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거기서 누가 무엇을 왜 가르치고 배우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개항기의 학교와 일제강점기의 학교, 해방 후의 학교, 21세기의 학교라는 장소의 의미는 다 다르고, 달라야 정상이다. ‘광주광역시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 서석초등학교’의 역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서석초등학교는 을미개혁(1896년)의 하나로 공포된 소학 교령에 의해 세워진 학교다. 광주향교 옆 사마재에서 문을 연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는 초기에 학생이 없어 애를 먹었다고 한다. 유교의 전통으로 인해 남자 학생들은 삭발하기 싫어 오지 않았고, 여자들은 체조가 기생춤 같다 하여 꺼렸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모인 학생들도 대개 16~17세였다. 더러 장가를 든 학생도 있었다. “모여서 잡담도 나누고 토론도 벌이다가, 책을 읽기도 하고, 마치 노는 것 같았다.” 광주 공립소학교의 풍경은 아니지만, 당시 근대 교육의 현장을 둘러본 외국 선교사가 남긴 기록을 보면, 개항기 근대 교육의 현장은 자유분방했던 모양이다. 규율과 훈육에 익숙한 서양인의 눈에는 무척 이질적으로 보였던 듯하다.
공립소학교는 1906년 공립 광주 보통학교가 되었다. 학교 공간도 이듬해 현재의 전일빌딩 자리로 옮겼다. 경술국치 후 교명은 광주 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되었고, 자리도 1927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1930년에는 강당이 지어졌다. 1933년에는 화재가 발생해 교실이 타버려 1935년 본관을 새로 건립해야 했다. 바로 전 해인 1934년 학교 이름은 광주 제1 공립보통학교로 또 한 번 바뀌었다.
1938년에는 광주 서석 공립 심상소학교, 1941년에는 광주 서석 공립초등학교가 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초등교육 정책 변화에 따른 것이었는데, 주목되는 점은 서석이라는 교명이다. 서석(瑞石)은 광주의 상징 무등산의 다른 이름이다. 광주도 예전엔 서석읍이었다. 본때 없는 이전 교명과는 비교도 안 되는 훌륭한 이름짓기였다고 하겠다. 서석 공립초등학교는 1943년 별관을 신축했다.
1930년 건립된 강당과 1935년에 지어진 본관은 2002년에, 1943년에 건축된 별관은 2007년에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세 건물은 현재 등록문화재 제17호다. 강당은 체육관이기도 했는데, 현재는 서석당이라 불린다. 서석당은 지을 당시 전국에서 유일한 대강당이어서 타지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일부러 들러 구경하고 갔다고 한다. 서석당 현관 위층의 둥근 창은 벽체와 같은 재료인 붉은 벽돌로 둥글게 감쌌는데, 정교한 솜씨가 돋보인다.
본관도 붉은 벽돌 2층 건물로서, 모서리마다 벽돌을 둥글게 쌓았다. 지붕에는 반원형 아치 형태로 환기창을 두었다. 당시로써는 최고급 벽돌과 목재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별관도 마찬가지다. 별관은 특히 교실마다 굴뚝을 세운 점이 이채롭다.
학생을 한 명도 구하기 어려웠던 광주 최초의 근대 공립학교는 일제강점기 누구나 가기 원하는 학교가 되었지만, 체벌로 훈육하는 규율 공간이기도 했다. 1920년대에 광주 공립보통학교에 다녔던 졸업생의 증언에 따르면 행동이 산만하거나 수업료를 내지 못하면 매를 맞았다고 한다. 근천 헌병대에서 아침마다 부는 나팔 소리가 수업시간에도 들리던 시절 얘기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근대 교육이 도입된 이래 전국의 학생들은 집을 나서며 큰 소리로 인사했다. 광주 서석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오늘도 근대문화유산이 된 아름다운 학교에 간다. 근대교육과 학교는 지난 120년 동안 달라졌고, 지금도 달라지고 있다.
“낮은 바람이 되고 싶은 사람이고, 독립기획자이며, ‘소년의 서’란 작은 책방을 꾸리고 있습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임인자(43)씨. 그의 이력인 서울변방연극제 예술감독, 광화문 공공극장 ‘블랙텐트’ 운영위원, 형제복지원 생존자모임 총무 등의 직함에서도 그녀가 겪어온 시공간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녀가 서 있는 곳, 해 온 일들의 주소는 거개 ‘변방’이었다. 떠밀려난 변방이 아니라 스스로 택한 변방.
지리적 위치도 때론 그렇다. 흥행이란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좋은 영화들을 고집하며 8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단관으로 생존하고 있는 ‘광주극장’의 옆구리 골목에 들어서 몇 번 굽이돌면 작은 책방이 뜬금없이 나타난다.
문을 열면, 책의 밀도가 확 느껴진다. 일고여덟 평의 공간에 책들이 집적돼 있다. 이 책짐을 떠메고 곧 이사가거나 방금 이사온 것 같은, 무질서의 질서가 에너지가 되어 흐른다. 인문사회과학예술서점인 이 서점에 들어오는 책의 자격은 무엇일까.
“광주 오월 관련 책들, 형제복지원 사건처럼 차별과 배제에 관련된 책들, 여성에 관련된 책들, 연극에 관한 책들, 도시에 관한 책들 등등. 출입문 쪽은 신간이고 안쪽엔 지금은 구하기 힘든 책들이 많아요. 판매는 안하지만 보여드리려고요. 일종의 도서관 같은 역할이랄까요.” 서점을 하면서도 꼭 읽어야 할 책, 있어야 할 책을 신중히 발굴하고 전하려는 산책자로서의 자세가 보인다. 변방을 “제도권에서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거점”으로 바라보듯, 서점 역시 그에겐 함께 읽고 알아가며 더 나은 사회를 향해 실천하려는 작은 씨앗 같은 공간인가 보다.
이상호 작가가 그린 녹두장군 전봉준의 얼굴 너머로 불끈 쥔 주먹과 함께 ‘We Will Not Be Silent’란 구호를 새긴 포스터가 보인다. 2016년 가을에 문 연 ‘소년의 서(書)’. 하지만 자주 문이 닫혔다. 그녀가 서점 바깥 세상에 나설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시대적인 급박함 속에서 서점이 운영되다 보니까 뭔가 서점으로서 성실하지 못한 느낌이 있었죠.”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들 중 1인이기도 한 그녀는 국가폭력인 블랙리스트 사태에 맞서 싸우면서 ‘김기춘 재판’을 꾸준히 방청했다. 또한 서점 문을 열고 얼마 안돼서 광화문 블랙텐트 활동 때문에 광화문에서 겨울을 났다. 그녀의 인스타그램에 ‘오늘 서점 문 닫음’이란 소식이 올라온다는 것은 그녀가 서점에 부재한 대신 무언가 긴박한 현장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년의 서’에 닿으려면, 골목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과정도 또 하나의 짧은 여행이 된다. 하지만 깊숙한 골목에 서점을 열면서 일말의 걱정은 없었을까. 그녀는 ‘아니오’라고 즉답한다.
“골목을 좋아해요. 광주극장에 영화 보러올 때 행복했던 기억들 때문에도 이 골목이 맘에 들었고, 소위 ‘핫하다’는 동네들과 달리 광주에서 숨쉴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책을 팔아보니 문화로서의 책 판매도 있고 상업행위로서의 책판매도 있는데 대로에 있으면 상업행위에 더 충실해야 할 것 같고 그러다 보면 애초에 서점을 연 의도와도 멀어질 것 같아요.”
임인자 씨가 서점을 열게 된 것은 2013년 서울변방연극제에서 형제복지원사건 피해생존자 한종선 씨의 이야기를 담은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바다를 떠돌았다」란 작품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년의 서’란 간판은 잊혀진 과거, 소외된 진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하지만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란 의미를 담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않은 존재가 소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붙인 이름이다. 책방 진열장에는 한종선의 「살아남은 아이」가 진열되어 있다.
초록색의 동그란 원이 겹겹을 이루는 간판도 직접 만들었다. 동그란 원은 옛 전남도청 앞 분수대광장을 생각하면서 디자인했다. ‘소년의 서’ 위층인 2층엔 ‘원앙자수’가 세들어 있다.
“드륵드륵 소리가 나죠. 일상의 배경음으로.”
‘원앙자수’는 전기세를 같이 내는 사이다.
“작년에 제가 제때제때 못내서 미안했죠. 참고 기다려주셔서 늘 고마웠고요.”
또 긴밀한 이웃으로는 광주극장이 있다. 서점 문을 열지 못할 때도 책 택배상자가 오면 받아주는 사이다.
작년 ‘소년의 서’의 목표는 책 판매로 월세를 내는 것이었고, 목표를 달성했다. 2018년 판매 결산은 1300권 정도. “한 달에 100권은 되잖아요. 열심히 판 결과, 책을 파는 즐거움도 알게 됐고 책과 사람을 잇는 재미도 누렸어요.” 북토크나 독서회도 부지런히 꾸리면서 사람들이 점점 연결되고 연대의 씨앗들도 움트고 있다. 골목이란 공간적 자산을 활용한 행사들도 자주 해볼 생각이다.
올해 목표는 바깥 일을 많이 줄이고 서점에 있는 시간을 늘리는 것. “그러기 위해선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과 사건들이 해결돼야죠. 서점에도 나에게도 일상이 돌아왔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연대하고 있어요.” 골목 안 작은 책방 역시 그녀에겐 변방이고 광장이고 거리이다. 억눌리고 사라지고 삭제된 목소리들을 불러오고 ‘모두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생활이 척박하던 시절, 먹고사는 것이 우선이었던 시절에도 서민들에게 숨통 트이는 시간을 제공하며 해방구가 되어주었던 통로가 있었다. 빛바래고 낡은 포스터가 붙어 있고 손 그림으로 그려진 그림간판이 걸리던 극장에서 서민들은 꿈을 꾸거나 쉼을 얻을 수 있었다. 수없이 많았던 향토극장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이 자리 잡은 지도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오래된 극장에서 누렸던 호사인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 추억 속 필름영화의 감성은 두고두고 가슴 속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광주극장은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 46번길에 있는 영화관이다. 광주에 향토극장으로는 지금은 사라진 무등극장과 두 개정도의 극장이 더 있었으나 이제는 오롯이 광주극장 하나가 남아있다. 광주극장은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1935년 개관하여 오늘까지 8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1933년 법인이 설립되고 부터로 본다면 올해 84주년이다. 지금은 구도심이 되어버렸지만 많은 한복집과 보석상들이 자리 잡았던 충장로 골목이 과거에는 중심지이자 번화가였다. 광주극장은 바로 그 충장로에 자리잡고 있다.
광주극장은 1968년 한차례의 큰 화재로 원래 건물이 소실되었지만 복원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다. 전소되기 전엔 좌석이 1000석인 극장이었다. 연극, 공연, 권투경기 등 영화상영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것들을 볼 수 있는 문화공연장이었던 셈이다.
디지털 영화가 보편화되기 전인 2000년대 초반까지 극장에서의 영화 상영이란 필름상영이었다. 20분 분량의 35미리 필름 6권이 필름 캔에 담겨 전국에서 상영하는 극장 상영관으로 옮겨졌고 각 상영관마다 영사실로 보내져 영사기사의 익숙한 솜씨에 따라 편집되었다. 광주극장에서는 지금도 필름 영사기를 보관하고 있으며 일 년에 3~4번 정도는 필름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20년 이상 극장에서 일하셨던 영사기사 두 분이 디지털과 필름 영사기를 돌리며 극장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낡은 극장 건물의 외관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영화간판학교’라고 적힌 그림간판이다. 손 간판을 꾸준히 작업해온 마지막 간판쟁이 박태규 선생의 뒤를 이은 간판학교 출신들의 그림이다. 시민 간판학교는 4년 전부터 해오고 있으며 각자가 광주극장에서 봤던 영화 중에서 좋아하거나 의미 있는 영화를 주제로 작업해오고 있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니 내부의 목조장식, 로비에 전시된 옛 영사기를 통해 세월의 흔적이 엿보인다. 로비를 지면 갓 내린 커피와 음료를 판매하는 곳이 있다. 상영시간에 맞춰 은은한 종소리가 울린다. 상영관에 입장
하라는 멋스런 안내방송인 셈이다. 전체 좌석 수는 856석, 좌석 예매 후 지정좌석제에서 영화를 보는 것에 익숙한 이들에겐 오히려 낯선 풍경일 수 있을 만큼 상영관 내부엔 여유 좌석이 넘쳐난다. 광주극장은 1.2층 어디서든 자유석에서 관람이 가능하다.
광주극장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개봉작을 상영했고 관람객이 제법 많은 극장이었으나 멀티플렉스 전용 극장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며 자생을 위한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정체성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2002년에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술영화관 사업에 지원을 하고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광주극장이 선정되었으나 초반에는 오히려 개봉작을 상영할 때보다 운영이 힘들었다. 지금처럼 예술영화에 대한 인식이나 미디어 노출이 높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려웠던 그때 광주극장은 후원회원을 모집한다. 광주극장의 운영이 어려움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해주었고 광주에 살지 않더라도 광주극장에 와본 경험이 있거나 광주극장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분들의 후원금으로 어려운 시기를 잘 버텨낼 수 있었다.
광주극장이 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들의 애정과 더불어 자본에 잠식당하지 않고 고유한 색과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또 다른 비결이 무엇일까 궁금하던 차에 광주극장에서 만난 극장 관계자의 말 속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요즘은 동네에서 솔직히 빵집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데 제가 여기서 일을 해서가 아니고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4대째 가업으로 이어 오고 있는데 이걸로 돈벌이를 하려는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지켜야한다는 그런 신념이나 철학 같은 게 있는 거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올곧은 철학과 신념이 광주극장에도 전해오고 있다. 광주극장은 단순하게 영화를 상영하는 상영관 그 이상으로 광주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행사를 주도해온 광주 문화예술의 살아있는 전설이며, 영화를 사랑하는 마니아들이 모여 영화이야기를 나누는 사랑방이다. 광주의 문화를 이어가면서 긴 호흡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광주극장이 오래오래 유지되길 바라며 100주년에도 영사필름이 돌아가는 광주극장을 방문해보길 희망한다.
광주문화재단에서 오래된 가게로 소개받은 공원물방을 찾았다. 염료 가게라고 하는데 이름이 물방이다. 물감을 판매하는 물감방의 줄임말인 듯하다. 처음에는 인터뷰를 거절하셨던 사장님과 지역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음을 열고 지난 이야기를 해주신다.
“지금 내가 66살인데, 예전에는 염료가게가 지방마다 있었지. 전에는 배달도 많고 했지만 요즘은 소득이 없으니까 하려는 사람들이 없어.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지배 할 때부터 공원물방이 있었다고 하니 그때부터 계산해보면 이 가게가 100년이 넘었지. 내가 처음 입사했을 때는 건물이 일본식 주택이니까 겨울철에 다다미집에서 고생하며 지냈어. 내가 19살부터 일했으니까 여기서 일한지 47년이 되었지. 처음에 7년간 근무하고, 내가 인수한지 40년이 된 건데. 내가 입사할 때 물방 사장님은 우리 아저씨 되시는 분 친구였어, 그분이 잠깐만 일 좀 봐달고 했던 건데, 잠깐 한다는 게 47년이 되부렀어.”
50년 가까이 한 가지 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그렇게 오랫동안 물방을 운영해온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장사가 잘 되던 시절은 지나가고 지금은 단골손님 몇몇만이 가게를 찾는다고 한다. 가게 문을 닫으면 그 손님들은 이 지역에서 염료를 살 곳이 없다.
“공원물방이 원래 있던 자리는 일본식 건물은 철거되고 주차장이 됐어요. 여기로 온지는 십년 조금 넘었는데, 물방이 이제 광주에는 저밖에 없어요. 색깔 내는 방식을 알아야 하는데 요즘에는 아는 사람들도 없지. 면사에 쓰는 염료, 나일론 염료가 다 다르지. 염료 부호를 알아야해. 어디에 쓴다 하면 바로 알아야지. 전에는 독일제가 제일 좋았어요. 이제는 염료를 선진국에선 안 만들고 후진국에서 만들고 있지, 환경문제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생산을 안해요. 상표는 변함이 없으니까 그렇지. 국내산 나오는 것도 천연염료뿐이에요. 화학염료는 전부 수입품이지. 옛날에는 소득이 좋았어, 광목에 염색 할 때, 특히 명절에는 줄섰지. 그리고 인근 지역에서 염료를 받아다가 장사하는 사람들 많았어요. 옛날에는 직물공장이 있었잖아.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을 때만해도 염료를 수입해서 염색해서 수출하고 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섬유를 생산하는 공장들이 없어졌잖아요. 그러니까 산업구조가 바뀐거죠. 이 업종은 이제 사양산업이 된 거야. 점원들 다 보내고 혼자 일한지도 10년이 넘었는데, 이제 하는데 까지 하다가 말아야지 뭐.”
예전에 호남지방의 염료는 부산을 통해서 공급되었다고 한다. 고체화된 양잿물, 물감, 조단이라는 첨가물이 주종이었다. 부산에서 여수로 들어온 원료들은 호남 각지의 도매상에게 판매되었고 도매상을 통해서 보부상들이 인근 지역 소매상들에게 물건을 공급했다. 원하는 색상의 물감과 양잿물과 조단을 섞어 뜨거운 물에 끓이면 흰 무명옷감이 원하는 색깔로 염색이 되었다. 당시에 염료는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활필수품 이었다. 그러나 예전의 무명옷들은 이제 화학섬유로 대체되고 기존의 물방들은 나전칠기에 사용되는 염료를 주로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사용되는 염료의 양은 턱없이 줄어들어 상인들은 생계를 이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전라도 광주에 마지막 남은 염료가게, 공원물방을 지키고 있는 문경필 사장님의 뒷모습이 더욱 작아 보인다.
사람의 키를 넘는 높은 책장에 가득 꽂혀 있는 헌책, 책을 내리기 위해 세워둔 사다리, 헌책방에서 맡을 수 있는 특유의 묵은 종이 냄새. 대형서점이나 온라인 서점에서 ‘책만’ 판다면 헌책방에는 ‘책과 책을 둘러싼 것’들이 있다.
광주 동구 광주고등학교 앞에 있는 ‘계림동 헌책방 거리’는 1960~1970년대를 주름잡던 중고 책방의 메카였다. 가난한 고학생이 책을 도둑질하고, 그 마음을 아는 책방 주인은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책으로 성공한 고학생이 책방 주인에게 감사를 표했다는 미담은 서점마다 있는 흔한 일이었다. 고학생이 중고 책도 없어서 쩔쩔맨 기억이 있다면, 서점 주인은 물량이 모자라 못 판 기억이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해방 직후에서 시작된 헌책방 거리에는 1980년대만 해도 헌책방이 60곳 넘게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인터넷을 통해 책을 팔고 사게 되면서, 인터넷에 익숙하지 못한 주인들이 장사를 포기하기도 하고 경영난도 있어. 지금은 달랑 몇 곳(유림서점, 백화서적, 학문당, 광일서점, 대교서점, 광주 고서점, 문학서점 등)이 남아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그마저도 언제 문을 닫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손님이 뜸해 종일 가게를 지키다 들어가는 날이 더 많아 한숨 세월을 보내지만, 계림동 헌책방 거리의 몇몇 가게들이 우리의 추억을 붙잡아 주고 있다.
광주에서 공부 좀 한 나이 지긋한 어른이라면 광주고 오거리에서 계림오거리에 이르는 700m 구간의 이 길목에 ‘보물찾기의 기적’을 체험했던 숱한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무질서하게 꽂혀 있는 책들 사이에서 기가 막힌 재주로 원하는 책을 찾아주던 책방 주인, 잃어버린 교과서를 사려고 애쓰던 학생, 희귀한 고서적을 찾는 어른이 책방과 함께하던 풍경이 남아 있다. 헌책도 인터넷으로 사는 젊은이들은 이 골목의 존재조차 모른다. 옛날에 책을 팔러 왔던 까까머리들이 어른이 돼 자녀들 손을 잡고 다시 찾아온다는 유림서점 주인장의 말처럼 어른 손에 이끌려 와야 이 보물창고를 발견할 수 있다.
유림서점 주인장은 아이 낳기 전부터 지금껏 헌책방 일을 하셨다. 50년 가까운 세월이다. 처음엔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책에 둘러싸여 종일 일하고 손님을 기다리는 일이 감옥살이 같다고 하셨다. 그나마 단골이 꾸준히 와 주기 때문에 그들과의 신의로 가게를 이어가고 있다고. 그런데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곳에서 딸은 희망을 찾았을까. 유림서점 2세대인 딸 유수진 씨는 몇 년 전 서점 옆 창고 공간에 핸드드립 커피집을 열었다. 조금 느리지만 손수 커피를 내려 손님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유수진 씨는 올 초에 헌책방을 찾는 젊은 단골인 책문화기획자 유휘경 씨와 공동기획으로 이 오래된 헌책방 거리를 살리기 위한 프로젝트도 시도했다. 광주고서점, 광일서점, 문학서점, 유림서점 등 1970년대부터 이곳에서 꾸준히 장사를 한 헌책방 주인들이 ‘계림동 처방전’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헌책방을 둘러싼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헌책방 단골 네 명이 결성한 시민밴드 보크콰르텟은 공연을 했다.
정보를 구할 수 있는 경로가 책밖에 없던 시절의 영화를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추억을 함께 하고, 또다른 미래를 꿈꾼다면 이루어지지 못할 이유도 없다.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서울 청계천 헌책방 거리나 관광명소로 지정된 부산의 보수동 책방골목처럼 눈에 띄는 변화는 없지만 광주 계림동의 헌책방 거리도 미래를 꿈꾸고 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현대식 인테리어로 손님을 유혹하는 대기업의 대형 중고서점이 헌책방 골목에 자리잡았지만, 세월은 그냥 쌓이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근대 교육을 실시하려면 학생을 가르칠 교사가 필요하다. 근대 교사 양성기관의 기원은 갑오개혁 직후인 1895년 설립된 한성사범학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대교육에 대한 열망이 갈수록 커지면서 한성사범 이후 민립 사범학교가 전국적으로 세워졌다. 1906년 ‘사범학교령’이 공포되어 교원 양성 체계가 정비되었으나, 1911년 조선총독부는 ‘조선교육령’을 통해 사범학교를 폐지해 버린다. 교사는 관립 고등보통학교에 1년제 사범과를 두는 방식으로 배출했다.
그러나 교육열이 더욱 커짐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1922년 ‘2차 조선교육령’을 내려 경성·대구·평양에 다시 관립 사범학교를 설치했다. 이듬해인 1923년에는 각 도에도 사범학교를 허가했다. 이에 따라 전국에 15개 사범학교가 설치되었다. 광주에도 전라남도 공립 사범학교가 설립되었다. 당시의 사범학교는 지금으로 치면 중·고등학교 과정을 통해 초등 교사를 배출하는 방식이다. 남자는 6년제, 여자는 5년제였다. 경성·대구·평양 사범학교 졸업생은 1종 훈도(訓導), 각 도의 사범학교 졸업생은 2종 훈도 자격증을 주었다. 같은 교사라도 등급을 달리했다는 얘기다.
1929년 11월 3일 나주에서 시작되어 광주와 목포를 비롯한 전라도는 물론 전국으로 학생독립운동이 확산되었다. 조선 학생과 일본 학생의 충돌이 확산되면서 독립을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간 당시 학생들의 의거는 오늘날 ‘광주학생독립운동’이라고 부른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전라남도 공립 사범학교 학생들도 대거 참여했다. 11월 중순 시위가 본격화되었을 때 전라남도 공립 사범학교 학생들은 합류하지 못했다. 학교 측이 적극적으로 막아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해 전라남도 공립 사범학교 학생 수십 명이 퇴학조치를 당했다. 공교롭게도 1929년 광주사범학교는 재정난을 이유로 문을 닫았다.
일제 강점기 조선 사람들의 교육 열망은 뜨거웠다. 조선인 교육을 최대한 억제하려 했던 조선총독부였지만 학교를 늘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38년 광주에 다시 사범학교가 문을 열었다. 광주사범학교라는 명칭으로 설립되었지만, 광주의 사범학교 뿌리는 1923년 전라남도 공립 사범학교에서 찾는 게 당연하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두 학교의 역사를 통합해 뿌리를 인정하는 일은 2012년에야 이루어졌다. 광주교육대학교 홈페이지 연혁은 1923년을 본교의 시작이라고 명기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 사범학교는 중학교 졸업생이 입학하는 학교가 되었다. 당시의 중학교는 오늘날의 중학교와는 달리 중·고 통합과정이었다. 해방 후에도 역시 교사 배출이 부족하여 다양한 방식의 연수과정 등을 통해 초등 교사 자격을 부여했다. 195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사범학교를 2년제 초급 대학으로 개편하자는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1962년부터 사범학교는 2년제 국립 교육대학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광주교육대학교 교육박물관은 1957년 지어졌다. 건축 당시의 용도는 광주사범의 본관이었다. 초등학교 교사를 꿈꾸는 입학생들이 강의를 받는 공간이었다는 얘기다. 건축은 당시 전라남도와 광주의 건축을 이끌었던 김한섭(金漢涉)이 맡았다. 김한섭은 건축 자재도, 건축 전문 인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모더니즘 양식을 최대한 살리려 고심한 끝에 본관 건물을 완성했다.
김한섭은 1920년 제주 출생으로, 송정공업학교(현재의 전남제일고등학교)와 일본대학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했다. 송정공업학교를 나와 만주국 건축 부서에 취업했으나, 건축을 더 공부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유학 시절 당시 오영섭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다시 일본으로 가 새로운 건축을 익혔고, 1955년부터 전남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활동했다. 광주사범 본관은 이 시기에 건축한 작품이다.
1950년대 중반 철근 등 건축자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김한섭은 벽돌을 쌓아 거푸집을 만들고 콘크리트를 부어 기둥을 만드는 방식으로 오늘날의 광주교육대학교 교육박물관 건물을 지었다. 지붕도 평 슬래브를 올릴 형편이 되지 않았기에, 목구조 틀 위 완만한 경사의 지붕을 올렸다. 그럼에도 김한섭은 창호와 벽돌 기둥을 배열하여 리듬감을 주었고, 출입구 현관도 곡선을 섬세하게 설계해 산뜻한 느낌의 모더니즘 건축물을 완성시켰다. 김한섭은 1960년대 초반까지 광주 용아빌딩, 광주 YWCA 빌딩, 광주극장 등 광주 지역에서 여러 건축물을 설계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제주도의 건축에도 큰 족적을 남겼는데, 제주 동문시장과 동양극장, 제주소방서, 남제주군청사 등이 김한섭의 작품이다.
옛 광주사범은 1963년 2년제 광주교육대학이 되었고, 1981년에는 4년제로 개편되었다. 1993년에는 국립 교육대학교로 발돋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7년 본관 동으로 건축된 건물은 부설 초등학교의 교사(校舍)로 쓰이기도 하고, 초등교육연수원, 학훈단 등으로 사용되다가 2008년 호남 최초의 교육박물관으로 리모델링되었다. 전시공간으로 개조하느라, 내부 구조는 일부 바뀌었으나 김한섭의 최초 설계의 뼈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원본 설계도도 현재 남아 있다. 광주교육대학교 교육박물관은 2014년 교육사에서 차지하는 학교의 의미와 지역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644호로 지정됐다.
광주광역시의 상징이 무등산이라면, 조선대학교의 랜드마크는 무등산 깃대봉 중턱에 자리 잡은 본관이다. 19개의 박공 건물이 370m 길이로 이어진 조선대학교 본관은 마치 학 한 마리가 깃대봉에서 나래를 좍 펼치고 날아오르려는 모습으로 비유된다. 건물 전체가 흰색으로 칠해져 백악(白堊) 캠퍼스라고 하지만 백학 캠퍼스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조선대학교 본관 19개 박공 건물 가운데 초기에 지어진 5개 건물은 2004년 등록문화재 제 9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대학은 한국 최초의 민립대학이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추진되었던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조선총독부의 방해로 무산되었으나 운동의 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해방 직후인 1946년 8월 ‘조선대학 설립동지회’가 창립되었고, 한 달 만인 1946년 9월 광주야간대학원(光州夜間大學園)이라는 명칭으로 대학이 개교했다.
광주야간대학원은 두 달 뒤인 1946년 11월 조선대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조선대학 설립동지회’는 계속해서 호남을 돌며 기금을 모았다. 설립동지회 회원권은 쌀 두 말 값인 100원이었다고 하는데, 지식인의 참여는 물론이고 관리와 지주부터 머슴과 촌부까지 회원권을 샀다고 한다. 1년 뒤인 1947년 말에는 무려 7만2,000명이 설립동지회원으로 가입했다.
조선대학 본관 신축 공사는 1947년 4월 착공해서 1955년 말 5개의 박공 건물로 완공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건축자재가 불에 타는 등 곡절을 겪으며 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1950년 사진을 보면 가운데 박공 건물 좌우에 상자형 건물이 붙은 형태이고, 2년 뒤인 1952년 사진은 3개 건물 모두 박공 형태다. 이어서 좌우로 또 각각 박공 건물을 세워 1955년 낙성을 보았다. 가운데 건물은 7층 높이이고, 좌우 건물은 6층, 또 옆 건물은 5층이다.
초기 본관 건물엔 크고 작은 강당 형 강의실이 모두 79개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대학의 원래 계획은 더 웅대해서 모두 294개 강당을 짓는 것이었다. 1977년부터 5개 동 본관에 잇대어 좌우로 각각 3개의 박공 건물을 더 세웠고, 1970~1980년대에 걸쳐 또 한 차례 좌우 대칭이 되게 각각 4개씩 박공 건물을 지어, 조선대학교 본관은 모두 19개 박공을 가진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조선대학은 이미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상태였다.
조선대학교는 한국 최초의 민립대학이지만 뼈아픈 역사도 갖고 있다. 조선대학 설립운동 당시 운동을 주도했던 서민호[徐珉濠] 당시 전라남도 도지사는 전라남도 운수과장이었던 박철웅[朴哲雄]에게 설립동지회 실무를 맡겼다. 박철웅은 메이지대학을 졸업했고, 일제강점기에 교육행정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대학의 초대 학장도 박철웅이 맡았다.
그러나 박철웅은 호남 촌부들까지 뜻을 모아 세운 대학의 설립자처럼 행세하기에 이르렀다. 1980년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박철웅의 학교 운영권을 박탈했으나, 1982년 박철웅은 조선대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복귀했다. 박철웅은 교비 횡령, 입시부정 등 사학비리에다 교수와 학생을 폭행하고 전횡을 일삼아 원성을 샀다.
급기야 1987년 조선대학교 학생들과 교수들이 박철웅 총장 퇴진과 민립대학 환원을 요구하며 113일간 장기농성에 돌입했다. 1988년 1월 8일 새벽 공권력이 투입되어 투신자와 중화상자가 발생하는 비극마저 빚어졌다. 조선대학교 역사는 이를 ‘1·8 항쟁’이라고 부른다. 이후 조선대학교는 정상화의 길로 들어섰으나, ‘독재자 총장’이 남긴 그늘이 꽤 깊었다.
1946년 조선대학 설립동지회의 권유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황토로라도 담을 쌓고, 창호지로라도 문을 발라서, 허청[헛간]에서라도…….” 호남인들의 교육 열망이 모여 탄생한 조선대학과 대학 본관은 모든 역사를 지켜보며 인재 양성이라는 소임을 다해왔다. 조선대학교 본관은 광주광역시의 랜드 마크가 되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 있는 송호영당에는 『사암집(思菴集)』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조선 중기 문단에 당시풍을 선도한 사암 박순(朴淳)의 시문집이다. 박순의 사후 60년이 지난 1652년에 이문망(李文望)에 의해 전주에서 초간본이 제작되었다. 이후 초간본을 바탕으로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후손인 박이휴가 1857년에 중간본을 만들었다. 제작 당시에는 총 180판이었으며 가로 35cm, 세로 2cm 크기로 제작되었다. 1990년 11월 15일에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사암집』은 총 7권 3책으로 1~3권은 시(詩), 4권은 잡저(雜著), 기(記), 비명(碑銘) 등과 같은 서(書), 5~7권은 부록(附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1728년에 건립되어 박순과 박상을 제향한 송호영당(松湖影堂)에 보관하다가 2004년 국립광주민속박물관으로 이관하였다.
사암 박순은 명종 연간에 31세의 나이로 벼슬길에 나아가 요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선조 연간에는 사림의 영수로 활동하며 중앙 정계와 재야 사림 간의 정치적 소통의 장을 마련함으로서 조선 시대 사림 정치에 큰 공을 끼쳤다. 특히 당파에 얽매이지 않고 훌륭한 인재라면 두루 천거하여 명재상으로 이름 높았다. 또한 자신의 옳다고 판단한 일에는 주저함이 없어, 정치적 위기에 빠질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율곡(栗谷) 선생을 비호하기도 하였다. 또한 자신이 물러날 시기 역시 정확히 판단하여, 영평(永平)에 은거할 당시 선조가 돌아올 것을 재차 권유하였지만 끝내 복귀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이처럼 조선 중기 정치사에 있어 사암 박순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태평성대를 구현하기 위해 정계에 투신하였지만, 그만큼이나 폭 넓은 학식과 문학적 재능 또한 두루 겸비한 인물이었다. 특히 송나라의 큰 선비인 소식(蘇軾)의 영향을 받아 조선 문단계에 만연하였던 송시풍에 변화를 일으킨 인물이기도 하였다. 훗날 삼당시인으로 널리 추앙받은 최경창, 백광훈, 이달이 박순의 당시풍을 전해 받았다는 평가가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 손곡 이달과 박순의 인연은 주목할 만하다. 이달은 본래 첩의 아들, 즉 서출(庶出)로서 조선 시대 신분 사회에서 억압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다만 그는 대단한 문학적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박순은 이러한 이달의 재능을 일찍이 눈여겨보았다. 이에 하루는 그를 따로 불러내어 이태백(李太白)과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등과 같은 당나라 시기 문장가들의 시문을 가르치니, 이달이 큰 깨달음을 얻어 명성을 얻게 되었다.
『사암집』 목판은 사암 박순의 학문과 생애 전반을 기록한 것이다. 조선 중기 사림의 정치와 문학에 미친 그의 영향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수 세기에 걸쳐 중간되며 전하는 이 목판의 존재는 당시 문중을 비롯한 재야 사대부들이 박순의 사상과 문학을 보존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청백리의 삶을 살아간 박순. 정치인으로서 붕당에 치우침 없이 공도(公道)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문학인으로서 신분과 관계없이 널리 가르침을 베풀며 조선 문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주도한 큰 선비의 일생을 『사암집』을 통해 살필 수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에는 취병 조형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취병(翠屛)은 조병의 호이며, 유허비는 옛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후세에 알리고 이로 인해 그 인물을 추모하기 위해 세우는 비석을 말한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은 조형이 출생한 곳이다. 조형의 아버지 조희보가 1606년 광주목사로 있을 때 부인이 아기를 잉태하게 되었다. 당시의 법으로는 관아에서 출산을 할 수 없었다. 조희보는 출산할 곳을 수소문해 당시 추앙받는 선비였던 박창우의 집을 정해 여기서 조형이 태어났다. 조형은 조희보가 광주목사를 지내는 1611년까지 광주에서 생활하였다. 1630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1655년에 조선통신사로 11개월 동안 일본에 머물다 와서 기록한 일기인 『부상일기』가 유명하다. 『부상일기』는 17세기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어떠했는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취병 조형 유허비는 비석의 형식이 독특하다. 지붕돌과 비석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돌의 처마가 위로 들려진 형태이다. 높이가 너비보다 더 긴 일반적인 비석과 달리 너비가 높이보다 더 길다. 2단으로 된 받침돌 위에 올려져 있으며 높이 95cm, 너비 120cm, 두께 28cm의 규모이다. 1873년 조형의 6세손인 조운한이 광주목사를 지낼 때, 조형의 출생지를 찾아 박창우의 집터에 비를 세웠다. 비의 앞면에는 조형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기록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346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의 앞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有明朝鮮國 大宗伯 豊壤趙公諱珩 字君獻 號翠屛 諡忠貞 萬曆丙午 十月 二十二日 丁巳戌時 降生 産室舊址 地名泉谷
癸酉 五月 十三日 六世孫 光州牧使 雲漢 謹竪
조선의 대종백(예조판서) 풍양 조형은 자는 군헌, 호는 취병, 시호는 충정이다. 1606년 10월 22일 술시(저녁 7시-9시)에 태어났다. 태어난 옛 터의 지명은 천곡이다.
1873년 5월 13일 6세손 광주목사 조운한 세움.
취병 조형 유허비는 택지 조성으로 인해 공원이 만들어지면서 원래의 위치에서 약 50m 정도 옮겨졌다. 1990년 11월 25일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호에 지정되었다. 취병 조형 유허비는 조형과 관련된 연구와 지방사에 대한 연구, 독특한 형태의 비석이라는 점 등 여러 방면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취병 조형 유허비는 조형어린이공원 옆쪽에 있다. 조형어린이공원은 조형을 기념하는 공원으로 놀이터와 쉼터가 조성되어 있어 가볍게 산책하기 좋다. 조형어린이공원에 들러 산책도 하고 취병 조형 유허비도 함께 살펴보면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에서 태어난 옛 선조의 삶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다.
누구나 과자에 대한 추억이 있겠지만 필자에게 특별한 과자는 연양갱이다. 그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할아버지께서는 유독 필자를 귀여워하셨다. 마을 잔칫집에 다녀오시는 날이면 주머니에서 구깃구깃 접은 종이에 싼 것을 꺼내 주셨는데 어느 날에는 종이상자에 든 것을 주셨다. 더운 여름날 처음 만난 연양갱은 은박의 종이가 달라붙어 끈적거렸다. 힘들게 종이를 떼어 낸 후, 검은색의 그것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맛은 사탕과 달랐고 입에 닿는 느낌은 무어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날은 온전히 나의 세상이었다.
양갱(羊羹)은 원래 양고기와 피 등을 굳힌 중국의 국물음식이었다.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80년대~1333)에 중국 불교의 선종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양갱도 전해졌다. 양갱은 일본어로 요깡, 요오칸(yokan)이라 하는데, 다도문화가 발전하면서 팥을 이용한 화과자가 된다. 일제 때 신문을 보면 양갱을 간식으로 소개하는 기사가 꽤 나온다. 1935년 4월 12일, 동아일보에는 ‘시장할 때 요기하기 조흔 과자 요-깡 맨드는 법’이라는 기사가 있다.
“요깡 만드는 법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여러분들이 말을 하셔서 오늘은 요깡이라는 과자 만드는 법을 소개하겠습니다. 요깡은 너무 단 것이 결점이나 빨리 상하지 않고 집에서 만들어도 맛이 좋습니다.
재료 : 한천(寒天, カンテン) 한 개, 이 간덴이라는 것은 무엇을 엉기게 하는 것인데 떼파트 식료품부에 가면 한개에 육, 칠전하는 것이 있으니 쉽사리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백사탕 한 근, 팥가루 한근...(중략, 기사 그대로 인용)”
위의 기사처럼 연양갱의 주재료는 한천(寒天)과 설탕, 팥소이다. 연양갱의 중요한 재료인 한천은 우뭇가사리로 만든다. 우뭇가사리는 해녀가 물질하여 채취하는 잔가지가 많은 붉은빛 해초로 고혈압, 당뇨, 변비를 예방하고 칼로리가 낮아 다이어트에 좋다고 한다. 처음 맛은 짜지만 소금기를 빼고 햇빛에 말리면 붉은색이 탈색돼 하얗게 변한다. 이것을 삶아 차갑게 식히면 투명한 우무(묵)가 되고, 건조하면 한천으로 만들 수 있다. 한천은 젤리, 잼, 아이스크림 등 식품가공에 사용되고 마트나 온라인 쇼핑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한국에 연양갱을 처음 들여온 것은 일본인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70년 이상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과자로 만들고 있는 곳은 해태제과이다. 그때의 포장 디자인도 크게 변하지 않았고 맛도 여전하다. 필자는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변하였는데 다행히 연양갱은 세월을 비껴가고 있는가 보다.
백 년이 넘은 송정시장에는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연양갱 카페 ‘갱소년(늙은이의 몸과 마음이 다시 젊어진다는 의미)’이 있다. 갱소년의 탄생은 엄마의 마음에서 시작하였다. 선지혜(여, 30세) 대표는 아이에게 줄 간식으로 다양한 과일을 사용하여 각양각색의 연양갱을 만들어 보았다.
“연양갱은 몸에 좋은 재료로 만들잖아요. 팥도 좋지만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색감과 모양을 고민했어요. 아이가 잘 먹으니까 사람들도 좋아하겠다고 생각했지요. 처음에는 연양갱을 배우면서 호기심으로 시작한 창업이었지만 제 삶의 경험이 담긴 메뉴가 되었어요. 과일은 주로 송정시장에서 사고 있어요. 이곳 어른들이 신선한 과일을 잘 챙겨주세요.”
현재 그녀는 지역에서 주목받는 사업가가 되었다. 네모난 모양의 연양갱을 동글한 모양으로 만들 생각을 어떻게 하였을까? 한 입에 쏙쏙 들어가는 크기이다. 방부제 없이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직접 만드는 수제 간식.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맛도 여러 가지이고 부드러운 식감이 누구나 좋아할 만하다.
고소한 팥 맛과 달콤한 딸기 맛, 새콤한 파인애플이 씹히는 파인애플 맛, 포도 맛 등 종류도 많다. 송정시장에는 오랜 시간 이곳을 지켜온 상점들이 많지만 젊은 창업가들이 새로 시작하는 상점들도 꽤 있다. 서로 협력하여 관광문화자원을 만들고 있고 시장의 발전을 고민한다. 별이 빛나는 송정시장의 길목에서 그들이 꿈꾸는 미래의 반전에 응원을 보낸다.
[도움 주신 분]
광주 송정시장에는 맛 좋고 예쁜 연양갱을 만드는 갱소년이 있다. 선지혜(여, 30세) 대표는 연양갱을 만드는 장인에게 기술을 배워 창업까지 연계한 열정적인 경영인이다. 만드는 과정을 직접 시연하고 설명해주며 도움을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