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은 강원도 영월군 중동면 석항은 폐광이 된 후로는 점차 주민들이 줄어들기 시작하여 이제는 주민들이 500여 명이 채 남지 않은 자그마한 마을이다.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인 석항역은 영월군 중동면에 있는 태백선의 기차역으로 1957년 보통역으로 출발하여 과거엔 29만 명이 넘는 유동인구가 북적이던 장소였다. 하지만 1989년 석탄산업의 쇠퇴로 인하여 탄광들이 모두 문을 닫게 되고 2009년에는 여객 취급마저 중단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히고 있었다. 가끔 덜컹거리며 그 곁을 지나가는 화물열차 소리만이 활기 넘치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던 외로운 지역이 바로 석항의 모습이었다.
영월 석항트레인스테이. 처음 이름만 들어서는 어떠한 곳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말을 하나씩 풀어보면 쉽고 간단하며 흥미로운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Train Stay. 석항역 옆 ‘열차’를 개조하여 ‘스테이’ 즉 사람이 ‘머물 수 있게 만든 장소’를 의미한다. 석항트레인스테이는 2013년 영월군이 폐열차 9량을 이용해 만들었다.
낙후된 폐광지역의 주민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 대안을 구상한 공간인 석항트레인스테이는 “과거와 현재,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고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편안하고 특별한 휴식을 전하고 싶다.”고 한다. 석항 지역의 주민들이 시작했지만 2018년부터는 사회적기업 ㈜오요리아시아가 함께 운영한다. “주민 자립이 먼저”라고 외치는 ㈜오요리아시아의 이지혜 대표는 운영을 도우며, 주민들의 직업 훈련이나 역량 강화를 통한 일자리를 만들어왔고, 지금도 지역주민들의 경제적인 자립을 돕고 있다. ㈜오요리아시아의 도움으로 올 연말 정도에는 주민들이 마을기업이나 소셜 벤처를 만들 수 있지 않겠냐고 내다봤다.
석항트레인스테이는 각 지역에서 추억을 만들고자 방문하는 다양한 손님들에게 행복한 시간을 선사하고 있다. 단체 방문객을 위해서는 넓은 광장이 중앙에 준비되어 있고, 간이역 식당에서는 석항연탄치킨, 연탄삼겹살 같은 특색있는 음식들을 판매한다. 식당 간판 옆에는 “옛 간이역을 떠올리며 우리들의 기차여행은 새롭게 시작된다”고 적혀 있다. 숙소로 사용할 수 있는 객차는 4인실과 6인실, 도미토리로 나뉘어 있으며, 편하게 쉴 수 있는 온돌형 객실과 도미토리형 침대 객실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되어있다. 객차 안은 냉·난방 조절장치는 물론 욕실, 냉장고, 이불장, 벽걸이 TV가 갖춰져 있어 손님들이 불편함 없이 이용할 수 있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 끝에 펼쳐진 라운지와 테라스는 카페와 책방으로 꾸며져 있어 특별한 추억을 만들고 사진을 찍기엔 제격이다. 삶의 고단함으로 지친 현대인들에게 힐링을 선사할 수 있는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이 공간에서는 시기별로 애프터눈 티트레인 이벤트나 패밀리 쿠킹클래스, 친환경 블록 화분 만들기, 기차 할로윈 파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석항트레인스테이와 그곳에 자리 잡은 모든 객차는 기존에 운행했던 열차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이용하는 손님들에게 이색적인 분위기와 함께 ‘편하게 누워 장시간의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객실 열차가 이런 느낌이 아닐까’하는 특별한 여행의 설렘을 안겨준다. 외롭고 쓸쓸하던 과거와는 달리 멋지게 탈바꿈한 열차 내부의 모습을 하나씩 살피며 감탄하고 있으면 저 멀리서 하얀 연기와 함께 아스라이 기차의 기적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덕신리 하천다숙은 원래 ‘하천재’라 불리던, 밀양 박 씨 규정공파 후손의 한 사당이었다. 하천재를 지은 인물은 만암 박채규(晩巖 朴彩珪)다. 만암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선친 하천 박병집(荷泉 朴炳執)을 기리기 위해 선영 아래에 문중 가묘를 세웠다. 만암의 부친 하천은 경상남도 진주와 사천 일대에서 선각자이자 효자로 소문이 난 인물이었다고 한다. 하천재의 건축 규모를 보면 만암이 상당한 재력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천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최후를 맞은 노량대첩의 현장에서 멀지 않다. 육지에서 노량대교를 건너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덕신리가 나온다. 하천재는 마을에서는 보이지 않고, 록두산 옥녀봉 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하천재는 풍수지리 상 지덕비보(地德裨補), 다시 말해 자연스럽게 땅의 기운이 살아나도록 지어진 건축물이라고 풀이된다. 해발 71m, 73m, 75m 지점에 3단으로 터를 닦고, 상단에 재실인 하천재, 중단에 준비 공간인 경모헌(景慕軒)과 세심헌(洗心軒), 하단에 솟을삼문 출입문인 옥산문(玉山門)을 세웠다. 경모헌과 세심헌은 좌우로 마주보도록 건축되었다. 전통적인 사당 건축의 근대적 변용 양식을 보여주는 하천재는 1960년대까지 밀양 박 씨 규정공파 후손들이 조상을 모시는 문중 가묘였다.
하천재는 만암 박채규의 아들 아인 박종한(亞人 朴鐘漢·1925~2012)에 의해 1960년대 말부터 한국 차(茶) 문화의 근대적 부활을 주도하는 중심 공간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연유를 캐려면, 아인의 이력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아인은 1943년 진주공립중학교를 졸업한 후 1944년 동지들과 반진단(般震團)이라는 비밀 항일투쟁 단체를 결성했다. 반진은 진국(잃어버린 나라)을 되찾는다는 의미다. 반진단원은 1944년 11월 부산항을 폭파하려는 거사를 진행하던 중 체포되었다.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아인은 해방이 되는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반진단원은 1946년 4월에 모임을 갖고, 새 조국의 급선무는 교육사업이라고 뜻을 모았다. 이후 서울대 상과대학에 진학한 아인은 1953년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털어 경상남도 진주에 대아중·고등학교를 세우고, 26세에 교장이 되었다. 아인은 쑨원(孫文)의 삼민주의와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사상을 토대로 오민교육을 주창했다. 고른 성품을 기르고(民性), 이용후생의 기술을 익히며(民生), 애국의 마음으로(民族), 홍익인간을 실천하며(民本), 미와 멋을 아는 문화로서 풍부해지는(民富) 학생을 기른다는 아인의 오민교육론은 대아중·고등학교의 교육 철학이 되었다.
아인은 1960년대 말 우연히 『조선의 차와 선』이라는 책을 접하고, 한국 차 문화에 매료되었다. 비록 일본인들이 1940년대에 쓴 책이었으나, 한국 차 문화가 민성 교육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아인은 한국 차와 차 예절을 더 깊이 공부하는 한편 적극적인 실천에 나섰다. 아인은 대아고등학교 교장실에 ‘차례실’을 만들고, 문제 학생들을 불러 함께 차를 마셨다. 조주선사의 유명한 화두 “차나 한잔 마시고 가게.(喫茶去)”의 현대적 재해석이자, 교육적 활용인 셈이었다. 아인의 ‘차례실’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교육 방식이 되었다. 아인은 진주 지방부터 시작해서 차를 사랑하고 차 문화를 보급하는 차인들의 모임을 차례로 만드는데 앞장섰다.
1976년에는 한·일 차 문화 교류회를 개최했고, 1978년에는 아인요를 설립해 전통 다완을 재현하는 일을 시작했다. 1978년 사단법인 한국차인회가 창립되었을 때 아인은 부회장을 맡았다. 아인의 차 문화 진흥 활동은 2012년 작고할 때까지 이어졌다. 아인은 한국 차에 심취한 이후 문중 가묘인 하천재를 개방해 차 문화의 중심지로 삼았다. 하천재에서 차를 끓이는 샘물은 대밭 한가운데 있었는데, 맑은 정기가 가득해 한 사발을 마시면 1년 더 산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실제로, 하천재가 위치한 덕신리는 장수마을로 알려져 있다. 아인은 1987년 하천재의 이름을 아예 하천다숙(荷泉茶塾)으로 바꾸었다. 차를 사랑하는 사람들, 차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머물며 차를 배우고, 차를 즐기도록 공간의 성격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하천다숙의 하천재, 경모헌과 세심헌, 옥산문은 2006년 등록문화재 제234호로 지정되었다. 근대적 성격이 가미된 전통 사당이라는 건축 특징과 한국 차를 근대 문화 속에서 되살린 역사적 산실이라는 가치를 모두 인정받은 결과였다. 하천다숙의 편액과 주련 글씨들도 근대 명필들의 글씨여서 의미를 더한다. ‘하천재’ 편액은 의친왕 이강의 글씨이고, ‘경모헌’은 이조판서를 지낸 윤용구, ‘세심헌’은 당시의 명필 하동주, 옥산문은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오세창이 썼다.
하천다숙의 건축물들은 2007년부터 2009년 사이 낡은 부분을 전체적으로 손보았다. 하천다숙은 2013년 전통한옥 체험 숙박시설로 지정되어, 일반인이 예약을 하면 이용 가능하게 되었다. 하천다숙의 왼쪽으로는 개울이 흐르고, 뒤편으로는 대나무숲과 편백나무숲이 우거진 록두산 옥녀봉 자락이다. 아인은 차 한 잔이 생활 속에서 신성·영성·족성·자성·감성 5성을 길러준다고 설파했다. 몸을 이롭게 하며, 영혼을 맑게 하고,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자신의 개성을 닦고, 감수성과 풍류를 알게 한다는 것이다. 하천다숙은 “차나 한잔 하고 가시게.”라는 화두의 현현인 듯하다.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조양관은 원래 여관으로 지어졌다. 일반 건축물 대장에 기록된 연대는 1935년이지만, 실제로는 더 전에 지어졌다는 설도 있다. 여관으로 운영될 당시 상호는 ‘국일여관’이었다고 한다. 해방과 한국전쟁이 지난 후 음식점으로 용도가 바뀌었고, 내부와 외부 구조도 그에 맞추어 변화하기는 했으나, 여러 칸의 방으로 나뉘어 있어 여관의 흔적을 여전히 보여준다.
여관과 음식점은 용도가 전혀 다른 공간이다. 하지만 한 세대 전만 해도 한국의 여관에서도 직접 음식을 조리해 손님의 방으로 가져다주었다. 일본의 료칸 서비스에는 요즘도 조반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그러므로 조양관은 지어진 때부터 지금까지 80년 넘게 음식과 인연이 깊은 공간으로 유지된 셈이다.
한국전쟁 후 1950년대에 ‘국일여관’ 건물을 인수한 최계월은 전라북도 전주의 유명한 요정인 ‘행원’의 주방 책임자였다. 원래 ‘행원’의 예기(藝妓)였으나, 목에 이상이 생겨 주방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국일여관’은 숙박업을 접고, ‘조양관’이라는 일종의 음식점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쉽게 드나드는 식당이 아니라 고창에서 알아주는 요정이 되었다.
전주의 ‘행원’과 고창의 ‘조양’은 창업자의 인연뿐만 아니라 역사 또한 흥미로운 점이 많다. ‘행원’은 원래 1928년 낙원권번으로 시작되었다. 권번이란 1890년대 조선시대 관기(官妓) 제도가 폐지된 이후 조직된 기생조합이다. 1908년 공포된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에 따라 기생조합은 서울 기생(경기)과 지방 기생(향기)으로 나뉘어 식민당국의 규제를 받았다. 낙원권번은 후일 ‘행원’이라는 요정이 되어, 1983년 한식당으로 바뀔 때까지 전주에서 꼽아주는 요정으로 영업을 계속했다. 현재 전주의 ‘행원’은 카페와 복합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고창의 ‘조양’은 1970년대까지 고창에서 가장 유명한 요정으로 번창했다. ‘조양’ 앞으로는 고창천이 흐르는데, 벚꽃 흐드러지게 피는 봄밤이면 ‘조양’의 2층 연회장에서 노랫가락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에 ‘오진암’, ‘대원각’, ‘삼청각’ 3대 요정이 있었다면, 전주에는 ‘행원’이, 고창에는 ‘조양’이 있었던 셈이다.
‘행원’, ‘조양’ 같은 업태는 사실 근대 들어 새롭게 등장한 영업 방식이다. 개항기에 일본인과 청나라 거류지를 중심으로 술과 여흥을 함께 파는 음식점들이 들어선 데다, 1909년 이를 한국식으로 변형시킨 명월관이 문을 열었다. 명월관을 연 사람은 대한제국 궁내부 전선사장(典膳司長)을 지낸 안순환(安淳煥)이다. 이후, 크고 작은 연회를 열 수 있고, 기예에 능한 기생들을 불러 공연까지 곁들이는 요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요정은 접대의 공간이다. 허기를 채우거나 맛을 즐기기 위해 찾는 음식점과는 달리 ‘한상 떡 벌어지게’ 차려놓고 과시하여 상대에게 만족감을 주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요정에서 차려내는 한상은 한 끼에 도저히 먹지 못할 만큼 음식과 반찬의 가짓수가 많다. 칼럼니스트 황교익에 따르면 ‘한정식’이라는 말은 이 같은 요정의 행태가 남긴 관행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왕도 평상적인 상차림은 7첩이 고작이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고창의 ‘조양’도, 전주의 ‘행원’도 1980년대 들어 사양길을 걷게 된다. ‘룸살롱’이라는 업태가 요정의 수요를 흡수해버렸기 때문이다. 비난의 어조가 다분했던 ‘요정정치’라는 말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시대가 바뀌자 ‘조양’은 요정이 아니라 ‘한정식’ 음식점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외지 손님이 고창을 찾아왔을 때 갈만한 고급 음식점을 지향했고, 이 전략은 성공적이었던 듯하다. 고창의 음식점 하면 ‘조양식당’을 먼저 떠올리는 지역 사람들이 많았다.
‘조양식당’ 건물은 2007년 등록문화재 제325호로 지정되었다. 고창읍내에 남은 유일한 일본식 주거시설이라는 점에서 평가를 받은 덕이다. 일식 시멘트 기와를 얹은 2층 건물(연면적 254㎡, 건축면적 188㎡)은 한눈에 봐도 일제강점기 건물이라고 직감할 수 있다.
지붕과 처마의 선도 일본식이고, 2층 외벽을 목재 비늘판으로 마감한 방식도 일본식이다. 물론 세월이 세월이고, 용도도 자주 변경되어서 변형은 많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식당 영업을 하고 있으므로, 보존과 활용이 비교적 잘 되고 있다고 평가된다.
2010년대 들어 휴업을 하고 리모델링을 거쳐 다시 식당 문을 열었다. 현재 옥호는 ‘조양관’이며, 서울 강남에 분관을 내기도 했다.
조양식당 남쪽으로는 동리 신재효(桐里 申在孝·1812~1884)의 고택(서재)과 동리국악당이 있고, 조금 더 가면 고창읍성이다.
판소리 열두 마당을 정리한 동리 신재효와 그의 제자로서 흥선대원군 시절 경회루 낙성식에서 창을 해 명창으로 알려진 진채선(陳彩仙)은 모두 고창 출신이다. 신재효와 진채선의 이야기는 2015년 「도리화가」라는 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다.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때 축성된 읍성으로, 충청남도 서산의 해미읍성, 전라남도 순천의 낙안읍성과 더불어 현재까지 남아 있는 3개의 읍성 가운데 하나다. 고창읍성은 고창의 백제 시대 지명인 모량부리(毛良夫里)와 연관 지어 모양성(毛陽城)이라고도 불린다.
1935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시가지의 중심부에 보성여관이 세워졌다. 지금으로 치면 호텔급의 고급 여관이었다. 건물이 7채에 방이 13개나 됐다. 보성여관은 한식과 일식이 섞인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1층은 객실로 꾸며진 온돌방이었고, 2층은 4칸짜리의 넓은 다다미방이어서 연회장으로 이용됐다. 구 보성여관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남도여관’의 실제 장소이다. 소설에서 반란군 토벌대장 임만수와 대원들이 숙소로 이용했다. 조정래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부터 벌교에서 보낸 어린 시절 기억을 바탕으로 잊혀가던 옛 벌교를 소설을 통해 살려냈다. 보성여관은 한국인 강활암(姜活岩)이 지은 집이다. 일본인들을 상대로 여관을 하기 위해 일본풍으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급으로 지어진 보성여관은 번성했던 벌교의 옛 모습을 보여준다.
여관이 문을 열던 즈음 벌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왕래가 잦던 지역이었다. 당시 벌교는 전남의 4대 도시 중 하나로 동부권의 중심도시였다. 1935년 조선총독부 ‘국세 조사자료’의 전남지역 인구기록을 보면 목포 6만734명, 광주 5만4,607명, 여수 2만8,205명, 벌교 2만4,254명이었다. 벌교에 거주하는 일본인만 550명이 넘었다. 일본은 1913년 200여 가구가 살던 작은 포구였던 벌교의 지리적 이점을 일찍이 간파했다. 식민지 수탈이 지리적으로 유리하다는 이유로 벌교는 일제에 의해 빠르게 개발되었다. 1930년에는 여수~광주 간 남조선철도(현재의 경전선)가 생겼고, 큰 배가 내륙까지 들어올 수 있었으므로 화물선이 매일 20회씩 드나들었다. 육로를 통해 모인 엄청난 양의 쌀과 곡물이 벌교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려 갔다. 수많은 일본인이 돈벌이를 위해 벌교로 몰려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인들이 몰려들자 신시가지가 생겨났는데 그 중심부에 보성여관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많이 지어졌던 일본식 건물들이 허물어지며 시대의 흔적이 사라진 지금, 보성여관은 일식 목조건축의 형태를 잘 간직해온 몇 안 되는 건축물이다. 해방 이후에도 여관으로 영업을 계속하다가 1988년부터 상점으로 이용되었다. 2004년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132호로 등재되었으며 2008년 문화재청이 매입했다. 이후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 보성군이 17억 원을 들여 2년간의 공사 끝에 옛 모습을 복원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운영을 맡아 관리하고 있으며 현재는 카페, 소극장, 숙박업소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보성여관은 80여 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면서 크고 작은 보수공사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1930년대 벌교의 사회구조와 일식 목조건축의 특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건물은 마당을 중간에 둔 ㅁ자 배치로 형성되어 있으며, 장마루로 되어있는 복도는 한국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2층 건물의 외벽 구조와 오르내리창도 인상적이다. 보성여관의 외벽은 바람을 막기 위함과 외관을 고려한 목제 비늘판 벽으로 되어있다. 중간에 창이 하나 있는데, 상하로 오르내릴 수 있는 오르내리창이다. 일식 기와를 사용한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1층에는 사무실과 카페, 소극장, 전시실, 자료실, 숙박동이 있고, 2층은 다다미방 4개가 하나로 트인 다목적 문화체험공간이다.
벌교읍에는 보성여관을 중심으로 ‘태백산맥 문학기행 코스’가 마련되어 있다. 금융조합, 조정래 조형물, 벌교의 이름이 비롯된 홍교, 김범우의 집, 포구의 양안을 이어주는 소화다리,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 염상구가 결투를 벌였던 철 다리, 죽도방죽, 벌교역 등 소설의 주 무대와 기념시설을 볼 수 있다. 2008년 개관한 태백산맥 문학관은 지상 2층의 건물로 조정래의 육필원고와 증여 작품 등 총 144건, 623점을 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