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화동 무너진 성곽터 위의 망루같은 혜성교회

    1945년 해방 이후, 공산계열이 북한의 실질적 정권을 장악하면서 미국이나 서구사회와의 연결채널로 인식되던 기독교는 탄압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했는데, 혜성교회 역시 유민들이 혜화동의 무너진 성곽 구석에 예배를 위해 모여 들면서 세워진 교회다. 1948년 8월 10일 혜화동 6번지 조상만 성도의 가정에서 설립예배를 드렸으며, 1949년 3월, 예배당을 건축했다. 그때로부터 2019년 현재까지 70년이 넘게 원형을 간직한 채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원형을 지킬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데, 교회를 세운 터가 하필이면 일제 강점기에 헐린 서울 성곽터였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짚어보자면 서울 성곽길 북대문 구간, 즉 혜화문에서 시작해 와룡공원을 걸친 구간에 해당하는 이 성곽은 문화재이기 때문에 교회 부지를 임의로 확장하거나 증축할 수 없다. 교회관계자 입장에서는 교인의 수용과 주차, 편의 시설을 충분히 확보 할 수 없어 불편할 수 있겠으나, 덕분에 70년이란 긴 세월동안 원형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혜성교회 전경 이미지
    혜성교회 전경

    필자가 1984년 가을, 초등학생 때 처음 이 교회에 발을 들인 이후 40여 년 동안 공사는 딱 세 번 있었다. 교회 마당에 아스팔트가 깔리고, 교회첨탑 교체 공사를 한번 했으며, 2000년대 중반 내부 리모델링을 한 게 전부다. 서울 사대문 안에 이런 뷰와 분위기를 가진 교회가 과연 있기나 할까? 오른편으로는 혜화동, 명륜동이 왼편으로는 성북동, 삼선동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개발제한구역으로 시야를 막는 고층건물도 없거니와 교회 위치가 언덕 제일 꼭대기라 전망이 훤하게 보인다. 교육관 2층 예배실에서 그날 나온 따끈한 주보로 비행기를 접어 날려보라. 바람만 잘 타면 혜화여고(지금은 혜화초등학교)까지 문제없이 날아갈 것이다. 올라오려면 숨이 좀 많이 차오르지만, 어차피 성곽길 북대문 코스에 있으니 성곽길 산책으로 생각하고 오면 된다. 날짜와 시간이 잘 맞으면 교회 1층 카페에서 라바짜 커피를 2000원에 즐길 수도 있다.


    혜성교회는 영화에도 몇 번 나왔다. 백재호 감독의 「그들이 죽었다(2015)」에서 주인공 집 옥상장면마다 배경으로 걸리는 파란 첨탑의 교회,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2008)」에서 연쇄살인마 하정우가 다녔던 교회가 이곳이다. 영화에 나온 예수상은 미술소품이지만, 교회 외부와 목회실은 혜성교회에서 촬영했다.


    혜성교회로 가는 길은 크게 혜화동로타리, 삼선교, 성북동에서 가는 3가지이다. 필자가 주로 다녔던 길은 혜화동로타리에서 올라가는 큰사발 루트인데, 중학교 3학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새벽송 돌고난 뒤, 로터피 편의점에서 우육탕큰사발에 물을 받아 나온 다음, 3분 뒤, 혜화슈퍼를 끼고 돌 즈음 면발을 먹기 시작해서, 그렇게 사발면의 온기로 몸을 녹이며 올라오다가 마지막 오르막 전에 국물을 마저 마신 뒤, 다 먹은 용기는 교회 휴지통에 버렸으니까, 대략 15분이 소요된다. 

    필자가 강추하는 루트는, 지하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혜화문에서 시작하는 루트로, 서울 성곽길 북대문 코스와 일치한다. 성벽을 따라 지어진 서울시공관 담을 따라 돌아가면, 한편으로는 성북동 일대가 펼쳐지고, 5분정도 더 걸어가면, 공관과 마찬가지로 무너진 성벽 위로 세워진 교회가 모습을 나타낸다. 세 번째 루트인 성북동에서 오는 길 역시 북대문코스의 연장인데,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좁은 길을 따라 가다보면, 경신고등학교 후문이 나오고, 쭈욱 직진하면 3분도 안되는 거리에 위치한다. 세 길 모두 소요되는 시간은 엇비슷하다. 


    혜성교회 이미지
    혜성교회


    교회에 대해 특이한 몇가지 사항을 적어보자면, 교육관 옥상에 풋살경기장을 구비해 놓았고, 교회후문 주차장 입구 옆에는 아이들을 위한 트램블링이 설치되어 있어서 보호자만 있다면 언제든지 즐길 수 있다. 그리고 1층 카페 안에는 추억의 게임기도 있는데, 주일학교 예배 후, 성인예배를 드리는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주 이용객이다. 

    수년 전부터, 늘어난 교인과 민원, 주차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경신고등학교 안에 언더우드기념관을 건축 중이다. 평일에는 학교 강당, 체육관으로, 주말에는 집회장소로 사용될 예정으로 2020년에 완공된다. 현재 예배장소로 사용되는 교회는 2020년 이후 어떤 용도로 사용될지는 모르겠다. 교회가 결정할 일이지만, 70여년의 세월과 앞으로의 시간들이 연륜이 한결 깊어지길 바란다. 성벽과 함께. 

  • 성 이시돌 목장 안의 순례지, 제주 삼위일체 대성당

    제주도에 정말 아름답고 특별한 성당 몇 군데가 있는데 그 중 삼위일체대성당은 넓은 들판 속 독특한 외관으로 유명하다. 야외성당이라고 생각하면 왠지 낭만적이고 근사한 모습일 것 같지만 삼위일체대성당은 큰 강당으로 된 성전으로 벽돌과 성상들로만 장식된 소박한 곳이다. 이국적인 느낌이지만 잔잔한 묵상 음악이 흘러나오면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삼위일체대성당은 빡빡한 제주여행, 제주 일상의 바쁜 스케줄 속에서 마음을 비우고 조용하게 생각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이다.

    제주 삼위일체 성당 이미지
    제주 삼위일체 성당

    이곳은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에 위치한 천주교 기도순례지로 성 이시돌 농촌사업개발협회 맥그린치 신부님의 주도 아래 1991년 9월 이시돌 목장 경내에 야외 순례와 기도를 위한 은총의 동산을 조성하고 1991년 10월 28일 축성식을 거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시돌 목장 내에 묵주기도의 길과 십자가의 길과 수녀원, 야외성당과 삼위일체대성당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은총의 동산에 있는 동굴은 루드르의 성모발현을 재현하여 조성되었고 이 동굴 안에는 제단이 갖추어져 있다. 

    제주 삼위일체 성당 동상 이미지
    제주 삼위일체 성당 동상


    천주교 신자들이 즐겨찾는 이유로 산정호수를 한 바퀴 돌면서 묵주 15단을 바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고, 은총의 동산 세 봉우리 중 동쪽은 십자가의 길로 조성되어 있다. 많은 이들에게 유명한 성이시돌 목장과 성삼위일체대성당은 옆으로는 유명한 금악성당과 글라라성당이 있고 근처에 이시돌 순례길이 조성되어 있다.


    2017년 9월 개장한 이시돌 순례길은 제주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장소이다. 또 가까운 곳에 현대미술관, 저지예술인마을, 제주올레 13코스와 오름들이 있어 관광하기에 좋은 구역이다. 삼위일체 야외 대성당 쪽으로 가면 성경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 14처가 조각예술로 표현되어 있다. 


    예수의 사형 판결 →십자가를 짐 →첫번째로 넘어짐 →어머니를 만남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게 함 →베로니카가 예수의 얼굴을 닦아줌 →예수가 2번째로 넘어짐 → 예루살렘 여인들이 예수를 보고 눈물을 흘림 → 3번째로 넘어짐 → 겉옷을 벗기움 → 십자가에 못박힘 → 십자가에서 죽음 → 십자가에서 내려짐 → 무덤에 안장됨


    이 순서의 14처가 끝나는 곳부터 호수를 따라서 한 바퀴 돌면서 묵주기도 15단을 올릴 수 있게 되어 있고 맨 위에 승천하신 예수님이 계신다. 이 14개의 성처들을 방문하여 각 성처 앞에서 기도하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명상하는 의식은 초기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의 관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여행 중 미사에 참석하기도 하고, 또 이시돌 목장과 연계하여 산책코스로 지나치기도 한다. 소풍을 즐기기에도 좋은 곳이다. 이곳에 오면 늘 마음이 비워지고, 편안해지며 일상과 복잡한 현실을 벗어나 힐링할 수 있다. 특별한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도 여러 조형물과 삼위일체대성당을 거쳐 거닐다보면 인간의 삶과 한계를 초월하여 신과 신이 만드신 세계, 자연 속의 나를 깊이 묵상할 수 있게 된다. 

    제주 삼위일체 야외 대성당 이미지
    제주 삼위일체 야외 대성당

    성 이시돌 목장은 아일랜드 태생 콜롬반외방선교회 소속의 25세의 패트릭 맥그린치 신부님이 1954년 제주 한림공소에 부임하여 제주의 비참한 가난을 목격한 후 충격을 받아 이 버려지고 척박한 땅을 매입하여 황무지에 씨를 뿌린 역사로 유명하다. 그렇게 시작된 성 이시돌목장은 지금 양돈과 축산기술을 보급하는 등 신용협동조합과 직물사업을 하고 있으며 성 이시돌 의원을 건립하는 등 사회공헌 사업도 벌이고 있다. 이곳은 1950년대 한 아일랜드 신부에 의해 제주라는 가난한 섬이 그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고된 여정을 걸어왔다는 것을 증언해주는 산 역사현장이다. 삼뫼소 오름이라는 멋진 풍경과 성이시돌요양원, 피정센터, 수녀원 은총의 동산, 삼위일체대성당과 전시기념관, 무인카페 등 잘 가꾸어 놓은 이 공간을 걷는 것은 제주에서의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 6.25 때 건립된 육군 제1훈련소의 강병대교회

    여행의 설렘과 추억만 가득할 것 같은 제주도에도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함께 해온 흔적들이 꽤나 많이 남아있다. 그래서 그 흔적들을 지나고 거닐 때마다 제주도민들의 마음 한 켠이 아릿해져 오는데 그 중에서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위치한 남제주 강병대교회는 전쟁의 포성 속에서 1952년 5월에 준공된 교회이다. 육군 제1훈련소 명칭이 강병대(强兵臺)로 개정되면서 교회 이름도 강병대교회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1965년 공군 30단 308부대로 편입되고 기지교회로 발족하였고 이후 공군부대와 해병부대 장병들과 가족들의 예배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1977년 지붕과 천장 탑판을 교체하였으며 1995년 교회로 사용하기 위해 내부를 전면적으로 보수하였다. 

     

    강병대교회

    역사적 가치, 특히 군사적 또는 국방기념물로서의 가치가 높은 강병대교회는 한국 전쟁 관련 건축물 중 원형이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로 2002년 5월 31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고 지금까지 예배를 드리고 있다. 강병대교회는 국방부에서 관리 운영하는 교회로 우리나라 최남단에 있는 군종교회이자 가장 오래된 군종교회라고 한다. 전쟁터로 나가야만 하는 육군 장병들이 고된 훈련과 참혹한 현실 속에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기 위해 머물렀던 장소로 군인들의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강병대교회의 외관은 제주도의 현무암을 사용해 벽체를 쌓은 것이 특징이고 목조 트러스트 위에 함석지붕을 씌워 건축기술자의 참여도 없이 설계되고 건축되었다고 한다. 전쟁 당시의 상황에 급박하게 지어져서일까, 매우 제주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길고 긴 건물은 독특한 느낌을 주고, 매우 단순해보이지만 강하고 단단하게 느껴져서 군대 특유의 강인함을 물씬 자아낸다. 지금은 교회 내에 역사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 당시의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현재의 제주를 있게 한 근대문화유산인 강병대교회는 사실 일반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교회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이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에서 어린 훈련병들이 고되게 훈련받으며 종교적 위로를 받고 강하게 무장되었던 곳이라고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또 피난 온 신자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렸던 기도의 터전이기도 했다. 전쟁의 공포를 종교의 힘으로 이겨내며 이런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역사의 순간들을 이겨냈던 사람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제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강병대교회를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다. 더불어 제주가 얼마나 많은 슬픔이 쌓여있는 섬인지, 처절했던 생존의 섬이자 평범한 민초들이 겪어야했던 역사적 아픔이 많았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강병대교회 표지판 이미지
    강병대교회 표지판

    강병대교회는 종교기관일 뿐 아니라 당장의 삶이 막막하고 캄캄했던 모슬포 지역의 교육기관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1966년부터 ‘강병대교회 부설 신우고등공민학교’로 신입생을 받기 시작하여 1981년 폐교될 때까지 13회에 걸쳐 2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지금은 교육기관은 아니지만 인근 공군, 해방대 부대 장병과 가족들이 예배를 드리는 공간으로 남아있다. 

     

    역사를 알고 보면 푸른 잔디 위에 현무암 건물, 하얀 창과 파란 지붕의 강병대교회는 수십 년 동안이나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관람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커다랗게 교회 안내문에 적혀있다. 침략자들에 의해 시달린 제주근대문화유산이라는 역사와 아름다운 교회와 자연의 풍경이 대비되어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지만 이 교회가 오래오래 보존되어 제주에 사는 후대들에게 제주를 지킨 이들의 역사가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 백제 때 창건된 오산 보적사

    오산시 세마역 근처에는 조그마하지만 특별한 절 보적사가 있다. 

    보적사는 작은 절로, 창건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백제시대에 독산성이 만들어질 때 같이 창건되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보적사가 아니었으나 1920년 현재의 대웅전을 지으면서 이름을 보적사로 바꾸었다. 보적사는 1978년 세마사로 이름을 변경했다가 1996년 다시 보적사로 바뀌었다. 현재에도 비공식적으로 세마사로 불리는 경우가 있다. 

    보적사의 이름에 대한 전설이 있다. 먹을 것이 없었던 노부부가 유일한 쌀을 부처님께 공양하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니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보적사라고 한다.

     

    세마역을 따라 오다 보면 독산성 삼림욕장이라고 적혀있는 큰 산문을 만날 수 있다. 거대한 산문을 지나 푸르른 자연을 느끼며 1.4km를 올라가면 동문을 마주한다. 뭔가 비밀스러운 입구 같은 동문을 지나면 아름다운 꽃들이 우리를 반겨 다른 세상에 들어온 느낌을 받으며 조그마한 절 보적사를 만날 수 있다. 

    보적사는 아담하지만 여유로움과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는 절이다. 보적사 석탑 위에 올려져 있는 아기자기한 불상들을 관찰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경기도 오산 보적사 이미지
    경기도 오산 보적사


    개인적으로 보적사에서 가장 기분 좋은 곳은 대웅전 앞 미륵존불(천진포대화상)과 천진동자불복손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양한 절을 가봤지만 보적사의 불상만큼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불상을 보지 못 했다.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웃음을 짓고 있는 천진포대화상의 귀여운 배를 만지며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나도 천진포대화상의 배를 만지며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소원을 빌었다. 

    천진포대화상의 바로 옆에 있는 천진동자불복손도 인자한 웃음을 지으면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천진동사불복손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불상의 손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어떤 소원이든 이뤄줄 것 같은 불상의 행복한 표정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소원을 빌었다.

    불상 외에도 절의 이곳저곳을 보면서 절의 고요한 분위기를 물씬 즐겼다. 규모가 크지 않아 특별하게 볼 것은 없었지만 풍경소리, 아름다운 전망, 인자한 미소를 지닌 불상들이 주는 편안한 분위기가 좋은 곳이다.

     

    보적사 미륵존불상 이미지
    보적사 미륵존불상

    보적사에서는 특별한 손님인 고양이들도 구경할 수 있다. 보적사에 밥을 얻어 먹으러 오는 2-3마리의 고양이는 친절하지는 않지만 귀엽고 사랑스럽다. 운이 좋다면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도 볼 수 있으며, 물을 마시는 고양이의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

    보적사를 충분히 즐기고 나오면 탁 트인 전망을 볼 수 있다. 높은 건물들이 즐비한 동탄 일대의 전망을 모두 볼 수 있다. 같이 간 사람들과 함께 유명한 건물을 찾아보고, 도란도란 옛 오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날씨가 좋은 날은 아주 멀리까지 시야가 확보된다. 하늘이 뻥 뚫린 전망 좋은 곳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 모든 근심걱정이 씻겨나가는 느낌이다. 추운 겨울이 지나 봄이 온다면 다시 방문하고 싶은 곳이다.

  • 영해만세운동의 본거지, 영덕 송천예배당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억울함과 울분을 안고서 싸웠던 시절, 우리나라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운동과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나라를 위해 싸우던 과거는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깊게 새겨져 있으며 앞으로도 쭉 이어질 이야기이다. 지금부터 소개할 장소는 1919년 당시 가장 크고 넓은 규모의 만세 봉기가 일어났던 뜻깊은 땅이며, 그 역사적인 중심지중 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영해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나와 송천교를 나아가면 저 멀리서부터 높게 솟아있는 철탑위의 십자가가 선연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동해안의 주요 교통로인 옛 7번 국도변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시골교회. 그곳이 바로 ‘영덕 송천예배당’이 있는 송천교회이다.


    송천예배당(사진출처:문화재청)

    1953년 미국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송천예배당은 요즘 시대에는 보기 드문 목조 건물의 형태를 하고 있다. 동서로 긴 사각형의 평면과 정면 출입구 위에는 박공지붕의 포치(Porch)가 솟아있고, 지붕 아래에는 목구조를 응용한 십자가 형태가 방문객이 찾는 송천예배당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2016년에 들어서서 외벽에 목판을 덧붙이는 등 새로 수리를 하여 옛 모습과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오랜 건물이다.

     

    마당에 들어서면 예배당보다도 더 오래되었을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소나무 몇 그루와 함께 예배당의 출입구 바로 앞에 서 있는 종탑이 방문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높은 위치에 매달려 어두운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종과 바로 그 아래에 사람의 손이 닿을 정도로 낮은 위치에 남아있는 송천예배당의 옛 종은 붉게 녹이 슬어있어 그간 이곳에 머무르며 일 해온 세월과 연륜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영덕 송천예배당은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아픔 속에서 태어난 공동체였다. 해안가를 따라서 길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이어지고 있어 깨끗하고 맑은 물이 흐르는 동네 이름을 따 교회의 이름을 송천이라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당시 3월 1일에 서울에서 일어나게 되었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내려왔던 낙평교회의 전도사인 김세영 조사는 구세군낙평영문 권태영 담임사관에게 거사를 일으킬 것을 제안하지만, 일본 경찰의 검속으로 인하여 김세영 조사는 체포되고 만다. 대신 짐을 지게 된 권태원 사관이 도움을 청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송천교회의 정규하 장로였다.

     

    그는 권태원 사관을 만난 후에 바로 교회로 돌아가 우리가 행할 봉기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90여명이라는 많은 수의 교인들이 다 같이 만세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그는 이웃 마을인 창수면의 사람들까지 봉기에 합류시킨다. 정규하 장로는 의거 장소와 일시를 정하는 데도 누구보다 주도적으로 임하였고, 3월 18일날 마침내 영해, 영덕 일대의 많은 기독교인들과 3000여명의 군중들이 함께 성내장터에 모여서 우렁찬 만세함성을 외친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이 땅의 자랑으로 유명한 ‘영해만세운동’이었다.

     

    송천예배당(사진출처:문화재청)


    “작은 시골교회라고 함부로 얕볼 수 없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현재 송천교회를 담임하는 김영원 목사의 설명이다. 그 역사와 자긍심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아 영덕 송천예배당은 2006년 12월 4일에 근대문화재인 등록문화재 제288호로 지정된다. 문화재로서 송천예배당의 관리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고, 그에 대한 책임감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복음을 위해, 나라를 위해 애쓴 선배들의 유산이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자산”이라면서 이를 알리고 귀감으로 삼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마당에 우뚝 자리 잡은 낡은 종탑, 안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아늑한 예배당의 분위기는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차분하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해준다. 100주년을 맞아 건립한 기념비와 예배당 책장을 가득 채운 각종 서적들은 영해만세운동을 비롯해 지난 백 십여 년간 이어져온 송천교회의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채로 줄곧 이어져 오고 있다. 이 땅에 얽힌 오랜 역사와 더불어 누구보다 뜻깊은 이야기를 지닌 영덕 송천예배당, 그 곳에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꼭 한번 찾아가보자.

  • 제당 자리에 세운 천주교 성당, 아산 공세리 성당

    가을이 막바지로 달려가며 오색 단풍이 우거진 아산공세리 성당을 다녀왔다. 공세리성당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명소를 소개하는 여행관련 매체나 영화, 드라마 등에서 단골처럼 등장하는 곳이다. 공세리성당은 천주교 역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중심지이다. 신유박해와 병인박해 때 이 지역에서 순교한 많은 순교자들을 모시고 있어 천주교 신자에게는 성지로 알려져 있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아름드리 보호수에게 둘러싸인 성당의 경치 덕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공세리 성당 측면 이미지
    공세리 성당 측면


    제당 위에 세운 성당, 보호수가 된 당산나무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 144호로 지정되어 있는 공세리성당은 1890년 설립했다.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건물이 아니고 동네 민가를 교회로 사용했다고 한다. 1922년에야 지금과 같은 고딕양식의 근대식 성당의 본당이 완성되었다. 본당의 설계는 에밀리오 드비즈 초대 신부가 직접 했다고 전해온다. 여러 그루의 보호수가 있는 공세리성당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의 나무는 베네딕트 관과 본당 사이에 있는 느티나무이다. 약 380년이 되었다는 이 느티나무는 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만 해도 마을의 당산나무였다고 한다. 사실 성당 본당이 있던 자리도 과거 ‘침해당’이라는 제당이 있던 자리였다. 이렇게 배의 무사항해를 빌었던 전통 민간신앙의 흔적 위에 천주교가 녹아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다. 

     

    충남 아산에 있는 공세리는 평택과 아산을 연결하는 아산만 방조제의 연결 지점이다. 조선시대에는 세금을 걷어들이는 아산 공세곶고지가 있었다고 한다. 공세곶고지는 조선시대에 곡식을 운반하기 전에 쌓아 놓았던 창고로 후에 공진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 충청도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은 모두 공세곶고지에 모였는데 40군데가 넘는 고을의 쌀이 모였다. 충청도 서해의 관문이었던 이 곳에 모인 쌀들을 조운선에 실어 한양으로 운반했다고 한다.

     

    학부모들이 일군 공감마을 

    공세리성당을 나와서 마을입구로 들어섰다. 아담한 시골마을이지만 어딘지 공세리성당 만큼이나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다. 이곳은 공감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정형화되지 않은 벽화들과 여유로운 벤치들이 놓여서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이 마을을 가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단체가 인주학부모협의회이다. 시골마을에서도 자녀들을 잘 키울 수 있다는 마음으로 모인 이들은, 그 첫시작으로 ‘꿈꾸는 팽나무 도서관’을 만들었고, 이후 평생학습관, 북카페 등이 뒤따라 문을 열었다. 


    결국 공세리 공감마을은 아산시의 평생학습마을로 지정되면서 학생들과 마을주민들이 크고 작은 문화적 혜택을 받게 된다. 2013년 충청남도 공공디자인 공모사업을 통해서 마을 안의 낡은 시설물을 개선하고 담장에 아름다운 벽화를 그려서 공세리성당을 찾는 관광객들이 들러가는 명소가 되었다. 

    공세리 성당 전경 이미지
    공세리 성당 전경

     

    이명래 고약의 발원지 

    마을에서 만난 어르신은 옛날에 피부에 종기가 나면 바르곤 했던 만병통치약인 ‘이명래 고약’도 이 마을에서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전해주셨다. ‘이명래 고약’은 조선말에 만들어져 1980년대까지 매우 유명한 약품이었다. 지금도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은 추억어린 명약으로 ‘이명래 고약’을 기억하고 계신다. 가톨릭 신자인 이명래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인 프랑스 선교사 에밀 드비즈 신부에게 지식을 전수 받아 민간에서 전해오는 비법과 결합해 만들어냈는데 그 제조 비법은 오늘날에도 비밀로 지켜지고 있다고 한다. 검은색의 고약을 잘라서 불로 녹인 후 종기가 난 부위에 붙이는데, 그러고 나면 종기 안의 고름이 녹아 나오고, 종기가 치료되어 값이 비싸지 않으면서도 효과가 우수한 만병통치약으로 백성들에게 알려져왔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생산이 멈춘 상태라고 한다. 


    공세리성당과 공감마을을 돌아보고 나오며 공세리성당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름다운 충남 아산으로 여행을 떠날 일이 있다면 역사와 자연의 조화가 아름답고 신앙의 뜻깊은 흔적을 가진 공세리 성당에 들려보길 권한다. 

  • 100년을 지켜온 한옥성당, 행주성당

    행주성당은 1899년 약현 본당 관할의 행주공소로 시작해, 1909년 본당으로 승격된 뒤 지금까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성당이다. 행주공소 시절부터 생각하면 장장 120년 동안 한 곳에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행주성당의 특별함은 단순히 성당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점뿐만이 아니다.

    성당 마당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기와와 처마선! 한옥 성당이라는 점이 행주성당의 특별한 점이다. 일반적인 한옥과 달리 넓은 정면이 아닌 좁은 측면에 입구가 위치한 행주성당은 대한성공회 강화성당과 함께 대표적인 한식 목조 건축물로 평가받는 건축물이다.

     

    행주성당은 1910년 소박한 한옥 형태로 지어진 뒤 한 번의 이전과 한 번의 증축 과정을 거쳤다. 1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전쟁과 홍수 등 수난을 겪으며 낡고 무너져 시멘트벽과 현대식 기와로 변형되기도 했었다.

    그러다 2010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5호로 지정된 뒤, 2013년부터 정부와 고양시의 지원으로 복원사업이 추진되었고, 문화재 전문가들의 고증과 자문을 거쳐 마침내 2015년 복원이 완료되었다.

     

    행주성당 이미지
    행주성당


    성당 건물이 거의 완벽하게 복원될 수 있었던 건, 1928년 성당을 이전할 때 기존의 기초 부자재들을 대부분 재활용하였고, 1949년 증축하며 기록한 자료가 잘 보존된 덕분이었다. 특히 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목조에 최초 건립 부분과 증축 부분이 잘 남아 있다는 점이, 행주성당을 대한성공회 강화성당과 함께 대표적인 한식 목조 건축물로 평가받게 한 이유이다.

    신발을 벗고 성당 내부에 들어가면 신도 100명 정도가 다닥다닥 붙어 앉을 수 있는 작은 예배공간이 있는데, 낮은 천장에 드러난 나무 서까래들이 너무 자로 잰 듯 곧지 않기 때문인지 더욱 친근하고 아늑한 느낌이 든다.

     

    한옥성당 옆에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현대식 붉은 벽돌 건물인 ‘100주년 기념관 성모의 집’이 우뚝 서 있다. 겨우 3층짜리 건물이지만 묘하게 웅장하게 느껴지는 건, 아담한 한옥 성당과 비교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3층 난간에 설치된 예수님 동상이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성모의 집은 2009년 기공식을 가진 뒤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무려 3년 만에 완공된 건물로서, 소규모 피정의 집(교황청이나 교구장의 인가를 받아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의 단체)과 교구사제의 숙소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미사가 없는 날에도 문을 열어두고 있어서 신자와 관광객들이 1층에 있는 쉼터에서 편히 쉬어갈 수 있다. 쉼터 벽에 그려진 커피잔을 들고 웃는 예수님 그림이 유머러스하고 귀여운 느낌이다.

    건물 안에는 쉼터 외에도 행주성당의 100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물전시실이 있어서 언제든 둘러볼 수가 있고, 로비에 무료로 비치해둔 책자 「행주성당 100년 이야기」는 신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행주성당 벽화 이미지
    행주성당 벽화


    한옥성당과 100주년 기념관 사이에는 조금 특별한 공간이 마련돼 있는데, 2016년 행주성당이 특별 전대사 순례지로 선정된 것을 기념해 만든 성모당이다. 성모당의 모양은 대구대교구 성모당을 모델로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 동굴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다만 인근 주민이 아닐 경우 행주성당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3호선 화정역이나 경의중앙선 능곡역에서 버스를 타고 행주성당 근처에서 내린 뒤 5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자동차로 갈 땐 성당까지 이르는 길이 좁고 가파른 골목길이라 복잡하게 느껴지고 주차공간이 마땅치 않을 때도 많아서, 되도록 미사가 없는 한가한 시간대를 골라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어리바리 헤매며, 잘못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성당에 도착해 차를 주차하고 내리면, 주차장 담벼락에 그려진 옛 행주성당 그림을 보게 된다.

    자칫 보지 못하고 지나치기 쉬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듯 그곳에 있는 벽화는, 처음 지어질 무렵의 성당과 초가지붕의 사제관 모습으로, 100년 넘은 성당의 역사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예스러운 한옥 성당과 현대적인 성모의 집을 차례로 둘러본 뒤, 유럽의 성모동굴을 본 따 만든 성모당 앞 벤치에 앉아 성당 마당에 서 있는 철제 종탑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독특하면서도 묘하게 조화로운 분위기 속에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 새 성당이지만 오랜 역사를 간직한 천호동 성당

    천호역 부근 로데오 골목을 지나 천호시장 앞 2차선의 좁은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언덕 위로 천호동 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 좁은 길은 서울의 전철역 부근에서 흔치 않은 2차선인데다가 횡단보도도 잘 없고, 그래서 자유롭게 길을 건너다니는 보행자들과 비보호 신호들로 가득해 초보운전자에게는 끝판왕 연습코스이기도 하다. 개발순위에서 밀려, 오래된 재래시장과 함께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이곳은 대부분의 상가들도 오래된 곳이다. 

    이곳에 숨겨진 듯한, 그러나 꽤 새 건물인 천호동 성당이 있다. 이 거리 안 점점 늘어가는 신축건물들처럼 새로 생긴 성당일까? 싶었지만, 이 천호동 성당은 70여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오래된 성당이다.

     

    천호동 성당 이미지
    천호동 성당


    천주교 천호동 성당 제9지구장 본당은 1958년 ‘신당동 성당’을 모본당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1985년 길동, 1986년 고덕동, 이후로도 명일동, 풍납동 성당으로 분리되었고, 주변 지역 수녀원까지 포함하여 중심이 되는 성당이다. 성모마리아와 1841년 순교한 김성우 안토니우스 성인이 수호성인으로 모셔진 성당이다. 늘 성당의 수호성인은 외국의 성인들이었는데 한국의 성인을 보게 되니 우선은 신선하고 다음엔 더 가깝게 느껴진다. 박해 후 순교한 우리나라 신부들이 1984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는데, 그 이후 성당이 설립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성전은 2009년 교황청에서 로마 성모 대성전과 특별한 영적유대로 결합된 성모 순례지 성당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동안 각종 불우이웃돕기행사, 철쭉문화행사, 로즈메리힐 축제, 장터개장 등 신도들과 주민들이 함께할 수 있는 행사들을 꾸준히 개최해오고 있다. 노인한글교실과 어린이백일장 등도 이어지고 있다. 나이테가 새겨지듯 주민들에게 오래고 친숙한 공간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중이다. 

     

    눈이 와서 길이 참 미끄럽던 어느 날에도, 날이 찌는 듯이 덥던 날에도, 힘겹게 성당으로 가는 언덕길을 오르던 할머니들이 넘어질까, 어지럽진 않을까 가슴 졸이며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2006년 노후된 성전 천장이 붕괴되는 사고가 일어나고, 2009년 기공식을 하며 성전이 새로 지어져서 2011년 지금 성전의 모습이 되었다. 그 언덕길은 이제 계단이 깔려서 이제 날씨가 궂어도, 할머니들이 힘들지 않을까 마음 졸이며 볼 일은 없어 다행이다. 세련되고 웅장하게 성전이 새로 지어져서 좋은 점도 있지만, 오롯이 세월이 느껴지는 오래되고 낡은 성당의 느낌이 너무 사라져버려서 잘 가게 되지 않는다고 하는 주민들도 있다.

     

    천호동성당 로즈메리힐에서 본 마을전경 이미지
    천호동성당 로즈메리힐에서 본 마을전경


    동네 시장길에 숨은 듯이 올라앉아있는 모양새인 성당이지만, 계단을 올라서면 탁 트인 넓은 공간을 만날 수 있다. 반듯한 성전과 그 뒤에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는 정원인 로즈메리힐이 눈에 들어온다. 정신없던 거리에서 벗어난 평온한 느낌이 든다. 아름다운 로즈메리힐과 이어지는 성모동산도 찾아오는 이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선사한다. 

    로즈메리힐은 천호성당에서 부지를 제공하고 서울시가 조성한 인증된 주민 쉼터다. 다른 성당에서는 볼 수 없는 장미, 산철쭉, 산딸나무 등의 다양한 식물들이 있어 동네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서 찾는 발길도 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이곳을 잘 모른다. 성당은 대표적인 종교적 공간이기에, 비신자에게는 폐쇄적으로 느껴질 수 있고, 내가 갈 수 있다고 인식되지 못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개축 후 최근에는 이곳에서 진행되는 결혼식에 참여하면서 천호동 성당을 방문하게 되는 사람들도 많다. 300여석 규모의 연회석과 넓은 주차장이 있어 결혼식이 많이 열린다. 또 유치원도 운영되고 있어 성전 주변은 원생들의 흔적 또한 만연하다. 알고보면 종교적 공간은 본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이다. 비단 성당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절도, 교회도 그러했다.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때를 기억하면 알 수 있듯 어려웠던 역경의 세월을 함께 보내고, 미래를 위한 투쟁을 도모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역할이 있었다. 그렇게 함께 역사를 버텨내고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하겠다. 천호동 성당의 행보도 이와 같은 결이라 여겨진다.

     

    “할망구들이 가서 동전 몇 개 내는 게 다여. 돈도 없어~”라고 손을 훠이훠이 젓던 할머니신자들이 오래된 성전과 참 닮았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유난히 잊혀지질 않는다. 여전히 예전의 낡은 성당의 모습을 추억하는 사람들도 있고, 새로운 성당으로 기억할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오래된 세월만큼 쌓여가는 다양한 모습으로 천호동 성당은 신도들과 주민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동네를 굽어보고 있다.

  • 주민들이 직접 지은 한옥 성당, 강화 온수리 성당

    성당입구 이미지
    성당입구


    강화 온수리 마을의 골목을 지나 얕은 언덕을 올라서면 한옥으로 지어진 이색적인 성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110주년을 맞이한 강화 온수리 성당이다. 한옥 옆으로는 탁 트인 넓은 잔디가 깔려있고 외부 십자가가 눈에 띤다. 곡선미가 살아있는 연꽃 모양의 십자가다. 연꽃이 물을 정화시키듯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정화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성당은 언덕 정수리를 비켜서 언덕 자락에 터를 잡은 한국 전통의 배산임수이다. 정족산의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 아늑한 이곳은 동남쪽으로 초지들판과 서해바다의 시원함이 더해진 경관이다. 이 아름다운 풍경들과 함께 기품이 있는 온수리 성당의 정식 명칭은 성 안드레성당. 


    강화에는 1900년에 선교본부인 영국교회의 지원 하에 성공회강화성당과 함께 이곳 온수리 성당이 세워졌다. 온수리 성당은 온수리 주민들이 땅을 기증하고, 특별헌금을 내는 등 민초들의 힘으로 지어져 의의가 크다. 아담하고 단아한 한옥의 양식이 잘 보존된 교회건축양식으로 역사적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7월 14일에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15호로 지정받았고, 이후 2003년 11월 18일에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52호로 지정되었다. 

     

    그에 걸맞게 성당 앞에 서면 소박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먼저 ‘솟을지붕’ 형식의 성당 정문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팔작지붕 홑처마로 정면이 3칸, 측면이 9칸, 합이 27칸인 일자형의 한옥이다. 오른편 아래쪽에는 성당과 조화가 잘 어우러진 사제관이 눈에 들어온다. 선교를 담당한 성직자들이 머물던 거처를 당시의 한옥 양식으로 지었는데, 소박하고 순수한 토착미를 잘 보존한 곳이라는 의의가 있어 2002년 2월 4일에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41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교회의 입구에 서 있는 정문의 지붕은 우진각으로 처리되었다. 그 모습이 조선시대 성곽의 망루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종은 지붕 아래 매달아 사방으로 그 소리가 퍼져 나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종은 일제시대 때 징발 당해 사라졌고, 지금의 종은 한국전쟁 이후에 새로 들인 것이다. 

     

    연꽃 십자가가 보이는 측면 이미지
    연꽃 십자가가 보이는 측면


    이 한옥 성당의 아름다움은 내부로 들어가면 더 돋보인다. 바실리카 양식으로 되어있는 성당 내부는 로마시대 법정 궁정 등에서 사용되었던 평면 직사각형의 기본형을 바탕으로 건축되었다. 12사도들을 상징하는 12개 기둥으로 제단과 회중석이 구분되었다. 제단과 회중석이 가까운 점이 다른 성당들과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측랑(교회의 측면 복도)이 없고 회중석 가운데 복도는 남녀 좌석을 구분했으며, 채광을 위해 높은 곳에설치하는 유리창 같은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은 생략되었다. 

    제단은 전체면적의 1/6만을 차지한다. 이를 통해 이곳이 민초가 새운 성당이고 회중 중심의 교회 건물 분위기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화읍성당의 제단이 전체 면적의 반절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 비교했을 때 사뭇 다른 구조라는 것이 느껴진다. 

    천장에는 흰 회벽에 들보와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서 한옥의 시원하고도 안정감 있는 느낌을 살렸다. 가운데 가로 들보들과 기둥 모서리마다 여러 가지 덩굴풀이 꼬여 뻩어나가는 당초문을 새긴 나무 조각판들을 부착하였다. 토착적인 멋과 세심함이 깃들어 있음이 엿보인다.

    또한 회중석 위의 중인방 들보는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굽은 나무이 모습을 살려서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제단은 동양전통의 3단으로 만들었다. 

     

    강화읍성당은 백두산 소나무로 경복궁을 지었다는 도목수들이 만들었는데, 그에 반해 이곳 온수리 성당은 이곳 교인의 집 뒷산에서 베어온 소나무를 이곳 목수들이 다듬었다. 기와 역시 이곳의 흙으로 구웠다고 한다. 이곳 지역 사람들이 올려 지은 집이라는 점에서 이 성당은 의미가 깊은, 소박하고 순수한 토착미를 품은 공간이다.

  • 사찰이 천주교 성당으로 변한 경기도 광주시 천진암

    천진암 터  이미지
    천진암 터
    경기 천진암터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천진암은 조선시대에 지은 암자의 이름으로, 지금은 인근의 계곡과 산기슭 일대도 천진암이라 부르고 있다. 도로명 주소도 천진암로(天眞庵路)로 명명되었다. 


    사찰이 천주교 성당으로 변한 경기도 광주시 천진암
    사찰이 천주교 성당으로 변한 경기도 광주시 천진암

    사찰이름이 지명이 되고 천주교 성지로 변해

    원래는 이곳에 천진암(天眞庵)이라는 절이 있었는데,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이 절에 숨어들었다. 스님은 스스럼없이 젊은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때 이곳에서 천주교 교리를 익혔던 주인공은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형제와 권철신, 권일신 형제, 그리고 이승훈, 김원성, 이벽 등이었다. 이 당시 이벽을 제외하고는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20대 안팎의 젊은이들이었다. 새로운 학문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도 강하게 끓어오르는 나이였다. 이들은 천진암에서 내어준 방에서 천주교 관련 강학과 기도수련을 하였다. 

    경기광주  강학회터
    경기광주 강학회터
    강학회터 이미지
    강학회터

    이벽은 20대의 청춘들에게 천주교의 원리를 강하게 전파하면서 모임을 이끌어 나갔다. 천주교에서는 7일을 기준으로 주일로 삼아 기도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정확히 날짜를 잘 몰라 나름대로 기도 날짜를 정했다. 일주일을 단위로 하되 한 달을 이레, 열나흘, 스무하루, 스무여드레로 나누었다. 그 날을 천주공경일로 전해서 예배를 드렸다. 당시의 상황이 변기영 신부가 지은 노랫말에 나온다.


    눈 속의 겨울 밤 촛불 아래 지새는데

    선학(仙鶴)의 봄바람에 넋이 타던 어진 이들

    빙천(氷泉)에 혼을 씻고 몸 꿇어 손 모으니

    기도소리 들리네 천진암에서

    찬미소리 울리네 천진암에서

    선비들이 모이네 천진암으로

     

    노랫말에 당시 젊은이들이 어떻게 천주교를 전파해 갔는지가 잘 드러난다. 이렇게 시작된 천진암은 천주교의 성지가 되어 수만명의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 지역을 이르는 땅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 성경에 대한 모든 것, 국제성서박물관

    기독교의 기록이자 교리, 성경

    모든 종교에는 종교적인 원칙을 담은 교리(敎理)가 있다. 기독교의 교리를 담은 것이 바로 성경(bible)이라고 할 수 있다. 바이블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책(biblia)에서 온 말이다. 성경은 계시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독교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성경을 흔히 한 권의 책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성경은 약 기원전 1000년 경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긴 기간동안 저자와 내용과 형식과 부비가 서로 다른 66권의 책 묶음이다. 66권의 묶음은 39권의 구약과 27권의 신약으로 나누어진다. 


    세계의 역사 그 중심에 있는 성경을 전시로, 국제성서박물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성경의 한 구절이다. 세상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없어지지 않고 있는 성경의 말씀을 의미하는 구절이다. 이처럼 성경은 세계 역사와 문화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에 중요한 원동력으로서 인류와 함께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이러한 문화유산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자 국제성서박물관이 1995년 4월 30일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20년에는 25주년을 기념하여 새롭게 공간을 조성하고 재개관하였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위치한 국제성서박물관의 소장품은 주안감리교회를 담임했던 고(故)한경수 감독이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44개국에서 수집한 성경을 기증한 것이다. 또한 미국의 성경 수집가인 고(故) 웨이크필트 박사가 기증한 유물과 성경도 있다. 이 모두를 합치면 약 350여 언어로 기록된 5천 권 이상의 성경과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상설전시는 중앙 로비에서 성경과 관련된 영상으로 시작한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번쯤을 들어봤을 천지창조, 노아의 방주, 모세의 십계명 등을 영상으로 설명한다. 1관은 ‘성경, 세계를 움직이다’이다. 처음 직접 손으로 기록한 두루마리 형식의 양피지나 파피루스에서 인쇄기로 인쇄된 성경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볼 수 있다. 또한 종교개혁으로 유명한 마틴루터의 번역 성경과 마틴루터의 방을 재현해두었다. 또한 책상에는 마틴루터의 95개의 논재가 적혀있는 종이를 비치해두었다. 


    2관에서는 종교개혁 이후 세계 곳곳으로 성경이 전해지며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전시하고 있다. 2019년 기준 성경은 3,384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고 한다. 국제성서박물관은 350여개의 언어로 된 성경을 보유중이다. 그 중 36개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을 전시하고 있다. 


    3관은 ‘한국 근대사를 열다’ 이다. 전시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과정을 근대 역사적 관점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마지막 4관은 성경마을이다. 성경의 배경이 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중동 지역 문화와 관련된 전시로 성경 속 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외에는 기증자인 고(故)한경수 감독 추모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상설 전시 이외에도 성경과 종교를 주제로 한 기획전시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다채로운 체험과 교육 프로그램 참여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