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릉동 국수거리는 노원 음식 특화거리이다. 빠르게 유행이 달라지는 음식 문화 속에서 공릉동 국수거리의 가게들은 멸치 국수를 중심으로, 저마다 특색 있는 국수로 비교적 오랜 기간 가게를 운영해오고 있다.
공릉동 복개천을 중심으로 많은 국수집이 생긴 것이 공릉동 국수거리의 시작이다. 그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원조 멸치국수는 1980년 후반 반지하 3평짜리 점포에서 야간에만 멸치 국수집을 운영하였다. 당시 주변에는 벽돌공장이 많아 주변 인부들이 싼 값에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필요했다. 그렇게 시작된 국수집은 오랜 기간 입소문을 타며 근래에는 택시 기사 분들이 자주 오는 국수거리가 되었다.
공릉동 국수거리 입구를 시작으로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국수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국수 가게는 30년 전통 공릉동 「원조 멸치 국수」이다. 이 거리에서는 가장 오래된 국수 가게로 외관은 작고 허름하지만 단골들이 꾸준히 오가는 가게이다.
그 맞은 편 인근에는 「봉평 메밀촌」이 보인다. 원자력 병원 가는 길에 있던 봉평 메밀촌 주방장이 독립해, 국수 거리 입구 인근에 차린 가게이다. 공릉동 국수 거리에서는 가장 늦게 시작한 가게이지만, 이전 단골손님들을 포함해 많으 사람들이 드나든다. 대중적이고 남녀노소 호불호가 없는 무난한 맛으로 장사가 잘 되는 가게 중 하나이다.
국수거리를 걷다보면 다양한 전통의 멸치국수 가게들이 이어진다. 가게이름도 별 꾸밈이 없는 「공릉동 멸치국수」 부터 멸치 국수로 대박을 노리는 「대박 멸치국수」, 멸치국수로 이미 소문이 난 「소문난 멸치국수」가 있다. 또한 30년 전통의 원조 국수와 원조를 다투려는 비교적 깔끔한 「원조 멸치국수」 가게의 간판도 보인다. 국수는 애초 장수를 기원하는 음식이었다. 그래서지 「장수 멸치 국수」도 있다. 국수 거리 멸치국수 가게들은 주 종목인 멸치 국수에 다른 메뉴를 추가하는 전략을 선택하기도 한다. 멸치국수에 전을 추가한 「멸치국수 번창 국수랑 전이랑」이 그러하다.
국수거리에는 전통의 멸치국수 가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박 멸치 국수 옆에 있는 「일번지 국수」 가게는 멸치 국수 외에도 칼국수와 비빔국수 등 다양한 메뉴로 손님들의 입맛을 잡고 있다. 또한 「장수 칼국수 왕만두」 가게는 멸치 국수 중심에서 벗어나 다른 입맛을 지닌 손님들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그 시작에 충실한 「옛날 잔치국수」도 있다. 이처럼 전통과 다양성을 함께 지닌 국수 가게들이 한 골목에 자리 잡으면서 사람들이 배고플 때 찾아 걷게 되는 국수거리를 이루고 있다. 국수거리의 마지막 여정에는 「복성식당」이 자리 잡고 있다. 국수 거리에 국수집이 아닌 식당을 소개하는 것이 의아하겠지만, 식재료를 직접 재배해 이 거리에서 가장 양 많고 저렴한 가성비 최고의 식당으로 유명한 가게이다.
공릉동 국수거리는 2012년 10월 15일에 선포식이 열린 후 매달 11일을 국수 데이로 정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도록 홍보하고 있다. 국수거리에 위치하고 있진 않지만 도깨비 시장에서 늘 손님이 끊이지 않는 가게가 있다. 손으로 직접 빚은 손칼국수 가게인데 시장을 찾는 어른들은 물론, 그 뛰어난 식감으로 과학기술대 학생들의 입맛마저 사로잡고 있다.
공릉동 국수거리를 걸으며 전통의 음식은 원조 그대로 변형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오랜 세월 손님들과 대화하며 맛을 더해가는 다양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릉동 국수거리를 걷는 맛은 전통과 다양성의 조화로운 맛이었다.
웹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강풀’이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2005년 부천국제만화제대상, 2006년 독자만화대상, 2010년 대한민국 올해의 만화상 등의 화려한 이력을 지닌 강풀 작가는 1세대 웹툰 작가이다. 강풀 작가는 어릴 적부터 살고 있는 서울 강동구의 이곳저곳을 그의 작품 속에 그렸다.
5호선 천호역과 강동역 사이의 성내동 일대 골목에는 강풀 작가의 만화 세상이 구현되어 있다. 2013년 강동구에 오랫동안 거주한 강풀 씨와 공공미술 사업단, 봉사자들이 함께 벽화마을을 만들어냈다. ‘성안마을 강풀만화거리’는 강풀 작가의 ‘순정만화 시리즈’를 재구성한 거리이다. 골목 골목마다 만화와 관련된 캐릭터와 글귀, 이야기 등이 이어져 있어, 스토리를 따라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작품인 ‘당신의 모든 순간’, ‘그대를 사랑합니다’, ‘바보’, ‘순정만화’를 읽었던 독자라면 그가 골목에 구현해낸 만화세상을 더욱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강동역 4번 출구에서 직진하면 이곳으로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다. 화살표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서면 강풀만화거리의 지도가 있다. 지도를 참고해 곳곳에 숨어있는 벽화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골목이라 길을 잃을 수 있으니 사진 찍어서 참고하는 것도 추천한다. 바닥에 그려진 별들을 따라가는 것도 편하다.
골목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눈에 보인 벽화는 두 남녀가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그림이었다. “열심히 살게 해줘서 고마워요.”라는 멘트에서 강풀의 만화를 본 적은 없지만 두 사람이 사랑하는 사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랑이란 감정은 인생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따뜻한, 어쩌면 따뜻함을 넘어서서 뜨거운 감정이 아닐까. 그 옆에는 나무 아래 서 있는 운동복을 입은 남자와 남자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듯한 차려입은 여자가 있다. “니가 나의 작은 별이었구나.”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옆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마주 보고 서 있는 그림이 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사랑은 다양한 계층, 연령의 사람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임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주택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는 좁은 골목에 펼쳐진 순정만화 내용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내용뿐만 아니라 밝은 채색 또한 어둡고 좁은 골목길을 밝고 따뜻한 공간으로 만들어주는데 한몫을 한다. 회색빛 담벼락과 시멘트 바닥, 차갑다 못해 시린 느낌의 양은 판자 지붕. 흑백의 거리에 알록달록한 색을 추가해 동화적인 느낌을 준다. 특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결혼식 복장으로 오토바이를 타는 연한 분홍색 바탕의 벽화는 무채색의 골목을 환하게 밝혀준다.
어두컴컴하고 좁은 주택가 골목길을 따뜻한 메시지와 밝은 색채를 지닌 벽화를 통해 새로운 공간으로 재구성한 ‘강풀 만화거리’. 2016년부터 전문 해설사와 함께하는 벽화투어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고 하니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바닥에 그려진 별을 따라 걷다 보면 만화거리가 끝나는 곳에 성내전통시장이 있다. 전통시장에서 파는 다양한 먹을거리도 함께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강동구에 오래 거주했던 주민으로서 근처에 있는 쭈꾸미 골목의 쭈꾸미 가게에서 이 여정을 마무리하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주민들이 낸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지역 주민들과 함께 가꿔온 거리인 만큼 쾌적하고 풍성한 문화가 살아 숨쉬는 거리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과거 대구에도 읍성이 있었다. 대구 중구의 북성로는 대구읍성의 북쪽에 있는 성벽 길을 칭하는 말이다. 1906년 일본제국이 북쪽 성벽을 허물고 읍성 중심부에 주요 건물을 지으면서 그들만의 상권을 형성했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수많은 적산가옥과 근대 건축물의 잔재들이 지금도 북성로에 남아있는 이유다. 아픈 역사 속 그렇게 북성로는 대구에서 처음으로 상권이 발달한 최고의 번화가 되었다.
한국전쟁과 산업화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근대 역사를 품고 있는 북성로에 공구거리가 자리하고 있다. 대구 최대의 공구거리인 ‘북성로 공구거리’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됐다. 국산 공구가 생산되기 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폐공구를 수집하던 주민 몇몇이 이곳에서 공구를 판매한 것이 시작이었다. 1950~60년대 철물과 기계를 취급하는 공구 상점들이 하나둘 모여 들더니 자연스럽게 공구거리가 만들어졌다. 1970~80년대는 점포 수가 600여 개에 이르며 전국의 모든 공구가 이곳에 있다 할 만큼 호황을 누렸다. 과거에는 ‘도면만 있다면 탱크도 쉽게 만든다’는 소문이 나올 정도였다
북성로 입구 대구역을 중심으로 역세권이 발달하면서, 1980~1990년대 북성로는 핫플레이스가 될 만큼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그러나 IMF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2000년대를 기점으로 상권이 분산되었고 호황은 옛 말이 되었다. 이제 공구를 찾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지금도 수십 개의 공구 상가들이 남아 ‘북성로 공구거리’ 이름을 지키고 있다.
공구거리에는 수십 개의 공구점이 마주 보고 늘어서 있다. 거리에 문을 연 가게들 마다 잔뜩 쌓아두고 있는 여러 가지 부품들은 그 종류도 크기도 천차만별이다. 이름도 쓰임도 잘 알지 못하는 공구들과 가게 앞에 앉아 가만히 용접을 하는 이의 모습은 여행자들에게 생경한 풍경이 된다.
활기를 잃고 공구만 가득했던 북성로 공구거리는 도시 정비 사업을 거치면서 문화와 관광의 거리로 바뀌었다. 도로 정비와 간판 정비, 공구박물관 개설, 순종황제어가길이 조성되면서 낡은 이미지를 벗어던지게 된 것이다. 오래된 낡은 적산가옥과 근대식 건물에 젊은 장사꾼들과 문화인들이 들어오면서 거리는 감각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특색 있는 카페와 갤러리는 물론 독립서점 등 다양하고 소소한 볼거리가 곳곳에 숨어있다.
특히 눈길이 가는 곳은 2013년 5월 개관한 북성로 공구박물관이다. 과거 일제강점기 때에는 쌀 창고로 사용되었다고 하는 옛날 삼덕상회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가 2018년, 5분 거리에 있는 지금의 자리로 확장 이전했다. 중구 서성로에 새롭게 문을 연 공구박물관은 ‘북성로기술예술융합소 모루’라는 이름으로 새단장을 했다. 대장간에서 흔히 무쇠와 철을 다듬을 때 받침대로 쓰고는 하는 단단한 ‘모루’에서 이름을 따왔다.
‘두드리며 생각하는 곳’ 모루는 기술과 예술의 융복합이라는 참신한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모루는 장인작업장과 전시관, 창작 공간 등을 갖추고 있다. 전시관 안에는 전시품과 시민 기증품 100여 종 3천여 점이 진열되어 있고 북성로를 그린 대형 아크릴 벽에는 망치, 톱, 칼, 끌, 스패너, 드라이버 등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수직 발동기 등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는 희귀 공구들도 구경할 수 있다.
1층 장인의 방은 북성로 장인들의 옛 작업공간을 재현했다. 이곳엔 경력 60년이 넘은 함석공 이득영 씨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함석집은 항상 구둣방처럼 두드려야 한다. 요술방망이 두들기는 소리만 나면 귀신같이 손님이 찾아온다.” 두드리는 사람 이득영 장인의 땡땡땡, 땜질 소리가 들여오는 듯하다. 작업대에 놓인 함석가위와 오래된 판금망치 등 낡고 붉게 녹슨 공구들을 통해 장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모루는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오랜 공구를 테마로 한 다양한 예술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창작공간에서 낡아 버려지는 폐공구를 활용하여 직접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철제·PVC 파이프를 가지고 타악기 만들기, 사진·디자인전 등 공구와 관련된 다채로운 활동이 펼쳐진다. 공구들로 가득한 공간은 함부로 따라할 수 없는 진정한 빈티지를 선사한다. 단단한 철물의 특징 때문인지 찾아드는 손님에게도 묘한 중압감을 느끼게 만든다.
북성로 공구거리는 이제 개성 넘치는 공간들로 생기가 넘친다. ‘카페 삼덕상회’는 70년 넘게 이 거리를 지켜온 공구상 삼덕상회 건물을 카페로 개조해 명물이 됐다. ‘믹스카페 북성로’는 적산가옥 두 채를 자연스럽게 연결한 카페 겸 전시장이다. 도심 속에 세워져 오랜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건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웅장함과 묵직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 지역 작가들의 개인 서적을 판매하는 독립서점 ‘더폴락’과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 판매점 ‘소셜마켓 협동조합’도 북성로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공구를 모티브로 한 빵을 판매하는 베이커리 ‘팩토리 09’는 북성로 공구거리의 문화상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 북성로는 근대 역사 위로 현대 예술과 문화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빈티지와 세련미가 함께 어우러지고, 묵직함과 자유로움이 균형을 맞춘다. 북성로 공구거리에서 우리는 세월이라는 공구가 만들어낸 색다른 공간을 경험하게 된다.
공덕역에서부터 마포대교 북단까지 뻗은 마포로 좌우에는 많은 맛집들이 있다. 특히 마포역 3번 출구에서 공덕역 8번 출구로 이어지는 안쪽 길은 마포먹자골목으로 통한다. 다른 시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업종의 음식점들이 포진해있지만, 마포하면 연관검색어처럼 따라붙는 음식은 단연 갈비다. 그래서인지 전통을 자랑하는 돼지갈비, 소 주물럭집 등 고기집이 많은 편이다. 그 마포먹자골목에 놀랍게도 평균 30년 이상, 합이 100년이 넘은 전통을 자랑하는 떡볶이 가게 세 곳이 한 골목에서 성업 중이다. 바로 마포구 도화2길에 위치한 코끼리분식, 마포원조떡볶이, 다락이 그곳이다.
각각 영업기간 30년이 넘은 이 가게들은, 각각의 단골들에 소문을 듣고 찾아온 손님들이 가세해 식사시간엔 언제나 길게 줄이 서 있다. 세 가게 각각 뚜렷한 개성으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지만 아주 큰 공통점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맛이 있다는 것, 두 번째는 20세기부터 장사를 시작해서 모두 이골목에서 30년을 넘었다는 것, 세 번째는 가격이 싸다는 점이다. 사실 마포상권이 저렴한 곳이 아닌데 세 집 모두 가성비는 어디 내놔도 밀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최강을 자랑하고 있다.
한집한집 알아보면, 도화2길 3번지에 위치한 코끼리분식은 즉석 떡볶이집으로 개업년도가 1986년이다. 2018년 서울시의 ‘오래가게’에 선정되었다. 코끼리분식은 떡볶이 골목 중 가성비의 선두주자로 즉석떡볶이 2인분에 2천원이다. 사리와 튀김을 포함하고 밥까지 볶아서 둘이 배부르게 먹어도 7~8천 원 정도밖에 안 나온다. 요즘 물가를 생각하면 놀라운 가격이다. 물론 맛있는 건 기본이다.
점심시간이면 각각의 가게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손님들의 줄이 보인다. 한 골목에 모여 있는 이 세 곳의 떡볶이집이 각각 백년을 넘을 정도로 오래오래 갔으면 좋겠다.
종로는 조선왕조의 궁궐들을 품고 있는 서울의 중심부로서, 오랜 문화 구역이다. 피맛골, 무교동 문화의 거리, 을지로 골뱅이 골목 등의 먹거리 지역, 방산시장, 광장시장 등의 건재한 재래시장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귀금속 거리, 낙원상가, 세운상가 등의 전문적인 상가까지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구역들을 가지고 있다. 유구한 역사의 한편으로 시청, 각종 금융사와 대기업의 고층빌딩이 늘어선 가장 현대적인 서울의 모습도 있는 ‘다이나믹 코리아’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지역이다.
종로 예지동에 형성되어 주변 봉익동 등지로 이동하며 시계골목은 종로에서 그 역사를 6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이곳은 최근 핫 플레이스로 주목받고 있는, 멀지 않은 익선동 골목들에 비하면 아주 조용하다. 이제 아는 사람만 아는, 모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골목이다. 200미터 남짓한 좁은 골목에 이제는 10개 남짓의 시계방과 귀금속방, 금속재료방, 각종 부품과 각인 광택 가게 몇 개가 모여있다. 한 때는 비슷한 생김새와 크기의 시계방들이 100여개 넘게 모여 있던 시계골목이었다. 시계줄, 광택, 수리 등 각각의 전문분야가 있었고, 만원짜리 시계부터 수천만원의 명품시계까지, 신상품부터 빈티지 상품까지 세상의 모든 시계가 모여있던 곳이다. 가까이에 귀금속 거리도 화려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시계 골목에 비하면 귀금속 가게들은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는 편이다.
아날로그 기계식 수리가 주업이다 보니 기계 대신 디지털로 대체되고 있는 요즘, 세상에서 가장 빨리 잊혀져가는 곳이 시계골목이다. 문 닫은 많은 시계방들이 이 주변에서 살아남은 금속 부품, 각인 및 광택 가게들로 대체되면서 시계골목은 사라지지 않고 숨을 붙들고 있다. 80년대의 호황기를 끝으로 90년도부터 시계 산업 자체가 주춤하면서부터 디지털시계가 많아지고, 나아가 4차 산업혁명이 대두되는 지금까지 시계골목의 상권은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시계방들에는 30년에서 40년의 경력을 지닌 장인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곳을 지켜보는 외부인들은 걱정스럽기만 하겠지만 시계장인들은 낙담하지만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일을 사랑하고, 자신의 세월을 담은 시계방들에 대한 애착도 남다르다.
오래되서 멈춰버린지도 오래된 다양한 브랜드의 시계를 가지고 시계골목의 ‘신화사’를 찾았다. 장인은 눈알에 딱 맞게 껴지는 전문 안경을 끼고, 담담하게 수리를 시작했다. 단순히 배터리만 교체하면 되는 것도 있지만, 부품이 녹아내려 망가졌거나, 이물질이 잔뜩 낀 시계도 있었다. 그런 시계들이 장인의 손에 하나씩 하나씩 다시 작동을 해 나간다. 판매처에 A/S를 맡기던 때를 생각하며, 개수도 많겠다 정해진 어느 날 다시 오라는 말이 떨어질 줄 알았다. 문 닫기 전에 도착해 맡길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는데, 시계장인은 수리를 멈추지 않는다. 언제 또 여기까지 찾아오겠냐며 금방 다 해주겠다고 한다.
그제서야 시계방을 둘러보았다. 일명 ‘줄질’로 유명한 시계방이라더니 벽과 천장까지 다양한 종류의 시계줄이 걸려있고, 아래쪽에 작고 빽빽한 서랍장에는 다양한 판매용 시계나 부품들이 차있다. 바꿀 시계줄을 고르니 놀러온 이웃인가보다 했던 아저씨가 시계줄을 능숙하게 갈아 껴주었다. 갑자기 들어와 대소사를 늘어놓으며 한참을 대화중이던 아저씨는 알고 보니 옆집의 시계장인이었다. 어느 새 안경을 받아 끼고 장인이 꽤 오래 붙들고 있던 디지털 시계 문제를 금세 해결해주었다.
나는 또 디지털 시계는 잘 모르고,
이 사람이 젊은 사람이라 더 잘해.
그렇게 시계 수리와 줄질을 위해 잠시 머무는 동안 이 시계방은 같은 골목의 시계장인들, 찾아온 단골들, 택배 기사 등 북적북적 익숙한 사람들이 내뿜는 친숙한 활기로 넘쳐났다. 단종된 부품을 서로 공유하기도 하고, 상권에 대한 고민도 나누고, 자연스럽게 서로 돕는 시계골목 장인들의 시간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시계골목을 찾지 않았다면, 언젠가 그대로 버리고 말았을 시계들은 다시 나와 가족들의 일상을 함께하고 있다. 이곳만이 줄 수 있는 가치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족발하면 장충동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고, 서울 3대 족발이라고 꼽히는 성수동의 성수족발, 종로의 오향족발, 양재동의 양재족발을 꼽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야식메뉴인 족발은 마음 먹으면 쉽게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친숙한 음식이다.
천호역에서 걸어내려오면 천호 구시장 거리의 2001아울렛 옆에 족발집들이 모여 있는 좁다란 족발골목이 있다. 족발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 근처를 몇 번 와보지 못했다면 모르고 지나쳐도 이상할 것 없는 좁은 골목이다. 거창한 느낌 없는 골목이지만 40년 넘게 사랑받고, 십년 단위의 단골고객들을 가지고 있는 오랜 족발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한국 전쟁 후 피란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시작된 이곳은 1970년대 들어서면서 하나 둘 음식점들이 생기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족발 골목에 들어서면 넓지 않아 더 극대화되는 것 같은 이 골목만의 풍광이 있었다. 삶아지고, 썰어지는 고기들, 코를 감싸는 달콤하면서도 알싸한 족발냄새, 전통과 원조를 강조하고 있는 세월이 느껴지는 간판들이 어우러져 묘한 흥분을 선사한다. 좁다란 골목이라 나름 프라이빗한 매력도 느껴진다.
초행길이라면 어디를 들어가게 될까? 흔히 이런 족발골목 같은 식으로 음식 자체를 강조해 형성된 골목들은 맛이 다 거기서 거기일 거라는 생각도 들기 마련이다. 20년은 훌쩍 넘는 경력의 족발의 달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보니, 그냥 끌리는 가게로 들어가도 실패할 걱정은 없다. 하지만 보통은 자신의 지인들이 이용하는 집을 추천받아 가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신림동 순대촌이 그렇듯, 저마다의 단골집 하나씩은 마음에 품고 있다. 족발도 족발이지만 어떤 집은 김치가 맛있고, 어떤 집은 막국수가 맛있고 하는 저마다의 특성들이 있어 한 단골집만 갈 수도 있겠지만 그날그날의 기분과 취향에 따라 다른 집들을 이용하는 재미도 있다.
손가락 하나로 집안에 누워서도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오랜 세월을 거친 골목들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소식이 왕왕 들려오지만, 대표 배달음식인 족발은 위기 없이 순항 중이다.
전통적인 한방 방식의 족발은 가장 기본적인 족발이다. 잡내 없고 부드러운 식감을 자랑하는 이 기본족발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오리지널 메뉴이다. 하지만 트렌드에 따라 족발 메뉴도 진화하고 있다. 마늘 족발, 매운 족발같이 한국인이 좋아하는 양념을 한 차례 더한 메뉴도 있고, 새로운 퓨전 족발메뉴도 계속 발명되고 있다. 월남쌈을 접목한 족발쌈, 치즈에 찍어먹는 퐁듀 불족발 등의 신 메뉴들이 개발되면서 각종 매체들을 통해 최근에 천호동 족발골목은 다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저마다 방송출연 경력을 간판으로 달고 있다. 기본 족발의 맛이 좋기에 이러한 퓨전메뉴도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족발이라는 음식 자체는 건재하지만, 족발골목은 이제 재개발 대상이 되었다. 이 골목이 위치한 천호 구시장은 재래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표상권이었지만, 시장이 노후하고, 집창촌 문제가 있어 점점 낙후되었다. 젊은 세대들은 로데오 거리나 현대백화점과 이마트가 있는 역 쪽으로 몰려갔고, 상권은 이동되었다. 재개발 사업 역시 송파구 일대 개발에 밀려 주목받지 못하고, 점점 접근성이 떨어져갔다. 노포들을 일부러 찾아가는 ‘뉴트로’ 열풍이 불고, 배달량은 늘었지만 이 족발골목도 자꾸만 생기를 잃어갔다. 최근 집창촌이 단속으로 규모가 줄어들면서 지역의 이미지가 변화하기 시작했고 강동권의 개발에 가속이 붙으며 드디어 재개발 결정이 떨어졌다. 가게들마다 이전 안내 현수막이 붙기 시작하더니 골목은 비어갔고, 곧 공사가 시작될 듯 막혔다. 큰 존재감은 아니지만 그 자리에 언제까지 있을 것 같던 푸근한 골목이 어느 날 막혔다.
족발골목에서 수십년 살 맞대고 붙어있던 족발집들은 이제 주변 건물들로 뿔뿔이 흩어졌다. 쌓인 시간만큼 많은 사람들의 추억의 맛이 가득한 골목이 이제 정말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