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로는 조선시대에 수도인 한양에서 남쪽에 자리한 수원 화성으로 이어지던 간선도로이며, 수원별로(水原別路)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던 간선도로가 최종적으로는 10대로로 구성되므로 수원로를 간선도로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 길은 도성에서 노량진-시흥-안양 행궁-사근평 행궁-수원 행궁을 거쳐 건릉까지 이어지는 구간으로 총 100리에 달하는 거리이다. 여기에서 시흥은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가 아니라 서울특별시 금천구의 시흥동 일대를 가리킨다. 건릉(健陵)은 조선 22대 왕이었던 정조와 그의 부인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를 함께 안장한 무덤으로 행정구역 상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 1-1에 위치한다. 건릉과 융릉의 앞을 지나는 도로의 명칭은 효행로이다.
건릉과 융릉(현륭원)은 정조 및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1789년 화성으로 옮기고 이를 현륭원이라 칭했으며, 매년 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리고 친제를 올렸다. 정조가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행차하던 도로가 바로 수원로이다. 정조가 어머니의 회갑을 맞은 1795년 한양 도성의 창덕궁에서 현륭원까지 8일에 걸쳐 이동한 행차를 을묘년 원행이라 한다. 정조는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고 수원화성의 행궁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베풀었다.
본래 정조가 수원으로 행차하던 길은 동작나루를 통해 남태령-과천-사근내-지지대고개를 넘는 구간이었으나,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계기로 남태령 고개를 넘어 과천으로 이어지는 험한 구간을 이용하지 않고, 한강의 노들나루에서 시흥(지금의 서울특별시 금천구 일대)과 안양을 거쳐 수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다른 길을 개통하였다. 이 때문에 수원별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정조 이후 모든 임금이 지나던 길이 되었다.
수원시와 의왕시 경계부에서 지금의 국도 1호선이 통과하는 구간의 지지대고개는 과거에 사근현 또는 미륵당이 있어 미륵현으로 불렸다. 해발 약 100m에 달하는 지지대고개의 남쪽으로는 기복이 작은 저지대가 넓게 펼쳐진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으로 이동하면서, 아버지의 묘가 내려다보이는 데도 이동 속도가 너무 느리게 느껴져 “왜 이리 더딘가”라고 아쉬워하였다고 한다. 또한 참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지지대고개를 넘으면 더 이상 아버지의 묘를 볼 수가 없어 안타깝고 그리운 마음에 고갯마루에서 눈물을 흘리며 한참을 머물렀다고 한다.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조가 능을 뒤돌아보며 고개를 떠나기를 아쉬워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지지대고개에 이르면 왕의 이동 속도가 느릿느릿해졌다는 데에서 한자의 '느릴 지(遲)'자 두 개를 붙여 지지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지대고개에는 정조의 효심을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시민들의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조성된 효행공원이 있으며, 여기에는 효행기념관과 정조의 동상 등이 있다. 수원로는 지지대고개부터 대황교 근처에서 현륭원 방향으로 향하고 충청도와 전라도로 뻗은 대로는 진위 방향으로 나아간다.
일본이 1901년 경부선 철도 노선을 계획하면서 안양을 지나 지지대고개를 뚫고 팔달산 뒤쪽을 관통하는 노선을 구상했다고 한다. 수원의 주민들이 지지대고개 통과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그 결과 경부선 철도는 수원화성을 돌아 지금과 같이 군포-부곡-수원역의 노선으로 확정되었다. 수원로는 근현대 들어 수원을 서울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동맥이라 할 수 있다.
경기도 수원시 삼일중학교 교명의 삼일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교리인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학교의 연원도 교회 부설로 출발했고, 후일 운영도 미션 스쿨이었기에, 성부·성자·성령 3위가 하나라는 뜻을 가져다 이름으로 삼은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생각은 달랐던 듯하다. 삼일이 기미년의 3·1운동을 계속 연상시켰기 때문일 터이다. 삼일학교는 1938년 결국 팔달심상소학교로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당시 교무주임 유부영(柳富榮) 선생은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창씨개명을 거부하다 강제 징용되었고, 돌아오지 못했다. 삼일이라는 학교 이름은 해방 후 1946년이 되어서야 되찾을 수 있었다.
삼일학교의 기원은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원 출신 애국지사이자 기독교인인 이하영(李夏榮), 임면수(林冕洙) 선생 등이 주동이 되어 당시 수원군 보시동 북감리교회에서 문을 연 ‘매일학교’가 삼일학교의 전신이다. 삼일학교는 만세운동 이전인 1915년 삼일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지금도 삼일중학교 교정에 건재한 아담스 기념관은 1923년 삼일학교의 새로운 교사(校舍)로 지어졌다. 아담스(Adams)는 건축비를 지원한 미국의 교회 이름으로부터 유래했다. 당시 미 북감리회 소속 수원지방 감리사였던 노블(N. A. Noble) 목사가 변변한 교실도 없이 교회 건물에 더부살이하는 삼일학교의 소식을 자신의 고향 교회에 알렸고, 감동한 아담스 교회 교인들이 상당액의 달러를 보내와 건축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아담스 기념관은 중국인 시공 책임자[왕영덕]의 감독 아래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이다. 좌우 벽면을 살짝 들어가게 쌓은 방식이라든가, 경사진 우진각 지붕에 환기를 위해 설치한 삼각형 창 등은 단지 기능만 생각해 지은 학교 건물이 아니라는 점을 한눈에 느끼게 해 준다. 좌우대칭이 아니라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친 현관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올 정도다.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은 투박해 보이기 마련이지만, 아담스 기념관은 매끈하고 세련된 인상을 준다.
아담스 기념관 준공이 당시 삼일학교 학생들에게 어떤 감격을 주었을지 상상하게 하는 사진이 남아 있다. 2014년 판 『수원시사』 10권에는 1920년대 기념사진이 실려 있다. 검은 교모에 책 보퉁이를 들었거나, 두루마기를 입은 학생들 뒤로 아담스 기념관이 보인다. 건물의 외형은 현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같은 시기 수원을 찍은 사진들에는 초가집만 즐비할 뿐, 아담스 기념관과 같은 ‘최첨단’ 건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담스 기념관은 튼튼하게 지어져서, 한국전쟁 시기에도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전쟁 당시 아담스 기념관은 네덜란드 군의 막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담스 기념관은 현재도 도서열람실, 북카페, 영어학습실, 특기적성실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수원 시티 투어의 코스 가운데 한 곳인 아담스 기념관은 경기도기념물 제 175호다.
수원역에서 오산 방향으로 전철 길을 따라가다 보면 두 개의 급수탑을 만난다. 두 개가 굴뚝모양의 원통형 급수탑이다. 키가 큰 회색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것과 그 옆에 낮은 급수탑은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아담한 모양새이다. 출근길 늘 지나는 길을 무심코 지나치다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문득 발견할 때가 있다.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자꾸만 보니 사랑스럽다.
수원역 급수탑은 1924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제작되었다. 과거 수원역에는 일제강점기 개통한 수인선, 수여선 두 개의 협궤열차의 시종착역이었다. 이때 사용되었던 급수탑은 증기기관차 운행에 필요한 물을 저장했다가 물을 공급하는 시설이다. 두 협궤열차가 폐선되고 난 후 급수탑은 수원역 구내에 남아있었다.
2년 전 구청에서 보수공사를 진행해서 철로 옆 담을 허물어 지나는 사람들이 급수탑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기관사들이 목욕하던 목욕탕 등 남아있던 다른 부속시설들이 허물어져 이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세월은 지났고 바삐 달려와 수증기를 내뿜으며 숨을 고르던 열차의 모습은 이제 없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길을 따라 하루 하루를 바삐 시작하고 있다. 열차가 다니지 않는 급수탑의 시간은 이제 세월이 빗겨간 듯 느긋하게 흐르고 있다.
식민지 조선을 수탈하기 위한 일본에 의해 건설되어 표준궤도와 비교하면 절반에 불과했던 협궤열차는 인천에서 출발해 시흥, 안산, 화성, 시흥을 거쳐 수원까지 운행되었던 수인선과 수원에서 출발해 용인, 이천, 여주까지 운행되었던 수여선이다.
빵빵거리는 꼬마기차의 기적 소리가 울리면 역마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무거운 짐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들고 열차에 올랐다. 인천의 소금과 젓갈이 그렇게 내륙으로 들어갔고 여주, 이천 등지의 쌀과 채소들이 철도를 타고 다른 마을로 향했다. 학생들의 등하교시간에 서로 마주 보고 앉으면 무릎이 닿을 정도로 좁았던 열차에는 고단한 삶을 살던 젓갈 장수의 비린내가 풍겼고 소래에 김장젓갈을 사러가는 주부들과 인천 송도유원지로 여주 신륵사로 소풍가는 젊은 연인들과 학생들로 가득했다. 철길은 동네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신나는 놀이터였다. 서민들의 애환을 가득 담은 채 흔들흔들 달려가던 시속 20Km의 협궤열차, 지금은 비록 사라졌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있다.
지난날 내 기억에 언저리를 만나게 되는 공간, 생각만으로도 어린 시절의 훈훈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 공간을 만났을 때의 따뜻한 마음을 여행은 그렇게 우리 삶을 위로한다. 많은 이들이 만나고 떠났던 철길위에 이제는 두개의 급수탑만 남아있다.
* 두 개의 급수탑 중 콘크리트로 된 급수탑(준철도기념물 제11-시-02-14호)은 경부선에 사용되었고 붉은 벽돌로 된 낮은 급수탑(준철도기념물 제11-시-02-15호)은 수인선, 수여선에 사용하던 급수탑이다.
수인선은 1937년 8월 영업을 개시하여 1995년 12월 31일 폐선하였고
수여선은 1930년 12월 1일 개통하여 1972년 4월 1일 폐선하였다.
수원 지역에 골목박물관이 새로 문을 열었다. 수원화성의 장안문에서 남쪽으로 사백 미터. 장안사거리에서 북수동 초입 좌측 골목을 돌아 들어가면 커다란 나무 대문이 보인다. 묵직한 여닫이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아담한 마당에 옛집 두 채가 서로 옆구리를 대고 ㅅ자로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행궁동 골목박물관이다. 행궁동은 수원화성으로 둘러싸인 성안 마을이다. 성 안쪽은 과거에 수원의 행정 도심이자 상업 중심지였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골목마다 이야기가 넘쳐났다. 골목박물관은 행궁동 사람들의 그 시절 이야기, 물건, 영상 등을 기록으로 담고 있다.
박물관 마당 한편에 있는 “행궁동 골목을 걷다”를 따라가 본다. 수원화성을 중심으로 하는 열두 개의 작은 동네들을 통틀어 행궁동이라고 하는데, 이 동네 골목을 48시간 동안 걸어서 둘러볼 수 있게 짜 놓은 것이다. 첫날 오전에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동네 남창동을 여유롭게 걷고, 오후에는 신풍동과 장안동의 낮은 담벼락과 골목 가게들을 구경한다. 어두워지면 달빛 아래 성곽 길 따라 북수동, 남수동으로 저녁여행을 한다. 안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을 걷다 보면 쭉 뻗은 길로만 가는 것이 얼마나 재미없는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도시가 발달하고 커지면서 골목이 있던 주택가는 빠른 속도로 옛 모습을 잃었다. 행궁동도 그 흐름을 비껴가진 못했다. 하지만 수원화성이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성안 마을만의 정서와 역사가 아직 남아 있다. 전시실에 들어서기 전, 낡은 풍금이 눈에 띈다. 색색의 분필, 옛날 교과서 등은 신풍초등학교의 기증품이다. 신풍초등학교는 122년의 역사를 지녔지만 2018년 2월을 끝으로 이제는 교문과 강당만 남아 있다.
친구들과 어쩌다 신풍학교 바로 위에 있던 동굴로 놀러가거나 조그만 다람쥐 굴에 연기를 피워 다람쥐를 잡던 즐거운 기억도 남아있다. …신풍학교가 소풍가는 날이면 비가 온다는 설화가 있었는데 실제로 소풍만 가면 비가 왔고…
-‘골목잡지 사이다’5권 65p, 1960년대 신풍학교를 다닌 이달호 수원화성박물관 관장 이야기-
비록 학교는 사라졌지만 아이들의 온기로 활기차던 골목의 기억은 여기저기 남아 있다. 하지만 기록이 없으면, 종국엔 기억했던 사람과 함께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 박물관 한편 영상실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인터뷰 영상이 “행궁동 인생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상영되고 있다. 분홍 의자에 앉으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던 수원의 모습,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기찻길인 수려선 이야기, 수원 내의 실향민 사진 등이 화면에 담겨 나온다. 그 시절 사람들의 기억 조각을 찾아 옛 수원의 모습을 그려본다.
전시를 준비한 더페이퍼는 많은 사람들이 소통하는 공동체 문화를 살리고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사람의 이야기를 담는 ‘골목잡지 사이다’를 꾸준히 발행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행궁동 취재를 통해 만난 어르신들과의 인터뷰를 각각 한 권의 얇은 책으로 만들었다. 흔히 “나 살아온 얘기 책 한 권은 족히 될 거”라고 하시는 어르신들 말씀처럼 진짜 한 권의 책으로 꾸려냈다. 오랜 세월 동네를 지켜온 토박이 분들의 인생 이야기를 행궁동 골목박물관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행궁동에 오랫동안 거주하신 다섯 분의 이야기는 따로 집 모양으로 된 전시공간에 물건들과 함께 담았다.
행궁동 인생극장 옆은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오빠생각” 전시 공간이다. 동요 ‘오빠 생각’의 작사가인 아동문학가 최순애는 수원화성 안 동네에서 태어났다. 아름다운 동시들을 썼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발행된 동시집 한 권조차 남기질 못했다. 그리고 노래의 주인공인 오빠 최영주는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잡지들을 발행했던 출판 편집자였지만 고향에서조차 잊힌 인물이다. 이번 전시로 그들의 삶이 되살아났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볼거리는 무엇보다 “행궁동 살림살이”다. 행궁동 주민들은 직접 시민 수집가가 되어 2년여 동안 민간구술 기록과 사진, 영상, 유물을 수집했다. 여러 대에 걸쳐 수십 년 동안 보관했던, 소소한 삶의 기억을 담은 오랜 물건들이 그렇게 골목박물관에 자리하게 됐다.
시집올 때 받은 예단함, 100년이 넘은 태극기, 병풍을 만들고 싶어 모은 복권 박스, 시간을 스스로 증명하는 녹슨 청동주걱…여섯 명의 시동생에 자녀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혼자서 대식구의 끼니를 챙겼던 나무주걱과 국자, 뒤집개는 식당에서나 보던 것들이다.
-‘골목잡지 사이다’ 14권 76p, 남문통 이병희 할머니 이야기-
그 물건 속에는 삶의 역사가 지문처럼 남겨져 있다. 매향동에 사는 정옥선 님(71세)의 나막신은 젊은 나이에 먼저 떠난 남편의 사랑이다. 10여 년을 아프던 서른 후반의 남편이 어느 날 시골에서 가져온 향나무로 밤마다 깎아서 신겨보며 만든 신발이다. 나이 마흔에 홀로된 아내는 나막신과 함께 할머니가 되었다. 장안동 신정호 님(74세) 댁에 있던 꽃 항아리는 한때 대청마루 뒤주 위에 있었고, 어느 날은 부엌에 놓였다. 속에 사탕이나 열쇠가 들어있던 때도 있었고, 물김치가 담기기도 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항아리가 어머니의 물김치 맛까지 상기시킨다.
물건의 뒷이야기 가운데 가장 마음 시린 것은 매화동 박복순 님(1929년생)의 유품인 양동이 두 개다. 평생 아기가 없다가, 추운 겨울 업둥이를 맞아 키운 그는 스물다섯에 남편에게 이 양동이를 생일 선물로 받았다. 남편은 며칠을 두드리고 땜질하여 양동이를 만들었다. 열다섯 번 넘는 이사에도 육십 년을 함께한 양동이. 박 할머니는 이제 돌아가셨고 양동이만 남았다. 사연을 모른다면 쳐다볼 일 없을 양동이가 이곳 골목박물관에 자리해 사람 살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행궁동 골목박물관이 만들어진 공간은 1920년에 지어진 ‘묘수사’라는 사찰이었다. 백 년 가까이 된 이 건물이 더는 사찰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던 공간이 행궁동 골목박물관이 되어 주민들의 공유된 기억을 음미하며,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교류 공간이 되었다.
수여선(水驪線)은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 수원~여주 간을 잇던 철도 노선이었다. 수여선은 궤간이 표준보다 좁고 운행속도가 낮은 협궤 철도였다. 열차의 크기 역시 표준보다 작아서 꼬마열차라고 불렸다. 1931년에 개통한 수여선은 수원, 용인, 이천, 여주등 20개의 역을 거쳐 달렸다. 연료를 달리하는 기관차와 동차, 두 종류의 열차가 수여선 철도를 달렸다. 수여선은 수원에서 여주까지 4시간 40분이 걸렸다.
수여선은 일제 강점기에 지역 물자를 강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설되었다. 사설 철도회사인 경동철도주식회사에서 1930년 수원~이천 구간을 먼저 개통하였고 이듬해에 이천~여주 구간을 개통하였다. 1937년에는 수원~인천을 잇는 수인선을 개통하여 여주에서 항구가 있는 인천까지 최단거리로 직결되는 경제수탈 노선을 완성하였다. 배를 이용해 해산물과 소금 석유 등을 수여선까지 운반해와 원주와 충주에 팔고 그 지역의 특산품을 다시 수여선 열차로 운반하였다. 수여선은 물자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당시 마을 청년을 실어 나르는 징병의 기능도 했다.
그러나 수여선은 가슴 아픈 역사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수여선은 물자수송을 큰 목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주민들의 이동 수단이 되기도 했다. 수여선이 생기기 전에는 수원~여주 간의 지역 교류는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수여선 개통 이후 떨어져 있던 지인들을 더 쉽게 만날 수 있게 되었고, 학생들은 용인과 수원으로 통학할 때 수여선을 이용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느리게 달리는 열차인 만큼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인연도 많았다. 승무원이 승객들의 행선지를 잘 알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지역 사람들은 수여선을 자주 이용했다.
특히 수여선을 자주 이용했던 사람들은 장사꾼이었다. 물건을 팔기 위해 장에 나가는 교통수단으로 수여선이 많이 이용되었다. 수여선 노선 부근에는 지역의 읍내장을 비롯하여 영동시장, 오천장, 김량장, 이천장 등이 있었다. 이 밖에 놀라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관광객들이 여주의 세종대왕릉과 신륵사에 가기 위해 수여선에 올랐다.
수여선은 해방 후에도 꾸준히 많은 이들의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지만 1960년 이후 도로 사정이 개선되면서 화물 수송량이 급감하였다. 거기에 승객의 수는 줄지 않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승객의 무임승차로 점점 적자가 증가했다. 정부는 연간 1억 7900만 원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하던 수여선을 1972년 3월 31일자로 폐지하였다. 수여선은 마지막 운행 날 ‘주민 여러분 안녕’이라는 현수막을, 여주에서 열린 수여선 종별 운행식에서는 ‘여주야 잘 있거라’라는 현수막을 달고 떠났다.
수여선은 지금 그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수여선이 다녔던 길의 대부분이 재개발되어 아파트, 도로 등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여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용인시청에서 양지까지 수여선이 지나던 길은 경기도가 경기옛길 영담길이라는 길을 만들어 ‘수여선 옛길’이라고 이름 지었다. 도보로 표지판을 따라 수여선이 지나던 길을 걸을 수 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갔던 화성역은 지금 버스 정류장의 이름이 되었고 수원역 광장의 남동쪽에서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을 볼 수 있다. 화성역 구간, 죽당역에서 매류역에 이르는 구간은 기찻길이 선형을 보존한 채로 도로가 되었다. 기흥역에서 송담대역까지의 노선은 수여선의 신갈~용인 구간의 노선과 거의 일치한다. 과거 이천역이 있던 자리에는 수여선과 이천역에 대한 설명이 새겨진 이천역 비석이 놓여있고 매류리 역촌마을의 마을회관 옆에는 60년대 역과 마을의 풍경을 보여주는 그림판과 수여선·수인선에 대한 짧은 설명이 적혀 있다. 한때 경기 지역의 주요하고 친근한 교통수단이었던 협궤열차 수여선의 자취는 이렇듯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중음식이었던 육회가 경기도의 향토음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경기도의 지역적ㆍ행정적 특수성에 기인한다. 조선시대에는 수도 한양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경기ㆍ황해도ㆍ평안도ㆍ함경도ㆍ강원도ㆍ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 등 팔도로 나누었다. 그런데 지금은 경기도라 부르지만 조선시대에는 경기도라 하지 않고 ‘경기’라 하였고, 나머지 일곱 개의 지역은 모두 ‘도’를 붙여서 구분하였다.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편찬한 법전을 비롯한 각종 문부를 보면 경기도라 하지 않고 ‘경기’라고 표기한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경기’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의 『시경(詩經)』, 『맹자』 등에서 유래한다. 『시경』에는 ‘기내(畿內)의 땅이여 백성이 머물러 사는 곳이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왕도(王都) 주변 사방 오백 리 이내의 땅을 경기로 획정하고 천자(天子) 직할지(直轄地)로 삼은 데서 비롯된다. 경기는 기내(畿內), 기전(畿甸)으로도 불리었다. 즉 조선에서의 ’경기‘는 도성인 한양을 둘러싼 인근 지역을 일컫는 것이었고, 다른 지방의 도와는 달리 군사적으로는 도성을 옹위하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빨리 도성의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지역으로 기능하였다. 현재 경기도의 도청은 수원시에 있지만 조선시대의 경기감영은 지금 서대문이라 불리는 돈의문(敦義門) 밖에 바로 위치하였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교남동의 서대문 적십자병원 자리가 바로 경기감영 터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경기는 도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보니 한양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여건을 갖출 수 있었다.
실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17세기 중반 이후는 군사제도가 도성방위중심으로 개편되면서 한양에는 훈련도감과 금위영, 한양 이북은 북한산성의 총융청과 이남은 남한산성의 수어청 등 사영(四營) 방위체제가 구축되었다. 18세기 정조(正祖)대에 이르러서는 경기지역의 동서남북으로 개성ㆍ강화ㆍ광주ㆍ수원을 정2품 유수부(留守府)로 승격하고, 각각 경리영(經理營)ㆍ진무영(鎭撫營)ㆍ총리영(總理營)등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군영의 사(使)를 유수가 겸임토록 하였다. 광주목에서 광주유수부가 된 광주의 경우는 이미 수어청(守禦廳)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관직 간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수어사가 광주유수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도성방위체제의 변화는 단순히 군사적ㆍ행정적인 변화에만 그치지 않고, 궁중과 한양의 문화가 경기지역에 유입되는 것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여 농성을 하다가 투항한 기간이 불과 두 달여 밖에 안 되지만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남한산성 인근 광주지역에는 도성의 문물이 전파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정조가 현재의 수원시에 축조하였던 화성(華城)과 화성행궁(行宮)은 국왕이 설계하고 직접 공사를 주관한 조선 최초 최대의 ‘신도시 조성계획’ 이었으며, 화성에 전국의 문물과 경제력이 집결하고 궁중문화가 지방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그야말로 작은 도성이었다.
조선시대 대개의 왕릉이 도성 주변인 경기도 구리시나 고양시 등에 위치하였던 것은 국왕의 능행(陵行)을 편하게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현재의 서울축별시 동대문구 전농동 배봉산에 있던 생부(生父)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인 영우원(永祐園)을 1789년(정조 13) 화성 신도시 근처로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으로 명명하여 재위기간 중 30여 회 이상의 장거리 능을 하였다. 또한 정조는 1795년(정조 19)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도성이 아닌 화성행궁에서 성대하게 연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조도 사후에 부친의 묘인 현륭원 근처 건릉(健陵)에 안장되었고, 정조의 아들인 순조(純祖)대 이후로도 수원 능행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정조의 신도시 화성 건설로 인한 행행(行幸)과 현륭원으로의 능행은 조선후기 한양과 도성의 궁중문화가 경기지역에 확산되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현재 경기 도정(道政)의 중심지인 수원시가 오래전부터 소갈비를 양념에 재워 구워먹는 ‘수원갈비’로 유명한 지역이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조선시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원칙적으로 소를 임의로 도살하는 것을 국법으로 엄금하였다. 소를 잡아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해당 관아의 수령에게 타당한 사유를 신고한 후 허가를 받아야 가능했다. 농경국가인 조선에서 소는 국가적인 생산수단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잡아먹을 수 없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일반 민인들은 닭이나 개, 돼지 등을 주로 식용하였다. 그런데 수원의 경우에는 궁중음식이었던 소갈비구이가 민간에 전파되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상품화된 식품으로 판매되는 수원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으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육회와 같은 생고기를 식용한 역사는 비교적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근거로 유교의 사서삼경 중 하나인 『맹자』 진심하(盡心下)편에 회자(膾炙)라는 말이 언급될 정도로 오래되었다. 회자에서 ‘膾’는 생고기 음식을 이르며, ‘炙’는 익힌 고기를 뜻한다. 특히 남송(南宋)의 성리학(性理學)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고 개국한 조선에서는 『논어』에 공자도 즐겨 먹었다는 육회를 자연스레 먹는 것이 음식습속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시대 육회에 대한 기록은 18세기 무렵의 기록에서 집중적으로 관찰된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면 1766년 유중림(柳重臨)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1797년의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1800년대 초 저자 미상의 『주찬(酒饌)』, 1815년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閨閤叢書)』, 1827년 서유구(徐有榘)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1800년 말 저자 미상의 『시의전서(是議全書)』 등이다. 이상의 기록에는 소뿐만 아니라 돼지ㆍ양을 비롯한 각종 어육의 고기와 가죽, 내장 등 특수부위까지 가공하여 회로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 눈길이 가는 자료는 『원행을묘정리의궤』이다. 정조가 화성행궁에서 열었던 생모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찬품단자에는 회(膾)가 무려 9회나 기록되어 있다. 그 중 소의 살코기를 간장 양념에 참기름, 후추, 깨 등으로 조리한 육회는 총 4회가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육회가 궁중음식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갈비의 뜻은 "소나 돼지, 닭 따위의 가슴통을 이루는 좌우 열두 개의 굽은 뼈와 살을 식용으로 이르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갈비라 고 하면 소갈비를 말하고 소갈비 구이를 갈비라는 요리로 인식한다.
특별한 날, 즐겨 먹는 음식 중 하나인 갈비구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대표 한국음식이다. 옛 문헌들에서 등장하는 갈비구이는 『증보산림경제』의 ‘소갈비구이’, 『시의전서』,와 『조선요리제법』에서는 ‘가리구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갈비구이’로 소개되어 있다.
특히 갈비는 수원이 자랑하는 향토음식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음식이다. 조선 22대 왕 정조는 부친(사도세자)을 기리고 국가 개혁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조 18년(1794년), 부친의 묘를 옮기면서 화성(華城)축조를 시작해 2년 10개월 만에 완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화성축조와 관련하여 수원으로 모여들었고, 토목공사에 힘들어하는 인부들의 건강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농업생산에 큰 축을 담당하는 소를 함부로 도축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화성을 건설하면서 이 지역에서는 예외적으로 소의 도축이 허용되었고, 이후 자연스럽게 우시장도 발달하게 되었다. 수원에서는 1940년대까지 전국 최대의 우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지역 환경의 영향으로 수원에서는 소를 이용한 음식도 비교적 다양하게 발전되어 왔다.
수원 갈비는 1940년대 개업한 '화춘옥'이라는 식당에서 탄생하였다. 이 식당은 해장국에 갈비를 넣어주던 것으로 입소문을 탔는데 1956년, 갈비에 갖은 양념을 버무리고 소금으로 간을 한 후 숯불에 구워 팔면서 수원 갈비의 시초가 되었다. 수원 ‘화춘옥’의 갈비는 1960년대 전직 대통령이 자주 이 식당을 애용하면서 수원 갈비의 맛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참숯으로 굽는 수원 갈비는인공 감미료를 사용하지 않아 담백한 맛이 특징이며, 넉넉한 양으로 인기가 높다. 한 대에 15cm 이상 되는 크기로 그 양이 푸짐해 ‘왕갈비’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수원갈비는 1985년수원시 고유 향토음식으로 지정되어 그 맛과 전통을 인정받았다.
소갈비(뼈포함), 잣, 양념장(간장, 배즙, 설탕, 다진 마늘, 파, 후춧가루, 참기름, 깨소금)
조리과정경기도 수원시 영동시장에 ‘거북산당’이라 부르고, 매년 10월 ‘경기도 도당굿’이 행해지는 제당이 있다. 1986년 4월 ‘수원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원래는 마을 주민들을 위한 제당이었으나, 시장이 형성되면서 상인들 중심으로 제의를 진행한다.
거북산당의 유래와 변천
거북산당이 위치한 곳은 원래 조그마한 동산이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수원 화성을 축조하던 당시에도 거북처럼 생겨 ‘거북바위[구암(龜巖)]’라는 큰 바위가 있었고, 그 곁에 제법 큰 연못도 있었다. 언제부터 신당(神堂)이 건축되었는지는 모르지만, 1920년대에도 신당이 거북바위 옆에 있었다. 거북산당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4년이다.
조선 시대 수원 화성 축조 후 지금의 수원시 구천동 부근에 시장이 형성되었다. 정조 때 특혜를 받은 상인들에 의해 성내(城內)시장, 성외(城外)시장, 우시장 등이 열렸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기존의 성외 시장을 계승한 영동시장을 포함한 9개의 시장이 자리를 잡았다. 곧 구천동 주민들의 대다수가 시장의 상가 주인이거나 시장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1972년 영동시장은 ‘영동시장주식회사’라는 법인체가 되었다. 시장 상가 업주들로 구성된 ‘시장번영회’라는 단체가 구성되었고, 거북산당에서의 제의와 경기도당굿은 시장번영회가 중심이 되어 거행하게 되었다.
거북산당 관련 제의에는 크게 당고사라 부르는 ‘당굿’과 ‘도당굿’이 있다. 평상시에는 당고사로 불리는 소규모 제의가 치러지고, 제비가 넉넉하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도당굿을 거행하였다. 당고사는 음력 시월 초이렛날에 거행된다. 제의를 진행하기 하루 전날 밤에 ‘주굿’이라 하여 당주 또는 주무의 집에서 떡시루를 쪄서 자신이 위하고 있는 신들에게 미리 올린다. 제의 당일에 소머리나 돼지머리, 떡시루, 과일 등 제물을 차려 놓고 아침부터 굿을 한다. 굿은 대왕굿, 도당굿, 칠성굿, 군웅굿, 산신굿, 서낭굿 순으로 진행한다. 거북산당 “도당굿을 하지 않으면 시장에 불이 잘 난다.”라는 속설이 있듯이 시장 상인들에게 거북산당은 시장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대상이 되었다.
‘수원영동시장’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영동 팔달문 인근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팔달문[수원화성 남문] 안팎으로 개설되었던 '성내시장'과 '성외시장', 그리고 '수원우시장'의 전통을 잇고 있다. 수원영동시장이 정식으로 시장을 등록한 것은 1919년이지만, 실제 시장이 탄생한 것은 1796년경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경기 남부 최대의 전통시장이다. 현재 수원영동시장은 골목형 시장이 아닌 3층 규모의 단일 건물에 200여 개의 점포가 입점한 상설시장으로 운영되며, 주단, 포목, 커튼, 수예, 의류, 패션잡화, 생활잡화 등 다양한 품목을 판매하고 있다. 또한, 한복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40여 개의 점포가 있어 ‘한복특화시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수원영동시장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성내시장'과 '성외시장'은 정조 때 특혜를 받은 상인들에 의해 개설된 시장이다. 정조는 1794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화성을 만들었는데, 화성 안에는 상가와 시장이 들어설 자리를 조성하였고, 인삼, 관모를 비롯하여 중국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제시하여 나라 안의 큰 부자들이 모이도록 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많은 상인이 기회를 얻기 위해 수원으로 모여들었다. 거대 자본과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는데, 당시 성내시장은 매월 9, 19, 29일에 우시장과 함께 열렸으며, 성외시장은 매월 4, 14, 24일에 장이 개설되었다. 이중 성외시장은 일제강점기 ‘영정시장’이라고 불리다가 1949년 수원이 시로 승격하면서 오늘날의 이름인 ‘영동시장’으로 부르게 되었다. 당시 영동시장은 매월 4, 9일에 장이 열렸다.
정조는 화성을 만든 후 수원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농민들에게 종자와 소를 나눠주고 둔전을 운영하였다. 이후 늘어난 소를 팔려는 농민들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우시장이 형성되었다. '수원우시장'은 매월 9, 19, 29일에 성내시장과 함께 열렸는데, 당시 한양 도성 내에서는 도축이 엄격히 금지되었기 때문에 한양에서 소를 거래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수원우시장을 찾았다. 더욱이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운행하면서 연간 2만두 이상의 소가 거래되는 전국 3대 우시장 중 한 곳으로 성장하였다.
우시장의 성장과 함께 수원에는 자연스럽게 소고기를 취급하는 음식점들이 생겨났다. 수원갈비의 유래는 해방 이후 팔달문 밖 장터[현재 수원영동시장]의 싸전거리에서 이귀성(1900∼1964)씨가 '화춘옥'(華春屋)을 세운 것이 시초가 되었다. 초기 화춘옥에서는 설렁탕, 해장국, 육개장 등을 판매했으며, 1946년에 처음으로 숯불에 구운 양념갈비를 팔기 시작했다. 수원갈비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수원갈비의 맛을 보기 위해 화춘옥을 자주 찾으면서부터였다. 화춘옥을 시작으로 수원 전역에는 많은 갈빗집이 생겨났으며, 수원시에서는 수원갈비의 맛과 명성을 알리기 위해 1995년부터 ‘수원양념갈비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우리는 치킨 종주국이라고 하는 미국보다 다양한 맛의 치킨을 파는 치킨공화국,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치킨과 관련된 신조어만 해도 수십가지다. 치킨과 하느님의 합성어인 ‘치느님’, 치킨과 맥주를 함께먹는 새로운 문화인 ‘치맥’, 치킨의 맛을 감별하는 ‘치믈리에’ 등 우리의 치킨사랑이 느껴지는 단어들이속속 생겨나고 있다. 우리나라에 있는 치킨집 점포의 개수가 전 세계 맥도날드 매장의 수를 뛰어넘었다고 한다. 대단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큰 궁금증이 생긴다. “이 치킨의 역사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우리나라 치킨의 원조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주한미군 유래설과 전통시장 유래설이다.
우선, 주한미군이 추수감사절에 칠면조 대신 닭을 튀겨먹은 것이 오늘날 치킨요리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혹은 미국 남부의 프라이드치킨 문화가 미군과 함께 들어와서 사람들이 즐겨 먹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두 번째로는, 식용유가 값싸게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전통시장을 중심으로 가마솥에 닭을 튀겨내는 ‘시장 통닭’이 국내 치킨 요리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이다.
그런데 음식이라는 것은 다양한 문화적 요인과 경제적 상황이 총체적으로 녹아드는 곳이다. 주한미군이 치킨을 국내에서 처음 소개했다고 한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전 처음 보는 기름진 닭튀김을 좋아라했을까? 또한, 전통시장에서 닭을 튀겨 팔아보자는 생각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졌을 리도 없다. 1970년대 이전에는 식용유가 굉장히 비쌌기 때문에 닭을 튀긴답시고 가마솥 가득 식용유를 부어 사용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최초의 치킨은 눈썰미 좋은 누군가가 이 두 아이디어를 합쳐본 것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통시장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시장의 음식이 맛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만큼 다양한 창의적인 생각들도 모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바로 이 기발한 발상이 수원 팔달문의 시장 부근에서 시작되었다. 수원 팔달문 동쪽에는 팔달문시장, 시민상가시장, 수원영동시장 등 수원의 내로라하는 시장들이 몰려있다. 이들 시장에서 북쪽으로 발걸음을 조금만 옮기면, 전국적으로 유명한 거리에 진입하게 된다. 진미통닭, 용성통닭, 남문통닭, 매향통닭, 중앙치킨타운 등 지급까지 수십년 통닭의 맛을 지키며 수원 통닭거리의 명성을 만든 일등공신들의 간판이 보이기시작하면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바로 수원 통닭거리다.
어린 시절 아버지 월급날이면 오른쪽 손에는 서류가방이, 왼쪽 손에는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 기름기가 배어 나오는 갈색 종이봉투와 ‘통닭’이라고 적혀있는 투명한 치킨무 봉지가 있었는데, 이것만 보면 환호성을 지르곤 했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서일까, 지금도 통닭을 떠올리면 복고적인 향수가 피어오른다. 그래서 다시 수원 통닭거리를 찾아간다.
하얀 밀가루 반죽에 닭을 통째로 풍덩 담갔다가 기름이 부글거리는 가마솥 안에 넣으면, 지글지글거리는 맛있는 소리와 함께 닭이 노란 튀김옷을 입고 나온다. 가위로 숭덩숭덩 잘라내면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데, 한입 베어 물고 치킨무를 재빨리 입에 넣으면 그 맛이 기가 막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