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대왕과 함께하는 여주 한글시장

    여주는 경기도에서 두 번째로 큰 전통 5일장이 열리는 곳이다. ‘여주중앙통’, ‘여주제일시장’이라고 불리던 이 5일장은, 2016년 문화관광형 시장육성사업에 선정되면서 한글을 테마로 ‘여주한글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주 한글시장 이미지
    여주 한글시장


    여주가 한글을 테마로 내세운 이유는 세종대왕릉이 여주에 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릉이 여주까지 오게 된 이유는 당시 풍수지리를 보던 지관들이 여주를 따라 흐르는 남한강 근처를 천하의 명당으로 꼽았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여주시는 세종대왕하면 바로 연관검색어처럼 떠오르는 한글을 전통시장 활성화의 키워드로 가져왔다. 

     

    실제로 기존시장이 ‘여주한글시장’이 되면서 단순히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시장 곳곳에 방문객의 눈길을 끄는 세종대왕상, 한글을 연상시키는 조형물, 한글 표지판들이 설치되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또한 한글시장 내에 있는 생활문화전시관 ‘여주두지’에는 실제 예전 사람들이 사용했던 물건을 전시하고 있어 가족단위 관광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처럼 ‘여주한글시장’은 쇼핑과 관광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만족도 높은 시장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매달 5일과 10일 여주 5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한글시장과 연결된 가판에 나와 더 다양한 농수산물과 잡화들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타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여주 5일장 이미지
    여주 5일장

    그럼 볼거리, 살거리가 풍부한 여주한글시장의 알차게 즐기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여주한글시장은 1~4구역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고, 구역 너머에는 난전이 이어진다. 한글 시장의 1구역은 다양한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여기서 한글시장의 명물 ‘한글빵’을 맛볼 수 있다. 한글빵은 단팥, 고구마, 단호박 등으로 속을 채운 쫀득한 찹쌀빵으로 빵 위에 한글의 자음모음 24개가 한 글자씩 찍혀있다. 한글 24글자를 모두 먹으려면 한두번 방문해서는 안될 것 같다. 이 구역은 야시장이 열리는 날엔 더욱 많은 판매대가 형성된다. 

    한글빵카페 이미지
    한글빵카페

     


    2구역은 ‘여주두지’와 문화 아지트라 불리는 ‘토닥토닥’이 위치하고 있다. 지역사람들 누구나 이용하는 다목적문화공간이기도 하고 타지역 방문객에게 여주를 알리는 곳이기도 하다. 


    3구역은 여주시장 상인들이 여주쌀과 고구마로 빚은 여주현미초진액, 천연화장품 등 협동조합 상품을 만날 수 있는 구역이다. 다양한 상품을 개발 전시하고 있으며, 바로 구입도 가능하다. 


    4구역은 세종대왕의 생애와 한글 탄생의 역사를 벽화나 조형물로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인증샷 찍기 매우 좋은 곳이다. 세종대왕과 한글의 역사를 담은 벽화는 4구역뿐 아니라 2, 3구역의 골목에도 곳곳에 숨어있기 때문에 시장골목을 하나하나 들어가 숨은 벽화와 한글 조형물들을 발견하는 것도 여주한글시장을 즐기는 방법 중의 하나다. 

  • 낙안읍성 근처의 순천 뿌리깊은나무박물관

    故 한창기 선생은 1976년 군사정권 당시 최초의 순우리말 잡지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한 사람이다. 「뿌리깊은 나무」는 순한글, 가로쓰기로 쓰인 잡지로, “주어진 글에 양념이나 치고 화장이나 하는 일은 안 하겠다”던 한창기 선생의 원칙대로 한문이나 일본어투가 밴 문장을 우리말에 맞게 고쳐 발행했다. 어려운 한자어가 많은 유신헌법을 순우리말로 풀어내 그 문제적 내용을 알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뿌리깊은 나무」는 전통문화, 민속문화를 알리는 ‘민중 자서전’을 펴냈다. 이렇듯 한창기 선생은 한글과 한국전통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깊었다.

     

    뿌리깊은나무박물관 전시실 입구 이미지
    뿌리깊은나무박물관 전시실 입구


    순천에는 이런 한창기 선생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이다. 잡지 <뿌리깊은 나무>의 이름을 그대로 담은 뿌리깊은나무박물관에는 한창기 선생이 생전 모았던 65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건물이 높지 않고 전시실을 밖에서 보았을 때는 작다는 인상이 있어 어떻게 이 건물 안에 6500여 점의 유물이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전시실은 지하에 있다. 전시실 입구로 들어가 깊은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 높고 넓은 실내와 곧 마주하게 될 많은 유물들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전시관은 상설전시실과 한창기실, 기획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창기실에는 그가 출판한 「뿌리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 등의 잡지와, 영문으로 쓰인 한창기 선생의 편지와 한글로 쓰인 육필 원고 등을 볼 수 있다. 한창기 선생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전시실에 들어가도 복도 벽에 붙어 있는 한창기 선생의 소개글과 한창기실의 유물들로 그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했는지 등 그의 업적과 생애를 알 수 있다.

     

    상설전시실에서는 청동기 시대부터 광복 이후까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토기나 책, 민속공예품 등을 볼 수 있다. 바둑판과 둥근 조약돌 같은 바둑돌을 들여다보며 예전에는 이런 돌로 어떻게 바둑을 뒀을까 하는 호기심이 올라온다. 그만큼 친근하고 익숙한 유물들이다. 한창기 선생이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대중에게 알리고 싶어 했던 판소리다섯마당의 앨범도 눈으로 볼 수 있다. 이것들은 역대 왕이나 왕실의 화려한 유물은 아니지만 우리 민족의 손길이 닿은, 얼이 담긴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뿌리깊은나무박물관 전시실 이미지
    뿌리깊은나무박물관 전시실


    기획전시실에서는 매년 2회 소장유물을 선별하여 기획전을 연다. 고서 전시나, 민화, 소설 전 등을 개최하며, 한창기 선생이 수집한 유물을 다양한 기획으로 관람객들에게 더 많이 공개할 예정이라고 순천시는 말했다. 이 밖에 뿌리깊은나무박물관에서는 전통놀이체험이나 설맞이 황금돼지 엽서쓰기 등 전통문화와 관련한 다양한 문화체험 이벤트를 개최한다. 설이나 추석에는 한복을 입고 온 관람객을 무료 입장 시킨다. 행사에서도 이 땅의 문화를 사랑했던 한창기 선생의 정신이 묻어난다.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의 입구와 건물은 현대적이고 깔끔하다. 그러나 주변이 대개 한옥이라 전체적으로 시야가 넓게 트이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시실 밖으로 쉼터 건물과 조형물이 놓인 잔디밭이 있어 쉬어갈 수 있다.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의 야외전시실에는 전남 구례 절골마을에서 옮겨와 복원한 거문고 명인 백경 김무규 선생의 고택이 있다. 생전에 한옥을 사랑했던 한창기 선생은 1980년 이 고택을 보고 매료되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담아 2006년 뿌리깊은나무박물관에서 고택을 매입, 이건하였다. 고택은 다른 전시관들처럼 멀찍이 두고 사진만 찍는 곳이 아니라 관람객들이 직접 방 안으로 들어가 조선 시대 양반 주택의 안팎을 모두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은 낙안읍성의 성벽 외곽에 위치해 있다. 위치상 가깝고 낙안읍성의 관람코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낙안읍성에 방문하여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을 관람하거나 반대로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을 관람한 뒤 낙안읍성을 구경하는 것도 좋은 관광이 될 것이다. 성인 1000원, 청소년과 군인은 800원, 어린이는 500원로 입장료도 저렴하다. 휴일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뜻깊은 경험을 얻기 위해서 순천의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을 방문해보는 것은 어떨까.

  • 최현배 선생의 한글 사랑이 가득한 곳,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한글 가로쓰기를 확립한 외솔 최현배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동상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동상



    현대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한글로 가로쓰기 체재는 국어 연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최현배 선생의 업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외솔 최현배 선생(1894-1970)은 국어 문법의 체계를 정리하고 국어와 관련된 정책을 수립하는 등 국어학 연구에 큰 공적을 남긴 학자이다. 국어 문법 연구를 집대성한 『우리말본』과 한글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한글갈』 등 20책이 넘는 저서와 100편에 이르는 논문 등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한글이 목숨’이라는 글을 남길 정도로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울산광역시 중구 동동에는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의 생가터가 자리하고 있다. 선생은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를 다니다 1910년 17세 때 서울의 한성고등학교로 전학하기까지 울산 생가에서 생활하였다. 이 생가터는 2001년 12월 20일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생가터에 설립된 외솔기념관와 복원된 생가

    최현배 선생 생가터가 울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면서 최현배 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본격적으로 기념관 설립과 생가 복원을 위한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2010년 3월 23일 최현배 선생 생가터에 지상 2층, 지하 1층의 규모로 건립된 외솔기념관이 개관하였다. 1층에는 한글과 관련된 다양한 서적들이 전시된 한글실, 선생이 생전에 사용했던 타자기나 장롱 등 유품이 전시된 외솔실 등의 전시실이 자리하고 있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낱말 만들기, 한글 받아쓰기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인 체험실도 마련되어 있다. 또한 최현배 선생 관련 영상을 관람할 수 있는 영상실도 있다.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외솔 한옥도서관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외솔 한옥도서관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한솔기념관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한솔기념관

    2층에는 어린이와 어르신을 위한 한글교실을 운영하는 모듬실이 있으며, 최현배 선생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생가는 집터와 축대 정도만 남아있던 것을 2008년 복원한 것이다. ‘ㄷ’자형의 초가집으로 본채와 2개의 아래채, 총 3채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2개의 방과 부엌, 툇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2개의 아래채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의 툇마루로 구성되어 마주보고 있다.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안채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안채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아래채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아래채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부속채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부속채

    애니메이션과 길, 도시로 알리는 최현배의 한글사랑

    최근 최현배 선생의 생애와 한글 사랑에 대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쉽고 재미있는 방법으로 알리기 위해 애니메이션이 제공되고 있다. 애니메이션은 ‘한글을 목숨처럼 사랑한 최현배 선생’이라는 제목으로, 2020년 울산시가 울산방송에 의뢰하여 제작되었다. 약 25분 분량이며 외솔기념관 영상실에서 상영하고 있다. 또한 외솔기념관 근처의 도로가 2025년까지 5년간 ‘외솔최현배길’이라는 이름의 명예도로로 운영되고 있으며, 울산광역시 중구에서는 중구를 ‘한글도시’로 선포해 한글과 관련된 문화산업에 힘을 쏟고 있다.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한글 날아오르다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한글 날아오르다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한글 날아오르다
    울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한글 날아오르다

    울산광역시 중구는 최현배 선생이 나고 자란 곳으로 현재까지 선생의 한글에 대한 애정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외솔기념관 일대에 방문해 여러 전시물과 영상물, 복원된 생가를 관람하고 평생을 바쳐 우리말과 우리글 연구에 매진한 최현배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되돌아보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로 여겨진다.

  • 간송 전형필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 서울 보화각

    한국 최고의 문화재 수집가 간송 전형필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는 보화각이라는 미술관이 있다.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간송미술관의 ‘간송’은 문화재 수집가이자 교육가로 유명한 전형필(1906~1962)의 호이다. 전형필은 큰 부잣집에서 태어나 집안의 유일한 계승자로서 10대 중반의 어린 나이에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을 스승으로 만나게 된다.


    고희동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자 한학자이며 서예가로 유명한 위창 오세창에게 전형필을 소개해 주었다. 전형필에게 오세창이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전형필은 문화재 수집과 보호라는 큰 꿈을 가지게 되었다. 오세창은 흥정을 잘하는 거간꾼 이순황을 보조로 쓰게 하여 전형필의 골동품 수집을 도왔다. 오세창과 이순황의 도움으로 문화재 수집을 본격화하면서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졌다. 1934년 성북동의 산줄기에 좋은 터를 발견하고 사들이기 시작했고, 오세창은 이곳을 북단장(北壇莊)이라 이름 지었다. 

    서울 보화각
    서울 보화각(사진출처:문화재청)

    박길룡이 설계하고 오세창이 현판을 쓴 보화각

    전형필은 거액을 들여 국보를 비롯한 많고 다양한 문화재를 수집해 당대 제일의 수장가가 되었다. 유물들을 보관하고 전시하기 위해 건축가 박길룡(1898~1943)에게 설계를 부탁했다. 1938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인 보화각이 모더니즘 양식의 2층 건물로 북단장 내에 세워졌다. 오세창이 전서체로 보화각의 현판을 써서 걸어 놓은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 유물 및 전통 미술품 등의 보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장소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2019년 12월 30일 국가등록문화재 제768호에 지정되었다.


    훈민정음의 가치를 알아본 소장가  

    전형필은 다양한 종류의 자료들을 수집했는데 그 중 『훈민정음』을 사들인 일화를 전하면 다음과 같다. 1940년 어느 여름날 저물녘에 전형필은 한남서림에서 더위를 피해 쉬고 있었다. 책을 주로 취급하여 흥정하던 어떤 사람이 바쁘게 걸어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전형필은 이순황에게 시켜 무슨 사정인가를 알아보게 하였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의 원본이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 그 사람은 『훈민정음』을 사들일 돈을 구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던 것이었다. 전형필이 금액을 물으니 1천원이었다. 1천원은 당시 큰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전형필은 말없이 1만원을 더 얹어 1만 1천원을 내어주고 『훈민정음』을 소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보화각 전시실
    서울 보화각 전시실(사진출처:문화재청)
    서울 보화각 전시실
    서울 보화각 전시실(사진출처:문화재청)

    1971년 간송미술관으로 바뀐 보화각

    보화각 건립 후 전형필은 문화재의 목록을 작성하여 체계화하는 데 애썼다. 그러다 1962년 갑작스레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장남 전성우와 차남 전영우가 전형필의 뒤를 이어 보화각의 일을 맡았다. 1971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이때부터 한 해에 두 번 미술관 전시가 이루어지며 유물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책, 도자기, 그림 등 다양하고도 많은 양의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2013년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출범되었으며, 2014년부터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에서 전시가 열리고 있다.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인 보화각으로 시작해 민족미술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곳이다. 지금도 문화 발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