒤를 이은 간판학교 출신들의 그림이다. 시민 간판학교는 4년 전부터 해오고 있으며 각자가 광주극장에서 봤던 영화 중에서 좋아하거나 의미 있는 영화를 주제로 작업해오고 있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니 내부의 목조장식, 로비에 전시된 옛 영사기를 통해 세월의 흔적이 엿보인다. 로비를 지면 갓 내린 커피와 음료를 판매하는 곳이 있다. 상영시간에 맞춰 은은한 종소리가 울린다. 상영관에 입장
하라는 멋스런 안내방송인 셈이다. 전체 좌석 수는 856석, 좌석 예매 후 지정좌석제에서 영화를 보는 것에 익숙한 이들에겐 오히려 낯선 풍경일 수 있을 만큼 상영관 내부엔 여유 좌석이 넘쳐난다. 광주극장은 1.2층 어디서든 자유석에서 관람이 가능하다.
광주극장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개봉작을 상영했고 관람객이 제법 많은 극장이었으나 멀티플렉스 전용 극장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며 자생을 위한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정체성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2002년에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술영화관 사업에 지원을 하고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광주극장이 선정되었으나 초반에는 오히려 개봉작을 상영할 때보다 운영이 힘들었다. 지금처럼 예술영화에 대한 인식이나 미디어 노출이 높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려웠던 그때 광주극장은 후원회원을 모집한다. 광주극장의 운영이 어려움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해주었고 광주에 살지 않더라도 광주극장에 와본 경험이 있거나 광주극장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분들의 후원금으로 어려운 시기를 잘 버텨낼 수 있었다.
광주극장이 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들의 애정과 더불어 자본에 잠식당하지 않고 고유한 색과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또 다른 비결이 무엇일까 궁금하던 차에 광주극장에서 만난 극장 관계자의 말 속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요즘은 동네에서 솔직히 빵집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데 제가 여기서 일을 해서가 아니고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4대째 가업으로 이어 오고 있는데 이걸로 돈벌이를 하려는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지켜야한다는 그런 신념이나 철학 같은 게 있는 거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올곧은 철학과 신념이 광주극장에도 전해오고 있다. 광주극장은 단순하게 영화를 상영하는 상영관 그 이상으로 광주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행사를 주도해온 광주 문화예술의 살아있는 전설이며, 영화를 사랑하는 마니아들이 모여 영화이야기를 나누는 사랑방이다. 광주의 문화를 이어가면서 긴 호흡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광주극장이 오래오래 유지되길 바라며 100주년에도 영사필름이 돌아가는 광주극장을 방문해보길 희망한다.
인천 유일의 실버 영화관인 미림극장은 동인천역에서 배다리로 향하는 거리에 있다. 영화 상영이 막 끝난 듯, 건물 앞으로 관객들 몇 몇이 나오기 시작했다. 중절모의 잘 차려입은 할아버지 무리들부터, 젊은 시절 이곳에서 같이 영화를 봤던 추억이 있는 듯한 노년 커플들까지.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의 얼굴은 밝거나, 추억에 잠기거나, 아쉬움 가득한 제각기의 표정들이다.
미림극장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957년이다. 천막극장으로 시작한 영화관에서는 무성영화가 상영되었다. 근처에는 현대 극장, 오성극장, 문화극장이 있어 이 미림극장과 함께 동인천 일대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았다. 하지만 지역이 점차 구도심이 되어감에 따라 상권도 이동하고, 차츰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갔다. 이제는 미림극장만이 유일하게 남은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2004년 ‘투 가이즈’를 마지막으로 영화관은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지려했다.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이 생겨남에 따라 작은 영화관이 차츰 문을 닫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수순처럼 보였다. 그렇게 미림극장도 완전히 사라질 뻔 했지만, 아직 사람들에게 이 극장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2013년 이 공간을 살려보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여러 후원을 받아 10월에 추억으로 사라질 뻔했던 극장이 재개관을 하게 된다. 리모델링 지원을 받아, 영화관은 제2의 시작을 시작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6개월도 안 돼서 다시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재개관 당시 힘을 실어주었던 인천시장이 바뀌면서 극장은 다시 폐관될 위기에 처해진 것이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영리 단체인 인천시 사회적기업 협의회에서 이곳을 맡아 관리하기로 했다. 그것을 발판으로 6년째 미림극장은 인천 유일의 실버극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280석에 단관이지만 하루에 150~200명의 어르신 관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2000원의 저렴한 가격으로 영화 한 편 보러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에겐 그것보다 좀 더 큰 의미가 있다. 극장의 변화와 지역사회와의 연결을 위해 이곳은 빈 공간을 이용해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다양성 독립 영화, 제3세계 영화 등을 상영한다. 단지 한 편의 영화를 오락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곳을 찾는 실버 관객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진행했던 베트남 영화 상영에서는 한 노년의 관객이 자신의 인생에서 베트남은 가본 적도 의미도 없는 나라였지만, 영화를 보는 시간은 자신에게 너무나도 의미가 있고 중요한 순간이었다는 후기를 남겼다 한다. 그런 어르신들의 피드백은 이곳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더 고무시켰다. 뿐만 아니라, 문화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어르신들 중 시집을 내신 분도 있고, 영화를 만든 참여자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그런 일들에 힘입어 2019년에는 일본 요코하마의 ‘잭앤베티’ 지역사회 극장과의 문하 교류도 진행하였다. 이들은 민간 영화 교류의 좋은 사례로써 미림극장에 또 다른 정체성을 부여하였다. 올해 3월에는 일본 국제교류기금에서 지원 기금을 받아 일본의 다른 지역영화관들과의 지역영화제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 미림극장의 노력은 추억과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오래된 극장이 아닌 혀전히 현재 여전히 진행 중인 극장을 만들기 위함이다. 정기후원제도를 통해서 그들은 자생의 노력을 하고 있고, 현재 후원자가 7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곳은 이제 젊은 예술가들이 먼저 찾는 곳이 되었다. 긴 역사를 자랑하는 극장과의 작업들이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 동시에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는 노년의 할리우드 키드들의 현재와 기억을 잇는 극장이기도 하다.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1가에 위치한 명동예술극장은 일제강점기 영화관이자 극장 “명치좌(明治座)”가 있던 곳이다. 1936년에 개관한 명치좌는 철근콘크리트조 건물로 지상 4층, 지하 1층의 꽤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관객은 총 1,178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식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현관 전면부에 화려한 장식이 돋보인다. 명치좌는 당시 명동에서 부민관, 황금좌 등과 함께 1930년대 일본인 위락시설의 역할을 담당했다. 주 고객이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일본 영화만을 상영했다.
해방 후에도 극장으로 사용되다가 1957년에 국립극장이 되었다.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공연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다가 장충동에 신축 극장이 생기면서 국립극장 신축비용 문제로 민간에 매각되었다. 그러나 시민들과 문화예술단체 등의 노력으로 2004년 문화체육관광부가 건물 매입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건물 외관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명동예술극장으로 재개관하였다.
"명치좌 구경갈 때 혼자만 가구
심부름 시킬 때면 엄벙땡 하구
오빠는 핑계쟁이
오빠는 안달쟁이
오빠는 트집쟁이야"
- 박향림, 「오빠는 풍각쟁이」
「오빠는 풍각쟁이」는 1938년 박향림이 부른 만요이다. 만요는 1930년대 사회상을 희극적이고 풍자적으로 표현한 노래를 말한다. 노래 가사에 등장하는 명치좌는 1936년에 개관한 일본인 극장을 의미한다. 당시 명치좌에서는 일본인들을 위해 일본 영화만을 상영했지만, 화려한 극장의 외관을 감상하기 위해 구경을 오는 사람들이 많았던 듯하다. 1930년대 명동 길목엔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미츠코시 백화점 경성지점 등이 있었다. 거리엔 사람들이 북적했고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은 활기가 넘쳤다. 명동 일대는 인기 거리로 새롭게 부상하며 경성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서 소비를 즐기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명동은 식민지 지배층으로서 권력과 특권을 누렸던 일본인들의 주 무대이기도 했다.
한편, 1930년대는 연극과 영화가 점차 발전을 이룩하던 시기였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사람들이 하나둘 귀국하면서 문예활동을 활발하게 펼쳤기 때문이다. 1919년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가 개봉한 이후로 『월하의 맹서』(1923), 『장화홍련전』(1925)이 차례로 개봉하면서 우리나라 영화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며 나운규뿐만 아니라 윤봉춘, 이구영 등 신인 감독이 등장하며 영화계가 점차 확장되었다. 게다가 1930년대는 발성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영화가 빠르게 발전해 나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명치좌를 포함하여 1930년대 운영되었던 수많은 극장의 존재는 당시 영화의 선풍적인 인기를 짐작하게 한다. 명치좌는 해방 후 국제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하고 시공관 등을 거쳐 현재의 명동예술극장이 되었다.
서울 시내에 남아 있는 극장 중 유일하게 1930년대의 외관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문화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명동예술극장은 오늘날까지도 명동 거리를 밝히며 시민들에게 문화 예술 공연을 향유할 수 있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
인천광역시 중구 경동에 위치한 애관극장은 한국인이 세운 국내 최초 공연장 협률사(協律社)를 이어받아 문을 연 극장이다. 협률사는 1895년 당대 인천의 부호 정치국(丁致國)이 개관하였으며, ‘협률’은 오늘날 공연을 의미한다. 인천의 협률사는 1902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세워진 협률사보다 7년이나 앞서 개관했다. 협률사는 1912년에 축항사, 1921년에 애관으로 명칭을 바꾸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남사당패나 굿중패가 각종 공연을 하던 곳이었는데, 유행에 따라 신파극, 신극, 무성영화, 유성영화 등도 관람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야말로 근대 인천 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960년 현재 모습으로 지어져 재개관했다.
1900년에 들어설 무렵 인천은 영사관, 극장, 은행, 호텔 등 근대 건축물들이 많이 들어설 정도로 근대 도시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이때 일본인들을 위한 극장인 인천좌가 인천광역시 송학동에 문을 열었다. 이후 1905년 인천광역시 중구 사동에 가부키좌가 들어서고, 1909년엔 인천광역시 중구 신생동에 표관을 비롯하여 여러 극장이 개관했다. 이처럼 인천광역시 중구 사동과 경동은 다양한 극단과 예술단체들이 활동하는 문화 거점 지역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협률사는 일제강점기에 변변찮은 공공시설도 없던 인천 시민들에게 문화 향유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게다가 광복, 한국전쟁,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극장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가운데 한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왔다.
협률사는 처음에 정치국의 창고를 개조하여 만들어졌다. 그래서 설비가 미비하고 공간도 협소했다. 일본인들이 세운 극장에 비해 매우 소박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국은 극장의 필요성을 전해 듣고 국내 최초의 극장을 세우긴 했지만 처음부터 전문적으로 경영하기엔 정보와 기술이 역부족했다. 협률사가 축항사, 애관으로 명칭이 바뀌는 동안 극장 운영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이후 소유자가 정치국에서 김윤복으로 넘어가면서 협률사는 낙후한 시설을 보수하기 위한 공사가 수차례 이어졌다. 그리고 애관은 다시 기신양행이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외국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으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애관은 영화관뿐만 아니라 정부시책이나 공공 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공간 또는 노동자 시위 공간, 지역 주민 자치 행사 공간 등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처럼 애관이 주민들을 위한 다목적 시설로 쓰일 수 있었던 것은 애관이 공공, 민간에서 애호하는 모임 장소였기 때문이다.
협소한 창고에서 시작된 국내 최초의 공연장은 여러 차례 이름과 소유자가 변경되면서 점차 인천 지역 유명 극장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최첨단 멀티플렉스 상영관의 등장과 다양한 온라인 동영상서비스가 개발되면서 애관극장의 존재는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이에 인천광역시 시민들과 문화예술인들이 애관극장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애관극장은 우리나라 문화예술공연의 근현대 역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광화문 새문안교회 부근에는 개화기에 설립된 사설극장 “원각사”가 있었다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원각사가 있던 자리에는 1902년부터 1906년까지 운영되었던 협률사라는 극장이 있었다. 협률사는 고종 재위 40주년 경축식을 거행하기 위해 로마식 극장을 본떠 지은 옥내 극장이다. 1906년에 협률사가 문을 닫자 건물은 관인구락부로 사용되다가 박정동, 이인직 등이 건물을 임대하여 1908년 7월에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극장을 다시 열었다. 원각사는 판소리와 민속무용 등 전통연희를 주로 공연하였는데, 1908년 11월 이인직의 『은세계』가 무대에 오르면서 신연극과 창극 등 새로운 형식의 공연이 시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1909년 11월 이후 실질적인 공연 활동이 중단되었고, 가끔씩 연설회장과 연희장으로 쓰이다가 1914년 봄에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
100여년 전 우리나라 극장 무대에 오른 신연극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1908년 7월 28일 황성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대한신문사장 이인직이 우리나라 연극을 개량하기 위해 원각사를 열고 소설 『은세계』를 신연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신연극을 공연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기존 전통연희 공연을 두 달 간 지속한다는 내용이 덧붙었다.
『은세계』는 원각사가 문을 연 후 약 3개월 간의 연습을 거쳐 그해 11월에 막을 올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연극 공연이었다. 『은세계』는 관객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를 기점으로 우리나라에 근대식 연극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은세계』는 갑오경장 뒤 개화의 물결이 일었던 시대가 반영된 소설이다. 부정부패한 관리에 항거하여 지배층의 문제를 폭로하고 봉건 체제를 거부하는 등 개화기적 면모가 잘 드러난다. 이인직은 이 작품을 발표할 당시 표지에 ‘신연극’이라고 표시하였는데, 처음부터 신연극 각본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은세계』는 새로운 시대를 새로운 양식으로 관객에게 선보인 최초의 공연이었다. 그러나 작품 자체에 친일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비판을 피하지는 못했다.
현재 원각사의 자취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지 오래되어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서울특별시 종로구 정동에는 서울미래유산 정동극장이 원각사의 맥을 잇고 있다. 정동극장은 우리나라 근대 극장 원각사를 복원하려는 의도로 1995년에 건립된 극장이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 탄생한 정동극장은 100년 전 원각사에서 공연한 『은세계』를 복원해 무대를 올리는 등 그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내고 있다. 원각사 설립 및 운영에 관여했던 인물들의 친일 행적 때문에 원각사의 가치와 의의를 찾는 데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원각사는 전통연희에서 더 나아가 근대 극장 문화 형성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