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미와 칼을 직접 두드려 만드는 건천대장간

    '대장간’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시골장터나 마을마다 있던 대장간은 이제 전국적으로도 몇 곳 남지 않았다. 무딘 농기구를 벼리거나 쇠를 불에 달구어 각종 연장을 만들어내는 대장간. 경북 경주시 건천읍 시골 장터 건천시장에서 오래된 대장간을 만날 수 있다. 

     

    건천시장은 1914년에 개설된 전형적인 재래시장이다. 시장에 있는 40여 개의 점포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이 바로 ‘건천대장간’이다. 함석 위에 쓴 오래된 손글씨 간판이 눈에 띄는 것은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 대장간이기 때문이다. 2대째 내려오는 이 가게의 간판은 2007년 4월 작고하신 유기배 장인이 직접 쓴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간판임에도 손님들이 가게를 잘 찾아왔고, 지난 세월 동안 가게는 제 역할을 다했다.

     

    유기배 장인이 대장간을 운영하던 1970~80년대에는 밤새도록 일을 할 정도로 일감이 많았다. 그는 경주에서 제일가는 대장장이였다. 경주 시내 철물점마다 그가 만든 칼과 호미, 쇠스랑 등의 농기구가 진열됐고, 납작호미와 끌게는 고인만이 만들 수 있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때를 “장날 벌초 대목에는 이 대장간 앞이 둘러꺼졌다”고 회상하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낫을 50가리씩 포개어 놓아도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금세 동이 났다는 것이다. 인근의 아화장터나, 산내장터에 작업장이 별도로 있었을 정도라니 얼마나 많은 제품을 만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고인이 된 유기배 장인의 뒤를 이어 차남인 유종태 장인이 대장간을 맡아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며 그 기술을 잇고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대장간에서 놀면서 아버지 일하는 것을 봐 왔다고 한다. 아버지가 바쁠 때는 어린 나이지만 낫자루 댕기 감는 일(낫자루에 낫을 고정하는 과정)을 돕기도 했다. 

     

    중국산 농기구가 싼 가격에 들어오고, 손으로 직접 만든 농기구를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대장간을 찾는 손님은 많이 줄었다. 게다가 오랜 단골들도 많이 돌아가셨다. 하지만 건천대장간의 불매뚝(대장간에서 사용하는 화덕)은 아직도 벌겋게 불이 붙어 있다. 외지에서 오는 손님도 있고, 농기구 외에 인테리어 소품을 사가는 손님도 있다. 

     

    농기구 주문이 가장 많을 것 같지만, 농사일을 기계가 대신하면서 그 수요는 많이 줄었고, 회 뜨는 칼의 주문이 많다. 동해안 쪽, 포항의 죽도시장이나 전문횟집, 구룡포, 후포, 평해 지역의 횟집에서는 건천대장간에서 만든 칼을 쓰고 있다. 수작업으로 식도를 만드는 대장간이 흔하지 않으니 전국적인 주문을 받는다. 또 목수들이 한옥을 지을 때 필요한 연장들, 끌, 망치, 정 등도 이곳에서 다양한 크기로 제작해 주고 있다. 

     

    대장간에 있는 연장을 보면 놀랍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낯선 풍경이기도 하지만 그 오래된 세월과 대장장이의 수고가 감히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장간에서 가장 중요한 커다란 화덕의 이름은 ‘불매뚝’이다. 이 불매뚝과 낫적심통(물통)이 가장 오래되었고, 달궈진 쇠를 놓고 치는 쇠로 만든 받침대인 모루는 유기배 장인이 처음 대장간을 열 때, 다른 사람이 쓰던 것을 받아서 쓰게 된 것으로, 족히 100년은 되는 듯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불매뚝은 돌 같은 ‘중개탄(석탄의 일종)’을 연료로 쓰는데 풍구를 조절하면 불꽃의 세기가 조절된다. 풍구는 예전의 풀무를 대신하는 것으로 바람을 불어 넣어 화력을 세게 하는 기구이다. 쇠에 매질을 하는 쇳덩어리는 ‘모래띠’라고 부른다. 집게도 종류마다 다른데, 도끼나 목괭이를 잡는 집게와 망치 같은 굵은 쇳덩어리를 집는 집게가 모양이 다르다. 망치도 구멍의 모양과 크기에 따라 다르고 면을 고르는 망치는 따로 있다. 그러나 요즘은 예전보다 제작 종수가 적어 대장간에 있는 연장을 다 쓰지 못한다. 또 쇠를 자르고 갈 때는 요즘의 기계를 쓰기도 한다. 

     

    쇠를 직접 손망치로 두드려가며 연장을 만들어내는 대장간은 전국에 몇 군데 없다. 이제 대장간은 그저 과거의 유물로 여겨진다. 하지만 건천시장에는 장인인 아버지의 대를 이어 대장장이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는 유종태 장인의 ‘건천대장간’이 있다. 이제 대장간을 직접 보고 싶으면 그곳으로 가보자. 경주에서는 이미 유명한 곳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건천대장간을, 아직 대장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길 바란다. 

  • 일년 361일 문을 여는 언양읍 매일대장간

    울산 언양읍에 있는 알프스시장은 시골 정서가 살아있는 전통 시골장터이다. 언양불고기로 유명하고, 언양 현지인들이 추천하는 시장곰탕집이 맛있는 곳이다. 울산 언양읍 알프스시장에서 매일매일 쉬지 않고 한 자리를 지키며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가 있다. 불꽃과 함께 불꽃처럼 뜨거운 인생을 살아오신 ‘언양 매일대장간’ 박병오 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매일대장간 외부 이미지
    매일대장간 외부


    박병오 씨가 대장간을 처음 시작 할 때 만 해도 언양읍에 비슷한 대장간이 7~8개는 있었다고 한다. 농사가 주된 수입원이었던 과거에는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장이라는 직업이 수입이 보장되는 인기직종이었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주문이 넘쳐서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며 일을 해야 할 만큼 바빴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대형마트나 인터넷 등을 통해서 필요한 농기구나 물건들을 손쉽게 사서 쓸 수 있기에 공들여 만들어내는 연장과 도구의 값어치가 전만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워낙 귀한 직종이며 장인정신이 필요한 일이기에 아직도 인근 지역은 물론,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다. 인터뷰를 하던 날도 소소한 물건을 사가는 손님들이 있었다.

     

    박병오 씨가 처음 대장장이 일을 배울 때만 해도 먹고 사는 것이 워낙 힘든 시절이라 ‘뭐라도 한 가지 기술을 배우면 밥은 굶지 않겠지’란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고향에서 함께 자라던 동무들 중 남의 집에 머슴을 살러 가는 동무들도 있었지만 그는 고되어도 자기 기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대장장이의 길을 선택했다. 남의 대장간에서 일을 배우는 견습생의 과정을 거쳐서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대장간을 차린 것은 나이 마흔이 넘어서다. 풀무질과 담금질을 하는 그의 손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만들어낸 연장과 농기구 하나하나를 자식 같은 마음으로 대하고 소중히 여기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울산 쇠부리축제’에 자신의 철기구들을 기증하기도 했다.

    고되고 힘든 일이지만 이 기술을 후대에 전수하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물으니 돌아오는 답이 서글프다. 


    매일대장간 주인 박병오씨 이미지
    매일대장간 주인 박병오씨



    이 험한 일을 지금 사람들은 누가 배우려고 하지도 않지만,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도 다치거나 화상입거나 그럴 경우 산재 처리도 해줘야 하고 내가 다 책임지고 보상해줘야 하는데 이제 80이 넘은 늙은이가 그런 부담감까지 안고 일을 가르치기는 힘들지.

     

    지독한 일벌레인 박병오 씨는 매일대장간을 40년 동안 매일 열었다. 매일대장간은 1년 동안 공식적으로 딱 4일 문을 닫는다. 설날 이틀과 추석 이틀이 쉬는 날의 전부이다. 1년 365일의 4일을 빼고 늘 문을 열기에 대장간 이름도 매일대장간이다. 

     

    박병오 씨는 60여년 가까이 대장장이를 자신의 천직으로 알고 대장간을 이어온 이유를 명료하지만 신념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세상이 달라지고 편해졌지만, 대장장이인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내가 그 자리에 없다면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한 평생을 대장장이로 살아온 박병오 씨의 손은 거칠고 상처가 많았지만, 자신만의 외길을 올곧게 살아낸 장인의 손답게 강하고 힘이 있어 보였다.

  • 인천 도원동 철공소 거리의 최고령 대장장이

    붉은 색보다 더 강렬한 철을 풀무질하고 있는 대장장이의 뒷모습이 선명한 첫인상이었다. 팔순이 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할아버지보다는 대장장이다. 굵고 단단한 손마디는 쇠의 강인함과 유연함이 동시에 들어있다. 그 손의 생김새가 대장장이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38년생 송종화 대장장이. 그는 이 도원동 철공소 골목의 최고령인 현역 대장장이다.

     

    송중화 대장장이 이미지
    송중화 대장장이


    조심스레 그의 뒤에서 말을 시켜보지만, 귀가 잘 안 들렸을 수도 있고, 혹 붉은 철에 집중한 탓에 다른 이의 말을 잠시 접어두는 것 같기도 했다. 쾅쾅쾅, 쇳덩이를 내리치는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집중에는 그의 인생이 들어있었다. 시간이 얼마 지났을까. 그는 내게 잠시 기다리라는 눈빛을 보내고는 다시 일에 집중하였다.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려면 이 철공소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철공소 골목은 도원동 참외전로이다. 황골 고개라 불리던 이 거리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6.25 전쟁 이후로 철공소들이 하나 둘씩 들어섰다. 전쟁을 겪었던 이들은 이곳에 하나 둘씩 터를 잡았고 살기 위해서 쇳덩이를 집기 시작했다. 먹고 살기 위해 농기구, 연통, 난로들을 만들어 내다 팔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인해 갈 곳을 잃은 사람들, 북에서 온 사람들, 고향을 잃은 피란민까지 이곳에선 살기 위해서 대장 기술을 배우고 삶을 꾸렸다. 

     

    한창 때에는 옛 인천공설운동장 주변 길을 따라 대장간들이 쭈욱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철공소 자체를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지금과는 너무도 달랐다. 현재 이 주변엔 가구도매점이나 상점들이 있다. 1970~80년대 현재의 현대제철, 당시의 인천 제철에서도 그는 주문을 받아 부품을 만들었다. 지금은 작은 공간에서 그 혼자 일하지만, 당시만 해도 사람 서넛을 써가며 일했다. 주문도 쉴 새 없이 밀려들었다. 공정이 까다로운 작업들을 해가며 대장장이 의 진면목을 보이던 때였다. 그는 인천 제철에 들어가는 복잡한 볼트들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참 만들기도 힘들고 까다로웠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의 쇳덩이를 볼트로 완성시키는 순간, 그는 자신이 작품을 만들었구나 생각했단다. 자신이 대장장이임을 그리고 기술자임을 스스로가 느꼈었다. 그 순간들을 되새겨 떠올리는 노장의 눈빛이 반짝인다.

     

    대장장이가 만든 작업물들 이미지
    대장장이가 만든 작업물들


    그는 1953년, 15살의 어린 나이로 쇠망치를 처음 쥐었었다. 먹고 살기 위한 것이었다. 제물포에서 태어난 그는 6.25때 살던 집이 폭격을 맞으면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쇠망치를 잡았다. 어린 4형제들이 목숨은 부지했지만 먹고 살기 막막했기에 쇠망치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65년 넘게 지나갔다. 그동안 철공 장인이 만들어낸 인생 외길에는 자부심도 있었지만, 기계화된 작업들 앞에서 한 개인의 대장장이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도 존재했다고 한다. 


    이 거리가 성황리였던 좋은 시절들은 어느 덧 지나갔다. 대장장이의 손길이 필요했던 공장들은 기계들을 도입해서 쓰기 시작했고 그의 일감들도 차츰 끊겨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쇠의 때가 잔뜩 묻어 세월의 흔적이 쌓인 작업복을 입는다. 오늘도 변함없이 골목의 한 공간을 지키며 대장장이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장인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는 여전히 현역으로서 살아간다. 


    이제 이 동네의 대장간은 거의 문을 닫았다. 인일, 인해, 도원, 인천 철공소. 이렇게 네 곳만이 남았다. 그곳의 대장장이들은 이곳 송종화 대장장이로부터 기술을 익힌 그의 후배들이다. 일흔 밖에 되지 않은 젊은 후배들. 그는 자신이 가장 나이가 많다고 말한다. 같이 일했던 자기 연배 사람들은 다 죽고 지금은 없다고 한다. 언젠간 이 철공소도 문을 닫고 그의 묵묵했던 망치질 소리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그가 이 도원동의 마지막 대장장이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망치질을 멈추지 않는다. 

  • 쇠를 달구어 농기구를 만드는 야장

    대장간은 쇠를 달구어 각종 도구를 만드는 곳이다. 무딘 농기구나 각종 도구를 불에 달구어 버리기도 하고 새로 만들기도 한다. 대장간에서 철제품을 만드는 장인을 ‘야장(冶匠)’이라고 하며, 흔히 ‘대장장이’로 부른다. 지금은 시장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 되었지만,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는 철로 된 농기구 생산이 매우 중요하기에 쇠를 두드리는 야장은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야장의 신분 변화

    삼국시대에는 철기를 생산할 수 있었던 사람은 존경을 받았다. 신라의 탈해가 호공(瓠公)의 집을 빼앗기 위해 몰래 숫돌과 숯을 파묻어 놓고 자신의 조상이 본래 야장이었음을 주장한다. 후에 탈해는 신라의 왕이 되기도 한다. 고려 시대에 이어 조선 시대는 야장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았다. 야장은 신분이 낮은 수공업자로서 관청에 등록되어 국가를 위해 일정한 의무 일수(日數)에 따라 노동을 해야만 했다.


    쇠를 불에 녹여 만드는 농기구

    흙으로 쌓아 올린 재래식 화덕의 화구에 숯불을 넣고 풀무질을 하여 불의 온도를 높이고 제품을 만들 쇳덩이를 불에 충분히 달군다. 집게로 쇳덩이를 집고 철제품을 모루에 올려놓으면 양쪽에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쇠메로 메질을 한다. 야장은 집게로 벌건 쇳덩이를 잡고 메질에 맞추어서 형태를 만들어 가고 중간중간 물에 집어넣어 급격히 식히는 담금질을 하면서 메질, 담금질 그리고 벼름질을 반복하면서 제품을 만든다.

    단원 김홍도의 대장간
    단원 김홍도의 대장간(사진출처:문화재청)

    무형문화재로서의 야장

    1970년대 이후 농기계의 등장과 1990년 이후 중국 농기구의 수입 등으로 인해 한국의 대장간이 쇠퇴하였다. 현재 야장들은 주문 제작과 수선 제작을 함께 한다. 생산 품목은 농기구인 도끼·호미·낫·쇠스랑·괭이 등을 만들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쓸 수 있는 칼 등을 주로 만든다. 충청북도에서는 야장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그 명맥을 잇게 하고 있다. 무형문화재로서의 야장은 개인 대장간을 가지고 있고, 박물관 등에서 전시를 하거나 축제나 행사장 등에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일부는 예전과 같이 오일장을 다니며 손님을 맞이하기도 한다.

  • 경북 청도군 운문면에서 풀무질하며 부르는 불매야소리

    씨없는 감으로 유명한 청도군

    청도군은 경상남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동쪽은 경주, 서쪽은 창녕, 남쪽은 밀양, 북쪽은 대구 · 경산과 맞닿았다. 행정구역은 2개 읍, 7개 면, 212개 행정리(127개 법정리)로 나뉘어진다. 태백산맥 남단에 위치한다. 곰티재와 용각산 그리고 그 지맥이 지형을 동서로 나눈다. 동쪽은 산악지대이며 서쪽은 들이 펼쳐져 있다. 군의 남서단에 위치한 풍각면에서 발원한 청도천이 군의 중앙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흐르는데 그 유역에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총 경지면적은 15.31%로 협소하나 땅이 비옥하고 수량이 풍부하다. 이 중 논과 밭은 각각 38.3%, 61.7%로 밭농사를 더 많이 짓는다. 쌀을 중심으로 한 곡류와 함께 무 · 배추 · 고추 · 딸기와 같은 채소류, 작약 · 당귀 · 천궁 등의 약용작물의 생산량도 많다. 감 · 사과 · 복숭아 등의 과일 재배도 활발한데 특히 청도반시는 씨 없는 감으로 전국적으로 이름이 났다. 

     

    청도군의 노동요

    청도군의 노동요에는 「모찌는소리」(정자소리), 「모심는소리」(정자소리), 「논매는소리」(방아소리, 상사소리, 어사용, 옹헤야소리, 위야전례소리, 칭칭이소리), 「논매고뒤풀이하는소리」(방아소리), 「벼터는소리」(두루매기소리), 「밭매는소리」(부모죽은 부고왔네), 「밭작물도리깨질하는소리」(어화소리, 옹헤야소리), 「산판목도하는소리」(허영차소리), 「나무하는소리」(어사용), 「나뭇짐지는소리」(어사용), 「풀베는소리」(어사용), 「삼삼는소리」(긴삼가리소리), 「물레질하는소리」(노리개타령), 「풀무질하는소리」(불매야소리), 「둑가래질하는소리」(가래소리), 「터다지는소리」(어여라차소리) 등이 전한다. 삶을 꾸려가기 위해 필요한 각각의 일자리에서 불리는 노래들이 활발하게 보존 · 전승이 되었다. 

     

    쇳물 녹일 때 부르는 「풀무질하는소리」

    대장간에서 풀무로 바람을 일으키며 부르는 소리이다. 쇠로 농기구나 솥을 만들기 위해 화덕에 바람을 불어넣거나 쇳물을 녹이고자 할 때 풀무질을 한다. 작업의 규모와 목적에 따라 여러 종류의 풀무가 쓰인다. 혼자 손으로 하는 작은 풀무냐 여럿이 발로 밟는 큰 풀무냐와 같은 풀무의 종류에 따라 불리는 노래 또한 호흡의 빠르기, 사설과 가락의 자유로움 등 그 모습을 달리한다. 현재 전해지는 「풀무질하는소리」에는 만대장소리, 불매야소리, 사데소리, 신선풍기로다소리, 아웨기소리, 어화네소리, 에웨기소리, 푸르르소리의 8종류가 있다. 주로 경상도, 함경도, 제주도를 중심으로 전해진다. 제주도에서는 독창으로 나머지 지역에서는 대체로 선후장으로 부른다. 타령이나 「아기어르는소리」로 전환되어 불리기도 한다. 

     

    '어허루 불매야'를 후렴구로 하는 불매야소리

    불매야소리는 경북 청도와 울산광역시 중구에서 전승되었다. 2마디짜리 전언가사에, “어허루 불매야”, “오호호 불매야”와 같은 ‘불매’를 핵심어로 하는 디딤가사를 붙여 선후창으로 부른다. ‘불매’는 ‘풀무’의 사투리이다. 주된 내용은 풀무와 무쇠의 내력을 이야기한 후 부지런히 풀무질을 해서 농기구를 만들어 그 농기구로 농사를 열심히 지어 나라의 태평과 집안의 평화를 이루겠다는 것이다.


    다음은 1992년 청도군 운문면 방음리 말울마을에서 홍성준(남, 1927)과 홍의근(남, 1926)이 부른 불매야소리이다. 말울마을에는 해방 전까지 솥을 만들던 대불무가 있었다. 풀무질은 6명이 한 팀이 되어 했는데 제보한 홍성준은 젊어서 대불무질을 직접 했었다고 한다. 풀무의 내력을 짧게 다룬 후 일을 빨리 마치고 밥과 술을 먹자며 일꾼들을 독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호호 불매야 오호호 불매야

    불매 불매 불매야 오호호 불매야

    거들어서 여러사 불매야 오호호 불매야

    이 불매가 어데 불매 오호호 불매야

    경상도 대불매 오호호 불매야

    부러랑 부러랑 불어라 오호호 불매야

    얼렁하고 술 묵자 오호호 불매야

    미역국에 땀 나고 오호호 불매야

    조피(두부)국에 짐난다 오호호 불매야

    부러랑 부러랑 불어라 오호호 불매야

    오호호 불매야 오호호 불매야

    오호호 불매야 오호호 불매

  • 내 안의 열이 식기 전에 나를 잡아주오, 모루

    철기의 탄생, 일상의 변화

    철은 이제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인류가 철을 처음부터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를 거쳐 한반도에서는 위만조선 시기부터 철기가 도입된 것으로 보는데 시대명을 통해서 알 수 있듯 철은 인류가 가장 먼저 사용했던 금속은 아니다. 녹는점이 낮은 청동은 철보다 먼저 사용되었던 금속이었지만 비싼 값과 이미지로 인해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재료는 아니었다. 흔히 ‘위신재’라고 불리는 지금으로 치면 명품에 해당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도입된 철기는 청동기와 달리 일상생활에서 사용된 재료였다. 기존에 돌로 만들었던 여러 가지 도구들이 점차 철로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생활도구와 농업도구, 무기까지 철의 사용은 날로 확장되어 갔다.


    철기의 제조, 그리고 모루

    모루
    모루(사진출처:국립민속박물관)
    모루
    모루(사진출처:국립민속박물관)

    철기의 제조는 대장간에서 이뤄진다. 지금이야 제철소와 공장에서 철을 다루지만 그래도 철기의 고향은 대장간이다. 철광석을 높은 온도의 화로에서 녹이고 나면 주물을 이용해 틀을 잡는다. 틀이 잡힌 철은 다시 높은 온도를 가열하여 적당한 연성이 생기면 망치질을 통해 형태를 다듬어 간다. 모루는 이때 사용되는 물건이다. 적당히 가열된 철기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곳, 그곳이 바로 모루다.


    그래서 모루는 항상 화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화로에서의 거리가 멀면 이동시간 중 철이 식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화로에서 옮겨진 철을 모루의 적당한 부분에 가져다 대고 그 위로 쉴 새 없는 망치질이 반복된다. 모루의 모양이 평평하고 둥글고 뾰족한 이유는 그 모루의 모양대로 철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철기가 무뎌지거나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다시금 재탄생하는 곳도 바로 모루다. 칼, 호미, 괭이, 낫, 집게, 가위 같은 생활도구부터 검, 창 등의 무기까지 모두 이곳에서 태어난다. 모루는 철기의 요람이다.

       

    모루의 역사, 저물어가는 대장간

    모루는 철기를 제조하는 도구로 수많은 망치질을 견뎌야하기 때문에 철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역사상으로 철모루가 등장하기 전에는 돌로 만든 모루를 사용하기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모루의 모양은 삼각형 모양이고 지금도 대부분의 대장간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모루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로 파악되며, 그 이전 조선시대에는 원통형의 모루가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 문화의 원형이 훼손되거나 단절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모루 역시 그러한 사례 중 하나이다.


    철기는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예부터 어느 마을이나 작은 대장간 하나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모든 제조 공정이 기계식으로 변한 후에는 우리 주변의 대장간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때문에 대장간이라면 필수로 있어야 하는 모루 역시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옛 농기구가 쓰임에 닳아버리면 모루에서 다시 태어나곤 했다. 헌 것을 다듬어 새것으로 거듭나게 하는 모루를 보면 작은 물건이라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다시 고쳐 쓰는 정겨움이 묻어난다. 

  • 대장간 건물을 더하여 그려놓은 김득신의 대장간

    김홍도와 김득신의 관계  

    현재 전하는 19세기 대장간 풍경을 담은 그림은 긍재 김득신(1754~1822)과 단원 김홍도의 작품 등 2점뿐이다. 김득신의 대장간 풍경은 긍재가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본떠서 그렸다고 전해진다. 김득신은 단원 김홍도와 9살 차이로 어려서부터 가까운 사이였으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긍재 김득신의 삼촌이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기도 하다. 긍재의 집안은 명문 화원 가문이다. 아버지, 아들, 동생, 삼촌, 외손자 등 화원만 여덟 명이나 된다. 화가 군단이라 해도 손색이 없겠다.


    김홍도가 이룩한 한국적 감각의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양기(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김득신(金得臣)·김석신(金碩臣)·이명기(李命基)·이재관(李在寬)·이수민(李壽民)·유운홍(劉運弘)·엄치욱(嚴致郁)·이한철(李漢喆)·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등 한국화 발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단원 김홍도의 대장간 그림을 따라 그린 김득신

    단원 김홍도의 대장간은 「단원풍속화첩」에 산수 배경 없이 풍속 장면만을 부각하여 한 화첩에 표현한 것이다. 모두 25엽으로 구성된 이 화첩은 「행려풍속도병」의 소재인 벼 타작, 빨래터, 우물가 등이 그려져 있다. 특히 대장간 그림은 건물 등을 생략한 채 쇳덩이를 가열하기 위한 단야로(鍛冶爐)를 중심으로 4명의 인물이 모루 위에 달구어진 쇳덩이를 집게로 잡은 채 두들기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대장간은 철소(鐵所)에서 생산한 철을 가공해 농기구나 생활도구를 생산하던 시설로 마을마다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활동했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속 대장간은 18~19세기 조선의 일반적인 대장간 모습을 담고 있으며, 그의 작품은 이후 여러 화가들에 의해 모방되어 방작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특히 단원 김홍도의 제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김득신의 풍속화에서도 김홍도의 풍속화와 동일 소재와 구도를 갖는 그림들이 확인되고 있어, 조선 후기 풍속화에 있어 김홍도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대장간 건물을 더해놓은 김득신의 그림

    김득신의 대장간 그림의 원제목은 '야장단련(冶匠鍛鍊)'으로 대장장이가 쇠 메질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보물 제1987호로 지정된 풍속도 화첩에 포함된 작품으로 대장간의 불꽃 튀는 노동 장면을 잘 표현하고 있는 풍속화이다. 김홍도의 그림과 달리 낫을 벼리는 인물이 줄었고, 단야로에 바람을 불어 넣기 위해 설치한 풍구의 위치가 바뀌었다. 또한 김홍도 그림에서는 과감히 생략했던 대장간 건물을 새롭게 더해 놓았다. 특히 집게를 잡고 있는 인물의 시선을 정면으로 바꾸어 놓아 그림을 보는 사람의 시선과 맞닿게 하였다.


    일하며 노래 부르는 대장장이들

    단원 김홍도와 긍재 김득신의 두 작품 모두 풍속화 특유의 멋스러움과 서민적인 맛을 보여주고 있다. 붉게 달궈진 쇠덩이를 집게로 모루 위에 대 주고 있는 사람이 주인 격인 우두머리 대장장이다. 깔끔한 차림의 옷 맵시와 균형이 잘 잡힌 외씨버선이 그 증거다. 대장장이 입이 벌어진 걸 보면 노동요를 부르는 모양이다. 일꾼들의 흥겨운 자세와 미소 가득한 얼굴 표정은 입담을 섞어 즉흥적으로 풀어내는 노동요 가락 탓일 게다. 노동요는 메질의 박자 역할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메질하는 두 일꾼의 동작이 꼬여 달군 쇠를 제대로 두드릴 수가 없다. 율동감과 생동감이 넘쳐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장장이의 시선이 특이하다. 달궈진 쇠를 보고 있어야 하는데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다. 몸에 밴 일이라 안 봐도 맞춰 줄 수 있을 테지만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장간 풍경을 구경하는 관객을 의식하고 있음이다.

  • 구리 고구려대장간마을, 진짜 고구려 마을로 시간여행 할 수 있다고요!

    고구려대장간마을,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니?

    고구려대장간마을은 아차산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다양한 철기 유물, 간이대장간 터, 그리고 철기 문화가 발달했던 고구려의 특성을 보여주는 여러 역사 자료들을 근거로 ‘고구려의 대장간 마을’을 테마로 조성됐다. 입구에 아차산고구려유적전시관이 있고, 그 뒤로 야외 전시장이 펼쳐진다.


    야외전시장은 대장간, 거믈촌[마을 회의 장소], 연호 개채[손님을 대접할 수 있는 입식 생활 공간], 담덕채[담덕이 왕권의 꿈을 키운, 쪽구들이 놓인 평범한 가옥], 그리고 관람객을 위한 체험 학습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구려대장간마을을 찾은 관람객은 21세기 한국에서 고구려 마을로 시간여행을 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요즘 인기 있는 VR 전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실감 나는, 오감이 살아있는 고구려 탐험이 시작된다.


    고구려대장간마을은 2012년도 드라마 ‘신의’의 촬영장이기도 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이 갑자기 700년 전 고구려로 납치돼 벌어지는 환상적인 이야기는 고구려대장간마을을 방문한 관람객과 시공간을 오간다는 점에서 왠지 비슷하다.

     

    아차산에서 기지개를 켠 고구려 유적

    한반도 남쪽에서 고구려 시대 유적이 발견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는 남한에서 발견된 최초의 고구려 유적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백제 본기 개로왕(蓋鹵王) 21년 조에는 고구려가 어떻게 백제의 한성을 함락했는지가 기록돼 있다.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기 475년 9월에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데리고 내려와 백제 한성을 포위했다. 당시 백제의 왕은 개로왕이었는데, 두려움에 감히 싸우지 못했다. 고구려군은 7일 만에 북성을 함락시키고 남성을 공격했다. 그러자 개로왕이 어쩔 줄 몰라 성문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향했다. 이때 백제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장수 재증걸루(再曾桀婁)가 나서서 달아나는 개로왕을 잡아 아차성(阿且城) 아래에서 죽였다. 이렇게 해서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게 됐고, 고구려는 80년 동안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아차산 일대에 여러 요새를 쌓게 된 것이다. 

    아차산4보루 출토유물 투구
    아차산4보루 출토유물 투구(사진출처:구리시청)
    아차산4보루 출토유물 후부도형 명문접시
    아차산4보루 출토유물 후부도형 명문접시(사진출처:구리시청)


    고구려 사람들이 남기고 간 것들

    고구려대장간마을의 아차산고구려유적전시관에는 아차산에서 발굴된 다양한 고구려의 문화유산이 소장돼 있다. 이 중 ‘후부도○형(後部都○兄)’ 글자가 적힌 도기 접시는 군인들이 음식을 배식받던 용기로 추정된다. 왜 접시에 글자를 새긴 걸까? 고구려 군인들은 글자를 읽을 수 있었던 걸까? 고구려가 어떤 사회였을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유물이다. 아궁이에서 출토된 철제 투구는 뛰어난 고구려의 철기 문화를 짐작하게 한다.


    실제 아차산 4보루에서는 간이 대장간이 확인됐는데, 철로 만들어진 물건을 수리하거나 간단한 철기는 직접 제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나 봤던 갑옷을 입은 용맹한 고구려 군사들이 이곳 아차산에도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밖에 고구려가 기마 민족이었음을 보여주는 철제 등자와 재갈, 몸통이 길고[타원형] 바닥이 편평한 고구려의 도기 항아리 등도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의 고구려 유적이 북한지역에 있고 중국을 통한 접근도 한계가 있는 지금, 고구려대장간마을은 관람객에게 고구려의 문화를 느끼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아차산4보루 출토유물 호
    아차산4보루 출토유물 호(사진출처:구리시청)
    아차산4보루 출토유물 재갈과 등자
    아차산4보루 출토유물 재갈과 등자(사진출처:구리시청)

  • 고대 무덤의 널에도 쓰인 쇠못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널못

    나무와 나무를 연결할 때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못을 박는 것이다. 못은 망치를 이용하여 쉽게 박을 수 있으며 시간이 오래 지나도 잘 빠지지 않아 목재를 이용한 구조물에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도구이다. 못은 망치로 내리칠 수 있게 넓적하게 만든 머리 부분과 자루, 그리고 부리(끝)로 구성되어 있다. 모양과 구조는 정(釘)과 비슷하여 못과 정의 한자도 같다. 못은 철정(鐵釘)이라고도 하며 특히 관에 사용한 못을 관정(棺釘) 혹은 널못이라고 했다.

    쇠 못
    쇠 못(사진출처:국립춘천박물관)

    우리나라에서 못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고고학적인 발굴에 따라 청동기시대나 철기시대에 이미 못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철제 못은 강원도 영월, 강릉, 원주, 전남 영광 등지에서 초기철기시대 유물로 다수 발굴된 바 있다. 국립춘천박물관에는 초기철기시대 쇠못이 소장되어 있다. 이 쇠못은 강원도 원주에서 출토되었으며 길이가 약 8cm정도이다.


    청동이나 철로 된 못은 주로 고대 무덤 유적에서 관에 사용되었던 널못의 형태로 출토되었다. 경상남도 창원시 동면 다호리고분에서는 원삼국 초기(기원전 1세기 후반) 청동 장식 못이 확인된 바 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무령왕릉에서는 다양한 모양의 널못이 발굴되었다. 못의 머리 모양이 꽃모양, 원형, 방형 등의 세 가지 종류의 못이 나왔다. 또한, 6세기경 전라남도 함평군 예덕리의 신덕고분에서도 여러 형태의 널못이 무려 150여 점이나 출토된 바 있다.


    재래식 못은 각못

    못은 쓰임에 따라 생김새나 크기가 다양한데 재질에 따라 쇠못, 대나무 못, 나무못 등이 있다. 쇠못은 전통적인 재래식 못과 현대식 양못[洋釘]이 있다. 재래식 못은 대장간에서 쇠를 두드려서 만드는 못으로 자루가 각이 져 있어서 각못이라고 한다.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백제의 쇠못들을 보면 머리와 자루가 모두 방형이다. 즉 머리는 정사각형이고 자루는 사각기둥처럼 되어 있다. 길이는 긴 것이 18㎝ 정도이고 작은 것이 14㎝ 정도이다. 현대식 양못은 자루가 둥근 못으로 기계로 대량 생산한다. 재질도 쇠·구리·놋 등 여러 가지이고 오늘날 가장 일반적인 못이다.

    쇠 못
    쇠 못(사진출처:국립광주박물관)

    모양에 따라 쓰임에 따라 다양한 쇠못

    쇠못은 머리의 모양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다. 머리가 원형인 원두정(圓頭釘), 머리 모양이 반구형으로 볼록하게 된 볼록원두정, 머리가 넓고 평평하게 된 평두정(平頭釘), 이를 납작머리못이라고도 한다. 머리가 작고 평평한 민머리못, 머리가 네모로 된 네모머리못, 머리가 사각형으로 된 각두정(角頭釘), 머리가 크고 넓어 장식 겸용으로 쓰는 광두정(廣頭釘), 머리를 퉁퉁하고 크게 만든 대갈못, 이는 주로 대문짝 같은 데에 박는다. 또한, 쇠못의 자루, 즉 몸통의 모양에 따라서도 여러 종류가 있다. 몸통의 단면이 네모로 된 네모못[方釘], 몸통의 단면이 둥근 둥근못[圓釘] 등이 있다.


    쇠못의 쓰임에 따라서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 바늘못은 바늘과 같이 몸통과 머리가 가늘게 된 강철재 못으로 주로 장식 띠나 합판 등을 박는 데 쓴다. 양끝못은 못의 양쪽 끝을 뽀족하게 만들어 붙이는데 주로 널에 쓰는 못이다. 고리못은 한 끝을 구부려 고리처럼 만든 못이다. 갈고리못은 머리가 직각으로 구부러진 못으로 곡정(曲釘)이라고도 한다. 거멀못은 ㄱ자 또는 ㄷ자형으로 구부려 만든 못인데 두 재료를 연결할 때 쓴다. 주름못은 끝이 오목한 톱니 모양으로 되고, 몸통은 주름잡은 판철로 만든 거멀못이다. 얇은 나무쪽이나 널조각 따위를 붙일 때 쓴다. 가시못은 몸통에 역방향으로 가시가 있어 박으면 잘 빠지지 않는다. 철물 고정용이나 제화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변자못은 물건의 가장자리를 꾸미는 재료를 박는 작은 못이다.


    기와를 고정시킬 때도 못으로

    기와를 고정시킬 때 사용하는 못도 고정시킬 기와 종류에 따라 다르다. 용두박이는 용두머리 기와에 박는 긴 못이고 취두박이는 취두 기와에 박아 대는 쇠못이다. 종심추녀박이는 용마루에 오는 추녀를 눌러 박는 못이고 종심박이는 용마루 또는 그 위에 대는 적심을 박아 대는 못이며 방초(防草)박이는 수막새가 흘러 내리지 않도록 박아 놓는 못이다. 요즈음에는 나사못이나 마루깔기·창레일 고정 등 못의 머리가 보이지 않아야 하는 곳에 사용하는 플랫못, 슬레이트못, 콘크리트못 등도 많이 사용된다. 그 밖에 쇠못은 길이에 따라 세치못·네치못·닷푼못·치못·치닷푼못·여섯치못·자못 등이 있으며 큰못[大釘]이라고 하면 양정에서는 길이 15cm 이상, 재래정에서는 길이 20cm 이상의 못을 말한다.


    못을 박는다는 단호함

    옛 속담에 “가슴에 못을 박는다”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원통한 생각을 마음속 깊이 맺히게 한다는 뜻이다. 또는 어떤 사실에 대해 “못을 박다”라는 말도 있다. 어떤 사실을 꼭 집어 분명하게 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든 어떤 사실에 대해 못을 박든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명적이고 절대적인 일을 강조할 때는 ‘못’을 박는다고 표현한다. 못은 두 물체를 연결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절대적이고 고정적인 행위의 상징이기도 하다.

  • 5대에 걸쳐 전통 접쇠 기술을 전승하고 있는 안성대장간

    경기도 무형문화재 60호 ‘야장’의 전승지, 안성대장간

    경기도에서 철기 제작과 관련된 무형문화재로는 야장, 주물장, 주성장이 있다. 주물장은 무쇠솥을 주로 제작하는 장인이고 주성장은 각각 불구와 범종 등을 만드는 장인이다. 이들은 모두 쇠를 녹여 형틀에 부어 물건을 만드는 주물 방식의 기술을 사용하는 반면 야장은 대장장이라고도 하는데 쇠를 두드려서 물건을 만드는 단조 기술을 사용하는 장인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접쇠를 하고 있는 신인영 야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접쇠를 하고 있는 신인영 야장

    경기도에서는 무형문화재로 〈야장〉(제60호)이 지정되어 있다. 이 야장의 보유자는 안성시 가현동에 있는 안성대장간의 신인영 장인이다. 그는 19세기 후반에 생존했던 김인용(1845년생)으로부터 김영제-김동숙-강석봉으로 이어지는 대장간을 물려받아 현재 5대째 대장장이를 하고 있다. 안성대장간은 당시 안성 시내에 있었던 십여 개의 대장간 중에서도 오래된 역사와 규모, 기술력에서도 유명했다고 한다. 안성대장간의 4대 대장장이였던 강석봉이 처조카인 신인영에게 대장간을 물려 주었고 신인영은 2016년에 야장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황토흙을 이용하는 접쇠 기술 전승

    신인영 야장
    신인영 야장(사진출처:문화재청)


    신인영 장인은 13세가 되던 1966년부터 대장일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2021년 현재까지 55년간 대장일을 하고 있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기능은 단조에 필요한 기본적인 풀무질, 절단, 달굼질, 집게질, 메질, 갈음질, 담금질이 있으며 특히, 전통적인 접쇠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대장간에 전통 화덕과 풀무, 모루 등을 갖추고 있으며 전통 방식으로 제작을 하고 있다. 물론 기계식 해머도 갖추고 있으나 반드시 메질을 해야 제작할 수 있는 제품들의 경우는 전통 방식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접쇠란 강철과 연철 등 탄소량에서 다소 차이가 나는 철들을 여러 겹으로 붙여 강하면서도 탄력있는 우수한 철을 만드는 전통적인 대장 기법이다. 접쇠를 할 때는 연철을 디귿자로 접은 후 그 사이에 강철을 끼워 붙이고 접쇠된 부분을 다시 늘여 또 디귿자로 접고 강철을 끼워 붙이기를 반복한다. 제작 물품에 따라 접는 횟수가 다르며 주로 병장기와 건축 철물 등을 만들 때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러한 접쇠를 할 때 황토 흙을 이용하는 것이 그의 특장이다. 접쇠에 이용되는 흙은 산화피막이 생기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데 흙을 이용한 접쇠는 많은 훈련과 시행착오를 통해 얻어지는 고난도의 기술이다. 따라서 요즘 대부분의 대장간에서는 작업이 좀 더 쉬운 붕사(화학 재료)를 이용한다고 한다. 현재 흙을 이용한 전통 접쇠를 만들어 물품을 제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야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런 전통 접쇠기법으로 숭례문의 주요 장식 철물을 제작하였고 또 미륵사지 석탑 보수공사에 사용되는 석장용 연장도 제작하였다.


    전통을 되살리고 보존하고자 하는 집념

    현재 안성대장간에는 전통적인 화덕과 풀무, 모루 등을 갖추고 있으며 전통 방식으로 제작을 하고 있다. 물론 기계식 해머도 갖추고 있으나 반드시 메질을 해야 제작할 수 있는 제품들의 경우는 전통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가 제작할 수 있는 제품은 문고리나 돌쩌귀 등 건축 철문, 호미와 낫, 쟁기 등 농기구. 부엌칼이나 가위 등 생활 도구, 톱이나 정과 같은 연장들, 검이나 창과 같은 병장기 등 거의 모든 철제 도구와 연장을 포괄한다. 특히, 대장간 내에 다양한 철제 제품과 농기구 등을 지역별로 수집, 분류하여 진열을 해 놓는 등 농기구의 지역적 특색이나 조선시대 쓰였던 단조 방식 등에 대해 많은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 ‘소구라’나 ‘봇가래’ 등 전통 농기구 등에 대한 제작도 시도하는 등 전통적인 철제 도구 복원에도 노력하고 있다.

    접쇠를 하기 위해 황토를 바르는 모습
    접쇠를 하기 위해 황토를 바르는 모습
    신인영 야장의 연장들
    신인영 야장의 연장들

  • 광탄오일장의 터줏대감, 파주대장간

    광탄오일장 입구의 파주대장간

    과거 장터에는 대장간이 하나씩은 있었다. 장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호미며 낫 같은 농기구를 사거나 집에서 쓰다 무뎌진 도끼나 괭이를 벼리려고 대장간에 한 번씩은 들르기 마련이다. 파주에도 이러한 대장간이 10여 군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2021년 현재는 거의 사라졌고 파주대장간이 하나 남아 있다. 파주대장간은 파주 광탄면 신산리에 있으며 광탄오일장의 입구에 있다. 광탄오일장은 신산리에서 열리며 5.10장, 즉 5일과 10일로 끝나는 날에 장이 선다.

    파주대장간 전경(2016년)
    파주대장간 전경(2016년)
    광탄오일장 모습(2016년)
    광탄오일장 모습(2016년)

    파주대장간은 한근수 씨가 대장장이를 하고 있다. 선대에서 대장장이 일을 한 적은 없지만 본인은 1959년부터 2021년 현재까지 60여 년이 넘게 대장간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처음 대장간 일을 시작한 것은 14살이 되었던 1959년에 서울 영등포의 곽산대장간에서 일을 하면서부터이다. 여기서 11년간 대장간 일을 익혔다. 이후 파주에 내려와 ‘법원리대장간’에서 5년간 일을 하다 이곳 광탄의 ‘파주대장간’으로 옮겨 3년 정도 일을 하다가 대장간을 인수하였다. 그러니 현재까지 50여 년간 파주지역에서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는 셈이다. 


    전통은 전통대로, 때로는 현대식으로

    쇠스랑 자루를 메질하는 한근수 야장
    쇠스랑 자루를 메질하는 한근수 야장

    한근수 야장은 대장간에 전통적 방식의 화덕과 모루, 집게와 메 등을 갖추고 있으며 제작에 있어서도 메질과 담금질 등 전통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문고리의 이음매처럼 쇠를 든든하게 붙일 필요가 있을 때는 황토를 이용하여 접합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쇠를 불에 달군 다음 길게 늘렸다가 둥글게 휘어서 문고리 모양을 만든다. 이때 둥글게 말린 양 끝을 떨어지게 붙여야 하는데 여기서 접합할 부분에 황토 흙을 바른다. 향토 흙을 바른 다음 불에 달궈 이를 다시 메질을 하면서 단단하게 붙인다. 이러한 방식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황토 진흙을 발라 불에 달군 후 접합해야 잘 붙는다고 한다. 이후에도 잘 떨어지지 않고 주물로 만든 것처럼 튼튼하게 유지된다. 이처럼 황토 흙을 사용하여 쇠를 접합하는 방식은 전통 접쇠 방식에서도 사용된다. 접쇠란 강철과 연철 등 탄소량에서 다소 차이가 나는 철들을 여러 겹으로 붙여 강하면서도 탄력있는 우수한 철을 만드는 전통적인 대장 기법이다.

    접쇠를 할 때는 연철을 디귿자로 접은 후 그 사이에 강철을 끼워 붙이고 접쇠된 부분을 다시 늘여 또 디귿자로 접고 강철을 끼워 붙이기를 반복한다. 이때 황토 흙을 발라 작업을 하면 접합이 잘 된다. 그러나 이렇게 흙을 사용하는 방식은 실패하기도 쉬워서 무척 숙련된 야장만이 할 수 있는 고도의 기능이다. 한근수 야장은 이러한 접쇠까지는 아니지만 쇠를 접합할 때는 이러한 전통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제작 과정에서는 기계식 해머와 가스 용접기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초벌로 메질을 할 때는 기계식 해머를 이용하여 쇠를 늘린다. 이렇게 해서 쇠가 어느 정도 늘어나고 모양이 잡히면 최종 단계에서는 손으로 직접 메질을 하여 완성을 한다. 쇠스랑처럼 날이 갈라져야 하는 경우에는 가스 용접기를 사용하여 날을 가른다. 날을 세 갈래로 자른 다음에는 다시 불에 달군 다음, 날을 꺾고 손으로 메질을 하여 날을 세운다. 이처럼 초벌로 쇠를 늘리고 모양을 잡을 때는 기계식 해머와 가스 용접기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피한 선택이다. 인력이 부족하고 연로하여 기력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생계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기계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파주대장간의 한근수 야장
    파주대장간의 한근수 야장
    황토 진흙을 발라 쇠를 접합하는 모습
    황토 진흙을 발라 쇠를 접합하는 모습


    파주의 마지막 대장간

    다른 지역의 대장간들도 비슷한 상황이지만 현재 대장간을 계승할 후계자가 없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세울 수가 없어서 파주의 마지막 대장간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다. 현재 대장업과 야장 기술은 값싼 수입 제품과 인력 부족으로 인해 근근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장간에 대한 지원이나 활성화에 대한 방안 등이 없으면 기계식 제작 방식이나 수입품에 의해 전통 방식의 대장간과 야장이 소멸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경기도에서는 무형문화재로 〈야장(冶匠)〉이 지정되어 있으나 보유자는 1명에 불과하다. 보유자 이외의 다른 대장장이들에 대한 지원도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파주의 경우처럼 다른 지역에서도 마지막 대장간이 생겨나지 않도록 말이다.

  • 좋은 밥맛의 시작, 안성주물 전통가마솥

    안성주물에서는 전통방식으로 가마솥을 만든다

    전통가마솥은 석탄, 선천, 석회석 등에 불을 붙여 뜨거운 열로 녹인 쇳물을 솥 모양의 틀에 넣어서 아주 크고 우묵하게 만든 솥을 말한다. 솥의 성분과 제작 과정에서 솥의 원료를 전기를 통해 녹이고, 강철을 만들 때 화학 성분을 사용하는 현재 가마솥과 구분된다. 경기도 안성에는 100년이 넘도록 전통방식으로 가마솥을 만들고 있는 안성주물이 있다. 안성주물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의 주물 방식을 통해 가마솥을 생산하는 곳이다. 안성주물로 인해 안성은 주물을 대표하는 지역이 되었다.

    경복궁 주물 복원작품
    경복궁 주물 복원작품(사진출처:문화재청)

    3일동안 만드는 전통가마솥

    전통가마솥을 만드는 데에는 3일이 걸린다. 먼저 가마솥을 만들기 위한 형틀을 만들어야 한다. 형틀은 점토와 작은 알갱이로 이루어진 흰 모래인 규사를 섞은 흙을 잘 다져서 만든다. 이 형틀을 만드는 작업은 가마솥을 만들 때마다 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손이 많이 가고 힘든 작업이기도 하다. 형틀을 만든 다음에는 쇳물을 녹이는 작업을 한다. 작은 구멍이 많은 형태로 석탄의 물기를 다 말린 해탄에 불을 붙인 다음 선천, 석탄과 함께 석회석을 함께 넣어 뜨거운 바람으로 이들을 녹인다.


    석회석을 넣는 이유는 석회석이 불순물을 걸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1,500도 이상의 뜨거운 쇳물이 만들어지면 이것을 가마솥 모양으로 만든 거푸집에 붓게 된다. 거푸집은 청동기나 철기를 만들 때 쇠붙이를 녹인 쇳물을 넣어서 일정한 틀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 다음으로 거푸집에서 가마솥을 빼낸 다음 흙을 없앤다. 이렇게 가마솥이 완성되면 여기에 참기름을 발라 솥을 길들이는 과정을 더한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시중에서 보는 검은 색의 가마솥이 완성된다. 

    좋은 밥맛의 시작, 안성주물 전통가마솥
    좋은 밥맛의 시작, 안성주물 전통가마솥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안성주물

    경기도 안성시에 위치한 안성주물은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안성주물은 1910년 김대선에 의해 시작되었다. 충청북도 청원에서 농사를 짓던 김대선은 1900년대 초에 안성으로 터전을 옮겼다. 이곳에 터를 잡기 위해 김대선은 안성유기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이때 품질 좋은 놋쇠를 뜨거운 열로 녹인 후 다시 부어서 두드려 만드는 그릇인 방짜 유기 기술과 금속을 녹여서 만들고자 하는 모양의 틀에 넣어서 물건을 만드는 주물 기술을 배웠다. 이렇게 익힌 기술로 김대선은 안성장에서 쇠를 녹여서 가마솥을 때워주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안성장은 조선의 3대 시장이었다. 이후 가마솥을 수리하는 가게를 열었다가 1919년에는 가마솥을 만드는 작은 공장을 가족들과 함께 운영하기 시작했다. 


    김대선이 세운 가마솥 공장을 그의 아들인 김순성이 이어 현재 안성시청이 있는 안성시 봉산동에 자리를 잡았고, 주물공장을 확장하게 되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로 가마솥을 만들기 위해서는 철을 배급받아서 사용해야 했다. 배급받았던 철에는 불순물이 많아서 철의 순도를 높이는데 주력했고, 그렇게 높아진 기술력은 그의 가마솥 공장의 물건이 서울과 경기도에서 인기있는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때가 1945년 광복 이후였다. 이쯤 김순성의 아들인 김종훈이 가마솥 공장인 안성주물을 맡게 되었다. 6.25 전쟁 중에 김순성이 공장을 운영할 만큼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종훈은 아버지인 김순성의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만 안성주물을 맡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2023년 현재까지 안성주물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일평생을 가마솥을 비롯한 주물장에 인생을 바친 것이다. 이로 인해 김종훈의 주물기술은 2006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45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김종훈의 아들인 김성태가 안성주물을 맡고 있다. 1910년에 시작된 안성주물은 100이 넘게 석탄, 선천, 석회석 등에 불을 붙여 뜨거운 열로 녹인 쇳물을 솥모양의 틀에 넣어서 아주 크고 우묵하게 만든 솥을 만드는 전통방식으로 가마솥을 만들고 있다. 그렇게 안성주물은 안성을 대표하는 주물공장이 되었다.

  • 사인검과 삼정검의 예술성과 장인정신

    사인검과 삼정검

    사인검(四寅劍)은 벽사(辟邪), 군신 간의 의리, 국태민안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는 칼이다. 12년 만에 한 번꼴로 돌아오는,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제작하는 것이고, 또 공기도 길다. 장인 한 사람이 많아야 30~40자루밖에 제작하지 못한다. 게다가 사인검을 제작할 만큼 솜씨가 뛰어난 장인도 많지 않다. 반대로 벽사의 의미와 함께 예술적인 도검이어서 찾는 사람은 많다. 조선시대 사인검은 왕실에서 제작하여 공신이나 공로가 큰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것이었다.

    문경전통공예관 사인검 전경
    문경전통공예관 사인검 전경

    지금 이런 의미가 있는 행사로는 삼정검(三精劍) 수여식이 있다. 삼정검은 준장으로 진급하는 장군들에게 대통령이 수여하는 검이다. 그러나 현재 준장 진급자들에게 수여하는 삼정검은 사인검을 제대로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삼정’은 육·해·공 삼군이 호국·통일·번영 세 정신을 이룩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왕 이런 정신을 고취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제대로 제작한 삼정검을 수여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기야 해마다 수십 명이나 되는 진급자들에게 수여할 만한 수의 사인검을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기도 하다. 고가의 사인검을 수여할 만한 예산을 마련하기도 어렵다 보니 저가의 제품을 수여하고 있다.


    참요제마(斬妖除魔), 제간서악(除奸鋤惡)

    삼정검처럼 사인검은 왕실 소속 장인들이 제작하고, 왕이 공신에게 하사하였다. 사인검은 전투용 칼이 아니라 주술적 의기(儀器)다. 검신에는 28자 검결과 이십팔수의 별자리, 연화문 같은 길상 문양 등을 상감한다. 사인검의 검결은 아래와 같다.


    하늘은 정을 내리시고 땅은 영을 도우시니

    해와 달 모양 갖추고 산천 형태 갖추네

    천둥번개 몰아치고 현묘한 별자리 움직여

    산천의 악한 것 물리치고 현묘한 도리로 베어 바르게 하라

    乾降精 坤援靈

    日月象 岡澶形

    撝雷電 運玄坐

    推山惡 玄斬貞


    검결에는 『주역(周易)』과 도교(道敎)의 우주관이 담겨 있다. 사인검은 이 검결처럼 천지신명의 사악함을 물리치는 주술적 의기(儀器)여서 제작 과정은 경건했다. 도검을 제작하는 장인은 수개월 전부터 근신하고, 제작을 전후로 하여 제를 올린다. 검결을 새길 때에는 주문을 읊고, 잡인이나 동물의 출입을 금한다.


    순양의 시간에 단조 성형을 하는 이유

    사인검은 호랑이가 네 번 겹치는 시간, 즉 인년-인월-인일-인시(寅年-寅月-寅日-寅時)에 제작한다. 물론 칼의 제작 전 과정을 인시(03시~05시)에 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 야철 도검 부분 기능 전승자인 이상선 도검장은 사인검 제작 기간이 짧게는 3개월 길에는 6개월이라고 말한다. 검결이나 별자리 등을 약식으로 새기는 도검은 3개월, 별자리 28수, 검결 28자를 비롯하여 여러 길상 문양을 모두 새기고 금은상감을 하는 문화재급 도검을 재현하는 데는 6개월까지 걸린다.

    문경전통공예관 도검 제작과정
    문경전통공예관 도검 제작과정

    인년-인월-인일-인시에는 성형 직전 단계까지 준비해 검신을 타조만 한다. 이상선 도검장은 사인검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이 시간에 열처리한 것이냐 아니냐가 기준이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인시에 하는 열처리를 하면 사인검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인검이 될 수 없다. 도검 제작의 핵심인 셈이다. 하기야 열처리를 잘못하면 그간의 모든 공이 수포가 되니 그럴 만도 하다. 가령 인시에 열처리하다가 잘못되어 인시가 지나서 열처리하면, 그것은 사인검 목록에서 제외된다. 사인검은 결국 인년-인월-인일-인시 전에 열처리할 준비를 마치고 인시에 열처리하여 시간을 두고 완성하는 것이다.


    ‘천년 고철’로 만드는 도검

    사인검을 제작하는 쇠는 사철이나 철광으로 제련한 쇠가 아니라 ‘천년 고철’을 사용한다. 고대 제철 기능전승자인 이은철 도검장은 천년 고철을 목수들로부터 구한다고 말한다. 목수들에게 부탁하여 오래된 건물을 해체할 때 나오는 못이나 돌쩌귀 등 철을 모아주도록 의뢰한다. 이렇게 구한 쇠를 섭씨 1,350℃까지 가열하여 괴련철을 만들고, 괴련철을 가열하여 질흙을 바르고 두드리다가 쇠를 꺾고 접어 결합하고 다시 두드려서 압착하기를 반복한다. 많게는 15회까지 꺾어 접고 압착하는데, 이렇게 하면 쇠는 3~4만 겹이 되어 탄력이 좋고 단단하면서도 질겨진다.

    문경전통공예관 사인검
    문경전통공예관 사인검
    문경전통공예관 사인검
    문경전통공예관 사인검

    이런 쇠를 백련강이라고 한다. 백련강을 가열하여 두드리면서 점차 도검 형태로 성형하고, 깎칼로 깎고 줄로 다듬은 다음 담금질, 불림, 풀림 등의 열처리를 한다. 이 열처리를 인년-인월-인일-인시에 하면 ‘사인검’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인년-인월-인일-인시에 제작한 재료들은 시간을 두고 숫돌에 갈아 날을 세우고 소가죽으로 문질러 광을 내어 검신을 완성한다. 검신이 완성되면 손잡이와 칼집에 필요한 부품을 제작하고 장식을 조각해 두고 칼집을 제작한다. 이렇게 준비가 되면 이제 검신에 검결 및 별자리를 새기고 금은상감을 한다. 이은철 도검장은 전통 방식에 따라 감탕을 제조하여 그 위에 검신을 놓고 조각정으로 문양을 새긴다.


    도검에 서린 정신과 예술성을 실력으로 증명하다

    경기도무형문화재 제62호 홍석현 환도장은 전통 방식으로 고려대 박물관 소장 사인검을 재현하여 2009년 제28회 전승공예대전에서 금속 부문 대통령상 수상하였다. 섬세한 상감기법과 조형기법이 돋보인다는 심사평을 받았다. 2010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철제 금은입사 사인참사검을 재현했다. 이 참사검은 손잡이에는 산스크리스트 진언문과 부적이 금으로 상감되어 있고 연화형 봉두 별자리를 금 상감했다. 코등이에도 앞뒤로 '옴마니반메흠'의 육자진언이 새겨져 있다. 날 부분의 별자리는 깔끔하면서도 꽉 찬 느낌을 준다. 전서체 검결 양옆으로 산스크리트어가 금상감되어 있어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이 사인검은 현존 사인검 유물 중 예술적 가치가 가장 높다. 이처럼 예술적 가치가 높은 사인검을 재현하는 일은 도검에 서린 정신과 예술성을 재현하는 일이다. 그뿐 아니라 장인으로서 예술가로서 실력을 증명함으로써 자신이 제작하는 제품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법이기도 하다.

    문경전통공예관 사인검
    문경전통공예관 사인검
    문경전통공예관 사인검 설명
    문경전통공예관 사인검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