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덕양구 주교동에서 마상 공원 뒤쪽으로 가면 ‘박재궁 마을’이라는 묘한 이름의 표지판을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마을 초입에 궁도장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박재궁과 궁도장을 연결지어 추측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 둘은 아무 상관이 없다.
재궁(齋宮)은 본래 국왕이 제사를 준비하는 곳을 지칭하는 말로서, 재실(齋室) 즉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이 아주 규모가 큰 경우에는 재궁이라 불렸다고 한다.
박재궁 마을이란 명칭은 바로 이 지역에 밀양 박씨 가문의 묘역과 재궁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박재궁이란 지명은 일찍이 조선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1755년 영조 연간에 발간된 고양군지에도 ‘박재궁촌’이라는 이름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박재궁 마을에 가면 추원재라는 재실이 있고 상당히 큰 규모의 묘역(3개가 하나를 이루고 있다)과 여러 신도비(고관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죽은 사람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를 함께 세워둔 신도비군이 있다. 마을 자체는 전체적으로 보면 연립주택, 아파트, 빌라 등이 뒤섞여 일반적인 주택가와 다를 바 없으나, 규모가 큰 묘역과 재실이 있고 구석구석에 오래된 기와집들이 자리하고 있어서 아직 이곳과 과거를 연결하는 끈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밀양 박씨 가문이 처음 이곳에 묘역을 마련한 것은 1370년 고려 때 추성익위공신 전법판서 겸 상장군 사경 공을 처음 안장하며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 광해조에 이르기까지 300년간, 53위의 묘소와 11위의 제단, 그리고 배위까지 합하면 전부 90여위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1589년 지사 이의신은 답산기에서 이 박재궁 묘역에 대한 글을 남긴 바 있다.
삼각산에서 떨어진 외맥이 서쪽으로 물 같이 평평하게 서너번 흘러 주원에 들어온 맥이 낮게 오다가 다시 봉우리로 솟았다가 완만한 등성이를 이루고 허술한 듯 내려가다가 뚝 떨어져 혈을 맺었으니 대지(大地: 좋은 묏자리)이다. 전면이 조금 완만하게 굽고, 혈도가 조금 노출된 것이 한스러우나 이 세상에 이만한 땅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한편으로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한편으로 우리가 과거의 유산을 존중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조금 더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아무튼 밀양 박씨 선조께서 묏자리를 잘 쓰셔서인지 몰라도 이 묘역에 묻힌 조상들 중에는 큰 벼슬을 한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고려 중엽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규정(종3품)을 지낸 박현, 대제학을 지낸 박충원, 영의정을 지낸 박승종, 형조참판을 지낸 박자흥, 우문관대제학을 지낸 박시용,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박연 등이 있다.
특히 박충원의 묘는 전체 묘역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는 조선 중종 2년(1507)에 태어나 선조 14년(1581)에 돌아가신 충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영월군수를 거쳐 대제학, 이조판서,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낙춘박선생유고’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한 인물이다. 박충원이 영월군수로 재직할 당시 돌아간 단종의 현신과 화답하고 단종의 묘역을 장릉으로 조성한 것이 현재까지도 일화로 남아 있다.
단종과 관계된 밀양 박씨 인물들은 더 있는데 역시 박재궁 묘역에 묻혀 있는 청제 박심문도 그중 하나다. 박심문은 단종의 충신으로 단종 복위를 모의했던 사람이다. 그는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길에 단종 복위 계획이 들통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압록강에서 자결을 하면서 자신이 신던 신을 집으로 보내, 신이 집에 도착한 날을 자신의 기일로 삼아 달라고 부탁했다. 후손들은 신발과 옷가지가 도착한 날 박재궁의 선영 밑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2008년 밀양 박씨 후손이자 이 지역 주민인 박원석씨가 조상 대대로 보관해 온 ‘충절록’을 고양신문사에 가져가 감정을 의뢰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충절록’의 또 다른 판본인 ‘청제박선생충절록’은 국립중앙도서관에도 보관되어 있다.
재미있게도 ‘박재궁’이라는 마을 이름은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도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곳에도 과거에는 밀양 박씨의 묘가 수십기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고양시의 박재궁처럼 오랫동안 유지되다가 근대의 개발 바람에 버티지 못하고 주택가 부지로 팔렸던 것 같다. 고양시 박재궁 마을의 밀양 박씨 묘역은 현재에도 상당히 면적이 넓은데, 원래 국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땅은 지금보다 훨씬 더 넓었다고 한다. 지사 이의신 선생이 지적했듯 ‘좋은 묏자리이나 한두 가지 한스러운 점이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과거 고관대작을 지낸 한 가문의 묘역을 애써 보존해야 하는 의미를 우리가 찾지 못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박재궁의 넓고 당당한 묘역과 다소 빈한한 주택가의 조화는 어딘가 낯설고 아쉽다.
많은 이들이 ‘일산’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어떤 것들일까? 신도시, 호수공원, 킨텍스, 전원주택 단지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밤가시 초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신도시라 불리는 일산에 그것도 서양의 주택 단지처럼 세련된 전원주택들이 가득한 동네 한가운데에 짚으로 지붕을 얹고 황토로 벽을 쌓은 작고 소박한 집 한 채, 밤가시 초가가 있다.
'밤가시 초가'는 조선 후기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전통적인 서민 농촌 주택으로, 드물게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평면 구성의 형식이나 기둥 등 주요 목재의 부식 정도로 미루어 대략 150여 년 전, 곧 19세기 중엽 이전의 건축물로 추정되며 경기도 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건물의 기둥, 대들보, 문틀. 마루, 서까래 등에 이르기까지 밤나무 재목을 쓴 것이 특징인데 이는 이 마을에 밤나무가 울창했고 가을이면 밤가시가 많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율동」이란 지명이 생겨날 정도로 밤나무가 유명한 지역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움푹 파진 웅덩이 모양의 안마당이 있고 안마당 주변에는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의 문간채가 전체적으로 ㅁ자형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안채는 좁은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안방과 부엌, 왼쪽에 건넌방과 사랑방이 있다. 문간채는 후대에 지은 것으로 창고와 변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마당의 둥근 웅덩이는 이 가옥의 독특한 특징으로, 똬리 모양으로 둥그렇게 모아지는 마당 위쪽 지붕형태를 따라 떨어지는 낙수물의 배수로 역할도 하고 있다. 밤가시 초가는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정서적인 포근함을 느끼게 하며 주변의 수목과 함께 옛 농가의 정겨움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다.
일산에 신도시 공사가 시작되던 90년대 초반까지 이 집에는 실재 사람이 살고 있었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집의 대문 옆에는 당시 입주자의 명패가 여전히 달려있다. 원래 이 집의 주변으로 다른 집들 또한 밀집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나, 1989년의 홍수로 많은 집들이 유실되고 밤가시 초가 한 채만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았다고 한다. 홍수 직후에 신도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시에서는 150년도 넘은 이 소박한 초가집의 가치를 높이 사 철거하지 않고 원형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초가집과 그 주변의 나무들과 장독대, 그리고 대문 앞의 좁은 길 일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관리 중이며, 밤가시 초가 언덕 아래로는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조선 후기의 서민 생활상도 함께 엿볼 수 있도록 1996년에 새로 지은 한옥 기와집 형태의 ‘민속 전시관’과 기와 대신 납작하게 쪼개지는 푸른 빛깔의 점판암으로 지붕을 얹은 청석집 형태의 ‘관리동’과 ‘사주문’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때 보아도 아름답고 정감 어린 밤가시 초가는 새 것만이 가득한 신도시 일산의 소중한 역사이자 어떤 건축물 보다 빛나는 보물로써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홍대 앞 예술가들이 이주한 동네’, ‘소셜 벤처의 성지’, ‘수제화 골목’. 이 수식어들은 성수동을 칭한다. 그만큼 성수동은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진 동네다. 그 중 시간의 흐름을 간직한 작은 마을이 있다. 서울시 성동구 성수 1가 안의 작은 마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시인 백석(1912~1996)과 서양화가 정현웅(1911~1976)이 살았던 마을, 새촌마을이다.
새촌마을의 역사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에 ‘경성부 서둑도리’라고 불리던 이곳에 개량한옥 지구가 조성되었다. 건축왕 정세권(1888~1965)은 독립운동의 한 형태로 일제식 가옥이 아닌 개량한옥을 지어 보급하는 사업을 했다. 1930년대에 일본인들이 왕십리 쪽으로 진출하자, 정세권은 뚝섬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일본인들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들을 교묘히 견제하는 정세권식 독립운동이었다. 민족 운동가이자 최초의 근대적 부동산 개발업자인 그는 현재 북촌이 서울 도심 속 아담한 한옥마을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서민용 한옥일 것.
생활이 편하게 개량한옥일 것.
많은 가구를 지을 것.
정세권 선생은 이와 같은 목적으로 1919년 종합 건축사 ‘건양사’를 설립하고 북촌 일대 땅을 대규모로 사들여 중소형 한옥으로만 이뤄진 주택지구를 조성해 서민들에게 분양했다. 익선동, 창신동을 비롯 성수동에서 일종의 뉴타운 사업을 벌인 것이다. 일본인들이 명동 일대를 일본식으로 재개발하는 것을 보고 “우리 식의 한옥마을을 지어야 한다”며 성수동에 개량한옥 지구를 조성하고 새로운 마을이란 뜻의 ‘새촌’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렇게 조성된 새촌에는 백석 시인, 정현웅 화가 등이 이주해 살았다고 한다.
백석은 이 무렵(1938년) 뚝섬으로 이사를 가서 ‘경성부 서둑도리 656번지’에 살고 있었다. (중략) 정현웅은 결혼 후에 경성의 새로운 개발 지역인 뚝섬으로 이사를 했다. 함께 근무하던 백석이 혼자 사는 게 적적하니까 이사를 오라고 조르다시피 한 것이다. 정현웅 부부는 은행 대출을 받아 백석의 바로 옆집을 사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주소는 ‘경성부 서둑도리 657-57호’였다. 새로 주택을 짓고 길을 내면서 뚝섬이 막 개발될 때였다. 뚝섬에서 조선일보사로 출근할 때 정현웅과 백석은 괘도차를 이용했다. 정현웅의 부인은 그 무렵 수시로 백석이 집을 들락거리며 남편과 술잔을 기울였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안도현 저, <백서평전>中
골목 어귀에 걸려있는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정현웅 화가의 그림을 시작으로 마을 담벼락엔 아기자기 소박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김형상 씨(72세)의 말에 의하면, 도시재생 사업으로 지역 주민들과 함께 조성한 벽화라고 한다. 이름하여 시니어 골목 재생단 ‘떴다 할매’의 작품이다.
‘떴다 할매’는 성수동에 살고 계시는 평균연령 75세가 넘는 어르신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성수도시재생주민공모사업의 지원으로 시행된 ‘새촌 꽃길가꾸기’는 지역 주민들이 함께 모여 사람과 사람의 정을 나누고, 골목 가꾸기를 진행한다. 이웃과 따뜻한 정이 사라진 골목에 화분을 내어놓고 작은 화단도 만들며, 마을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한 작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새촌마을은 전체로 보면 정사각형 모양인데 마을의 절반 정도 비율로 주택이 있고, 나머진 크고 작은 공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터를 크게 잡았던 공장들은 지식산업센터로, 공장터는 중견기업들의 사옥으로 전환되고 있다. 다가구주택의 1층에는 작은 편집숍, 카페들이 들어서 골목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내가 갓난아기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자란 곳은 충청남도 아산군 음봉면 삼거리라는 작은 동네였다. 이곳은 현재 아산시로 편입되었다. 그곳은 작고도 가난했던 동네였고, 집 앞 신작로는 포장도 되지 않아 겨울이면 길에서 썰매도 타곤 했다. 그러다 어느 샌가 길에 아스팔트가 깔리고 북으로는 평택을 통과하는 경기도와 연결되고, 남으로는 온양시를 통해 예산, 당진 등 충남 서북부로 통하게 되었고, 동쪽으로는 천안시와 연결되는 그야말로 삼거리가 되었다. 주민들은 교통의 요지로 각광받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여전히 한참동안 별 볼일 없는 마을이었다.
이 작은 마을의 자랑거리라면 이순신 장군의 진짜 묘소가 있다는 것. 동네에서 7~8km 정도 떨어진 현충사에 이순신 장군 생가가 있고 응봉동 삼거리에는 이순신 장군 묘소가 있다. 이순신 장군묘는 국민학교 시절 단골 소풍지였다. 학교에서 걸어서 10여분이면 갈 수 있었던 터라 매년 갔는데, 지겹지는 않았다. 딱히 소풍 때 말고는 갈 일이 없었던 터라 가게 되면 넓은 잔디밭에서 신나게 구르고 놀았다. 친구들끼리 결투 같은 걸 할라치면 애용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묘는 진입로가 예쁘다. 왼쪽으로 나즈막한 산이 보이고, 잘 닦인 길 양 옆으로는 가로수가 사시사철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은행이 떨어지는 늦가을엔 구린내를 좀 참아야 되지만, 그런 환경 덕분에 여름에도 바람이 잘 통하고 시원했다. 진입로를 지나면 입구에 자그마한 약수터가 있다. 짧은 진입로지만 은근한 오르막이라 목이 말라올 때쯤 만나는 약수터는 구원이다. 약숫물을 한 바가지 마시고, 입구를 지나 더 걸어가면 이순신 장군의 묘소가 보인다.
실묘가 있는 꽤 높은 곳까지 잔디밭으로 경사가 다듬어져 있다. 주변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멋지게 조성되어 있고, 정조대왕이 직접 만들었다는 비석과 함께 자그마한 연못도 있다. 먼 곳에서 친구들이 놀러왔을 때 한 번 데리고 간 적이 있는데 조용히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고 다들 좋아했다. 가끔 석상에 올라타 노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예의가 아니니 자중해야겠다. 이 사적의 백미는 진입로 초입에 있는 자그마한 잔디밭과 신도비다. 이곳은 청춘들의 밀회의 장소로 한때 인기 있었다.
어느덧 가까운 곳에 아산온천이 개발되고, 큰 공장들이 들어섰다. 동네 주민들은 응봉면 삼거리에도 활기가 돌 것이라 약간의 기대도 했지만, 주변으로 우회도로가 만들어 지다 보니 오히려 교통량이 줄었다. 매년 명절만 되면 동네 가운데로 꽉꽉 들어차던 차들이 어느새 많이 줄었다.
그 한적함이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평지마을은 경남 김해시 진례면 신안리 1075번지 일대의 산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마을 자체는 평지라 평지마을이라고 부른다. 비음산을 중심으로 뒤쪽에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 창원시가 있고, 앞으로는 멀리 부산시가 있다.
마을 뒤쪽에는 비음산, 왼쪽에는 정병산, 오른쪽에는 용제봉이 있는 불모산이 있어 비단폭으로 애기(마을)를 보듬는 형국이다. 마을 앞쪽은 일명 평지못이라 부르는 진례저수지가 호수처럼 넓게 자리잡고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마을이다. 조원순 마을 이장에 의하면 150년 전 경남 함안에서 함안 조씨가 입향할 때에는 겨우 2가구만 살고 있었다고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점차 함안 조씨의 집성촌처럼 가구 수가 늘다가 지금은 줄어 41가구 인원수 153명 정도이다.
역사적으로 김해는 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터전을 잡았으며 초기 철기시대에는 변한 12국의 하나인 구야국의 중심지였다.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김해에서 가락국을 세웠으며 임나가라, 가야 등으로 불리다가 신라에 편입되면서 금관군으로 불렀고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에 처음으로 김해라는 지명을 사용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한때 임해(臨海), 금주(金州), 금령(金寜), 분성(盆城) 등 다른 이름으로 불렸으나 지금까지 김해라는 지명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진례면은 가락국을 개국한 김수로왕이 진례성을 쌓아 왕자를 진례성주로 봉했다는 신화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지금은 창원시에 속해 있지만 통일신라의 진성여왕(887-896) 재위 시절 진경대사가 정병산 자락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봉림산문(鳳林山門)을 개창할 때 강력한 후원자가 김해 진례 지역호족인 진례성 제군사 김율희였다.
세월이 흘러 현재 진례면에는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김해 분청도자기 전시관이 생겼으며, 분청도자기 축제도 열고 도자기 공방도 많이 모여있는 도예촌으로 변모하였다. 마을 주위를 살펴보면, 비음산에는 고대에 돌로 쌓아 올린 진례산성이 지금도 등산로처럼 길게 흔적을 남겨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평지마을로 올라가기 전 진례 들녘에는 진례토성이 조그마한 밭두렁에 흔적만 남기고 있다. 100여 년 전 일본사람이 찍은 사진이 현재 전해오고 있다.
평지마을로 올라가는 길 언저리에는 가야시대의 첨성대가 있었다는 표시판이 세워져 있다. 고대 금관가야 지역인 김해에도 별을 관찰하는 곳이 있었던 것이다. 김해 시내에 있는 분산 꼭대기에는 김해천문대가 있다. 여기서는 김해 시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학생들의 별자리 관찰학습 장소와 어른들의 답사 여행지로서 부산 등 인근 주민의 호평을 받고 있다.
평지마을 바로 앞에는 마을사람이 평지못으로 부르는 진례저수지가 있다. 조원순 마을 이장에 따르면 이 저수지는 지금부터 40여 년 전에 만들었다고 한다. 마을 뒷산인 비음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아 농업용수로 활용하고 있다. 조이장은 물이 맑고 단맛이 있어 식수로 사용하여도 문제없을 거라고 했다. 2018년도에는 평지못 둑 위에 1.5Km에 이르는 둑방길을 조성하여 각종 나무와 꽃으로 한적한 호수길을 꾸몄다. 진례저수지 2Km 밑쪽에는 신안 저수지가 이 물을 받아 인근 논에 물을 대고 있다. 신안저수지는 조선후기 옛 지도에는 ‘무송지’로 표기되어 있을 정도로 오래된 저수지이다.
평지마을은 현재 토속음식점이 모여들어 ‘백숙촌’으로도 부르고 있다. 과거 평지못을 조성할 때 공사장 사람들이 평지마을의 닭을 보고 닭백숙을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한두 집이 응하다 보니 백숙집이 생기게 되었다. 이곳의 물맛과 요리솜씨가 좋아 부산, 창원, 김해시내 등지에서 한해 20만 명 이상 다녀간다고 한다.
우리 마을은 독산 마을 또는 독메 마을로 불린다. 마을 위치는 김해시 생림면 마사리와 밀양시 삼랑진읍을 가로 지르는 낙동강변에 있으며 밀양시 삼랑진읍과 경계를 이루는 김해시 생림면의 북쪽 관문이다. 생림면(生林面)은 무척산의 나무숲이 우거져 생긴 이름이라고 하며, 생림면에 소재하는 생철(生鐵)지명과 봉림(鳳林)지명을 합하여 생겨난 땅이름으로 전해오고 있다. 마사리(馬沙里)는 마을 이름이 각각 독산, 마사 1구, 북곡, 송촌으로 불리는 마을로 구성되었으며 옛날에는 마휴촌(馬休村)이라고 불렀다. 마휴촌은 낙동강변에 있는 나루터에 말이 쉬어가는 곳이라는 뜻이며, 마사리라는 이름은 낙동강을 따라 모래가 많아서 지어진 이름이다.
우리 마을 동남쪽으로는 과거 식산(食山), 무착산(無着山) 등으로 불렀던 무척산(無隻山)이 있고, 남서쪽으로 함박산이 있어 이 산들이 우리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 북쪽으로는 우리 마을의 생명줄인 낙동강이 잔잔한 파도를 만들며 평온하게 흐르고 있다. 우리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낙동강변의 독메 일대에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만들어졌다. 옛날에는 인근 사람들이 독산마을을 나루가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초에는 김해김씨가 살았으며 점차 타성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김해와 밀양을 연결하는 우리 마을 근처에 해양진(海陽津)이라는 나루터와 이를 관리하는 해양원(海陽院)이 있었다. 해양진은 뇌진(磊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낙동강변에서 재첩을 위시한 여러 가지 조개들을 캐서 먹었기에 조개 무덤도 있다. 주민들은 고기잡이와 밭농사 일을 주 수입원으로 먹고 살았다. 독산둑이 만들어진 일제강점기와 1950~1970년대에는 동민들이 주로 모래밭에 보리, 메밀, 목화, 삼베, 마, 우엉 등을 재배했다. 1980년대에는 바닷물이 낙동강으로 올라오는 것을 막는 부산 하구둑의 영향으로 다양한 조개, 참게, 붕어 등을 잡는 민물어업을 했으며 밭에는 감자를 대단위로 심었다.
현재 독산마을의 가구수는 67가구이며, 120여 명의 주민이 옹기종기 평화롭게 살고 있다. 회화나무 아래서 풍물과 함께 동제(洞祭)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을 빌고 공동체의 결속을 돈독히 했다. 과거 평화롭고 정겨운 농어촌 마을이었던 이곳은 현재 산업화 물결에 맞춰 창의성 있는 문화마을로 변모하고 있다. 임진왜란 시절 이름난 정승이었던 서애 유성룡(1542〜1607)의 부친이며 이조참의를 지낸 유중영(柳仲郢, 1515〜1573)이 밀양 삼랑진에서 나룻배를 타고 이곳 뇌진으로 오면서 김해의 아이 배운상에게 지어준 시가 『김해읍지』(1929)에 전하고 있어 기념으로 여기에 기록코자 한다.
증배운상(贈裵雲祥)
유중영(柳仲郢)
金官千古地 可矣一又童 금관의 천년 옛 땅에서
금관천고지 가의일우동 기특한 아이 한명 또 있네.
黙對淸江水 含情向我東 말없이 푸른 강물 쳐다보다가
묵대청강수 함정향아동 정 간직하고 동쪽으로 향하네.
대한민국에는 다양한 민속마을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외암리 민속마을은 다른 곳들에 비하여 더욱 포근하고 따뜻한 정감을 느낄 수 있다. 외암리 민속마을은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있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넓은 주차장이 있고, 차에서 내려 돌다리를 건너면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외암리 민속마을의 집은 초가집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많은 집들에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도로명주소 표지판도 붙어있고 함부로 들어가면 민폐일 수 있으니 조심하면 좋을 것 같다.
그 집들 중에 음식점도 군데군데 숨어있다. 민속마을답게 한정식을 파는 곳이 많다. 부모님께선 잔치국수 파는 곳이 제일 맛있다고 하신다. 돌아다니다 보면 민속놀이 체험을 해볼 수 있는 장소도 여럿 마련되어 있다. 굴렁쇠 굴리기를 시작으로 제기차기, 투호, 외줄타기, 떡메치기 등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게 되어있다. 또한 외암리 민속마을은 영화 ‘취화선’, ‘태극기 휘날리며’의 촬영지이기도 한데 어느 장면에서 등장했는지 궁금하다면 직접 와서 확인해보길 바란다.
이곳에선 정기적으로 축제가 열리는데 첫 번째 행사는 ‘장승제(대보름행사)’이다. 매년 음력 1월 14일에 열리며 원래는 마을 주민들만 참여하던 행사였는데, 지역민들도 함께 하기 위해 축제느낌으로 변화 발전되었다. 장승제 때는 대보름날 민속놀이인 쥐불놀이, 연날리기, 보름음식 먹기 등을 한다. 두 번째 큰 행사로는 ‘짚풀 문화제’가 있다. 매년 10월 중에 3일간 열리는 행사인데, 외암리 출신에다 호도 외암인 성리학자 이간 선생의 일대기를 주제로 한 축제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결혼식도 올리고, 장례식도 치르는 등 전통시대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축제들은 아산 지역에 사는 시민들과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행사다.
외부인들이 외암리 민속마을을 더 재밌게 즐기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먼저 친구들과 함께 오는 것을 추천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친구들과 함께 민박집을 예약해서 최소 1박을 하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사실 하루만 가지고도 외암리 구경은 충분하다. 하지만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 친구들이랑 1박2일만 시간을 맞추어서 놀러와 민속체험도 하고 놀다가 저녁에는 외암리 안에 있는 민박집으로 가자. 고기, 불판, 숯불 등을 준비해 저녁을 맛있게 먹고, 해가 지면 평상이나 마루에 나와 별을 보며 그동안 바빠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눈다면 완벽한 1박 2일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하늘의 별도 잘 보이고 민속마을 특유의 분위기도 있어서 저절로 마음 속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
항상 가는 핫플레이스, 최신식 건물들도 좋지만 한 번쯤은 우리의 것을 체험하고 친구들과 추억도 쌓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가까운 주말 혹은 방학에 사랑하는 친구들과 1박2일 약속을 잡아보는 것은 어떨까?
제주시 중심에서 서쪽으로 7~9km 지점에 위치한 외도동은 우렝이, 절물, 수정동, 제맹이 4개 마을을 합쳐 외도1동이라 하고, 월대동과 연대동 두 마을을 합쳐 외도2동이라 한다. 그 중 연대포구와 연대마을에서 외도1동 외도포구까지 이어지는 해안 산책로는 모든 외도인들의 자랑이다. 연대마을은 외도동의 바닷가 마을로 제주의 해안가 봉수대 역할을 했던 시설물을 뜻하는 연대, 즉 적들의 침입으로 인해 연기가 항상 마을 주위를 감돌았다고 해서 연대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2006년도 선정된 준범죄없는 마을로도 유명하고 옛 정취와 모습을 간직한 조용한 제주를 느끼기에 적절한 곳이다.
연대마을 입구의 마이못이라는 연못은 담수와 해수가 만나 이루어진 곳으로 숭어들의 산란처이며 거북이의 서식지, 가끔은 철새들의 쉬어가는 독특한 곳이다. 아직 주민들이 이곳의 담수로 나물을 씻기도 한다. 제주시내면서도 옛 농어촌 마을의 소박한 정서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반면 빠르게 유입되는 인구로 인해 새롭게 도약하는 양면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연대포구는 제주시 외도2동에 있는 작은 자연포구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포구다. 마리지포(馬里池浦)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곳엔 원형 그대로 보존된 해녀탈의장도 볼 수 있고 ‘연안정비계획’에 따라 조성된 나무다리를 걷다보면 제주의 아름다운 해안 풍경을 볼 수 있는 외도 해안 산책로로 이어진다. 이 산책로 개설로 인해 많은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고 방파제는 늘 낚시꾼들로 붐빈다. 외도인들은 여름에 한치회와 오징어회를 즉석에서 팔고, 저녁 어스름이 오면 하나 둘씩 회를 먹기 위해 모인다.
연대포구에서 외도 해안산책로 주변에는 펜션과 분위기 있는 카페도 많아서 바다전망을 그림 삼아 감성을 즐기는 이들도 많다. 바람 따라 드넓은 바닷길 따라 걷기만 해도 멀리 도두봉이 섬처럼 보이고 아담한 포구의 풍경이 마음을 적신다. 외도의 아이들은 눈앞에 바다가 보이는 길까지 내려가 바쁘게 움직이는 칠게를 구경하고 데크길을 뛰어다니며 마음껏 노는 것에 익숙하다. 물이 많이 빠지는 날은 제주도민, 아이들 너나할 것 없이 바다로 내려와 소라와 보말을 줍기에 바쁘다. 바위 틈 새우를 보기도 하고, 고인 물에 있는 치어도 볼 수 있어 살아있는 자연교육현장이 되곤 한다.
외도 주민들은 제주의 셀 수 없이 많은 관광지, 해수욕장보다 외도 앞바다와 산책로를 사랑한다. 뒤로는 도시의 빌딩처럼 서 있는 빌라들과 아파트들, 수많은 편의시설 등이 대조적으로 놓여있어 아주 독특한 풍경을 자아내지만 길 하나만 건너면 만날 수 있는 연대포구와 외도 해안산책로 때문에 많은 외도인들이 자부심을 느낀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면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 보존되어 있어 더욱 가치가 있는 외도동도 최근엔 늘어나는 쓰레기 더미와 오염물질로 인해 바다가 몸살을 앓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제주도바다환경보전협의회 기록을 보면 2018년 한 해 1500여명이 참여해서 총 42회에 걸쳐 해양쓰레기 200여톤을 수거했고 계속해서 해안정화 활동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교통이 편리하고 밀집된 주택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까닭에 외도동 연대포구와 해안산책로의 주변에는 카페라운지 등 많은 상업 점포들이 생길 것 같다. 그런 가운데서도 청정한 제주바다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더해져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멋진 외도의 연대포구와 해안 산책로의 모습이 유지되기를 소망해본다.
해발 200~250m 높이에 위치한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는 절산 아래서 물이 용출하여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흐르는 언덕이 있는 마을이다. 예로부터 물이 좋아서 마을 지명에 물수(水)자가 붙어 있는 것처럼 마을 곳곳에는 유수암천을 비롯해 극락물, 고조물, 고다리물, 어린더러물, 흐리물 등 크고 작은 샘들이 있다. 유수암은 유수암 본리와 거믄덕이, 개척단지 등 3개 자연마을로 이뤄져 있는 중산간 마을로 애월읍에서도 손꼽히는 강씨, 이씨, 변씨 집성촌이다. 유수암 개척단지는 예전엔 중산간 마을에서도 살기 불편한 오지에 속했으나 지금은 평화로가 뚫려 교통이 편리해지고 접근이 쉽다.
금덕 개척단지 설촌 유래비에 있는 마을 소개글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금덕 개척단지(현 유수암 상동)는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보다 잘사는 농촌건설을 위하여 1969년 국책사업으로 금덕 1038번지를 중심으로 토지원형분할방식을 도입, 90헥타를 30세대에 분배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양잠, 축산, 밭벼, 감자를 주업으로 복합영농을 통한 자립 불굴의 정신으로 협동 단결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 되었기에 그 역사를 돌에 새겨 기념하고자 한다. 단민이 협동 단결해 마을 발전에 이바지하여 도내 6개 시범단지 중 가장 규모가 큰 마을로 2015년 현재 156 세대로 발전하였다. 이를 후세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설촌 유래비를 세운다.
이제는 유수암이 교통상태가 좋아져 타운하우스가 많이 건설되어 있고 제주의 자연을 사랑하는 외지인들이 적잖이 들어와 있는 상태이다. 또 작고 예쁜 가게, 오래된 밥집 등 편의시설도 꽤 많이 생겨 인기 높은 마을이 되었다. 신축으로 텃밭과 정원을 갖춘 전원주택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제주 타운하우스의 시초가 된 곳이 유수암이라고 할 정도이다.
유수암리 개척단지는 척박한 삶을 벗어나고자 생겨난 마을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공터를 중심으로 안정되고 정감있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하나하나 집들과 상점들을 살펴보면 각자의 고집과 개성이 드러난다. 멀리 바다가 보이지만 조금 고립되어 있는 느낌이 들어, 복잡한 도시를 떠나서 왜 이곳에 하나둘씩 자리를 잡았는지 알 것 같다.
이 마을의 공터는 어르신들을 위한 유수암 상동 경로당과 코딩,드론,목공,서각,미술,음악,요가,발레,캘리그라피,3D프린팅,폰영화제작,노트북제작 등 마을사람들을 위한 배움의 장인 누리터 공간, 부녀회에서 이런저런 행사를 할 수 있는 자리, 아이들을 위한 놀이시설 등 문화와 복지를 위한 공간으로써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나가고 있다.
공터를 둘러싼 작고 옛스러운 집들과 예쁜 정원, 꽃들, 소박한 맛집들, 그리고 조용한 분위기의 카페 등이 자연과 어우러져 있고 조금 더 크게 둘러보면 풀 뜯고 있는 토종마도 볼 수 있으며, 크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곳곳이 많이 심겨져 있다.
조금 내려가면 1992년까지 학생들이 다니던 금덕분교 터가 나온다. 이 학교는 해발 350m에 위치한 옛 학교로 제주도 중산간의 축산진흥 및 양잠개척단지 조성시책에 따라서 새 삶의 터전을 일구고자 정착한 영농 30세대 어린이들을 위해 만들었다. 1974년 1학급 3개 학년으로 개교하여 17년 동안 배움의 나래를 펼쳐오다가 취학 어린이 감소로 1992년 안타깝게도 폐교가 되어 장전초등학교에 통합되었다. 하지만 이후 금덕분교는 농업회사법인인 ‘꼼지락’으로 인해 활발하게 금덕분교장터로 운영되고 있다.
꼼지락은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이 2009년 전통문화 인성교육센터로 지정한 자연체험학습장으로 제주의 들꽃과 들풀 등 제주의 자연을 주제로 한 전통문화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초등학생들은 물론 성인들을 대상으로 압화(壓花) 공예, 한지 공예, 들꽃 빛깔 물들이기, 색 모래로 들꽃 그리기, 염색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과 함께 캠핑장을 운영하며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또 금덕분교장 건물을 공예 실습장으로 활용하며, 식수시설, 샤워장, 야외 바비큐장도 갖추고 있다. (제주新보)
이처럼 폐교를 친환경문화센터로 활용해나가며 유수암 개척단지는 아름다운 문화활동을 해나가는 특별한 마을이다.
제주시 애월읍에 시내와 멀지 않지만 시골스러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 있다.
걷다보면 오른쪽으로는 하귀 앞바다가 보이고, 왼쪽으로는 멀리 한라산이 보이는 곳, 하귀2리는 작아보이지만 알차고 오래된 가게들이 가득 차 있는 사람 구경하기 좋은 곳이다.
하귀2리는 제주시내에서 애월읍-한림읍 방면 일주도로로 나가면 만날 수 있는 마을로 고려시대 귀일촌의 중심 마을로서 지석묘가 있는 걸로 보아 신석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1147년~1170년에는 대촌으로 설정되어 예로부터 주거지로 적합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제주군 신우면 지역으로 귀일현이 있어서 귀일촌·귀일이라 하여 위, 아래를 갈라 하귀일·하귀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하귀리가 되었다. 1953년 동귀리로 개칭하였으나, 1980년 12월 1일에 애월면이 애월읍으로 승격되었다. 1993년 하귀리에서 1995년 하귀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하귀2리는 5개의 자연마을 미수동, 가문동, 학원동, 답동, 가문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귀2리의 가문동에서 애월읍까지의 해안도로는 제주 해안도로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소문이 자자해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찾는 곳이다. 하지만 많은 관광객들을 뒤로 하고 하귀2리 초입부터 걷다보면 다리도 보이고, 작은 밭엔 양파, 쪽파, 양배추, 수박을 심은 풍경을 볼 수 있다. 오래된 방앗간에서 풍겨 나오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 떡 만드는 냄새에 취하고 작은 카페들, 빵집들에서 풍겨 나오는 커피냄새, 빵냄새에 자꾸만 침이 보인다.
하귀 2리를 다녀보면 가보고 싶은 식당들이 많다. 실제로 대형식당은 없지만 기분좋게 곱빼기에 곱빼기를 담아준다는 국수집, 진한 국물의 순대국집, 얼큰하고 시원한 동태탕집 등 입소문이 제대로 났지만 규모가 작은 맛집이 많다. 점심시간엔 이 맛집을 찾아온 차들로 2차선 도로가 꽉 찰 정도다.
하귀2리는 최근에 생긴 다이소와 병원건물을 제외하곤 건물 자체를 철거하고 새로 짓는 경우가 드물어 낮은 주택과 옛 돌담, 옛 벽, 옛 간판 등이 유지되고 있다. 낡았지만 세월과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건물 특유의 옛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담벼락을 휘감은 풀들과 간간히 제주특유의 야자수나무를 볼 수 있으며, 약간의 리모델링을 한 아기자기하고 다양한 상점들이 더해지면서 하리2리만의 특유의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
이곳은 어릴 때나 볼 수 있었던 가게들이 많다. 오만가지를 다 파는 철물점, 고쟁이나 작업복이나 닥치는 대로 옷걸이에 걸어놓은 옛날 옷집, 듬성듬성 물건이 놓인 가게 등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기 보다 타박타박 걸으면서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추억에 잠기고 싶어지는 마을이다. 하귀2리는 수십 년 전 건물을 하귀문하센터(주민센터), 우체국, 경찰서로 활용하고 있다. 그 건물들이 소박하고 아름다워 카메라를 꺼내게 된다. 마을을 돌다보면 청보리가 예쁘게 난 곳에서 운좋으면 인생노을사진도 건질 수 있고, 3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빵집도 만날 수 있다,
애월 하귀해안도로는 유명한 드라이브 코스이고, 낚시꾼들은 아는 포인트가 많아 끊임없이 외부인구의 유입이 늘어나고 있다. 조용하고 소박한 하귀2리만의 분위기가 유지되었으면 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일까? 바다를 품고 있는 한적하고 정다운 하귀2리가 언제나 그 모습으로 있었으면 싶어진다. 바쁘고 고단한 마음을 산책으로, 음식으로, 오래된 건물을 보는 것으로 위로받아서일까? 새 건물이 자꾸 들어서고 개발되는 제주 안에 살면서도 하귀2리를 거닐다보면 조금 천천히 가라고, 너무 빨리 변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차분해진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은 구산동 주택가의 연립주택 세 채를 이용해 만들어진 도서관이다. 구산동도서관마을에 들어가면 넓은 내부와 밝은 인테리어, 그리고 자유롭게 펼쳐진 독서공간이 눈을 사로잡는다. 내부가 딱딱하게 나누어진 다른 도서관과 달리 구산동도서관마을에는 열람실이 없고 모든 곳이 자료실이고 독서실이다. 이 도서관은 연립주택을 이용한 도시재생 건축물이라는 것 이외에도 주민의 의견을 많이 반영하여 완성한 도서관이어서 특별한 가치가 있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의 신남희 관장은 도서관을 건축하던 사람들이 “이름 없는 건축가들의 협업이다.”라고 말하던 표현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도서관을 지어달라는 주민의 요구를 듣고 구청에서 예산과 부지를 확보해 도서관 건축을 시작한다. 보통은 건축이 시작되면 주민들의 목소리는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구산동도서관마을은 주민들이 서울시 주민참여예산에 참여해 예산을 확보하고 구청과 협력해 건축에도 개입한 이후 운영까지도 주민에게 맡긴 전국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이런 주민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도서관은 건축에도 신경을 썼다. 마을의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함이었다. 연립주택의 거실과 방이었던 공간이 자료실이 되고 아이들이 뛰어 놀던 골목은 서가가 되었다. 층마다 발코니를 살려 건물이 높고 넓게 구성되었다. 연립주택의 모양도 내부에 그대로 남아있어 그 이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마을 안에 가까이 자리한 덕분일까, 주택 공간이 그대로 남아있어서일까. 도서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발걸음 역시 슈퍼에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도서관이 주민의 생활과 어우러진 풍경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도서관 내부에는 도서관 건립 당시에 찍은 사진이나 주민들이 직접 찍은 마을 사진 등으로 꾸며져 있다. ‘마을 자료실’에는 구산동의 역사와 마을 사람들에 대한 자료가 따로 보관되어 있어 열람이 가능하다. 도서관 프로그램 ‘도서관 스케치’에 참여한 주민들이 구산동도서관마을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기도 하다. 또 마을 주민이 연립주택에서 찍은 어린 시절 사진을 신 관장에게 보내온 일도 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집이 도서관이 되어 기분이 좋다는 편지가 함께 들어있었다. 어린 아이가 연립주택 마당에서 그네를 타는 흑백사진은 지금 도서관 계단 벽에 전시되어 있다.
신 관장은 그 외에도 구산동도서관마을을 찾아오는 특별한 이들을 기억한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이 세금 내는 보람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주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폭염과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도서관을 지켜주어서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를 전하는 이들도 있었다. 구산동도서관마을 밖 주차공간에 있는 나무들이 제대로 관리되는 것 같지 않다며 직접 관리해주겠다고 나선 주민도 있다. 신 관장은 도서관을 찾는 이들의 애착과 관심 덕분에 도서관 직원들도 힘이 나고 보람차게 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양한 자료실과 주민들이 예산을 확보하며 기획했던 ‘청소년 힐링 캠프’는 구산동도서관마을의 자랑거리다. ‘청소년 힐링 캠프’는 강연을 하는 강당으로, 극장처럼 천장이 높고 멋있게 구성되어 있어 외부 강연자들이 강연을 하러 오면 ‘도서관 강당이 이렇게 멋진 것은 처음이다’라며 감탄을 한다. 또 일반적인 자료실과 신문자료실 외에도 ‘만화자료실’, ‘마을자료실’, ‘청소년자료실’이 따로 갖춰져 있는 것이 구산동도서관마을의 특징이다.
신 관장은 다른 지역에서 주민과 함께하는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도서관 운동을 해왔다. 외국의 공공도서관은 건물도 멋있지만 그 안의 분위기도 따뜻하고 지역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책임지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의 시나 구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가운데 구산동도서관마을은 민관 협치의 좋은 사례를 보여주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신 관장은 그러한 지역 시민들의 힘을 배경 삼아 지역과 함께 호흡하는 도서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작고 조용한, 여느 시골마을과 같았던 부여 송정마을은 2010년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송정그림책마을이 되기 전에는 부여군 최초의 벽화마을로 송정그림마을이라 불렀다. 2010년 1월부터 8월까지 8개월간 한국전통문화학교 학생들이 마을 곳곳에 벽화를 그렸다. 부여군 최초 벽화마을로 이름을 알린 송정마을은 2015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그림책 읽는 마을 찻집 조성 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송정그림책마을은 여유롭게 산책하며 돌아보기 좋은 소담한 마을이다. 담벼락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지나온 시간만큼 색이 바랬다. 집마다 문패를 대신해 집주인이 그린 그림과 이름을 넣었다. 그림 문패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이 집에 사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든다. 다른 시골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마을 곳곳에 그려져 있는 그림 덕분인지 마을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해진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보이는 오래된 건물이 야학당이다. 박상신 이장은 이 야학당을 송정그림책 마을의 “중심이자 정신”이라고 이야기 했다. 광복 전후로 송정마을에 깨어 있는 사람이 모여 야학당을 운영했다. 당시는 초등학교 문턱조차 밟기 어렵던 시절이었다. 매일 밤이면 남포등 하나를 켜고 작은 교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업을 들었다. 덕분에 마을사람 중에는 초등학교도 못 나온 사람은 있어도,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그 야학당에서 주민에게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지금 와서 그림책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 불가능했을 거여. 지금 송정마을을 있도록 만들어 준 공간이니까 우리 마을의 중심이고 정신이라 말할 수 있는 거지.
주민이 찾아오기 편하도록 마을 한가운데 단층으로 만든 야학당은 어린 시절 공부했던 학교 교실 한 칸을 작게 축소한 듯하다. 비록 지금은 그 쓰임을 다해 비어 있지만, 야학당은 송정그림책마을을 찾는 이에게 꼭 소개하는 장소이다. 어렵고 힘든 시절, 마을 사람이 모여 함께했던 추억이 서려있기에 송정마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송정그림책마을의 박상신 이장은 송정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성인이 되기 전 고향마을을 떠났다가 은퇴 후에 송정마을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주변 사람들 권유로 이장을 맡았다. 창조지역사업 시작 당시에는 그림책은 생각도 없었다.
무슨 농사꾼이 책을 만들어. 책 만들기가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창조지역사업 선정 이후 마을에서 좀 독특하고 다른 사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농촌 지역에 워낙 많은 사업비가 내려왔고 각 마을이 테마로 잡는 것들이 유사하고 비슷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소문 끝에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이라는 곳을 찾았고, 그곳과 컨설팅 계약을 체결했다.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제안으로 마을에서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책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마을 어르신이 감히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오랜 시간 이어진 대화와 노력 끝에 송정마을 23명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엿한 작가로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을 세상에 내보였다.
그림책이 나온 이후 총 두 번에 걸쳐 서울에서 원화 전시회를 진행했다. 서툰 솜씨로 그린 그림이었지만, 전시회장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는 기분은 남달랐다.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작가 이름을 달고 전시회를 하는 엄마, 아빠, 아내,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러 온 가족들에게도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00 엄마', '00 아빠' 대신에 자기 이름을 찾았다. 이제는 어엿한 작가로서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송정그림책마을은 사람은 물론이고 많은 매체가 다녀갔다. 날로 높아지는 마을의 인기를 실감하면서도 아직은 얼떨떨하다. 50명 이상의 단체 손님이 찾아오는 날도 많다. 손님이 찾아오는 날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돌아가면서 직접 책을 읽어 준다. 소담하지만, 진정성 있는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사람도 많다. 쑥스러워하면서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을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써 준다. 작가와의 만남 자리에 작가로 당당하게 서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인구가 줄고 고령화되는 농촌마을에 다양한 정책자금이 쏟아져 들어간다. 다양한 자원을 소진하는 형태의 사업이 즐비하다. 송정그림책마을이 특별했던 건, 프로젝트 중심에 주민이 당당하게 섰다는 사실이었다. 평생 누구 엄마, 누구 아빠로 불리며 노동 현장에 있었던 그들 삶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자존감을 부여했다. 한 인간으로서 충분히 의미 있고 가치 있음을 드러내며 삶을 당당하게 곧추 세웠다.
할머니들이 농사짓고 빻아서 물에 타 준 미숫가루 한 잔을 들고 창가 테이블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한가로이 앉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한참 마을을 둘러보고 다시 마을 입구로 내려왔을 때는 계절 탓인지 해가 뉘엿하게 지기 시작했다. 그날의 마지막 햇살이 넓은 창으로 한가득 쏟아져 들어오고, 노랗게 내리는 노을이 마을에 그대로 물든다.
충청남도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 판교마을은 과거 판교면에서도 가장 사람이 많았던 마을이다. 판교면은 본래 비인군 동면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서천군 동면이 되었고, 1942년 판교면으로 개칭했다. 1942년 당시, '해 뜨는 마을'이라는 뜻의 '동면'을 일본인들이 판교면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현암리는 한때 서천군에서 가장 큰 장이었다는 판교 오일장과 우시장, 모시전이 열렸다. 장이 열리는 날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는 마을이었다. 판교 우시장은 1980년대 중반까지 충청남도 3대 우시장으로 불릴 정도로 번성했다. 30년 전 우시장이 자리를 옮기고, 시대가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도 빠져나갔다. 그때의 활기를 지금은 찾을 수 없지만, 마을의 모습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시간이 멈춘 마을'이라고 부른다.
판교면사무소를 지나 판교마을로 향했다. 마을은 여느 시골 마을처럼 한적하다. 마을에 들어서면 보이는 판교 노인건강교실 앞에는 노인 전동차가 가지런히 주차되어 있고, 신나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온다. 건강교실 앞에 붙은 현수막을 보니, 이날은 실버로빅을 진행하는 날이다.신명나는 음악을 뒤로하고 마을로 들어섰다.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건물이 보인다. 세월을 머금은 건물은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채 굳게 문이 닫혀 있다. 마을에서 진흥농기계를 운영하는 박 사장은 그 건물이 도토리묵 공장이었다고 이야기한다. 한때 재래식으로 도토리묵을 만들었던 공장은 사람과 기계가 빠져나가고 건물만 덩그러니 남았다.
지금 진흥농기계가 있는 자리는 우시장이 열리는 자리였다. 7월, 8월에는 약 1천여 마리의 소가 묶여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판교 우시장 주변으로는 주막을 겸한 국밥집이 즐비했고, 사람도 많았다. 최근 이곳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한 TV 프로그램에 마을이 소개된 이후 꾸준하게 사람들이 마을을 찾는다. 저마다 어깨에 카메라를 하나씩 메고, 마을을 돌며 셔터를 누르기 바쁘단다. 마을이 알려진 이후에 TV 프로그램 촬영도 늘었다. 얼마 전에는 영화 촬영도 있었다.
진흥농기계 맞은편에는 동일주조장이 있다. 동일주조장은 주로 밀가루로 막걸리를 만들어 판교지역에 공급하던 양조장으로 박호성 씨가 3대째 운영하다가 2000년에 문을 닫았다. 마을의 상징적인 공간마다 친절하게 안내판이 놓여 있다. 짧은 글로나마 마을에 담긴 이야기를 만난다.
판교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었지만, 마을은 그저 한산하다. 마을을 오가는 어르신들은 낯선 외지인의 방문이 익숙한 듯 걸음을 옮긴다.
아이고 뭐 하러 왔대? 식사들은 하셨어? 밥 먹어야 하는디.
노인 전동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던 마을 할머니는 낯선 외지인에게 거리낌 없이 친절하게 말을 건넨다. 따듯하다. 거리에는 오래된 건물과 새로 지은 건물이 뒤섞였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건물은 속이 텅 비었고, 나무판자만 남았다. 다 벗겨진 페인트와 오래된 간판, 금방이고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지붕만이 공간이 존재했음을 알린다. 여전히 운영하는 가게도 더러 있다. 미용실에는 머리하는 아주머니도 보이고, 시계방에는 소파와 테이블이 놓였다. 시계방과 정미소, 전파사, 미용실까지 오래된 상가들은 이곳이 얼마나 번성했던 곳인지를 짐작하게 만든다. 전파사는 이곳에서 40년을 넘게 운영했다. 영업을 안 한 지는 10년이 넘었다.
옛 판교역이 있던 자리는 현재 판교특화음식촌이 들어섰다. 판교역이 장항선 직선화 공사로 2008년 11월 27일 이전하면서 지역 공동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2012년 문을 열었다. 장항선 판교역은 징용, 징병, 식량 약탈 등을 위해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개통했다. 서천군 동면 판교리의 판교장 이름을 따서 판교역이라 이름 붙였다. 해방 이후에는 도시로 가는 길목이었던 옛 판교역은 이제 추억으로 남았다. 1930년대 심었다는 판교특화음식촌 앞 소나무만이 올곧게 서 있다.
일제 강점기의 흔적은 장미사진관에도 남아 있다. 장미사진관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살았던 집이다. 장미사진관으로 사용한 것은 해방 이후다. 일제 강점기 당시 판교면에는 일본인이 농토와 상권을 장악했다. 장미사진관 안내문에 따르면 '1930년 당시 '동면'에서는 일본 사람 스스로 '본토인'이라고 말하고, 우리 민족은 '조선인'이라 칭하며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당시 이야기를 알고 있거나 전해들은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오래된 건물 앞 안내문만이 과거를 이야기해 준다.
서천군은 오는 2022년까지 51억 8천여만 원을 들여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 조성사업'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현암리 이외에도 명품관광 도시를 조성하기 위해 지역 주요 관광지의 대규모 재개발과 다각적인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 조성사업은 판교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재조명하고, 재창조함으로써 새로운 관광명소를 개발하기 위함이다. 판교지역 내 창작체험공간을 비롯해 어울림 공간 등을 조성하고, 마을 스토리텔링과 홍보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 사업이 시간이 멈춘 마을과 주민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아직 가늠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떠난 폐교에는 쓸쓸한 적막만이 가득 찬다. 과거에는 떠들썩했을 교실에 고요함과 먼지만이 켜켜이 쌓여가고, 아무도 오가지 않는 학교 건물에는 지저분하게 자란 수풀만이 우거진다. 아이들이 없어 문을 닫는 시골학교의 모습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외로움을 남긴다. 전북 고창 해리면 나성리 월봉마을에 위치한 나성 초등학교 또한 그러한 장소였다. 1933년 광승 간이학교로 문을 열고, 2001년 나성 초등학교로서 그 막을 내리게 되기까지 수많은 아이들이 이곳을 거쳐 가고 자라왔다. 누군가에게는 유년기의 즐거운 추억이 잔뜩 담겨있을 이 소중한 학교가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장소인 ‘고창 책마을해리’로서 다시 싹을 틔운 것은 2006년의 어느 날이었다.
목적지를 향하여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 바다로 길게 이어진 강의 끝자락과 완만하게 솟아있는 언덕을 따라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작은 저수지가 보인다. 저 멀리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은 월봉마을을 찾아온 여행객들의 뺨을 간질이며 어딘지 낯익은 푸근함으로 손님을 반긴다. 책마을해리 앞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푸른 잔디가 깔린 운동장과 그 외곽의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다. ‘책뜰’이라고 불리는 푸른 운동장의 너머를 가만히 둘러보면 여러 동물 동상들과 조형물들이 사람들을 환영하는 것처럼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오래되어 보이는 사자상은 등이 하얗게 벗겨져있어, 과거에 수많은 아이들이 이 사자상 위에서 말 타기를 하며 신나게 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면에 있는 붉은 벽돌로 된 건물의 외벽에는 무성하게 자라난 담쟁이덩굴과 ‘승공없이 통일없고 방첩없이 평화없다’라는 문장과 ‘바로보자 거짓평화 막아내자’라는 글귀가 남아있다. 1950년대 반공 교육이 한창이던 때에나 볼 수 있었던 그 문장들은 이 학교가 얼마나 오래된 건물인지 쉬이 짐작하게 한다.
제 할아버지께서 설립해 기증했던 이곳이 폐교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귀향해 곧바로 인수했습니다.
서울에서 출판사에 몸담고 있었던 ‘책마을해리’의 이대건 촌장은 자신의 선친이 세웠던 학교가 폐교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 땅으로 한걸음에 달려왔다. 2006년 ‘책마을’을 만들겠다는 오랜 꿈을 안고서 고창으로 온 그는 폐허가 된 학교를 하나둘씩 가꿔나가며 모두가 쉬고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을 준비하였고, 아예 서울에 살던 가족과 함께 이곳에 정착하여 ‘책마을해리’를 만들었다. 오래되어 삐걱대는 복도를 새롭게 깔고, 지저분한 교실을 깔끔하게 단장했으며 건물의 벽에는 예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는 차곡차곡 책장에 책을 모았다. 책마을해리에 있는 수많은 책들은 그렇게 늘어나 어느덧 15만 권 가량이 되었다.
고창 책마을해리에 있는 것은 수많은 책들이 다가 아니다. ‘바람언덕’이라 이름 붙여진 조그만 야외강연장과 암벽타기 벽이 설치되어 있어 아이들에게 큰 인기를 자랑하는 ‘동학평화 도서관’, 다양한 마을신문과 각 지역의 책들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전시해둔 ‘책숲 시간의숲’과 전국의 어린이 청소년 양서들을 모아둔 ‘버들눈 도서관’, 직접 글을 쓰고 책을 찍어낼 수 있는 ‘누리책공방’등의 볼거리가 넘쳐나는 곳이다. 또한 매주 토요일 운영되고 있는 나만의 책 만들기를 비롯하여 한지만들기 체험, 그림책 작가 교실, 출판캠프 등의 다양한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 고창 책마을해리는 단순히 책만을 제공하는 장소가 아니라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수많은 볼거리와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고 있다.
20년 넘게 출판업계에 몸을 담았던 이대건 촌장은 책마을해리에 대해 “책이 있는 공간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삶, 이야기를 한 권으로 묶어내는 장소를 만들었으면 했다.”고 말한다. 겉보기엔 낡은 학교 건물처럼 보였던 장소가 천장까지 빼곡이 쌓인 책들을 계기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은 그야말로 마법 그 자체였다. 원하는 책들을 자유롭게 펼쳐볼 수 있는 독자가 되기도 하고, 내가 바라는 책을 써보고 직접 출판하는 작가가 될 수도 있는 마법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마치 ‘해리포터’ 같은 소설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러한 꿈이 마을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대건 촌장의 바람이었다. 그가 ‘해리면’에 있는 ‘책마을해리’라고 이름을 정한 것도 그러한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것이다.
책마을해리가 생겨난 것으로 10가구 남짓한 자그마한 월봉마을에는 새로운 활기가 돌고 있다. 지역민들을 물론 타지에서 찾아온 방문객들마저 문화의 생산자가 되고자 하면 언제든 될 수 있다. 책을 기획하고, 쓰고, 편집하는 등 책과 관련된 다양한 체험을 함께 꾸려나가고 접하는 것으로 이곳은 단지 책을 읽는 곳이 아니라 지역공동체가 함께 하는 복합적인 쉼터가 되었다.
인천 원도심 중의 한 곳인 동구에 경인전철을 끼고 있는 배다리 마을이 있다. ‘배다리’라는 이름은 예전에 이곳 마을 어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배와 배를 연결하여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녔다거나 배를 댈 수 있는 다리가 있어 붙여졌다. 인천 하면 자유공원과 차이나타운(청관)이 유명한데, 이곳이 일본과 청나라를 비롯한 외국 세력들의 침략과 침탈의 역사가 깃든 신중심지였다면, 배다리는 그곳에서 밀려나거나 쫓겨난 조선인들과, 주변부에 들어선 공장에 일자리를 찾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노동자들, 한국전쟁 이후 황해도 등지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뒤섞여 어려운 시절을 이겨온 고달픈 삶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나라의 위기와 삶의 힘겨움을 교육으로 극복하고 도와주기 위한 지식인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기도 하다.
광복을 맞이하며 시작된 헌책방은 한국전쟁 이후 거리를 형성하며 한 때 40여 개가 들어서 성업을 이룰 정도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배다리는 “인천 역사 문화의 모태”라고 말할 정도로 개항 이후 근대 종교와 교육, 산업, 노동, 교통, 상업의 시발지였고 중심지였다. 그러나 이곳도 곳곳에서 드러나는 도시 변화의 한 현상인 ‘원도심 쇠퇴’라는 직격탄을 피해가지 못했다. 도시가 확장되고 중심이 신도시로 옮겨가면서 배다리 마을 또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기억에서 멀어졌다. 그러던 이 마을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마을 중간을 관통하는 산업도로 공사 때문이었다. 인천시가 국책사업으로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었던 경제자유구역 조성사업 중 남쪽의 송도신도시와 북쪽의 청라신도시를 오가는 가장 빠른 길을 내려다 이곳 배다리 마을 주택가 한 복판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동네가 하루아침에 절단이 났고, 그렇게 파헤쳐진 마을의 모습은 폐허 그 자체였다. 오로지 속도와 효율, 이익만을 생각한 결과, 마을 하나쯤 없어져도 괜찮다는 생각이 그런 폐허를 만들었다.
이 도로가 지나가게 되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될 주민들이 먼저 나서서 반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던 지역의 시민문화예술단체와 활동가들이 동참했다. 특히 일부 문화예술단체와 공간들은 아예 이곳으로 둥지를 옮겨왔다. 그러던 중 이 일대를 전면 철거하려는 대규모 개발 계획이 수립되어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다.
주민들과 활동가들은 반대 싸움을 하면서 더불어 ‘배다리 역사문화마을 만들기’ 사업도 함께 했다. 지나온 삶의 가치와 정신을 오늘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접목시키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오래되어 방치된 건물을 부수지 않고 매입하거나 임대하여 옛 흔적과 사연을 잘 살려 매력 있게 변신시키는 개보수 작업과 더불어 이를 문화와 공동체 공간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후 지은 건물 다락방의 오래된 벽돌벽 위에 새 벽돌을 쌓아 천정을 높인 후 시집 전시실로 꾸며 매달 시낭송회 등을 개최해 온 아벨전시관, 막걸리를 만들던 옛 양조장 건물을 임대, 개보수하여 문화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스페이스 빔, 옛 조흥상회 건물을 되살린 배다리 생활문화공간 ‘달이네’와 독립서점 ‘나비날다’, 이 외에도 카페 ‘싸리재’, 잇다 스페이스, 20세기약방 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더불어 마을과 도시의 대안을 고민하고 논의하고 실험하는 활동들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예술가 거주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해 배다리 마을과 원도심 일대의 역사 문화 가치를 재조명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배다리 도시학교’를 통해 지역의 도시 현안과 이슈에 대한 문제의식과 혁신 사례를 공유하고 가능성을 타진했다. 하나의 가게를 여러 주인들이 요일별로 번갈아 사용하며 서로의 관심사와 재주, 수익을 나누는 ‘요일가게’는 공유경제의 작지만 모범적인 사례다.
무엇보다도 공사를 중단시키고 주민들의 품으로 온전히 돌려받기 위한 관점에서 산업도로 부지의 생태 숲 복원, 텃밭 가꾸기, 여름생태캠프 개최, 마을공동체를 위한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행사, 아이들을 위한 모험놀이터 조성 등은 이곳을 매연과 소음을 발생시키며 주민 피해만 끼치는 도로가 아닌. 생명과 생태, 공동체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싸움과 활동의 결과, 도로부지는 주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지하로 지나가게 되었고, 지상 부지는 주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꾸밀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개발 계획은 무산되어 이곳 주민들이 원하는 기반시설 개선과 편의시설 확충 등의 사업을 벌여 이제 배다리는 큰 위기를 넘겼다. 이렇듯 배다리는 위기를 넘기고 노력해온 보람을 느끼나 싶었는데, 현재는 또 다른 위기와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인천시 동구가 배다리를 관광지로 꾸미기 위해 구역을 나누고, 테마거리를 만들고, 조형물을 이곳저곳에 세우려는 계획을 주민들과의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세운 후 밀어붙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안적인 마을과 도시 만들기를 위해 배다리 마을의 주민과 활동가들은 지혜를 모으고 있다.
인천시 동구 만석동은 부두와 섬을 품고 있는 마을이다. 과거 부두에서 느낄 수 있던 역동감은 제 빛을 잃었지만 만석동에서 바다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바다에 나가면 낚싯배와 조개잡이 배들을 볼 수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만석동이 아니지만 만석동 사람들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북성포구를 찾았다. 만석동과 북성포구를 떼 놓고 얘기할 수 없음에도 마을에서 바다가 쉬 보이지는 않는다. 굴 막장을 지나서 좁은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면, 둘이 걸으면 꽉 차는 좁은 길이 나온다. 인근 제분회사의 사유지로 양쪽에 철제 구조물로 둘러싸인 막다른 길을 지나며 과연 바다와 포구가 정말로 나타날까 의아할 즈음에 눈앞에 북성포구가 보였다.
현덕의 소설 「남생이」 첫줄에 ‘호두형으로 조그만 항구 한쪽 끝을 향해 머리를 들고 앉은’ 이라 소개되는 호두형 포구인 북성포구다. 북성포구는 개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천의 개항을 받아들인 조선은 화도진이 관리했던 만석동 일대의 포구를 열었다. 조선 정부는 남쪽을 각국 묘지로 사용하고 북쪽에 조선인 마을을 만들었다. 그때 이후로 지금도 절반은 만석동 43번지이고 나머지 절반은 북성동 1가로 나뉘어 있고 마을에는 외국인 묘지가 있었던 곳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북성포구는 ‘똥마당’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만석동과 북성동에 모여 살던 시절, 화장실과 하수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공동화장실의 분뇨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때 배설물들이 밀물을 만나 마을에 떠다니던 모습 때문에 ‘똥마당’이라는 오명이 지금껏 전해오고 있다. 비가 오면 오물이 지대가 낮은 집 안까지 밀려 들어왔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주민들에게 ‘똥마당’이란 이름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만석동을 대표하는 별명처럼 따라다니고 있다.
1960년대부터 파시가 이어져왔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선상파시가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성포구는 현재도 매년 파시가 열리고 있고 주말에는 전국에서 200여명 이상의 손님들이 파시를 찾고 있다. 선상에서 값싸고 좋은 생선과 새우젓을 구입할 수 있어서 단골들이 잊지 않고 찾고 있다고 인근 주민들이 전해준다.
인천 만석동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부두인 만석부두는 만석비치아파트 인근에 자리 잡고 있다. 만석부두 입구사거리에서 화도진로와 보세로를 거쳐 만석부두로를 따라 가다보면 만석부두로 들어서는 입구를 만난다. 부두 입구에는 인항파출소 만석출장소와 인천수협 만석 직매장 건물이 있는데, 만석부두는 낚시꾼들이 배를 타기위해 찾아오는 부두로 주로 이용되고 있다.
만석부두는 인천 앞바다의 여러 섬들에 운항하는 여객선들의 출발지이기도 했다. 작약도가 관광지로 각광을 받던 시절,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여객선을 왕복 300원의 요금을 내면 탈 수 있었다. 영종도로 가는 배도 만석부두에서 탈 수 있었는데 1973년 5월 1일 연안부두가 건설된 이후, 만석부두에서 영종도로 가는 항로는 1976년 폐쇄됐다. 지금도 만석부두에서는 주꾸미를 잡기위해 어망을 손질하고 낚시꾼들을 태우고 출항을 준비하는 배들과 선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만석부두에는 만석동에 살아온 피란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굴막이 있었다. 부두가 가까운 만석동에서 살아온 피란민들은 만석부두에서 배를 타고 영종도, 팔미도 등지로 나가 직접 캐온 굴을 까서 연안부두 상인들이나 굴막을 찾는 사람들에게 팔기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만석부두 굴막은 활기가 넘쳤지만, 지금은 대형마트 등에서 손쉽게 손질된 굴을 구입할 수 있기에 굴막에서 굴을 사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오래된 굴막의 흔적만 남겨져 있다.
만석동 기록 작업을 진행하면서 피란민들이 머물던 판잣집과 굴막에 얽힌 무수한 삶의 이야기들을 만났다. 남녀 가리지 않고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고 굴을 캐고, 조개를 캐서 먹고 살았던 처절한 삶의 이야기들 속에서 그 시절 만석동의 전성기를 엿볼 수 있었다. 지금은 전성기를 지내고 난 나이든 노인처럼, 생기 잃고 늙어가는 듯 보이고,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지 않는 북성포구와 만석부두이지만 그곳에서 살아왔던 마을 사람들의 고단했지만 행복했던 노동의 현장과 추억들을 삶의 흔적과 함께 마음에 담아본다.
흔히 제주는 바다와 오름이 있는 천혜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여행지로 생각하기 쉽다. 옛 제주의 모습을 상상할 때도 앞은 바다고 뒤에는 오름이 있는 시골 마을만 생각하기 쉬운데, 제주에도 번화했던 원도심이 있다. 오래된 도심은 엄청난 이야기를 품는다. 그대로 남은 옛 장소와 아주 사라진 빈터, 공간의 의미가 복원된 건물, 새로운 이야기를 담는 예술 공간이 함께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제주 원도심은 옛 제주읍성 안쪽이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곳이 제주도의 중심이었다. 성안(城內) 간다고 하면 번화한 이곳에 볼일 보러 간다는 말이었다. 극장이며 주점이 많아 사람들이 모이던 이곳에 300년 넘은 초가가 한 채 있다. 초가 마을이었을 때부터 한자리를 지키던 이 오래된 집에는 안순생(97세) 할머니가 7대째 살고 계신다. 이 마을에서는 제주 토박이들의 뚝심 있는 삶과 제주의 옛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제주에서는 부자 양반도 초가에 살았다. 기와를 굽지 않아 기와집은 없었기 때문이다. 제주에 있는 기와집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일본식 기와를 들여와 지은 것이다. 박씨 초가 집 앞에 있는 하마비(말에서 내릴 때 딛는 돌)와 우물터를 보면 역시 권세 있는 집이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집을 ‘박 판사네’라고 부른다. 지난해 ‘최순실 게이트’ 사건을 담당했던 박영수 특검의 아버지인 고(故) 박창택 판사네 집이기 때문이다. 박 판사의 부친은 고(故) 박명효 북제주군수였다. 지금 초가를 지키고 있는 안순생 할머니는 박 판사의 어머니이다. 어르신은 꽃 처녀일 때 시집와 이집에서 세 아이를 낳고 길렀다.
이 초가는 어르신의 삶이 담긴 집이자 제주 사람의 역사가 담긴 집이다. 어르신은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미리 준비해 놓은 수의를 보여주셨다. 세상 떠날 날을 위해 손수 장만해 두셨다고. 자식에게 빚지고 싶지 않아 직접 마련하셨다는 말씀에 평생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오셨는지 짐작이 간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 바람에 옛집들이 많이 사라졌다. 이후 건축사의 변화무쌍한 바람에도 박씨 초가는 초가지붕을 고수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문은 흰색 샤시 창호로 바뀌었지만. 콘크리트 건축물 사이에 있는 돌담에 둘러싸인 초가는 기품 있고 굳건해 보인다. 10년만 돼도 헌집 취급을 받는 요즘 생각으로 300년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세월이다.
원도심에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보물 제322호인 관덕정이다. 세종 때인 1448년 병사를 훈련시키기 위해 지은 곳으로 관덕정은 제주성의 광장이었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이곳 관덕정을 배경으로 벌어졌다. 제주 4.3사건의 발단이 된 1947년 발포 사건도 이곳에서 삼일절 행사가 있어 사람들이 모였을 때 일어난 일이다. 지금도 여기서 입춘굿, 콘서트 같은 큰 행사가 치러진다.
이 동네가 제주의 원도심인 이유는 조선 시대 제주의 행정중심지였던 제주목관아가 있기 때문이다. 제주목관아 앞이 그 시절 중심 상가였다. 각종 가게와 편의 시설이 자리하고 있었다. 최초의 교회, 초기의 극장, 종합병원이 이곳에 있다. 제주중앙성당 종탑은 여전히 12시에 맞춰 종소리를 흘려보낸다. 관덕정 길 건너에 있는 제주 개신교의 발상지, 성내교회는 독립군자금을 모금하다 일제의 핍박을 받았던 곳이다.
제주목관아는 관덕정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없어졌는데 1991년에 그 터에 복원을 해놓았다. 이 관아에서 바다까지의 거리는 불과 500m 바다 앞 옛 마을을 보기에 가장 적합한 여행지가 아닐까 싶다. 제주목관아에는 제주목 역사관이 있고 평일에 관람이 가능하고 1500원의 입장료가 있다.
유명 관광지로서의 제주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 예술을 품고 있는, 그동안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제주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원도심이다. 원도심에는 관덕정, 제주목관아 외에도, 옛 건물을 개조한 카페나 갤러리, 옷가게 등이 많다. 성내교회 옆에 있는 ‘모퉁이 옷장’도 JTBC 방송의 예능 프로그램인 ‘효리네민박’에 나와 명소가 되었다. 순아커피, 갤러리 코지왓, 예술공간 이아 등 옛 건물을 그대로 사용한 장소들이 공항 가기 전에 들러 사진 찍기 좋은 코스로 입소문이 나면서 여행자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강원도 화천읍에서 북한강의 지류인 파포천을 따라 5번국도를 타고 오다보면, 굽이굽이 작은 산이 이어지다가 누렇게 익은 벼들이 가득한 넓은 들이 펼쳐진다. 산이 많고 밭농사를 많이 짓는 강원도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다. 이곳이 바로 신대리(토고미마을)다. 마을 이름이 왜 ‘토고미’인가 했더니, 신대리는 예로부터 기름진 옥토가 많아 부자가 많이 살았는데, 농사일에 품을 팔면 꼭 쌀로 품삯을 받았다하여 토고미(土雇米)라 불렸다고 한다.
신대리 마을주변으로 얕은 산자락이 감싸고 마을 앞으로는 파포천이 흐르고 있어 첫눈에 봐도 사람살기 좋은 마을임을 알 수 있다. 마을입구 다리를 건너가면 병풍처럼 펼쳐진 산 아래로 6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시골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대리는 옛날에 신풍리에 속한 마을로 어귓마을로 불리다가 동리(洞里)가 커지면서 1956년에 토고미, 느릅제기, 작은 토고미를 병합하여 신대리라 불리게 되었다. 10년 전까지 마을입구에 신풍초등학교가 운영될 만큼 제법 큰 마을이었다.
신대리는 친환경 농사와 농촌체험마을로 화천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유명한 곳이다. 토고미자연학교는 연2-3만명이 체험하러 오는, 농촌체험으로는 전국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다. 80여 호의 200명 남짓한 이 마을 주민 수에 비하면 방문객이 많은 편이다. 전국의 학교, 기업, 지자체들이 체험관광코스로 찾아오고 있다. 지금의 토고미자연학교는 10여 년 전까지는 지역의 초등학교로 운영되던 곳인데 학생수가 줄어들면서 폐교되고, 그 후 리모델링한 뒤 신대리에서 농촌체험을 테마로 한 ‘토고미자연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지금도 내부 객실호가 1-1, 2-1 등으로 추억 속 초등학교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강아지와 당나귀 3마리가 맞아주니 어린이 방문객들이 잔디밭에서 자연스럽게 뛰논다.
2008년까지는 오리농법으로 친환경 논농사를 짓다가 2009년부터 현재까지 우렁이농법으로 논농사를 짓고 있다. 현재도 신대리 농지 곳곳에는 오리를 키우던 사육장이 남아있어 방문객들의 궁금증을 사고 있다.
신대리 주민들의 경험담에 의하면, 오리보다 우렁이가 농사를 잘 짓는다고 한다. 오리는 논에 들어가 매일 잡초를 먹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해서 따로 사료를 챙겨줘야 하고 오리가 벼와 벼사이 보다 몸집이 커지면 오리를 논에서 빼내야 하는데, 우렁이는 잡초제거를 더 잘하고 사료를 챙겨줄 필요가 없어 농민들의 칭찬이 자자하다. 또한 추수 후 논에 물을 빼고 논을 갈 때 자연스럽게 우렁이가 논에 유기물이 되어주기도 한다.
신대리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마을에서 직접 구매하여 [토고미농산물]로 상품화되는데, 그중 친환경 토고미쌀이 가장 비중이 높다. 신대리에서는 마을정미소를 운영하여 신대리 마을주민의 쌀을 직접 수매・가공・판매하여 농협보다 비싼 가격으로 농민에게 돌려준다. 인터넷과 방문객을 대상으로 그해에 생산한 쌀은 다음해 여름까지 완판 된다고 하니, 신대리는 쌀값 하락은 걱정 없겠다.
여름에는 친환경 논 위를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를 만나고, 트렉터 기차를 타고 마을 한바퀴를 돌아보며 소 여물주기, 고구마 캐기를 체험하고 돌아와 토고미자연학교에서 인절미를 만들어 나눠먹고 나면 하루 동안 꽉 채운 농촌체험으로 마음 한켠이 넉넉하고 편안해진다. 신대리는 ‘고향’을 판다. 도시에서 고향을 모르고 사는 바쁜 현대인들은 잠시 신대리에서 고향의 추억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겠다.
서울에 ‘마을’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강동구 천호동에 자리한 ‘십자성마을’을 찾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5호선 굽은다리역 1번 출구 십자성마을이라는 안내판이 바로 보였다. 파병되었던 국군상이군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바로 십자성마을이다.
1960~1975년까지 지속되었던 베트남 전쟁에 우리나라는 30만명이 넘는 군인들을 파병했다. 1964년 9월 의료진을 중심으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이 들어가 1만 6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참전 군인들은 고엽제 피해 등 후유증에 시달렸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부상을 입고 돌아온 군인들은 파월전상자 자립회를 만들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폐품수집 등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자활기금을 모았으며, 여기에 원호처 정착대부금과 대통령 하사금을 더해서 기금을 마련, 1974년 천호동에 정착한 후 마을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입구에는 ‘십자성에너지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반겼고, 주말인데도 굉장히 조용하고 깨끗했다. 조금 걷다 보니 마을회관이 보였고, 그 앞에는 철모를 형상화한 비석이 서 있었다. 비석 아래 머릿돌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이 마을은 자유 수호를 위하여 이역만리 베트남 전선에서
혁혁한 무궁을 세운 전상용사들의 생활안정을 위하여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하사하여 주신 자금을 바탕으로 건립되었으며
"십자성 마을" 이란 이름 지으시고 이를 휘호로 하사하시어 위와 같이 각자하다.
대통령 각하의 높으신 뜻을 받들어 조국의 번영과
자유 평화의 기수로서 전진할 것을 다짐하며 이 탑을 세우다.
1974.10.25. 파월전상자 자립회
십자성이라는 마을이름은, 일주일 가까이 배를 타고 월남으로 향할 때 밤마다 빛나던 별, 남십자성을 상징한다. 마을은 나지막한 단독주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조금만 걸어도 ‘국가유공자의 집’이라는 문패가 곳곳에 걸려 있어 남다른 동네임이 느껴진다.
또한, 이 마을에는 별칭이 있다. 바로 에너지마을이다. 에너지 자립마을이란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마을 공동체에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생산은 늘려 에너지 자립도를 높여가는 마을을 뜻한다. 2018년 현재 서울시에는 100개의 에너지자립마을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마을이 바로 십자성 마을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후에 우리나라에서도 원전하나 줄이기 사업이 시작되었고, 이에 발맞춰 강동구청은 ‘서울시의 원전하나 줄이기’ 사업에 동참하기를 십자성 마을에 권유하였다. 주민들은 실천할 수 있는 생활 속 에너지절약을 이루었고 마침내 태양광 발전을 위해 자기 집 옥상에 시간당 3㎾짜리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했다. 그 후 2012년부터 서울시에서 자립마을 사업승인을 받은 후 태양광설비를 지원받고 자발적인 에너지 절약과 자립을 이끌어내어 대표모델이 되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섰을 때부터 주택 곳곳마다 태양광 설비가 눈에 띈다.
마을회관 1층에 위치한 홍보관에서 전기소비량을 확인할 수 있고, 태양광을 설치한 세대와 옥상에 텃밭을 만들어 녹화사업이나 에너지 절약을 실천하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십자성 마을은 민·관에서 수차례 견학을 올 정도로 국내∙외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70%의 세대가 주택태양광을 설치하고, 전기요금 상당액을 절약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종전 후 40년이 흘러 처음 101가구로 조성되었던 마을은 현재 41가구만이 남게 되었다. 마을의 주민으로 보이는 한 어르신이 전신주에 붙어 있던 전단을 떼며 정리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온화한 미소로 종이를 정리하고 마을 곳곳을 아끼는 마음이 느껴졌다. 십자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시간이 흘러도, 세월이 변해도 한 자리에서 끊임없이 반짝거릴 것이다.
독일마을 맥주축제는 세계 3대 축제의 하나인 독일 뮌헨의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를 모태로 하여 2010년 처음 개최되었다. 독일마을은 “1960년대에 산업역군으로 독일에 파견되어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한 독일 거주 교포들이 한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삶의 터전을 제공해주고, 독일의 이국문화를 경험하는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2001년부터 조성”된 곳이다. 독일마을은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와 동천리, 봉화리 일대 약 100,000㎡의 부지”에 조성되어 있으며, “독일 교포들이 직접 독일에서 건축부재를 수입하여 전통적인 독일 양식”으로 주택을 건립하였다. 지금은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10년 처음 개최된 독일마을 맥추축제는 남해군이 주최하고 독일마을맥주축제추진단이 주관하며 매년 10월 남해군 삼동면 독일마을 일원(독일광장)에서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문화관광축제의 2018년 육성축제이다.
옥토버페스트는 독일어로 ‘10월 축제’라는 뜻이다. 1810년 10월 12일 빌헬름 1세의 결혼에 맞추어 5일간 축제를 개최하면서 시작되었다. 매년 9월 15일 이후 돌아오는 토요일에 시작하여 10월 첫째 주 일요일까지 최단 16일에서 최장 18일간 열린다. 전 세계에서 600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민속 축제이자 맥주축제로, 브라질의 리우 축제와 일본의 삿포로 눈 축제 등과 더불어 세계 3대 축제로 꼽힌다.
독일마을 맥주축제는 “첫날 환영 거리퍼레이드와 맥주 오크통 개봉을 시작으로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프로스트(건배의 독일어)를 외치며 축제장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과 맥주잔을 부딪치며 인사”를 주고받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축제는 ‘옥토버낭만콘서트(재즈, 어쿠스틱, 퍼포먼스, 7080밴드 공연 등), 옥토버나이트(EDM파티), 베르그 프라우데 요들송 공연, 환영퍼레이드 및 환영식(독일마을주민 합창)’ 등의 공연 프로그램으로 무르익으며 ‘독일맥주, 음료, 스낵 등 판매부스’가 차려져 먹고 마시는 기쁨이 함께 한다. 체험행사로는 ‘독일전통의상 체험, 맥주마시기 참여 게임’ 등이 진행된다. 부대행사로는 ‘옥토버 챌린지(맥주잔 많이 들고 달리기, 맥주 빨리 마시기, 오크통 수레 끌고 달리기, 맥주잔 높이 쌓아 달리기, 맥주 캔 높이 쌓기 등), 토크콘서트with파독광부/간호사’ 등이 진행된다. 독일마을 맥주축제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주변 관광지로 ‘독일마을·파독전시관, 남해12경-제10경 남해 물건리 방조어부포세이돈마린레저림과 물미해안, 원예예술촌, 남해군요트학교, 해오름예술촌, 은점어촌체험마을, 꽃내권역’ 등이 있다.
장록마을은 행정구역상으로는 평동 출장소 관할 송촌동에 속하며 황룡강변에 위치한 비교적 큰 마을로 장록교를 기준으로 송정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S자형으로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황룡강을 따라 마을건너편에는 선암동 중보의 구시장 터가 바라다보이며 황룡강 제방을 끼고 주변에 넓게 펼쳐진 비옥한 평야지대에 마을이 형성되어 과거에는 전형적인 농경중심의 전통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이 위치한 자연환경은 황룡강의 풍부한 수량을 확보할 수 있는 자연 지리적 여건과 예로부터 강을 이용한 교통의 발달로 농산물 등 물류의 수송이 원활하였었다. 나주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으로 남평의 광리역에서 선암역으로 오는 원동 지로나루가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숙박시설이나 주막 등의 편의시설이 자연스럽게 운영될 수 있는 생활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장록마을의 또 다른 이름은 ‘녹촌(錄村)‚이라고도 하였으며 430여년 전에 김해김씨, 인동장씨, 장수황씨 등 3성이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3정자마을(三亭子)’이라고도 한다. 마을의 형성은 3성 중 김해김씨 김자녕공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출전하였다가 난이 끝나자 1599년 18세의 나이로 고향인 경상북도 청도로 가는 도중 이 고을을 지나다가 기름지고 넓은 들판을 보고 이곳에 머물러 문화유씨와 결혼 정착함으로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장록에서 가까운 주변에 월성 사장마을이 있을때는 활터로도 유명하였고 이곳이 한 때 경마장이 되기도 하였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녹촌(錄村), 사장(射場), 월성(月城)을 합쳐서 장록이라 하였지만 사장이나 월성마을은 폐촌되어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행정구역상 원래는 평리면과 관동면으로 있을 때는 나주목 소속이었으나 1949년 두 면을 합쳐 평동면이 되면서 광주로 편입되었다. 1960년대에는 장록에 육군간이비행장이 설치되었다가 폐쇄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 장록마을에 주로 거주하였던 성씨는 김해김씨 96호, 전주이씨 20호, 밀양박씨 13호, 나주정씨 12호, 진주강씨 9호, 기타 50호 등 200여 호가 거주하였다. 현재는 마을에 빈집들이 군데군데 많이 보이고 있어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또한 마을안에는 평동농협 동부지점을 비롯하여 은석교회. 무등기와산업, 삼원배관 등 공장들이 일부 들어서 있다. 마을 주민들의 주된 경제활동은 종래에는 양계시범마을로 지정 육성되어오다가 수리와 교통이 좋아 대부분의 주민들이 시설원예작물 재배로 전환하여 높은 소득을 올렸었다. 원예가 발달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마을주민들 간에는 원예계가 조직되었고 생산과 판매를 공동으로 추진하여 주민들의 소득증대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오늘날처럼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물자의 수송 수단은 주로 강을 이용한 물류유통이 활발하였다. 장록마을 역시 조선 후기에는 평리면에 소속된 21개 마을 중 하나였는데 이곳에는 선암역을 건너다니는 원동나루가 있어 배가 수시로 드나들었다. 이 나루는 주로 관리들이 건너다니는 나루였고 일반 민초들은 바로 옆의 지로나루를 이용하였다.
장록마을은 평구부곡이 자리했던 곳이기도 하며 당시 평동과 송정에 이르는 황룡강변은 뱃길이 있어서 조선시대 이곳을 선도면(船道面)이라고도 했다. 조선시대 장록마을은 교통의 요충지였기에 여행객이나 관리들이 이곳에서 숙박하는 경우가 많아 이들의 숙식을 제공하는 오늘날의 여관 같은 원(院)이 있었다.
오늘날 도로변의 주유소나 가든이란 이름을 붙인 음식점 자리들이 옛날 원이나 주막터였다. 지로마을에도 나그네들이나 여행객들이 쉬어가는 뱃머리 주막, 장록원이 있는 장록마을에도 삼정주막이 있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마을주민인 정육만(73세)에 의하면 원집 터는 현재 일등요양병원 앞에 ‘강진(江津)나루‚라고 부르는 대보 뚝 부근에 있었으며 여기에는 장이 섰었고 주막도 여기에 있었다고 전한다. 장록마을 주민들은 한해 농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정월대보름날이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위해 당산제를 지냈다. 마을 당산은 원래 10개가 있었으나 현재는 할머니당산을 비롯하여 3곳 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당산제는 마을 유래인 삼정자 마을의 유래와 관련이 있다.
장록마을 당산제의 유래를 보면 임진왜란이 끝난 후 1599년 여름에 김해김씨 후손 김질(金桎)공, 장수황씨 후손 황석중(黃錫中)공, 인동장씨 후손 장남사(張南嗣)공이 귀향 도중에 해가 저물어 이곳에 머무는데 꿈에 신령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터는 금구포란(金龜抱卵)이니 너희들은 이곳에 거주하라‚ 하고 ‘지대가 낮아 홍수가 우려되니 주변에 식수를 하면 된다‚ 라고 하여 그로부터 3인이 3가구로 시작하여 나무를 심고 3곳에 정자를 지었다고 하여 3정자마을이 되었다.
주민들이 농업을 위주로 삼아 생활하는데 한 해에는 폭우가 쏟아져 가옥은 침수되었으나 온 주민은 3정자나무로 인하여 인명피해를 모면하여 그 후부터 3정자 나무에 제단을 쌓고 매년 정초에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내게 되었다. 3정자 중 동북 양 정자는 퇴락하고 서정西亭만 남아있다. 마을에서는 이 정자를 휴서정(休鋤亭)이라 하는데 농사짓다가 휴식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이다.
마을의 당산제는 일제강점기 전반까지도 도제(都祭)라고 했으나 일제말기에 많은 사람이 모여 도제에 방해가 되는 것을 막기위해 이름을 당산제로 바꾸었다고 한다. 장록의 당산제는 10개의 당산 가운데 처음에는 중앙 동·북·서 정자 등 4곳에 모셨으나 현재는 휴서정 옆에 있는 수령 300년 된 느티나무 할머니당산(장록동 364-2)을 포함하여 3곳에서만 지냈다.
할머니당산나무는 현재 광산구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고는 15m, 둘레 4.4m인데 주변은 시멘트와 돌을 결합한 50cm 정도의 단을 쌓았다. 제일이 되기 3일전부터 당산주변 3군데 금줄을 치고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며 제일 3일 전부터 왼새끼를 꼬아 미리 당산나무에 줄을 감아놓는다. 제주는 3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으며 제를 지내는 시간은 12시 정각에 지낸다.
마을에서 가장 많이 제주로 참여했던 사람은 고인이 된 박토수씨가 오랫동안 제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당산제에 필요한 경비는 마을에서 나락을 몇 되씩 거둬 이를 말린 후 쌀로 빻아 가지고 제를 지낸다. 당산주변과 마을 골목골목을 청소하고 온 동네사람들이 목욕을하거나 혹은 머리를 감는다. 한편 각 가정에서는 떡을 하고 공을 들였다.
최근 몇 년 전부터 당산제를 지낼 때 관할구청에서 참석하여 찬조금을 지원하고 있다. 풍우로 꺾어진 당산나무가지는 절대 개인집으로 가지고 가지 않고 나무주변에 모아놓았다가 제를 지내는 시간동안 추위를 이기기 위해 불을 피우는데 사용하였다. 이는 개인이 당산나무 가지를 가져가 집에서 사용할 경우 우환이 찾아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장록마을은 각 골목마다 문화콘텐츠화 할 수 있는 원형문화자산이 다수 산재하고 있는데 특히 조선시대 교통통신과 당산제 관련 이야기들이 많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관할 사호동과 본량동 관할 선동, 지산동 경계에 있는 용진산(351m)은 장성에서 남쪽으로 내려선 능선이 본량에서 솟아 이루어진 산이다. 이름 그대로 들녘에서는 드물게 보는 겹겹으로 포개져 있는 높은 산으로 산 정상에 있는 뾰쪽한 산봉우리가 나란히 2개가 솟아있는데 석봉과 토봉이라고 부른다. 봉우리가 우뚝 뾰쪽 솟아 '솟돌뫼'를 한자로 표기하면 용진산(聳珍山)이 된다.
16세기 하서 김인후(1510∼1560)는 장성황룡에서 용진산을 바라보며 기이한 봉우리를 두고 읊기를 “실室이 바로 쌍첨雙尖의 북쪽이라서/아침저녁 빼어난 빛을 보는구나. 서쪽에서 바라보면 더 기특하니 /땅 형세 기운 것이 되려 귀엽네.” 라고 하면서 「면앙정 30영」 중 제 1영에 놓았다. 두 봉우리 사이 고개는 배가 넘어간다고 '배넘어재'라 부른다.
역사적으로 이곳 용진산에는 옛 상원사란 절이 있었다. 그 상원사지에 따르면 나주 회진 거평부옥에서 3년간 귀양살이를 왔던 삼봉 정도전(1342∼1398)이 틈 날때 마다 이곳을 찾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17세기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제주도로 귀양 갈 때 이곳 용진산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는 구전도 전해지고 있다. 1895년 동학농민전쟁 당시에는 관군과 농민군이 싸운 전쟁터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말의 명유로 호남의병들을 길러내 의병의 정신적 지주였던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1851~1931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시작詩作과 독서로 소일하였던 용진정사가 있다. 또한 한말의병장 이기손장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이곳 용진산에서 왜병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던 곳이다. 오상열 장군도 이곳에서 1908년 12월 23일 적탄에 맞아 순국하였으며 용진산은 건너편 어등산과 같이 한말의병과 왜군이 치열하게 싸운 격전지였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공비토벌의 중심지였으며 용진산 주변의 수많은 음택 명당터는 지금도 광주 인근 부호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기도 하다. 용진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황룡강이 흐르고, 임곡동과 마주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어등산과 마주보고있는데 용진산 자락 아래 황룡강을 가까이 끼고서 사호(沙湖)마을이 있다. 사호마을은 속칭「세우개」라고도 부르며 마을 앞에 넓고 깊은 황룡강이 흘러 마치 호수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마을뒤편은 광주시민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불행하게도 1989년 7월 25일 폭우로 산사태가 일어나 마을 대부분이 매몰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1600년경 이천서씨 서이영徐以泳이 나주봉황에서 이곳으로 이주해와 터를 잡았으며 그 후 평택임씨, 전주이씨, 남양홍씨 등이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서이영이 들어온 시기와 비슷한 수령 500년을 자랑하는 느티나무 보호수가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정월 대보름날에는 주민들이 이곳에 당산제를 지내고 치성을 다하여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빌었다. 당산나무 옆에는 주민들의 휴식공간인 정면 2칸 측면 2칸의 양철지붕으로 된 모정이 있다.
모정 옆에는 주민들이 세운 해광(海狂) 송제민(宋齋民,1549∼1602)의 10세손인 청암 송재옥 공적비가 있다. 송재옥(1917∼1980)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상경하여 자수성가한 후 고향인 이곳의 청소년들 육성에 많은 기금을 출연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공적비를 건립(1984)하였다. 현재의 사호마을은 도시민들이 이주하여 과거의 토박이 이천 서씨들은 몇 가구 없고 다양한 성씨들이 들어와 30여 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여름철이면 마을을 통과하는 실개천의 깨끗한 물과 사방에 울창하게 우거진 수목이 마을 전체를 시원하게 해주며 실개천을 따라 옛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꾸불꾸불하면서 고즈넉하고 정겨운 골목길을 걸을 수 있다. 골목길 끝자락에 다다르면 용진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시민들의 발길이 잦은 편이다. 이곳에서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사호동 맛 집으로 알려진 자연산 민물 매운탕도 일품이다.
마을우측에서 황룡강변을 따라가다가 우측 3부 능선쯤에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마애불이 있다.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 우측에는 죽산박씨 후손 박동춘의 글씨로 문중의 흔적을 기록한 내용이 보인다. 마애불을 감상하고 나서 다시 용진산을 오르면 8부 능선쯤의 가파른 바위위에 학에 올라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육각형 정자인 박경처사의 가학정駕鶴亭이 우뚝 서있다. 정자 우측에는 정자를 세울때 함께 지은 성성재(惺惺齋)가 있었으나 지금은 작은 암자로 보살의 불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정자에 오르는 길목에는 층암절벽이 솟아있어 소금강을 방불케하고 산림이 울창하여 학덕이 높은 선비가 시서를 벗 삼고 소일하기에는 더없이 호적한 곳이다. 가학정 주인 박경(朴璟, 1559∼1616)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때 너부실마을의 칠송정 주인이자 기대승의 장자인 함재 기효증(奇孝曾, 1550∼1616)의 종사관이 되어 의곡(義穀)을 모아 운반하였으며 천성적으로 의리에 강한 사람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벼슬도 없이 백의종군하며 선조임금을 모시고 피난 북행하는 공훈을 세웠다. 선조임금은 그 공을 인정하여 박경이 벼슬길에 나서기를 소명召命했지만 그가 했던 일은 마음에서 우러난 충심에서 비롯됐기에 이를 사양하고 여생을 초야에 묻혀 충성할 것을 아뢰니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죽림천사(竹林處士)의 시호와 궤장을 하사하였다. 1601년 가을에 나랏돈으로 용진산 북쪽 산허리 협곡과 물이 있는 호적한 곳에 가학정(駕鶴亭)을 건립하게 하였는데 가학정은 박경이 자연과 대화하는 통로의 장소였다.
마을우측의 산자락을 따라서 걷다보면 일제강점기 일인들이 금을 채굴했던 국내 유수의 금광동굴이 있다. 1920년대 광주의 재벌이었던 최용주가 금광을 개발하면서 용진광산의 역사는 시작된다. 이곳에서 금맥이 터지면서 한때 1 천여 명의 광부들이 이 일대에 몰려들었으며 때 맞춰서 임곡의 열차역 앞에는 오일장(임곡장)이 서는 등 조용한 농촌지역이 황금의 물결에 영향을 받아 술렁거렸다. 금광광부들은 황룡강변에 설치된 물레방앗간 옆에 아름다운 여인네가 경영하는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보리타작이 한창인 6월에는 외딴 집에서 3일 밤을새며 큰 도박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금광동굴은 몇 년 전까지는 방치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자연발효 새우젖 저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사호마을에 전해내려오는 전설 중「며느리 바위」전설이 있다. 먼 옛날 이곳에 선녀가 내려와 베를 짯다는 베틀굴이 있고 그 가까이에 며느리바위 하나가 있다. 또한 마을 앞에 ‘장자못’이라는 유지溜池가 있었으나 경지정리로 사라졌다. 며느리바위 전설의 내용은 그 옛날 이 마을에 장씨 성을 가진 부자 한 사람이 살았다. 어느 날 도승이 찾아와 시주를 구하자 장씨는 시주는커녕 그 배낭 속에 쇠똥을 담아주었다. 이 광경을 본 며느리가 민망해서 시아버지 몰래 도승에게 쌀을 담아주었다. 도승은 그 며느리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고 도승을 따르라고 일렀다. 그런데 며느리는 따라가다가 그 동안의 정리를 못잊어 도중에 뒤돌아보고 말았다. 그러자 자기가 살았던 집은 못으로 변해버렸고 그 며느리는 그 자리에 바위로 굳어져서 며느리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어 듣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처럼 사호마을은 용진산이란 천혜의 자연환경과 다양하고 유서깊은 역사적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광주에서 장성을 잇는 고속국도의 개통으로 접근성도 좋으며 교통도 편리한 편이어서 시내버스 임곡 90번의 종점이기도 하다.
용산과 입석마을에는 아직도 2천년 전 청동기시대에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무덤 양식인 고인돌들과 그들의 거석숭배 대상이었던 선돌들이 집안과 마을어귀 여기저기 남아있어 산수동마을의 역사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789년에 간행된 「호구총서」에 의하면 조선후기 이곳은 나주 여황면의 지역으로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창촌(倉村)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06년 칙령제49호에 의해 나주군 적량, 여황, 장본면이 함평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함평군 여황면의 용산리, 용수리, 용계리, 입석리, 감동리와 오산면 황계 일부를 합해 나주군 본량면 산수리라고 하였다. 또한 용산, 용수, 용강 세 마을을 합하여 나주의 ‘북창’이라고 불렀으나 일제하에 용진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용산이라 부른 때도 있었다. 그 후 입석 감동리와 오산면의 황계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고 용산과 용수의 이름을 따서 산수리라 하여 나주군 본량면에 편입 되었다가 1949년 광산군으로 편입되었다. 1988년 이 지역에 광산구 본량출장소가 개설되면서 산수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입석마을은 본량지역의 동남쪽들 외딴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뒤편 황룡강에는 벌써 겨울 철새들이 한두 마리씩 먹이를 찾고 있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들 가운데 선돌이 세워져 마을 이름을 일제하에 한자식 이름으로 고쳐 ‘입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을에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조선중기 문화부와 승정원 소속의 정7품의 주서 벼슬을 지낸 나주오씨 오학선이 아들을 데리고 이주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선돌은 마을안 오형렬씨 집 마당에 있으며 1989년 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한때 주민들이 입석을 어떻게 세웠을까 궁금하여 1.8m 정도를 파보았으나 뿌리 끝이 보이지 않고 물이 콸콸 솟아나와 덮어 버렸다고 한다. 입석에 대한 주민들의 치성은 명절 때마다 음식을 차려놓고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며 정월대보름에는 주민들이 줄다리기를 한 후 줄을 감았었다. 입석제의 시기는 마을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거나 큰 일이 있으면 입석제를 지냈다.
마을 우측을 돌아가면 마을을 위해 1962년 봄에 건립한「영춘정」이란 마을정자가 있다. 상량문에는「歲在甲午三月二十日 安礎入柱越二日 庚戌時上樑」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정자 옆에는 1833년(崇禎紀元後四癸巳孟眞日)에 세워진 민후치 목사 불망비가 있어 산수동 마을과 나주목사 관련 이야기들이 있을 것 같다. 마을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후백제의 진훤과 왕건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왕건이 남평들에서 싸우고 난 후 이곳에서 쉬어갔다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고을의 목사가 임무교대를 하려면 이 마을에 와서 상견례를 한 후 교대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구전이 전해오고 있다. 그래서 이 마을의 옛 이름이「원촌」,「말똥배미」라고 한다.
감동마을은 본량 지역 동쪽 넓은 들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 주민들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18세기초 나주정씨인 정준위가 들이 넓고 물이 풍부한 곳을 찾아 이웃 석계마을에서 이주해와 정착하게되어 마을을 이루게되었다. 마을 이름은 마을에 유자열매 처럼 자갈이 깔려있어서 처음에는 감동柑洞으로 부르다가 근래에 샘물에서 단맛이 난다고 하여 감동甘洞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들 가운데 있는 야촌임에도 불구하고 맑고 시원한 석간수 우물물이 어떠한 가뭄에도 끊이지않고 솟아나 이 우물물 때문에 옛부터 병자가 적었다는 구전이 전해오고 있다.
용산마을은 본량의 동북쪽 용진산 남쪽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형성은 인동장씨 장원린張元鱗이 나주에서 옮겨와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앞에 있는 정자나무는 이때 심었다고 하여 이 노거수를「장정자」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청동기 시대에 조성된 고인돌이 김준태씨 밭에 3기가 분포하여 마을의 오랜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나주의 세곡을 보관하였던 이곳은 광주의 마륵동에 서창이 있는 것처럼 조선후기 나주목의 북쪽에 국가세곡을 보관하는 창고였다. 이 창고는 1875년부터 1910년까지 세곡을 저장하는 창고였으나 한일합방 이후 한국흥업주식회사(1906년 자본금 일백만원으로 창립), 한국척식주식회사(1908년 자본금 일백만원으로 창립)에서 농지를 헐값으로 찬탈하면서 농지세, 수리세 등을 현물로 받아 저장하기도 하였다. 당시 창고를 관리하던 자들은 선량한 농민들에게 강압적이고 무리한 언행으로 일관해 대항시에는 얻어맞기도하여 그 마을을 기피하는 현상이 뚜렷하였다.
북창의 악명은 해방이후에도 남아 마을 가운데로 통행하는 임곡 삼도간의 국도를 도보로 다닐 때는 마을뒤로 우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1960년 마을청년회가 조직되어 마을의 악명을 해소하기 위해서 외지인들에게 무리한 행동을 삼가도록하고 친절하게하자고 자정을 결의하여 인심이 점차 회복되고 있는 가운데 본량동초등학교가 설립되어 교사들의 적극적인 홍보활동으로 모범마을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1999년 12월 마을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우려고 회의에 붙였는데 산수동과 북창이라는 마을이름을 놓고 검토한 결과 한동안 북창이라는 이름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3개 마을을 통합해서 부르는 이름이 산수동보다는 북창이 더 알기쉽고 이제는 건전한 마을로 인식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북창으로 표기한바 있다. 당시 이곳 북창에 저장된 세곡은 황룡강 수로를 통해 나주목으로 운반했었다. 이곳에서 생산된 미나리는 나라에 바치는 진상품이기도 하였다.
용수마을은 조선시대 나주의 북쪽에 있는 창고지라고 해서 북창이라고 불러오다가 일제시기에 마을주변에 제방이 축조되지않아 홍수가 나면 황룡강물이 범람하므로 용수라고 마을 이름을 변경하였다. 마을에 주민들이 본격적으로 살기시작한 것은 한말에 화순에 살던 의병장 창녕조씨가 의병활동 중 쫓기는 몸이되어 피신처를 찾아 이곳에 정착하여 개촌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마을이 세곡을 쌓아놓은 창고가 있는 지역인 만큼 각종 세금을 현물로 받아 보관하고 광산에서 제일가는 부자들이 대를 이어왔던 까닭에 한때는 광산 경제의 선두주자 역할을 했다. 이 마을 출신 중에 박남수란 사람은 1920년대 용진산 금광개발을 임대로 위임받아 금을 캐기 위해 옆집에 살고 있던 5촌 지간의 박판길씨와 전담해서 금을 캤었다. 북창뒤 부수동 옆으로 흐르는 개천의 수량이 많아 대보 건너 황룡강변에 물레방아가 설치되어 매일 방아찧는 소리가 요란했고 그 옆에는 아름다운 여인네가 주막집을 운영하면서 금광에서 금을 캐던 광부들을 불러 모으기도 하였다.
마을 북쪽에 우뚝 솟아있는 용진산에서는 가뭄이 심하면 이곳 봉우리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이때 임곡 사람들은 석봉에서 지내고 본량 사람들은 토봉에서 지냈다. 여성들은 부정탄다고 못 오게 했으며 경비는 집집마다 추렴을 해서 충당하였다. 제주는 아침부터 찬물에 목욕을 하고 몸을 정갈하게 관리한다. 제를 지내고 난 후 산 주위의 생솔가지를 모아 불을 놓으면 시커먼 연기가 하늘높이 올라가 검은 비구름이 몰려와 장대같은 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그래도 비가 안 오면 마을뒷산의 묘를 파기도 하였다.
산수동마을 전반을 톱아보니 마을주변의 가을들판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추수의 계절인 만큼 풍요로운 모습은 볼 수 있으나 정작 한낮인데도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질 않아 도시 속의 농촌이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여느 농촌마을처럼 활기가 없어 보인다. 마을 입구 황룡강 제방에는 목장승 2기를 세워놓았는데 이 길이 황룡강 생태길 이어서 이곳 장승은 이정표 역할을 위해 세웠다고 보여진다. 황룡강 둔치의 갈대 잎과 용진산의 단풍잎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에 산수동마을의 풍요로웠던 옛 영화가 눈앞에 아른 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