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 저동 을지로 골뱅이골목 너머로는 수많은 회사빌딩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하늘 위로 높게 뻗어있는 빌딩들을 하나씩 눈으로 더듬으며 나아가면 그 가운데에 자리 잡은 ‘종로양복점’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빌딩 6층에 자리 잡고 있는 종로양복점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선반과 그 안에 차곡하게 쌓여있는 옷감들, 그리고 그 곁에 줄지어 걸려있는 양복들이 방문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자신의 주인이 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양복들은 모두 종로양복점의 대표인 이경주 대표의 손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이다.
올해로 문을 연 지 103년이 된 수제 양복점인 종로양복점은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서울의 유명한 가게 중 하나다. 본래 보신각 앞에 자리하고 있었던 종로양복점은 1942년에 종로1가로 한번 자리를 옮겨갔다. 이후 광화문 신문로 대로변 2층으로 다시 자리를 옮기고 10년, 2010년 지역 재개발로 인해 또다시 자리를 옮기게 되어 지금 이 장소에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자리를 옮겼어도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는 전통과 우리가 만드는 수제 양복의 가치는 변함이 없다”며 이경주 대표는 자랑스레 웃었다. 이경주 대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3대째 이 양복점을 이어나가고 있다.
‘종로양복점’의 역사는 창업주이자 이 대표의 할아버지이신 이두용 씨가 1916년 보신각 옆에서 가게를 차리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양복 학교를 다니며 유학을 했던 할아버지는 뛰어난 솜씨로 당시 개성과 함흥에 분점을 내기까지 했다. 그의 아버지이자 종로양복점의 2대 대표인 이해주 씨는 지성무식(至誠無息)의 마음으로 손님을 향해 정성을 다했고, 그러한 아버지의 신념은 아들인 이 대표에게도 물려졌다. 대대로 이어져 온 이 기술과 정성이야말로 지금의 종로양복점을 있게 만들어준 가장 큰 공로자이자 자랑거리인 것이다.
백여 년이라는 오랜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진 만큼, 종로양복점에도 크고 작은 위기는 있었다. 1950년 6·25로 인해 1·4후퇴가 일어나던 날. 어린 소년이었던 이 대표는, 가족들과 공장 직원들 모두가 양복점에 있던 옷감들을 한가득 어깨에 짊어지고 도망치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피난을 가서 대구까지 내려간 그들은 그곳에서도 자그마한 공간을 찾아 그 자리에 종로양복점의 간판을 다시 내걸었다. 피난을 가서도 자신들의 삶인 가게를 쭉 이어간 것이다.
빠르게 변해가는 지역사회 속에서도 꿋꿋하게 그 이름을 지키며 가게를 이어가고 있는 종로양복점은 누구나 이름을 아는 연예인들이나 박정희·김영삼 전 대통령,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같은 유명 인사들을 포함한 다양한 손님들이 찾아든다. 103년간 이어온 가업은 곧 브랜드가 되어 입소문을 타고, 그 소문을 들은 전국 각지에서 손님들이 방문하고 있는 것이다. 저 멀리 부산과 제주는 물론 바다 건너에 있는 일본에서도 일감이 온다. 이경주 대표는 요즘은 기성복이 슬림화되어 있고 대중들에게 편하게 퍼져있는 만큼 자신에게 제대로 맞는 옷과 나만의 매력과 개성을 찾으려는 20, 30대의 젊은 층의 손님들도 많이 찾아온다고 이야기했다.
존경하는 스승이자 하나뿐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재단 가위를 잡게 된 그는 모든 것이 어려웠던 처음과 달리 일이 익숙해진 지금도 틈틈이 백화점 매장을 돌아보며 기성복 트렌드를 살피고 외국 양복잡지를 펼쳐본다. “오래된 가게라는 것만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느냐, 그 이상으로 특별하고 자랑스러운 가게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쌓아온 세월뿐만 아니라 앞을 향해 발전하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경주 대표의 얼굴에는 세대를 뛰어넘는 뜨거운 열정이 담겨있다.
그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한, 이 일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 한다. 부디 이 뜻깊은 전통과 역사, 그리고 깊은 신념이 살아 숨 쉬는 서울의 ‘종로양복점’이 오래 그 뜻을 이어 펼쳐나가길 바라본다.
미군기지 캠프 케이시는 1952년 이후 제7사단에 이어 지금까지 73여 년간 동두천시 전체 면적의 42%를 무상으로 사용하며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시의 주요 산업은 미군기지 장병들을 대상으로 한 2차 산업과 서비스업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양복점으로, 한때 30곳이 넘는 업체가 미군기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성업했다.
주 고객은 미군 장교와 부사관, 일반 병사, 지역 유지 등이었으며, 판매 방식은 맞춤 제작과 맞춤 재단이 전부였다. 업자들은 대부분 동대문에서 직접 국산 원단을 가져와 미군 제복은 물론 정장, 코트, 재킷 등을 만들었다.
상점 구조는 거리를 향한 앞쪽에 매장을 두고, 뒤쪽에는 바지와 상의 등을 재단 및 제작하는 공간을 따로 마련하는 형태였다. 대형 양복점에는 기술자가 20여 명, 소형 양복점에도 대여섯 명을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 양복점마다 영어 통역을 겸하는 영업 직원을 따로 두었다. 카드 결제나 외상 거래, 가격 흥정은 거의 없었으며, 간혹 작은 양복점에서는 가봉 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폭력을 행사하는 미군도 있어 헌병이 달려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양복점 매출이 늘어난 이유 중 하나는 본국과 비교해 가격이 현저히 저렴한 데다 품질까지 좋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미군은 한 번에 대여섯 벌씩 맞추는 것이 예사였고, 옷에 맞춰 구두도 대여섯 켤레는 기본으로 주문할 만큼 맞춤을 선호했다. 본국으로 돌아갈 때면 본인 것은 물론 가족들 것까지 함께 맞춰 가는 경우도 많았다. 일부 양복점에서는 백인 병사보다 흑인 병사 고객이 더 많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군 월급과 한국인 고용 용역비 등이 달러로 시중에 풀렸고, 미군들도 달러로 결제했으며 상인들 역시 달러로 직접 거래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달러가 시장에 넘치기 시작하자, 수사관과 경찰들이 불법 환전, 세금 회피, 달러 탈세, 외화 유출 등을 빌미로 암시장 단속을 수시로 벌였다. 단속이 있을 때마다 상점가는 바짝 긴장했다. 양복점도 예외는 아니어서, 수중에 있는 달러를 급히 감추기 바빴고, 들키면 일부를 빼앗기는 억울한 일도 있었다.
2025년 8월 말 기준 대한민국의 외화보유액은 약 4,162.9억 달러로 세계 10위권에 달하지만, 달러가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 동두천은 비공식 외화 창구 역할을 해 왔다. 수출 산업이 약세를 면치 못하던 외화 부족 시대에, 동두천은 지역을 넘어 국가 경제 순환에 기여하는 숨은 공로자였다. 하지만 공여지보상에 대한 정부의 약속은 여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다.
‘GQ Custom Tailor’와 ‘리갈양복점-미네르바’는 보산동의 역사를 간직한 오래된 맞춤 양복점이다. 한때 보산동에는 40~50곳의 양복점이 성업할 만큼 커스텀 양복으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미군들은 패션 카탈로그를 들고 와 원하는 스타일을 주문했고, 한국 장인의 뛰어난 손재주 덕분에 저렴하면서도 품질 좋은 양복을 맞출 수 있었다. 군복, 예복, 파티복, 사교용 의상 등 다양한 옷을 여러 벌씩 맞춰 가는 것은 흔한 풍경이었고, 미국에 있는 가족의 치수를 받아 여성 드레스를 주문하는 경우도 있었다.
30년 이상 동두천을 지키며 양복점 ‘보스턴 테일러’를 운영했다는 진영순씨, 남편은 재단기술자로 아내는 영업을 하는 시니어 맞벌이 부부의 삶을 살았다. 전라남도 출신인 박석례씨는 양복재단사로 영순씨네 가게에 방을 얻어 살고 있었는데 친정아버지의 눈에 들어 영순씨는 1977년 결혼식을 치르고 첫딸을 낳았다. 그러던 중 1983년 이웃집 아저씨의 주선으로 미군부대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특별한 기술이 없었기에 주로 캐셔를 했지만 근무를 하며 미군들을 상대하다 보니 영어도 많이 늘었고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영순씨가 착안한 점은 미군들은 전투복이라 부르는 얼룩무늬 제복외에도 드레스 블루(Dress Blue), 드레스 그린(Dress Green) 등 다양한 유니폼이 있다는 것과 대부분 맞춰서 입는다는 사실이었다.
30년 넘게 동두천을 지키며 양복점 ’보스턴 테일러‘를 운영해 온 진영순 씨. 남편은 재단 기술자로, 아내는 영업을 맡아 함께 가게를 꾸려온 시니어 맞벌이 부부다. 전라남도 출신의 박석례 씨는 양복 재단사로 일하며 영순 씨네 가게에 방을 얻어 살고 있었는데, 친정아버지의 눈에 들어 1977년 결혼식을 올리고 첫딸을 낳았다. 그러던 중 1983년, 이웃집 아저씨의 주선으로 미군부대에 취직하게 됐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 주로 캐셔 일을 했지만, 미군들을 상대하다 보니 영어 실력도 부쩍 늘었고 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생겼다. 그러면서 영순 씨가 눈여겨본 것이 있었다. 미군들은 전투복이라 부르는 얼룩무늬 제복 외에도 드레스 블루(Dress Blue), 드레스 그린(Dress Green) 등 다양한 유니폼이 있으며, 대부분 맞춤으로 입는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수공이 필요한 양복 값이 무척 비싸기 때문에, 한국에 파견되면 여러 벌씩 맞춰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남편과 상의 끝에, 남편은 월급쟁이 생활을 청산하고 전 주인이 쓰던 상호 ‘보스턴 테일러’를 그대로 이어받아 가게 문을 열었다. 보스턴 테일러는 많은 미군의 신뢰를 얻으며 수입도 제법 좋았다.
이곳 양복점들은 단순한 가게가 아니다. 40년 넘게 쌓아 온 기술과 특별한 노하우가 집약된 공간이다. 기성복이 흔치 않던 시절, 미국에서 유행하는 최신 디자인 잡지에서 나름의 감각을 찾아냈고, 이탈리아, 영국, 미국식 등 다양한 스타일의 옷을 수선하고 제작해 왔다. 지금도 가게 안에는 색색의 원단들이 가득하다.2)
한때 황금의 도시라 불리던 동두천 양복점의 쇠퇴는 여러 요인이 맞물린 결과다. 미군 재배치에 따른 평택 이전이 가장 큰 타격이었고, 국내 기성복 대중화, 온라인 쇼핑과 본국 직구로 바뀐 미군들의 소비 패턴 변화도 한몫했다. 이제 보산동에 남은 양복점은 손에 꼽을 정도로, 겨우 명맥만 이어 가고 있다.
1) 세계속의 경기도
2) 미래유물전 기획단 기록(2025.07)
군산은 광복과 함께 ‘수탈의 도시’라는 치욕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에는 삼팔선을 넘어온 월남민이 넘쳐났고, 곳곳에 하꼬방(판잣집)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식량과 의복을 배급받아 겨우 연명하던 그해 10월, 미군정까지 시작되었다. 군산에 들어온 미군은 일본군이 사용하던 군산비행장을 접수했고, 이에 따라 ‘미국인 문화’가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미군 담요를 물들여 옷을 만들어 입었고, 청년들은 미군 작업복을 염색해서 입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다. 양담배, 통조림, 커피, 비누, 휴지 등 미제 물건을 숨겨놓고 파는 암상인도 하나둘 등장했다.
당시 거리는 미군과 월남민까지 가세해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뤘다. 평화동에 자리 잡은 미국인 시장은 1950년 6·25전쟁 전후로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군정이 실시되던 해방 직후부터 생성됐다는 게 정설이다. 구 ‘닭 전(가축시장)’ 부근에 암상인이 하나둘 모여들며 점차 ‘야매시장(미국인 시장)’으로 확장된 것이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 1월(1·4후퇴 때) 미 수송함(LST)을 타고 군산항에 발을 내디딘 피난민은 5만여 명에 달했다. 그중 절반가량이 군산에 정착하면서 곳곳에 수용소와 피난민촌이 조성되었다. 이들이 새로운 터전을 일구면서 시장에는 빈대떡 전문 선술집이 등장했고, 추운 겨울에도 이 시린 냉면을 파는 냉면집도 문을 열었다.
전쟁으로 노숙자와 실업자가 넘쳐나면서 한국은 본격적인 ‘원조경제 시대’로 돌입했다. 당시 미국에서 구호품으로 들어온 밀가루 포대에는 성조기를 상징하는 별 4개와 두 사람이 굳게 악수하는 그림, 그리고 ‘미국 국민이 기증한 것. 팔거나 바꾸지 말 것’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 그림은 우정과 신뢰를 상징했고, 시중에서 ‘악수표 밀가루’로 불렸다.
미국에서 잉여농산물 원조가 시작되면서 ‘미제는 똥도 약 된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미군 야전 재킷이나 털점퍼를 염색해서 입는 것을 최고의 사치로 여길 만큼 가난했다. 농촌 사람들은 쌀과 보리를 주고 구호물자 옷을 사 입었다. 이에 염색 전문 세탁소가 동네마다 생겨났고, 평화동 미국인 시장 역시 점포 수도 대폭 증가하며 규모가 확장되었다.
미국인 시장에는 ‘○○테라(tailor)’, ‘○○양복점’ 등 맞춤 양복 전문점이 들어섰다. 작업복과 지퍼를 수선하는 가게도 있었고, 가게를 얻지 못한 피난민들은 좌판을 벌여놓고 부대에서 흘러나온 생활용품을 팔았다. 공설운동장과 중앙초등학교에 보충대(논산훈련소 전신)가 주둔하고 있어 더욱 활기를 띠었다. 한국군 부대에서는 값싼 군수품도 쏟아져 나왔다. 상점에 쌓인 상품은 군복이 주종을 이뤘다. 대부분 미 공군비행장에서 비공식 경로로 흘러나온 물건이었다. 조달 경로는 미군이나 한국군 병사가 직접 가져오는 경우부터, 기지촌 여성을 통한 보따리장수, 미 공군비행장 매점에 근무하는 한국인 종업원, 심지어 트럭을 이용해 군수품을 빼돌리는 전문 업자까지 매우 다양했다.
북에서 삼팔선을 넘어 내려온 이들을 흔히 ‘삼팔따라지’라 불렀으나, 그들이 모두 가난한 난민은 아니었다. 귀한 전축을 틀어놓고 행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양복점이 있는가 하면, 세련된 패션 감각으로 점포를 꾸민 이들도 있었다. 지퍼 수리점부터 고급 양복점까지 공존했던 이곳에는 ‘군산의 명동’이라 불리던 영동 패션 거리와는 또 다른 멋과 낭만이 흐르고 있었다.
1950~60년대 미국인 시장은 ‘닭 전(가축시장)’을 끼고 있었다. 부근에는 미국인 냄새가 짙게 풍기는 빈 깡통과 종이 박스, 헌 잡지, 필름 등을 취급하는 도소매점도 두세 곳 있었다. 미군이 사용하던 침구류뿐만 아니라 씨-레이션(전투식량), 워커(군화), 에어매트리스, 항고(반찬통·밥그릇), 비누, 군용 벨트, 수통까지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군용 파카(스키파카)와 오버코트, 외피 등을 취급하는 점포도 인기였다. 그중 경비병들이 입던 야전 파카는 완벽한 방수 기능 덕분에 방한복으로 인기가 최고였다. 겨울철에는 빙벽 등반 마니아들 사이에서 등산 파카로 둔갑해 팔리기도 했다. 다만 단속에 걸리면 압수당했기에 주로 염색을 해서 입었으며, 점포 주인에게 간곡히 부탁해야 겨우 구할 수 있을 정도로 귀했다.
누드 사진이 담긴 ‘플레이보이’ 잡지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파는 가게가 있는가 하면, 미군 비행장에서 흘러나온 필름을 파는 ‘기공사’도 있었다. 카메라와 시계 수리를 겸한 도매상점이었던 기공사는 2~3평 남짓한 작은 규모였으나 거래액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 주인 역시 강한 북한 사투리를 쓰는 피난민이었다.
미국인 시장은 충남 서천, 대천, 전북 익산, 김제 등지에서 오는 단골도 많았다. 수시로 단속을 나온 미군 헌병이 가게 앞에서 서성이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는데, 불법으로 유통된 군수품을 진열했다가 이들에게 압수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단속 바람이 불 때마다 상인들은 암호를 주고받으며 물건을 치우곤 하였다.
군산 지역 부모들은 명절 때면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을 미국인 시장으로 데려가 새 교복을 맞춰주었다. 1960년대 중반 초등학교 졸업하고 미국인 시장 가게에서 기술을 배웠다는 형주안(70대) 씨는 “옛날에는 설이나 추석 보름 전부터 밤새워가며 일을 했는데, 심부름하면서도 신이 났었다.”라고 회고했다.
한때 군복 전문 점포 100여 개가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던 ‘밀리터리 패션가’ 미국인 시장. 교복 자율화 이전인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학생들이 몰려와 단체 주문을 하며 흥정하던 재미가 쏠쏠했던 곳이다. 그러나 화려했던 전성기를 뒤로하고, 지금은 밀리터리 스타일의 기성복 매장 20여 개만이 남아 그 시절의 명맥을 묵묵히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