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 이후, 공산계열이 북한의 실질적 정권을 장악하면서 미국이나 서구사회와의 연결채널로 인식되던 기독교는 탄압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했는데, 혜성교회 역시 유민들이 혜화동의 무너진 성곽 구석에 예배를 위해 모여 들면서 세워진 교회다. 1948년 8월 10일 혜화동 6번지 조상만 성도의 가정에서 설립예배를 드렸으며, 1949년 3월, 예배당을 건축했다. 그때로부터 2019년 현재까지 70년이 넘게 원형을 간직한 채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원형을 지킬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데, 교회를 세운 터가 하필이면 일제 강점기에 헐린 서울 성곽터였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짚어보자면 서울 성곽길 북대문 구간, 즉 혜화문에서 시작해 와룡공원을 걸친 구간에 해당하는 이 성곽은 문화재이기 때문에 교회 부지를 임의로 확장하거나 증축할 수 없다. 교회관계자 입장에서는 교인의 수용과 주차, 편의 시설을 충분히 확보 할 수 없어 불편할 수 있겠으나, 덕분에 70년이란 긴 세월동안 원형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필자가 1984년 가을, 초등학생 때 처음 이 교회에 발을 들인 이후 40여 년 동안 공사는 딱 세 번 있었다. 교회 마당에 아스팔트가 깔리고, 교회첨탑 교체 공사를 한번 했으며, 2000년대 중반 내부 리모델링을 한 게 전부다. 서울 사대문 안에 이런 뷰와 분위기를 가진 교회가 과연 있기나 할까? 오른편으로는 혜화동, 명륜동이 왼편으로는 성북동, 삼선동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개발제한구역으로 시야를 막는 고층건물도 없거니와 교회 위치가 언덕 제일 꼭대기라 전망이 훤하게 보인다. 교육관 2층 예배실에서 그날 나온 따끈한 주보로 비행기를 접어 날려보라. 바람만 잘 타면 혜화여고(지금은 혜화초등학교)까지 문제없이 날아갈 것이다. 올라오려면 숨이 좀 많이 차오르지만, 어차피 성곽길 북대문 코스에 있으니 성곽길 산책으로 생각하고 오면 된다. 날짜와 시간이 잘 맞으면 교회 1층 카페에서 라바짜 커피를 2000원에 즐길 수도 있다.
혜성교회는 영화에도 몇 번 나왔다. 백재호 감독의 「그들이 죽었다(2015)」에서 주인공 집 옥상장면마다 배경으로 걸리는 파란 첨탑의 교회,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2008)」에서 연쇄살인마 하정우가 다녔던 교회가 이곳이다. 영화에 나온 예수상은 미술소품이지만, 교회 외부와 목회실은 혜성교회에서 촬영했다.
혜성교회로 가는 길은 크게 혜화동로타리, 삼선교, 성북동에서 가는 3가지이다. 필자가 주로 다녔던 길은 혜화동로타리에서 올라가는 큰사발 루트인데, 중학교 3학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새벽송 돌고난 뒤, 로터피 편의점에서 우육탕큰사발에 물을 받아 나온 다음, 3분 뒤, 혜화슈퍼를 끼고 돌 즈음 면발을 먹기 시작해서, 그렇게 사발면의 온기로 몸을 녹이며 올라오다가 마지막 오르막 전에 국물을 마저 마신 뒤, 다 먹은 용기는 교회 휴지통에 버렸으니까, 대략 15분이 소요된다.
필자가 강추하는 루트는, 지하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혜화문에서 시작하는 루트로, 서울 성곽길 북대문 코스와 일치한다. 성벽을 따라 지어진 서울시공관 담을 따라 돌아가면, 한편으로는 성북동 일대가 펼쳐지고, 5분정도 더 걸어가면, 공관과 마찬가지로 무너진 성벽 위로 세워진 교회가 모습을 나타낸다. 세 번째 루트인 성북동에서 오는 길 역시 북대문코스의 연장인데,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좁은 길을 따라 가다보면, 경신고등학교 후문이 나오고, 쭈욱 직진하면 3분도 안되는 거리에 위치한다. 세 길 모두 소요되는 시간은 엇비슷하다.
교회에 대해 특이한 몇가지 사항을 적어보자면, 교육관 옥상에 풋살경기장을 구비해 놓았고, 교회후문 주차장 입구 옆에는 아이들을 위한 트램블링이 설치되어 있어서 보호자만 있다면 언제든지 즐길 수 있다. 그리고 1층 카페 안에는 추억의 게임기도 있는데, 주일학교 예배 후, 성인예배를 드리는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주 이용객이다.
수년 전부터, 늘어난 교인과 민원, 주차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경신고등학교 안에 언더우드기념관을 건축 중이다. 평일에는 학교 강당, 체육관으로, 주말에는 집회장소로 사용될 예정으로 2020년에 완공된다. 현재 예배장소로 사용되는 교회는 2020년 이후 어떤 용도로 사용될지는 모르겠다. 교회가 결정할 일이지만, 70여년의 세월과 앞으로의 시간들이 연륜이 한결 깊어지길 바란다. 성벽과 함께.
여행의 설렘과 추억만 가득할 것 같은 제주도에도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함께 해온 흔적들이 꽤나 많이 남아있다. 그래서 그 흔적들을 지나고 거닐 때마다 제주도민들의 마음 한 켠이 아릿해져 오는데 그 중에서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위치한 남제주 강병대교회는 전쟁의 포성 속에서 1952년 5월에 준공된 교회이다. 육군 제1훈련소 명칭이 강병대(强兵臺)로 개정되면서 교회 이름도 강병대교회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1965년 공군 30단 308부대로 편입되고 기지교회로 발족하였고 이후 공군부대와 해병부대 장병들과 가족들의 예배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1977년 지붕과 천장 탑판을 교체하였으며 1995년 교회로 사용하기 위해 내부를 전면적으로 보수하였다.
역사적 가치, 특히 군사적 또는 국방기념물로서의 가치가 높은 강병대교회는 한국 전쟁 관련 건축물 중 원형이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로 2002년 5월 31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고 지금까지 예배를 드리고 있다. 강병대교회는 국방부에서 관리 운영하는 교회로 우리나라 최남단에 있는 군종교회이자 가장 오래된 군종교회라고 한다. 전쟁터로 나가야만 하는 육군 장병들이 고된 훈련과 참혹한 현실 속에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기 위해 머물렀던 장소로 군인들의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강병대교회의 외관은 제주도의 현무암을 사용해 벽체를 쌓은 것이 특징이고 목조 트러스트 위에 함석지붕을 씌워 건축기술자의 참여도 없이 설계되고 건축되었다고 한다. 전쟁 당시의 상황에 급박하게 지어져서일까, 매우 제주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길고 긴 건물은 독특한 느낌을 주고, 매우 단순해보이지만 강하고 단단하게 느껴져서 군대 특유의 강인함을 물씬 자아낸다. 지금은 교회 내에 역사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 당시의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현재의 제주를 있게 한 근대문화유산인 강병대교회는 사실 일반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교회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이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에서 어린 훈련병들이 고되게 훈련받으며 종교적 위로를 받고 강하게 무장되었던 곳이라고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또 피난 온 신자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렸던 기도의 터전이기도 했다. 전쟁의 공포를 종교의 힘으로 이겨내며 이런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역사의 순간들을 이겨냈던 사람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제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강병대교회를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다. 더불어 제주가 얼마나 많은 슬픔이 쌓여있는 섬인지, 처절했던 생존의 섬이자 평범한 민초들이 겪어야했던 역사적 아픔이 많았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강병대교회는 종교기관일 뿐 아니라 당장의 삶이 막막하고 캄캄했던 모슬포 지역의 교육기관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1966년부터 ‘강병대교회 부설 신우고등공민학교’로 신입생을 받기 시작하여 1981년 폐교될 때까지 13회에 걸쳐 2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지금은 교육기관은 아니지만 인근 공군, 해방대 부대 장병과 가족들이 예배를 드리는 공간으로 남아있다.
역사를 알고 보면 푸른 잔디 위에 현무암 건물, 하얀 창과 파란 지붕의 강병대교회는 수십 년 동안이나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관람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커다랗게 교회 안내문에 적혀있다. 침략자들에 의해 시달린 제주근대문화유산이라는 역사와 아름다운 교회와 자연의 풍경이 대비되어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지만 이 교회가 오래오래 보존되어 제주에 사는 후대들에게 제주를 지킨 이들의 역사가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억울함과 울분을 안고서 싸웠던 시절, 우리나라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운동과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나라를 위해 싸우던 과거는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깊게 새겨져 있으며 앞으로도 쭉 이어질 이야기이다. 지금부터 소개할 장소는 1919년 당시 가장 크고 넓은 규모의 만세 봉기가 일어났던 뜻깊은 땅이며, 그 역사적인 중심지중 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영해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나와 송천교를 나아가면 저 멀리서부터 높게 솟아있는 철탑위의 십자가가 선연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동해안의 주요 교통로인 옛 7번 국도변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시골교회. 그곳이 바로 ‘영덕 송천예배당’이 있는 송천교회이다.
1953년 미국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송천예배당은 요즘 시대에는 보기 드문 목조 건물의 형태를 하고 있다. 동서로 긴 사각형의 평면과 정면 출입구 위에는 박공지붕의 포치(Porch)가 솟아있고, 지붕 아래에는 목구조를 응용한 십자가 형태가 방문객이 찾는 송천예배당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2016년에 들어서서 외벽에 목판을 덧붙이는 등 새로 수리를 하여 옛 모습과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오랜 건물이다.
마당에 들어서면 예배당보다도 더 오래되었을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소나무 몇 그루와 함께 예배당의 출입구 바로 앞에 서 있는 종탑이 방문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높은 위치에 매달려 어두운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종과 바로 그 아래에 사람의 손이 닿을 정도로 낮은 위치에 남아있는 송천예배당의 옛 종은 붉게 녹이 슬어있어 그간 이곳에 머무르며 일 해온 세월과 연륜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영덕 송천예배당은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아픔 속에서 태어난 공동체였다. 해안가를 따라서 길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이어지고 있어 깨끗하고 맑은 물이 흐르는 동네 이름을 따 교회의 이름을 송천이라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당시 3월 1일에 서울에서 일어나게 되었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내려왔던 낙평교회의 전도사인 김세영 조사는 구세군낙평영문 권태영 담임사관에게 거사를 일으킬 것을 제안하지만, 일본 경찰의 검속으로 인하여 김세영 조사는 체포되고 만다. 대신 짐을 지게 된 권태원 사관이 도움을 청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송천교회의 정규하 장로였다.
그는 권태원 사관을 만난 후에 바로 교회로 돌아가 우리가 행할 봉기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90여명이라는 많은 수의 교인들이 다 같이 만세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그는 이웃 마을인 창수면의 사람들까지 봉기에 합류시킨다. 정규하 장로는 의거 장소와 일시를 정하는 데도 누구보다 주도적으로 임하였고, 3월 18일날 마침내 영해, 영덕 일대의 많은 기독교인들과 3000여명의 군중들이 함께 성내장터에 모여서 우렁찬 만세함성을 외친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이 땅의 자랑으로 유명한 ‘영해만세운동’이었다.
“작은 시골교회라고 함부로 얕볼 수 없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현재 송천교회를 담임하는 김영원 목사의 설명이다. 그 역사와 자긍심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아 영덕 송천예배당은 2006년 12월 4일에 근대문화재인 등록문화재 제288호로 지정된다. 문화재로서 송천예배당의 관리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고, 그에 대한 책임감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복음을 위해, 나라를 위해 애쓴 선배들의 유산이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자산”이라면서 이를 알리고 귀감으로 삼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마당에 우뚝 자리 잡은 낡은 종탑, 안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아늑한 예배당의 분위기는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차분하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해준다. 100주년을 맞아 건립한 기념비와 예배당 책장을 가득 채운 각종 서적들은 영해만세운동을 비롯해 지난 백 십여 년간 이어져온 송천교회의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채로 줄곧 이어져 오고 있다. 이 땅에 얽힌 오랜 역사와 더불어 누구보다 뜻깊은 이야기를 지닌 영덕 송천예배당, 그 곳에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꼭 한번 찾아가보자.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인 1950년 7월 미군 폭격기들이 강원도 철원읍[구 철원]을 무차별 공습했다. 강원도 철원읍은 38선 이북 지역으로 주요 관공서와 시설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공중에서 퍼부어진 폭탄으로 철원읍은 쑥대밭이 되었다. “동대문 밖 최고의 건축물” 소리를 듣던 철원 제일 교회도 벽체 일부 등을 남기고 폐허가 되었다. 당시 인민군은 미군이 교회는 폭격하지 않는다고 믿고 철원 제일 교회를 야전병원으로 쓰고 있었다고 한다.
철원 제일 교회는 1905년 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장로교회로 설립되었다. 2년 뒤인 1907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구역 협정에 따라 교회는 감리교단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사랑방에서 시작한 교회는 교인이 증가해 1920년 붉은 벽돌로 새 예배당을 지었다. 게다가 1920년 의료선교사 부부가 상주하고, 활발한 전도와 사회 활동을 통해 1930년대 들어 교인이 급증했다.
철원 제일 교회의 박연서 담임목사를 비롯한 교인들이 1919년 철원 지역의 3·1운동에 적극 앞장선 사실도 교회의 성장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박연서 목사는 3·1운동 직후 ‘철원애국단’이라는 비밀 청년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철원애국단’은 1920년 발각되어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박연서 목사는 아쉽게도 일제강점기 말에 친일인사로 변절했다.
1937년은 철원 제일 교회 30주년이 되는 해였다. 교인은 500명을 넘어섰다. 기존 예배당으론 감당하기 어려웠다. 1936년 창립 30주년을 앞두고 교회 신축이 결정되었다. 설계를 맡은 인물은 일본 근대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윌리엄 보리스(William Vories)였다. 평신도 선교사였던 보리스는 일본의 근대 건축을 이끌면서, 조선의 이화 여자전문학교 파이퍼 홀, 태화기독교사회관 등을 설계한 건축가로 명성이 높았다.
보리스가 설계한 철원 제일 교회 새 예배당은 지하 1층, 지상 3층[높이 16m]에 대리석과 화강암 그리고 철원 지역에 흔한 ‘멍돌’[현무암의 일종]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었다. 내벽은 화산암, 외벽은 화강암으로 쌓고, 정면의 창은 아름답고 화려하게 대리석으로 장식하도록 했다. 시공은 보리스의 의도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무너지기 전 사진만 봐도 감탄이 나온다. “동대문 밖 최고의 건축물”이라는 찬사는 과장이 아니었을 듯하다.
철원은 경원선과 금강산선 철로가 분기하는 중요 길목이었다. 수많은 길손과 관광객이 들르는 교통 요충지요, 자타가 공인하는 철원의 중심 교회 새 성전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철원 제일 교회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1939년 부임한 강종근 담임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가 ‘사상범 예비검속’에 걸려 구속되었고, 1942년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해방 후에도 철원 제일 교회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38선 이북 지역이었기에 교회와 공산주의의 마찰이 심했다. 서울과 연계된 ‘신한 애국청년단’ 사건으로 철원 제일 교회 목회자와 신도들이 다수 희생되었다고 한다. 철원 제일 교회와 400m 거리에 철원 노동당사가 건립되었던 시절이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철원 노동당사와 철원 제일 교회는 오랫동안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민간인 출입통제선 이북 지역에 속했다. 1990년대 들어 통제가 다소 완화되면서, 찾아가 볼 수는 있게 되었으나 잔해 속에서 예전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철원 제일 교회의 아름다웠던 모습은 2000년대 들어 사진이 발굴되면서 알려졌다. 나아가 철원 제일 교회의 지교회였던 철원 장흥교회 이금성 장로가 일본 오사카예술대학 박물관에서 설계자 보리스가 남긴 설계도면을 찾아냈다.
평화의 시대가 다시 열리면 철원은 금강산과 원산으로 가는 중요 길목이 될 가능성이 크다. 철원 제일 교회의 폐허는 지난날의 수난을 묵묵히 되짚으며 평화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철원 제일 교회 유허는 2002년 ‘철원 감리교회’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문헌 자료 고증을 통해 2015년 ‘구 철원 제일 교회’로 정정됐다.
침례교 선교는 캐나다 출신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선교사가 1889년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펜윅 선교사가 다른 교단과는 달리 본토 선교 본부의 지원 없이 독립적으로 활동을 한 침례교는 1907년 ‘대한기독교회’가 결성됨으로써 본격적인 전도에 나섰다.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행곡 교회 창립이 1908년이므로, 울진은 침례교가 일찍 들어온 지역에 해당한다. 행곡 교회는 경상북도 울진 지역에 처음 들어선 개신교회이자, 전국 침례교회 가운데 여섯 번째로 세워진 교회다.
한옥으로 지어진 행곡 교회 예배당이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교회 창립 10년쯤 지난 1917년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교회 측은 오래된 교인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1934년경 한옥 예배당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전에도 예배당이 있었으나, 새로 지었을 것으로 본다. 한옥 행곡 교회 건축에 사용된 자재는 울진 읍성을 지키던 병사들의 숙소 건물 것이었다고 한다. 울진 읍성 병사 숙소는 조선 순조 임금 때 지어졌던 건물이었는데, 헐리게 되자 교인들이 우마차 등을 끌고 가 2시간 거리를 옮겨왔다고 한다. 한옥 교회는 정면 4칸, 측면 2칸 기와집으로 지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한옥 성당이나 교회는 대부분 한옥의 정면(가로)과 측면(세로)을 바꾸어 예배 공간을 조성하는 방식이지만, 행곡 교회 한옥 성당은 가로 정면이 길다. 대신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반대편 끝쪽으로 강대상이 설치된 형태였다. 천장은 다른 한옥 예배 공간처럼 연등천장(서까래가 그대로 노출되게 한 천장)이고, 중간에 기둥이나 벽은 없다. 연등 천장은 1970년대에 합판으로 마감해 초기의 모습과 달라졌다. 지붕 기와와 벽체도 1990년대 이후 일부 수리했다. 한옥 교회는 1983년 새 예배당이 신축되어 본당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한옥 교회의 전체적인 외관은 보존이 잘 된 편이어서, 2006년 등록문화재 제286호로 지정되었다.
침례교단에서는 행곡 교회를 “동해안의 예루살렘 교회”라고 부른다. 침례교 선교 초기에 창립된 교회이기도 하지만 순교자가 3명이나 배출된 곳이기 때문이다. 첫 순교자는 전치규(田穉珪) 목사다. 전치규 목사는 행곡리 출신의 한학자로서, 1910년 32세의 나이에 침례교인이 되었다. 6년 후인 1916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24년에는 교단의 대표자 격인 감목(監牧)을 맡아 행곡 교회에서 전국 교단 총회에 해당하는 ‘대화회’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동아기독교회’라 불리던 침례교는 일제에 비협조적이어서 탄압을 받았다. 1942년 신사참배 거부 등의 이유로 교단 대표들과 함께 투옥되었고, 1944년 함흥감옥에서 영양실조와 고문 후유증으로 숨을 거뒀다.
두 번째 순교자는 전병무(田炳武) 목사다. 전병무 목사 역시 행곡리 출신으로 한학에 밝았다고 한다. 1909년 신자가 되었고, 1942년 목회자가 아니었음에도 교단 대표들이 투옥될 때 같이 수용되었다가 1944년 출소해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 재건에 힘썼다. 침례교단은 1944년 일제에 의해 성결교, 구세군, 안식교와 함께 교단이 강제 해산된 상태였다. 전병무 목사는 해방 후인 1949년 목사 안수를 받았으나,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일대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빨치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26세 청년 남석천(南錫天) 성도도 전병무 목사와 함께 비운을 맞았다.
마을의 이름이자 교회의 명칭인 행곡(杏谷)은 원래 ‘쌀골’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근처 천량암이라는 바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쌀이 나와 ‘쌀골’이라 한다는 전설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문신인 임유후(任有後)가 들렀다가 냇가에 살구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고장이라 하여 살구골로 고쳐 부르게 했고, 한자로 살구나무를 뜻하는 행(杏)자를 써서 행곡이 되었다는 것이다.
행곡 교회에는 ‘지하 방공호’로 알려진 비밀 공간이 있다. 교회 바닥을 2m 깊이로 파서 만든 한 평이 채 안 되는 작은 공간이다. 내려가는 출입문을 눈에 띄지 않게 설치해 놓아 더 은밀해 보인다. 방공호라기보다는 개인 기도실처럼 보이지만, 여러 기록에서 ‘지하 방공호’라 소개하고 있어 그렇게 알려졌다. 총에 맞아 숨진 2명의 순교자를 떠올리면, 행곡 교회가 해방 후 혼란기에 겪은 수난과 관련이 있을 것도 같다. 행곡 교회는 일제강점기 혹은 해방 직후에 쓰던 강대상과 의자, 문짝, 핸드벨 등도 소장하고 있다. 등록문화재 제287호인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 용장 교회 역시 한옥 교회인데, 행곡 교회의 교세가 커지면서 설립하게 된 교회라고 한다.
대구광역시 내륙 지방인 군위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 계열의 교회가 들어선 해는 1920년이다. 윌리엄 헤슬롭(William Heslop) 선교사가 풍금을 팔아 헌금한 돈으로 교회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초대 교역자로 김병선 전도사를 파송했다.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은 1920년대 독자적인 조직을 갖추고, 성결교단이 되었다.
현재 군위유치원으로 쓰이는 군위성결교회 예배당은 1937년에 세워졌다. 원래 있던 교회는 1927년 지어졌고, 다시 10년 뒤 새 예배당을 지은 것이다. 교회 건물을 헐고 새로 짓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도 있었다. 손수 작업에 나섰던 이종익 목사와 집사(노성문 집사)가 철거 과정에서 순직했다. 교역자와 신도가 직접 철거 공사를 벌여야 했으니, 넉넉하지 못했던 형편을 짐작할 수 있다. 비극을 딛고 완공된 예배당은 정갈하다. 목조 단층에 맞배지붕인 예배당은 전실 1칸, 교회당 6칸인 7칸 건물이다. 남서향으로 자리 잡은 교회 정면의 출입구는 좌우 두 곳이다. 남녀 교인들은 들어가는 문이 달랐다. 예배 공간도 막을 쳐 남녀 신도석을 구분했다고 한다.
두 출입구는 돌출시켜 포치를 설치했다. 양 출입구 사이 정면의 한복판에는 첨두형 아치창이 설치돼 있다. 아치창을 자세히 보면 윗부분 창살은 십자가를 기본 형태로 하여 단순 소박하면서도 경건하게 디자인되었다. 정면 좌우 양 끝에 좁은 아치창을 대칭이 되도록 했다. 나무문이 달린 두 출입구, 중앙 아치창과 양 끝 좁은 아치창은 정중앙 위쪽에 붙인 6개의 마름모꼴 장식과 어울려 편안하면서도 정감 있는 예배당이라는 인상을 준다.
군위성결교회 예배당은 목조와 모르타르 구조에 콘크리트 바닥이다. 벽체를 쌓을 때는 대나무를 엮어 틀을 만들고 짚과 진흙을 섞어 채운 다음 외벽을 만들었다고 한다. 군위성결교회는 지방으로 개신교가 확장해 나가던 시기의 교회 건축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예배당이 지어지던 1937년은 기독교인도, 비교인도 힘들던 시절이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가 전시체제를 가동하며 식민지를 옥죄던 시기였다. 성결교단도 굴절을 감내하면서 교회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제는 급기야 1943년 5월 성결교회 교역자들을 대거 체포했다. 이어 9월에는 예배와 집회를 금지했다. 마침내 1943년 12월 성결교단에는 해산명령이 떨어졌다. 군위성결교회도 1944년 4월 교회 문을 닫아야 했다. 해방되고서야 군위성결교회에는 다시 찬송가 소리가 울려 퍼질 수 있었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군위성결교회는 1956년 신관을 지었고, 1974년에는 목사관, 1984년에는 전도사관, 1991년에는 교육관을 건립했다. 구 예배당은 유치원이 되었다. 유치원으로 바꾸면서 내부 구조는 변했으나 외형은 본디 모습을 살렸다. 구 군위성결교회 예배당은 2006년 등록문화재 제291호로 지정됐다.
공주 제일 교회 인근에는 제민천(濟民川)이라는 하천이 흐른다. 제민은 ‘백성을 구한다’라는 뜻이다. 공주 제일 교회는 개항기부터 3.1운동과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전후복구와 산업화에 이르는 역사를 제민천과 함께 흘러왔다.
충청남도 공주시 개신교의 역사는 공주 제일 교회로부터 시작된다.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인 맥 길(William B. McGill)이 이용주 전도사와 함께 1903년 공주 하리동 (현 충청남도 공주시 옥룡동)에서 첫 예배를 올렸다. 초가 2칸으로 시작된 교회는 1909년 ‘협산자 예배당’을 지었고, 1931년 자리를 옮겨 새로운 교회당을 준공했다. 당시 건립된 교회가 바로 등록문화재 제472호(2011년)로 지정된 공주 제일 교회 구 예배당이다. 공주 제일 교회 구 예배당은 현재 공주 제일 교회 기독교박물관으로 쓰인다.
신도들의 헌금으로 지어진 공주 제일 교회 구 예배당은 1941년 말 교회 문을 닫는 비운을 겪는다. 조선총독부가 적산(敵産)이라는 이유로 교회 폐쇄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해방을 맞아 다시 예배를 올리게 되었으나 1950년 8월 폭격을 맞아 반지하 등 일부만 남고 파괴되었다. 신도들은 파손 부분을 수리하여 교회를 복원하기로 했다.
1956년 보수 증축된 공주 제일 교회 구 예배당은 옛 모습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예전처럼 내부 공간을 나누지 않고 통합된 강당 형태로 했으며, 부서지지 않은 굴뚝을 측면에 우뚝 솟은 그대로 두었다. 반지하 석조 부분도 원모습을 유지했다. ‘1930년’이라 새겨진, 애초 건립 당시의 모서리 돌도 후면부에 배치했다. 정면 윗부분에는 고대의 성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벽돌을 쌓았다. 서양의 성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당한 역사를 상징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그러나 원래 정면 왼쪽에 있던 종탑은 정면 가운데로 옮겼다.
1979년에 다시 한번 증축이 이루어졌다. 정면 종탑 부분 아래로 포치를 설치해 예배당 입구 부분이 새롭게 바뀌었다. 포치의 측면에는 세련된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만들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이남규 작가(1931~1993)의 초기 작품으로서 삼위일체 신앙을 형상화한 것이다. 1950년대 개축을 통해 과거를 살리면서 새로운 의미를 더하는 교회 건축이 이루어졌다면, 1970년대 말 증축은 아름다움을 더해 예배당의 품격을 높였다. 공주 제일 교회 구 예배당은 역사의 고비마다 새로운 마디를 더해, 건축사적으로도 교회사적으로도 의미 깊은 장소라는 평가를 받는다.
공주 제일 교회는 유관순 열사의 연고 교회이기도 하다. 교회 초기 선교사였던 사애리사[미국 이름 Mrs. Alice H Sharp]가 1913년 충청남도 천안 지방 선교여행에서 12세의 유관순을 데려와 수양딸로 삼았고, 서울 이화학당으로 보내기 전까지 영명 학교에서 공부시켰다. 공주 제일 교회는 1919년 충청도 3.1만세운동의 중심지였다. 독립선언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신홍식 목사가 훗날 공주 제일 교회 9대 목사로 부임하기도 했다.
서두에 언급한 ‘협산자 예배당’은 공주 제일 교회의 옛 이름으로서, ‘우산을 옆구리에 낀 사람의 예배당’이라는 뜻이다. 1900년대 중반 새로운 예배당을 짓고 싶었으나 자금이 부족했던 신도들이 모여 기도를 올리는 자리에 우산을 낀 사람이 나타나 거액의 헌금을 했다고 한다. 희사자의 이름을 따 교회명을 짓는 관례에 따르려 했으나, 굳이 익명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산자 예배당’이라고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미국 남장로회의 호남 선교는 1892년 일단의 선교사가 인천항에 발을 디딤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미 북장로회와 감리교단 소속 선교사들이 1880년대에 한반도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남장로회는 호남을 집중 선교 지역으로 선택했다.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전라북도 전주를 시작으로 전라북도 군산, 전라남도 목포, 광주에 이어 1910년 전라남도 순천에도 선교기지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미 남장로회 순천선교부는 1913년부터 활동 공간을 마련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아기 무덤이 널린 버려진 땅[현재 매곡동 순천선교부 거리]과 초가집 몇 채를 사들여 교회를 세우고, 학교와 병원을 건축했으며, 선교사들이 거주할 집을 지었다.
순천선교부가 계획했던 건물을 얼추 완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시점은 1916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호남 지역의 각 선교부와 순천을 오가며 활동했던 선교사는 대략 70명이 넘었다. 여기에 병원에서 진료를 하는 외국인 의사와 간호사, 학교의 교사까지 하면 순천 선교부와 관계된 외국인은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교사들 가운데는 기혼자도 적지 않았고, 자녀도 있었다. 한국에 와서 결혼한 선교사들도 적지 않았다.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 · 1891~1960, 한국 이름 인돈)은 21세 때 한국에 선교사로 왔다. 역시 선교사였던 유진 벨(Eugene Bell · 1868~1925, 한국 이름 배유지)의 딸 샬롯 벨(Charlotte Bell · 1899~1974)과 결혼하여 아들 휴 린튼(1926~1984 · 인휴)을 군산에서 낳았다. 휴 린턴의 세 아들 스티븐(인세반), 제임스(인야곱), 존(인요한) 또한 호남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스티븐 린튼은 2018년 현재 유진 벨 재단의 이사장이다. 윌리엄 린튼 만이 아니라 70여 명의 순천선교부 선교사들은 한국 이름을 짓고, 일제강점기 식민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갔다. 이눌서[Reynolds], 변요한[Preston], 고라복[Coit], 서로득[Swineheart], 구례인[Crane], 보이열[Boyer], 두애란[Dupuy], 오기원[Owen]……. 한국인이 미국 이름을 부러 지어 가지는 요즘 세태와 같은 듯 다르다.
구 순천선교부 외국인 어린이학교는 선교사 자녀의 교육을 위해 지어졌다. 선교사들은 다른 호남 지역 선교부로 옮겨 가 일을 하기도 했으므로, 순천의 학교는 자녀들의 교육에 중요한 장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회색 벽돌을 쌓아 건립된 학교는 정교한 벽돌쌓기가 돋보이는 건물이다. 석조로 건축된 주변 선교사 사택과는 대비된다. 선교사의 자녀들은 외국인 어린이학교에서 공부하고 사귀며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선교의 땅에서 자녀를 잃은 선교사들도 있다. 고라복 선교사의 경우 1908년 결혼해 1909년생 아들과 1911년생 딸을 두었으나, 순천으로 온 지 1주일 만에 두 자녀를 이질로 모두 잃었다. 참척[慘慽 · 자손이 먼저 죽는 일.]을 겪고서도 고라복 선교사는 순천 매산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힘과 정성을 쏟았다. 전라남도 순천시 의료원로터리에서 순천시 기독교역사박물관까지 약 1㎞는 순천선교부 거리라 불린다. 거리에는 순천 매산중학교 매산관(등록문화재 제 123호)를 비롯해 5점의 등록문화재와 10여 개의 순천선교부 관련 유적이 있고, 7곳의 터가 전해진다. 외국인 어린이학교도 2004년 등록문화재 제 124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은 산골이다. 봉화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법전면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줄기 사이에 파묻힌 오지에 해당한다. 청량산 자락인 법전면 척곡리 언덕에 1907년 교회가 들어섰다. 선교사가 세운 교회도 아니고, 기독교 단체가 설립한 교회도 아니다. 대한제국 탁지부(오늘날의 기획재정부)의 관리였던 김종숙(金鐘叔, 1872~1956)이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관직을 내던지고 처가의 고향으로 내려와 세운 교회다. 김종숙은 서울에서 관료 생활을 할 당시 언더우드 선교사를 알게 되었고, 기독교도가 되었다. 교회 설립 당시 김종숙은 평신도에 불과했다. 해발 360m인 경상북도 산골 오지에 대한제국 말기 평신도가 설립한 교회는 한국 개신교의 역사에서 특기해 둘만한 사례다. 김종숙은 1919년에야 장로가 되었고, 해방 후인 1946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김종숙과 함께 척곡교회를 설립한 김종욱도 나중에 목사가 되었다.
척곡교회는 설립 동기부터 독립운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김종숙의 처남 석태산은 봉화에서 활약한 의병장이었다. 석태산, 봉화 출신 독립투사 정용선, 김명림 등은 척곡교회를 중요한 회합장소이자 만주로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석태산, 정용선, 김명림 등은 경상북도 일대의 주재소를 습격하고, 친일 부자들을 털어 군자금을 마련한 다음 김종욱을 통해 만주에 보냈다. 언덕 위 척곡교회 담장에는 아래에서 일본 헌병이 출현했는지 살피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척곡교회 예배당은 교회 창립 2년 뒤인 1909년 건립되었다. 지역의 부자 최재구가 땅을 내놓았고, 건축비는 김종숙의 헌금으로 충당했다. 척곡교회 예배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 미음 자 기와집으로 세워졌다. 초창기 한국교회가 기역 자 또는 한 일 자(一) 초가집이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흥미로운 모습이다. 교회 출입문은 왼쪽과 오른쪽에 작은 솟을대문처럼 지어졌다. 남자와 여자의 출입구를 구분했기 때문이다. 뒷문은 교회 뒤 산으로 연결되었는데, 예배 인도자가 드나드는 문이자, 독립운동가들이 발각될 경우 피신시키기 위한 용도였다고 한다.
척곡교회는 예배당에 앞서 1907년 사설 교육기관인 명동서숙 건물부터 지었다. 초기 한국 교회는 애국계몽과 선교의 목적으로 교회와 학교를 함께 짓곤 했다. 명동서숙은 이름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규암 김약연(圭巖 金躍淵)이 북간도에 세운 저 유명한 명동서숙과 명칭이 같다. 봉화 독립투사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북간도로 전달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일부러 같은 이름을 썼다고 해도 무리가 아닌 듯하다. 봉화 척곡교회 명동서숙은 여학생 기숙사 방을 두고 있었다. 학생 규모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으나, 산골까지 배움을 얻고자 찾아오는 남녀 청년들이 꽤 있었다고 짐작된다. 초기 교회들이 세웠던 사설 교육기관은 일제강점기 들어 대부분 공식 학교가 되었다. 하지만 명동서숙은 사설로 남아 있다가 1943년 강제 폐교 당했다. 척곡교회 역시 처음부터 감시 대상이었고, 1920년대엔 김종숙 장로가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1943년경에는 교회 종을 빼앗겼고, 1945년엔 김종숙 장로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가 3개월 옥고를 치르고 해방이 되면서 풀려났다.
석태산, 정용선, 김명림은 일제의 강력한 진압 때문에 1910년대 후반에 소백산으로 들어갔다. 소백산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석태산은 협상을 하자는 간계에 속아 협상장에 갔다가 현장에서 사살되었고, 김명림은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0년 복역한 후 만기 출소했다. 정용선은 청주에서 체포되어 마포 경성형무소로 압송되었다. 이후 행적은 가족들도 몰랐는데, 1928년 돌연 사망했다는 통지가 가족들에게 전달되었다. 정용선의 증손자 정병기에 따르면, 증조부의 옥사 이후 증조모는 신분을 숨기고 개가했으나 발각되어 연금 상태에서 아사했고, 후손들은 머슴, 도시 날품팔이, 광부 등으로 근근이 살아왔다고 한다. 정병기가 찾아낸 정용선의 호적에는 정용선이 마포 경성형무소에서 숨을 거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나, 정부의 보훈 부서는 수형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정용선의 독립운동 서훈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정병기는 2019년에도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올렸으나, 정부는 여전히 증조부의 서훈에 소극적이다.
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척곡교회는 산골교회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다가 2006년에야 역사적 가치와 교회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명동서숙과 함께 등록문화재 제257호로 지정되었다. 척곡교회의 초기 역사와 기록은 설립자 김종숙의 손자 김영성의 노력 덕분에 확인되었다. 최근에는 명동서숙과 예배당이 최대한 초기 모습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교회의 담장도 일본 헌병의 습격에 대비해 뚫었던 구멍까지 살려 새로 쌓았다.
경사천부 사아식물 매번불망(敬事天父 賜我食物 每番不忘);
저에게 식물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며
식물을 주실 때마다 그 크신 은혜를 잊을 길이 없나이다.
위의 구절은 척곡교회에서 드리는 식사 기도문인데, 110년이 넘는 교회 역사를 상기시키기에 충분하다. 척곡교회에 보관되어 있는 기록 5점은 2011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90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된 문서는 1907년부터 1955년까지의 세례인 명부, 1921년 기록인 척곡장로교 면려회 회록, 1926년부터 사용된 봉화 척곡면려회 출석부, 1926년 이래 척곡교회 당회록 가운데 2호, 1930년 조직된 척곡교회의 기본금 기성회 창립회의 회의록이다. 이 밖에도 척곡교회에는 1910년대~1930년대에 간행된 서적들이 남아 있다.
경기도 오산시 중앙동 오산감리교회는 오색시장 한복판에 있다. 교회 정문 양옆으로도 점포가 즐비하고, 후문은 아예 줄지은 가게에 묻혀 있다. 오색시장은 조선시대부터 존재했던 경기도 남부 상권의 중심이다. 세속의 상징인 저잣거리 속에 성소의 대명사인 예배당이 자리 잡은 모습은 성과 속의 관계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조선시대 시장은 상설 점포가 늘어선 장소가 아니라 5일장이다. 오산장도 3일과 8일 열리는 5일장이었는데, 원래의 위치는 현재의 자리가 아니라 북쪽 오산천변이었다고 한다. 오산장 인접한 곳에서는 주로 쌀을 사고파는 미시장도 열렸다. 오산장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오산중앙시장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근대기에 들어서면서 상설 점포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무렵이다.
오산감리교회의 역사는 이보다 조금 더 된다. 교회 홈페이지의 연혁에는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최초로 창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교회 측은 1905년을 창립 시점으로 보아 2005년 100주년 기념예배를 올렸다. 교회 홈페이지에는 창립자를 노블 밀러 선교사로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한국 감리교회 초창기에 ‘노블 밀러’라는 선교사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노블은 아마도 윌리엄 아더 노블(William Arthur Noble·1866~1945) 목사를, 밀러는 룰라 아델리아 밀러(Lula Adelia Miller) 여선교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노블 목사는 부인(매티 윌콕스 노블)과 함께 1892년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다. 매티 노블은 배재학당에서 서양음악을 가르친 최초의 여교사였다. 노블 목사 부부는 아들 둘을 이질로 잃으면서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벌여나갔다. 노블은 수원 지방의 감리사를 세 차례나 지냈다. 당시 오산·화성·수원은 하나의 행정구역이었다. 노블 목사의 한국 이름은 노보을(魯普乙)이다. 룰라 밀러 여선교사는 1907년 수원의 삼일여학교(현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의 교장이 된 인물로서, 한국 이름은 미라(美羅)라고 했다. 밀러 선교사 역시 수원 지역의 선교와 교육 활동에 크게 공헌한 공적이 확인된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노블 목사와 밀러 선교사가 오산감리교회를 설립했다고 보는 게 정확할 듯하다.
오늘날 오색시장 한복판에 서 있는 오산감리교회의 돌 교회는 창립 당시에는 지어지지 않았다. 최초의 예배당은 1907년에 초가로 지어졌다. 1934년 노블 감리사의 지원으로 30평 규모의 붉은 벽돌 예배당이 새로 건축되었다. 두 번째 예배당은 한국전쟁 시기에 인민군의 지휘소로 쓰였다는 증언이 있다. 근방에 이만한 건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이 어떠하든, 적벽돌 예배당은 전쟁 시기에 미군 폭격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1954년 원래 교회 자리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위치에 화강암 예배당이 건축되었다. 건축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1985년 돌 교회 바로 옆에 새로운 신식 예배당을 추가로 짓고 봉헌 예배를 드렸을 당시의 팸플릿에 돌 교회 건축 경위가 두 줄 기록돼 있을 뿐이다.
조영행, 조광현, 이주찬, 황달용 씨의 307-13의 대지 기증과
전간, 국유지, 분배농지, 그 외 매입 6필지 570평에 55평 8홉 8작 건축.
미군사 AFK 물자와 복구비로 건립.
전쟁 직후 교회와 학교 건축에 미군의 지원이 있었던 지역이 여러 곳 있다. 경기도만 해도 고양의 신도제일교회 예배당과 고양종합고등학교 강당, 수원의 수원장로교회 예배당이 미군 지원 하에 건축된 대표적 예다. 이들 예배당과 강당은 돌을 주 건축자재로 썼다. 수원장로교회는 한동안 ‘돌 교회’로 불렸다. 고양과 수원의 경우 미군 어느 부대가 지원했는지 비교적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으나, 같은 ‘돌 교회’인 오산감리교회 건축 경위는 앞에서 소개한 두 줄이 전부다. 오산감리교회는 마감재로 화강석을 써 지은 예배당이다. 외형과는 달리 내벽은 벽돌로 쌓았다. 정면에는 3단으로 종탑을 올렸다. 가장 높은 단은 금속이지만, 아래 두 단은 화강암 쌓기다. 위로 올라갈수록 바닥 면적이 좁아져 상승감을 주도록 설계되어 있다. 오산감리교회 돌 예배당은 1985년 새 본당이 지어지면서 교육관 등으로 쓰였다. 현재도 돌 예배당과 새 본당이 나란히 서 있다. 돌 예배당은 198㎡ 규모다. 오산감리교회 마당에 들어서면, 돌 예배당과 새 본당 그리고 본당 옆 물고기 형상의 기하학적 종탑이 어울려 소박하면서도 성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오색시장은 경기도 남부에서 손꼽아주는 시장이지만, 오산감리교회 돌 예배당이 지어질 당시는 물론이고, 교회에 소장되어 있는 1930년대 사진을 보아도 주변에는 논밭만 보인다. 다시 말해, 애초부터 시장 한복판에 교회가 들어선 것이 아니라, 교회 주변으로 오산장의 상권이 확장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는 얘기다. 지역 토박이들에 따르면, 1970년대부터 교회 주변으로 점포가 점차 늘어나 시장이 되었다고 한다. 오산중앙시장이라 불리던 시장은 2013년 오산 오색시장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도시 발달의 경로야 어떠하든 시장통 한복판 교회는 방문자들에게 새로운 감흥을 안겨준다. 문제는 오산감리교회가 오산시 부산동에 새 부지를 마련하여 신축 이전을 계획하고 있는데, 2019년 현재 기존 시장통에 있는 돌 예배당을 보전할지 철거할지 고민 중이라는 사실이다. 100년이 훨씬 넘은 교회이고,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1950년대 돌 예배당은 보존 가치가 충분하다. 역사를 자랑하는 시장과 역사를 간직한 돌 예배당, 그 성과 속의 조화를 지키는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
1926년부터 전라남도 광주 나병원에서 ‘눈물의 이주’를 시작했다. 광주 제중원 원장이자, 광주 나병원 원장을 겸하고 있던 선교사 윌슨(Robert M. Wilson, 한국이름 우일선, 우월손)이 전라남도 여수군 율촌면 신풍리에 매입한 부지로 옮겨가는 길이었다. 먼저 이주를 시작한 사람들은 광주 나병원에서 목공일, 석공일 등을 익힌 나환자들이였다. 그들이 먼저 부지에 도착해 병원과 집, 교회를 지어야 했다. 특히 나병에 대한 편견을 가진 행인들의 눈에 띄면 안되었기 때문에 나환자들은 낮에 이동하지 못했다. 이러한 한센인의 이주과정은 영화 「사랑의 원자탄」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영화의 이야기와 다르게 실제로 손 목사는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피란 가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애양원교회에서 한센인들을 돌보다가 북한군이 퇴각하던 1950년 9월 총살되고 말았다. 손 목사는 앞서 숨진 두 아들 곁에 묻혔으며, 그의 묘역은 애양원 내에 있다.
식민지 시대 한센인 격리정책을 그대로 유지했던 대한민국 정부는 1960년대부터 수용소 위주에서 정착촌 위주로 정책을 바꾸었다. 한센병은 치료 가능한 질병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밝혀진 터에, 완치된 한센인을 가둬두는 식은 인권유린이기 때문이다. 강제 격리, 단종과 낙태 시술 등 그동안 한센인들에게 가해진 고통도 있어서는 안 될 조치들이었다. 이렇게 정부의 정책 아래 한센인들의 정착촌의 수는 늘어났지만, 여전히 완강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으나, 점차 확대되어 나갔다.
애양원은 엘머 보이어(Elmer T. Boyer, 한국이름 보이열) 원장 시절인 1960년대에 전라북도 남원과 전라남도 여천에 정착농원을 조성해 완치된 환자들의 재활과 사회복귀를 도왔다. 보이열 원장 후임인 스탠리 토플(Stanley C. Topple, 한국이름 도성래) 원장은 1970년대 중반 애양원 북쪽에 도성농원이라는 정착촌을 조성했다. 애양병원은 도성래 원장 시절 새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또한 한센병 환자 진료를 넘어 소아마비 환자를 치유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오늘날 애양병원은 관절 수술과 치료에 탁월한 병원이 되었다. 물론 한센병 치료를 위한 피부과 진료와 시술도 소문이 나서 전국에서 환자가 찾아오는 병원이 되었다.
기존 애양병원 건물은 독신 한센인 숙소로 쓰이다가 상당 기간 비워져 있기도 했다. 1999년에야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2000년부터 애양원은 애양 역사박물관이 되었다. 기존 건물의 골격은 살렸고, 전면부에 유리 패널을 덧대어 씌웠다. 애양 역사박물관에 가면, 한센병의 역사, 한센인의 생활상, 예전 열악했던 시절의 의료기구 등이 보관·전시되어 있다. 애양원교회(산성교회)는 1950년대, 1970년, 1990년대에 보수가 이뤄졌으나, 1935년 재건된 모습을 상당부분 간직하고 있다. 애양원교회는 2002년 등록문화재 제32호. 구 애양병원은 2002년 제33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은 1980년대 중반 한센병을 퇴치했다고 공식발표 했다. 그러나 한센인들에게 가해졌던 부당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한국사회가 한 단계 더 수준을 높이려면 이는 반드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구 애양병원, 애양원교회, 토플 하우스(한때 한센인들의 신학교), 과거 한센인들의 병동을 개조한 숙박시설들, 손양원 목사 묘역, 손양원 기념 공원 등이 자리한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신풍반도(애양반도)는 한센인들의 한숨과 눈물, 한센인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려 했던 인물들을 차분히 돌아보고, 깊은 성찰를 이어가기 좋은 공간이라 하겠다.
터키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하기아 소피아)는 현재 박물관이다. 터키어로 ‘성스러운 지혜’를 뜻하는 ‘아야 소피아’는 원래 그리스 정교회의 대성당으로 지어졌다. 약 900년간 정교회의 지혜를 간직해온 성당은 비잔티움(이스탄불)의 주인이 바뀌면서 잠시(50여 년) 로마 가톨릭 성당이 되었다가, 15세기 중반부터는 이슬람 사원으로 변모한다. 480년가량 무슬림의 성스러운 공간 모스크였던 ‘아야 소피아’는 오스만터키 제국의 멸망 이후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변모했다. 대성당의 운명은 기구한 것일까, 신비로운 것일까.
전라남도 목포시 무안동 오거리문화센터는 원래 일본 불교의 포교당으로 지어졌다. 해방 후 10여 년간 한국 불교의 사찰로 변했다가 1957년 소유권이 교회로 이전되었다. 예불이 이뤄지던 장소에서 찬송가가 울려 퍼지게 된 것이다. 한반도에 근대가 도래한 이래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감안할 때 경이로운 일이라 할만하다. 반세기 동안 목포중앙교회로 불리던 건물은 교회가 2007년 이전한 후 우여곡절을 거쳐 문화센터로 다시 태어났다.
일본 정토진종이 목포에 동본원사(東本願寺)의 지원(支院)을 설치한 해는 1898년이다. 목포가 개항 당한지 1년 뒤다. 정토진종 뿐만 아니라 일본 불교의 주요 종단은 1877년부터 앞다퉈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일본 불교는 조선 침략의 정신적 기둥 역할을 자임했다. 일본 불교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융합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스스로 떠맡았다. 일본 교토의 동본원사가 목포에 지원을 둔 이유도 명백했다.
동본원사 목포지원은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에 자리 잡았다. 목포지원은 곧바로 목포심상고등소학교를 열었다. 일본인 자녀 교육기관인 목포심상소학교가 지금의 유달초등학교의 시작이다. 목포지원은 1905년 현 위치(당시 지번으로는 무안통 4정목)에 법당을 지었다. 1907년 목포지원은 목포별원으로 한 등급 높아졌다. 원래 법당은 일본 전통 사찰과 마찬가지로 목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목포별원은 1930년대 초 목조 법당을 현존 형태의 석조 건물로 개축했다.
건물 본체의 높이가 5.5m인데, 지붕은 7m나 된다. 한눈에 일본 사찰이라고 직감할 수 있다. 화강암을 쌓아 올린 석조 건물인데도, 장식은 일본 목조 사찰의 세부를 살리려고 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채로운 동본원사 목포별원 건물은 해방이 되자 한국 불교의 정광사(淨光寺)가 되었다.
정광사는 해방 직후 무엇보다도 시급한 ‘교육 불사’가 이뤄지는 중심 역할을 했다. 호남의 5대 사찰(백양사, 대흥사, 화엄사, 송광사, 선암사)가 출자하여 정광중학교가 설립됐다. 정광중학교는 정광사 자리에 있다가 1948년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으로 옮겨갔다. 1950년대 중반까지 정광사는 목포 불교의 중심 공간으로 여겨졌다. 목포역에서 불과 300m 거리에 있는 정광사는 큰스님들이 목포에 들렀을 때 설법을 하는 장소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1957년 정광사가 돌연 목포중앙교회에 건물을 넘겼다는 사실이다. 불교 사찰을 인수해 기독교 예배 처소로 삼은 사례는 희귀하다. 어떤 연유로 목포중앙교회가 건물과 공간을 인수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목포중앙교회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가 1923년 설립한 교회로 1934년 죽동에 예배당을 세웠다. 1957년 불교 사찰, 그것도 일본식 불교 사찰을 매입한 목포중앙교회는 법당을 교회로 단장했다. 법당으로 들어가는 일본식 박공(가라하후)에 십자가를 걸었다. 목포중앙교회는 2008년 옥암동으로 신축 이전하기까지 정광사, 동본원사 목포별원 법당을 교회로 사용했다.
예전 사진을 보면 일본식 박공에 목포중앙교회 시절 걸었던 성경 문구가 선명하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구약성서 이사야서 56장 7절의 일부다. 불상 앞에서 합장하고 올리던 간구도 넓은 의미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섬기는 신은 엄연히 다르나, 같은 공간에서 한 세기 가까이 엎드려 기도한 불자나 기독교 신자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문화재청은 2007년 구 동본원사 목포 별원을 등록문화재 340호로 지정했다.
목포중앙교회 시절 이 공간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인사들이 모이던 장소이기도 했다. 교육관으로 쓰인 지하 1층에서 목포 지역 목회자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인물들이 뜻을 모으고, 대응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유신 시절부터 1980년 5·18 민주항쟁, 1987년 6월 항쟁까지 중요한 결정들이 이곳에서 이뤄졌다는 기념표지석이 마당에 서 있다. 2008년 교회가 옮겨 가자 잠시 철거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으나 손질하여 문화센터로 쓰기로 했다. 2010년 오거리문화센터가 된 공간에서는 이제 독경과 설법, 찬송가와 설교 대신 문화공연과 전시회가 열린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1908년 늦가을 경상북도 안동으로 김병우(金炳宇)를 보내어 ‘기독서점’이라는 책방을 열게 했다. 김병우는 ‘매서’였다고 한다. 권서인이라고도 부르는 매서는 기독교 선교 초기 궤짝에 성경책을 짊어지고 방방골골 찾아다니며 보급하던 사람을 가리킨다. 선비의 고장인 안동의 서문 밖 대석동에 서점부터 연 선교 전략은 주효했던 모양이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09년 8월 8일 교인 7명이 참석한 첫 예배가 드려졌다. 안동교회는 이날을 교회가 창립된 날로 친다.
안동 유림은 1904년 무렵부터 종래의 척사(斥邪) 태도를 버리고 신문물, 신사상을 수용하는 혁신 유림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서점에 이어 1909년 10월 성소병원을 열고 의료선교도 시작했다. 안동교회 목회자 부임(1909년 11월)보다 두 달 빠르다. 성소병원 의사는 별위추(Archibald Fletcher) 의료선교사였고, 교회 초대 담임은 김영옥 목사였다. 별위추 선교사는 1930년대 대구광역시 동산병원을 이끈 인물이다.
첫 예배를 드릴 때 7명이었던 교인은 1년 후 70명으로 늘어났다. 안동교회는 의료선교에 이어 1911년에는 계명학원을 세워 교육선교도 시작했다. 계명학원은 여학생도 받아들이는 초등과정의 학교였다. 안동교회는 1913년 현재의 터(안동시 서동문로)에 50칸 규모의 함석지붕 예배당을 건립했다. 기독서점을 열어 교회의 초석을 놓았던 김병우는 1913년 안동교회 장로가 되었다. 안동교회는 1910년대 보수적인 안동에서 차근차근 교세를 다져나갔다.
신앙심과 애국심이 결합된 안동교회의 가르침은 1919년 3·1운동 과정에서 확실하게 드러났다. 일본 동경의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강대극과 경성 연희전문 의대생 김재영(김병우 장로의 아들)으로부터 만세 시위 흐름을 전달받은 김영옥 목사와 신도들은 3월 13일 안동장날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김영옥 목사를 비롯해 안동교회 지도자들을 예비검속으로 가두어버렸다. 3·13 시위는 일단 불발되는 듯했다.
켜지지도 못한 채 꺼지는 듯했던 만세시위는 한 용감한 인물이 자전거를 타고 장터를 지나가며 대한독립을 외치면서 불씨가 살아났다. 지금으로 치면 ‘1인 시위’를 벌인 인물은 이상동(李相東)이었다. 이상동은 나중에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의 동생이다. 이상룡은 척사 유림에서 혁신 유림이 된 안동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상동 역시 의병에 참가하고, 계몽운동에 뛰어들기도 하면서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상동이 안동교회 교인은 아니었으나, 그의 소식에 안동교회 교인들은 다시 용기를 얻었다. 다음 장날인 3월 18일 계명학교 학생을 비롯해 안동교회 교인들이 상당수 참여한 가운데 안동장터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안동교회 교인 가운데는 김병우 장로가 징역 2년을 언도받았고, 김익현 김명인 1년, 김재성 김계한 이인홍 황인규 권점필이 6개월 형에 처해졌다.
감옥 안에서 이상동이 유림 출신 인사들의 마음을 기독교로 돌리게 한 일도 흥미롭다. 이상동에게 감화 받은 이원영, 이종무, 이운호, 이맹호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원영은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거쳐 목사가 되었다. 이원영(李源永) 목사는 일제강점기에 4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안동서부교회(안기교회)에서 목회를 했고, 1954년에는 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이 되어 일제강점기 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가 무효라고 선언했다. 이원영 목사가 시무한 안동서부교회는 1926년 안동 안기천 서쪽에 사는 교인들을 분가시켜 설립한 교회다.
안동교회가 자부심을 갖는 역사 가운데 또 한 가지는 1921년 기독면려회가 안동교회에서 조직되었다는 사실이다. 18세기 후반 미국에서 시작된 기독면려회는 청년을 중심으로 평신도들이 신앙과 생활 모두 올바르게 하자고 계몽하고 권면하는 조직이다. 우리나라에는 1910년대에 소개되고 초기 조직이 시도되었으나, 본격적인 조직화는 안동교회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안동교회에서 시작된 기독면려회는 곧 전국적 조직을 낳았다. 기독면려회는 교회 밖 사회를 향해 계몽운동·농촌운동·절제운동을 활기차게 벌여나갔다.
1920년대와 1930년대 기독면려회는 금연·금주운동을 비롯해 야학, 문맹퇴치에 힘써 성과를 거둔 운동으로 평가된다. 학생회, 청년회, 선교회 등 오늘날 장로교 내의 조직 체계는 분야별 면려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동교회는 1920년대 후반부터 예배당 신축 준비에 들어갔다. 교인이 늘어나 함석교회로는 감당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오랜 준비 끝에 새 예배당은 1937년 완공되었다. 1만 개가 넘는 화강암을 쌓아 지은 2층 석조 예배당이다. 기반이 무른 땅이어서 생소나무를 박아 넣어 기초를 다진 뒤에 10㎞ 떨어진 곳에서 화강암을 날라 와 쌓았다. 설계자는 이화여대 파이퍼홀, 강원도 철원의 철원제일교회 등을 지은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 윌리엄 보리스(William M. Vories)로 알려져 있다. 으레 세우기 마련인 종탑을 따로 세우지 않고, 예배당 출입문 위에 커다란 삼각형 형태로 돌을 쌓고 위에 십자가를 올렸다.
안동교회는 1930년대 후반 꼿꼿하고 슬기로운 김영옥 목사 덕분에 신사참배도 하지 않고, 조선총독부가 교회 내에 설치하라고 강요한 신사위패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예배당은 역사의 수난을 피해가기 못했다. 1940년대에 일본 육군이 징발해 사용했다. 해방 후 한국전쟁 시기에는 인민군의 야전병원이 되기도 했다. 예배당 전면의 철제 난간에는 전쟁의 상흔인 총탄 자국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예배당은 1959년 증축 때도 원형을 잃지 않았고, 현재도 안동교회의 예배당으로 쓰인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예배당 옆에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지어진 기념관이 있다. 안동교회 예배당은 2015년 등록문화재 제654호로 지정되었다.
안동시에는 안동교회에서 분가해 나간 교회도 많고, 안동교회가 개척하거나 지원해 세워진 교회도 많다. 안동동부교회, 안동서부교회 등 분가한 교회가 4곳이고, 개척교회가 8곳이다. 안동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교회이지만,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 다른 교단 소속 교회의 설립도 도왔다고 한다.교단 중심을 넘어 개별 교회 중심인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박수 받을 만한 행적이다.
안동교회는 소속 교단이 1950년대부터 분열을 거듭하는 과정에서도 한 번도 치우치거나 휩쓸리지 않은 교회로 정평이 나 있다. 한편 “나리 나리 개나리…”로 시작하는 동요 ‘봄나들이’의 작곡자 권태호(權泰浩, 1903~1972)는 안동교회에서 성장했다. 9살 때 안동교회에서 처음으로 서양음악을 알게 되었고, 선교사의 부인에게서 피아노를 배운 권태호는 16세 때부터 안동교회 반주자, 성가대 지휘자를 맡았다. 성악가(테너)로도 유명한 권태호는 일본 유학파이면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숭실대학교에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생기기까지, 그 여정은 쉽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걸으신 고난의 길과 닮았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의 설립자는 매산 김양선 관장이다. 시작은 역대 일본 천황과 전쟁 영웅들의 위패를 모신 남산 조선신궁 터에 1948년 ‘기독교박물관’과 ‘매산고고미술관’을 설립하면서부터다. 물론 해방 직후, 개인이 박물관을 꾸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관을 위해 평양에 있던 유물을 옮겨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막내딸을 인민군 총탄에 잃은 것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슬픔이었다. 그러나 김양선 관장의 아픔과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개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건물이 불탔다.
많던 소장품도 파괴되거나 분실됐다. 남은 유물은 아홉 상자뿐이었다. 아마도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포기했겠지만, 김양선 관장은 또다시 박물관 재건에 나섰다. 그러나 나쁜 일은 연이어 일어난다고 했던가. 김양선 관장이 가려는 길에 또 다른 장벽이 나타났다. 남산 박물관 용지가 서울특별시 소유라는 것. 문제 해결을 위해 사방팔방 다니며 애를 썼지만, 결국 박물관을 이전하는 길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양선 관장의 큰 뜻을 하늘이 알아주기라도 한 걸까. 숭실대학교에 김양선 관장이 유물을 기증하면서, 박물관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생겼다. 1967년 10월 10일, 숭실대학교 내에, 배움과 믿음의 전당인 이곳에 마침내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 한국이 문호를 열고, 외국인들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들어온 즈음일까? 놀랍게도 우리는 이미 1천여 년 전인 통일신라시대에 ‘경교’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 물적 증거들이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더욱이 이 유물들은 김양선 관장이 직접 경주 지역에서 수집한 것들이라 의미가 남다르다.
청동으로 만든 <마리아상>은 불교 조각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화관을 쓴 여성이 아기를 무릎에 안고 있는 엄연한 마리아상이다. <경교돌십자가>에는 투박함 속 굳은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의 신앙이 깃들어 있고, 토기에 다섯 개의 원을 새겨 정교하게 표현한 <십자무늬장식>에서는 만든 이의 정성과 믿음이 느껴진다.
※ ‘경교’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일치하지 않고, 마리아가 성모임을 부정하는 종교로 네스토리우스가 창시했다. 이단으로 취급됐지만, 교세가 확장돼 7세기 중국에까지 전해졌고, 당시 당나라와 교류가 활발했던 통일신라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는 ‘경교’ 관련 소장품 외에도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한국 기독교 역사실’에 전시돼 있다. 존 로스 선교사가 번역하고 발행한 최초의 한글 성경 <누가복음>(1882년)과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비롯해 선교사들의 다양한 활동사진, 기독교 메달 등 우리의 파란만장했던 역사 속 기독교의 성장을 살필 수 있는 전시물이 가득하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국보와 보물로 가득한 ‘고고미술실’에, 수준 높은 유물 전시에 깜짝 놀라게 된다. 교과서에서나 본 국보 <청동잔무늬거울>과 해방 후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발굴된 것으로 전해지는 청동기시대 국보 <거푸집 일괄>, 크기가 범상치 않은 대형 <빗살무늬 토기>, 고려시대 비천상이 아름다운 <동종>, 조선시대 서민들의 일상을 담아낸 <기산풍속도> 등을 만나볼 수 있는 까닭이다.
김양선 관장은 기독교 자료를 모으면서, 일제에 빼앗기거나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고고미술품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학생들을 모아 우리의 고고 역사를 가르쳤고,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설립 후에는 국내 중요 발굴사업에 참여해 고고학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 성과를 냈다. 이렇게 해서 수집한 수많은 문화유산이 이곳에 있기에, 기독교인이라면 물론이고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꼭 한번 방문해야 할 곳이 아닐까.
모든 종교에는 종교적인 원칙을 담은 교리(敎理)가 있다. 기독교의 교리를 담은 것이 바로 성경(bible)이라고 할 수 있다. 바이블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책(biblia)에서 온 말이다. 성경은 계시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독교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성경을 흔히 한 권의 책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성경은 약 기원전 1000년 경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긴 기간동안 저자와 내용과 형식과 부비가 서로 다른 66권의 책 묶음이다. 66권의 묶음은 39권의 구약과 27권의 신약으로 나누어진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성경의 한 구절이다. 세상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없어지지 않고 있는 성경의 말씀을 의미하는 구절이다. 이처럼 성경은 세계 역사와 문화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에 중요한 원동력으로서 인류와 함께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이러한 문화유산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자 국제성서박물관이 1995년 4월 30일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20년에는 25주년을 기념하여 새롭게 공간을 조성하고 재개관하였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위치한 국제성서박물관의 소장품은 주안감리교회를 담임했던 고(故)한경수 감독이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44개국에서 수집한 성경을 기증한 것이다. 또한 미국의 성경 수집가인 고(故) 웨이크필트 박사가 기증한 유물과 성경도 있다. 이 모두를 합치면 약 350여 언어로 기록된 5천 권 이상의 성경과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상설전시는 중앙 로비에서 성경과 관련된 영상으로 시작한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번쯤을 들어봤을 천지창조, 노아의 방주, 모세의 십계명 등을 영상으로 설명한다. 1관은 ‘성경, 세계를 움직이다’이다. 처음 직접 손으로 기록한 두루마리 형식의 양피지나 파피루스에서 인쇄기로 인쇄된 성경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볼 수 있다. 또한 종교개혁으로 유명한 마틴루터의 번역 성경과 마틴루터의 방을 재현해두었다. 또한 책상에는 마틴루터의 95개의 논재가 적혀있는 종이를 비치해두었다.
2관에서는 종교개혁 이후 세계 곳곳으로 성경이 전해지며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전시하고 있다. 2019년 기준 성경은 3,384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고 한다. 국제성서박물관은 350여개의 언어로 된 성경을 보유중이다. 그 중 36개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을 전시하고 있다.
3관은 ‘한국 근대사를 열다’ 이다. 전시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과정을 근대 역사적 관점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마지막 4관은 성경마을이다. 성경의 배경이 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중동 지역 문화와 관련된 전시로 성경 속 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외에는 기증자인 고(故)한경수 감독 추모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상설 전시 이외에도 성경과 종교를 주제로 한 기획전시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다채로운 체험과 교육 프로그램 참여도 가능하다.