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일본인 조계지에 위치했던 대불호텔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알려져 있다. 1978년 철거되었다가 2018년 4월 고증을 거쳐 중구 생활사 전시관의 1관으로 복원되었다. 대불호텔은 개항기 국제항구였던 인천의 위상을 보여준다. 대불호텔에 대한 근대신문기사는 단편적인데 김창수의 주목할만한 연구(김창수,「인천 大佛호텔·中華樓의 변천사 자료연구」. 『인천학연구』13, 2010.)가 있어 그 연구를 바탕으로 근대기 대불호텔에 대해 알아본다.
대불호텔은 1888년경 일본인 해운업자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 ?~ 1898)가 건립하여 운영했다. 호리 히사타로는 나가사키 출신 무역상으로 제물포 개항 직후인 1883년에 아들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 1870~?)와 함께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주하여 호리상회를 열어 무역업과 해운업을 시작했다. 히사타로는 인천으로 이주한 직후 일본 거류지 제12호(현 중앙동 1가 18번지 일대) 및 제24호(현 중앙동 1가 22번지 일대)의 부지를 경매 임대 받은 후 업무용 건물과 주거용 가옥을 신축했다. 1884년 겨울 일본의 경축일인 천장절(天長節) 행사를 거류지 제12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의 집에서 거행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자산이 있고, 영사관 관리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호리일가는 인천으로 이주하면서 1898년 인천-블라디보스토크 항로, 1899년에는 인천-오사카 항로를 개설하여 동아시아의 주요 국제항행권을 장악하였고, 1900년에는 진남포와 평양을 연결하는 항로를 열고 1901년에는 원산항로를 개척하는 등 한국의 연안 항해권도 독점하였다. 호리 일가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때 회사의 배를 동원하여 군수물자와 사람들을 날라서 일본의 전쟁을 돕기도 했다.
『인천부사』에서는 대불호텔의 건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인천개항 당시, 즉 메이지 16년(1883) 4월, 부산에서 인천으로 함께 이주해온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과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 부자는 가업인 해운업을 하기 위해 함선 매입을 시작하고, 같은 해 말에는 일본거류지 제11호지(제12호지의 착오), 지금의 본정통 1-1번지에 건물 한 채를 건축하였다. 이어 내외인 숙박에 적당한 시설을 갖춘 여관이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메이지20년(1887)부터 이듬해에 걸쳐 벽돌조의 서양식 3층 가옥을 새로 지었다. 상호는 호리 히사타로의 풍모를 고려하여 대불호텔(大佛ホテル)이라는 상호를 붙였다.“ 1885년 한국에 온 미국선교사인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1885년 5월 조선에 부임한 영국 영사 칼스가 대불호텔에 묵었다. 그러나 이때 대불호텔은 3층이 아니라 2층이라 신축전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건물을 무슨 이유에선지 호리집안이 외국인 등을 위한 숙박소로 쓴 것이다.
경인선이 개통되기 전 인천과 서울은 우마차로 12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인천을 통해 한양으로 가야하는 외국인은 인천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고, 인천을 떠나 외국으로 가는 사람도 미리 인천에 와서 배편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하여 인천의 숙박업은 호황을 누렸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어 인천과 서울은 1시간 거리가 되면서 인천지역 숙박업은 쇠퇴하였다. 그러함에도 대불호텔은 1907년 무렵까지 영엽하다가 폐업한다. 1918년 뢰소정(賴紹晶)을 비롯한 40여 명의 중국인들이 대불호텔을 인수하여 일본인과 중국 상인들을 상대로 북경요리 전문점 ‘중화루(中華樓)’를 열었다. 중화루는 해방후 1970년 초까지 운영되다가 폐업을 하고 1978년 철거될 때가지 월세집으로 쓰였다.
대불호텔은 객실이 11개였고, 객실료는 상등실 2원 50전, 일반실 2원으로 다른 여관에 비해 높았다. 대불호텔은 서양식 건물에 고급 침구를 갖춘 객실, 피아노를 구비한 연회장이 있었고, 서양요리를 제공하였으며 영어를 사용하는 종업원이 서비스를 해서 일본식 여관과 구별되었다. 그러나 이 호텔을 이용한 외국인들은 서양요리가 형편없는 것, 비가 새는 것 등을 불평하였다. 새비지-랜도어(Savage-Landor)는 이 호텔의 요리에 대해 ‘일주일의 대부분을 대불호텔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는 로스비프 그리고 다음날은 무틴숍(mutinshops)이라는 이름의 정체 모를 고기 조각을 이따금 볼 수 있을 뿐이었으나, 불행하게도 너무 질겨서 셰필드(Sheffield)제(製)의 칼로도 거의 자를 수가 없었으며, 사람의 치아나 턱이 아무리 날카롭고 강할지라도 그 고기를 씹어 먹을 수가 없었다.‘고 불평하였다. ( A. H. 새비지-랜도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집문당, 1999)
프랑스인 프랑탱은 ‘그 호텔의 시설들은 겉보기엔 그럴싸하게 보였으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실로 비참할 정도로 초라했다. 한국의 다른 객관(客館)들보다는 훨씬 뛰어났지만, 호텔 지붕은 비가 줄줄 샐 정도였다. 숙박하는 손님은 우산이 있으면 그걸 펴서 비를 막았지만 불행히도 없을 경우에는 얼마 못 가서 빗물에 온 몸이 흠뻑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침대는 훌륭했으나, 요리에 대해서는 차마 여기에 기록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라고 하였다.(끌라르 보티에, 이뽈리트 프랑뗑,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 태학사, 2002)
대불호텔은 이 호텔에 묵은 외국인이나 조선인에 대해 일본영사관에 보고하기도 하였다. 1897년 러시아 장교가 묵은 것, 1900년 일본으로 망명했던 안경수가 다시 조선으로 귀국하여 대불호텔에 묵고 있던 것, 1901년 6월 4일 농상공부대신 민병석이 대불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서울로 되돌아 간 것 등을 일본영사관에 보고하였다. 대불호텔은 2018년 4월 기존 빈 터였던 곳에 고증을 거쳐 복원하였다. 복원된 대불호텔은 중국 생활사 전시관의 1관과 2관중 1관이다. 대불호텔터는 김홍섭 인천광역시 중구청장의 동생인 김홍빈씨가 소유하였는데 2011년 문화재청이 대불호텔 부지에 대한 보존조치 결정을 하자 대불호텔부지(386.8제곱미터)를 중구에 기증하였다.
인천 원도심 중의 한 곳인 동구에 경인전철을 끼고 있는 배다리 마을이 있다. ‘배다리’라는 이름은 예전에 이곳 마을 어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배와 배를 연결하여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녔다거나 배를 댈 수 있는 다리가 있어 붙여졌다. 인천 하면 자유공원과 차이나타운(청관)이 유명한데, 이곳이 일본과 청나라를 비롯한 외국 세력들의 침략과 침탈의 역사가 깃든 신중심지였다면, 배다리는 그곳에서 밀려나거나 쫓겨난 조선인들과, 주변부에 들어선 공장에 일자리를 찾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노동자들, 한국전쟁 이후 황해도 등지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뒤섞여 어려운 시절을 이겨온 고달픈 삶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나라의 위기와 삶의 힘겨움을 교육으로 극복하고 도와주기 위한 지식인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기도 하다.
광복을 맞이하며 시작된 헌책방은 한국전쟁 이후 거리를 형성하며 한 때 40여 개가 들어서 성업을 이룰 정도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배다리는 “인천 역사 문화의 모태”라고 말할 정도로 개항 이후 근대 종교와 교육, 산업, 노동, 교통, 상업의 시발지였고 중심지였다. 그러나 이곳도 곳곳에서 드러나는 도시 변화의 한 현상인 ‘원도심 쇠퇴’라는 직격탄을 피해가지 못했다. 도시가 확장되고 중심이 신도시로 옮겨가면서 배다리 마을 또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기억에서 멀어졌다. 그러던 이 마을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마을 중간을 관통하는 산업도로 공사 때문이었다. 인천시가 국책사업으로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었던 경제자유구역 조성사업 중 남쪽의 송도신도시와 북쪽의 청라신도시를 오가는 가장 빠른 길을 내려다 이곳 배다리 마을 주택가 한 복판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동네가 하루아침에 절단이 났고, 그렇게 파헤쳐진 마을의 모습은 폐허 그 자체였다. 오로지 속도와 효율, 이익만을 생각한 결과, 마을 하나쯤 없어져도 괜찮다는 생각이 그런 폐허를 만들었다.
이 도로가 지나가게 되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될 주민들이 먼저 나서서 반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던 지역의 시민문화예술단체와 활동가들이 동참했다. 특히 일부 문화예술단체와 공간들은 아예 이곳으로 둥지를 옮겨왔다. 그러던 중 이 일대를 전면 철거하려는 대규모 개발 계획이 수립되어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다.
주민들과 활동가들은 반대 싸움을 하면서 더불어 ‘배다리 역사문화마을 만들기’ 사업도 함께 했다. 지나온 삶의 가치와 정신을 오늘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접목시키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오래되어 방치된 건물을 부수지 않고 매입하거나 임대하여 옛 흔적과 사연을 잘 살려 매력 있게 변신시키는 개보수 작업과 더불어 이를 문화와 공동체 공간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후 지은 건물 다락방의 오래된 벽돌벽 위에 새 벽돌을 쌓아 천정을 높인 후 시집 전시실로 꾸며 매달 시낭송회 등을 개최해 온 아벨전시관, 막걸리를 만들던 옛 양조장 건물을 임대, 개보수하여 문화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스페이스 빔, 옛 조흥상회 건물을 되살린 배다리 생활문화공간 ‘달이네’와 독립서점 ‘나비날다’, 이 외에도 카페 ‘싸리재’, 잇다 스페이스, 20세기약방 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더불어 마을과 도시의 대안을 고민하고 논의하고 실험하는 활동들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예술가 거주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해 배다리 마을과 원도심 일대의 역사 문화 가치를 재조명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배다리 도시학교’를 통해 지역의 도시 현안과 이슈에 대한 문제의식과 혁신 사례를 공유하고 가능성을 타진했다. 하나의 가게를 여러 주인들이 요일별로 번갈아 사용하며 서로의 관심사와 재주, 수익을 나누는 ‘요일가게’는 공유경제의 작지만 모범적인 사례다.
무엇보다도 공사를 중단시키고 주민들의 품으로 온전히 돌려받기 위한 관점에서 산업도로 부지의 생태 숲 복원, 텃밭 가꾸기, 여름생태캠프 개최, 마을공동체를 위한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행사, 아이들을 위한 모험놀이터 조성 등은 이곳을 매연과 소음을 발생시키며 주민 피해만 끼치는 도로가 아닌. 생명과 생태, 공동체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싸움과 활동의 결과, 도로부지는 주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지하로 지나가게 되었고, 지상 부지는 주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꾸밀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개발 계획은 무산되어 이곳 주민들이 원하는 기반시설 개선과 편의시설 확충 등의 사업을 벌여 이제 배다리는 큰 위기를 넘겼다. 이렇듯 배다리는 위기를 넘기고 노력해온 보람을 느끼나 싶었는데, 현재는 또 다른 위기와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인천시 동구가 배다리를 관광지로 꾸미기 위해 구역을 나누고, 테마거리를 만들고, 조형물을 이곳저곳에 세우려는 계획을 주민들과의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세운 후 밀어붙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안적인 마을과 도시 만들기를 위해 배다리 마을의 주민과 활동가들은 지혜를 모으고 있다.
인천시 동구 만석동은 부두와 섬을 품고 있는 마을이다. 과거 부두에서 느낄 수 있던 역동감은 제 빛을 잃었지만 만석동에서 바다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바다에 나가면 낚싯배와 조개잡이 배들을 볼 수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만석동이 아니지만 만석동 사람들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북성포구를 찾았다. 만석동과 북성포구를 떼 놓고 얘기할 수 없음에도 마을에서 바다가 쉬 보이지는 않는다. 굴 막장을 지나서 좁은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면, 둘이 걸으면 꽉 차는 좁은 길이 나온다. 인근 제분회사의 사유지로 양쪽에 철제 구조물로 둘러싸인 막다른 길을 지나며 과연 바다와 포구가 정말로 나타날까 의아할 즈음에 눈앞에 북성포구가 보였다.
현덕의 소설 「남생이」 첫줄에 ‘호두형으로 조그만 항구 한쪽 끝을 향해 머리를 들고 앉은’ 이라 소개되는 호두형 포구인 북성포구다. 북성포구는 개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천의 개항을 받아들인 조선은 화도진이 관리했던 만석동 일대의 포구를 열었다. 조선 정부는 남쪽을 각국 묘지로 사용하고 북쪽에 조선인 마을을 만들었다. 그때 이후로 지금도 절반은 만석동 43번지이고 나머지 절반은 북성동 1가로 나뉘어 있고 마을에는 외국인 묘지가 있었던 곳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북성포구는 ‘똥마당’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만석동과 북성동에 모여 살던 시절, 화장실과 하수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공동화장실의 분뇨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때 배설물들이 밀물을 만나 마을에 떠다니던 모습 때문에 ‘똥마당’이라는 오명이 지금껏 전해오고 있다. 비가 오면 오물이 지대가 낮은 집 안까지 밀려 들어왔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주민들에게 ‘똥마당’이란 이름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만석동을 대표하는 별명처럼 따라다니고 있다.
1960년대부터 파시가 이어져왔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선상파시가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성포구는 현재도 매년 파시가 열리고 있고 주말에는 전국에서 200여명 이상의 손님들이 파시를 찾고 있다. 선상에서 값싸고 좋은 생선과 새우젓을 구입할 수 있어서 단골들이 잊지 않고 찾고 있다고 인근 주민들이 전해준다.
인천 만석동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부두인 만석부두는 만석비치아파트 인근에 자리 잡고 있다. 만석부두 입구사거리에서 화도진로와 보세로를 거쳐 만석부두로를 따라 가다보면 만석부두로 들어서는 입구를 만난다. 부두 입구에는 인항파출소 만석출장소와 인천수협 만석 직매장 건물이 있는데, 만석부두는 낚시꾼들이 배를 타기위해 찾아오는 부두로 주로 이용되고 있다.
만석부두는 인천 앞바다의 여러 섬들에 운항하는 여객선들의 출발지이기도 했다. 작약도가 관광지로 각광을 받던 시절,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여객선을 왕복 300원의 요금을 내면 탈 수 있었다. 영종도로 가는 배도 만석부두에서 탈 수 있었는데 1973년 5월 1일 연안부두가 건설된 이후, 만석부두에서 영종도로 가는 항로는 1976년 폐쇄됐다. 지금도 만석부두에서는 주꾸미를 잡기위해 어망을 손질하고 낚시꾼들을 태우고 출항을 준비하는 배들과 선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만석부두에는 만석동에 살아온 피란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굴막이 있었다. 부두가 가까운 만석동에서 살아온 피란민들은 만석부두에서 배를 타고 영종도, 팔미도 등지로 나가 직접 캐온 굴을 까서 연안부두 상인들이나 굴막을 찾는 사람들에게 팔기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만석부두 굴막은 활기가 넘쳤지만, 지금은 대형마트 등에서 손쉽게 손질된 굴을 구입할 수 있기에 굴막에서 굴을 사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오래된 굴막의 흔적만 남겨져 있다.
만석동 기록 작업을 진행하면서 피란민들이 머물던 판잣집과 굴막에 얽힌 무수한 삶의 이야기들을 만났다. 남녀 가리지 않고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고 굴을 캐고, 조개를 캐서 먹고 살았던 처절한 삶의 이야기들 속에서 그 시절 만석동의 전성기를 엿볼 수 있었다. 지금은 전성기를 지내고 난 나이든 노인처럼, 생기 잃고 늙어가는 듯 보이고,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지 않는 북성포구와 만석부두이지만 그곳에서 살아왔던 마을 사람들의 고단했지만 행복했던 노동의 현장과 추억들을 삶의 흔적과 함께 마음에 담아본다.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별명을 가진 곳이 있다. 1970~1980년대 추억의 풍경이 보고 싶다면 이곳을 추천한다. 인천 강화도의 교동도이다. 강화도의 교동도? 그렇다. 이곳은 섬 안에 있는 섬이다. 강화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15분을 가면 교동도 월선포 선착장이다. 섬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 교동도의 들녘은 가을이면 황금벌판으로 장관을 이룬다. 교동도는 섬이지만 주민들이 쌀 맛있다고 자랑하는 넓은 들판이 있다. 대부분의 주민은 농사를 짓고 고기잡이 하는 분이 더 적다. 바다를 막아 만든 인공저수지가 섬 양쪽에 있다. 간척으로 얻은 땅에 주민은 적으니 가구당 경작 면적도 전국에서 손꼽히게 넓은 편이다.
지난 2014년 교동대교가 연결돼 이제는 육지이지만 다리가 개통되기 전까지 이곳은 사람들이 잘 찾아가지 못하는 지역이었다. 망원경 없이도 북한의 연백평야를 볼 수 있을 만큼 북한과 가까워서 출입도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그 탓에 오랜 세월동안 진짜 섬처럼 외부와 단절을 겪었고, 옛 모습을 오랫동안 간직한 지역이 됐다.
조선시대의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로 유명했다. 이곳을 다녀간 왕족을 손으로 꼽자면 양손가락을 다 써야할 정도다. 광해군, 연산군을 비롯해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도 이곳에 유배했었고, 선조의 첫째 서자인 임해군과 인조의 동생인 능창대군 이곳에 머물렀다. 또 인조의 다섯째 아들인 숭선군과 철종의 사촌 익평군까지 시대별로 유명인들의 유배지였다.
그런데 교동도에는 역사의 흔적보다도 대룡시장 골목이 더 유명하다. 마치 1960년대 영화세트장을 꾸려놓은 것처럼 시장에 들어선 순간 과거가 펼쳐진다. 대룡시장은 월선포 선착장에서 가깝다. 큰길을 따라서 약 5킬로미터 쯤 가면 된다. 한국전쟁 때 황해도 연백군에 살던 주민들이 교동으로 잠시 피난 나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해 살았다. 고향을 바로 앞에 두고도 찾아가지 못하는 마음을 달래며, 살아생전 돌아갈 날을 꿈꾸며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다 도시로 나가도 연세 드신 분들은 이곳을 지키는 이유는 바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교동도 북단 율두산에 있는 망배단은 이런 실향민들이 명절 때 모여 차례를 지내는 곳이다. 그래서 교동도는 실향민의 섬이라고도 불렸다. 고향의 연백시장을 그리워한 실향민들은 그곳을 그대로 재현해 300m 정도의 골목에 대룡시장을 꾸렸다. 시장은 10분이면 다 둘러볼 정도로 짧고 성인 남자 둘이 나란이 가려면 어깨를 겹쳐야 하는 좁은 골목이이다. 하지만 이발소나 미장원, 분식점과 통닭집, 신발가게에 약방, 시계점, 전파사까지 있을 건 다 있다.
차가 다니기 힘든 골목에 키 낮은 가게가 있고 손 글씨로 쓰인 촌스런 이름의 간판이 얹어져 있다. 선팅이 벗겨진 유리문에 몇 번 덧칠된 가게 이름이 이 시장의 분위기를 대변한다. 보통 생각하는 시골의 전통시장하고도 분위기가 다르다. 약국이 아닌 약방, 고무신과 장화를 파는 신발가게, 낡은 이발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추억의 골목. 이 배경을 그냥 두기 아쉽다면 시장 한쪽 ‘교동사진관’에 마련된 옛 교복과 고무신을 차려 입고 추억의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시장통 담벼락의 벽화나 옛 포스터, 표어들이 훌륭하게 사진 구석을 장식해줄 것이다.
돼지네 식품, 붉은노을 호프 치킨, 와글와글 식당, 중앙신발, 민욱이네 담배 잡화 등 익숙한 듯 어색한 간판이 가득한 골목. 한국전쟁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은 집 두어 채 있던 벌판에 직접 시장을 만들었다. 산에서 직접 나무를 해다가 움막집을 짓고 그곳에서 떡을 팔고 국수를 팔았다. 물이 귀한 시절이라 이발관에서는 손님 머리 감길 물을 위해 물통 지고 산을 넘어 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전쟁이 끝나고, 장사로 돈을 번 사람들이 건물을 올리고 비로소 시장다운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초가지붕 대신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던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당시에 나라에서 지급받은 목재로 지은 건물들이 몇십 년 세월 동안 그저 그 모습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룡시장 골목에는 초가지붕 위에 또 슬레이트를 올린 건물도 몇 채 있다. 먹고살기 바쁘니 초가지붕 걷어낼 틈도 없었던 모양이다.
조용하던 이곳이 ‘빈티지’ 열풍에 한 번, ‘레트로’ 열풍에 또 한 번 유명세를 타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핫’한 듯하다. 이곳을 다니러 온 사람들에게는 영화 세트장을 보는 것 같겠지만 시장 상인과 주민들에게는 이곳이 삶의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을 찍거나 구경할 때도 시끄럽지 않도록, 여행자의 예의를 지키길 바란다.
인천광역시 남동에 위치한 소래포구는 어시장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아직도 소래포구는 고깃배들이 해산물을 실어나르고, 사람들의 발길을 끊이지 않는 수도권 유일의 재래 어시장을 보유하고 있다. 소래포구는 재래어항으로 현재도 300여 척의 어선이 드나들 수 있는 정박시설을 갖추고 있다. 재래어시장의 특색을 살리고 인천광역시의 대표축제로 만들기 위해 2001년부터 소래포구축제가 개최되었다. 소래포구축제는 ‘바다로, 포구로, 소래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다.
소래라는 이름은 몇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660년(무열왕 7) 신라와 당나라가 나당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공격하고자 했을 때, 당나라에서는 소정방(蘇定方)이 출정하였는데 소정방이 출발한 곳이 중국의 산동성 내주(萊州)이고, 도착지가 소래포구 지역이기 때문에 소정방의 ‘소’와 내주의 ‘래’을 결합한 이름이라는 설이다. 또다른 하나는 소래지역의 냇가에 소나무 숲이 무성하여 솔내(松川)으로 불렸는데 솔내가 소래가 되었다는 설이다. 혹은 소래지역의 지형이 소라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마지막으로 소래의 지형이 좁아서 ‘솔다’라고 부른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소래포구의 자연환경을 보면 소래의 북동편에는 해발 299m의 소래산이 있다. 소래산은 전통시대의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 『여지도서(輿地圖書)』등)에 의하면 ‘인천의 진산’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150m 전후 높이의 오봉산과 관모산이 소래포구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시흥으로가는 도선장이었던 소래포구 지역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염전이 생기면서부터이다. 1937년 수인선 협궤열차가 부설되면서 소래역이 생겼다. 소래역은 소래염전지역에서 생산된 천일염을 수탈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1974년 인천 내항이 준공되면서 새우잡이 배인 소형어선이 소래포구로 옮기면서 새우파시로 유명해졌고, 수도권을 대표하는 재래어항이 되었다.
새우, 꽃제, 젓갈 등이 풍부한 소래포구는 수많은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으로 인근에는 소래습지생태공원이 있어 관광명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소래포구축제는 이러한 지역적특색을 반영하여 먹거리, 살거리, 즐길거리, 볼거리가 있는 축제이다. 때문에 소래포구축제는 맛, 멋, 흥이 어우러진 축제라고 한다. 풍부한 수산물 먹거리와 포구에서 한 폭의 풍경화같은 석양을 즐길 수 있는 멋과 다양한 콘텐츠가 그 흥을 돋군다. 2017년 소래포구는 국가어항으로 지정이 되어 2019년 기획재정부의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하였다. 이로 인해 소래포구는 소래포구항 건설공사 사업이 본격화 될 것이다. 더욱이 2017년 소래포구시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무허가 가건물 상태의 시장도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앞쪽으로 옛 건물들이 이어져있다. 시장을 찾으려하지만 한눈에 띄지 않는다. 골목으로 들어서야 시장 골목들이 보이는데, 문을 닫은 몇몇 가게들 사이로 생선가게, 방앗간 등의 오래된 가게에 불이 켜져 있다. 가게들을 사이에 끼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제야 새롭게 단장한 평화시장의 모습이 보인다.
이 시장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49년 전이다. 1980년대 이곳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북적이는 동네 시장이었지만, 점차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갔다. 하지만 이 잊혀진 공간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며 새로운 활기를 찾는 중이다. ‘숭의평화창작공간’이 문을 열면서 이곳은 오래된 도시의 잊혀진 공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는 공간으로 성장하고 있다.
평화시장의 옥상에 오르면,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내려다보이고, 그 주변으로 주상복합 건물을 세우는 공사들이 진행 중이다.
이곳에 남아있는 생선가게 할머니는 마트가 생기면서 손님들이 확 줄었다고 말씀하신다. 이 시장에서 40여 년 동안 생선가게를 하신 사장 할머니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던 이곳을 추억하셨다. 호황기였을 때만해도 골목에 생선가게만 8개가 있었다고 한다. 바글바글대는 손님들에 대한 기억들이 여전히 생생하신 듯하다. 하지만 이제 이 가게만 유일하게 남았다. 장사가 되지 않지만 집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기 뭐해서 가게에 항상 나오신다고 한다. 할머니는 가게 유리창에 붙은 손글씨로 된 가게 팻말을 보면서 창작공간의 샥시들, 그러니깐 입주 작가들이 만들어줬다면서 좋아하셨다.
1971년 시작한 숭의평화시장은 숭의동과 도원동 일대의 주민들이 모여드는 농수산물 재래시장이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100여 개 상당의 점포들이 들어와 시장이 활기를 띄었고 안마당에는 좌판들이 가득 차서 지역주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이 일대가 변두리로 밀려나면서 주민들은 점점 떠났다. 더욱이 근처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시장의 기능을 잃어버린 이곳의 상점들은 텅 비어버렸다. 이제는 평화시장 생선가게, 그리고 쌀집, 방앗간 등 몇 점포만이 유일하게 남았다. 그렇게 완전히 사람들로부터 잊힐 뻔했던 시장엔 젊은 작가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조금씩 활기를 만들어갔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도로변과 상점들 사이로 작은 골목을 지나 들어가면 조금은 낯설고 예상치 못하는 이색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광장을 중심으로 색색의 콘크리트 건물들이 에워싸고 있다.
잊혀졌던 공간과 지역사회와의 공존을 위해서 2015년 인천시와 미추홀구는 8억 4500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시장의 빈 점포 6개 동을 창작공간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젊은 예술가들이 모이는 이곳은 기존의 상점들과의 공존을 통해 새 숨을 쉬기 시작했다. 지역 작가들과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주민들이 어우러져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생기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마을과 가게 주인들이 젊은 작가들의 존재를 경계했다고 한다. 구도심의 발달로 인해 원래 주민들이 갈 곳을 상실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우는 잠시였다. 지금은 기특하다고 격려해주시고 어깨를 두드려주시며 많이 가까워졌다고 한다. 현재 숭의창작공간은 입주 작가 6개 팀, 레지던시 작가 7개 팀 그리고 문화예술단체 등의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와 있다. 리사이클, 전통술과 차 만들기, 도자기 공예, 공공미술 등 다채로운 창작영역이 함께 한다. 매주 수요일 오후 1시에 원데이 클래스인 ‘숭의문화예술시장’도 열린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문학산(文鶴山)이 있다. 문학산은 고대 미추홀의 진산(鎭山)이었다. 해발 217m로 높지 않다. 산 정상 부근에는 백제시대에 쌓았다는 문학산성(文鶴山城)이 소재해 있다. 원래 문학산은 1965년부터 군부대가 주둔해 있었기에 일반인들이 오르지 못했다가 2015년 10월에 개방되었다. 현재는 문학산성 둘레로 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문학산 정상 봉수대가 있던 자리 아래에 ‘안관당’이라 부르는 사당이 있었다. 안관당은 임진왜란 때 전사한 인천도호부 도호부사 김민선(金敏善)[1542~1592]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이었다. 김민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문학산성을 수리해 지키면서 왜적을 무찌르다 전사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과는 다르게 전해지는 설화가 있다.
옛날, 문학산 안관당에는 나무로 깎아 만든 할아버지와 할머니상이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목상은 험상궂게 생기기는 했지만, 눈을 부라린 모습이 용맹하게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 목상을 보고는 “마치 불법을 지키는 금강역사와도 비슷하게 생겼네.”, “그래도 우리 마을 문학산을 지켜 주는 신령님이신데.”, “암, 우리 마을이 평안한 것은 다 저 두 분 할아버지, 할머니 덕분이야.”라고 하였다. 문학산성 아랫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안관당에 모셔진 할아버지와 할머니 목상을 각각 ‘안관할아버지’, ‘안관할머니’라고 불렀다. 그리고 안관할아버지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믿고 의지하였다. 매년 봄과 가을에 안관당에서 마을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평안과 풍농(豐農), 풍어(豐漁) 등을 기원하였다. 또한 개인적인 소원을 빌 때도 안관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찾아 빌기도 하였다. 특히 아기가 없는 사람들은 안관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아기를 낳게 해 달라고 백일 정성을 드렸다.
그런데 어느 날 현재 청학동에 사는 최씨 문중의 한 부인이 안관할아버지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고는 흉을 보았다. “흥, 이것이 다 뭐람? 이상하게 생긴 목조상을 갖다 놓고 이걸 산신이라고?”, “다 어리석은 미신이고 우상일 뿐이야.” 그리고는 사람들이 안관당에 와서 아기를 낳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있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부인이 임신을 하였다. 그리고 열 달이 지나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조금 모자랐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이 “부정을 탄 거야!”, “안관할아버지를 비웃었으니 할아버지가 노하셔서 벌을 주셨는지도 모르지.”라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아이의 모습이 안관할아버지처럼 눈을 크게 부라리고, 마치 마을주민들을 쥐어박을 듯 주먹질을 해대었다. 그리고는 “씨익, 씨익.”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그 때부터 마을 사람들이 이 아이를 보면 “어, 씨익 할 네 가는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씨익 할 네’는 ‘씨익’ 소리를 냈기 때문에 아이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안관할아버지를 욕했기 때문에 그러한 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한편, 김민선 부사가 전사하고 나서, 그의 혼령을 위로하는 사당이 없었는데 김민선 부사의 혼령이 가끔 나타나, 그의 혼령을 모시는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병자호란이 있을 때는 김부사가 목마를 타고 나타나 창과 칼로서 막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이 사당이 보이는 곳에서 말을 타고 지나가면 말굽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를 못했다고도 한다. 안관당은 원래 김민선 부사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여기에 문학산 산신인 안관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연계되었다. 이 두 설화는 김민선 부사는 물론 안관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영험함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패(牌)’란 여러 사람이 모인 ‘무리’를 말한다. 그리고 ‘청(靑)’은 동쪽과 바다를, ‘황(黃)’은 중앙과 땅을 상징한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청황패놀이란 물고기를 잡는 어민(청패)과 농사를 짓는 농민(황패)이 편을 나누어 경쟁하는 놀이임을 알 수 있다. 생존과 직결된 풍농과 풍어를 기원하고 사람들이 항상 두려워하는 바다에서의 조난을 피하기 위한 제의를 놀이로 변화시켜 즐겼다.
놀이의 연원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조선 초기 세조 연간에 바다의 신들을 모시는 사당을 두고 지역의 수령들로 하여금 직접 제사를 지내게 한 일에서 출발했다고 보기도 한다. ‘원도(猿島)’는 인천광역시 중구에 있는 섬으로(현재는 간척사업으로 육지로 변함), 매년 두 번 인천도호부사가 원도신께 풍농과 풍어 그리고 조업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의례를 지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관리 주도의 제사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이것이 놀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청황패놀이는 삼월 삼짇날(음력 3월 3일)과 시월 첫 오일(午日)에 벌인다. 짝숫날을 피하는 것은 짝수는 음(陰), 홀수는 양(陽)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듯한 양의 기운이 있어야 만물이 생동한다고 믿었던 까닭이다. 또 오일(午日)의 오(午) 역시 말(馬)을 뜻하는 글자로, 말날에 놀면 말의 왕성한 기운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놀이는 총 8개의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순서는 도는 마당→뵈는 마당→비는 마당→노는 마당→얼름 마당→싸움 마당→화동 마당→나는 마당이다. 두 편으로 나누어 겨루지만, 사실 마을 주민들은 농사도 짓고 물고기도 잡는 생활을 한다. 따라서 승패를 따로 내지 않고 양쪽 모두 이긴 것으로 쳐서 풍농과 풍어를 함께 기원했다.
인천광역시 남구의 전통 활쏘기 놀이로 편을 갈라 논다고 해서 '편사'라 불린다. 편을 먹는 방법에 따라 사정(射亭)끼리 경쟁하는 터편사와 마을 간에 겨루는 골편사(洞便射) 그리고 도성 안과 밖이 각각 편을 먹는 장안편사(長安便射) 등이 있는데, 인천광역시 남구의 활쏘기는 터편사에 속한다.
활쏘기는 구석기 시대부터 있었다. 사냥을 하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국가 성립 이후에는 전쟁 무기로 사용되면서 국가에서 장려하는 놀이이자 중요한 훈련과목이었다. 그러나 근대기 총이 발명되고부터는 무기로서의 위력을 점차 잃고 운동경기가 됐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활을 잘 쏜다고 해서 ‘동이(東夷)’라고 불렸다. 그래서인지 활쏘기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다. 무과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활쏘기 과목을 반드시 통과해야 했으며 왕이 친히 활쏘기 대회를 열어 우승한 사람에게 상을 주기도 했다. 당시 활쏘기는 엄밀히 말하면 하나의 도(道)였다. 예의를 갖추고 마음가짐을 바로 하는 수련의 과정이었던 셈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전라도 용안 지역에서는 활을 쏘기 전에 연장자 순서로 아래와 같은 서약문을 낭독하게 했다고 한다.
어버이에게 불효한 자를 물리치고, 형제간에 불화한 자를 물리치며, 벗 사이에 불신한 자를 물리치고, 조정을 비방하는 자를 물리치며, 수령을 비방하는 자를 물리친다. 첫째 덕업(德業)을 서로 전하고, 둘째 잘못을 서로 깨우치며, 셋째 예속(禮俗)을 서로 도와 이루고, 넷째 환난을 서로 구휼(救恤)한다. 무릇 동향인은 효우충신(孝友忠信)을 공고히 하도록 맹세한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에는 경복궁 동쪽에 '오운정(五雲亭)'이라는 활터를 만들어 일반 백성들에게 개방했는데, 이것이 민간 활쏘기의 시작이다. 이를 계기로 수십 개의 활터가 전국에 생겼고 그중 하나가 인천 남구에 있는 무덕정(설립년도 1850년 추정)이다.
음력 5월 5일 단옷날이 되면 창포물에 머리 감기, 쑥과 익모초 뜯기, 부적 만들어 붙이기, 대추나무 시집보내기, 단오 비녀 꽂기, 그네뛰기, 씨름 그리고 활쏘기를 했다. 세시풍속 중 하나로 민간에서 즐긴 것이다. 편 갈라 노는 일이 많았지만 ‘활쏘기 백일장’을 열기도 했다. 3~4일 동안 예선과 본선을 거쳐 1등부터 5등까지 순위를 매기는 방식으로 행해지는데, 백일장 참여자는 신청금을 내고 화살 5발을 쏠 수 있었다고 한다. 만약 활쏘기가 신통치 않았다면 신청금을 다시 내고 재도전할 수 있었다. 활쏘기 백일장의 시작이 언제부터인지는 불확실하지만(17세기 이후로 추정), 일제 강점기 때 본격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편을 갈라 활쏘기 놀이를 하려면 몇 가지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먼저 편사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상대를 찾는다. 사실 서로 왕래하는 사정이 있기 때문에 미리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어쨌든 서로 활쏘기를 하겠다는 의사를 확인 한 후 대회 준비에 들어간다. 초청장을 돌리고 음식을 준비한다. 대회 때 명중 여부를 깃발로 알리는 사람, 창(국악인)할 사람 등을 정한다. 풍악이 울리면 드디어 활쏘기가 시작된다. 대회 중 계속해서 경기민요가 흐르는데,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면 “지화자”로 가락이 바뀐다. 대회가 끝나면 모두가 참여하는 춤판이 벌어진다. 우리나라의 활쏘기 놀이는 단지 기술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신명나게 어울리는 축제다.
용흥궁은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의 잠저로서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확장하고 이름을 격상시킨 것이다. 용흥궁의 외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이고, 내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행랑채와 우물, 대문과 후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의 구조는 주심포 양식으로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다. 또한 용흥궁은 창덕궁의 연경당이나 낙선재처럼 살림집 유형으로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다. 용흥궁 경내에 철종의 옛 집임을 나타내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현재는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잠저구기비각(潛邸舊基碑閣) 1동의 건물이 있다. 용흥궁은 사대부의 살림집이 아니라 궁이기 때문에 안채는 내전, 사랑채는 외전이라 한다. 용흥궁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로 1995년 3월 1일 지정되었다.
용흥궁의 내전과 외전은 경기지방 한옥처럼 기역(ㄱ)자 형태로 유교적 법규를 따랐다. 즉 기와지붕 구성물의 하나인 처마도리를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따라 외전은 둥글게하여 하늘을 상징하고, 내전은 네모나게 하여 땅을 의미한다. 용흥궁 보수를 맡았던 문화재 보수 전문가 태인석(飛건설 대표) 씨는 “서울 운현궁처럼 화려하고 규모가 큰 잠저는 아니지만, 유교적 격식을 아주 잘 갖추고 당시 가장 좋은 목재를 써서 만든 집, 상량문(上樑文·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 등을 적어둔 글)을 보면 30~35년 주기로 보수를 했으나, 실제 사람이 살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용흥궁의 특징은 사대부의 집과는 달리 외전을 내전 뒤 구릉에 배치한 것이다. 사대부 집은 일반적으로 대문을 지나 사랑채가 있고 안채는 사랑채 뒤에 배치하여 외부인으로부터 안채의 여성 공간을 보호하는 형태이다. 그런데 용흥궁은 왕이 머무는 외전을 내전 뒤에 두어 권위와 전망을 고려하였다. 용흥궁은 왕이 거주했던 집이었기에 새로이 건축한 이후 다른 사람이 살지 않았다. 어찌보면 왕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새로이 기와집으로 지은 기념관과 같다.
강화는 왕족이 많이 유배를 가는 곳이다. 수도 서울과 가깝고 지리적 특수성으로 감시와 통제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집안이 역모로 몰린 철종도 19살까지 강화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지금은 강화를 섬으로 인식하기 어렵게 다리로 연결되어 있지만 당시만 해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섬이었다. 조선시대 잠저는 용흥궁처럼 섬에 있지 않고 대부분 서울에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잠저는 태조의 함흥 본궁(本宮), 개성 경덕궁(敬德宮)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운현궁(雲峴宮)뿐이다. 그러므로 용흥궁은 남아있는 잠저 중에서도 섬에 있는 잠저로 더욱 희소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용흥궁은 현재 정부가 친일재산환수 관련 소송이 진행되면서 가압류를 하고 있다. 용흥궁의 소유자는 이해승(李海昇·1890~?)의 후손인데, 이해승은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1785~1841)의 5대손으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명단에 포함된 친일인사이기 때문이다.
강화 고대섭 가옥은 강화군 송해면에 있는 건축물이다. 가옥의 형태는 미음(ㅁ)자이고, 크기는 반가 99칸이다. 99칸은 전통시대 관헌이나 공공의 건물이 아닌 개인의 신분으로 건축할 수 있는 최대한의 크기이다. 100칸을 넘을 수 없기 때문에 최대치인 99칸 집짓는 것이다. 때문에 99칸 집이라고 하면 대단히 큰 집이다. 강화 고대섭 가옥은 최초에 「강화 솔정리 고씨댁 가옥」으로 불리었다. 2006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명칭은 2008년 「강화 솔정리 고씨가옥」으로 바뀌었다가 2020년 「강화 고대섭 가옥」으로 변경되었다. 종손인 고영한이 처음 이 주택을 지은 고대섭(高大燮)의 이름을 따서 명칭 변경신청을 했다고 한다. 고대섭은 강화 고려인삼의 최초 경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고대섭은 강화 출신으로 1941년 이 집을 지었다. 고대섭은 인삼무역을 통해 서울·개성 등 국내뿐 아니라 중국·일본 등 국외를 많이 돌아다녔다. 지금의 가옥은 사업차 개성에서 본 집이 마음에 들어 그 집과 똑같은 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지어진 고대섭 가옥은 전통 한옥과 일본식 건축양식을 혼합한 형태로 솟을대문을 가운데 두고 이어진 담장을 따라 좌측과 우측 두 곳에 문을 냈다. 집 안쪽은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를 ‘기역(ㄱ)’자 형태로 하고 사랑채 등을 ‘니은(ㄴ)’자 형태로 하여 전체적으로 ‘미음(ㅁ)’자 형태의 한옥이 되었다. 집을 짓기 위한 자재인 돌과 목재는 황해도에서 가져왔는데, 종손인 고영한은 “증조부께서 집을 짓기 위해 건축 재료를 전부 황해도에서 배로 실어 날랐다고 하더라. 당시 건축 자재를 실어 날랐던 사람들에게 '배를 타고 오는데 이 집을 지을 터에서 도깨비 불빛이 올라와 돈을 많이 벌겠구나 하는 우스갯소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고대섭 가옥 특징 중 한 가지는 땅을 2m 정도 깊이로 파고 지하 난방시설을 했다는 점이다. 툇마루 아래로 방마다 아궁이를 만들고, 아궁이 사이로는 통풍구멍을 내었다. 이런 지하 공간에는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를 숨겨주기도 했고, 6·25전쟁 때 고씨 가족이 피난하여 숨기도 했다. 그리고 첩보부대인 4863부대가 이 집을 사용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첩보부대 지대장과 고영한의 할아버지 여동생이 결혼을 하여 지대장이 고모할아버지가 되었다고 한다. 개성식 한옥집과 일본식 양식이 혼합된 고대섭 가옥의 또 다른 특징은 별채에 설치된 목욕시설이다. 무쇠솥의 지름이 1.5m 정도로 현재의 욕조와 같은 기능을 하였고, 건물 밖 아궁이에서 불을 지폈다. 마치 근대식 목욕탕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한다. 전통을 중시하여 지금도 종손은 부뚜막에 조왕신을 위한 음식을 올려놓고 있으며, 집안에 온기를 더하기 위해 고택 스테이로 집을 개방할 준비를 하고 있다. 2020년 후반이면 새단장 끝에 고택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더욱이 건축물을 유지 관리하는 것은 박제된 전시물처럼 보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고택 스테이로 집을 개방하면서 전통을 유지한다는 것은 탁월한 선택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