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공양왕이 마셨다는 샘물, 대궐고개 약수터

    이 약수터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에 위치해 있다. 군부대와 작은 농장들을 제외하고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야산 한 가운데에 대궐고개라는 지명이 붙어 있다는 사실이 심상찮다. 이 장소는 고양시에서 조성한 ‘배다리 누리길’이라는 이름의 둘레길이 지나지 않았다면 찾는 사람도 별로 없을 외진 곳이다. 하지만 이곳으로부터 500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의 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생기게 된다. 한반도 땅에는 걷는 길마다 역사가 묻어나는 곳이 수없이 많지만, 이 외진 산속의 좁은 오솔길도 그중 하나라는 사실이 새삼 감탄스럽다.


    대궐고개 약수터 이미지
    대궐고개 약수터

     

    후에 조선 태조가 되는 이성계는 공민왕의 적자 우왕과 창왕을 죽인 뒤, 고려 왕실 직계에 포함되면서 자신에게도 가까운 왕족을 왕으로 내세우고 싶었다. 그래서 왕이 된 것이 이성계와 먼 사돈뻘이었던 왕족, 바로 공양왕이다. 직접 모은 재산도 상당해서 편안한 말년을 기다리던 사람이 갑자기 왕까지 되었으니 기분이 좋았을까? 시절이 하 수상하던 그때 왕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공양왕이 모를 리 없다. 죄 하나 짓지 않고도 언제 처형당할지 모르는 사형수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 노국공주와 신돈이 등장하는 극적 스토리를 가진 공민왕에 비해 공양왕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어 그저 무력하게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스러진 왕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실제 사료를 보면 나름대로 이성계에게 저항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아마 그것이 그의 죽음을 앞당겼는지도 모르지만 결국 왕이 된지 3년도 못 되어 처형당한다.

    실록에서는 그가 삼척으로 유배되고 거기서 처형되었다고 하나, 민간에서 전승되는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공양왕이 삼척에서 탈출하여 쫓기다가 결국 이곳 고양시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저 민담이라고 무시할 수만 없는 것이, 실제로 공양왕릉은 삼척과 고양 두 곳에 있는데 조선 왕조는 고양시의 능을 공인했기 때문이다. 

    민간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공양왕은 이성계의 병사들에게 쫓기다 최영 장군의 묘지가 있는 고봉현(현재의 고양시)까지 오게 되는데, 산속에서 헤매다 작은 절을 발견하고 몸을 의탁하고자 했다. 그러나 스님들은 쫓아오는 병사들이 분명 이 절을 놓치지 않을 것을 알고, 공양왕에게 근처의 골짜기에 숨어 있으면 밥을 날라 드리겠다고 했다. 그래서 공양왕은 골짜기를 찾아가려 했으나 날은 어둡고 초행길이라 그날 밤은 어느 고개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이 뒤는 자세하지 않다. 골짜기에 숨은 공양왕에게 몇 차례 밥을 가져다줬던 스님들이 어느 날 시신이 된 공양왕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 근방 백성들이 왕이 머물렀던 고개를 대궐고개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공양왕이 피신해 있는 동안 꼭 한 곳의 샘물만을 마셨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바로 그곳이 훗날 대궐고개 약수터가 되었다. 

    기구한 운명으로 객사한 어느 왕의 사연도 안타깝고, 그를 불쌍히 여겨 왕의 발길이 닿았던 곳마다 대궐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백성들의 마음도 짠하다. 스님들이 왕에게 밥을 주었던 골짜기는 식사골로 불렸는데, 그곳의 이름은 ‘식사동’이 되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있다.

     

    대궐고개 이미지
    대궐고개


    현재 대궐고개 약수터는 식수 부적합 판정을 받아 가끔 이용이 금지되기도 한다. 또 바로 근처에 국도 대체 우회도로가 건설되고 있는데 2016년에는 이 우회도로가 역사적 사연이 많은 산책로를 파괴한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집단민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 유물 증거 없이 사연만이 존재하는 작은 오솔길과 샘물이 현대 문명의 개발 바람을 얼마나 오래 버텨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아직은 공양왕과 백성들의 모습을 충분히 그려볼 수 있을 만큼 숲은 울창하고 골은 깊으니 한번쯤 산책이 필요할 때 지나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