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에서 첫사랑과 두 팔 벌려 걷곤 하던 장소, 혹은 숨어있던 살인마가 덮칠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장소로 나오곤 하는 철길. 서울에 남아있는 세 군데 철길 중 하나가 서울시 구로구 오류동에 위치한 항동철길이다. 폐쇄된 철길 같지만 항동 철길은 구로구 오류동에서 시작해 경기 부천, 광명을 거쳐 시흥군부대까지 이르는 11.8km의 오류선의 일부로, 일시 중단된 군용철로이다.
7호선 천왕역에서 나와 400m정도 걸으면 옛날의 흔적을 담고 있는 기차와 정지 표지판이 보인다. 조용한 주택가 골목에서 아파트 옆으로 갑자기 나타나는 철로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일시 중단된 철길을 실감하게 그냥 철길만 놓여있는지라, 근처 주민들에게는 산책길 이전에, 등하교길이자 출퇴근길이다. 조용한 동네 풍경 속 한 길목이기만 했던 이곳이 서울에 몇 안남은 철길 중 하나라는 점과 ‘레트로 열풍’으로 인생사진 장소로 SNS로 알려지면서 최근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항동공공주택지구 개발사업동안 열차 운행을 일시 중지하기로 하면서 임시개방되었는데 점점 인기를 끌며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항동철길은 현재 사업이 끝난 후 재개를 놓고 갈등이 일고 있다. 항동철길을 연남동 경의선 숲길처럼 만들고 싶어하는 구로구와 비용 및 여러 사정상 폐선이나 운행중단은 어렵다는 국방부가 대립하고 있다. 이미 예정되었던 재개는 수차례 미뤄진 상태다. 일주일에 한두 번 군수품 수송하자고 서울 시민의 명소가 된 항동철길을 막을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고, 원래 국방부가 이용하던 길을 임시로 개방했던 것이기에 원래대로 돌려줘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폐선을 만들지, 안전장치 설치 같은 대책을 마련해 운행을 재개할지 방법적 협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길어지는 갈등 때문인지, 계절 때문인지 포토존이나 표지판, 수풀이 관리가 잘 안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끝없이 펼쳐진 철로를 걷다보니 망망대해에 떠 있는 기분이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에 기차가 지나다닌다면, 주변 건물들과 너무 가까워 위험하겠구나 하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도 스친다.
항동철길에는 연 61만 명이 방문한다고 한다. 인기 요소 중 하나는 항동철길의 산책코스를 다양하게 짤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이정표를 만나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근교 방문객, 재방문객이 꽤 된다. 마음먹기에 따라 그냥 철길을 따라 쭉 걸어 역이나 정류장을 이동하는 간단한 코스도 가능하고, 철로를 따라 걷다가 푸른 수목원으로 빠지는 코스도 있다. 수목원으로 빠지는 코스가 가장 인기가 많은데, 서울수목원이라고도 불리는 푸른 수목원은 연중무휴 무료로 운영되는 서울 최초의 수목원으로, 서울광장의 8배인 부지에 1700여종의 수목과 화초가 어우러져있다. 메타세쿼이아 길과 아름드리 나무 쉼터, 억새원, 습지원, 항동 저수지 등 다양한 생태군락으로 출사지이자 힐링 쉼터로 사랑받고 있다.
또한 성공회대학교로부터 반대로 도는 산책코스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24시간 개방된 천왕산 성공회대 순환길 중 일부인 이 코스에서는 1936년 건축된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별장 구두인관도 볼 수 있다. 이국적이면서도 복고적인 이 건물을 성공회대학교에서 매입하여 신학원장의 사택 또는 집회시설로 이용하였으며 민청학련 사건의 산실이기도 하다. 구두인관과 캠퍼스를 지나 천왕산의 산책길로 들어서면 신영복의 다양한 서화작품들이 이어지고 따듯하게 볕이 쏟아지는 소담한 추모공간이 나온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코스다.
쉬고, 걷기 위해서도 한참을 찾아 나가야 하는 게 현실인, 휴식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서울이기에 항동철길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언제나 새로운 트렌드를 찾는 젊은 세대들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동네 주민들에게 더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닿기 쉽고, 짧은 호흡으로도 긴 호흡으로도 산책을 즐길 수 있는 항동철길이 없어지지 않기를 많은 주민들이 간절히 바라고 있다.
승객이 줄어 문을 닫은 간이역은 첫사랑을 닮았다. 좀처럼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던 시간이 떠오르고,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서던 설레는 순간이 기억난다. 작은 대합실에는 차마 꺼내지 못한 많은 말과 사연이 고여 있을 듯하다. 무심하게 선로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키 큰 나무조차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일신리 구둔역은 더는 기차가 들어오지 않는 중앙선 폐 간이역이다. 구둔역은 1940년 4월 1일 양평에서 강원도 원주 사이 55.9㎞ 철로가 개통되면서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1년 전인 1939년 4월 1일에는 서울 청량리~양평 간 52.5㎞가 완성되어 팔당역이 먼저 승객을 맞았다. 팔당역에서 7개 역을 더 지나면 구둔역이었다. 구둔역에서 양동역을 지나면 기차는 강원도 땅으로 넘어갔다. 다시 말해 양평에는 중앙선 9개 역이 있었다.
중앙선을 당시는 경경선이라 불렀다. 서울에서 경상북도 경주를 연결한다 해서 서울 경(京)자와 경사 경(慶)자를 겹쳐 썼다. 계획 단계에서는 중앙선이라 했다가, 1936년 막상 착공될 무렵 경경선이라 개칭했다. 경경선은 해방 직후에야 중앙선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부터 경부선 외에 한반도를 종단하는 철도 노선을 하나 더 놓으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 중반이 되자 한반도 동쪽 내륙을 관통하는 철도 부설을 서둘렀다. 중국 대륙 침략용 물자 확보가 시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상북도 쪽은 1910년대 후반에 놓인 철도 구간들을 잇는 방식으로, 경기도~강원도~충청북도 구간은 새롭게 건설하는 방법으로 철도 공사를 강행했다.
완공된 구간은 먼저 부분 개통하는 식으로 진행된 중앙선은 1942년에야 전 구간 345.2㎞를 완성할 수 있었다. 중앙선은 승객 수송보다 물자를 실어 나르는 일이 주목적이었으므로, 화물차가 많이 운행됐다. 해방 후에도 중앙선의 주 임무는 석탄 등 지하자원과 시멘트 수송이었다. 1960~1970년대 산업화 시대에는 중앙선의 비중이 더 커졌다. 중앙선의 화물 수송량은 2000년대 들어서도 전국 철도 화물량의 20% 이상이었다. 그래도 양평 동쪽 주민들에게 중앙선은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도로망이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에는 양평장을 보러 갈 때 긴요했고,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학생도 많았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양평과 강원도의 유원지를 찾기 위해 중앙선을 타는 서울과 수도권 승객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강원도 못지않게 산지가 많은 양평 동쪽에도 도로망이 갖춰지면서 구둔역을 이용하는 승객은 점차 줄었다. 구둔역은 1996년 대합실 매표소에서 승차권을 팔지 않고, 기차를 먼저 탄 뒤에 표를 끊는 승차권 차내 취급역이 되었다. 그래도 구둔역을 이용하는 주민이 2000년대 초반까지는 제법 많았다.
1988년부터 중앙선을 전철화하는 사업이 시작되었고, 2005년에는 복선 전철화가 착공되었다. 청량리역에서 서원주역 구간 복선 전철화 사업은 2012년 개통되었다. 그런데 복선으로 철로를 놓고, 서울과 강원도를 잇는 경강선 계획까지 맞물리면서 철도의 노선이 조정되었다. 구둔역을 통과하던 철로는 북쪽으로 1㎞가량 옮겨졌다. 역사마저 새로 지어야 했는데, 신 역사의 명칭은 지역명을 따서 일신역으로 정해졌다. 간이역이었다가 이제는 기차마저 지나가지 않게 된 구둔역은 옛 명칭을 그대로 두되 ‘구 구둔역’이라 부르기로 했다. 더는 역도 아니고, 기차도 다니지 않으니 ‘구’를 앞에 붙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구 구둔역은 다행히 역사 철거를 면했고, 2006년 등록문화재(제296호)로 지정됐다. 대합실과 사무실, 숙직실이 있던 건물과 역사 앞 광장, 기차를 타는 승강장과 좌우 철로 각각 150m 전체가 등록문화재다. 구둔역은 2012년 개봉한 영화 <건축학개론>의 촬영지가 되면서 유명해졌다. 첫사랑의 추억을 소환하는 간이역 구둔역의 분위기는 2014년 가수 아이유가 발표한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에도 등장한다. <꽃다지 1>에 수록된 ‘너의 의미’의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슬픔은 간이역의 코스모스로 피고….” 구 구둔역은 추억을 쌓으려는 발길을 끌어들이면서 명소로 부상했다.
구 구둔역 역사에서 승강장 쪽으로 들어서면 역사 건물보다 큰 향나무가 서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 나무를 소원나무라고 부른다. 소원나무에는 연인 등 다양한 관광객이 소망을 적어 매달아둔 쪽지와 사진들이 걸려 있다. 소원의 나무 외에도, 큰 나무 앞에 세워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과거를 돌아보는 반추의 마당, 들꽃이 심어진 향기의 미로, 사랑을 고백하는 고백의 정원, 카페 등 역사 안팎은 9개의 공간으로 꾸며졌다. 양평군은 2019년 구둔역 관광지를 더욱 체계적으로 만들기 위한 사업비 100억 원을 확보했다고 한다.
구 구둔역 앞으로는 일신천이라는 하천이 흐른다. 마을은 역 광장과 일신천 사이에 있다. 구둔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왜군과 싸우기 위해 군사들이 주변 산 아홉 곳에 진을 쳤다고 하여 구둔이라 한다는 것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구둔리가 있었으나, 5개리를 통합해 일신리가 되었다. 일신리는 마을 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영화를 찍어볼 수 있는 마을로 소문이 나 있다. 2004년 영화감독 부부가 마을에 머물면서 촬영과 편집 등을 주민들에게 전수했고, 주민들이 손수 찍은 5분 정도 길이의 영화로 해마다 영화제를 연다. 일신리 마을보건소 2층에는 천문 장비가 갖추어져 있어, 밤이면 별을 관측할 수도 있다. 일신리에서는 영화제와 함께 별 축제도 개최된다.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섬진강 기차마을’은 예전 기찻길과 기차역을 이용한 철도 테마파크 사례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로 꼽힌다. 테마파크 ‘섬진강 기차마을’은 2004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2014년에는 한국관광공사가 수여하는 ‘한국 관광의 별’ 창조관광 부문의 상을 받았고, 미국 CNN 방송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 봐야할 50곳’에 선정되기도 했다. 인구 2,000명 남짓한 오곡면을 찾는 관광객이 연간 수백만 명에 이른다. ‘섬진강 기차마을’의 성공을 낳은 공간 구심점이 전라선 구 곡성역이다.
구 곡성역은 전라남도 남원~곡성 구간 전라선(당시 명칭 경전북부선) 철로가 완공된 1933년이다. 호남선 전라북도 익산역에서 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전라선은 1937년에야 전라남도 여수역까지 이어졌다. 1930년대 중반까지는 완공 구간부터 열차가 다녔으므로, 구 곡성역이 문을 연 1933년에는 구 곡성역이 전라선 하행 종착역이었던 셈이다. 구 곡성역은 섬진강 고운 모래를 실어내기에 좋은 위치였다. 섬진강은 고려 우왕 때 왜구가 침입하자 두꺼비 떼 수십만 마리가 나타나 울어대는 바람에 왜구들이 다른 지역으로 피해갔다 하여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 자를 쓴다. 그런데, 섬진강의 다른 이름은 모래 사(沙) 자 ‘사천’, 많을 다(多) 모래 사 ‘다사천’, 아예 한글로 ‘모래가람’이라 부르기도 한 강이다. 고운 모래가 지천이었다는 얘기다. 섬진강변에서 퍼 올려진 모래는 지척에 있는 구 곡성역 화물열차에 실려 전국의 토목 건설 공사장으로 실려 나갔다.
물론 전라선을 이용하는 승객도 늘어났다. 호남선은 호남 서부의 평야지대를 지나가지만, 전라선은 호남 동부를 종단하면서 지리산을 비롯해 많은 명승지 근처를 지나간다.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는 시골 역 대합실의 늦은 밤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
1970년대까지 구 곡성역 대합실의 밤도 다르지 않았을 듯하다. 시에 등장하는 사평역은 실재하는 역이 아니지만, 전라선의 어느 역이 모델이라고 한다.
구 곡성역 역사는 면적이 216㎡여서 농촌의 역 치고는 넓은 편이다. 역사의 형태는 일제강점기 관공서 형 역사 건물의 전형처럼 평범하다. 굴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합실과 역무실에 난방용 난로가 설치되어 있었던 듯하다. 구 곡성역은 숱한 섬진강 모래와 수많은 여객을 실어 날랐으나, 1999년 문을 닫아야만 했다. 1989년부터 진행된 전라선 복선화와 선로가 곡선에서 직선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곡성읍에 새로운 역이 들어서 곡성역이 되었고, 오곡면의 구 역은 구 곡성역으로 불리게 되었다.
곡성군은 구 곡성역과 새 직선화 선로 덕에 폐선된 구 선로를 어떻게 활용할지 다각도로 검토했다. 풍광 면에서는 구불구불 놓인 옛 노선이 훨씬 정감 있다. 구 곡성역을 지나자마자 섬진강 쪽으로 바싹 붙어 자동차 도로 하나만 사이에 두고 강물과 함께 기차가 달렸다. 기차를 탄 채로 강물의 반짝거림, 강변 나무들의 싱그러움, 화사한 봄 벚꽃을 만끽하기 좋았다. 곡성군은 2004년 한국철도공사(코레일)과 손잡고 구 곡성역과 폐 철도를 활용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마침 구 곡성역은 2004년 등록문화재 제122호로 지정 고시되었다.
우선 폐선구간 17.9㎞에 레일바이크와 증기기관차를 운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레일바이크는 5.1㎞구간을 운행하고, 증기관차는 13㎞ 정도를 달리도록 했다. 관광객이 직접 자전거를 타듯이 레일바이크를 움직이면서 섬진강 경치를 즐기고, 돌아올 때는 증기기관차를 타고 천천히 강변을 따라 돌아올 수 있다. 1967년 디젤기관차 등장으로 퇴출된 증기기관차는 추억과 향수를 되살리기 좋은 수단이다.
구 곡성역 역사 안에는 완목식 신호기나 통표걸이 등 예전에 사용되던 철도 유물들을 모아 전시공간을 만들었다. 완목식 신호기는 레버를 당겨 철로를 바꾸는 장치이고, 통표는 역무원이 열차가 통과해도 좋다고 기관사에게 신호를 보내던 둥근 고리다. 역 구내에도 미니 레일바이크 1.6㎞를 설치해서 관람객이 재미를 느끼며 돌아볼 수 있게 했다. ‘섬진강 기차마을’의 전체면적은 52만㎡인데, 개장 이후에도 철도 테마 마을이라는 콘셉트에 맞추어 다양한 시설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4만㎡ 규모의 ‘1004 장미원’을 조성해 1,004 종류에 이르는 국내 최다 장미 품종 감상 화원이 조성됐고, 음악분수, 동물농장, 기차를 개조한 숙박시설을 차례로 설치했다.
곡성군의 인구는 1960년대 초 14만 명이 넘었으나, 산업화와 도시화로 이농이 가속화되면서 2019년 현재 3만 명 수준이다. 구 곡성역과 ‘섬진강 기차마을’이 위치한 오곡면 인구는 고작 2,000명이다. 곡성군에서 유일한 읍인 곡성읍 8,300여 명보다는 적으나 면 가운데는 가장 많은 게 그 정도다. 한적했던 오곡면은 ‘섬진강 기차마을’을 보러 오는 여행객 덕분에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 톱밥난로에 손바닥을 쬐며 말없이 막차를 기다리던 시절은 완전히 사라졌으나, 여전히 말없이 흐르는 섬진강을 기차 타고 천천히 따라가고 싶은 관광객은 구 곡성역과 기차마을을 계속 찾아온다.
소제동은 변하지 않은 듯 고요하다. 고요함 속의 움직임은 느리고 자연스럽다. 4년 전 문을 연 소제관사42호는 ‘소제창작촌’으로 이름을 바꿨다. 소제창작촌을 운영하는 유현민 작가는 소제창작촌 뒤편 골목에 시울마실과 293빈집 두 개 공간의 문을 열었다. 전통나래관 뒤편 골목에도 소호헌이라는 전시 공간이 있다. 모두 사람이 떠난 지 몇 년씩 된 집이다. 유현민 작가가 소제창작촌에서 활동하는 것을 유심히 본 마을 주민들이 '한번 써 볼 텨?'하며 공간을 저렴하게 빌릴 수 있도록 힘써 주었다. 소제창작촌, 시울마실, 293빈집, 소호헌까지 네 개 공간이 소제동에 있다.
공간을 조금씩 늘리는 것도 운영하는 것도, 유현민 작가의 뜻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민들이 활동을 지지해 주고 도와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제동 사람들은 유현민 작가를 '사진관 아저씨'로 기억한다. 소제창작촌 문을 열고 마을에 돌아다니며 영정사진을 찍어 주는 프로젝트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맨 처음 공간이 소제창작촌이고, 여기에서 전시나 무용 등의 프로그램으로 사람을 만났어요. 그러면서 마을분 중에 '형님' 하며 지내는 분도 생기고, 마을 분들이 조금씩 마음을 열어 주셨어요. 소제창작촌에서 전시하며 젊은 작가들이나, 전시를 보러 사람이 조금씩 오잖아요. 조용했던 동네가 한 번씩 왁자지껄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빈 곳으로 두느니 이런 걸 하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셨던 거죠. 본인들이 아는 공간 중에 싸게 해 줄 수 있는 공간 몇 군데를 소개해 주셨어요. 여력만 되면 다 운영하고 싶지만, 그게 안 되니까 고민하다가도 주민분들이 추천을 많이 해 주셔서 몇 군데 계약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두 번째로 문을 연 공간이 소호헌이다. 소호헌은 7년 정도 빈집이었다. 옛날에 호수가 있던 자리라고 들었다. 전시하려면 전기가 필요한데 워낙 오랫동안 빈집이라 전기를 쓸 수가 없었다. 끌어다 쓰려니 돈이 많이 들어서 고민하자 빌려주겠다고 나선 이웃들이 있었다. 소호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지붕 위에는 蘇湖軒이라는 공간의 이름이 붙었다. 소제 호수가 있었던 집이라는 뜻에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소호헌은 11월이면 정리를 해야 해요. 소호헌이 있던 자리에서 전통나래관 쪽으로 큰 도로를 낸다고 해요. 준비하면서부터 없어지면 반납한다는 생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새로운 재료를 쓰지 않고 버려진 재료를 썼어요. 그래도 아쉬워요. 도시 계획을 세울 때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해요.
세 번째 문을 연 공간은 재생공간 293과 시울마실이다. 시울마실과 재생공간293은 솔랑시울 골목 한가운데에 자리한 청양슈퍼의 가까운 이웃이다. 청양슈퍼 주인장인 윤광원 씨가 공간을 소개했다. 재생공간293은 얼마 전까지 올해 레지던스 작가들이 전시했다. 일본, 태국 등에서 뽑힌 작가들이 와 한국에 몇 달씩 머물러야 했다. 작가들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시울마실까지 세를 얻었다. 윤광원 씨 덕분에 공간을 싸게 얻을 수 있었다.
시울마실은 이층집이다. 일반 가정집과 똑같은 구조다. 재생공간293은 내부 구조가 특이하다. 골목 쪽으로 난 대문으로 들어가면 좁은 마당이 있고, 방과 부엌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공간이 있다. 관사 건물은 나중에 사람이 살면서 공간을 늘렸다. 처음 공간을 구했을 때 가장 먼저 벽에 있던 벽지를 모두 뜯었다. 몇 겹씩 나오더니 가장 처음으로 발랐던 것으로 보이는 벽지를 발견했다. 일본에서 온 작가 메이코 씨가 그 벽지를 작품으로 만들기도 했다. 천장에 규칙적으로 설킨 목조 구조의 지붕은 그대로 남았다. 천장이 높고 방 하나엔 다락방이 있다.
커뮤니티 아트는 주민들 삶에 깊숙하게 들어가야 해요. 공간을 더 만드는 건 혼자서는 무리이긴 해요. 경제적으로 정말 힘들 땐, 공간을 운영하는 게 버겁죠. 그런데 소제동에 오래 머물면서 든 생각은 주민들의 이야기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에요. 제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이 앞에 앉아 있는데, 누가 오더니 혹시 작가분이냐고 물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굉장히 기분 좋아하셨어요. 설치 작가라고 했대요. 노가다를 하니까 설치 아니냐고 웃으면서. 사실은 주민 작가도 중요해요. 주민분들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해 드리고 싶어요. 그러려면 정말 안으로 들어와서 밀접하게 관계하는 활동가가 더 필요해요.
설치 작가로 소개했다는 '형님'은 설치 작가가 어떤 작업을 하는지 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골목에서 헤매면 전시하는 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주민들이 있다. 마을에서 꽤 오랜 시간 공간을 운영한 기획자가 있고, 기획자를 중심으로 여러 공간이 문을 열었다. 소제창작촌과 재생공간293, 시울마실, 소호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전시'를 한다. 그런데 그 공간의 주인은 소제동 주민들이다. 막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슈퍼를 운영하는 사장님, 나이 들어서 이제 일하지 못하는 노인, 지나가는 주민, 예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그곳의 주인이었다.
외국 작가들이 왔을 때 주민들이 칭찬을 많이 했어요. 이 앞에 나무도 가지치기 하고, 작업을 하다가도 주민들이 부르면 나와서 같이 놀고, 말도 잘 안 통하는데 뭐든 함께하는데 거리낌이 없더라고요. 동네 안에 이런 공간을 만드는 건 그런 것 같아요. 소통하고, 소통을 통해 지속가능한 이유를 계속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수원역에서 남쪽방향으로 조금 걷다보면, 두 개의 급수탑이 보인다. 과거에는 담장에 가려져있었지만, 몇 년 사이에 옛 수인선 철도 자리에 산책로를 조성하여 시민들에게 급수탑을 공개하였다. 특히, 급수탑 주변에 산책길을 조성하여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급수탑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급수탑(Water Tower)이란, 물을 공급하기 위해 탑 모양으로 물탱크를 설치한 구조물로, 당시 증기기관차에 물을 급수하였던 시설물을 말한다. 당시 증기기관차는 몇 개의 정류장을 경유하면, 기관차에 급수를 해야만 했다. 급수는 주로 10 여분 정도가 소요됐는데, 따라서 급수탑 주변에는 주로 물을 쉽게 공급할 수 있는 연못이나 저수지가 필요했다고 한다.
수원은 물의 근원이라 이름에 알맞게, 주변에 수원천이 존재하였을 뿐 아니라, 주요 간선의 중심에 있었다. 그래서 증기기관차의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을 설치하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수원역 남쪽에 총 두 개의 급수탑이 만들어졌는데, 벽도조 급수탑과 콘크리트조 급수탑이다. 이들은 협궤열차의 물 공급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특히 수원과 인천을 잇던 수인선의 중요한 물 공급책으로 활용되었다.
수원역 급수탑의 역사적인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수인선이라는 협궤 철도선에 대한 부가적인 내용을 조금 더 알 필요가 있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1937년부터 1995년까지 약 60여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운행이 되었다. 당시, 일반 열차의 1,435mm 철로보다 좁은 762mm 레일 넓이 위에서 달렸던 협궤열차는 마주 보면 무릎이 닿아서 꼬마열차라고도 불릴 정도로 작았다고 한다. 수인선은 인천광역시 송도와 수원을 잇는 협궤 철도선으로 총길이 57km, 일제강점기에는 수여선을 인천항까지 연결하는 중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이후 물량확대와 교통의 편리성 요구가 증대되자, 승객과 화물이 줄어들어 이용 빈도가 크게 감소하였다. 결국 수인선은 1973년 11월 종착역이던 남인천역이 폐쇄되고 1977년 화물수송이 중단되었으며, 1995년에는 여객운송을 중단하고 폐선하게 되었다고 한다.
급수탑은 이러한 증기기관차의 운행에 발 맞춰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지어졌으며, 1967년 8월 31일, 운행을 끝으로 급수탑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한국에서는 증기기관차를 일반 여객용으로 운행하지 않고 있어, 많은 역의 급수탑이 철거된 상태이다. 따라서 전국에 남은 급수탑은 약 20 여개 정도가 전부이다. 남아있는 급수탑 중 일부는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가 되었는데, 경부선과 수원역을 연결했던 수원역의 급수탑 역시 그 중 하나로, 현재 준철도 기념물 제 15,16호로 한국철도 공사 지정 철도문화재로 등록보존되고 있다.
이 두 개의 급수탑들은 두 개의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데, 하나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표준궤용 급수탑의 모양을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벽돌로 만들어진 급수탑으로 콘크리트 급수탑보다 크기는 작지만, 상층부가 더 넓고 크며 붉은색을 띄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붉은 급수탑은 실제로도 매우 드문 경우인데, 작고 아담한 크기이지만 상층부의 커다랗고 웅장한 모습은 당시 수인선의 급수를 담당하던 위용을 보여주는 듯하였다. 반면, 콘크리트 급수탑은 크기는 크지만, 세월에 벗겨진 콘크리트와 녹이 슨 철제 사다리의 모습을 하고 있어 더욱 고독하고 쓸쓸하게 보였다.
급수탑은 주로 원통형 평면을 지니고 있으며 상부와 하부로 나누어져 하부에는 석탄 등을 이용하여 물을 끓이기 위한 엔진과 상부의 물탱크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펌프로 설치가 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는 전기로만 움직이는 KTX 또는 전철이 보편화되고 일반적이라서, 과거에는 석탄과 물을 통해 열차를 움직였다는 것이 새삼 놀랍고 신기하였다.
이렇게 우리의 근대 철도 역사에서 그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가 있는 급수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또 희미한 추억으로 사라지고 있다. 수원역의 급수탑도 최근에서야 산책길로 조성이 되어 시민들에게 공개되었으나, 급수탑에 대한 설명이나 내용이 턱없이 부족하고 이야기의 전달력이 약하다는 한계점을 가진다.
교통의 중심지에서 수인선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수원역 급수탑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안전상의 보수를 확실히 하여 콘크리트 급수탑 위에서 바라보는 수원역의 전경이라던가, 아니면 수원의 철도 역사를 활용한 지역 문화콘텐츠의 활용이 필요하다. 관광상품 개발 등 적극적으로 지역문화원과 시민들이 힘을 합쳐 근대의 소중한 철도 역사를 간직한 문화재를 보존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수여선(水驪線)은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 수원~여주 간을 잇던 철도 노선이었다. 수여선은 궤간이 표준보다 좁고 운행속도가 낮은 협궤 철도였다. 열차의 크기 역시 표준보다 작아서 꼬마열차라고 불렸다. 1931년에 개통한 수여선은 수원, 용인, 이천, 여주등 20개의 역을 거쳐 달렸다. 연료를 달리하는 기관차와 동차, 두 종류의 열차가 수여선 철도를 달렸다. 수여선은 수원에서 여주까지 4시간 40분이 걸렸다.
수여선은 일제 강점기에 지역 물자를 강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설되었다. 사설 철도회사인 경동철도주식회사에서 1930년 수원~이천 구간을 먼저 개통하였고 이듬해에 이천~여주 구간을 개통하였다. 1937년에는 수원~인천을 잇는 수인선을 개통하여 여주에서 항구가 있는 인천까지 최단거리로 직결되는 경제수탈 노선을 완성하였다. 배를 이용해 해산물과 소금 석유 등을 수여선까지 운반해와 원주와 충주에 팔고 그 지역의 특산품을 다시 수여선 열차로 운반하였다. 수여선은 물자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당시 마을 청년을 실어 나르는 징병의 기능도 했다.
그러나 수여선은 가슴 아픈 역사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수여선은 물자수송을 큰 목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주민들의 이동 수단이 되기도 했다. 수여선이 생기기 전에는 수원~여주 간의 지역 교류는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수여선 개통 이후 떨어져 있던 지인들을 더 쉽게 만날 수 있게 되었고, 학생들은 용인과 수원으로 통학할 때 수여선을 이용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느리게 달리는 열차인 만큼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인연도 많았다. 승무원이 승객들의 행선지를 잘 알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지역 사람들은 수여선을 자주 이용했다.
특히 수여선을 자주 이용했던 사람들은 장사꾼이었다. 물건을 팔기 위해 장에 나가는 교통수단으로 수여선이 많이 이용되었다. 수여선 노선 부근에는 지역의 읍내장을 비롯하여 영동시장, 오천장, 김량장, 이천장 등이 있었다. 이 밖에 놀라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관광객들이 여주의 세종대왕릉과 신륵사에 가기 위해 수여선에 올랐다.
수여선은 해방 후에도 꾸준히 많은 이들의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지만 1960년 이후 도로 사정이 개선되면서 화물 수송량이 급감하였다. 거기에 승객의 수는 줄지 않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승객의 무임승차로 점점 적자가 증가했다. 정부는 연간 1억 7900만 원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하던 수여선을 1972년 3월 31일자로 폐지하였다. 수여선은 마지막 운행 날 ‘주민 여러분 안녕’이라는 현수막을, 여주에서 열린 수여선 종별 운행식에서는 ‘여주야 잘 있거라’라는 현수막을 달고 떠났다.
수여선은 지금 그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수여선이 다녔던 길의 대부분이 재개발되어 아파트, 도로 등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여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용인시청에서 양지까지 수여선이 지나던 길은 경기도가 경기옛길 영담길이라는 길을 만들어 ‘수여선 옛길’이라고 이름 지었다. 도보로 표지판을 따라 수여선이 지나던 길을 걸을 수 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갔던 화성역은 지금 버스 정류장의 이름이 되었고 수원역 광장의 남동쪽에서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을 볼 수 있다. 화성역 구간, 죽당역에서 매류역에 이르는 구간은 기찻길이 선형을 보존한 채로 도로가 되었다. 기흥역에서 송담대역까지의 노선은 수여선의 신갈~용인 구간의 노선과 거의 일치한다. 과거 이천역이 있던 자리에는 수여선과 이천역에 대한 설명이 새겨진 이천역 비석이 놓여있고 매류리 역촌마을의 마을회관 옆에는 60년대 역과 마을의 풍경을 보여주는 그림판과 수여선·수인선에 대한 짧은 설명이 적혀 있다. 한때 경기 지역의 주요하고 친근한 교통수단이었던 협궤열차 수여선의 자취는 이렇듯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